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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금융권인 저축은행에서 대출 업무를 담당하는 한 실무자는 최근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금융회사에서 빌린 돈을 5년 넘게 갚지 못한 채무자의 빚 갚을 의무를 없애주겠다는 정책이 최저임금 인상이나 법정 최고금리 인하 정책과 같이 취약계층의 어려움을 가중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채권 소멸시효(5년) 연장 못하면 대출심사 강화 가능성↑
14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 당국의 ‘소비자신용법’ 제정안을 놓고 금융 현장에서는 이 같은 우려가 나오고 있다. 소비자신용법은 은행이 빌려준 신용 대출·담보 대출 등 개인 채권의 소멸시효(원금 연체일로부터 5년)가 지나면 금융회사가 대출금을 돌려받을 법적 권리를 포기하게 하고 대출자가 빚 갚을 능력이 있을 때만 시효 연장을 허용하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금융회사가 법원 지급 명령 등을 통해 대출의 소멸시효를 일률적으로 연장해 신용 불량 상태에 놓인 채무자가 수십 년씩 고통받는 것을 방지하겠다는 취지다.
이 같은 예상은 우량 대출자를 상대하는 시중은행 등 1금융권보다 취약계층이 많이 이용하는 2금융권에서 주로 제기되고 있다. 대형 은행 관계자는 “은행의 경우 장기 연체된 신용대출은 대부분 자체 비용으로 처리해 채권을 소각하고 회수가 어려워진 담보 대출만 채권의 90% 정도 가격에 외부 기관에 판다”며 “채권 소멸시효를 연장하기 어려워지면 은행보다는 저신용자를 상대로 소액 신용 대출 등을 많이 취급하는 저축은행, 카드사 등 2금융권 회사가 대출 심사를 강화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올해 2금융권 대출 6조원 급감…취약계층 ‘대출절벽’ 올라
1·2금융권 회사에서 연체된 대출의 채권을 사서 추심을 하는 대부업계의 위기감도 크다. 소멸시효 연장이 어려워지면 일감이 줄어드는 직격탄을 맞게 되기 때문이다. 대부업계 관계자는 “대부업은 현재 모든 금융기관이 부실 채권을 떨구는 금융의 하수구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데, 이런 채권이 모두 휴짓조각이 된다면 피해가 막심할 것”이라며 “소멸시효가 완료되기 전에 어떻게든 대출금을 회수하기 위해 채무자의 가재도구까지 모두 압류하거나 경매에 부치는 등 추심 강도가 지금보다 훨씬 세질 가능성도 크다”고 했다.
금융 당국도 시장의 이 같은 우려를 알고 있다. 금융위 관계자는 “채권 소멸시효의 일률적 연장을 방지하는 것과 함께 채무자 편에서 금융사와의 채무 조정을 도와주는 채무 조정 서비스업을 새로 도입하면 현재 금융회사가 추심업자에 주는 수수료 등 부실 채권 처리에 드는 사회 전체적인 간접 비용이 줄어드는 효과가 있을 수 있다”며 “정책 세부안을 정하는 과정에서 업계와 계속 대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소비자신용법 제정안 논의에 참여 중인 김영일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채권 소멸시효 연장을 제한해 금융회사가 대출 심사를 강화하면 상대적으로 생산성이 높은 사람에게 자금이 지원되고 과다 채무자나 범죄자 등 돈을 빌리면 안 되는 사람은 대출을 못 받는 등 자원 배분의 효율성이 높아지는 순기능도 있을 것”이라며 “생계비나 의료비 등을 위해 금융권 대출이 꼭 필요한 사람의 경우 단순 금융 정책 측면에서만 접근할 것이 아니라 정부가 복지 정책 등 사회 안전망을 강화해 예상되는 부작용을 줄여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