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발(發) 경제위기를 뚫고 20여 년 만에 다시 ‘벤처붐’이 일고 있다. 연일 역대 최고치를 갈아치운 벤처투자액과 벤처펀드 결성실적이 이를 증명한다. 2000년대 초반 정보기술(IT) 강국 초석을 닦았던 ‘제1벤처붐’처럼 제2벤처붐은 코로나19 이후 경제를 이끌어갈 혁신성장 동력으로 주목받는다.
20년 만에 다시 온 벤처붐…“생태계 질적으로 달라져”
5일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벤처투자액은 4조 3045억원으로 제1벤처붐 당시인 2000년 2조 211억원에서 2배 이상 늘어났다. 같은 기간 벤처펀드 결성실적은 1조 4779억원에서 6조 5676억원으로 4배가량 뛰었다. 창업 지표인 신설법인 또한 6만 1456개에서 12만 3305개로 2배 이상 증가했다.
20여 년 만에 다시 찾아온 벤처붐에 벤처업계는 한껏 고무된 분위기다. 이정민 벤처기업협회 혁신벤처정책연구소 부소장은 “인터넷, IT(정보기술) 기반 중심이었던 제1벤처붐과 달리, 지금은 인공지능(AI)·바이오 등 미래산업 분야 핵심 기술로 무장한 기업들이 벤처 열풍을 이끌고 있다”며 “벤처투자나 신설법인이 늘어난 것도 단순한 양적 확대를 넘어 그만큼 벤처 생태계가 외연을 넓힌 것”이라고 말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100억원 이상 대형투자를 받은 기업도 역대 최다라는 부분이다. 올 1분기 100억원 이상 대형투자를 받은 기업은 23개에 달했다. 지난해 1분기에는 10개사만이 100억원 이상 투자를 받았다. 이처럼 ‘뭉칫돈’이 벤처에 쏠리면서 올해는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조원 이상 벤처기업)이 다수 등장할 것이란 기대감도 높아지고 있다. 이미 지난 4월 채팅 솔루션 업체 센드버드는 1116억원 규모 시리즈C 투자를 유치하면서 유니콘 기업에 등극했다. 또한 ‘핑크퐁’, ‘아기상어’로 유명한 에듀테크 업체 스마트스터디 역시 최근 투자유치 과정에서 1조원 이상 기업가치 규모를 인정받아 유니콘 기업 반열에 올라섰다.
정부도 벤처 생태계 발전을 적극 뒷받침하고 있다. 중기부 창업지원 예산은 지난 2000년 499억원에서 지난해 8492억원으로 16배나 뛰었다. 지난 1997년 벤처기업법 제정으로 제1벤처붐 기반을 마련한 것처럼, 중기부는 올해 제2벤처붐 확산에 필요한 벤처투자 관련 법·제도를 신속하게 마련할 계획이다. 이달 중에는 청년 창업 활성화 종합 대책도 발표할 계획이다. 권칠승 중기부 장관은 “창업 열기가 지속하는 가운데 제2벤처붐이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도록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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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벤처업계 일각에서는 ‘닷컴 버블’ 붕괴와 함께 사라진 제1벤처붐과 같은 전철을 밟을까 우려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2000년 당시 미국 나스닥 폭락으로 시작한 닷컴 버블 붕괴는 코스닥 지수 하락으로 이어져 당시 국내 벤처업계 암흑기를 가져왔다. 때문에 이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벤처 생태계를 튼튼히 할 법·제도적 기반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지만, 여전히 발걸음이 더디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의료·데이터 등 유망 산업 분야 규제 완화도 시급한 과제다. 전 세계적으로 디지털 헬스케어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국내 벤처·스타트업들도 인공지능·데이터를 활용한 의료 기술을 개발해 사업 기회를 엿보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원격의료나 의료데이터 활용이 의료법 등 규제로 막혀 해외에서 사업을 펼치는 기업이 적지 않다.
4차 산업혁명 시대 ‘쌀’로 불리는 데이터 분야에 대한 법·제도 마련도 거론된다. 지난해 ‘데이터 3법’(개인정보 보호법 · 정보통신망법 · 신용정보법 개정안) 통과로 이전보다 데이터 활용은 수월해졌지만, 아직 데이터산업의 개념이나 촉진 및 활성화 방안을 담은 기본법이 마련되지 않아 산업 발전이 더디다는 지적이 업계에서 꾸준히 나오고 있다.
이정희 중앙대 교수는 “벤처 열기가 영원히 이어질 수는 없기 때문에, 혁신성을 갖춘 기업이 빠르게 성과를 내 투자-성장-회수-재투자라는 선순환 구조를 지속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각 분야에서 기술력과 혁신성을 갖춘 기업을 선별해 지원하고 개별 산업 규제를 완화해 빠르게 성과를 낼 수 있도록 하는 핀셋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