'1+1≠2'…과학, 진리를 부정하다

실험실 갇힌 '지식 진보' 넘어
사회와 상호작용으로 바라봐
'인간과 비인간 네트워크' 강조
과학은 절대적 완성품 아냐
관계 주고받는 인간활동 결과
……………………………………
홍성욱의 STS, 과학을 경청하다
홍성욱|448|동아시아
  • 등록 2016-09-28 오전 6:17:30

    수정 2016-09-28 오전 7:30:57

[이데일리 오현주 기자] 어느 대학의 새로 지은 실험실습건물 천장에 비가 샜단다. 비가 오는 날이면 학생들은 양동이를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보다 못한 교수들이 나서 건물 수리전문가를 옥상으로 불렀다. “비가 떨어지는 위치를 찾아서 막아주세요.” 그러곤 타이어 튜브에 펑크난 것을 때우는 것과 같지 않겠느냐며 손짓 발짓으로 빗물 떨어지는 위치까지 설명했다. 과연 전문가는 교수의 말대로 비 새는 곳을 찾아냈을까.

아니다. 전문가의 진단은 달랐다. “비가 새는 정확한 위치를 찾는 건 불가능합니다. 설사 찾아내 시멘트를 발라둔다고 해도 십중팔구 다른 곳에서 또 샐 겁니다.” 그러면서 내놓은 대책은 옥상 전체에 일정한 간격으로 파이프를 박아 넣는 것. 가장 확실한 해법인데 비싼 게 흠이란다. 좀더 저렴하게는 방수페인트를 칠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도 오래 버티진 못할 거라고 차분히 일렀다.

참 뜬금없이 ‘비 새는 건물이야기’를 꺼낸 건 현대과학기술의 단계를 가늠하기 위해서다. 요즘 잘 빠진 건물에는 첨단과학기술이 먼저 나선다. 뉴턴의 법칙부터 공학기술까지. 덕분에 지진이 흔들고 태풍이 덮쳐도 웬만해선 무너지지 않는다. 그런데 과학기술을 총동원해도 못하는 일이 있으니 바로 비 새는 곳을 찾는 거였다. 인공지능에게 바둑도 두게 하고 글도 쓰게 하는 세상이라지만 의외로 과학기술은 약하고 무기력하다는 방증. 그렇다고 완전히 손을 뗄 만큼 절망스럽진 않다. 파이프도 박을 수 있고 방수페인트도 칠할 수 있으니. 바로 ‘네트워크’의 힘이다.

한국에 ‘과학기술학’(STS·Science & Technology Studies)을 꾸준히 소개해온 과학사학자 홍성욱 서울대 교수가 현대과학기술의 복잡한 ‘내면읽기’에 나섰다. 과학기술 자체보다 사회라는 변수가 작동하는 현상을 들여다본 것이다. 이 과정서 중요하게 쓴 도구가 네트워크다.

저자가 과학이슈의 흐름을 설명하는 ‘키’로 뽑아든 네트워크는 흔히 말하는 연결망보단 과학활동의 궤적에 가깝다. 머물지 않고 확장하며 뻗어나가는 속성을 잡아낸 것이다. 과학의 발전이란 게 단순히 지식의 진보가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 사회와의 네트워크로 이룬 상호작용에 다름 아니다란 논지다.

▲‘1+1=2’는 초월적 진리가 아니다

“과학이 완성된 진리를 발견하는 거라면 그냥 미국이 내놓는 과학의 결과를 가져오면 된다.” 저자의 문제제기는 ‘과학은 진리도 아니고 발견은 더더욱 아니다’란 데서 출발한다. 저자가 볼 때 과학은 “인간과 비인간의 살아 있는 네트워크를 만드는 활동”이고, 실험은 “비인간을 길들이는 인간행위”다. 그러니 미국서 논문은 가져오더라도 실험실을 가져올 순 없다. 과학자의 머리에 든 노하우를 가져오는 건 더욱 힘들며, 과학의 네트워크를 끌어오는 건 그 자체가 ‘불가능’이다. 한마디로 한국사회에 적합한 과학은 따로 있단 뜻이다.

그렇다면 비인간은 뭔가. 인간이 아닌 존재 전부란다. 자연물·동식물·논문·기술 등. 이 중 대표적인 비인간이 기술이고, 이 기술이 연결하는 네트워크를 파악한다면 과학·과학기술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쉽게 설명해보자. 흔히 ‘1+1=2’라는 등식을 두곤 역사·사회를 초월하는 영구진리라고들 한다. 과학도 이 등식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그러나 정말 그런가. 작은 사과 하나와 이보다 두 배가 큰 사과를 합쳐도 여전히 사과인데. 무게를 달면 작은 사과의 세 배쯤일 테고. 이러니 과학기술을 알자고 굳이 초월적인 가정까지 끌어올 필요 따윈 없는 거다.

▲‘고래’ 논쟁은 네트워크로 읽어야

사회와의 네트워크로 과학을 봐야 하는 이유도 분명하다. 가령 핵을 만든다고 치다. 핵분열을 낳는 플루토늄과 중성자라는 ‘비인간’을 길들이는 것은 과학기술자다. 하지만 핵전략을 짜는 건 정책전문가의 몫이다. 핵이 너무 거창하다면 휴대폰의 경우를 봐도 된다. 사진촬영에 ‘찰칵’ 소리를 내게 한 건 기술이 강제한 도덕적 선택이다. 이 장치는 사진촬영을 할 때마다 ‘몰카는 불법’이란 사실을 계속 떠올리게 한다. 저자가 굳이 STS의 마지막 S를 연구(Studies)가 아닌 사회(Society)라고 바꿔 사용하려 한 의도가 여기에 있다.

또 다른 예로 보자. ‘고래는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인가, 없애야 하는 존재인가’라는 논쟁이 있다. 물고기면서 다른 물고기를 가차없이 먹어치운다고 포경선을 만드는 일본, 지능이 높은 동물이니 무조건 지켜내야 한다는 서구의 주장은 각각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다. 과학철학자 토머스 쿤에 따르면 이런 논쟁은 패러다임의 차이에 따른 거다. 세상을 이해하는 틀이 다르단 말이다. 그러나 저자는 네트워크로 이 상황을 읽는다. 각각이 처한 네트워크가 다르기 때문이란 것이다. 결국 과학기술은 자연 본연의 속성이라기보다 끊임없이 관계를 주고받는 인간활동의 결과란 소리다.

▲과학의 오랜 잠을 깨우는 ‘키스!’

네덜란드 과학기술학자 위비 바이커를 인용해 저자는 사회의 소리를 듣는 과학을 ‘STS 키스’라고 명명했다. 잠자는 공주를 깨우듯 오래도록 잠에 빠진 과학이 ‘STS’와의 입맞춤으로 기지개를 펼 수 있단 설명이다. 다시 말해 STS가 나선다면 신화화·박제화 한 과학을 깨우고 ‘절대적 완성품’을 향한 과학자의 믿음에 ‘깨몽!’을 선사할 수 있다.

과학의 ‘내면 읽기’가 다소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럼에도 STS의 영역을 넓혀 놓은 곳곳의 증빙을 건져낸 것만으로도 성과는 충분하다. 갈수록 경제논리의 도구로만 과학을 인식하려드는 추세에 저자는 분명히 선을 긋는다. 과학에게 인간의 얼굴을 줘야 한다고.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신의 얼굴을 한 진리가 아니라 인간의 얼굴을 한 과학이라고. 그냥 지지고 볶으며 만들어내는 게 하늘서 뚝 떨어진 매끈한 기성품보다 낫다는 얘기다. 왜냐고? 과학은 발전이 아니고 창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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