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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정남 기자] “중앙은행이 할 일은 파티가 막 달아오를 때 펀치 보울을 치우는 것이다. (Take away the punch bowl just when the party is getting started.)”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9대 의장을 지낸 윌리엄 맥체스니 마틴이 남긴 이 말은 중앙은행론(論)을 잘 함축하고 있다. 펀치 보울은 칵테일이 섞인 음료를 담은 그릇이다. 어느 누구든 파티는 계속되기를 바라겠지만, 그래도 언제까지나 술에 취해 비틀거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누군가는 파티를 끝내야 한다.
이를 경제에 접목하면 ‘안정된’ 성장을 추구해야 한다는 뜻으로 요약된다. 경기가 과열될 기미를 보이면 돈줄을 조여야 하는데, 이런 시어머니 같은 역할을 중앙은행이 맡아야 한다는 게 마틴의 뜻이다.
마틴이 역대 최장수 연준 의장(1951~1970년)이자 뚜렷한 원칙과 소신으로 기억되는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다. 마틴은 정치적인 압력에 맞서 연준을 행정부 내 독립기구로 격상시켰던 인사다.
이주열 “통화정책 기조 변화”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4일 주요국 중앙은행 총재들과 회동한 뒤 “금융위기 이후 10년간에 걸쳐 초저금리와 대규모 양적완화로 이어진 선진국 통화정책 기조가 변화를 맞이할 것”이라고 밝힌 것은 마틴의 중앙은행론을 떠올리게 한다.
이 총재는 지난 24~28일(현지시간) 국제결제은행(BIS) 연차총회(스위스)와 유럽중앙은행(ECB) 포럼(포르투갈) 출장을 다녀온 직후인 이날 공개석상(경제동향간담회)에서 “미국 연준이 이미 금리 인상과 더불어 보유자산 축소를 예고한 상황인데,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도 유로 지역의 경기 회복세가 지속될 것으로 내다보면서 양적완화 축소의 가능성을 처음 시사했다”고 말했다.
ECB의 양적완화는 2009년 6월부터다. 금융기관의 우량자산을 담보로 발행되는 담보부채권의 일종인 커버드본드를 사들인 게 1차 프로그램이었다. 2010년 5월부터 2년여간 재정위기국의 국채를 사들이기도 했다. 영란은행(BOE·2009년 3월~)과 일본은행(BOJ·2010년 10월~)도 그 즈음부터 시작됐다.
미국 연준은 양적완화 프로그램을 2014년 10월로 종료했지만, 그외 주요국 중앙은행들은 아직 이를 시행하고 있다.
드라기 총재가 ECB 포럼에서 긴축을 시사한 것은 양적완화 프로그램을 조만간 마무리하겠다는 의미로 시장은 받아들이고 있다. 더이상 시중에 돈을 풀지 않고, 더 나아가 풀었던 돈을 거둬들이겠다는 것이다. 마크 카니 BOE 총재도 최근 긴축을 암시했다. 일각에서는 BOJ의 통화정책 정상화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한은 역시 주요국들과 마찬가지로 긴축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이 총재는 이날 “각국 중앙은행 총재들은 최근 글로벌 경기 회복세가 매우 뚜렷해지고 있다는 점에 대체로 의견을 같이 했다”고 했는데, 실제 양호한 경제 지표들이 쏟아지고 있다.
중국의 차이신 6월 제조업 구매관리자지수(PMI)도 50.4로 시장 예상치를 웃돌았다.
‘테이퍼 탠트럼’ 가능성 우려
시장도 이에 반응하고 있다. 경제 회복세가 뚜렷해지면 통화 긴축 신호는 더 힘을 받고, 채권금리도 상승 쪽을 향하게 된다.
간밤 미국 국채 10년물 금리가 전거래일 대비 4.71bp(1bp=0.01%포인트) 오른 2.3483%에 마감한 게 대표적이다. 지난 5월11일(2.3865%) 이후 거의 두 달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주요국의 장기금리는 최근 급등하고 있고, 우리나라 역시 이에 동조하고 있다. 이날 오전 서울채권시장에서 국고채 10년물 금리는 3.2bp 오른 2.267%를 나타냈다.
문제는 금융 불안 가능성이다. 2013년 미국 연준이 양적완화 축소 가능성을 언급했을 당시 ‘테이퍼 탠트럼(긴축 발작·금리 급등)’이 발생했던 전례가 있어 국제금융시장은 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10년물 이상 장기금리가 스프링처럼 튀는 건 그 자체로 위기다. 금융 불안은 기업투자 지연, 소비심리 악화 등 실물경제로 번질 수 있다.
이 총재는 “선진국 통화정책의 기조 변화가 신흥국의 금융불안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면서도 “신흥국의 외환보유액 증가 등 대외건전성 제고, 글로벌 경기 회복세 등을 감안할 때 테이퍼 탠트럼과 같은 금융 불안의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것이 중론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그간 국제금융시장에 공급된 막대한 유동성이 축소되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는 만큼 신흥국 입장에서는 확실한 대비 태세가 필요하다는 점도 강조됐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