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렬
  • 영역
  • 기간
  • 기자명
  • 단어포함
  • 단어제외

뉴스 검색결과 1,368건

무엇이 그들을 무죄로 만들었나? ''이태원 살인사건''
  • [SPN 리뷰]무엇이 그들을 무죄로 만들었나? ''이태원 살인사건''
  • ▲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 포스터[이데일리 SPN 김용운기자] 1997년 4월 외국인 관광특구인 서울 이태원의 한 패스트푸드가게의 화장실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진다. 피해자는 당시 대학생이었던 고 조중필군. 중필군은 여자친구를 바라다 주던 길에 화장실에 들렀다가 몸의 9군데가 칼에 찔려 숨을 거뒀다. 사건의 피의자는 미국 국적의 10대 청소년 두 명. 이들은 사건 직후 검거가 됐지만 결국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난다. 서로를 범인으로 지목했지만 누가 죽였는지를 확증할 수 있는 증거가 나오지 않아서다. 죽은 사람은 있고 이를 본 사람은 있는데 정작 죽인 범인은 없다는 것이 이태원 패스트푸드가게 살인사건의 요지다. 홍기선 감독은 우연히 조중필씨 사건에 대한 인터넷 홈페이지를 보고 이 영화를 기획하게 됐다. 서울대 원자력공학과 재학시절 공대 영화 동아리 얄랴성의 초기 멤버였던 홍기선 감독은 80년대 5.18 광주민주항쟁을 최초로 다룬 단편 영화인 ‘오 꿈의 나라’ 때문에 옥고를 치른다. 이후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 자르고’와 ‘선택’ 두 장편 영화로 당시 80년대 운동권이었던 영화인들에게 빚을 안겼다. 소위 멍텅구리 배라고 하는 새우잡이 배에 잡혀간 군상들의 삶을 가감 없이 보여준 ‘가슴에’와 비전향 장기수의 삶을 담은 ‘선택’은 한국사회의 어두운 진실이었고 홍기선 감독의 영화를 통해 재조명됐기 때문이다. 영화의 사회적 메시지를 고민하는 영화인들에게 그래서 홍기선 감독의 이름은 남달랐다. 홍 감독은 이태원 살인사건의 전후와 과정을 보면서 90년대 한국사회의 표징을 읽었다고 한다. 이태원이란 무국적 공간속에서 벌어진 미국 국적 10대 소년들의 살인사건. 그리고 이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결국 피해자만 있고 범인은 존재하지 않는 어이없는 상황. 결국 홍 감독은 누가 범인인가보다 누가 혹은 어떤 시스템이 피의자들을 풀어줬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그것이 당대 우리사회의 어두운 진실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이런 홍 감독의 진심을 보고 피해자인 조중필군의 어머니는 아들 사건에 대한 영화 제의에 눈물을 흘리며 수락했다. 억울한 아들의 죽음이 영화를 통해서나마 알려지고 행여나 다시 재판이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애초 저예산독립영화로 구상했던 ‘이태원 살인사건’은 점차 규모가 커져갔다. 홍 감독에게 빚을 진 마음이 컸다는 정진영이 박 검사 역으로 출연을 결정했고 청춘스타 장근석이 피의자 중 한 명인 피어슨 역을 맡게 됐다. 오광록, 고창석 등 충무로의 연기파 배우들이 합류했고 제작비도 처음 기획했던 것의 배 이상 확보할 수 있었다. 결국 예상치도 못했던 제작발표회를 거쳐 200여개관이 넘는 스크린에서 ‘이태원 살인사건’의 간판을 올리게 됐다. 이처럼 긴 사연이 ‘이태원 살인사건’이 있었기에 박 검사 역을 맡은 정진영은 “할리우드 스릴러 영화 같은 작품은 아니다”고 못을 박았다. 자칫 영화 제목에서 주는 어감 때문에 스릴러 영화의 감각적인 재미를 주는 작품으로 곡해될 것을 우려해서였다. 정진영의 말처럼 ‘이태원 살인사건’은 감독과 관객사이에 두뇌싸움이나 범인을 검거하는 과정에서의 긴박함이나 긴장감은 없다. 오히려 법정드라마처럼 사건의 사실적 재현과 전개 과정에 초점을 맞췄다. 야구로 치자면 정통파 투수가 투스트라이크 쓰리볼 상황에서 타자의 헛스윙을 유도하는 변화구 보다 칠 태면 쳐보라는 식으로 스트라이크 존을 향해 꽂는 묵직한 직구 같은 느낌의 영화다. 홍 감독은 그렇게 영화를 만들어야지만 고인의 넋을 이용하지 않는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극적인 재미를 위해 가공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지만 사건 자체를 보다 객관적으로 관객들에게 전달시키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다. 저예산독립영화를 표방(?)했던 ‘이태원 살인사건’이 상업적으로 주목을 받고 홍 감독의 작품 중 가장 큰 규모로 개봉하게 된 요인 중에 하나는 장근석이 주인공 피어슨으로 출연한 덕이 크다. 장근석은 20대 초반 자신의 영화 인생에 하나의 분기점이 될 만한 캐릭터를 선택했고 스스로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해냈다. 9일 개봉 15세 관람가.
2009.09.12 I 김용운 기자
  • (김前대통령서거)3김 시대의 물리적 종언
  • [이데일리 김세형기자]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우리나라 정치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3김` 시대도 `물리적 종언`을 맞게 됐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정착에 이들이 기여한 것에 대해 누구도 이견을 달 수 없지만 이들은 `지역 할거주의`라는 고질적인 병폐도 양산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집권을 계기로 이들은 모두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고, 3김 시대는 공식적으로 마감했다. 하지만 이들이 남겨 놓은 지역주의가 여전히 한국 정치판에 어슬렁거리고 있다. 호남권의 맹주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정치권에 `지역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 문화가 형성될 지 관심이다. ◇ 3김의 태동..`서울의 봄` 김대중 전 대통령(1924년생), 김영삼 전 대통령(1927년생),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1926년생)를 한묶음으로 일컫는 `3김`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은 통상 지난 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직후로 볼 수 있다. 그전까지 이들이 정치 일면에 없었던 것은 아니나 박정희 대통령의 피격당하면서 이들이 권력의 최상층에 접근할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늘상 야권의 대표주자들이었다. 이승만 정권 붕괴와 5·16 군사 쿠데타로 약화된 해방 이후의 정치권을 대체하는 신세대의 기수들이었다. 둘은 박정희 정권에 맞서 그들의 경력을 쌓아갔고, 야권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서로 맞붙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의 독재가 심해질 때 핍박을 받았던 것 역시 같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살해 위험에 처하기도 했고 김영삼 전 대통령 역시 박정희 정권 말기에 국회의원직에서 영구제명되기도 했다. 이에 비해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는 군사 쿠데타에 가담해 정치권에 등장한 인물로, 초대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것을 필두로 박정희 정권에서 국무총리를 두 차례 지냈을 정도로 실력자였다. 그러나 항상 2인자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다.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총격에 의해 사망하면서 대한민국은 정권에 공백이 생겼다. 이른바 `서울의 봄`이다. 이같은 공백기에 부상한 것이 이들 3김이다.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은 야권의 대표주자로서, 김종필 전 총재는 전 정권의 지분 보유자격이 감안됐다. 작고한 종교계 지도자 강원용 목사의 중재 아래 이들 3김의 권력 분점이 막바지에 이르기도 했다. 하지만 서로 권리를 주장하면서 시간이 흐르는 사이 전두환 전 대통령의 신군부가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해 버렸다. 이때 3김이 권력 분점에 합의했다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시대가 좀 더 빨리 왔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있는 게 사실이다. 전두환 정권 시절, 이들 3김은 정계 은퇴와 가택연금 등 정권의 탄압을 받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다만 이때는 지역주의 색채가 그리 강하지 않았다는 것이 통설이다. ◇ 민주화와 함께 열린 3김 시대..`지역분할과 야합` 87년 정권 막바지에 이른 전두환 정권은 장기집권을 시도하고 국민들은 피로 얼룩진 6월 항쟁으로 결국 직선제 개헌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퇴진을 이끌어 내게 된다. 이는 3김 시대가 꽃을 피우는 계기가 됐다. 정치 활동 금지가 풀린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손을 잡고 통일민주당을 창당해 정권 창출에 나섰고, 김종필 전 총재도 미국에서 귀국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한 뒤 정계에 복귀했다. 이들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후계자격인 노태우 민주정의당 후보와 그해말 대통령 선거에서 대결하게 된다. 이때 대통령 당선에 가장 앞서 있던 것은 통일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다. 하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은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결국 노태우 전 대통령이 당선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때 평화민주당을 창당, 대통령 선거에 나섰는 데 이것이 결국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호남, 김영삼 전 대통령의 영남, 그리고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의 충청도 등 지역 할거주의가 본격화하는 계기가 됐다. 각자 후보마다 100만명 넘는 지지파를 동원해 여의도에서 유세를 가진 것은 지역 할거주의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집권은 했지만 민주화를 바라는 국민의 열망은 매우 강렬했다. 이후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소야대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민정당은 국정 안정을 위해 야권에 손을 내밀게 된다. 이것은 3당 야합으로 일컫어지는 1990년의 민정당, 통민당, 신민주공화당의 전격 합당으로 귀결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대표라는 직함을 얻었고, 김종필 전 총재는 내각제라는 꿈을 품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안정적 국정운영이라는 소득을 얻었다. 이때부터 분할과 야합이라는 부정적 평가도 얻었다. 서로 각기의 지역 기반을 갖고, 정권 획득에 전력하는 것으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92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당권 경쟁에서 승리한 김영삼 후보가 민자당 후보로 나온다. 영남과 충청권을 등에 업은 김영삼 후보는 호남을 기반으로 재차 출마한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의 꿈을 이루게 된다. 김대중 후보가 선거 패배 여파로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런던으로 갔지만 3김 시대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김종필 전 총재는 정권 창출에 기여한 공으로 김영삼 정부 초기 집권 민주자유당의 대표가 됐지만 결국 불화를 참지 못하고 1995년 2월 자유민주연합이라는 독자정당을 다시 창당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이를 전후해 정계에 복귀하면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여권과 김대중, 김종필의 야권이라는 3각 분할구도가 이뤄진다. 이때가 3김의 절정이랄 수도 있다. 97년 대선에서는 재차 합종연횡이 이뤄진다. 3당 합당시 야합이라고 극렬 비난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측과 김종필 전 자민련측이 일명 DJP연합 전선을 구축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후보로 내세운 것. 때마침 불어닥친 IMF 경제위기라는 시대 상황도 유리하게 돌아가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네번의 도전끝에 결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면서 3김도 한풀 꺾였다.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3년 퇴임하고 2004년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가 국회의원 선거 참패를 이유로 정계은퇴를 선언하면서 사실상 3김 시대는 막을 내렸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집권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영남권 출신의 호남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고, 스스로도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등을 제안하면서 3김 시대 종식에 앞장 서기도 했다. ◇ 김대중 서거..지역주의 끝나나노무현 정부시절 3김이 완전히 끝난 줄 판단했지만 3김의 지역주의 유산은 2007년 대선에서 고스란히 되살아 났다. 영남권을 기반으로한 박근혜 전 한나라당 최고위원이 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막판까지 접전을 벌이는가 하면 정계밖에 있던 이회창 자유선진당 후보가 충청권을 등에 업고 재차 정계에 들어 왔다. 집권 여당도 마찬가지였던 터라, 열린우리당은 전주 출신의 정동영 의원을 후보로 내세우면서 여전히 지역주의의 한계를 표출했다. 이명박 정권이 집권한 지 1년반으로 접어 들고 있지만 이런 지역주의는 여전한 모습이다. 지역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인물에, 그 인물이 현직에 있건 이선으로 후퇴해 있건 정치인들이 줄을 대는 양상이다. 이명박 대통령마저도 통합을 이야기하면서 지역 갈등을 척결대상으로 꼽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사실상 막을 내렸던 3김 시대는 이제 물리적으로도 종언을 맡게 됐다. 하지만 가장 손쉽게 지지세력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 `우리가 남이가`로 대표되는 지역주의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믿는 이들이 있는 이상, 지역주의 척결까지는 아직 멀기만 해 보인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은 90년 3당 합당을 계기로 완전히 등을 돌린 뒤 최근까지도 화해하지 못했다. 그러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직전 병상을 직접 찾아 화해를 모색했다. 이 둘의 화해가 양편으로 갈라섰던 대한민국의 갈등을 봉합하는 계기가 될 지 지켜볼 일이다.
2009.08.18 I 김세형 기자
(김前대통령서거)인동초 인생..결코 패배하지 않았던 삶
  • (김前대통령서거)인동초 인생..결코 패배하지 않았던 삶
  • [이데일리 이숙현기자] `인동초`. 김대중에 대한, 말하자면 비유라기보다 묘사다. 그는 한 때 (혹은 누군가에게는 영원히)`빨갱이`였다. 71년 신민당 대선 후보로 결정될 당시부터 심지어 1997년 대통령 당선 이후에도 이 진부한 색깔론은 언제든 `필요할 때마다` 살아나 그와 그 주변을 괴롭혔다. 사고를 가장한 암살 위협, 납치와 가택연금, 망명, 사형선고 그리고 4번의 대선 도전 끝 대통령 당선과 노벨평화상 수상에 이르기까지 단 한순간도 그는 `인간 김대중`일 수 없었다. 세상사 모든 것이 정치라지만 그는 유독 `정치인 김대중`으로 살아남아야 했다. 지나치게 뛰어난 사람에게 질투와 질시는 천형과 같은 법. 그가 짊어졌던 삶이 본인의 온전한 선택이었는지, 보이지 않는 운명의 강요였는지 눈 감아 버린 그만이 알 것이다. 그의 삶은 곧 영욕이자, 자체로 소설이었다. 김대중은 강원도 인제에서 3차례 국회의원에 도전했다. 모두 실패였다. 4수 끝에 1961년 보궐선거에서 당선됐지만 5·16쿠데타로 당선 이틀 만에 의원선서도 하지 못하고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45세이던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40대 기수론`을 앞세우며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당시 김대중 후보는 향토예비군 폐지, 노동자·자본가 공동위원회 구성, 비정치적 남북교류,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국 안전보장안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선거공약을 내걸고 박정희 후보와 맞섰다. 김대중은 과감한 공약과 호소력 있는 연설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으나 박정희에 95만 표 차이로 패배했다. 하지만 쿠테타 세력에 의한 온갖 부정선거 의혹 속에서도 김대중은 46%를 득표, 박정희 정권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 `사건`은 곧 김대중 수난사를 본격적으로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72년 유신이 선포되자 김대중은 일본으로 망명한다. 73년 8월에는 그 유명한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난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다시 동교동으로 돌아왔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가택 연금. 이제 투옥, 살해 위협, 연금과 감시는 그의 일상사가 된 듯 했다. ▲ `김대중 내란음모죄` 재판 장면1980년 초 `서울의 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한 이듬 해(1980년) 2월 사면복권된 김대중은 이 시기에 김영삼·김종필 등과 함께 정치활동 전면에 나섰다. 그러나 1979년 12·12사태로 군권을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령을 전국적으로 확대했다.  이때 김대중은 26명의 정치인들과 함께 또 다시 체포, 수감됐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시기를 감옥에서 보낸 그는 9월 계엄사령부 군법회의에서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주동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1981년 1월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았다. 이에 미국·일본·독일·프랑스 등을 중심으로 현지 교포들과 각국의 양심적 지식인·문화인·정치인들이 대거 그의 구명운동을 벌이자 군사정권은 그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한 데 이어 1982년 12월 미국 망명을 허용했다. 1985년 제12대 총선을 앞두고 미국에서 전격적으로 귀국한 그는 김영삼과 함께 급조한 신한민주당을 통해 당시 어용야당이던 민주한국당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부상하는 저력을 보였다. 이후 `대통령 직선제 개헌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한다. 87년 6월 민주항쟁의 물결이 전국을 휩쓸자 군사정권은 마침내 대통령 직선제 수용 등을 담은 `6·29선언`을 내놓았다. 형식적인 민주주의를 이끌어냈지만 그것을 내용적으로 실현할 민주화 세력의 통합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김대중은 1987년 12월로 예정된 제13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통합민주당 총재였던 김영삼과의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자 11월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대통령선거에 나섰다. 야당의 분열 속에 집권당인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의 승리는 예견된 일이었다. 동시에 민주화세력에게 적전 분열은 재앙을 의미했다. 대통령선거에 패한 후 야당분열에 대한 국민적 비난, 평화민주당 총재직 사퇴, 제13대 총선에서 제1야당으로 부상 그리고 1990년 `3당 합당`. 그의 정치인생 놓인 시련과 굴곡은 끝이 없어 보였다. ▲ 1985년 미국서 귀국 당시 모습그는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또 다시 출마한다. 그리고 패배. 이후 전격 정계은퇴 선언을 했으나 곧 95년 정치활동을 재개하며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다.  마침내 1997년 12월. 그는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도전해 성공을 거두었다. 4번째 도전 끝에 `준비된 대통령`으로서 첫 발을 내딛게 된 순간이자, 71년 대선 첫 도전 이후 26년만에 이룬 꿈이었다. 생전에 노무현은 김대중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그분은 그 시기에 가장 탁월한 정치인이었습니다. 지금 보면 완전한 정치인이라고 볼 수 없지만, 그 시기에 가장 탁월한 정치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 시대의 역사적 가치의 상징이었죠. 민주주의라는 역사적 가치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분을 평가할 때 그 점을 우리가 인정하고 시작해야 합니다. 칭찬을 하든, 비판을 하든 그 기본적인 전제를 먼저 우리가 인정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2009년 8월18일. 그는 떠났다. 온몸으로 세상과 부딪히며 스스로 역사를 만들어갔다. 그렇게 86년 인생을 쉼없이 살다갔다. 김대중의 죽음은 멀지 않은 우리의 과거, 통한의 역사를 돌아보게 한다. 2009년 5월 29일, 후배 대통령의 영정 앞에서 아이처럼 울던, 그리고 또다시 민주주의를 외치던 그의 빈 자리를 이제 누가,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좋든 싫든 그처럼 역사를 몸으로 웅변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는 이제 쉽지 않아 보인다. 수많은 현실적 패배 속에서도 결코 패배하지 않았던 한 `인간`을 다시 만나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그의 죽음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이유다. "다섯 번 죽을 고비를 넘겼고, 6년을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수십 년을 망명과 연금, 감시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 사이에 수많은 치욕과 고통도 있었고 수많은 유혹도 있었습니다. 신군부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죽는 것이 몹시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유혹을 뿌리쳤습니다. 역사는 결코 불의에게 편들지 않고, 역사를 믿는 사람에겐 패배가 없습니다." (2003년 2월 24일, 대통령 퇴임사)
2009.08.18 I 이숙현 기자
  • 6·10 범국민대회… 수만명 서울광장 운집
  • [노컷뉴스 제공] 경찰의 불허 통보에도 불구하고 6월 민주항쟁 22주년을 기념하는 범국민대회가 예정대로 10일 서울광장에서 시작됐다. 이날 저녁부터 시민들이 불어나 범국민대회 시작을 전후로 광장이 거의 메워졌으며, 자체 집계로 저녁 8시를 기준으로 대략 4만여명의 시민들이 모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범국민대회 1부는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씨와 박종철 열사 아버지 박정기 씨의 여는 말로 시작됐다. 이어 정세균, 강기갑, 문국현, 노회찬 의원 등 야4당 대표 연설과 함께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의 결의문 낭독이 있을 예정이다. 준비위는 결의문에서 “국민은 전면적 국정기조 전환을 염원하고 있다”며 "대통령의 사과와 검경을 앞세운 강압통치 중단, 4대강 개발사업과 언론 악법 등 반민주, 반민생 악법 추진 중단 등을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2부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및 민주회복 문화제가 이어진다. 배우 권해효 씨의 사회로 진행되는 2부 공연에는 노 전 대통령 추모 영상과 함께 노래를 찾는 사람들 등 문화 공연이 진행될 예정이다. 경찰은 80개 중대 6천여명의 전,의경을 광장 곳곳에 배치해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있으며, 밤늦게는 최대 150개 중대 만 2천여명의 경력을 투입할 계획이다. 특히 경찰은 대회가 강경하게 이어질 경우 차벽을 설치하거나 대규모 경력을 동원해 서울광장을 에워싸는 인의장막을 칠 계획이어서 양측간 충돌이 우려되고 있다.
  • 李대통령 "폭력 행사하는 모습이 민주주의 왜곡"
  • [이데일리 김세형기자] 이명박 대통령이 10일 "법을 위반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이 우리가 애써 이룩한 민주주의를 왜곡하고 있다"며 불법 폭력시위에 대해 우려의 뜻을 표시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6·10 민주항쟁 22주년 기념식에서 이달곤 행정안전부장관이 대독한 기념사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이 대통령은 "22년전 오늘 전국 각지에서는 한 목소리로 `호헌철폐`와 `직선제 개헌`을 외쳤고 마침내 위대한 우리 국민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민주화의 새 역사를 창조해냈다"며 "2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누구도 되돌릴 수 없을 만큼 확고하게 뿌리 내렸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그러나 "민주주의 제도적, 외형적 틀은 갖추어져 있지만 운용과 의식은 아직도 미흡한 부분이 많다"며 "민주주의가 열어놓은 정치공간에 실용보다 이념, 그리고 집단 이기주의가 앞서는 일들이 종종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통령은 특히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법을 어기고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도 우리가 애써 이룩한 민주주의를 왜곡하고 있다"며 "이제 우리는 민주주의를 더욱 깊게 이해하고 성숙한 민주주의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대통령은 그러면서 "성숙한 민주주의는 우리 사회 모든 곳에서 독선적인 주장이 아니라 개방적인 토론이, 극단적인 투쟁이 아니라 합리적인 대화가 존중받는 것"이라며 또 "성숙한 민주주의는 성숙한 시민이 자율과 절제, 토론과 타협을 통해 만들어 가는 위대한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대통령은 아울러 "민주주의가 사회갈등과 분열보다는 사회통합과 단합을 이루는 기제가 되도록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2009.06.10 I 김세형 기자
  • "대통령은 사과하라" 시국선언 교수 1천명 넘어섰다
  • [노컷뉴스 제공] 상아탑으로 번진 시국선언의 열기가 시간이 지날수록 확산되고 있다. 지난 3일 서울대 교수 124여명이 현 정부의 기조를 비판하는 시국선언의 첫 테이프를 끊은지 5일만에 17개 대학 1163명의 교수들이 시국선언문에 이름을 올렸다. ◈ 17개 대학 1,163명 선언, 이 대통령 모교 고려대 가장 많은 인원 기록지금까지 시국선언에 동참한 대학교는 서울대 (124명), 고려대 (131명), 중앙대 (68명), 서강대 (45명), 성균관대 (35명), 신라대 (39명), 동아대 (56명), 경상대 (66명), 경북대, 영남대, 계명대, 대구대, 대구보건대 연합 (309명), 충북대 (80명), 한신대 (88명), 우석대 (85명), 인천대 (37명) 등 17개 대학 1,163명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모교인 고려대 교수들도 8일 시국선언 대열에 동참했다. 고려대 교수 131명은 이날 시국선언문을 통해 "정부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한 추모 행렬에서 나타난 민의를 헤아리기 보다는 오만한 권력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고 우려하며 국정쇄신을 요구했다.특히 고려대는 지금까지 학교단위에서는 가장 많은 교수 참석인원을 기록하기도 했다. 성균관대 교수 35명도 이날 본교 호암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통령의 공식 사과를 요구했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성균관대 교수들은 “검찰의 불법적인 표적 수사 행태, 추모에 대한 경찰의 폭력적 대응과 몰상식한 언행은 과거 군사정권의 악몽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면서 정부를 강하게 질타했다. 교수들은 이어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함과 동시에 정부가 표현과 집회의 자유를 억압하지 말고, 언론 장악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는 9일에도 연세대를 비롯해 건국대, 부산대, 전남대 등 전국의 각 대학 교수들이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기로 해 6월 민주항쟁 기념일인 10일을 전후로 이같은 시국선언의 물결이 최고조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민주화의 고비마다 사회 정의를 외치면서 역사의 전환점이 됐던 교수들의 시국선언이 다시 한번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현 정부의 운영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 문인들도 시국선언 나서…보수 성향 단체 · 교수들 맞불이에 동참해 시인, 소설가, 평론가 등 문인들도 시국선언에 나선다.188명의 작가들은 9일 오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현 시국에 대한 작가들의 목소리를 담은 '이것은 사람의 말-6ㆍ9 작가선언'을 발표할 예정이다. 이들은 이날 선언문을 통해 "민주주의의 일반 원리와 보편 가치를 무자비하게 짓밟으면서 달려온 이명박 정권 1년은 이토록 참담하다."고 비판한 후 개별 작가의 목소리를 담은 '한줄 선언'을 낭독할 예정이다. 한편 보수 성향의 단체와 교수들을 중심으로 릴레이 시국선언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보수 단체측에서는 "교수들이 시국선언을 통해 반정부 분위기를 정치적으로 선동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9일 오전에는 서강대 안세영 교수와 서울대 박효종 교수, 서울시립대 윤창현 교수 등 보수성향의 교수들이 최근의 릴레이식 시국선언을 우려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하며, 뉴라이트전국연합 등 보수진영 시민사회단체들도 이날 오후 국가위기극복을 위한 '맞불' 시국선언을 할 예정이다.
  • (주간전망대)기준금리 동결 유력..`뜨거운 6월` 열기는↑
  • [이데일리 정원석기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와 그로 인한 조문 정국과 영결식이 마무리됐지만, 정치·사회적 혼란은 더욱 커지고 있다. 북한의 핵실험으로 불거진 남북간의 갈등은 연이은 미사실 실험과 서해안에서의 군사적 군사적 충돌의 우려, 미국과 UN의 대북 제재안 마련 움직임으로 이어지면서 한층 더 높아지고 있다. 경제부문에서도 각종 지표가 개선되고 있기는 하지만, 경기회복 자체는 지지부진하다. 정부 부양정책에 힘입어 1분기 국내총생산(GDP)이 플러스로 전환했지만, 국민총소득(GNI)는 3분기 연속 마이너스를 이어간 게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다음주에는 한국은행이 6월 금융통화위원회를 열고 기준금리를 결정한다. 넉달 연속 동결기조를 이어갈 가능성이 크다. 한은이 경제상황을 어떻게 보는지를 종합적으로 나타난다. 금융위원회 등이 주도하는 기업 구조조정도 마무리 단계로 접어든다. ◇기준금리 넉달 연속 동결 전망.."경기·유동성 진단 확인하자" 오는 11일 한은 금통위는 넉달 연속 기준금리를 동결할 것으로 전망된다. 경기 회복기조가 아직 본격화되지 않았고, 시중 유동성 역시 증가세가 둔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가상승률 역시 지난 5월 2.7% 상승하는 데 그치며, 20개월만에 2%대로 접어들며 금리동결 결정을 뒷받침할 것으로 보인다. 금통위를 앞둔 10일 5월 중 금융시장 동향과 4월 중 통화 및 유동성 지표 동향이 발표될 예정이다. 금통위 하루 뒤인 오는 12일에는 1분기 자금순환 동향이 나온다. 과잉유동성 논란과 금융시장 상황에 대한 한은의 관점을 엿볼 수는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하반기 경제전망에 대한 관점도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성태 총재는 금통위 후 기자회견과 12일 한은 창립 59주년 기념사 등을 통해 경기에 대한 인식을 드러낼 것으로 기대된다. ◇ 대기업 구조조정 본격화..고용·은행 자본 확충 현황 개선 기대경기후행지표인 고용시장 동향이 11일 발표된다. 가팔랐던 고용 감소세가 주춤했던 전월의 분위기를 이어갈지 주목된다. 4월 취업자는 2352만4000명으로 1년전보다 18만8000명 줄어들면서 5개월 연속 감소세를 이어갔다. 하지만 3월의 감소폭인 19만5000명 보다는 다소나마 그 폭이 둔화됐다. 고용은 소비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향후 경기를 내다볼 수 있는 주요 이정표가 될 전망이다. 이번 주엔 개별 대기업에 대한 옥석 가리기 작업이 마무리되면서 대기업 구조조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전망이다. 금융당국은 금융권 신용공여액 500억원 이상 1422개 대기업을 대상으로 1차 신용위험평가를 실시, 이중 430개 대기업에 대해 세부 평가를 진행하고 있다. 금융권은 20개 안팎의 기업들이 워크아웃(C등급)이나 법정관리(D등급)으로 분류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9일엔 3월말 기준 국내 은행들의 국제결제은행(BIS) 비율이 공개된다. 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은행들이 위기에 대비하기 위해 자본 확충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국내 은행들의 BIS 기본자본비율은 크게 높아진 것으로 분석된다. ◇ `6·10 범국민 대회` 예고..개성공단 회담, 남북 긴장 완화 계기되나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극도의 경색국면으로 치닫고 있는 정치권의 움직임도 눈여겨봐야한다. 정치 사회적으로 이번 주는 한 고비가 될 전망이다. 서울대와 중앙대에서 시작된 교수들의 시국선언은 대구·경북 지역을 거쳐, 부산·경남지역과 연세대, 성균관대, 성공회대 등으로 확산되고 있다. 야당과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6.10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는 오는 10일 서울광장에서 `6월항쟁 계승-민주회복 범국민대회`를 열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최근 서울광장 봉쇄를 해제한 경찰은 대규모 시위 가능성이 있으면 다시 봉쇄하겠다고 밝힌 바 있어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 남북은 11일 개성공단 실무회담을 갖는다. 근로자 임금 인상과 토지사용료 조기 징수 등을 요구하고 있는 북측이 개성공단 재계약 조건을 구체적으로 제시할 것으로 관측된다. 이를 계기로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는 한반도 주변정세에 변화의 조짐이 나타날지 관심이다. 정치권에서는 미디어법, 비정규직법, 금융지주회사법 등 최대 쟁점 법안이 논의될 6월 임시국회 개원에 대한 합의가 이뤄질지 주목된다.
2009.06.07 I 정원석 기자
  • 한명숙 전 국무총리 영결식 조사 전문
  • [이데일리 이숙현기자] 다음은 29일 故 노무현 前대통령의 영결식에서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낭독한 조사의 전문이다.노무현 대통령님. 얼마나 긴 고뇌의 밤을 보내셨습니까? 얼마나 힘이 드셨으면, 자전거 뒤에 태우고 봉하의 논두렁을 달리셨던, 그 어여쁜 손녀들을 두고 떠나셨습니까?대통령님. 얼마나 외로우셨습니까? 떠안은 시대의 고역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새벽빛 선연한 그 외로운 길 홀로 가셨습니까?유난히 푸르던 오월의 그날, ‘원칙과 상식’ ‘개혁과 통합’의 한길을 달려온 님이 가시던 날, 우리들의 갈망도 갈 곳을 잃었습니다. 서러운 통곡과 목 메인 절규만이 남았습니다.어린 시절 대통령님은 봉화산에서 꿈을 키우셨습니다. 떨쳐내지 않으면 숨이 막힐 듯한 가난을 딛고 남다른 집념과 총명한 지혜로 불가능할 것 같던 꿈을 이루었습니다.님은 꿈을 이루기 위해 좌절과 시련을 온몸으로 사랑했습니다. 어려울수록 더욱 힘차게 세상에 도전했고, 꿈을 이룰 때마다 더욱 큰 겸손으로 세상을 만났습니다. 한없이 여린 마음씨와 차돌 같은 양심이 혹독한 강압의 시대에 인권변호사로 이끌었습니다.불의에 대한 분노와 정의를 향한 열정은 6월 항쟁의 민주투사로 만들었습니다.그렇게 삶을 살아온 님에게 ‘청문회 스타’라는 명예는 어쩌면 시대의 운명이었습니다.‘이의 있습니다!’ 3당 합당을 홀로 반대했던 이 한마디! 거기에 ‘원칙과 상식’의 정치가 있었고 ‘개혁과 통합’의 정치는 시작되었습니다.‘원칙과 상식’을 지킨 대가는 가혹했습니다. 거듭된 낙선으로 풍찬노숙의 야인 신세였지만, 님은 한 순간도 편한 길, 쉬운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노사모’ 그리고 ‘희망돼지저금통’ 그것은 분명 ‘바보 노무현’이 만들어낸 정치혁명이었습니다.노무현 대통령님. 님은 언제나 시대를 한 발이 아닌 두세 발을 앞서 가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너무나 영악할 뿐이었습니다.수많은 왜곡과 음해들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어렵다고 돌아가지 않았고 급하다고 건너뛰지 않았습니다.항상 멀리 보며 묵묵하게 역사의 길을 가셨습니다.반칙과 특권에 젖은 이 땅의 권력문화를 바꾸기 위해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았습니다. 화해와 통합의 미래를 위해 국가공권력으로 희생된 국민들의 한을 풀고 역사 앞에 사과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님이 대통령으로 계시는 동안, 대한민국에선 분명 국민이 대통령이었습니다.동반성장, 지방분권, 균형발전 정책으로 더불어 잘사는 따뜻한 사회라는 큰 꿈의 씨앗들을 뿌려놓았습니다.흔들림 없는 경제정책으로 주가 2천, 외환보유고 2,500억 달러 무역 6천억 달러,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열었습니다.군사분계선을 걸어 넘어 한반도 평화를 한 차원 높였고 균형외교로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해 냈습니다.컴퓨터를 자유자재로 쓰는 세계 첫 대통령으로 이 나라를 인터넷 강국, 지식정보화시대의 세계 속 리더국가로 자리 잡게 했습니다.이 땅에 창의와 표현, 상상력의 지평이 새롭게 열리고 아시아는 물론 아프리카까지 한류가 넘치는 문화르네상스 시대를 열었습니다.대통령님이 떠난 지금에 와서야 님이 재임했던 5년을 돌아보는 것이 왜 이리도 새삼 행복한 것일까요.열다섯 달 전, 청와대를 떠난 님은 작지만 새로운 꿈을 꾸셨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와 잘사는 농촌사회를 만드는 한 사람의 농민, ‘진보의 미래’를 개척하는 깨어있는 한 사람의 시민이 되겠다는 소중한 소망이었습니다.엄마 아빠 손을 잡고 봉하마을을 찾는 아이들의 초롱한 눈을 보며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뇌하고 또 고뇌했습니다.그러나 모진 세월과 험한 시절은 그 소박한 소망을 이룰 기회마저 허용치 않았습니다.자신의 문제에 대해선 한없이 엄격하고 강인했지만 주변의 아픔에 대해선 속절없이 약했던 님.‘여러분은 이제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는 글을 접하고서도 님을 지키지 못한 저희들의 무력함이 참으로 통탄스럽습니다.그래도 꿈을 키우던 어린 시절의 자연인으로 돌아가겠다는 마지막 꿈만큼은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그런데 어인 일입니까? 세상에 이런 일이 있습니까? 세상은 ‘인간 노무현’으로 살아갈 마지막 기회조차도 빼앗고 말았습니다.님은 남기신 마지막 글에서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최근 써놓으신 글에서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이 실패 이야기를 쓰는 것이 맞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이 말씀이 남아 있는 저희들을 더욱 슬프고 부끄럽게 만듭니다.대통령님. 님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설령 님의 말씀처럼 실패라 하더라도 이제 걱정하지 마십시오.이제 저희들이 님의 자취를 따라, 님의 꿈을 따라 대한민국의 꿈을 이루겠습니다. 그래서 님은 온 국민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아있는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대통령님. 생전에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분열로 반목하고 있는 우리를 화해와 통합으로 이끄시고 대결로 치닫고 있는 민족 간의 갈등을 평화로 이끌어주십시오.그리고 쓰러져가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다시금 꽃피우게 해주십시오.이제 우리는 대통령님을 떠나보냅니다. 대통령님이 언젠가 말씀하셨듯이, 다음 세상에서는 부디 대통령 하지 마십시오. 정치하지 마십시오. 또 다시 ‘바보 노무현’으로 살지 마십시오.그래서 다음 세상에서는 부디 더는 혼자 힘들어 하시는 일이 없기를, 더는 혼자 그 무거운 짐 안고 가시는 길이 없기를 빌고 또 빕니다.노무현 대통령님. 님을 놓아드리는 것으로 저희들의 속죄를 대신하겠습니다. 이제 마지막 가시는 길, 이승에서의 모든 것을 잊으시고, 저 높은 하늘로 훨훨 날아가십시오.대통령님 죄송합니다. 사랑합니다. 행복했습니다.대통령님 편안히 가십시오.2009년 5월 29일고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장의위원회 위원장 한명숙▶ 관련기사 ◀☞故 노무현 前대통령 영결식 엄수
2009.05.29 I 이숙현 기자
노무현 前대통령 출생에서 서거까지
  • 노무현 前대통령 출생에서 서거까지
  • [이데일리 정태선기자] 노무현(63세) 전 대통령은 1946년 8월 6일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진영대창초등학교(1959년)와 진영중학교(1963년), 부산상업고등학교(1966년)를 졸업했다.  1968년 3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했으며 군 제대 후 고향에서 부인 권양숙씨와 1973년 1월 결혼해 아들 건호씨와 딸 정연씨를 낳았다. 가정형편 등으로 대학 진학을 포기한 그는 9년간 독학해 1975년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1977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를 거쳐 이듬해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인권변호사에서 청문회스타로 ▶◀노무현 前 대통령변호사로 승률 90%를 넘나들었다는 그는 81년 용공조작 사건을 맡으면서 재야 운동에 뛰어들었고 6월항쟁 뒤 정치권에 영입됐다. 1981년 제5공화국 정권의 민주화 세력에 대한 용공조작 사건인 부림사건(釜林事件)의 변론을 맡으면서 이후 학생·노동자 등의 인권사건을 수임하는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1987년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아 6월항쟁에 앞장섰다. 같은 해 대우조선사건 때 이석규의 사인 규명 작업을 하다 구속돼 변호사 업무 정치 처분을 받기도 했다. 이후 1988년 부산 동구에서 제13대 국회의원(통일민주당)으로 당선됐으며, 제5공화국비리조사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날카로운 질문과 정연한 논리로 전국적 지명도를 가진, 이른바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바보 노무현` 청와대까지 1990년 3당 합당을 거부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 여로는 순탄치 않았다. 이후 부산에서 14대 총선(1992년), 부산광역시장 선거(1995년), 15대 총선(1996년)에 출마했지만 모두 낙선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당선 확률이 희박했지만 지역주의 타파를 내세워 연이어 출마해 주변 사람들로부터 `바보 노무현`으로 불렸다. 1997년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및 수도권 특별유세단 단장을 역임하고, 이듬해 서울 종로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2000년 종로구의 지역구를 포기한 채 '지역주의 타파'를 내걸고 부산에서 출마했지만 한나라당 돌풍에 휘말려 또 한 차례의 고배를 마셨다. 이후 새천년민주당 부산 북강서(을) 지구당 위원장을 거쳐 그해 8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해양수산부장관을 지냈다. 2002년 국민경선과 사퇴 압력, 단일화의 곡절 끝에 그는 후보로 선출됐고, 결국 제 16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낡은 정치 청산,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 행정수도의 충청권 이전' 등을 기치로 내걸고 선거전에 들어갔고,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물리쳤다.  당시 투표 하루 전날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의 일방적인 지지철회로 후보 단일화는 깨졌지만  `노사모`등 팬클럽의 지지를 얻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파란만장 `정치여로`..서거로 마감 그러나 대통령 임기 5년 역시 힘든 여정이었다. 아마추어라는 비아냥과 원칙은 지켰다는 평가가 공존했다. 취임 직후부터 거침없는 언사로 야당과 언론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임기중 대통령 선거중립의무 위반과 측근 비리 등에 대한 야당의 사과 요구에 대해 거절하자, 2004년 3월 국회는 본회의에서 193대 2로 탄핵소추를 의결했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 의결은 56년 헌정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가 5월에 열린 탄핵심판 선거공판에서 기각결정을 내려 탄핵사건은 종결됐다. 재임기간 중에는 안희정씨와 최도술씨 등 386세대로 불려진 측근들이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검찰에 구속수감됐다.  청와대에서 집사로 불렸던 정상문 전 총무비서관 역시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받은 3억원과 노 전 대통령 특수활동비 12억5000만원을 빼돌린 혐의로 구속수감됐다. 노 전 대통령은 퇴임이후 고향 김해에 머물며 나름의 활동 영역을 찾아가는 듯 했었다.  그러나 지난해 청와대 기록물 유출 사건에 이어 박연차 사건으로 검찰수사를 받으면서 최대 위기에 몰리게 됐다. 재임 중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600만 달러의 `포괄적 뇌물수수` 혐의를 받아 피의자 신분으로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에 이어 역대 대통령으로는 세 번째로 검찰에 출석했다. 이후 조만간 검찰의 재소환을 앞두고 23일 오전 6시50분께 경남 김해 봉하마을 자택 뒷산 언덕에서 투신, 뇌출혈상태에서 병원에 이송돼 심폐소생술을 받았지만 오전 9시30분 끝내 서거했다.
2009.05.23 I 정태선 기자
  • 김수환 추기경, 그 ''낮은 삶''을 돌아보다
  • [노컷뉴스 제공] 김수환(金壽煥) 스테파노 추기경이 16일 오후 6시 12분경 향년 87세의 나이로 선종(善終)했다.지난 2008년 10월 4일 강남 성모병원에 입원한 김 추기경은 그동안 노환으로 치료를 받아오다 이날 선종했다.김 추기경은 1922년 음력 윤5월 8일(양력 7월 2일) 대구 남산동 독실한 구교우 집안에서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조부 김보현 요한은 1868년 무진박해 때 충남 연산에서 체포돼 서울에서 순교했다. 천주교로 인해 몰락한 집안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김 추기경의 부친 김영석 요셉은 옹기장수로 전전하면서 가난하게 살았다. 김 추기경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선종하자 모친인 서중하 마르티나는 옹기와 포목행상을 하며 엄격하게 아이들을 키웠다.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온 김 추기경은 5년제 소신학교(小神學敎)인 동성상업학교(지금의 동성고등학교) 을조(乙組)에 입학했다가 '황국 신민으로서 그 소감을 쓰라'는 시험 문제에 "나는 황국 신민이 아님. 따라서 소감이 없음"이라고 썼다가 교장실에 불려가 크게 야단을 맞았다. 그 길로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오라는 대구대교구장을 명령을 받고 1941년 4월 도쿄 조치(上智)대학 유학길에 오른다.2차 세계대전으로 잠시 휴학했던 김 추기경은 해방 이후인 1947년 9월 혜화동 성신대학(지금의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 복학해 마치고 1951년 9월 15일 대구 계산동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됐다.1966년 4월 부산교구에서 분리, 새 교구로 설립된 마산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됐다. 1968년 5월29일 대주교 승품된 그는 제12대 서울대교구장에 올랐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69년 4월28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하여 추기경 서임됐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당시 주교였던 김 추기경은 1968년 2월 9일 한국 교회에서는 처음으로 사회적 발언에 나선다. 노동자들의 인간 존엄성을 되찾기 위해 나선 것이다. 가톨릭노동청년회(JOC; Jeunesse Ouvriere Chretienne)의 총재주교였던 그는 합법적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노동자를 불법 해고한 ‘강화 심도직물 사건’에 맞서 ‘사회 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주교단 공동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 발표 이후 정부가 사태 수습에 나서 6일 후 해고자들이 전원 복직되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됐지만 이후로도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생존권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절규는 끊이지 않았다. 그때마다 김 추기경은 그들을 큰 품으로 끌어안았다. 김 추기경과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큰 버팀목이 되는 순간이었다.김 추기경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파생된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기본권과 사회 정의가 지켜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1969년 3월 교황 바오로 6세가 발표한 새 추기경 명단에 김수환 대주교의 이름이 올랐다.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탄생한 것이다. 추기경 서임식은 1969년 4월 28일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열렸다. 당시 김 추기경의 나이는 47세로, 전 세계 추기경 134명 가운데 최연소였다. 교황을 보필하고 교황 선거권과 피선출권을 갖는 고위 성직자라는, 자리의 높고 낮음을 떠나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크다는 반증이었기에 한국 천주교회 2세기만의 큰 경사였다.김수환 추기경은 이후 30년 동안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을 역임했고, 주교회의 산하 여러 분과 위원장과 전국 단체들의 총재를 맡았으며, 1975년 6월 1일부터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했다. 또 1970년에는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67년 이후에는 한국 대표로서 여섯 차례에 걸쳐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1998년 5월 29일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직을 사임한다. 서울대교구장을 맡은 지 30년, 목자 생활 47년 만이었다.김수환 추기경은 선교사 없이 신앙이 전파된 한국 천주교회의 형성과 발전이 세계 천주교회 속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전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1984년 5월 6일에는 한국을 처음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과 103위 시성식을 여의도 광장에서 개최했다. 순교의 피로 전해져 내려온 한국 교회의 신앙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9년에도 한 번 더 방한해 제44차 세계 성체대회를 주례했다. 세계 성체대회를 계기로 1988년에 시작한 ‘한마음한몸운동’은 성체성사의 깊은 뜻을 삶으로 실천하자는 운동으로 지금까지 많은 결실을 맺었다. 김 추기경은 북한 교회와 동포를 항상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서울대교구의 관할 구역이 휴전선을 넘어서 황해도까지 이어진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었다. 미사 마침예식에서 주교는 오른손으로 세 번 십자표시를 하면서 신자들에게 강복하는데 김 추기경은 언제나 그 마지막 세 번째 십자표시를 마음에 품고 있는 북녘 형제들을 생각하면서 그었다고 한다. 통일에 대비하고 앞으로의 북한 선교를 위한 실질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1995년 ‘민족화해위원회’를 설립하게 된다. 같은 해 3월 7일 명동대성당에서 시작된 ‘민족화해미사’는 지금도 매주 화요일 오후 7시에 봉헌되고 있다. “이 세상 누구도 존중받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제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주목한 이유입니다. 그들을 위한 ‘우선적 사랑’에서 더 나아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사랑’으로 가야 합니다.”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편에 선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기까지 한 1974년 민청학련 사건, 1978년 동일방직노조 사건 등 김 추기경은 성탄·사순 메시지나 강연, 시국담화문 등을 통해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짚어내는 일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70-80년대를 지나는 동안 김 추기경은 우리사회 민주화 운동의 버팀목이자 잣대였다.1987년 6·10 민주항쟁 때도 명동성당 공권력 투입이라는 일촉즉발의 위기를 그런 믿음 하나로 막았다.“성당 안으로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우리를 다 넘어뜨리고 난 후에야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김수환 추기경이 종교를 넘어 이 땅의 버팀목으로 여겨지는 것은 그가 더 낮는 자리에 있는 이들을 한 없이 끌어안았기 때문이었다. [참조=김수환 추기경 홈페이지]
주제 없는 ''광주 비엔날레''엔 어떤 작품이?
  • 주제 없는 ''광주 비엔날레''엔 어떤 작품이?
  • [노컷뉴스 제공] 2008 광주 비엔날레는 전시주제가 없다. 지난 6회 때까지 매회 주제가 있었던 반면, 오쿠이 엔위저 예술총감독은 과감히 주제의틀을 벗어나 '관객이 전시를 보고 느끼는 바가 주제다'라고 밝혔다. 또 하나의 특징은 전체 전식 공간과 상관없이 모두 하나로 통합 · 연결된다는 점이다. 특히 5.18 민주화 운동과 프랑스 6.8 혁명 등 '시민항쟁'의 역사를 되새기는 의미로 9월 5일 금남로에서 펼쳐지는 거리 행렬 퍼포먼스는 이번 광주비엔날레가 '광주'의 사회 ·역사적 배경에 깊은 연결고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행사의 주 무대가 될 전시는 크게 3개 섹션으로 구성됐다. '길 위에서'는 2007년 하반기부터 올해 상반기 사이 세계 곳곳에서 전시됐던 전시들에 대한 보고다. '제안'은 한국과 미국, 동남아시아 ,북아프리카에서 활동하는 5명의 큐레이터들이 독자적인 전시기획과 프로젝트를 관객에서 제시한다. '끼워넣기'는 새롭고 독립적인 프로젝트나 작품들로, 올해 광주비엔날레를 위해 특별히 기획되거나 초대된 것이다. 오쿠이 총감독은 "이번 비엔날레는 현대예술의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잘 흘러가도록 구조를 만들어준 것이다"며 " 주제가 없다는 것은 더 많이 개방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높은 차원의 의미를 작품 관람 후에 느낄 것이다"고 말했다. 개막에 앞서 4일 내 · 외신 기자 초청 설명회를 통해 공개된 작품 중 몇점을 추려본다. 마이다다(민영순, 알랭 드수자, 압델라리 다로치) '마이다다'의 영상은 2001년 레바논에서 이스라엘로 국경을 넘어 돌을 던지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사진을 보여준다. 작품의 네모난 검은 통로 안으로 들어가면, 맞은편 투척기계에서 '퍽' 소리와 함께 투척물이 관객을 향해 날아든다. 이 영상은 사이드의 사진 이미지 그 자체를 보여준다기 보다는, 팔레스타인 출신의 지식인 '사이드'가 이스라엘에 던지는 경고의 메시지로 들린다.동시에 투척물이 내는 섬뜩한 소리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가하는 '폭력'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열망(마문호) 마문호 작가의 '열망'은 시장사람이나 작가가 어디에도 기대지 말고 천개, 만개의 꽃을 피우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마문호씨는 버려진 포장용 비닐 덮개를 재료삼아 서민들의 삶을 한뜸 한뜸 그려내고 있다. 마치 시골 할머니들이 넓은 밭의 김을 매듯이. 그는 "사람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치유해 주는 것이 예술이다"며 "시장 상인들이 '예술인도 우리와 똑같은 삶을 사는구나'하고 위안을 삼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공공미술의 한 형태인 '복덕방 프로젝트'가 획일적이고 자본에 얽매인 예술을 탈피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네 명의 음악가(요하힘 숀펠트) 제 1전시관 요하임 숀펠트의 '네명의 음악가'는 소와 암사자, 독수리, 공작 같은 아프리카를 상싱하는 네 동물 박제가 역삼각형으로 쌓여 있는 작품이다. 이는 고전동화 '브레멘 음악대'를 살짝 비틀어 재현한 것이다. 특이한 것은 실물의 브라스밴드가작품 옆에서 마치 네 마리의 동물이 음악을 연주하듯 음악을 연주한다는 점이다. 전남대학교 학생 5명은 화,목,토요일 오전 11시부터 1시간동안 작품과 사운드를 일치시킨다. 작가는 동물의 모습과 음악이 함께 될 때 작품이 비로소 완성된다고 했으니 제대로 느끼려면 이 시간을 맞출 것을 권한다.
김아중 '미녀'에서 사격선수로...영화 '29년' 캐스팅
  • 김아중 '미녀'에서 사격선수로...영화 '29년' 캐스팅
  • ▲ 김아중[이데일리 SPN 김용운기자] 배우 김아중이 강풀의 인터넷 연재만화 ‘26년’을 원작으로 한 영화 ‘29년’(감독 이해영, 제작 청어람)에 여자주인공 미진 역으로 캐스팅 됐다. 김아중은 2007년 전국 662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 ‘미녀는 괴로워’ 이후 차기작을 고심해 오다 ‘천하장사 마돈나’의 공동연출이었던 이해영 감독의 ‘29년’을 통해 스크린에 복귀하게 됐다. 김아중은 ‘29년’에서 냉철한 사격선수 미진 역을 맡아 이전과는 다른 여성 캐릭터로 연기의 폭을 한 단계 넓힐 예정이다. 영화 ‘29년’은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원작인 ‘26년’은 인터넷 연재당시 큰 화제가 됐다. 당시 광주시민 학살 책임자에 대한 복수가 주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김아중 외에 ‘29년’에는 남자 주인공 진배 역으로 류승범이 캐스팅 됐으며 진구, 한상진 등 젊은 배우들 외에 변희봉, 천호진, 주진모, 기주봉 등 중견배우들이 영화 속 주요 인물들로 캐스팅 됐다. ‘29년’은 9월부터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간다. ▶ 관련기사 ◀☞[포토]김아중, '제가 결혼식에 빠질 수 없죠~'☞[포토]김아중-최기환 아나, '대종상 사회 맡았어요'☞김아중이 느끼는 '감정' 책으로 출간...대학교수와 공동집필☞[커플대세③]가상커플이 더 효과적...김아중 임성언, 커플마케팅 수혜☞대종상 홍보대사 위촉 소감, 안성기 '연륜', 김아중 '재치'
2008.08.29 I 김용운 기자
  • (전문)이명박 대통령 8.15 경축사
  • [이데일리 이진우기자] “위대한 국민, 새로운 꿈 ” □ 위대한 국민, 기적의 역사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재외동포와 국가유공자, 그리고 내외귀빈 여러분! 60년 전 오늘, 바로 이 자리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되었습니다.5천년 한민족의 역사가 임시정부와 광복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계승되는 순간이었습니다.그러나 한 때 이 자리에는 동족상잔으로 붉은 깃발이 올라가기도 했습니다.용맹한 우리 국군이 태극기를 다시 꽂았지만 수백만의 목숨이 스러지고 국토는 폐허가 되었습니다. 어느 참전 장군은 “이 나라는 백년이 지나도 복구되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하지만 우리는 일어섰습니다.경제규모는 그 때보다 750배나 커졌고 1인당 소득도 300배 넘게 늘어났습니다.우리의 발전은 경제에 그치지 않았습니다.4.19 혁명과 5.18 민주화운동, 6.10 항쟁을 거치며 인권과 민주주의는 굳건히 뿌리를 내렸습니다. 올림픽을 치르고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루며 유엔 사무총장까지 배출하였습니다.비록 시련과 굴절은 있었지만 우리는 줄곧 전진해 왔습니다.저는 오늘 분명히 말하고자 합니다. 대한민국 건국 60년은 ‘성공의 역사’였습니다.`발전의 역사` 였습니다.`기적의 역사` 였습니다. 위대한 국민 여러분!‘기적의 역사’는 국민 여러분이 모두 함께 써내려간 것입니다.그 주인공은 바로 국민 여러분입니다.조국의 광복을 위해 목숨을 던진 순국선열들이 계셨습니다.6.25전쟁에서 장렬히 산화한 수많은 무명용사들이 있었습니다. 이 분들이 없었다면, 자유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입니다. 일자리를 찾아 이역만리에서 고생한 간호사와 광부가 있었습니다.동생의 학비를 대기 위해 밤새 재봉틀을 돌리던 우리의 누이가 있었습니다.열사의 땅에서 비지땀을 흘린 산업역군들이 있었습니다. 자식교육을 위해 손발이 닳고 허리가 휘어도 내색 않던 우리의 부모님이 있었습니다. 이 분들이 없었다면, 한강의 기적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불의와 독재에 맞서 싸운 수많은 학생과 시민, 선거 때마다 한 표로 선거혁명을 이룬 유권자들,이 분들이 없었다면, 민주화의 길은 아직도 멀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위기 속에서 단합했고 시련을 겪을수록 더 강해졌습니다.금융위기에 장롱 속 금붙이를 선뜻 내놓은 서민들, 기름으로 뒤덮인 태안 바닷가에 내 일처럼 뛰어온 자원봉사자들. 여러분이 아니었으면 오늘은 없었을 것입니다.기적의 역사를 남들은 신화라고 하지만, 그것은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의 산물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위대한 국민 여러분!저는 국민 여러분이 참으로 자랑스럽습니다.나라의 회갑을 맞은 오늘, 우리 선조께 감사의 박수를 보냅시다.우리 모두에게 긍지와 자부심의 박수를 보냅시다.우리 후손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냅시다.저는 이 역사가 기록되고 새롭게 이어질 수 있도록 ‘현대사 박물관’을 짓겠습니다. 광화문 앞에서 숭례문까지 거리를 ‘국가의 얼굴’로 가꾸어 우리의 자긍심을 높이고 미래를 여는 새로운 원동력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자유를 향한 여정자랑스러운 국민 여러분,저는 건국 60년을 맞아 국가의 독립과 영토를 보전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발전시켜 국민의 복리를 증진하라는 헌법의 명령을 엄숙히 받아들이며 그 책무를 다할 것을 다시 한 번 다짐합니다.역사는 구경하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사람들의 것입니다.자유는 결코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건국 60년 우리는, <자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자유를 위협하는 모든 것들과 당당히 싸워왔습니다.경제적 자유를 얻기 위해 빈곤과 싸웠습니다.정치적 자유를 얻기 위해 억압과 독재와 싸웠습니다. 사회적 자유를 얻기 위해 차별과 싸웠습니다.그리고 문화적 자유를 얻기 위해 편견과 싸웠습니다.자유는 우리가 숨 쉬는 공기와 같습니다. 자유를 향한 우리의 여정은 인류 보편의 가치를 구현하고 있기에 더욱 값진 것입니다.우리가 추구하는 자유의 가치는 이제 더 넓고 더 깊어져야 합니다.자유는 자율과 창의, 책임과 신뢰, 배려와 협력 속에서만 뿌리를 내릴 수 있습니다. 자유는 행복한 가족과 따뜻한 공동체 없이는 꽃 피울 수 없습니다.자유는 폭넓은 자아실현의 기회가 없이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건국 60년이 기본적 자유를 얻는 시간이었다면, 앞으로 60년은 성숙한 자유를 구현하는 시간이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대한민국의 건국은 완성될 것입니다.□ 새로운 60년을 열며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이제 새로운 60년이 열립니다.‘성숙한 자유’의 시대가 열립니다.우리 모두가 열망하는 선진화의 문이 활짝 열립니다.우리가 꿈꾸는 선진일류국가는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발전이 조화를 이루는 나라입니다.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성숙이 균형을 이루는 나라입니다.‘잘사는 국민’, ‘따뜻한 사회’, ‘강한 나라’입니다.인류의 모범이 되고 세계로부터 존경받는 나라입니다.선진일류국가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기본>부터 다시 돌아보아야 합니다.기본이 충실하지 않으면 사상누각일 뿐입니다. 압축 고도성장 과정에서 우리가 소홀히 한 것, 우리가 놓친 것들을 다지고 채워야 합니다.저는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안전>부터 확고히 하겠습니다. 우리 사회의 안전 수준은 선진국과 큰 격차를 보이고 있습니다.저는 식품안전만큼은 반드시 확보하겠습니다.국민들이 먹거리로 불안해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어린이와 부녀자가 폭행과 납치의 두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습니다.국민 개개인을 지키는 ‘인간 안보’는 ‘국가 안보’ 못지않게 중요합니다.일상생활과 산업·교통 등 사회전반에 걸쳐 대한민국을 안전 선진국으로 만들겠습니다.우리 사회의 <신뢰>도 선진국 수준으로 올려놓아야 합니다.개인 간의 신뢰, 법질서의 준수, 정부의 투명성, 윤리경영과 노사관계, 이 모든 분야에서 한국은 현재 OECD 최저 수준입니다.신뢰가 없으면 갈등이 깊어지고 통합은 멀어집니다. 신뢰가 없으면 규제가 많아지고 거래비용이 높아집니다.그래서 신뢰는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이 귀한 사회자본, 정신자본입니다.<법치>도 확고히 하겠습니다.지키기 어려운 법령은 지킬 수 있도록 고치고, 합의된 법과 원칙은 반드시 지켜지도록 하겠습니다. 정부부터 투명성을 높여나가겠습니다.사회지도층부터 솔선수범하는 풍토를 만들겠습니다.법을 어기는 행위에 대해서는 저를 포함해 누구에게도 관용이란 있을 수 없음을 실천으로 보이겠습니다. 건국 60주년의 새로운 출발과 국민 통합을 위해 사면을 단행했습니다만, 이제 제 임기 동안 일어나는 비리와 부정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지 않을 것입니다. □ 새로운 60년의 비전: 저탄소 녹색성장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지금 우리 경제는 에너지 위기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양극화와 일자리 부족, 민생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습니다.이대로 주저앉을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커지고 있습니다. 이를 돌파하고 선진화의 문턱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더욱 창의적인 발상과 대담한 결단이 필요합니다.지금 우리는 문명의 변화를 보고 있습니다. 세계는 농업혁명, 산업혁명, 정보혁명을 거쳐 환경혁명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습니다.나무와 석탄과 석유의 시대를 지나 새로운 에너지의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우리에게 이 같은 변화는 위기인 동시에 기회입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저력을 발휘해 왔습니다.1차 석유파동은 해외건설 진출과 산업고도화의 계기로 삼았습니다.2차 석유파동은 안정 속의 성장과 대외개방의 촉매로 만들었습니다.최근의 고유가 사태도 우리 경제체질을 바꾸고 신성장동력을 창출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대한민국 건국 60년을 맞는 오늘, 저는 ‘저탄소 녹색성장’을 새로운 비전의 축으로 제시하고자 합니다.녹색성장은 온실가스와 환경오염을 줄이는 지속 가능한 성장입니다.녹색 기술과 청정 에너지로 신성장동력과 일자리를 창출하는 신국가발전 패러다임 입니다.녹색기술은 정보통신기술, 생명공학기술, 나노기술, 문화산업기술을 아우르면서도 이를 뛰어 넘습니다.녹색기술은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 ‘일자리 없는 성장’의 문제를 치유할 것입니다.재생에너지 산업은 기존 산업에 비해 몇 배나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것입니다.정보화시대에는 부의 격차가 벌어졌지만 녹색성장시대에는 그 격차가 줄어들 것입니다.녹색성장은 한강의 기적에 이어 한반도의 기적을 만들 미래 전략입니다.우리가 처음 자동차를 만들 때 선진국과의 기술격차는 50년 이상이었습니다. 반도체는 20년 이상이었습니다.그러나 지금은 자동차 세계 5위, 반도체 세계 1위, 조선 1위 이렇게 기술국가로 성장했습니다. 우리가 먼저 결단하고 행동에 나선다면 녹색성장을 이끌고 새로운 문명을 주도할 수 있습니다.저는 이 녹색성장을 통해 다음 세대가 10년, 20년 먹고 살 거리를 만들어내겠습니다.□ 에너지 패러다임을 바꿀 총력투자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에너지 위기를 극복하고 녹색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우선 에너지 안보를 확고히 다지겠습니다.5% 남짓한 에너지 자주개발률을 임기 중에 18%, 2050년에는 50% 이상으로 끌어올려 에너지 독립국의 꿈을 실현하겠습니다. 자원의 보고인 북극해와 남극에 대한 탐사와 연구도 적극 추진하겠습니다.우리 민족이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는 진취적이고 창조적인 DNA를 가졌음을 안팎으로 알리겠습니다.신재생 에너지 사용비율을 현재의 2%에서 2030년에는 11% 이상, 2050년에는 20% 이상으로 높이도록 총력투자에 나서겠습니다. 녹색기술 연구개발 투자를 두 배 이상 확대하여, 2020년이면 3천조 원에 달할 녹색기술 시장의 선도국이 되겠습니다.새만금을 비롯해 국토 곳곳이 태양과 바람, 꽃과 바다 에너지가 만개하는 신천지가 될 것입니다.집집마다 신재생에너지를 쓸 수 있도록 ‘그린홈’ 백만호 프로젝트를 전개하겠습니다.LED와 무공해석탄과 같은 새로운 그린 에너지 기술도 개발하겠습니다.아울러 친환경 고효율 ‘그린 카’를 신성장 동력산업으로 중점 육성하겠습니다. 임기 중에 세계 4대 ‘그린 카’ 강국으로 도약시키겠습니다.기후변화종합대책도 9월 중에 마련하여, 올해를 저탄소사회로 가는 원년이 되도록 하겠습니다.돌이 없어서 석기시대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석유시대도 석유가 없어서 끝나지는 않을 것입니다.설령 앞으로 유가가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과도한 석유의존시대와 결별해야 합니다.비록 탄소시대에는 뒤졌지만 다가올 수소시대에는 앞서 나가야 합니다. 그 길은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단절의 고통과 불편도 따를 것입니다.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를 앞당겼듯이 대담하고 신속하게 나아간다면, 반드시 녹색강국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삶의 질 선진화와 생활공감 정책사랑하는 국민 여러분!고령화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거대한 도전입니다. 1948년, 우리의 평균 수명은 50세에 미치지 못했습니다.그때는 생존이 문제였습니다.지금 우리의 평균기대수명은 80세에 달합니다.생애는 점점 더 길어지고 있습니다.이제 생존이 아니라 삶의 질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일과 교육과 여가를 통합할 수 있는 새로운 복지 모델을 만들어야 합니다.고령 인구도 활발히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새로운 일자리 모델을 설계해야 합니다. ‘개인의 행복’을 정책의 중심에 두는 국가 경영을 해 나가겠습니다.이를 위해 교육과 문화, 복지 분야의 혁신을 서둘러야 합니다.저는, 대한민국에 태어나 사는 것이 큰 행운이 되도록, 반드시 만들어 나가겠습니다.정부는 고령화 사회에 근본적으로 대응해 나갈 것입니다. 이와 함께 민생과 직결되는 작지만 가치 있는 ‘생활공감정책’을 대폭 발굴하고 실행할 것입니다.소득이 적더라도 생활하는 데 불편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가난 때문에 공부 못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겠습니다.이미 새 정부 들어 빈곤층 자녀에게는 대학 등록금을 대폭 지원하고 있습니다. 치매 중풍 환자는 국가가 책임져서 자식이 못하는 효도를 국가가 대신하도록 하겠습니다.‘장애인 정책발전 5개년계획’을 통해서 장애인이 불편없이 생활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마음놓고 아이를 낳고 기를 수 있도록 보육만큼은 국가가 책임지도록 하겠습니다.집 근처에서 편리하게 이용할 있는 문화시설과 체육시설이 촘촘히 들어서도록 할 것입니다.국민 생활의 불편을 가져오는 각종 규제는 신속히 풀겠습니다.모든 국민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 수 있는, 살맛나는 나라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착실히 전진할 것입니다.국민성공시대를 넘어서 국민행복시대를 열어나가겠습니다.존경하는 국민 여러분!한국인이 세계에서 존중받도록 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합니다.대한민국의 국가브랜드 가치는 우리 경제력의 30 퍼센트 대에 그치고 있습니다. 미국과 일본의 수십분의 1에 불과합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국가이지만 외국인들은 한국 하면, 노사분규와 거리시위를 먼저 떠올립니다. 우리가 선진국을 원한다면 우리의 이미지, 우리의 평판도 획기적으로 높여야 합니다. 저는 조만간 대통령 직속으로 국가브랜드위원회를 설치하겠습니다. 임기 중에 한국의 국가브랜드 가치를 선진국 수준으로 올려놓겠습니다. 이제 우리도 국제사회에서 친구를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공적개발원조(ODA)를 우리 위상에 맞게 늘리고 평화유지군 활동에도 적극 참여할 것입니다.우리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소중한 발전의 경험을 `글로벌 코리아 모델`로 승화시켜 세계와 공유해 나가겠습니다.십만명의 우리 젊은이들을 세계 곳곳에 보내 일하고 배우며 봉사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7백만 재외동포와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도록 지원하겠습니다. 아울러 백만 외국인 시대를 맞아 전 세계의 인재들이 한국에서 일하고 생활할 수 있도록 출입국관리와 이주정책을 개선해 나가겠습니다.비록 땅은 좁지만 마음은 넓은 나라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세계로 뻗어가는 통일 한국의 꿈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새로운 60년을 여는 오늘,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꿈이 있습니다.남과 북 8천만 겨레가 하나 되어 세계로 뻗어나가는 꿈입니다.북한이 국제사회의 흐름에 동참하고 나아가 남과 북이 하나가 되면 우리는 유라시아-태평양 시대의 중심에 설 수 있습니다. 미국을 포함한 환태평양권은 세계 총생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세계 인구의 과반이 몰려있는 유라시아는 세계 총생산의 3분의 1, 세계 무역의 절반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유라시아-태평양 시대가 활짝 열리고 있습니다. 남북한이 통일되면, 해양과 대륙이 연결되어 한반도는 닫힌 공간에서 열린 공간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바닷길, 땅길, 그리고 하늘길로 유라시아와 태평양을 잇는 번영의 관문이 될 것입니다.부산에서 화물을 싣고 대륙횡단철도를 따라 중앙아시아, 서유럽까지 갈 수 있습니다. 해양시대와 대륙시대를 동시에 열면서 통일한국은 세계중심국가로 도약할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그리고 북한 동포 여러분!저는 그 꿈을 8천만 겨레와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다른 길이 있다 하더라도 북한을 우회하거나 뛰어넘고 싶지 않습니다.남과 북 모두가 함께 잘사는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평화가 정착되어야 합니다. 불신과 갈등의 원천이 되는 핵무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그 자리를 상생과 공영의 기회로 채워 나가야 합니다.저는 얼마 전 부시 미국대통령과 만나서 “북한이 하루빨리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어 한국과 미국이 국제금융기구를 통해 대북지원에 적극 나설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유감스러운 금강산 피격사건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전면적 대화와 경제 협력에 나서기를 기대합니다. 왜냐하면 지금이야말로 북한이 놓쳐서는 안 될, 변화의 호기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6자회담과 국제협력의 진전에 따라 실질적인 대북 경제협력 프로그램을 본격 추진하여 한반도 경제공동체를 실현해 나갈 것입니다.미래는 꿈꾸는 자의 것입니다.혼자 꾸는 꿈은 꿈에 그칠 수 있지만 8천만 겨레가 같은 꿈을 꾸면 그것은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이 하나가 되면 이토록 위대할 수 있음을 후손들에게 보여줍시다. 존경하는 국민여러분!지금으로부터 63년 전 우리는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였습니다.우리가 나라를 빼앗겼던 것은 무엇보다 우리가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비극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야 합니다.이로써 우리의 영토를 부당하게 넘보는 일도 없어질 것입니다.일본도 역사를 직시해서 불행했던 과거를 현재의 일로 되살리는 우를 결코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 위대한 국민, 새로운 꿈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우주 로켓은 처음 발사될 때 연료의 90%를 쓴다고 합니다.일단 중력의 한계를 돌파해서 하늘로 솟구치면 연료가 거의 들지 않습니다.선진국과 만년 중진국을 가르는 이치도 이와 같습니다.우리도 로켓처럼 3만 달러의 고비를 넘는다면 더 쉽게 4만 달러, 5만 달러 시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기입니다.우리는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국민 여러분!좌절과 분열로는 우리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습니다.용기와 화합으로만 우리의 목표를 이룰 수 있습니다.지금 세계는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안에서 소모적인 대립과 갈등으로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이제 눈을 세계로 미래로 돌려야 합니다.선진일류국가를 위해 모두 힘을 합해야 합니다. 우리는 안전과 신뢰, 그리고 법치를 통해 선진국의 기초를 다질 것입니다.녹색성장으로 수소시대의 중심에 설 것입니다. 생활공감정책으로 행복한 삶을 추구할 것입니다.조금 전 여기에 섰던 아이들이 자신의 적성과 자질에 맞는 교육을 받고, 지구촌의 미래를 함께 설계하는 자랑스러운 지구시민이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힘을 합칩시다. 우리 아이들이 누리는 자유와 번영이 우리 세대보다 더욱 크고 의미 있도록 합시다.오늘 이 자리가 새로운 꿈이 시작되는 출발점이었음을 이 아이들이 60년 뒤 후손들에게 증언할 수 있도록 합시다.건국 60년, 기적의 역사가 새로운 꿈과 만납니다. 건국 60년, 기적의 역사는 새로운 60년에도 이어질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신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위대한 대한민국의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위대한 통일의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그리고 위대한 한민족의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우리 모두 함께 앞으로, 앞으로 나아갑시다. 감사합니다.
2008.08.16 I 이진우 기자
(르포)촛불시위대는 왜 화가 났을까
  • (르포)촛불시위대는 왜 화가 났을까
  • [이데일리 좌동욱 정원석 기자] 28일 서울 광화문 촛불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잔뜩 화가 나 있었다. 경찰이 강경대응에 나섰고,&nbsp;시위대도 극렬하게 저항하면서 시위는 점차 과격해졌다.한 40대 가장은 "촛불이 줄고 있다"는 소식에 처음으로 시위에 참석했다.&nbsp;다른&nbsp;아버지는 초등학생 4학년 아이와 함께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시위 한복판에 나섰다.&nbsp;물대포가 날아오고, 경찰-시위대간&nbsp;물병과 쇠붙이가 난무하는 상황이었지만 아버지는 위험해도&nbsp;`산교육`이 될 것이라고 했다. &nbsp;커피를 나눠주거나 자비로 신문을 만들어 집회상황을 알려주는 이들도 생겨났다. 대통령이 사과하고, 불법·폭력시위에 대해서는 엄정한 대응방침을 천명했지만 고시 강행을 계기로 다시 타오른&nbsp;촛불이 금방 꺼질 것으로&nbsp;보이진 않았다.◇ 격렬해진 촛불시위.."의료진" "카메라" 외쳐&nbsp;28일 밤 10시10분경 종로 교보문고 앞 8차선 도로. 길을&nbsp;차단한&nbsp;전경 버스 6대를 사이에 두고 경찰과 촛불 시위대들이&nbsp;서로 대치했다. 버스 창문은&nbsp;성난 시위대가&nbsp;소화기,&nbsp;몽둥이로&nbsp;두들겨 부순 탓에 앙상한 골격만 남아 있었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경찰은 1시간 째 살수차를 동원해 물대포를 쏘아댔다.&nbsp;처음 한대로 시작한 물대포는 3대로 늘어났다. 경찰이 소화기를 뿌려대는 탓에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었고,&nbsp;제대로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nbsp; &nbsp;머리위로는 버스 건너편에서&nbsp;경찰이 던진 물병, 쓰레기 등이&nbsp;떨어졌다. 시위대도&nbsp;그것을 주워 다시 던졌다. 누가 먼저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과정에서&nbsp;시위대와 전경 상호간에 부상자가 발생했다.&nbsp;누군가 한명이&nbsp;"의료진"을 외치자 시위대 모두가 함께 외쳤다.&nbsp; 누군가가 "카메라 기자"를 외쳤고, 또 다시&nbsp;모두가&nbsp;따라&nbsp;외쳤다. 카메라 기자들이 찾아와 사진을 찍었다.&nbsp;"의료진"을 외치는 횟수는 점점&nbsp;많아졌다.&nbsp;이날 촛불집회가 벌어진&nbsp;종로&nbsp;거리는&nbsp;전쟁터의 '전선'을 방불케 했다.&nbsp;&nbsp;◇ 다양한 집회 참가자들..주말맞아 가족단위 참석&nbsp;전선 앞에 모인 사람들은 다양했다. 화물연대나&nbsp;민주노총의 옷을 입은 건장한 남자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nbsp;격한 시위를 예상한 듯 나온 사람도 있었지만 팔짱을 낀 연인, 부부, 노인들, 아이를 데리고 온 어머니 등 일반 시민들이&nbsp;훨씬 많았다.&nbsp;&nbsp;&nbsp;박동학(42세)씨는 이 위험한 현장에 초등학교 4학년생 아들과 함께 서 있었다. 경찰과 시위대를 가르는 전경버스로부터 불과 10여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위험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위험한 것은 알지만 현장의 민주주의를 직접 배우라고 (아이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다"고 했다. 100미터쯤 뒤로 가니 여성, 노약자, 학생 등 일반 시민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nbsp;홍성희(32세)씨는&nbsp;지인 지연화(45세)씨 부부와 함께 촛불을 들고 있었다. 홍씨는 왜 왔냐는 질문에 "신문, 방송을 보고 화가 나서 왔다"고 했다. 그는 "정부와 언론에서는 우리를 폭력 시위대로 몰아가지만 실상은 경찰들이 물대포를 쏘면서 시위대를 도발했기 때문"이라며&nbsp;말했다. 남편과 함께 온 지연화씨는 "대통령은 잘못했다고 반성했지만, 곧이어 (미국산 쇠고기 수입) 고시 강행, 시위대 강경 진압을 지시했다"며 "이제라도 국민들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고 했다.김종갑(45세, 서울 방학동)씨는 시위 현장에서 DSLR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느라 부산했다.&nbsp;한눈에 보기에도 값비싼 카메라가 비에 흠뻑 젖었다.&nbsp;고가의 장비가 망가질 수도 있었지만 김씨는 "그래도 찍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nbsp;심상정, 노회찬 민노당 전 의원도&nbsp;현장을 지켰다. 심 의원은 "대통령의 강경론이 촛불시위를 키우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다"고 경고했다.&nbsp;&nbsp;◇ 갈수록 격렬해지는&nbsp;시위시위는 시간이 지날수록&nbsp;격렬해졌다. 시민들이 전경버스를 밧줄로 묶어 전복한 후 청와대로 몰려가도는&nbsp;시도가 이어졌다. 밧줄 길이만 족히 100미터는 돼 보였다. 처음엔 버스가 넘어질 듯 크게 흔들렸으나 넘어지지는 않았다.&nbsp;버스에 묶은 밧줄을 두개로 늘리자, 반대편 경찰측도 쇠밧줄로 지지대를 설치했다. 일부 시위대가 경찰 살수차를 부수고, 경찰도 물대포와 소화기로 적극 대응하면서&nbsp;양측의 감정은 이미 격해져있었다.&nbsp;&nbsp;경찰이 방송 마이크로 "불법 집회를 해산하라"고&nbsp;경고하자,&nbsp;시민들은 '우'하는 함성으로 응수했다.&nbsp;밤 10시44분경에는 종로 거리에서&nbsp;종로구청쪽으로 우회, 청와대로 진입하려는&nbsp;시도가 있었다. 화물연대가 "대책위만&nbsp;믿고 있을 때가 아니다, 우리가 길을 열어보자"며 앞장섰다. 하지만 종로에서 청와대로 가는 길은 전경 버스로 모두 막혀 있었다. 종로구청 앞에는 집으로 가려는 사람들 십여명이 "집에 어떻게 가라는 말이냐"며 발을 동동 구르고&nbsp;있었다. 그 중 한명은 휴대전화로 "빨갱이들 때문에 집에 못가고 있다"고 말했다가 사람들이 쳐다보자 "말 조심해야 겠다"며 소근소근 통화하기도 했다.&nbsp;&nbsp;◇ "80년대와 비교하면&nbsp;오합지졸..그것이 사회 발전"밤 11시50분경 버스로 차단된 바리케이트가 뚫렸다. 시위대가&nbsp;밧줄로 당긴 힘에 못이겨 전경 버스 한대가 70도 정도 돌아간 것이다.&nbsp;시위대쪽에서 '와'하는 환성이 터져나왔지만&nbsp;정작&nbsp;장애물을 치운 후 시위대는&nbsp;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 틈을 타 경찰들이 방패와 경찰봉을 휘두르며 시위대쪽으로 밀고 들어왔다.&nbsp;한순간 시위대가 100여미터나 뒤로 밀렸다. 남자들이 앞으로 나와 스크럼을 짰지만 엉성했다.&nbsp;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혼재했다. 사고를 우려한 경찰들도 더 이상 시위대를 밀어내지&nbsp;못했다.&nbsp;앞에 서있는 전경들에게 오물을 던지고 욕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것을 말리는 시위대도 함께&nbsp;있었다. 86학번이라는 박동학씨는 "87년 민주항쟁 등으로 대학 시절&nbsp;시위를 많이 참가했다"며 "그 때와 비교하면 지금 시위대는 오합지졸이다. 참 답답하다"고 말했다.&nbsp;그러나 그는 "오합지졸로 조직적인 경찰에 맞서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가 한단계 발전된 것 아니냐"며&nbsp;"하지만 경찰들은 20년전 그대로"라고&nbsp;꼬집었다. &nbsp;이날 시위는 종로 뿐 아니라 시청 앞 태평로 거리와 안국역에서도 열렸다. 집회 참가자 들 중 몇몇은 '프레스(PRESS)' 완장을 찬 기자들에게 시위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냐는 질문을&nbsp;던지기도 했다.&nbsp;&nbsp;&nbsp;◇진화하는 촛불 집회&nbsp;&nbsp;촛불시위 참가자들은 오후부터 삼삼오오 나타나기 시작, 집회가 시작된 오후&nbsp;7시경엔&nbsp;시청 앞에서 동아일보 사옥 앞까지 태평로 8차선 도로를 가득메웠다. 다양한 연령대, 남녀, 노소들이 빽빽하게 들어찼다. 이미&nbsp;유명해진 유모차 부대가&nbsp;눈에 띄었다. 유모차 부대엔 출산을 앞둔 산모도 있었다.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도 연단에 올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정규직이 비정규직으로 바뀌고 있다"며 "현장의 비정규직이 곧 광우병"이라는&nbsp;말을 전했다. 박원석&nbsp;대책위 공동상황실장은 "집회 참가자가 10만여명"이라고 말했고&nbsp;경찰이 추산한 참석자수는 2만여명이었다. 촛불이 서울 도심을 뒤덮은 6.10 이후 최대 규모의 인원이 촛불시위에 참석했다.&nbsp;김영록씨(42세) 가족은 포장마차에서 통닭을 먹고 있었다. 부인, 아들, 딸까지 4명이다. 김 씨는 "오늘 집회에 처음 나왔는데 촛불이 줄고 있다는 보도를 듣고 나왔다"고 말했다.&nbsp;그는 "아이들이 매번 가자고 했지만 직장생활 때문에&nbsp;오지 못했다"며 "순진한&nbsp;아이들이지만 알 것은 다 안다. 이젠 쇠고기 먹으러 가자고 해도 안간다"고 말했다. 공짜커피를 주는&nbsp;곳도 있었다. 직장인 이정우씨(30세)는 시청 잔디마당에 '목마른 시민에게는 커피가 공짜'라는 플래카드를 걸고 '촛불다방'을 운영했다.&nbsp;오늘까지 11일째라고 했다.&nbsp;이씨는 "자비로 물과 커피를 나눠주는데 하루 30~40만원 정도가 들었다"며 "혼자서는 힘들어 26일부터 아고라에서 후원을 받고 있는 데 이틀만에 100만원 정도가 모였다"고 말했다.&nbsp;대학 4학년생이라는 엄모씨(21세)는 자비로 공짜 신문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nbsp;엄씨는 "촛불집회 상황을 알리고 싶어서 아고라에서 네티즌들과 함께 돈을 모아 신문 10만부를 만들었다"고 했다. 촛불집회에서 신문을 직접 만든 것은&nbsp;이번이 처음이라고 그는 말했다.&nbsp; 29일&nbsp;현재시각 새벽 4시까지도&nbsp;집회는&nbsp;계속됐다.&nbsp;초여름이지만 빗방울이 굵어진 탓에 날씨가 쌀쌀했다.&nbsp;시위대 수는 현저히 줄었지만 그럼에도&nbsp;종각역 사거리에서&nbsp;SK 본사건물까지 8차선 도로를 메우고 있었다.&nbsp;광화문 곳곳의&nbsp;술집과 커피숍에는&nbsp;추위를 피해 온 집회 참가자들이 눈에 띄었다.&nbsp;&nbsp;촛불집회가 시간이 지나면서 동력이 떨어지고, 집회에 '시위꾼'들만 참석하고 있다는 인식은&nbsp;이날 현장 상황과는 거리가 있었다.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은 다양했고, 화도 많이 나 있었다. 촛불집회는 상황에 따라&nbsp;대응을 달리하면서 계속 진화해 나가고&nbsp;있었다.
2008.06.29 I 좌동욱 기자
  • 비운의 정운천 장관..화려한 만큼 추락은 쓰리고
  • [이데일리 박옥희기자] 농업계의 `이건희 회장`, 국내 1호 농업인 주식회사 대표, 독창적인 발상으로 참다래(키위)를 종주국 뉴질랜드에 수출한 성공한 농업 경영인, 한국 농업CEO연합회 회장, 이명박 정부 초대 농림수산식품부 장관. 척박한 한국 농업계에 이만큼 화려한 타이틀을 가진 농업인은 드물다. 정운천 농식품부 장관은 이렇게 성공한 농업인이었다. 그러나 정 장관에게 지난 6월10일은 기억하기 싫을 만큼 길고 힘든 하루였다. 그는 이날 아침 청와대에 사표를 제출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쇠고기 파동에 대한 책임으로 내각이 전원 사임을 한 상황. 전국이 연일 쇠고기 재협상을 요구하는 촛불로 밤을 밝히고 있고, 마침 이날은 6월 민주항쟁 21주년을 맞아 최대 인파의 촛불시위가 예정되어 있었다. 사표를 제출한 정 장관은 쇠고기 협상의 주무부처 장관으로서 무엇인가 해야한다는 책임감을 느꼈던 것일까? 그는 예정에 없었던 일정을 하나 더 만들었다. 서울 광화문 촛불집회 현장을 직접 찾아가 국민들을 만나겠다고 결심했다. 언론에 미리 알리지도 않았다. 국민들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는 장관이 시위현장에 맨몸으로 뛰어드는 것을 경찰도 몰랐다. 어떤 상황을 기대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 점퍼 차림으로 집회 현장을 찾은 정 장관은 국민이면 누구라도 올라가 말할 수 있다는 자유발언대에 한발도 들여놓지 못했다. 일부 시민들은 그에게 `매국노`라고 소리치며 쫓아냈다. 아무도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국민들을 만나러 간 정 장관은 결국 말 한마디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일부에서는 그가 욕을 먹을 각오를 하고 집회 현장을 방문해 국민과 대화를 시도한 용기에 내심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현장에서는 `대통령이 나오라`는 목소리가 더 높았다. 국민들의 분노는 쇠고기 문제 뿐만 아니라 쇠고기로 표출된 정부와 대통령에 대한 총체적인 불신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석달전 정 장관이 내정됐을 때 주변에서는 `농업인 CEO로써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장관으로는 자질이 부족하다`는 우려도 제기됐었다. 행정 경험이 전혀 없는 그가 농식품부 장관으로써 한미FTA, 쌀, 쇠고기 문제 등을 다 풀어나갈 수 있겠느냐는 지적이었다. 국민들은 이같은 우려가 기우(杞憂)가 되길 바랐지만 결국 현실로 나타나게 됐다. 정 장관이 만약 이날 촛불집회를 찾기로 한 용기와 책임감으로 한미 쇠고기 협상을 추진했다면 어땠을까? 한미 정삼회담이라는 거사에도 불구, 30개월 이상 미국 쇠고기를 수입하지 않고, 광우병 위험물질을 철저히 차단하고, 우리 기준에 맞게 수입을 금지할 수 있도록 협상을 이끌었다면 어땠을까?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만약 그랬다면 그가 이날 집회현장에서 겪어야 했던 `굴욕`은 없었을 것이다. 취임 석달여만에 퇴진 1순위로 거론되는 비운의 장관이 되지는 않았을 지도 모른다. 농식품부 직원들은 "미국산 쇠고기 파동 때문에 정 장관이 구상했던 농어업 정책을 제대로 추진해 보지도 못하고 물러나게 됐다"며 아쉬움을 표현했다. 하지만 그의 용기가 너무 늦었고, 국정을 운용하는 장관으로서의 소신도 부족했다. 국민과 소통하려는 노력도 모자랐다. 이날 정 장관의 `굴욕`은 쇠고기 정국 속에 흔들리는 정부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장면이었다.
2008.06.11 I 박옥희 기자
(르포)비폭력 정착시킨 `유쾌·발랄` 국민저항
  • (르포)비폭력 정착시킨 `유쾌·발랄` 국민저항
  • [이데일리 정원석기자] `명박산성` 10일 세종로 이순신 동상 앞을 가로막고 늘어선 2층 높이의 컨테이너 장벽에 시민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육중한 몸집에 경찰이 칠한 기름칠 때문에 흉물스러운 모습을 나타내고 있지만, 시민들은 이 앞에서 사진을 찍어대며 연방 웃음을 쏟아낸다. “코메디잖아. 완전 해외 토픽감이야.”, “다음 세대에는 볼 수 없는 장면이니 기록해야지”그들의 웃음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저항이었다. 국민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장벽 안에 스스로를 가둔 권력에 대한 비판이 조롱섞인 웃음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독재정권의 탄압에 맞서기 위해 화염병과 쇠파이프를 들어야 했던 20여 년 전과는 확실히 다른 방식이었다. &nbsp;▲10일 컨테이너 장벽에 나붙은 각종&nbsp;게시물들◇투쟁가에서 촛불집회 버전 `뽀뽀뽀`로.."유쾌 발랄하게 저항한다" 한달이 넘게 지속돼온 촛불 집회를 이끈 힘은 `비폭력 발랄 유쾌한 저항 문화`였다. “너나 먹어 미친 소”로 시작된 시위 구호는 “100일이다, 헤어지자” 등으로 진화했다. 집회라면 의례적으로 떠오르는 엄숙한 분위기는 이제 찾아볼 수 없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가사와 빠른 비트로 시작되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 등의 노래가 비장감 넘치는 투쟁가를 대체한 지 오래다. “이제 학교에 알려지면 선생님한테 또 혼나요...”라고 쭈뼛쭈뼛 무대에 오른 여고생들이 불렀다는 촛불집회 판 `뽀뽀뽀`는 이 시대 저항이 의미하는 바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아빠가 출근할 때 고유가, 엄마가 시장가면 미친소, 우리가 학교가면 0교시, 우리들의 수면시간 4시간” 이라는 가사에 국민들이 위협을 느끼는 `미친소`, `미친물가`, `미친교육`에 대한 거부감이 극명하게 드러나있지만 유쾌하다. `상상력이 권력을 쟁취한다`는 40년 전 프랑스 68혁명의 모토가 우리 눈앞에 현실화되고 있었다. ◇ `무료 촛불다방`..자발적인 참여로&nbsp;뜨거워진 `촛불열기`▲ 손수 피켓을 만들어 나온 시민유쾌 발랄한 시위 문화를 뒷받침한 것은 바로 `자발성`이다. 배후도 없고, 주도하는 사람도 없는 집회 문화가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 낸 것이다. 촛불 문화제 행사가 끝나면 어김없이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와 집회장의 쓰레기를 줍는 사람을 보는 것은 이제 예사로운 일이 됐다. 72시간 릴레이 행동이 시작된 지난 6일 새벽. 태평로 코리아나 호텔 부근에서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남성 2명과 여성1명이 “커피 마시고 가세요”라고 외쳤다. &nbsp;같은 동네에서 일하는 학원 강사라는 그들은 자비를 들여 커피를 끓이게 됐다고 말했다. “새벽까지 집회장을 몇 차례 지키다보니 추위를 느끼게 되서 시작한 행동”이라고 덧붙였다. 소형승합차를 끌고 나와 촛불 다방을 차린 시민도 있었다. 승합차 창문에는 `촛불 다방 무료`라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거리 행진 도중에는 출출한 배를 채우라며 손수 주먹밥을 만들어 돌리는 시민 역시 눈에 띄었다. 6·10 문화제에서 영화배우 문소리씨는 “외국에 나가있어 촛불 열기에 함께하지 못했지만 인터넷을 통해 그동안 있었던 일을 지켜봤다”며 “끝까지 멋진 모습,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모습 보여주셨으면 좋겠다. 이런 장관을 만들어주신 대한민국 국민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비폭력으로 승화된 시민저항..업그레이드된 6·10 정신&nbsp;자발적인 참여열기는 비폭력 평화 집회 분위기로 이어졌다. 10일 국민행동은 전국적으로 100만명이 참여하며, 87년 6월 항쟁 이후 가장 많은 인원이 참여했지만, 경찰과의 물리적 충돌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시민들은 집회 초기부터 "비폭력"을 외쳤다. "비폭력이 우리의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라는 피켓을 들고 참여한 사람도 눈에 띄었다. 경찰이 쌓아둔 컨테이너 장벽을 타고 넘어가려는 시도가 몇 차례 있었지만, 대다수 시민들은 "내려와. 내려와"를 외치며 이들을 만류했다. 새벽 2시경 세종로 앞에서 컨테이너 장벽에 항의하기 위해 세워둔 스티로폼 연단을 타고 넘어가 청와대 진입을 시도하자고 주장했을 때도, 시민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몇 몇 사람들이 경찰이 세워둔 방어벽을 각목 등의 도구로 내리쳤을 때도 시민들을 그들을 둘러싸며 "비폭력"을 연호했다. 한 집회 참석자는 자유발언을 통해 "우리가 이제껏 만들어온 춧불 집회의 순수성을 훼손하기 위해 이명박 정부는 끊임없이 폭력을 유발하려고 하고 있다"며 "우리가 그들이 바라는 대로 넘어가면 안된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시민들은 답답해 했다. 한달이 넘게 촛불을 밝히고 있지만 정부는 여전히 "`쇠고기 전면 재협상`은 어렵다"고 한다. 국민의 행복권과 건강권이 위협받고 있다는 불안감은 어느 때보다도 높았다.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은 "국회가 시민들의 정치적 의사를 대변하지 못하니 국민들이 불안해 할 수 밖에 없다"며 "지금까지 촛불 열기가 달아오른 것은 그만큼 답답하다는 심정을 드러낸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절제되고 재기발랄한 방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20여년 전 군부독재를 몰아내기 위해 분연히 떨치고 일어선 시민들의 저항은, 이제 비폭력 저항이라는 한 차원 높은 방식으로 승화됐다.
2008.06.11 I 정원석 기자
  • 李대통령 "어제 집회 보며 많은 생각 했다"
  • [이데일리 김수연기자] 이명박 대통령이 전날 열린 최대 규모 촛불집회에 대해 "어제밤 6.10 민주화 항쟁 집회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11일 청와대에서 열린 제 1차 중소기업 성공전략회의 모두에 "학생때 나도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면서 고통을 겪었던 민주화 1세대"라며 "어제 모습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또 "또 국민들은 이 경제적 어려움 속에 청와대 수석과 내각이 일괄 사의를 표명해 국정 공백이 있지 않을까 걱정한다"며 "국무위원들과 수석들에게 한치의 공백이 없도록 열심히 일해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했다. 고유가 상황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세계 경제가, 미래가 불확실하고 고유가에 의해서 위기감을 느끼고 있고 우리도 유가가 150불이 될지 200불이 될지 예측을 불허하는 상황"이라며 "좀 더 지켜보면 우리 상황이 비상 대책을 세워야 할 단계가 올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우리는 과거에 가장 훌륭하게 위기를 극복한 과거 경험을 갖고 있다"며 "이번 위기도 합심하면 잘 극복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정부도 새로운 각오로 출발하려고 한다"며 "어려운 때일수록 공격적 도전을 하고, 공격적 경영을 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2008.06.11 I 김수연 기자
(르포)`386, 그들이 쿨하게 돌아왔다`
  • (르포)`386, 그들이 쿨하게 돌아왔다`
  • [이데일리 김보리기자] 정치세력으로써 386의 시대는 끝났다고 했다. 노무현 정권의 주 구성원으로 변화를 꿈꿨으나 실패한 세력으로 분류되기도 했던 386세대. 2008년 6월,촛불집회 현장에서 그들은 다시 정치의 관망자가 아니라 `참여자`로 돌아와 있었다. 6.10민주항쟁 기념일과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가 맞물린 2008년 6월10일은 1987년 6월 이후 최대의 열기였다. 2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군부독재에서 대통령 직선제로 바꾼 그 열기는 그대로 살아있었다.&nbsp;중심에 386이 있었다. &nbsp;혈기왕성한 대학생이었던 그들이 이제 가장으로, 사회의 중견이 돼 다시 광화문으로 돌아왔다. 운동화와 청바지가&nbsp;구두와 넥타이로 바뀌었지만&nbsp;의식은 전과 같았고,&nbsp;결기도 여전했다.◇ 87년 오늘과&nbsp;다른 듯 닮았다..열정은 그대로 87년 6월과 2008년의 6월은 닮았다. 형식면에선 달라졌지만 그 열정은 그대로였다. ▲ 87년6월항쟁 참여자로 인터뷰에 응해준 양춘승 씨87년 당시 시위대의 대다수가 대학생이었던 데 비해 2008년서울 광장을 메운 사람은 십대 부터 50,60대 노인까지 다양해졌다는 것. &nbsp;87년은 삼엄한 분위기에 구호를 외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면 2008년은 시위가 아닌 문화제란 이름으로 새로운 시위 문화로 다가오고 있었다.&nbsp;6.10 항쟁 당시 대학 2학년이었던 86학번 김 모 씨는 "당시에는 피가 아니면 이야기 자체가 안 통했다"며 "87년의 집회는 죽기아니면 까무려친다는 심정이었고 구호를 외치는 건 극히 소수였다"고 말했다. 지랄탄이 날아다니고, 도심에서도 공공연한 폭력이 자행되던 시기였다. 87년 6월 항쟁 참여자로 다시 광화문을 찾았다는 양춘승씨는 "당시 집회에선 넥타이 부대로 참여했는데, 이번에는 젊은 친구들이 주도하는 집회를 관객처럼 구경하는 게 미안하게 느껴져 6.10 기념일을 맞아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nbsp;당시 대학원생이었다는 서울대 조국 교수를 만났다. 조 교수는 "정치적이든 문화적이든 권위주의를 용납하지 않는 시민의 특성은 20년 전 오늘과 공통점"이라며 "정책적으로나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것이 닮은 점"이라고 언급했다. 추가 질문을 던지려 하자 조 교수는 "오늘은 교수가 아니라 한 참여자로 즐기려 왔다"면서 미소를 던지며 황급히 군중 속으로 뛰어들었다. ◇ 그들을 이끌 건 아들·딸..세대 간의 소통 창구로 ▲ 세종로 앞 컨테이너 앞에 설치된 스티로폼 위에서 6.10민주항쟁에 대해 자유발언하는 한 시민386들을 다시 시청 앞 광장으로 이끈 것은 그들의 아들, 딸이었다. 386들은 자신들보다 먼저 일어나는 자식들을 보고 부끄러웠다는&nbsp;것과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해야 하는 이 여전한 현실을 바꿔놓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85학번으로 당시 대학교 3학년이었던 최경오 씨는 "나는 기러기 아빠"라며 "아이러니컬하게도 외국에 가 있는 아이들에게 인터넷으로 촛불집회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nbsp;당시 대학 2학년으로 지금은&nbsp;수원에서 자영업을 한다는 남 모 씨는 자식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자식들이, 어른들의 잘못으로 먹거리부터 불안하는 등 미래를 보장받지 못하는 것이 너무 미안하다"며 "세상을 바꿔놓을지 알았는데 여전히 정부에 말할 수 있는 수단은 시위 뿐인 이 현실이 부끄럽다"고 했다. 촛불집회는 386과 그들의 자식세대에서 또 하나의 소통창구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식들에게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민주주의의 한 장면을 교과서가 아니라 현장에서 직접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중학생 딸을 데리고 왔다는 한 시민은 "촛불집회로 딸과 많이 친해졌다"며 "아이가 광화문에 먼저 가겠다고 했을 때 주문한 건 사태에 대해 제대로 알고 가라는 것"이라고 했다. 중학생인 딸은 "가자고 한 건 나였는데, 나도 아빠의 주문으로 신문도 찾아보고 친구들과 토론도 하면서 더 관심이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 잊혀진 열정을 불붙인 도화선 386들은 87년 6월처럼 다시 가슴이 뛴다고 했다. 민주화의 구호를 놓고 한 평범한 직장인으로, 생활인으로 내 문제에만 내몰돼 살았는데 촛불집회를 계기로 다시 사회로 향한 관심을 표출할 수 있게 됐다고 그들은 입을 모았다. 87년 당시, 대학교 1학년으로 21년 전 이날을 구로경찰서에서 보냈다는 김범학 씨는 시위 내내 큰 구호를 외치지 않았다. 21년 만에 찾아온 이 현장에서 그에게 `설레지 않는냐`고 묻자 돌아오는 답은 명쾌했다. "그냥 마냥 이 자리에 서서 그 때의 감동을 다시 느끼고 싶다"며 "왠지 뭉클해서 아무말도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목소리에서는&nbsp;묘한 떨림이 느껴졌다. 삼삼오오, 대학동기나 선후배들이 함께 나온 386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함께 과거를 추억했고, 지금의 사태를 토론했다.&nbsp;&nbsp;▲ 87년 당시 21살로 6.10민주항쟁에 참여했다는 박준건 씨82학번이라는 한 시민은 인터뷰를 자처했다. 그는 "사실 우리 입장에선 말을 하고 싶어도 말할 기회가 없었다"며 "촛불집회가 우리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또 한번의 기회가 된 것 같다"고 했다. 87년 당시 21살로 시위에 참여했다는 박준건 씨(사진)는 "시민들이 마치 해코지라도 하려는 듯, 청와대로 가는 길을 컨테이너로 봉쇄한 이 행태는 시대착오적이라 옛 생각이 나서 다시 찾았다"고 말했다. 86학번과 87학번 동기가 함께 나왔다는 한 시민은 "20년 지난 오늘, 달라진 건 국민이고 변하지 않은 것은 정부란 생각이 든다"며 "이번 쇠고기 사태로 얻은 가장 큰 소득은 이번 기회로 국민들이 쇠고기나 FTA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단 것과 그리고 내 가슴 속에 있던 열정을 다시 불붙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nbsp;386들은 시위가 새벽을 지나도록 광화문을 떠나지 않았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또는 직장동료·대학 선후배들과 그 대열 속에 있었다. 혈기왕성했던&nbsp;청년은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를 바라보면서, 이제 민주주의와 정의 뿐만 아니라 가족과 자식을&nbsp;생각하고,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우리 사회의 중심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nbsp;
2008.06.11 I 김보리 기자

04517 서울시 중구 통일로 92 케이지타워 18F, 19F 이데일리

대표전화 02-3772-0114 I 이메일 webmaster@edaily.co.krI 사업자번호 107-81-75795

등록번호 서울 아 00090 I 등록일자 2005.10.25 I 회장 곽재선 I 발행·편집인 이익원 I 청소년보호책임자 고규대

ⓒ 이데일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