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핵심 계열사인 대한항공 사내이사직에서 퇴진했다. 어제 열린 주총에서 참석 주주 3분의 2 이상의 동의를 얻지 못해 연임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1999년 부친의 뒤를 이어 대표이사 자리에 오른 지 20년 만의 일이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대기업 총수가 국민연금의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 이른바 스튜어드십 코드에 의해 물러나게 된 첫 사례다.
조 회장의 연임안 부결은 어느 정도 예상됐던 바다. 2대 주주인 국민연금이 ‘기업가치 훼손’을 들어 반대하기로 한 데다 해외연기금과 기관, 소액주주들 상당수가 이에 가세하려는 조짐이 이어졌다. ‘땅콩 갑질’에서부터 연이어 드러난 조 회장 일가의 불법·비리 혐의에 등을 돌린 것이다. 재벌 오너도 주주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지위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경고가 현실화된 것이다.
재계가 충격에 빠진 것은 당연하다. 이번 사태가 선례로 작용해 자칫 경제계 전반으로 확산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분위기다. 가뜩이나 정부의 친노동·반기업 정책으로 경영 여건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행동주의 펀드들이 갖은 압력을 넣으며 경영권을 흔드는 상황이다. 여기에 국민연금까지 나서면 기업 활동은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고 투자나 일자리 창출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국민연금이 주주권 행사로 지배주주의 전횡을 막아야 한다는 원칙론에는 십분 공감한다. 하지만 이번처럼 부정적인 사회 여론을 등에 업고 기업을 길들이려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시각도 없지 않다. 앞으로도 ‘국민 정서’를 내세워 정권에 미운털 박힌 기업을 흔드는 일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주주권 행사에 가급적 신중할 필요가 있다.
정권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한 국민연금의 경영 개입은 뒷말이 따를 수밖에 없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눈을 돌리다가 자칫 본연의 책무인 국민의 노후자금 증식에 소홀해지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지난해만 해도 마이너스 수익률로 6조원 가량의 투자금을 까먹었다. 수익률 제고에 힘을 쏟아야 한다. 기업들도 이번 사태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오너 주변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나타나지 않도록 투명·윤리경영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함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