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비의 문화재 읽기] 문예의 나라 조선에서 '호렵도' 그린 까닭

정묘·병자호란때 마상 무예로 패배
정조, 기마술 배우고자 제작 명해
지난해 환수 '팔폭병풍' 생동감 압권
  • 등록 2021-02-22 오전 6:00:00

    수정 2021-02-22 오전 6:00:00

[이데일리 김은비 기자] “여러 아랫사람들이 사냥을 안했으면 하는 것은, 진실로 전하께서 마음대로 말을 달리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조선 3대 왕인 태종이 신하들에게 강무(왕의 사냥)를 가겠다고 하자, 이를 가로막으며 신하들이 한 말이다. 당시가 태종이 재위에 오른지 2년(1402)에 있었던 일이다. 겉으로는 왕이 사냥하는 중 다칠까 염려돼 만류했지만, 신하들이 사냥을 반대한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무’(武)보다 ‘문’(文)을 중요시한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임금은 궁궐에 앉아 학문과 성왕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이 곧 백성들을 돌보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특히 종묘에서 제례를 지내는 왕에게 살생과 같은 부정한 일은 멀리하는 것이 예법이기도 했다. 이같은 인식에 조선에서 강무는 군례의 일부로 세종대까지 행해지긴 했지만, 조선 중기 이후에는 거의 시행되지 않았다. 당연히 수렵하는 모습을 그린 수렵도도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18세기 후반 정조(1752~1800)는 돌연 궁중 도화서에 청나라 황제가 사냥하는 그림을 그리도록 명했다. 심지어 정조는 당대 최고 화가였던 단원 김홍도(1745~1806?)를 1780년 청나라 수도 연경(베이징)에 사신단으로 보내 호렵도를 익히도록 했다. 조선으로 돌아온 김홍도에게 정조는 호렵도를 그려 궁궐 안에 붙이고 왕족과 신하들에게도 감상하도록 했다.

지난해 11월 미국에서 환수돼 한국으로 들어온 ‘호렵도 팔폭병풍’(사진=문화재청)
최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서 공개한 ‘호렵도 팔폭병풍’은 조선시대 궁중에서 제작된 ‘호렵도’를 가장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8폭의 비단에 그린 병풍은 사냥을 즐기러 나온 청나라 황제와 주변 신하들이 생동감 넘치게 잘 표현돼 있다. 하얀 말 위에는 곤룡포처럼 가슴과 어깨에 용이 그려져 있는 청색의 가죽옷인 행괘를 입은 인물이 있어, 청나라 황제임을 드러낸다. 옆으로는 화살통을 등에 맨 신하들과, 조총을 겨누거나 활을 금방 쏠 태세의 인물이 보인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청나라 황제가 사냥하는 모습을 그린 이유에 대해 정병모 경주대 문화재학과 교수는 “조선은 앞서 청나라의 뛰어난 마상무예에 두 차례나 전쟁에서 큰 패배를 겪었기 때문에 이를 배우고자 했던 관심이 반영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17세기 초 만주족의 청나라는 기존의 한족 왕조 명나라를 대신해 중국을 지배하게 됐다. 한족인 명나라를 따랐던 조선은 청나라를 오랑캐로 낮춰 부르고 배척했다. 이 같은 이유로 조선은 청나라로부터 갖은 수난을 당했다. 청은 정묘호란(1627)에 이어 병자호란(1636)을 잇따라 일으키며 조선을 침략했다. 특히 이들의 뛰어난 마상무예, 기마술에 처참히 당한 조선은 마상무예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됐다.

병자호란 이후에도 조선은 100년 가까이 청나라를 무시·배척했다. 심지어 병자호란으로 청에 8년간 볼모로 잡혀갔다 온 효종(재위 1649∼1659)은 청을 정벌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하지만 비현실적인 북벌정책은 오히려 중국 문물이 들어오는 통로를 막았고 정치적·문화적 쇄국주의로 이어졌다. 결국 조선은 18세기 후반에서야 청의 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이 같은 인식은 비슷한 시기 제작됐던 각종 무예 서적에서도 드러난다. 1790년 정조대왕의 명으로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 등은 조선 군사들의 ‘무예도보통지’를 제작했다. 책은 조선군사들이 익힌 지상무예 18가지에 마상무예 6가지를 더했다. ‘무예도보통지’가 편찬된 후 오군영을 비롯한 지방의 군영에서는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무예24기를 수련했다. 정조의 친위군영이었던 장용영은 마상무예를 전담으로 하는 선기대를 별도로 구성하기도 했다.

다만 정조는 ‘호렵도’를 조선의 화풍으로 바꿔 청나라의 문물을 수용하면서도 자존의식을 지키고자 했다. ‘호렵도 팔폭병풍’에서 보면 중국 황제가 사냥을 하고 있지만 사냥을 하는 장소는 조선으로 표현돼 있다. 1~2폭에 그려진 나뭇잎이 떨어진 나무와 폭포는 전형적인 김홍도 화풍의 산수 표현이다. 정 교수는 “북학 정책 속에서도 중심을 지킨 정조의 외래문화 수용태도와도 상통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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