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곡수로 키운 미나리… 봄을 ‘한쌈’에 먹는다

별미 가득한청도여행 30시간
''운치''만 있는 줄 알앗더니 ''맛''도 있더라
  • 등록 2010-03-18 오후 12:20:00

    수정 2010-03-18 오후 12:20:00

[조선일보 제공] "어떻게 봄을 아껴 보낼까."

경북 청도군 한재 미나리 비닐하우스에서 이 탄성의 입체적 의미를 목격할 수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식객(食客)들이 사랑스러운 봄의 초록 전령사를 아낌없이 해치우고 있다. 생미나리를 돌돌 말아 쌈장에 찍고, 푸줏간에서 따로 사온 삼겹살을 구워 미나리쌈에 얹은 후 순식간에 집어삼킨다. 각자의 폐활량을 넘어선 지 오래다. 기도 혹은 식도가 막혀 꺼억꺼억 거리면서도 "여기 미나리 한 단 더~"를 줄기차게 외친다. 바야흐로 생미나리의 파릇파릇함, 싱그럽고 은근한 봄 향내, 튼실한 줄기와 여린 잎의 식감을 총체적으로 낭비 중이다.

청도(淸道)를 3월에 찾은 으뜸 이유는 한재 미나리 때문이었다. 봄을 알리는 채소, 미나리가 지천이다. 그리고 결정적 이유 하나 더. 지금이 제철인 까닭이다. "4월 지나면서 조금 질겨진다"는 게 '안재봉 미나리'의 안주인인 여순태(65) 할머니의 솔직한 고백. 청도읍과 풍각, 각남면을 가르는 큰 고개, 한재는 물이 풍부하고 햇볕이 풍성한 곳이다. 게다가 고인 물이 아니라 흐르는 계곡물이고 여기에 이 지역 특유의 따뜻한 지하 암반수가 합쳐졌다. 따라서 미나리꽝(미나리논)의 고인 물과 부록처럼 따라붙는 거머리를 두려워했던 당신이라면, 여기서는 그 공포를 조금 덜어도 좋으리라.

이곳 미나리는 거머리가 '거의 없는'데다, 1994년 전국에서 처음으로 미나리 무농약 재배 품질인증을 받았다. 게다가 미나리는 원래 피를 맑게 하는 청혈(淸血)작용으로 이름 높다. 덕분에 이곳 120여 농가가 1000t 정도를 생산해 올리는 소득이 연간 70억원에 이른다는 게 청도군 농업기술센터의 뿌듯한 추산이다.

한재의 미나리와 삼겹살을 함께 즐기려면 조금 부지런해야 한다. 청도와 밀양을 잇는 25번 국도에서 902번 지방도로로 우회전하면 벼락같이 나타나는 미나리 비닐하우스가 거의 사단(師團) 규모. 그 엄청난 하우스의 밭을 가르고 난 도로 양옆으로 사람이 들어가 앉을 수 있는 별도의 비닐하우스들이 수십 곳 포진해 있다. 재배 농가가 대충 꾸민 가건물 비닐하우스다. 하지만 이곳의 비닐하우스는 식당이 아니므로 삼겹살 준비는 본인 몫.
▲  미나리는 봄의 초록 전령사. 흐르는 계곡수와 따뜻한 지하 암반수로 키우는 청도 한재미나리는 지금이 제철이다. /조선영상미디어

풋고추나 김치를 먹고 싶다면 그것 역시 각자 꾸려 가야 한다. 여기서 제공하는 건 1㎏에 8000원 하는 생미나리(시장 가격과 같다)와 개당 1000원에 빌려주는 휴대용 가스레인지(부탄가스 포함), 그리고 쌈장이 전부다.

주인 할머니는 손님 받으랴 전국에 택배로 부칠 미나리 다듬으랴 거의 '분신술'을 쓰시는 중. 따라서 필요한 접시나 젓가락, 종이컵은 평상에서 눈치껏 알아 챙기는 것이 당신의 정신건강을 위해 바람직하다. 그런 '자발적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주말이면 도로 전체가 주차장이 될 정도로 꾸역꾸역 밀려든다. 그리고 "미나리 한 단 더~"를 끊임없이 외친다. 주인 할머니가 막 뜯어 온 미나리를 흐르는 물에 헹군 뒤 물기를 탁탁 털어 바로 손에 쥐여준다. 이러니 어쩌겠는가. 청도의 봄을 헤프게 먹어 치울 수밖에.

산천청려(山川淸麗), 대도사통(大道四通). 산과 물이 맑고 아름다우며, 큰길 사방 교통이 편하다. 청도(淸道)의 이름은 이 문장에서 왔다고 한다. 실제로 KTX 동대구역에서 청도까지는 겨우 40분 드라이브. 가깝다. 이번 여정에서 얻은 또 하나의 깨달음. "경상도 음식은 생존을 위해서만 먹는다"는 주장은 최소한 이곳 청도에서만은 편견일 수 있다. 문화유적 답사에 식도락 기행을 더한 청도에서의 30시간.


12:10 한재 '안재봉 미나리'

청도역 앞 하나로마트에 들러 삼겹살과 항정살 두 근을 끊었다. 대형 마트 실내인데, 동네 어르신 네 명이 소주 술판을 벌이고 있다. 서울서는 상상하기 힘든 풍경. 하지만 왁자한 경상도 사투리가 서로에게 흥겹다.

한재 미나리 단지는 이곳에서 차로 약 15분. 숨 고르기하며 4월 만개(滿開)를 손꼽아 기다리는 복숭아나무 밭을 지나 902번 지방도로 접어든다. 거대한 미나리 비닐하우스 군락(群落)의 시작. 자신의 이름을 커다랗게 내세워 재배하는 프라이드의 향연이었다.

'안재봉 미나리'(054-372-1193)를 찾은 까닭은 이 집 지하수 따뜻하기가 동네 비닐하우스 군락에서도 으뜸과 버금을 다툰다는 추천 때문. 비닐하우스 문을 열고 들어가자, 70대 할머니들이 '생활의 달인' 경지로 미나리를 다듬고 있다. 한 할머니가 막 뜯어온 미나리의 흙을 털면, 맞은편 할머니가 개수대에서 흐르는 물을 이용해 씻는다. 손목 스냅 두세 번에 미나리가 흙을 벗고 몸단장을 마친다. 단장 마친 미나리를 받아 잎만 딴 뒤 손바닥 위에 상추 모양으로 놓는다. 1㎏에 8000원. 노릇노릇하게 구운 삼겹살 한 점을 놓고 쌈장을 얹는다. 삼겹살의 고소함에 생미나리의 향을 포갠다.

혹시 고기를 가져가지 못했다 해도 당황할 필요는 없다. 비닐하우스 안에 고기를 배달해주는 식육점(정육점) 전화번호가 주르륵 적혀 있다. 미나리는 서울로 택배도 가능하다. 택배비는 5㎏까지 3000원, 12㎏까지 4000원. 한재 미나리 특유의 비장 무기가 하나 더 있다. 매실 엑기스처럼, 미나리 엑기스를 만든다. 이 집 조카라고 자신을 소개한 예정숙 아주머니가 소주 한 잔 분량의 미나리 엑기스를 소주 한 병과 합친다. 달큰하면서 싸한 기운이 식도를 타고 내려간다. 미나리 엑기스는 1.8L 페트병 한 병에 2만원. 소주는 2000원. 햇살은 시방 홑겹 비닐하우스를 지나 소주잔을 관통 중. 바야흐로 봄을 만끽하고 있다.

▲  성지암의 창. /조선영상미디어

14:50 성지암에서 내려다 본 청도

한재 미나리 단지에서 인근 화악산 자락으로 30분만 걸어 올라가면 성지암(054-372-9882)이다. 포장이 된 도로지만, 걸어 올라갈 것을 추천한다. 암자 주차장이라고 해야 자동차 서너 대가 들어오면 그 이상은 난감할 지경이고, 올라가는 도로도 위아래 서로 양보하지 않으면 해결이 안날 좁은 길이니까. 송광사에서 수학했다는 주지 종오(51) 스님은 거의 달마대사처럼 짙고 검푸른 눈썹을 지녔다. "해발 700m 넘는 곳에 암자가 자리 잡으면 신선이 되고, 해발 300~600m에 위치하면 수행하기 좋다"는 말을 들려준다. 따라서 후자인 성지암은 수행하기 좋은 도량. 성지암은 또 한국의 사찰에서는 쉽게 만나기 힘든 목각불을 접할 수 있다. 잠시 예를 갖추고 둘러봐도 좋을 것이다. 몽골의 이동가옥인 게르를 닮은 팔각정에서 통유리를 통해 내려다보는 청도의 풍광이 일품이다. 화양읍 청도읍성에서는 복을 빌면서 읍성 위를 걷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기복(祈福)의 읍성 위로 산골의 해가 저문다. 청도의 밤이 뜬다.

▲  읍성을 한 바퀴 돌면 건강해지고, 두 바퀴 돌면 오래 살고, 세 바퀴 돌면 극락왕생에 이른다고 했다. 화양읍 청도읍성을 밟는다. /조선영상미디어 

18:00 용암온천과 원동매운탕

물 좋다고 소문난 용암온천의 자랑은 지하 1008m 암반에서 뿜어져 나온다는 43도의 물. "게르마늄 유황탄산 온천수로 만성피로 회복, 중금속 오염 및 노폐물 제거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게 청도용암웰빙스파(054-371-5500)의 자랑이다. 30도를 넘지 못하는 국내 대부분의 온천수를 고려하면 작지 않은 미덕. 현란한 최근의 인테리어를 따라잡기는 힘들겠지만, 시설도 감투상 정도는 줄 만하다. 수압과 분무를 이용한 마사지를 즐길 수 있는 바데풀, 고려인삼탕, 박하탕, 야외온천탕도 지루하지 않게 이어진다. 히노키탕 좋아하는 온천객들에게는 아쉽지만, 야외온천탕은 옥으로 꾸몄다. 시사 주간신문 최근호를 한 장씩 코팅해 탕 속에서 볼 수 있도록 하는 센스도 갖췄다. 주중 8000원, 주말 9000원.

▲ 원동매운탕의 피리조림.

뜨거운 물에 몸을 달군 뒤 청도읍 원리 원동매운탕집(054-372-3737)으로 향했다. 청도 천변에 자리 잡은 이 집의 메뉴 중 흥미로운 것은 피리 조림. 피라미를 이곳 방언으로 피리라고 부르는데, 어른 손가락만한 놈들을 튀긴 뒤에 고추장 양념을 발랐다. 뼈도 발라내지 않고 통째 튀긴다. 붉은 고추장 양념과 푸른 고추가 원형 프라이팬에서 이룬 균형미가 압권이다. 바삭하면서도 상당히 맵다. 두 번 연속으로 먹으면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 소 1만5000원, 대 2만원. 메기 매운탕은 산초로 비린내와 느끼함을 없앴다. 함께 들어 있는 수제비 맛이 일품이다. 기름기가 적고 뒷맛이 깔끔하다. 크기에 따라 2만5000~4만원. 군청 공무원들이 즐겨 찾는다는 원동매운탕집은 독립된 방 구조로 되어 있다. 취향에 따라서는 견디기 어려울 것 같은 꽃무늬가 방의 콘셉트. 벽지, 띠지, 커튼, 천장이 일관된 꽃무늬를 자랑한다. 아직은 때가 이르지만, 창문 밖으로 매화, 벚꽃, 복숭아꽃이 순서대로 피면 장관일 것이다. 9시를 넘기자 일하는 할머니들이 성화다. 청도의 밤이 익는다.

▲ 북대암에서 바라본 운문사.

05:50 운문사 북대암

청도군 중심부에서 운문사까지는 33.2㎞. 대략 50분의 드라이브다. 정신 못 차리고 내린 전날의 눈 덕분에 곳곳이 설산이고 눈 덮인 산사다. 덕분에 3월의 겨울을 만끽하는 호사를 누린다. 비구니 승가대학으로 이름난 운문사는 1440여년간 이어진 큰 사찰. 오늘은 그 위의 북대암(北臺庵)에 오른다. 가파른 경사라 30분을 오르면 땀이 뻘뻘 흐르는데, 투덜거릴 즈음 "걷는 사람이 장수합니다"라며 암벽에 붙은 팻말이 위로한다. 암벽등반 하는 사람들이 보면 좋아서 입이 쩍 벌어질 가파른 암벽이 병풍처럼 북대암을 두르고 있다. 산 밑에서 올려다볼 땐 벼랑 끝에 매달린 까치집처럼 보였는데, 암자에 올라 운문사를 내려다보니 부처님 손바닥의 한 줌이다.

▲ 운문사 북대암. 암벽에 매달린 듯 위태롭다. /조선영상미디어

북대암 칠성각과 산신각을 오르는 돌계단은 어깨 너비 정도나 될까 싶은 가파르고 좁은 길. 그 까마득한 경사를 오르며, 삶을, 인생을 배운다. 요사채에서 나오는 비구니 스님이 아침 8시에 시작하는 아침 공양을 권한다. 두 손 모아 합장하며 발길을 운문호(湖)로 이끈다. 물비늘이 찰랑인다. 청도의 아침이 깨어나고 있다.


09:30 내시 고택

청도 기차역 앞 삼양추어탕(054-371-2331)에서 잡어(雜魚)로 끓인 추어탕으로 해장한다. 미꾸라지 대신 쏘가리, 황동어, 꺽지 등 청도 천변에서 잡은 잡어를 갈아 끓였다. 부드러운 배추를 함께 넣었는데, 걸쭉하기는커녕 조갯국처럼 맑다. 한 그릇 5000원.

▲ 잡어 추어탕.

늦은 아침을 마치고 임당리 김씨 고택으로 향한다.

18~19세기 조선시대 궁중 내시로 정 3품 벼슬에 올랐던 통정대부 김일준이 말년에 낙향하여 지은 집이라고 했다. 김선희 문화해설사의 도움을 받아 잠겨 있는 고택(古宅)의 문을 연다. 고택 안으로 들어가려면 청도군청 문화관광과(054-370-6363)에 미리 전화를 걸어 허락을 받아야 한다. 내시의 가계를 안쓰러워하는 문화해설사의 설명이 이어진다. 사당에서 이 집의 족보 한 책이 발견되었는데, 여느 양반집 족보와 달리 더없이 단출했다고. 그럴 수밖에. 단 한 명의 입양을 통해 후손을 잇는 가계니만큼 17대 내시 집안의 족보래봤자 겨우 17인에 불과할 것이 아닌가. 여느 조선시대 집과 달리 사랑채에서 안채를 완벽하게 '감시'할 수 있는 구조가 내시고택의 특징이다. 사내구실을 할 수 없는 남편이 아내를 바라보는 시선은 얼마나 의심으로 가득 찼을 것인가. 사내구실을 기대할 수 없는 아내가 남편을 바라보는 시선은 또 얼마나 잔인했을 것인가. 고택 안의 음기(陰氣)가 가혹하다.

13:00 어머니밥상의 돌솥 쌈밥 정식

청도 8경 낙대폭포 가는 길의 어머니밥상(054-373-8559)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황토 흙벽과 감물 들인 삼베를 바닥에 깐 방, 아(亞)자 무늬 창과 식탁도 시선을 잡아채지만, 1인 1만2000원인 정식이 더 매력적이다. 쌈밥정식이라고 스스로를 칭했지만, 사실상 한정식 수준. 우선 쌈은 당귀, 향나물, 적겨자, 케일, 청겨자, 적근대, 상추, 머위, 다시마가 정갈하게 놓였다. 여기에 명란젓, 까나리젓, 낙지젓, 참젓이 가지런하다. 여기에 갈치조림(사실상 갈치찌개에 가깝다), 된장찌개, 굴비, 찰수수전, 땅두릅, 머위나물, 고구마줄기, 장조림이 입맛을 하염없이 돋운다.

점심을 마친 뒤 가볍게 등산하는 기분으로 낙대폭포에 오른다. 남산 중턱에 있는 높이 30여m의 폭포다. 한 10여분 걸었을까. 하얗게 물방울이 부서지면서 계곡수가 곤두박질하고 있다. 여름이면 우비를 갖춰 입거나 수영복 차림의 사람들이 폭포 아래에서 물줄기를 맞으려고 줄을 선단다. 청도 천변에서는 소싸움축제(3월17~21일)를 맞아 유등제 준비가 한창이다. 이 마을을 관통하는 청도천에 등불을 띄워 보내는 행사다. 강물 건너 주구산(走狗山)을 바라보니 정말 달리는 개를 닮았다. 그 개를 주저앉히기 위해 떡 모양의 절을 지었단다. 원래 이름은 덕사(德寺)지만, 동네에서 불리는 이름은 '떡절'. 주지 연암 스님은 "주민들이 친근감을 느끼니 그것으로 됐다"고 허허 웃는다. 청도의 여유가 푸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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