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가 사람"…집 잃은 '서예'를 들이다 51년 만에

국립현대미술관 '미술관에 書: 한국 근현대 서예전'
1969년 개관 이래 처음 연 단독서예전
김환기·이응노 등 회화거장 서예그림
소전·검여·일중 등 1세대 서예가 집중
48인 300여점…90분 영상으로 선공개
  • 등록 2020-03-31 오전 12:20:00

    수정 2020-04-01 오후 1:49:54

일중 김충현의 ‘조성신 도산가’(1963). ‘일중체’로 불리는 한글 궁서·고체, 한문 예서를 만들어낸 ‘서예천재’ 일중이 한글·한문을 혼용해 쓴 새로운 서예작품이다. 한글과 한문이 한 종이에서 주거니 받거니 나란히 들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이전까지 아무도 하지 못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태백산 나린 용이 영지산 높아서라 황지로 솟은 물이 낙천이 맑아서라 퇴계수 돌아들어 온계촌 올라가니 노송정 높은 집에 대현이 나시셨다….”

조선 문인 조성신(1765∼1835)은 정조 16년(1792) 경북 안동 도산 별과에 응시했다가 낙방하고 만다. 그 안타까움은 중년에 들어서 눈이 점점 더 어두워지며 되살아났다. 도산서원의 풍경, 제를 올릴 때의 광경이 떠올랐고, 퇴계 이황의 덕을 그리워하는 마음까지 깊어졌다. 후대에 수작으로 평가받은 ‘도산가’(도산별곡)는 그때 지어졌다.

그 절절함이 한 번 더 살아난 건 170여년 뒤, 우연찮은 계기였다. 바로 일중 김충현(1921∼2006)이 옮긴 글씨. ‘국필’로 불리던 그가 누구도 감히 시도하지 않았던 한글·한자를 혼용한 서예작품을 내놓은 거다. ‘조성신 도산가’(1963)다. 획수 변화가 작은 한글과 큰 한문, 여백이 많은 한글과 적은 한문이 한 종이에서 주거니 받거니 나란히 들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이전까지 아무도 못했던 터다. 그것도 아주 편안하게, 부딪치지도 충돌하지도 않고. 그 순간, 글씨는 예술이 됐다.

한때 그런 적이 있다. 서예가 미술이던 때. 여기에 금을 낸 첫 난관은 일제강점기에 있었다.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서도부’가 ‘공예부’로 대체되면서. 두 번째 난관은 50년 뒤에 왔다. ‘선전’에 이어 1949년부터 연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가 1981년 30회를 끝으로 ‘재량껏 민간 주최’로 넘어가면서다. 그나마 동양화·서양화·조각 뒤에 작은 자리 하나 차지하던 서예를 대놓고 빼버리기 시작한 거다. 언감생심 ‘국립 기획전’은 꿈도 꾸지 못했다. 아니 그보다 늘 바닥에 깔려 있던 문제에 시달렸다. “서예가 미술인가.”

초정 권창륜의 ‘직선지가필유여경’(2009). ‘선을 쌓으면 집안에 좋은 일이 가득하다’는 주역의 글귀를 5m 길이의 종이에 일필휘지 행초서로 그어냈다. 초정은 근현대 서예가 2세대로 일중 김충현의 제자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국립현대미술관이 이 두 ‘과제’의 동시 해결에 나섰다. 1969년 개관 이래 처음 ‘단독 서예기획전’을 열고, ‘서예도 미술이다’에 접근한 거다. 서울 중구 덕수궁관에 펼친 ‘미술관에 書: 한국 근현대 서예전’이다. 일단 ‘집 잃은’ 서예를 미술관에 대거 들이고, 서예가 근현대미술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가치를 더듬는다. 말보단 작품이다. 미술이든 아니든 미동도 않고 굳건히 지켜온, ‘글씨 좀 썼다’는 작가 48명의 압도하는 300여점이 대신 외친다. “내 붓이 뭘 품어왔는지 아는가.”

△“난 그린 적 없다 썼다”…그림 그린 이들의 ‘서예’

‘서예전’이라면 으레 겁먹을, 고색창연한 글씨는 없다. 전시는 타이틀의 ‘근현대’가 잡아주듯 일제강점기부터 바로 오늘까지의 붓길을 따른다. 한마디로 ‘서예를 그리고 그림을 써’ 온, ‘글씨가 곧 사람’이라 믿어온, 그러다가 ‘서예로 실험’을 하고, ‘디자인도 입히고 일상도 품겠다’고 한 고집과 철학, 혁신과 진화를 관통하는 거다.

우성 김종영의 ‘작품65-2’(1965·왼쪽). 조각가면서 대단한 서예가였던 우성이 기하학적 입방체를 수직·수평으로 연결한 나무조각이다. 오른쪽은 고암 이응노의 수묵담채 ‘생맥’(1950s). 상형문자에서 시작한 서예를 바탕으로 완성했다. 고암은 서양의 추상회화를 전통서화가로 수용하며 문자·서체추상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그 중요한 맥락 중 하나가 그림과 떨어질 수 없는 글씨의 운명이다. 김환기·이응노·장우성·남관·이우환·서세옥·김창열·황창배·오수환·김기창 등 그림으로 세상을 흔든 대가들의 ‘시서화’ ‘문자추상’ ‘서체추상’으로 포문을 연 건데.

‘저는 시방 꼭 텅 빈 항아리 같기도 하고…’로 운을 뗀 서정주의 시 ‘기도’를 그림에 옮겨 쓴 김환기의 ‘항아리와 시’(1954), 선글라스·배꼽티·휴대폰으로 무장했지만 가계도 제대로 모르는 젊은 여성을 한탄한 장우성의 ‘단군일백오십대손’(2001) 등 시서화를 앞세우고 김기창의 ‘문자도’(1980), 이응노의 ‘구성’(1970), 서세옥의 ‘사람들’(1988), 남관의 ‘겨울풍경’(1972), 김창열의 ‘회귀’(1995) 등 문자추상, 이우환의 ‘동풍 84011003’(1984), 오수환의 ‘배리에이션’(2008), 김종영의 나무조각 ‘작품65-2’(1965) 등 서체추상이 연달아 출현한다.

월전 장우성의 ‘단군일백오십대손’(2001). 선글라스·배꼽티·휴대폰으로 무장했지만 출신도 제대로 모르는 젊은 여성을 한탄하는 내용이 글로 들어간 풍자적 시서화다. 나이 아흔의 월전이 ‘미스 한’이란 이 여성에게 가계를 물었더니 “단군 백대손”이란 대답을 듣고 시제를 잡았단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표현과 기법은 차이가 있지만 이들에겐 굵은 공통점이 있다. 동아시아 회화사를 이끈 ‘서화동원론’(글씨와 그림은 뿌리가 같다)에 한 표씩 던지고 서예에서 미술을 끌어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는 거다. 캔버스에 숱한 점을 찍고 선을 그어 추상회화의 거장 반열에 오른 이우환조차 말이다. “난 그린 적이 없다, 썼다”고 했다지 않나.

△한 획엔 신념, 한 획엔 고집…철학 품은 미술 ‘서예’의 진화

그럼에도 ‘서예전’이라면 먹향이 스미고 붉은 낙관이 화룡점정인, 온전한 붓글씨에 찍혀야 하는 법. 전시의 비중 역시 거기에 실렸다. 같은 붓으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던 조선의 서화시대 이후 말이다. 그림에서 떨어져 나와, 온전히 글씨로만 ‘전통·예술’ 양쪽에서 승부를 봐야 했던 이들을 집중조명한 거다. ‘글씨는 그 사람이어야 한다’는 신념을 버리지 못한 근현대 서예가 1세대 12인이다.

소암 현중화의 ‘취시선’(1976). 전시가 선정한 근현대 서예가 1세대 12인에 든 소암이 어느 날 제주 서귀포 한 음식점에 갔다가 새로 도배된 벽을 보고 붓이 동해 술기운에 휘감아냈다는 글씨다. 후에 절친이던 청원 변성근이 가게주인과 협의해 도배지를 떼어내 배접한 뒤 보관했단다. ‘취하면 곧 신선’이란 뜻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일제강점기의 ‘서도’란 명칭 대신 ‘서예’란 이름을 지금껏 쓰게 한 소전 손재형(1903∼1981), 그 조형미 넘치던 ‘소전체’는 글씨도 아니라며 “고법의 재해석이 서예의 갈 길”이라 주창했던 여초 김응현(1927∼2007)이 벌인 붓대결은 놓칠 수 없는 지점.

아호 그대로 ‘칼과 같이’(劍如·검여), 멈추고 세우고 찌르고 막는, 전투력 있는 필획을 그었던 ‘검여 유희강’(1911∼1976)도 독보적이다. 58세에 오른손이 마비되자 피나는 노력 끝에 왼손으로 글씨를 썼다는데, 전시는 양손에서 나온 작품을 구분해 걸고 보는 이들을 기죽게 한다.

소전 손재형의 ‘수신진덕온고지신’(1970년대·위). ‘몸을 닦아 덕으로 나아가며 옛것을 익혀 새것을 안다’는 말이다. 안정된 짜임, 차분한 운필, 완곡한 획법이 노년의 소전이 구현한 예서의 전형을 보인다. 아래는 일본 전각가 마츠우라 요우겐이 목인한 ‘손재형인’ ‘교졸상망’이 놓였다. 각각 위 작품의 왼쪽과 오른쪽에 낙관으로 찍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검여 유희강의 ‘두보 백부행’(1966). 당나라 두보의 ‘흰 오리를 노래함’이란 시를 옮겼다. 해서·행서·초서를 뒤섞어 칼로 베어내고 찌르듯 막힘없이 몰아쳤다. 검여는 먹을 4시간쯤 갈고 하루를 숙성한 뒤 글씨를 썼다는데 덕분에 ‘빛과 향이 다르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단다. 마비가 오기 전 오른손으로 쓴 글씨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앞서 ‘조성신 도산가’로 맛보기를 했던 일중 김충현은 시쳇말로 ‘서예천재’라고 할까. 20대에 이미 이름을 알린 뒤 한글·한문혼용은 물론 ‘일중체’로 불리는 한글 궁서·고체, 한문 예서를 만들어냈다. 전시는 그이의 다양한 서체를 두루 갖췄는데. 백미는 ‘정읍사’(1962)라 할 거다. 6가지 서체(한글 고체·흘림, 전서·예서·해서·행서)를 한 작품에 들였으니.

1968년 국전(17회) 사상 처음으로 서예부문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평보 서희환(1934∼1995)도 지나칠 수 없다. 스승의 글씨인 소전체를 넘어 ‘평보체’로 휘두른 ‘높이 올라 멀리 보라’(1978), ‘불휘기픈남간’(1984) 등을 통해 이후의 2세대를 엿보게 하니까. 초정 권창륜(77)이 주역의 글귀를 5m 일필휘지 행초서로 그어낸 ‘직선지가필유여경’(선을 쌓으면 집안에 좋은 일이 가득하다·2009), 하석 박원규(73)가 TV세트와 곰발바닥으로 ‘그린’ 문자조형 ‘공정’(公正·2020) 등등을 말이다.

평보 서희환의 ‘불휘기픈남간’(1984). 스승의 글씨인 소전체를 넘어 ‘평보체’로 휘둘렀다. 강하고 질박한 필획의 힘이 튀어나올 듯한 글씨를 썼던 평보는 서예사에 한번도 존재한 적 없는 ‘한글서예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하석 박원규의 ‘공정’(2020). 근현대 서예가 2세대에 속하는 하석이 고대 서주시대 청동 제기에 새겨진 ‘공정’(公正) 자를 현재적 문자조형으로 재해석했다. 회화적 요소를 극대화한 서예의 진화라 할 법하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한 점, 한 점 풀어내기도 버거운 구성이다. 전시에 들지 못한 작가·작품이 한둘이 아닐 텐데, 그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촘촘하고 성실하게 갖췄다. 다만 현장을 직접 확인하는 건 미술관 휴관이 끝나는 때로 잠시 미뤄야 할 듯하다. 대신 온라인으로는 미리 볼 수 있다. 미술관이 90분짜리 영상을 만들어 30일부터 유튜브채널에 공개했다. 오랜 시간 준비했을 배원정 학예연구사가 마치 자신의 작품들인양 소개하고 안내한다. 아쉬운 게 하나 있다면, 그저 그 자리에 함께 들이지 못한 먹먹한 묵향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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