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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 대통령, 연두기자회견 일문일답-②
  • [edaily] 다음은 김대중 대통령 내외신 연두기자회견 일문일답-② - 공적자금 투입의 공과와 향후 추가투입계획은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에 진념 부총리가 설명토록하고 필요하면 보완하겠다. (진념 부총리)공적자금은 수십년간 이뤄진 기업부실과 관치금융으로 인해 생긴 부실을 메꿔주는 것으로 불가피한 조치였다. 지난해에 우리 은행들이 5년만에 처음으로 흑자를 실현했다. 충당금 적립후 5조2000억원의 당기순익을 냈다. 정부가 가지고 있는 금융기관의 주식을 적정한 수준에서 민영화하겠다. 조흥은행의 경우 지난 주말에 5000원을 회복했다. 우리경제가 활성화되고 주가가 올려가면 공적자금 회수도 늘 것이다. 살릴 수 있는 기업은 가급적 살리고 부실의 원인제공자에 대한 책임은 철저히 물어 책임을 물리겠다. (김대중 대통령) 덧붙이자면 투입된 공적자금 150여조원은 현 정부의 부실이 아니라 과거 역대 정부의 부실을 대신 수습해준 것이다. 기업가에게 직접 준 것이 아니라 은행에다 투입한 것이다. 은행이 무너지기 때문에 은행의 주식을 담보로 해서 준 것이다. 은행 대출을 받아 빼돌린 부실책임자는 추적을 하고 있다. 공적자금의 투입으로 우리의 금융이 건전금융으로 돌아섰고 국제적 신인도가 높아졌고 외평채 (가산)금리가 세계적으로 가장 낮다. 아까 질문 가운데 빠트린 것이 있는데 지금 답하겠다. 지방선거 조기실행은 여야가 결정할 문제이고 정부는 개입않겠다. 그리고 중단된 일본 문화의 개방에 대한 향후 개방과 관련, 신사참배문제와 교과서 문제등이 발단이 됐었다. 그러나 지난 10월달에 고이즈미총리와 만나 7개 문제를 합의했다. 교과서 문제를 갖고서 기술적으로 결말이 안났지만, 며칠전에 7개를 다 해결하겠다고 약속했었다. 이문제가 해결되면 문화교류은 재개되는게 순리로 보인다. - 북미 관계 전망은 ▲지금 그 문제에 대해 확실한 전망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북미관계와 남북관계는 함수관계이다. 한쪽이 잘돼야 다른 쪽도 잘되는 관계이다. 부시정부도 언제 어디서나 북과 대화하겠다고 의지를 밝히고 있다. 상하이에서 만났을 때도 부시대통령이 이점을 강조했다. 북한도 대화를 열망하고 있다. 다만 계기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신뢰부족이 원인으로 보인다. 북한이 테러를 막는 조약 2개에 가입했다. 상황이 바뀌고 있다. 금년에 북미관계에 어떤 대화의 진전이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우리 정부도 이같은 대화가 이뤄질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해나가겠다. - 남북관계 및 미국관계 개선을 위해 미국이 취할 가장 올바른 조치와 다음달 방한에서 어떤 이야기를 나눌지 말해달라. ▲부시대통령은 작년 6월이후 북한과 언제든지 만나서 이야기 하겠다고 말해왔다. 북한도 무조건 대화를 하는게 좋겠다 이렇게 공고하고 있다. 할 말이 있으면 나가서 하는게 좋다. 떨어져서 말을 주고 받는 것 보다 이것이 더 효율적이다. 그래서 북한에 대해 대화를 나가도록 권하고 있다. 또 북한의 체면을 세워주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다. 구체적인 문제는 향후 부시대통령을 만나면 이야기 나누겠다. - 민주당 차기대선주자까지 대통령의 인사정책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인사정책은 참 어려운 문제다. 다 잘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지연·학연을 배제하기 위해 노력해 온 것은 사실이다. 불만족스러운 것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과거에 비하면 큰 진전이 있었다. 인사위원회의 통계에도 나와있다. 여기에 대해 만족하지 않고 비판은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인사정책에 대해선 더 개선시켜나가겠다. - 김정일 답방과 관련해 설명해주시고, 현재 통일안보팀을 새롭게 구성할 계획은 없나 ▲김정일 위원장의 방한에 대해 현재 확실한 말씀을 드릴 수 없다. 문서상으로는 확실하다. 실제로 오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분이나 나나 모두 불투명하게 생각하고 있다. 안보팀 문제에 대해선 그런 의견도 참고로해서 여러가지로 대처해 나가겠다. 현재 안보팀에 있어선 긴밀히 토론하고 해서 진행되고 있다고 말씀드리겠다. - 한중 관계에 대한 견해는 ▲한중관계 10년은 세계 어느나라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좋은 관계로 발전했다. 만족하고 있다. 한중은 전면적인 동반자 관계에 들어가 참으로 좋은 우방으로 있다. 우리는 수천년 왕래했고 문화교류가 있었다. 오늘도 빈번히 행해지고 있다. 한중 관계가 각별한 관계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리적으로 볼때 중국과의 관계가 군사안보면에서나 경제면에서 막중하다. 중국과의 평화적 관계 협력의 관계를 매우 중요시하고 있다. 중국은 교역과 투자에 있어 중요한 국가이다. 치열한 경쟁도 하게 될 것이다. 이런 모든 과정에서 경쟁과 협력의 원칙을 가지고 대응해 나가겠다. 동아시아의 평화와 공동의 발전, 문화적 인적 교류 등에 대해서는 확고하게 협조해 나가야 한다. 국교 10주년을 맞아 중국의 장쩌민 수석이 방한하기를 바란다. - 수능이 어렵게 출제돼 학생들이 혼란을 겪었다. 교육정책에 대해 말씀해 달라 ▲(한완상 부총리)OECD수준의 학급 환경으로 올해 개선하고 교원의 질도 높이겠다. 학습자의 선택을 존중하는 입시제도를 마련할 것이다. 백화점식 대학의 모습은 끝나야한다. IT 등 6대 핵심기술에 적합한 인력 양성하겠다. 사교육비를 줄이기 위해선 학벌주의 문화를 타파해야한다. 이를 타파해야 실력중심의 사회가 된다. 실력을 검증하는 인증제도를 검토해보려고 한다. 이를 통해 지식기반사회, 지식경제국가를 만들겠다. (김대중 대통령)교육문제에 있어 금년도 입시를 치룬 학생에게 미안한 것은 정부가 금년부터 자기 전공만 잘하면 대학진학에 어려움이 없도록 하겠다고 했었는데 수능 시험이 어렵게 나와 사실상 약속을 못지킨 결과가 됐다. 출제한 분들이 좀더 깊이 생각을 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한다. 교육여건 개선사업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다. 학급당 학생수를 OECD수준으로 올리고, 중학교 전면 의무교육을 금년부터 실행한다. BK21을 통해 대학의 다양성과 특수성을 강화시켜 세계적 수준의 대학으로 나가는 노력을 해냐가야 하겠다. 정부로선 21세기 지식기반시대에 있어 교육은 근본이다. 교육이 잘돼야 지식기반경제가 잘된다. 입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가 그렇다. 정부는 반드시 교육을 살려나가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이해해주시고, 현장의 교수와 교원들도 적극적으로 협력해주길 바란다. - 공정선거를 위한 복안과 자민련 김종필 총재와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를 만날 계획은 ▲당적 이탈 계획은 없다. 민주당 공천으로 당선됐는데 저를 찍은 사람은 민주당의 정책을 보고 찍었고 저를 보고 찍었다. 유권자에 대한 책임상, 그리고 민주당을 근본뿌리부터 해온 사람으로서 비록 총재직은 그만뒀지만 민주당에 대한 사랑은 변함없다. 따라서 당을 뜰 이유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야당총재는 언제든지 만날 용의가 있다. 나는 당총재를 떠났기 때문에 정계를 비롯한 각계 지도자를 만날 기회를 갖고 좋은 말씀을 듣고자 한다. - 한일 관계에 대한 말씀이 나왔는데 추가로 질문을 드리겠다 .역사인식 교육에 대한 문제인데, 이는 양국 학자간 견해차이다. 정부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앞으로 교과서 문제는 국가가 나서지 말고 학자(민간)에 맡기는 게 어떤가 ▲원칙적으로 일리가 있다 그러나 한일 관계는 특수성이 있다. 기본적으로는 민간인 학자들이 학문적으로 전체 토론을 하고, 양국정부가 관여를 하면서 과거와 같은 사태가 나지 않도록 조정협조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양국사이에서 방법적으로 협의를 하고 있다. 합의하고 있는 과정을 지켜보도록 하자.
2002.01.14 I 오상용 기자
  • (정동희의 핫스팟)일본이라는 복병
  • [edaily] ▶ 바로 옆에 있지만 와닿지 않으면서 또한 무시하는 나라, 일본 주식투자자를 위한 어느 설명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우리나라 주식시장 전망 이야기를 하는 과정 속에서 일본의 경기 침체 심각성을 10여분간 이야기하자 마자, 나이 드신 어느 투자자가 대뜸 질문을 던진다. 일본이 경기 침체에 빠진 사실이 우리 주식시장에 무슨 영향을 미치는 건가요?”라고 묻는 질문에, 일본의 경기 침체가 우리나라 주식시장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표정이 숨겨진 것 같았다. 문득 마음 속으로 ‘아, 이거 어떻게 설명해야지 피부로 와 닿게 설명할 수 있을까?’하는 순간적인 고민 끝에, 마누라 이야기를 했다.“제 와이프(Wife)가 외국계 화장품 면세점 계통에서 일하는데요, 국내 면세점의 화장품 매출의 70∼80%가 바로 일본 관광객에 의해 발생됩니다. 그런데 요즘 일본 경기 침체가 본격화되면서, 국내 면세점 매출이 상당히 재미없다고 합니다.” 면세점 매출에서 가장 큰 수입원을 갖고 있는 호텔신라의 주가가 「월드컵 수혜주」니 「경기 수혜주」니 하면서 저점 대비 50% 이상 오르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답변을 질문자가 어떻게 받아 들일지 궁금하기만 하다. 【2001년 이후 달러/엔 환율과 원/달러 환율의 변화 추이】 기관투자가와의 시황에 대해 의견을 나눌 때도 이러한 현상을 가끔씩 겪게 된다. 심화되고 있는 일본의 경기 침체 상황이나, 일본 경기 침체가 지역 경제에 일정부분 타격을 줄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면, 종종 받는 질문이 있다. “일본에 대해서는 이미 포기했다. 하지만 우리는 중국이 있지 않는가?” 이러한 질문 이면에는 ‘일본 경기 침체가 지역 경제에 일정부분 타격을 줄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먼저, 중국의 경우 향후 5년간 경제활동인구의 자연스런 증가와 더불어 국영 부문 정리에 따른 실업자와 농촌의 잉여 노동력 흡수를 위해서는 매년 100만개의 신규 일자리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적어도 7%대의 안정적인 성장세 유지가 필수적이다. 내년 중국의 성장률을 7%대 중반 정도로 내다 보는 의견이 현재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러한 전망이 전제하고 있는 것은 美 경제가 내년 2/4분기 이후 회복될 것이라는 (확실하지는 않은) 전망을 깔고 있다.(사실 중국의 경제 성장 향방은 상당부분 미국의 경기 회복 여부에 의존하고 있다.) 또한 중국과 관련하여 한국 투자자들이 막연한 기대로 인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중국의 잠재적인 성장에서 혜택 받을 수 있는 국가로는 같은 화교 국가이며 중국에 대한 자본 투자가 활발했던 『대만과 싱가포르』를 1차적으로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중국시장의 1차 수혜국인 대만이 3/4분기에 전년 동기비 -4.2% 성장세를 보이며 26년래 최악인 상황을 보이고 있고 싱가포르 경제도 올 3/4분기에 -5.6% 성장한 이후 4/4분기에도 -8.3% 성장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는 마당에, 한국은 중국시장에 대해 너무 낙관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일본은 자국産 경기침체를 수출하려고 안달이 나 있다 일본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 보자. 달러/엔 환율은 지난 98년 10월 이후 최고치로 상승하면서, 『일본 경기 침체가 지역 경제에 일정부분 타격을 줄 가능성』이 막연한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부 발빠른 투자자는 인식하는 듯 하다. 일본은 자국의 경기침체를 환율 평가절하를 묵인하는 메커니즘을 이용하여, 이제 타국에 수출하게 될 것이다. 「일본産 경기침체의 수출」구도가 우리나라에 어떻게 영향을 줄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최근 발표된 일본 경제지표를 분석해 보면, 좀 더 명확해진다. 일본은행이 지난12월12일 발표한 12월 기업단기경제관측조사(단칸, 短觀)를 면밀하게 살펴보면, 기업의 경기 체감을 나타내는 업황판단지수(DI) 측면에서 非제조업은 마이너스 22를 기록한 반면 대기업 제조업에서 마이너스 38을 기록하고 있다. 「일본産 경기침체의 수출」의 무게 중심은 단연코 일본의 대기업 제조업 부분이 가장 큰 수혜를 보도록 의도될 수 밖에 없다. IT수요의 감소에 허덕이는 전자기계 부분이 무려 마이너스 63을 기록하고 있고, 지난 9월 조사에서는 마이너스 2에 머물렀던 자동차가 마이너스 14까지 떨어지며 대폭 하향 조정된 사실을 주목해야겠다. 일본의 10월 완전실업률이 사상 최악인 5.4%를 기록하고 있고, 민간설비투자의 선행지표가 되는 "선박, 전력을 제외한 민간수요"의 수주액(계절조정치)이 전월비 10.1% 감소하며 5개월 연속 감소세를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환율 평가절하를 통한「일본産 경기침체의 수출」구도의 무게 중심은 바로 전자기계 부분과 자동차 부문에서 일본의 희생양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일본産 경기침체의 수출」구도의 무게 중심은 바로 전자기계 부분과 자동차 부문일 듯.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일본産 경기침체의 수출 대상 후보로는 1차적으로 미국과 중국보다는 한국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배제할 수 없겠다. 중국과 일본의 무역 전쟁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위안화 평가절하는 아시아 주변국에게 가장 큰 위협 요인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중국의 외환보유액이 일본에 이어 세계 제 2위 규모인 2,000억달러(10월말 현재)에 이르고 있고 중국과 일본의 주력 산업구조도 아직까지는 차이가 많아, 그 가능성은 크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미국도 일본의 경제 불안이 갖는 국제적 함의에 대한 미국의 심각한 우려를 여러 차례 표명한 바 있는데다, 日銀 해외자산 인수나 통화 증발 등을 통한 엔화 약세 시도의 필요성을 사실상 묵인하고 있는 것으로 뉴욕 외환시장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 증시 재료 측면에서 향후 한국이 질 수 있는 두 가지 잠재 부담 요인들 환율 평가절하를 통한「일본産 경기침체의 수출」구도의 무게 중심은 바로 전자기계 부분과 자동차 부문에서 일본의 희생양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면, 한국은 두 가지 점에서 잠재적인 부담요인을 질 것 같다. (물론, SKT와 NTT도코모와의 외자 유치 협상 결렬과 같은 사건도 결국에는 ‘일본産 경기침체의 수출’구도에서 간접적인 원인을 찾을 수 있겠다.) ① 미국의 제너럴 모터스(GM)가 대우자동차 인수와 관련하여 약속된 최종 시한인 올해 연내 성사가 사실상 깨어지고 있는데다, 인수 자체가 무산될 가능성에 대해 CNN등 외신이 국내 언론보다 오히려 더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포드도 포기한 대우차 인수를 만약 GM도 포기한다면, 현실적으로 대우차에 대한 청산보다는 현대차 그룹에 어떠한 형식으로든 타진할 수 밖에 없는 방안만 남을 수 있다. ② 도시바와 인피니언의 D램 사업부문 통합 계획이 원칙적인 합의에 도달된 상황에서, 12조4,000억원에 달하는 하이닉스의 막대한 부채 규모로 인해 하이닉스와 마이크론과의 전략적 제휴 방안이 합병으로 귀결되지 않을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점이다. 미국 최대 에너지기업 엔론이 다이너지가 합병 인수를 철회한 후 급격한 상황 변화를 겪었고, 당초 기대를 부풀리게 했던 HPㆍ컴팩 합병 계획안이 지금은 포춘紙에 의해 「올해 "최악"의 결합」으로 선정되고 일부 대주주들이 합병에 반대하며 뒤늦게 급격한 상황 변화를 역시 겪고 있다는 점을 새겨 볼 만 하다. 일본 경기 침체가 지역 경제에 일정부분 타격을 줄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높고, 환율 평가절하를 통한「일본産 경기침체의 수출」구도의 무게 중심은 바로 전자기계 부분과 자동차 부문에서 일본의 희생양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는 측면에서, 엔화의 환율 평가절하가 현실화되고 있는 상황은 주식시장에 참여하는 투자자에게 섣부른 추격 매수의 위험성을 간접적으로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이다. ▶ 미국 주식시장의 분위기가 변화될 조짐이 있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소위 「War against Terror」가 어느 정도 일단락되고 있는 상황에서, 최근 미국 주식시장의 분위기가 뭔가 변화될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9월 11일 테러 이후 미국 주식시장의 참여자는 기업실적 점검이나 전망과 같은 Bottom-Up 접근을 도외시하고 더 이상 최악은 없다는 식의 「심리적 애국주의」와 공격적 금리 인하로 인한 유동성 논리에 편중한 Top-Down 방식만 바라보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12월 들어 기업실적 점검이나 전망과 같은 Bottom-Up 접근을 보려는 예전 속성이 다시 나타나는 경향이 강해 보인다. 사실 주식이 채권에 비해 높은 수익률을 보장하는 시장 구조가 너무 부각되며 최근 채권 매도세가 부풀려지고 있고, 기업 수익의 뚜렷한 개선 조짐이 요구되어야 현재의 주가를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시점이 되고 있는 셈이다. 아직까지 국내외적으로 정책 대응이 의도된 효과를 창출하지 못할 가능성을 우려할 단계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키친 싸이클(Kitchen Cycle)과 같은 짧은 경기순환적 관점에만 집착하여, 지금처럼 세계화된 경제에서 경기 회복 가능성이 구조적으로 과거에 비해 훨씬 어려워지고 있는 구조적 배경을 너무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속적인 주가 상승을 위해서는 주당순익(EPS)이 가속화되어야 된다는 측면에서, 국내외 기업실적 점검과 향후 전망에 대해 좀 더 냉정하게 점검해야 되지 않을까?
2001.12.17 I 정동희 기자
  • (환리스크관리의 주역들)SK글로벌 이명석팀장(상)
  • [edaily] 외환위기후 우리 금융시장은 세계화의 거센 물결에 휘말렸고 외환시장은 가장 심한 변화를 겪었다. 특히 기업들은 자유변동환율제 도입이후 대외거래 확대와 비례해 갈수록 커져만가는 환위험을 관리하는데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적지않은 기업들이 환위험관리의 중요성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고 때에 따라선 거액의 환차손을 입고 존립조차 위협받기도했다. 무역협회 조사에 따르면 국내 주요 수출기업 200개사 중 44%가 특별한 환위험 회피방법을 강구하고 있지않다. 이게 우리 기업들의 현주소다. 지난달 미국의 존 F.O 빌슨 박사는 한 세미나에서 "기업경영 최후의 성공비결은 위험관리에 달려있으며 이를 위해 CRO(위험관리 최고책임자 Chief Risk Officer)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edaily는 환위험을 직접 체험하고있는 국내 주요기업들의 외환담당자들을 찾아 그들의 거래경험과 철학을 탐문하는 기획 인터뷰를 마련했다. 그 첫 대상자는 SK글로벌의 이명석 딜링팀 팀장이다. SK글로벌은 한국상장사협의회 자료기준 지난해 12월결산 상장사 중 외화관련 순이익 1위 업체로 지난해 외환거래를 통해 무려 325억원의 수익을 올렸다. 이 팀장은 입사 후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딜링팀에 배치받았지만 6년만에 하루 수억달러의 포지션을 거뜬히 관리하고 많은 수익을 내는 "일급 트레이더"가 됐다. 공식적인 실무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도 철저한 자기관리와 학습을 통해 위험관리 전문가가 된 그의 얘기를 들어봤다. (약력은 기사하단 참조) -SK글로벌에는 언제 입사하셨습니까. ▲95년 대학졸업하고 병역의무를 마친 후 바로 입사했습니다. 이후 계속 이 일을 해왔습니다. -당시 딜링팀의 조직상황은 어땠습니까. ▲처음에는 국제금융팀이라는 조직의 일부분이었습니다. 저는 자금팀으로 들어왔다가 환거래 업무는 국제금융팀 소속이라기에 국제금융팀으로 옮겼죠. 국제금융팀에는 과장, 대리가 한 명씩 계셨고 사원으로 제가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건 그 업무자체가 6개월 후에 자금팀으로 다시 넘어갔다는 겁니다. 1년 후 처음 모셨던 과장님이 다른 팀으로 옮겨가셨어요. 그 당시만 해도 이일이 전문직이 아니라 순환보직 개념이 강해서 이동이 잦았습니다. 전문가가 없다보니 2~3년 하다가 다른 팀으로 가고..한 가지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저는 무척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지금 SK증권으로 가신 남승엽 부장님을 만난 게 행운이었습니다. 그 분 밑에서 가나다부터 배운 셈입니다. 남 부장님은 사실 주식전문가셨습니다. 미국에 계실 때 살로먼스미스바니에서 일하신 경험도 있고요. "트레이딩은 이런 거다. 머니게임에서 돈을 벌려면 이렇게 해야한다"는 것을 체계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야말로 도제식 수업이죠. 책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이럴 땐 이렇게 하고 저럴 땐 저렇게 한다"는 걸 몸소 겪지않으면 안 되거든요. 남 부장님 밑에서 3~4년 세월이 금방 지나갔고 그 분이 증권으로 옮겨가시면서 "이제 너 정도면 혼자 꾸려가도 괜찮겠다"라는 말씀을 해주고 떠나셨습니다. 6개월 동안은 저 혼자하 거래하다가 요즘 대리 한 명이 들어왔습니다. -외환외에 주식, 채권쪽 거래도 하십니까. ▲지금은 할 여력이 전혀 없습니다. 다만 그 쪽 상황을 안 볼 수는 없으니까 항상 체크하죠. 머니게임에서는 펀더멘털, 테크니컬 접근이 있는데 제가 배운 건 철저히 테크니컬한 접근이에요. 사실 기자분들을 비롯해 이쪽 분야에 몸담고 계신 분들로부터 전화도 꽤 받는 편입니다. 아까도 한국은행의 조사역 한분이 "환율 어떻게 될 것 같으냐"고 전화하셔서 얼마 정도 예상한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그 분이 왜 그러냐고 물으세요. 제가 그랬죠. "아시면서 왜 그러십니까. 전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될 확률이 높다는 것만큼은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다"고. 차트를 분석하고 과거 예를 들어보면 이렇게 움직일 것 같다고 말씀드린 거고 거기에 경기상황이 어떻고 뭐가 어떻고 그런 말을 갖다붙일 필요가 없는 겁니다. 물론 이런 방식을 폄하하시는 분도 계시지만 저는 여태까지 이걸 통해 돈을 벌었습니다. 다른 말이 필요없죠. ◇피말리는 머니게임의 세계..손절매는 "칼같이" -회사의 포지션 헤지가 목적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서 거래하신단 말씀이군요. ▲네. 농담이지만 헤지만 한다면 초등학교 나와도 할 수 있어요. 달러 남으면 팔면 되거든요. 그걸 위해서라면 제가 이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또다시 머니게임에 뛰어든다는 것은 상당한 위험부담을 요구하는 일인데요. ▲자랑이 아니라 전 저희회사가 어떤 시중 금융기관보다도 셋업이 잘 돼 있다고 봅니다. 체계적인 시스템 하에서 차근차근 거래한다면 위험부담을 져도 돈을 벌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에요. 종합상사의 특성상 저희 회사도 평균 Exposure(환위험 노출규모)가 몇 억달러가 넘지만 저는 하루 평잔 몇 억달러를 다 관리합니다. 보고체계나 거래한도가 잘 갖춰져있으니 그 안에서 거래하면 됩니다. -달러 유입이나 유출상태는 미리미리 알고 거래하십니까. ▲물론입니다. 갑자기 확 들어오거나 나가는 경우가 없진 않지만 향후 유입유출 규모가 어떻다는 것을 미리 파악하지 못하면 거래할 수 없죠. 들어올 게 있으면 저에게 바로바로 통보가 옵니다. -통제는 어떤 식으로 받고 있습니까. ▲컨트롤러 업무는 부회장이신 CFO께서 담당하십니다. 제가 데일리 리포트를 쓰는데 이걸 자금담당 임원, 실적담당 팀장, CFO 세 분께 보고하고 CEO께는 월간으로 올립니다. 제 포지션 한도나 손절매(stop-loss) 한도가 얼마인지는 밝혀드릴 수 없지만 그 분들은 1분1초마다 제가 한도를 지키고있는지 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좀 된다" 싶어서 한꺼번에 지르거나 그런 일은 없다는 말씀이군요.(웃음) ▲포지션 리미트는 철저하게 지켜야합니다. 그걸 어기면 용서가 안 돼요. 아무리 돈을 잘 벌어도 이를 어기면 바로 해고당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이 안 돼있는 거니까요. 손절매를 안 지키는 것은 걸을 줄도 모르면서 뛰려고 하는 행태아닙니까. 어쩌다 뛸 순 있겠지만 다음엔 바로 넘어집니다. 사실 과거에 몇몇 대규모 회사들도 그런 일 많이했어요. 자기자신의 룰을 안 지키니까 한 순간 큰 회사가 날라가게 되는 겁니다. 머니게임에서는 단 한사람의 잘못이 엄청난 결과를 가져옵니다. 베어링 증권 파산이 바로 그 예가 아닙니까. 위험부담이 없으면 안되니까 리스크는 져야죠. 돈을 번다는 뜻은 잃을 위험도 있다는 말인데 위험관리는 기본이 아니겠어요. 돈 잃을까 두려워 거래 못한다는 말도 어불성설이지만 기본적인 룰을 안 지키면서 거래하는 것은 더 위험합니다. ◇100% 헤지는 기본 -거래하는 사람의 기본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말씀이군요. 외환위기 전에는 환율이 움직이지 않았잖아요. 그땐 어떤 식으로 거래하셨나요. ▲헤지라는 개념도 잘 없었죠. 뭐 외환위기 전에는 사실 100% 헤지를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제가 3억달러 달러매도초과(숏) 포지션이면 반드시 그 금액만큼 달러를 사들여 커버하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무렵 종합상사들이 모두 금을 거래했습니다. 금을 들여와서 800원대에 팔았어요. 당시 임원들은 환율변화에 대한 인식도 거의 없었고 환율상승은 더욱 생각도 못하는 분들이었습니다. 외환위기 전까지 90년대에는 환율이 800원에서 600원까지 떨어지던 때였으니까요. "원화절상 시기에 헤지가 웬 말이냐" 뭐 이런 식이었습니다. 기업들은 외화차입으로 금을 사들여서 800원에 팔았습니다. 금을 팔 때되면 환율 750원 돼 있으니 차입금이 줄어들죠. 당시 한국 금리도 미국보다 2배 높았으니 꿩먹고 알먹는 격이죠. 이게 버전업이 돼서 각 기업들이 외화를 다루는 규모가 점점 늘어난 겁니다. 과거에 종합상사들이 환투기해서 이익을 많이 냈습니다. 상사가 들여오는 상품들이 대부분 마진이 작은 품목들이라 환투기를 통해서도 돈을 벌었죠. 그때와 달리 요즘 저희 회사는 포지션의 100%를 헤지합니다. 마케팅 프로덕션 리서치(MPR) 부서에서는 환위험을 100% 저에게 전가시켜야 합니다. 본인들은 영업수익 극대화를 위해서만 노력하고요. 최고경영자께서 강조하시길 "영업부는 영업이익만 신경써라. 환차익에 대해선 잘했다고 평가해주지 않겠다. 하지만 환차손에 대해선 엄중히 책임을 묻겠다" 고 말씀하셨거든요. 외환과 관련된 부분은 모두 전문팀에게 맡기고 영업팀은 영업에 더욱 신경쓰라는 뜻입니다. 98년 1월부터 저희팀이 헤지를 책임졌고 99년에는 저희도 영업팀에 대해서 "영업은 무조건적으로 100% 헤지해라"고 주문했습니다. 환율변동성이 커지고 거래규모가 늘어나면서 위험부담이 엄청 커졌기 때문입니다. 영업팀도 정신 바짝 차려야죠. 저희가 아주 많을 때는 평잔으로 6억달러에 달하는 익스포져(포지션 노출)가 생겨요. 6억달러의 반이면 3억달러인데 환율이 10원이 변한다면 30억이 왔다갔다 하지 않습니까. 종합상사 수익중 30억을 하루에 잃을 수 있다는 건 회사 존립을 위협하는 문제입니다. 거래는 다음과 같은 식으로 이뤄집니다. 제가 환율상승을 예상한 시기에 회사가 3억달러 달러매수초과(롱) 상태가 됐어요. 그럼 헤지를 위해서는 이걸 다 되팔아야 하는데 저에게 부여된 한도가 1000만달러라고 가정하면 2억9000만 달러만 팝니다. 나머지 1000만달러는 이익을 위해 남겨두죠. 3억달러 다 팔고 1000만달러를 되살 수도 있지만 거래비용이 드니까 효율성을 위해서 이 방법을 택한 겁니다. ◇집중력과 수리력이 중요 -외환위기 전에는 지금처럼 각종 통신사 단말기나 좋은 프로그램과 같은 툴이 없었을 때인데..어떤 식으로 거래하셨습니까. ▲처음에는 장부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엑세스를 사용한 프로그램을 직접 만들었어요. 전산팀에다 문의한 것도 아니고 일일이 책을 사다 배워가면서 하나하나 만들었습니다. 그게 98년이었고 업데이트가 계속적으로 이뤄졌죠. 요즘에는 저와 영업팀, 회계팀 모두 실시간 거래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사내선물환 MIS(Management Information System)를 쓰고 있습니다. -하루 거래일과를 말씀해주시죠. ▲특별한 건 없고..저는 장중에 게임을 할 때도 있습니다. 하루 종일 시장을 들여다보는 것은 너무나도 큰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일이니까요. 오히려 체력과 업무 효율성만 떨어지고. 대신 미리 계산은 철저하게 해둡니다. 아침 일찍 오늘 손절기준, 매매방법에 대해 큰 그림을 그려놓습니다. 오늘(11월1일) 일과를 말씀드릴께요. 저희가 오늘 1296원에 500만달러를 샀어요. 그런데 오전중 1296원이 무너지니까 저희 팀 대리는 겁을 먹는 겁니다. 저도 그 연차때는 당연히 그랬으니까 "1294원70전이 부러지면 뒤도 안 돌아보고 손절매한다. 그러니 그 때까진 겁먹지 말라"고 말해줬습니다. 이러저러해서 이 선이 상당히 중요한 저항선이 된다고. 트레이딩에는 집중력과 수리력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시장이 안 움직이는 것 같아도 한 순간에 움직이거든요. 이때 뛰어들수 있는 집중력과 순발력이 필요합니다. 감이 왔을때 뛰어들려면 당연히 미리미리 계산을 해놓아야하고요. 말씀은 이렇게 드리지만 사람이 제일로 하지말아야 할 일이 바로 샐러리맨 생활이고 그 중에서도 돈 먹기 게임하는 일입니다.(웃음) 사실 저야 뭐 이때까지 별탈없이 지내왔고 회사에 돈도 많이 안겨줬지만 회의가 들 때도 상당히 많습니다. -아니 왜요. ▲철저한 제로섬 게임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돈 번만큼 다른 누구는 돈을 잃는다는 얘기니까요. 저도 매일매일 거래하면서 돈 잃은 적이 많은데 그 기분을 모르겠습니까. 주식거래는 좀 다릅니다. 100원에 주식을 사서 300원이 됐다면 아무도 잃은 사람없고 300원에 산 주식이 100원이 됐다해도 저만 잃은 건 아니잖습니까. 하지만 외환은 제가 벌면 누군가는 잃게 돼 있습니다. (중편으로 이어집니다)
2001.11.14 I 하정민 기자
  • (금융시장의 연금술사들)국민은행 맥쿼리팀①
  • [edaily] 파생금융상품은 멀리하면 어렵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재미도 있고 이익도 짭짤하다. 일단 시작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것이 쉽지않다. 자신이 잘 모르는 것을 빨리 알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잘 아는 사람과 같이 일을 하면 된다. 국민은행과 호주의 맥쿼리 은행은 파생금융 분야에서 “업무제휴”라는 모델을 실험하고 있다. 맥쿼리는 파생상품 “지식”을, 국민은행은 “신용”과 “고객 기반”을 제공하는 것이다. 국민은행 국제금융부의 “파생 및 복합금융상품팀”은 벌써 3년째 이 같은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은행내에서는 이 팀을 “맥쿼리팀” 또는 “업무제휴팀”이라고 부른다. 업무제휴팀의 유광근 팀장(사진 왼쪽)과 니콜라스 오케인 씨는 말도 다르고 은행에서의 역할도 다르지만 각자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호흡을 맞추고 있다. 맥쿼리팀에서 니콜라스 오케인은 닉으로 불린다. 미혼인 닉은 처음 IRS 딜러로 한국에 왔지만 지금은 맥쿼리 쪽 헤드로 승진했다. 그는 IRS 마켓 경험이 7년이나 된다. 닉은 “지난 2년간 채권시장과 금리스왑(IRS) 시장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발전한 것이 가장 인상적”이라고 말한다. IRS의 경우 시장 자체가 없었는데 지금은 비드(Bid)-오퍼(Offer) 스프레드 차이가 5~7bp 정도로 좁혀졌다. IRS 시장은 99년 이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지난해 초까지도 IRS 시장에서 비드-오퍼 스트레드는 15~30bp 였다. 이것이 10~15bp로 좁혀졌고 지금은 5~7bp로 줄어든 것이다. 국민은행이 파생상품 분야에 진출한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국민은행은 IMF 이전부터 소매영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사람들을 키워왔다. 때마침 맥쿼리가 업무 제휴를 타진해왔다. 그로부터 3년 남짓 시간이 흘러, 국민은행은 산업은행과 함께 국내 IRS 시장의 강자로 부상했다. 국제금융부 내의 마케팅 팀과 손발을 맞춰가며 외환관련 파생상품으로도 “큰 건수”를 제법 건졌다. 국민은행이 98년 12월 맥쿼리와 제휴를 결정하기까지 과정과 파생상품 업무를 세팅하면서 겪은 일들, 북(Book) 운용 전략, 대고객 거래 사례, 파생상품 마케팅 전략 등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서로 밑지지 않는 장사…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고> -(우선 니콜라스 오케인에게 물었다.) IRS 시장이 비교적 빠르게 성장했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선 채권시장이 발전했습니다. 프라이머리 딜러, 시가평가, 국채선물, 회계 등 나름대로 기반 조성이 됐죠. IRS는 채권시장과 따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국채시장이 발전하면서 수익률 곡선(Yield Curve)이 생성됐고 일드커브가 있어야 IRS 가격이 나올 수 있습니다. 국채선물이라는 헤지 수단이 생기면서 “현물 채권시장-국채선물-장외 IRS”의 3각 관계가 균형있게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채권 발행자의 욕구가 다양해지고 투자자의 저변도 늘어나 변동금리와 고정금리의 교환도 적극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죠. -다른 은행들은 IRS 시장에 진입하지 않고 있는데 ▲(유 팀장) 우선, 시스템이 갖춰져야합니다. 그래야 정확한 프라이싱과 일드커브를 생성할 수 있습니다. 교과서에 있는 “일드커브”로는 실전에서 장사를 할 수 없어요. 시스템은 리스크 관리에도 필수적입니다. 사실 이것이 노하우죠. 맥쿼리에서 우리가 배우려는 것도 이런 것이고요. 일드커브의 방향, 모양 등을 시스템으로 관리할 수 있어야합니다. 마지막으로 시스템은 딜러가 트레이딩 할 수 있는 기본적인 데이터를 제공해야합니다. 둘째로 거래 경험이 있어야합니다. 경험해본 것과 안해본 것은 천지 차이에요. 맥쿼리로부터 이 같은 경험을 전수받아야죠. 셋째, 크레딧도 중요합니다. IRS 계약이 몇 년을 가는데 거래 상대편의 신용이 중요하죠. 외국계 은행들이 국민은행이나 산업은행 외에 다른 국내 은행과 거래하는 것을 꺼리는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케인) 맥쿼리 은행 본사에는 시스템을 업데이트하는 전담 팀이 있습니다. 시장이 움직일때마다 쫓아다니면서 사후관리를 다 해줘요. -맥쿼리는 왜 국민은행을 선택했나요 ▲(오케인) 국민은행은 고객 기반이 넓습니다. 98년에 한국에 있는 8개 은행을 대상으로 스트레스 테스트를 했습니다. 이중 4개 은행이 선정됐고 합작팀이 4개 은행을 일일이 방문해서 임원과 담당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때 국민은행과 신한은행이 가장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국민은행 경영진이 더욱 적극적이었어요. 국민은행도 담당자들이 호주로 와서 맥쿼리 은행 상황을 직접 점검했습니다. (유 팀장은 합작과 관련된 보다 세부적인 내용을 설명했다. 다음은 그 내용) 98년 여름 맥쿼리 은행에서 한 사람이 불쑥 국민은행을 찾아왔다. 지금은 홍콩으로 전근을 갔지만 초대 업무제휴팀의 맥쿼리측 책임자였다. 이 사람이 자기 은행을 소개하면서 파생상품 업무를 같이 하자고 했다. 98년 여름이면 IMF가 한창 진행중일때였다. 국민은행도 소매금융만으로는 안된다, 뭔가 새로운 수익원을 찾아야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중에 하나가 파생상품이었다. 당시에도 은행내에서 파생상품 팀이 별도로 있었다. 통화옵션 등의 거래를 했는데 시스템이 없어서 대고객 거래보다는 트레이딩에 주력했다. 96년부터 이 분야의 전문가를 영입, 외국은행 스타일로 트레이딩을 했었다. 시티은행과 체이스에서 트레이딩을 하신 분이었는데 당시 나는 과장이었다. 외환이나 국제분야 업무는 국민은행이 후발주자였기 때문에 신속하게 따라잡기 위해서는 외부인력 충원이 절실했다. IMF가 터지자 트레이딩을 할 것이 없었다. 다른 시중은행은 파생상품팀을 해체했는데 우리는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IMF 직전까지 국제금융에서 중요한 것은 투융자 업무였다. 달러로 조달해서 동남아 시장 등에 투자하는 것이었는데 IMF 이후 이런 거래는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투융자가 안된다면 대안은 뭐냐. 어렴풋이 트레저리(treasury)와 파생상품이 대안이라는 인식은 있었다. 그 무렵 맥쿼리가 찾아온 것이다. 맥쿼리는 8개 은행을 골라서 “한국이 지금의 위기가 계속될 때 살아남는 은행이 어디일까” 스트레스 테스트를 하고 4개 은행을 선택했다고 한다. 당시 송달호 행장은 합작에 적극적이었다. 실무진이 호주에 가서 맥쿼리가 어떤 은행인지 알아봐야했다. 시드니에 일주일간 머물며 맥쿼리 행장 등을 면담했다. 그당시 맥쿼리의 자산규모는 우리 은행의 10분의 1 수준이었다. 작지만 강한 은행이었다. 맥쿼리 은행이 걸어온 길을 보면 우리와 비슷하다. 호주도 80년대 초에 외환시장을 개방하면서 국내와 똑 같은 혼란을 경험했다. 맥쿼리는 “자신들이 우리보다 10년 먼저 겪었고 그 혼란에서 살아남았다. 골드만삭스나 시티, 리만 등과 경쟁해서 이겼다. 자신있다. 호주에서 맥쿼리가 이 분야의 탑이다. 경쟁력도 있고 기술도 있다”고 강조했다. (인터뷰 2편으로 이어짐)
2001.10.24 I 정명수 기자
  • (금융시장의 연금술사들)산은 금융공학팀-파생상품 백화점②
  • [edaily] 산업은행 금융공학팀은 자금거래실 안에 있다. 산은 자금거래실은 주식, 원화채권, 외화채권, 콜, 외환 스팟, 선물환, 외화 머니마켓 등 온갖 금융거래를 담당하는 부서다. (1편에서 이어집니다) ◇파생상품 백화점 금융공학팀은 총 인원이 17명(팀장, 스왑 4명, ABS 7명, 옵션 2명, 법률 담당 1명, 위험관리 등 북(Book) 관리에 2명)으로 자금거래실 중 인력이 가장 많다. 앞서 열거한 거래이외의 모든 거래, 즉 파생상품 거래 일체를 금융공학팀이 담당한다. 정 팀장은 “금융공학팀은 3개 파트로 나눌 수 있다”고 말한다. 우선 스왑 파트. 원화금리스왑, 이종통화스왑(Cross Currency Swap: CRS) 등을 담당한다. 원달러 통화스왑(원화 고정금리와 달러 리보 금리를 바꾸는 거래)이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거래된 것은 98년 하반기부터다. 정 팀장은 “그 이전까지는 국내에서 원달러 스왑이 많지 않고 홍콩 등지의 NDF 시장을 이용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가 IMF 체제에 들어간 이후 원달러 통화스왑이 발달했다. 국내 기업과 금융기관이 달러를 구하기가 어렵게 되자 원화로 채권을 발행, 통화스왑을 통해 달러를 조달하기 시작했다. 정 팀장은 “당시에 우리 기관들이 약하게 보이니까 외국 기관들이 스왑 레이트를 자기들 유리한대로 적용했다”며 “시장을 정상화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장 조성자(마켓메이커) 역할을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금리스왑 시장은 99년말부터 형성됐다. 부산 선물거래소에 CD선물이 도입되고 국채선물도 상장되면서 금리스왑 호가를 제시했다. 그 시장이 조금씩 커져서 2000년초에는 금리스왑 인력이 대폭 보강됐다. 정 팀장은 초창기 금리스왑 거래를 외국 은행과 할 때는 불평등한 거래 조항때문에 한동안 거래를 거부했다고 말한다. 국제적으로 스왑 거래는 거래 규정이 통일돼 있다. 국제스왑파생상품협회(International Swaps & Derivtives Association :ISDA)에서 만든 규정을 기본으로 한다. 스왑은 증권거래소처럼 정해진 시장에서 거래를 하는 것이 아니라 기관 대 기관이 임의로 계약을 맺는 장외거래이기 때문에 거래의 규약과 상대방의 신용도가 중요하다. 산업은행이 금리스왑을 할 때 ISDA 규정 중에 “링 펜스(Ring Fence: 권투경기를 하는 링을 둘러싼 줄)”라는 것이 문제가 됐다. 산업은행과 외국의 A은행 서울 지점이 스왑 거래를 했다고 하자. 만약 서울 지점에 어떤 문제가 생겨서 스왑 거래를 이행할 수 없게 되면 A은행 본점이 이에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이 링 펜스다. 산은과 거래하는 외국 은행들은 시티, 도이체 등 세계 유수의 금융기관이다. 이들 은행의 서울 지점과 스왑 거래를 하는데 마치 “너희들끼리 문제를 해결해라”는 식으로 링 펜스 조항을 이용한 것이다. 정 팀장은 “링 펜스는 선진국 금융기관들이 후진국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수단 중에 하나”라며 “쓸개, 간 다 떼어주고 거래를 할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더구나 달러도 아니고 원화 금리스왑인데 외국 은행이 우리나라 은행보고 담보를 내라고 하거나 링 펜스 조항을 거는 것은 자존심과 관련된 문제였다. 지금은 산업은행이 금리스왑 시장에서 무시할 수 없는 거래 파트너이기 떄문에 이들 은행도 링 펜스 조항을 강요할 수 없는 처지다. 정 팀장은 “우리도 신용이 떨어지는 기관과 거래할 때 담보를 내라, 마진을 높여라 요구하고 싶지만 그렇게 선별적으로 거래하면 시장 활성화가 안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이처럼 산업은행이 강하게 나오며 장기 스왑 거래를 거부하자 외국의 큰 은행들 몸이 달았다. 다른 외국 은행을 통해 간접적으로 스왑 거래 의뢰가 들어오기도 했다. 현재 금리스왑 시장에는 산업은행, 국민은행, 기업은행 등 국내 은행과 외국 은행들이 참여하고 있다. 브로커만도 프레본, 켄터, 툴렛, 니딴 등 외국 중개회사와 한국자금중개 등 5~6개가 된다. 새로 이 시장에 진입하려는 브로커 회사도 3~4개가 있다. 최근에는 투신사도 금리스왑 거래를 할 수 있게 됐다. 정 팀장은 “투신과 거래할 경우에는 거래 규모가 문제가 될 수 있다”며 “한번 거래할 때 단위가 100억원이기 때문에 대형 투신사들이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스왑과 함께 현대 파생상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옵션이다. 옵션은 7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거래가 시작됐다. 옵션 가격을 결정하는 블랙숄즈 모델이 나오면서 금융 거래에 응용이 가능해졌다. 산은 금융공학팀에서 주로 다루는 옵션은 원달러 옵션이다. 옵션은 환율 변동 위험을 헤지하는 파생상품에서 빠지지 않는 필수 양념이다. 외화부채나 외화자산의 환위험을 헤지할 때 환율을 그대로 고정시켜버리는 선물환이나 스왑은 너무 단순하다고 여겨져 다른 효과를 내고자 할 때 옵션거래를 할 수 있다 예를들어 외화 자산을 기초로 원화표시 유동화채권을 발행한다면 외화 자산에서 나오는 현금흐름을 환율 변동에 관계없이 일정하게 만드는 원달러 옵션 거래를 해야한다. 정 팀장은 “아직까지 원달러 옵션은 시장규모가 크지 않지만 외환 거래가 많은 대형기업과 금융기관들이 이용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ABS(Asset Backed Securities: 자산유동화증권) 파트가 있다. ABS 업무는 금융공학팀이 의도적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다. 98년 ABS 관련법이 통과돼 99년부터 ABS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기초자산에 대한 분석 업무를 해주다가 우연히(?) 시장에 참여하게 됐다. 정 팀장은 “우리 팀에 파이낸셜 어드바이져 기능이 있어서 ABS 발행에 관여하게 됐는데 지금은 주택은행에 이어 ABS 수탁 분야에서 국민은행과 함꼐 업계 2위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산은 금융공학팀의 ABS는 스왑, 옵션 등 파생상품 기법을 응용한 것이 많다. 기초자산이 변동금리인데 이를 고정금리로 바꾸거나 외화 자산을 원화표시로 발행하는 등 “기술”이 들어간 상품들이다. 정 팀장의 대략적인 설명이 끝났을 때 오후 3시 금리스왑(IRS) 거래도 끝이 났다. 거래를 막 끝내고 북(Book: 거래장부) 정리를 하고 있는 김선욱 차장과 이제희 대리에게 IRS 시장에 대한 보다 자세한 것을 물어봤다. (3편으로 이어집니다)
2001.10.09 I 정명수 기자
  • (정동희의 핫스팟)돈의 힘과 유동성 함정
  • [edaily] 약효가 떨어지고 있는『돈의 힘』 한국은행이 지난 주 역사상 처음으로 2차례 연속 콜 금리를 인하한 뒤, 『주식시장으로의 자금 유입 기대』가 여기저기서 제기되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低 금리효과를 막연하기 기대하기 이전에, 점검해야 될 요인들이 많이 잠복해 있다. 低 금리와 관계된「돈의 힘」이 가지는 한계를 주식시장 측면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Ⅰ.「금리와 주가의 반비례관계 법칙」은 무너졌다! 흔히들 경제학이나 재무관리 책에 보면,「금리와 주가의 반비례관계」에 대해 절대절명의 법칙처럼 서술되어 있다. 상식적으로도 금리가 올라가면 은행예금으로 돈이 더 몰릴 것 같고, 금리가 내려가면 주식시장으로 돈이 더 몰릴 것 같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상식 속에「탁상공론의 함정」을 발견하게 된다. 【그림 1 : 99년 이후 종합주가지수와 회사채 수익률 간의 비교 차트】 즉【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99년 이후 종합주가지수와 금리 간의 상관관계가「逆의 상관관계」가 아니라 오히려「正의 상관관계」를 보인다는 사실을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이다. 실제로 99년 이후 종합주가지수와 3년 만기 AA-회사채수익률의 상관관계를 구하면 69.2%로 상당히 높은 正의 상관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2. 과연「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을 자신 있게 배격할 수 있는가? 금리가 떨어지면 일반적으로 소비나 투자를 늘리게 마련이나, 금리가 너무 떨어지면 오히려 가까운 미래에 금리가 올라갈 것으로 예상, 채권을 매입하지 않고 현금을 보유하려는 성향이 높아지는 현상을 소위『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이라고 일컫는다.이러한「유동성 함정」의 엄격한 정의를 주식시장 측면에서 풀이한다면, 「금리는 내려가는데 주가는 안 오르는 현상」으로 비유할 수 있겠다. 결론부터 말하면, 주식시장 측면에서는「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현상을 자신 있게 배격할 수 있는 상황증거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실제로 99년 이후 금리와 주가의 正비례관계를 예를 들지 않더라도, 지난 7월 금통위에서 많은 논란 끝에 콜 금리 인하를 실제적으로 단행한 소식이 알려진 후 주식시장은 오히려 하락했고 고객예탁금은 오히려 감소했다. 실물경제 측면을 떠나 주식시장 측면에서는 이번 8월 콜금리 인하의 적절성과 실효성에 대해 의구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低 금리 기조로 인해 오히려 아파트 전세 찾기가 어려워지면서 월세가 넘쳐 나면서 低 금리현상이 부동산 시장 과열의 주 원인으로 실제로 작용하고 있는 상황에서, 低 금리 기조로 수혜를 입은 주체는 과연 누구인가?”하는 의문점이 생긴다. 즉, 실질적으로 低 금리로 수혜를 받는 주체는 일반 서민이 아니라,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어야 할 한계기업의 구조조정만 연기시켜 놓은 결과만 초래한 것은 아닐까? 주식시장에 참여하는 투자자 입장에서는 低 금리에 따른 괜한 강박관념으로 자신도 모르게 위험선호 경향만 높이는 가운데, 펀더멘탈의 심각한 고민 없이『돈의 힘』을 어느새 추종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되지 않을까? 세계적인 금융완화 기조 연장선 上에서 우리나라도 경기부양을 위한 콜금리 인하조치가 단행되고 있지만, ⓐ 작년 11월 이후 지속되는 설비투자 감소세, ⓒ 현실화되지 않는 주식시장 주변의 유동성 개선 등을 감안하여 실질금리가 이미「통화정책의 효과를 제한할 수 있는 한계금리 수준」에 가까워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는 접근이 향후 투자전략 측면에서는 오히려 유리할 것 같다. 3.『돈의 힘』을 과신했다가 고생하고 있는 중국 주식시장 중국의 주식시장은 작년 전세계적으로 주식시장이 혹독한 시련을 겪을 때에도 견고한 흐름을 보였고 특히 올해 연초에는 폭발적인 상승세를 보였다. 중국정부가 상하이와 선진의 B주식들에 대해 내국인 거래를 허용한 이후 중국 일반인의 자금과 타이완 자금의 돈이 물밀듯이 들어와, 중국 주식시장은 그야말로 초 강세를 보였다. 그러나 전세계적인 경기 침체현상 속에서도 중국은 탄탄한 내수시장을 기반으로 2분기에도 7.9% GDP 성장률을 보여 주었고 WTO가입 및 올림픽 유치 등 대형 호재가 나타나는 와중에, 화려했던 중국의 상하이와 선진의 B주식은 두 달 반 만에 50% 폭락하는 버블 붕괴현상을 겪고 있다. 이를 통해 돈의 힘으로 시세를 만드는 한계와 그 후유증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겠다. 【그림 2 : 작년 이후 중국 상하이B주와 선진B주의 주가 등락 추이】 4. 『돈의 힘』으로 변동성을 줄였으나 그 약효가 한계에 오고 있는 나스닥시장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최근 나스닥시장 변동성이 올해 들어 가장 안정적인 흐름을 두 달여 동안 보여왔다. 그러나 변동성이 축소되는 와중에서도 고점과 저점이 낮아지는「전형적인 하락 채널型」을 보여왔다는 점에 주목해야겠다. 특히 변동성의 축소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심리적 지지선인 2,000Pt선을 다시 하향 이탈하여, 향후 2,000Pt선이 의외로 강한 저항선으로 반전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즉, 일시적으로 2,000Pt선을 회복할 수는 있어도, 기조적으로는 다시 한번 저점을 확인하는 쪽으로 변동성이 확대될 가능성이 많다고 전망할 수 밖에 없겠다. 【그림 3 : 올해 이후 나스닥지수 일봉 차트 上 변화 추이】 5. 「펀더멘탈」이 아니라『돈의 힘』으로 버텨 가고 있는 주가 그러나『돈의 힘』으로 해결 안 될 수 있는 것은 ① 자식 교육 ② 골프 ③ 주식이다 향후 주식시장의 방향성에 대한 질문에 가장 직접적이고 속 시원하게 답해보라고 누가 묻는다면, “「펀더멘탈」이 아니라,『돈의 힘』으로 버텨 가고 있는 주가”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겠다. 【그림 4 : 종합주가지수와 태평양 주가의 비교 환산 차트】 그림【종합주가지수와 태평양 주가의 비교 환산 차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돈의 힘에 의존한 시세 형성은 이미 現 주가에 이미 반영되어 있고, 지금부터는『低 금리와 성급한 경제 회복 기대감들이 부추긴 자금 유입을 정당화시키기에는 역부족인 펀드멘탈 상황』을 더 고민해야 될 시점이라고 생각된다. 태평양은 올 상반기에 영업이익 측면에서 전년동기 비해 32% 가량 증가했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는 연초 대비 한 때 3배 가량 급등한 주가 흐름을 정당화하기에는 역 부족해 보이며, 그 이면에는 바로 수급측면에서「돈의 힘」이 너무 과다하게 반영했다는 메커니즘이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지난 주 한국은행의 콜 금리 인하 이후『주식시장으로의 자금 유입 기대』가 여기저기서 제기되고 있음. 그러나 『돈의 힘』으로 해결 안 될 수 있는 것을 세 개 꼽으라면, ① 자식 교육 ② 골프 ③ 주식을 꼽을 수 있지 않나 생각됨. 공부에 소질이 없는 자식에게 소위「고액 과외」를 무제한적으로 해준다 해도 천성이 바뀌는 것은 아니고, 운동에 소질이 없는 사람에게「박세리나 소렌스탐」에게 직접 배운다고 해서 더블보기가 근본적으로 줄어드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세계 경기 침체 현상이 당초 예상과 달리 심각한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고 수출 채산성이나 규모 측면에서 2년 연속 악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低 금리로 인한「돈의 힘」에 대한 의존도는 날로 더 커지고 있는 것이 우리 주식시장의 현 주소다. 펀더멘탈이 약해지고 있는 우리 주식시장에게 소위「돈의 힘」으로 밀어붙인다 해도 펀더멘탈이 개선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자식교육과 골프 사례를 통해 생각해봐야 되지 않을까? 6.『장고(長考) 끝에 악수(惡手) 나온다!』 종합주가지수가 550Pt선 이상에서 성급하게 매수에 참여할 수 있는 시점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판단 근거의 가장 큰 이유는 다음과 같은 요인들로 인해『이번 장세가 지난 7월 하락 장세와는 성격 자체가 많이 틀릴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첫째, 7월과 달리『미국 기업실적의 정체 지속기간』이 연장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최근 Firstcall/Thomson Financial이 S&P 500 지수 기업의 올해 4분기 실적을 당초 전망한 12.6% 증가세에서 대폭 하향 조정해 3분기와 같은 정체 수준으로 입장을 번복했다. 둘째, 7월과 달리『D램의 약세 지속기간』이 상당기간 연장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인텔의 CPU가격인하가 자칫 하이닉스·NEC 등의 감산 효과를 제한하면서 실제로 신학기가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D램 경기가 예상 밖으로 썰렁할 수 있는 위험이 잠복 되어 있는데다, 일부 (영향력 있는) 외국계 반도체 애널리스트의 경우 최근 반도체산업의 설비투자가 내년에도 추가로 감소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는 실정이다. 셋째, 경기불황을 타파하기 위한 정부정책 변수와 관련하여 통화정책과 재정정책 효과를 각각 제한할 수 있는「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과 구축효과(Crowding Out Effect) 가능성」을, 한계금리 수준 근접 가능성과 부동산시장 과열 등으로 인해,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요인들을 감안할 때, 당분간 성급하게 저점 매수에 참여하는 접근보다는 짧은 반등이라도 최대한 이용하여 현금비중을 확보하여,「혹시 있을지 모를 어려운 시기를 준비하는 전략」이 절실하게 필요해 보인다.특히 시장 참여자들의 매매동향을 유심히 살펴보면,「방향성 진행 여부를 확인하고 매매하려는 심리」가 강한 느낌이다. 그러나 주식시장의 메커니즘은 항상 냉혹하여, 많은 사람들이 방향성 진행에 대해 확신이 생길 때쯤에는 이미 급하게 상승하기 시작했거나 툭툭 하락하기 시작하고 난 뒤가 되기 쉬움. 특히 최근 모멘텀 플레이(Momentum Play)式 시장흐름이 만연하고 있어, 너무 장고(長考)하다 보면 악수(惡手)가 나올 수 있다. 결론적으로 현 상황은 ”「펀더멘탈」이 아니라『돈의 힘』으로 버텨 가고 있는 주가”로 요약되는데, 『돈』으로 많은 것을 살 수 있어도『취약해지고 있는 펀더멘탈 자체』를 살 수는 없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겠다.
2001.08.13 I 정동희 기자
  • 아르헨 바이어 "상품 수입 줄일 것"-현지 무역관 긴급 설문
  • [edaily] 아르헨티나 경제위기와 관련, 현지 바이어들은 신규 비즈니스 추진을 유보하는 가운데 한국 상품의 수입도 상당 부분 줄어들게 될 것이란 의견을 보였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는 아르헨티나 경제위기와 관련해 지난 16일부터 17일까지 현재 19개 수입업체들을 대상으로 긴급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설문조사 내용을 소개한다. ◇설문결과 주요내용 1. 경제위기 관련 경제위기 발생원인을 묻는 질문에 정치불안정에 기인한다는 응답이 11개사로 전체 응답자의 57.9%를 차지하였으며, 뒤를 이어 미숙한 경제정책운용과 부정부패가 각각 15.8%, 대통령의 리더쉽부족 및 국내경제침체가 5.2%를 차지하였다. 경제위기 해결방안을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초긴축재정책을 추진해야한다가 6개사로 35.2%를 차지하였으며, 뒤를 이어 재정지출확대에 의한 경제활성화가 23.5%, 여야간 정치단결이 17.6%, 차관도입, 소비확대/탈세방지/세수증대, 정권교체, 국민의 애국심 발휘가 각각 5.8%를 차지하였다. 경제위기 해결시기를 묻는 질문에는 전체 응답자의 35.2%가 6개월이내라고 응답해 경제위기가 하루속히 해결되기를 희망하는 비즈니스맨으로서의 희망사항을 표명한 것으로 보이며, 다음으로 6개월-1년이내와 1-3년이내, 3-5년이내가 각각 17.6%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2개사가 10년이상 걸릴 것이라고 응답해 아르헨티나의 경제문제의 심각성이 매우 깊다는 점을 대변해 준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위기관련 마지막 질문인 디폴트 선언 가능성에 대해서는 19개 응답업체중 13개사가 디폴트는 절대 안할 것이다라고 응답하였으며 나머지 6개사는 필요시 디폴트의 가능성도 있다고 응답함으로써, 디폴트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가 훨씬 높게 나타났다. 2. 내수경기관련 현정부 경제정책의 경기회복 기여여부를 묻는 질문에 대해 42.1%가 약간 기여, 31.6%는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응답해 총 73.7%가 현정부의 경제정책이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응답하였다. 상기 질문과 유사한 현정부 경제정책에 대한 신뢰도를 묻는 항목에 대해서도 57.9%가 보통 불신, 26.3%가 보통 신뢰, 15.8%가 매우 불신한다고 응답해 긍정적인 답변이 약간 우세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대비 올 상반기 판매율(영업실적)을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47.4%가 10-30% 감소하였다고 응답하였으며, 전년과 비슷하다와 50%이상 감소했다가 각각 15.8%를 차지해 전체적으로 경기침체에 따라 판매율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대비 올해 제품판매가격 변동을 묻는 질문에 42.1%가 10%미만 감소했다고 밝혔으며 26.3%가 10-30% 감소하였다고 밝힌 반면 10%미만 증가했다고 응답한 업체는 10.5%에 불과해 경기침체에 따라 제품가격도 전반적으로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침체 및 경제위기에 따른 전체적인 판매율 감소영향을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전체 응답자의 38.2%가 20-40%미만 감소할 것이라고 응답하였으며, 40-60%미만 감소와 60%이상 감소할 것이라고 응답한 업체가 각각 26.5%를 차지하여 지속되어온 경제침체에다 이번의 경제위기가 비즈니스에 있어 상당한 악재로 작용할 것으로 전망하였다. 내수경기관련 마지막 질문인 내수경기 회복시기를 묻는 질문에는 올해내가 42.1%, 2003년이후가 36.8%, 2002년중이 21.1%라고 응답해 현 경제위기와 함께 경제침체도 금년내에 해소되기를 희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수입관련 전년대비 올 상반기 수입실적을 묻는 질문에 47.3%가 전년수준이었다고 응답하였으며 50%이상 감소하였다는 응답이 26.3%, 10-30%감소하였다는 답변이 15.8%인 것으로 나타나 업체별 취급품목에 따라 상당한 편차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년대비 올해 수입가격 변동을 묻는 질문에 대해서도 55.5%가 전년과 동일하다고 응답하였으며, 27.8%가 10%미만 감소하였다고 응답함에 따라, 판매가격이 감소하였다는 응답비율이 73%인 점을 고려하면 결국 수입업체의 유통마진폭이 감소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금번 경제위기로 수입변동 전망을 묻는 질문에는 26.3%가 10-30% 감소할 것으로 응답하였으며, 21%가 50%이상 감소할 것으로, 전년수준과 10%미만 증가로 응답한 비율이 각각 15.8%로 나타나, 경제위기에 따른 금리인상 및 평가절하 가능성과 구매자들의 소비심리 위축 등으로 인해 수입이 감소할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경기침체 및 경제위기에 따른 수입감소율 전망을 묻는 질문에 대해 57%의 응답자가 20%미만 감소할 것이라고 응답하였으며, 25.7%의 응답자가 20-30%미만 감소할 것으로, 17.1%의 응답자가 30%이상 감소할 것으로 예상해 역시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지만 감소폭이 제품판매율에 비해 적어, 역시 마진 축소를 어느정도 염두해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년대비 올 상반기 대한국 수입실적을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52.9%의 응답자가 전년수준으로 수입하였다고 밝혔으며 35.2%가 10-50%감소한 것으로 응답해 국내경제침체에 따른 판매율 감소에 비해서는 감소폭이 다소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전년대비 올해 대한국 수입가격변동에 대한 질문에서도 전년 수준이라고 응답한 비율이 57%였으며 10%미만 감소하였다고 응답한 비율도 23.8%로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금번 경제위기로 대한국 수입변동 전망을 묻는 질문에 대해 전년수준이 될 것이라고 응답한 비율과 30%이상 감소할 것이라고 응답한 비율이 공히 37.5%를 차지하였으며, 이외에 10%미만 감소가 18.7%, 10%미만 증가가 6.2%로 나타나, 전반적으로 이번 경제위기의 여파로 한국으로부터의 수입도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바이어별 반응 1. H사 (H자동차 판매) 아르헨티나 경제위기와 관련 현재상황에 대해 당장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사실 현지자동차판매업체가 판매율이 49%하락한데 비해 현대자동차는 올해 상반기 판매율이 작년동기에 비해 8%의 하락율에 그쳤다. 우선적으로 정부에서 발표한 경제계획이 또 다른 변화없이 좋은 방향으로 나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사실 우리 회사는 올해에도 건물을 3개 구입하는 투자를 계속하고 있으며 큰 문제는 갖고있지 않다. 매월 400대에서 500대를 구매하였었으나 판매감소에 따라 주문을 줄여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2. W사 (낚시용품/캠핑용품) 99년부터 시작된 경기침체에도 불구, 그다지 큰 영향을 받지 않는 품목이 낚시, 캠핑용품이었으나 전년에 비해 올해 상반기 판매는 26∼30%하락, 2백만달러정도 판매가 감소하였다. 7월, 8월에는 일반적으로 판매가 감소하는 기간이긴 하지만 금년에는 정도가 조금 심하다고 할수 있는데 약 60% 하락하였다. 올해 연말까지 두고봐야 될 것 같은데, 년초에는 6월까지만 두고 보려고 하였으나 12월까지 회복세를 보이지 못할 것 같다. 한국과의 거래에는 문제가 전혀 없으며 이미 주문한 제품은 계속 수입할 예정이다. 한국업체들에게 L/C거래는 하지 말도록 당부하고 싶다. 3. CJ사(자동차부품) 한국과 오래전부터 거래하고 있으며 외상거래를 절대 안하고 있다. 이번 경제위기는 일시적이다. 이미 한국에 주문해놓은 부품이 있다. 자동차부품은 현지에서 계속적인 수요가 있으므로 큰 영향은 미치지 않으나 현지 업체들의 판매율이 저조함에 따라 대금결제일을 지키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12월 이전에는 경기가 호전될 것으로 본다. 4. HTA사(광학제품) 이번 경제위기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본다. 이번 기회를 이용해 오히려 광고와 업체소개를 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빠른시일안에 현재상황이 해결될 것으로 믿고 싶다. 국민의 지지율이 높지 않은 정부의 능력이 한계와 온 것 같다. 한국으로부터 수입한 광학제품이 현지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어 제품의 종류를 늘리면서 어려운 시기에 제품의 인지도를 높일 마케팅 계획을 가지고 있다. 5. I사(섬유직물) 현재 당장 뭐라고 말할 수 없으며 어떤 결정도 내리기 힘든 상황이다. 사실 이같은 경제위기는 과거에도 있었으며 계속 헤쳐나왔으므로 큰 문제를 없을 것으로 본다. 올해 상반기 판매율은 지난해에 비해 15∼20% 하락하였다. 아르헨티나내에서 한국제품과 같은 품질좋은 폴리에스터 직물을 생산하기 어려우므로 어쩔수 없이 수입에 의존하게 된다. 사실 현재 보유하고 있는 공장을 판매하고 싶은 의사가 있으며 수입만을 전문으로 할 계획이다. 현지상황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나 올해안에 회복될 것으로 본다. 6. M사(건축자재) 최근 2년간 2천4백만달러의 매출액을 유지해오다가 올해 판매율이 15∼20%하락한 상태이다. 영향을 안받는 업체가 없다고 말할 정도로 경기침체가 심한 편이다. 이번 위기는 일시적인 것으로 보고 싶으며 올해안에 경제가 안정될 것으로 예상(희망)한다. 7. T사(디젤엔진) 판매부진과 수금문제로 재정상의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본다. 또한 아르헨티나의 기업은 은행들의 장난에 익숙해 있고 위기로 인해 국가가 부도나는 일은 단기간에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개인적인 걱정은 수입한 제품을 못 파는 일보다, 딸을 가진 아버지로서 고실업율로 인한 범죄율 상승이 우려된다. 8. TR사(냉온수기 부분품) 국내소비위축으로 사업에는 지장이 있으나 이번 위기는 국채를 사고파는 은행의 장난일 뿐, 시장이 달러화 되어 있어 평가절하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본다. 실업율이 높아지고 은행이자가 높아지므로 기업에 많은 지장이 있지만 더 큰 걱정은 앞으로 정부가 소비를 여하히 부양할지 의문이 가며, 리더쉽이 없는 현정부가 외국투자가와의 약속을 여하히 준수할른지 의문이다. 9. D사(보안시스템) 금년도 수입액은 지난해에 비해 낮아질 것이며 한국산 제품은 가격면에서 시장성은 있으나 수입물량은 지난해에 비해 분명히 감소할 것으로 생각된다 10. B사(자동차) 내수침체로 인해 수입물량이 감소하고 있는 상황이며, 한국산 제품가격은 경쟁력이 떨어지지는 않으나 내수침체의 영향에 따라 마찬가지로 타격을 받을 것으로 생각된다 11. BR사(캠핑/낚시용품) 금년들어 수입물량이 적은 상황이며, 한국업체의 경우 외상거래를 하지 않아 타국제품을 수입중에 있다 12. F사(저울) 경제상황이 매우 심각한 상황으로 생각되어 정부의 적절한 경제조치를 기대하고 있는 중이며 금년도 및 내년도 수입은 각각 20%수준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13. DI사(유아용품) 현재 시장활동이 거의 정체된 상황이며 정부 정책이 정상화될 때까지 자금대출이 거의 정지되다시피한 상황으로서 내수활동이 회복되지 않는 한 수입 또한 감소할 것이다 ※ 상기 바이어들은 공통적으로 은행이자율의 추이를 살펴보며 수입여부를 그때 그때 판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2001.07.18 I 이훈 기자
  •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⑮지동현 조흥은행 상무(중)
  • [edaily] 이번주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의 주인공은 조흥은행의 지동현 상무 입니다. (인터뷰 상편에서 이어짐) <’은행장이 꿈’..실제 은행경영에 참여해 보고 싶었다> -조흥은행으로 옮기신 건 언제입니까. ▲99년에 조흥은행 사외이사가 됐습니다. 마침 금융연구원에서 안식년을 맞이한 때라 출근하는 사외이사직을 맡았죠. 위성복 행장께서 제게 요청하신 분야가 있었거든요. 당시 조흥은행이 DR발행과 사업부제로 조직개편을 준비하던 때라 조언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외이사가 된 특별한 계기라도 있었나요. 사외이사에서 조흥은행 상무로 변신하게 된 이유도 궁금합니다. ▲뭐 정확한 것은 저도 잘 모르지만 누군가 저를 사외이사로 추천했고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의가 왔습니다. 사실 당시 제일은행에서도 똑같은 요청을 받았었는데 그곳보다는 조흥이 낫겠다 싶어서 온 겁니다. 조흥은행으로 직장을 옮긴 이유는 음...어쨌든 사외이사는 primary job이 아닌 second job이잖아요. 아주 예전부터 은행장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는데 위 행장께서 "실제 경영진으로서 같이 한번 일해보자"고 제안하셨습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어요. -위 행장을 처음 만나신 건 언제인가요. ▲93년 금융연구원에서 조흥은행 컨설팅을 해줬어요. 그때 처음 만났습니다. -현재 맡고있는 업무는 스스로 선택한 것입니까 아니면 위 행장께서 지시한 사안입니까. ▲2월에 입행했으니까 이제 다섯달이 다 돼가는군요. 제의를 받은 것은 작년 연말이었는데 "어떤 자리를 줄테니 와라" 이런 말씀은 전혀 안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이런 자리 주십시오 하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상무 취임하는 첫 날 제 부서를 알았습니다. 위 행장께서도 많은 고민을 하셨을 겁니다. 제가 온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내보내야 한다는 뜻인데 누구를 내보내야 하나, 또 저에게는 어떤 일을 맡겨야 하나...여러 가지 문제가 얽혀있으니까요. 제가 담당하는 부서가 소위 말하는 profit center(수익창출부서) 아닙니까. 이 일을 맡기실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영업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고 후선에서 연구조사만 해 왔으니 걱정도 많이 하셨겠죠. 그런데 제게 profit center를 맡겨주시니 우선은 놀라웠고 그 배려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연구원 생활만 10년 넘게 했는데 은행에 와서도 비슷한 일을 한다면 제가 왜 직장을 옮기겠습니까. 변신을 하려면 확실히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위 행장께서는 risk taking을 하신거고, 운이 좋아서 그랬지만 아직까지 제가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으니 천만다행이죠 뭐.(웃음) 우리 은행의 채권부문이 타 은행보다 성적이 좋은 것은 사실이니까요. 조흥은행에 5개 본부가 있는데 우리 본부가 올해 달성해야할 이익목표가 1750억원 입니다. 진도율이 가장 앞서나가고 있습니다. 채권쪽에서 잘한 것이 크게 작용했죠. <취임하자마자 “채권투자 규모 2조5000억원을 3000억원으로 줄입시다” 설득> 제가 취임한 날이 2월 16일 목요일이었습니다. 첫 주에는 인사다니고 정신없이 보냈는데 그 다음주 목요일, 금요일에 채권수익률이 30bp이상이 오르더니 이틀 사이에 700억원이 날라갔어요. 아찔했죠. 우리 트레이더들을 불러모아 긴급회의에 들어갔습니다. 우선 듀레이션이 얼마냐고 물었더니 4년 정도라고 대답하더군요. 채권부문 총 자산이 2조5000억원인데 금리가 1%가 움직이면 1000억이 왔다갔다 하는거 아닙니까. 저는 그당시만해도 금리가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요. 700억원을 이틀만에 까먹고 200억 정도 남았는데 1000억을 손해보면 사실상 만회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헤지가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국채선물 매도에 들어가자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트레이더들이 "우리 물량이 너무 많아서 매도를 왠만큼 해서는 헤지가 안된다"고 말하더군요. 그럼 팔라고 했더니 파는 건 더 안된대요.(웃음) "우리가 국채선물 시장의 큰 손인데 팔아대기 시작하면 더 떨어집니다. 왜 자기 발등을 도끼로 찍습니까"라고 말하는데 난감했죠. 당시만해도 국채선물 시장규모가 그렇게 작은 줄도 몰랐었고 헤지는 안된다고 하니 답답하기가 이루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 어떡하냐고 물어봤더니 방법이 없다고 대답하더군요. 하하. "세상에 방법이 없다는 게 말이 되냐. 시장가격에 영향을 주지 않는 범위내에서 조금씩 팔아치워라"고 말하니까 트레이더들이 무척 싫어하는 눈치에요. 잘 아시겠지만 트레이더들은 누가 팔아라 사라 지시하는 걸 무척 싫어하죠. 물론 저라도 그럴 겁니다. 하지만 그걸 이해하고 넘어갈 상황이 아니었어요. 말도 안하고 뚱한 기색이 역력하길래 제가 한 마디 했습니다. "우리 본부의 손익을 책임지는 사람이 누구냐" 고 말이죠. 저라고 대답해요. "그럼 난 뭘 해야되냐"고 되물으면서 "최소한 포지션을 정할 수 있는 권한은 나한테 있는거 아니냐"고 밀어부쳤습니다. "나는 3000억 이내로 줄일테니까 무슨 일이 있더라고 그 범위에 맞추라"고 세게 나갔어요. -2조5000억원을 3000억원으로 말입니까. 하하. 갈등이 많았겠군요. ▲물론입니다. 없을 수가 없죠. 그러나 저희 본부가 원화채권 분야에서 이익을 내야하는 최소단위가 1050억인데 이걸 맞추려면 반드시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트레이더들을 설득했어요. "사고 싶을 때 나에게 근거제시만 합리적으로 해라. 그 때는 한도를 왕창 늘려주겠다. 일년 내내 똑같은 포지션을 들고가야할 이유가 도대체 뭐냐. 상황에 따라 줄이거나 늘릴 수는 있는 거 아니냐. 전체규모는 내가 정할테니까 그 한도 안에서는 뭐든 하고싶은 대로 해도 좋다" 고 말했습니다. 사실 이것이 역할분담인데 납득시키는 것은 엄청 어렵더군요. 트레이더들은 1년에 1번 포지션을 정하면 고수해야된다고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당시 상품계정에 2조를 배정해줬어요. 2조는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들에게 어디서 개뼉다귀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3000억으로 줄이라니 그 사람들도 황당했겠죠.(웃음) -하하. 설득비법은 뭡니까. ▲2주 동안 사정도 하고 야단도 치고, 빌기도 하고 윽박지르기도 하고 하여간 난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위 행장께서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으셨는지 제게 "트레이더들을 너무 한 쪽으로 몰고 가지 마라. 방향 설정만 해주면 된다"고 세번이나 말씀하시는 겁니다. "아무리 지 박사가 이론이 강하다고 해도 실무경험은 없지 않느냐. 동물적 감각으로 이 세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인데 너무 윽박지르면 안 된다"고 말이죠. 그래서 당초 의도했던 것 만큼 못 줄였어요.(웃음) 1조6000억원 정도만 팔았습니다. 채권수익률이 올라가다가 다시 떨어지니까 그렇게 큰 규모로 안 줄여도 될 것 같았어요. 그 다음에는 알아서 하라고 자율권을 줬습니다. <5월에 채권을 사야했던 3가지 이유> -돈은 언제 버셨나요. ▲규모를 줄이고 나서 4월까지 두 달 동안은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돈을 벌 수가 없죠. 5월에 많이 벌었습니다. 전 정말 우리 트레이더들을 업고 다니고 싶어요. 얼마전 손을 털고 나오면서 우리 은행은 매매이익을 실현했고 다른 곳에서는 오히려 평가이익을 까먹었으니까요. 현재 저희는 기회가 오면 다시 지를 수 있는 충분한 힘을 비축했습니다. 매달 말이 되면 다음달 운용전략에 대해 미팅을 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금리가 7%에 진입하면 왕창 실으려고 했는데 7%에 못 가서 기회를 놓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5월 미팅을 하는데 트레이더들이 중순쯤에 3000억원 어치를 다 샀다고 말하는 거에요. 왜 샀냐고 물어보니 지금이 사야할 때라면서 포지션을 1조5000억원까지 늘려달래요. 이유를 설명해보라고 말했더니 이런 대답이 나왔습니다. 첫째, 물가불안 위험요인은 거의 다 사라졌다. 둘째, 경기회복이 된다고는 하지만 미, 일, 유럽쪽 상황이 너무 안좋기 때문에 경기회복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릴 거다. 셋째, 은행들의 현재 퍼포먼스가 상당히 나쁜데 6월 반기결산을 맞추려면 어떻든 시장에 다시 들어올 수 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들어보니 다 맞는 얘기 아닙니까. 그래서 한 마디했죠. "질러라" 5월말 1주일동안에 1조5000억원을 다 채웠습니다. 이 부분은 전적으로 우리 트레이더들의 공이에요. 저는 이유를 듣고 허락만 했을 뿐이죠. -걱정은 안 했습니까. ▲걱정 많이했죠. 잠도 안와요. 까딱 잘못하면 그동안 벌어놓은 것도 다 날릴 판인데 태연할 수가 없죠. 포지션을 늘린 다음 위 행장께 "이러저러해서 늘려습니다"고 보고하니 이번에는 아무말씀도 안하시더군요. 그동안 조금 믿음이 생기신 모양인지...하하. -현재 가지고 있는 포지션은 얼마나 됩니까. ▲2000억원 정도? 없어요. 6월 들어와서 이익실현하고 다 정리했습니다. 제가 와서 채권분야에 두 가지 큰 결정을 내렸는데 두 번째는 트레이더들이 전적으로 주장한 것입니다. 처음결정은 제가 했으니까 저와 우리 트레이더들은 비교적 궁합이 잘 맞는 것 같아요.(웃음) 직원들 덕분에 제 마음이 무척 편한 상태고 우리 트레이더들도 저 때문에 지를 수 있는 힘을 비축했으니까 서로서로 좋은 거죠. <” 전 정말 우리 트레이더들을 업고 다니고 싶어요.”> -2월에 금리가 4.98%까지 내려갔다가 급격한 상승반전을 이룬 적이 있죠? 그 때 전철환 한국은행 총재가 "국고채시장 과열"이라고 발언하신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지만 조흥은행도 한 몫을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예보채를 무자비하게 팔았던 걸로 아는데요. 그 때는 이미 이익을 실현한 후였죠? ▲그렇습니다. 마지막에 우리가 팔았다는 신호만 낸 겁니다. 사실 그 전부터 단계적으로 팔았는데 워낙 규모가 크다 보니 시장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 뿐이에요. 트레이더들에게 "살살 해라. 난 재경부에서 오는 전화받기 싫다"고 말했는데도 말이죠.(웃음) 사실 그때 저는 잘 몰랐어요. 그날 이데일리 김병수 기자가 "조흥은행이 3000억 던졌다는데 어떻게 된거냐"고 전화로 물어봐요. "난 모르는 일인데 알아보고 전화주겠다"고 우선 대답했습니다. 담당 트레이더 대답이 걸작입니다. "제가 팔고 싶어서 판 게 아닙니다. 한은 총재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영 시원찮고 더는 못들고 있겠습니다. 3000억원 한도는 지켰습니다. 그 안에서는 제 마음대로 합니다" 라고. 하하. -손발이 척척 맞았던 거군요. ▲우리 트레이더들은 지금도 금리가 6% 이하로 내려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저도 동의합니다. 제가 채권투자를 해 본적은 없지만 "무릎에서 사서 어깨에서 팔라"는 증시격언이 있죠? 그것이 채권투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해요. 다 먹으려는 건 욕심이니까요. "우리 너무 욕심부리지 말자. 나도 6% 깨진다고 생각하지만 거기까지 기다릴 거 뭐있냐. 지금 이익실현하고 나오자"고 말했습니다. -트레이더들은 매일매일 전투를 치르지만 지 상무께서는 1년간의 전쟁을 준비하시잖아요. 전략수립은 어떻게 합니까. ▲큰 흐름을 보려고 노력합니다. 그 흐름을 파악하려면 잔잔한 파동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니까 항상 주의깊게 시장을 관찰하죠. 시장이 열리는 동안에는 한시도 눈을 떼지 않습니다. 입사직후 채권시장에서 나름대로 이름났다고 하는 분들을 직접 찾아다녔습니다. "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 라고 말하고 많은 조언을 들었어요. <”첫째도 위험관리, 둘째도 위험관리”> -은행쪽 사람도 만났습니까. ▲은행 쪽은 못 만났고 투신이나 증권회사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하는 얘기는 다 똑같아요. 첫째도 위험관리, 둘째도 위험관리라고 하더군요.(웃음) 그럼 위험관리를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물었더니 한도관리만 해서는 안된다고 말합디다. 똑같이 1조를 운용해도 듀레이션이 1년이냐 5년이냐에 따라서 금액은 5배가 차이난다고 말이죠. 그래서 위험부담은 100억이내로 가져가겠다고 결심했습니다. -100억이라는 숫자는 어디서 나온 건가요. ▲제가 채권에서 내야할 수익이 1050억이니까 100억은 10%에 해당하죠. 이 정도는 깨져도 회복이 가능하지만 더 많이 깨지면 복구가 불가능합니다. 100억 정도 손실나면 정신차리고 원상복구에 달려들겠는데 몇 백억씩 깨지면 거기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제 나름의 "감" 이었습니다. -한도를 정할 때 "3년짜리 얼마, 5년짜리 얼마" 라는 식의 디테일한 개입도 하십니까. ▲네. 큰 덩어리는 정해주는 편입니다. 5월달에 사들일때는 5000억원은 장기물로, 1조는 2년 이내로 사라고 말해줬습니다. (인터뷰 하편으로 이어짐)
2001.06.22 I 정명수 기자
  •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⑪이동진 HSBC 부지점장(상)
  • [edaily] 우리나라 채권시장에 ‘딜링’이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97년 외환위기 이후다. 그 전까지 기관투자가들은 채권이 발행되면 적당한 수익률에 사서 만기까지 보유하는 것이 거의 유일한 투자전략이었다. 이번주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의 주인공인 HSBC의 이동진 부지점장은 80년대 중반부터 채권 딜링을 시도한 몇사람중 한명이다. 이 부지점장은 당시 용어조차 없었던 ‘데이트레이딩’이나 금리선물 투자까지 시도하면서 채권시장을 주도한 큰 손이다. 외국계 은행에 근무하면서 선진금융시장에서 활용되는 금융기법들을 한국 시장에 도입한 개척자인 셈이다. 채권시장의 많은 사람들은 93년 금융실명제 당시 채권수익률의 방향을 돌려놓는데 외국계 은행인 BTC의 역할이 컸다고 말한다. 바로 그때 이 부지점장이 BTC에서 채권딜링을 담당했다. 이 부지점장은 당시를 회고하며 스스로 “다소 과장됐다”고 말했지만 시장에 쇼크가 왔을 때 대처하는 원리로서 ‘역발상’을 실천했다는 점에서 후배 채권딜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부지점장이 원래 채권딜러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는 마케팅 분야에 흥미가 있었지만 ‘우연한 기회’에 BTC에 입사해서 13년이상 채권시장에 몸담게 됐다. 지금은 직접 딜링을 하기보다는 딜러들을 매니징하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시장에 대한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중요한 고비때마다 매매방향을 결정하고 있다. 채권시장 입문 초기에는 새로운 상품과 새로운 거래방법을 도입해 하나하나 실행해보는 것이 재미였다면 지금은 경험과 경륜으로 시장 방향을 예측해보는 즐거움이 있는 듯했다. 그는 채권딜러라는 직업이 시간을 다투며 수백억원짜리 채권을 사고 파는 긴장도가 높은 일이지만 여유를 잃지 않고 충실하게 임하는 것이 롱런하는 길이라고 충고한다. 그는 동로마사와 관련된 역사서를 번역할 만큼 역사학에 대해 아마추어 이상의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남들이 하지 않은 일들을 앞서 행하기 위해서 과거의 역사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한국 채권시장이 지금처럼 역동적으로 움직이기 이전부터 지금과 같은 시장을 꿈꾸고 먼저 행동했던 이 부지점장의 ‘채권인생’을 들어봤다.(약력은 인터뷰 기사 하단 참조) -79학번이시네요. 미시간에서 MBA를 하시구요.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하고 곧바로 서울대 경영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3월에 입학해서 2~3달 가량 다녔을까. 그리고 곧바로 미국으로 갔어요. 대학 4학년 때 시험을 보고 미국 여러 군데 대학에 입학신청을 했는데 허가서가 딱 한 통 날라왔습니다. 그곳이 바로 미시간이었죠.(웃음) 운이 좋았던 것이 그 무렵 처음으로 군 미필자가 유학을 갈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됐습니다. 83년에 가서 석사학위를 받고 85년 6월에 귀국했죠. <자동차와 마케팅의 꿈을 접고, BTC에 입사> -귀국해서는 무슨 일을 하셨나요? ▲귀국 후 바로 BTC(Bankers Trust Company) 서울지점에 입사했습니다. 사실 저랑 MBA를 같이했던 친구들은 대부분 박사과정을 밟았어요. 저는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마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미국 현지에서 취업하려고 인터뷰도 하고 그랬습니다. 제가 자동차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자동차 회사도 면접을 봤고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만한 회사들을 알아봤죠. 하지만 군대문제 등이 겹쳐서 그런지 잘 안 됐습니다. 그래서 일단 귀국했죠. 돌아와서 몇 군데 원서를 냈는데 모 대기업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당시 그 기업의 이사께서 “이 친구 일하도록 해”라고 말씀까지 하셨는데도 정식 공채기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연락이 늦어지더라구요. 그 때 제가 원서를 넣은 외국계 은행 중 BTC에서 연락이 왔어요. 저를 한 번 보더니 흔쾌히 “좋다. 내일부터 같이 일해보자”고 하더군요. 사실 저는 은행에서 일할 마음은 별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베개를 같이 쓰고 있는 사람과 그 당시 한참 연애중이었어요. 돈도 많이 필요했던 때라 오라는 곳을 망설일만한 여유가 없었죠.(웃음) 그래서 출근했습니다. BTC에서 몇 달 근무하고 6개월짜리 석사장교로 군 복무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군 복무 시절 저를 물먹인 대기업에서 연락이 왔어요. 내부사정이 이러저러해서 연락이 늦었다고. 그래서 제가 그랬죠. “이제와서 연락을 주다니 너무한 것 아니냐. 일단 군대를 마치고나서 얘기해보자” 이상하게 대기업은 의사결정속도가 상당히 늦더라구요. 제가 “나는 MBA이기 때문에 이러저러한 대우를 해달라”고 한 것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그당시 저는 마케팅에 관심이 많았어요. 보통 MBA 코스를 이수하면 파이낸스와 관련된 공부를 많이 하는데 저는 학창시절부터 마케팅과목을 많이 들었습니다. 미국 사람들의 생활을 직접 겪어보려고 일부러 외국인 친구들와 어울리고 접시도 닦았습니다. 사실 군 복무를 마치고 BTC로 복귀하고 나서도 한두 군데 정도 면접을 더 봤습니다. 하지만 곧 결혼을 앞둔 상태였고 외국계 은행의 보수가 낮은 편도 아니라 직장을 옮긴다는 것이 쉽지 않더군요. 그러다보니 13년 넘게 근무하게 됐습니다. BTC에서 맨 처음 기업금융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자금부를 새로 개편하면서 팀이 만들어졌고 그 때 새 팀장으로 오신 분이 현 JP모건-체이스의 CEO이신 홍기명 대표입니다. 그 분께서 같이 일해보자고 말씀하셔서 외환, 채권 딜러로 일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외국계은행은 이동이 잦습니다. 제 윗분들이 여러 곳으로 움직이시면서 빨리 책임업무를 맡게 된 겁니다. -BTC를 첫 직장으로 잡은 건 원래 계획과는 다른 일이었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습니다. <채권시장에 입문하다> -자금부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맨 처음 제 보스는 강정원 현 서울은행장이셨어요. 그 분 도와드리는 일을 했죠. 그 외 크레딧 분석 같은 일도 했구요. 창피한 말이지만 적어도 은행에 다닌다면 대출관계, L/C, 예금, 환전을 어느 수준이상으로는 할 줄 알아야합니다. 그러나 저는 입행 후 곧바로 자금부에 들어왔고 딜링업무만 계속해서 그런 것을 잘 모릅니다. 친구나 친척들이 사업한다고 L/C가 뭐냐고 물어도 제대로 대답도 못해줬죠.(웃음) 개인적으로는 베팅을 좋아한다거나 노름에 관심있는 편은 아닌데 십년 넘게 딜링을 하게 된 것이 참 묘하다고 생각해요. -본격적으로 “채권만 한다”고 생각하신 건 언제인가요. ▲입사 초기에야 누구나 그렇듯 분야에 관계없이 업무보조를 많이했죠. 외국계은행이라고 해서 채권은 채권만 외환은 외환만 하는 분위기는 아니니까요. 제 기억으로는 88년 초 제 사수가 BTC를 그만뒀습니다. 그 후부터 제가 전담해서 업무를 추진했으니까 88년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MBA를 마치고 외국계 은행에 입사하는 것이 당시 일반적인 일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동기들 중 대부분은 학교에 남았죠. 공부를 계속하지 않은 친구들은 증권사로 가기 시작하더군요. 85년 무렵이 증권사의 태동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많은 수는 아니었습니다. 제가 대학교다니던 시절에는 학교에서 주식이 뭔지 채권이 뭔지 가르쳐주는 분위기가 아니었으니까요. 아마 외국계 은행도 제가 처음일 겁니다. -학부전공이 경제학이신데 전공결정은 어떻게 하신 겁니까? 다른 전공에는 관심이 없으셨나요? ▲허허. 그러면 또 지나간 얘기가 나와야하는데. 당시 학제는 지금과 많이 달랐습니다. 문과생의 경우 법대, 경영대, 인문대, 사회과학대 등등의 단과대를 선택하는 거에요. 사회과학대로 입학했더니 그 안에 십여 개 정도의 전공과목이 있더군요. 정치, 외교, 사회, 신문 등등. 솔직히 경제에 관심이 있어서 간 건 아닌데 같이 입학한 고등학교 친구들이 경제학과를 많이 선택했습니다. 제일 좋은 과라고 하더군요.(웃음) -중동고를 졸업하셨군요. 당시에도 주먹으로 유명하던 시기였습니까. ▲저희 때는 아직 강남으로 이사가기 전이었이었습니다. 당연히 유명했죠. 하하. 선배들 얘기 들어보면 뭐 더 엄청나더군요. -그럼 ‘싸움’에도 자신이 있으시겠군요. 모범생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학업성적과 상관없이 “하고싶은 일은 한다”는 생각을 하신 듯 한데요. ▲싸움요? 전혀 아닙니다. 하하. 보면 아시겠지만.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랑만 어울리지는 않았고요. 물론 고3 때는 공부에 파묻혀 있었지만 얌전한 모범생은 아니었습니다. 한달내내 열심히 공부해서 시험보는 스타일은 아니었죠. 고2 때까지는 성적에 그다지 많이 신경쓰지 않았어요. <”채권딜링”이라는 새로운 거래기법을 도입> -학부전공은 경제학이었는데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것이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었습니다. 학과내용에 대해서 잘 알고 전공을 선택한 것도 아니었고. 물론 그 때 저보고 경제학과를 권유한 친구들은 다 경제학 교수가 돼 있어요. 어떻게보면 저는 대학생활을 하면서도 ‘에이 고등학교 때처럼 좀 놀다가 3~4학년 돼서 공부하지 뭐’ 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공부에 그다지 흥미를 가진 편은 아니었거든요. -학문으로서의 경제학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는 의미군요. MBA때도 마케팅을 집중적으로 공부하셨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네. 저는 학교에 남겠다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이 없습니다. 나가서 뭔가 일을 하고, 특히 무역업 같은 것 말이죠. 꼭 장사를 하지않더라도 세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살고 싶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영어에 흥미가 있었어요. 아버님께서도 무역업에 종사하셨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공부에는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된 거죠. -딜링 룸에 있는다는 것은 사람들을 만나고 비즈니스활동을 펼치는 것과는 전혀 반대되는 일인데요. 숫자들을 바라보면서 고민해야 되는 정적인 일이잖습니까. 활동적인 업무를 좋아하는 분이 딜링을 십년 먼게 해왔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언뜻 조화가 안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사실 저는 지금까지도 마케팅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어요. 손님을 따라나가는 일도 드물었으니까요. 그래서 곰곰 따져보면 ‘아 나는 마케팅체질이 아니었구나’ 라는 생각도 들어요. 업무에 따라 제 성격이 바뀌어왔는지도 모르겠어요. 학창시절에는 분명 지금보다 외향적이고 사교적이었습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이 길을 택한 걸 후회해본 적은 없어요. 왜냐구요? 제가 원래부터 외국계 은행을 목표로 하고 BTC에 입사한 건 아니지만 들어와서 보니 외국계 은행의 채권 트레이딩은 저 혼자 하고 있더라구요. 당시 채권을 사고 판다는 딜링 개념에서의 트레이딩을 하는 곳은 외국계에서는 BTC뿐이었습니다. 그건 달리 말해 강 행장을 포함한 BTC 경영진들이 향후 트렌드를 예측했다고도 볼 수 있어요. -보충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무도 딜링을 하지않으면 어떻게 딜링이 가능한가요? ▲물론 혼자라는 것은 약간 틀린 표현이구요. 88년 무렵만 해도 활성화되지 않았다는 표현이 정확하겠죠. 저는 91년부터 채권거래 규모를 크게 늘렸습니다. 물론 지금 규모랑 비교하면 그리 많지 않은 액수겠지만 하여간 그 무렵에 채권을 크게하는 곳은 저희와 장기신용은행 정도였습니다. -구체적인 액수를 말씀해주시죠. ▲3000억~4000억원 정도 됐습니다. 장기신용은행은 팀을 갖추고 저희보다 좀 더 큰 규모로 했구요. 그 당시 연금, 보험, 투신 등 다른 기관들은 오직 한 가지 전략밖에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만기까지 보유하는 “buy & hold” 죠. -그 때 딜링용으로 사용했던 주요 채권은 무엇이었나요. ▲당시에는 회사채가 최고였습니다. 시장의 벤치마크라고 할 수 있는 장기채권은 회사채 3년이 유일하다시피 했으니까요. 지금이야 국채도 있고 예보채도 있고 장기채권의 종류와 수가 다양하지만 그 무렵 어디 그런 것이 있습니까. 회사채가 샀다 팔았다하기 가장 쉬운 채권이었고 채권이 나오기만 하면 투신사가 채권을 싹쓸이해갔죠. 물론 채권발행이 매일매일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서 며칠 후에도 살 수는 있었습니다. -현재는 회사채등급이 무척 세분화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당시에는 어땠습니까. ▲은행보증/비은행보증 두 가지 분류 정도였죠. 무보증채권이 있긴 했지만 거의 주목받지 못했고. 80년대에는 은행들간의 차이가 없었으니까 증권사 브로커들에게도 “은행보증 채권 얼마얼마 있습니다” 라고 한 마디만 하면 됐어요. 그것이 어떤 은행인지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채권을 샀다가 팔 수 있는 유동성만 담보되면 어느 회사냐, 어느 은행이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을 때니까요. (인터뷰 중편으로 이어짐)
2001.05.18 I 정명수 기자
  •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⑨박성진 삼성투신 차장(중)
  • [edaily] 이번주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은 삼성투신운용의 스트레티지스트인 박성진 차장입니다. (인터뷰 상편에서 이어짐) <운명의 장난(?) 교수의 꿈이 증권사 채권맨으로> -그럼 신영증권에 입사한 것은 어떤 계기에서입니까. ▲아까 말씀드렸듯이 유학을 가려고 했는데요. 제가 준비했던 학교가 인디애나 주립대였어요. 미국 내에서도 빅 10에 들어가고 무엇보다도 한국학자들 중 여기서 학위받은 분들이 많은 곳이죠. 제 석사논문을 영어로 번역해서 원서를 넣었더니 그 쪽에서 “좋다. 너는 바로 박사과정에 진학해도 된다”고 하더군요. 이게 왠 떡이냐 싶었죠. 돈도 없는데 미국에서 다시 석사부터 시작하려면 좀 시간이 많이 걸리겠습니까. 의기양양 비자를 받으러 대사관에 갔더니 아까 그 여자 면접관이 “your job responsibility is not enough guarantee to come back. Your financial status is not enough guarantee to finish your coursework” 이라고 하더군요. 기가 막혔죠. 그때가 12월이었어요. 1월에 미국으로 가서 2월부터 시작하는 강의를 수강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저는 그 때 이미 결혼을 해서 기혼자용 기숙사에 제 피 같은 돈 100불을 예치금으로 송금까지 한 상황이었어요.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그래서 사정을 했죠. 그런데 전혀 안 통해요. 안 통하는 정도가 아니라 전경을 불러서 끌어낼 태세에요. 하늘이 노래진다는 것 느껴본 적 있으십니까. 한 남자의 꿈과 인생이 일개 미 대사관 직원의 손에서 박살이 난 겁니다. 인디애나 주립대에 전화를 했습니다. 창피해서 비자가 리젝트됐다는 소리는 죽어도 못하겠고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서 다음 달에는 못 가겠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괜찮다. 2년 안으로만 다시 하면 된다. 그렇지만 2년이 지나면 토플과 GRE를 새로 시험 봐서 최신 성적을 보내주면 또 된다”고 친절히 알려주더군요. 그래서 낙담한 마음을 조금은 지울 수 있었죠. 그 때 병도 좀 앓았는데 가장이니 어떡합니까. 먹고는 살아아죠. 신문을 탁 펼치고 구인광고를 막 뒤졌어요. 취직을 하기로 결심하고 보니 12월에 신입사원을 뽑는 곳이 딱 두 군데였어요. 신영증권이랑 디지털조선. 처음에는 당연히 디지털조선에 가고 싶었습니다. 대기업공채는 이미 가을에 끝났고 신영증권은 회사 자체에 일이 있어서 12월로 늦춰졌다고 하더군요. 신영증권의 일정이 먼저 시작됐는데 모집분야에 연구/조사 분야가 있었어요. 일단 두 곳에 모두 원서를 넣었죠. -증권이 무엇인지는 아는 상태에서 입사를 결정한 것은 아닐텐데요. ▲그런 건 아닙니다. 사실… 유학준비를 하면서 잠깐 토플학원 강사로 일했는데 그 학원 바로 옆에 동서증권이 있었어요. 학원에서는 초급반 영어랑 주부회화를 담당했습니다. 아침에만 좀 바쁘고 오후에는 내리 놀아요. 그리고 학생들 수업끝나고 직장인들 하루 일과가 끝나는 저녁시간에 연이어 수업이 계속되는 거죠. 학원강사가 참 고달픈 직업입니다. 건강도 많이 망쳐요. 낮에 시간 많겠다 바로 옆에 증권회사 있겠다. 그래서 순진한 집사람을 꾀서 주식을 하겠다고 졸랐어요. 당시 집사람이 피아노 레슨을 20개나 해서 2000만원을 모았거든요. 그 돈으로 주식투자를 시작했습니다. 이 돈을 불려서 유학가자는 결심을 하고 증권계좌를 만들었더니 처음에는 잘 되더라구요. 금방 2500만원으로 돈이 불어났거든요. 저는 주식의 ‘주’자도 몰랐고 기업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어요. 들어본 회사라고는 아버님이 다니셨던 동아건설이 고작이었어요. 당시 성수대교 붕괴사태 때문에 동아건설주가 무척 쌌어요. 그래서 “음 저건 낙폭과대주야” 라고 매입했죠. 하하. 그리고 당시 금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LG계열사 주식도 샀고요. 그런데 첫끗발이 개끗발이라고 그 다음부터는 폭락하기 시작하는 겁니다.(웃음) 그 후 손절할 때가 왔는데도 그걸 못했어요. 개미투자자의 전형적인 실패사례죠. ‘손절하지 않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오를거야’ 라는 말도 안되는 류의 생각들. 되긴 뭐가 됩니까. 유학 갈 날짜는 다가오고 점점 돈은 줄어드는 지경이 됐어요. 대충 정리를 해보니까 1500만원이 조금 안되는 돈이 남았더군요. 속으로는 “그래도 선방했다. 이게 다 내가 블루칩과 낙폭과대주를 산 덕택이야”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하 유학이 취소되고 나니까 오기가 생기더라구요. 내가 왜 주식투자에 실패했는지 증권회사에 들어가서 몸소 알아봐야겠다는 오기죠. 전 그 당시만해도 증권회사 직원들은 그 이유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제 딴에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몰렸는데 그 길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디지털조선은 어떻게 됐냐구요? 제가 학부는 놀아서 학점이 나쁜데 대학원은 all A였어요. 대학원 all A지, 토플 점수 우수하지…나름대로는 서류는 문제없다고 생각하고 디조에 원서를 보냈어요. 그런데 서류에서 떨어졌습니다.(웃음) 그래서 지금도 조선일보는 감정이 좋지 않아요. <우연의 연속, 채권분석가가 되기까지> -신영증권에 들어자마자 바로 채권부로 갔습니까? ▲연수를 받고 신입사원들에게 지원부서를 적으라더군요. 1순위는 무조건 조사부 적었죠. 한 게 그것 밖에 없으니까요. 그리고 두번째는 국제부. 폼 나잖아요. 3순위. 주식부. 왜 주식을 하다가 망했는지 알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런데 발령을 하는데 인사부장이 “박성진 채권부” 하고 부르는 겁니다. 인상 팍 쓰면서 ‘도대체 채권부가 뭐하는데야?’ 라고 생각했어요. 인사부장께 물었죠. 채권부가 뭐하는 곳이냐고. 그랬더니 인사부장이 “아파트 분양하잖아. 거기서 채권받거든. 분양하고 나오는 사람들 앞에서 채권, 채권 하면서 소리지르고 가서 팔아. 너 명동이나 주택가에서 채권, 채권하면서 팔러다니는 사람들 본 적 없냐? 그거하는 거야” 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토씨하나 다르지않게 전해드리는 거에요. 반은 농담이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황당했어요.(웃음) 채권이 뭔지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던 데다 신입사원 교육 때 채권시간이 무지 재미없었거든요. 수학공식 막 쓰고 계산도 복잡하고. 채권부에 갔더니 지금 LG투신에 있는 최원녕 과장이 “네가 채권부냐?” 라고 인상을 쓰면서 말하는 거에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초등학교 선배더라구요. 그것 때문에 꽉 잡혀서 찍 소리도 못하고 살았죠. 하하. -결국 전공이나 희망사항과는 전혀 상관없이 채권판에 들어왔군요. 처음에는 무슨 일을 했습니까. ▲수도결제죠뭐.(증권사가 채권매매 중개시 현물 채권과 대금을 교환, 결제해주는 것) 처음 증권사 채권부에 가면 하는 일이 그거 밖에 더 있겠습니까. 속된 말로 인생이 완전히 골로 가더라구요. 그전까지는 알튀세르, 레비스트로스와 라캉을 논하던 나름대로 먹물먹은 지식인이라고 제 딴에 자부했는데 말이죠. 하하. 인생이 이렇게 꼬이고 저렇게 꼬이는데 정신을 못 차리겠더군요. 그냥 전공살려서 기자나 됐으면 폼이라도 날 거 아니겠어요. (웃음) -수도는 얼마나 했습니까? ▲9개월 정도? 한 일년 가까이 했습니다. 제가 신입사원 동기들보다 나이가 좀 많았어요. 다행인 것은 저랑 한 조가 된 친구가 운전을 전혀 할 줄 몰랐어요. 그래서 제가 운전을 하고 그 친구가 막 뛰어다니는 일을 했죠(웃음) 제가 어떤 건물 앞에 차를 탁 세우면 그 친구는 미친 듯 뛰어올라가서 도장 찍어오고. 수도를 직접 해 봐야 채권의 비애를 몸소 체험할 수 있어요. 길이 막힐 때는 원효대교를 뛰어서 여의도로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재미있는 일화가 많았어요. 그때 거래가 많았거든요. 선배들이 “야 이 자식아 빨리빨리 처리 못해? 느려터져 가지고선” 뭐 이렇게 혼이났죠. 저도 열이 받으면 “우리 회사에서 매매보고서 나보다 더 빨리 작성하는 사람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나보다 더 빨리 하는 사람없으니까 늦는다고 갈구지 마” (웃음) 이렇게 맞받았죠. <“너는 컴퓨터도 잘 다루니까 기술적 분석이나 한번 해봐라”> -채권의 기술적 분석을 시작한 건 언제인가요. ▲그것도 제가 하겠다고 한 게 아니라 신영증권 황 부장께서 “너는 컴퓨터도 잘 다루니까 이거 한번 해봐라” 이런 식으로 명령을 내리셔서 하게 된 겁니다. 입사하고 3개월 후부터 수도업무랑 채권분석을 같이하기 시작했어요. 채권단가, 이론부터 알아나갔죠. 실제로 해보니까 제가 한 것이 잘 맞아 떨어지더라구요. 잘 맞을 때까지 조정도 이리저리 해보고. 여하튼 재미있었습니다. -채권관련 책은 몇 종류나 봤습니까. ▲기술적 분석에 관한 책은 사실 그다지 많지 않아요. 거기에 나오는 공식들을 보는거죠. 제가 좀 컴퓨터를 다루니까 그 공식들을 프로그램으로 짜고 그것을 또다시 엑셀에서 구현하는 작업들을 했어요. 조정과정을 몇 개월 거치니까 신기할 정도로 잘 맞는 거에요. 그때 당시에는 족집게처럼 들어맞는다고 느껴졌을 정도니까요. -그게 몇 년도인가요. ▲입사하던 해였으니까 96년이군요. 그런데 이유가 있더라구요. 그 당시 시장은 지금처럼 시가평가(market to market) 시장도 아니었고 대부분 시장참가자들이 기관투자가다 보니까 현재에 비해 모멘텀이 훨씬 분명한 시장이었습니다. 지금처럼 변동성이 큰 것이 아니라 한 번 모멘텀이 생기면 관성에 의해서 일정 기간은 그것이 계속 유지가 된 거죠. 단기 딜링을 해서 돈도 벌 수 있을 것 같고 자신감도 막 생겨났습니다. 아침회의에서 “금리 어떻게 될 것 같나?” 라는 질문을 받을 때 신입사원임에도 불구하고 코멘트를 하고. 그러면서 “아 나는 이쪽 방면에 소질이 있는가봐. 분석의 천재라니까” 라는 착각에 빠지게됐죠(웃음). 그 시절에는 어디 인터넷이 있습니까. 나오는 모든 금융데이타를 일일이 손으로 작업했어요. 한국은행 데이터, 경기동향, 통계청 데이터를 수기로 입력했다는 거 아닙니까. 아주 초보적인 수준이었지만 재미있었어요. -재미를 느낀 것이 가장 큰 이유였군요. 그만두겠다는 생각도 안하고 말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번듯한 직장에 취직해 비자받을 때 흠 잡히지 않고 돈 모아서 곧 유학을 떠날 계획이었습니다.(웃음) 학원강사랑은 엄청난 차이가 있잖아요. 증권회사라면 미국사람들도 job responsibility가 어쩌니 저쩌니 못할 거 아니겠어요. 2년간 괜찮다는데 금방 떠나려고 했죠. 그런데 학위받는 일에 대해서 회의가 들기 시작했어요. 유학 갈 형편도 안됐지만. 사실 우리나라에서 학계만큼 정치적인 곳도 없잖아요. 물론 하고 싶은 일을 못했다는 것에 대한 자괴감이 없을 수는 없죠. 사람인데. 수도하면서 도장받으러 다니려고 내가 이때까지 공부했나. 이런 생각들. 그래서 대학때부터 다니던 교회에도 뜸하게 되고. 저는 토요일 교회모임 때문에 대학시절 내내 그 흔한 MT도 한번 안 간 사람인데 말이에요. ‘이렇게 열심히 살면서 하나님을 모셨는데 생 양아치 같은 애들은 다 잘되고 나는 남들 다 가는 유학 한 번 못 가나’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해도 위에서 뭐하라고 시키면 죽어라 하거든요.(웃음) 제가 바로 그랬어요. 마음 속은 썩어 문드러져도 하라면 다 했으니까요. 그러다 지금 다니는 교회 목사님을 만났어요. 그 목사님께서 “하나님이 자네를 유학 보내시지 않은 이유가 있다. 이 세상에서 지금 자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지금 그 일을 시키시려고 일부러 여기 남게 하신 거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시장을 분석하고 예측하는 일에 관한 재능을 주신거다. 네가 경제학을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그 부분은 하나님이 메꿔 주실거다.” 이렇게 설득을 하시더군요. -조직 안에서 전문적으로 분석을 시작한 건 언제인가요. ▲수도일이 끝나고 나서는 상품운용팀에 들어갔어요. 말이 상품운용이지 일반고객들을 상대로 채권을 파는 거였죠. 전자계산기도 무지 잘 써야했구요. 세금계산을 손으로 하는데 나중에는 손이 보이지않을 정도로 손동작을 놀려야 했습니다. -아니 엑셀이 있었을텐데 왜 그런 일을 했습니까. ▲관행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깨지는 것이 아네요(웃음). 엑셀쓰자고 어른들에게 건의하면 무조건 손으로도 할 줄 알아야 된대요. 컴퓨터 없을 때는 네가 어떡할거냐는 거죠. <”상상력과 재치” 시황으로 이름을 얻다> -그럼 시황을 본격적으로 쓴 건 언제입니까. ▲브로커팀으로 옮기면서 시황을 쓰게 됐습니다. IMF 외환위기가 터지기 3개월 정도 전이었어요. 97년 9월로 기억합니다. 그 당시 데일리 한편 조그만 귀퉁이에다가 제 이름으로 시황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평이 너무 좋은 거에요. (웃음) -제 기억으로도 호평을 받았던 것이 생각나네요. 기술적 분석과 관련된 코멘트도 최초로 나왔었죠 아마? 지금도 그 얘기를 하는 분들이 있는데.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자체 제작한 툴을 가지고 하니까 제 예측이 잘 맞으니까 ‘이걸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주자’ 라는 마음에서 시작하게 됐어요. 나름대로 제가 생각한 아이디어도 많이 넣었죠. 확인도 안 해보고 “이런 건 아닐까? 저런 건 아닐까?” 를 집어넣은 겁니다. 그때는 그게 장점이었죠. 지금은 단점이 됐지만(웃음) 제가 지금도 “너는 확인해보면 간단한 일을 가지고 상상을 먼저 해. 그래서 안돼” 질책을 받아요. 그러면서 맨날 깨지거든요. 하지만 그 때 당시에는 그것이 재미있다고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해요. -당시 데일리 말고 따로 리포트를 쓴 적은 없나요. ▲사실 저는 데일리를 쓸 만한 내공도 가지지 못했어요. 지금도 그렇구요. 배우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채권을 잘 알지도 못하는 애가 채권계에 입문해서 뭔가 쓴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준 정도겠죠. DB 만들고 상관관계 분석하는 모든 일들이 재미있었고 지금도 도움이 많이 됩니다. -첫번째 프리젠테이션은 어디서 했습니까. ▲정말 기억이 안나요. 한때 많이 불려다니긴 했는데 어디서 처음 했는지가 기억이 잘 안 나는군요. 자주 갔던 곳은 외환, 한미은행 등 은행권이었습니다. -혼자 갔습니까. ▲아뇨. 담당부장님과 함께 갔습니다. 가서 상담하고 이것저것 말해주고. 사실 맞았던 적보다 틀린 적이 훨씬 많았어요. 틀렸을 때의 그 창피함, 짜증남이라는 건 말로 못해요. 틀린 것만 가지고도 많은 공부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만해도 채권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곳이 거의 없었어요. 다른 곳에서는 프리젠테이션을 한다고 전해주는 정보가 채권시장 안에 있는 사람들에겐 너무 빈약하게 느껴진거죠. 시장도 좁고 돌아가는 메커니즘도 빤한 곳이 이 바닥 아닙니까. 그런데 제가 가서 이러저러 말을 하니까 “쟤는 채권수도도 해 본 녀석이고 말은 좀 통하네” 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는 건 절대 아네요. 전 지금도 투신, 은행권이 어떻게 채권을 사고 파는지 잘 몰라요. 많은 선배들은 제게 “네가 말은 참신하고 조리있게 했지만 실상 은행이나 보험이 그렇게 단순하게 자산운용을 하는 곳이 아니다” 라고 충고를 해줬죠. -그 당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뭡니까. ▲우리 시장이 좀 건조하다 보니..제가 장난기가 좀 심한 편이라 의도적으로 코믹하게 쓰려고 했어요. 그러면서도 내용의 본질은 놓치지않으려고 나름대로 애를 쓰긴 했는데. 별루 기억에 남는 것이 없네요. -시황제목을 무척 재미있게 달았던 걸로 기억됩니다만. ▲음 그런 건 있었어요. 외환위기 이후 IMF 고금리 정책을 계속 고수했잖아요. 그 후 분기마다 정책 내용을 바꾸게 됐는데 한번은 영문을 읽어보니까 이번엔 고금리 정책 완화기조로 간다 뭐 이렇게 느껴지더라구요. 그리고 진짜 금리가 내렸습니다. 마침 금리가 하락하는 날 IMF 서울사무소장의 금리하락 멘트도 나갔죠. 그 시점에서 제가 뭐라고 코멘트를 했냐면 “IMF는 Immediate Money-market Fever 다“ 라고 했어요. 사람들이 그런 걸 기억해 준 거죠. 분석을 잘해서가 아니라. (인터뷰 하편으로 이어짐)
2001.05.04 I 정명수 기자
  •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⑧김윤모 하나증권 기업본부장(하)
  • [edaily] 이번주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은 하나증권 기업금융본부 김윤모 이사입니다.(인터뷰 중편에서 이어짐) -구체적으로 어려운 점은 뭡니까. ▲은행에서는 상사가 부하직원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수직적인 top-down decision making이 확실한 곳이 바로 은행이거든요. 요즘들어서 분위기가 많이 완화됐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도 보수적이에요. 하지만 증권사에서는 그래서는 안되겠다는 것을 많이 느꼈어요. 위계질서를 엄격히 내세우는 구조가 오히려 하우스의 발전을 해치는 거죠. 처음 출범시 은행, 그룹 등 다양한 곳에서 사람들을 끌어왔기 때문에 서로 다른 문화에서 자란 사람들을 한 덩어리로 뭉치게 하는 작업에 1년이 걸린 겁니다. 그 후 “이제 전진하자. 이 인원이면 어디가서 무엇인들 못하겠느냐”는 결심이 섰죠. -요즘도 출근을 일찍 하십니까. ▲네. 8시 이전에 출근합니다. 이사 승진 후 저는 임원 방이 필요없다고 말했어요. 고객과 직접 대면하고 회의를 주재해야하는데 방이 왜 따로 필요하냐고 말했죠. <“내가 일한만큼 대우받지 못한다는 것은 내가 시장에 필요없다는 의미”> -임원승진 후에도 성과급체계를 그대로 유지, 상당한 연봉을 받으신다고 들었습니다. 비결을 좀 알려주시죠.(웃음) ▲임원 중 성과급을 받는 사람들은 다른 하우스에서도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내가 일한만큼 대우받지 못한다는 것은 내가 시장에 필요없다는 의미일거다. 내가 필요하다면 거기에 걸맞는 대우를 해줘야한다” 는 거죠. 제 친구들 중에는 주식브로커로 성공해 엄청난 돈을 번 친구도 있습니다. 제가 그 친구들보다 질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직급보다는 비즈니스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럼 월급을 더 많이 받는 부하직원도 있습니까. ▲물론 있습니다. 올해는 제가 조금 더 많이 받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작년까지만 해도 팀장이나 다른 직원들 중 저와 비슷한 연봉을 받는 친구들이 꽤 있었습니다. 저는 제 봉급을 부하직원의 디스커션을 통해 결정합니다. 팀장들이 직접 “우리 보스는 일을 이러저러하게 했으니 이만큼 받으면 된다”고 평가하는 거죠. 사실 위에서는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모릅니다.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팀장이고 그들이 제게 돈을 줄 만하다고 생각해야 그 돈을 받을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들이 평가하기에 제가 무능력하다고 생각하면 저 말고 다른 사람이 하나은행 기업금융본부의 헤드로 와야 회사가 발전하겠죠. -옛날에 은행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을 고객으로 맞이하고 나서는 어떤 감정이 들던가요. ▲그 부분이 솔직히 말씀드려서 제 직업의 “애환” 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아직까지 브로커에 대한 인식이 매니저보다 화려하지 못한 일로 평가되고 있으니까요. 매니저와의 관계에서도 항상 자기주장을 낮추고 공손하게 대해야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앞으로는 동반자적 위치에 서는 식으로 분위기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브로커들이 많은 실력을 쌓아야겠죠. 저 개인적으로는 그런 문화를 많이 바꾸려고 노력하는데 상대방 쪽에서 호응해주지 않을 때는 만감이 교차합니다. 그 부분이 제일 힘들어요. -지난 한해 수익은 어느정도를 냈습니까. ▲30명이 영업이익 규모로 125억정도 흑자를 냈습니다. 원래는 170억 가량됐는데 코스닥 등록기업 시장조성 때문에 규모가 좀 줄어들었죠. <”실무경험을 가진 CEO들이 자꾸자꾸 등장하면 펀드매니저 대우가 파격적으로 달라지리라 믿습니다”> -이건 좀 조심스런 질문인데… 딜러와 브로커의 페이가 너무 차이난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딜러들이 브로커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과도한 수수료에 반감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인데요. ▲미국에서는 스페셜리스트에게는 확실한 대우를 보장해줍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그렇지않아요. 채권운용 펀드매니저가 운용을 잘해서 큰 수익을 내도 “너 혼자만 잘해서 그런 건 아니지 않느냐 시장이 좋아서 그렇지” 식의 분위기가 대부분이죠. 그건 한국의 금융기관 CEO나 CFO들이 능력에 걸맞는 대우를 해주는 미국식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은 탓이 크다고 봅니다. 실무경험을 가진 CEO들이 자꾸자꾸 등장하면 펀드매니저 대우가 파격적으로 달라지리라 믿습니다. -하나증권으로 옮긴 후 기억에 남는 딜은 무엇인가요. ▲회사채로 보면 두 가지 정도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이름을 밝히기는 좀 그렇고…하여간 모 그룹사의 BBB 등급 채권이 특히 기억에 남는군요.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소외당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 그룹사가 증권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쪽에서도 맡을 엄두를 못 냈어요. 저희 리서치에서 분석을 해보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돼서 밀어붙였습니다. 딜이 성공한 다음에는 고맙다고 난리도 아니더군요. 지금 잘 나가는 회사들 중에서도 한때 채권발행이 어려웠던 곳이 꽤 있었습니다. 그런 쪽을 맡았을 경우 저희는 이런 식으로 접근했습니다. 큰 기관을 직접 찾아가서 “이 채권을 왜 안 사냐. 이건 정말 저평가됐다” 고 주장했습니다. Argue 아닌 argue를 한 거죠. 그래서 큰 수익을 안겨준 곳이 몇 개 있습니다. 기업금융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큰 보람이었어요.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시대흐름에 순응하는 자세가 필요> -힘들거나 어려웠던 적은 없습니까. ▲제가 노력한만큼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나 할까요. 또 하나는 금융계에 종사하는 사람이 대부분 보수적이다보니 새로운 지식이나 시스템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좀 유연하지 못한 것 같아요. 배타적인 사고방식이 많이 존재하는 편입니다.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시대흐름에 순응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원래 영업하는 분들은 좀 공격적인데요. ▲저는 조화를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어느 한 면만 뛰어나서는 안되고 다방면에 걸쳐 균형감각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기자도 취재를 위해 매일 정보를 요구할 수는 없잖아요. 내가 정보를 주기도 해야 다음에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고. 세상만사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주고받는 식으로 이뤄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쪽 계통의 사람이 너무 강성을 띠면 곤란하죠. 이번에 놓쳤더라도 다음 번에 좀 더 좋은 가격을 노리려면 적당히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한의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는데…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요? ▲우선 저는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의 혈색을 세심하게 관찰합니다. 혈색만 유심히 관찰해도 신체의 어느 부분이 안 좋은지 정도는 알 수 있어요. 제가 체계적으로 공부한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지식을 쌓으려고 노력한 결과라고나 할까요. 병명이나 약재에 관한 호기심도 많습니다. 저는 “사람은 건강하게 오래살아야 한다” 고 생각해요. 미국 매니저들은 fitness club 등을 이용하면서 자신의 건강관리에 대단한 노력을 쏟습니다. 지금도 건강한 데 뭐하러 그렇게 시간을 들여서 운동하냐고 물어보면 그들의 대답은 이겁니다. “일을 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데일리 몸 컨디션을 최적으로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가진 능력의 베스트를 발휘할 수 있다” -그럼 건강관리를 어떤 식으로 하시나요. ▲목욕하는 것을 무척 즐기고 음식을 가려먹습니다. 기름진 음식은 거의 입에 대지 않습니다. 비만을 해소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서양에는 채식주의자가 많지만 바로 녹차입니다. 녹차를 끊임없이 마시죠. 담배도 끊었습니다. 금연을 결정한 이유는 브로커를 하다보니 말을 많이해서 목 상태가 나빠졌기 때문입니다. 성대결절도 앓았습니다. 목이 나빠져서 처음 병원에 갔더니 엑스레이 사진을 보고 인턴이 그러더군요. 혹시 직업이 가수시냐고. 그래서 가수라고 했습니다.(웃음) -다방면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은데 의사말고 다른 직업을 희망한 적은 없습니까. ▲쇼 프로그램 PD를 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음악을 무척 좋아해요. 듣는 것, 노래하는 것 모두다(웃음). 쇼 PD는 우선 즐거움을 주는 직업이잖습니까. 화려하고 재미있고 다이나믹한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누군가 “어차피 인생은 쇼다” 하던데요(웃음) <인재에 대한 교육, 투자가 시급하다> -한국 브로커리지 하우스가 앞으로 갖춰야 할 점은 무어라고 생각하시나요. ▲외국증권사에 비하면 지극히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적어도 기업금융 부분에서는 세계적인 증권사들과 경쟁할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이를 위한 교육 및 투자가 시급하다고 생각해요. 직원을 외국에 보내서 선진금융기법을 익히게 하는 일을 비롯해서요. 인재를 키우지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어요. 지금 비슷한 일을 계획중인데 이데일리에서도 한 분 정도 참가하시면 좋겠어요. 이 모두가 한국금융시장 발전을 위한 밑거름이 될 겁니다. -그러한 계획들이 윗선에서 제지 당하지는 않을까요. ▲그건 간단합니다. 이제 금융기관도 많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해당기업에 돈을 더 많이 벌어다주면 제가 원하는 바를 요구할 수 있는 거죠.(웃음) 그리고 회사도 그것을 수용하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바램은 무엇입니까. ▲저는 파트너라는 말을 무척 좋아하고 국내 최초의 파트너증권사를 만들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김&장, 앤더슨, 아서 D 리틀, PWC 같은 곳 말입니다. 각자가 파트너가 돼서 회사 일에 책임을 지는 유한회사 말입니다. 우리나라 조직에서는 인사가 어떻고 급여가 어떻고 간섭하고 질시하는 일이 비일비재 하잖습니까. 너무 비효율적인 것 같아요. 자기 역할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누가 봐도 ‘아, 저 하우스는 실력좋고 깨끗하고 담백한 곳이구나. 뛰어난 애널리스트, 브로커, 딜러들을 고루 갖췄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끔 할 겁니다. 이제 한국 자본시장도 자생적인 경쟁력을 갖출 시기인 것 같아요. 사실 금융계 선배들 중에서도 이런 노력을 하신 분들이 몇 분 계세요. -결혼은 어떻게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선을 봤습니다. 그 때 집사람은 병원 약사로 근무 중이었는데 만나기전에 먼저 전화를 했죠. 그랬더니 다짜고짜 “저번 주에 전화하신 분이죠?” 하는 겁니다. 무슨 소립니까. 난 저번 주의 그 남자가 아닌데. 그 말을 듣고 나니 오기가 막 발동하더라구요. 그래서 적극적으로 덤볐죠. 허허 동양적 성격이라 제 생활을 잘 이해해서 항상 고맙게 생각합니다. -공부를 더하겠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습니까. ▲그 생각은 많이 해왔습니다. 이사 승진 때 제가 임원승진 대신 공부를 좀 더 시켜달라고 부탁드린 적도 있습니다. 이론적인 것보다 선진국 자본시장에서 어떤 상품이 판매되고 그런 시스템은 어떻게 구축돼 있느냐는 식의 실질적인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제가 공부한 것들을 한국금융시장에 정착시키는 작업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죠. 언젠가는 갈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습니다. 아울러 저희 팀장급은 무조건 순환해서 공부를 계속 시킬 생각입니다. (김윤모 이사 약력) -59년 부산 출생 -부산대동고 졸업 -79년 고려대 정경대 통계학과 입학 -83년 조흥은행 입사 -86~91년 한미은행(신탁부, 외환업무부) -91년 하나은행(한국투자금융 전환설립 사무국, 신탁증권부, 영업부, 종기부, 장기경영팀) -99년 하나은행 지점장 -99년 9월~ 하나증권 기업금융본부
2001.04.27 I 정명수 기자
  •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⑧김윤모 하나증권 기업본부장(상)
  • [edaily] 채권 펀드매니저와 브로커는 미우나 고우나 얼굴을 맞대고, 전화로 숨소리를 함께 해야하는 관계다. 펀드매니저를 야구의 투수에 비유한다면 브로커는 포수다. 포수의 리드가 좋지 않으면 아무리 훌륭한 투수도 빛을 볼 수 없다. 이번주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의 주인공은 하나증권 기업금융본부를 이끌고 있는 김윤모 이사다. 하나증권 기업금융본부는 회사채, ABS 등 발행업무와 채권중개 분야에서 1년 반만에 업계 수위를 차지, 급부상한 브로커 하우스다. 김 이사는 하나은행에서 잘 나가는 ‘뱅커’였지만 과감하게 브로커로 변신, 여의도에 안착한 대표적인 ‘명동맨’이다. 은행원에서 증권사 직원으로, 그것도 폐쇄적이라는 채권판의 브로커로 변신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은행시절 신탁부에 오래 있어서 채권시장에 지인이 많고 전혀 낯설지는 않았어요. 제가 채권딜러였을 때 브로커로서 저를 응대했던 분들중 딜러가 되신 분들도 많구요. 지금은 제가 브로커고 그분들이 딜러죠. 입장이 바뀌었지만 개의치 않습니다.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고 시장에서 인정을 받으면 되죠.” 김 이사는 은행시절에도 새로운 상품을 만들고 새로운 채권에 투자하는데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하나은행의 해외DR 발행실무를 맡았을 때는 가격 협상의 기법을 익히기 위해 국내에 진출한 외국계 증권사를 이잡듯 뒤지고 다녔다. 자산유동화법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신탁적 양도”라는 방법으로 매출채권을 유동화시키는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기기도 했다. 하나증권 브로커팀을 이끌면서도 신용도가 높고 성장성도 있지만 시장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 회사채, 카드채 등을 발굴해 손수 기업IR까지 해가며 채권발행을 성공시켰다. 김 이사는 “단순히 호가나 불러주고 딜러들 의견에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브로커는 더 이상 경쟁력이 없다”며 “브로커일수록 공부하고 새로운 서비스를 개발해 내야한다”고 말했다. “투수에서 포수로, 딜러에서 브로커로” 김 이사의 변신 과정, ‘명동맨’의 ‘여의도 이주기’를 들어봤다.(김 이사 약력은 인터뷰 하편 기사 하단참조) -통계학을 전공하셨네요. ▲고려대학교 통계학과 79학번으로 입학했습니다. 통계학이란 학문이 너무 어려워서 대학시절에는 딴전을 많이 피웠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의사를 하면 훨씬 잘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제가 건강에 관심이 매우 많은 편입니다. 한약이나 한방체질에도 남다른 흥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집안에 의사가 계신가요. ▲가족 중에는 없습니다. 저희는 집안은 교육자 집안입니다. 조부때부터 3대째 교육자 일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저희 부친께서는 고등학교 영어선생님을 하셨죠. 한때 세칭 부산에서 제일 잘나가는 과외선생님이시기도 했습니다. 하하. 현재 형님 중 한 분도 교직에 계십니다. -그럼 어떤 기회에 건강, 의학쪽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겁니까. ▲그건 아마 타고난 것 같습니다. 아주 어릴적부터 흥미를 가졌으니까요. <비즈니스 맨의 꿈이 뱅커로> -대학교 시절의 꿈은 뭐였습니까. ▲상대쪽을 다니다보니 자연스레 비즈니스 맨의 꿈을 키웠습니다. 실제로 대학졸업 후 처음에는 모 그룹사 공채에 합격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인생이라는 것이 꼭 생각한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더군요. 제가 형님이 세 분인데 대한항공에서 근무하시는 형님께서 “그룹일이라는 것은 너무 힘들고 비전도 별로 없다. 금융계로 진출하면 어떻겠느냐”고 권유하셨어요. 그래서 군대가기 전에 조흥은행에 입사했습니다. -그 때가 언제였나요. ▲83년이었습니다. 지금 서울역 엘지빌딩에 있었죠. 그당시 은행은 무척 경직되고 위계질서가 엄격한 분위기였습니다. 처음 입행해서는 외환 네고업무를 담당했습니다. 한번은 다른 그룹사 직원과 우리 여직원사이에 싸움이 붙었어요. 대기업의 위세가 대단하던 때니까 그 그룹쪽에서 강력한 반발을 하고 저희 직원들은 큰 야단을 듣고…난리도 아니었죠. 그런데 사실 우리 여직원들은 순서에 맞게 일을 처리했을 뿐이었거든요. 그래서 차장에게 항의를 했죠. “여직원들은 사실 잘못한 것이 없다” 고 말입니다. 그 일로 차장과 크게 말다툼을 벌였는데 그때 ‘은행 일은 내 적성에 맞지 않다. 다른 직장을 찾아봐야겠다’ 는 것을 확실히 느꼈습니다. 그리고 군대를 다녀와서 새 직장을 구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IBM같은 외국기업들이 매우 인기가 높은 직장이었어요. 그래서 Bank of America와 국내 기업이 합작해서 만든 한미은행이 괜찮겠다 싶더군요. 외국계 기업의 문화를 지니고 있는데다 급여수준도 상당히 높았고… 바로 추천을 받아서 어플라이를 했습니다. 다섯명을 뽑는데 경쟁률이 몇십대 일일 정도로 무척 인기가 높았습니다. 그때 저희 담당임원이 김진만 전 한빛은행장이셨죠. 지금은 상상하기 힘드시겠지만 86년 당시 은행권에서 그렇게 자유로운 분위기를 지닌 곳은 아무데도 없었습니다. 자유복을 입고 회사 안에서 머그컵을 들고 돌아다니고 외국TV에서 본 것처럼 책상에 걸터앉아 회의도 하고… 이 모든 것이 당시로선 파격이었던거죠. 사실 조흥은행에서는 채 1년도 안되는 기간을 근무했기 때문에 첫 직장은 한미은행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한미은행에서의 생활은 ▲그때 김진만 행장께서 상무로 재직중이셨는데 저를 좋게 봐주시고 많은 배려를 해주셨어요. 특진도 세 번 정도 했습니다. 입사때부터 기업금융 쪽 일을 주로 했습니다. -그럼 어떤 계기로 한국투자금융 전환설립사무국으로 이직하게 되었습니까. ▲ 한국투자금융은 하나은행의 전신입니다. 처음에 제의를 받고 무척 고민을 많이 했어요. 한미은행에서의 생활도 괜찮았고 옮겨간 직장이 잘된다는 보장을 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술을 한잔 먹고 집에 들어가서 집사람과 얘기를 나눴죠. 저희 집사람은 말수가 적은 편입니다. 몇가지 물어보더라구요. -그게 뭡니까. ▲승진기회와 월급을 어디가 많이 주냐는 것이었습니다. 하하. 그래서 새 직장이 더 많다고 답했더니 그럼 그 쪽으로 옮기는 것이 당연하지 않냐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반문했죠. 여기서는 김진만 행장께서 나를 좋게 봐주시고 잘 돌봐주시는데 새 직장에 가면 그런게 다 없어지지 않느냐고. 집사람 말이 “그 분이 당신과 평생 같이 살기라도 하느냐. 언젠가는 홀로서야 하지 않겠느냐”고 모든 것을 명확히 해주더군요. 이직에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집사람은 직장 옮겨서 좋을지 안 좋을 지에 관해서 점을 보러가겠다고 하더라구요. 점장이 왈 “승진을 하거나 좋은 곳으로 갈 운명” 이라고 말했다더군요. 그당시 한미은행에서 막 대리로 승진했을 때라 또다시 승진하지는 않을 것 같고 그럼 좋은 데로 갈 운명인가보다 생각했죠. 제 친한 친구들 7명에게도 일일이 물어봤더니 다들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를 해주더군요. <여신, 외환, 신탁, 기획… 은행의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하나은행으로 옮긴 다음에는 어떤 일을 했습니까. ▲91년 하나은행으로 이직하고 나서는 온갖 일을 두루두루 다 했습니다. 본점영업부여신, LC, 외환, 신탁운용, 기획, 결산 등등이죠. 영업부 차장으로 승진한 후에는 30대 그룹 여신 외환업무나 기관섭외 및 마케팅 담당으로 일했습니다. 주로 영업쪽 일을 많이 하다보니 하루는 행장께서 “영업만 해서는 클 수 없다. 이제는 종합기획일을 좀 해봐라”고 하시더군요. 그 후 종합기획 주무과장으로 발령받았습니다. 처음에는 기획쪽으로 가게 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행장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이사 한 분께 “영업하는 사람을 기획으로 가라고 하시는 말씀은 회사를 그만두라는 것 아닙니까”라고 항의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기획일을 담당하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도움이 되고요. -하나은행에서 이직 제의를 받았을 때 유학을 보내준다는 등의 조건들도 있었다면서요. 이행이 됐습니까. ▲하나도 이뤄지지 않았죠. 하하. 승진은 빨리 했습니다만 일을 정말 많이 시키더군요.(웃음) 일은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일요일에도 집에 거의 못갔을 정도였으니까요. 하나은행 영업부 차장시절에 신상품도 많이 만들었습니다. -해외DR 발행 이야기 좀 들려주시죠. ▲금융권에서 저희보다 먼저 해외DR을 발행한 건 장기신용은행 뿐이었습니다. 그게 96년이었는데 실패했죠. 그때 김영삼 정부가 중소기업지원 명목으로 한시적으로 금융권 해외DR 발행을 허용했던 때였습니다. 장기신용은행이 실패할 무렵 저희는 한참 로드쇼(road show: 유가증권을 발행하려는 회사가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벌이는 설명회. 주요 국제 금융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진행된다. 유가증권 발행시에 실시하므로 일반적 기업설명회인 IR과는 구분된다)를 진행중이었습니다. 제가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준도 못됐고 그때 국제부는 현 하나은행 국제부 임원이신 최종석 상무께서 맡고 계셨습니다. 해외DR 발행의 경우 은행마다 발행 담당팀이 달랐어요. 국제부에서 맡는 곳도 있었고 다른 팀에서도 했는데 하여간 서로들 하려고 난리였습니다. 로드쇼라는 것이 해외에서 진행되는 것이라 재미도 있고 보람도 느낄 수 있는 일이잖습니까. 하나은행에서 해외DR 발행과 관련된 팀은 국제부와 저희 종합기획부였는데 저희는 서로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일이 워낙 많으니까요. 의견차도 있었구요. 결국 저보고 그 일을 맡으라고 위에서 말씀하시더군요. 제가 “왜 가야합니까?” 라고 질문했더니 “영어는 잘 못해도 담판을 잘짓는 당신 같은 사람이 제격이다”라고 하시더군요.(웃음) 가격 프라이싱을 해본 사람이 가야된다는 논리였죠. 그래서 한달동안 6개 외국계 증권사 서울지점장들을 저녁마다 만났습니다. 어떻게 하면 성공적인 해외DR 발행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많은 자문을 구했어요. 하루도 거르지않고 저녁마다 2시간씩 강행군을 해서 대충 결론을 내렸습니다. 공통된 답은 “동서양 문화는 다르지만 결국 DR 발행도 일종의 기싸움이다” 였어요. 흥정에서 밀리면 진다는 거죠. 그래서 하나은행이 프리미엄을 받아야 되는 이유에 관한 논리를 마련하고 마음의 준비를 가다듬었습니다. 그런데 장기신용은행이 실패를 하고 돌아오고 나니까 사람들이 별 기대를 안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아무튼 해외로 날아갔습니다. 저희는 주간사를 메릴린치나 골드만삭스 같은 큰 회사로 하지않고 조그만 회사로 선정했었어요. 양자가 세계적인 회사긴 하지만 일단 로드쇼가 시작되면 주간사는 발행자편이 아니고 투자자편으로 돌아서거든요. 그래야 투자자들에게 계속 채권을 계속 팔아먹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동방페레그린증권과 현대증권 등에 주간사 업무를 맡겼습니다. 당시 페레그린 증권이 동양을 잘 이해하는 하우스이기도 했으니까요. 그 후 협상테이블에 앉아 프라이싱을 하는데 1%밖에 못 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그 가격에는 도저히 발행못한다”고 말하고서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습니다. 그 후 재협상에 돌입해서 3%까지 끌어올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가격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애초목표는 10%였거든요. 또 다시 지루한 협상이 시작되고 마지막 즈음에 제가 말했습니다. “서로 양보하자. 정 안되면 너희 CEO와 우리 CEO가 담판을 지으면 될 것 아니냐. 난 10%를 생각하고 왔으니 3% 양보하겠다. 너희도 3% 양보해라” 라고요. 그래서 6%로 합의를 봤습니다. 딜을 끝내고나서 하루정도 뒷마무리 작업을 하는 것이 보통인데 저희는 그런 것 없이 일사천리로 일을 마쳤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 해외DR 발행이 그룹증자로 이어지면서 많은 분들이 좋은 평가를 해주신 것 같습니다. 그 후에도 발행에 실패한 곳도 더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외환위기 당시에는 무슨 업무를 맡으셨나요. ▲외환위기가 발생할 당시 장기금융전략팀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주된 업무는 금융권 얼라이언스 준비, 증권회사 진출업무였고 후에 종금사 합병업무도 맡았었습니다. 종금사 합병때는 비밀작업들도 많이 했습니다. 6개월동안 숨어 지내다시피하면서 성사를 위해 노력했죠. 위에서 “모 종금” 이라고 한마디 하시면 일주일 만에 작업을 추진하느라 백방으로 뛰어다녔습니다. 자료정리 및 재평가 작업만으로도 눈코뜰 새 없이 바빴습니다. (인터뷰 중편으로 이어짐)
2001.04.27 I 정명수 기자
  • "중소·벤처기업 힘 닿는데까지 지원"- 김 대통령
  • [edaily] 김대중 대통령은 28일 "정부는 중소기업과 벤처기업을 힘 닿는데까지 지원할 것"이라면서 "정부가 힘이 없어서, 잘 몰라서 못 도와주는 경우는 있어도 힘이 있고, 알고 있으면서 도와주지 않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중소·벤처기업도 투명성을 확보해야 한다"면서 "신용대출을 건의했는데 여러분이 금융기관에도 투명한 경영을 설명하고 신용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대통령은 이날 낮 청와대에서 중소기업·벤처기업 대표 200여명과 가진 오찬에서 이같이 말했다. 다음은 대통령 발언(전문) ▲ 대통령 : 여러분과 오찬을 함께 하며 대화를 나누고 고충을 들었다. 직접 호흡하면서 여러분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에 대해 의견교환을 했다. 나는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경제가 발전해야 한다는 주장을 40년전부터 펴왔다. 71년엔 대중경제론을 통해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발전 필요성을 제기했다. 대만과 이태리는 중소기업 중심으로 성공한 나라다. 미국, 독일도 중소기업이 튼튼하다. 산업사회는 자본과 자원, 정보를 많이 동원하는 대기업이 발전을 주도했다. 지금은 달라졌다. 21세기는 중소기업, 벤처인, 그리고 여성과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고 있다.(인류역사 발전과정과 농업, 산업사회 발전과정을 설명) 산업사회에서는 중소기업인과 여성은 불리했다. 벤처나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도 설 땅이 없었다. 21세기는 달라졌다. 이젠 창의력이 얼마나 넘치느냐, 그런 사람이 얼마나 많으냐가 국력을 좌우한다. 빌 게이츠 10명이 있으면 세계 최대 강국이 된다. 지금은 가난한 사람들도 컴퓨터 1대와 아이디어가 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중소기업이나 여성 할 것 없이 불리할 것이 없다. 모험가들이, 엉뚱한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들이 필요하다. 바로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들의 대표들이다. 나는 미리 내다 보고 45년간 중소·벤처기업의 중요성을 역설해 왔다. 대통령이 된 후 외환위기를 극복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금융·기업 등 4대 구조조정에 힘을 쏟았다. 바로 그때 나는 정보화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정보화를 중시하게 된 것은 개인적으로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82년 청주교도소에서 앨빈 토플러가 쓴 "제3의 물결"을 읽고 정보화 시대가 온다는 것을 느꼈고, 놀랐다. 그때 눈이 띄였고 야당활동을 하다 대통령이 되어 가장 먼저 이 분야에 착수한 것이다. 오늘 우리나라는 정보화에서 세계에서도 앞서가고 있다. 인터넷 인구가 2,100만명이다. 초고속망은 400만이다. 미국에 버금간다. 일본, 유럽이 못 따라온다. 정보화를 안하면 안된다. 중소기업 심지어 농업분야도 경쟁하려면 정보화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국은 전세계에서 정보화와 관련해 부러움을 사고 있다. 국민의 정부가 잘한 일도 있고 비난받는 일도 있지만 정보화를 왜 안 했느냐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또 성공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도 없다. 이젠 여러분의 시대가 왔다. 그렇지만 경쟁해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 세계일류 제품을 만들어야 하고 마케팅을 해야 한다. 그래서 돈을 벌어야 한다. 가장 싸고 질 좋은 물건을 만들면 아무리 경제가 어려워도 얼마든지 팔 수 있다. 세계와 경쟁하는 것은 예외가 없다. 양말공장, 구멍가게 사람들도 세계와 경쟁을 해야 한다. 정부에서도 다른 것은 다 도와줘도 관세장벽을 치고 개방을 하지 않는 방법으로 도와줄 수는 없다. 세계에서 가장 좋은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 정부는 중소기업과 벤처기업을 힘 닿는데까지 지원할 것이다. 하지만 경쟁력이 있어야 한다. 적당히 하는 기업은 경제에 부담을 주고 국민에게도 부담을 준다. 세계경제가 어렵다. 예측하기도 힘들다. 지난번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미국에 가서 IMF, IBRD 총재 그리고 미국 경제장관들에게 미국경제가 어떻게 될 것인지 물어봤다. 미국경제가 경착륙은 안한다고 하더라. 그런데 귀국해 보니 미국경제가 경착륙할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그런데 또 오늘 아침에 보니까 소비지수가 좋아져 전망이 밝아진다고 한다. 정말 예측하기란 어렵다. 그렇지만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를 극복해 나가야 한다. 한국인들은 충분히 이겨낼 것이라고 본다. 벤처기업이 재작년에 4,934개였다. 그동안 주가가 폭락하고 경제가 어려웠는데도 작년말에는 8,798개로 늘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무리 어려워도 모험을 좋아하는 한국인이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민족이다. 겁 없는 민족 아니냐. 일본에는 이런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우리는 다르다. 이런 것이 필요하다. 여성들도 무섭게 발전하고 있다. 사관학교에서 훌륭한 생도들을 배출하고 있고 조금 있으면 여자 전투기 조종사가 나올 것 같다. 여성들이 일어나고 있다. 남자와 구분이 없어져 간다. 우린 세계지식강국으로 나갈 것이다. 일본, 미국 시장은 어려워지고 있다. 대신 유럽과 중남미, 아프리카 시장이 유망해지고 있다. 앞으로 일본이 자동차 부품공장을 우리 나라로 옮기고 우리 부품을 가져갈 것이라고 본다. 오늘 신문에 보니 미국에 160억 달러 어치 삼성전자 제품을 계약했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경쟁력을 키우면 불가능하지 않다. 우리가 과거에 어떤 나라였는가.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일본 식민지로 어려움을 겪었다. 지금 세계 강국에 둘러싸여 있다. 대륙, 해양 할 것 없이 강대국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4,600만명의 인구가 있다. 한국인이 세계에 500만명이 나가 살고 있다. 남북한을 합하면 7,000만명이다. 경의선, 경원선이 놓이면 만주와 중국,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으로 뻗어갈수 있다. 지금 한국은 3.8선이 가로놓여 있지만 남북한이 합하면 유라시아, 유럽의 물류중심지가 된다. 지금 우리는 중심에 살고 있다. 여러분 중에 내년에 개성에 가서 사업을 하는 사람이 나올 것이다. 중앙아시아에서 물건를 실어나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수한 국민을 갖고 있다. 4면이 강대국이지만 그만큼 큰 시장을 갖고 있는 셈이다. 제일 좋고 싼 물건을 만들어 경쟁력을 갖추면 된다. 중국에 어려움을 당하고, 일본의 식민지로 살고, 국토가 분단되어 전쟁을 겪었고, 눈치보고 살던 우리가 10대강국, 일류강국을 지향하고 있다. 여러분들이 이끌고 정부가 밀고 가야 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전통산업과 첨단산업이 쌍두마차가 되어 가야한다. 나는 옥중서신에서 이런 얘기를 쓴 일이 있다. 유일한 박사가 재산을 사회에 헌납했을 때 개인으로는 참 훌륭한 일을 했다. 하지만 기업인으로 훌륭한 것과는 별개라고 썼다. 기업인은 좋은 물건을 만들어 소비자에 공급하고, 근로자에게 많은 임금을 줘야 하며, 재투자해서 기업을 키우고 정당한 세금을 내는 것이 훌륭한 기업인이라고 생각한다. 기업인이 돈을 내놓는 것은 개인적으로 훌륭한 일이지만 기업인으로는 아니다. 정부는 힘있는 데까지 여러분을 도와줄 것이다. 정부가 힘이 없어서, 잘 몰라서 못 도와주는 경우는 있어도 힘이 있고, 알고 있으면서 도와주지 않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여러분이 열심히 해야 한다. 그리고 기업의 투명성도 확보해야 한다. 신용대출을 건의했는데 여러분이 금융기관에도 투명한 경영을 설명하고 신용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2001.03.28 I 조용만 기자
  • 고 정주영 명예회장 경영 에피소드
  • [edaily]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불도저에 비유되는 저돌적인 경영기법으로 주변을 놀라게 하곤 했다. 정 명예회장이 현대그룹을 일궈낸 저돌적 경영기법의 이면을 살펴본다. ◇빈대의 교훈 네 번째 가출로 인천 부두에서 막노동 시절. 그 곳의 노동자 합숙소는 빈대 지옥이었다. 정주영은 어느 날 꾀를 써서 밥상 위에 올라가 잤는데, 잠시 뜸한가 했더니 이내 빈대가 밥상 다리로 기어 올라와 물어뜯기 시작했다. 정주영은 다시 머리를 써서 밥상 다리 네 개를 물 담은 양재기 넷에 하나씩 담궈 놓고 잤다. 빈대가 밥상다리를 타려다 양재기 물에 떨어져 익사하게 하자는 묘안이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빈대들이었다. 빈대들은 사람을 물기 위해 벽을 타고 천장으로 올라간 다음, 사람을 목표로 뚝 떨어져 목적을 달성했다. 그때 정주영은 하찮은 빈대도 물이 담긴 양재기라는 장애물을 뛰어 넘으려 그토록 전심전력으로 연구하고 필사적으로 노력해서 제 뜻을 이루는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뜻을 세우고 최선을 다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한다. ◇500원 짜리 지폐와 초라한 백사장 사진의 신화 현대조선소 설립 당시 가장 큰 문제는 돈이었다. 정주영은 71년 9월 영국 버클레이 은행으로부터 차관을 얻기 위해 런던으로 날아가 A&P 애플도어의 롱바톰 회장을 만났다. 조선소 설립 경험도 없고, 선주도 나타나지 않은 상황에서 영국은행의 대답은 간단히 "NO"였다. 정주영은 그때 바지주머니에서 5백원 짜리 지폐를 꺼내 펴 보였다. “이 돈을 보시오. 이것이 거북선이오.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 전인 1천 5백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었소. 단지 쇄국정책으로 산업화가 늦었을 뿐, 그 잠재력은 그대로 갖고 있소.”라는 재치 있는 임기응변으로 롱바톰 회장을 감동시켜 해외 차관에 대한 합의는 얻었지만 더 큰 문제는 선주를 찾는 일이 남아 있었다. 그때 정주영의 손에는 황량한 바닷가에 소나무 몇 그루와 초가집 몇 채가 선 초라한 백사장을 찍은 사진이 전부였다. 정주영은 봉이 정선달이 되어 황량한 바닷가에 소나무 몇 그루와 초가집 몇 채가 선 미포만의 초라한 백사장 사진 한 장을 쥐고 미친 듯이 배를 팔러 다녔다. 결국 정주영은 그리스 거물 해운업자 리바노스를 만나 26만 톤짜리 배 두 척을 주문 받았고, 조선소 건립과 동시에 2척의 배를 진수시킨 세계 조선사에 유일한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다. 이렇게 정주영의 개척정신과 적극적인 추진력으로 이루어낸 현대조선소는 현재 세계 최대 규모의 중공업회사로 성장했다. ◇사우디 주베일산업항 대양수송작전 사우디의 주베일산업항 건설 당시 정주영은 시간과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모든 기자재를 울산조선소에서 제작하여 세계 최대 태풍권인 필리핀 해양을 지나 동남아 해상, 몬수운의 인도양을 거쳐서 걸프만까지 대형 바지선을 끌고 가는 대양수송작전이라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던 모험과 도전을 제시했다. 수송 도중 대형 파이프 자켓이 태풍으로 해난사고가 날 것에 대비해 자켓이 해면에 떠 있도록 하는 공법을 강구하는 치밀함도 보였다. 그 당시 선진국들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자켓 설치 공사 착수와 함께 자켓을 연결하는 빔 제작도 설계대로 울산에서 제작한 사실이다. 수심 30미터나 되는 곳에서 파도에 흔들거리면서 중량 5백 톤짜리 자켓을 한계오차 5센티미터 이내로 꼭 20미터 간격으로 심해에 설치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선진국들도 일단 자켓 설치가 끝난 후 그 간격을 재서 빔을 제작하던 실정이었다. 그러나 정주영의 창조적인 발상과 그칠 줄 모르는 도전의식으로 가로 18미터, 세로 20미터, 높이 36미터로 무게가 5백 톤이나 되는 자켓 89개를 울산에서 운반해 와 5센티미터 이내의 오차로 완벽하게 설치해 만든 사우디 주베일산업항은 20세기 최대의 역사라고 세계 언론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올릭픽 유치와 꽃바구니 한국과 일본의 올림픽 유치전 당시 한국이 올림픽 유치를 성공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올림픽 유치위원장이었던 정주영은 현대의 해외파견 직원들을 동원해 IOC위원들에 대한 세밀한 신상파악으로 성향을 분석하고 경쟁 유치국의 활동상황까지 치밀하게 분석했다. 승리의 여신이 정주영에게 미소를 지운 사건은 바로 정회장의 꽃바구니 전략! 정주영은 한국의 IOC위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꽃바구니 하나씩을 각국의 IOC 위원 방으로 넣어 주었다. 그 꽃바구니는 단순히 주문된 것이 아니라 현대의 해외파견 직원 부인들이 정성스럽게 하나하나 만든 것이었다. 그 꽃바구니의 반응은 의외로 대단했다. 그 다음날 각국 IOC위원들이 회의를 끝내고 로비에 모였다가 정주영 일행을 보면 모두 반가워하며 아름다운 꽃을 보내 주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진심으로 해주었다. 그때 일본측은 IOC위원 부부들에게 최고급 일제 손목시계를 선물했는데 시계 선물에 대한 인사는 없고 꽃바구니에 대한 감사인사만이 만발했다. 역시 값비싼 선물보다는 마음과 정성이 담긴 작은 선물이 인간적인 따스함을 전달할 수 있고 부담감도 안 준다는 사실을 정주영은 알았던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각국 IOC 위원들의 반응은 상당히 호의적으로 변했고 그동안 정주영과 현대 임직원들이 펼친 유치활동은 성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결국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쎄울 코리아!”를 외쳐 일본과의 올림픽 유치전은 한국의 승리로 마감됐다. ◇서산간척지의 신화 - 유조선 공법(일명 정주영 공법) 80년 초 정주영은 바다를 메워 옥토를 만드는 대규모 간척사업을 착수했다. 서산 앞바다는 조수간만의 차가 워낙 커 20만톤 이상의 돌을 구입해 매립해야만 물막이가 가능한 곳이었다. 이때 정주영은 공사비 절감과 공기단축 방안을 강구하다 대형 유조선으로 조수를 막으면 바위덩어리 외에도 흙이나 버력 등 현장 근처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도 물막이를 할 수 있다는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정주영은 『간척지 최종 물막이 공사는 인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공사이며, 설사 인력으로 해결이 된다고 해도 그 엄청난 비용이 문제다』라고 말하며,『밀물과 썰물의 빠른 물살을 막기 위해서는 폐유조선을 침하시켜 물줄기를 차단 내지 감속시킨 다음 일시에 토사를 대량 투하하면 제방과 제방사이를 막을 수 있다』고 현대의 간부진들에게 제안했다. 유조선 공법에 대한 실행 가능성을 현대의 기술진들이 면밀히 분석한 후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자 정주영은 1984년 2월 24일 직접 유조선에 올라 최종 물막이 공사를 진두지휘했다. 그래서 이 ‘유조선 공법’을 일명 ‘정주영 공법’이라고도 부른다. 이 공법 덕분에 현대건설은 계획공기 45개월을 35개월이나 단축, 9개월 만에 완공시킴으로써 총 공사비를 2백 8십억 원이나 절감해 세인을 깜짝 놀라게 했다. 정주영이 창안한 「유조선 공법」은 그 후 미국의 「뉴스위크」와 「뉴욕타임즈」에 소개되었고, 런던 템임즈강 하류 방조제 공사를 수행한 세계적 철구조물 회사인 랜달팔머 & 트리튼 사(社)가 유조선 공법에 대한 문의를 해오는 등 전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소떼몰이 방북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정주영에게 소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 농사를 생업으로 하는 전통적인 농가에서 소는 생계의 밑천이요, 가족과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정주영은 어린 시절 가난이 싫어 소 판 돈을 갖고 무작정 상경했다. 그후 노동판의 막일꾼에서 세계적인 기업가로 성공하기까지 정주영은 묵묵히 일 잘하고 참을성 있는 소를 성실과 부지런함의 상징으로 삼고 인생을 걸어왔다고 한다. 지난 1998년 6월 정주영은 민간기업인 최초로 소떼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 방북하면서 『이제 그 한 마리가 천 마리의 소가 되어 그 빚을 갚으러 꿈에 그리던 고향산천을 찾아간다』며, 『이번 방북이 단지 한 개인의 고향방문을 넘어 남북간의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초석이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고 말한 바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대립과 갈등의 상징이었던 판문점의 빗장을 열게 한 소떼몰이 방북은 정회장만이 생각할 수 있는 창조적인 발상이었던 것이다. 소떼몰이 방북에 대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문명비평가인 기소르망은 “20세기 마지막 전위예술”이라고 평한 바 있다.
2001.03.21 I 이경탑 기자
  • (긴급진단) ②깊어가는 내우(內憂)..커지는 외환(外患)
  • [edaily] 한국 경제가 재도약의 시동을 걸기도 전에 바다 건너에서 불어오는 거센 태풍으로 사면초가 상황에 몰렸다. 경기가 추락하는 가운데 물가는 앙등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 `경제학 교과서를 새로 써야 한다`고 기염을 토하며 10년 장기호황을 구가했던 미국 경제는 지금 증시와 함께 추락할 위기에 처했다. 20일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연방기금금리를 0.5%포인트 인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날 나스닥지수는 4.80%(93.72포인트), 다우지수는 2.39%(238.35포인트) 폭락했다. 미국의 재정 및 통화정책 여력으로 경착륙 가능성은 높지 않다던 연초 각 연구기관들의 전망도 차츰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20일 오후 진념 경제부총리 주재로 개최된 대외경제동향 점검회의에서 참석자들의 60%는 미국의 향후 경기를 비관적으로 관측한 것으로 전해졌다. 거칠게 착륙(rough landing)하되 경착륙(hard landing)까지는 안 갈 것이란 전망도 늘고 있지만, IT제품을 중심으로 한 우리의 수출이 타격을 받기는 마찬가지일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이에 진 부총리도 21일 열린 능률협회 주최 조찬 간담회에서 "미국의 경착륙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며 "이 경우 우리 경제의 성장률은 4%미만이 될 것"이라고 비관적 전망을 내놨다. 그러나 더욱 걱정되는 곳은 일본이다.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을 보낸 일본 경제는 여전히 막대한 금융부실과 낙후된 경제시스템으로 몸살기가 더해가고 있다. 인플레보다 더 무섭다는 디플레가 가속화되고 있는 가운데 성장세 회복 가능성은 보이지 않고 있다. 일본의 문제는 경기를 회복시킬 재정·통화정책의 여력이 거의 소진됐으며, 과감한 구조개혁을 추진할 리더십도 없다는 점이다. 바크레이 캐피탈의 한 분석가는 일본은행의 금융완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일본 경제가 계속 하강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속적인 엔화절하에도 불구하고 지난 1월 4년만에 처음으로 무역적자를 기록한 일본은 2월에도 흑자폭이 25%이상 줄었다. 일본경제의 무역의존도가 10%대에 불과하지만 엔화절하를 통한 수출경기 진작과 디플레 탈출 시도는 불가피해 보인다. 닛케이파이낸셜데일리는 일본은행의 통화확대 조치로 엔화 약세가 지속될 것이라고 보도했고, 도이체방크의 한 투자전략가는 증시급락으로 인해 아시아 국가의 통화가 추가적인 하락압력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같은 일본의 침체와 엔화절하는 미국의 경착륙 우려에 더해 우리 경제를 더욱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전철환 한국은행 총재는 21일 조찬 강연에서 "일본의 경우 경기부양을 위한 재정정책이나 통화정책을 사용하기 힘든 지경에 이른 것 같다"고 진단하면서 "엔화약세의 영향으로 환율이 불안해져 물가관리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달러/원 환율은 지난 19일에 이어 21일 재차 1300원선을 가볍게 상향돌파했다. 특히 미국과 일본경제의 불안심화는 세계적인 유동성 위기를 불러 올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미국 등 국제자본이 아시아지역 투자비중을 급격히 줄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미국 금융시장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일본자금이 대거 이탈하는 악순환마저 우려되고 있다. 재정, 통화, 환율 등 거시경제정책 조합을 적절히 구사하는 데 어려움이 가중되는 상황이다. 이런 외환(外患)에 내우(內憂)까지 겹쳐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2월말 4대부문 개혁 완료를 통해 상시 구조조정 체제 진입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불확실성과 불신감은 제거되지 않고 있다. 특히 문제의 핵으로 지목되고 있는 현대문제는 해결의 모멘텀을 찾지 못한 채 1년 가까이를 끌고 있다. `현대`라면 무조건 불신하고 보는 시장의 시각이 여전해 누구도 선뜻 소비와 투자를 늘릴 생각을 않는다. 정책 일선에 있는 당국자들 조차도 대부분 `현대` 얘기가 나오면 표정이 심각해진다. 현대문제와 직접 관련이 없는 이들은 더욱 비관적이다. 대우자동차 매각 문제는 여전히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동아건설의 회사정리절차 폐지결정으로 대규모 국제송사에 휘말릴 가능성마저 있어 걱정거리가 커졌다. 연초 국민들의 자신감 회복에 주력했던 정책당국도 이제는 `해외충격으로 인한 경착륙` 가능성을 내비치며 `마음의 준비`를 요구하는 모습이다. 기업과 소비자의 호전된 심리에 대해서도 당국은 평가를 유보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해외로부터의 태풍을 막아낼 리더십이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 세무조사 등으로 언론과 팽팽한 긴장관계에 있는 국민의 정부는 급기야 터져 버린 의약분업의 부작용과 건강보험의 재정파탄 문제로 궁지에 몰려 있다. 여기에 지난해 초여름부터 나돌고 있는 `개각설`은 1년이 다되도록 관가를 흔들고 있다. 21일 강연에서 전철환 한은 총재는 `일본과 같은 장기침체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정치적 리더십과 국민적 합의가 있어야겠지만..."이라며 전제를 달았다. 거세게 몰아닥치는 외풍을 막아낼 준비가 우리에게 돼 있는 지 여당과 야당, 정부와 국민 모두가 심각히 생각해 볼 때다.
2001.03.21 I 안근모 기자
  • (증시포커스)럭비공 장세..쿼바디스 증시
  • [edaily] 주가가 덤블링하듯 오르고 내림을 거듭하고 있다. 마치 심술쟁이 뺑덕어멈처럼 변덕이 죽을 끌이는 모양세다. 그러나 주식시장을 탓할 일은 아니다. 세계경제가 어수선하고 투자자들의 마음도 갈피를 못잡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주요국 증시와 더불어 국내증시도 변동성이 확대되고 있다. 세계증시는 튀는 방향을 예측할 수 없는 럭비공과 같다. 최근의 시장 흐름은 쿼바디스라는 단어를 떠오르게 만든다. 순교의 현장을 피하려고 로마를 떠난 베드로가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 베드로는 물었다. "쿼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몇몇 시황분석가들에게 "쿼바디스 증시"를 물었다. 그러나 분석가의 상당수는 난감해하면서 솔직히 "쉬는게 낫다."고 말했다. 부화뇌동하다간 낭패보기 쉽상이라는 말도 덧붙였다.정리해보면 극히 조심스런 형국이다. 공격적인 투자자들은 변동성 클 때 단기 시세를 따먹을 수 있는 기회의 장으로 활용하겠지만, 실제 위험을 떠안고 나선 투자는 성공할 확률은 희박하다. 공격적인 투자자세를 용감하다고 자랑할 때는 결코 아니다. ◇춤추는 증시, 거래소 540선/코스닥 70선 버텨내 15일 종합주가지수는 개장초 큰폭으로 되밀리다 반등을 시도하면서 결국 1.45포인트(0.27%) 떨어진 541.83포인트로 마감했다. 코스닥시장도 70선을 깨고 내려섰다 낙폭을 좁히면서 전일 보다 0.80포인트(1.11%) 하락한 71.24포인트를 기록했다. 장중에 전해진 미국 나스닥선물의 상승반전과 일본증시의 반등세 등이 낙폭을 줄이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하락종목수는 전일 보다 200개 이상 줄었지만, 그래도 거래소(606개)와 코스닥(402개)를 합쳐 1008개에 달했다. 때문에 지수하락폭에 비해 투자자들이 피부로 느끼는 체감지수는 상대적으로 심한 하루였다. 거래소와 코스닥시장의 거래량은 각각 3억8519만주와 3억9576만주로 전일에 비해 거래소는 줄고, 코스닥은 늘었다. ◇누가 사고, 누가 팔았나 외국인은 이날 거래소시장에서 550억원의 순매도를 기록했다. 매수 하룻만의 매도반전이다. 개인도 290억원어치를 순매도했다. 반면 기관은 570억원의 순매수를 기록했다. 최근 어느 투자주체도 매매의 일관성은 없다. 코스닥시장에선 기관과 개인이 각각 57억원과 79억원을 순매수한 반면 외국인은 138억원을 순매도했다. 선물시장에선 외국인과 개인이 각각 1727계약과 1095계약의 매수포지션을 취한 반면 투신은 2716계약의 매도로 맞섰다. 외국인은 현물을 팔고 선물을 산 셈이다. 외국인은 선물에서 사흘연속 매수포지션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워낙 장중 변동성이 커 일관된 흐름으로 파악해서는 곤란하다는 지적이다. 거래소와 코스닥은 물론 선물에서도 방향성을 갖고 움직이는 투자주체는 없는 셈이다. 데이 트레이더가 아닌 이상 투자가 어려운 상황이다. ◇외국인 금융주 집중매도 이날 외국인은 거래소시장에서 금융주를 집중 매도했다. 금융주 매도규모는 전체 매도액을 웃도는 623억원에 달했다. 전일 220억원 순매수에서 대규모 매도로 돌아선 것이다. 그러나 금융주는 기관과 개인의 매수세에 힘입어 낙폭은 크지 않았다. 은행업종은 1.82% 떨어졌고, 증권은 1.04%, 보험은 0.18% 하락에 그쳤다. 이날 외국인의 매도타깃이 된 금융주는 현대증권을 비롯 신한은행, 하나은행, 대우증권, 삼성증권, 한미은행, 국민은행, 외환은행, 대신증권, 대신증권1우 등이다. 경기문제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시점에서 금융주의 향방은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경기가 어려우면 금융기관의 잠재부실이 증가해 결국 금융주는 맥을 못춘다느게 과거 시장이 보여준 학습사례다. 전일 미국을 비롯 일본의 금융주가 급락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다만 각국 정부가 경기부양을 위한 정책을 발표하거나 준비중에 있다. 특히 오는 20일 열리는 미국의 공개시장준비위원회에서 금리를 낮출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게 한가닥 위안이 되고 있다. 그러나 금리의 인하조치가 경기와 기업실적에 반영되는데는 최소 6개월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는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같은 시차를 시장에선 어떻게 반영할지도 지켜볼 일이다. ◇금요일 징크스(?)..신중함을 널을 뛰는 장세는 곤두박질치는 장세 보다 낭패 볼 확률이 높다. 연일 곤두박질치는 하락장에선 쉬면 그만이다. 그러나 널뛰기 장세는 마음 급한 사람을 더욱 유혹한다. 사고 팔다 보면 수수료는 배가된다. 게다가 방향이 한번 어긋나면 그야말로 곤혹치루기 쉽상이다. 16일은 금요일이다. 강세장에선 금요일이든 월요일이든 오를 확률이 높다. 그러나 약세장, 특히 변동성이 확대된 시장에선 금요일은 주의가 요망된다. 오르고 내림이 반복되는 최근의 시장 사이클이 지속된다고 가정할 때 목요일날(15일) 떨어졌으니까 금요일(16일)에는 오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월요일은 다시 생각해 볼이다. 미국증시도 징검다리다. 우리시간으로 16일 저녁에 오르면 17일밤(현지시간 금요일)에는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널뛰기를 전제로 한 것이다. 3월들어 금요일이었던 지난 2일과 10일 모두 주가는 하락세를 보였다. 금요일 징크스라고 불릴 단계는 아니지만, 최근들어 금요일의 변동성이 커지고 있다는 사실은 유념할 일이다. ◇당분간 위험관리 힘쓸 때 세계경제에 대해선 보다 신중한 접근이 요구된다. 세계경제는 미국과 일본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그만큼 영향력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과 일본의 경기상황이 금리인하 조치만으로 회복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선 심각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금리를 인하한다고 경제의 펀드멘탈이 곧바로 회복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전세계는 광우병과 구제역 파동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상당한 파장이 예상되는 대목이다. 소비를 위축시킬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예를 들어보자. 미국은 아직 광우병과 구제역의 징후는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 미국에선 햄버거가 잘 안팔린다고 한다. 고기 때문이다. 그런데 햄버거가 안팔리면, 콜라도 안 팔릴 것이고, 고기 소비가 이뤄지지 않으면 축산농가는 타격을 받게 된다. 한쪽에서 소비가 위축되면 여타부문으로 확산되는 것은 시간 문제일 수 있다. 경기문제가 세계증시를 짓누르는 상황이다. 국내증시도 예외는 아니다. 거시경제의 뚜렸한 개선 조짐이 이뤄지지 않는 한, 위험관리에 나서는 신중함이 요구된다. 경기문제가 거론될 때에는 실적주와 가치주에 대한 관심이 더욱 부각될 가능성이 높다. 쿼바디스 증시에 대한 답은 세계경제가 해줄 것이다. 그러나 그 답을 얻는데는 시간이 필요할 전망이다.
2001.03.15 I 김진석 기자
  •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①오석태 씨티은행 부장(상)
  • [edaily] 채권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최근 금리가 급등하면서 정책당국자들은 서둘러 시장을 안정시키기위한 대책을 내놓고 있다. 일반인들이 쉽게 접하는 주식시장이나 외환위기를 통해 상식이 풍부해진 외환시장과 달리 채권시장은 아직도 상당부분 베일에 가려져 있다. 우리나라 채권시장은 전체규모가 300조원에 달하는 거대한 시장이다. 채권시장은 한 나라의 경제지표중 가장 중요한 금리를 결정한다. 이 시장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각 기관에서 특별히(?) 훈련받은 정예 요원들이다. edaily는 “300조를 움직이는” 채권시장의 중요 인물들을 찾아 거래경험과 철학, 운용중 겪었던 재미있는 경험 등을 들어보는 연속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번주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으로는 지난해말과 올해초 “경기경착륙”과 “V자형 회복”을 가장 먼저 주장, 시장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씨티은행의 오석태 부장이다.(약력은 기사하단 참조) 오 부장은 채권시장에 몇 안되는 전문 이코노미스트로서 서울대 경제학과을 수석으로 입학하고 하바드에서 수학한 “수재형”경제분석가중 한명이다. 그는 통상적인 애널리스트들과 달리 단순한 경제전망에 그치지않고 경제현상과 경제정책에 대해 주관적이고 직설적인 의견을 피력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채권 이코노미스트로서 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는데 또 다른 희망이 있습니까. ▲이코노미스트를 70세까지 하는 것입니다. -직업인으로서 이코노미스트가 아니라..일종의 비전 같은 것을 여쭤본 것인데요. ▲새로운 비전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여유가 없습니다. 평일날은 일에 치여서 살고 있고 게다가 요즘엔 아침에 헬스클럽 다닌답시고 6시에 집에서 나와요. 그게 일과입니다. 어차피 이코노미스트라는 게 정년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는 이 일을 오래하고 싶습니다. -인터뷰 전에 어디 기관에서 세미나를 하고 오셨다면서요. 그 얘기좀 해주시죠. ▲우리 경제 상황이나 현장 분위기가 미국에 의해 이끌려가는게 사실입니다. 저는 진정한 구조조정은 미국에서 독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독립선언을 하려니까 산업생산지수도 안 좋게 나오고 미국 경제가 돌아가는 상황도 많이 안 좋다는게 문제입니다. 지금 방향 제시를 해주어야 하는데 V자 모양이 확실한 것도 아니니 6개월 후에 금리가 4.5%다 뭐다 하는 게 무슨 필요가 있겠나 싶습니다. 전 6개월이나 12개월 전망 따위는 믿지도 않습니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6개월 후의 전망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중요한 건 지금 당장의 방향이 뭐냐하는 것이지요. 과감하게 말하자면 "한국경제는 올해 하반기에도 반등없다" 라고 말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게 잘 안됩니다. 왜냐하면 확인이 안 되니까요. "V자 회복은 전망이 아니라 희망이다" -V자 회복에 대해서는 전망이 아니라 일종의 희망사항이라는 말씀도 하셨는데요. ▲지금 문제는 한국경제가 아니라 미국이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미국이 쓰러지면 한국은 없습니다. 미국이 어떻게 되느냐가 지금 상황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화두입니다. 지난 5년 동안 미국의 초과성장을 이끌어 온 건 결국은 IT산업입니다. 그런데 이게 흔들리고 있어요. IT가 무너지면 전 세계경제는 없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미국의 어떤 부분이 취약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금융시장이 그린스펀의 말 한마디에 목 매달고 있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취약점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스닥이 하루에 4-5%씩 내렸다 올랐다 하는데 이건 정상이 아니거든요. 한국은 주가가 1월에 많이 올랐을 때도 "이걸로는 안된다"며 전전긍긍하고 있는 상황인데 미국은 이나마도 없지 않습니까. -시티그룹의 미국경제에 대한 전망은 긍정적이지 않습니까. ▲나름대로 긍정적으로 보고 있긴 합니다. 처음에는 시티도 부정적으로 보긴 했는데 그 다음 다른데서도 다 그런 식으로 따라오고...그러니 차마 "미국 경제 올해 내년 별볼일 없다" 라고 하기가 어려운 것이죠. 게다가 내가 봐도 미국 사람이 미국 경제에 대해서 그렇게 부정적으로 쓰는 것이 상당히 힘들 것이라고 생각해요. -일전에 씨티은행이라는 기관이 한국 금융 시장에서 일정한 롤이 정해져있어서 리서치 페이퍼가 제약받는 부분도 있다고 하셨는데. ▲그게 어떻게 보면 좋을 수도 있습니다. 내부자가 하나는 있어야 하니까요. 한국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사람은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제 위치가 무척 특별합니다. 저는 외국기관에서 일하지만 한국인이고 그래서 “외국기관이 한국을 좋게 본다” 라는 점이 작용할 수도 있는 것이죠. 이런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매주 리포트를 쓰셔야하는데요. 부담이 되시죠. ▲쓰다가 쓰다가 안되면 “이번주에 아무것도 없다" 라고 보내면 그만인데 그럴수는 없지 않습니까. 저도 기자들처럼 다음 리포트를 뭘로 써야할지 늘 고민합니다.(웃음) 사실 생각이야 많지만 그걸 일일이 다 쓸 수도 없는 노릇이고...사실 인플레이션, 인구증가율, 자본축적 이미 이 세개 그래프가 꺾였습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금리를 끌어내린 배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해 채권수익률 급락 이유있다 -지금까지 채권시장이 이유있는 강세장이라는 의미인가요. ▲예. 사실 지금 아무도 작년 올해초 금리가 떨어진 이유를 말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코스닥거품처럼 쉽게 꺼지는 것도 아니고. 금리가 내려갔다는 사실의 70-80%는 (펀더멘털로) 인정을 해줘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연초 랠리는 좀 과하지 않나 싶어요. 미국이 변수이기는 하지만. 만약 2월에도 경제가 안 살아난다면 좀 더 강력한 경기부양책을 써야합니다. -리포트를 쓰실 때 여러가지 경제지표를 참고하실 텐데요. 무엇을 주로 보십니까. ▲저는 기본적으로 우리나라 지표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숫자의 오류 가능성이 너무 높아요. 일례로 산업생산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이 40%이상인데 이것으로 진정한 산업생산을 평가할 수는 없죠. 미국처럼 다양한 데이터를 모두 봅니다. 남들이 잘 안보는 고용지표도 참고하구요. 저는 어떤 지표를 보느냐보다는 그 지표의 이면에 숨겨진 진짜 뜻이 무엇인지 고민합니다. -애널리스트라는 것이 한쪽이 약하다고 하면 연쇄적으로 약하다고 하는 군중심리 같은 것이 있는데요. ▲그런 묘한 심리가 있습니다. 한 쪽에서 나쁘다고 쓰고 뒤따라서 또 쓰고 그러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마저도 "아닌가" 하고 갸우뚱하게 되고 그래서 상승작용을 일으키죠. 그 대표적인 예가 미국 애널리스트들이 기술주에 대해 누가누가 더 나쁘게 보나 하고 경쟁하는 것입니다. 이제 내성이 생길만도 한데. 그 사람들은 아마 70달러 하던 시스코가 10달러가 돼도 직성이 안 풀린 듯 합니다. 이미 닷컴들은 다 맛이 간 상태고 남아있는 것도 거의 없어서 지금 그 쪽에서는 그런 주식들을 “ex-블루칩” 이라 부릅니다. 예전에 잘 나갔지만 지금은 애물단지에 불과하다는 의미죠. 물론 IBM, GE 등 진짜 블루칩들은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하지만 한 때 뉴블루칩이라 불리며 미 경제의 상승을 주도했던 선마이크로시스템즈 같은 기업들의 주가가 3분의1 수준으로 떨어졌는데도 아직 PER가 높다는 게 미국의 문제죠. -미국 경기회복에 대한 전망이 수정될 가능성도 있습니까. ▲수정은 언제든지 될 수 있습니다. 원래 V자 회복 전망은 성장률에 기인한건데 비관적 시나리오로 보면 2% 대로 간다는 전망도 나올 수 있습니다. 일부 국내 증권사에서는 성장률이 2.8%까지 내려간다고 강한 어조로 썼지만. 저도 물론 그렇게 할 수는 있습니다. 홍콩에 있는 아시아리서치팀 보스한테 "까짓거 성장률 2%대 라고 쓸까요" 라고 물었더니 "네가 나설 필요 없다. 어차피 안 좋다는 거 다 알고 있는데 적당히 깎아라"라고 하더군요. 나와있는 수치나 싸이클상으로 보면 올해 하반기쯤에는 반등이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하반기에는 V자 회복이 있을 것이다라고 쓴 겁니다. 한국에서는 이제까지 V자 회복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구조조정보다 경기부양이 우선이다" -지금까지 써낸 리포트는 제목 등이 무척 강렬해서 마치 주식쪽에 있던 “스티브 마빈”을 연상시킨다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뭐가 그렇게 강렬하죠?(웃음) -시장이 기억하는 문제작이 2편이나 있지 않습니까. “하드랜딩”과 “V자회복”. 두가지 주제 모두 오부장께서 먼저 언급한 것 아닌가요. ▲앞뒤말이 맞지 않는다고 비판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V자 회복이 되려면 하드랜딩이 앞서 있어야 가능한 것 아니냐고 말하죠. 골이 깊어야 산도 높아지는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지난해말에는 분명 하드랜딩을 이야기하셨는데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걸 안 하면 시장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것과 둘째는 정부에게 신경 좀 쓰라는 의미였죠. 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도 모르고 그 때 정부는 구조조정(restructuring)이니 뭐니 한다며 거기에만 신경쓰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restructuring”이라는 말을 무척 싫어합니다. -왜 그렇죠? ▲restructuring이라는 게 말이 쉽죠. 한 꺼풀만 벗겨서 "대체 restructuring이 뭐냐" 고 물어보면 사람마다 다 다르게 이야기합니다. 이코노미스트들은 경제학을 배운 사람인데 경제학 교과서에는 restructuring이라는 단어를 눈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어요. 지금 노조는 구조조정 결사반대를 외치고, 정부는 구조조정 해야한다고 난리고, 외국 사람들은 한국은 구조조정이 안 돼서 문제라고 하는 게 우리의 현실 아닙니까. 그럼 이게 대체 뭐냐는 말이죠. 시티 내부적으로는 restructuring에 대해 경기반등의 필요조건은 아니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restructuring이 안돼서 “너희는 꽝이다”라는 건 상황을 너무 단순하게 보는 것이고 오히려 우리는 경기가 반등했을 때 restructuring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restructuring을 제대로 안 할 바에는 경기부양이라도 하라는 거죠. 근데 그걸 못하니...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라는 식은 곤란하다는 겁니다. -손놓고 있지만 말고 뭔가 해야한다는 뜻입니까. ▲물론입니다. 사실 경기부양책을 쓰면 국내에서는 체감하기 힘들지 몰라도 외국투자자들은 더 좋아해요. 그 단적인 예가 일본이죠. 자기들이 다 일본주식 사 놨는데 주식 값이 올라야 할 거 아닙니까. 사실 외국인들이 무척 이중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중요한 건 성장이지 구조조정이 아닙니다. 자기가 투자한 돈이 아깝기 때문에. -결국 중요한 건 수익성(earnings)인 것 같네요. ▲earning이든 뭐든 무엇보다도 기업경기전망(Business outlook)이 밝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earning도 나오게 되죠. 사람 자르는 식의 구조조정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미 한국은 사람을 많이 자르기도 했고. 심리적인 안정이 중요 -오부장께서 쓰신 “경기부양을 선택하라”는 보고서는 edaily내에서도 논란이 됐습니다. 경기부양이든 구조조정이든 둘 중 하나는 해야하는데 하려면 경기부양을 해야한다는 내용을 보고 씨티가 정부를 도와주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혹시 그 보고서 이후 정부측에서 만나자는 제의는 없었나요? ▲전혀 없었어요.(웃음) 기본적으로 씨티에서도 현대전자 문제에 깊이 관여했기 때문에 다른 이들이 다 나쁘다, 쓰러진다 말할 때 우리까지 그러면 안된다는 건 있을 수 있죠. 그렇게 하면 완전히 숨 넘어가는 사람에게 칼 꽂는거 아닙니까. 어떻게 보면 씨티에서 정부보다 먼저 현대전자가 괜찮다고 판단한 거죠. 사실상의 경기부양 효과를 일으켜 사람들의 심리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취지였습니다. 단기적이지만 일조를 했다고 봅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에요 그린스펀의 말 한마디에 시장이 쏠리는 이유말입니다. 지금 당장의 금리인하가 큰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안정감을 얻고 싶은 심리죠. -다른 이코노미스트들과 교류가 있습니까. ▲없어요. 저는 제 직업을 청기와장수같다고 생각합니다. 교류할 시간도 없고, 사실 주식시장의 애널들을 보면 서로에 대해서 경쟁심리도 많이 느끼는 것 같은데 그런 건 별로 없어요. -하바드에서 공부할 때 전공분야는 뭐였습니까. ▲거시경제, 특히 소비 관련을 공부했습니다. 소비가 무엇에 의해서 결정되느냐 같은 주제로. 박사학위를 끝내지는 못했어요. -유학을 하게 된 동기는 뭐였습니까. 고등학교때부터 대학졸업때까지 수석을 놓친 적이 거의없다고 들었는데요. ▲학력고사 수석이라고 알려져 있을 뿐이에요. 그거 말고는 뭐...원래는 이과쪽을 지망하려했습니다. 아버님이 서울대 법대를 나오셔서 공무원 생활을 하셨는데 공무원 생활이라는게 빤해서 어머니가 힘들어하셨어요. 아버님을 보면서 법대갈 생각은 추호도 안했죠. 공무원은 돈 못 번다는 생각이 뼈속 깊이 박혀 있어서. 나중에 보니까 서울대 법대가 무척 좋은 학교더라구요.(웃음) 자연계로 가려니 아버님이 과학자해서는 한국에서 출세하기 힘들다고 극구 말리시고, 솔직히 지금 철들고 나니까 아버님의 그 말씀이 공감이 갑니다. 그래서 전공을 결정하려고 보니 남는 건 경제학밖에 없었어요. 요즘에야 젊은 사람들이 생각이 바뀌어서 경영학과도 많이 가지만 우리 때만 해도 문과생들이 택할 수 있는 과는 법대, 그게 싫으면 경제학이었으니까요. 그래서 학교 졸업하고 보니 뭔가 허전했습니다. 바로 취직하기도 그렇고, 다른 친구들처럼 고시 볼 마음도 없고, 그래서 유학을 선택했죠. "자네는 교수될 것 같지는 않은데" -대학시절에도 역시 공부를 잘 했다던데 교수님들의 주목도 많이 받았겠어요. 어떤 분들이 조언을 많이 해주셨습니까. ▲정운찬 교수님, 한승수 교수님 등이죠. 뭐 맨날 일등만 한 건 아니었고 성적은 그런대로 잘 나온 편이었어요. 어쨌든 주목을 받고 장도에 오르긴 했는데 한승수 교수님이 악수하면서 그러시더라구요. 그 때 막 비서실장 하시고 주목을 많이 받으시던 때인데 그분이 그러셨어요. "자네는 교수될 것 같지는 않은데...뭔지는 모르지만 무척 재미있는 일 할 것 같구만" 이라고. -유학생활은 어땠나요? ▲가서 공부를 따라가는 건 사실 어렵지 않았어요. 그러다 중간에 군대 문제가 걸려있어 다시 한국에 들어와 입대했죠. 군대에 갔을 때 사수가 하버드 MBA를 나온 사람이었습니다. 그 선배가 투자은행이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 가서 이코노미스트라는 걸 하면 별로 하는 것 없이 돈도 많이 준다고 하더라구요. 가뜩이나 교수는 싫고 뭐 딴 거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그런 것도 있나 싶었죠. 교수만 해야하는 줄 알았는데 새로운 일이 생긴거죠. 군대 마치고 돌아갔더니 2년의 공백기간 때문인지 공부가 잘 안됐어요. 논문도 잘 안 써지고. 박사 수료까지는 논문만 남았었는데 이 논문 쓴다는 게 쉽지가 않더라구요. 게다가 지도교수라는 사람이 "너는 박사하는 것 보다 딴 거 하는게 더 맞을 것 같다" 고 말하더군요. 그 말은 즉 "너는 여기 적당하지 않으니 딴 데가서 딴 길 알아봐라" 이거죠. 그래서 고민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일단 한국에 들어가고 보자. 연봉 천만원을 받더라도 들어가서 일 하는게 낫지 여기선 폐인되겠다" 라는 생각에 귀국했습니다. 그 때 우연찮게 지금 삼성증권 상무로 계시는 박진회 상무를 만나 씨티은행 입사 제의를 받았습니다. -그게 언제죠 ▲96년이죠. 그리고 97년 말에 IMF가 터지면서 이코노미스트로서의 눈을 뜨게 됐습니다. 그 전까지는 뭐 이코노미스트라는 것이 필요하지도 않았고. 98년부터 현장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이코노미스트는 실전 경험이 풍부해야 -학위를 목전에 두고 귀국했는데 거기에 대해 일말의 미련이나 후회는 없습니까. ▲없어요. 현장에서 배우는 게 거기서 허송세월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 계통의 사람들 보면 박사학위 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어요. 박사학위 소지자들은 대부분 IMF나 세계은행에서 커리어를 쌓고 돈 벌겠다고 투자은행쪽으로 발길을 돌린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 얘기들어보니 IMF나 세계은행도 거의 제2의 재경부나 마찬가지더라구요. 상당히 관료적인 조직이라 연줄이 중요하고 위로 올라가는 거 바늘구멍 뚫기보다 힘들고. 그러니 연봉 몇 십만불 주는 투자은행에 오는 거죠. 박사학위 목전에서 관둔 나같은 사람도 무척 많아요. 따지고 보면 그린스펀도 나랑 똑같은 경우죠. 나중에 뉴욕대에서 박사학위를 주긴 했지만. 우리 리서치 헤드도 박사학위가 없습니다.(웃음) 내가 대학교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면 모르겠는데 그럴 맘도 겨를도 없고...그냥 이거 70세까지 할 생각입니다. -학문으로서 경제학을 택한 것은 만족하십니까. ▲경제학 이론과 금융시장에서 이코노미스트가 봐야할 것은 전혀 별개입니다. 경제학원론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는 첨단을 달리는 실무 현장에서 결론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죠. 경제는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대학에서 배운 건 오직 그거 하나죠. 저는 정말로 이코노미스트가 연예인이랑 같은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직접 자산운용을 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까. ▲아직은 이코노미스트로 할 일이 남았기에 그런 생각 없습니다. 전혀 생각을 안해본 건 아닌데. 글쎄...만일 하게 된다면 스트레티지스트 정도? 이렇게 해라 저저렇게 해라 전략을 제시해주고 실무는 밑에 있는 사람들이 하고, 그런 방식으로 한다면 모르죠. 내가 직접 한다? 우선 나이가 걸려요. 대부분의 딜러가 30대 초반이 아닙니까. 30대 후반 40대 초반 돼서 오면 누가 받아줄까요. -기회가 주어진다면 국내은행에서 일할 생각도 있습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그쪽은 경험이 없어서. 사실 글로벌 리서치조직의 일원으로 있다는 것이 아직 제게는 많은 이득이 됩니다. 배울점도 훨씬 많고. 저를 씨티에 입사하게 만든 박 상무께선 그런 고민 끝에 회사를 옮기셨습니다. 물론 저도 그 분이 삼성증권으로 옮길 때 하셨던 고민을 할 때가 오겠죠. 하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데이터를 의심하고 숨겨진 의미를 찾아라" -다른 이코노미스트들과 자신의 차별점이랄까 장점은 무어라고 보십니까. ▲앞서 말했듯이 숫자를 한번 더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 잘은 모르지만 결과물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데이타가 나오면 우선 의심을 해봐야하는데 배운 이론이라던가 과거 경험이라던가 그런데 얽매여서 단순하게 생각한다” 는 생각이 들때가 있습니다. "이코노미스트로서의 한국의 프로페션은 내가 만든다" 라는 생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러더군요. "이코노미스트는 무조건 극단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고. 수없이 많은 이코노미스트들이 수많은 리포트를 써내는데 극단적으로 쓰지 않으면 누가 그걸 읽어주겠습니까. -리포트를 쓰면서 생긴 에피소드는 없나요? ▲인터넷이 발달한 후 이코노미스트들의 리포트를 쉽게 쉽게 받아보는 건 좋은데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 부담이 됩니다. 저번에도 이 정도면 조정을 받을 것 같다고 썼더니 딜러가 전화해 "오부장. 그런거 쓸거면 미리 얘기나 해주고 쓰지. 어제 채권 샀는데 어떡하라구" 라고 하더라구요. 그거 말고는 글쎄? 아마 옛날에 쓴 리포트 지금 읽으면 부끄러워서 못 볼겁니다. (인터뷰 하편으로 이어짐.)
2001.03.10 I 정명수 기자
  • (초점) 웹밴의 쓰디 쓴 교훈- NYT
  • 인터넷을 이용해 잡화 비즈니스를 개혁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까지 잡화 비즈니스 개혁을 위해 10억 달러나 쓴 웹밴의 사례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19일 뉴욕 타임스가 보도했다. 웹밴은 실패한 인터넷 상거래 업체의 대명사격으로 간주되고 있다. 다음은 그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지금까지 12억 달러의 자금을 끌어들인 웹밴은 아마존에 이어 두번째로 큰 온라인 상점이다. 그러나 부엌 선반까지 식품을 배달하는 것은 UPS를 통해 책을 보내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처음 장사를 시작한 샌프란시스코에서 웹밴은 그 지역 가구의 6.5%로 부터 주문을 받는 성과를 거뒀다. 이는 1년 반 동안에 이룬 성과치고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절반 이상이 두번 다시 주문을 내지 않았다. 그리고 시스템 운영에 돈이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손익분기점을 맞추기 위해서는 연간 매출이 1억 2500만 달러가 넘어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3분의2 정도를 달성했을 뿐이다. 웹밴의 가장 큰 문제는 다른 문제를 풀기 전까지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웹밴은 매 분기마다 1억 달러의 현찰이 줄고 있는 중이다. 지금 현재 갖고 있는 현찰은 2억 1200만 달러. 웹밴은 원래 작년 9월까지는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흑자로 반전할 것이라고 다짐했으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그 후로는 더 이상 현찰을 끌어들이지 못했다. 연간 400만 달러의 돈을 받고 앤더슨 컨설팅(액센추어)에서 일하다가 웹밴의 최고경영자(CEO)가 된 조지 샤힌은 "만약 당신이 2년 전에 나에게 "모델이 괜찮느냐"고 물었다면 나는 "아니다. 거품이 꺼지고 말 것이다"라고 말했어야만 했을 것이다"라고 실토했다. 그는 "당시에 나는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애널리스트들은 웹밴이 가능한 웅장하게 보이려고 했다고 말한다. 웹밴은 아주 복잡하고 비싼 자동화된 배달 시스템에 모험을 걸었다. 그리고는 이 비즈니스 모델이 작동한다는 것을 입증하기도 전에 26개 도시로 확장해 나갔다. 로버트슨 스티븐스의 애널리스트인 로렌 레비탄은 "그들은 한 시장에서 그들 모델을 완벽하게 만든 뒤 긍정적인 현금흐름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할 필요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웅장함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프로그래머들은 더 이상 미래 주방을 개발해내지 못하고 있으며 현재의 매출을 증진시킬 수 있는 전자 쿠폰 시스템만 만들려고 애쓰고 있는 중이다. 웹밴은 이미 26개 도시 진출 계획을 포기했으며 뉴저지 등의 3500만 달러짜리 창고 오픈 계획도 철회했다. 이러한 사업 축소와 여러차례에 걸친 해고 등 웹밴의 구조조정 계획이 성공한다면 웹밴은 올해 말이면 은행에 100만 달러의 현금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웹밴의 주가는 현재 34센트다. 최고가보다 99%나 떨어졌다. 나스닥은 이미 웹밴의 거래를 중단시킨 상태다. 웹밴이 망한다면 이는 지금까지 있었던 인터넷 사고로는 가장 큰 규모가 된다. 벤치마크 캐피털, 세퀘이아 캐피탈, 골드만 삭스, CBS 등이 7억 9300만 달러를 투자했다. 또한 웹밴이 인수한 홈그로서에는 다른 기업들이 4억 3000만 달러를 투입했다. 문제는 그 돈이 모두 고객들이 어떠한 서비스를 원하는 지에 대한 리서치없이 투입됐다는 것이다. 폐쇄적인 성격인 수학자이자 창업자인 루이 보더스는 복잡한 재고 관리와 배급 시스템 수립에만 집중했다. 샤힌에 따르면 "보더스는 우리가 만들기만 하면 고객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보더스는 지금까지 어떠한 유통업체도 하지 못했던 "많은 상품에 대해 싼 가격에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웹밴은 이에 따라 30분 내에 배달을 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피포드를 비롯한 경쟁업체는 2시간 배달을 하고 있었다. 보더스는 "크지 않으면 망한다"는 인터넷 투자 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벤치마크 캐피털의 데이비드 베르니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베르니는 지난 주에 "좀 더 적은 수의 시장에서 했었더라면 하고서 말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샘 월튼이 월마트를 개설하는 것보다 더 빨리 비즈니스를 확장할 수 있는 만큼 돈을 끌어들일 수 있는 시장이 있었다. 그러나 돈을 끌어들이고 브랜드 네임을 세우고 투자자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서는 잡음 수준이 높아질 수 밖에 없다"고 아직까지도 보더스의 비즈니스 모델을 옹호하고 있다. 그는 또한 웹밴이 두려워 했던 것은 경쟁업체가 앞서나가지 못하도록 빨리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사실 피포드, 스트림라인, 아마존, 클라이너 퍼킨스 코필드&바이어스 등이 홈그로서를 지원하고 있었다. 결국 양측에서 군비확장 경쟁이 일어났다. 홈그로서의 창업자인 테렌스 드레이튼은 "모든 투자은행 직원과 금융 조언자들이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멀리 더 빨리 나가라고 재촉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돈은 끝없이 공급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작년 여름 인터넷 주가가 급락하면서 홈그로서는 웹밴에 인수됐다. 홈그로서의 후원자들에게 있어서 웹밴의 매각은 충격적인 일이었다. 왜냐하면 홈그로서는 더 싸고 덜 자동화된 창고를 가진, 시장의 실제와 보다 많이 부합하는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홈그로서의 초기 투자자중 한 명은 "우리가 더 컸었고 더 잘했고 수익을 내는데 더 근접해 있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웹밴이 월스트리트를 향해 허황된 소리를 함으로써 우리의 장점을 훼손시켰다"고 말했다. 웹밴의 경영진들도 홈그로서의 1000만 달러짜리 창고가 자신들의 3500만 달러짜리 창고보다 더 낫다고 말한다. 웹밴의 사장인 로버트 숀은 "우리가 만약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한 시장용 인프라를 구축할 것"이라고 말했다. 웹밴은 샌프란시스코에 하루에 8000개의 주문을 처리할 수 있는 창고를 지었다. 이는 이 지역의 전체 잡화 매출의 3%가 넘는 규모였다. 15개월 안에 손익분기점을 맞추기 위해서는 3000개의 주문만 처리할 수 있으면 됐다. 그러나 작년 말까지 주문은 하루에 2150개 밖에는 안됐다. 웹밴은 75달러 이하의 상품 주문에 대해서는 4.75달러의 배달료를 부과, 비용을 줄였다. 그리고 30분 배달도 지금은 한 시간으로 연장했다. 또한 무엇보다도 웹밴은 기존 소비자들에게 신뢰를 주어야만 했다. 평균적으로 웹밴의 고객들은 분기당 1.8건 밖에는 주문하지 않고 있다. 현재는 핵심 고객을 상대로 한 이메일 마케팅을 강화하고 있으며 고객들이 원하는 상품을 추가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일부 고객들은 웹밴이 쿠폰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불평을 터뜨리고 있다. 또한 기저귀와 종이 타월과 같은 저가 패키지 상품도 내놓고 있지 않다고 한다. 따라서 웹밴은 지금 새로운 충성도 보상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는 중이다. 웹밴은 지금 올 3분기면 샌프란시스코에서 손익분기점에 도달할 수 있으며 올 연말까지는 로스앤젤레스 지역에서도 이익을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그러나 넷스케이프의 전 최고경영자인 제임스 박스데일은 "모델을 입증하던지 안하던 지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필요는 혁신의 어머니"라고 잘라 말했다. 샤힌은 "앞으로 2개 시장에서 손익분기점에 도달한다면 필요 자금을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미래는 어두울 것이며 용서를 구할 수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2001.02.20 I 김홍기 기자
  • 증권사 사장단 청와대 간담회 발언록(전문)
  • 8일 낮 청와대에서 개최된 김대중 대통령과 증권시장 관계자들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업계 대표들은 "기업연금 제도의 조기도입이 필요하다"고 김 대통령에 건의했다. 이에 김 대통령은 "매일같이 증시상황을 주시하고 있다"며 "정부도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화답했다. 다음은 이날 박준영 청와대 대변인이 전한 간담회 발언록. ▲오호수 LG투자증권 사장 = 새해 들어 증권시장은 당초 예상과는 달리 큰 활력을 되찾고 있다. 정부가 수요보강을 위해 연기금 주식투자를 늘리고 근로자 주식투자, 회사채 신속 인수제 등 자금시장 안정을 위한 조치들을 취한데 힘입어 이러한 증시정책에 공감하고 신뢰를 되찾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 증권시장은 선진국에 비해 취약하다. 개인투자 거래비중이 높고 기관투자가의 역할이 크게 부족하다. 외국인 자금 움직임에도 민감하다. 기업연금을 도입해 장기투자를 유도하면 기관투자가들의 역할을 높일 수 있는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방안이 될 것이다. 우리 주식이 제값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다. 정부의 지속적 개혁과 금융개혁에 힘입어 여러 제도와 여건 개선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한다. ▲이덕훈 대한투자신탁증권 사장 = 증권시장에 대한 대통령의 관심을 고맙게 생각한다. 그동안 시장이 위축돼서 걱정을 끼쳐드려 죄송하다. 작년에 상당히 어려웠다. 채권시장은 거의 거래가 중단되는 등 신용경색 현상이 나타났다. 작년말 대규모 기업 연쇄부도의 우려가 있었다. 특히 투신은 고객의 불신이 강해 기관투자가로서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연말에 환율을 1300원대에서 1100원대로 과감히 조절해주고 신주인수제도 등을 도입해 채권시장도 경색현상이 풀리고 주식시장도 좋아지고 있다. 정책이 시기를 놓치지 않고 시행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업계는 많이 낙후돼 있다. 시장경제가 움직이는 것은 90년대 후반부터 가능했다. 증권회사의 고객 수요 충족 노력이 부족했다. 업계의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정부가 시의적절한 정책을 세워주신다면 증권사의 경쟁력이 향상될 것이다. 우선 업계를 신뢰해 달라. 특히 증권업계는 위험을 갖고 미래를 예측하고 산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과거 잘못으로 민·형사 책임을 받고 있다. 옥석이 구별되지 않아 사장이하 전직원이 위축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자유화에 대한 규정과 규제부문에 대해 정부와 업계가 신뢰하고 시기를 놓치지 않고 개선해 준다면 기여할 수 있다.정부도 기업마인드를 갖고 업계에 동반자적인 도움을 줬으면 한다. ▲최운열 한국증권연구원 원장 = 대통령께서는 증시활성화 방안을 물었을 때 철저한 기업개혁이 활성화 방안이라고 정확한 답을 했다. 대통령이 지적한 대로 구조조정 과정에서 증시 불확실성이 높았고 기업 지배구조가 개선되지 않았다고 시장이 평가했다.합리적이고 객관적 기준에 따라 시장에서 퇴출될 수밖에 없도록 해달라. 전체 주주 중심의 기업이 되도록 지배구조를 개선해야 하나 시장에서 평가를 못받고 있다.당근 정책은 어떤가.시장을 신뢰할 지배구조를 갖춘 기업에 금리 차등, 신용평가 우대, 회사채 납부시 수수료 차별 등으로 당근정책을 쓰면 달라질 것이다. 외국 기관 투자가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지배구조를 바꾸면 38%이상이 프리미엄을 지불하겠다는 답변을 했다.지배구조를 바꾸면 이렇게 좋아진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개인투자가 비중이 너무 높다. 기업연금제를 가능한 조속히 추진하는게 좋겠다. ▲진념 경제부총리 = 오사장이 기관투자가의 비중 높여야 한다면서 코리아 디스카운트 문제를 제기한 대 대해 전적으로 공감한다. 혹시 오해가 있을까봐 지적하는데 환율 조정은 시장 상황에 과감히 맡겼다. 정부도 업계를 신뢰하는데 업계도 정부보다 시장으로부터 신뢰를 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규제완화할 것을 지적하면 반영하겠다. 코리아 디스카운트과정에서 구조조정, 지배구조 개선 등에 대한 얘기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정부는 인위적인 정책은 쓸 수 없고 안쓰려고 한다. 투명하고 공정한 거래가 이뤄지는 방향에 중점을 두고있으며,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기업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정부는 증시활성화와 관련해 시장 시스템으로 자리잡고 투명하고 공정한 거래가 이뤄지는 방향이면 몰라도 기업 가치를 높이는 것은 기업 자체 일이다. 내외투자가에 대해 주주중심으로 경영하고 있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수익성을 높이는 것이 회사가치를 극대화하고 주가를 올릴 수 있는 것이다. 증시활성화가 수많은 투자가에게 좋은 기회를 준다고 생각하고 심리적 안정에 역점을 두겠다.2월말까지 개혁을 마무리짓고 그 이후에는 상시적 개혁과 자기 혁신이 이뤄지도록 하겠다.지금 어렵지만 구조개혁하고 투자 심리를 안정시키면 확실히 비전이 있다. 증권과 자금 관리의 최고경영자 여러분이 스스로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금년은 증시가 다시 도약하는 해로 하자.귀를 열어놓겠다.힘을 모으자.그 심부름을 내가 하겠다.어렵지만 이같은 구조조정 노력을 하고 투자 소비심리가 안정되면 비전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할 것이다.지나친 자만심은 안되지만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우리가 자신감을 안 가지는데 외국인이 오겠나. ▲대통령 = 오늘 이 자리에는 증권관리소 이사장,증권계의 지도자들이 모였다. 먼저 작년에 어려움을 겪은데 대해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 드린다. 450만명의 투자가들, 중복까지 치면 780만명의 투자가들이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100조원의 손실을 입은 작년 상황에 대해 때로는 밤잠을 설치면서 걱정하고 가슴아프게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힘을 내서 새해부터 증시가 활력을 찾고 있어 감사하게 생각한다. 올해는 작년에 잃은 것을 회복할 수 있는 증시로 발전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정부도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지금 자본시장이 회복중에 있고 증시도 약간 활기를 띄고 있다고 해서 매일 같이 TV에 나오는 증시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IMF를 극복할때 증시가 도움이 되고 벤처창업의 동기부여도 된 것을 기억하면서 금년에도 더 한층의 역할을 부탁한다. 증시활성화는 왕도가 없고 정도만 있다. 정도의 하나는 철저한 구조조정을 통해 기업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또한 증시안정정책을 세워 주변 환경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기업이 경쟁력이 있어야 주식이 팔린다. 기업의 경쟁력은 이윤을 내야하는 것이다. 돈을 버는 기업, 부채가 적은 기업, 재무구조가 투명한 기업, 이런 기업이 우리에게 필요하다.이를 위해 우리는 철저한 구조조정을 하고 기업의 상품가치를 높여 증시에 내놓아 하며 관련기업에 대해서 그런 것들을 엄격히 주문해야할 것으로 생각한다. 정부는 4대부문 개혁에 대해 어떻게 보면 열심히 했고, 어떻게 보면 신속 철저하지 못했다. 그점을 반성하고 작년 하반기부터 집중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금융개혁을 했고 기업도 56개 기업을 퇴출시키고 살릴 것은 과감히 살리는 노력도 해왔다. 공공부문도 한전,한국통신,한국중공업,철도청 등 민영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작년 연말 금융대란이라고 했는데 정부도 큰 곤혹을 느꼈다. 두 은행이 파업해도 걱정이었다. 전 금융기관이 파업한다고 할 때 위기의식도 느꼈다. 그러나 정부는 확고한 원칙을 갖고 대처했다. 노동조합은 근로조건을 가지고 싸울 수 있으나 노동조합이 합병 등 경영에 간섭하는 것은 용납해서는 안된다. 주주와 이사가 결정할 일이지 노조의 일이 아니다. 정부는 노동자들에게 집회,파업,정치활동 등을 모두 합법화해 주었다. 그러면서 정부는 조건을 제시했다.모든 자유를 주겠다,그 대신 법을 지키고 폭력을 써서는 안된다.그런데 금융계가 파업을 했다.정부는 여기서 정권의 안위를 걸고 반드시 극복하겠다,노동질서를 바로 세워 새로운 노사문화 만들자는 각오로 임했다. 그 결과 희생없이 무사히 해결됐다. 이것은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전환점이 될 것이다. 올해 우리 노동계는 작년보다 더 안정돼 갈 것으로 확신한다. 노동계와 대화해서 어려운 문제를 풀고 있고 있다. 또 많은 사업장이 무쟁의 선언을 하고 있다.우리가 세계적인 경쟁에서 이기려면 구조조정을 철저히 해야하며 노사가 힘을 합해 이겨내야한다. 외환위기 당시 기아자동차가 파산해 15000명을 해고했다. 그러나 경쟁력이 강화되니까 다시 자동차가 팔리고, 나갔던 노동자들이 대부분 복귀했다. 현대도 그런 예에 속한다. 따라서 개혁을 철저히해 경쟁력을 갖는다는 것은 국가경제와 기업, 노동자를 위해 좋은 일이다. 우리는 노동자를 위해 구조조정을 철저히 해나갈 것이다. 기업이 경쟁력을 높혀야 돈을 벌고,주식시장에서 기업이 값있는 상품으로 등장할 수 있지 않겠는가.동시에 증시가 안정적으로 발전되도록 정부는 자본시장육성에 최선을 다할 것이고 자본시장 발전이 기업발전에 연결되도록 할 것이다. 서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우리는 장기안정을 위한 수요기반 조성을 위해 연기금 투자를 확대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시가총액대비 연기금 투자비율이 미국이 24%, 영국 33%,한국은 1%이다. 우리는 연기금의 주식투자비중을 앞으로 대폭 늘려나가야 되지 않나 생각한다.경제 부총리가 적극 추진할 것이다. 선진국의 연기금이 증시 안정의 중요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고 듣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런 점을 참고로 해야 할 것이다. 회사채 신속인수는 국내외적으로 비판이 있다. 그러나 이 조치가 매우 중요했다는 평가를 하는 것을 보고 감사히 생각한다. 이 문제는 IMF도 필요성을 인정했지만 동시에 단기에 그쳐야한다는 주문도 있다. 이 주문도 명심해야 한다.언제나 긴급조치에 의존해서는 안된다.근본적으로 증시 상장기업들의 체질을 강화해야 한다. 왕도가 아닌 정도를 찾는 증시정책을 해야한다. 앞으로 증시안정화를 위해 정부, 증권거래위원회, 코스닥 관리위원회 ,거래소 등 유관기관들이 긴밀히 협조해 시장안정에 노력해 주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자신을 가져야 한다.우리 민족은 어느때보다도 자신을 가질 자격이 있고 가치가 있는 시대이다. 산업사회는 자본,노동, 원자재 등 눈에 보이는 물질이 기반이었다.우리는 이런 것들이 없었다. 그러나 지식기반시대인 IT, BT시대에는 인간의 창의력,모험심이 경쟁력의 핵심요소이다. 알기쉽게 말하면 우리나라에서 빌 게이츠 같은 사람 10명만 나오면 세상이 바뀔 것이다. 산업사회에서는 일사분란한 단체행동,즉 민족의 경쟁력이 강해야 했다. 그러나 창의력과 모험심이 경제를 움직이는 시대에는 문화창의력,모험심이 있는 우리 민족이 때를 만난 것이다. 불교가 들어오면 해동불교로 발전시켰다.중국이 한국만은 중국화시키지 못했다.그 원인은 중국문화를 받아들여 동화되지 않고 재창조했기때문이다.만주족은 중국에 청나라를 세워 270년 동안 통치했으나 중국에 동화돼 소멸됐다.그러나 우리는 7천만명의 대민족으로 당당히 남았다. 이런 소중한 유산이 21세기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 나라를 세계 경제국가로 만들 전사들이다.정부는 이것을 지원할 것이다.이러한 우리 민족의 자질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평가하고 있다. 21세기 IT,BT시대에 여러분이 선두에 서주시고 정부가 길을 열고 뒤에서 밀어 이 나라도 한번 세계일류 경쟁국이 되는 기반을 남은 임기동안에 닦을 생각이다. 국민적 합의속에 4대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사람들이 별로 인정안하지만 앞으로 국민의 정부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될 것은 정보화에 주력하고 벤처기업을 육성한 것이다.여기에 앞장선 것이 평가될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 어려움에 처해있지만 우리는 하면 된다.외환유기를 극복했고 작년 외환보유고 세계 5대 국가이며 7개밖에 없는 순채권국가에 들어갔다. 지금 어렵지만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면 국민의 능력으로 보아, 세계가 놀라는 정보화를 추진한 힘으로 보아 우리는 앞날에 희망이 있고 하반기부터 상황이 좋아질 것으로 생각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시적으로 하지말고 근본적으로 개혁하고 체제를 강화해 어떠한 불황에도 이겨내도록 하고, 재무구조를 강화해 경쟁력을 키워나가야 한다. 이러한 체질강화를 하는 동시에 증시가 안정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여러분이 이 경제를 끌고가는 책임자로 앞장서주고 정부는 지원자로서 서로 손을 잡고 증시활력을 이루어나가자. 세계적 경쟁력을 갖추고 세계일류 경제강국의 기초를 닦아서 후손들에게 넘겨준다는 각오로 일해주기 바란다. 임기 마지막까지 흔들림 없이 지원할 것이다. 정부를 믿고, 정부는 약속을 반드시 실천한다고 이해하고 증시부문에서 성공적인 역할을 해주기를 부탁한다. 이 해가 우리증시가 크게 발전하는 해 가 되도록 다 같이 협력하자. <끝>
2001.02.08 I 안근모 기자
  • 이용득 금노위원장 기자회견문(전문)
  •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그리고 사랑하는 금융노동자 여러분! 우리 금융노동자들은 비와 눈보라가 몰아치는 혹한속에서도 값진투쟁을 전개했습니다. 금융노동자의 의지와 투쟁성을 대내외에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이번 투쟁에서 국가경제를 책임져야할 정부는 파업시 대책이나 파국을 막을 힘이 전혀 없음을 여실히 드러냈으며, 우리의 투쟁력과 강고한 단결력의 표출은 이미 싸움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투쟁으로 많은 고객들과 국민여러분에게 불편과 피해를 끼쳐드렸습니다. 아울러 이에 대한 책음은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먼저 저희 금융노조에서는 파업명령을 내린 위원장인 제가 전적으로 책임지고 사법처리를 받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은행장들과 정부 관계자도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할 것입니다. 다시한번 말하건대, 충격요법으로 금융시장을 교란시키고 기업등에 자금경색을 가져와 결과적으로 경제를 어렵게 만드는 졸속적 금융정책은 수정되어야 합니다. 무능한 경제관료들의 가시적인 한건 실적을 위한 금융정책은 철저하게 근절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번투쟁을 통하여 분명히 정부의 잘못된 경제정책의 시정을 지속적으로 요구한 바 있습니다. 정부는 이미 11개은행의 퇴출과 4만 8천명의 금융인이 구조조정의 희생물로 직장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정부정책의 실패를 계속 금융인에게 전가하고 국민들을 호도하는 얄팍한 속임수를 즉각 멈추고 금융시장 안정정책을 통해 경제를 안정시켜야 합니다. 특히 금번 파업을 통해 정부와 은행책임자가 순간을 모면하기 위하여 보여준 행동이 궁극적으로 어떠한 대가로 돌아오는가를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이에 우리는 연말의 자금이동이 집중되는 시기에 파업 때문에 수많은 피해자들이 속출하고 국가경제에 주름살이 깊어지는 점을 충분히 감안하여 중대한 결정을 내립니다. 이번 파업을 12월 28일 16시 20분을 기하여 일단 유보함과 동시에 다음의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 우리는 또다시 전 금융인의 총파업을 강력하게 전개해나갈 것임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요구사항 1. 금번 12월 22일 국민은행-주택은행 합병선언은 단지 계약(MOU)일 뿐이다. 은행업은 사람을 기본으로 하는 신용사업이므로 전종업원이 반대하는 합병은 원천적으로 성공할 수 없기 때문에 합병에 상당한 문제가 있다고 본다. 따라서 합병에 관한 전반적인 노사간 자율적인 협의를 반드시 거쳐 결정하여야 한다. 2. 금번 파업에 참여한 전종업원에게는 어떠한 인사상불이익과 민형사상의 책임을 물어서는 안된다. 3. 금번 파업의 노조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파업명령권자인 금융산업노조위원장에게 있기 때문에 금융산업노조위원장과 국민ㆍ주택지부 위원장을 제외한 다른 간부에 대해서는 일체의 책임을 최소화하고 노사협의회의 일정기간은 유예되어야 한다. 2000. 12. 28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위원장 이 용 득 국민지부 위원장 이경수, 주택지부 위원장 김철홍
2000.12.28 I 김병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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