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멱칼럼]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 등록 2023-09-22 오전 9:53:05

    수정 2023-09-22 오전 9:53:41

[정재숙 전 문화재청장] 서울대 중앙도서관 2층에 ‘박완서 아카이브’가 마련된다는 소식에 잠시 그와 나눈 추억에 젖었다. 소설가 박완서(1931~2011) 선생이 1998년 구리시 아치울로 이사해 만든 뒤 말년까지 거처했던 서재를 재현해 고인이 남긴 일기와 편지, 장서와 유품 등을 전시한다니 내년에 완공되면 한번 찾아가 보리라 마음먹었다. 1987년 ‘여성문학’지 창간 준비로 시인 고정희(1948~1991)와 함께 처음 만난 뒤 그 서재를 비롯해 여러 자리에서 선생을 뵙고 사람과 글이 일치하는 모습에 감복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박완서는 평생 일관된 신념으로 ‘말의 힘’을 믿었던 작가였다. 그는 단편소설집 ‘도둑맞은 가난’에 이런 머리말을 붙였다.

“그때만 해도 말의 힘을 믿었던 시대였습니다. (…) 그때 우리들은 다들 가난하고 남루하게 살았지만 마음까지 남루하지 않았던 것은 말의 힘 때문이 아니었을까. 누가 믿건 안 믿건 제멋대로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문학하는 사람, 작가들이었습니다.”

지난해 12월 타계한 소설가 조세희(1942~2022)와 재회한 건 제15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고양시의 한 영화관이었다. 김미례 감독이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에 이어 4년 만에 내놓은 신작 ‘열 개의 우물’에 고인이 남긴 연작 소설집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어른거렸다. 인천 만석동과 십정동이 무대인 영화는 1980년대 인천 빈민지역에서 탁아운동을 전개한 여성들을 다루고 있지만 이 동네야말로 조세희 작가가 난장이들의 외침을 찾아다녔던 현장이다.

본디 소설명보다 ‘난쏘공’이란 줄임 제목으로 더 이름났던 ‘난장이 연작’은 시대정신을 읽을 수 있는 명문이었다. 1978년 출간 당시 빈부 격차와 노사 대립을 극적으로 압축한 피뢰침 같은 증언으로 1970년대 한국 사회의 모순을 면도날처럼 벼려낸 그 소설을 읽었던 충격은 지금도 찌릿찌릿하다.

45년이 지났는데도 줄기차게 팔리고 있는 이 소설집은 이제 세대를 뛰어넘은 한국 현대문학의 고전이 됐다. 좋은 걸 알아보는 눈은 본능일까. 시간은 흘렀어도 부자와 권력층은 요지부동인 이 나라의 변함없는 행태 탓일 수도 있다. 세대차가 극명하고 취향의 주기 또한 널을 뛰는 이 시대에 ‘난쏘공’의 불멸은 불가사의하면서도 애틋하다. 2017년 한국 문학작품으로는 처음 300쇄를 찍은 뒤 조 작가 자신은 이렇게 말했다.

“‘난쏘공’은 우리 시대의 숙제였어요. 그 소임을 제가 맡아 한 것뿐. 우리 역사의 진행을 보면 작품을 쓰지 않을 수 없는 때가 있는데 ‘난쏘공’을 쓸 때가 바로 그랬죠.”

이 정직한 한마디는 결국 예술에서 살아남는 건 해묵은 심성이 마음을 툭 치고 스며들며 오장육부로 전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만든다. 그 말의 힘을 찾아 오늘도 해묵은 책을 읽고 씹는다. 제4차 산업혁명의 물결이 오고, 생성형 인공지능이 인류의 많은 영역을 넘본다 해도 끄떡없을 수 있는 심장의 한 조각이 문화의 힘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박완서와 조세희의 소설은 세월이 흘러도 변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심성을 되씹게 한다. 시대가 작가에게 지워준 짐이자 숙제를 풀고자 누가 알아주건 말건 고투했던 수많은 문화인의 마음을 대변한 그들의 진언이 오늘 우리 귀를 울린다.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문화 생태계에 어떤 변화가 있을까 걱정한 이가 많다. 문화의 속성 상 단칼에 뭘 어쩔 수는 없겠지, 그래도 문화 민주주의에 대한 존경심은 있겠지, 바랐거늘. 문화계를 교란했던 ‘블랙리스트’의 유령이 다시 떠도는 걸 아연해 바라본다.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는 주류의 이야기에 대치하려는 ‘대항적인 이야기’의 상징이었다. 끼리끼리 그저 의자 몇 개 갈며 자리바꿈을 하는 이상한 현실을 목도하면서 다시금 난장이를 불러본다. 좀 긴 안목으로 난장이들이 제 나름 노래하며 행복동에 살게 할 수는 없는 걸까.

박완서 작가는 이미 작품 제목으로 일갈하지 않았던가.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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