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까지 이야기하면 무슨 사내 단합대회를 했나 싶거나 혹시 실적 증대를 위해 해병대 캠프 보내듯 마라톤 대회를 보냈나 하겠지만 이들이 난생 처음으로 마라톤 대회에 나간 이유는 전적으로 돈 때문이었다.
직원들이 모두 풀코스를 뛸테니 그걸 보고 감동을 받거든 한 구좌당 42.195km를 상징하는 4만2195원씩을 기부해 달라는 취지였다. 얼마가 될 지 모르지만 그렇게 모인 돈은 신용회복절차를 밟고 있는 사람들에게 소액대출을 해주는 재원으로 사용된다.
신용회복위원회 직원들이 이렇게 좋은 일도 한다는 미담(美談)을 전하자는 게 아니다. 자고 나면 서민대출 상품이 하나씩 튀어나오는 이 시대에 왜 여기는 대출해 줄 돈이 없어서 사무직으로 입사한 이들이 마라톤 대회에 나가야 하느냐는 얘기다.
이해를 돕기 위해 신용회복위원회가 뭘 하는 곳인지 잠깐 소개하면, 여기는 금융회사에서 돈을 빌렸다가 빚을 못 갚고 두 손을 든 이들에게 원금과 이자를 일부 탕감해서 빚을 갚을 수 있는 정도의 크기로 `리모델링`해 주는 곳이다.
그러면 채무자는 최장 8년동안 자기 수입 중에 먹고 살 만큼의 돈만 남기고는 모두 그 빚을 갚는데 써야 한다. 다 갚으면 신용불량자 딱지를 떼 주는데 이걸 `신용회복절차`라고 하고 전국에서 약 42만명이 이런 절차를 밟고 있다.
그럴 때 이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게 신용회복위원회의 소액대출 제도다. 신용회복절차를 밟기 시작해서 1년 이상 꾸준히 돈을 갚은 이들에게만 대출을 해주는데, 대략 300만원 정도의 돈을 4% 정도의 금리로 최장 3년동안 빌려준다. 눈에 띄는 것은 이런 대출의 대손율이 몇년째 3%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작심하고 새출발을 하는 이들이라 대출이자를 열심히 갚는다는 게 신용회복위원회의 분석이다.
이런 대출을 위해서는 한달에 50억원 정도의 대출재원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 신용회복위원회의 금고에 남은 돈은 약 200억원뿐이다.
신용회복절차를 밟고 있는 42만명중에 이 제도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3만명에 불과하다. 몰라서 못쓰는 사람들도 많은데 적극적으로 홍보를 하지 못하는 이유 역시 돈이 없기 때문이다. 너도 나도 돈 빌려달라며 몰려들기 시작하면 대책이 없기 때문에 쉬쉬하는 형편이다.
3만명 정도에게라도 꾸준히 대출을 해주려면 약 800억원이 필요하다. 그러나 신용회복위원회가 갖고 있는 돈은 기부금으로 들어온 170억원 뿐. 나머지는 그때 그때 미소금융재단 등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다 아슬아슬하게 메운다. 신용회복위원회 직원들이 마라톤 대회에 나간 것도 그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가 필요한 돈은 자기가 마련해야지 왜 정부가 대주냐거나 탕감해준 이자와 원금을 생각하면 이미 충분히 지원해줬는데 뭘 또 주냐는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갚을 돈도 줄여주는데 거기에 돈까지 막 빌려주면 도덕적 해이를 조장하는 일이라는 지적도 맞다.
그러나 그런 잣대를 들이대자면 2조원의 재원이 들어간 미소금융이나 역시 2조원을 쏟아부을 예정인 햇살론도 크게 다르지 않다.
떨어질 때 붙잡을 수 있도록 벼랑에 나뭇가지 몇 개를 더 박아놓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 중 상당수는 결국 벼랑에서 떨어져 신용회복위원회를 찾게 될 가능성이 크다.
반면 신용회복절차는 벼랑에서 이미 떨어진 서민들을 치료하고 회복시키는 단계다. 서민대출상품보다 어쩌면 더 근본적인 처방이다. 이들을 방치해두고 햇살론이나 미소금융에만 돈을 쏟아붓는 것은 약국에서 파는 진통제에는 건강보험 혜택을 주면서 입원환자가 먹는 진통제는 보험혜택을 주지 않는 것과 같다. 결국 의사와 간호사들이 진통제 값 마련을 위해 마라톤 대회에 나간 꼴이다.
누구나 자기가 만든 정책에 더 애착이 가기 마련이어서 금융위원회가 MB정부의 작품인 미소금융과 햇살론에 더 신경을 쓰는 것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햇살론과 미소금융에는 휴면예금과 복권기금 등 모든 가용자금을 총동원하면서 신용회복위원회 소액대출은 직원들이 마라톤을 해서 모으도록 방치하는 이런 상황은 공정사회도 아니고 친서민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장중심주의도 아니다.
신용회복위원회가 `신용 전과자`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일이 옳지 않다면 아예 못하게 막아야 할 일이겠지만 빌려줘야 될 것 같으면 정부가 기금을 만들어 빌려주는 게 옳다. 직원들이 알아서 기부금이나 좀 받아보고 안되면 그만두라고 할 일이 아니다.
남의 일이라고 치부할 문제도 아닌 듯하다. 다음 정권이 들어서면 `달빛론` 같은 새로운 서민대출 상품이 등장하고, 그때는 미소금융재단 직원들이 마라톤 연습을 시작해야 할 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