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김환기 회고전’이 마지막이었다. 삼성미술관 리움이 공식적으로 언급한 기획전 말이다. 전시는 열지도 못했다. 열겠다는 예고편만 날린 그 시점에 멈춰 섰으니까. 2017년 3월의 일이다. ‘김환기 회고전’은 그해 4월부터 진행할 예정이었으니 진짜 코앞이었다. ‘리움과 김환기’. 거대한 두 산맥이 과연 어떤 장면을 연출할지 미술계는 물론 대중의 관심도 한껏 달아올랐던 터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홍라희와 김환기’였다. 국내 미술계를 쥐락펴락한 그 홍라희와 그 김환기. 두 인물이 이뤘을 극적인 시너지를 어디서 다시 찾을 수 있겠나. 하지만 지상 최대의 이벤트가 될 뻔했던 드라마는 끝내 불방했고 두고두고 많은 이들의 아쉬움만 번져냈다.
리움미술관이 다시 문을 연다. “10월 8일부터 운영을 재개한다”고 못을 박았다. 호암미술관도 함께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 리움미술관과 경기 용인시 처인구 호암미술관은 ‘이건희컬렉션’, 아니 그 이전 ‘삼성컬렉션’을 세우고 가꾼 양대 축이다. 이병철(1910∼1987) 삼성 창업자와 이건희(1942∼2020) 회장으로 이어진 삼성가 미술품 소장사에서 주춧돌이란 뜻이다. 두 주춧돌은 삼성문화재단이 관리·운영하고 있다.
귀환하는 리움미술관의 신고식은 이를 기념하는 ‘재개관 기념 기획전’으로 치를 예정이다. 타이틀은 ‘인간, 일곱 개의 질문’. 미술관은 “예술의 근원인 인간을 돌아보고 위기와 재난의 시기에 인간 존재의 의미를 되새기는 인문학적 전시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이를 위해 국내 대표 설치미술가인 이불, 양혜규, 서도호, 박이소 등과 더불어 미디어 아티스트 정연두 등도 나선다.
|
이름만 걸고 명맥만 유지하던 ‘상설전’도 새로운 주제를 걸고 전면 개편해 공개한다. “지금껏 전시하지 않았던 작품을 대거 선보일 것”이라며 기대감을 높였다. 사실 상설전은 이건희 회장 소장품 2만 3000여점이 국가기관에 기증되며 대형 변화가 예고됐던 터다. 그렇다고 규모와 내용을 상상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이미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등에서 열고 있는 ‘이건희컬렉션 특별전’으로 슬쩍 엿보기도 했으니. 그들 전시의 규모와 내용이 확장한 형태라고 봐도 무방한 거다. 덕분에 지난 몇개월 동안 이건희컬렉션을 타고 실체보다 이름을 세상에 먼저 알린 유명 작품들을 두루 살필 수 있게 됐다. 미국 추상표현주의 화가 윌렘 드 쿠닝의 ‘무제 XIV’(1975), 조각가 루이즈 부르주아 ‘밀실 XI’(초상·2000), 중국작가 장샤오강의 ‘소년’(2009) 등이다. 여기에 강력한 한방이 될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거대한 여인 Ⅲ’(1960)도 나선다. 세계적인 조각 거장 자코메티의 ‘거대한 여인 Ⅲ’은 이건희컬렉션이 발표되기 이전에 수없이 입을 탔던 작품이다. 이유는 작품가 때문. 자코메티의 작품들은 미술시장에서 수백억원에서 1000억원대까지 거래되고 있다.
호암미술관도 재개관을 기념한 기획전을 준비한다. ‘야금(冶金)-위대한 지혜’란 테마로 열 전시는 금속공예를 기둥으로 세우고 전통부터 현대까지 한국미술사를 되짚는 융합전시로 꾸리게 된다.
|
홍라희 관장 사임 후 4년 넘게 닫아걸었던 빗장
리움미술관의 재개관은 ‘그때’ 이후 4년 6개월여 만이다. ‘김환기 회고전’을 멈춰 세울 만큼 중차대했던 ‘그 일’은 홍라희(76) 관장의 전격 사임이었다. 당시 홍 관장은 호암미술관장직도 같이 내려놨다. 후임도 정하지 않은 급작스러운 일이라 세간에선 동생 홍라영(61) 총괄부관장이 미술관을 맡아 운영할 것이란 짐작들을 내놨더랬다. 하지만 불과 이틀 뒤 홍 부관장도 연달아 사임하자 미술계는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삼성이 미술사업에서 손을 떼려는 신호가 아니냐” “리움미술관이 제 기능을 못하면 국내 미술시장의 위축은 불 보듯 뻔하다”며 웅성거렸던 거다.
홍 전 관장이 왜 사임했는가를 두곤 ‘숨은 사연 찾기’를 하느라 난리도 아니었지만 이해할 만한 “일신상의 이유”가 꼽혔다. 남편 이건희 회장의 와병에 아들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 이어 미래전략실 해체라는 삼성그룹의 격변까지. 그 와중에 무슨 미술이냐고 한다면 납득하지 못할 것도 없다고 했다.
|
미술계, 리움미술관 역할 기대…“재개관 환영”
사실 리움미술관이 문을 다시 연다는 얘기는 지난해 말부터 삐져나왔더랬다. 한창 리모델링 중이라며, 시점은 올 3월로 예상했다. 그런데 1월 공교롭게도 이재용 부회장이 다시 법정구속되고, 미술계로선 핵폭탄급쯤 될 ‘이건희컬렉션’이란 일련의 사건에 휩싸이며 그 시기가 늦춰진 것으로 보인다.
이번 재개관과 맞물린 가장 큰 변화는 리움미술관 운영위원장인 이서현(48)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의 부상이다. 이 이사장은 이건희컬렉션 기증을 사실상 주도해왔다. ‘특별전’이 열린 뒤 홍 전 관장과 함께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을 둘러보기도 했는데. 덕분에 지난달 본지와 인터뷰한,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이 말한 ‘3자 협업’도 탄력을 받게 됐다. 미술관을 방문한 자리에서 윤 관장은 “이건희컬렉션이란 공통분모를 가진 리움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이 함께하는 3자협의체를 제안”했고, “그렇게 해보자는 대답을 들었다”고 귀띔하기도 했다.
|
리움미술관이 주목받는 건 비단 ‘삼성’이란 이름값 때문만은 아니다. 말 그대로 ‘국내 최고’라서다. 사립미술관으로선 단연 톱이고 국립미술관과 견줘도 나으면 나았지 뒤지지 않는다. 그 덕에 일거수일투족 움직일 때마다 이슈를 만들었고 그 중심에 섰더랬다. 이번 리움미술관 재개관 소식에 미술계는 “무조건 환영한다”는 반응 일색이다. “국내 미술시장을 좌우할 만큼 막대했던 예전 영향력에 더해 이건희컬렉션으로 무게감까지 생겼다”며 “남은 건 세계로 확장해나가는 일”이라고 리움미술관의 역할을 기대했다. 다만 재개관을 기회로 달라진 모습을 기대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다. “그간 리움미술관이 고수했던 닫힌 분위기를 바꿔 대중에게 보다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기를 바란다”는 당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