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돈 없으니 마라톤이라도?

  • 등록 2010-11-05 오후 12:11:11

    수정 2010-11-05 오후 12:11:11

[이데일리 이진우 기자] 신용회복위원회 20여명 직원들이 지난달 24일 춘천 마라톤 대회에 참가해 전원이 풀코스를 완주했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무슨 사내 단합대회를 했나 싶거나 혹시 실적 증대를 위해 해병대 캠프 보내듯 마라톤 대회를 보냈나 하겠지만 이들이 난생 처음으로 마라톤 대회에 나간 이유는 전적으로 돈 때문이었다.

직원들이 모두 풀코스를 뛸테니 그걸 보고 감동을 받거든 한 구좌당 42.195km를 상징하는 4만2195원씩을 기부해 달라는 취지였다. 얼마가 될 지 모르지만 그렇게 모인 돈은 신용회복절차를 밟고 있는 사람들에게 소액대출을 해주는 재원으로 사용된다.
 


신용회복위원회 직원들이 이렇게 좋은 일도 한다는 미담(美談)을 전하자는 게 아니다. 자고 나면 서민대출 상품이 하나씩 튀어나오는 이 시대에 왜 여기는 대출해 줄 돈이 없어서 사무직으로 입사한 이들이 마라톤 대회에 나가야 하느냐는 얘기다.

이해를 돕기 위해 신용회복위원회가 뭘 하는 곳인지 잠깐 소개하면, 여기는 금융회사에서 돈을 빌렸다가 빚을 못 갚고 두 손을 든 이들에게 원금과 이자를 일부 탕감해서 빚을 갚을 수 있는 정도의 크기로 `리모델링`해 주는 곳이다.

그러면 채무자는 최장 8년동안 자기 수입 중에 먹고 살 만큼의 돈만 남기고는 모두 그 빚을 갚는데 써야 한다. 다 갚으면 신용불량자 딱지를 떼 주는데 이걸 `신용회복절차`라고 하고 전국에서 약 42만명이 이런 절차를 밟고 있다.

신용회복절차를 밟는 사람들도 살다 보면 급한 돈이 필요할 때가 있기 마련이지만, 신용불량자 낙인이 찍힌 이들에게는 대부업체도 돈을 빌려주지 않고 햇살론도 받을 수 없다. 2년동안 성실히 돈을 갚고 나서야 겨우 미소금융 창구에 갈 수 있다.
 
그럴 때 이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게 신용회복위원회의 소액대출 제도다. 신용회복절차를 밟기 시작해서 1년 이상 꾸준히 돈을 갚은 이들에게만 대출을 해주는데, 대략 300만원 정도의 돈을 4% 정도의 금리로 최장 3년동안 빌려준다. 눈에 띄는 것은 이런 대출의 대손율이 몇년째 3%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작심하고 새출발을 하는 이들이라 대출이자를 열심히 갚는다는 게 신용회복위원회의 분석이다.

이런 대출을 위해서는 한달에 50억원 정도의 대출재원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 신용회복위원회의 금고에 남은 돈은 약 200억원뿐이다. 
 
신용회복절차를 밟고 있는 42만명중에 이 제도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3만명에 불과하다. 몰라서 못쓰는 사람들도 많은데 적극적으로 홍보를 하지 못하는 이유 역시 돈이 없기 때문이다. 너도 나도 돈 빌려달라며 몰려들기 시작하면 대책이 없기 때문에 쉬쉬하는 형편이다. 

3만명 정도에게라도 꾸준히 대출을 해주려면 약 800억원이 필요하다. 그러나 신용회복위원회가 갖고 있는 돈은 기부금으로 들어온 170억원 뿐. 나머지는 그때 그때 미소금융재단 등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다 아슬아슬하게 메운다. 신용회복위원회 직원들이 마라톤 대회에 나간 것도 그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가 필요한 돈은 자기가 마련해야지 왜 정부가 대주냐거나 탕감해준 이자와 원금을 생각하면 이미 충분히 지원해줬는데 뭘 또 주냐는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갚을 돈도 줄여주는데 거기에 돈까지 막 빌려주면 도덕적 해이를 조장하는 일이라는 지적도 맞다.

그러나 그런 잣대를 들이대자면 2조원의 재원이 들어간 미소금융이나 역시 2조원을 쏟아부을 예정인 햇살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전환대출, 희망홀씨, 햇살론 등 이런 정책성 대출의 가장 큰 고민은 `언 발에 오줌누기`라는 점이다. 이렇게 대출을 받아서 이전에 받은 고금리 대출을 갚더라도 몇달 뒤 돈이 떨어지면 다시 대부업체를 찾는다. 수조원을 쏟아붓는 정책이지만 급한 불을 잠시 끄는 정도라는 얘기다.
 
떨어질 때 붙잡을 수 있도록 벼랑에 나뭇가지 몇 개를 더 박아놓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 중 상당수는 결국 벼랑에서 떨어져 신용회복위원회를 찾게 될 가능성이 크다.

반면 신용회복절차는 벼랑에서 이미 떨어진 서민들을 치료하고 회복시키는 단계다. 서민대출상품보다 어쩌면 더 근본적인 처방이다. 이들을 방치해두고 햇살론이나 미소금융에만 돈을 쏟아붓는 것은 약국에서 파는 진통제에는 건강보험 혜택을 주면서 입원환자가 먹는 진통제는 보험혜택을 주지 않는 것과 같다. 결국 의사와 간호사들이 진통제 값 마련을 위해 마라톤 대회에 나간 꼴이다.
 
누구나 자기가 만든 정책에 더 애착이 가기 마련이어서 금융위원회가 MB정부의 작품인 미소금융과 햇살론에 더 신경을 쓰는 것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햇살론과 미소금융에는 휴면예금과 복권기금 등 모든 가용자금을 총동원하면서 신용회복위원회 소액대출은 직원들이 마라톤을 해서 모으도록 방치하는 이런 상황은 공정사회도 아니고 친서민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장중심주의도 아니다.
 
신용회복위원회가 `신용 전과자`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일이 옳지 않다면 아예 못하게 막아야 할 일이겠지만 빌려줘야 될 것 같으면 정부가 기금을 만들어 빌려주는 게 옳다. 직원들이 알아서 기부금이나 좀 받아보고 안되면 그만두라고 할 일이 아니다.

남의 일이라고 치부할 문제도 아닌 듯하다. 다음 정권이 들어서면 `달빛론` 같은 새로운 서민대출 상품이 등장하고, 그때는 미소금융재단 직원들이 마라톤 연습을 시작해야 할 지도 모른다.

 
▲ 지난 2일 진동수 금융위원장과 박인주 청와대 사회통합수석 등이 신용회복위원회 긴급자금 지원 재원 모금을 위한 후원식에 참석했다. 기부금 모금 후원식에 참석해 자리를 빛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금과 재원을 마련해 안정적으로 굴러갈 수 있게 제도를 만드는 일이 이들에게는 더 시급한 일이라는 지적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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