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신문 | 이 기사는 이데일리신문 2012년 02월 28일자 25면에 게재됐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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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최근 출간한 시집 `먼 곳`(100쪽, 창비)은 2008년 `그늘의 발달` 이후 4년 만에 내놓은 다섯 번째 시집이다. `그늘의…`에서 시인은 “시집을 내자고 여기 숨을 고르며 앉아 있는 나여. 너는 얼마나 고되게 왔는가. 아버지께 이 시집을 바친다”고 후기를 적었다. 경북 김천에서 과수원 농사를 지으며 한평생 농부로 살아온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주된 정조를 이뤘기 때문이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눈앞의 것에 연연했으나 이제 기다려본다. 되울려오는 것을, 귀와 눈과 가슴께로 미동처럼 오는 것을. 그것을 내가 세계로 나아가는 혹은 세계가 나에게 와닿는 초입이라 부를 수 있을까”며 삶을 이루는 보다 근원의 세계로 눈을 돌린다. 그래서 시인은 차분히 내면으로 침잠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말없이 말하는 자연의 존재들에 대해 새삼스러움을 느낀다.
시인의 숙명은 말 없는 존재들의 음성을 통역하는 일이다. 그들의 언어를 듣다보면 불가에서 말하는 삼라만상의 윤회를 떠올린다. 윤회란 결국 나를 잊음이다. `둥그런 윤곽은 물렁물렁해지고 흐릿흐릿해졌네 누군가/ 나를 떼어내 그 무엇과도 알맞게 섞을 수 있고/ 그리하여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네`(`공백` 중에서).
그 속내는 시인이 아닌 이상 알 수는 없다. 다만 시인이 표제작으로 삼은 `먼 곳`의 마지막 구절을 읽으며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모두가 이별을 말할 때/ 먼 곳은 생겨난다/ 헤아려 내다볼 수 없는 곳`. 그 먼 곳에서 수행하려는 시인의 마음은 고요하지만 차갑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