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히 '얼굴' 된 흙색덩어리…수억으로도 못 품는 '김종영'

'한국추상조각의 선구자 김종영의 인체조각' 전
'깎지 않은' 불각추상 바탕된 '인체'
나무는 나무, 돌은 돌, 철은 철답게
군더더기 빼낸채 표현 최대로 아껴
김종영미술관서 조각·회화 80여점
  • 등록 2020-05-04 오전 12:20:00

    수정 2020-05-04 오전 5:05:24

김종영의 ‘작품 80-5’(1980). 작가의 ‘세 번째 자각상’이라 불린다. ‘깎지 않은’ 불각의 추상, 그 정점에 이르렀다 할 대표적 ‘인체조각’이다. 나무작품인 원작 대신 브론즈조각이 전시장에 나왔다. 오른쪽은 ‘작품 80-5’의 모티브가 됐을 ‘자화상’(1975경). 먹 찍은 붓선 한 줄로 휘두른 얼굴에 눈·코·입을 간신히 들였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세로결이 무심하게 그인 흙색의 밋밋한 덩어리는 그대로 ‘얼굴’이 됐다. 정갈하게 다듬고 고른 형태와는 거리가 멀다. 한쪽은 잘려나간 선으로 뚝 떨어졌고, 다른 한쪽에는 각진 모서리가 하나 더 생겼으니. 좌우대칭의 조화조차 못 이룬 그 얼굴의 무게를 받친 건 두툼한 또 다른 덩어리. 이것을 어찌 얼굴이라 하겠느냐 해도 어쩔 수 없다. 눈과 입조차도 과욕이라 여겼나 보니. 간신히 기다란 토막 한 줄 가운데 박아 코라도 만든 게 어딘가 싶어 감지덕지할 뿐. 무념무심한 얼굴만큼이나 담담한 작품명을 본다면 이해가 될 듯도 할 거다. 그저 ‘작품 80-5’. 1980년에 빚은 여섯 번째 작품이란 뜻이다.

그런데 ‘얼굴’은 혼자가 아니었다. 조각상 옆에 나란히 걸린 그림 한 점이 ‘덩어리’의 무게를 덜어내고 있다. 일필휘지라 해도 섭섭하지 않을, 먹 찍은 붓선 한 줄로 휘두른 날렵한 생김새에 눈·코·입 간신히 들인 모양. 줄기도 뿌리도 다 잃고 홀로 떨어져 나온 나뭇잎을 닮은 또 하나의 얼굴. 마치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는 듯 고개를 기울인 비대칭. 맞다. 바로 옆에 세운 그 얼굴이 보이지 않나. 세로 30㎝ 남짓한 이 얼굴에는 ‘자화상’(1975경)이란 작품명이 붙었다. 그렇다면? 절제가 지나쳐 무심하기까지 한 저 옆 덩어리는 ‘자각상’인 거다.

김종영의 ‘여인입상’(1965)을 앞쪽과 뒤쪽에서 봤다. 1m 남짓한 호리호리한 여인상의 원작은 나무다. 전시장에는 브론즈조각이 대신 나왔다. 이 시기 인체조각은 이후 차츰 간결해지며 추상조각의 정수에 다다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우성 김종영(1915∼1982). 세상은 그를 ‘한국추상조각의 선구자’라 부른다. 뛰어난 서예가기도 했던 그이는 마치 획처럼 그어낸 조각을 했다. 선과 맞먹는 입체라니. 아니 붓길 만큼이나 정과 망치가 가는 자리를 아꼈다는 건데.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던가. 종국에는 ‘깎지 않는 조각’을 평생 도달해야 할 경지로 삼고야 말았다. 재료를 새기거나 깎아 입체적인 형상을 만드는 일. 그이는 그 ‘조각’의 근본을 뒤흔들어 버린 거다. 그런데 그것이 말이다. 반역이 아니라 반전이었다. ‘안 한’ 것이 아니라 ‘더 한’ 것이었으니까. 수없는 구상으로 최소한의 실체만 뽑아내는, 말 그대로 ‘불각(不刻)의 미’란 정수에 올라선 거다.

김종영의 ‘작품 68-1’(1968)과 ‘드로잉’(1968 이후). 색연필로 쓱쓱 그은, 문자 같기도 사람 같기도 한 ‘드로잉’(1968 이후)은 그 형태 그대로 브론즈조각 ‘작품 68-1’(1968)로 태어났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다만 그 명성에, 그 명작에 가려 놓쳐온 것이 있다. 수려한 ‘추상조각’의 면면이 그이가 줄기차게 추구해왔던 작업 한 줄기를 숨긴 셈인데. 바로 ‘인체조각’이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이 특별전을 꾸리고 바로 그 지점을 들여다본다. ‘한국추상조각의 선구자 김종영의 인체조각’ 전이다.

△‘불각의 미’에 이르게 한 바탕 ‘인체’

전시는 김종영에 묻혀 미처 보지 못했던 김종영을 꺼내놓는 자리다. 그이의 수많은 작품이 추상조각으로 향하는 길을 ‘인체’로 들여다본 거니까. 이유는 명쾌하다. 그 인체가 작품세계에 철두철미한 바탕이 됐다는 얘기다. 박춘호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은 이 과정을 두고 “가장 표준적인 조각의 길을 선생 역시 걸었다”고 말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추상조각이 아니란 소리다. 이어 박 실장은 “공통의 조형원리를 찾으려 한 게 아닌가 싶다”며 “종내 시공을 초월한 공감을 얻으려 했던 것”이라고 읽어냈다.

생전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조각가 김종영(1915∼1982)(사진=김종영미술관).


인체조각이라고 혹여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처럼 잘빠진 구상조각을 상상하면 곤란하다. 어디까지나 ‘김종영 식’이니까. 돌에서 나무에서 철에서 빼낸 사람, 아니 이미 들어있었을 그들을 건져냈다고 할까. 하나같이 ‘나무는 나무답게’ ‘돌은 돌답게’ ‘철은 철답게’다. 야속하도록 군더더기를 빼고, 인색하도록 표현을 아낀 형체가 줄지어 나섰다.

김종영의 ‘작품 80-3’(1980)과 ‘드로잉’(1970s). 춤추는 사람을 모델로 했을까. 나무에 채색한 조각과 종이에 연필·먹으로 그린 회화. 빼다 박은 듯 닮은 두 작품이 나란히 걸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조각작품 40여점, 회화작품 40여점을 세우고 건 이번 전시에서도 늘 그렇듯 ‘연결고리 찾기’가 도드라진다. 드로잉이 조각으로, 조각이 드로잉으로 변주되는 경로 말이다. 종이에 먹과 수채로 풍선을 엮듯 둥글게 그리고 채색한 ‘드로잉’(1970s)은 나무조각 ‘작품 76-12’(1976)로 이어진다. 연필스케치가 선명한 두루뭉술한 인간형상의 ‘드로잉’(1970s)은 찍어내듯 조각하고 색을 입힌 나무조각 ‘작품 80-3’(1980)이 됐다. 색연필로 쓱쓱 그은, 문자 같기도 사람 같기도 한 ‘드로잉’(1968 이후)은 그 형태 그대로 브론즈조각 ‘작품 68-1’(1968)로 태어났다. 여기에 그이가 마지막으로 제작했다는 여인입상 ‘작품 74-1A’(1974)는 석고로 작업했다는 ‘작품 53-1’(1953·전시에는 사진으로만 나왔다)과 나란히 서서, 한치도 곁눈질이 없던 20년 세월의 일관성까지 증명하고야 만다.

김종영의 ‘작품 74-1A’(1974). 작가가 마지막으로 제작했다는 여인입상이다. 돌 작품인 원작 대신 브론즈조각이 전시장에 나왔다. 1953년 석고로 제작한 또 다른 여인입상 ‘작품 53-1’(1953·왼쪽)과 비교할 때 20년 세월을 뛰어넘는 공통점이 보인다. ‘한손으로 턱을 괴고 상념에 잠긴 여인’에 기울인 애정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소재·주제가 인체인 만큼 작가의 자화상·자각상은 물론이고, 작가의 가족과도 두루 눈 맞춤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딸(‘드로잉’ 1949·1955)과 아들(‘태아7세상’ 1958), 어머니(‘어머니상’ 1974)와 할머니(‘조모상 작품 36-1’), 평생 모델로 삼은 것도 모자라 임신 중일 때까지 기어이 캔버스 앞에 앉혔다는 아내(‘부인’ 1949, ‘부인상’ 1950s 등)가 자주 눈에 들어온다. 이 모두를 함께 들인, 조각상을 닮은 그림 ‘가족의 초상’(1954)은 신선한 덤이라고 할까. 유독 작가가 ‘그리고 만지고 보듬고’ 싶었던 인체들이 아니었을까.

김종영의 ‘부인’(1949). 1941년 결혼 후 1948년 서울대 조소과에 부임하기까지 작가에게 아내는 가장 훌륭한 모델이었단다. 임신 중일 때도 기어이 캔버스 앞에 끌어다 앉혀 그렸다는 작품이다. 부인 이효영 여사는 지난해 타계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돈 대신 마음으로 품어야 하는 ‘작품’

1915년 경남 창원서 태어난 김종영은 영남 사대부가의 후손답게 선비교육을 받았다. 시서화는 기본, 다섯 살부터 아버지에게서 한학과 서예를 배우고 익혔단다. 17세 휘문고보 재학 중에 나선 ‘제3회 전조선학생작품전람회’(1932)에서 중등부 습자 장원을 받은 건 어찌 보면 수순이었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동경미술학교 조각과를 졸업한 그이는 1948년 서울대 미대에 부임해 1980년 미대 학장을 지내고 퇴임하기까지 교단과 작업실만을 오가는 생애를 살았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에 펼친 ‘한국추상조각의 선구자 김종영의 인체조각’ 전경. 왼쪽부터 ‘작품 73-12’(1972·브론즈), ‘작품 79-10’(1979·나무), ‘작품 65-7A 가족A’(1965)가 차례로 섰다. 오른쪽 그림은 작가의 가족을 마치 조각상처럼 세워 화면에 들인 ‘가족의 초상’(1954)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그 삶 그대로 그이가 정한 고집스러운 원칙 하나가 있었으니 ‘작품은 팔지 않는 것’이었다. 실제 김종영의 작품은 미술시장에 나온 적이 거의 없다. 생전 작가의 ‘작품 불매’ 의지는 유족에게 ‘작가의 그 뜻을 거스르지 않는다’로 이어져 ‘매매’ 자체가 성사되지 않았던 거다. 오죽했으면 5년 전쯤 까다로운 눈높이의 삼성가가 서예작품 한 점에 대한 거래를 제안했을 때도 완곡히 거절을 했을까. 그러니 그이의 작품가치는 그저 가늠만 할 뿐이다. 수억원을 들이밀어도 못 사는 것으로, 결국 돈이 아닌 마음으로 품어야 하는 것으로.

돌과 나무, 브론즈로 형상화한 300여점의 조각, 다 꺼내보지도 못했다는 1000여점의 서예, 수채·유화·드로잉 등 3000여점의 회화작품들은 덕분에 흩어지지 않은 채 다 함께 모여 있다. 한국조각사를 넘어 한국현대미술사에 얹은 비중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이가 다다르려 했던 봉우리는 이리도 우뚝하다. 전시는 6월 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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