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명 중 1명이 동거

  • 등록 2007-07-22 오후 3:39:32

    수정 2007-07-22 오후 3:39:32

[조선일보 제공] 서울 신촌 B오피스텔의 큰 창과 복층식 구조가 마음에 들었던 H대 박모(24·여)씨. 9000만원이라는 비싼 전세금이 문제였다. 때맞춰 떠오른 얼굴이 평소 친동생처럼 여기던 지금의 동거남인 Y대 공대생 김모(20)씨였다. 마침 새로운 전셋집을 구하려 했던 김씨는 그녀의 제안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올 3월부터 지금까지 두 사람은 다달이 들어가는 관리비와 생활비를 공동으로 부담하며 함께 살고 있다.

지난 16일 박-김씨의 오피스텔을 찾아가보니 두 사람은 집안에서 강아지도 함께 키우며 여느 부부처럼 생활하고 있었다. 69㎡(21평) 오피스텔에서 박씨는 내부 계단으로 연결된 윗방을 자신의 방으로 따로 꾸며놓았다. 하지만 화장실, 식탁, 냉장고, 소파 등이 있는 아래층이 주된 주거공간. 붙박이 식의 냉장고에는 두 집에서 보내온 반찬 통이 빼곡히 들어차 있고, 온종일 켜져 있다는 컴퓨터 앞에는 먹다 남긴 치킨과 콜라가 널려있었다. 또, 함께 사용하는 화장실에는 남성용 화장품과 여성 목욕용품이 함께 진열돼 있다. 박씨는 “친구들 대부분이 미국이나 유럽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동거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본다”며 “생활비도 절약하고, 동성끼리는 채울 수 없는 부분을 충족시킬 수 있는 현재의 동거 생활이 만족스럽다”고 했다.

K대생 이준희(21·가명)씨는 올 2월부터 여자 친구와 동거 중이다. 양쪽 부모님 모두 동거 사실을 알고 있고, 조씨의 아버지는 여자 친구에게 ‘며느리’라고 부른다. ‘문란하다’며 조씨를 비난하던 주변 친구들도 지금은 “혼전 동거가 꼭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고 말한다. 조씨는 “아플 때나 심각하게 무언가를 결정해야 하는 때 옆에 믿고 의지할 사람이 있다는 점과 생활비를 아낄 수 있다는 것이 동거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했다. 그는 평생 함께 살 사람이라면 동거 후 결혼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대학생 동거는 이젠 더 이상 색다른 사회 현상이 아니다. 대학가 주변에서는 어렵지 않게 “동거를 하고 있다”고 당당히 밝히는 대학생 커플을 만날 수 있다. 부동산 업자들 역시 “최근 들어서는 그들만의 ‘보금자리’를 찾는 동거 커플이 특별한 손님은 아니다”고 말한다.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는 대학생 김모(24)씨는 “내가 사는 원룸 건물의 절반 이상은 함께 동거하는 고시 커플들이 사용하고 있다”며 “저녁 늦게 근처 편의점에 가면 운동복 차림으로 라면이나 빵 등을 사러 오는 동거 커플들과 자주 마주친다”고 했다.

왜 숨겨요?”… 흔하디 흔한 동거

각종 설문조사에서도 20~30대 미혼남녀들은 당당히 “필요하다면 혼전 동거도 가능하다”는 대답을 내놓고 있다. 최근 결혼정보회사 듀오가 수도권에 거주하는 25~35세 미혼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온라인 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59%가 “결혼할 연인이 있을 경우 미리 동거해 보는 것이 좋다”고 응답했다. 성별에서도 남성 64%, 여성 54%로, 상당수의 젊은 여성들 또한 혼전 동거에 대해 개방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었다. 지난 5월 경상북도의 K대학교 학생 1700여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에서도 응답자의 67%가 “혼전 동거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실제 ‘Why?’가 지난 15일부터 사흘간 서울의 신촌, 종로, 대학로 일대를 돌아다니며 200여명의 대학생들을 직접 만나본 결과, 총 21명의 대학생들이 동거를 하고 있거나 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1명을 제외하곤 양쪽 부모님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계셨지만, 20쌍의 커플은 떳떳이 그들의 동거 관계를 밝혔다.

3개월 전부터 남자 친구와 동거 중인 모여대 3학년 김모(23·여)씨는 1개월간의 교제 후 동거를 결정했다. 그는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수년간 혼자 지내다 보니 외로움이 컸다고 했다. “왜 동성 친구와 함께 지내지 않느냐”고 질문하자 김씨는 “나를 가장 잘 배려해주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내 남자친구”라며 “굳이 이성 친구와 동거를 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남자 친구와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는 터라 서로에 대해 더욱 깊이 알고 싶다는 바람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녀는 함께 사는 이와의 결혼에 대해 ‘확신’이 없다. 김씨는 “나중에 정말 더 좋은 사람이 생겨서 지금 남자 친구와 헤어진다고 해도 특별히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며 “그 때 가서도 또다시 동거를 고려해볼 것”이라고 말했다.

사랑하니까… 같이 살고 싶으니까

대학생들은 “왜 동거를 하느냐”는 질문에 으레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있고 싶어서” 라고 대답한다. 결혼이라는 형식적인 구속에서 벗어나 뜻이 맞고,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같으면 함께 살 수 있다는 의미다. 여기에 꼭 결혼을 해야 할 아무런 의무도 없고, 헤어져도 친한 친구 몇 명만 동거 사실을 알기 때문에 별다른 불안감도 없다.

지난해 8월 Y대생 이성준(25)씨는 “서로 사랑하는데 함께 사는 건 당연하다”면서 3개월간 사귀던 여자 친구를 설득해 동거 생활을 시작했다. 같이 있고 싶고, 생활비도 아낄 수 있겠다는 마음으로 그간 혼자 생활하던 원룸에서 함께 지냈다. 결혼하기에는 어린 나이였고, 또 딱히 힘들게 결혼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씨는 “매일 볼 수 있고, 생활비도 줄어들어 처음 몇 달간은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씨는 6개월 만에 동거 생활을 끝냈다. 차츰차츰 여자 친구의 단점이 보였고 옷차림, 말투, 만나는 사람 등 부지불식간에 여자 친구의 미운 점이 크게만 느껴졌다. 식사, 청소, 빨래, 쓰레기 버리기 등 사소한 문제로 자주 싸우던 이들 커플은 “헤어지자”는 한마디 말을 끝으로 동거 생활을 접었다. 그는 “부모님도 동거 사실을 모르셨고, 친한 친구 몇 명만 입조심을 해주면 되는 상황에서 헤어지는 일이 어렵진 않았다”고 말했다.

동거 대학생 중 일부는 실리적인 이유에서 동거를 선택한다. 이들이 꼽는 동거의 가장 큰 장점은 ‘생활비 절약’이다. 자취, 하숙방을 하나로 합치거나, 상대방이 사는 전셋집에 들어가 집값을 절약하는 것이다. 생활비 역시 각자 30~50만원 가량을 내놓고 정해진 금액 안에서 함께 쓰기 때문에 낭비를 줄인다. 현재 군 복무중인 이진우(22)씨는 “작년 초 여자 친구의 전셋집으로 들어가 함께 살 때에는 하숙비도 아끼고, 생활비도 절반씩 분담해 그 규모에 맞춰 생활했기 때문에 금전적 여유가 있었다”고 했다.

성적 욕구의 해소 또한 대학생 동거의 한 원인이다. 대학생 김승연(28·가명)씨는 “동거를 통해 심리적인 안정감도 얻을 수 있지만 성적인 욕구를 충족할 수 있다는 점 또한 무시할 수 없다”며 “문제는 이성에 대한 신비감이나 환상이 사라져 결혼도 별것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이준희씨도 “동거를 시작할 때부터 서로 원할 때 성관계를 가지자고 약속했고, 그런 일로 문제가 생긴 적은 없었다”고 했다.

생활비·집세 절반씩… ‘각방 동거’도 많아

대다수 대학생 동거 커플은 동거 결정 후 생활비를 절반씩 부담하고, 집안일도 나눠서 맡는다. 여학생이 식사 담당을 맡으면 설거지는 남학생 몫이고, 집안 청소도 한 명이 청소기를 돌리면 한 명은 물걸레질을 하는 식이다. 상대방의 전셋집으로 들어갈 때에는 생활비를 조금 더 내거나 가사일을 도맡아 하지만 정해진 것은 아니다. 또, 둘이 합친 생활비는 한 사람 명의의 통장에 넣어 두고 함께 사용한다.

부모님이 마련해준 전셋집에서 여자 친구와 함께 살고 있다는 H대 4학년 김모(26·가명)씨는 “부모님께 매달 40만원씩 용돈을 받고, 여자 친구는 학생 과외로 매달 50만원씩 벌어서 둘이 모은 돈으로 함께 지낸다”고 했다. 대학생 김모(23·여)씨도 “식사는 학교에서 해결하거나 집에서 해먹고, 함께 있을 공간이 있어서 찻집이나 영화관을 자주 안 가게 되기 때문에 데이트 비용이 많이 줄어들었다”고 했다. 동거 대학생의 생활 방식은 으레 외식이 줄고, 외부에서의 유흥비가 줄어들어 생활비가 절약된다는 것이 이들의 얘기다.

하지만 대학생 동거라고 해서 모두가 똑같은 방식으로 생활하진 않는다. 비싼 집값 때문에 집만 같이 구한 다음, 방을 따로 쓰면서 엄격히 사생활을 구분하며 지내는 ‘각방 동거생’도 상당수다. 이들은 “함께 식사를 하고, 영화를 보며 여가를 같이 보낼 수는 있어도 이성 친구로 보지 않고 더욱이 성관계는 갖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달 초부터 20평 대 아파트에서 여학생과 함께 지내고 있는 대학생 이모(26)씨는 “방이 2개인데 각자 자신의 방에서 생활하고, 가끔 밥을 같이 먹거나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함께 본다”며 “집세와 관리비만 반반씩 내고, 상대방의 방에는 절대 안 들어가는 것을 원칙으로 정했다”고 했다. 김씨에 따르면 대학가에서 집만 같이 공유하는 커플들도 상당수다.

동거인을 구하는 인터넷 사이트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성 관계만을 바라며 노골적으로 접근하는 성인들도 있지만, 하숙비를 아끼고 색다른 동거 경험을 바라는 대학생들도 이런 사이트를 이용하고 있다. 올 3월 한 인터넷 동거인 모집 사이트에 ‘신촌입니다. 동거 구해요’ 라는 제목으로 여성 동거인을 구한다는 글을 올린 Y대학생 이모(25)씨는 비싼 월세금과 몇 년간의 집안일을 둘러싼 남자 룸메이트와의 잦은 다툼으로 여성 동거인을 원했다. 이씨는 “현재 사귀는 여자 친구도 있지만 동의를 구해서 여자 동거인을 구하게 되었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동거 대학생들은 부모님에게는 물론 친구들에게도 동거 사실을 비밀에 부친다. 상대방의 부모님이 방문할 때면 다른 친구 집을 전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친한 친구들에게는 동거 사실을 밝히고, 이를 부러워하는 친구들도 있다고 당사자들은 증언한다. 동거 대학생 강모(26)씨는 “동거를 나쁘게 보는 친구들도 있지만 동거 커플을 부러워하는 친구들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K대학생 조모(23)씨도 “바로 옆방에서 같은 과 동기 커플이 살고 있는데,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 가족처럼 챙겨주는 모습이 부럽기만 하다”고 말했다.

부모들은 반대… 부부관계 가볍게 여길 수도

반면 자식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알 길이 없는 자취생 부모님들은 걱정이 앞선다. “동거하는 여자 친구의 낙태수술 이후 아버지의 권유로 정관수술을 했고 지금도 동거는 계속하고 있다”고 밝힌 이준희씨도 “주변 친구들을 보면 대부분의 부모님이 동거에 반대한다”고 했다. 대학생 자녀를 둔 윤도경(50)씨는 “학생들이 서로 학업에 지장을 주지 않으면서 건전하게만 지낸다면 동거를 이해할 수 있다”면서도 “하지만 내 자식이 동거를 하겠다면 어떻게든 말릴 것”이라고 했다.

대학가 인근 부동산 업자들은 한결같이 “대학생 동거가 최근 크게 늘어나고 있으며, 당사자들 또한 과거와 다르게 당당하게 행동한다”고 말한다. 신촌에서 5년간 부동산을 운영했다는 이두연씨는 “5년 전만 하더라도 부끄러워하며 어렵게 집을 구하고 다녔다”며 “하지만 요즘은 손잡고 같이 와서 함께 살 집을 알아볼 정도”라고 했다.

“올 1학기 내가 담당한 교양수업에서 절반 이상의 학생들이 혼전 동거에 찬성했다”고 밝힌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는 “대학생 동거는 수년 전부터 지속적인 증가 추세”라며 “하지만 개방적이지만은 않은 우리 사회에서 이런 문화에 익숙해지다 보면 진정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상대방에게 미안함을 느끼게 되고, 또 결혼 후에도 부부 관계를 가볍게 여기게 되기 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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