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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일의 선비이야기]선비체험에 몰입하는 천주교인들

  • 등록 2021-12-03 오전 6:15:00

    수정 2021-12-03 오전 6:15:00

[김병일의 선비이야기] 열흘전 대구의 한 성당에서 봉사활동 하는 교인들이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을 다녀갔다. 성당에서 해마다 몇 차례 성지나 수도원을 찾아 사색하고 수도하는 피정(避靜)의 일환이었다. 그런데 왜 조선 유교를 집대성한 퇴계선생의 선비정신이 오롯이 남아있는 도산서원과 선비문화수련원을 택했을까?

앞서 수련원을 잘 아는 독실한 신도의 권유로 성당의 신부와 수녀가 예비 답사를 다녀가면서 긍정적인 인상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수련원의 시설과 커리큘럼을 살피면서, 그들은 이 시대에 필요한 선비정신의 핵심에 관해 문답하며 짚어 나갔다. 그러고 나서 성당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신도들부터 선비수련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고 권유하였던 것이다.

천주교와 유교는 서양과 동양이라는 아주 다른 토양에서 출발하여 오랜 기간 발전하였기에 그 차이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다. 그러나 인간을 사랑하고 보듬는 박애(博愛)와 인의(仁義)의 정신은 한 방향이 아닐까 한다. 유교국가 조선에서 인의를 핵심으로 하는 선비정신은 지도층인 사대부에 의해 실천되었다. 퇴계, 남명, 율곡, 다산 같은 학자는 물론, 백성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세종대왕과 충무공 역시 충효애민의 선비정신을 앞장서 행동한 분들이다. 그러다가 조선후기 들어 양자가 만나면서 처음에는 조상 제사 문제 등으로 첨예하게 마찰하며 한동안 상극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약자인 천주교인은 여러 차례 엄청난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신앙이 자유롭게 허용된 시대가 되면서 두 종교에서는 약속이나 한 듯 훌륭한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한말 국권이 흔들릴 때 목숨 걸고 나선 의병장은 유학하는 선비가 대다수였다. 한편 독립운동가하면 첫머리에 떠오르는 안중근 의사(1879~1910)는 유학을 공부했던 독실한 천주교도였다. 그는 순국하기 전 여순감옥에서 여러 장의 글을 남겼는데, 그 중 ‘견리사의(見利思義), 견위수명(見危授命)’이라 쓴 유묵이 압권이다. ‘이익이 되는 것을 보았을 때는 옳은지를 먼저 생각하고, 공동체에 위기가 닥쳤을 때는 기꺼이 목숨을 바치라’는 의미다. 자신의 애국적 의거에 대한 외침인 동시에 선비들이 평생토록 실천하고자 애쓴 정신의 표현이다.

어디 그뿐이랴! 우리사회에서 최고의 정신적 어른으로 추앙을 받았던 김수환 추기경(1922~2009)은 자기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관대한 박기후인(薄己厚人)의 선비정신으로 일관하였다. 이런 인품 때문에 김 추기경은 최고의 선비에게 시상하는 심산상을 2000년에 받았다. 몇 번의 고사 끝에 수상을 하자 심산 김창숙(金昌淑, 1879~1962) 선생의 묘소에서 열린 전통방식의 고유행사에서 큰절을 하였다. 그리고 받은 상금이 유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의 성금임을 알고 얼마 후 이보다 많은 금액을 보내왔다. 우리 시대에 이보다 더 감동적인 선비정신의 실행이 있을까?

이런 일화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깊은 감회에 젖은 신부와 수녀가 다녀간 후, 이들의 마음이 옮겨진 때문인지 이번에 찾아온 신도들은 도착하는 순간부터 남달랐다. 30분 일찍 도착해서 가까이 있는 퇴계선생의 유적을 다녀온 후 수련에 몰입하였고, 수련이 진행되면서도 선비정신과 천주교의 교리, 퇴계선생의 인간존중과 천주교인들의 봉사활동 등을 주제로 한 강의와 도산서원 탐방, 고령의 퇴계종손과 대화 등을 통해 몸과 마음이 빠져들었다. 수련이 끝난 뒤에도 “이번 수련이 나 자신을 돌아보고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선비수련을 권하겠다”는 등의 소감들이 쏟아졌다.

이를 보며 20년 전 도덕입국의 가치를 들고 수련원 설립을 주도한 이곳 유림들과 소요비용을 꾸준히 지원해준 중앙정부와 지자체에 다소나마 보답하는 듯하여 기뻤다. 15년 가까이 수련원에 몸담으면서 진정 바라던 것이 바로 이런 반응이 아니었던가! 선비정신과 퇴계선생의 삶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기를 줄곧 바라마지 않던 사람으로서 이번에 천금보다 귀한 수련 소감을 들려준 천주교 신자분들께 깊이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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