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워-스트래티지(WarStrategy)
전쟁은 무기의 질, 병력의 수보다 어떻게 준비하고 어떤 전략과 작전을 바탕으로 전투를 수행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 한국전쟁을 시작으로 페르시아 전쟁 등 인류사의 향배를 결정지은 수많은 전쟁과 이에 얽힌 전략적 사유를 통해 개인과 국가의 행위를 이해하는 폭을 넓힌다.
☆ 최영진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
중앙대에서 정치국제학과 교수로 재직.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한국정치학회 부회장 역임. 육군 및 해군 발전자문위원. ‘전쟁과 미술’ 발간. ‘현대군사명저를 찾아’, ‘군사고전 다시읽기’, ‘역사속의 군사전략’ 등 기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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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바르카(Hannibal Barca)가 로마를 공격하기 위해 알프스 산맥을 넘으면서 남긴 말이다.
‘위대한 생각: 워-스트래티지’ 강연을 진행하는 최영진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는 지난 5강에서 고대부터 중세까지 유럽을 호령한 로마군단 이야기를 다뤘다. 이런 최강 로마군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준 이가 바로 한니발이다. 한니발은 15년에 걸친 ‘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의 근거지 이탈리아 반도에서 로마를 수세로 몰아넣었다. 과연 한니발 장군은 어떻게 강력한 군사력과 동맹을 가진 로마를 곤경에 몰아넣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로마는 그 수세에서 어떻게 역전극을 펼칠 수 있었을까.
대 이은 로마 정벌 숙원…한니발, 알프스를 넘다
한니발은 지금의 튀니지 지역에 해당하는 해안 도시국가 카르타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하밀카르 바르카는 카르타고의 장군으로 1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에 항전했다.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로마에 패하자 히밀카르는 카르타고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해 가족과 군대를 거느리고 에스파냐로 넘어갔다.
당시 카르타고의 식민지였던 에스파냐에 정착한 하밀카르는 토착민을 정벌하고 거대한 농장과 은광을 경영하는 한편 상비군을 양성해 힘을 키웠다.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쓴맛을 본 바르카 가(家)의 숙원은 여전히 로마 정벌이었기 때문이다. 하밀카르는 아들 한니발에게 ‘로마와 결코 친구가 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을 정도로 그를 철저한 군인으로 키웠다. 기원전(B.C) 221년 한니발은 26세의 나이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에스파냐 총독 자리에 오른다.
29세의 한니발은 로마로 직접 진격하기로 하고 10만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에스파냐를 떠나 이탈리아 본토로 향한다. 본래 카르타고는 해상국가로 지중해 해상무역을 독점했을 만큼 많은 배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1차 포에니 전쟁을 치르면서 해군의 힘이 약해져 원정에 바닷길을 이용할 수 없었다. 게다가 로마는 이미 이탈리아 서쪽 코르시카와 사르디니아를 장악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로마로 가는 가장 험난한 길인 알프스 산맥을 넘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는 경로를 선택한 데는 전략적 이유도 있었다. 최 교수는 “한니발이 알프스 산을 넘기로 한 배경에는 그 과정에서 로마와 사이가 좋지 않은 갈리아인들을 한편으로 끌어들이려는 목적도 있었다”며 “알프스를 넘는 과정에서 10만 군사가 4분의 1로 줄었지만, 갈리아 부족에게 다시 인적·물적 지원을 받아낼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탈리아 본토로 진입한 한니발은 트레비아 강에서 4만의 로마 군단과 맞붙는다. 여기서 로마는 보병 3만 6000명과 기병 4000명으로 한니발을 막았다. 한니발 측은 보병은 2만 8000명으로 적었지만 기병은 1만 명으로 두 배 이상 많았다. 결국 이 전투에서 한니발의 기병에 압도된 로마군 2만 명이 사망하고, 5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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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은 이때부터 로마동맹의 와해를 꿈꾼다. 포로 중 로마시민은 혹독하게 대우했지만, 동맹도시의 시민군은 환대하고 음식을 주면서 회유했다. 로마는 트레비아 전투에서 이긴 한니발의 움직임에 주목했다. 한니발이 어느 쪽을 먼저 공략할지 몰라 4개 군단을 2개씩 나눠 파견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한니발은 길이 잘 닦인 행군로 대신 알페니노 산맥을 넘는 어려운 길을 택했다.
한니발은 도중에 이탈리아 중부의 트라시메네 호수에서 매복 작전을 펼친다. 한니발을 추격하기 위해 북에서 남하하는 로마군단을 겨냥한 작전이었다. 겨울이 지나 봄이 된 트라시메네 호수는 물안개가 많이 끼고 숲으로 둘러 쌓여 있어 매복하기 최적의 장소였다. 로마군 2개 군단이 매복 사실을 모른 채 행군 속도를 높이던 순간 한니발 군대가 그 앞을 막아섰다. 행렬 후미에서는 앞쪽의 상황을 모른 채 계속해서 밀고 들어왔다. 로마군의 앞과 뒤는 한니발 군대, 오른쪽은 호수가 있으니 학살에 가까운 전투가 벌어졌다.
연이은 대승을 거둔 뒤 한니발은 본격적으로 동맹 와해 작전에 들어갔다. 한니발의 전략적 목표는 로마 동맹의 해체였다. 그는 포로의 출신에 따라 차별대우를 했는데 동맹도시 출신 포로들이 고향에 돌아가 한니발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을 전하게 했다. 최 교수는 “한니발은 로마를 완전히 멸망시키기보다 카르타고에 유리한 평화협정을 맺으려고 했다”며 “이 목적을 위해서는 로마 동맹의 해체가 필수였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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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나이는 로마에서 300㎞ 남쪽에 있는 남부 식량 창고였다. 이 전투에서 한니발은 로마군의 양익을 궤멸하고 기병으로 로마군 주변을 감싸는 포위망을 만든다. 이 전투에선 최대 7만 6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사를 통틀어 단일 전투에서 발생한 최대 사망자다. 로마 역사에서도 가장 큰 패배였다.
시스템이 일군 로마의 역전극
참패를 당한 로마의 대응은 어땠을까. 로마는 한니발의 강화협상을 거부하고 전쟁을 계속할 것을 선언한다. 노예까지 끌어모아 군단을 편성하고 원로원 의원들도 재산을 헌납했다. 이렇게 해서 총 25개 군단이 탄생했고 그중 10개 군단을 한니발을 막는데 투입했다. 최 교수는 “절치부심한 로마군단은 기습과 미인계 등 비전통적 전략을 쓰는데 주저하지 않았다”며 “전쟁 수행 집정관을 1년 단위로 바꾸던 것을 장기복무로 바꿔 전쟁에 투입시켰다”고 말했다.
로마는 본토 외부에도 군사를 파견해 한니발의 세력 확장을 막았다. 이 과정에서 로마는 한니발에게 빼앗겼던 타란토, 카푸아, 시라쿠사 등을 탈환한다. 한편 에스파냐로 원정을 떠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한니발의 본거지인 카르타헤나와 바이쿨라를 점령해 한니발의 기반을 뒤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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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교수는 한니발이 끝내 로마를 이기지 못한 이유를 시스템의 차이에서 찾는다. 한니발은 카르타고에서 제대로 보급도 받지 못했고, 카르타고 군대에는 한니발을 제외하고는 믿을만한 지휘관이 없었다. 반면 로마는 지휘관 양성 시스템 덕분에 유능한 지휘관이 지속적으로 배출됐다. 덕분에 초기 전투에서 한니발에게 연전연패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군대와 더 유능한 지휘관을 기용할 수 있었다.
최 교수는 “한니발은 알프스를 넘었을 때 고작 2만 6000명의 병력으로 로마군을 압도했고 무려 12년 동안 로마를 괴롭혔다”며 “한니발의 전략이 길이 칭송받는 것은 세계 최강의 군대를 압도적으로 이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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