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들려주는 사람’…화면해설작가 입니다”

눈에 선하게
권성아·김은주·이진희·임현아·홍미정 5인
268쪽|사이드웨이
시각 정보 ‘소리 언어’로 바꾸는 직업
디테일의 장인, 다섯 명의 분투기
  • 등록 2022-11-16 오전 3:10:00

    수정 2022-11-17 오후 4:59:45

[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요즘 출판계에서 이 책을 거론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268쪽 분량의 생소한 직업 수기가 막힘없이 잘 읽히는 데다, ENA 인기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이하 ‘우영우’)에 대한 관심이 ‘장애’로 확장한 덕이다. 여러모로 ‘힙’(최신 유행에 밝고 신선하다는 의미)하다는 평가다.

책 ‘눈에 선하게’(사이드웨이)는 10년간 화면해설방송 대본을 써온 권성아(51), 김은주(46), 이진희(46), 임현아(37), 홍미정(51) 다섯 명의 베테랑 작가가 함께 쓴 직업 에세이다. 이들은 2011년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미디어접근센터에서 화면해설방송 교육을 받은 ‘3기 동기’들로, 이 세계에 입문한 뒤 ‘일하는 기쁨과 슬픔’을 책에 담았다.

최근 서울 합정동 한 카페에서 만난 홍 작가와 김 작가는 책을 쓴 계기에 대해 “매우 사소하고 단순했다”고 운을 뗐다. 홍 작가는 “일단 코로나19 여파로 여행 다큐멘터리나 예능 방송, 영화 개봉작이 줄어들면서 덩달아 화면해설방송 일도 줄었다”며 “시간적 여유가 생기자 우리 일이 눈에 들어왔다”고 말했다.

“화면해설작가라는 직업을 들어보신 적 있나요? 아마 없으실 거예요. 마침 작년이 화면해설작가에 입문한 지 10년 되던 해였는데 우리 일에 대해 책을 써보자는 의견이 나왔고, 바로 실행으로 옮겼죠. 하하.”

책 ‘눈에 선하게’를 공동 집필한 화면해설작가 김은주, 홍미정 씨. 최근 출간된 이 에세이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해설 대본을 10년간 쓰고 있는 베테랑 작가들의 분투기를 담고 있다.
화면해설작가란 TV드라마, 영화 등 영상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몸짓과 표정, 배경, 화면전환 등을 말로 풀어쓰는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일종의 시각장애인을 위한 번역가인 셈이다.

홍 작가와 김 작가는 이 작업이 직업으로서 만족스럽다고 했다. 김 작가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일인 만큼 보탬이 됐으면 하는 마음도 있지만, 사실 대단한 사명감을 갖고 시작한 일은 아니다”고 말했다. 이어 “방송글이라는 게 결국 공중에 흩어져버리는 작업인데, 화면해설은 수요층이 명확하다. 그들의 귀에 확실히 가닿아야 하는 화면예술이라는 데 매력을 느꼈다”고 웃었다.

다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화면해설은 그저 ‘좋은 일’, ‘선한 일’ 정도로 여겨지는 게 현실이다. 이 일이 정확하게 무엇을 하는 것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화면해설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것에서 출발했지만, 여러 이유로 방송을 즐기기 힘든 사회적 약자는 물론, 새로운 방식으로 콘텐츠를 감상하려는 사람들에게도 조금씩 알려지고 있죠. 하지만 갈 길이 멀어요. ‘배리어 프리’(장애인을 위해 물리적·제도적 장벽을 제거하자는 것)가 더 확대되어야 하고, 강도 높은 노동 조건도 바뀌어야 합니다.”

베테랑 작가들이지만 매일이 글쓰기 훈련이다. 대사와 음향 사이, 좁은 틈에 효과적인 해설을 끼워 넣느라 머리를 쥐어뜯는 게 일상이다. 저자들은 디테일을 찾는데 애쓴다. 의성어와 의태어를 광적으로 수집하고 같은 장면을 수십 번씩 반복해 돌려보기도 한다. 홍 작가는 “다큐멘터리, 역사극 등을 설명하려면 다양한 배경지식이 필요해 늘 공부해야 한다. 영상의 새 기법이나 새 기술도 익혀야 한다”고 했다.

국내에 첫 화면해설방송이 전파를 탄 건 2001년 4월19일 장애인의 날을 맞아 시험 방송을 한 MBC ‘전원일기’(1000)와 KBS ‘일요스페셜’이 시작이었다. 20년이 흘렀는데도 화면해설방송이 낯선 건 절대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두 작가에 따르면 법이 정해둔 화면해설방송 의무 비율은 방송사별로 연간 5~10%에 불과하다. 김 작가는 “국내 방송사에서는 의무 할당량만 채우면 화면해설방송을 중단해버리기도 하는데, 그러면 시각 장애인은 즐겨보던 드라마의 결말을 알 수 없다”고 지적했다. 국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는 적용 대상도 아니다.

김 작가는 “미국 넷플릭스는 자국 규정에 따라 자체 제작 모든 오리지널 프로그램에 화면해설을 제공한다. 넷플릭스는 첫 방송과 동시에 100% 음성해설을 넣는 반면 우리나라는 대부분 재방송에 화면해설을 입힌다”고 아쉬워했다.

이들에게 가장 어려운 작업은 뭘까. 댄서들의 춤싸움을 그린 ‘스트릿 우먼 파이터’(이하 ‘스우파’)와 같은 댄스 프로그램이다. “오른팔을 들고 깡충 뛴다”는 식의 움직임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고 속도를 따라갈 수 없어 언어 표현의 한계에 자주 부딪힌다고 했다. 요즘 간접광고(PPL)는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웃음을 유발하는 편인데 브랜드 이름을 언급할 수 없기 때문에 계속 고민하는 부분이란다.

“좋은 화면해설은 장애인이 TV를 보는 비시각장애인과 같은 타이밍에 웃는 거예요. 남들은 이미 다 웃었는데 자세한 해설을 듣다가 한 박자 늦게 웃는다면 예능을 보는 의미가 없잖아요. 비시각장애인과 같은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홍 작가)

화면해설작가로서 바람도 전했다. 홍 작가는 “시각장애도 전혀 보지 못하는 전맹시각장애, 주변시야가 안보거이나 흐릿하게 보이는 장애 등 유형이 다 다르다”며 “장애 정도에 따라 자세한 해설이 성가실 수 있다. 화면해설이 보편화돼 A버전, B버전을 선택할 수 있는 시기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 작가는 코로나19 이후 화면 속 수어통역사가 익숙해진 것처럼, 화면해설도 일상 속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화면해설 제작이 더 많아져 비장애인처럼 더 다양한 작품을 접했으면 합니다. 저희는 체력이 허락하는 한 열심히 대본을 쓸게요. 엉덩이의 힘을 믿거든요. 하하.”

책 ‘눈에 선하게’를 공동 집필한 화면해설작가 김은주, 홍미정 씨. 최근 출간된 이 에세이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해설 대본을 10년간 쓰고 있는 베테랑 작가들의 분투기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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