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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韓IT열전]③ 이재웅과 다음… 이메일 대중화 시대를 열다
- 혁신이 필요한 시대, 이데일리는 한국 벤처·스타트업 업계를 이끌었던 인물들을 조망하는 열전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우리 시대의 창업 꿈나무들에게 교순을 줄 수 있는 인물들이 대상입니다. 일부 논쟁적인 인물이라도 벤처·스타트업의 도전과 성공이라는 관점에서 그들의 삶을 돌아보고자 합니다.[이데일리 김유성 기자] 1997년 말 외환위기의 충격을 겪은 한국 사회는 1990년대 말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정부는 정보통신 산업을 새로운 한국의 먹거리로 삼고 집중적인 투자를 했다. 저렴한 가격의 국민PC 보급을 추진했고 초고속인터넷망 구축도 지원했다. 그 위를 인터넷 벤처기업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이때 대표 주자 중 하나가 한메일(혹은 다음)의 이재웅이었다. 당시 인터넷을 이용하던 우리나라 사람들 상당수가 ‘한메일’(hanmail) 주소를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지금은 이메일 주소 하나를 만드는 게 특별하지 않다. 허나 당시에는 달랐다. 인터넷에 자신만의 주소가 생겼다는 것 자체가 새로운 경험이었다. 종이 편지와 유선전화로 소식을 전하고 안부를 묻던 이들에게는 가히 ‘센세이션’이라 할 만한 변화였다.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대학 동아리 활동을 하기 위해 이메일을 만들었다.1998년 12월 한메일넷 첫화면. 이 이미지를 기억한다면 당신은 한국 인터넷 얼리어답터. (출처 : 한국경제인협회 디지털기업인 박물관)물론 한메일에 도전하는 여러 포털 메일 서비스가 나왔다. 엠파스의 엠팔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이라고 평가할 만한 30MB의 메일 저장 용량을 제공했다. 한메일의 무료 용량이 5MB였던 때라 ‘이걸 언제 다 써?’라면서 반기기도 했다. 그래도 2000년대 중반까지 한메일은 국내 웹메일의 대명사였다.한메일은 이재웅과 공동창업자들의 작품이다. 다만 이재웅은 1990년대를 관통했던 다른 IT 벤처인들과 달리 프랑스에서 인간의 인지와 사고를 연구한 경력을 갖고 있다. 대학 시절 컴퓨터를 공부했다고 하지만, 그의 초기 사업 구상은 이메일이나 검색보다 문화와 예술에 더 가까웠다.2001년 국내 자동차 광고에 나왔던 이재웅. 당시 성공한 CEO의 전형이었다.◇SF 소설을 읽고 컴퓨터에 빠졌던 소년1968년 서울에서 이재웅은 태어났다. 이재웅에게 행운이었던 것은 그의 부모가 모두 공학을 공부한 인텔리였다는 점이다. 아버지 이철형 씨는 한국종합건설 대표를 지낸 기업인이었다. 덕분에 이재웅은 어릴 때부터 공학용 계산기를 접했고 수학과 과학에도 흥미를 느꼈다.책도 좋아했다. 그는 초등학교 1학년 때 SF 소설 60권짜리 전집을 선물받았는데, 일주일 만에 모두 읽었다. 우주와 미래, 아직 존재하지 않는 기술에 대한 상상과 동경이 자리 잡았다.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때 그의 일생에 결정적인 선물을 받게 된다. 컴퓨터였다. 애플Ⅱ를 모방한 ‘청계천표’ 호환 컴퓨터였다. 앞서 소개했던 이찬진과 안철수처럼 일찍이 컴퓨터를 접하게 된 게 결정적이었다.PC를 갖게 된 많은 소년이 그렇듯 그도 처음에는 게임을 했다. 그러다 베이직(BASIC)이라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웠다. PC 모니터에 영문 명령어를 입력하면 그대로 실행되는 게 소년 이재웅에게는 경이로웠다.훗날 진행됐던 넥슨컴퓨터박물관의 ‘내 인생의 컴퓨터’ 프로젝트에서 그는 컴퓨터가 외부 세계와 소통하는 매개였다고 회상하기도 했다.공학을 공부했던 부모, 어린 시절 읽었던 과학책과 SF 소설, 고등학생 때 선물받은 컴퓨터가 그를 전산학의 세계로 이끌었다. 그는 1986년 연세대 전산과학과에 입학했다.그가 연세대에 입학했던 1980년대 중반은 국내에 PC가 보급되기 시작했던 때였다. 여러 대의 컴퓨터가 놓이게 되고 이를 연결해 정보를 주고받으려는 시도가 진행됐다. 기초적인 인터넷의 싹이 트고 있었다. 이재웅은 대학에서 컴퓨터를 공부하면서 네트워크의 가능성을 경험했다.1989년 그가 접한 비트넷(BITNET)은 새로운 세계를 보여줬다. 비트넷은 미국 대학들을 중심으로 발전한 학술 컴퓨터 네트워크였다. 멀리 떨어진 대학과 연구기관들이 전자우편과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인터넷 문화의 선구적 시스템이었다. 한 대의 컴퓨터로 프로그램을 실행하던 세계가 여러 컴퓨터를 연결하는 세계로 확장되고 있었다.이재웅은 이때 곧 변화할 시대를 감지했을 것 같다. 컴퓨터 네트워크에서는 이용자가 직접 정보를 만들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누구나 정보를 생산하고 공유할 수 있는 주체가 된 것이다. 새로운 소통의 공간이 열릴 수 있다는 의미였다.대학에서 그와 같은 관심을 가진 후배도 만났다. 그중 한 명이 이택경이었다. 이택경은 이재웅보다 네 학번 아래인 연세대 후배였다. 두 사람은 PC통신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교류했다. 이 두 사람의 인연은 한국 인터넷 산업의 역사로까지 이어졌다.이재웅은 1991년 연세대 전산과학과를 졸업했고 1993년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다음 행보는 취업이나 창업이 아닌 프랑스 유학이었다.◇프랑스 유학 후 한국에서 창업1993년 이재웅은 프랑스로 떠났다. 그곳에서 공부한 분야는 인지과학이었다. 인지과학은 인간이 정보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며 사고하는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컴퓨터과학과 심리학, 언어학, 인공지능 등이 만나는 학제 간 연구 분야이기도 했다.2001년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이재웅은 프랑스에서 다양성의 가치를 배웠다고 회상했다. 어느 하나만 옳다는 식의 사고에서 벗어나 서로 다른 생각이 공존할 수 있음을 경험했다는 것이다.그의 인생을 바꾼 또 다른 계기가 있었다. 언어학자이자 사회비평가인 노엄 촘스키의 다큐멘터리 영화였다. 촘스키는 언어학 연구의 거장이면서 기존 언론과 권력의 관계를 비판해 온 학자다.이재웅은 촘스키를 다룬 영화를 보면서 기존 언론의 문제점을 짚고 독립적인 미디어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여기서 인터넷이 할 수 있는 역할과 가능성을 발견했다.기존 언론사나 거대한 자본이 독점하던 정보 유통 방식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새로운 미디어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했다.이런 생각을 구체적인 사업으로 옮기게 한 인연이 있었다. 프랑스 유학 시절 다시 만난 고등학교 동창 박건희였다. 박건희는 중앙대학교에서 사진을 공부한 뒤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두 사람은 파리의 한 식당에서 만나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기술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이야기를 나눴다.당시는 인터넷이 세계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들고 글을 올리거나 그림과 사진을 게시하는 것 자체가 새로운 시도였다. 두 사람은 인터넷이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예술가와 관객을 연결하는 공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이재웅은 창업을 결심했다. 그의 부모도 그 선택을 지지했다.이재웅은 안정적인 가정환경에서 자랐던 점이 새로운 사업을 하는 데 원동력이 됐다고 봤다. 그리고 젊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면 새로운 사업에 도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이재웅과 박건희는 귀국했고 연세대 후배 이택경이 합류하면서 새 회사가 설립됐다. 1995년 2월 16일 다음커뮤니케이션의 시작을 알렸다. 이재웅은 당시 스물여섯 살이었다.◇다음의 첫시작은 가상미술관 다음커뮤니케이션의 초기 자본금은 5000만원, 사무실은 청담동에 있는 20평 남짓한 공간이었다. 책상 세 개가 놓였다. 회사 이름은 ‘현재 이후의 시간’을 뜻하는 다음이었다. 한자로는 여러 소리라는 의미의 ‘다음(多音)’을 담았다. 여러 목소리가 어우러지는 미래를 만들자는 취지였다.첫 사업은 인터넷에 문화와 예술 콘텐츠를 올리고 이를 이용자에게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버추얼갤러리(Virtual Gallery)’라는 인터넷 가상미술관이었다. 1995년 광주비엔날레의 소식을 인터넷으로 전했고 서울국제만화페스티벌을 소개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하기도 했다. 패션 정보를 제공하는 ‘패션넷’, 청소년 대상 웹진 ‘채널텐’ 등으로도 영역을 넓혔다.문제는 시장이었다. PC통신이 여전히 중심이었고 인터넷 이용자는 많지 않았다. 인터넷용 콘텐츠를 만드는 데에는 많은 비용이 들었지만 이를 통한 수익 창출은 어려웠다. 회사 운영을 위해서는 다른 수입원이 필요했다. 사내 정보망인 인트라넷을 개발하는 용역을 맡거나 기업용 그룹웨어를 개발했다. 이렇게 번 돈을 인터넷 서비스 개발에 투자했다.그즈음 이메일이 새로운 인터넷 서비스로 관심을 모았다. 다만 이메일은 누구나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서비스가 아니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느린 속도로 전화선을 통해 데이터를 주고받았다. 학교나 연구기관에 속한 사람들이 주로 이메일을 썼고 일반 이용자는 PC통신 서비스에 가입해 제공되는 전자우편 기능을 사용했다.이때 등장한 게 핫메일이었다. 1996년 시작한 핫메일은 인터넷 브라우저를 통해 무료로 이메일을 이용할 수 있게 했다. 별도의 메일 프로그램을 설치하지 않아도 인터넷에 접속하면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이재웅과 이택경은 인터넷에서 누구나 무료로 이메일을 이용할 수 있게 한다는 구상에 뜻을 모았다. 당장 이용료를 받는 대신 사람들을 모으고, 사람들이 모이면 더 많은 서비스를 제공하자는 취지였다. 어쩌면 오늘날 플랫폼 사업 전략의 초기 형태를 다음의 한메일에서 찾을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기술적인 준비도 돼 있었다. 기업용 인트라넷과 그룹웨어를 개발하면서 네트워크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경험을 쌓았던 덕에 곧 한메일넷을 출시할 수 있었다.1997년 5월이었다. 국내 최초의 무료 웹메일 서비스로 평가받는 한메일넷의 등장은 한국 인터넷 시장에서 중요한 사건이 됐다. 사용 방법도 어렵지 않았다. 인터넷 이용자들은 자신의 이름이나 별명으로 주소를 만들고 그 주소를 친구들과 교환했다. 인터넷상의 신분증을 갖게 된 셈이다.처음에는 인터넷에 관심이 많은 젊은 층을 중심으로 사용자가 늘더니 이후에는 대학생과 직장인, 일반 가정으로 이용자가 확대됐다.◇한메일 이후 ‘카페’까지 성공한메일은 한국 인터넷 이용자들의 기본 서비스가 됐다. 1998년 7월 사용자 수 50만명을 넘겼고 그해 12월에는 100만명을 돌파했다. 1999년 봄에는 200만명 수준까지 늘었다. 가입자가 증가하면서 광고와 전자상거래를 비롯한 다른 사업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당시 선두 포털이었던 ‘야후’의 아성에 도전할 기반도 갖추게 됐다.당시에도 여러 메일 서비스가 나왔다. 한메일이 이들 서비스와 달랐던 점은 그것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서비스를 준비해 내놓았다는 것이다. 인터넷 커뮤니티의 대명사처럼 불렸던 ‘카페’다.1999년 5월 25일 ‘다음카페’가 등장했다.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들이 온라인 공간에 모여 글을 쓰고 자료를 올리며 의견을 나누자는 취지였다. PC통신 프로그램이나 복잡한 접속 과정 없이 인터넷 홈페이지에만 들어가면 됐기 때문에 이용하기도 쉬웠다. 학교 동창회, 대학 동아리, 연예인 팬클럽, 취미 모임 등이 만들어졌다.2000년 당시 다음 초기 화면 (출처 : 한국경제인협회 디지털기업인박물관)한메일과 카페의 성공으로 다음은 지속적인 성장을 했다. 초고속인터넷의 보급은 다음의 성장 속도를 끌어올렸다. 다음은 2000년 4월 회원 수 1000만명을 돌파했고 같은 해 11월에는 2000만명을 넘겼다. 온라인 쇼핑과 금융, 뉴스 등으로 서비스가 확대됐다. 2000년 이재웅은 세계경제포럼이 선정하는 ‘미래의 세계 지도자’ 100인에도 이름을 올렸다. 이재웅이 한국 인터넷 산업의 성공을 상징하는 젊은 기업인으로 떠오른 것이다.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을 연결하겠다던 이재웅의 꿈이 현실이 된 것이다. 동시에 야후와 네이버 등과 치열한 포털 경쟁을 벌여야 했다.
- "아버지 장례 반년 뒤 모르는 대부업체 소장이 왔습니다"[돈분쟁해결소]
- [박기태 법무법인 한중 변호사] 경제뉴스 속 사건들은 남의 이야기 같지만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돈분쟁해결소’는 실제 피해 사례들을 재구성한 사건을 통해 ‘내가 당사자라면?’이라는 질문에 답하며 돈을 둘러싼 법적 쟁점과 현실적인 대응법을 함께 짚어봅니다. <편집자주>지난겨울 아버지를 여읜 후 반년 뒤 모르는 대부업체 소장을 받은 50대 직장인 A.(사진=제미나이 생성 이미지)50대 직장인 A씨는 지난겨울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작은 식당을 하다 몇 해 전 문을 닫은 아버지가 남긴 재산이라곤 시골의 낡은 집 한 채뿐이었습니다. A씨는 장례를 치른 뒤 아버지의 통장을 정리해 장례비에 보탰고, 타던 중고차는 동생이 처분했습니다. 빚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반년이 흐른 어느 날 법원에서 소장이 날아왔습니다. 생전 들어본 적 없는 대부업체가 아버지의 빚 4000만원을 자식들이 갚으라고 독촉한 것입니다. 폐업 무렵 받은 대출은 연체 이자까지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었습니다. 당황한 A씨가 상속포기를 알아보니 이미 ‘상속 개시를 안 날부터 3개월’이 지났다는 절망적인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지인은 “그러면 한정승인(상속인이 상속으로 취득하게 될 재산의 한도에서 피상속인의 채무와 유증을 변제할 것을 조건으로 상속을 승인하려는 의사표시)이라도 해 두라”고 조언했습니다. -상속포기 기간이 지났다는데, 꼼짝없이 아버지 빚을 다 떠안아야 하나요?△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원칙적으로 상속인은 상속 개시를 안 날부터 3개월 안에 단순승인, 한정승인, 상속포기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아무 조치도 하지 않으면 빚까지 고스란히 물려받는 ‘단순승인’으로 간주되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빚이 재산보다 많다는 사실을 중대한 과실 없이 몰랐다면 그 사실을 안 날부터 3개월 안에 다시 한정승인을 할 수 있습니다. 이를 ‘특별한정승인’이라 부릅니다. 소장을 받고서야 빚의 존재를 알았다면 소장을 받은 날부터 3개월의 시계가 다시 도는 것입니다.다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이 있습니다. 통장을 정리해 장례비로 쓰고 차량을 처분한 행위는 ‘상속재산 처분’으로 간주되어 단순승인으로 처리될 위험이 있습니다. 장례비 지출은 다툴 여지가 있으나 차량 처분은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으니 처분 경위와 대금 사용처를 꼼꼼히 소명할 준비를 해두어야 합니다.-애초에 상속포기를 했더라면 더 깔끔하게 끝나지 않았을까요?△이미 지나간 일이기도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상속포기는 A씨 개인을 빚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줄 뿐, 빚 자체를 없애주지는 않습니다. A씨 형제가 모두 상속을 포기하면 그 빚은 다음 순위 상속인, 즉 아버지의 형제나 조카들에게 넘어갑니다. 그들 역시 3개월 안에 포기하지 않으면 무심코 빚을 떠안게 됩니다. 친척들에게 ‘빚 폭탄’을 돌리는 셈이 될 수 있습니다.그래서 재산이 조금이라도 있고 후순위 상속인이 존재한다면 처음부터 한정승인을 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려받은 재산 범위 내에서만 빚을 갚으면 되므로 다른 사람에게 전가되지 않고 A씨 선에서 깔끔하게 마무리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A씨에게 남은 최선의 길 역시 한정승인이니 애초에 틀린 방향은 아니었던 것입니다.-그렇다면 법원에 한정승인 신청만 해두면 모든 게 끝나는 건가요?△가장 흔하면서도 치명적인 오해입니다. 한정승인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이는 단지 ‘물려받은 재산 한도 내에서만 갚겠다’는 선언일 뿐이며 그 재산을 채권자들에게 실제로 나누어주는 청산 절차가 뒤따라야만 진정한 매듭이 지어집니다. 채권자들에게 신고하라고 공고하고 신고된 비율대로 배당하며 시골 집 같은 재산은 매각이나 상속재산파산을 통해 정리해야 합니다.이를 모른 채 법원 결정문만 서랍에 넣어두면 몇 년 뒤 다른 채권자가 ‘왜 내 빚은 갚지 않았느냐’며 소송을 제기할 수 있고 자칫 한정승인의 보호막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적지 않은 법률 전문가들조차 신청서를 내고 결정문을 받는 데서 업무를 멈추며 청산의 필요성을 제대로 안내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부동산을 직접 팔아서 채권자들에게 나눠주라니 막막합니다. 그런 일은 해본 적도 없는데요.△그래서 존재하는 제도가 바로 ‘상속재산파산’입니다. 한정승인을 한 상속인이 상속재산에 대해 파산을 신청하면 법원이 파산관재인을 선임해 재산을 조사하고 처분하여 채권자들에게 공평하게 배당해줍니다. C씨가 직접 공고와 배당, 매각을 챙겨야 하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고 훗날 ‘배당이 잘못됐다’며 책임을 질 위험도 없습니다. 특히 부동산이 포함되어 있어 세금과 처분 절차가 복잡하게 얽힌 경우라면 이 제도를 활용하는 것이 훨씬 안전합니다.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꼭 알아두어야 할 유용한 길입니다.재산보다 빚을 물려받는 상속이 늘어나는 시대입니다. 노년의 생활비 대출과 폐업 후에도 남은 가게 빚, 어쩔 수 없이 섰던 보증 채무가 고인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유족의 삶을 짓누릅니다. 사망신고 시 금융재산과 채무를 한 번에 조회해 주는 안심상속 서비스가 도입되었지만, 정작 그다음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아무도 속 시원히 알려주지 않습니다. 기한과 선택지, 그리고 한정승인 이후의 청산 절차까지 창구에서 종이 한 장으로라도 안내해 주는 세심함이 아쉬운 대목입니다.젊은 층에서 인기를 끄는 만화 ‘체인소 맨’의 주인공 덴지는 아버지가 남긴 막대한 빚을 영문도 모른 채 떠안고 이를 갚기 위해 목숨 걸고 악마를 사냥하는 소년으로 자라납니다. 슬프게도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부모의 빚이 남은 자식의 삶마저 삼키지 않도록, 고인의 통장을 정리하기 전 반드시 빚의 유무부터 확인하고 석 달의 시계가 돌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박기태 법무법인 한중 변호사. (사진=이데일리 DB)<!--EndFragment-->
- "편견 대신 희망 보여주고파"… 한국 빛내는 '다문화 태극전사들'
- [이데일리 스타in 주미희 기자] “예선에서 겪은 실격 오심은 기억에 없고요. 딱 적절한 타이밍에 온 ‘액땜’이라고 생각합니다.”지난달 28일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 미즈호 공원 육상 경기장에서 열린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육상 남자 400m 계주 결선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대한민국 대표팀 비웨사 다니엘 가사마(왼쪽)와 나마디 조엘진이 기뻐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지난달 28일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육상 남자 400m 계주에서 한국 신기록(38초43)을 작성하며 동메달을 목에 건 비웨사 다니엘 가사마(23·안산시청)는 유창한 한국말로 이렇게 말했다.탄탄한 체격과 피부색, 한국식과는 거리가 먼 이름 때문에 언뜻 외국 선수로 보이지만 그는 대한민국 육상 국가대표다. 콩고민주공화국 출신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비웨사는 중학교 3학년 때 한국 국적을 취득한 뒤 전문 육상 선수의 길을 걸었다.지난달 28일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 미즈호공원 육상 경기장에서 열린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육상 남자 400m 계주 메달 시상식. 동메달을 획득한 대한민국 대표팀 서민준(왼쪽부터), 나마디 조엘진, 이재성, 비웨사 다니엘 가사마로가 메달을 받고 기뻐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조엘진·비웨사·이해란까지…달라진 태극전사 얼굴이번 아시안게임에서는 비웨사처럼 다문화·이주 배경을 가진 선수들이 곳곳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활약하고 있다. 변화가 가장 두드러진 종목 가운데 하나가 육상이다. 비웨사와 함께 남자 400m 계주 동메달을 합작한 나마디 조엘진(20·예천군청)도 다문화 가정에서 성장했다.한국인 어머니와 나이지리아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조엘진은 한국에서 나고 자랐다. 키 186cm, 몸무게 80kg의 탄탄한 체격에 큰 눈과 짙은 피부, 곱슬머리 등 외모는 일반적인 한국 선수들과 다소 다르다. 이름 역시 아버지의 성씨인 ‘나마디’와 천주교 영세명 ‘조엘’, ‘보배’를 뜻하는 한자 ‘진(珍)’을 합쳐 지었다. 하지만 조엘진은 스스로를 ‘뼛속까지 한국인’이라고 말한다.여자농구 금메달의 주역 이해란(23·삼성생명)도 다문화 가정 출신이다. 필리핀 출신 어머니를 둔 이해란은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한국 최고의 농구선수’라는 꿈을 키웠다. 프로 데뷔 후 정상급 포워드로 성장해 태극마크까지 달았다. 이번 대회에서도 존재감은 뚜렷했다. 최대 승부처였던 중국과의 준결승에서 신장 226cm의 장쯔위를 전담 수비하며 승리에 힘을 보탰고, 결승전에서도 맹활약했다.메달 물어보는 이해란.(사진=연합뉴스)남자 농구대표팀의 에디 다니엘(19·SK)은 아프리카계 영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국 유도 간판 허미미(24·경북체육회)는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재일교포다. 2021년 ‘한국 선수로 뛰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할머니의 유언을 따라 한국 국적을 선택했고, 독립운동가 허석 선생의 5대손인 것이 알려져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허미미는 1일 유도 여자 57㎏급 결승에서 몽골의 아리운자야 테르비시를 유효승으로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서핑 국가대표 팔미아노 카노아 희재(19) 역시 필리핀계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를 둔 다문화 가정 출신이다. 서퍼 출신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찌감치 서핑을 시작한 카노아 희재는 이름은 이국적이지만 ‘토종’ 한국인이다. 아버지를 따라 캐나다나 필리핀 국가대표를 선택할 수도 있었고 어린 시절 실제 스카우트 제의도 받았지만 “나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태극마크를 달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니콜라이스 마줄스 대한민국 대표팀 감독이 에디 다니엘(오른쪽)에게 작전을 지시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편견의 벽 넘어…“다문화 선수들의 희망 되고파”다문화 가정 선수들의 활약이 늘어나고 있지만 태극마크에 이르는 길이 늘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경기 안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비웨사는 어린 시절 한국 국적이 없어 전국 규모 대회 출전과 체계적인 육상 교육에 제약을 받았다. 어머니가 10년 넘게 귀화를 위해 노력한 끝에 한국 국적을 취득했고, 비웨사는 이후 본격적으로 전문 훈련을 시작했다.서핑 유망주 카노아 희재에게는 비인기 종목의 현실이 또다른 벽이었다. 안정적인 후원을 구하기 쉽지 않았고, 해외 전지훈련은 물론 대회 출전 비용까지 자비로 부담해야 했다. 후원업체들도 처음에는 ‘카노아’라는 낯선 이름에 난색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아들의 꿈을 위해 직장을 내려놓은 아버지와 생계를 책임진 어머니의 헌신 덕에 카노아 희재는 결국 태극마크를 달고 아시안게임에 출전했다.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개회식에 참석한 팔미아노 카노아 희재.(사진=카노아 희재 인스타그램)조엘진은 성장 과정에서 다문화 가정 선수라는 이유로 편견을 마주했지만, 자신이 겪은 차별을 후배들에게는 ‘가능성’으로 돌려주고 싶다고 했다. 그는 “혼혈이라는 것 때문에 편견 어린 시선을 받을 때도 있었지만 엄마의 격려 덕분에 더 힘을 냈다”면서 “내가 앞으로 다문화가정 선수들의 희망과 미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항상 한다”고 말했다.2023년 기준 국내 초·중·고교 다문화 학생은 약 18만명으로 전체 학생의 3.5%에 달했다. 전체 학령인구가 줄어드는 가운데 다문화 학생은 꾸준히 늘고 있다. 이 같은 변화는 엘리트 스포츠에서도 결실로 나타나고 있다. 다문화 배경 선수들이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무대에서 성과를 내면서 한국 스포츠의 새로운 경쟁력으로 자리잡고 있다.1일 일본 나고야 아이치 인터내셔널 아레나에서 열린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유도 여자 -57kg급 결승전. 몽골 아리운자야 테르비시를 상대로 승리하고 금메달을 따낸 허미미가 기뻐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 李대통령 "일부러 저질 싸움판 유도하는 세력 있어"
- [이데일리 박지혜 기자] 이재명 대통령은 27일 “국민의 관심과 격려, 특히 ‘대통령 친구’님들의 참여와 실천이 꼭 필요하다”며 “함께 해줄 것으로 믿는다”고 호소했다.미국과 멕시코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이재명 대통령이 27일 성남 서울공항에 도착한 공군 1호기에서 영접 인사들과 인사를 나누며 허리를 만지고 있다 (사진=연합뉴스)이 대통령은 이날 오후 엑스(X·옛 트위터)에 한 누리꾼이 이 대통령의 외교 성과를 각 언론사가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언급한 게시물을 공유하며 ‘참여와 작은 실천이 개혁 세상을 만든다’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해당 누리꾼은 이 대통령의 미국·멕시코 순방을 다룬 언론 보도 등을 나름대로 분석한 결과를 내세우며 “외교 성과가 있었다는 언론사가 매우 적고, 단순히 복귀한다는 얘기와 쌓여 있는 국내 문제를 언급하는 언론이 많다”고 주장했다.이에 대해 이 대통령은 “언론이 보도하지 않는다고, 믿었던 유튜브 채널이 알려주지 안는다고 섭섭해하지 말자”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은 우리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일이고 또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일”이라고 위로했다.그러면서 “반국민적 대통령을 탄핵하고 새 대통령을 뽑았다고 개혁이 저절로 되지 않는다”며 “탄핵은 퇴행과 몰락을 막았을 뿐이고, 새 대통령 선출은 개혁의 끝이 아니라 겨우 시작”이라고 했다.또 “개혁도 동력이 있어야 하고, 동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며 “개혁 의지가 왜곡되지 않고 개혁이 사익 추구가 악용되지 않으며 개혁 성과가 제대로 국민에게 알려지고 개혁 작업이 국민의 공감 속에 국민과 함께 이뤄져야 지속적 개혁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이 대통령은 “반칙과 특권 없는 사람 사는 세상, 억강부약 하는 대동 세상은 그것을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들이 행동하고 실천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밝혔다.더불어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는 말을 인용하며 “악의를 가졌으되 훈련되고 조직돼 행동하는 소수가 선량하나 분산된 다수를 좌지우지하는 경우가 많다”며 “우리 스스로 헤쳐 왔듯이, 우리 스스로 헤쳐가야 한다”고 당부했다.이 대통령은 “주어지는 정보에 눈 감고 귀 막은 채 맹종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돌아봐야 한다”며 “나의 선의가 누군가의 돈벌이에 이용되고 악용되지 않게 하려면 스스로 정보를 취득하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데에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라고도 했다.아울러 “목숨 걸고 계엄군의 총과 장갑차에 맞서는 일만큼 일상에서 댓글로, 메시지로, 전화로, SNS 글로 언론이 외면하고 유튜버가 조작하는 숨겨진 진실과 팩트를 알리고, 댓글에 ‘좋아요’ 한 번 누르는 것도 그 순간 우리가 원했던 세상을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하고 중요한 실천”이라고 독려했다.다만 이 대통령은 “똑같이 갚아주는 게 시원할지 모르나 설득력도 없고 싸잡아 ‘똑같은 사람’이란 말만 듣는다. 주변 사람마저 똑같은 사람이라는 비난 소재가 된다”며 “더티한(더러운) 싸움판으로 전락하면 누가 먼저냐는 의미가 없다. 일부러 저질 싸움판을 유도하는 세력도 있다. 그들 스스로 부끄럽게 느껴지도록, 지켜보는 국민이 평가할 수 있도록 그들이 비록 저질스럽게 나오더라도 우리는 고고하게 가자”고 했다.이 대통령은 “대한국민과 빛의 전사들이 맡긴 꿈을 한시도 잊지 않았고 한치도 잊지 않을 것이다. 맡겨진 권한을 최대한 활용해 그 꿈을 현실로 만드는데 신명을 바칠 것”이라고 다짐했다.이 대통령은 5박 7일간 미국·멕시코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기 직전 이러한 글을 SNS에 올렸다.강훈식 청와대 비서실장의 사의 수리 여부 등 참모진 개편과 장관 인사 실패에 대한 수습, 검찰개혁 후속 작업, 범여권 지지층의 갈등 봉합 등 산적해 있는 주요 현안을 해결하기에 앞서 지지층 결집과 지원 사격을 당부한 것으로 풀이된다.
- "둘 만의 일상에 만족"…더 이상 특별하지 않은 `딩크족`[난 괜찮아요]
- 명절을 맞아 모인 가족들이 서로를 이해하자는 취지로 [난 괜찮아요]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자퇴한 청소년부터 취업을 미루는 청년, 결혼을 하지 않는 이들, 자녀 계획이 없거나 황혼 연애·재혼을 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담았습니다. 평소 그들의 속내를 알지 못했다면 이번 명절을 계기로 조금은 이해해보면 어떨까요? [편집자주][이데일리 이유림 기자 정유진 수습기자] “이번 추석엔 싱가포르 이웃과 송편을 나누며 조용하고 오붓하게 보낼 거예요. 저희 부부에겐 태어나지 않은 2세보다 지금 곁에 있는 서로의 일상이 훨씬 소중하거든요.” 미국인 남편과 싱가포르에서 거주하는 40대 후반 장모 씨는 자녀 대신 반려묘 두 마리와 함께 사는 15년차 ‘딩크’(DINK·맞벌이 무자녀)족이다. 결혼 초기만 해도 아이를 원했던 장씨는 남편과의 깊은 대화 끝에 딩크를 택했다.장씨는 “‘둘이 지내는 게 더 행복할 것 같다’는 남편의 생각을 따르기로 했다”며 “반려묘를 키우는 데도 수많은 조율이 필요한 걸 보면서 우리는 아이가 있었다면 더 많이 다퉜을 것이란 생각도 든다”고 웃음을 보였다. 한때 자녀가 있는 주변 가정을 보며 부러운 마음이 들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부부의 삶에 대한 확신이 더 깊어졌다. 장씨는 “우리 선택에 확신이 쌓이면서 자녀가 있는 가정도 진심으로 축복하게 됐다”며 “우리의 선택이 처음부터 옳았다기보다, 부부가 함께 그 선택을 옳게 만들어가는 삶을 살고 있다”고 전했다.맞벌이면서 자녀가 없는 딩크족(사진= 게티이미지뱅크)◇10명 중 3명 “아이 필요성 못느껴”민족 대명절 한가위를 맞아 모인 친척들 사이에서 단골 안부였던 “아이는 언제 낳느냐”는 질문이 점차 힘을 잃고 있다. 전통적인 ‘결혼=출산’ 등식이 옅어지고, 자녀 없이 부부의 유대와 자아실현에 집중하는 삶이 또 하나의 가족 형태로 자리 잡으면서다.대통령직속 인구전략위원회의 ‘2025 결혼, 출산, 양육 및 정부 저출생 대책에 대한 인식조사’에 따르면 국민 10명 중 3명(29.1%)은 자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고 답했다. 특히 만 25~29세 여성의 경우 필요 없다는 응답(51.3%)이 필요하다는 응답(48.7%)을 앞질렀다.무자녀 응답자 중 향후 “아이 낳을 생각이 있다”는 응답은 39.7%에 그쳤다. 반면 60% 이상은 출산을 망설이거나 거부했다. 출산을 기피·유보하는 주된 이유(복수응답)로는 ‘임신·출산·양육의 어려움’(57.2%)이 가장 많았고, ‘아이가 살기 힘든 사회’(36.0%), ‘양육비용 부담’(33.2%)이 뒤를 이었다.경제적·환경적 부담을 넘어, 자아실현과 삶의 자율성을 최우선에 두는 가치관의 변화 역시 무자녀 선택의 핵심 배경으로 꼽힌다. 취미 동호회에서 남편을 만나 결혼 18년 차를 맞은 전업주부 이모(56) 씨는 “늦은 나이에 올린 결혼인 만큼 서로에게 더 사랑을 쏟고 충실하자는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둘만의 삶을 택했다”고 전했다.이 씨는 딩크족으로 살아온 지난 삶의 가장 큰 장점으로 ‘시간적·경제적 여유’를 꼽았다. 그는 “특별한 삶을 살기보다 여느 부부처럼 함께 장을 보고 TV를 보며 언제나 둘이 함께하는 일상 속에서 큰 만족을 느낀다”고 말했다.명절에 자녀 계획을 묻는 친척들에게는 “생기면 낳고, 안 생기면 안 낳는다”며 유연하게 넘겼고, 시어머니의 2세 기대 역시 남편이 중간에서 배려 있게 중재해 준 덕에 큰 갈등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이 씨는 “자녀가 없으면 부부 사이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며 흔드는 주변의 시선에 휘둘리거나 그들을 설득하려 애쓸 필요는 없다”며 “내 삶을 대신 살아줄 사람이 아닌 만큼, 부부의 중심을 잡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무자녀 부부에 대한 인식 달라져”프리랜서로 일하는 결혼 2년 차 김모(34) 씨는 학창 시절부터 비출산 의지가 확고했다. 남편의 생각도 비슷했다. 김 씨는 “주변에서 ‘너는 좋은 엄마가 될 텐데 하나 낳아보라’고 권유할 때도 있지만, 아이를 예뻐하는 것과 내 아이를 직접 키우는 건 전혀 다른 문제”라고 선을 그었다. 김 씨의 요즘 화두는 육아가 아닌 ‘배움과 진로’다. 대학원 진학 등 새로운 학업 도전을 준비 중인 그는 “아이를 낳아 키우는 행복의 대가로 무엇을 지불해야 하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라며 “내가 어떤 삶을 원하는 사람인지 깊이 고민해본 뒤 선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결혼 6년 차에 접어들며 개인 헤어숍을 차린 윤모(34) 씨는 커리어를 위해 자녀 계획을 접었다. 윤 씨는 “내 이름으로 매장을 여는 게 오랜 꿈이었고, 숍이 자리 잡기 위해선 당분간 일에 온전히 몰입해야 한다”며 “아이 없이 남편과 둘이서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아갈 자신이 있어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무자녀 부부를 ‘미완성된 가족’이나 ‘이기적인 선택’으로 낙인찍는 전통적 시선이 점차 옅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송다영 인천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국내에 ‘딩크’라는 용어가 쓰인 지 20~30년이 흐르면서 과거에 비해 편견이나 부정적 인식이 크게 줄었다”며 “최근에는 2030 세대뿐 아니라 기성세대 사이에서도 ‘그렇게 살 수도 있지’라며 삶의 한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이어 1인 가구나 비혼 등 가족 구조가 다변화되는 현실을 짚으며 “딩크 역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새로운 가족 형태 중 하나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사진= 생성형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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