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만에 언론에 모습 드러낸 민사고 설립자 최명재

  • 등록 2007-09-02 오전 9:29:16

    수정 2007-09-02 오전 9:29:16

[조선일보 제공] “파스퇴르 우유는 망해서 팔았고, 내게 남은 것은 민족사관고등학교밖에 없소.”

말은 입속에서 웅얼거렸다. 나는 의자를 끌어당겨 그에게 바싹 다가갔다. 그의 말을 잡아내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내게는 민족사관학교만 남았지요”라는 이 짧은 말을 마칠 때쯤 벌써 숨이 찬 것 같았다. 최명재(崔明在) 전 파스퇴르유업 회장이 7년 만에 언론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서울 강남에 있는 한 아파트. 인터뷰를 위해 한복으로 애써 단장한 이 팔순 노인은 한때 세상에 끊임없이 싸움을 걸어 시끄럽게 만들었던 인물이다. ‘돈키호테’ ‘고집쟁이’ ‘정신병자’ 등 그를 향해 숱한 야유와 비방이 잇따르기도 했다. 그는 싸움을 잘했지만, 그 파스퇴르유업은 벌써 2004년 한국야쿠르트로 넘어갔다. 그런 그에게서 마지막으로 남은 직함은 ‘민족사관고등학교’ 이사장뿐이다. 이제 그는 실내에서 정물(靜物)처럼 칩거 중이다.

그는 2000년 7월 제주도 호텔의 한 사우나에서 욕탕으로 급하게 뛰어들다 화상(火傷)을 입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사고는 어쩌면 그 직선적인 성격의 일면을 보여준 것인지 모른다. 그 뒤로 그는 언론에 모습을 나타낸 적이 없었다. 의료진은 전신 85%가 2~3도 화상을 입은 그의 회생(回生)이 거의 기적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한다. 세 차례의 피부이식 수술과 재활치료가 계속됐고, 요즘도 한 달에 한 번 꼴로 통원치료를 받고 있다.

세상에 대해 그렇게 할 말이 많았고 말하기를 좋아했고 달변이었던 이 노인은 사고 뒤로 일절 언론을 피했다. 인터뷰 신청이 끊이질 않았으나 그는 결코 응하지 않았다. 찾아오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섰으나 그는 만나기를 원하지 않았다.

화상 뒤의 신체적 변화로 인해 그는 자신이 품어온 생각을 더 이상 이전처럼 말로 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7년 만에 처음 이뤄진 이번 인터뷰를 수락하면서도, 가족은 “비록 대면은 하겠지만 많은 대화를 나누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에 그를 인터뷰했던 기사를 보니, 그에게 ‘천하에 독한 사람’이라는 수식어를 달아놓았다. 독한 사람이라면, 최(崔)씨 성에다 틀림없이 키가 작고 단단할 것이라고 그의 아파트로 가면서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180㎝의 기골이 장대한 노인이 느릿느릿 로봇 같은 걸음으로 안방에서 거실로 나왔다. 네모진 얼굴 속에는 아이의 표정이 숨어있었다. 악수했을 때,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그 얼굴에는 홍조(紅潮)가 번졌다. 오래 떨어져 있었던 언론과의 만남에서 오는 어떤 흥분 같은 것이었다. 부축을 받고서야 소파에 앉았다. 그가 앉기 위해 소파에는 등받이, 발밑에는 받침대를 받쳤다.

그는 꼿꼿하게 허리를 세웠다.

―하루 일상을 어떻게 보내나요?
“몸은 괜찮아요.”

그는 웃음을 지었다. 보청기를 끼고 있는 그는 질문을 잘 알아듣지 못했던 것 같았다. 나는 의자를 앞으로 당겼고 목소리도 높였다.

“집안에서 지내요. 한 달에 한번 병원에 갈 때를 빼면, 내 방에서 종일 TV를 봐요. 외국영화만 봐요. 외국영화에는 자막(字幕)이 있으니, 자막으로 내용을 읽어요. 귀가 안 좋아 한국 드라마는 (보청기가 울리기 때문에) 안 봐요. 아침에 일어나 뉴스는 봅니다만. 그리고는 쭉 외국영화만 봐요.”

―그렇게 저돌적으로 기업 활동을 했던 분이 집안에만 쭉 계시니 답답하지 않으세요?
“집안이 아니라도, 어차피 어디에 있어도, 걸음걸이가 잘 안 되니까요.”

곱게 차려입은 한복의 바깥으로 드러난 손목과 발목에는 연분홍 화상 자국이 보였다. 그는 똑바로 걷는 것은 얼마간 가능하나, 옆이나 뒤로 걷는 것은 어렵다고 했다.

―강원도 횡성에 있는 민사고에는 안 갑니까?

“두 달에 한 번쯤 가요. 학교에 상주하지는 못해요. 새로 선생님이 들어오거나 일이 있을 때면 가요. 내 관심은 늘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이지요. 하지만 선생님을 한명 한명 만나지는 않아요. 교사들을 지도하는 부교장을 만나고, 행정실장과 교장님께 이야기를 들어요. 나는 어떻게 이끌고 가라는 방향만 말해요.”

배석한 가족이 “회장님 방에는 민사고 교사 명단과 정년 날짜가 적힌 표까지 있다. 집안에 계시지만 학교를 환히 들여다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실질적으로 학교를 운영하는 이는 행정실장을 맡고 있는 그의 장남이다. 하지만 민사고의 ‘브랜드’는 아직 팔순 노인인 그에게 있다. 장남은 토요일마다 서울 집에 들러 그에게 학교 상황을 보고한다.

▲ "민사고가 귀족학교라고요?대부분 중산층 자녀예요 그들은 자녀교육 위해 전국을 찾아다니지요 자기 인생을 자녀 교육에 바쳐요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귀족인가요?"
그가 자신의 분신인 학교를 자신의 핏줄인 장남에게 맡긴 것은 어쩜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는 파스퇴르 유업을 할 때,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기도 했고 때로는 육사출신 장교를 대거 영입하는 인사 실험도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아들에게 학교를 맡긴 이유를 묻자, “아들은 참을 줄을 압니다”라고 했다.

“어려울 때 먼 미래를 생각하면서 참을 줄 알아야 하지요. 그 애도 학교를 맡으면서 자기 살림을 학교 운영비로 집어넣었다고 해요. 금방 이익을 안 나는 일에 그렇게 하기는 어려워요. 그렇게 자기 것을 던질 줄 모르는 사람은 월급쟁이는 돼도 사업가는 못돼요. 이런 교육 사업은 못해요.”

―몸이 불편해 학교까지 가는 데 힘이 드시죠?

“뭐, 차를 타고 가니까요. 콜택시를 특별히 불러서 가요. 내가 타던 자가용은 팔고 운전사도 내보냈어요. 불필요한 경비를 줄여야죠. 몸이 이래서 차를 쓸 일이 없어요. 내가 그렇게 외출할 일도 없고. 간병인도 더 이상 쓰지 않아요(가족 한 명이 함께 살면서 돌보고 있음). 학교에 도착하면 나를 위해 휠체어를 끌고 나와요.”

―처음 민족사관학교를 세울 때, ‘미친 짓’이라는 소리도 들었지요.

“처음에는 사람들이 이해를 못 했죠. 우유 팔아서 돈 좀 벌게 되니 뭐 다른 일이 없을까, 기왕이면 ‘한번 세상에 나와 짧은 평생 살다 가는데 가장 보람 있는 일이 무엇일까’라고 생각했지요. 내가 영국의 이튼스쿨을 방문해보고(1970년대), 교육 투자가 가장 많이 남는다, 제대로 된 지도자를 키우면 모든 게 남는 장사라는 걸 알았지요. 장사꾼이 돈을 벌면 소득이 가장 많이 나는 곳에 투자를 해야지요. 민사고를 설립할 때, 누가 뭐라도 나는 자신이 있었죠. 한해 한해 졸업생들이 훌륭하게 배출되니, 세상에서 우리 민사고를 보는 눈이 달라졌지요. 갈수록 더 뛰어난 학생들이 들어와요.”

그가 정부 지원을 받지 않아 정부의 간섭도 거부하는 ‘자립형’ 사립학교 민족사관학교를 세운 것은 1996년이었다. 당시 파스퇴르유업 전체 자산이 370억원. 이중 20%인 70억원을 재단에 출연했다. 소목장으로 쓰던 토지 70만평과 서울에 있는 시가 40억 원의 부동산이었다. 매년 운영비로는 우유 팔아 번 돈에서 30억~50억원을 내놓았다. 파스퇴르유업과 학교의 운명이 같이 묶여있었던 셈이다.

처음에는 전원 장학금을 주고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생 30명으로 시작했다. 교사의 수는 27명이었다. 그는 자신의 돈으로 학생들을 공부시키고 자신이 생각하는 학교를 운영해보겠다는 배짱이었다.

“두고 보라. 우리 학교 출신들이 훌륭한 대학에 들어가고, 인격적으로도 뛰어나는 사실이 확인될 때 이와 같은 학교가 우후죽순으로 세워질 것이다. 파스퇴르유업이 할 수 있는 일이면 똑같은 사업을 할 수 있는 기업이 우리나라에 5000개는 된다. 그 중에서 100분의 1만 동참하더라도 나라 안에 50개의 새로운 학교가 세워지지 않을까”라고.

애초 그의 구상은 남자고등학교는 ‘민족사관고등학교’, 여자고등학교는 ‘사임당여자고등학교’를 짓는 것이었다. 그런 뒤 대학까지 만들 계획이었다. 당시 그는 작가 이청(李淸)씨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좀 선동적인 얘기로 들리겠지만, 사학(私學)이라는 것은 재단에서 학교의 운영비를 대는 것인데 거꾸로 학생들로부터 거둔 돈으로 재단을 살찌우고, 재단은 그 돈으로 다른 사업을 하거나 부동산에 투자합니다. 세상에 이렇게 거꾸로 된 나라가 어디 있어요. 그러니 학문은 상품화되고, 학문이 상품이니까 수요자인 학생은 싸게 사려고 하고 공급자인 재단은 비싸게 팔려고 할 것이니 싸다 비싸다 시비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게 우리나라의 사학이고, 많은 문제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입니다. 어쩔 수 없기는 뭐가 어쩔 수 없어요. 잘못된 것이 있다면 고쳐야지요. 이것이 우리나라 사학의 일반적인 형태라면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사학은 지금까지의 그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이 될 겁니다.”

세간에는 “그런 학교는 지구상에 없다”고 모두 비웃었고, 그 실패를 예견했다. 실패는 다른 쪽에서 왔다. 설립 이듬해 IMF가 터졌고, 민사고를 재정적으로 지원해온 파스퇴르가 1998년 부도났다. 그는 ‘부도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는 신문 광고까지 내면서 대표이사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뒤 세월이 흐르면서 학생 정원도 450명으로 늘어났고, 이제 학생 등록금이 학교 운영의 70%를 차지하게 됐다. 그럼에도 민사고는 ‘하늘의 별’처럼, 학부모들과 중학생들이라면 한번쯤 선망하는 목표가 됐다. 그는 비록 실패한 기업인이 됐지만, 그의 학교실험은 결국 성공한 것이 아닌가.

―요즘 민사고에 대해 개인적으로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나요?

“모두 잘해요. 다만 영재교육을 더 강화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영재교육을 더 잘 시킬 수 있는 선생님을 모셔올까 해요.”

―민사고는 현 정권의 고교평준화 정책과는 반대로 갔던 셈입니다. 교육에서의 평준화는 잘못된 것일까요?

“우리 학교는 교육평준화 정책에는 안 들어갑니다. 교육을 받는 기회의 균등과 교육의 평준화는 다른 거지요. 그러나 나는 정책이니 그런 걸 몰라요. 우리 사회에서 이런 학교가 필요하다고 난 생각했어요. 그래서 정부 돈을 전혀 받지 않고 자립적으로 해보려고 한 거죠.”

그의 표정에는 뭔가 더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은 힘에 부쳐 바깥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는 민사고를 설립한 직후, “소수의 영재만 집중 발굴하는 방식은 학생들 간에 위화감을 조성하고 과외 열풍을 몰고 올 수 있다”는 세상의 공격에 맞서 이런 심경을 밝힌 적이 있다.

“정신적 능력이 각기 다른 학생들이 각자의 능력에 맞는 교육을 받을 수 있고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인정해주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될 때 수백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창조적 소수가 탄생되는 것이다. 한 사람이 수백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인재가 탄생될 때 우리 민족이 부강해질 수 있다.”

―학부모 입장에서 묻는데, 민사고를 ‘귀족학교’라고 부르기도 하더군요. 정말 귀족학교가 맞나요?

“그 말을 들었어요. 관심 없어요. 실없는 사람들의 말장난인데 무슨 대꾸를 해요.”

―그래도 정말 그런가 보다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학교에는 큰 부잣집 아이는 별로 없어요. 대부분 중산층이에요. 이분들은 좋은 학교와 좋은 교육 환경을 찾고, 자기 인생을 자녀 교육에 바쳐요.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귀족인가요?’

―민사고는 명문대학에 들어가는 코스라고 하지요. 학부모들이 자녀를 민사고에 집어넣고 싶어 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그래서 민사고가 고급화된 입시 전문기관으로 변질됐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는 당초 설립 취지와 맞나요?

“우리 학교는 시험 교과목만 가르치지 않아요. 우리 학교의 목표는 서울대가 아니죠. 서울대는 둘째 셋째죠. 세계로 나아가 외국 유명대학이 목표죠. 지금 잘 해내고 있어요. 똑똑하게 태어난 영재들은 그만큼 조국에 대한 사명을 가져야 해요. 우리 졸업생들은 이 나라를 짊어지고 나가야지요.”

―그런 기대대로 될 것 같습니까.

“저는 믿고 있어요. 우리 학교 졸업생들이 노벨상을 타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우리 학교를 만들 때 나는 노벨상 좌대(座臺)를 15개나 만들어놨어요. 우리 학생들이 그걸…”

그는 감정이 북받치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금방 눈 주위가 젖어들 것 같았다. 배석한 가족이 “학생들 생각만 하면 마음이 그런가 봐요. 이제 정말 그만 하시죠”라고 가로막았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을 하시고 싶어 하는 모습을 오랜만에 봤어요. 그런데 마음먹은 대로 말씀이 안 되니, 너무 힘들어하시는 것 같네요”라면서. 인터뷰도 사람의 ‘때(時)’가 있는 것이다.

나중에 작별 인사를 위해 그의 방문을 여니, 노인은 인터뷰용 한복을 벌써 벗고서 시원한 러닝셔츠 차림으로 안락의자에 앉아 리모컨을 든 채 외국영화를 보고 있었다. 내 쪽을 향해 아이처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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