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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정부 초대총리 `잔혹사`…文정부 이낙연 운명은?
- [이데일리 김재은 기자] 문재인 정부의 초대 총리 후보자인 이낙연 인준이 야권의 반발로 난항을 겪고 있는 가운데 과거 정부에서도 초대 총리들의 인준은 쉽지 않았다.국회 인사청문회가 도입된 2000년 6월 이후 각 정부의 초대 내각 수장인 총리 인준안이 무사히 통과된 전례는 거의 없다. 인사청문회 도입 이전에는 상대적으로 국회 검증절차가 느슨했고, 정권출범일 직전 인선이 발표에 이뤄졌었다.특히 지명자 개인의 신상이 검증과정에서 문제가 됐거나 정치권의 힘겨루기 속에 임명동의안 처리가 정치적 공방의 대상으로 전락하며 인준안 통과가 지연됐다. 노무현 정부 이후 3번의 정권 모두 대통령 취임 이후 총리 인준안이 통과되는 불명예를 얻었다. 이낙연 총리후보자 인준안은 탄핵으로 인한 궐위선거 이후 정국임에도 불구하고 야권에서 ‘위장전입’ ‘병역면탈’ 등 대통령의 공약을 지키지 않았다며 대통령 사과를 요구하고 나섰다. 25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이낙연 국무총리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이 후보자가 위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명박근혜 정부 ‘불통’ ‘고소영’ ‘회전문’ 낙인박근혜 정부 초대 총리 지명자인 김용준 전 헌법재판소장은 논란 끝에 자진 사퇴했다. 아들 병역 면제 논란과 부동산 투기 의혹이 확산됐기 때문이다. 특히 김 후보자는 1970~80년대 부장판사, 대법관등으로 재직하며 서울, 경기도, 수도권 일대의 땅을 집중적으로 사들인 의혹이 있다. 아들 두명 모두 군 면제를 받았고, 이들이 8살 6살에 서초동 주택을 구입한 것으로 나타나 편법 증여 의혹에 시달렸다.김용준 후보자는 박근혜 정권 출범을 돕는 인수위원장으로 역할했지만, 박근혜식 불통의 ‘나홀로 인사’가 빚은 참사로 여겨진다. 이는 결국 4년뒤 사상 초유의 탄핵으로 인한 불명예 퇴진의 시발점이 됐다.박근혜 정부에서는 김용준을 비롯해 정홍원, 안대희, 문창극, 이완구, 황교안, 김병준 총리후보자 7명가운데 3명이 청문회 과정에서 낙마했고, 1명은 청문회도 거치지 못한 채 사퇴했다.박 정부 정홍원 초대 총리는 박 대통령 취임식 다음날인 2013년 2월26일 인준안이 통과됐다.이명박 정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초기 고소영(고려대 소망교회 영남인맥), 강부자(강남 땅부자) 회전문 인사 등 내각 인선에 참패하며 정권 초부터 민심을 잃었다. 이명박 정부 초대 총리인 한승수 후보자의 경우 부통산 투기와 위장전입 의혹과 함께 정부조직 개편안의 유탄이 총리 인준안에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은 2008년 1월28일 한승수 전 총리를 후보자로 지명하고 2월20~21일 인사청문회가 실시됐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통일부, 여성부 폐지 방침에 대한 통합민주당(현 더불어민주당)의 반발이 이어지면서 정부조직법은 2월22일 어렵사리 처리됐다. 한 지명자 임명동의안은 정부 출범 이후인 2월 29일에야 통과됐다.◇ 참여정부, 野 특검법 발목… DJ정부 김종필, 최장 서리 불명예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3년 1월 22일 일찌감치 고건 전 총리를 총리후보자로 지명하고 청문회도 실시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대북송금 특검법을 처리하지 않을 경우 고건 전 총리에 대한 임명동의안을 처리하지 않겠다고 압박했다. 한나라당은 대통령 취임식 다음날인 2월 26일 사실상 단독 소집한 국회에서 특검법을 처리하고, 이후 여야의원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고 전 총리에 대한 임명동의안을 통과시켰다. 국회 인사청문회가 도입되기 전인 DJ정부에서는 야권의 반대로 김종필 초대 총리가 6개월간 ‘총리서리’라는 불명예를 얻었다.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8년 2월 23일 김종필 전 자민련 명예총재를 총리후보자로 지명했지만, 한나라당은 김 후보자의 도덕성, 5.16 쿠데타 가담 전력, 경제에 대한 비전문성 등을 들어 당론으로 인준 반대 입장을 정했다. 임명동의안 처리가 난항을 겪자 김 전 대통령은 정부 출범 후인 3월 3일 문민정부의 마지막 총리였던 고건 당시 총리의 제청을 받아 17개 부처 장관을 임명하고, 김종필 총리서리체제로 내각을 꾸린다. 총리 인준동의안은 그해 8월 17일에야 국회를 통과했다. 1993년 김영삼 전 대통령은 취임식 3일 전인 2월22일 황인성 총리 후보자를 지명하고 취임식 당일인 25일 임명동의안이 처리됐다. 당시 야당인 민주당은 대선 당시 용공음해에 대한 사과없이는 협조할 수 없다며 동의안 처리에 불참했다.◇ 이낙연 후보자 인준안 통과될까이낙연 총리 후보자에 대한 발목잡기는 문재인 정부가 제시한 5대 비리 고위공직자 원천 배제 공약에서 시작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병역면탈, 위장전입, 세금탈루, 논문표절, 부동산 투기’ 등 5대 비리관련자는 고위공직자에서 완전 배제하겠다고 강조해왔다. 그러나 이낙연 초대 총리 후보자부터 병역면탈, 위장전입 등 2가지 의혹에 시달리고 있다. 과거 김용준 총리후보자 등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그 정도가 약하다고 볼수 있지만, 문 대통령 스스로가 내건 인사원칙을 초대 총리부터 어긴다는 부담이 크다. 야권의 비판이 커지자 임종석 비서실장은 “국민들께 사과드린다. 야권에는 송구하다”며 공식적으로 입장을 표명했지만, 야권은 대통령이 직접 나서라고 요구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도가 90%에 육박하는 등 강력히 개혁 드라이브를 걸고 있어, 야권으로서는 집권 초기 추진력에 브레이크를 걸고자 하는 의도로 풀이된다.하지만 국민 10명중 7명은 이낙연 총리 인준안 통과를 희망하고 있다. 이처럼 ‘너가 더 했으면서 남을 탓하냐’는 여론이 비등한 것도 야권에게는 부담이다. 대통령 탄핵에 따른 궐위선거로 치러진 만큼 혼란을 수습하고 국정을 안정시켜야할 의무가 있는 탓이다.결국 이낙연 총리 후보자 인준안은 통과될 가능성이 높지만, 이 과정에서 문재인 정부엔 적지 않은 흠결이 남게 될 전망이다. 총리 인준안은 청문회 종료 사흘 이내에 국회의장에게 제출해야 한다. 총리 임명동의안 처리시한은 제출일로부터 20일 이내인 5월 31일까지다.
- [대선 맛보기] 김영삼·김대중만이 ‘탈당=대선패배’ 공식 깼다
- [이데일리 김성곤 기자] ‘탈당’은 정치인이 가장 피해야 할 정치적 자살행위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는 득보다는 실이 압도적입니다. 실제 대한민국 정치사를 돌아보면 고심 끝에 탈당을 선택했다가 손해를 본 유력 정치인들은 한둘이 아닙니다. 이인제·손학규·정동영이 대표적입니다. 거창한 명분을 내세워 탈당의 깃발을 높이 들어봤자 성공 가능성은 매우 희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정치인들은 탈당을 선택합니다. 대거 총선이나 대선을 앞두고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철새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손쉽게 탈당을 선택하는 것은 복당이 그렇게 어렵지 않기 때문입니다.20대 총선과 19대 대선을 앞두고도 예외없이 탈당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20대 총선을 앞두고 새정치민주연합에서 이탈한 의원들은 국민의당을 창당했습니다. 19대 대선을 앞두고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새누리당에서 이탈한 의원들은 바른정당이라는 둥지를 만들었습니다. 대선주자였던 안철수와 유승민 역시 이 과정에서 탈당을 선택했습니다. 대선에 나선 두 사람은 패배했습니다. 물론 안철수와 유승민의 득표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다소 논란이 있습니다. 여하튼 대역전극을 노린 두 사람은 실패했습니다.사실 탈당해서 성공한 정치인은 사실 김영삼, 김대중밖에 없습니다. 두 사람만이 탈당 경력에도 대선에서 승리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정치 10단으로 불리는 강력한 카리스마에 영남과 호남이라는 강력한 지역기반을 갖췄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난 2004년 17대 총선에서 자민련의 몰락과 더불어 김종필이 현실정치에서 은퇴하면서 3김시대가 막을 내린 이후 YS나 DJ에 버금가는 카리스마와 지역기반을 갖춘 정치인은 없습니다. 거칠게 이야기하면 대선에서 승리하고 싶다면 탈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개그맨도 울고 갈 ‘희대의 정치 코미디’…바른정당 탈당사태돌이켜보면 19대 대선은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국회의 대통령 탄핵의결,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결정, 5월 조기대선, 사상 유례없는 5자구도 등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냈습니다. 빠질 수 없는 게 보수정당의 분열이었었습니다. 새누리당이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으로 쪼개진 것입니다. 97년 대선 당시 이회창·이인제의 분열로 정권을 잃어버린 보수정당은 이후 대선에서 단 한 번도 분열하지 않았습니다. 분열하지 않으면 손쉽게 이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통령 탄핵사태를 겪은 이번 대선만큼은 달랐습니다. 보수의 혁신을 내건 바른정당이 탄생했기 때문입니다.문제는 바른정당 탈당파의 자유한국당 복당사태입니다. 개그맨도 울고갈 희대의 정치코미디입니다. 흔히 “정치는 생물”이라고 하지만 아무래도 뒷맛이 씁쓸합니다. 바른정당 창당에 참여했던 핵심인사들은 최순실국정농단 사태와 관련해 야당보다 더 날카로운 목소리를 냈습니다. 친박패권의 청산 가능성이 없다는 절망 속에 탈당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대선패배의 암운이 드리우자 또 13명의 의원들이 본인들이 만들었던 바른정당을 또다시 박차고 나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민주적인 선출과정을 거친 대선후보를 압박하기도 했습니다. 최악은 굴욕을 감수하면서 자유한국당으로 되돌아갔다는 점입니다. 바른정당 대변인 오신환은 한국당이 바른정당 탈당파 13명 의원의 재입당을 승인한 것과 관련해 한국정당사에 길이 남을 논평을 남겼습니다. “잘 살아라, 우린 갈 길을 가련다.”◇이인제, 손학규, 정동영은 왜 정치적으로 몰락해갔나?바른정당 탈당파들은 반년도 채 되지 않은 기간 동안 2번 탈당이라는 대기록을 남겼습니다. 이들의 향후 정치적 행보는 성공할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국민은 바보가 아닙니다. 우리 정치사는 국민들의 탈당을 분명하게 심판해왔습니다. 가치와 명분이 아닌 정치적 유불리를 따지면서 갈짓자 행보를 보였을 경우에는 예외가 없었습니다. 국민이 이해할 수 없는 탈당을 선택한 정치인들은 회복하기 힘든 상처에 시달렸습니다. 이인제, 손학규, 정동영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인제는 97년 대선에서 이회창의 승리로 막을 내린 경선에 불복하면서 신한국당을 탈당합니다. 2002년 대선에서는 노풍에 밀려 대세론이 붕괴된 뒤 민주당을 탈당합니다. 잦은 당적변경에도 의원직을 유지해 ‘피닉제’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손학규의 탈당도 대표적인 실패사례입니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경선전은 이명박·박근혜·손학규의 3파전 구도였습니다. 승리 가능성이 희박했던 손학규는 한나라당 탈당이라는 승부수를 띄웠지만 대선 본선에 나서지도 못했습니다. 이번 대선에서는 민주당을 탈당한 뒤 국민의당을 선택했지만 안철수에 밀렸습니다. 정동영은 2007년 대선 참패와 18대 총선 패배 이후 전주 덕진 재보선 출마를 위해 탈당과 무소속 출마를 강행한 이후 정치적 위상이 날개없는 추락을 거듭했습니다. 만일 이인제, 손학규, 정동영의 정치인생에서 탈당이 없었다면 어땠을까요? 물론 역사에 가정은 없습니다. 그래도 해본다면 이인제는 97년 대선 이회창 당선에 이어 2002년 대선 승자가 되지 않았을까요? 손학규는 2007년 대선 이명박 승리에 이어 2012년 대권을 거머쥐지 않았을까요. 정동영의 경우 잦은 지역구 변경에 따른 철새 이미지를 접고 2012년 대선에 나설 또 한 번의 기회를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탈당에도 명분은 필요하다” 김영삼·김대중의 대선승리 왜?탈당에도 명분이 필요합니다. 국민들은 정치인들의 탈당에 대체로 부정적이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친박학살로 상징되는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일부 공천탈락자들은 탈당을 선택한 뒤 친박연대, 친박무소속연대를 만들어서 대성공을 거둡니다. 참여정부 첫해 열린우리당 창당 당시 한나라당을 탈당했던 김부겸, 김영춘 등 이른바 독수리5형제의 탈당도 그렇게 나쁜 평가를 받지 않았습니다. 20대 총선 새누리당 공천파동 속에서 탈당을 선택했다가 무소속으로 당선된 유승민 등도 국민적인 동의를 받은 것으로 봐야 합니다. 대선주자라면 탈당선택은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거물급 정치인 중 탈당경력에도 대선승리를 이룬 정치인들은 김영삼, 김대중, 박근혜를 제외하면 사례를 찾기 힘들 정도입니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80년대 중반 이민우 총재의 내각제 구상에 반발해 신민당을 탈당하고 통일민주당을 창당했습니다. 김대중은 이후 87년 대선을 앞두고 통일민주당을 탈당한 뒤 평화민주당을 창당했습니다. 묘하게도 탈당을 선택했던 두 사람은 87년 대선에서 양김단일화에 실패하면서 노태우에게 승리를 헌납합니다. 3당합당을 거쳐 김영삼은 92년 대선에서 승리했습니다. 92년 대선패배로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은 이후 정계복귀를 시도하면서 민주당을 탈당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97년 대선에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뤄냅니다. 박근혜의 경우 2002년 대선국면에서 잠시 탈당을 선택했을 뿐 2007년 탈당 유혹에도 경선승복을 선언했습니다. 그것은 2012년 대선승리의 소중한 밑거름이 됐습니다. 세 사람의 공통점은 강력한 지역기반입니다. 김영삼과 박근혜는 영남, 김대중은 호남입니다. 영호남은 세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든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냈습니다. 또 김영삼, 김대중의 과거 신민당 탈당 사례는 앞서 언급한 정치인들과는 달리 대의명분도 있습니다. ◇‘최대 피해자’ 안철수 vs ‘최대 수혜주’ 유승민의 미래는?5자구도로 치러진 19대 대선에서 탈당이라는 주홍글씨를 새기고 대선에 나선 후보는 안철수와 유승민입니다. 말장난 같지만 대선에서 승리하고 싶다면 탈당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확고부동한 지역기반을 갖춘 김영삼, 김대중, 박근혜조차도 예외는 없었습니다. 김영삼·김대중은 신민당 탈당 이후 치러진 87년 대선에서 나란히 패배했습니다. 김영삼이 ‘탈당=대선패배’라는 공식을 깨는 데는 5년이 걸렸습니다. 김대중의 경우 그야말로 천우신조입니다. 97년 대선을 앞두고 또다시 탈당을 선택했지만 이인제의 독자출마로 어부지리 대선승리를 거뒀다고 봐야 합니다. 2002년 한나라당 탈당한 박근혜는 그해 대선에는 나서지도 못합니다. 2007년 대선에서는 경선에서 패배했고 탈당 이후 10년만에 치러진 2012년 대선에서 어렵게 승리를 거뒀습니다. 가히 ‘탈당=대선패배’의 저주라고 불러도 무방합니다. 그런 점에서 안철수와 유승민의 대선패배는 예견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4월 초순 대세론을 누리던 문재인과 양강구도를 형성했던 안철수는 TV토론 실패와 정체성 혼란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특히 집토끼와 산토끼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과정에서 전략적 실수가 적지 않았습니다. 대선 막판 바닥민심은 다르다며 역전극을 장담했지만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문재인에 이어 2위는커녕 홍준표에게마저 밀리며 3위로 내려앉았습니다. 이번 대선의 최대 피해자입니다. 보수혁신을 강조했던 유승민은 무자격자로 비난했던 홍준표 득표에게 뒤지며 완패했습니다. 선거막판 집단탈당 역풍에 따른 동정론과 본인의 진정성이 인정받으면서 겨우 4위로 대선을 마무리했습니다. 만일 대선이 5월말에 열렸다면 유승민이 어느 정도 득표를 얻었을지는 예측하기 어렵지만 지금 수준보다 더 높을 것이라는 점은 확실합니다. 그런 점에서 대선승자 문재인을 제외한다면 유승민은 이번 대선의 최대 수혜주입니다. 과연 두 사람은 2022년 차기 대선에서 권토중래할 수 있을까요? 지역 기반을 잃었다는 점에서 매우 회의적입니다. 안철수는 20대 총선에서 압도적 지지를 보냈던 호남 기반을 잃었습니다. 유승민 역시 영남 득표는 안철수에게마저 밀리며 배신자 이미지를 씻지 못했습니다. 돌파구는 지역기반을 뛰어넘을 가치와 비전의 제시입니다. 다행스러운 점은 이번 대선은 역대 어느 대선과 비교해도 고질적인 지역대립구도가 많이 완화됐습니다. 오히려 세대간 대결양상이 뚜렷해졌습니다. 후진적 정치문화를 본다면 새정치와 보수혁신을 내세운 두 사람의 가치는 여전히 변수입니다. 안철수와 유승민은 탈당이라는 주홍글씨에도 대선승리를 거머쥐는 제2의 김영삼이나 김대중이 될 수 있을까요? 선택은 5년 후 국민의 몫입니다.
- 文측 “安, 내공부족에 양강 깨져…洪, 후보자격 없어”(종합)
- 불기 2561년 부처님오신날인 3일 서울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에서 열린 봉축 법요식에서 안철수 국민의당(왼쪽 부터),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가 얘기를 나누는 동안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사진=연합뉴스)[이데일리 유태환 기자]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측은 3일 안철수 국민의당,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에 대해 내공부족과 후보자격을 지적하며 평가절하 했다. 동시에 절박함을 호소하면서 자신들에 지지를 모아줄 것을 당부했다.◇“안철수, 정체성 혼란…홍준표, 보수 대변 자격 없어”문 후보 측 김민석 종합상황본부장은 이날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안 후보는 내공 부족으로 지지율을 지키지 못하고 양강구도가 깨진 것”이라며 “모든 문제의 핵심은 정체성 혼란”이라고 분석했다. 안 후보가 진보와 보수 양쪽 표를 모두 얻으려다 지지율이 떨어졌다고 비판한 것으로 풀이된다.김 본부장은 “햇볕이냐 탈볕이냐, 정권교체를 할 것이냐 타협할 것이냐 이 문제에 답하지 못했다”며 “국민의당이 이 문제에 대해 일관된 태도를 취하지 못하는 것에도 명료히 지도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그러면서도 “애초부터 민주세력 뿌리부터 시작한 국민의당”이라며 “이 어려운 상황에서 펼쳐갈 개혁 국정의 동반자로서 정체성을 회복해 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대선 후 국민의당과 연대를 고려해 둔 발언으로 해석된다.김 본부장은 홍 후보에 대해서도 “촛불 민심으로 시작된 대선에서 홍준표 후보와 자유한국당을 논하게 된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라며 “자유한국당과 홍 후보는 품격과 자존심을 생명으로 하는 보수를 대변할 자격 없다”고 날을 세웠다. 그는 “품격이 아닌 막말과 매너가 아닌 색깔론, 준법이 아닌 (경남 지사) 사퇴 시한 꼼수를 부렸다”며 “이런 것을 자행한 자유한국당은 사실 애초부터 대선에서 석고대죄를 하고 후보를 안 내는 것이 옳았는데 결국 최악의 후보를 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劉, 햇볕정책 함께한 JP 반면교사로…沈, 토론으로 가치 인정”김 본부장은 이 자리에서 유승민 바른정당, 심상정 정의당 후보에 대한 평가도 이어갔다.유 후보에 대해선 “개인적으로 이번 선거 상황을 지켜보면서 유 후보가 안타깝다”면서도 “유 후보의 외교·안보관은 국가를 책임지기에는 너무 협소한 외눈박이 세계관”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보수 원조였던 김종필조차 햇볕정책을 여는데 함께 협력한 것을 반면교사로 삼아 생각을 바꿔야할 때 왔다”며 “유 후보의 낮은 지지율은 건전한 보수와 지향 세력에 눈을 크게 뜨라는 국민 요구”라고 평가했다.심 후보에 대해서도 “진보정당 의의란 것은 정치권이 고민하거나 제기하지 못한 건강한 진보적 의제를 던지는 것”이라며 “그런 점에서 좀 아쉽다. 심 후보와 정의당의 진보적 의제가 뭐였느냐”고 반문했다. 다만 “심 후보의 지지율이 10% 대 육박하거나 전후해 비쳐지는 데 이것은 주로 국면적 요인”이라며 “TV토론 후 형성 지지율은 구조적 역량을 넘어가는 수준으로 격려가 있는 것 아닌가”하고 분석했다.김 본부장은 이어 “(앞으로 유세방향은) 저희를 (지지율) 1위로 만들어 주고 계신 데 그것이 마지막 날 투표장까지 지속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국정에 대한 걱정과 고민, 절박함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게 유일한 전략”이라고 설명했다.한편 김 본부장은 앞으로 남은 1주일간 선거 국면 변수로 △가짜 뉴스 △기득권 세력의 몸부림 △집중력을 유지 못 한 내부 실수 등을 꼽았다.
- 한광옥 "국가에 헌신한 분"..'DJP 협상파트너' 故김용환 애도
- [이데일리 이준기 기자] 한광옥(사진) 대통령비서실장이 자유한국당 김용환 상임고문의 별세 소식을 듣고 “평소 존경하던 훌륭한 정치선배를 잃게 돼 가슴이 아프다”며 애도의 뜻을 표했다. 청와대의 한 참모는 9일 춘추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한 실장이 김 상임고문을 ‘나라와 국가를 위해 헌신한 분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며 한 실장의 소회를 전했다. 한 비서실장은 전날(8일) 김 고문 빈소를 찾아 고인의 명복을 빌었으며, 발인식에도 참석할 예정이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 명의의 조화도 보냈다.두 사람은 제15대 대통령선거 당시 후보단일화를 위한 ‘DJP(김대중·김종필) 연합’ 협상의 파트너이자 주역으로, 그 이후에도 각별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JP가 창당한 자유민주연합에서 부총재를 맡고 있던 김 고문은 1996년 JP의 위임을 받아 DJP 연합 협상에 나섰고, 당시 협상 파트너가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였던 DJ의 위임을 받은 한광옥 당시 국민회의 부총재였다. 두 사람은 1년여의 줄다리기 끝에 ‘대통령 후보 DJ·국무총리 JP’와 ‘내각제 개헌’ 등을 전제로 협상을 타결했고, 이는 DJ 당선의 밑바탕이 됐다.한 실장은 “협상하면서 신뢰 속에 비밀누설을 하지 않고 보안을 유지하는 등 힘든 시간을 보냈다”며 김 상임고문과의 인연을 회고했다. 이어 “정도 쌓였고 연배도 높았다”며 “협상 과정에서 원칙과 지략, 전략을 갖춘 정치를 보여줬던 분”이라고 치켜세웠다.한 실장이 2012년 18대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캠프에 합류하게 된 배경에도 김 상임고문이 있었다. 당시 김 상임고문은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강창희 전 국회의장, 현경대 전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 안병훈 전 조선일보 부사장, 김용갑 전 의원 등과 비공개 정기모임(일명 ‘7인회’)을 함께 하며 박 전 대통령을 막후에서 도왔다. 그는 김 상임고문의 건강이 악화한 사실을 알지 못한 데 대해 자책하기도 했다. 한 실장은 “탄핵 국면으로 지난 1년여간 뵙지 못했던 게 죄송하다”고 했다. 한편 김 상임고문은 지난 7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5세, 호는 정암(靜巖).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고 장례는 4일장으로 치러진다. 유족은 나춘구 여사와 아들 기주·기영씨가 있다.
- '공연장 피아노' 롯데홀 손열음·전당 임동혁 골랐다
- 피아니스트 손열음(오른쪽)과 임동혁은 각각 롯데콘서트홀과 금호아트홀, 경기도문화의전당의 연주용 피아노를 직접 고른 주인공이다. 두 사람은 최상의 컨디션을 지닌 피아노 공수를 위해 독일 함부르크 스타인웨이 본사를 방문해 직접 타건하고 소리를 들어본 뒤 심사숙고해 선택했다(사진=경기도문화의전당·롯데콘서트홀).[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내 이름은 ‘594115’(일련번호). 고향은 독일 함부르크야. 오늘은 대한민국 서울에서 새 식구들을 만나는 날이야. 이미 나보다 먼저 온 형들이 있대. 571318·550699·501610이라고 불러. 너무 길다 싶으면 318·699·610 이렇게도 부르지. 독일서 날 직접 고른 피아니스트는 이진상이래. 서울의 첫 무대를 함께할 파트너기도 해. 날 무척 좋아하는 듯했어. 혹시 무대 위 나를 본다면 알은 체 하길. ‘아마 115일 거야’라고….” 2013년 4월 16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전당에 피아노 한 대가 반입될 당시 촬영한 영상을 보고 재구성한 글이다. 피아니스트 신수정과 이진상은 2012년 예술의전당 담당자들과 함께 독일 스타인웨이 본사를 방문해 직접 테스트를 해보고 피아노 한 대를 골랐다. 바로 ‘115’이다. 예술의전당 측은 “현재 10대를 보유 중이고, 사용하는 피아노는 7대다. 그중 ‘115’는 5년 정도된 피아노로 연주자들에게 인기”라며 “2012년 이전에는 사전조사를 통해 독일 본사에 주문하고 공수했다”고 귀띔했다. 피아니스트 이진상공연장의 피아노는 악기를 가지고 다닐 수 없는 피아니스트에게 그날의 연주력을 판가름하는 중요한 척도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웬만큼 이름난 공연장은 유명 아티스트나 전문가에게 의뢰해 피아노를 까다롭게 고른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꼽히는 호로비츠가 투어 때마다 자신의 피아노를 직접 옮겨와 조립한 뒤 연주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임선미 경기도문화의전당 홍보팀장은 “전설처럼 통하는 이 일화는 콘서트홀에 비치된 피아노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라면서 “한정된 예산으로 최상의 모델을 고르려고 애쓴다”고 말했다. 이어 “원하는 모델을 찾았더니 국내엔 단 1대뿐이더라. 독일 현지를 방문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같은 모델이라도 선택 폭이 넓어진다”고 덧붙였다. △피아노 직접 선택한 아티스트 누군가 보니…최근 경기도문화의전당의 새 피아노 구입에 일조한 이는 스타 피아니스트 임동혁이다. 베를린에 체류 중인 임동혁은 아홉 대의 피아노를 직접 타건하고 소리를 들어본 뒤 심사숙고해 D타입 풀사이즈 2대의 그랜드피아노 스타인웨이 D-274를 선택했다. 경기도문화의전당에서 새로 구입한 스타인웨이 피아노 일련번호 ‘605290’임 팀장은 “그동안 짧게는 13년, 길게는 25년을 쓴 피아노를 사용해온 터라 연주를 하던 피아니스트들이 피아노 컨디션에 아쉬움을 토로했다”며 “전당 무대에 자주 올라 피아노의 상태를 잘 알고 있는 실력파 임동혁이 기꺼이 재능을 기여했다”고 고마워했다. 국내에 가장 많은 피아노를 공수해온 피아니스트는 손열음이다. 무려 대당 2억원대의 피아노를 4대 구입한 롯데콘서트홀을 비롯해 광화문 금호아트홀, 금호아트홀 연세의 피아노까지 손열음이 직접 골랐다. 이미란 롯데콘서트홀 홍보책임은 “손열음은 독일 하노버에서 공부하고 있어 스타인웨이 본사와는 1시간대 거리다. 게다가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협연, 여러 차례 독주회 경험도 있다”며 “여러 장르의 다양한 음색 선별에 탁월한 피아니스트인 점을 고려해 의뢰했다”고 했다. 이 홍보책임은 “정작 손열음은 지난해 8월 개관 이후 롯데콘서트홀 무대에 아직 서지 못했다”면서 “오는 22일 손열음의 음악편지를 통해 첫 연주를 한다”고 웃었다. 개관 당시 세종문화회관의 안방마님 피아노 구입 일화는 흥미롭다. 배문환 초대관장의 회고록에 따르면 1978년 “김종필 국무총리가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구입하라고 지시해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고 있는 백건우 씨에게 부탁해 구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선택하면 아티스트 임무 끝…다음은 조율사 몫 파이니스트 조성진(왼쪽)과 김선욱20년 경력의 김용래 피아노조율사는 프랑스 피아니스트 피에르 로랑 에마르를 깐깐한 연주자로 기억하고 있다. 2012년 첫 내한공연 당시 조율을 담당했던 그는 평소 1~2시간이던 피아노 튜닝시간을 꼬박 하루로 늘렸다. 에마르가 원하는 악기상태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피아노 줄 장력부터 건반 연타 음색, 잔향까지 주문사항은 대단히 구체적이었다. 김 조율사는 “같은 공장에서 같은 규격으로 만들었더라도 음색이 같을 수 없다”며 “악기 성향은 다다르다. 사람 같이 대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그는 “우선 공연장의 크기, 울림에 맞게 튜닝한 뒤 연주자가 일부 요구하면 바꿔준다. 다만 연주곡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그날의 곡과 작곡가에 맞춰 튜닝하는 게 조율사가 갖춰야 하는 자격”이라고 했다. 피아니스트 김선욱은 튜닝 시간만 3~4시간 걸린다. 단단하면서 본인이 듣기에 깨끗하고 선명한 소리를 선호하는 편. 또 조율사가 대부분 연주 리허설까지 지켜보는 반면 김선욱의 경우 연주회가 끝날 때까지 대기한다. 지난 1월 독주회에서 조성진은 첫날과 둘째 날 피아노를 바꿔 연주했다. 김 조율사는 “프로그램이 달라 피아노 교체를 추천했는데 성진이가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했다.△5년이하 선호·전성기 지나면 창고행예술의전당·롯데콘서트홀·금호아트홀·LG아트센터 모두 스타인웨이의 피아노를 쓴다. 김 조율사는 “스타인웨이 피아노는 전문 숙력가들의 최고기술로 제작했다”며 “건반의 빠른 반응속도와 무게감, 감기는 촉감 등 스펙트럼이 넓은 게 장점이다. 특허권을 가진 그들만의 독창적인 기술이 세계적으로 점유율을 높인 이유”라고 말했다. 오래될수록 명품 대접받은 현악기와 달리 피아노는 퇴물 취급을 받는다. 맑고 영롱했던 소리가 시간이 갈수록 가벼워지고 울림도 짧아져서다. 세종문화회관이 김 전 국무총리 지시에 의해 39년 전 구입한 스타인웨이 피아노 역시 연주자에게 선택받지 못해 창고에 보관 중이다. 연주자들은 5년 이하의 젊은 피아노를 선호하는 편. 롯데콘서트홀 측은 “연주 전에 피아노를 테스트해보고 자신이 선호하는 음색에 맞는 것을 직접 고르거나 조율사가 연주자의 개성과 곡에 맞게 제안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다만 소리는 상대적이라 그날의 분위기와 연주자의 컨디션, 청중 수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손열음은 치기 편한 피아노를 선호한다. 손열음은 “피아니스트들은 리허설 후 바로 본 공연에 들어가기 때문에 쉽게 적응할 수 있는 서너 대를 먼저 고른 뒤에 최종적으로 성격이 좀 강하고 색깔있는 피아노를 선택했다”며 “밋밋하면 주고받을 게 없어 답답하고, 개성이 너무 강하면 연주자가 피아노에 맞춰야 해서 힘들다”고 귀띔했다. 대당 2억원대인 롯데콘서트홀 개관 피아노를 고른 손열음(사진=롯데콘서트홀).손열음이 금호아트홀 연세의 피아노를 직접 독일서 고르는 모습(c)Gerrit Glaner
- [대선 맛보기] 단일화의 한계와 역설…“왜 모두 실패로 끝날까”
- [이데일리 김성곤 기자] 대선판에서 늘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게 바로 ‘단일화’입니다. 그러나 단언컨대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습니다. 팩트체크를 해보면 성공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97년과 2002년 대선에서 야권의 승리는 DJP(김대중+김종필) 연대와 노무현·정몽준 단일화가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표면적으로 볼 때만 그렇습니다. 본질적으로 보면 단일화는 늘 실패합니다. 후보단일화 논의가 갖는 구조적 한계 때문입니다. ‘1+1은 2 이상이 될 것’이라는 장밋빛 청사진은 사실상 억지에 가깝습니다. ‘1+1은 이유야 어찌됐든 2 미만’이 정답입니다. 5.9 장미대선 역시 단일화 논의가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중심축은 두 가지입니다. 홍준표 vs 유승민의 범보수 단일화와 안철수·홍준표·유승민을 잇는 반(反)문재인 3각 단일화입니다. 단일화 여부에 따라 차기 대선은 심상정을 제외한다면 문재인 vs 안철수 vs 보수후보의 3자구도 또는 문재인 vs 안철수 양자구도가 될 수 있습니다. 단일화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후보등록일(4월 15·16일) 이전에 논의가 마무리돼야 합니다. 4월 3일 기준으로 대선 D-36일입니다. 공식선거운동 기간은 4월 17일부터 5월 8일까지 22일간입니다. 각 후보간 차이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리고 시간도 없습니다. 단일화는 과연 가능할까요? 효과는 위력적일까요? ◇단일화는 늘 야권의 프레임…DJP연대와 盧·鄭단일화 과연 성공이었나?역대 대선에서 단일화는 늘 야권의 프레임이었습니다. 약했기 때문에 힘을 합치지 않으면 도저히 승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DJP연대와 노무현·정몽준 단일화가 대표적입니다. 물론 92년 대선 이전에는 달랐습니다. 진보가 보수보다 더 강력했습니다. 당장 87년 대선 결과만 살펴봐도 분명합니다. 진보(김영삼·김대중)의 득표율 합계는 55% 정도로 보수(노태우·김종필)의 45%보다 무려 10%포인트가 많습니다. 대한민국 정치가 기울어진 운동장이 된 것은 90년 3당 때문입니다. 87년 대선 당시 이른바 1노3김의 정치지형은 반(反)김대중, 이른바 호남포위 구도를 만들어냅니다. TK(노태우), PK(김영삼), 충청(김종필)라는 지역이 보수라는 이름 아래 하나의 거대한 정치세력을 형성합니다. 이후 총선이나 지방선거에서 부분적으로 야권이 승리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지만 대선은 늘 ‘기울어진 운동장’ 이론이 예외없이 적용됐습니다. 야권은 언제나 진보정당까지 포함한 연대를 이뤄야만 대선승리가 가능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에 시달렸습니다. 흔히 성공사례로 거론되는 DJP연대와 노정 단일화가 과연 성공적이었는지는 의문입니다. 대선결과로만 본다면 맞습니다. 그러나 DJP연대는 국민의정부 후반 붕괴됐고 노정 단일화 역시 대선 전날밤 파기됐습니다. 사실 ‘대선후보 김대중·총리 김종필’을 내세운 DJP연대는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모범적인 단일화였습니다. 장기간의 협상을 통해 50대 50 지분의 공동정부 구성에 합의하고 내각제 개헌도 합의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DJP연대가 97년 대선승리를 가져왔다는 것은 논리적 비약입니다. 외환위기 사태라는 여권발 악재에도 신승을 거둔 것은 이인제의 독자출마가 가져온 어부지리였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정몽준 단일화는 포장마차에서 소주잔 러브샷을 하면서 이뤄낸 성과였습니다. 노무현의 기적적인 대선승리에는 정몽준과의 단일화가 큰 힘이 됐습니다. 그러나 대선 전날 정몽준의 지지 철회와 문전박대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엄청난 위기의식을 느낀 지지층의 막판 대결집이 이뤄낸 성과로 보는 게 더 타당합니다. ◇2012년 대선, 문재인+안철수 단일화에도 왜 박근혜가 승리했나단일화 없이 대선에 나선 야권은 대참패를 경험했습니다. 2007년 정동영의 패배가 대표적입니다. 문국현과의 단일화는 물론 구민주당 이인제와의 단일화에도 실패했습니다. 진보진영의 권영길과의 단일화도 이뤄내지 못했습니다. 결과는 531만표의 대참패였습니다. 2012년 대선은 정반대의 구도였습니다. 문재인은 안철수와의 단일화에 성공했습니다. 통합진보당 이정희, 진보정의당 심상정마저 정권교체를 명분으로 대선출마를 포기합니다. 박근혜 vs 문재인의 완벽한 일대일 구도가 만들어집니다. 박근혜가 아무리 이명박과 차별화된 이미지를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MB정부의 레임덕 분위기와 투표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문재인의 대선승리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2012년 총선과 대선은 이른바 ‘단일화 만능주의’에 대한 경종을 울립니다. 2012년 4월 19대 총선에서 야권은 역대 어떤 선거보다 강력한 단일대오를 형성합니다. 그러나 총선 과반은 박근혜가 이끌었던 새누리당의 몫이었습니다. 대선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재인·안철수 단일화는 표면적으로는 성사됐습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아름답지 못한 불완전한 단일화였습니다. 기대했던 시너지 효과보다는 마이너스 효과가 더 많았습니다. 우선 단일화 논의에서 후보를 양보한 쪽의 지지층이 투표를 포기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단일후보와 경쟁하는 후보의 지지층이 엄청난 위기의식을 느끼면서 보다 더 강력하게 결집할 수 있습니다.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를 지지했던 50대의 기록적인 투표율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전체 투표율은 75.8%였지만 50대 투표율은 82.0%에 달했습니다. 여하튼 4년여가 흘렀지만 한쪽은 다른 한 쪽이 적극적으로 돕지 않아서 대선에서 패배했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그렇게 말하면 짐승만도 못하다는 거친 반박도 있습니다. 단일화 논의를 둘러싼 당시의 힘겨루기와 감정의 앙금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단일화는 식상한 프레임입니다. 정치공학적 단일화는 2002년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이후 폐기돼야 할 선거전략입니다. 20대 총선에서 야권분열에도 불구하고 여소야대가 만들어진 것은 매우 상징적인 장면입니다. ◇민주당 대선 경선 이후…문재인은 왜 지지율 50%를 넘지 못할까단일화가 왜 기대만큼의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하는지는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을 보면 잘 드러납니다. 민주당 소속 빅3 주자인 문재인, 안희정, 안철수의 지지율 합계는 차기 대선 다자구도 지지도에서 평균적으로 보통 55% 이상 또는 60%선에 육박합니다. 최근 안철수의 상승세와 안희정의 하락세로 민주당 빅3 주자의 지지율 합계가 다소 하락했지만 어떤 조사든 50% 이상은 넘깁니다. 4월 3일 민주당 대선후보로 문재인 선출이 거의 확정적입니다. 만일 문재인이 안희정과 이재명의 지지표를 모두 흡수할 수 있다면 대선 본선은 해보나 마나입니다. 다시 말해서 문재인이 50% 이상이기 때문에 어떤 후보가 나서도 49.99% 미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민주당 대선후보를 문재인으로 가정한 정당별 5자 가상대결에서 문재인의 지지율은 40%대 초반 수준에 그칩니다. 그렇다면 최소 10%에서 최대 15% 가량의 지지율은 어디로 갔을까요? 이는 민주당 대선경선 과정을 문재인, 안희정, 이재명 빅3의 후보 단일화 과정으로 이해하면 쉽게 풀립니다. 사실 정당의 대선후보 경선 과정은 정당 내부의 자체적인 단일화나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해 문재인이 민주당 대선후보가 되면 안희정, 이재명 지지표 100%가 문재인에게 가지 않습니다. 3일 발표된 리얼미터의 3월 5주차 주간집계(보다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고)에서 민주당 빅3 주자의 지지율은 문재인 34.9%, 안희정 12.1%, 이재명 10.0%입니다. 합계는 57.0%입니다. 그러나 문재인을 민주당 대선후보로 가정한 정당후보별 5자 가상대결은 문재인 43.0%, 안철수 22.7%, 홍준표 10.2%, 유승민 3.9%, 심상정 3.9%로 나타납니다. 단순비교만 해도 14.0%가 사라졌습니다. 리얼미터 분석에 따르면, 다자구도에서 안희정 지지층(안철수 23.0%, 문재인 21.9%, 유보층 37.7%) 10명 중 2명 정도만이 문재인으로 이동했습니다. 이재명 지지층(문 42.7%, 안 11.6%, 유보층 33.5%)은 10명 중 4명 정도가 이동했습니다. 단일화라는 게 성사되면 결국 지지율을 단순 합산하는 것보다는 반드시 빠지게 돼있습니다. 단일화의 역설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단일화 성사 불투명·효과 불분명…여론조사 단일화는 코미디정치 완결판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홍준표·유승민의 범보수 단일화는 가능할까요. 그리고 안철수·홍준표·유승민을 묶는 비문연대 차원의 3각 단일화가 가능할까요? 매우 어렵습니다. 우선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은 박근혜 탄핵을 놓고 지난 12월말 분당했습니다. 불과 3개월여만에 또다시 연대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습니다. 바른정당은 홍준표의 후보자격이 없다, 한국당은 유승민은 배신자라고 융단폭격만 쏟아내고 있습니다. 단일화 주도권 잡기라기보다는 단일화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점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홍준표·유승민 단일화 논쟁의 본질은 대선패배 이후 보수의 주도권 쟁탈전으로 보는 게 더 타당합니다. 아울러 안철수·홍준표·유승민의 3각 단일화는 더 어렵습니다. 앞서 리얼미터 조사에서 5자 가상대결은 문재인 43.0%, 안철수 22.7%, 홍준표 10.2%, 유승민 3.9%, 심상정 3.9%입니다. 심상정이 완주한다고 가정할 때 문재인(43.0%)의 지지율은 안철수 22.7%, 홍준표 10.2%, 유승민 3.9%의 지지율 합계 36.8%보다 더 높습니다. 단순합산해도 비문 단일후보의 지지율은 문재인에 미치지 못합니다. 더 큰 문제는 비문단일후보의 성사 가능성입니다. 홍준표·유승민 보수후보단일화도 어려운데 안철수까지 포함할 경우 성사는 99.99% 불가능합니다. 역대 대선에서 특정후보에 반대하기 위한 3각 단일화 논의는 시도된 적도 없고 성사된 적도 없습니다. 영호남 연합정권이라는 한국정치의 금자탑과 같은 명분에도 속사정은 문재인 정말 싫다 한마디로 요약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풍도 예측불허입니다. 만일 안철수가 비문 단일화 논의에 뛰어들 경우 호남을 기반으로 하는 전통적 지지층의 이탈이 어느 정도 불가피합니다. 아울러 햇볕정책을 계승하는 국민의당과 사드포대의 추가배치 등 대북강경책을 고집하는 한국당 및 바른정당과의 결합은 더욱 어렵습니다. 이 모든 한계를 뛰어넘어 비문 단일후보가 만들어진다고 해도 단일화의 시너지효과보다는 이탈표가 오히려 더 커질 수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단일화 방식의 적절성입니다. 한국적 현실에서 단일화 방식은 오로지 ‘여론조사’밖에 없습니다. 김대중과 김종필의 DJP연대와 같은 방식의 후보 단일화는 불가능합니다. 강력한 지역기반과 정치적 카리스마를 갖춰도 쉽지 않은 일인데 현 구조에서 DJ와 JP만큼 막강 파워를 갖춘 정치인은 아예 없습니다. 아울러 여론조사방식의 단일화가 갖는 한계도 살펴봐야 합니다. 여론조사에는 오차범위라는 게 있습니다. A후보와 B후보가 단일화에 합의해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A후보는 45.5%, B후보는 41.5%가 나왔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모름 3%). A,B 후보의 격차는 4.0% 포인트입니다. 만일 표본오차가 ±2.5%p(95% 신뢰도)라면 오차범위 이내의 격차이기 때문에 통계학적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만일 오차범위 이내의 격차도 사전에 우열을 인정하고 후보를 선정하면 정치는 완전히 코미디가 됩니다. 2002년 노무현·정몽준 후보단일화를 둘러싸고 각종 잡음이 끊이지 않았던 것도 여론조사를 통한 후보단일화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 손학규 "경기도에서 키웠던 꿈, 대한민국 꿈으로 만들겠다"
- 국민의당 대선주자인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가 31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행신동의 한 교회에서 열린 고양 지역 지지자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이데일리 하지나 기자] 손학규 국민의당 대선 경선 후보는 1일 “경기도에서 키웠던 꿈을 대한민국의 꿈으로 키우고자한다. 경기도민의 자부심을 대한민국 국민의 자부심으로 만들고자 한다”며 자신의 경기도지사 경험을 부각하며, 지지를 호소했다.손 후보는 이날 수원 종합운동장 실내체육관에서 진행된 제19대 대통령 후보자 선출을 위한 경기도 지역 경선 합동연설회에서 “고향 경기도에 다시 서니 감회가 새롭다”며 운을 뗐다.그는 “경기도는 손학규의 꿈의 현장이었다”며 “기업이 활기를 뛰며 투자했고 74만개의 일자리에 연 평균 7.5%의 경제성장률을 달성했다. 또 북한에 대한 벼농사 지원사업으로 남북 평화 협력의 한 축을 담당했다”고 강조했다. 또한 “경기도는 저 손학규의 열정의 현장이었다”면서 “일자리 경기도, 중소기업 경기도, 복지 경기도, 교육 경기도, 보육 경기도, 문화 경기도, 여성 경기도, 농업 경기도, 체육 경기도, 그리고 남북평화의 경기도에 이르기까지 경기도는 제 일생의 기쁨이었고 보람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 “저에게는 아직 꿈이 있다”면서 “이 꿈을 이룰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다. 손 후보는 이어 “제왕적 대통령제를 이대로 두고서는 새 나라의 꿈을 결코 이뤄질 수 없다”며 “개헌을 통해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위기를 극복할 새로운 체제를 갖추고, 위기를 극복할 정치세력을 만들어야 한다”며 대연정을 주장했다. 손 후보는 “김대중 대통령은 집권을 위해서 적과의 동침을 마다하지 않았다. 자기를 죽이려했던 김종필과 손을 잡고, DJP 연합으로 정권을 잡고 IMF 위기를 극복했다”면서 “모든 개혁세력들을 한마당으로 불러들여, 개혁대연합으로 대선승리를 이뤄내고, 개혁공동정부를 만들겠다.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국민들에게 저녁이 있는 삶을 선사하겠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