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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란눈의 석학, 세종대왕릉을 참배하다
- [오마이뉴스 제공] 559돌 한글날을 맞아 참으로 풍성한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그런 사이에 우리들의 관심을 끌게 하는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한 행사가 여주 영릉에서 있었다. 그것은 바로 50여년 한글을 연구해온 해외 석학들이 세종대왕이 잠들어 계신 영릉을 참배한 일이다. 그들은 일본의 우메다 히로유끼(梅田博之) 레이타쿠 대학교 총장과 독일의 베르너 삿셋(Werner Sasse) 함부르크 대학 동양학연구소 교수이다. 지난 6일에 있었던 한글문화 정보화 포럼에서 초청강연을 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영릉참배에 더욱 의의를 두고 있었다. 7일 아침 10시에 호텔에서 버스를 타고 출발했는데 이동 중에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먼저 우메다 히로유끼 총장과 인터뷰를 시작했다. 우메다 총장은 한글과의 처음 만남이 도쿄대학교 3학년 때 언어학을 전공으로 선택하면서부터였으며, 그 뒤 50여년을 한글과 함께 했다고 한다. 반세기를 한글과 함께 한 것이다. "한글은 음소문자이면서, 음운자질을 가지고 있다. 또 모아쓰기를 하지만 음소문자이기 때문에 내부의 구조를 알 수 있다. 즉, 단어와 형태소 등 문법단위의 경계를 분명히 한다. 다시 말하면 어간과 어미의 구별이 확실한 구조이다. 이러한 자질문자는 가르치기 쉽고, 배우기 쉽고, 쓰기도 좋다. 이에 비하면, 일본의 가나문자는 음절문자일 뿐 특이한 방법을 쓰기 때문에 설명하기가 어려워서 로마자로 대신하고 있다. 한마디로 한글은 최고의 글자이다. 이집트의 '하이로그리프문자(Hieroglypg:신성한 조각문자, 聖刻文字)'는 신권의 상징이며, 왕의 권위를 과시하는 문자이다. 또 문자구조가 복잡해서 배워서 쓰는 게 어렵다. 하지만 훈민정음은 세종대왕께서 글 모르는 백성을 위해 일상생활의 편리를 꾀하고자 만드신 것으로 의의가 크다. 결국 훈민정음은 세계 어떤 글자와도 비교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글자임이 분명하다. 과학과 철학을 아우르고, 그러면서도 배우기 쉽고, 쓰기 쉬운 것은 물론 가르치기도 쉽다. 그것은 어학적으로도 대단히 뛰어나다는 것을 뜻한다. 더구나 만든 의도가 백성들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감탄을 금할 수 없다." 한글에 대한 신념이 절절히 묻어나 신앙으로 느낄 정도였다. 유창한 한국말로 거침없이 질문에 대답했다. - 한국어를 배우는데 가장 큰 도움은 무엇이었나? "어쩌면 운명이었다. 나는 하버드대학교 옌칭연구소 일-한-중 교류프로그램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여기서 연구비를 받아 서울대학교 이숭녕 교수에게 공부했다. 또 이기문, 김석득 선생 등 많은 학자와의 교류하며 좋은 인간관계를 맺었다. 한국 사람들은 훌륭한 인격을 소유한 분들이었다. 그 분들과 알았다는 것이 오늘의 내가 있게 바탕이다." - NHK방송에서 맨 처음 한글강좌를 시작한 것으로 아는데. "한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간 뒤 나는 아시아아프리카언어문화연구소 소장이 되었는데 1984년 NHK에서 한국어 강좌를 해달라는 제의를 해왔다. 이때부터 5년간 강좌를 진행했다. 일본 사회에 한국과 한국어를 널리 알리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평생교육 차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뿌린 씨앗이 이 정도로 번성할 줄은 몰랐다. 큰 보람이 되었다." - 지금 한류열풍이 굉장한데 한국어학자의 처지에서 앞으로 어떻게 될 것으로 보는가? "겨울연가로 시작된 한류열풍은 겨울연가가 일본과 비슷한 분위기 또는 좀 더 앞선 상황이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하여 일시적일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그 뒤 분위기도, 배경도 일본과는 전혀 다른 대장금이 성공하는 것을 보고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더욱 지속될 것이란 확신을 갖게 됐다. 지금 일본 곳곳에 가면 한글간판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한국어학자로서는 뿌듯할 수밖에 없다." 그는 인터뷰를 끝마치면서 한국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는 흐뭇하며 한국 사람은 존경과 사랑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88올림픽 이후 한국의 발전은 놀라울 정도지만 예전의 구수한 냄새는 없어진 듯해 아쉽다고 한다. 따뜻한 손을 지닌 할아버지를 대한 느낌으로 인터뷰를 마쳤다. 이어서 파란 눈의 베르너 삿셋 교수와 인터뷰를 했다. 삿셋 교수는 '월인청강지곡'을 독일어로 번역할 정도로 뛰어난 한글 사랑과 학식을 지니고 있다. 잘 웃고, 농담에도 거침이 없어 학자라기보다는 이웃집 아저씨를 연상케 한다. "한글은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창조물이며, 철학적, 과학적 결과물이다. 모음은 음양철학을, 자음은 오행철학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어서 음운현상에 철학을 이입시켰다. 한글은 전통철학이 과학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다. 태극기에 경의를 표하는 것은 한글에 경의를 표하는 것과 같다. 또 한국문화는 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전통문화와 외래문화를 잘 조화해야 하는데 이것의 좋은 예가 훈민정음이다, 한국철학을 배경으로 현대과학에 알맞은 사고방식과 제도를 만든 것이다. 철학과 과학을 조화시킨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위대한 글자다. 한국어를 선택한 것이 자랑스럽다." 역시 삿셋 교수도 신앙에 가까울 정도로 한글을 극찬한다. - 어떻게 한국어와 인연을 맺었나? "60년대 후반에 한국에 사회봉사를 왔다가 자연스럽게 공부를 하게 되었다. 독일로 돌아간 뒤 나는 한국에 있을 때 매력을 느꼈던 한국어를 공부해보고 싶었다. 보쿰대학교의 레빈 교수에게 한국학과 언어학을 배우게 됐다. 그 때 쓴 박사논문은 '계림유사 속의 고려방언'이었으며, 교수자격시험의 논문 제목은 '향가연구'였다." - 한국의 고서적들을 독일어로 번역했다는 얘길 들었는데. "같이 연구하고 있는 안정희 교수(한국인으로 독일에 거주)와 함께 5년간의 공동작업 끝에 '월인천강지곡'을 번역할 수 있었다. 특히 특수단어, 불교배경, 문법분석 등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2002년 한국의 소학사란 출판사에서 펴냈다. 지금 이를 이어서 '용비어천가'를 번역하고 있는 중이다. 내년이면 완성돼 책으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 앞으로의 계획은? "내년에 은퇴하면 한국에 와서 일생동안 공부했지만 끝내지 못한 것들을 완성해낼 것이다. 한국의 문학, 민속학, 역사, 언어학 등을 모두 해볼 생각이다. 한국 문화도 훌륭하지만 사람들도 참 좋다. 나와는 성격이 잘 맞아서 독일보다 한국 친구가 더 많을 정도다. 그래서 한국에 와서 연구하는 것이 즐거울 것이다. 예전에 한국에 있을 때 돈암동 어딘가 막걸리집에 외상을 진 일이 있는데 그것도 갚아야 하겠다."(웃음) 내년에 그가 완전한 한국 사람으로 변신하는지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는 인터뷰를 끝마치면서 한국에 인문학이 위축되면서 저급한 외래문화가 판을 친다며, 전통문화와 외래문화 간에 격차를 줄이고 조화를 꾀해야만 한다고 주문한다. 그 날 두 석학은 영릉 세종대왕 묘에 꽃을 바치고, 향을 피운 채 묵념을 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흠모의 정을 가누지 못하는 듯 오랫동안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리곤 영릉을 돌아보며 세종대왕의 위업을 기리는데 한국인들보다 더한 열의를 보인다. 누가 세종대왕의 후손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참배에 감격해 하고 있다. 그들은 한글인터넷주소추진총연합회 최기호 회장의 안내로 세종대왕 전시장 등을 돌아보며 설명을 들었다. 이 자리에서 최 회장은 세종대왕이 백성들을 위해 측우기 등 농사관련 기기들을 발명하고 천상열차지도를 그려 천문학을 발전시켰으며 고유악기와 세종악보(정간보)를 만들어 향악을 집대성하고 최고의 글자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며 그야말로 천재였음을 강조했다. 이에 그들은 맞장구치기에 바빴고, 신이 난 듯 보였다. 영릉 참배를 한 그날 저녁 두 석학은 세종연구소 이기남 이사장, 독일 출신 한국인인 기아자동차 이참 고문 등과 함께 식사를 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세종연구소가 글이 없는 민족에게 한글을 모국어로 만들어주는 일을 하는 것에 박수를 보냈다. 이 자리에서 이참씨는 다른 민족의 말을 모두 표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한글 자모를 더 만들 필요는 없다고 했으며, 이에 두 석학을 비롯한 참석자 모두 적극 공감했다. 두 석학과 이참씨는 영릉을 2천여 평방미터의 좁은 장소에 보잘 것없이 방치하지 말고, 청계천 복원에 든 비용의 10배 이상의 돈을 들여 국가적 사업으로 단장해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한국 최고의 문화유산이며, 가장 강력한 국가 경쟁도구인 한글의 창시자 묘역을 그렇게 소홀히 놔둔데 대한 질책인 것이다. 정말 작지만 작지 않은, 아니 우리 국민이 깜짝 놀라야할 일이 7일 영릉에서 벌어진 것이다. 국민 중 우리 겨레에게 커다란 은혜를 베풀어준 세종대왕이 잠들어 계신 영릉을 참배한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있을지, 아니 세종임금이 어디에 잠들고 계신지 정도라도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의심스러운 이 때에 머리가 희끗한 외국의 노학자들이 참배를 위해 먼 길을 애써 온 것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 호프집도 직원 늘리면 1백만원 받는다
- [edaily 박동석기자] 관광호텔과 민박, 소주방, 복권판매소, 폐광지역 카지노등은 직원 채용시 1인당 100만원씩의 채용 장려금을 지원받게 된다. 그러나 모텔, 룸살롱, 카지노등 소비성 서비스업은 제외된다.
또 근로계약기간이 1년 미만인 직원은 정부가 올 7월이후 창업한 고용창출형창업기업에 주는 고용 세제혜택 대상에서 제외된다.
재정경제부는 24일 지난달 26일 조세특례제한법이 공포됨에 따라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시행령 개정안을 마련해 추진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정부는 기업이 근로자를 전년보다 추가로 고용할 경우 추가 고용인원 1인당 100만원을 소득세, 법인세에서 세액공제해 줄 방침이나 소비성서비스업과 청소년보호법상 규제업종등은 지원대상에서 빼기로 했다.★아래 표 참조
지원대상에서 제외되는 업종은 일반호텔과 모텔등 숙박업, 요정, 룸살롱, 카바레, 나이트클럽, 댄스홀, 콜라텍, 카지노등 도박시설, 안마, 비디오방, 노래방, 티켓다방등이다.
허용석 세제총괄심의관은 “그러나 관광호텔, 콘도, 민박, 유스호스텔, 외국인 전용 유흥음식점, 소주방, 호프집, 막걸리집, 토속주점, 복권판매소, 폐광지역 카지노등에 대해서는 직원 추가 고용에 따른 세액공제혜택을 줄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개정안은 또 고용창출형창업기업에 대한 세액감면 적용 대상을 근로계약기간이 1년미만인 자, 기업의 최대주주, 그 배우자, 직계존비속 및 그 배우자, 형제자매를 제외한 내국인근로자로 규정했다.
이와함께 교대근무제 도입등으로 고용인원을 감축하지 않은 기업들에게는 고용이 유지된 직원 1인당 50만원씩의 세액공제 혜택이 주어진다. 단 교대근무제를 새로 시행하거나 확대해야 하며 고용인원 감축없이 근로시간을 단축해야 한다. 근로시간 단축 기준은 근로기준법상 주5일제(주40시간근무제) 법정시행일 6개월전에 주 5일제를 도입하거나 주5일제 시행후 법정근로시간 미만으로 근로시간을 줄여야 한다.
정부는 또 작물재배업, 기술계 학원, 분뇨처리업등 분료관련업을 일반기업에 비해 세금혜택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중소기업 업종에 추가했다.
아울러 금괴(금지금)을 면세로 거래할 수 있는 도매업자의 요건을 강화하고 올 7월부터 110분의 10에서 108분의 8로 줄이기로 한 중고자동차 폐자원매입세액공제(부가세 환급)율 조정시기를 내년 7월로 1년 연기했다.
- 민노당 `진보가 보수에게` 시리즈 화제
- [오마이뉴스 제공] 민주노동당이 지난달 29일부터 총선홈페이지(www.pangari.net)에 연재하고 있는 "진보가 보수에게" 코너가 화제가 되고 있다.
첫 회 <최순영이 박근혜에게> "홈런"
첫 회는 유신붕괴의 한 계기가 된 YH여공들의 신민당사 농성사건 당시 노조지부장이었던 민주노동당의 최순영 부대표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에게 보낸 「최순영이 박근혜에게-묵은 것은 가고 새것은 오고야 맙니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 등 인터넷 매체들과 스포츠 신문에 관련기사가 실린 데 이어, <동아일보>의 데스크 칼럼에 "여공과 영애"의 내용이 되는 등 화제가 됐다.
두번째는 민주노동당 지지를 선언해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김영길 공무원 노조 위원장이 고건 대통령권한대행에게 띄운 「달인인가, 퇴물인가」로 "고위직 공무원들의 정치활동은 허용되면서 하위직은 막고있느냐"고 비판하는 내용이다. 공무원 노조측은 "이 글 때문에 고건 대행이 공무원 노조에 대한 강경대응에 나섰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글 또한 언론에서 많은 인용보도를 했다.
3회∼6회는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측에 초점
3회부터 6회까지는 열린우리당 측에 포커스를 맞춰 민주노동당과 열린우리당의 차별성을 강조했다.
▲민주노동당 당원인 김형민씨의 「막걸리 당원이 "노빠"에게-제가 좋아한 "노무현"이 "정말 안되는 이유들"」 ▲지난 89년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문광명 변호사가 당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의장으로 같이 활동했던 임종석 의원에게 띄운 「386이 386에게-변호사 문광명→국회의원 임종석」 ▲민주노동당에 대한 비판적지지를 자임하고 있는 인터넷매체인 진보누리가 역시 열린우리당과 노무현 대통령 지지 사이트인 서프라이즈에게 보낸 「"보수 정체성을 분명하게 하라"」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후보 11순위인 소설가 송경아씨가 선배문인이자 열린우리당 후보로 부산연제구 후보로 나선 노혜경씨에게 「"선생님, 어떻게 철새와 같이 노시나요?"」 등이다.
각 회별로 발신자와 수신자가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 시리즈는 각각 5천회 이상 조회수를 기록했고, 게시판에 수십개 이상의 댓글이 올라와 즉석 토론이 이루어졌다.
7회는 민주노동당 법률지원단장인 김정진 변호사의 「대법원 판결인가, 경총 보고서인가 - 대법원장, 헌재소장께」다. 김 변호사는 이 글에서 대법원에 대해 "파업을 이유로 한 가압류 남발이 원인이 되어 배달호, 김주익, 이해남 등 노동자들이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며 "법원이 법을 만드는 기관은 아니지만, 폭넓은 해석권한이 있기 때문에 합리적으로 그 범위를 제한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 변호사는 헌법재판소에 대해서도 "부자에게 불리한 세법에 대해서는 너무도 쉽게 위헌결정을 하였고, 교사의 정당가입과 선거운동 금지는 합헌이라는 결정 또한 사회변화를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6일자는 배우 오지혜씨가 한나라당 전여옥 대변인에게 보낸 「제발 입 좀 다물고 계세요」다. 오씨는 "강금실 장관과 문 수석의 만남에 대해서 망언을 하는 것을 보고 난 당신이 미친 게 아닌가 싶었다"며 "앞으로는 진보야당이 잘 할테니까 좀 조용히 해달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두차례 더 연재 뒤 "민주노동당이 열린우리당에게 보내는 정책서신"으로 바꿀 계획
민주노동당은 이후 "심상정이 정동영에게", "단병호가 노무현에게"를 더 내보내면서 일단락을 짓고, 이후부터는 "민주노동당이 열린우리당에게"라는 제목으로 정책서신을 띄울 계획이다.
"진보가 보수에게"라는 연재 아이디어를 낸 이광호 <진보정치> 편집국장은 "박근혜씨가 한나라당 대표가 되면서 수구정당, 차떼기 정당이라는 것을 감추고 박정희 전 대통령를 끌어내는 이미지 정치를 하는 것에 대해 대응이 필요하다는 것이 처음 아이디어였다"며 "심상정 후보와 최순영 부대표를 놓고 고민을 했었다"고 전했다.
이광호 편집국장은 "1회성으로 생각했다가 열린우리당 쪽과 노사모 등에 대해서도 방향을 맞추기로 하면서 시리즈가 됐다"며 "일방적인 공격보다 소통의 형식을 취하기 위해 필자들에게 경어체로 글을 써달라고 부탁했다"고 밝혔다.
- 재계원로가 본 고 정명예회장-조중훈 한진그룹 명예회장
- [edaily] 21일 별세한 고 정주영 현대그룹 전 명예회장은 한국 현대사를 이끈 재계의 거목으로 평가되고 있다. 재계원로들이 평소 가졌던 그에 대한 평가를 실어본다.
◇조중훈 한진그룹 명예회장 = <국가가 자랑할 만한 거목>
“어느 시대에서나 그 시대에 합당한 인물이 나타난다”
삼국지에 나오는 말이다. 또한 ‘뛰어난 사람은 그 시대에 시급히 해야 할 일을 안다’는 말도 있다.
나는 아산 정주영 회장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합당한 인물로, 자신의 시대에 해야 할 일을 알고 계신 분이라고 생각한다. 황무지나 다름 없었던 우리 경제상황에서 사업의 여러 분야를 새롭게 개척하고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게 한 제1인자이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현대와 한진은 같은 시대적 배경 속에서 출발하고 성장해왔다. 현대가 초창기에 건설업을 통해 국가 발전에 기여하고 지금처럼 ‘세계의 현대’로 명망을 쌓는 동안, 한진은 수송업으로 일관해 오늘에 이르렀다. 사실 건설과 수송은 한국 경제발전의 선도적 역할을 수행해 온 기반사업이다.
60년대 이후 우리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에 건설과 수송이 커다란 기여를 했다고 믿는다. 산업자본 형성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 여러 분야의 발전에 직·간접으로 커다란 영향을 미쳐왔다.
아산은 나보다 5년 연상의 업계 선배로서, 1950년대부터 서로 알고 지내다가 사업적으로 교분을 맺게 된 것은 60년대 월남 전 초기 때부터이다. 당시 현대는 건설업체로서의 명성을 높이고 있었다.
65년 9월 현대는 태국에서 고속도로 건설공사를 수주했으며, 66년 1월에는 월남 캄란만 준설공사에 참여했다. 이 두 공사는 현대가 최초로 해외에 진출한 것으로 기억되는데, 우리 경제발전의 프론티어로서 하나의 전환점이 된 공사였음에 틀림없다.
현대는 여기에서의 시공 경험과 실적을 기반으로 그 후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에서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현대가 아니었으면 그렇게 합리적인 가격으로 짧은 시간 내에 이룰 수 없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또한 월남에서의 준설공사 경험은 70년대 중반 현대가 중동으로 진출해 발전의 기틀을 잡은 초석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무렵에 나 역시도 주월미군의 수송 용역을 맡아 월남에서 살다시피 했고, 사치와는 거리가 먼 아산은 유난히 큰 체구에 항상 국산 파나마 모자를 쓰고 다녀, 비행기에서나 거리에서나 늘 눈에 띄는 거물이었다. 당시 우리는 월남에 진출한 한국업체의 대표격으로서 이따금 만나 서로 격려와 충고를 아끼지 않았던 기억이 새롭다.
그 후에도 우리는 전경련 회장과 부회장으로서 10년 가까이 회합을 갖기도 했으며, 88 서울올림픽 유치를 위한 민간차원 추진위원 등 여러 가지 인연으로 오랜 교분을 유지해 오고 있다. 아산의 자서전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나 역시 서울올림픽 유치는 관민 협조의 모범사례로 기업인들의 공도 매우 컸다고 생각한다.
무슨 이익을 바라고 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누가 알아주건 말건 스스로 능력이 닿는 범위 내에서 국익을 위해 애쓰고자 했으며, 민간외교관으로서 올림픽 유치를 위해 그 누구보다 열심히 뛰었다. 그러한 정 선배가 언젠가 한 신문에서의 회고를 통해, 함께 열심히 뛰어준 사람으로 내 이름을 거명하며 과분한 칭송을 하여, 불현듯 당시의 추억이 새로워 서신을 보낸 적도 있다.
우리는 서로의 인맥과 친분을 총동원해 올림픽 서울유치의 당위성을 알리고, 거기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기적적으로 일본의 나고야를 누르고 유치에 성공했던 것이다. 외교는 관민이 함께 노력해야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올림픽 유치는 이러한 사실을 입증하는 좋은 예이다.
기업에 대한 우리 사회 일반의 인식은 지극히 냉혹하다. 창업과 축성의 과정에서 온갖 시련과 고난을 이겨내고 어느 정도의 성취를 이루고 나면, 세간의 곱지 않은 시선을 감내해야만 한다. 아직도 사회 일각에서는 부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며, 대기업에 대한 편견도 상존하고 있다. 그러나 언제 어느 때나 옥석을 구분하는 것은 필요하다.
아산과 같은 기업인들이 평생을 사업에 전념해 온 이유는 결국 일에 대한 집념과 성취감 때문이다. 내가 다른 자리에서 언급한 바도 있지만 돈을 벌어 즐기겠다는 것만이 목적이었다면, 굳이 모험을 무릅쓰고 힘든 사업을 계속해야 할 까닭이 없다.
시장경제체제 하에서 기업은 국가의 경제, 사회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이며, 기업인들의 오늘이 있기까지에는 각고의 노력으로 점철된 기업사가 있게 마련이다. 기업인들이 이 나라의 경제, 사회 발전에 기여한 바는 적지 않으며, 그 점에 관한 한 일반의 편견은 반드시 재고되어야만 한다고 나는 믿고 있다.
나는 얼마전 정 선배의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흥미롭게 읽은 바 있다. 이 책에서 아산은 인간이 스스로 한계라고 규정 지은 일에 도전하고, 그것을 이루는 기쁨을 보람으로 삼아 오늘까지 사업을 해왔으며, 지금도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참으로 정 선배다운 말이며, 같은 시대를 살아온 후배로서, 또한 경제발전을 위해 정신없이 뛰어온 기업인으로서,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아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정치에는 기적이 있지만 경제에는 기적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경제학자들이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경제학 이론이나 수치로는 불가능한 것이 인간의 정신력으로 실현된 데 대한 하나의 찬사일 뿐이다.
아산 정주영 회장은 타고난 기업가이다. 70~80년대 소위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웠던 우리 경제의 발전에 현대가 선구자로서 기여한 바는 적지 않으며, 현대가 이룩한 성과 중 대부분이 아산의 공로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확고한 신념과 불굴의 정신으로 자신의 분야에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으며, 이를 통해 국가 발전에 기여해 왔다.
아산은 그 자신도 인정하듯 천성이 가만히 손을 놓고 있지 못하는 분이다. 한가한 것을 답답해 하며, 항상 일을 하고 일만을 생각하는 검소하고 서민적인 분이기에 그의 삶에 휴식이나 멈춤이란 있을 수 없을 것으로 믿는다.
부디 이 시대의 거인으로서 특유의 집념과 투지, 그리고 건강을 유지하여, 언젠가 아산이 내게 말했듯이, 서산농장에서 일을 마치고 시골 사람들과 어울려 막걸리를 마시는 즐거운 모습을 보게 되기를 기대한다.
*자료= 현대그룹 사이버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