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낯선 욕망에 눈뜨다…초상화 사고 백자 팔고

개항기부터 해방 이전까지 70년 미술시장 형성사
화랑·경매 등 매매, 그림 눈 키운 전시장 출현까지
서양·일본인이 눈뜨게 한 거래…미술품 갈망으로
△미술시장의 탄생|손영옥|424쪽|푸른역사
  • 등록 2020-05-20 오전 12:15:21

    수정 2020-05-22 오전 7:47:40

1923년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를 찾아 작품을 감상하고 있는 여학교 학생들. 저자 손영옥이 살핀 ‘미술시장의 탄생’ 중 한 장면이다. 개항기부터 해방 이전까지 70년을 꿰뚫으며 저자는 자본주의 욕망이 진해지기 시작한 한국미술시장의 형성을 잔잔히 좇는다(사진=푸른역사).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내던지고 낙향한 ‘인기 초상화가’가 있다. 이후 그는 고향 전주는 물론이고 익산·변산·고부·남원 등을 다니며 항일 우국지사와 유학자들의 초상 그리기에 몰두했는데. 이때 그가 도입한 파격적인 방침이 있다. ‘정찰가격제’다. 그의 초상화 한 점을 받으려면 제법 큰 ‘현금’이 필요했던 거다. 전신상에 100원, 반신상에 70원. 그 시절 이 돈이면 뭘 살 수 있었을까. 소 한 마리다. 1928년 임실에서 소 한 마리를 82원에 거래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그의 초상화 한 점에 웬만한 집안의 보물인 소 정도는 우습게 바쳐야 했다는 얘기다.

석지 채용신(1850∼1941). 바로 그 ‘초상화가’다. 전통양식을 따른 마지막 인물화가인 동시에 전통에만 매이지 않는, 세부묘사부터 원근과 명암까지, 서양화법을 과감히 들인 한국화가다. 꽃도 새도 산수도 그렸지만, 그이의 이름에는 단연 ‘초상화가’란 타이틀이 붙는다. 한국회화사상 초상화를 가장 많이 그린 작가기도 했으니까. ‘양’만이 아니다. ‘질’도 만만치 않다. 대표작으로 ‘고종황제어진’ ‘영조어진’ ‘흥선대원군 초상’ ‘최익현 초상’ 등이 꼽히니.

능력도 능력이지만 흥미로운 건 그의 지극히 현대적인 ‘사업수완’이었다. 신문광고, 가족경영, 선수금 등의 개념을 도입했으니까. 이런 거다. 초상화를 의뢰한 고객에겐 막내아들을 파견해 선수금 20원을 받아오게 했단다. 이후의 고객 접대는 큰아들 몫이었고. 나중에는 ‘초상화 제작합니다’로 신문에 광고까지 냈다. 작가이력·제작가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증명사진 같은 초상화란 특수성이 마땅히 반영됐을 터. 하지만 이를 한국미술시장의 첫 장면으로 삼는 데는 무리가 없다.

△“초상화 그리시게? 소 한 마리 값 82원만 내셔”

5000억원 규모를 목전에 뒀다. 한 해에 4만점쯤 거래된다. 화랑·경매사·아트페어 등서 여는 전시·경매가 6200회쯤 되고(미술관 2640회는 별도), 200만명이 둘러보고 작품을 살까 말까 고민한다. 드디어 100억원대를 넘긴 그림(지난해 김환기의 ‘우주’가 132억원에 낙찰됐다)도 나왔다. 바로 요즘의 한국미술시장이 말이다.

시장 사정이 어떻든 그건 나중 문제고, 이만큼의 미술시장이 태동한 때가 분명 있을 터. 채용신의 ‘사업수완’에 빗대본 그 시기의 풍경은 ‘개항기’(1876∼1904)부터 ‘일제강점기’가 끝나는 해방 이전까지 불과 70년 안팎에서 만들어졌단다. 중절모를 쓴 백인신사가 갓끈을 질끈 묶은 조선인을 상대로 백자항아리를 놓고 흥정하고, 일본 관료와 화상이 앞다퉈 조선미술품을 빼내던 그때 말이다. 책은 현직 미술·문화재전문기자로 활약하는 저자가 오랜 시간 잡아낸 그때 그 풍경이다. 화랑·경매 등 대표적 미술시장부터 그림 보는 눈높이를 배워간 전시장의 출현까지. 한마디로 ‘미술’로 다시 쓴 통사다.

특히 저자가 주목한 것은 개항기. “한국미술시장에서 가장 격동적인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란 진단에서다. 주먹구구식 행태에서 벗어나 근대적인 자본주의 생산방식을 따라 미술품을 제작하고 사고팔던 시점. 화랑의 전신인 ‘지전’ ‘서화관’이 생기고, 이후 ‘백화점갤러리’ ‘전람회’ 등이 등장하는 기반을 다진 것도 이때고. 이 과정은 마치 계획했던 대로 일사천리로 진행됐는데. 무엇보다 황명도 아니고 국가정책도 아닌, 오로지 상업적 목적이 만든 시장이란다. 말 그대로 돈 벌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더 큰돈을 위해 그림을 파는.

이 세세한 관찰을 위해 저자는 특별한 키워드를 내놓는데. ‘욕망’이다. 이때의 장면을 좇기 위해선, 끼니를 찾아 연명하던 그 시절에도 꿈틀대던 미술품에 대한 갈망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자극은 외지인으로부터였다. 개항기 조선화가들은 서양인 취향에 맞춘 풍속화를 그려 팔았고, 무덤에서 도자기·토기까지 몰래 꺼내 그들의 품에 안겼다. 일제강점기에는 그 중간절차도 필요 없었다. 고려자기 등을 닥치는 대로 도굴한 일본 상인들이 골동품상점을 열어 되팔고 경매까지 붙였으니. 첫 미술전시회라 할 ‘조선미술전람회’도 1922년부터 조선총독부가 주최했고.

어찌 보면 1930년대 이후 본격적인 상업화랑시대는 수십년에 걸친 미술시장의 기형적 형성이 남긴 ‘사생아’일 수도 있다. 뿌리고 거두고 만드는 노동을 하지 않고도, 내 돈을 직접 투자하지 않고도 이익을 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로 ‘미술품 거래’를 순식간에 터득한 셈인데.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아주 낯선 욕망’이었던 거다.

1927년 대중잡지 ‘개조’와 ‘별건곤’에 실렸던 ‘미전소견’이란 제목의 풍자삽화. 왼쪽은 서양화 전시문화에 대한 이질감을, 오른쪽은 서양누드화가 가져온 충격을 묘사하고 있다. 각각 “이 사람아 남이 못 아라(알아) 보도록 그리는 것이 요새 시태(유행)라네”, “연애편지 문학과 함께 꼭 잘 팔릴 그림”이란 설명을 달았다(사진=푸른역사).


△한국인 수장가 등장했지만…한국미술시장 태생의 한계 남아

물론 전혀 다른 장면도 있다. 국내 미술품수장가가 본격 등장한 시기로 저자는 역시 이즈음을 꼽는다. 책은 그 역사적인 현장도 기록해뒀다. 1936년 11월 22일. 일본인 저축은행장이던 모리 고이치가 생전 수집한 고미술품을 모조리 꺼내놓는 날이었는데. 한국 최초 미술품 경매회사던 경성미술구락부에서 연 이날 경매의 하이라이트는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 절제된 화려함을 지녔다고 평가받던 조선백자였다. 500원을 부른 시작가는 단숨에 7000원을 넘겼고, 호가대결은 마치 ‘조선인 대 일본인’ 구도로 보였다. 실제 조선인 컬렉터와 일본 최고 골동상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니.

결국 낙찰가는 1만 4580원. 과연 백자는 어디로? 조선인이다. 간송 전형필(1906~1962). 31세의 그가 일본인의 독무대였던 당시 고미술품시장에 대수장가로 떠오른 순간이었다. 그무렵 조선백자의 경매시세는 100∼2100원 사이였다니, 이 충격적인 거래가 조선백자의 가격상승에 불을 놨던 건 물론이다. 일본으로 하염없이 유출되던 문화재를 끊임없이 사들였던 간송. 그의 이날 활약 덕에 이 백자는 훗날 국보 제294호로 등록된다.

어차피 한계는 있다. ‘한국미술시장’의 태생이 말이다. 일제침탈이란 무거운 변수를 안고 가야 했으니. 서민과는 동떨어진 상류층 필요에 의해 얼개가 짜인 구조란 점도 편파적이고. 간송이 ‘문화재지킴이’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막대하게 쏟아부은 돈 덕분이 아니었나. 말로 다할 수 없게 고마운 일이었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껏 미술품 거래가 ‘그들만의 문화’란 인식이 꺾이지 않은 건 결국 ‘태생의 한계’ 탓일 수 있는 거다.

그 뼈아픈 과정에 대한 감정적 동요는 접었다. 책은 담담한 시선으로 아카이브가 턱없이 빈곤한 그 시절의 퍼즐을 맞추는 데 공을 들였다. 롤러코스터보단 오리배를 택했다고 할까. 내 발을 얼마나 휘젓느냐에 따라 앞으로 더 많이 보일 것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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