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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태호의 그림&스토리]<20>붓은 총보다 강하다

▲화가들의 한국전쟁
전쟁 폭력성 고발한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한가족 고단한 피란길 그린 이수억 '6·25동란'
적나라하게 전쟁의 참상 드러낸 반전 화가들
단순한 감상의 도구 넘어서는 예술을 실천해
  • 등록 2021-06-25 오전 3:30:00

    수정 2021-06-25 오전 3:30:00

파블로 피카소가 1951년에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 피카소의 대표적 반전 회화다. 하지만 여인과 아이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병사가 누구인지 명확치 않아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한국에서의 학살’이란 제목뿐 한국인은커녕 동양인도, 또 철갑 투구로 무장한 이들의 신분을 알아챌 단서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덕분에 “피카소가 표현하려 한 것은 특정 전쟁이 아니라 전쟁 그 자체”라는 해석이 오히려 설득력을 얻는다. 나무판에 유채, 209×109㎝, 프랑스 파리 피카소미술관 소장.
혹독한 세상살이에 그림이 무슨 대수냐고 했습니다. 쫓기는 일상에 미술이 무슨 소용이냐고 했습니다. 옛 그림이고 한국미술이라면 더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는 일을 돌아보면 말입니다. 치열하지 않은 순간이 어디 있었고, 위태롭지 않은 시대가 어디 있었습니까. 한국미술은 그 척박한 세월을 함께 견뎌온 지혜였고 부단히 곧추세운 용기였습니다. 옛 그림으로 세태를 읽고 나를 세우는 법을 일러주는 손태호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조선부터 근현대까지 시공을 넘나들며, 시대와 호흡한 삶, 역사와 소통한 현장에서 풀어낼 ‘한국미술로 엿보는 세상이야기’ ‘한국미술로 비추는 사람이야기’입니다. 때론 따뜻한 위로로 때론 따가운 죽비로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손태호 미술평론가] 올해는 파블로 피카소(1881∼1973)가 태어난 지 14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아무리 미술과 그림에 관심이 없다고 하더라도 피카소를 모른다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피카소는 스페인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활동한 유명한 화가입니다. 한국그림과 한국미술을 소개하는 연재에서 난데없는 ‘피카소’가 뜬금없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굳이 피카소여야 하는 데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림 한 점 때문입니다. 바로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en Coree·1951)입니다. 피카소는 이 작품을 ‘전쟁에 반대하기 위한 전쟁그림’으로 그렸습니다. 한국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인 ‘한국전쟁’이 일어난 6월 25일, ‘한국에서의 학살’을 한 번 살펴볼까 합니다.

그림은 화면 중앙을 중심으로 좌우가 대비되는 구도임을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갑옷을 입고 총칼을 겨눈 병사들이 모여 있는데 표정을 읽을 수 없게 투구를 쓰고 있습니다. 커다란 발로 푸른 잔디를 짓밟은 이들이 겨누고 있는 총은 총구가 3개씩이나 달린 것입니다. 왼쪽에는 벌거벗은 여인과 아이들이 겁에 질린 채 한데 모여 있습니다. 무방비 상태로 아무런 저항의 무기도 갖지 못한 여인들의 얼굴은 공포로 일그러지거나 체념한 듯 무표정합니다. 그 와중에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어린아이는 흙장난에 열중하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합니다. 여인과 아이들이 서 있는 붉은 땅은 병사들이 선 푸른 잔디와 대조적으로, 다가올 비극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게르니카’ 함께 대표적 반전그림…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그림의 주제는 너무나 명확합니다. 전쟁의 희생자인 민간인과 학살자인 군인을 극적으로 대비해 전쟁의 폭력과 야만성을 적나라하게 고발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발표 직후 유럽이나 미국에서 큰 비난을 받았고 우리나라에서는 오랫동안 언급조차 되지 못했습니다.

1930년 중반 피카소는 초현실주의자 예술가들, 특히 화가이자 사진작가인 도라 마르를 만나면서 예술적 열정을 높여가던 중 1936년 모국인 스페인에서 내전이 발발합니다. 피카소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던 스페인은 1936년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장으로 그를 임명하면서 1937년 5월 파리국제박람회에 스페인을 대표한 작품 제출을 요청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그 유명한 ‘게르니카’(Guernica)입니다. 피카소 반전그림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지요.

‘게르니카’는 스페인내전 중 군인이 민간인을 학살한 사실을 고발하는 묘사로 당시 박람회를 찾은 많은 이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그림에 관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2차대전 중 피카소가 활동하던 파리가 나치에 점령을 당했을 때 일입니다. 나치가 피카소의 집에 쳐들어와 ‘게르니카’를 가리키며 “당신이 그렸소?”라고 물었다는 겁니다. 그러자 피카소가 이렇게 대답을 했다지요. “당신들이 그렸소!” 이즈음 피카소는 잔혹한 나치에 저항하기 위해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합니다.

2차대전이 끝난 뒤 피카소는 전쟁의 상흔을 씻으며 지중해변에서 목가적이고 평화적인 작품에 몰두합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1950년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프랑스 공산당을 통해 듣게 됩니다. 미국이 북한을 침공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이 희생당했다는 왜곡된 정보였습니다. 이어 공산당으로부터 미국의 이 같은 만행을 고발하는 작품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바로 ‘한국에서의 학살’인 것입니다. 어떤 이는 작품이 1950년 10∼12월 황해도 신천군 일대에서 벌어진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배경으로 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천군 사건 정황이 프랑스에 제대로 알려진 것은 1952년이라 이 주장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이념논쟁 속 한국 등서 오랜 세월 외면 받아와

그런데 정작 피카소는 이 작품 때문에 프랑스 공산당과 불화가 생깁니다. 누가 봐도 학살자가 미군임을 알 수 있도록 해달라는 공산당의 요청을 듣지 않았던 건데요. 피카소는 “미군이나 어떤 다른 나라 군대의 헬멧이나 유니폼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며 “나는 모든 인류의 편에 서 있다”고 했습니다.

우익은 우익대로 이 작품이 한국전쟁을 왜곡하는 공산당의 선전물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쏟아냈습니다. 미국은 피카소의 입국을 금지했고 전시를 막았으며 피카소 그림을 소장한 인사들은 조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작품은 어떤 도록이나 책에 수록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피카소를 칭찬하거나 언급하면 반공법으로 처벌을 받았습니다. 오죽하면 ‘피카소 크레파스’를 제작한 문구사는 제품명을 바꿀 것을 요구받았겠습니까. 1980년대가 돼서야 미국에서 피카소에 대한 금기가 해제되고 ‘한국에서의 학살’ 전시도 허락됩니다. 한국에서도 그제야 피카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개선하고 지금은 20세기를 대표하는 대화가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평화주의자 피카소 입장에서는 참 억울한 시절이자 작품인 셈입니다.

이수억이 1954년에 그린 ‘6·25동란’. 선명한 원색으로 화면을 구성하고 인물은 윤곽선 위주로 대담하게 표현했다. 형체는 분명하나 눈·코·입과 표정을 굳이 그리지 않은 건 한국전쟁이 피란길에 오른 이들 가족만의 비극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1987년에 작가가 개작한, 원작의 비극적 정서를 다소 덜어낸 ‘6·25동란’이 한 점 더 있다. 캔버스에 유채, 123×189.5㎝, 가나아트센터 소장.
‘한국에서의 학살’이 한국전쟁의 폭력성을 고발한 작품이라 할지라도 피카소는 역시 당사자가 아닌 관찰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로서는 이 작품에서 조부모나 부모가 겪은 뼈아픈 고통을 느끼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우리나라의 많은 화가들은 종군화가로 참전하거나 피란생활 중 전쟁 관련 작품을 통해 상처 입은 국민의 마음을 다독였습니다. 피카소와는 달리 우리나라 화가들은 전쟁의 참상과 고통의 당사자이자 피해자이며 기록자였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수많은 한국전쟁 미술작품 중 한국인의 고통을 정말 잘 표현한 작품이 있습니다. 종군화가 이수억(1918∼1990)의 ‘6·25동란’(1954)입니다.

단순화해 극대화한 전쟁 참상…이수억 ‘6·25동란’

작품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남쪽으로 향하는 피란행렬을 단순화하고 있지만 그 울림이 대단히 큽니다. 형제로 보이는 사내 둘이 가재도구를 잔뜩 실은 수레를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있습니다. 수레 위에는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여인이 앉아 있어 전쟁 중에도 생명은 이어진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수레 옆에는 흰옷을 입은 아낙이 큰 이불보따리를 머리에 얹고 짐까지 든 채 힘겹게 걷고 있습니다. 그 옆으론 검정 치마를 입은 누나가 동생을 업고 갑니다. 뒤로 가방을 메고 손에 보따리를 든 아이의 구부정한 허리가 보입니다.

어느 가족의 고단한 피란행렬을 그린 작품에선 주변에 지게를 진 인물도 있고 앞뒤에 반쯤만 보이는 인물도 있어 긴 행렬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수레를 끄는 인물의 고개는 수평이고 몸은 사선이라 유독 힘겨워 보이지만 사실 그림 전체는 의도적으로 수평과 수직, 사선으로 분할돼 있습니다. 이는 당시 한국화단에서 유행했던 입체주의 영향이지만 피카소의 기하학적 형태와는 다른 한국적 입체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분할 덕에 얼굴이 없고 피부는 검게 그을렸으며 땅만 바라보고 있는 피란길의 힘겨움과 고달픔이 더욱 실감납니다.

최근 어느 유력 신문에서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이 공산주의자의 전쟁선전물이란 기사가 나왔습니다. 시대에 뒤처진 이념 논쟁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듯해 씁쓸했지만 무엇보다도 자의적인 작품 해석이 참 안타까웠습니다. 물론 피카소는 순수예술지상주의자는 아닙니다. 그는 “그림이란 집안을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라며 예술작품이 단순히 감상의 도구나 장식품이 아닌 동시대의 부조리와 약자의 아픔을 대변하는 소통의 수단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행동한 화가입니다. 그러면서도 평화를 사랑한 나머지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를 많이 그렸고, 딸의 이름도 스페인어로 비둘기란 뜻의 ‘팔로마’(Paloma)라 짓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했던 것도 나치에 대한 항거이지 이념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그려진 지 70년이 지나서야, 최근 국내 한 전시를 통해 한국 땅을 처음 밟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한국전쟁의 고통과 상처를 어루만졌던 많은 작가와 작품들에 대한 관심도 이어지길 기대해봅니다.

※ 화가 이수억과 한국전쟁

한국전쟁을 겪고 기억하는 화가들이 모두 전쟁의 참상을 화폭에 옮긴 건 아니다. 오히려 그 수가 귀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이수억은 특별하다. 피란·폐허·상흔 등 전쟁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작품을 여럿 남겼다. 그 작업은 군인과 젊은 여성을 통해 전선과 후방의 삶을 가름한 ‘전선야곡’(1952), 전쟁의 상처를 도심의 무너진 빌딩 잔해로 대신 그려낸 ‘폐허의 서울’(1952), 무너진 도시에서 오직 살기 위한 소년의 사투를 암시한 ‘구두닦이 소년’(1953)을 거쳐 피란짐을 싣고 길 떠나는 가족을 재구성한 ‘6·25동란’(1954)으로 이어졌다. 1950년 전쟁과 함께 군속에 입대한 이수억은 1951년 1·4후퇴 당시 포항을 거쳐 대구에서 피란생활을 했다. 미군 헌병사령부에서 일했고, 국방부 종군화가단원으로도 활약했다. 1952년에는, 박수근이 그랬던 것처럼, 서울의 미군 PX(신세계백화점 자리)에서 초상화를 그려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종군화가단 전시에 ‘야전도’를 출품해 참모총장상을 수상했고, 대한민국미술대전에 ‘6·25피난도’ 등을 출품하는 등 이수억에게 한국전쟁은 치열한 현실인식과 진정한 작가의식의 다른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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