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다섯 남녀의 '취중진담' 술~술~ 넘어가네

연극 '거기'
강원도 해변마을 저녁
귀신부터 가족이야기까지
'술'로 풀어놓는 인생사
  
  • 등록 2012-09-23 오후 1:45:15

    수정 2012-09-23 오후 1:45:15

연극 ‘거기’의 한 장면. 이상우 연출은 씁쓸하기도 따뜻하기도 한 그곳을 ‘거기’라 했다(사진=차이다).


[이데일리 오현주 기자] 눈을 붙잡는 볼거리 없다. 귀에 착 감기는 음악 없다. 각 세우는 연기도 없다. 절정으로 감정을 응축하는 드라마가 있는 것도 아니다. 뼈대를 세울 서사가 있지도 않다. 그런데 이 연극 여운이 길다.

강원도 동해안 북쪽, 부채끝처럼 생긴 마을이 있다. 이름도 그래서 ‘부채끝’이다. 작은 해수욕장이 딸린 그 어귀에 카페가 있다. 카페를 부르는 명칭이 없진 않겠지만 딱히 그 이름을 챙기는 사람은 없다. 고즈넉한 저녁 무렵, 이곳에 동네 늙은 청년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그리곤 마치 자신들의 집인 양 맥주 한 병씩을 따놓고 자잘한 신변잡기를 꺼내놓기 시작한다.

‘동네 늙은 청년’이라 표현했듯 이들의 면면도 특출할 것이 없다. 비가 올 때 양철지붕 때리는 소리만 요란한 정비소의 주인 ‘장우’는 시내서 호텔을 경영하는 ‘춘발’과 어릴 적 친구다. 이들을 따르는 ‘진수’는 설비보수전문이란 타이틀을 가졌다. 카페주인 ‘병도’가 막내다. 이들이 사는 한적한 마을을 흔들어놓은 큰 사건은 최근 서울서 내려온 여자 ‘김정’이다. 서른 줄인 그 여자는 그림을 그린다 했다. 춘발의 동네 안내를 받은 그날 저녁 모임에 합류했다.

흥미로운 건 이들의 대화다. 여자가 새로 살게 된 집터가 발단이 돼 동네에 떠돌던 귀신 이야기로 번져나간 거다. 이들은 차례로 자신과 관련이 있는 다채로운 동네 귀신들을 잡담에 출몰시킨다. 그런데 이 분위기가 묘하다. 몰입력을 가진 거다. 입담을 과시하듯 꺼내놓은 이야기가 객석마저 숨죽이게 하는 힘 말이다.

여기까지 감지됐다면 큰 그림은 잡은 것이다. 연극 ‘거기’의 핵심이 이야기와 풍경인 까닭이다. 자연스럽게 흐르는 이들의 대화는 상실과 외로움, 후회와 아픔, 극복과 치유를 저변에 깐다. 소란하게 드러내지 않아도 누구나 늘 품고 사는 감정의 한 지점, 그 장소적 지칭이 바로 ‘거기’다. 원작은 아일랜드 작가 코너 맥퍼슨이 쓴 ‘둑방(The Weir)’이다. 국내선 2002년 초연했다. 아일랜드 어느 동네에서든 자리잡은 펍(pub)을 강원도로 옮겨왔다. 초연 당시 ‘올해의 베스트연극 3’ ‘우수공연 베스트 7’ 등에 선정되며 호평을 받았다. 이번 공연은 6년 만이다.

아련함이 무르익을 때쯤 여자가 꺼낸 사연이 나름의 종결점을 끌어낸다. 학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여자는 얼마 전 딸을 잃었다. 누구 탓도 아닌 그 사고로 그는 남편과 별거까지 하고 홀로 지낼 곳을 찾아 마을로 왔다. 그럼에도 무대는 끝까지 동요하지 않는다. 그저 바에 늘어앉은 이들의 일상과 정서가 교차될 뿐이다.

작품의 백미라 하면 단연 ‘술’이다. 대사에 방해될까 무대 위에선 물 한 모금도 잘 안 마시는 배우들이 취중연기를 펼치는 거다. 극 중 이들이 마신 맥주만 10병을 넘겼다. 소주 한 병도 땄고 카페주인이 집에서 보관하던 와인까지 꺼내왔다. 입가심은 ‘킵’해둔 양주 한 잔씩. 그리곤 끝까지 “마세!” 한다.

노련한 연기가 당연히 중요하다. 연극 ‘늘근도둑이야기’ ‘비언소’의 이상우 연출이 김승욱, 이대연, 김중기, 민복기, 오용, 송재룡, 김소진, 오유진 등을 세워 탄탄한 연기력을 과시케 했다. 10월 중엔 무대 밖에서 더 바쁜 강신일, 이성민도 투입될 예정이다.

“강원도 질은 주욱 똑바로 가기만 하믄 되요. 그래서 강원도 촌놈들은 빠꾸를 못해요. 김정 씨 증말 이사 잘 온 거래요.” 튀는 것은 단 하나, 극이 끝나도 쟁쟁 울리는 사투리의 감칠맛이다. 서울 동숭동 아트원씨어터에서 11월25일까지. 02-762-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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