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꽃미남 수행원 정년은 16세

호랑이 사냥 `착호갑사`
시간 알려주는 `금루관`
말단 공무원 세계 조명
……………………………
조선의 9급 관원들, 하찮으나 존엄한
김인호|320쪽|너머북스
  • 등록 2011-12-21 오전 11:41:50

    수정 2011-12-21 오전 11:44:10

이데일리신문 | 이 기사는 이데일리신문 2011년 12월 21일자 27면에 게재됐습니다.
[이데일리 오현주 기자] 조선 중종 30년인 1535년 7월 대사헌 허항은 임금에게 심각한 보고를 하고 있었다. 그는 한 주 전 궁궐의 꽃과 나무 관리를 맡은 장원서에 나가 화초와 기구를 점검했다. 그런데 보존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를 묵과할 수 없던 허항은 물품목록을 대조하려 했으나 장부마저 제대로 갖춰 있지 않았다. 결국 호조에 문제제기를 했다. 성종대 이후 작성된 장원서의 회계장부를 보내라 명했다. 그러나 호조도 비협조적이었다. 두세 번의 독촉이 이어지자 마지못해 장부대신 사람을 보내왔다. 산원(算員)이었다. 그는 장원서 장부가 아닌 작년 과일을 올린 회계장부를 들고 나타났다. 허항은 격노했다. 호조가 사헌부를 속였다는 것을 문제삼아 임금에게 보고를 올렸다. 자칫 호조의 하급관원인 산원이 다칠 뻔한 이 사건은 호조판서가 해임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이 사건에서 마치 호조의 허수아비처럼 비쳐진 산원은 실은 백성들에게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실무자였다. 수학과 관련된 일을 한 명실상부한 전문직으로, 땅의 면적과 수확량을 측정하고 정부 물품을 관리했다. 일반 백성들이 탈 수 없는 말을 탔고 일반 관리들처럼 사모를 썼다. 그들의 말 한마디는 백성들의 세금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고 더 나아가 재산까지 좌우케 했다. 그러나 왕실과 고위관리 앞에선 꼼짝없이 죽은 척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하급관원이었다.

좀더 큰 권력과 밀착된 직업도 있다. 그들은 15세가 안 되는 나이에 임용돼 16세가 되면 퇴직을 해야 했다. 꽃미남이어야 하는 조건도 있었다. 중금(中禁)이다. 임금의 행차 때 길을 정리하는 것이 임무다. 낭랑한 목소리로 “상감마마 납시오”를 외치는 일이었다.

궁궐 밖에는 더 특별한 직업도 있었다. 호랑이 전문사냥꾼인 착호갑사(捉虎甲士)다. 수시로 출몰하던 호랑이로부터 백성들의 안위를 지키는 것이 그들의 직책이었다. 무예 실력 이상의 담력과 용기가 필수조건이었다.

조선왕조의 최말단에서 공무를 담당했던 관원들의 이야기다. 나랏일은 했지만 비주류였던 탓에 조선의 `비정규직 공무원`쯤 됐던 이들도 있다. 시간을 알리는 금루관(禁漏官), 통역을 담당한 통사(通事), 풍속 위반자를 단속하는 소유(所由), 세금운반선을 운행하는 조졸(漕卒), 고급정보를 빼오는 간첩(間諜) 등등. 책은 명칭만큼 생소한 조선의 하급관리 세계를 선명히 복원한다.

▲ 김홍도의 그림 `평생도` 중 하나. 한림 겸수찬이란 한 벼슬아치의 행차 장면으로, 그를 에워싼 이들이 구사(丘史)였다. 구사는 관리의 행차를 알리는 일종의 수행원으로 나라에 소속된 남자종이다(사진=너머북스).
`조선시대 백성들에게 공권력의 실체는 무엇이었나`라는 질문으로 궁금증을 끌어냈다. 한국역사고전연구소에 재직하는 저자는 단연코 관료제의 언저리에서 일하던 말단 관원들이었다고 답한다. 그들이 병약한 왕권과 부패한 사대부가 지배하던 왕조를 500년 넘게 버티게 한 원동력이었다는 주장도 서슴지 않는다. 조선의 실핏줄 같은 존재였다는 거다.

역사는 기록으로 말한다는데 오히려 책은 많지 않은 기록에서 찾아낸 역사다. 왕조실록에 흔적은 있다지만 요새 신문의 사회면 단신처럼 취급되기 일쑤였던 내용들이 태반이었다고 했다. 앞뒤를 꿰어 맞춰야 어슴푸레 형태가 갖춰졌다는 저자의 토로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하찮은 신분에 존엄한 가치를 부여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쉽지 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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