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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승우, "앞으로 10년? 지금만 같기를···"(인터뷰)
- ▲ 김승우[이데일리 SPN 최은영 기자] "우정출연이 애정출연 됐죠" 영화 '포화속으로'에 출연한 배우 김승우(41)의 말이다. 2006년 '해변의 연인' 이후 4년만에 선보이는 영화. 욕심을 낼 법도 한데 김승우는 우정출연, 애정출연 운운하며 자신을 바짝 낮추고 봤다. "영화에서 전 주연이 아녜요. 게다가 비중도 작죠. 그런데 왜 출연했냐구요? 우정출연이 애정출연 된 거죠." ◇"'포화속으로' 비중 작아도 조합은 최고" 그러면서 `껄껄` 큰 웃음을 짓는데 대인배의 카리스마가 절로 느껴졌다. 김승우의 통 큰 배포는 이후 행보에서도 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 제작보고회, 언론시사회, 무대인사 등 각종 영화 관련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하며 작품 홍보에 발벗고 나선 것. 김승우 정도의 이름값 있는 스타가 주연도 아닌 영화에 무대인사까지 돌며 작품 홍보에 앞장 서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김승우는 드라마 '아이리스' 종영 이후 거의 휴식없이 영화 '포화속으로' 촬영에 돌입했다. 그것도 북한 호위부 작전공작원에서 국군의 엘리트 장교로 국적과 소속만이 바뀌었을 뿐 닮은 점이 많아 위험할 수 있는 캐릭터로 말이다. 김승우도 이러한 이유로 새로운 배역을 맡아 연기하는데 고민이 많았었다고 했다. "나라를 향한 애국심, 선이 아닌 각의 연기를 요하는 부분 등 배역상 유사한 면이 많았어요. 다른 점이 있다면 국적과 소속, 그리고 전작에서 박철영이 전쟁터가 아닌 곳에서 전쟁을 치르는 사람이었다면, '포화속으로' 강석대는 전쟁터에서 더 치열하게 드러내놓고 싸우는 인물이라는 것 정도요? '아이리스' 때와는 분명 달라야 한다는 고민이 컸어요. 그래서 대사 처리 등에 각별히 신경을 써서 변화를 줬구요." 영화는 1950년 북한의 침공으로 시작된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에 맞서 싸우다 희생된 71명 학도병의 이야기를 담았다. 작품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낙동강 전투를 위해 포항에 학도병을 남겨둔 채 철수하는 국군 장교 강석대. 나라를 위해 대를 선택하지만 학도병과의 약속 또한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아버지 같은 군인이다. 김승우는 비중이 작은 역할이라면서도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톰 행크스 같은, 전쟁영화에선 없어서는 안될 정의로운 군인"이라며 맡은 배역에 강한 애정을 보였다. 또 함께 출연한 후배 연기자들 칭찬에도 신바람을 냈다. '포화속으로'는 전작 '아이리스'에 이어 태원엔터테인먼트가 제작에 참여한 영화. 북한군 유격부대 대장 박무량 역의 차승원과는 '라이터를 켜라' 이후 10년만에 재회했고, 사실상 이 영화의 주연인 빅뱅의 탑과는 '아이리스'에 이어 연달아 한 작품에서 만나는 각별한 인연도 이었다. 또 소년원에 끌려가는 대신 학도병에 자원한 구갑조 역의 권상우도 평소 절친했던 후배다. 김승우는 "한마디로 최고의 조합이었다"며 "친숙한 이들과의 작업이 최고의 효과를 이끌어냈다"고 팀워크를 자랑했다. 특히 학도병 중대장 오장범 역을 맡은 탑의 연기는 기대해도 좋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맞춤옷을 입은 양 배역에 정확히 녹아들었다는 게 그의 평가다. 김승우는 "승현(탑의 본명)이가 가수 아닌 배우의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포화속으로'는 하늘이 내린 기회가 될 것"이라는 말도 했다. ▲ 김승우 ◇"20년째 정상? 몰라서 하는 소리" 그렇다면 정작 그에게는 '포화속으로'가 어떤 의미일까. 직접 답을 구하진 않았지만 느낌으로 전해지는 것은 분명 있었다. 본격적인 부활을 알리는 몸풀기 혹은 예고편 같은 작품이랄까. 1990년 영화 '장군의 아들'로 데뷔해 올해로 배우인생 20년째. '늘 한결같이 정상에 머물 수 있었던 비결'을 물으니 모르는 소리 말라며 손사레부터 친다. "얼마전에도 어떤 후배가 '형은 늘 그 자리에 있었잖아' 하던데···. 사람들이 왜 그렇게만 생각하죠? 지난해 '아이리스'로 복귀하기 전 2~3년 간 대중과 떨어져 살았던 시기도 있었는데 말예요. 당시 우리 와이프(김남주) 둘째 낳고 작품활동 안 하니 광고도 죄다 끊겼죠, 금전적으로도 얼마나 힘들었게요." 뜻밖이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스타 커플이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은 적이 다 있었다니 말이다. 의외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지으니 "겉으로 티만 안냈을 뿐 배우로의 위기감은 10년 전부터 있었다"고 한술 더 떠 이야기한다. "10년전부터 해마다 연초가 되면 이런 생각을 했어요. '이 영화 혹은 드라마가 내가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마지막 작품이 아닐까' 그러다 살짝 위기가 오는 듯 하더니 드라마 '아이리스'로 제자리를 찾고, 그렇게 근근히 연명하게 되더군요. 저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그런 점에서 겸손해져야겠단 생각도 하구요." 김승우의 배우인생은 화려했다. '장군의 아들'로 데뷔후 '고스트 맘마' '꽃을 든 남자' 등 작품이 잇따라 성공하며 요즘 그가 진행하는 TV 토크 프로그램의 이름처럼 한마디로 배우로 '승승장구'했다. 그러다 이후 '불어라 봄바람' 등의 작품이 연이어 흥행에서 저조한 성적을 내며 위기를 맞는 듯도 보였다. 그런 그에게서 변화가 감지된 건 지난해부터다. '아이리스'에서 폭풍간지로 불리며 재기에 성공한 그는 뮤지컬, 예능프로그램, 영화를 넘나들며 톱스타로 다시 서기 시작했다. 불혹을 넘기며 중심에서 살짝 비껴난 듯은 해도 폭이 한층 넓어진 느낌이랄까? 적잖은 배우들이 나이 마흔에 캐릭터의 한계를 느껴를 좌절하고 방황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김승우는 향후 10년 배우로의 인생계획을 묻는 질문에 "지금 이대로만 같기를···"이라고 답했다. 궃이 애써 손 흔들지 않아도 자신을 찾아주는 사람이 있는 지금에 만족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배우들이 나이 마흔에 접어들면 하고 픈 연기를 못하고 생활형 연기자로 전락하죠. 그런데 전 다행히도 아직은 아니잖아요. 요즘도 전 촬영장에 가면 설레요. 이런 열정을 가진 제가 스스로 기특하기도 하구요. 앞으로의 10년도 지금만 같았음 싶은데 이 정도의 열정이면 가능하지 않을까요?(웃음)" (사진=한대욱 기자)▲ 김승우▶ 관련기사 ◀☞'포화속으로' 1주 천하···톰 크루즈 '나잇&데이'에 고배☞`포화속으로` 개봉 첫주 110만, 대작 위용 과시☞탑, '포화속으로' 2주차 흥행 책임진다
- 소박한 얼굴로 이야기를 팝니다
- [경향닷컴 제공] 전북 진안군 백운면 원촌마을은 ‘간판’으로 뜬 시골마을이다. 시골마을이 뜨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먹거리·특산품으로 뜨고 생태관광으로도 뜨고 ‘1박2일’ 덕분에도 뜬다. 그런데 새로 정비한 간판이 사람들을 매료시킬 줄이야. 간판 제작을 기획한 대학교수도, 군청 공무원도, 마을사람들도 짐작하지 못했다. 옆집 할아버지네 숟가락 수까지 아는 시골 마을에서 선전하고 광고하는 간판이 무슨 대수일까. 대학교수들이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공공 미술·디자인 차원에서 발제했고, 마을사람, 공무원들이 함께 힘을 모아 간판을 바꿔달았다. 눈썰미 좋은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여행 동호회 사람들 순례 리스트에 오르고, 여기저기의 발길도 잦아졌다. 이곳 간판의 매력은 뭘까. 지난 3일 백운면 원촌마을에 간판을 보러 갔다. ‘흰 구름이 머문다’고 해서 백운(白雲)인데, 정작 이날은 구름 한점 없이 청명하다. 간판 보러 왔으니 흰 구름은 없어도 좋았다. 마을 어귀에 도착해 마을쪽을 봤다. 정작 간판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큰길가로 들어가니까 올망졸망 모인 30여개의 가게 간판이 보인다. 소박하면서도 이쁜데, 촌스럽게도 보인다. 간판을 보든 말든 상관없다는 투로 그저 낡고 오래된 가게에 붙어 있다. 시인 이문재가 ‘간판의 애무, 간판의 유혹, 간판의 범행’이란 제목으로 글을 쓴 적이 있다. “간판을 보지 못하는 날이 죽는 날일 것이다. 간판. 나는 간판에게 관심이 없지만, 간판은 나에게 관심이 지독하다.” 또 누군가는 시인 유치환의 ‘깃발’에 빗대 간판을 두고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 했고, “주변에 널린 악(惡)”이라며 말그대로 악담한 이도 있다. 도시 환경 오염 주범이 대기 가스뿐일까. 크게, 화려하게, 원색으로, 하루 종일 아우성치는 게 도시나 시골 할 것 없이 내걸린 간판의 속성이다. 소박하고 단순한 이곳 간판에 자꾸 눈길이 가고 관심이 간다. 전자제품으로 치면 경박단소다. 원치 않는 애무와 유혹, 또 속수무책의 범행에서 벗어난 느낌이다. 생존의 적나라함과 무한증식의 욕망으로 주변을 짓누르고 스스로도 죽고 마는 도시 간판의 운명이 떠오른다. 이곳 간판의 힘은 ‘이야기’고 ‘사연’인데, 간판만 들여다봐선 알 수 없다. 옛장터에 자리잡은 ‘육번집’으로 먼저 갔다. 30여년 전 딸딸이 전화기를 쓰던 시절 전화번호가 ‘6번’이어서 ‘육번집’이다. 돼지국밥을 시켰다. 전영수씨(72)가 주문을 받자마자 파와 양파를 그 자리에서 송송 썰고, 돼지고기를 함께 볶아 육수에 넣고 끓인다. 전영수·김재순씨(68) 부부의 안방에서 국밥을 먹었다. 벽에 걸린 손자들 사진 옆에 걸린 빛바랜 흑백 사진에 눈길이 간다. “스물세살 때야. 가운데 ‘라지오’(라디오) 메고 있는 게 나여”라며 웃는다. 이들 삶의 소품들이 살갑게 와닿는다. 돼지국밥이 짬뽕맛이다. “양념 별 거 없어. 보통 사람 다 넣는 거야. 오래 끓이면 짬뽕맛이 난다”며 좀처럼 비결을 말해주지 않는다. 채근하니까 “37년 동안 이 자리에서 음식 장사해서 아들 다섯 키워 내보냈어. 70년대에는 자장면, 짬뽕도 팔았지”라고 한다. 짬뽕의 DNA가 손맛을 타고 내려온 것이다. 백운면의 전성기는 1970~80년대였다. 주변에 광산도 산판도 있었다. 노동자들은 일을 마치고 이곳으로 와 허기를 채우고, 취기를 올렸다. 건너편 ‘희망건강원’ 간판도 담백하다. 지붕 위에 철판으로 염소와 담쟁이를 만들어 달았다. 주인 주영미씨(44)는 서울에서 귀농했다. 얼마 전까지 마을 ‘간사’를 하며 마을을 찾는 사람들을 구석구석 안내했다. 주씨가 강조하는 것도 ‘이야기’다. “간판만 보고 사진만 찍고 가면 마을을 제대로 못 보는 거죠.” 원촌마을이 뜨다보니 다른 지자체에서 시찰을 오곤 한다. “마을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게 우리 간판의 핵심인데, 대부분 겉으로 드러난 치수와 글씨체 같은 디자인만 베껴간다”고 했다. 간판만 봐선 알 수 없는 이야기들도 나온다. 이곳 할머니들은 40~50년 전 야트막한 산이나 언덕을 넘어 시집왔다. 전봉준 장군이 백운면 오정마을에서 서당훈장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백운면 주민자치센터는 ‘마실길’을 만든다고 한다. ‘신광재 가는길’ ‘고개너머 백운마을길’ ‘내동산 도는 길’이라는 이름도 붙였다. 주씨가 “여긴 볼거리, 체험거리가 별로 없다. 골목길, 논두렁도 걸어보라”고 권한다. 간판만 찍고 갈 게 아니라 샅샅이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보는 게 좋을 것 같다. 큰길가 ‘백운농협’과 ‘열린마트’ 사잇길 초입에 자전거 모양의 ‘자전거 코스, 산책길’ 입간판이 서 있다. 소가 여물을 먹고 있는 낡은 대형 축사, 수백년 된 듯한 고목 옆을 걸었다. 논두렁 옆 전봇대에 묶어둔 자전거도 보인다. 겨울 날씨 때문일까. 이 모든 풍경이 낡은 흑백사진의 한 장면처럼 정지된 느낌이다. 시든 담쟁이 덩굴이 얽힌 낡은 시멘트 집 지붕과 흙담벼락에 ‘담쟁이 길’이라는 이정표가 붙었다. ‘개조심’이라고 쓰인 대문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더니, 마당에서 개가 짖는다. 백운초등학교 옆 주민자치로 운영되는 ‘작은도서관’도 구경했다. 방과 후 아이들은 컴퓨터와 서가 사이를 오가며 법석이다. 사서 김명주씨(39)가 커피 한잔을 건네 얻어마셨다. 한적한 시골 풍경과 예쁜 간판이 이곳 여행의 전부는 아니다. 원촌마을 주민들은 기꺼이 외지인들에게 ‘이야기꾼’이 될 준비가 되어 있다.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 ‘팩션’이 아니라 삶의 진솔한 이야기, 우리 아버지·어머니, 할아버지·할머니대의 삶의 원형이 되는 이야기 말이다. 또 하나. “간판이 40, 50년대처럼 생겨 갖고, 해줄라면 하고 말라면 말지 그랬지요. 적막한 마을에 이게 특이하다고 구경하러 오는 사람이 많아 좋긴 허죠. 그래도 먹고사는 게 달라진 게 없어요. 30년 살고 장사했는데 비슷비슷 허요.” ‘덕태상회’ 정옥순씨(61)의 말이다. 갈수록 소외되어가는 시골 마을이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게 ‘간판’이다. 이곳에 들른다면 구경거리, 사진거리 너머의 ‘삶’도 살펴보면 좋겠다. -길잡이- *백운면 : 경부고속도로에서 천안·논산, 호남 고속도로로 가다 전주에서 익산~장수간 고속도로로 바꿔 타 진안 IC에서 들어가면 된다. 진안읍에서는 30번 국도를 타고 남원·임실 방향으로 가도 된다. 인근 백운면 운교리에는 1850년쯤 지어진 물레방앗간도 있다. 인근 마령면 계서리 계남정미소(http://www.jungmiso.net/)는 공동체박물관이다. 주민들 삶과 밀접한 전시를 주로 한다. 둘러볼 만한 곳인데, 지금은 휴관 중이다. 미리 전화해 시간만 맞으면 주영미씨가 안내도 기꺼이 해준다고 한다. 대중교통편은 안 좋다. 서울호남센트럴시티에서 하루 두번 진안으로 운행한다. 희망건강원 (063)432~4880. 진안궁청 문화관광과 (063)430~2227, 백운면사무소 (063)432~4567, 작은도서관 (063)432~2260. *데미샘 : 섬진강의 최장 발원지다. 데미라는 말은 더미(봉우리)의 전라도 사투리다. 백운면 신우너리 팔공산(1151m) 북쪽 기슭의 상추막이골에 있다. 데미샘은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다. 샘 주변은 단풍나무와 산죽으로 둘러싸여 있다. 가을 오색단풍이 절경이다. 선각산 자연휴양림과도 이어져 있다. 체험의 숲, 명상의 숲이 잘 꾸며져 있다. 전북 산림환경연구소 (063)222~9003 *마이산 : 매년 100만명가량이 찾는 마이산에 올라도 좋을 것 같다. 마이산 중턱 인공호수, 저연석 80여기를 쌓아올린 돌탑이 볼거리다. 마이산 주변은 홍삼 재배지기도 하다. 토종 흙돼지가 맛있다. 마이산 남부출입소 주변에 ‘초가정담’ 등 흙돼지 요리집이 몰려 있다. 새끼돼지찜인 ‘애저찜’도 진안의 명물인데, ‘금복회관’이 잘한다고 소문났다. 마이산 도립공원 (063)433~3313, 초가정담 (063)432~2469, 금복회관 (063)432~0651. ▶ 관련기사 ◀☞노천욕, 설 가족끼리 ''한 탕'' 할까요☞1박2일 짧지만 영원한 추억
- 박상민, "죽을 때까지 '장군의 아들' 타이틀 갖고 싶다"(인터뷰①)
- ▲ 박상민(좌), 임권택 감독(우)[이데일리 SPN 박미애기자] "할리우드 배우 아널드 슈워제너거도 '아이 윌 비 백' 하나로 지금까지 얘기되고 있잖아요. 저 역시 '장군의 아들'로 관객들에게 평생 기억되고 싶습니다." 영화 '장군의 아들'은 박상민에게 큰 영광을 준 작품이다. 이를 테면 이준기가 영화 '왕의 남자' 한 편으로 '공길 신드롬'을 일으킨 것처럼 박상민은 '장군의 아들' 한 편으로 '김두한 신드롬'을 만들어냈다. "자고 일어나 보니 스타가 돼 있었더란 말 있죠? 그게 바로 저더라고요. 오디션을 보고 촬영을 하고 개봉되기 전까지만 해도 전 평범한 학생이었어요. '스타'라는 인식이 전혀 없었죠. 그러다가 하루는 밖에 나갔는데 날 보던 한 여학생이 그 자리에서 '악'하고 기절하는 거예요. 너무 놀랐죠. 그렇게 사람들이 알아보기 시작하면서 인기를 알게 된 거죠." '장군의 아들'은 지난 1990년 개봉돼 서울 단성사 한 곳에서만 무려 6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1편의 인기는 2편, 3편으로 이어졌는데 박상민은 세 편의 '장군의 아들'에서 실존 인물보다 더 리얼한 김두한의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그땐 제 자신이 김두한이라도 된마냥 착각하고 살았어요. 그랬더니 주변 사람들도 어려워하더라고요. 연기가 자연스럽게 나오려면 김두한처럼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감독님의 말씀을 너무 깊이 새겼었나 봐요. 하하." 하지만 '장군의 아들'은 박상민에게 큰 영광과 기회를 준 동시에 그의 발목을 잡은 작품이었다. 박상민 하면 '장군의 아들'밖에 떠오르지 않을 만큼 김두한의 이미지가 깊이 씌어진 것이다. "'장군의 아들' 타이틀이 너무 강하잖아요. 당시엔 액션배우만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이런 저런 역할도 해보고 여러 가지 시도를 많이 했어요. 그래도 답이 안 나와서 고민 많이 했죠. 답은 결국 연기에 있었는데 말이죠." 박상민은 이후 '젊은이의 양지',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덕이', '여인천하', '내 사랑 못난이', '불량커플', '대왕세종' 등 많은 드라마에서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연기에 전념했다. 그 덕분에 '장군의 아들'에 이어 또 다른 캐릭터를 가질 수 있었으며 시청률 측면에서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2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고 생각도 달라졌다. 제대로 된 한 가지 타이틀을 갖기에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박상민은 '장군의 아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박상민은 지난 18일 '장군의 아들' 연출진과 출연진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2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를 가졌다. 이날은 '장군의 아들'의 출연진이 결정된지 딱 20년이 되던 해였다. 이 자리에는 '장군의 아들'을 연출한 임권택 감독 부부를 비롯해 김두한 오디션 심사를 본 강수연 그리고 이일재, 김형일 등 40여명이 참석했다. 박상민은 이 자리의 의미에 대해 얘기하며 마치 20년 전으로 되돌아간 듯 설레하며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임권택 감독을 비롯해 당시의 영화인들이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박상민은 없었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장군의 아들'은 오늘의 저를 만들어준 작품이에요. 그리고 올해는 박상민이 김두한으로 또 배우로 산지 스무살이 되는 해고요. 20주년뿐만 아니라 30주년, 40주년 때도 이런 자리를 만들 생각이에요. 그래서 배우 박상민을 탄생시켜준 분들께 항상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 지난 18일 영화 '장군의 아들' 20주년 기념 파티가 열렸다.▶ 관련기사 ◀☞박상민, "몸무게 1kg 감량보다 대사 한 줄 더 익히는 게 중요"(인터뷰②)☞배우 박상민, "올해 2세 가질 계획"(인터뷰③)
- 하일성 "기다림·대역전… 야구는 삶과 닮은꼴, 해설은 대화다"
- [경향닷컴 제공] 하일성 전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총장의 별명은 '하구라'다. 국민해설가로 불릴 만큼 감칠맛나는 야구해설은 물론 방송에서도 주부프로에서 시사프로에까지 등장해 고부갈등부터 금연문제까지 무슨 주제건 거침없다. 또 사석에선 사고뭉치였던 학창시절이나 월남전 참전 당시의 무용담, 깡패부터 전직 대통령 등 각계 인사와의 일화를 전하며 좌중을 압도한다. KBO 사무총장 시절엔 제8구단 창단,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야구금메달, WBC 결승 진출, 프로야구관객 500만명 달성 등 한국 야구 르네상스에 기여했다. 올해로 야구해설 30년을 맞는 그를 만나 장군의 아들로 태어나 교사, 야구해설가, 행정가, 가발CF 모델, 방송패널, 강사 등 다양한 인생을 살아온 그의 삶과 한국 야구계의 미래를 들어봤다. -언제 다시 방송에서 '하일성표 야구해설'을 들을 수 있나요. " 현재 각 방송사에서 제의가 들어와서 대우 문제, 즉 몸값을 협의중이에요. 제가 심장병수술을 받을 때도 기다려주고 기회를 준 KBS엔 무료라도 일해야하는데 주위에선 그게 이기적인 생각이라는군요. 다른 동료나 후배들을 생각해서라도 제가 제대로 된 대우를 받아야한답니다. 그래서 방송사들이 어렵다고 하지만 후배 해설가들을 위해서라도 연봉 등을 협상중입니다. 요즘은 조용히 표사서 야구장에 들어가 외야석에 앉아 야구관람도 하고 자료도 찾아보는 등 해설준비를 하고 있어요. " -주변에선 연임설도 많았는데 KBO 사무총장을 지난 3월 31일에 미리 그만 두셨습니다. " 연임은 제 의지대로 되는 건 아니니까요. 사무총장은 꼭 하고 싶은 일이라 의욕이 너무 앞서 실수도 많았고 욕도 원없이 들었어요. 제 진심이 안통하는 것 같아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울 정도였죠. 그래도 그만 두고 처음 한달은 굉장히 힘들었어요. 너무 바쁘다가 갑자기 실업자가 되니 공황상태가 되더군요. 산에도 가고 절도 다니며 마음을 다스렸습니다. 그동안 일에 대한 철학이 없어 일을 즐기기보다 일에 집착해서 그런가봐요. 그러다 김연아 선수에게 한 수 배웠습니다. 인터뷰를 하는데 '상대 선수 컨디션이 좋다던데 어떠냐'고 묻자 '난 상대편과 싸우기 위해 여기 온 게 아니라 내게 주어진 4분 동안의 연기 시간을 충분히 즐기기 위해 왔다'고 당당히 말하더군요. 무슨 일을 하건 집착하기보다 즐겨야죠. 스무살인 연아보다 환갑 넘은 제가 더 철학이 없는 것 같아 인생 공부를 새로 합니다. " -그래도 사무총장으로 일하며 보람도 컸죠. " 그럼요. 특히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야구대표단 단장격으로 선수단을 뒷바라지해서 금메달을 땄을 때의 긴장감, 짜릿함, 감동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죠. 제가 선수때나 교사때도 금메달을 딴 적이 없는데 이번엔 헹가래도 받아보고…. 또 WBC에서 우승은 못했지만 결승에 진출했고 어린이 야구단이나 야구동호회도 늘어났고 프로야구 관객도 500만명을 돌파했으니까요. 제 묘비명에도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야구대표팀 단장'이라고 써달라고 했어요. " -만약 사무총장을 연임했다면 뭘 꼭 더 하고 싶은가요. " 프로야구 발전을 위해 할 일은 너무 많지만 무엇보다 야구장 시설을 현대화하지 못한 게 아쉬워요. 제가 총장에 취임할 땐 새 돔구장을 신설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는데 일하면서 보니 새시설을 짓기보다 현재의 야구장을 깨끗하고 편리하게 만드는 게 시급해요. 아무리 야구시합이 재미있어도 악취나는 화장실이나 곳곳이 위험한 야구장에서 어떻게 야구를 즐기겠습니까. 또 요즘 프로야구 노조가 결성된다는데 제가 협회측과 선수측의 중재를 맡으면 갈등 요인도 줄어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합니다만 새 집행부가 잘 하겠죠. " -지금은 한국야구계의 대부이고 명사인데 학창시절엔 그렇게 문제아였다면서요. " 제가 외아들인데 아버지는 나중에 장군이 된 군인이셨고 어머니도 사업을 크게 해서 유복하게 자랐어요. 그러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때 부모님이 이혼했어요. 어머니는 외국가시고 아버지는 지방부대에 근무해 가족과 떨어져 거의 혼자 지내면서 방황하고 환경에 대한 분노도 커서 불량서클도 가입하고 싸움도 많이 했죠. 오죽하면 제가 고등학교 선생님이 되었는데도 어머니가 교장선생님을 찾아와 '우리 아들 잘 부탁한다'며 촌지를 드리고 가셨겠어요. 학생때 말썽을 부리면 봉투들고 학교 찾아오던 습관 때문이죠.(웃음) " -그런 문제아가 선생님이 된건 좀 뻔뻔한(?) 일이 아닌지요. " 공부 잘하고 순종적인 모범생보다 저같은 문제아 출신의 선생이 학생들에게 교육상 효과적이죠. 이 선생님도 노력해서 이렇게 됐으니 너희들도 마음먹으면 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희망을 주니까요. 선생님 말이라면 잘 들어주고 존경해주는 순박한 학생들과 지낸 5년동안 제 성격도 긍정적으로 변했고 아이들에게 알기 쉽고 논리정연하게 말하는 연습을 한 것이 야구해설에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 -야구해설은 어떻게 시작한 겁니까. " 오관영 선배님 덕분이죠. 그분은 환일고등학교 교사생활을 하시면서 배구 해설도 하셨는데요. 당시에 TBC라는 동양방송의 김재길 체육부장님이 야구가 프로화가 된다는 전제하에 대비해서 앞으로 5년 동안 해설자를 좀 키우고 싶다고 했을 때, 오관영 선배가 저를 추천하셨어요. 그 때 조건이 싸움 잘하고, 여자 사랑할 줄 알고, 술 잘 먹는 선수 출신을 찾아서 제가 발탁된 거라더군요. 저는 환일고에서 근무하며 일본유학을 준비중이었어요. 일본 유학 다녀와 교수가 되는 게 꿈이었거든요. 그런데 야구해설을 맡아 교사직도 교수꿈도 포기했죠. " -처음부터 해설을 잘 했나요. " 웬걸요. 거의 말도 못하고 버벅거려 잘릴 뻔했어요. 1979년 청룡기 경기로 제가 첫 해설을 시작했죠. 그 당시 저와 처음 같이 하셨던 아나운서 분이 박종세·유수호·이장호 아나운서 세 분이셨어요. 기라성같은 아나운서 옆에 있으니 입이 안열려요. 해설자가 말을 해야 해설자 아닙니까? 긴장을 해서 너무 말을 안하니까 PD가 컵에다가 술을 따라 왔어요. 술이라도 마시고 진정하고 말 좀 하라고요. 그런데 긴장이 풀리는 게 아니라 술까지 취해서 그냥 " 네, 네, 네 " 란 말만 했어요. 완전 방송사고 수준이죠. 그후에도 계속 나아지지 않아 동양방송 간부회의에서 하일성은 해설자로서 재능이 없는 것 같으니 내리자고 했는데, 그 때 김재길·박종세 두 선배님이 진짜 사표를 걸고 저를 옹호했어요. 6개월 만 기다려보자면서요. " -그후에 어떻게 살아남으셨나요. " 공부했죠. 똑같은 상황에서 나는 이렇게 설명했는데, 우리 선배님들은 어떻게 설명했을까 하는 식으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죠. 정말 피나게 공부를 했죠. 그랬더니 정말 달라지더라고요. 야구가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더라고요…. " -한국 최고의 야구해설가, 국민해설가로 인정받은 비결은 뭔가요. " 전 해설은 대화라고 생각해요. 한번도 해설을 위한 해설은 안했어요. 보통사람들이 맥주집이나 회사 근처 식당에서 '어제 야구시합 봤어?'라고 떠들 때의 수준으로 편하고 쉽게 선수나 시청자들과 이야기하듯 한 게 친근감을 준 것 같습니다. 또 권위의식을 버렸어요. 모르면 뭐든 물어봤죠. 해설하다가 이해 안가는 룰이 있으면 심판에게 찾아가 물어보고, 선수들에게도 '그때 왜 그런 플레이를 했냐?' '뭐가 힘드냐' 등을 물어봤어요. 어린 선수들과 더그아웃에서 장난치듯 물어본 것들이 다 자양분이 되더군요. " -'예상해설'의 선구자이기도 한데요. "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빨간 장갑의 마술사라고 하는 김동엽 선배님이 저를 많이 예뻐해 주셨어요. 그분이 '우리가 여지껏 했던 해설은 어떤 상황을 쫓아가는 해설이다. 너는 그러지 마라. 해설에 승부를 걸어라. 네가 정확하게 예상이 되면 과감하게 말해라'라는 조언을 해주셨어요. 전에는 예측해설보다는 벌어진 상황에 대해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가를 많이 설명하는 스타일이었는데 저는 김동엽 선배님의 조언을 듣고서 이렇게 될 것이다라는 쪽으로 바꿨죠. 워낙 기라성같은 선배님들이 해설을 하고 계시니까 그분들과 경쟁해서 제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저도 승부를 걸어야겠다는 생각에서 패턴을 바꿨는데 호응을 얻었습니다. " -예상이 빗나갈 때도 있잖습니까. " 당연하죠. 전엔 예상이 빗나가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두거나 왜 그런 예상을 했는지 구구절절 설명하느라 말을 많이 했어요. 이젠 제가 잘못 판단한 거라고 사과를 해요. " -KBS TV < 아침마당 > 은 물론 각종 프로그램의 인기 초대손님인데 일상 대화도 맛깔스럽게 하는 비법이 궁금합니다. " 우선 누구와 만나도 제가 편안한 마음을 가져서 그럴 겁니다. 무엇보다 진솔한 것이 제 장점이자 단점인 것 같아요. 감정 표현을 잘 감추지 못하고 저나 가족이 부끄러운 이야기도 솔직하게 말하거든요. 뭐 방송에 이미 소개된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딸들이 호주에서 유학할 때 담배를 피운다는 걸 알았어요. 방송에 나가 '내 자식이 아니면 담배 피우지 말라고 야단칠 텐데 막상 내 자식에겐 뭐라 할말이 없더라. 이젠 자식에게 질 때다. 지더라도 멋지게 지는 법을 배워야할 것 같아서 공공장소에서는 피우지 말라고 했다'라고 했죠. 당시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방송에 출연하는 이들을 보면 다 도덕적인 성인군자이고 절대 죄라고는 안짓는 천사들뿐인데 저는 실수담이며 남부끄러운 이야기도 털어놓으니 재미있나봅니다. " -한국 주먹을 상징하는 김태촌씨부터 한국의 석학이란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과도 친분이 두터운데요. " 인간관계 폭이 넓긴 합니다. 김태촌씨 아들이 장가갈 땐 그 사람이 옥중에 있어 제가 혼주 역할도 했죠. 사람들은 누구나 배울 게 있어요. 사람들을 만나서 편안한 마음으로 대하면 그분들도 마음을 열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다보면 다양한 삶을 관찰할 수 있고 서로 도움을 주니 좋죠. 제 취미가 독서와 술입니다. 환할 땐 책보고 깜깜해지면 술 마셔요. 매일 술만 마시다 보니 60평생 < 맘마미아 > 같은 유명한 뮤지컬은 물론 연극 한편 보러간 적ㅔ이 없어요. 남들이 다 즐기는 문화생활을 제대로 못해본 게 후회스럽습니다. " -그렇게 술드시다 결국 죽을 고비도 넘기셨잖아요. 주변에서 술많이 드신다고 걱정하면 '내 간은 심심산골 주지의 간보다 깨끗하다'고 자랑하시더니…. " 간은 아직도 말짱해요(웃음). 어느날 방송중에 가슴 통증이 너무 심해 곧바로 병원에 갔다가 여섯시간에 걸쳐 심근경색 수술을 받았죠. 그 후에도 위의 종양절제술, 담낭제거술, 연골수술, 손목수술 등을 몇년 사이에 받았어요. 심장수술받고는 술과 담배를 끊고 조신하게 살았는데 다시 위암일지도 모른다는 진단을 받고 조직세포 검사하느라 1주일을 기다리는데 그때가 가장 무섭고 고통에 시달렸어요. 결국 양성으로 밝혀졌는데 그게 악성이라고 판정났으면 인생이 달라졌죠. 글자 하나 차이에 생과 사가 오가듯 어찌 보면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해서 술, 담배는 적당히 즐겨요. 제가 월드컵때는 토론프로에 흡연자 대표로 나갔다가 심장수술을 한 후엔 금연자대표로 나갔는데 KBO 사무총장하면서 다시 담배를 피웁니다. 인간이 이렇게 간사한 거에요. " -다섯번이나 수술을 한 분이 야구때문에 다시 담배를 피우셨군요. 그렇게 평생을 매달린 야구의 매력이 뭡니까. " 야구가 우리 인생과 가장 닮았기 때문입니다. 스포츠마다 다 특징이 있지만 야구는 테니스나 농구처럼 공으로 하면서도 공에 승패가 달려있지 않고 사람이 하는 운동이라 매력적이에요. 또 선수가 공을 쳐서 1루, 2루, 3루를 돌아 홈으로 돌아오는 과정은 혼자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죠. 감독의 지시, 동료들의 투혼 등 파란만장한 과정을 거쳐 오면서 삶의 지난함을 체험합니다. 또 투수가 어떤 공을 던질까 기다려야 하는 등 기다림의 미학도 배울 수 있고 다 죽어있던 팀들이 펄펄 살아나 대역전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야구만의 매력입니다. 야구만큼 철학적이고 드라마틱한 운동도 드물죠. 반항아에 말썽꾼이던 소년에게 야구가 멋진 인생을 선물한 것에 감사해 제 여생도 한국 야구 발전을 위해 바치고 싶습니다. " ▲하일성은 누구인가 고교 체육교사로 사회생활…79년 TBC서 해설위원 입문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나 성동고·경희대학교 체육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김포 양곡고등학교 체육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 당시 제자와 결혼해 두딸을 두었다. 1979년부터 동양방송(TBC) 야구해설위원으로 방송계에 입문, 1982년 한국방송 스포츠국에 야구해설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각종 방송프로그램 출연은 물론 이장호 감독의 < 공포의 외인구단 > (1998년), <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 (1998년) 등 야구영화에도 특별출연했다. < 하일성 없이도 프로야구를 10배 재미있게 즐기는 책 > < 하일성의 나는 밥보다 야구가 좋다 > < 인생은 1%의 싸움이다 > 등의 책도 펴냈다. 어느 일도 5분 만 설명하면 남들에게 50분 동안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순발력과 재담이 뛰어나다. 최근에야 돈에 눈떠 부자가 되어 야구발전에 기여하고 싶다는 결심을 했단다.
- 암릉에 앉아, 눈으로 들이켜는 백두대간
- ▲ 멧등바위의 정상 사이 암릉 구간에서 생달리 쪽으로 바라다 본 황장산의 능선. [경향닷컴 제공] 황장산(1077.3m)은 백두대간 남한 구간의 중간쯤에 우뚝 솟아있다. 소백산을 지나 지리산으로 흐르는 백두대간이 110㎞에 이르는 문경 구간 초입에 황장산을 빚어놓았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북 문경시 동로면이다. 골짜기가 깊어 원시림이 잘 보전돼 있고, 암릉과 암벽이 빼어나다. 대미산, 포암산, 부봉으로 물길처럼 흐르는 백두대간 길과 단양의 도락산 등 주변 명산들을 한 폭의 동양화 보듯 감상하며 오를 수 있는, 조망미가 특히 뛰어난 산이다. 황장산의 이름은 황장목이 많은 데서 유래했다. 황장목은 왕실에서 대궐이나 임금의 관, 배 등을 만드는 데 쓰는 최고 품질의 소나무를 말한다. 송진이 꽉 차 속살은 누렇고, 목질이 단단하고 결도 곱다. 조선 숙종 때(1680년)는 나무 보호를 위해 벌목과 개간을 금지하는 봉산(封山)으로 정하고 관리를 파견, 감시했다. 당시 세워진 봉산 표석(지방문화재 제227호)이 명전리에 남아 있다. 지금은 안타깝게도 과도한 벌채 등으로 황장목이 없다. 황장산의 옛 이름은 작성산(鵲城山)이다. 동국여지승람과 대동지지에 그렇게 표기돼 있다. 산세가 까치집처럼 생겼고 작성(鵲城)이란 성터가 있다. 조선 중기까지 작성산으로 불려오다 봉산으로 지정되면서 자연스럽게 산 이름이 황장산으로 바뀐 듯하다. 황장산이 있는 동로면은 고려시대까지 작성현(鵲城縣)으로 불렸고, 황장산 문안골에는 성문 문설주 등 고구려성으로 추정되는 작성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한국전쟁 때는 빨치산과 토벌대, 인민군과 국군간 격전이 벌어지는 등 치열했던 우리 역사가 고스란히 배어있다. ▲ 황장산 차갓재에 있는 백두대간 남한 구간 중간 지점 표지석과 장승. 2005년 7월 문경 산들산악회에서 세웠다. 황장산의 능선들은 크고 작은 바위들로 이뤄져 있다. 암산답게 곳곳에서 암봉의 비경이 펼쳐진다. 베를 한 올 한 올 늘어뜨려 놓은 것 처럼 생긴 ‘베바위’, 화강암 절벽이 치마를 펼친 것 같다 하여 이름지어진 ‘치마바위’, 비녀를 꽂아 쪽을 진 것처럼 생긴 감투봉, 투구봉, 조망바위 등이 산세와 조화를 이룬다. 기암괴석 사이에 뿌리를 박고 세찬 풍파를 견뎌온 소나무들은 운치를 더한다. 정상 아래 수직에 가까운 멧등바위와 부근 암릉지대에서는 로프를 잡고 절벽 구간을 오르는 스릴감을 느낄 수 있다. 거친 암릉 구간이 많지만 암벽 등반 코스로 인기가 높은 수리봉(841m) 촛대바위 등 일부를 제외하고 장비 없이 오르지 못할 바위는 거의 없다. 생달2리 안산다리마을 위 차갓재에는 ‘백두대간 남한 구간 중간 지점’이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통일이여! 통일이여!/민족의 가슴을 멍들게 한/철조망이 걷히고/막혔던 혈관을 뚫고/끓는 피가 맑게 흐르는 날/대간 길 마루금에 흩날리는/풋풋한 풀꽃 내음을 맘껏 호흡하며/물안개 피는 북녘땅 삼재령에서/다시 한 번 힘찬 발걸음 내딛는/네 모습이 보고 싶다.’ 표지석 뒷면에는 이 같은 산악인들의 염원이 새겨져 있다. 문경지역 산악회에서 세운 것이다. 좌우에는 두 장승, ‘백두대장군’과 ‘지리여장군’이 서 있다. 정상쪽 능선에 오르면 백두대간 길과 백두대간에서 가지쳐 나간 주변 명산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서남쪽으로 대미산·운달산·주흘산, 북쪽으로 도락산, 북서쪽으로 월악산, 동북쪽으로 황정산과 그 뒤로 소백산이 한 폭의 화첩처럼 펼쳐진다. 문안골, 토시골, 우망골 등 남북으로 몇 갈래씩 뻗어나간 골짜기는 반나절은 족히 걸릴 만큼 펑퍼짐하고 깊다. 거친 능선과 달리 수천년 동안 피흘리며 쓰러진 남정네들을 감싸안은 여인의 넓고 넓은 치맛자락 같은 모습이다. 가파르거나 험하지 않아 계곡산행의 묘미를 즐길 수 있다. 전설 깃든 옛 명당에서 오미자 한잔, 호산춘 한잔 황장산은 사방으로 여러 갈래 길이 나 있다. 문경시 동로면 생달2리 안산다리마을에서 차갓재나 작은차갓재로 오르는 길이 있고, 동로초교 생달분교에서 토시골로 오르는 길, 단양군 대강면에서 문안골로 오르는 길, 벌재나 황장산 약수에서 백두대간을 따라 오르는 길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안산다리마을에서 차갓재나 작은차갓재로 올라 백두대간 길을 밟고 정상에 오른 뒤 산태골로 내려오는 원점 회귀 산행 코스가 많이 알려져 있다. 차갓재에서 정상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의 아기자기한 암릉미를 즐기며 사방에 솟아있는 주변 산들을 감상할 수 있다. 산행 시간은 4시간 안팎이다. 안산다리마을에서 작은차갓재로 올라 백두대간을 타고 정상에서 계속해서 감투봉, 황장재, 치마바위, 폐맥이재를 거쳐 벌재까지 가는 데는 4시간30분가량 걸린다. 산행 기점으로 많이 이용되는 안산다리마을에는 백두대간 종주자들이 주로 찾는 민박집이 여러 곳 있다. 황장산 기슭 동로면 일대는 오미자로 유명하다. 생달1리에는 오미자청을 만들며 농·산촌을 체험할 수 있는 오미자체험마을도 있다. 면소재지에서 생달리간 도로변(적성리)에는 풍수설과 관련한 전설이 깃들어있는 말(馬)무덤이 수령 300년 된 큰 소나무와 어우러져 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서 귀화한 두사충이 조선의 팔대 명당 중 하나라고 전하는 명당을 적성리에서 발견,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정탁의 머슴에게 일러주어 나중에 정탁의 아들이 찾아나섰는데 타고온 말이 갑자기 뒷발질을 해 머슴이 즉사하자 화가 나 말의 목을 베어 묻었다는 곳이다. 산악인들이 간단하게 술 한 잔 하며 황장산 산행을 결산하는 장소로 많이 애용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시내 쪽으로 차로 10분쯤 가면 경천호가 나오고 이어 도로변에 황희 정승 후손들이 500년을 빚어온 명주 ‘호산춘’ 제조장(산북면 대하리, 054-552-7036)이 나온다. 호산춘은 장수 황씨 사정공파 종택에서 전승돼온 솔향 그윽한 가양주로 이곳에서만 구할 수 있다.▶ 관련기사 ◀☞최초의 등대섬, 팔미도 106년 만에 개방☞영암왕인문화축제, "봄나들이와 체험학습"☞어머니의 넉넉한 품 같은 한반도의 배꼽 철원
- '개성만점' 연예인 예명, 그 존재의 이유
- ▲ 이민호[이데일리 SPN 박미애기자] 많은 연예인들이 본명이 아닌 예명을 쓴다. 멋이나 이미지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그 중에는 나름 타당한 이유를 제시하는 이들도 상당히 많다. 그래서 연예인들의 예명, 그 존재의 이유에 대해 살펴봤다.하나. 동명이인 때문에~ 세상에는 수많은 동명이인이 존재한다. 연예계도 마찬가지다. 모델 이소라와 가수 이소라, 방송인 박지윤과 가수 박지윤, 가수 이승환과 개그맨 이승환 등은 대표적인 동명이인 연예인들이다.이들은 자신들의 본명을 그대로 사용하지만 연예인들 중에는 동명이인의 존재로 어쩔 수 없이 예명을 쓰는 경우도 있다. KBS 2TV 월화드라마 '꽃보다 남자'에 출연 중인 이민호도 데뷔 초 이런 이유로 잠깐 '이민'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었다고 한다. 배우 한가인(본명 김현주), 배우 김민(본명 김민정), 가수 아이비(본명 박은혜), 배우 박시연(본명 박미선), 배우 김수로(본명 김상중) 등도 동명이인의 존재때문에 예명을 쓰는 예다.▲ 손예진둘. 이름이 어려워서~ 배우 김성민의 본명은 김성택. 드라마 '왕꽃 선녀님'에 출연할 때까진 본명으로 활동했다. 그러다 자신의 데뷔작인 '인어아가씨'가 중국 등 아시아권에서 인기를 끌면서 한류스타로 떠올랐는데 중화권에서 김성택이란 이름이 발음하기 어려워 김성민으로 바꾸게 됐다. 배우 손예진의 본명은 손언진이다. 연예계에 데뷔할때 이름이 어렵다며 주위에서 예명을 쓸 것을 권유해 '예진'이란 새 이름을 얻었다. 지금은 스스로 본명이 더 낯설게 느껴질 만큼 손예진이라는 이름에 익숙해졌다고 한다.▲ 이완셋. 묻어가는 건 싫어~ 배우 이완의 본명은 김형수로 예명을 쓰게 된 배경에는 누나 김태희의 유명세가 한 몫 했다. 그는 지난해 10월 한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해 "본명으로 데뷔하면 김태희 동생이란 사실이 들통날 것 같아 예명을 만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 배우 하정우도 김성훈이라는 본명이 따로 있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탤런트 김용건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아 예명을 사용했다. ▲ 비넷. 그 외에~ 가수 비(본명 정지훈)는 데뷔 음반을 녹음할 때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려 박진영이 지은 활동명이고 가수 세븐(본명 최동욱)은 설렁탕집에 밥을 먹으러 갔다가 때마침 접시에 놓인 깍두기 수가 일곱 개인 것을 보고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졌다. 또, 배우 주진모(본명 박진태)와 장혁(본명 정용준)은 매니저의 이름을 따서 그리고 송채환(본명 권소연)은 자신이 출연한 영화 '장군의 아들2'에서 맡은 캐릭터 이름을 따 예명을 짓는 등 연예인들의 예명에는 다양한 사연이 녹아 있다. ▶ 관련기사 ◀☞이민호 "꽈당만 하지 않았더라면…" 백상 신인상 소감 밝혀☞이민호·김현중 '백상 수상' 직후 촬영 복귀...기쁨보다 '꽃남'☞김현중, 이민호 누르고 백상 男 인기상...女 인기상 윤아 2관왕☞이민호 인기, 죽은 '고등어'도 살렸다...'달려라! 구준표'☞'꽃남' 이민호, 뜨기 전 '예명' 있었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