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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PO기업소개(가드텍)
- [edaily] 가드텍은 출입용 집적회로(IC)카드를 이용해 출입자를 통제하는 키드리더기 기반의 물리적 보안사업을 주력으로 하는 업체다.
지난 84년 설립 이후 키드리더 방식의 출입통제 시스템을 주력상품으로 삼아왔으나 97년 이후에는 PKI방식 등 컴퓨터와 연계된 보안사업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출입통제시스템 사업은 10여개 업체가 시장을 주도하고 있으며 이중에 코스닥 등록기업으로는 씨큐어테크(52640)가 있다. 시장점유율은 씨큐어테크가 8.44%, 가드텍이 7.91%로 유사하나 지난 해 매출액은 씨큐어테크가 61억원을 기록한 데 반해 가드텍은 절반 규모인 29억원에 그쳤다.
가드텍은 과거 단말 형태의 제품에서 최근 사내 네트워크와 연계하는 시스템 방식으로 매출형태를 전환하고 있으며 한 장의 카드로 건물출입통제, 컴퓨터사용인증, 사이버거래인증의 기능을 발휘하는 솔루션인 원카드시스템을 도입, 네트워크보안과 출입통제스템을 결합한 시스템으로 보안관련 경비업체와 정보통신업체를 공략하고 있다.
또 출입통제 시스템 뿐 아니라 공개키 기반의 네트워크 인증시스템 제품과 최근 개인용 방화벽인 PC WALL, 3.5 인치 디스크카드를 개발했다. 주로 내수용으로 판매되고 있으며 지난해의 수출비중은 15% 가량이었으나 올해는 100% 내수부문에서 매출을 올리고 있다.
지난 84년 삼보컴퓨터 대리점에서 출발한 가드텍은 경쟁업체들에 비해 비교적 오랜 연혁을 갖고 있으며 관리조직 인원들의 평균근무연수도 5년 이상으로 비교적 업무체계가 확립돼 있다는 점이 강점으로 꼽히고 있다.
투자위험요소로는 정보보안이 빠르게 변화하는 지식기반산업으로 기술의 수명주기가 짧고 우수인력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특징이 있어 우수인력 확보 및 지속적인 신기술 개발로 신제품을 출시하지 못할 경우 매출액이 감소할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됐다.
또 수출에 주력하려는 전략을 갖고 있으나 지난해 800만원 규모의 미국 수출 외에는 직접적인 수출 경험이 없고 보안기술에 주력하고 있으나 매출액중 상품매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56%에 불과, 유통업으로 분류된다는 점도 최근 대기업들의 유통시장 진출과 관련,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으로 지적됐다.
지난해말 현재 매출채권이 자기자본의 71.8%인 48억원에 이른다는 점과 끊임없는 영업으로 매출처를 지속적으로 발굴해야 한다는 보안산업 자체의 특성도 투자유의사항으로 꼽혔다.
현재 가드텍의 지분은 대표이사 김승찬 등이 23.26%, 신협중앙회가 5.61%를 갖고 있으며 미래에셋 7.67%, 동원창투가 9.28%를 보유하고 있다. 자본금은 공모전 30억원에서 공모후 40억1000만원으로 증가할 전망이다.
등록후 곧바로 매물화될 수 있는 물량은 구주주물량 19만5194주와 공모주식수 24만5765주(우리사주조합분 61,441주 제외)를 합한 44만959주.
공모가는 1만3000원(액면가 500원)으로 결정됐으며 본질가치는 1만2910원이다. 오는 18~19일 신흥증권을 주간사로 공모주 청약이 실시된다.
<주요재무제표 2000년 기준>
자본금 35.6억원
매출액 115.3억원
영업이익 9.9억원
경상이익 11.2억원
순이익 8.4억원
주간사 신흥증권
- (자료)증권투자신탁업감독규정 개정 내용-금감위
- [edaily]
1. 개정이유
□ MMF의 장부가 평가에 따른 부실화 개연성 및 만기불일치 문제를 해소하고 비상장채권에 대한 평가방법을 개선하는 한편, 신탁재산의 정보제공 범위 등 제도상의 미비점을 보완
2. 주요 개정내용
가. MMF 운용제한 제도의 개선
□ 현 황
① 편입대상 채권 규제
국채·통안증권의 경우 잔존만기 2년이내물로 제한
* 국채잔존만기 단축 : 5년 → 2년("00.11)
회사채의 잔존만기는 1년이내물로 제한
② 장부가와 시가와의 괴리율 규제
시가가 장부가보다 1%이상 하회하거나 하회할 우려가 있는 경우 보유 유가증권의 매각 또는 가격조정등 의무화("00.11신설)
□ 개선내용
① 편입대상 채권의 잔존만기 단축
MMF의 만기불일치 현상을 예방하기 위하여 국채 및 통안증권의 만기 단축 : 2년이내 ⇒ 1년 이내
(시행방법)
시행일부터 1년6월로 단축하고 동 시행일 이후 6월이 경과하면 1년으로 단축
신규펀드 및 기존펀드에 새로 편입되는 채권에 적용
② 장부가와 시가의 괴리율 축소
괴리율을 축소함으로써 장부가평가에 따른 부실가능성을 최소화 : 1% ⇒ 0.5%
(시행방법)
시행일부터 0.75%로 축소하고 시행일 후 6월이 경과하면 0.5%로 축소
<기존펀드에 대한 경과조치>
·시행일 현재 괴리율이 0.75%이상인 경우
⇒ 시행일 후 3월이내에 해소
·시행일로부터 6월 경과후 괴리율이 0.5%이상∼0.75%이내인 경우
⇒ 6월이 경과한 날부터 3월이내에 해소
□ 시행시기 : 공고일(관보게재일)
나. 비상장채권의 평가방법 개선
□ 현 황
채권가격평가기관의 가격정보 이용이 의무화되어 있지 않아 대부분의 투신사들이 증권업협회의 시가평가수익률만을 이용
이에 따라 시장의 실세금리를 정확히 반영하지 못하고 시가평가의 공정성에 의문이 제기됨
□ 개선내용
2이상의 채권가격평가기관이 제공하는 가격정보를 기초로 평가
대상채권 : 투자·투기등급채권(CB, BW, FRN등 포함)
(시행방법)
기존펀드의 경우 신규로 편입되는 채권에 한해 적용하고 신규펀드는 모든 채권에 적용
□ 시행시기 : 2001.9.1
다. 투신사의 펀드운용 정보제공의 범위 제한
□ 현 황
위탁회사는 판매회사 또는 계열회사에 신탁재산의 자산구성내용 또는 유가증권 매매등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함(법 제35조)
- 다만, 예외적으로 신탁재산의 과거운용정보등 수익자의 이익을 해하지 아니하는 정보로서 금감위가 정하는 정보의 제공은 가능(법시행령 제16조의4)
□ 개선내용
정보제공대상 : 판매회사
정보의 범위 및 사용제한
- 정보범위 : 신탁재탁재산명세서, 수익증권기준가격대장, 재무제표 및 그 부속명세서(과거 1월이전 자료에 한함)
- 사용제한 : 자기이익을 위한 사용이나 수익자 및 펀드평가회사이외의 제3자에게 제공금지
라. 성과보수제 도입근거 마련
□ 현 황
규제개혁위원회에서 2001년 지식정보화 사회구현을 위한 주요 규제개혁 과제로 투신 및 뮤추얼펀드의 성과보수제 도입을 추진
성과보수는 운용회사가 자율적으로 결정할 사항이지만 이를 전면 허용할 경우 선관의무 소홀 등의 부작용 소지가 있음
□ 개선내용
성과보수 대상은 사모펀드(수익자 100인 미만)에 한하여 허용
성과보수를 정하는 경우 약관, 투자신탁설명서에 다음사항을 기재토록 하여 수익자에게 인지시키도록 함
- 성과보수의 산정방법
- 성과보수 측정에 사용될 비교지수(예, KOSPI, 국고채수익률등), 비교지수의 특성 및 측정기간
마. 사모사채의 투자제한 완화
□ 현 황
현행 사모사채는 사실상 발행기업에 대한 여신으로 보아 엄격히 투자제한을 하고 있음
<현행 규제내용>
·A등급이상의 사모사채(상장·협회등록법인)
·종목당 한도 : 신탁재산의 100분의3(특수관계인은 100분의2)
□ 개선내용
① 사모펀드에 대한 사모사채 투자제한 폐지
사모펀드의 경우 소수 투자자들이 투자위험에 대한 합의하에 투자하는 상품이므로 사모사채 투자제한(3%)을 폐지하고 신용등급 요건(A등급이상)도 적용 배제
- 다만, 최소한의 투자자 보호를 위해 투자가능 신용등급을 약관 등에 기재하여 공시토록 하고 신용평가를 받지 않은 무등급 사모사채는 운용대상에서 제외
② 벤처전용펀드에 대한 사모사채 투자제한 폐지
벤처기업에 대한 지원의 일환으로 기술신용보증기금 및 신용보증기금이 보증하는 사모사채를 주로 편입하는 펀드에 대해서는 사모사채 투자제한을 폐지하고 신용등급 요건 적용 배제
- 공모펀드로서 법률상 종목별 한도(10%)는 적용
< 벤처 사모사채 전용 투자신탁(例) >
벤처기업이 발행하는 사모사채로서 기술신용보증기금 또는 신용보증기금이 전액 보증하는 것을 주로 편입(50%이상)
Ⅱ. 증권투자회사감독규정 개정
1. 개정이유
□ 사모펀드의 사모사채 투자제한을 완화하고 성과보수 도입근거를 마련(증권투자신탁업감독규정과 동일수준)
2. 주요 개정내용
□ 사모증권투자회사의 경우 사모사채에 대한 투자제한(5%) 및 편입가능한 신용등급제한(A등급이상)을 배제
다만, 최소한의 투자자 보호를 위해 투자가능 신용등급을 약관 등에 기재하여 공시토록 하고 신용평가를 받지 않은 무등급 사모사채는 운용대상에서 제외
□ 성과보수 지급근거를 마련함으로서 보수체계에 대한 규제를 완화
성과보수 대상은 사모펀드(수익자 100인 미만)에 한하여 허용
성과보수를 정하는 경우 정관, 투자설명서에 다음사항을 기재토록 하여 주주에게 인지시키도록 함
- 성과보수의 산정방법
- 성과보수 측정에 사용될 비교지수, 비교지수의 특성 및 측정기간
- 오호수 증협회장, 증권분석사회 신임회장에 선임
- [edaily] 사단법인 한국증권분석사회는 25일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신임회장에 오호수 증권업협회 회장을 선임했다. 또 부회장에는 윤희육 전 교보투신운용 사장, 정강현 건설증권 사장, 허과현 IMG홀딩컴 사장을 선임하고, 오문성 공인회계사(신한회계법인)를 감사로 선임했다.
신임 오호수 회장은 취임사에서 "증권분석사는 유가증권의 가치를 분석하고 평가해 투자자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증권전문인력으로서의 역할이 중요한 만큼 철저한 직업윤리를 바탕으로 전문지식과 실무능력을 겸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회원윤리강령 및 직무행위기준을 제정하는 한편 지속적인 실무연수 강화, 증권분석사를 중심으로 한 IR활동 및 세미나를 활성화해 회원의 자질향상과 사회적 위상을 제고해 증권금융업계에서 인정받는 증권분석사회가 되도록 노력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한국증권분석사회는 지난 76년 3월 창립해 83년 재경부로부터 사단법인 설립 인가를 받았으며 현재 1248명의 개인회원이 주로 증권·금융업계에서 애널리스트 및 펀드매니저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법인회원은 15개사로 증권업협회, 투신협회, 증권거래소를 비롯해 증권사 7사(삼성, LG, 대신, 동원, 현대, 한화, 리젠트), 투신증권사 2개(대한투신증권, 현대투신증권), 투신운용사 2사(교보투신운용, 조흥투신운용), 보험사 1사(대한생명) 등이 가입하고 있다.
- 정통부, IT인력양성에 5년간 1조 투자-종합계획(상보)
- [edaily] 정보통신부는 올해 당초 2000억원 수준이었던 IT전문인력 양성 예산을 4311억원으로 대폭 늘리고, 이를 통해 5만명 이상의 우수한 IT 전문인력을 양성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향후 5년간 IT전문인력 양성에 총 1조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정통부는 21일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열린 "IT전문인력 채용설명회"에서 "지식정보강국 e코리아 건설을 위한 IT인력양성 종합계획"을 통해 이같은 계획을 발표했다.
정통부는 이에 따라 IT관련 학과 및 대학(원)의 정원 확대와 민간교육기관의 IT전문교육 등 기존 사업의 규모를 확대하고, 우수한 IT 전문인력 양성을 위한 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신규사업을 추가로 실시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다음은 이날 정통부가 밝힌 IT인력 양성 계획의 주요 신규사업계획 및 기존 계획의 확대 내용이다.
◇주요 신규사업
▲수도권 지역 IT관련학과 정원 확대= 수도권 대학의 정원 감축분을 활용하여 지난 2년간 동결됐던 수도권 지역에 IT학과를 중심으로 증원을 허용키로 함
▲S/W 인재 양성기반 확충= IT분야중 인력부족이 심각한 소프트웨어(S/W)분야의 학과 및 대학(원)을 설립하는 경우 첨단시설장비 및 교수요원 확충 등을 위해 설립시 2년간 20억원을 지원하고, S/W학과의 경우에는 2년간 15억원의 예산을 지원하기로 함
▲산업현장 지향 교육강화= IT관련 학과가 커리큘럼을 JAVA, HTML 등 산업체 수요가 많은 교과목 중심으로 개편하는 경우 학교당 1.5억원 한도내에서 첨단시설장비 및 교수요원 확충 등을 지원하여 실무적응능력을 제고함. 이와 함께 비IT학과가 IT교과 과정을 도입하는 경우 학교당 1억원 한도내에서 첨단시설장비 및 교수요원 확충 등을 지원하여 IT인력의 저변을 확산하고 컨텐츠산업의 발전을 도모함.
▲해외교육 기회확대 및 연구개발 활성화= 대학이 첨단 IT지식 및 기술을 가진 해외 우수대학의 교수 및 전문가를 초빙하여 교수로 활용할 수 있도록 교수 채용비용을 1인당 연간 1억원 한도내에서 지원하여 국내에서 선진 IT 지식 및 기술을 전수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대학교육의 세계화를 추진하여 글로벌한 IT 전문인재를 양성함. 또 "미디어 랩 아시아"를 설립, "MIT미디어 랩"과의 협력관계를 구축하여 첨단 미디어/IT 통합기술을 개발함.
▲IT영재 발굴·육성= 과학영재고에 첨단 교육기자재 등을 지원하고 정보통신 관련 대학(원) 교수가 과학고에 출강하여 지도함으로써 미래의 빌게이츠나 손정의씨 같은 IT분야 영재를 조기에 발굴하여 육성함. 이를 위해 현재 교육부와 협의중인 S/W분야의 학부를 신규로 설립하여 고교·대학·대학원으로 이어지는 일관되고 체계적인 IT 영재 교육 체계를 구축하고, S/W, 미디어 및 콘텐츠 분야의 선도인력을 확대 양성함.
▲제도적 기반조성= 노동시장 환경변화에 대응해 신속하고 정확한 인력수급 통계 및 실태조사체계를 구축하고 인력양성사업 성과측정 및 평가체계를 개발하여 IT 전문인력의 체계적 양성기반을 조성함
◇기존 사업 확대 내용
▲인력양성 규모확대= 교육비의 절반을 지원하는 교육대상자수를 당초 2000명에서 2만명으로 확대함. 또 정규교육기관을 통한 IT인력양성 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4대 권역별 정보통신 대학원설립 등 IT정원을 확대하는 교육기관에 첨단장비, S/W 등을 지원함. 대학원의 경우 2년간 15억원, 대학은 10억원을 지원함.
이와 함께 정보보호 및 전자상거래 등 교육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IT과목에 대한 사이버교육을 실시하고, 2003년부터는 정보통신사이버대학으로 인가를 받아 정식 학위취득이 가능하도록 추진함.
더불어 국제수준의 IT교육기관을 육성하기 위해 우수한 IT교육기관을 10개 범위내에서 "MIC IT아카데미"로 지정하고, 이들 학원에게 학원당 2억원씩의 기자재 확충 예산을 지원하고, 디지털 컨텐츠, 게임 등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분야를 전문으로 교육하는 "디지털컨텐츠/게임분야 전문교육기관"을 육성하여 대학 등 정규교육기관의 틈새를 보완함.
▲산업현장 지향 교육강화= 산업체, 연구소 등의 IT전문가를 대학에서 객원·겸임교수로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객원교수는 1인당 3500만원, 겸임교수는 1500만원씩의 예산을 지원하고, ASIC, JAVA, RF 등 IT 특성화 전문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관련 전문가를 지속적으로 양성하고, 우수 창업아이템에 대해 IT창업기업가 및 벤처전문가를 양성하는 벤처아카데미를 개설·운영함.
▲해외교육 기회확대= 올해 200명 규모의 해외 우수대학의 석·박사 유학을 지원하고, 민간 우수 IT교육기관 파견교육을 확대하여 국제경쟁력있는 인재를 양성함.
▲정보화 교육실시= 정보격차 해소 및 잠재적 IT인력양성을 위해 130만명에 대한 정보화 교육을 실시함.
- 김 대통령, "벤처예산 1조이상으로 확대"
- [edaily] 김대중 대통령은 21일 올해 벤처예산을 1조원에서 더욱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김대중 대통령은 세원텔레콤을 방문한 자리에서 "올해 벤처투자를 1조원에서 더 확대할 것이며 20개 벤처기업지원센터도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김 대통령은 또 세원텔레콤이 1분기에 1670%의 수출신장을 이룬 것에 대해 홍성범 회장과 근로자들을 치하하고 중국시장 적극 진출과 벤처기업 육성의 필요성을 강조했다고 청와대는 밝혔다.
다음은 21일 오전 경기도 김포시 세원텔레콤을 방문해 생산라인을 시찰한 김대통령의 발언내용.
홍성범 회장 등 세원텔레콤 모든 분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치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은 우리 경제를 다시 살리는데 있어 가장 탁월한 공헌을 한 견인차들이다.
내가 듣기에 올 1분기에 이미 작년 수출액의 19%를 넘는 수출신장을 이뤘고, 지난 3월 우리나라 전체 수출은 1.8% 마이너스인데, 여기서는 13%의 수출 증가를 이뤘다. 우리나라의 수출을 살리는 효자산업 노릇을 한 것이다. 정부는 이를 치하하고 고마운 말씀을 드린다.
여러분은 기술로 세계시장에 도전하고, 자체 브랜드로 수출에 성공, 유럽과 중국 등으로 날로 발전하고 있다. 세계 초소형 핸드폰 기술은 세계 최고의 수준이라고 들었다. 여러분의 성공이야말로 경제난국을 타개하고, 21세기 지식정보화시대에 일류국가를 만드는데 힘이 될 것이다.
세원텔레콤이 작년에 비해 1/4분기에 1,670%의 수출신장을 했다는 것을 듣고 참으로 놀랐다. 이런 기업들이 계속 나올 때 우리 수출이 성공할 것이다.
과거 국민의 정부 이전, 90년부터 97년까지 8년간 우리나라는 667억달러의 무역수지 적자를 봤다. 그러나 지난 3년간 우리나라는 772억달러의 흑자를 기록했다. 그것이 외환위기 극복에 큰 힘이 됐다. 외환위기 때 우리나라는 외환보유고가 39억달러 밖에 없었으나 이제는 940억달러가 넘어 전세계 180여개 국가 중 5번째로 많은 나라가 됐다. IMF에서 빌린 돈도 미리 앞당겨 다 갚았다.
수출해서 먹고사는 나라는 무역흑자를 내야 한다. 우리나라는 작년에 118억달러의 흑자를 냈다. 그러나 금년이 문제다. 수출이 저조하고 심지어 마이너스 현상까지 나오고 있다. 수출에 의존하는 나라에서 참으로 중대한 문제다. 미국, 일본 등 주 수출 대상국의 경제가 좋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 일본만 믿고 살 수 없다. 여기가 안되면 저기, 동이 안되면 서로 나가야 한다. 아프리카, 중동 산유국의 오일달러를 찾아나서야 한다. EU의 수출전망이 좋고, 중남미에서도 시장을 적극 개척해야 한다. 무엇보다 바로 옆 13억 인구를 가진 중국 시장은 엄청난 것이다.
세원텔레콤이 갈수록 중요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세원의 중국진출은 참으로 성공적이고, 매우 잘한 일이다. 큰 성공을 이룰 것으로 기대한다.
우리는 벤처기업 육성에 진력을 다해야 합니다. 국민의 정부 3년간 벤처기업이 1만개가 넘게 창업해 우리나라 수출에 효자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금년에도 일반기업의 수출은 1.8% 적자이나, 벤처기업은 13%의 흑자를 내고 있다. 그러나 벤처기업도 미·일 등 국제시장의 경기후퇴, 국내 주가하락, 몇몇 창업사들의 부실한 행동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부는 벤처기업을 살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대책을 세우겠다. 그래서 벤처기업이 수출주역으로서 사명을 다하도록 하겠다.
올해 벤처예산 1조를 더욱 확대시킬 것이다. 벤처창업 투자지원이 작년에 2000억원이었으나 올해는 그 이상을 투자하도록 하겠다. 20개 벤처기업지원센터도 적극 지원하겠다.
벤처기업 발전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낸 세원텔레콤이 선도자, 교사가 되어 "세원을 보라" "세원을 따라잡자"는 운동이 일어나도록 모든 벤처기업의 모범이 되도록 그렇게 해 달라. 기업과 종업원이 서로 일심동체가 되어 잘 협력해 세원이 성공하도록 하십시오.
20세기는 국민경제 시대이고, 나라의 테두리 내에서 노가 이기느냐, 사가 이기느냐에 따라 승부가 결정됐다. 그러나 21세기 세계화 시대에는 세계와의 경쟁에서 이기지 않으면, 노가 이기든 사가 이기든 회사가 망하게 된다. 회사가 세계와의 경쟁에서 이겨야만 살아남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업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일점의 의혹도 없이 경영해야 한다. 또 종업원과 일심동체가 되어 세계 1등이 돼야 한다. 2등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리고 성공해서 돈을 벌면 노사가 공정하게 배분해야 한다. 이렇게 세계와의 경쟁에서 이겨 노사가 다 덕을 보도록 해야 한다. 정부는 노사가 모두 희망을 갖고 자식, 부모, 친척, 가족들이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발전이요, 핵심은 수출증대다. 금년은 수출도 잘 되지 않고, 수입도 크게 줄고 있다. 그래서 무역흑자는 많이 늘어났으나 이는 건전하지 않은 것이다. 수출도 많이 늘고, 수입도 적정하게 늘도록 해야 한다. 수출이 우리 경제의 운명을 좌우한다. 세원의 엄청난 수출증대에 대해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
대통령으로서 여러분의 얼굴을 보고 감사의 뜻을 전한다. 더한층 분발해줄 것을 바라고, 몸 건강하시기 바란다. 세계 속에 약진하는 세원을 만들어 우리 경제에 보탬이 되도록 해 달라. 감사하다.
-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⑨박성진 삼성투신 차장(중)
- [edaily] 이번주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은 삼성투신운용의 스트레티지스트인 박성진 차장입니다. (인터뷰 상편에서 이어짐)
<운명의 장난(?) 교수의 꿈이 증권사 채권맨으로>
-그럼 신영증권에 입사한 것은 어떤 계기에서입니까.
▲아까 말씀드렸듯이 유학을 가려고 했는데요. 제가 준비했던 학교가 인디애나 주립대였어요. 미국 내에서도 빅 10에 들어가고 무엇보다도 한국학자들 중 여기서 학위받은 분들이 많은 곳이죠.
제 석사논문을 영어로 번역해서 원서를 넣었더니 그 쪽에서 “좋다. 너는 바로 박사과정에 진학해도 된다”고 하더군요. 이게 왠 떡이냐 싶었죠. 돈도 없는데 미국에서 다시 석사부터 시작하려면 좀 시간이 많이 걸리겠습니까.
의기양양 비자를 받으러 대사관에 갔더니 아까 그 여자 면접관이 “your job responsibility is not enough guarantee to come back. Your financial status is not enough guarantee to finish your coursework” 이라고 하더군요. 기가 막혔죠. 그때가 12월이었어요. 1월에 미국으로 가서 2월부터 시작하는 강의를 수강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저는 그 때 이미 결혼을 해서 기혼자용 기숙사에 제 피 같은 돈 100불을 예치금으로 송금까지 한 상황이었어요.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그래서 사정을 했죠. 그런데 전혀 안 통해요. 안 통하는 정도가 아니라 전경을 불러서 끌어낼 태세에요. 하늘이 노래진다는 것 느껴본 적 있으십니까. 한 남자의 꿈과 인생이 일개 미 대사관 직원의 손에서 박살이 난 겁니다.
인디애나 주립대에 전화를 했습니다. 창피해서 비자가 리젝트됐다는 소리는 죽어도 못하겠고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서 다음 달에는 못 가겠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괜찮다. 2년 안으로만 다시 하면 된다. 그렇지만 2년이 지나면 토플과 GRE를 새로 시험 봐서 최신 성적을 보내주면 또 된다”고 친절히 알려주더군요.
그래서 낙담한 마음을 조금은 지울 수 있었죠. 그 때 병도 좀 앓았는데 가장이니 어떡합니까. 먹고는 살아아죠. 신문을 탁 펼치고 구인광고를 막 뒤졌어요.
취직을 하기로 결심하고 보니 12월에 신입사원을 뽑는 곳이 딱 두 군데였어요. 신영증권이랑 디지털조선. 처음에는 당연히 디지털조선에 가고 싶었습니다. 대기업공채는 이미 가을에 끝났고 신영증권은 회사 자체에 일이 있어서 12월로 늦춰졌다고 하더군요. 신영증권의 일정이 먼저 시작됐는데 모집분야에 연구/조사 분야가 있었어요. 일단 두 곳에 모두 원서를 넣었죠.
-증권이 무엇인지는 아는 상태에서 입사를 결정한 것은 아닐텐데요.
▲그런 건 아닙니다. 사실… 유학준비를 하면서 잠깐 토플학원 강사로 일했는데 그 학원 바로 옆에 동서증권이 있었어요. 학원에서는 초급반 영어랑 주부회화를 담당했습니다. 아침에만 좀 바쁘고 오후에는 내리 놀아요. 그리고 학생들 수업끝나고 직장인들 하루 일과가 끝나는 저녁시간에 연이어 수업이 계속되는 거죠. 학원강사가 참 고달픈 직업입니다. 건강도 많이 망쳐요.
낮에 시간 많겠다 바로 옆에 증권회사 있겠다. 그래서 순진한 집사람을 꾀서 주식을 하겠다고 졸랐어요. 당시 집사람이 피아노 레슨을 20개나 해서 2000만원을 모았거든요. 그 돈으로 주식투자를 시작했습니다.
이 돈을 불려서 유학가자는 결심을 하고 증권계좌를 만들었더니 처음에는 잘 되더라구요. 금방 2500만원으로 돈이 불어났거든요. 저는 주식의 ‘주’자도 몰랐고 기업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어요.
들어본 회사라고는 아버님이 다니셨던 동아건설이 고작이었어요. 당시 성수대교 붕괴사태 때문에 동아건설주가 무척 쌌어요. 그래서 “음 저건 낙폭과대주야” 라고 매입했죠. 하하. 그리고 당시 금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LG계열사 주식도 샀고요. 그런데 첫끗발이 개끗발이라고 그 다음부터는 폭락하기 시작하는 겁니다.(웃음)
그 후 손절할 때가 왔는데도 그걸 못했어요. 개미투자자의 전형적인 실패사례죠. ‘손절하지 않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오를거야’ 라는 말도 안되는 류의 생각들. 되긴 뭐가 됩니까. 유학 갈 날짜는 다가오고 점점 돈은 줄어드는 지경이 됐어요. 대충 정리를 해보니까 1500만원이 조금 안되는 돈이 남았더군요. 속으로는 “그래도 선방했다. 이게 다 내가 블루칩과 낙폭과대주를 산 덕택이야”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하
유학이 취소되고 나니까 오기가 생기더라구요. 내가 왜 주식투자에 실패했는지 증권회사에 들어가서 몸소 알아봐야겠다는 오기죠. 전 그 당시만해도 증권회사 직원들은 그 이유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제 딴에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몰렸는데 그 길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디지털조선은 어떻게 됐냐구요? 제가 학부는 놀아서 학점이 나쁜데 대학원은 all A였어요. 대학원 all A지, 토플 점수 우수하지…나름대로는 서류는 문제없다고 생각하고 디조에 원서를 보냈어요. 그런데 서류에서 떨어졌습니다.(웃음) 그래서 지금도 조선일보는 감정이 좋지 않아요.
<우연의 연속, 채권분석가가 되기까지>
-신영증권에 들어자마자 바로 채권부로 갔습니까?
▲연수를 받고 신입사원들에게 지원부서를 적으라더군요. 1순위는 무조건 조사부 적었죠. 한 게 그것 밖에 없으니까요. 그리고 두번째는 국제부. 폼 나잖아요. 3순위. 주식부. 왜 주식을 하다가 망했는지 알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런데 발령을 하는데 인사부장이 “박성진 채권부” 하고 부르는 겁니다.
인상 팍 쓰면서 ‘도대체 채권부가 뭐하는데야?’ 라고 생각했어요. 인사부장께 물었죠. 채권부가 뭐하는 곳이냐고. 그랬더니 인사부장이 “아파트 분양하잖아. 거기서 채권받거든. 분양하고 나오는 사람들 앞에서 채권, 채권 하면서 소리지르고 가서 팔아. 너 명동이나 주택가에서 채권, 채권하면서 팔러다니는 사람들 본 적 없냐? 그거하는 거야” 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토씨하나 다르지않게 전해드리는 거에요. 반은 농담이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황당했어요.(웃음) 채권이 뭔지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던 데다 신입사원 교육 때 채권시간이 무지 재미없었거든요. 수학공식 막 쓰고 계산도 복잡하고.
채권부에 갔더니 지금 LG투신에 있는 최원녕 과장이 “네가 채권부냐?” 라고 인상을 쓰면서 말하는 거에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초등학교 선배더라구요. 그것 때문에 꽉 잡혀서 찍 소리도 못하고 살았죠. 하하.
-결국 전공이나 희망사항과는 전혀 상관없이 채권판에 들어왔군요. 처음에는 무슨 일을 했습니까.
▲수도결제죠뭐.(증권사가 채권매매 중개시 현물 채권과 대금을 교환, 결제해주는 것) 처음 증권사 채권부에 가면 하는 일이 그거 밖에 더 있겠습니까. 속된 말로 인생이 완전히 골로 가더라구요. 그전까지는 알튀세르, 레비스트로스와 라캉을 논하던 나름대로 먹물먹은 지식인이라고 제 딴에 자부했는데 말이죠. 하하. 인생이 이렇게 꼬이고 저렇게 꼬이는데 정신을 못 차리겠더군요. 그냥 전공살려서 기자나 됐으면 폼이라도 날 거 아니겠어요. (웃음)
-수도는 얼마나 했습니까?
▲9개월 정도? 한 일년 가까이 했습니다. 제가 신입사원 동기들보다 나이가 좀 많았어요. 다행인 것은 저랑 한 조가 된 친구가 운전을 전혀 할 줄 몰랐어요. 그래서 제가 운전을 하고 그 친구가 막 뛰어다니는 일을 했죠(웃음) 제가 어떤 건물 앞에 차를 탁 세우면 그 친구는 미친 듯 뛰어올라가서 도장 찍어오고. 수도를 직접 해 봐야 채권의 비애를 몸소 체험할 수 있어요. 길이 막힐 때는 원효대교를 뛰어서 여의도로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재미있는 일화가 많았어요. 그때 거래가 많았거든요. 선배들이 “야 이 자식아 빨리빨리 처리 못해? 느려터져 가지고선” 뭐 이렇게 혼이났죠. 저도 열이 받으면 “우리 회사에서 매매보고서 나보다 더 빨리 작성하는 사람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나보다 더 빨리 하는 사람없으니까 늦는다고 갈구지 마” (웃음) 이렇게 맞받았죠.
<“너는 컴퓨터도 잘 다루니까 기술적 분석이나 한번 해봐라”>
-채권의 기술적 분석을 시작한 건 언제인가요.
▲그것도 제가 하겠다고 한 게 아니라 신영증권 황 부장께서 “너는 컴퓨터도 잘 다루니까 이거 한번 해봐라” 이런 식으로 명령을 내리셔서 하게 된 겁니다. 입사하고 3개월 후부터 수도업무랑 채권분석을 같이하기 시작했어요. 채권단가, 이론부터 알아나갔죠. 실제로 해보니까 제가 한 것이 잘 맞아 떨어지더라구요. 잘 맞을 때까지 조정도 이리저리 해보고. 여하튼 재미있었습니다.
-채권관련 책은 몇 종류나 봤습니까.
▲기술적 분석에 관한 책은 사실 그다지 많지 않아요. 거기에 나오는 공식들을 보는거죠.
제가 좀 컴퓨터를 다루니까 그 공식들을 프로그램으로 짜고 그것을 또다시 엑셀에서 구현하는 작업들을 했어요. 조정과정을 몇 개월 거치니까 신기할 정도로 잘 맞는 거에요. 그때 당시에는 족집게처럼 들어맞는다고 느껴졌을 정도니까요.
-그게 몇 년도인가요.
▲입사하던 해였으니까 96년이군요. 그런데 이유가 있더라구요. 그 당시 시장은 지금처럼 시가평가(market to market) 시장도 아니었고 대부분 시장참가자들이 기관투자가다 보니까 현재에 비해 모멘텀이 훨씬 분명한 시장이었습니다.
지금처럼 변동성이 큰 것이 아니라 한 번 모멘텀이 생기면 관성에 의해서 일정 기간은 그것이 계속 유지가 된 거죠. 단기 딜링을 해서 돈도 벌 수 있을 것 같고 자신감도 막 생겨났습니다. 아침회의에서 “금리 어떻게 될 것 같나?” 라는 질문을 받을 때 신입사원임에도 불구하고 코멘트를 하고. 그러면서 “아 나는 이쪽 방면에 소질이 있는가봐. 분석의 천재라니까” 라는 착각에 빠지게됐죠(웃음).
그 시절에는 어디 인터넷이 있습니까. 나오는 모든 금융데이타를 일일이 손으로 작업했어요. 한국은행 데이터, 경기동향, 통계청 데이터를 수기로 입력했다는 거 아닙니까. 아주 초보적인 수준이었지만 재미있었어요.
-재미를 느낀 것이 가장 큰 이유였군요. 그만두겠다는 생각도 안하고 말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번듯한 직장에 취직해 비자받을 때 흠 잡히지 않고 돈 모아서 곧 유학을 떠날 계획이었습니다.(웃음) 학원강사랑은 엄청난 차이가 있잖아요. 증권회사라면 미국사람들도 job responsibility가 어쩌니 저쩌니 못할 거 아니겠어요. 2년간 괜찮다는데 금방 떠나려고 했죠. 그런데 학위받는 일에 대해서 회의가 들기 시작했어요. 유학 갈 형편도 안됐지만. 사실 우리나라에서 학계만큼 정치적인 곳도 없잖아요.
물론 하고 싶은 일을 못했다는 것에 대한 자괴감이 없을 수는 없죠. 사람인데. 수도하면서 도장받으러 다니려고 내가 이때까지 공부했나. 이런 생각들. 그래서 대학때부터 다니던 교회에도 뜸하게 되고. 저는 토요일 교회모임 때문에 대학시절 내내 그 흔한 MT도 한번 안 간 사람인데 말이에요.
‘이렇게 열심히 살면서 하나님을 모셨는데 생 양아치 같은 애들은 다 잘되고 나는 남들 다 가는 유학 한 번 못 가나’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해도 위에서 뭐하라고 시키면 죽어라 하거든요.(웃음) 제가 바로 그랬어요. 마음 속은 썩어 문드러져도 하라면 다 했으니까요.
그러다 지금 다니는 교회 목사님을 만났어요. 그 목사님께서 “하나님이 자네를 유학 보내시지 않은 이유가 있다. 이 세상에서 지금 자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지금 그 일을 시키시려고 일부러 여기 남게 하신 거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시장을 분석하고 예측하는 일에 관한 재능을 주신거다. 네가 경제학을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그 부분은 하나님이 메꿔 주실거다.” 이렇게 설득을 하시더군요.
-조직 안에서 전문적으로 분석을 시작한 건 언제인가요.
▲수도일이 끝나고 나서는 상품운용팀에 들어갔어요. 말이 상품운용이지 일반고객들을 상대로 채권을 파는 거였죠. 전자계산기도 무지 잘 써야했구요. 세금계산을 손으로 하는데 나중에는 손이 보이지않을 정도로 손동작을 놀려야 했습니다.
-아니 엑셀이 있었을텐데 왜 그런 일을 했습니까.
▲관행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깨지는 것이 아네요(웃음). 엑셀쓰자고 어른들에게 건의하면 무조건 손으로도 할 줄 알아야 된대요. 컴퓨터 없을 때는 네가 어떡할거냐는 거죠.
<”상상력과 재치” 시황으로 이름을 얻다>
-그럼 시황을 본격적으로 쓴 건 언제입니까.
▲브로커팀으로 옮기면서 시황을 쓰게 됐습니다. IMF 외환위기가 터지기 3개월 정도 전이었어요. 97년 9월로 기억합니다. 그 당시 데일리 한편 조그만 귀퉁이에다가 제 이름으로 시황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평이 너무 좋은 거에요. (웃음)
-제 기억으로도 호평을 받았던 것이 생각나네요. 기술적 분석과 관련된 코멘트도 최초로 나왔었죠 아마? 지금도 그 얘기를 하는 분들이 있는데.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자체 제작한 툴을 가지고 하니까 제 예측이 잘 맞으니까 ‘이걸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주자’ 라는 마음에서 시작하게 됐어요. 나름대로 제가 생각한 아이디어도 많이 넣었죠. 확인도 안 해보고 “이런 건 아닐까? 저런 건 아닐까?” 를 집어넣은 겁니다. 그때는 그게 장점이었죠. 지금은 단점이 됐지만(웃음)
제가 지금도 “너는 확인해보면 간단한 일을 가지고 상상을 먼저 해. 그래서 안돼” 질책을 받아요. 그러면서 맨날 깨지거든요. 하지만 그 때 당시에는 그것이 재미있다고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해요.
-당시 데일리 말고 따로 리포트를 쓴 적은 없나요.
▲사실 저는 데일리를 쓸 만한 내공도 가지지 못했어요. 지금도 그렇구요. 배우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채권을 잘 알지도 못하는 애가 채권계에 입문해서 뭔가 쓴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준 정도겠죠. DB 만들고 상관관계 분석하는 모든 일들이 재미있었고 지금도 도움이 많이 됩니다.
-첫번째 프리젠테이션은 어디서 했습니까.
▲정말 기억이 안나요. 한때 많이 불려다니긴 했는데 어디서 처음 했는지가 기억이 잘 안 나는군요. 자주 갔던 곳은 외환, 한미은행 등 은행권이었습니다.
-혼자 갔습니까.
▲아뇨. 담당부장님과 함께 갔습니다. 가서 상담하고 이것저것 말해주고. 사실 맞았던 적보다 틀린 적이 훨씬 많았어요. 틀렸을 때의 그 창피함, 짜증남이라는 건 말로 못해요. 틀린 것만 가지고도 많은 공부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만해도 채권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곳이 거의 없었어요. 다른 곳에서는 프리젠테이션을 한다고 전해주는 정보가 채권시장 안에 있는 사람들에겐 너무 빈약하게 느껴진거죠. 시장도 좁고 돌아가는 메커니즘도 빤한 곳이 이 바닥 아닙니까.
그런데 제가 가서 이러저러 말을 하니까 “쟤는 채권수도도 해 본 녀석이고 말은 좀 통하네” 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는 건 절대 아네요. 전 지금도 투신, 은행권이 어떻게 채권을 사고 파는지 잘 몰라요. 많은 선배들은 제게 “네가 말은 참신하고 조리있게 했지만 실상 은행이나 보험이 그렇게 단순하게 자산운용을 하는 곳이 아니다” 라고 충고를 해줬죠.
-그 당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뭡니까.
▲우리 시장이 좀 건조하다 보니..제가 장난기가 좀 심한 편이라 의도적으로 코믹하게 쓰려고 했어요. 그러면서도 내용의 본질은 놓치지않으려고 나름대로 애를 쓰긴 했는데. 별루 기억에 남는 것이 없네요.
-시황제목을 무척 재미있게 달았던 걸로 기억됩니다만.
▲음 그런 건 있었어요. 외환위기 이후 IMF 고금리 정책을 계속 고수했잖아요. 그 후 분기마다 정책 내용을 바꾸게 됐는데 한번은 영문을 읽어보니까 이번엔 고금리 정책 완화기조로 간다 뭐 이렇게 느껴지더라구요. 그리고 진짜 금리가 내렸습니다. 마침 금리가 하락하는 날 IMF 서울사무소장의 금리하락 멘트도 나갔죠. 그 시점에서 제가 뭐라고 코멘트를 했냐면 “IMF는 Immediate Money-market Fever 다“ 라고 했어요. 사람들이 그런 걸 기억해 준 거죠. 분석을 잘해서가 아니라.
(인터뷰 하편으로 이어짐)
-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⑧김윤모 하나증권 기업본부장(하)
- [edaily] 이번주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은 하나증권 기업금융본부 김윤모 이사입니다.(인터뷰 중편에서 이어짐)
-구체적으로 어려운 점은 뭡니까.
▲은행에서는 상사가 부하직원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수직적인 top-down decision making이 확실한 곳이 바로 은행이거든요. 요즘들어서 분위기가 많이 완화됐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도 보수적이에요. 하지만 증권사에서는 그래서는 안되겠다는 것을 많이 느꼈어요. 위계질서를 엄격히 내세우는 구조가 오히려 하우스의 발전을 해치는 거죠.
처음 출범시 은행, 그룹 등 다양한 곳에서 사람들을 끌어왔기 때문에 서로 다른 문화에서 자란 사람들을 한 덩어리로 뭉치게 하는 작업에 1년이 걸린 겁니다. 그 후 “이제 전진하자. 이 인원이면 어디가서 무엇인들 못하겠느냐”는 결심이 섰죠.
-요즘도 출근을 일찍 하십니까.
▲네. 8시 이전에 출근합니다. 이사 승진 후 저는 임원 방이 필요없다고 말했어요. 고객과 직접 대면하고 회의를 주재해야하는데 방이 왜 따로 필요하냐고 말했죠.
<“내가 일한만큼 대우받지 못한다는 것은 내가 시장에 필요없다는 의미”>
-임원승진 후에도 성과급체계를 그대로 유지, 상당한 연봉을 받으신다고 들었습니다. 비결을 좀 알려주시죠.(웃음)
▲임원 중 성과급을 받는 사람들은 다른 하우스에서도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내가 일한만큼 대우받지 못한다는 것은 내가 시장에 필요없다는 의미일거다. 내가 필요하다면 거기에 걸맞는 대우를 해줘야한다” 는 거죠. 제 친구들 중에는 주식브로커로 성공해 엄청난 돈을 번 친구도 있습니다. 제가 그 친구들보다 질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직급보다는 비즈니스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럼 월급을 더 많이 받는 부하직원도 있습니까.
▲물론 있습니다. 올해는 제가 조금 더 많이 받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작년까지만 해도 팀장이나 다른 직원들 중 저와 비슷한 연봉을 받는 친구들이 꽤 있었습니다. 저는 제 봉급을 부하직원의 디스커션을 통해 결정합니다.
팀장들이 직접 “우리 보스는 일을 이러저러하게 했으니 이만큼 받으면 된다”고 평가하는 거죠. 사실 위에서는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모릅니다.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팀장이고 그들이 제게 돈을 줄 만하다고 생각해야 그 돈을 받을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들이 평가하기에 제가 무능력하다고 생각하면 저 말고 다른 사람이 하나은행 기업금융본부의 헤드로 와야 회사가 발전하겠죠.
-옛날에 은행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을 고객으로 맞이하고 나서는 어떤 감정이 들던가요.
▲그 부분이 솔직히 말씀드려서 제 직업의 “애환” 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아직까지 브로커에 대한 인식이 매니저보다 화려하지 못한 일로 평가되고 있으니까요. 매니저와의 관계에서도 항상 자기주장을 낮추고 공손하게 대해야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앞으로는 동반자적 위치에 서는 식으로 분위기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브로커들이 많은 실력을 쌓아야겠죠. 저 개인적으로는 그런 문화를 많이 바꾸려고 노력하는데 상대방 쪽에서 호응해주지 않을 때는 만감이 교차합니다. 그 부분이 제일 힘들어요.
-지난 한해 수익은 어느정도를 냈습니까.
▲30명이 영업이익 규모로 125억정도 흑자를 냈습니다. 원래는 170억 가량됐는데 코스닥 등록기업 시장조성 때문에 규모가 좀 줄어들었죠.
<”실무경험을 가진 CEO들이 자꾸자꾸 등장하면 펀드매니저 대우가 파격적으로 달라지리라 믿습니다”>
-이건 좀 조심스런 질문인데… 딜러와 브로커의 페이가 너무 차이난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딜러들이 브로커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과도한 수수료에 반감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인데요.
▲미국에서는 스페셜리스트에게는 확실한 대우를 보장해줍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그렇지않아요. 채권운용 펀드매니저가 운용을 잘해서 큰 수익을 내도 “너 혼자만 잘해서 그런 건 아니지 않느냐 시장이 좋아서 그렇지” 식의 분위기가 대부분이죠.
그건 한국의 금융기관 CEO나 CFO들이 능력에 걸맞는 대우를 해주는 미국식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은 탓이 크다고 봅니다. 실무경험을 가진 CEO들이 자꾸자꾸 등장하면 펀드매니저 대우가 파격적으로 달라지리라 믿습니다.
-하나증권으로 옮긴 후 기억에 남는 딜은 무엇인가요.
▲회사채로 보면 두 가지 정도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이름을 밝히기는 좀 그렇고…하여간 모 그룹사의 BBB 등급 채권이 특히 기억에 남는군요.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소외당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 그룹사가 증권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쪽에서도 맡을 엄두를 못 냈어요.
저희 리서치에서 분석을 해보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돼서 밀어붙였습니다. 딜이 성공한 다음에는 고맙다고 난리도 아니더군요. 지금 잘 나가는 회사들 중에서도 한때 채권발행이 어려웠던 곳이 꽤 있었습니다. 그런 쪽을 맡았을 경우 저희는 이런 식으로 접근했습니다.
큰 기관을 직접 찾아가서 “이 채권을 왜 안 사냐. 이건 정말 저평가됐다” 고 주장했습니다. Argue 아닌 argue를 한 거죠. 그래서 큰 수익을 안겨준 곳이 몇 개 있습니다. 기업금융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큰 보람이었어요.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시대흐름에 순응하는 자세가 필요>
-힘들거나 어려웠던 적은 없습니까.
▲제가 노력한만큼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나 할까요. 또 하나는 금융계에 종사하는 사람이 대부분 보수적이다보니 새로운 지식이나 시스템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좀 유연하지 못한 것 같아요. 배타적인 사고방식이 많이 존재하는 편입니다.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시대흐름에 순응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원래 영업하는 분들은 좀 공격적인데요.
▲저는 조화를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어느 한 면만 뛰어나서는 안되고 다방면에 걸쳐 균형감각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기자도 취재를 위해 매일 정보를 요구할 수는 없잖아요. 내가 정보를 주기도 해야 다음에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고.
세상만사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주고받는 식으로 이뤄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쪽 계통의 사람이 너무 강성을 띠면 곤란하죠. 이번에 놓쳤더라도 다음 번에 좀 더 좋은 가격을 노리려면 적당히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한의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는데…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요?
▲우선 저는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의 혈색을 세심하게 관찰합니다. 혈색만 유심히 관찰해도 신체의 어느 부분이 안 좋은지 정도는 알 수 있어요. 제가 체계적으로 공부한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지식을 쌓으려고 노력한 결과라고나 할까요. 병명이나 약재에 관한 호기심도 많습니다.
저는 “사람은 건강하게 오래살아야 한다” 고 생각해요. 미국 매니저들은 fitness club 등을 이용하면서 자신의 건강관리에 대단한 노력을 쏟습니다. 지금도 건강한 데 뭐하러 그렇게 시간을 들여서 운동하냐고 물어보면 그들의 대답은 이겁니다. “일을 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데일리 몸 컨디션을 최적으로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가진 능력의 베스트를 발휘할 수 있다”
-그럼 건강관리를 어떤 식으로 하시나요.
▲목욕하는 것을 무척 즐기고 음식을 가려먹습니다. 기름진 음식은 거의 입에 대지 않습니다. 비만을 해소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서양에는 채식주의자가 많지만 바로 녹차입니다. 녹차를 끊임없이 마시죠. 담배도 끊었습니다. 금연을 결정한 이유는 브로커를 하다보니 말을 많이해서 목 상태가 나빠졌기 때문입니다. 성대결절도 앓았습니다. 목이 나빠져서 처음 병원에 갔더니 엑스레이 사진을 보고 인턴이 그러더군요. 혹시 직업이 가수시냐고. 그래서 가수라고 했습니다.(웃음)
-다방면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은데 의사말고 다른 직업을 희망한 적은 없습니까.
▲쇼 프로그램 PD를 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음악을 무척 좋아해요. 듣는 것, 노래하는 것 모두다(웃음). 쇼 PD는 우선 즐거움을 주는 직업이잖습니까. 화려하고 재미있고 다이나믹한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누군가 “어차피 인생은 쇼다” 하던데요(웃음)
<인재에 대한 교육, 투자가 시급하다>
-한국 브로커리지 하우스가 앞으로 갖춰야 할 점은 무어라고 생각하시나요.
▲외국증권사에 비하면 지극히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적어도 기업금융 부분에서는 세계적인 증권사들과 경쟁할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이를 위한 교육 및 투자가 시급하다고 생각해요. 직원을 외국에 보내서 선진금융기법을 익히게 하는 일을 비롯해서요. 인재를 키우지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어요. 지금 비슷한 일을 계획중인데 이데일리에서도 한 분 정도 참가하시면 좋겠어요. 이 모두가 한국금융시장 발전을 위한 밑거름이 될 겁니다.
-그러한 계획들이 윗선에서 제지 당하지는 않을까요.
▲그건 간단합니다. 이제 금융기관도 많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해당기업에 돈을 더 많이 벌어다주면 제가 원하는 바를 요구할 수 있는 거죠.(웃음) 그리고 회사도 그것을 수용하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바램은 무엇입니까.
▲저는 파트너라는 말을 무척 좋아하고 국내 최초의 파트너증권사를 만들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김&장, 앤더슨, 아서 D 리틀, PWC 같은 곳 말입니다. 각자가 파트너가 돼서 회사 일에 책임을 지는 유한회사 말입니다. 우리나라 조직에서는 인사가 어떻고 급여가 어떻고 간섭하고 질시하는 일이 비일비재 하잖습니까. 너무 비효율적인 것 같아요. 자기 역할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누가 봐도 ‘아, 저 하우스는 실력좋고 깨끗하고 담백한 곳이구나. 뛰어난 애널리스트, 브로커, 딜러들을 고루 갖췄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끔 할 겁니다. 이제 한국 자본시장도 자생적인 경쟁력을 갖출 시기인 것 같아요. 사실 금융계 선배들 중에서도 이런 노력을 하신 분들이 몇 분 계세요.
-결혼은 어떻게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선을 봤습니다. 그 때 집사람은 병원 약사로 근무 중이었는데 만나기전에 먼저 전화를 했죠. 그랬더니 다짜고짜 “저번 주에 전화하신 분이죠?” 하는 겁니다. 무슨 소립니까. 난 저번 주의 그 남자가 아닌데. 그 말을 듣고 나니 오기가 막 발동하더라구요. 그래서 적극적으로 덤볐죠. 허허 동양적 성격이라 제 생활을 잘 이해해서 항상 고맙게 생각합니다.
-공부를 더하겠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습니까.
▲그 생각은 많이 해왔습니다. 이사 승진 때 제가 임원승진 대신 공부를 좀 더 시켜달라고 부탁드린 적도 있습니다. 이론적인 것보다 선진국 자본시장에서 어떤 상품이 판매되고 그런 시스템은 어떻게 구축돼 있느냐는 식의 실질적인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제가 공부한 것들을 한국금융시장에 정착시키는 작업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죠.
언젠가는 갈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습니다. 아울러 저희 팀장급은 무조건 순환해서 공부를 계속 시킬 생각입니다.
(김윤모 이사 약력)
-59년 부산 출생
-부산대동고 졸업
-79년 고려대 정경대 통계학과 입학
-83년 조흥은행 입사
-86~91년 한미은행(신탁부, 외환업무부)
-91년 하나은행(한국투자금융 전환설립 사무국, 신탁증권부, 영업부, 종기부, 장기경영팀)
-99년 하나은행 지점장
-99년 9월~ 하나증권 기업금융본부
-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⑧김윤모 하나증권 기업본부장(중)
- [edaily] 이번주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은 하나증권 기업금융본부 김윤모 이사입니다.(인터뷰 상편에서 이어짐)
-하나은행은 종금사를 그다지 많이 인수한 편은 아닌데요.
▲한 군데를 인수했죠. J종금이나 D종금 같은 곳을 비롯해 시도는 여러 곳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그때 M&A업무에 관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당시 신한경제연구소에서 일본 측 사람들과 같이 M&A 작업들을 많이 했었고 저희는 하나경제연구소와 같이 열명 정도로 팀을 꾸려서 작업했습니다. 저는 그 일을 하면서 금융지주회사가 곧 생길거라는 것을 예상했습니다. 합작증권사의 대상으로는 살로먼스미스바니나 베어스턴스가 괜찮은 파트너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 작업을 하실 때는 보람은행과 합병하기 전이죠.
▲그렇습니다. 보람과의 합병은 99년 1월이었으니까요. 그 후 하나증권 쪽 일에 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금융그룹이 증권사설립을 위해 선택한 방식은 기존의 증권사를 인수하는 것이었나요. 실제로 새로운 파트너를 찾지않고 보람증권을 인수해 하나증권으로 만들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새로운 파트너를 찾는 것은 너무나 많은 변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증권사 때문에 보람은행을 합병한 것은 아니지만요. 당시 하나은행 투자개발실에는 25명 정도의 직원이 있었고 상단한 수익을 냈습니다. 산업은행에 이어서 2위였죠.
-지점으로 나오신 건 언제인가요. 무슨 계기가 있었습니까.
▲어르신도 부산에 계시고 바쁘게 살다보니 제대로 뵙지도 못하고 해서 “이번 기회에 효도나 하자”는 생각에서 부산으로 내려갔습니다. 그게 99년입니다.
-부산에서 얼마나 계셨나요.
▲1년 6개월입니다. 하나증권으로 온 건 2000년 9월입니다.
-증권으로 옮기게 된 건 어떤 이유입니까.
▲저희 부사장께서는 영업부시절 제 담당 부장이셨는데 굉장히 성질이 급한 분이셨어요. 저역시 성질이 급해서 의견차이가 많이 있었습니다. 싸우면서 정이 들어서 제게 일을 많이 맡겨주셨습니다. 하나은행 김승유 행장께서 “증권에 누구를 보내야 하는데 누구를 보내나?” 하고 말씀하셔서 부사장께서 하나증권으로 옮기시게 됐고 같이 데리고 갈 사람으로 저를 지목하신 겁니다.
부산에 있는 저에게 전화를 하셔서 “내가 이쪽으로 가는데 당신이 나를 도와줘야지” 라고 하시더군요. 사실 은행 직원들은 증권사로 옮기는 것을 그다지 반기는 편이 아닙니다. 의리 때문에 옮기게 됐다고 하는 것이 맞겠죠. 저도 매니저생활을 오래한 사람인데 선뜻 내키는 제안은 솔직히 아니었습니다.
<채권 브로커로의 변신>
-채권분야에서 현재 하나증권의 위치는 어느 정도입니까. 제가 개인적으로 알아본 바로는 수위를 다투고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뭐 크게 틀리지않습니다. 저희 조직이 어떻게 구성됐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1팀은 IPO, 2팀은 ABS, 3팀이 회사채, 4팀이 채권운용과 CP를 담당합니다. Market share로 보면 유통시장 브로컬리지의 경우 또 다른 채권영업팀과 합쳤을 때 상위권입니다.
개별로 봤을 때 김동환 팀장의 팀이 2~3위 정도 하는 것 같고. 어쨌든 3위안에는 항상 든다고 보시면 됩니다. 블룸버그 집계로 발행시장의 경우 ABS는 6위를 했습니다. 올해는 LG증권에 이어 근소하게 2위를 기록했습니다. 회사채는 작년 8위를 기록했고 현재은 5~6위 정도입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그룹사들은 자기 계열사 물량이 있어서 저희와는 사정이 다릅니다.
<무엇보다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
-어쨌든 빠른 기간안에 급성장한 하우스가 됐는데..비결은 무엇입니까.
▲뭐 특별한 비결이라기보다는…저는 무엇보다도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름은 기억이 안나지만 세계적인 증권사 중 어떤 곳은 개개인의 능력보다 팀웍을 중요시한다고 들었습니다.
1위를 모아서 회사를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2위들만 모은 다음 이 2위들이 1위를 능가할 수 있도록 만드는거에요. 시너지효과를 창출하는 거죠. 처음 사람을 뽑을 때 고민을 참 많이 했습니다. 좋은 사람을 뽑아야하니까요. 브로커의 특성상 매니저에게 호감을 얻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저는 고객이 제일 선호하는 사람 위주로 뽑았습니다.
다른 기관을 다니면서 벤치마킹도 많이 했구요. 이 업계가 좁아서 대충 돌아다녀도 인물정보는 거의 다 얻을 수 있습니다. 브로커리지 능력이 제일 뛰어난 사람을 뽑기보다는 성장가능성을 염두에 뒀습니다. 장기적으로 볼 때 그 사람이 가진 잠재능력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봅니다. 개개인의 캐릭터는 물론이고 성실성과 영어능력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죠.
저는 개인적으로 그룹사의 문화를 좋아합니다. 삼성, 현대 같은 거대기업에도 의외로 진보적인 사고를 하는 분들이 많아요. 이 일을 한다고 해서 사람을 모두 금융권에서 데려오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룹사로 눈을 돌렸습니다. 그래서 다른 기업의 사람들도 현재 꽤 있습니다.
<브로커는 근성, 분석능력, 풍부한 지식이 있어야>
-부하직원을 평가할 때 가장 중점을 두는 요소는 무엇인가요.
▲그건 직업의식이죠. 브로커는 근성이 뛰어나야 해요. 한번 맡은 고객에겐 끝까지 딜을 따낼 수 있는 강한 승부근성을 가져야합니다.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지적능력도 가져야죠. 현재 이 시장의 브로커들은 그다지 학구적이지 않아요. 오죽하면 “마**” 라는 용어까지 나왔겠습니까. 브로커는 오히려 공부를 증권사사람보다 더 열심히해야 합니다. ABS건 외환스왑이든 다른 사람보다 앞설 수 있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임원이 되면 세부적인 일에는 그다지 관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 달라요. 구체적인 사항까지 일일이 체크합니다. 또 하나 강조하는 것은 뭐냐면 전 식사시간에 동료들과 밥을 먹는 직원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무조건 고객과 밥을 먹으라고 강조해요. 고객과 직접 부딪히면서 배우고 스스로를 레벨 업 시킬 수 있단 말입니다.
리만 브러더스의 경우 헤드는 일반 직원들보다 높은 위치에 자리잡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체크한다고 들었습니다. 마치 빠징코에서 지배인들이 딜러를 일일이 관리하는 것처럼요. 그 곳에서는 점심을 동료직원이랑 먹으면 사유서를 제출해야한다고 하더군요. 저 역시 직원들을 하드 트레이닝시켰다고 자부합니다.
그리고 직원들에게는 항상 과학적인 접근방식을 가지라고 요구합니다. “가격 좋으니까 이거 한 번 사시죠” 이런 류의 접근은 이제 탈피해야하지 않겠어요. 브로커는 기업분석능력을 갖춰야합니다. 그래야 고객들에게 상품판매권유를 할 수 있죠. 재무구조나 신용상태 등 그 기업에 관한 모든 데이터를 철저히 분석해서 브로커 자신이 그것을 가지고 자료화해야 합니다.
저희는 실제로 그렇게 했고 저희가 만든 자료를 가지고 기관들을 상대로 IR작업을 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삼성캐피탈을 발굴해냈고 고객들에게 많은 수익을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빠른 시일 안에 대한민국 최고의 채권애널리스트를 우리 하우스로 모시려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리서치가 뛰어나야만 채권 브로컬리지 하우스로 각광받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어요.
<적응은 빠르게, 변화도 신속하게>
-은행에서 상당히 오랜 기간을 보내셨는데 그때는 브로커를 상대하는 입장이셨죠. 상황이 바뀌었을 때 적응은 잘한 편이었나요.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을 열심히 하는 편입니다. 제가 처음 은행지점장이 됐을 때 마흔이었어요. 빠른 편이었죠. 제가 발령받은 곳은 부산 시장통에 있는 지점이었습니다. 하나은행 120개 전국점포 중 CS(서비스 모니터링) 부문에서 115등을 했을 정도로 업무여건이 나쁜 곳이었습니다.
처음 가봤더니 창구여직원들도 시장통 사람들을 상대하다보니 거친 편이었고 청경은 아예 인사도 안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 수위를 불렀어요. 그 사람이 원래 포커페이스여서 더 무뚝뚝해 보였거든요.
“나는 당신이 웃고만 있어주면 바랄 것이 없겠다” 라면서 소주를 한 잔 사주고 손을 잡았습니다. 그 수위의 집에 가봤더니 단칸방에서 너무너무 힘들게 살고 있길래 집사람을 시켜서 좀 돌봐주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부터는 일을 너무너무 열심히 하는 겁니다. 무조건 90도로 숙이고 손님이 깜짝 놀랄만큼 큰 소리로 씩씩하게 인사를 하고. 후에는 제가 객장일도 시켰습니다. 서서 인사하는 일만 하지말고 여기서 일도 배우라는 의미였지요.
여직원들을 모아놓고는 “우리도 한 번 해보자” 라고 말했습니다. “아플때는 무조건 쉬어라. 휴게실에서 쉬는 것은 막지않겠다. 하지만 아프다고 찡그리면서 고객응대하지 마라. 특히 전화받으면서 고객을 상대하는 것은 질색이다. 그 일은 절대 금물이니까 조심하라” 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각각 전담업무를 맡겼어요. 목소리가 좋은 직원에게는 전화응대를 전문으로, 상냥한 직원에게는 창구업무를 담당하게 했습니다. 심지어는 여직원들의 머리모양이나 메이크업까지 일일이 참견했습니다. 대한항공 스튜어디스를 불러다가 교육을 시켰죠.
그랬더니 그 다음달에는 글쎄 전국 3등을 하지 뭡니까. 흔히 부촌이라고 말하는 서울의 압구정동, 평창동, 동부이촌동 등 쟁쟁한 지점들을 제치고 3위를 해서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3위하고 나서는 표창과 상금까지 받았을 정도였으니까요. 그 다음에도 계속 전국 10위권 안에 들었습니다.
<”증권으로 옮길 때 사실 많이 울었습니다”>
여의도 하나증권으로 첫 출근하기 전에는 사실 많이 울었습니다. 연로한 부친께서는 은행지점장을 하다가 증권사 브로커로 간다니까 ‘너 혹시 사고쳐서 전출되는 거냐. 이러다가 쫓겨나면 어떡하냐’ 고 걱정을 많이 하셨기 때문입니다.
첫 출근하던 날 7시에 회사에 도착했습니다. 평생 뱅커로 남을 줄 알았는데 브로커로 여의도에 입성하고 보니 기분이 무척 묘하더군요. 저는 일이 바뀔 때마다 제일 먼저 출근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제일 먼저 출근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해요. 여의도로 옮기기로 결정한 후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기 위해” 아내와 아이들을 부산에 놔두고 홀로 상경했습니다. 6개월 동안 숙명여대 앞에서 하숙을 했죠.
-숙명여대 앞으로 하숙집을 결정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대학시절 숙대 앞 하숙집에서 지냈기 때문입니다. 2000년이 됐지만 20여년 전 제 대학시절과 달라진 건 거의 없는 그런 집이었습니다. 문을 열면 바로 수돗가가 나오고 신발벗는 곳도 바깥에 있는 집 말입니다. 2000년 9월부터 올해 3월까지 정확히 6개월을 그 집에서 지냈습니다. 겨울이라 무척 추워서 지내느라고 혼났습니다. 믿지 않으시겠지만 이불하나, 옷걸이 하나로 6개월을 버텼습니다.
<여의도의 젊은 분위기를 느끼기위해 대학촌에서 6개월간 하숙도>
-딜러들을 상대로 직접 호가를 부르며 브로커 업무도 하셨나요
▲딜러들의 경우 요즘 급속도로 연령이 낮아지는 추세입니다. 저희 쪽도 마찬가지구요. 그러다보니 마흔이 넘은 제가 일일이 딜러들과 호가를 부르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맞겠습니다. 소위 이쪽에서 나이 좀 지긋한 사람들과는 호가를 부르는 사이였습니다. 하하. 그래서 젊은 팀장을 영입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앞으로도 연령추세는 점점 더 낮아질 겁니다.
-낯선 여의도에 오셔서 겪은 에피소드들이 궁금합니다.
▲은행가와 증권가는 상당히 다른 것 같습니다. 우선 여의도에서는 출근시간이 8시로 은행보다 빠르잖아요. 은행에서는 9시까지하면 됐는데 아주 피곤하더군요.(웃음) 우선 여의도에서는 아침에 모든 사람들이 귀에 이어폰을 꽂고 바쁘게 움직이는 것 같아요. 가방을 들고 입으로는 음식을 먹으면서 잰 걸음걸이로 어디론가 이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띕니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여의도의 분위기는 좀 개인주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은행업무는 그래도 낭만이 있는 비즈니스에요. 은행 재직시절 요즘같이 날씨가 좋은 때에는 여직원에게도 “미스 김.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뭐하고 있나. 도시락이라도 싸들고 삼청공원이나 갈까?”라는 말도 종종 했었죠.(웃음) 그런데 여의도에서는 온통 “money” 라는 소리만 들었습니다.
-증권, 특히 채권쪽은 분위기가 많이 다르죠.
▲은행보다 분위기가 자유로운 것은 확실합니다. 은행원들은 와이셔츠 색깔도 거의 흰색으로 통일하고 넥타이도 트레디셔널한 스트라이프 무늬를 많이 매요. 저는 빨간색 넥타이를 여의도에 와서 처음으로 매 봤습니다. 모셨던 행장께서는 여름에도 긴팔 와이셔츠를 입으라고 하셨고. 양말도 검정이나 잿빛 계통으로 신고 배지도 항상 착용해야 합니다.
-완전히 적응하는데 까지는 얼마나 걸렸습니까.
▲1년 정도입니다. 아직까지 낯설 때도 많습니다.
(인터뷰 하편으로 이어짐)
- 여성기업인 커뮤니티 일하는 e-여성의 모임" 발족
- [edaily] 한국인터넷기업협회가 한국여성벤처협회와 공동으로 온/오프라인 기업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성 기업인들의 커뮤니티인 "일하는 e-여성의 모임"을 발족한다.
양 협회는 오는 4월 3일 포스코센터 서관 4층 아트홀에서 양승택 신임 정보통신부 장관, 허운나 민주당 국회의원 등 관련 인사를 비롯하여 e-비즈니스 분야의 여성기업인 3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커뮤니티 발족식을 갖는다고 1일 밝혔다.
이날 행사에는 김영사 박은주 사장, 듀오 신은경 사장, 버츄얼텍 서지현 사장, 이링크 김미희 사장, 인터넷매트릭스 이상경 사장, 우암닷컴 송혜자 사장, 이나루 배희숙 사장, 포미나넷 전용진, 컨텐츠코리아 이영아 사장, 디자인스톰 손정숙 사장, 파소나기닷컴 김아현 사장 등 여성 기업인이 대거 참가한다.
온/오프라인 기업을 아우르는 유일한 여성기업인 커뮤니티가 될 이 모임은 매월 첫째 화요일에 정례적으로 만남의 행사를 갖게 된다. 이에 따라 커뮤니티 이름도 첫번째 화요일 즉, "일화(一火)"라는 의미로 "일하(一火)는 e-여성의 모임"이라고 붙였다.
이날 행사에서는 매월 첫째 화요일을 "e-Woman’s Day"로 선포하고 온라인 기업을 대표해 이코퍼레이션의 김이숙 사장과, 오프라인 기업 대표로 북토피아의 김혜경 사장을 공동 대표로 위촉하는 한편, 커뮤니티 공동 운영을 위해 양 협회간에 업무제휴를 맺을 예정이다.
또 정보통신부 정보화기획실 변재일 실장이 "지식 정보강국 e코리아 건설"에 대해, 한국여성벤처협회 이영남 회장이 "e-BIZ산업에서 여성의 역할과 중요성", 스터링리소스 그룹의 김은수 사장이 "IT분야의 여성인력 수급전망"에 대해 각각 30분간 테마강의를 할 예정이다.
양 협회는 온라인에서 커뮤니티 사이트를 운영하는 한편, 여성 이직/취업 정보제공 및 알선, 매월 테마별 명사 초청강연, 여성벤처 성공사례, "올해의 e-여성인상" 제정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하여 온/오프라인 여성기업인간의 정보교류와 제휴를 위한 만남의 장으로 발전시켜 나갈 방침이다.
커뮤니티의 참가대상은 인터넷 벤처기업의 임원급 이상의 여성 기업인이나 오프라인 기업 중에서 온라인을 추진하는 여성기업인, 창업 예정인 여성을 비롯하여 기타 정,관,학계에서 e비즈니스 관련 여성인사를 대상으로 한다.
행사에 참여를 원하는 여성은 한국인터넷기업협회 홈페이지(www.kinternet.org)에서 사전 등록을 하면 된다.
-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③국민연금 한승양 팀장(상)
- [edaily] 국민연금은 채권시장의 “큰 손”중에서도 가장 큰 손이다. 국민연금의 채권투자 규모는 23조5000억원. 우리나라 전체 채권시장 규모를 300조원이라고 할 때 7.7%에 달하는 규모다.
국민연금의 위력은 현재보다 미래에 있다. 국민연금 펀드는 시간이 지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주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의 주인공은 국민연금에서 채권투자를 담당하는 한승양 팀장이다. 그는 증권사 애널리스트 시절 채권을 알게 된 이후 운용역을 거쳐 채권팀장까지 채권시장의 모든 영역에서 경험을 쌓은 백전노장이다. 국내 최대의 펀드인 국민연금 채권운용을 맡으면서 시장 전체를 움직일 수 있는 “파워”를 가지고 있지만 “투명한 원칙”과 “새로운 투자기법”을 부르짖는 정통 채권맨이다.
국민연금의 존재는 채권시장이 좋을 때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지난해 채권수익률이 급락, 대부분의 채권펀드가 “이보다 좋을 순 없다”며 호황을 구가할 때 국민연금은 예보채 입찰에도 참여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연금에 들어오는 자금의 성격상 예보채를 투자할 때가 아니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만기가 1년인 투신권 펀드에서도 5년짜리 예보채를 겁없이 사들였지만 국민연금은 수익률이 맞지 않으면 사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켜나갔다.
올들어 채권수익률이 급등락을 반복하면서 예보채 입찰이 어려워지자 국민연금이 움직였다. 적정 수익률이 됐다는 생각이 든 것. 국민연금의 “예보채 입찰에 관심이 있다”는 말 한마디에 예보채는 “유찰” 위기에서 벗어났다.
한승양 팀장은 “시장에서 은근히 국민연금이 어떤 역할을 해주길 바라지만 연기금이 해야할 일은 따로있다”며 “외국 유수의 연기금 펀드처럼 훌륭한 연기금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수익성과 투명성이라는 원칙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 팀장은 교보증권 채권팀장 자리를 그만두고 98년 국민연금으로 자리를 옮겼다. 기금운용 담당자를 공채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한 것인데 120여명의 경쟁자를 물리쳤다.
월급은 절반으로 줄어들었지만 한 팀장은 “펀드다운 펀드를 운용해보겠다”는 의욕으로 충만했다. 민간인으로서 준공무원 조직에 들어가 갈등이 없지 않았지만 “최고의 펀드, 최고의 펀드매니저”라는 꿈을 이뤄가는 재미로 버텨나갔다.
“토요일, 일요일이 가장 힘든 날입니다. 할 일이 없거든요.” 주말 여유시간마저 “일”을 하고 싶어하는 한 팀장의 채권철학을 들어봤다.(인터뷰 하편 기사 하단에 약력참조)
-격동의 80년에 대학에 들어가셨군요
▲제가 좀 늦게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원래는 자연계열이었습니다. 아버님께서 학자이신데 일제시대, 한국전쟁, 군사정권 등 암울한 시절들을 거치시면서 자식들은 정치나 사회상황에 휘둘리지 않는 직업을 택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과, 특히 의대를 가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제 적성과는 상관없이 고2때 이과를 선택하고 서울대 치대에 지원했었습니다.
그러다 “난 도저히 자연계열은 적성에 맞지 않는다. 문과로 다시 시험을 보겠다”고 말씀드리고 다시 시험을 봤죠. 그리고 서울대 사회과학대에 합격한 후 2학년 전공결정 때 국제경제학과를 선택한 겁니다.
격동의 80학번, 자본주의의 최첨단 증권시장에 입문
-80학번이시면 공부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절은 아니었을 텐데요.
▲그렇죠. 그 때 지금 한창 잘 나가시는 유시민씨, 심재철 의원등의 주도 하에 데모도 많이 했어요. 학교입학 후 두 달만에 5.18이 발생해서 10월까지 놀았습니다.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됐으니까요.
-공부하면서 재미있게 읽었던 책은 있습니까.
▲당시 제가 다니던 국제경제학과(당시 무역학과)는 학교 내에서 데모를 제일 많이 하던 곳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운동권 활동을 열성적으로 했던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그 쪽 관련책을 곁눈질해서 많이 보게 됐어요. 지금 부총리이신 한완상 교수, 이영희 교수의 책을 많이 읽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80년대 대학을 다니신 분이 자본주의의 최첨단이라고 할 수 있는 증권시장에 입문한 것이 독특하다면 독특한데요.
▲당시에는 채권이 뭔지도 몰랐어요. 80년대 중반이후 주식시장이 부상하던 시기였습니다. 저는 가끔 80년대의 비극이라고도 표현하는데 그 때 수많은 우수한 인재들이 증권회사가 좋다니까 무작정 몰렸습니다. 그 후에 일이 잘 풀리지 않은 사람도 참 많았거든요.
-증권회사를 택한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일단은 그곳이 자본주의의 최첨단을 달리고 있었고 또 금융의 증권화가 도래하는 시기였으니까요. 막 간접금융에서 직접금융시대로 넘어가려는 시대였지만 그때 한국의 직접금융이 너무 초기 단계라서 이 분야는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쌍용투자증권 부설 쌍용경제연구소에서 2년 반 정도 근무했습니다.
-애널리스트로 말입니까.
▲네. 그런데 그 때는 애널리스트와 이코노미스트 등에 대해 뚜렷한 개념이 없었어요. 저는 증권연구실에서 금융시장 전반에 관한 연구, 경제분석 같은 업무를 담당했죠. 굳이 말하자면 일종의 스트레티지스트였죠. 거기서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한 2년 반 하다보니 지겹더라구요. 마침 그 무렵 채권에 눈을 떴어요. 이거다 생각하고 연구소장님께 채권팀으로 보내달라고 한달 정도 계속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채권계에 발을 내딛은 겁니다.
”채권시장처럼 가능성이 큰 시장에 몸을 바치고 싶었다”
-채권팀에 그렇게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채권시장은 주식시장과 더불어 자본시장을 이끄는 수레바퀴중 하나이면서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훨씬 큽니다. 그런데 주식시장에 비하여 너무 낙후되어 있었어요. 미국이나 유럽시장을 보니 채권시장이나 채권매니저들의 위력이 대단하더라구요. 이 낙후된 분야에 몸을 바치고 싶었습니다.
-그럼 교보증권으로 옮기면서 채권을 시작한 겁니까.
▲아닙니다. 쌍용경제연구소에서 쌍용투자증권 채권부로 옮겨 3년 정도 근무했죠. 거기서 참 많이 배웠습니다. 특히 3개월 정도 미국 월스트리트에 OJT를 다녀왔는데 그걸 계기로 정말 여러 가지를 배웠고 채권시장에 대한 인식도 새롭게 하게 됐어요. 채권을 계속하고 싶었는데 회사방침이 근무순환 방침이어서 영업부로 발령이 난 게 계기가 되어 교보로 옮겼고 거기에서 채권팀장을 맡았죠.
-채권시장 경력이 한 11년은 되시는 군요. 듣기로는 국민연금이 처음으로 운용전문인력을 공채할 때 국민연금관리공단에 입사하셨다는데.
▲IMF 외환위기가 막 발생한 직후인 98년 2월에 공고가 났습니다. 그 때는 주식시장이 폭락하는 등 금융시장이 불안해지면서 국민연금에서 기금운용전문가 채용공고를 낸 거죠.
-경쟁률은 어땠습니까? 운용팀장을 뽑는 것이었나요?
▲120명정도 왔던 걸로 기억합니다. 운용팀장이 아니라 매니저, 즉 운용역을 뽑는 것이었습니다.
”채권시장의 2세대로서 진정한 펀드운용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국민연금으로 옮기시면서 월급도 많이 줄었을 텐데. 자리를 옮기신 이유는.
▲급여는 정확히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증권회사에서는 운용의 한계를 느꼈어요. 증권회사에서는 운용이라는 것이 단기 트레이딩이 전부였는데 이게 진정한 의미의 운용은 아니거든요. 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증권회사 사람들의 꿈은 진정한 운용을 해보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선진국처럼 자신의 펀드를 가지고 전략과 포트폴리오를 짜서 운용하는 것 말이죠. 또한가지는 그동안 나름대로 갈고 닦았던 채권관련지식을 공익을 위하여 바치고 싶었어요 .
제가 채권을 시작하기 전에 그 분야에서 일하시던 분들이 바로 한국 채권시장의 1세대시죠. 저는 2세대쯤 되겠죠. 그 당시 운용은 주먹구구식이었어요. 운용이라고 해야 호가, 매매단가계산, 가격체결 그 정도가 전부여서 단가계산하는 것이 커다란 노하우일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단가계산하는 법도 가르쳐주지 않으려는 분위기였죠.
-계산법을 안 가르쳐준다?
▲네. 채권을 시작하고 나서 얼마 후에 계산프로그램이 생겼죠. 샤프계산기인가? 그 계산기에 수식을 입력해서 마음대로 계산하는 선배들이 정말 부럽더군요. 그런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게 언제입니까?
▲80년대 후반입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증권시장이 펀더멘털을 중시하지도 않았고, 금리를 예측해서 채권을 사고 판다는 개념이 없었어요. 국고채도 없었고 그나마 회사채가 거래됐지만 대개 발행시장에서 소화된 게 대부분이었어요. 무보증사채도 없어서 회사채종류가 은행보증/기타보증 두 종류만 있어서 발행사의 신용도와 관계없이 호가가 두가지 밖에 없었어요.
은행이나 투신 같은 운용기관은 바이 앤 홀드(buy and hold:만기보유) 전략만 사용했구요. 채권을 매집해서 편입하기만 해놓는 시스템말입니다. 그런 것만 보고 배우다가 미국에 갔더니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대단했죠. 운용툴이 좍 펼쳐져 있고 프로그램이 저절로 움직이는데다 포지션을 가지고 매매을 하더라구요. 그래서 포지션을 가지고 운용하는 법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즘의 트레이딩이라고 하는 기법은 증권회사에서 맨 먼저 도입한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IMF 외환위기이후 채권시장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어요. 시가평가제도입, 인터넷기법의 활용등으로…
-국민연금에 입사하고는 몇 분이서 같이 운용을 했나요.
▲1년간은 저 혼자 했습니다. 그 후 반년간 둘이 하다가 99년 11월에 기금운용본부가 생겨 자산운용조직으로 면모를 갖추었고. 지금은 채권운용팀에 5명이 있습니다.(미들, 백오피스 제외) 상반기중 4-5명을 충원할 계획입니다.
국민연금 입사 초기, 인프라 구축에 주력
-초기 홀로 운용할 때는 지금처럼 딜을 활발하게 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그 당시에는 채권운용에 배정된 자금이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실제 딜보다는 운용관련 인프라 구축에 힘을 많이 쏟았어요. 무보증회사채 매입근거를 마련하고 선진운용기법도 도입하고 그전에는 매입만 있었어요. 제가 운용을 맡으면서 처음 매도를 한 거죠. 결제방식도 개선하고 운용관련 규정도 만들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운용을 하게 된 것은 기금운용본부 출범 이후입니다.
- 그 당시 채권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습니까.
▲처음에 제가 맡았을 때는 3조5000억이었고 본부가 만들어졌을 당시에는 6조5000억이었습니다. 지금이 23조5000억이니까 엄청나게 늘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익성, 안정성, 직접투자의 원칙
-기금운용이 운용본부로 통합되면서 많은 부분이 채권으로 바뀐거군요.
▲본부를 설립하면서 내건 운용방침은 수익성, 안정성이었습니다. 같은 fixed income 이라면 가장 수익이 높고 안정한 방법을 하겠다는 거죠. 그러면 예금을 들 이유가 없습니다. 요즘 국고채 금리가 떨어져서 좀 그렇지만 당시에는 예금과 채권의 금리차가 엄청났어요.
또 우리는 채권의 경우 간접투자는 안하고 직접투자만 합니다. 공사채형 수익증권과 은행금전신탁을 안하는 이유는 시가평가제하에서 시장위험을 무릅쓰면서 굳이 수수료를 줘가면서까지 들어야 할 이유가 없어요 .이건 저희 뿐 아니라 캘퍼스(CalPERS) 같은 해외유명 팬션(연금)펀드들이 동일합니다.
사족이지만 지난 2년간 국민연금의 채권운용수익률이 국내에서 제일 높습니다. 부실채권도 전혀 없구요
국민연금 포트폴리오 “국고채 55%, 회사채 45%” 우량 ABS에 투자
-채권운용규모가 23조나 되는데 그 포트폴리오가 어떤지 좀 알려주시죠
▲절대치로 봐서 현재의 23조는 그렇게 많은 돈이 아닙니다. 보험료수입과 운용수익이 급증하고 있고 올해부터는 공공자금관리기금으로 예탁되던 자금이 없어져 국민연금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게 돼 있어요. 국민연금의 성격상 그중 상당부분은 채권에 투자할 수밖에 없고 현재는 국공채에 55%를, 회사채에 45%를 투자하고 있습니다. 회사채중 절반이상이 우량ABS이구요.
-회사채의 투자등급은 어디까지입니까?
▲실질적으로 A등급이상에만 투자합니다. 규정상으로는 BBB등급에도 투자할 수 있습니다. 내부기금운용규정에 의하면 예외투자로 투자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이사장님의 승인을 받으면 BBB등급 회사채 투자가 가능합니다. 저희가 보수적으로 A급 이상에만 투자한 결과 부실채권이 전혀 없게 된거죠
“가장 중요한 투자전략은 저평가 채권을 발굴하고 고평가 채권을 매도하는 것”
-그런 거대규모의 자금을 움직이면서 생각하신 큰 밑그림은 뭡니까.
▲기본적인 운용방침은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운용수익을 올리는 겁니다.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원칙은 디폴트 프리(default free)이구요. 그 원칙 하에서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짜서 여러 가지 전략을 구사하고 있죠. 그 중 가장 중요한 전략은 저평가채권을 발굴하여 매입하고 고평가채권을 매도하는 것입니다. 이 점이 다른 금융기관의 운용전략과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단순한 의미의 딜링은 아니라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사실 저희는 금리의 변동에 따른 단기트레이딩을 그다지 많이 하지 않습니다. 물론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터닝포인트에는 과감히 매매도 합니다. 지난 2월의 금리 급락기에는 많이 팔았어요.
ABS 6조원 보유, 수익성 측면에서 주목하는 채권
-국민연금에서 주목하고 있는 채권은 어떤 것인가요?
▲저희가 가장 주목하고 있는 채권은 ABS 입니다. 우리나라 채권 중 ABS가 안정성과 수익성이 가장 높아요. 하지만 유동성이 낮아서 거래가 잘 안되니까 그동안 우리 시장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것이죠. 기금의 성격상 장기보유전략을 지향하는 국민연금으로서는 ABS가 가장 좋은 상품이지요.
기억에 남는 게 99년말부터 우리나라 시장에서 ABS가 본격적으로 발행되면서 여러분들을 설득하여 99년 12월에 규정을 바꾸고 그달에 처음으로 5000억을 투자한 것입니다. 초기에 적극적으로 투자한 결과 낮은 가격에 매입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는 약 6조원 정도의 ABS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하편으로 이어짐)
- (전문)"온라인 신문 1년, 평가와 발전 방향 " 좌담회(1)
- [edaily] 온라인 신문이 창간 1년만에 명실상부한 언론사로 거듭난다. 이미 기사 공급측면및 사회적 영향력면에서 기존 언론사에 버금가는 위치에 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사로서 지닐수 있는 세제혜택과 언론중재제도 등 정부의 각종 보호와 혜택의 테두리밖에 있었던 것이 온라인신문의 현실이다.
이제 창간 1주년을 맞은 온라인신문에 정부가 온라인 신문도 언론이다는 개념위에서 온라인신문의 "언론 공인화"작업에 착수했다.(관련기사 edaily 3월 19일 오후 11시 11분)
다음은 20일 창간 1주년을 맞은 inews24가 주최하고, 이창호 inews24 대표(사회) /최창환 이데일리 대표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 /정동영 민주당 의원 /원희룡 한나라당 의원 /정보통신부 변재일 정보화기획실장 /문화관광부 임병수 문화산업국장 등이 참석한 특별좌담회, "온라인 신문 1년, 평가와 발전방향 - 미디어로 뿌리내리기 위한 과제"에 대한 좌담회 전문 내용이다. 내용이 길어 좌담회 전문을 (1),(2)로 구분해 연속으로 싣는다.
<이창호 사장> 좁은 사무실인데 어렵게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민주당 정동영 최고위원, 한나라당 미래연대 원희룡 의원, 정보통신부 변재일 정보화기획실장, 문화관광부 임병수 문화산업국장 모든 분들 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앞의 두 분은 활발한 의정활동을 펼치고 계시고 다른 두 분 역시 정보통신과 문화산업 발전을 위해 바쁜 시간을 보내고 계시죠.
온라인신문에서는 오연호 오마이뉴스 사장과 최창환 이데일리 사장께서도 자리를 빛내 주셨습니다. 저는 inews24의 대표를 맡고 있는 이창호입니다.
힘들게 이렇게 자리를 만든 이유는 inews24가 1년이 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온라인 신문들이 1년이 되어 이 기회에 온라인 신문의 지난 한 해도 정리해 보고자 함입니다.
온라인 신문이 지난 1년 동안 어떻게 지내왔는 지 오연호 대표께서 간단히 정리해 주시죠.
<오연호 사장> 오마이뉴스가 대통령과 인터뷰를 할 때 "인터넷 세상이 됐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이상한 세상이 됐다"로 잘못 듣고 빼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나 이상한 세상이나 인터넷 세상이나 모두 같은 말인 것 같다고 했습니다.
순수 인터넷 신문들은 그 전단계 인터넷 신문들에 비해 콘텐츠 생산능력 면에서 이미 기존 종이 일간지 신문 못지 않게 된 것 같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일정 기업 규모를 가지고, 일간 단위로 신문을 만들고 있습니다. 주간이나 격주간이 아니고요.
영향력 측면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요 부문별로 그 인터넷 매체를 빼고서는 얘기가 안 될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국민 대중적으로나 언론계 내부에서는 실제 이 만큼 지위가 향상됐는 지 모르겠습니다.
<이창호 사장> 밖에서 도와주신 분들의 생각도 말씀해 보시죠.
<정동영 의원> 온라인신문이 1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사회에 깊숙이 각인되는 데 성공한 것 같습니다. 속보성, 양방향성을 인식시켰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은 소비자들이 수동적인데 온라인신문은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히 "혁명적 경험"입니다.
미디어 시장에서의 의의 뿐 아니라 세상이 다른 세상이 오고 있구나 하는 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공격적인 사고방식으로 변하기도 하고요. 40~50대가 아닌 20~30대의 마당이라는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현대가 현기증날 정도로 빠른 세상인데 더 빨라지는 가속도가 느껴집니다. 여유가 없어지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여유를 박탈당한 것도 같습니다.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그런 것 같군요.
<이창호 사장> 정부측에서 보신 점은 어떻습니까.
<변재일 실장> 기존 신문이 인터넷 신문을 겸하는 경우는 많은 데 순수 인터넷신문이 살 수 있는가는 아직까지 회의적입니다.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상황이 바뀌어 갈 지 독자적인 수익 기반도 충분히 검토해 볼 일인 것 같습니다.
인터넷신문을 누가 보느냐도 중요한 일입니다. 전체 이용자의 60~70%가 10대, 20대입니다. 미국의 경우 인터넷 이용자의 68%가 30대, 40대, 50대죠. 32%가 10대, 20대입니다. 누가 시장을 주도하느냐가 현저한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를 보면 지금은 10대, 20대, 전문가, 기자들이 주 접촉 대상이죠. 지금도 인터넷이 갖는 영향력보다는 전문 취재력과 속보성이 더 큰 영향을 갖고 있고 또 기존 신문 기자들이 이를 원용 보도하여 힘을 얻고 있는 약간은 불안정한 형태입니다. 다소 불안하기는 합니다.
인터넷신문 이용자 중 30~40대가 많아지고 또 지금처럼 접근 자체가 어렵지 않고 무선인터넷이 활성화되고 휴대폰이나 PDA를 통해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신문을 볼 수 있다면 새로운 수익모델과 독자층 발굴로 발전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환경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창호 사장> 지금 어떻게 보면 온라인신문이 갖는 한계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화장실 갈 때 못 들고 간다는 한계점이 있지만 PDA가 활성화되면 TV를 통째로 가지고 다니는 것이니까 좀 더 활성화될 수 있겠죠.
<변재일 실장> IS-95C가 활성화되고 휴대폰이 고기능화되면 무선인터넷이 발전하고 또 올 하반기부터는 인터넷 퍼블리싱 신문들도 새로운 수익 기반을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새로운 매체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라 봅니다.
<이창호 사장> 최 대표께서 온라인 신문의 장단점을 설명해 주시지요.
<최창환 사장> 변 실장 말씀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얘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이데일리는 80~90%가 경제 뉴스라 대부분의 독자가 의사결정권을 가진 30, 40, 50대이기도 합니다.
콘텐츠 판매가 어렵다고 하지만 올해 콘텐츠 수입만도 1억원 이상이 되고 있습니다. 수익 기반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죠.
인터넷 미디어의 성장은 현 정권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넷 벤처 열풍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자본과 지식만으로 미디어를 만들어낼 수 있었고 인터넷 벤처의 영향도 크지 않았나 싶습니다.
따라서 인터넷 신문은 정부 차원의 지원방안을 만들어 나가는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인터넷 신문의 발전 방향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산업혁명 때 농업귀족들의 얘기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산업혁명 당시 이들은 농업이 영원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농업 귀족은 생산성이 더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비중은 크게 줄어들었죠.
이렇게 본다면 인터넷 시대에 인터넷 미디어의 역할은 더욱 커질 것이라고 봅니다. 신문·방송이 수조원의 돈을 투자해야 했는데 인터넷은 더 적은 돈으로 정보를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습니다.
정보화 혁명은 어떤 쪽으로 방향을 잡아가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신문을 만들 때 부의 재분배도 이뤄집니다. 인터넷 신문이 가져올 변화도 크다고 봅니다.
<이창호 사장> 온라인신문의 경우 접근성이 어려운 점도 있었고 기사의 신뢰도에 대한 문제점도 있었습니다.
<원희룡 의원> 인터넷 콘텐츠를 전달해주는 하드웨어의 발전으로 미디어의 새로운 장이 열리는 것입니다. 매체들의 급속한 발전이 예상됩니다. 일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기상의 문제점은 해소될 것이고 새로운 장이 열릴 것으로 봅니다.
인터넷 미디어의 장점은 속보성이고 실시간 진행이 가능하고 용량 제한이 없어 일반 언론에서는 다루지 않는 많은 얘기들을 심도있게 전달할 수 있는 점이죠. 이 점이 일반 이용자들이 기존 신문에서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욕구 충족을 해주는 부분이죠. 전문성 면에서도 깊이 있는 정보가 있었습니다. 로이터가 다른 매체보다 클 수 있었던 것은 전문적인 정보제공에 힘입은 바 큽니다.
정보 측면에서는 수요자들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존 신문들이 정보를 독점하면서 공신력과 책임성을 바탕으로 했다면 온라인 신문에서는 "주장"과 "사실"의 경계가 명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마이뉴스의 경우 뉴스게릴라로 인해 국민 다수가 뉴스 제작에 참여하는 장점이 있으나 책임성이나 중립성, 공신력을 확보하는 것은 또 과제입니다.
뉴스에 따라 돈도 왔다 갔다 하고 명예, 책임성 등에 문제가 제기됩니다. 지금은 크지 않지만 앞으로는 언론매체로서 가진 이런 측면이 더 큰 과제로 대두될 것입니다.
온라인미디어의 제도화에 대해서는 다른 나라에서도 전혀 해결한 선례가 없습니다. 기술적인 뒷받침을 얘기하는 것 자체가 앞서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어려운 과제다 싶습니다.
<이창호 사장> 온라인신문이 해결해야 할 책임성 문제 등이 있는데 해외 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법적으로 담보해야 할 것이 많지요.
<임병수 국장> 온라인신문이 처음 출범할 때부터 새로운 환경이다 하면서 흐름을 보고 있었습니다. 기존 언론과의 관계를 놓고 볼 때 지속적으로 지켜 봤습니다.
미국에서는 22개 정도의 온라인신문사가 있는데 그 중 13개사가 기존 신문사가 만드는 온라인매체입니다. 우리나라는 130여개의 통신사, 온라인 신문사들이 생겨났는데 이 중 90여개가 신생 순수 온라인신문사입니다.
언론과 관련해서는 속보성, 제한성, 책임성이 같이 가야 하는 것이라 봅니다. 아까 이동통신에 대해 얘기했는데 동화상도 함께 볼 수 있는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책임성 문제가 나올 때에 전반적인 언론의 차원에서 거론돼야 할 일입니다. 새로운 시대와 환경의 논리를 구현한다고 하는데 원리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책임성을 볼 때 정간법 가운데서 숙고하고 있습니다.
<변재일 실장> 인터넷 신문을 얘기할 때 말이 신문이지, 성격을 규명하기 어렵습니다. 이데일리는 정보 분야의 뉴스를 내보내는데 정보를 가공하기도 합니다. 오마이뉴스는 독자가 참여하고 있다면 커뮤니티 서비스랑 비슷합니다.
동영상 뉴스가 나오면 인터넷 신문과 방송의 기준이 모호해집니다. 우리나라의 사례를 다른 나라에서 성향을 찾고 전례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가장 빠르기 때문이죠.
국내에서는 지난 해 인터넷을 통해 오디오·비디오를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60% 이상입니다. 미국은 30% 선에 불과합니다.
새로운 매체, 상황에 따라 독자가 어떤 기호를 따라 가느냐에 따라 많이 달라질 수 있고 기준도 모호하므로 앞으로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합니다.
<오연호 사장> 온라인 미디어는 기존의 언론 권력이 점차 이동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줍니다. 이것은 참여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과정이라고 봅니다. 열린 공간이 우리사회에 실현되고 많은 사람이 열린 공간에 참여하면서 서로 견제하고 채찍질하면서 우리사회가 좀 더 나아지는 방향으로 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반대편에서는 정보화시대에 속보와 양이 중시되면서 정보가 상품으로 취급되기도 합니다. 지나치게 강조되면 이 세계에서도 돈이 우선시되는 사회가 아닌가, 인간의 얼굴을 한 인터넷이 아니라 돈이 중시되는 삭막한 인터넷이 아닌가 봅니다.
참여 민주주의와 새로운 돈벌이의 장을 이룩하는 두 가지 측면을 병립해야 합니다.
<정동영 의원> 기존 언론이 위기로 가고 있다는 것은 명확합니다. 내부 관료적이고 특권에 싸여 있고, 알아야 할 정보들이 거리낌 없이 소통되느냐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는 것도 같습니다.
기자 충원이나 정보 유통에서 동맥경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터넷 신문은 기성 언론 권력의 위기에 출구를 만들고 판을 깨고 나가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독립 언론의 새로운 지평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그러나 책임과 신뢰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명예훼손이나 반론권에 대한 논의를 깊이 해야 하는 시점입니다.
기존 언론의 경우 기본적으로 본질적인 문제가 다뤄지지 않고 때로 사소한 것에 포커스가 많이 맞춰지기도 합니다.
인터넷 언론에서도 이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는가가 중요합니다. 품격의 문제도 있습니다. 일정 수준 이상의 고급 문화를 대변하기 위한 노력도 있어야 합니다.
전문 인터넷 언론이 초기 단계에서 책임성과 품격을 가지고 가야 하는 것이 과제입니다.
<최창환 사장> 약간 다른 측면에서 얘기하겠습니다.
언론이라는 게 최고의 목표이겠지만 이데일리는 창립하면서 스스로 우리의 한계를 설정했습니다.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고, 사회의 평가를 하고, 각종 정의도 해주고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우리 기자 30~40명이 과연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도 생각해 볼 일입니다.
우리는 뉴스 테마를 빠른 뉴스 하나로 정했습니다. 단지 많은 기자들이 빠른 뉴스만을 전달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니겠지만 당장은 시간과 재원의 한계를 확인하고 우리의 테마를 설정했습니다.
꿈도 있고 새로운 미디어가 되고자 하는 희망도 있습니다.
1년 동안 많은 얘기가 있으므로 주장이 있고 사실을 정례화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평가가 좋습니다. 주장과 사실의 구분을 명확히 하는 게 우리의 목표입니다.
그러나 주장이 명확치 않을 때는 사실 전달에만 주력하기로 했습니다.
기존 언론들이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사소한 사실을 침소봉대하는 경향도 있었으나 이데일리는 사실에 주력하여 시장에서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이창호 사장> 기존 언론의 문제점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해주셨고 대안 언론으로서의 가능성에 대해 얘기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책임 등 여러 담보해야 할 점들이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첫단계 논의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스스로 해결해야 할 과제와 외부에서 도움 받을 과제가 무엇인지 얘기해 봐야겠습니다.
<정동영 의원> 일본의 경우 인터넷 언론이 그렇게 활발하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기성 언론에 대한 만족도가 낮기 때문에 또 불신과 불만에 대한 반사적인 형태가 아닌가 싶습니다.
BBC의 경우 내부 가이드라인으로 정확한 것을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로 잡고 있습니다. 특종보다는 정확성을 생명으로 합니다. 독점 취재보다는 로이터에 내용을 전달, 한 단계 사실확인 단계를 거칩니다. 이것이 BBC의 신뢰도를 만든 것이라 봅니다.
대처 정부가 BBC를 비난한 적이 있었습니다. 애국심이 없는 방송이라면서. 그러자 BBC가 정확한 사실보도가 궁극적으로 국익에 도움을 준다고 했습니다.
온라인신문은 사실과 주장의 구분을 명확히 하여 기성 언론보다 더 객관적이고 신뢰할만하다는 평판을 얻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다면 가장 큰 경쟁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임병수 국장> 실제로는 많은 신문들이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온라인신문이 독자 매체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여러 방안이 있습니다.
언론의 본질은 보도와 논평입니다. 팩트를 중심으로 하는 것인데 이 역시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굉장히 의미가 크고 영향이 크기 때문에 독자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온라인신문은 사회적 공기의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 온라인신문의 논평에 대한 중요성이 강화되고 있습니다.
단순한 팩트에 큰 신경을 안 쓸지라도 우리는 그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방송에 있어서 인터넷 방송은 이미 방송법 제도하에 들어와 있습니다.
원리를 볼 때 언론의 자유와 책임이 중요합니다. 법적 제도적 뒷받침도 클 것입니다. 그러나 언론의 자유와 책임에 대해서는 논의를 계속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법적인 측면에서도 새로운 언론의 책임이 아니라 언론으로서의 책임과 보장이 중요한 것입니다. 새 지적재산권에서도 중복되는 얘깁니다.
별도의 제도를 마련하기보다 언론의 범위에서 큰 틀로 논의해야 합니다. 이것은 개인 소신이 아니라 문화관광부 입장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언론의 공적 책임을 논의하는 부분에서 얘기되어야 합니다.
<오연호 사장> 인터넷 신문이 오보가 많다거나 신뢰도가 낮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종이 신문은 닫혀 있으나 인터넷 신문은 기사가 있고 또 독자가 있고 열린 공간이 있고 한꺼번에 반론이나 독자의 의견이 게시됨으로써 때로 오보나 신뢰성에 문제가 제기되기도 합니다. 검증해 보았을 때 인터넷 신문은 지난 1년간 큰 오보나 사고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보도와 논평의 비중을 결정하는 것은 신문의 성격에 따라 결정한 부분입니다. 인터넷 신문의 열린 공간을 열린 공간을 폐쇄하지 않으면서 책임성을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마련돼야 할 것입니다. 열린 공간을 찾는다면 오히려 더 공세적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최창환 사장> 오프라인에서도 우리 출처를 밝히고 받아쓰는 곳이 있습니다. 온라인 신문의 신뢰성은 이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기자단이 무엇이고, 언론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이데일리는 언론사 등록도 안돼 있지만 한국은행과 금융감독위원회 등에 기자단으로 등록돼 있습니다. 언론으로 등록이 안돼 있어도 인정을 해주고 있습니다. 현실은 지금 4개 온라인 매체를 언론으로 인정해 주고 있습니다.
<이창호 사장> 독자에게는 언론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책임 측면에서는 언론 기능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 같습니다. 법적, 제도적으로 명백한 정체성이 갖춰져 있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얘기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정동영 의원> 정간법에서 온라인신문은 언론사로 등록할 수 없습니까.
<임병수 국장> 온라인신문을 언론사로 등록시키려면 최소한 시행령이 개정돼야 합니다. 등록 기준을 신문사 시설 기준과 같이 만들면 안됩니다. 등록 기준을 신문사처럼 만들어 놓으면 사이버 공간이 대륙같은 곳인데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진입은 자유롭게 하되 책임을 강조해야 합니다. 이 방향으로 시행령 개정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변재일 실장> 진입에 대한 규제가 없으면 사이버신문은 사이비 신문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모든 온라인신문을 등록업체로 만들면 그 이유만으로 이를 남용할 수도 있습니다.
<임병수 국장> 언론의 공적 책임 하에서 등록하도록 하려고 합니다.
<변재일 실장> 지금 이 온라인신문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대부분의 기자들이 기존 언론사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등록에 따른 문제는 많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회적 책임 문제, 기자 등 개인적 책임을 둘 수 있는데 사회적 책임은 법으로 판가름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최 대표가 얘기한 대로 사실 보도를 하는 게 중요합니다.
인터넷 방송도 500만원이면 만들 수 있습니다. 뉴스도 홈페이지에 지역 정보를 올리고 인터넷 신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 신문은 기존 언론에 방향성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좀 더 성공하려면 사실에 기반한 언론이 되어야 합니다. 인터넷 신문 업계는 정말 등록제를 원하십니까.
("온라인 신문 1년, 평가와 발전 방향 " 좌담회(2)에서 계속)
-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①오석태 씨티은행 부장(상)
- [edaily] 채권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최근 금리가 급등하면서 정책당국자들은 서둘러 시장을 안정시키기위한 대책을 내놓고 있다.
일반인들이 쉽게 접하는 주식시장이나 외환위기를 통해 상식이 풍부해진 외환시장과 달리 채권시장은 아직도 상당부분 베일에 가려져 있다.
우리나라 채권시장은 전체규모가 300조원에 달하는 거대한 시장이다. 채권시장은 한 나라의 경제지표중 가장 중요한 금리를 결정한다. 이 시장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각 기관에서 특별히(?) 훈련받은 정예 요원들이다.
edaily는 “300조를 움직이는” 채권시장의 중요 인물들을 찾아 거래경험과 철학, 운용중 겪었던 재미있는 경험 등을 들어보는 연속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번주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으로는 지난해말과 올해초 “경기경착륙”과 “V자형 회복”을 가장 먼저 주장, 시장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씨티은행의 오석태 부장이다.(약력은 기사하단 참조)
오 부장은 채권시장에 몇 안되는 전문 이코노미스트로서 서울대 경제학과을 수석으로 입학하고 하바드에서 수학한 “수재형”경제분석가중 한명이다. 그는 통상적인 애널리스트들과 달리 단순한 경제전망에 그치지않고 경제현상과 경제정책에 대해 주관적이고 직설적인 의견을 피력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채권 이코노미스트로서 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는데 또 다른 희망이 있습니까.
▲이코노미스트를 70세까지 하는 것입니다.
-직업인으로서 이코노미스트가 아니라..일종의 비전 같은 것을 여쭤본 것인데요.
▲새로운 비전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여유가 없습니다. 평일날은 일에 치여서 살고 있고 게다가 요즘엔 아침에 헬스클럽 다닌답시고 6시에 집에서 나와요. 그게 일과입니다. 어차피 이코노미스트라는 게 정년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는 이 일을 오래하고 싶습니다.
-인터뷰 전에 어디 기관에서 세미나를 하고 오셨다면서요. 그 얘기좀 해주시죠.
▲우리 경제 상황이나 현장 분위기가 미국에 의해 이끌려가는게 사실입니다. 저는 진정한 구조조정은 미국에서 독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독립선언을 하려니까 산업생산지수도 안 좋게 나오고 미국 경제가 돌아가는 상황도 많이 안 좋다는게 문제입니다.
지금 방향 제시를 해주어야 하는데 V자 모양이 확실한 것도 아니니 6개월 후에 금리가 4.5%다 뭐다 하는 게 무슨 필요가 있겠나 싶습니다. 전 6개월이나 12개월 전망 따위는 믿지도 않습니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6개월 후의 전망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중요한 건 지금 당장의 방향이 뭐냐하는 것이지요. 과감하게 말하자면 "한국경제는 올해 하반기에도 반등없다" 라고 말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게 잘 안됩니다. 왜냐하면 확인이 안 되니까요.
"V자 회복은 전망이 아니라 희망이다"
-V자 회복에 대해서는 전망이 아니라 일종의 희망사항이라는 말씀도 하셨는데요.
▲지금 문제는 한국경제가 아니라 미국이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미국이 쓰러지면 한국은 없습니다. 미국이 어떻게 되느냐가 지금 상황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화두입니다. 지난 5년 동안 미국의 초과성장을 이끌어 온 건 결국은 IT산업입니다. 그런데 이게 흔들리고 있어요. IT가 무너지면 전 세계경제는 없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미국의 어떤 부분이 취약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금융시장이 그린스펀의 말 한마디에 목 매달고 있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취약점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스닥이 하루에 4-5%씩 내렸다 올랐다 하는데 이건 정상이 아니거든요. 한국은 주가가 1월에 많이 올랐을 때도 "이걸로는 안된다"며 전전긍긍하고 있는 상황인데 미국은 이나마도 없지 않습니까.
-시티그룹의 미국경제에 대한 전망은 긍정적이지 않습니까.
▲나름대로 긍정적으로 보고 있긴 합니다. 처음에는 시티도 부정적으로 보긴 했는데 그 다음 다른데서도 다 그런 식으로 따라오고...그러니 차마 "미국 경제 올해 내년 별볼일 없다" 라고 하기가 어려운 것이죠. 게다가 내가 봐도 미국 사람이 미국 경제에 대해서 그렇게 부정적으로 쓰는 것이 상당히 힘들 것이라고 생각해요.
-일전에 씨티은행이라는 기관이 한국 금융 시장에서 일정한 롤이 정해져있어서 리서치 페이퍼가 제약받는 부분도 있다고 하셨는데.
▲그게 어떻게 보면 좋을 수도 있습니다. 내부자가 하나는 있어야 하니까요. 한국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사람은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제 위치가 무척 특별합니다. 저는 외국기관에서 일하지만 한국인이고 그래서 “외국기관이 한국을 좋게 본다” 라는 점이 작용할 수도 있는 것이죠. 이런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매주 리포트를 쓰셔야하는데요. 부담이 되시죠.
▲쓰다가 쓰다가 안되면 “이번주에 아무것도 없다" 라고 보내면 그만인데 그럴수는 없지 않습니까. 저도 기자들처럼 다음 리포트를 뭘로 써야할지 늘 고민합니다.(웃음) 사실 생각이야 많지만 그걸 일일이 다 쓸 수도 없는 노릇이고...사실 인플레이션, 인구증가율, 자본축적 이미 이 세개 그래프가 꺾였습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금리를 끌어내린 배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해 채권수익률 급락 이유있다
-지금까지 채권시장이 이유있는 강세장이라는 의미인가요.
▲예. 사실 지금 아무도 작년 올해초 금리가 떨어진 이유를 말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코스닥거품처럼 쉽게 꺼지는 것도 아니고. 금리가 내려갔다는 사실의 70-80%는 (펀더멘털로) 인정을 해줘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연초 랠리는 좀 과하지 않나 싶어요. 미국이 변수이기는 하지만. 만약 2월에도 경제가 안 살아난다면 좀 더 강력한 경기부양책을 써야합니다.
-리포트를 쓰실 때 여러가지 경제지표를 참고하실 텐데요. 무엇을 주로 보십니까.
▲저는 기본적으로 우리나라 지표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숫자의 오류 가능성이 너무 높아요. 일례로 산업생산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이 40%이상인데 이것으로 진정한 산업생산을 평가할 수는 없죠. 미국처럼 다양한 데이터를 모두 봅니다. 남들이 잘 안보는 고용지표도 참고하구요. 저는 어떤 지표를 보느냐보다는 그 지표의 이면에 숨겨진 진짜 뜻이 무엇인지 고민합니다.
-애널리스트라는 것이 한쪽이 약하다고 하면 연쇄적으로 약하다고 하는 군중심리 같은 것이 있는데요.
▲그런 묘한 심리가 있습니다. 한 쪽에서 나쁘다고 쓰고 뒤따라서 또 쓰고 그러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마저도 "아닌가" 하고 갸우뚱하게 되고 그래서 상승작용을 일으키죠.
그 대표적인 예가 미국 애널리스트들이 기술주에 대해 누가누가 더 나쁘게 보나 하고 경쟁하는 것입니다. 이제 내성이 생길만도 한데. 그 사람들은 아마 70달러 하던 시스코가 10달러가 돼도 직성이 안 풀린 듯 합니다. 이미 닷컴들은 다 맛이 간 상태고 남아있는 것도 거의 없어서 지금 그 쪽에서는 그런 주식들을 “ex-블루칩” 이라 부릅니다. 예전에 잘 나갔지만 지금은 애물단지에 불과하다는 의미죠.
물론 IBM, GE 등 진짜 블루칩들은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하지만 한 때 뉴블루칩이라 불리며 미 경제의 상승을 주도했던 선마이크로시스템즈 같은 기업들의 주가가 3분의1 수준으로 떨어졌는데도 아직 PER가 높다는 게 미국의 문제죠.
-미국 경기회복에 대한 전망이 수정될 가능성도 있습니까.
▲수정은 언제든지 될 수 있습니다. 원래 V자 회복 전망은 성장률에 기인한건데 비관적 시나리오로 보면 2% 대로 간다는 전망도 나올 수 있습니다. 일부 국내 증권사에서는 성장률이 2.8%까지 내려간다고 강한 어조로 썼지만. 저도 물론 그렇게 할 수는 있습니다.
홍콩에 있는 아시아리서치팀 보스한테 "까짓거 성장률 2%대 라고 쓸까요" 라고 물었더니 "네가 나설 필요 없다. 어차피 안 좋다는 거 다 알고 있는데 적당히 깎아라"라고 하더군요. 나와있는 수치나 싸이클상으로 보면 올해 하반기쯤에는 반등이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하반기에는 V자 회복이 있을 것이다라고 쓴 겁니다. 한국에서는 이제까지 V자 회복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구조조정보다 경기부양이 우선이다"
-지금까지 써낸 리포트는 제목 등이 무척 강렬해서 마치 주식쪽에 있던 “스티브 마빈”을 연상시킨다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뭐가 그렇게 강렬하죠?(웃음)
-시장이 기억하는 문제작이 2편이나 있지 않습니까. “하드랜딩”과 “V자회복”. 두가지 주제 모두 오부장께서 먼저 언급한 것 아닌가요.
▲앞뒤말이 맞지 않는다고 비판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V자 회복이 되려면 하드랜딩이 앞서 있어야 가능한 것 아니냐고 말하죠. 골이 깊어야 산도 높아지는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지난해말에는 분명 하드랜딩을 이야기하셨는데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걸 안 하면 시장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것과 둘째는 정부에게 신경 좀 쓰라는 의미였죠. 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도 모르고 그 때 정부는 구조조정(restructuring)이니 뭐니 한다며 거기에만 신경쓰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restructuring”이라는 말을 무척 싫어합니다.
-왜 그렇죠?
▲restructuring이라는 게 말이 쉽죠. 한 꺼풀만 벗겨서 "대체 restructuring이 뭐냐" 고 물어보면 사람마다 다 다르게 이야기합니다. 이코노미스트들은 경제학을 배운 사람인데 경제학 교과서에는 restructuring이라는 단어를 눈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어요.
지금 노조는 구조조정 결사반대를 외치고, 정부는 구조조정 해야한다고 난리고, 외국 사람들은 한국은 구조조정이 안 돼서 문제라고 하는 게 우리의 현실 아닙니까. 그럼 이게 대체 뭐냐는 말이죠. 시티 내부적으로는 restructuring에 대해 경기반등의 필요조건은 아니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restructuring이 안돼서 “너희는 꽝이다”라는 건 상황을 너무 단순하게 보는 것이고 오히려 우리는 경기가 반등했을 때 restructuring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restructuring을 제대로 안 할 바에는 경기부양이라도 하라는 거죠. 근데 그걸 못하니...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라는 식은 곤란하다는 겁니다.
-손놓고 있지만 말고 뭔가 해야한다는 뜻입니까.
▲물론입니다. 사실 경기부양책을 쓰면 국내에서는 체감하기 힘들지 몰라도 외국투자자들은 더 좋아해요. 그 단적인 예가 일본이죠. 자기들이 다 일본주식 사 놨는데 주식 값이 올라야 할 거 아닙니까. 사실 외국인들이 무척 이중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중요한 건 성장이지 구조조정이 아닙니다. 자기가 투자한 돈이 아깝기 때문에.
-결국 중요한 건 수익성(earnings)인 것 같네요.
▲earning이든 뭐든 무엇보다도 기업경기전망(Business outlook)이 밝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earning도 나오게 되죠. 사람 자르는 식의 구조조정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미 한국은 사람을 많이 자르기도 했고.
심리적인 안정이 중요
-오부장께서 쓰신 “경기부양을 선택하라”는 보고서는 edaily내에서도 논란이 됐습니다. 경기부양이든 구조조정이든 둘 중 하나는 해야하는데 하려면 경기부양을 해야한다는 내용을 보고 씨티가 정부를 도와주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혹시 그 보고서 이후 정부측에서 만나자는 제의는 없었나요?
▲전혀 없었어요.(웃음) 기본적으로 씨티에서도 현대전자 문제에 깊이 관여했기 때문에 다른 이들이 다 나쁘다, 쓰러진다 말할 때 우리까지 그러면 안된다는 건 있을 수 있죠. 그렇게 하면 완전히 숨 넘어가는 사람에게 칼 꽂는거 아닙니까.
어떻게 보면 씨티에서 정부보다 먼저 현대전자가 괜찮다고 판단한 거죠. 사실상의 경기부양 효과를 일으켜 사람들의 심리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취지였습니다. 단기적이지만 일조를 했다고 봅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에요 그린스펀의 말 한마디에 시장이 쏠리는 이유말입니다. 지금 당장의 금리인하가 큰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안정감을 얻고 싶은 심리죠.
-다른 이코노미스트들과 교류가 있습니까.
▲없어요. 저는 제 직업을 청기와장수같다고 생각합니다. 교류할 시간도 없고, 사실 주식시장의 애널들을 보면 서로에 대해서 경쟁심리도 많이 느끼는 것 같은데 그런 건 별로 없어요.
-하바드에서 공부할 때 전공분야는 뭐였습니까.
▲거시경제, 특히 소비 관련을 공부했습니다. 소비가 무엇에 의해서 결정되느냐 같은 주제로. 박사학위를 끝내지는 못했어요.
-유학을 하게 된 동기는 뭐였습니까. 고등학교때부터 대학졸업때까지 수석을 놓친 적이 거의없다고 들었는데요.
▲학력고사 수석이라고 알려져 있을 뿐이에요. 그거 말고는 뭐...원래는 이과쪽을 지망하려했습니다. 아버님이 서울대 법대를 나오셔서 공무원 생활을 하셨는데 공무원 생활이라는게 빤해서 어머니가 힘들어하셨어요.
아버님을 보면서 법대갈 생각은 추호도 안했죠. 공무원은 돈 못 번다는 생각이 뼈속 깊이 박혀 있어서. 나중에 보니까 서울대 법대가 무척 좋은 학교더라구요.(웃음)
자연계로 가려니 아버님이 과학자해서는 한국에서 출세하기 힘들다고 극구 말리시고, 솔직히 지금 철들고 나니까 아버님의 그 말씀이 공감이 갑니다. 그래서 전공을 결정하려고 보니 남는 건 경제학밖에 없었어요. 요즘에야 젊은 사람들이 생각이 바뀌어서 경영학과도 많이 가지만 우리 때만 해도 문과생들이 택할 수 있는 과는 법대, 그게 싫으면 경제학이었으니까요. 그래서 학교 졸업하고 보니 뭔가 허전했습니다. 바로 취직하기도 그렇고, 다른 친구들처럼 고시 볼 마음도 없고, 그래서 유학을 선택했죠.
"자네는 교수될 것 같지는 않은데"
-대학시절에도 역시 공부를 잘 했다던데 교수님들의 주목도 많이 받았겠어요. 어떤 분들이 조언을 많이 해주셨습니까.
▲정운찬 교수님, 한승수 교수님 등이죠. 뭐 맨날 일등만 한 건 아니었고 성적은 그런대로 잘 나온 편이었어요. 어쨌든 주목을 받고 장도에 오르긴 했는데 한승수 교수님이 악수하면서 그러시더라구요. 그 때 막 비서실장 하시고 주목을 많이 받으시던 때인데 그분이 그러셨어요. "자네는 교수될 것 같지는 않은데...뭔지는 모르지만 무척 재미있는 일 할 것 같구만" 이라고.
-유학생활은 어땠나요?
▲가서 공부를 따라가는 건 사실 어렵지 않았어요. 그러다 중간에 군대 문제가 걸려있어 다시 한국에 들어와 입대했죠. 군대에 갔을 때 사수가 하버드 MBA를 나온 사람이었습니다.
그 선배가 투자은행이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 가서 이코노미스트라는 걸 하면 별로 하는 것 없이 돈도 많이 준다고 하더라구요. 가뜩이나 교수는 싫고 뭐 딴 거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그런 것도 있나 싶었죠.
교수만 해야하는 줄 알았는데 새로운 일이 생긴거죠. 군대 마치고 돌아갔더니 2년의 공백기간 때문인지 공부가 잘 안됐어요. 논문도 잘 안 써지고. 박사 수료까지는 논문만 남았었는데 이 논문 쓴다는 게 쉽지가 않더라구요. 게다가 지도교수라는 사람이 "너는 박사하는 것 보다 딴 거 하는게 더 맞을 것 같다" 고 말하더군요.
그 말은 즉 "너는 여기 적당하지 않으니 딴 데가서 딴 길 알아봐라" 이거죠. 그래서 고민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일단 한국에 들어가고 보자. 연봉 천만원을 받더라도 들어가서 일 하는게 낫지 여기선 폐인되겠다" 라는 생각에 귀국했습니다. 그 때 우연찮게 지금 삼성증권 상무로 계시는 박진회 상무를 만나 씨티은행 입사 제의를 받았습니다.
-그게 언제죠
▲96년이죠. 그리고 97년 말에 IMF가 터지면서 이코노미스트로서의 눈을 뜨게 됐습니다. 그 전까지는 뭐 이코노미스트라는 것이 필요하지도 않았고. 98년부터 현장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이코노미스트는 실전 경험이 풍부해야
-학위를 목전에 두고 귀국했는데 거기에 대해 일말의 미련이나 후회는 없습니까.
▲없어요. 현장에서 배우는 게 거기서 허송세월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 계통의 사람들 보면 박사학위 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어요. 박사학위 소지자들은 대부분 IMF나 세계은행에서 커리어를 쌓고 돈 벌겠다고 투자은행쪽으로 발길을 돌린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 얘기들어보니 IMF나 세계은행도 거의 제2의 재경부나 마찬가지더라구요. 상당히 관료적인 조직이라 연줄이 중요하고 위로 올라가는 거 바늘구멍 뚫기보다 힘들고. 그러니 연봉 몇 십만불 주는 투자은행에 오는 거죠. 박사학위 목전에서 관둔 나같은 사람도 무척 많아요. 따지고 보면 그린스펀도 나랑 똑같은 경우죠. 나중에 뉴욕대에서 박사학위를 주긴 했지만. 우리 리서치 헤드도 박사학위가 없습니다.(웃음) 내가 대학교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면 모르겠는데 그럴 맘도 겨를도 없고...그냥 이거 70세까지 할 생각입니다.
-학문으로서 경제학을 택한 것은 만족하십니까.
▲경제학 이론과 금융시장에서 이코노미스트가 봐야할 것은 전혀 별개입니다. 경제학원론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는 첨단을 달리는 실무 현장에서 결론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죠. 경제는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대학에서 배운 건 오직 그거 하나죠. 저는 정말로 이코노미스트가 연예인이랑 같은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직접 자산운용을 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까.
▲아직은 이코노미스트로 할 일이 남았기에 그런 생각 없습니다. 전혀 생각을 안해본 건 아닌데. 글쎄...만일 하게 된다면 스트레티지스트 정도? 이렇게 해라 저저렇게 해라 전략을 제시해주고 실무는 밑에 있는 사람들이 하고, 그런 방식으로 한다면 모르죠. 내가 직접 한다? 우선 나이가 걸려요. 대부분의 딜러가 30대 초반이 아닙니까. 30대 후반 40대 초반 돼서 오면 누가 받아줄까요.
-기회가 주어진다면 국내은행에서 일할 생각도 있습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그쪽은 경험이 없어서. 사실 글로벌 리서치조직의 일원으로 있다는 것이 아직 제게는 많은 이득이 됩니다. 배울점도 훨씬 많고. 저를 씨티에 입사하게 만든 박 상무께선 그런 고민 끝에 회사를 옮기셨습니다. 물론 저도 그 분이 삼성증권으로 옮길 때 하셨던 고민을 할 때가 오겠죠. 하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데이터를 의심하고 숨겨진 의미를 찾아라"
-다른 이코노미스트들과 자신의 차별점이랄까 장점은 무어라고 보십니까.
▲앞서 말했듯이 숫자를 한번 더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 잘은 모르지만 결과물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데이타가 나오면 우선 의심을 해봐야하는데 배운 이론이라던가 과거 경험이라던가 그런데 얽매여서 단순하게 생각한다” 는 생각이 들때가 있습니다.
"이코노미스트로서의 한국의 프로페션은 내가 만든다" 라는 생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러더군요. "이코노미스트는 무조건 극단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고. 수없이 많은 이코노미스트들이 수많은 리포트를 써내는데 극단적으로 쓰지 않으면 누가 그걸 읽어주겠습니까.
-리포트를 쓰면서 생긴 에피소드는 없나요?
▲인터넷이 발달한 후 이코노미스트들의 리포트를 쉽게 쉽게 받아보는 건 좋은데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 부담이 됩니다. 저번에도 이 정도면 조정을 받을 것 같다고 썼더니 딜러가 전화해 "오부장. 그런거 쓸거면 미리 얘기나 해주고 쓰지. 어제 채권 샀는데 어떡하라구" 라고 하더라구요. 그거 말고는 글쎄? 아마 옛날에 쓴 리포트 지금 읽으면 부끄러워서 못 볼겁니다.
(인터뷰 하편으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