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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행정 1호' 이종덕, 55년 무대서 내려왔다
- 이종덕 충무아트홀 사장이 15일 서울 중구 흥인동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에서 열린 퇴임식에서 직원의 송사를 듣고 눈물을 보이고 있다(사진=연합뉴스).[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형님은 영원한 깡패다. 욕심이 없는 분이라 일도 많이 했다. 오늘은 형님 퇴임식이 아니고 새로운 인생을 사는 첫날이다. 훈수 많이 해주시오”(표재준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장), “공연계 많은 종사자가 관리자가 아닌 동지로 생각해왔다. 관직의 짐에서 벗어나 문화예술의 삶을 살게 된 것 축하한다”(임영웅 연출), “직원들을 믿음과 신뢰로 진심으로 대해줬다. 명예로운 퇴임 축하드린다”(이창기 마포문화재단 사장), “수고하셨습니다. 건강하세요”(강수진 국립발레단장). ‘대한민국 제1호 예술행정가’이자 ‘문화계 마당발’ 이종덕(81) 충무아트홀 사장이 공연현장에서 은퇴했다. 무대 뒤, 반세기 예술경영 삶의 막을 내렸다. 이 사장은 15일 서울 중구 흥인동 충무아트홀 블랙에서 퇴임식을 갖고 55년 공직생활에서 물러났다. 이날 퇴임식에는 김동호 전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장, 고학찬 예술의전당 사장, 안호상 국립극장장, 이창기 마포문화재단 사장 및 배우 이순재·신성일·박정자·손숙·윤석화 등 이 사장과 오랜 시간 인연을 맺어온 선후배이자 동료, 문화예술계 및 정계 인사 400여명이 참석해 은퇴를 축하했다. 퇴임사 하는 이종덕 충무아트홀 사장(사진=연합뉴스).이 사장은 국내 문화예술계에서 ‘그를 모르면 간첩’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마당발이자 예술행정의 산 증인이다.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제1기로 공직생활을 시작한 뒤 제3공화국 수립과 함께 문화공보부 예술과 공무원으로 문화계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반세기 동안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상임이사, 서울예술단 이사장, 예술의전당 사장, 세종문화회관 사장, 성남아트센터 사장 등 우리나라 대표 예술기관을 운영하며 문화융성의 토대를 다져왔다. 특히 2011년 1월 3년 임기의 충무아트홀 사장으로 선임된 후 경영성과를 인정받아 1년씩 두 차례 연임하며 충무아트홀을 국내 대표 공연장 반열에 올려놓았다는 평가를 받았다.이날 충무아트홀 직원 및 이 사장과 인연을 맺은 후배, 문화계 인사들은 영상을 통해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직원들은 “직접 발로 뛰는 예술경영의 자세를 보여줬다”며 한목소리를 냈다. 1996년 데뷔 2년차에게 세종문화회관 극장을 대관해 준 인연을 소개한 소리꾼 장사익은 ‘봄날은 간다’ 등 2곡의 축하노래를 불렀고, 박정자는 김남조 시인의 ‘섣달 그믐날’을 낭독해 은퇴를 축하했다. 성악가이기도 한 고학찬 사장은 ‘고엽’을 직접 불러 선배의 퇴임에 박수를 보냈다. 윤상희 충무아트홀 문화사업부 사원은 송사를 통해 “이론이 아닌 실천으로 문화행정의 나아갈 길을 직접 보여줬다”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어 “사장님표 폭탄주, 베사매무초를 즐겨 부르시고, 신사의 탱고 스텝을 밟던 모습이 생생하다”며 “낮에는 공무원, 밤에는 한량처럼 살았다는 사장님을 통해 많이 배우고 성장했다. 임기를 다 보낸 리더를 보내 드린다”고 울먹이자 이 사장도 눈물을 보였다.이 사장은 55년간의 공직생활을 회고했다. 당초 2010년 11월 성남아트센터 사장을 끝으로 현업에서 물러날 예정이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당시 일면식도 없는 (중구)청장이 찾아와 사장 자리를 맡아 달라고 고개를 숙이며 간곡하게 부탁해 승낙했다. 임기가 끝나던 3년 뒤에도 1년 더 해달라고 해서 하게 됐다. 1년 뒤가 바로 오늘”이라며 “국가기관 23년, 32년 공공기관을 지내는 동안 그동안 뭔가 잘한 줄 알고 큰 소리를 냈는데 며칠 동안 생각해보니 월급을 꼬박꼬박 준 게 국민의 세금이더라. 오히려 무릎 꿇고 큰절을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며 웃었다. 마지막으로 “복 많이 받으시고, 내내 건강하십시오. 고맙습니다”라는 말로 퇴임사를 마무리했다. 이 사장은 이날 중구문화재단, 서울예술단, 예술의전당, 세종문화회관, 성남문화재단 등 총 7개 기관에서 총 7개의 감사패와 공로패를 받았으며 충무아트홀 후원회 및 직원에게서는 선물과 감사패를 따로 받았다. 이 사장은 퇴임 후 올해 초 임명된 단국대 문화예술대학원 원장 겸 석좌교수직으로 자리를 옮겨 문화예술인 양성에 매진한다. 퇴임하는 이종덕 충무아트홀 사장(오른쪽 두번째)과 이종덕 사장의 아내(오른쪽) 모습(사진=연합뉴스).
- "눈처럼 계절되면 오시길"…백성희, 무대서 잠들다
- 지난 8일 노환으로 별세한 한국 연극 역사의 산 증인 故 백성희의 영결식이 12일 오전 서울 용산구 서계동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대한민국 연극인장으로 열리고 있는 가운데 국악인 안숙선이 조창을 하고 있다(사진=방인권기자).[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든든한 버팀목이자 동지였다. 계절이 되면 내리는 눈처럼 다시 돌아오셔서 우리의 연극을 지켜보실 거다. ”(연출가 손진책), “선생님은 떠나지 않으셨다. 춥고 배고픈 무대를 지켜주실 거라 믿는다”(배우 손숙), “선생님은 내 인생의 목표셨다. 연기 교과서였다. 이제는 편히 쉬십시오”(배우 김금지), “치열한 사랑, 투철한 직업정신, 주변을 배려한 깊은 사랑은 우리에게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김윤철 국립극단 예술감독). 70년 연극 외길을 걸어온 배우 백성희(91)가 자신의 이름을 딴 무대 위에서 영원한 영면에 들어갔다. 12일 오전 10시 서울 용산구 서계동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 무대. 이날 약 1시간 가량 엄수된 고인의 마지막 영결식을 끝으로 선후배, 동료 등 연극인들은 배우 백성희를 떠나보냈다. 대한민국 연극인장으로 치러진 이날 영결식에는 유족과 연극계, 문화예술계 인사 2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고인의 영면을 기원했다.배우 백성희(사진=국립극단).지난 8일 향년 91세 나이로 타계한 고인은 70여년간 400편의 연극에 출연한 ‘한국연극계의 산 증인’이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군부독재 등 현대사의 험난한 고비를 거치면서도 한결같이 무대를 지켰다. 17세에 빅터무용연구소 연습생, 빅터가극단 단원을 거쳐 같은 해 연극 ‘봉선화’로 데뷔했다. 낙랑극회·신협에서 활동했으며 1972~1974년 최연소 여성 국립극단 단장으로 선출된 후 1991~1993년 다시 한번 국립극단장에 추대됐다. 2010년에는 국내 처음으로 배우의 이름을 딴 ‘백성희장민호극장’이 세워졌다. 이날 사회를 본 배우 손숙은 “이 무대에는 우리가 사랑했던 백성희 선생님이 누워있다”며 “이 시대 가장 위대한 연극배우 백 선생님을 보내드리기 위해 한마음으로 모인 우리가 백 선생님의 마지막 관객”이라고 말했다. 이어 “무대 뒤는 조명이 켜지지 않으면 캄캄한 어둠이다. 막이 오르기 전에 무대 뒤에서 몸을 가늘게 떠시면서 간절하게 기도하시던 백 선생님을 기억하고 있다”며 “하지만 막이 오르고 무대에 나오면 그 꼿꼿한 자세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관객을 압도하던 배우였다”고 회고했다.짧은 묵념을 가진 뒤 김윤철 국립극단 예술감독이 백성희의 70여년 배우 인생을 간략하게 소개했다. 이어 배우 박정자는 고인의 70년 연기 인생을 정리한 회고록 ‘백성희의 삶과 연극, 연극의 정석’의 일부 내용을 발췌해 추모낭독을 했다. 고인의 생전 인터뷰와 공연 장면을 담은 영상이 나오자 일부 조문객들은 눈물 훔치며 훌쩍였다.추모사는 생전에 고인과 인연이 깊었던 연출가 손진책 전 국립극단 예술감독과 배우 김금지가 맡았다. 손진책은 조사를 읽기 전부터 목이 메여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장민호 선생님도 떠나고 선생님마저 떠나셨으니 이 극장은 이제 전설의 극장으로 남게 됐다. 한결같이 우리 곁에 계실 것만 같았던 선생님을 떠나 보내는 이 슬픈 마음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며 울먹였다.이어 “선생님은 70여 년간 연극의 끈을 이어온 대한민국 연극 역사의 주춧돌이며 산증인이셨다. 선생님은 성실함으로 후배들에게 모범을 보여줬고, 연기는 우리의 전범이었다”고 고인의 업적을 기렸다. 배조사가 끝난 후 이윤택의 조시를 안숙선이 노래하고, 소리꾼 장사익은 고인이 출연했던 영화 ‘봄날은 간다’의 동명 주제가를 부르며 고인을 기렸다. 영결식 후 중구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는 손 전 국립극단 예술감독의 연출로 국립창극단 단원 등 48명이 만가와 씻김굿을 하는 노제가 진행된다. 이후 고인은 분당메모리얼파크에서 영면한다. 한편 이날 영결식에서는 임영웅 연출가 겸 산울림극단 대표가 명예장례위원장, 윤봉구 한국연극협회 이사장이 장례위원장을 맡았으며 장례부위원장으로는 박정자, 윤대성, 손진책, 안호상이 맡았다. 배우 강부자, 김갑수, 김금지, 김성녀, 김을동, 나문희, 박근형, 송승환, 양희경, 유인촌, 윤문식, 이순재, 전무송, 최불암, 최종원, 최주봉, 이윤택, 이강백 등 한국 대표 연극인 200여명이 장례위원에 이름을 올렸다. 김 국립극단 예술감독은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12일 오전 서울 용산구 서계동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엄수된 연극배우 고(故) 백성희 영결식에서 고인의 영정이 영결식장을 나서고 있다(사진=방인권기자).지난 8일 노환으로 별세한 한국 연극역사의 산 증인 故 백성희의 영결식이 12일 오전 서울 용산구 서계동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대한민국 연극인장으로 열린 가운데 고인의 지인들이 헌화를 하고 있다(사진=방인권기자).
- 女 첫 국립극단장·70年 연극외길…'백성희' 누구인가
- 지난 8일 향년 91세로 별세한 배우 백성희. 고인은 이날 밤 11시18분께 서울의 한 요양병원 입원 중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1950년 창단한 국립극단의 현존하는 유일한 창립 단원이자 현역 원로단원이었다. 17세에 연극 무대에 데뷔한 이후 70년 넘게 한 길만을 걸어온 한국 연극사의 산증인이다(사진=국립극단).[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우연히 일본 소녀가극단 ‘다카라즈카’의 홍보물을 보고 연극인생을 살 것을 가슴에 품었다고 했다. 1943년 극단 현대극장 입단한 17살 꿈 많은 소녀는 오로지 연극 한 길만 걸어왔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군부독재 등 현대사의 험난한 고비를 거치면서도 한결같이 무대를 지켰다. 배우 백성희(91·본명 이어순이)가 8일 밤 세상을 떠났다. 향년 91세. 지난해 가을 건강이 급격히 악화돼 서울의 한 요양병원 중환자실에서 투병중 이날 밤 11시18분경 병석에서 눈을 감았다. 2013년 자신의 이름을 딴 서울 서계동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공연한 연극 ‘3월의 눈’과 명동예술극장 무대에서 ‘마리아’를 연기한 ‘바냐아저씨’는 고인의 유작이 됐다. 2013년 서울 서계동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공연한 연극 ‘3월의 눈’의 한 장면. 배우 변희봉(왼쪽)과 고인이 된 백성희(사진=국립극단).그의 삶은 한국 연극의 역사다. 본명 이어순이(李於順伊)로 1925년 9월 2일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17세에 빅터무용연구소 연습생, 빅터가극단 단원을 거쳐 같은 해 연극 ‘봉선화’로 데뷔했다. 낙랑극회·신협에서 활동했으며 1972~1974년과 1991~1993년 국립극단장을 맡았다. 2011년에는 그의 이름을 딴 ‘백성희장민호극장’이 세워졌다. “작품은 가려서 선택하지만 배역은 가리지 않는다”는 신조 아래 평생 400여 편의 연극에서 다양한 역을 맡았다. ‘봉선화’(1943), ‘베니스의 상인’(1964), ‘만선’(1964), ‘무녀도’(1979),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81), ‘강 건너 저편에’(2002) 등이 대표작이다. “발음과 대사에 공을 들인다”고 했다. “배우는 슬픔에 메여 울어도 대사만큼은 틀림없이 들리게 해야한다”는 원칙도 엄격히 지켰다. 1956년 첫 영화 ‘유전의 애수’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연극 연기의 힘을 믿었던 고인은 ‘봄날은 간다’(2001) 외에는 거의 스크린에서 볼 수 없었다.1972년 국립극단 사상 최초로 시행한 단장직선제에서는 최연소 여성 국립극단 단장으로 선출돼 연극계 두고두고 회자된다. 당시 리더십과 행정력을 인정받아 1991년 다시 한 번 국립극단 단장에 추대됐다. 2002년부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했다. 동아연극상(1965), 대통령표창(1980), 보관문화훈장(1983), 대한민국문화예술상(1994), 이해랑연극상(1996), 대한민국예술원상(1999), 은관문화훈장(2010) 등을 받았다.고인은 지난해 후배들의 도움을 얻어 지난 12월 15일 회고록 ‘백성희의 삷과 연극: 연극의 정석’을 발간하기도 했다. 김남석 부경대 교수가 지난해 4월부터 고인의 인터뷰와 구술 채록, 과거 인터뷰 분석 등을 통해 정리했다. 연기 입문 계기부터 국립극단 단원 시절, 한국 연극에 대한 제언 등 백씨의 연극인생이 640페이지에 걸쳐 담겨 있다. 김 교수와 고인의 대담을 비롯해 평론가 서연호, 연극배우 김금지, 연출가 임영웅 등 연극계 명사 5인의 인터뷰를 담았다.다음은 회고록에 수록된 ‘배우로서 살아온’ 고인의 말이다. “할아버지가 바라보는 저녁노을과 이제 막 데이트를 시작한 젊은 남녀의 일몰이 같지 않다는 사실에,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연극에 대한 소회를 담아낼 수 있을 것 같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는데, 그렇게 보이는 것만으로 나의 삶을 구성했다면, 나의 삶은 어쩌면 대단히 가난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는 연극이 있었고, 그 연극은 내가 볼 수 없는 것까지 보게 만들어,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의 새로운 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참으로 오랜 여행이었지만, 나는 지금 그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에 무한히 감사한다.”한편 고인의 빈소는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호실이며 발인은 오는 12일 오전 8시 30분이다. 장례는 대한민국 연극인장으로 치러지며 12일 오전 10시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영결식을 갖는다. 이후 중구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손진책 전(前) 국립극단 예술감독의 연출로 노제가 열린다. 장지는 분당메모리얼파크다.2014년 2월 ‘제1회 이데일리 문화대상’에서 공헌상을 수상할 당시 소감을 말하고 있는 연극인 백성희의 모습(사진=이데일리 DB).
- 원로배우 백성희 타계…"연극계 큰 별 졌다"(종합2보)
- 2014년 2월 ‘제1회 이데일리 문화대상’에서 공헌상을 수상할 당시 소감을 말하고 있는 연극인 백성희의 모습(사진=이데일리 DB).[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한국 연극의 살아있는 역사인 백성희 씨가 별세했다. 향년 91세. 고인은 최근 건강이 급격히 악화돼 노환으로 지난 8일 밤 11시 18분경 타계했다. 김윤철 국립극단 예술감독은 원로배우 백성희 타계 소식에 애석한 마음을 전했다. 김 예술감독은 “한국 연극계의 큰별이 졌다”며 “고인이 보여줬던 투철한 직업정신과 연기에 대한 열정을 후배들이 이어받아야 마땅하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의 연기 수준을 상당한 수준으로 끌어올리는데 큰 공을 세우신 분”이라고 고인을 회고하며 “국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 ‘3월의 눈’에 다시 한번 출연하고자 집념을 불태웠는데 그걸 이루지 못하고 타계해서 너무 마음이 아프고 서운하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1925년 9월 2일 서울에서 태어난 백성희는 17세에 빅터무용연구소 연습생, 빅터가극단 단원을 거쳐 1943년 극단 현대극장 단원으로 입단했다. 같은 해 연극 ‘봉선화’로 데뷔한 이후 70년 넘게 오로지 연극 한 길만을 걸어온 한국 연극사의 산증인이다. 1950년 창단한 국립극단의 창립 단원으로 옮긴 고인은 1972년 단장 직선제에서 최연소 여성 국립극단 단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당시의 지도력과 행정력을 인정받아 1991년 다시 한 번 국립극단 단장에 추대됐다. 2010년에는 국내 최초로 배우의 이름을 딴 극장인 ‘백성희장민호극장’의 주인공이 됐다.‘작품은 가려서 선택하지만, 배역은 가리지 않는다’는 신조 아래 평생 400여 편의 연극에서 다양한 역을 맡았다. 최근까지도 ‘3월의 눈’(2013), ‘바냐아저씨’(2013) 등에 출연했지만 건강이 급격히 악화돼 서울의 한 요양병원에서 투병 중이었다. 대표작으로는 ‘봉선화’(1943), ‘뇌우’(1950), ‘나도 인간이 되련다’(1953), ‘씨라노 드 벨쥬락’(1958), ‘베니스의 상인’(1964), ‘만선’(1964), ‘달집’(1971), ‘무녀도’(1979),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81), ‘메디아’(1989), ‘강 건너 저편에’(2002), ‘3월의 눈’(2011) 등이 있다. 연극계의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0년 대통령표창을 비롯해 대한민국연극상(1985), 한국연극인상(1993), 제34회 백상예술대상 여자연기상(1998), 은관문화훈장(2010), 제1회 이데일리 문화대상 공헌상(2014) 외 다수의 상을 수상한 바 있다. 고인은 지난해 후배들의 도움을 얻어 지난 12월 15일 회고록 ‘백성희의 삷과 연극: 연극의 정석’을 발간하기도 했다. 김남석 부경대 교수가 지난해 4월부터 고인의 인터뷰와 구술 채록, 과거 인터뷰 분석 등을 통해 정리했다. 연기 입문 계기부터 국립극단 단원 시절, 한국 연극에 대한 제언 등 백씨의 연극인생이 640페이지에 걸쳐 담겨 있다. 김 교수와 고인의 대담을 비롯해 평론가 서연호, 연극배우 김금지, 연출가 임영웅 등 연극계 명사 5인의 인터뷰도 담았다.한편 고인의 빈소는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호실이며 발인은 오는 12일 오전(시간 미정)이다. 장지는 분당메모리얼파크다.
- 검열논란 이윤택 "저항 않을 것…받은 혜택 돌려주겠다"
- 중견연극인 창작집단의 창단 두 번째 연극 ‘바냐아저씨’에서 연출을 맡은 이윤택 연출가가 7일 서울 대학로 예술가의 집에서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좌파 아니다. 진보적인 사람도 아니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 지지 연설을 한 것은 후회 없다. 원망하거나 저항하지 않을 생각이다. 다만 순응하지 않을 거다. 그간 받았던 혜택을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이고, 대학로를 지켜온 배우들에게 돌리겠다.” 한국 연극계 거장 이윤택(64) 연출 겸 극단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이 그동안 제기돼 왔던 정부 측의 예술 검열 논란에 대해 입을 열었다. 이 연출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예술검열 논란에 대해 의견을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연출가는 지난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창작기금 희곡심사에서 100점을 받고도 지원작품에서 탈락해 외압설에 휩싸였었다. 최근엔 부산에서 아동극을 하던 중 기장군의회에서 올해 운영예산 3억원을 전액 삭감 당해 이달부터 극장 문을 열지 못하고 있어 또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 연출은 7일 서울 종로구 혜화동 대학로 예술가의 집에서 열린 중견연극인 창작집단 연극 ‘바냐 아저씨’ 제작발표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지난해부터 그랬는데 내 수명이 다 됐구나 생각한다. 정치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며 이 같이 밝혔다. 연극 ‘바냐 아저씨’에서 연출을 맡은 그는 “이윤택이라는 사람이 한국사회에서 특혜를 갖고 있었던 거 같다. 그래서 이윤택이 많이 하니까 (더 이상) 하지 말라는 말도 맞는 말이다. 특혜를 받을 입장이 아니다. 물러나고 있다. 국공립연극도 하지 않는다”면서 “올해 연극 연출을 한지 30주년이다. 정년의 해로 삼고 조용히 연극을 할 생각이다”고 웃으며 말했다.이어 “지방 촌놈이 30년전에 (서울에) 올라왔는데 내 연극을 본 임영웅 연출, 김동훈 연출 등이 우리 극단에 와서 작업하라고 했다. 국가에서 혜택 받기 이전에 연극인들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은 사람”이라며 “혜택을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이고, 어떻게 돌려줘야 할까 고심 중이었다. 그 때 중견연극인 창작집단으로부터 연출 제안을 받았고 단숨에 승락했다. 대학로를 지켜온 배우들에게 돌리겠다”고 강조했다.중견연극인 창작집단은 지난 2013년 12월 중견예술인들의 활동 활성화는 물론 대학로 연극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뜻을 같이한 4060 연극인들이 모여 만든 단체다. 이듬해 김석만 연출을 필두로 연극 ‘현자 나탄’을 대학로 예술극장 대극장 무대에 올렸다. 연극인 김지숙이 대표를 맡고 있다. 오는 27일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서 개막하는 연극 ‘바냐 아저씨’는 중견연극인 창작집단이 창단 후 선보이는 두 번째 연극이다. 안톤 체호프의 원작을 이윤택 연출 특유의 블랙코미디로 재해석해 선보인다. 기주봉, 김지숙, 곽동철, 이재희, 고인배, 이용녀, 이봉규 등 중견연극인들이 출연한다.이윤택 연출은 “오늘도 간담회장으로 나서는데 단 한 사람도 차를 가진 사람이 없더라. 버스 타고, 내 차를 함께 타고 왔다. 평생 연극을 한 사람들”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연극을 하고 있다. 여건이 좋은 국공립 연극 말고, 정말로 대학로 민간 연극이 살아 있구나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대학로 배우들이 바로 이 사람들이구나를 알았으면 좋겠다”고 재차 강조했다.
- 20세기 韓예술 고전…연극 차범석 '산불'·음악 윤이상 '예악'
- [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우리나라 공연예술분야에서 20세기 한국예술을 대표하는 고전은 무엇일까. 한국예술종합학교(총장 김봉렬) 한국예술연구소(소장 양정무)는 공연예술분야 20세기 한국예술의 음악·연극·무용·전통예술 분야 고전이 될 작품으로 각각 △윤이상의 ‘예악’(1966년) △차범석의 ‘산불’(1962년) △김매자의 ‘춤본 1,2’(1987·1989년) △사물놀이팀 ‘사물놀이’(1978년)과 이상규 대금협주곡 ‘대바람 소리’(1978년)가 꼽혔다.이는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가 추계학술대회 ‘미래의 예술, 미래의 고전·20세기 한국예술을 말한다’를 준비하며 각 분야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다. 이번 설문 조사는 음악, 연극, 영상, 무용, 미술, 전통예술 등 6개 장르 전문가 60명을 대상으로 했다. 작곡가 윤이상20세기 한국예술의 고전이 될 음악작품 1위로 윤이상의 ‘예악’이 선정됐다. 종묘제례악을 의미하는 ‘예악’은 1966년 독일 도나우싱엔 음악제에서 초연됐다. 서양악기를 통해 우리나라 음악과 국악기를 표현했다. 홍정수 전 장로신학대학교 교수는 “한국 작곡가들이 오래 전부터 염원했던 한국음악과 서양음악의 전통적이고도 첨단적인 결합”이라고 평했다. 공동 2위는 강준일의 ‘마당’(1983), 김성태의 ‘코리안 카프리치오’(한국기상곡 1944), 안익태의 ‘한국환상곡’(1937)이 차지했다.연극 작품 1위로는 차범석의 ‘산불’(1962)이 뽑혔다. “6·25전쟁의 실상을 그린 한국 사실주의 희곡의 최고봉”(동국대학교 연극학부 김방옥 교수)이라는 평이다. 오영진의 ‘명진사댁 경사’(1942)와 ‘살아있는 이중생각하’(1949), 오태석의 ‘자전거’(1983)와 ‘태’(1974), 유치진의 ‘토막’(1933), 이강백의 ‘봄날’(1984), 이윤택의 ‘문제적 인간 연산’(1995), 최인훈의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1976) 등 8개 작품이 공동 2위다. 차범석 작, 임영웅 연출의 연극 ‘산불’(2005년 국립극단).무용 작품 1위는 김매자의 ‘춤본 Ⅰ·Ⅱ’(1987·1989)다. 무용평론가 김예림은 ‘춤본’이 “70년대까지 주를 이룬 신무용에서 벗어나 우리 춤을 현대화하는데 초석을 마련했다”고 평했다. 국제무용협회(CID-UNESCO) 한국본부 이종호 회장은 “풍부한 자산에 비해 자료정리의 전통이 빈약한 한국 춤의 방법론 확립에 큰 도움을 준 작품”이라고 봤다. 공동 2위는 배정혜의 ‘타고 남은 재’(1977)와 ‘유리도시’(1987), 송범의 ‘도미부인’(1984) 등 3개 작품이다. 20세기 한국예술의 고전이 될 전통예술 1위에는 2개 작품이 선정됐다. 사물놀이팀(김덕수, 김용배, 이광수, 최종실)의 ‘사물놀이’(1978년)와 이상규 대금협주곡 ‘대바람 소리’(1978년)다. 양정무 한국예술연구소장은 “이번 공연예술 분야의 설문에서 선정된 작품과 그 평가를 종합한 결과, 서양의 예술이 수용되는 과정 속에서 전통의 계승과 복원, 전통의 현대화를 시도한 점이 20세기 한국예술을 대표할 작품 선정의 주요인으로 작용했다”며 “시대성을 반영하면서도 새로움을 모색하는 실험 정신이 20세기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데 큰 부분을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어 “공연예술의 특성상 초연 이후 재연을 통한 대중적 인지도와 재창조를 거듭하는 열린 작품의 구조 역시 작품 선정의 이유에 빼 놓을 수 없는 요소였다”고 덧붙였다.
- 시민과 함께하는 축제를 꿈꾸다 <제4회 서울뮤지컬페스티벌> 개최기념식 현장
- 개최기념식 현장"/>올해 4회째를 맞는 창작뮤지컬의 축제 <서울뮤지컬페스티벌>이 내달 시작에 앞서, 27일 낮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에서 개최기념식을 가졌다.뮤지컬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제작사, 연출가, 배우 등의 관계자들이 함께한 가운데, 먼저 최근 개막한 뮤지컬 <아리랑>에서 옥비 역으로 활약하고 있는 이소연이 축하 공연을 가졌다. 그녀는 <아리랑>에 나오는 ‘사철가’를 선보이며, 아름다운 우리 소리로 무대를 가득 채웠다.페스티벌의 명예조직위원장인 최창식 중구청장은 환영사에서 “2012년 페스티벌이 처음 시작할 때 함께했던 사람으로, 해를 거듭할수록 페스티벌이 발전하고 창작뮤지컬을 선도하는 역할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여러 행사를 해봤지만 뮤지컬인들이 가장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것 같다.”라고 이야기하며, 개최기념식의 시작을 알렸다.이어 한국뮤지컬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최근 조정래 작가의 대하소설 <아리랑>을 뮤지컬화한 박명성 신시컴퍼니 대표가 기념사에서 “올해 <서울뮤지컬페스티벌>은 많은 시민과 함께 함으로써 뮤지컬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창작뮤지컬를 제작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지만 창작뮤지컬을 만든다는 자부심이 있다. 이번 페스티벌을 계기로 뮤지컬인들이 단합하고 서로 소통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고 전했다. 극단 산울림의 대표인 임영웅 연출은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뮤지컬 <살짜기 옵셔예>를 연출한 것이 1966년인데 시간이 참 빨리 흘렀다. 그동안 수많은 뮤지컬인들의 노고가 있었기에 오늘날의 한국 뮤지컬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폐스티벌을 통해서 한국뮤지컬이 세계로 뻗어나가길 기원한다.”라고 축사를 전했다.초대 조직위원장이자 이번 페스티벌의 예술감독을 맡은 송승환은 "첫 회를 준비할 때가 생각이 난다. ‘이게 과연 가능할까’ 싶었는데 많은 사람들의 이해와 관심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올해는 새롭게 아트마켓이 시작된다. 중구에서 페스티벌의 씨를 뿌렸지만 올해 서울시로 퍼져나가는 원년이 될 것 같다.”라고 힘주어 말했다.8월 17일부터 24일까지 일주일간 진행되는 <서울뮤지컬페스티벌>은 ‘뮤지컬보다 더 재미있는 축제’라는 키워드로 충무아트홀을 중심으로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등 다양한 장소에서 펼쳐진다. 김희철 집행위원장은 올해 달라진 점에 대해 “지난 3년간은 뮤지컬인 스스로 만들어가는 뮤지컬 관계자들만의 축제였다면 올해는 시민이 함께 만들어 나가는 축제로 시민참여프로그램을 확대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덧붙여 “올해 <서울뮤지컬페스티벌>은 아시아문화예술진흥연맹(FACP)과 충무로뮤지컬영화제 프리페스티벌과 함께 공동개최로 진행된다.”고 설명하며, “FACP는 아시아 13개국의 주요 문화 예술 기획자들 약 200여명이 참여하는 국제적인 총회로 매년 회원국의 주요 도시를 선정하여 컨퍼런스를 개회하는 행사다. 올해는 뮤지컬을 테마로 진행되며, 이 총회를 페스티벌 기간 중에 충무아트홀로 유치했다. 각국의 문화기획자들을 통해 한국뮤지컬이 세계로 진출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또한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뮤지컬에 새로운 관객들이 유입할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예그린 앙코르’가 페스티벌의 가장 핫한 프로그램이라고 서두를 뗀 유희성 집행위원은 “올해 예그린 앙코르에는 <레드슈즈> <아랑가> <나는 조선의 아이돌이다>가 선정되어 페스티벌 기간동안 한 작품씩 쇼케이스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라고 전했다. <서울뮤지컬페스티벌>을 대표하는 ‘예그린 앙코르’는 제작지원비와 극장대관을 지원함으로써 창작자 양성 및 창작뮤지컬의 성공적인 상업화를 위해 힘쓰는 창작프로그램이다.시민과 함께하는 축제로 거듭날 <서울뮤지컬페스티벌>은 오는 8월 17일부터 8월 24일까지 충무아트홀과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서울광장에서 펼쳐진다. 글: 강진이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jini21@interpark.com)사진: 기준서(www.studiochoo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