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소현의 일상탈출)(20)C.S.T역과의 악연

  • 등록 2006-12-08 오후 4:30:23

    수정 2007-05-17 오후 8:19:38

[이데일리 권소현기자] "메이 아이 헬프 유?"

뭄바이 콜바 거리에서 버스를 타고 C.S.T역에 내리자마자 같은 버스를 탔던 한 남자가 말을 건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 버스에서 내리면서 중심 못잡고 휘청했던 내가 안쓰러웠나보다.

밤 늦은 시간에 짐을 모두 챙겨서 둘러메고 기차역으로 간 것은 뭄바이보다 더 남쪽에 있는 해변 휴양지, 고아에 가기 위해서였다. 밤 11시에 기차를 타면 12시간을 달려 점심때쯤 고아에 내려준단다.

여행이 막바지에 이를수록 짐은 더 커져만 갔다. 가방을 10분만 메고 있어도 어깨가 빠질 것만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게다가 버스가 선 곳은 C.S.T역 맞은 편이다. 도로를 건너야 하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횡단보도가 없다. 도로 한 가운데 있는 허리 높이의 중앙 분리대만 눈에 띈다.

버스에서 내린 인도인들은 좌우를 재빨리 살피고는 무더기로 도로를 무단횡단해 중앙 분리대를 넘어 다시 반대차선 도로를 건넌다. 무거운 가방과 함께 하자니 중앙 분리대는 만리장성보다 더 높아 보인다.

가방만 아니었다면 아마 이 남자의 호의를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난이도로 도로를 횡단하는 모습을 목격하고는 나도 모르게 '땡큐'라고 답해버렸다.

거대한 가방은 그 남자의 어깨로 옮겨갔고 나는 해방감을 만끽하며 다른 인도인들을 따라 무단횡단을 감행했다.

▲ 인도 기차역 대합실 풍경, 바닥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있다.

C.S.T역은 상당히 복잡했다. 남부로 가는 모든 열차가 이 역에서 출발하는 데다 교외선까지 있어 사람들로 북적였다.

플랫폼까지 걷는 동안 이 남자는 쉴새 없이 말을 했다. 영어가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기초적인 호구조사 수준이니 그럭저럭 말은 통했다.

짧은 시간 동안 그 남자는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 아직 미혼이라는 것, 고아로 가기 위해 곧 기차를 탄다는 것, 벌써 1달째 여행중이라는 정도의 정보를 얻었고 나는 그 남자가 뭄바이에서 일한다는 것, 집이 외곽이라 늘 C.S.T역에서 교외선으로 출퇴근 한다는 것, 나이가 25살이라는 것 정도를 알게 됐다.

이 남자 대뜸 이렇게 묻는다.

"뭄바이에서 하루 더 자고 가는게 어때?"
"안돼. 나 고아 가는 기차 타야 한다니까. 예매까지 다 했다고"
"나 니가 좋아. 하루 더 있다가 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 남자는 점점 끈적끈적해진다.
"나 진짜 니가 좋아. 사랑해. 너를 만나서 행복해"
"....."

어이없는 내용으로 실갱이를 벌이는 사이 고아행 기차가 대기하고 있는 플랫폼까지 왔다. 기차 입구에 붙어있는 예약표에서 내 이름 석자와 좌석번호를 확인했다.

이제 기차를 타야 하는데 이 남자 가방을 넘겨줄 생각을 안한다. 예약표에 있는 이름 보여주면서 "봤지? 나 이 기차 타야해. 빨리 가방 줘"

뭔가 아쉽다는 표정의 이 남자, 마지못해 가방을 건네준다. 가방을 넘겨받은 순간, 새삼 가방의 무게를 실감하며 거듭 고맙다는 말을 하고는 기차에 오르려고 돌아섰다.

뒷통수에 대고 이 남자는 또 말을 걸었다.
"저기..할 말이 있어"

속으로 "아..또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야"하면서 돌아선 순간. 그 남자 입에서 나온 말은 "나에게 돈을 좀 줄 수 없겠니? 가방 들어줬잖아"

갑자기 너털웃음이 났다. 뭐야 그럼 아르바이트였어? 그럼 그렇지..사실 가방을 처음 넘겨줬을 때에는 눈물나게 고마워서 뭔가 선물을 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부채 정도면 괜찮겠다 싶었다.

그러다 점점 끈적해지자 선물을 주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그런데 돈을 달라는 이 남자 앞에서 지갑을 꺼내기가 갑자기 두려워지는 것이다. 결국 나는 가방을 뒤져 부채를 선물이라고 줬다.

"이게 전부야?"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다.

"이 부채 비싼거야. 한국돈으로 3000원 정도니까 인도 루피로 하면 100루피나 한다고" 인도에서 100루피면 평범한 식당에서 두끼 정도를 먹을 수 있고 허름하긴 하지만 물가 싼 도시에서 하룻밤 묵을 수 있는 수준이다.

"나는 배낭여행자야. 돈 없어. 잘가" 냉랭하게 말하고는 돌아서 후다닥 기차에 올랐다. 왠지 기차 안까지 따라와서 돈을 달라고 할것만 같아 심장이 떨렸지만 다행히도 거기서 포기했나보다. 기차는 출발했고 C.S.T역은 시야에서 멀어졌다.

▲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지정된 C.S.T역, 화려한 외관을 자랑한다.
고아에서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다시 뭄바이로 돌아왔다. 이번엔 델리까지 17시간 달리는 기차를 타기로 했다. 델리는 뭄바이 북쪽에 있어 델리행 기차는 C.S.T가 아닌 센트럴역에서 출발한다.

뭄바이 시내를 둘러보다가 C.S.T역까지 왔다. 차트라파티 시바지 터미너스를 줄여서 C.S.T라고 부르는데 기차역이지만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지정됐을만큼 유서깊은 건물이다. 뭄바이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자세히 보고 싶었다.

공작새와 원숭이, 사자 등 각종 동물의 형상이 기차역 기둥과 돔천장, 첨탑, 스태인드 글래스 창 등에 조각돼 있다. 고딕 양식의 화려하고 섬세한 건물이다.

C.S.T역에서 버스를 타고 센트럴 역까지 갈 참이었다. 두 역을 연결하는 124번 버스를 기다렸다.

워낙 C.S.T역이 큰데다 교통 중심지여서 버스 정류장이 일정 간격을 두고 여러개 있다. 게다가 아라비아 숫자가 아닌 현지 문자로만 쓰여져 있어서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 124번 버스 정류장을 찾았다.

보니까 고아로 떠나기 전 버스에서 내렸던 바로 그 장소다. 124번 버스가 선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서 있는데 수염 덥수룩하고 이빨이 듬성듬성 빠진 아저씨가 나타나 싱글벙글 웃으면서 말을 건다.

어디가냐, 몇번 타냐, 거긴 왜가냐고 묻는다. 여기가 바로 124번 버스 서는데가 맞다면서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선심쓰듯 가르쳐준다.

그러더니 도쿄에서 왔냐고 묻는다. "노. 서울, 코리아"라고 답하고는 버스가 오나 살피는데 갑자기 껴안으면서 볼에 입을 맞추려 하는 것이다.

잽싸게 피하긴 했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너무 놀라서 토끼눈에 경직된 표정으로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얼어붙어 있는 내 모습을 보고는 그 이상한 아저씨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유유히 사라졌다.

정신 차리고 보니 버스 스탠드에 길게 앉아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해 있다.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도 모두 시선 고정이다.

왜 C.S.T역 앞에만 오면 이런 어처구니 없는 끈적이는 남자들을 만날까. 짜증이 몰려오고 있는 찰나, 버스 한대가 왔다. 갑자기 버스 스탠드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일어나면서 나를 향해 '뭄바이 센트럴'을 외친다. 124번이 아니라 125번이었는데 이것도 가니까 타라고 손짓한다.

버스 앞으로 다가갔더니 모두 먼저 타라고 길을 비켜준다. 한 동양 여성이 인도인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버스를 타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버스에 올랐더니 뒤따라 탄 한 인도 남자가 빈 자리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길을 만들어준다. 쭈뼛쭈뼛 가서 자리에 앉았는데도 여전히 놀란 가슴은 진정이 되질 않는다.

버스는 사람들을 가득 태운채 출발했고 창밖에는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갈수록 황당했던 그 아저씨보다는 '뭄바이 센트럴'을 동시에 외치며 길을 만들어줬던 인도인들이 떠올랐다. 빠르게 뛰었던 심장 박동수는 점점 제속도를 찾기 시작했고 나는 어느새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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