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검색결과 652건
- 추억만 부려놓고 열차는 떠났다 ‘과거 속으로’
- [경향닷컴 제공] 한국은 재개발공화국이다. 웬만한 도시에선 불과 한 세대 전의 모습도 찾기 힘들다. 삼국시대에 세운 절이나 조선의 궁궐, 경상도의 사대부 고택은 남아 있지만 50년 전의 할아버지가 살았던 도시의 모습은 대부분 지워졌다. 짓고, 부수고, 짓고, 부수고를 끊임없이 반복해왔기 때문이다. 그동안 재개발은 미덕이었고, 일부에겐 재테크였다. 고쳐 짓는 것보다 부수고 다시 짓는 것이 돈이 된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자신이 나고 자란 집도, 조상 대대로 묵었던 마을도 쉽게 지워버렸다. 갑작스러운 충격으로 잠시 기억력을 잃은 사람처럼 한국의 주요 도시엔 한 세대 전의 모습이 없다. 흑백 앨범엔 분명하게도 그 시절 그 모습이 남아있는데도 말이다. 해서 사진기를 둘러멘 요즘 젊은이들이 서울의 낙산길이나 부산 문현동, 통영 동피랑 벽화마을을 찾곤 한다. 벽화 그 자체가 아름다워서라기보다 아버지 세대, 할아버지 세대의 집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군산 경암동 철길마을에 간 것도 과거를 보고 싶어서다. 철길마을은 한 두 세대 전의 모습을 보여주던 앨범이다. 386세대가 1960년대 들었던 ‘기찻길옆 오막살이’란 동요가 생각나는 그런 마을이었다. 거기도 사진기 멘 젊은이들이 몰려오는 곳이다. 철로 바로 옆에는 집들이 붙어있다. 철길 옆에 슬리퍼가 나란히 놓여있거나 보조바퀴가 달린 어린이 자전거가 세워져있는 집도 있었다. 가마솥이 걸린 폐가도 보였고, 자재를 보관하는 창고도 있다. 일단 군산이란 도시에 대해 먼저 알아두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군산은 일제가 조선을 강제병합한 후 철저하게 한국의 물자를 수탈해간 항구다. 김제 만경 평야의 너른 들판에서 가져온 쌀을 일본으로 가져갔다. 군산은 금강 하구에서 이어지는 강경 뱃길의 들머리로 1899년 개항한 해상교통의 요충지다. 1910년대 군산은 ‘작은 일본’이었다. 군산 주민의 절반인 약 8000명이 일본인이었을 정도다. 해서 군산에 가면 가끔 일본인 관광객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이 나고 자란 집들인 적산가옥, 그들이 다녔던 절 동국사를 찾아 오는 것이다. 군산은 일제가 패망한 뒤 그리 많이 변치는 않아서 조선은행, 나가사키18은행 등 근대문화유산이 많다. 경암동 철길마을은 일제 때 조성됐다. 63년 전부터 살았다는 ㅇ씨는 “여기가 원래 갯벌이었다”고 했다. 신문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게 싫다는 그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은 거의 없다”며 아득한 옛날 얘기를 꺼냈다. 일제가 간척사업을 벌인 것은 이 일대에 방직공장을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었단다. 군산역에서 방직공장 부지까지 2.5㎞ 구간에 철길을 놓았다. 방직공장 대신에 북선제지가 들어섰다. 해방 후에는 고려제지에 이어 세풍제지 등 종이회사가 차례로 공장을 차지했다. 현재는 페이퍼코리아가 들어서 있다. 종이회사의 원자재를 실어나르던 철도였으니 ‘제지선’ 또는 ‘종이철도’라고 불렸다. 가난했던 시절, 갯벌을 메운 땅에도 사람들이 몰렸다. 팔도에서 온 사람들이 철로변에 오막살이를 짓고 살기 시작한 것이 마을의 시초였다. 지금은 마을 뒤로 아파트도 보이고, 대로 건너편에는 대형할인매장 이마트도 들어섰지만 당시에는 허허벌판이었다고 한다. 집은 하나 둘씩 늘어갔고, 기차가 겨우 다닐 만한 공간을 제외하고는 빼곡히 마을이 들어섰다. 열차와 마을이 공생하는 철길마을은 그렇게 조성되기 시작했다. “그나마 집들이 조금 나아진 것은 박정희때였어. 우리가 새마을사업을 한다고 하니까 집을 새로 짓게 해줬지. 그래서 수도도 전기도 들어오고, 집도 새로 지을 수 있었어.” 원래는 국유지라 집을 짓는 것은 어려운데 70년대 새마을운동 바람이 불 때 묵인을 해줬다는 것이다. 당시엔 가마니로 움막을 만들어 사는 사람도 있었단다. 어쨌든 마을 사람들은 토지점유의 대가로 세금을 내고 있다. 현재는 33가구가 살고 있다. 80년대 중반 땅 일부는 불하했지만 철길마을은 철도부지로 묶였다. 그나저나 열차가 다니는데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열차는 2008년 6월까지 하루 두 번 다녔다고 한다. 이후 지난해 말까지 부정기적으로 다니다가 지금은 열차운행은 중단됐다. 마을 사람들은 열차가 다닐 때면 법석을 떨었다. 아침엔 원료를 싣고 제지회사로 들어가는 열차가 다녔고, 오후에는 종이 완제품이 실려 나왔다. 철로변에 물건을 두면 박살이 나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늘 조심해야 했다. 마치 쓰레기수거차에 환경미화원들이 매달려 가는 것처럼 열차에도 안전요원들이 매달린 채 철길에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경적을 울리고 주의를 줬다. 요즘 지어놓은 지하철 역사도 열차가 달릴 땐 진동을 느끼는데 철길 마을은 양은냄비와 찬그릇은 물론 솥단지까지 흔들거렸을 게 분명하다. 마을 주민 중 하나는 여닫이 문이 드물다고 했다. 열차에 받히면 문짝이 날아가서 미닫이가 많단다. 철길마을이 알려지면서 몇 해 전부터 사진작가 등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그닥 이들이 달갑잖은 눈치다. ㅇ씨는 “만날 허름하고 지저분한 것만 찍어대니까 마을 사람들이 좋아허겄어, 사람들도 막 찍어대니까 당연히 불편하다”고 떨떠름해 했다. 사진쟁이들이 오면 마을사람들은 슬금슬금 숨는단다. 한 5년 정도 마을에 살았다는 책방 주인은 “이왕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졌으니 체계적으로 관광명소로 만들면 좋겠다. 공원을 조성하겠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흐지부지된 것 같다. 철길도 깨끗하게 단장해 놓으면 좋은데 기차가 안다니니까 집도 늘린다”고 했다. 군산시 문화관광과는 과거 철길마을을 놓고 관광지 논의를 하긴 했지만 지금은 어떤 대책도 없다고 했다. 낚시점에서 만난 40대 남성은 “언젠가 재개발이 되긴 될 거요. 이천몇년쯤에 공원 만든다고 하던데…”라고 얼버무렸다. 경암동 철길마을을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다. 거긴 쇠락한 50년대 60년대의 표정, 아니면 70년대 서울역 뒤편의 어느 허름한 주택가라고 해도 믿을 만한 그런 모습이 남아있다. 컬러TV 시대에 태어나 도회지에서 자란 젊은 세대들이 이 철길마을을 찾는 것은 바로 흑백사진 같은 묘한 정취가 있기 때문이다. 재개발공화국이 채 지워버리지 못한 그런 우리들의 얼굴 말이다. -길잡이- *서해안고속도로 군산IC에서 빠진다. 내비게이션에서 군산 경암동 철길마을을 치면 안나온다. 군산 이마트를 쳐야 한다. 이마트 앞 왕복 6차선 건너편 도로변 상가 뒤가 경암동 철길마을이다. 도로변에서 보면 철길은 안보인다. 상가 사잇길로 들어서봐야 철길마을의 모습이 나타난다. *군산은 근대문화유산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쌀을 저장해둔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장미동에는 옛 군산세관이 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는데 군산의 역사를 볼 수 있다. 서해안고속도로에서 나오자마자 만나는 군산 관광안내소에 가면 군산 근대문화유산 지도가 있다. 군산 근대문화유산으로 꼭 봐야 할 것은 나가사키18은행, 국내 유일의 일본식 사찰 동국사, 일제가 뚫은 해망굴은 꼭 보면 좋다. 군산 하구언은 철새도래지로 철새전망대도 있다. *군산시 중앙로에 있는 이성당(063-445-2772)의 포장지에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이란 글귀가 있다. 1920년대부터 일본인들이 하던 빵집을 해방 직후 인수받아 운영하고 있단다. 옛 조선은행 앞 빈해원(063-445-2429)이란 중국집은 50년 이상된 중국집이다. 군산 토박이들은 요즘 미원동의 복성루(063-445-8412)도 많이 찾는다고 했다.
- 겨울에 가보고 싶다… 안갯속 고요한 종탑
- [경향닷컴 제공] 12월 여행지로 성당만한 곳도 없다. 불자가 아니라도 절에 갈 수 있듯이 신자가 아니라도 성당을 찾을 수 있다. 기독교가 처음 전해진 것은 조선 중기이지만 성당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은 기독교 선교를 묵인한 1882년 한미수호조약 이후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세워진 성당은 건축적으로 아름다워 문화재로 지정된 곳도 있다. 캐럴소리마저 희미해진 시대, 성당은 마음을 다스릴 만한 여행지로 좋다. 고즈넉한 묵주기도길… 수도원 같은 음성 감곡성당 ▲ 횡성 풍수원성당 수도원 같았다. 2층 구조의 피정의 집 옆에 붉은 빛을 띠는 성당이 서 있다. 말수가 적은 60, 70대 신자들은 촛불을 하나 올리고, 묵주를 들고 성모상 앞에 말없이 앉아 손을 모았다. 바람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정도로 성당은 고요했다. 성당 본당은 1930년 완공됐지만 성당의 역사는 1896년부터 시작됐다. 경기도 여주에서 선교를 하던 프랑스 외방선교회 소속 임가밀로 신부가 감곡에서 대궐 같은 집을 발견했다. 기와집은 명성황후의 육촌오빠인 민응식의 집이었고,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가 피신했던 곳이다. 훗날 집을 사들인 임 신부는 여기에 성당을 지어 성모에게 바쳤다. 임 신부의 고향은 프랑스 루르드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모 성지다. 성모상도 루르드에서 가져왔다. 이런 유래 때문에 정식 이름이 감곡매괴성모순례지성당이다. 꼭 빼놓지 않고 봐야 할 곳은 매괴동산이라고 쓰여진 묵주기도길이다. 고즈넉했다. 정상에는 십자가와 임가밀로 신부상이 있다. 언덕을 한바퀴 도는 데 40분 걸렸다. 임가밀로 신부의 가묘도 있다. 가묘는 1947년 임 신부가 묻혔던 곳이나 1983년 성당 본당내로 유해를 옮겼단다. 전통문화·외래종교의 공존 강화 성공회성당 ▲ 강화 성공회성당 답사여행객들에겐 꽤 유명한 한옥성당이다. 1900년에 세워졌다. 석조 건물 대신 왜 한옥 성당을 세웠을까? 이갑수 신부는 “아마도 당시 한국문화를 존중하려 애썼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생각해보자. 1866년 대원군은 프랑스 신부 9명을 비롯, 무려 8000명의 신자를 처형했다. 가까스로 탈출한 프랑스 신부가 이를 인도차이나에 주둔하던 로즈 제독에게 알렸고, 결국은 프랑스 군대가 조선을 침범했다. 병인양요다. 이후 한세대가 흘렀지만 조선인들에겐 외세에 대한 감정이 남아있었을지 모른다. 특히 강화도는 당시 수도권 방어의 최전선이 아니던가. 그래서일까. 성당이지만 구조는 절과 비슷하다. 대문에는 태극 문양 위에 십자가를 그려넣었다. 문을 열면 다시 중간문이 나온다. 불교로 치면 사천왕문이나 불이문 정도 될 듯하다. 여기에 한국식 범종을 걸어놓았다. 종에도 십자가 문양이 있다. 성당은 2층 한옥 건물. 2층에는 ‘천주성전’이란 현판을 붙였고, 본당 기둥에도 5개 한자 현판을 걸었다. 하나만 읽어보자. ‘삼위일체천주만유지진원(三位一體天主萬有之眞原)’. 삼위일체 천주는 만물을 주관하시니 참 근본이 되신다는 뜻이다. 궁궐의 처마선, 박공머리에 세워놓은 잡상이 성당의 지붕에도 올려져 있다. “십자가와 잡상이라….” 전통 문화와 외래 종교, 적어도 성공회 성당은 서로를 존중했다. 오병이어 형상화… 수수하고 단아한 강릉 초당성당 ▲ 강릉 초당성당하얀 성당은 수수하고 단아했다. 높은 첨탑에 십자가가 없었지만 외려 숙연한 느낌이 들게 했다. 성당에 들어섰더니 십자가 위로 햇살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제단 바로 위에 창을 내어 빛이 들어오게 했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걸린 예수상은 마치 소년 같았다. 특별한 멋을 낸 것도 없고, 화려하지도 않았지만 왠지 끌렸다. 성당 부지는 물고기 모양이었다. 처음엔 사제관과 성당 부지가 붙어있었는데 도로가 성당 부지를 가로질러 생겼다. 교회는 신성한 법. 소음을 줄여야 했다. 성당을 설계한 건축가 김영섭 성균관대 교수는 그래서 오병이어를 형상화한 성당을 만들기로 했다고 했다. “땅은 네모나고 하늘은 둥글다는 것을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고 하죠. 그래서 성당 내부를 천국을 상징하는 둥근 모양으로 했습니다.” 성당을 둘러서 있는 복도 역시 원형. 나누면 무한해진다는 의미를 담았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통한다. 2002년 완공된 성당은 건축학도들에게는 금세 유명해졌다. 때 묻지 않은 촌각시 같은 소박함 횡성 풍수원 성당 19세기초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40명의 신도들이 피난처를 찾아 헤맸다. 그러다 찾은 곳이 횡성 풍수원. 당시엔 초가에 모였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사제서품을 받은 정규하신부가 1907년 성당을 준공했다. (김대건 신부는 중국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풍수원은 한국인 신부가 세운 최초의 성당이라고 할 수 있다. 벽돌도 신자들이 구웠다. 겉은 위엄이 있어도 내부는 소박하다. 서툰 솜씨로 그린 성화가 벽에 걸려있고, 바닥은 나무 마루다. 성당 내부는 특별한 장식은 없었지만 단아했다. 때묻지 않은 촌각시 같다. 소박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어서 2003년 MBC드라마 <러브레터>를 여기서 촬영했다. ▲ 음성 감곡성당 성당 뒤편으로는 명상의 길이 있다. 명상로엔 판화가 이철수씨의 석각조형물이 늘어서있다. 돌계단을 따라 오르면 정신부의 묘소, 십자가 상 등을 볼 수 있다. 드라마·영화 촬영지로 유명 아산 공세리성당 고딕 양식의 현재 성당은 프랑스 출신의 드비즈 신부가 1922년 중국인 기술자를 데려와 지었다. 붉은 벽돌과 먹빛 벽돌이 대조를 이루고 지붕 귀퉁이에는 하얀 석고상을 장식물로 앉혔다. 이명래 고약이 바로 공세리성당에서 유래했다. 이조참판을 지낸 박만선이 주민들이 너무 가난하게 사는 것을 보고 간척사업을 벌였다. 고된 노동으로 몸이 닳고 헐어 고생하는 일꾼들을 위해 고약을 개발한 사람은 바로 성당을 지은 드비즈 신부. 고약은 드비즈 신부의 한국 이름을 따서 성일론(成一論) 고약으로 나왔고, 후에 비법은 신부의 일을 도와주던 이명래에게 전수됐다. 드라마 <모래시계>,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불새> <고스트맘마> 등을 촬영했다. -길잡이- △음성 감곡성당 : 중부내륙고속도로 감곡IC에서 빠진다. 감곡 방향으로 우회전해서 감곡읍까지 온다. 매괴여중 뒤편 언덕에 성당이 있다. 농협 앞 골목에 밥집이 많다. (043)881-2808 △강화 성공회성당 : 인천 강화읍 관청리에 있다. 읍내 우리은행을 조금 지나면 오른쪽으로 성공회성당 진입로가 있다.성당 아래 대형 주차장이 있다. 성당은 들어갈 수 있지만 내부는 사전에 요청해야 볼 수 있다(032-934-6171). 성당에서 차로 5분 거리인 강화경찰서 골목에 있는 43년된 강화국수집이 유명하다. 간판은 비빔국수라고만 쓰여 있다. 비빔국수와 잔치국수만 한다. 보통 3000원, 특 3500원. (032)933-7337 △강릉 초당성당 : 경포대와 가까운 초당동에 있다(033-652-9770). 초당 순두부가 초당동에서 유래했다. 초당은 허균의 아버지 허엽의 호. 초당순뚝배기(033-653-7398) 주인은 모두 23곳의 순두부집이 있다고 했다. 두부가 유명해진 것은 한국전쟁 후 주민들이 납북된 이후 아낙네들이 두부를 내다 팔면서부터라고 한다. 허난설헌 생가터도 가볼 만하다. 성당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다. △횡성 풍수원성당 : 중앙고속도로 횡성IC에서 빠진다. 양평 방향 6번 국도로 12㎞ 정도 달리면 풍수원 성당이 나타난다(033-343-4597). 횡성 안흥찐빵마을은 풍수원성당에서 약 40㎞ 떨어져 있다. △아산 공세리성당 : 서해안고속도로 서평택IC에서 빠진다. 아산만 방조제를 넘으면 공세리성당이 나타난다(041-533-8181). 삽교천 방조제를 지나 당진 가는 길목에는 우렁쌈밥집이 몰려 있다. ▶ 관련기사 ◀☞우리 동네 철새 도래지… 오리야, 기러기야 퇴근길에 만나자☞[방방곡곡 체험여행] 하루를 기다려도 괜찮은 ''5분의 예술''
- 인천의 ‘배꼽’을 보신 적이 있나요?
- ▲ 중국신 건축물이 남아있는 차이나타운. 이국적인 분위기로 주말이면 관광객들이 많이 몰린다.[경향닷컴 제공] 인천에서 나고 자란 시인 김중식은 <나의 도시, 당신의 풍경>에서 인천을 이렇게 썼다. ‘근현대사에서 인천은 상륙의 배꼽이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강화도조약, 제물포조약 등으로 열강들이 지 맘대로 상륙했다. 일본군은 나가사키나 시모노세키 등지에서 인천으로 상륙했다. 1941년 조선주둔 일본군이 사만육천 명일 때 김포에 육군비행연대를 두고, 강화를 해군 근거지로 삼았다. 해방 후 미24군단이 일본에서 인천으로 상륙했다. 6·25전쟁 때 맥아더 장군이 상륙했다. 지금은 김포공항과 영종도 국제공항을 통해 모든 게 거침없이 들어온다. 이에 앞서 아펜젤러와 스크랜턴(이상 감리교), 그리고 언더우드(장로교)가 상륙했다. 해방과 6·25전쟁 때 평안도, 황해도 인민들이 뱃길따라 상륙했다. 국가 주도 개발연대 시대에 전라도, 충청도 도민들이 상륙했다.’ ▲ 의선당은 중국식 절이다. 중국문화를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사실 한국의 근·현대사를 이야기할 때 인천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개화기엔 외래 문물이 홍수처럼 밀려오는 물꼬였으며, 한국전쟁의 흐름을 바꾼 전장이었고, 70년대 고도성장기엔 서민들이 모여들던 삶터였다. ‘인천의 운명 또는 지정학적 위치는 관문이다. (중략) 뭍의 문화와 물의 문화의 접점’이라고 김중식이 표현한 것처럼 인천만큼 역동적인 곳이 없었다. 중국의 급성장과 함께 더불어 인천은 급변하고 있다. ▲ 차이나타운 1패루. 중국 웨이하이시에서 기증한 돌로 만든 패루다. 인천 차이나타운과 근대건축유산을 둘러봤다. 재미도 있을 뿐 아니라 아이들 교육에도 좋다. 따지고 보면 인천의 역사는 한국의 역사다. 코스는 크게 3개다. ①차이나타운과 자유공원 ②중구청과 신포시장 주변 ③아트플랫폼이다. 인천역에서 길을 건너면 차이나타운을 상징하는 패루가 보인다. 높이가 11m나 되는 돌패루는 중국에서 보내와 세워졌다. 이 패루의 위상만으로도 차이나타운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다. 서울과 경기도 등 지자체들이 앞다퉈 차이나타운을 유치하려고 하는 것은 관광객 유치효과가 좋기 때문이다. 70~80년대의 초라한 중국마을이 아니라 관광명소로 변한 차이나타운을 볼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차이나타운은 북적였다. 비가 가끔 흩뿌린 주말이었지만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중국 전통의상을 입은 상인들이 손님들을 불러모으기도 했고, 이름난 음식점 앞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 ▲ 차이나타운 3패루.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는 계단길이 시작된다.차이나타운은 맛기행지로도 손색이 없다. 게다가 음식값도 싸다. 차이나타운에서 이름난 맛집은 공화춘, 청관, 풍미, 대창반점, 십리향, 원보, 복래춘 등이다. 잘 알다시피 자장면의 발상지는 인천이다. 중국에는 원래 자장면집이 없었다고 한다. 자장면을 처음 만든 집은 1905년 개업한 공화춘으로 알려져있다. 옛집은 이제 허물어져 없고, 새 건물로 번듯하게 옮겼다. 인천역 앞 1패루를 지나 올라가면 공화춘과 청관이 나란히 나타난다. 공화춘은 수십명이 줄을 선 상태여서 여행작가들이 맛있다고 추천한 풍미에 들렀다. 풍미는 중국식 건물로 제법 이국적이다. 서울시내 자장면과는 맛이 약간 다르다. 단맛이 적고, 쌉싸래한 된장맛이 났다. 공화춘을 마주보고 오른쪽 골목길로 접어들면 음식거리다. ▲ 청·일 조계지 계단. 중국과 청나라를 나누는 경계였다. ▲ 자유공원을 찾은 아이들이 매미채를 들고 곤충채집을 하고 있다.“자장면 없습니다”라고 안내문을 붙여놓은 만두집 원보도 들러봤다. 자장면 같은 것은 안 팔고 만두로 승부하겠다는 자부심이 대단해 보였다. 왕만두 1인분에 어른 주먹보다 큰 만두 3개가 나왔다. 중국식을 자처하며 돼지비곗살을 몽땅 넣어 느끼한 서울시내의 중국만두와 달랐다. 맛있다. 원보 옆 중국식 빵을 구워파는 집은 바로 십리향. 옹기 화덕 안쪽 벽에 빵들이 붙어있다. 아이들이 신기해하자 주인은 애들에게 사진을 찍으라고 했다. 단호박맛, 고기맛, 고구마맛 등 종류는 세 가지. 주변엔 노상에서 양꼬치를 구워 청도맥주와 함께 팔았는데 더울 때 들러 양꼬치 안주에 맥주로 목을 축이기에 좋다. 풍미에서 중구청 가는 길로 40m 떨어진 복래춘은 공갈빵이 유명했다. 차이나타운에서 조금 떨어져서인지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차이나타운에서 봐야 할 것 중 하나는 청·일 조계지 경계. 조계지 계단에선 중년의 아저씨가 고추를 말리고 있었다. 과거엔 왼쪽은 청나라, 오른쪽은 일본인 거주지 즉, 조계지였다. 100년 전엔 양국 조계지의 경계였을 텐데 지금은 고추를 말리고 있으니 세월이 무상하다. ▲ 1882년 개설된 옛 일본제1은행. 1911년 조선은행 인천지점으로 바뀌었다. 중구청을 중심으로는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건축물을 서너 개 볼 수 있다. 사실 중구청도 문화유산이다. 중구청은 옛 일본 영사관 자리였고, 그 아래로 조선은행건물,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 등이 있다. 신포시장 쪽으로 가면 신포시장 건너편 가톨릭센터 뒤 답동성당도 있다. 1891년에 건축된 약현성당이 한국 최초의 성당인데 인천 답동성당은 1895년에 완공됐다. 명동성당은 1898년 완공됐으니 건축학적으로 중요한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신포시장에선 유명하다는 닭강정가게를 찾아갔으나 수십명이 줄을 서 있어 발길을 물렸다. 다시 차이나타운으로 넘어와 자유공원도 들러봤다. 자유공원은 국내 1888년 조성된 최초의 시민공원으로 원래 이름은 각국공원이다. 한국전쟁 후 세운 맥아더 동상을 이전하고 만국공원으로 바꾸겠다는 인천시의 계획은 2005년 맥아더 동상 이전을 놓고 보혁갈등 끝에 유야무야돼 버렸다. 아직도 우리는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어쨌든 이곳에선 인천항이 내려다 보인다. ▲ 1895년에 세워진 인천 답동성당. 한국의 초기 성당 중 하나다. 인천에서 꼭 봐야 할 곳은 차이나타운 끝부분에 세워진 인천 아트플랫폼이다. 대한통운 창고 등을 개조해 만든 인천 아트플랫폼은 허름한 도시건축물도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부숴버리고 새 건물을 세우는 것을 최고로 아는 ‘재개발 지상주의’를 한 번 되새겨볼 만한 포인트다. 군수공장을 개조해 만든 중국 베이징의 다산쯔 798과 마찬가지로 명소가 될 가능성이 있다. ▲ 대한통운 공장 등을 개조한 인천아트플랫폼. 세계도시축전에 맞춰 8월말까지 인천여성미술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다. ▲ 대한통운 공장 등을 개조한 인천아트플랫폼. 세계도시축전에 맞춰 8월말까지 인천여성미술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다.신포재래시장에 있는 닭강정집. 주말이면 줄을 설 정도로 유명한 맛집이다. 과거 인천엔 궂은 이미지가 있었다.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에선 주인공이 술에 취해 고기냄새를 풍기며 전철로 돌아오는 도시로 묘사하며 인천을 떠나고 싶다고 했고, 70~80년대 군부대에선 ‘심심한’ 군가 대신 <인천의 성냥공장>을 부르게 했다. 80년대 집창촌 옐로하우스도 유명했다. 그래선지 항도 인천은 <목포의 눈물>의 목포처럼 서정성도 부족했고, <부산갈매기>의 부산처럼 활기도 강조되지 않았다. 집값에 따라 수도권의 도시를 평가하는 천박한 시선으로 인해 서울의 주변부로 타자화됐던 도시였다. 하지만 지금의 인천과 과거의 선입견으로 본 인천을 등식화할 수 없다. 인천은 급속하게 변해가고 있다. 게다가 재밌다. ■ 길잡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좋겠다. 전철 1호선 인천역에서 나오면 바로 차이나타운이 앞에 보인다. 역사 옆 관광안내소에서 ‘차이나타운’ 지도와 ‘근대역사의 파노라마 도보관광으로 즐기는 이색여행’ 지도를 달라고 해서 가지고 가면 좋다. 무료다. *코스는 차이나타운에서 시작하자. 1패루를 지나 맞은편 공화춘을 보고 오른쪽 중국음식거리를 들러본 뒤 반대편 의선당(중국식절)을 찾고, 이어 자유공원을 지나 근대문화유산건축물을 보고 신포시장으로 가는 코스가 좋다. 신포시장 건너편 가톨릭센터 뒤편에는 답동성당이 있다. 지도에는 1시간 코스라고 돼 있으나 천천히 걸으면 두어시간 정도 걸린다. 근대건축전시관(032-760-7549)은 월요일 휴무. 무료. 아트플랫폼 비엔날레조직위. www.iwabiennale.org *차이나타운의 맛집은 공화춘(032-765-0571·자장면), 청관(032-772-5118), 십리향(032-762-5888 중국빵), 원보(032-773-7888 왕만두), 풍미(032-772-2680 자장면), 대창반점(032-722-0937), 복래춘(032-772-3522 공갈빵) 등이 유명하다. 신포시장은 두번째 골목 끝머리에 닭강정집이 있다. 신포맛집닭강정(032-764-5888), 신포원조닭강정(032-762-5800), 찬누리닭강정(032-765-1235) 등이 유명하다. *인천세계도시축전이 10월25일까지 송도신도시에서 열린다. 인천역에도 안내 부스가 마련돼 있다. www.incheonfair.org▶ 관련기사 ◀☞맛 푸짐 낭만 넘실…‘한강데이트’ 떠나요☞"수많은 여행 중 걷기 여행이 가장 화려해"☞지리산 구룡계곡에서 탁족을~
- 사우나서 살고 사우나서 죽는 나라…핀란드의 헬싱키
- [경향닷컴 제공] ‘요람에서 무덤까지’란 복지천국 스웨덴의 슬로건을 핀란드 사우나에 적용해볼 수 있다. 핀란드에서 사우나는 목욕이 아니다. 레저이자 생활이며 전통이다. 핀란드 사람들은 아이도 사우나에서 낳고, 시신도 사우나에서 닦는다. 심지어 전쟁터에서도 텐트를 치고 돌을 데워 사우나를 했다고 한다. 가이드는 격식을 차릴 필요가 없는 사우나에서 비즈니스 상담도 한다고 했다. 인구는 500만명인데 사우나가 100만개. 집 지을 때도 사우나부터 짓는다. 그래서 핀란드를 여행할 때 사우나는 필수다. 굳이 사우나의 등급을 매기자면 전기사우나가 가장 낮고, 나무로 된 전통가옥에서 하는 사우나는 중급이다. 최고의 사우나는 스모크사우나, 즉 나무를 땐 연기가 그대로 배어 있는 사우나다.핀란드의 고도 투루쿠의 토미엔이란 섬의 스토르핀호바 리조트의 사우나를 찾았다. 투루쿠는 1812년 헬싱키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핀란드의 수도였다. 러시아가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이긴 뒤 서유럽의 영향력이 강한 투루쿠 대신 새 수도를 정한 것이다. 토미엔은 투루쿠 앞 발틱해의 ‘아키펠라고 국립공원’의 들머리다. 아키펠라고는 우리말로 치면 ‘다도해’다. 섬이 깨알같이 많아 핀란드인들도 세보지 못했다고 한다. 100년에 50㎝쯤 수면이 상승해서 섬들이 새로 생기기도 한다. 어쨌든 휴일이면 섬에 가서 쉬고 사우나를 하는 게 핀란드인들의 휴가법이다. 실제로 헬싱키 인근 수많은 섬에도 집이 두어채씩 있는데 하나는 별장, 나머지는 사우나다. (전 국토의 70%가 숲, 호수가 6만개나 된다.) 훤칠한 소나무가 좋은 숲 어귀에 사우나가 있었다. 작은 개울이 흐르는 암반 위에 통나무로 기둥을 올린 사우나는 3일 전부터 불을 땐다고 했다. 65t이나 되는 사우나 돌벽에 열기를 담기 위해서다. 안은 매캐했고, 숯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었다. 땔감은 자작나무를 많이 쓴단다. 가이드는 눈이 매울 경우 절대로 비비지 말고 밖에 나와 그냥 쉬면 된다고 주의를 줬다. 돌덩이 위에 물을 한 바가지 부을 때마다 수증기가 몸을 감았다. 땀을 흘렸는데도 희한하게 끈적거리지 않았다. 수건 한 장 두르고 맨발로 숲을 걷거나 나무 의자에 앉아 KOFF란 로컬 맥주를 마시면서 사우나를 해봤다. 맥주와 사우나도 묘하게 어울렸다. 2시간30분 정도의 사우나는 결코 지루하지 않았다. 왜 인접국가인 스웨덴이나 노르웨이엔 이런 사우나가 없을까. 피스카스에서 만난 할머니는 “먼 옛날엔 유럽에도 비슷한 전통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서로 발가벗고 마주하는 게 어색했을 것이고, 그래서 많이 없어졌을 것”이라고 했다. 핀란드는 유럽에서 가장 변방에 있는 나라이다보니 이런 전통을 아직까지 지켜오고 남아있는 것이라고 했다. 핀란드 사람들은 사우나로 내기도 건단다. 열기 속에서 오래버티기를 하는 것이다. 사우나에서 나오면 비히타라고 불리는 마른 자작나뭇잎으로 몸을 툭툭 쳤는데 건강에 좋다고 한다. 스토르핀호바의 사우나 옆에는 나무 중간에 걸쳐 놓은 오두막이 있다. 우리로 치면 삼림욕장의 통나무집이다.투루쿠도 핀란드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도시다. 13세기에 교황이 주교를 보냈으니 당시에도 꽤 큰 도시였음이 분명하다. 아쉬운 것은 1827년 화재로 잿더미가 돼 성당과 성곽을 제외하고는 투루쿠의 역사를 가늠해볼 만한 유적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다. 성당은 증축에 증축을 해서 덧입힌 자국이 드러나 있었다. 핀란드에서 사우나와 함께 즐겨야 할 것은 백야다. 백야를 핀란드 말로 유하누스(Juhanus)라고 한다. 기자가 방문한 5월말엔 해가 오후 10시쯤 졌고, 3시쯤 떴다. 해가 지고도 한참동안 환했다. 6월엔 해가 가장 길다는데 24시간 떠있다시피 한다.핀란드의 백야는 한낮이 한밤중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오후 5시의 햇살이 6~7시간씩 이어지는 것이다. 함께 여행하던 동료는 하루 일을 대강 갈무리할 수 있는 저물녘의 햇살같다고 했다. 광선은 비스듬히 창문으로 기어들어오고, 여리지도 강하지도 않은 햇발이 기분좋다고 했다. 밥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석양을 보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아루라 강변에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서 햇살을 즐긴다. 레스토랑으로 개조된 선박에 앉아 맥주를 기울이는 재미도 좋다고 한다.백야는 흑야에 대한 보상이다. 스칸디나반도에선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극단적이다. 겨울엔 하루 3~4시간밖에 뜨지 않는다. 그래서 햇빛 아래 있는 느낌이라도 얻기 위해 키카스발도라고 하는 밝은 램프를 켜놓는다. 암흑 속에서만 지내면 우울증에 걸리기 쉽기 때문이다. 반대로 여름은 핀란드의 모든 생명붙이들에게 활기를 불어 넣어준다. 생명들이 햇살 한 줌도 놓치지 않으려 쭉쭉 빨아먹으려 한다. ▲여행길잡이*핀란드관광청 홈페이지에서 여행정보를 한글로 얻을 수 있다. 태극기를 클릭하면 된다. 예를 들면 사우나 바와 도심에서 사우나를 할 수 있는 곳도 나온다. www.visitfinland.co.kr *핀에어가 주 4차례 인천~헬싱키 직항편을 운항한다. 유로를 쓴다.*헬싱키 도심 내에서 웬만한 거리는 걸어서 다닐 수 있다. 헬싱키 카드가 있으면 대중교통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으며 박물관과 미술관 등도 할인혜택을 받을 수 있다. 인근 수오멜리나섬으로 가는 섬여행도 공짜다. 헬싱키 카드는 24시간 33유로, 48시간 45유로, 72시간 55유로다. www.helsikicard.fi *아르텍 숍은 에스플라네이드 거리에 있다. www.artek.fi. 디자인포럼은 에스플라네이드에서 걸어서 10분. www.designforum.fi *헬싱키에서는 수오멜리나섬 관광을 추천한다. 마켓 스퀘어에서 배로 30분 거리. 핀란드 만을 지키는 요새였다. 헬싱키 사람들이 소풍가는 여행지. 결혼식도 많이 열린다. 헬싱키 카드가 있으면 배편 무료.*열차나 버스로 투루쿠까지 간 다음 현지 여행사를 이용하면 된다. 스토르핀호바 정보는 www.storfinnhova.fi에서 얻을 수 있다. 키미토 섬은 www.kimitoon.f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