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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추모의 `말말말`
  • [카드뉴스]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추모의 `말말말`
  • [이데일리 e뉴스팀] 이명박 전 대통령 : 민주화를 이끈 지도자로서 군정을 종식하고 문민정부를 세웠습니다. 취임 후에는 여러 개혁적 조치를 통해 민주주의를 한층 심화시키고 국가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퇴임 후에도 나라를 걱정하는 애국심으로 정부와 국민에게 믿음을 주는 원로였습니다. <☞관련기사 :굴곡진 현대사 '민주화의 큰 산' 지다(종합)> 김종필 전 국무총리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신념으로 민주화를 이룬 분입니다. 어떤 어려움에도 신념을 끝끝내 관철하신 분. 신념의 지도자로 국민 가슴에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 거산이라는 호처럼 거대한 산이셨던 분으로 민주화에 큰 족적을 남기셨습니다. 물을 마실 때 근원을 생각하라는 음수사원이라는 말을 방명록에 적고 싶었습니다. 우리나라 민주주의에 기여하신 공을 잊어서는 안됩니다.김덕룡 전 새누리당 의원 : 우리나라 민주화를 위해서 온 몸을 던졌던 대통령, 그리고 민주주의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서 취임 이후에 여러 개혁정책을 썼던 분입니다.정몽준 전 새누리당 의원(아산재단 이사장) : 민주화 투쟁에 몰두하면서도 미래를 생각하며 균형감각을 유지하고 나라를 통찰하는 혜안을 가진 정치인입니다. 개인적으로 존경합니다.손학규 전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 : 개혁과 더불어 김 전 대통령이 항상 하시던 말씀이 통합과 화합이었습니다. 그분이 이루고자 했던 우리 사회 이상이었습니다.▶ 관련기사 ◀☞ [김영삼 서거]불세출의 '정치9단' YS가 남긴 공과 과
2015.11.24 I e뉴스팀 기자
역사 바로세우기, YS 공적 중 ‘압권’
  • [김영삼 서거]역사 바로세우기, YS 공적 중 ‘압권’
  • [이데일리 선상원 기자] 한국 정치계의 거목, 민주화 운동의 큰 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한 후 김 전 대통령의 공과를 다시 재조명하자는 사회적 흐름이 일고 있다. 문민정부말 IMF 외환위기에 가려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우리나라 민주주의 절차가 그때 비로소 완성됐다. 군대 사조직인 하나회 해체, 금융·부동산실명제 실시, 고위 공직자 재산 등록, 지방자치제 전면 시행, 역사 바로세우기 등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다.이중 역사 바로세우기는 문민정부와 그 이전 군사권위주의 정부를 나누는 잣대다. 김 전 대통령(YS)은 1993년 정권초부터 역사 바로세우기를 밀고 나갔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한다’며 군부세력인 노태우 대통령의 민정당, 김종필 총재의 공화당과 3당 합당을 통해 정권을 창출한 것에 대한 오명을 씻어내려고 했던 의도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YS는 집권 첫해인 5월 13일 ‘역사 바로세우기 관련 특별담화’를 통해 “1980년 5월 광주의 유혈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되었다”면서 “분명히 말하거니와 오늘의 정부는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 위에 서 있는 민주 정부”라고 선언했다. 이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정부패 사건과 맞물려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으로 이어진다.[사진공동취재단] 정몽준 전 새누리당 대표가 22일 오후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김영삼 전 대통령 빈소에서 조문한 뒤 김 전 대통령 차남 김현철 씨를 위로하고 있다. 맨 오른쪽은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1995년 12월 시행한 특별법은 1979년 12·12쿠데타와 1980년 5·18 광주민주화 운동을 전후해 발생한 헌정질서 파괴행위에 대해 공소시효를 정지하고 헌정질서 파괴범죄자에 대해 검찰이 불기소처분을 한 경우에는 고소 고발인이 재정신청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또 광주민주화운동정신을 계승하는 기념사업을 추진하도록 했다. 광주에 국립 5·18 민주묘지가 조성되고 5월 18일을 기념일로 지정해 정부가 공식적인 행사를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검찰에 의해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은 12·12 쿠데타와 부정부패에 대해 역사적 단죄를 받았다. 문민정부에서 정무장관을 지낸 김덕룡 겨레의 숲 공동대표는 23일 YTN라디오 ‘신율의 출발 새아침’에 나와 “제일 힘들었던 시기는 광주 민주화운동 이후에 (1983년 광주 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아) 생명을 걸고 23일간 단식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분의 성격으로 볼 때 도저히 끝낼 것 같지 않은데, 이거 어떻게 큰 사고가 나지 않나, 이런 안타까움이 있었다”며 광주민주화운동에 얽힌 YS의 인연을 소개했다.YS는 취임 100일인 6월 3일 기자회견 통해 “5·16은 분명히 쿠데타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역사를 후퇴시킨 하나의 큰 시작이었다고 생각한다”며 5·16이 군사쿠데타라고 쐐기를 박았다. 그해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새 문민정부는 임시정부의 빛나는 정통성을 이어받고 있다. 민족의 역사는 바로 서야 한다”며 임시정부의 법통을 승계한 정권임을 분명히 했다. 이후 YS는 단순히 말로만 그치지 않고 조선총독부 철거, 경복궁 복원, 하나회 숙청, 청와대 안가 철거 등 역사 바로세우기를 단행했다.YS의 역사 바로세우기에는 당시 김무성 민정수석(새누리당 대표)과 서청원 정무장관(새누리당 최고위원), 이인제 노동장관(새누리당 최고위원) 등이 최측근 참모로서 적극 앞장섰다. 현재 이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총대를 메고 있다. 김 대표는 최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아이들에게 긍정 사관을 심어주자는 좋은 뜻”이라면서 “개혁을 추진하면서 여론에 일희일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국민들도 좌편향 역사교과서를 바꿔야 한다는 면에서는 절대다수가 찬성하고 있다”고 주장했다.서 최고위원도 같은 회의에서, “역사교과서를 바꾸는 건 당연한 것”이라면서 “아직 집필도 안했는데, 친일 독재 미화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면 야당은 국정 교과서가 친일과 독재를 미화할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YS의 정치적 분신인 차남 김현철 한양대 특임교수도 국정화에 맹공을 퍼부었다. 김 교수는 지난 7월 18일 트위터를 통해 “독재자 이승만 박정희를 미화시키기 위해 기를 쓰는 현정권과 관제언론들, 보수의 탈을 쓴 수구세력들의 과거 독재시절의 각종 악행들, 살인고문과 살인진압 그리고 야당탄압 노동탄압 그 잔혹사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데 일본의 역사왜곡과 거의 난형난제”라고 질타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화 강행을 천명한 10월 8일에는 “친일과 독재를 일방적으로 미화하는 국정화시도뿐 아니라 우리 국민의 절반을 졸지에 공산주의자로 만드는 수구세력들이 판치는 현 정권이야말로 얼마나 반민주적이고 수구독재적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비난했다. 김 교수의 비판은 YS가 재임 기간중 단행한 역사 바로세우기를 현 정부가 전면적으로 퇴행시키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정치적 아들을 자처한 김 대표와 정치적 대부로 (YS를) 모셨다는 서 최고위원은 김 교수와 함께 상주 역할을 하고 있다. 아이러니한 모습이다. 전병헌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김영삼 대통령은 당시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는 등 역사 바로 세우기에 누구보다 앞장섰다. 그런데 지금 박근혜 정부와 여당은 국정교과서로 오히려 역사를 왜곡하고 역사 굴절시키기에 나서고 있다. 역사왜곡에 가장 앞장서고 있는 현재의 여당 대표가 과연 김영삼 대통령의 정치적 아들이라고 자처할 수 있는지 한번 돌아볼 일이라 생각한다”고 꼬집었다.▶ 관련기사 ◀☞ 외환위기는 한국경제 구조적 문제..YS정부 재평가 움직임☞ YS 빈소 7분 머문 朴대통령..재계 총수들 조문 행렬(종합)☞ [포토]YS 빈소 찾은 안상수 창원시장
2015.11.23 I 선상원 기자
  • [김영삼 서거]'YS의 유산' 지방선거 전면 실시 20년
  • [이데일리 김진우 기자] “지금 많은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오늘날 본격적인 지방자치를 김영삼(YS) 대통령이 시작했다. 민주주의의 기초를 닦는 일까지 했다”. 상도동계 핵심인 김덕룡 전 의원이 23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김 전 대통령이 남긴 유산 가운데 하나가 지방자치제도 전면 실시다. 1987년 직선제 개헌이 절차적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기틀을 놨다면, 문민정부 출범 후 1995년 6월 전면 실시된 제5회 지방선거는 풀뿌리 민주주의가 정착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1949년 제정된 지방자치법에 따라 1952년 처음 실시된 지방선거는 1960년 제3회 지방선거 이후 박정희·전두환 군부정권을 거치며 30년 이상 자취를 감췄다. 이 기간 중앙정부가 지방정부의 장을 임명하는 ‘관선 지방통치’가 이뤄졌고 지방선거는 정당정치에 휩쓸려 기초단체가 더욱 혼탁진다는 이유 등으로 도입에 어려움을 겪었다.노태우 전 대통령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쟁취한 대통령 선거에서 공약으로 지방자치를 제시하고 1991년 지방의회 의원을 뽑는 제4회 지방선거를 실시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1992년 자치단체장을 뽑기로 한 지방선거를 1995년 상반기까지 연기했다. 30년 만에 재도입된 지방자치제도가 다시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김영삼 전 대통령은 취임 3년째인 1995월 6월 약속대로 지방의회 의원과 자치단체장을 뽑는 제5회 지방선거를 전면 실시하며 이 땅에 지방자치가 뿌리내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지방선거 투표소를 찾아 “중단된 지방자치를 34년 만에 내 손으로 부활시킨 데 대해 뿌듯하고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당시 김 전 대통령의 집권여당인 민주자유당은 지방선거 결과 참패했다. 15명의 광역단체장 가운데 민자당은 부산 등 5명을 배출하는 데 그쳤고,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물밑 지원한 민주당과 김종필(JP) 총재의 자민련은 각각 4명을 당선시켰다.제5회 지방선거에서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과 김종필 총재는 내각제 개헌에 공감대를 이루며 1997년 대선에서 ‘DJP 연대’를 이루는 전기를 마련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지방선거 전면 실시 결단이 역설적으로 헌정 이래 첫 평화적 정권교체의 기반을 마련해 준 셈이다.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한 전국 자치단체장들은 민주화와 지방자치에 기여한 그의 공적에 감사하며 깊은 애도를 표했다.남경필 경기지사는 “광역 시·도지사와 시장, 군수 등을 직접 주민이 선출하도록 하는 지방자치제를 확대시키는 등 경기도 발전에도 큰 기여를 했다”며 “김 전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우리 사회의 개혁과 통일한국을 만드는데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 [김영삼 서거]서울광장 추모 행렬 “민주화 대통령 영면하소서”☞ [김영삼 서거]양승태 대법원장 "김영삼 대통령 그리워"☞ [김영삼 서거]시민들 "금융실명제 업적" Vs "서민경제 뒷전"☞ [포토]故 김영삼 전 대통령 빈소찾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김영삼 서거]동교동계 조문…박지원 "민주주의 투명화위해 큰 역할한 분"
2015.11.23 I 김진우 기자
  • YS 빈소 7분 머문 朴대통령..재계 총수들 조문 행렬(종합)
  • [이데일리 이준기 김자영 기자] 주요 20개국(G20)·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관련 정상회의 일정을 마치고 23일 새벽 귀국한 박근혜 대통령이 김영삼 전 대통령(YS) 빈소를 찾아 직접 조문했다.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단 하루 만의 조문이었으나, 빈소에 머무른 시간은 단 7분에 불과했다. 1998년 박 대통령의 정계 입문 이후 이어진 두 전·현직 대통령 간 순탄치 않았던 관계가 투영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朴대통령, 차남 현철씨·손여사에 위로의 말 전해박 대통령은 이날 오후 2시께 YS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도착해 빈소에서 분향하고 영정 앞에 헌화한 뒤 잠시 묵념을 했다. 이어 YS의 차남인 현철씨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했고, 가족실로 이동해 YS의 부인인 손명순 여사의 손을 잡고 애도의 뜻과 추모의 말을 건넸다. 조문 때 박 대통령은 굳은 표정으로 일관했으며, 방명록도 작성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장례집행위원장인 정종섭 행정자치부 장관의 안내를 받으며 오후 2시7분께 빈소를 떠났다. 박 대통령의 이날 조문은 지난 2013년 5월 남덕우 전 국무총리와 지난 2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부인이자 사촌언니인 박영옥씨 조문 때와 대비됐다. 당시 박 대통령은 유족들과 10여분간 대화를 나누거나, 고인을 높이 평가하는 발언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때문에 두 전·현직 대통령의 평탄치 않았던 인연이 다시금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YS의 평생 정적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악연이 대(代)를 이은 탓이다.YS는 1999년 김대중 전 대통령(DJ)이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추진할 때 “박정희는 독재자”라며 강력한 비판을 쏟아냈다. 이에 박 대통령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업적 면이나 도덕성 면에서나 박 전 대통령이 1등을 차지한 반면 김영삼 전 대통령은 꼴찌로 나타나지 않았느냐”라고 맞받았다. YS는 2007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대선후보 경선 때 당시 이명박 후보 지지를 선언, 박 전 대통령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2012년 7월 새누리당 대선후보 경선에 출사표를 던진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가 YS에게 “토끼(김문수)가 사자(박근혜)를 잡는 격”이라고 하자, YS는 “(박 대통령은) 사자가 아니다. 아주 칠푼이”라고 원색적 비난도 서슴지 않았다.두 전·현직 대통령의 관계는 2012년 대선 직전 YS가 김무성 당시 새누리당 총괄선대본부장을 통해 박 대통령 지지 의사를 밝히면서 화해 무드로 발전했으나 완전한 관계복원은 이루지 못했다. 박 대통령이 취임 이후 전직 대통령들을 단 한 번도 청와대로 초청하지 않은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박 대통령은 26일 열리는 영결식에도 참석할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정부는 22일 임시 국무회의를 열어 김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가장으로 치르며, 26일 서울 국회의사당에서 영결식을 열기로 했다. 장지는 국립서울현충원으로 결정했다.◇이재용·구본무·박용만..재계 총수도 조문행렬 동참장례 이틀째인 이날 재계 총수들도 대거 조문행렬에 동참했다. 오전에는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구본준 LG전자 부회장 및 그룹 사장단을 이끌고 YS의 빈소를 찾았다. 구본무 회장은 “고인은 문민 정치시대를 열어 우리나라 정치와 사회 전반의 발전에 큰 획을 그으신 분”이라고 회고했다. 구본준 부회장도 “김 전 대통령과 특별한 인연은 없고 고향이 가까워 애착이 가는 분”이라며 “중학교 동문이고 내가 국민학생(초등학생)일 때부터 국회의원을 지내셨다”고 했다. 구 회장과 구 부회장의 고향은 각각 경남 진주와 부산으로, YS의 고향인 경남 거제와 맞닿아 있다.오후 2시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최지성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장(부회장)과 이인용 삼성전자 사장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이 부회장은 따로 고인에 대한 언급 없이 방명록에 자신의 이름만 적었다.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겸하고 있는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은 오후 3시께 빈소를 찾아 “고인은 금융실명제 등 굵은 결정을 많이 하셔서 우리 경제에 도움이 많이 됐다”고 고인의 업적을 기렸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도 비슷한 시각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현 회장은 외삼촌인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독대하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2015.11.23 I 이준기 기자
  • 朴, 순방 귀국 후 YS 조문..孫여사·현철씨 위로(종합)
  • [이데일리 이준기 기자] 주요 20개국(G20)·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관련 정상회의 일정을 마치고 23일 새벽 귀국한 박근혜 대통령이 김영삼 전 대통령을 빈소를 찾아 직접 조문했다.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단 하루 만이다. 박 대통령은 이날 오후 2시께 김 전 대통령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도착해 조문하고, 유족들을 만나 위로했다고 청와대가 전했다. 박 대통령은 먼저 빈소에서 분향하고 영정 앞에 헌화한 뒤 잠시 묵념을 했다. 이어 김 전 대통령의 차남인 현철씨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했고, 가족실로 이동해 김 전 대통령의 부인인 손명순 여사의 손을 잡고 애도의 뜻과 추모의 말을 건넸다. 조문 때 박 대통령은 굳은 표정으로 일관했으며, 방명록은 작성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장례집행위원장인 정종섭 행정자치부 장관의 안내를 받으며 오후 2시7분께 빈소를 떠났다. 이날 조문에는 이병기 대통령 비서실장을 비롯해 현기환 정무수석, 정연국 대변인 등이 수행했다. 박 대통령은 26일 열리는 영결식에도 참석할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정부는 22일 임시 국무회의를 열어 김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가장으로 치르며, 26일 서울 국회의사당에서 영결식을 열기로 결정했다. 장지는 국립서울현충원으로 결정했다.박 대통령은 지난 21일 밤(현지시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동아시아 정상회의(EAS) 갈라 만찬 행사를 마친 뒤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처음 보고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박 대통령은 이튿날인 22일 오전 10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김 전 대통령의 빈소에 조화를 보내 애도의 뜻을 전했다. 박 대통령은 같은 날 현지에서 “정부는 관련법과 유족들 뜻 살펴 예우를 갖춰 장례를 준비할 것”이라며 “유가족에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리며 거듭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애도 메시지도 전했다. 박 대통령이 취임 이후 직접 조문을 한 건 2013년 5월 고 남덕우 전 총리 빈소 방문, 올해 2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부인이자 자신의 사촌언니인 고 박영옥 여사 빈소 방문, 지난 3월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 국장 참석 등이다. 지난해 4월에는 경기도 안산에 마련된 ‘세월호 사고 희생자 정부 합동분향소’를 찾아 조문했다.
2015.11.23 I 이준기 기자
  • 朴, 순방 귀국후 김영삼 전 대통령 빈소 찾아 조문(상보)
  • [이데일리 이준기 기자] 주요 20개국(G20)·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관련 정상회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23일 새벽 귀국한 박근혜 대통령이 김영삼 전 대통령을 빈소를 찾아 직접 조문했다.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하루 만이다. 박 대통령은 이날 오후 2시께 김 전 대통령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도착해 조문하고, 유족들을 만나 위로했다고 청와대가 전했다. 박 대통령은 약 5분간 빈소에 머물렀다.앞서 박 대통령은 지난 21일 밤(현지시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동아시아 정상회의(EAS) 갈라 만찬 행사를 마친 뒤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처음 보고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박 대통령은 이튿날인 22일 오전 10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김 전 대통령의 빈소에 조화를 보내 애도의 뜻을 전했다.박 대통령은 또 같은 날 현지에서 “정부는 관련법과 유족들 뜻 살펴 예우를 갖춰 장례를 준비할 것”이라며 “유가족에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리며 거듭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애도 메시지를 전했다고 정연국 청와대 대변인이 밝혔다. 박 대통령이 취임 이후 직접 조문을 한 건 2013년 5월 고 남덕우 전 총리 빈소 방문, 올해 2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부인이자 자신의 사촌언니인 고 박영옥 여사 빈소 방문, 지난 3월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 국장 참석 등이다. 지난해 4월에는 경기도 안산에 마련된 ‘세월호 사고 희생자 정부 합동분향소’를 찾아 조문했다.
2015.11.23 I 이준기 기자
  • [김영삼 서거]YS 빈소 새벽부터 조문 행렬
  • [이데일리 최훈길 기자] 김영삼 전 대통령 빈소에는 새벽부터 정치인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22일 김 전 대통령 유족 측에 따르면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 마련된 빈소에는 오후 6시 현재까지 2600명가량의 문상객이 방문해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특히 오후 들면서 조문객이 빠르게 늘고 있어, 첫날에만 수천명이 방문할 것으로 보인다. 현직 정치인이나 과거에 함께 정치했던 정계 인사들이 주로 빈소를 찾았다. 황교안 국무총리는 “그동안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해 오신 김영삼 전 대통령께 합당한 예우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하겠다”며 “국가장으로 정부가 최선을 다해 모시고자 한다”고 말했다. 황 총리와 최경환 경제부총리, 황우여 사회부총리, 정종섭 행정자치부 장관 등은 김 전 대통령의 영정에 조화를 바치며 추모했다.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 안철수 의원 등 야당 정치인도 빈소를 찾았다. 문 대표와 안 의원은 “온 국민과 함께 애도합니다. 이 땅에 민주화의 역사를 만든 큰 별이셨습니다”, “고인께서 일생 헌신하신 민주화에 대한 신념과 헌신은 국민들 가슴속에 오랫동안 기억될 것입니다”라고 방명록에 각각 글을 남겼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휠체어를 타고 방문해 “다른 사람은 못하는 일을 한 신념의 분”이라고 심경을 밝혔다. 이어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신념으로 민주화를 이룬 분”이라며 “어떤 어려움에도 신념을 끝끝내 관철하신 분”이라고 덧붙였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어려운 시절을 견디면서 민주화의 큰길을 개척했던 큰 지도자라 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품고 있었다”며 “김 전 대통령은 야당과 민주화 운동에 큰 지도자였다. 정말 우리 사회의 큰 별이 지셨다”고 애도했다. 서울시는 23일 정오부터 서울광장에 김 전 대통령 분향소를 설치해 일반인 조문이 이뤄지도록 할 계획이다. 김 전 대통령과 각별한 정치 인연을 맺은 인사들도 잇따라 빈소를 방문했다. ‘YS의 오른팔’로 불렸던 최형우 전 의원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빈소를 찾아 영정 사진 앞에서 오열했다.민주산악회 홍보위원장 출신인 정진일(73)씨는 “군사정권을 뿌리 뽑고 민주주의를 뿌리내린 민주화의 영웅”이라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정책을 사나이답게 밀고 나간 대통령”이라고 회고했다.대통령과 인연이 없는 일반 시민들도 안타까움을 표하며 빈소를 찾았다. 아들과 함께 빈소를 찾은 박장휘(61·대구)씨는 “서울에 다른 볼 일이 있어서 왔다가 20~30대 시절 정치인 김영삼에 대한 추억이 생각나 오게 됐다”며 “유신 시절 국회의원직 제명을 당하면서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산행을 갔다가 비보를 듣고 등산복 차림으로 빈소를 찾은 최병일(57)씨는 “대통령 때보다는 유신 시절 민주화 투쟁을 하던 기억이 나서 빈소를 찾았다”면서도 “금융실명제, 하나회 척결은 YS만이 할 수 있었던 업적”이라고 평가했다.▶ 관련기사 ◀☞ [김영삼 서거]중국 언론 "개혁 일으킨 대통령"☞ [김영삼 서거]방송사, 뉴스 특보 체제·일부 예능 결방☞ [김영삼 서거] 서울시, 서울광장에 내일(23일) 분향소 설치☞ [김영삼 서거]"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지킨 마지막 인물 사라져"☞ [김영삼 서거]YS가 남긴 어록은
2015.11.22 I 최훈길 기자
  • [기자수첩]YS ‘화합과 통합’ 유지 받들어야
  • [이데일리 선상원 기자] 고 김영삼 전 대통령(YS)의 차남인 김현철 한양대 특임교수가 22일 조문객을 맞는 자리에서 김 전 대통령의 근황을 전했다. 김 교수는 “지난 2013년부터 1년 6개월 정도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말씀을 잘하지 못하셨다. 필담으로 글씨를 좀 쓰셨다. 거기서 평소에 안 쓰시던 통합하고 화합을 딱 쓰시더라고요. (글쓴 것을) 지적하시면서 우리가 필요한 거라고.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라고 밝혔다. 한국 현대사의 거목이 영면하면서 우리 사회에 남긴 말이다. 통합과 화합. 정치의 기본 목적이다. 김 전 대통령이 통합과 화합을 거론한 것은 우리 정치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사회와 나라를 분열시키고 갈등을 부추기고 있는 것을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 장례식장에는 여야 정치인들이 아침부터 찾았다. 상주인 김수한 전 국회의장과 서청원 새누리당 최고위원,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를 제외하고는 정치인으로는 김종필 자민련 전 총재, 정동영 전 의원이 맨 처음 찾았다. 뒤를 이어 문재인 새정치연합 대표와 이종걸 원내대표, 원유철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찾아 조문했다. 한국 정치계의 거목이 가는 길에 여야 정치인이 따로 없었다. 5일 동안 국가장으로 치러지기 때문에, 국회도 당분간 국민적 애도 분위기를 고려해 정쟁은 자제할 것으로 보인다.주말까지만 하더라도 여야는 지난 14일 서울 도심에서 열린 민중총궐기 대회를 둘러싸고 폭력시위니, 과잉진압이니 맞서며 여당은 복면금지법을 만들겠다고 했고 야당은 경찰의 차벽설치를 제한하는 법을 발의하겠다고 대립했다. 노동개혁 5법을 놓고도 서로 비난하기에 바빴다. 정치는 국민들의 아픔을 보살피고 어루만지는 것이 기본이다. 농민 백남기씨가 쌀값 폭락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여했다 사경을 헤매고 있다. 현재 80㎏ 한가마 기준 쌀값이 15만1000원 정도다. 전년 동기 대비 1만5000원 가량 떨어졌다. 김 전 대통령의 당부처럼 정치가 통합과 화합을 꾀하고자 한다면 정부여당은 강한 공권력을 확립하겠다고 하기에 앞서 백씨와 그 가족에게 이유가 어찌됐든 위로와 유감을 전해야 한다. 야당도 시위방식이 과격했다는 여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갤럽이 지난 17~19일 전국 성인남녀 850여명에게 휴대전화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과격했다’는 응답이 무려 67%에 달했다. 가장 손 쉬운 정치는 보수·진보 등 자기 지지자들을 대상으로 한 정치다. 김 전 대통령의 당부처럼 여야가 제발 갈등과 분열의 정치를 그만두고 통합과 화합의 정치를 했으면 한다. 여야 후배 정치인들에게 YS가 남긴 유지다.
2015.11.22 I 선상원 기자
필생의 라이벌 '양 김' 역사속으로 영면하다
  • [김영삼 서거]필생의 라이벌 '양 김' 역사속으로 영면하다
  • [이데일리 선상원 기자] 김영삼 전 대통령(YS)과 김대중 전 대통령(DJ), 두 정치 거목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지난 2009년 DJ에 이어 2015년 11월 22일 새벽 YS 마저 영면에 들었다. 영남과 호남을 대표하며 반세기 넘게 한국 현대 정치사를 이끌어왔던 ‘양김(兩金) 시대’가 완전히 저물게 된 것이다.‘양김’으로 일컬어져온 두 전직 대통령은 민주화 투쟁에서는 손을 맞잡은 ‘동지’였지만 대통령 권력 앞에선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영원한 ‘맞수’이자 ‘경쟁자’였다. YS가 스스로 생전에 DJ와의 사이를 “가장 오랜 경쟁관계이고 협력관계”라며 세계에서 유례없는 특수한 관계로 표현했던 것처럼, 필생의 라이벌이었다.◇출발점 달랐지만, 40대 기수론 제창 후 지도자로 성장 = 정계 최대 맞수였지만 출발점은 확연히 달랐다. DJ는 전남 신안의 외딴섬 하의도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고교를 졸업한 뒤 사업을 하다 정계에 뛰어든 자수성가형 정치인이었다. 1954년 선거에서 낙선한 뒤 1961년 4·19혁명으로 5월에 치러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지만 5ㆍ16군사 쿠데타로 당선 3일 만에 의원직을 상실하고 1963년 6대 총선에서야 비로소 정치권에 입문했다. 정계에 발을 들여놓는 것부터 순탄치 않았다. [사진공동취재단] 상도동계 1세대로 불리는 최형우 전 내무장관이 22일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찾아 헌화하고 있다.반면 경남 거제에서 지역 유지의 아들로 태어나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YS는 1951년 당시 장택상 총리의 비서로 정치권과 인연을 맺은 뒤 1954년 제3대 민의원 선거에서 27세의 나이로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 기록을 세우며 화려하게 정계에 입문했다.출신 지역과 정치적 배경이 달랐던 만큼 두 사람은 야당과 여당으로 정치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YS가 이승만 대통령의 집권연장을 위한 4사5입 개헌에 반대해 자유당을 탈당하면서 DJ와 한 배를 탄다. 야당인 신한민주당에서 YS와 DJ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정치 보폭을 넓혀갔다. 1968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 때 YS과 DJ가 처음으로 맞붙었다. YS 승리였다. 이후 YS는 원내총무를 5차례 맡으며 야권의 차세대 주자로 성장했다.YS가 국민들에게 확실히 각인된 것은 1970년 9월 제창한 ‘40대 기수론’부터다. 당시 신민당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대선에서 두 번이나 패한 후 깊은 무기력에 빠져있었다. 이 때 40대의 YS가 “빈사상태에 빠진 민주주의를 되살리기 위해 대통령후보 경선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DJ도 1971년 대통령 후보 경선에 참여했다. 결과는 DJ 승리였다. 1차 후보 경선 투표에서 앞선 YS가 2차 결선투표에서 역전패당한 것이다. 결국 DJ가 대선에 나갔으나 박정희 대통령에게 100만표 차이로 패했다. DJ가 1973년 8월 일본 도쿄에서 납치사건을 겪고 유신체제 하에서 정치활동이 금지되면서 YS가 유신 독재에 맞서 싸웠다. ◇DJ 정치활동 금지로, YS가 유신독재에 온 몸으로 맞서 = 개헌운동을 추진하던 YS는 1974년 유진산 총재가 타계하자 47세에 최연소로 제1야당 총재에 올랐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하며 전국적인 개헌운동을 이끌었다. 1979년에는 신민당사 YH여공 농성 사건을 계기로 박정희 정권과 정면대결하게 됐고, 헌정사상 최초로 의원직 제명까지 당했다. 부마사태에 이은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정권은 종언을 고하고 1980년 서울의 봄이 찾아왔다. YS와 DJ, 박 정권 아래서 정치활동이 자유롭지 못했던 김종필(JP) 자민련 전 총재까지 함께한 본격적인 3김 시대가 열렸다. 그것도 잠시 전두환 신군부의 12·12 쿠데타로 정치활동이 다시 금지됐다. DJ는 신군부세력에 의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82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후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DJ가 1985년 귀국할 때까지 국내에서 신군부와 맞선 사람은 YS이었다.1983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아 목숨을 건 23일간의 단식투쟁을 벌였다. 군부 강압통치에 숨죽여있던 민주화 운동의 기폭제가 됐고 1985년 신민당 창당과 2·12 총선 돌풍, 1987년 6·10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져 대통령 직선제를 이뤄냈다.YS와 DJ 모두 대선에 도전했다. 그러나 후보단일화에 실패해 여당 후보이던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악화됐다. 훗날 DJ는 자서전에서 “나라도 양보를 했어야 했다”, “너무도 후회스럽다”고 자책했다. YS도 DJ 서거 후 한 언론 인터뷰에서 “천추의 한이 됐지. 국민한테도 미안하고…”라고 회고했다. ◇YS DJ 연달아 대통령직 올라… JP, 내각제 개헌 고리로 손 잡아 = 1990년을 기점으로 YS는 3당 합당을 통한 여당의 길로, DJ는 야당의 길을 걷는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로 들어간다”던 YS는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DJ를 누르고 14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숙명의 라이벌인 DJ를 이긴 것이다. 그 후 DJ는 1997년에 YS가 초래한 IMF 외환위기를 기회로 삼아 역사상 처음으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뤄냈다.YS와 DJ 모두 대통령직에 올랐지만, 두 사람은 1990년 이후 2009년 DJ가 눈을 감을 때까지 대립하고 반목했다. DJ는 3당 합당 이후 어제의 동지였던 YS를 공격했고, YS도 퇴임 후 DJ의 노벨상 수상까지 깎아내리며 DJ를 비난했다. YS는 보수세력, DJ는 진보세력의 목소리를 대변하면서 두 사람의 불편한 관계는 DJ가 서거하던 2009년까지 이어졌다. YS가 그 해 8월 DJ를 전격 찾아가 문병한 뒤 “이제 화해한 것으로 봐도 좋다. 그럴 때가 됐다”고 밝히면서 극적 화해가 이뤄졌다. 이제 3김 중 남은 사람은 JP 뿐이다. JP는 YS가 운명을 달리하자 상주로 조문객을 맞고 있는 김수한 전 국회의장, 서청원 새누리당 최고위원,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를 제외하고는 맨 처음으로 빈소를 찾았다. JP는 YS와 3당 합당을 함께 했고 DJ와는 1997년 DJP연대로 정권교체에 동참했다. 공통분모는 내각제 개헌이었다. 3당 합당의 명분도 내각제 개헌이었고 DJ와 손을 잡은 것도 내각제 개헌 추진이었다. JP가 그토록 열망한 내각제 개헌은 다 무위로 그쳤다. 이날 빈소를 찾은 JP는 “내가 해준 것 아무것도 없지만 국회에서 제명할 때 난 반대했거든. 다 찬성을 했는데, 근데 박정희 대통령이 그걸 아셨는데, 나한테 아무 말도 뭐라고 안했어. (YS가) 하신 말씀 많이 있는데, 그중에 잊혀지지 것은,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유형 무형으로 방해하는 어떤 행위도 내 신념 꺾지 못하고 역사는 민주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신뢰의 분이야.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신뢰를 끝끝내 관철하신 분이야”라고 회고했다. 상주인 김 전 의장이 “오래 사셔야 된다”고 하자, JP는 “그게 마음대로 됩니까. 이 나이되면 오래 사는 것도 사회의 짐이요. 적당한 때 불러 주시길 바래”라고 답했다. ▶ 관련기사 ◀☞ [김영삼 서거]"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지킨 마지막 인물 사라져"☞ [김영삼 서거]경총 "금융실명제 도입 등 경제선진화 기틀 마련"☞ [김영삼 서거]무역협회 "경제강국 도약 초석 놓으신 분"☞ [김영삼 서거]염수정 추기경 "민주화 위해 평생 헌신했다"
2015.11.22 I 선상원 기자
승부사 YS, 평생을 거침없이 살았다
  • [김영삼 서거]승부사 YS, 평생을 거침없이 살았다
  • [이데일리 선상원 기자] 평생을 거침없이 살았던 거산(巨山)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서거했다. 향년 88세.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고 김대중 전 대통령,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 함께 40년 동난 한국 정치사를 쥐락펴락한 ‘3김 시대’의 주인공이다. 그 주인공 중 한 거목이 또 쓰러졌다. 김 전 대통령(YS)은 27세이던 지난 1954년 3대 총선에서 처음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9선 의원을 지냈다. 최연소 최다선 기록은 우리 의정사에서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YS는 결단의 정치인이다. 결단과 소신, 용기를 빼놓고는 YS를 설명할 수 없다. ◇헌정사 최초 의원직 제명, “영원히 사는 길 택할 것”중학생 시절 책상머리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는 글을 써 붙여놓고 대통령의 꿈을 키운 YS는 장택상 국회부의장 비서로 정치권에 입문한 뒤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 때 고향인 거제에서 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금배지를 달았다. 여당 의원 시절도 잠시, 이승만 대통령이 집권 연장을 위해 ‘사사오입’ 개헌을 강행하자 결연히 반대표를 던지고 자유당을 탈당했다. 이후 1991년 3당 합당 때까지 30여년을 야당 정치인으로, 민주화 투사로 살았다.야당을 회생시킨 1970년 ‘40대 기수론’도 YS가 먼저 치고 나갔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대선에서 두 번이나 패했던 신민당은 3선 개헌안마저 압도적으로 통과되자 무기력에 빠져 있었다. 이때 YS는 “빈사상태에 빠진 민주주의를 되살리기 위해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서겠다”며 40대 기수론을 제창했다. 뒤이어 김대중 전 대통령(DJ)과 이철승 전 헌정회 회장이 경선 참여를 선언해 야당의 세대교체를 이뤄냈다.“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며 1972년 10월 유신 이후 개헌운동을 추진하던 YS는 1974년 제1야당인 신민당 총재에 오른 뒤 1979년 5월 다시 총재에 복귀했다. 박정희 정권과 정면 대결이 시작됐고 결국 뉴욕타임스 인터뷰와 신민당사 YH여공 농성 사건이 빌미가 되어 헌정사상 최초의 의원직 제명으로까지 이어졌다. 당시 YS는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지 않고, 잠시 죽는 것 같지만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할 것”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줄기찬 반 유신투쟁에 박정희 정권은 10·26 사태로 종언을 고했다. 서울의 봄은 너무 짧았다. 1979년 12·12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소장 중심의 신군부는 1980년 5·17조치로 강압 통치를 이어갔다. YS는 기나 긴 자택 연금조치를 당했다. YS는 1983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아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벌인다. 식음을 전폐하고 무려 23일 동안이나 전개했다. 군부독재에 균열을 낸 YS는 이후 DJ와 함께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 결성, 1985년 신민당 창당과 2·12 총선 돌풍, 1986~1987년 직선제 개헌 운동 및 6·10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 6월 항쟁 결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뤄졌다. 그러나 1987년 대선에서 ‘양김’의 분열로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됐다. ◇“호랑이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3당 합당 결단1990년 1월 3당 합당은 승부사라는 YS 별명을 다시 한번 확인해준 사건이다. YS는 ‘구국의 결단’을 명분으로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등 3당을 합쳐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 평생 투쟁의 대상이었던 군부정치 세력과 손을 맞잡은 것으로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며 합당을 결행했다. YS는 여당의 2인자로 변신해 2년 만인 92년 5월 민자당 후보로 선출돼 같은 해 대권까지 거머줬다. 1993년 2월 대통령에 취임한 YS는 문민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면서 중단 없는 변화와 개혁을 천명했다. 1961년 5·16군사정변 후 31년 만에 대한민국에 문민시대를 연 것이다.취임하자마자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했다. 당시 하룻밤 사이에 떨어진 별이 50개로 당시 파장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케 한다. 1993년 8월에는 ‘긴급 재정경제 명령 제16호’로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하고 고위공직자의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 1급 이상 공직자의 재산을 공개하도록 했다. 또 ‘역사 바로세우기’ 일환으로 전두환 노태우 등 전직 대통령을 12·12 쿠데타와 부정부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단죄했다. 국민학교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꾸고, 쇠말뚝뽑기·구조선총독부 철거와 같은 일제 강점기 잔재 청산 작업도 이뤄졌다.◇노무현 이명박 이회창 손학규 등 정계 발탁 YS의 결단으로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기본 틀이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덕분에 집권 초에 90%에 달하는 지지율을 누리기도 했다. 그러다 정권 말 1997년 1월 한보 사태가 터지고 차남 김현철씨가 이에 연루돼 뇌물수수 및 권력남용 혐의로 구속되자 하락세를 걷게 된다. 급기야 1997년 12월 6·25 전쟁 이후 최대 국난이라는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사태를 맞았다.상주로 조문객을 맞고 있는 김수한 전 국회의장은 “오랜 군사통치의 종지부 찍는다는 건, 하나회 청산이라는 건 용기 없이는 불가능하다. 금융실명제도 여러 평가 있지만 역량 없으면 안된다”고 YS의 공적을 평가했다. 빈소를 찾은 문희상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도 “역대 정부 중에 제일 효율적으로 단시간 내에 많이 했다고 생각한다. 대통령 되시고 나서 얼마나 개혁적인 일을 했는지는 역사가 나중에 증명할 거”라고 화답했다. 결단의 정치인답게 YS는 용인술에도 능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 모두 YS가 발탁했다. 부산의 대표적인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던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4월 13대 총선 때 당시 통일민주당을 이끌던 YS에게 영입돼 부산 동구에서 금배지를 달았다. 이 전 대통령은 1992년 3월 치러진 14대 총선에 민자당 전국구(비례대표) 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이인제 새누리당 최고위원,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홍준표 경남지사, 정의화 국회의장도 YS 사람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민중당을 결성해 활동하던 김문수 전 경기지사와 이재오 의원을 각각 영입해 의원으로 만든 것도 YS다. 상주로 조문객을 맞고 있는 김 전 의장, 서청원 최고위원,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등 상도동계는 YS와 생사고락을 함께한 영원한 동지들이다.▶ 관련기사 ◀☞ [김영삼 서거]불세출의 '정치9단' YS가 남긴 공과 과☞ [김영삼 서거]전두환 "좋은 곳으로 가셨을 것"☞ [김영삼 서거]행자부 "유족 뜻 전적으로 존중..'기독교 장례' 반영"(일문일답)☞ [김영삼 서거]국가장 확정..26일 발인, 장지 현충원(종합)
2015.11.22 I 선상원 기자
 김영삼 前 대통령이 남긴 어록은...
  • [카드뉴스] 김영삼 前 대통령이 남긴 어록은...
  • [이데일리 e뉴스 김민화 기자] 고(故)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선 굵은 정치만큼이나 ‘촌철살인’과도 같은 어록들로도 유명하다.“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1979년 박정희 정권이 YH무역 여공들의 신민당 점거 농성을 폭력진압하자 이에 항거하는 과정에서 국회의원직을 제명당한 후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고 발표한 성명서는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이들에게 시공간을 뛰어넘어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의 제명은 부마(釜馬)항쟁을 촉발시키고 유신을 끝내는 전환점을 만들어냈다.“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 1990년 김 전 대통령은 30여년의 야당생활을 접고 노태우 대통령의 민주정의당(민정당),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신민주공화당(공화당)과 함께 자신의 통일민주당(민주당)을 합당하는 ‘3당합당’을 결행했다. 당시 이 때문에 야권으로부터 ‘변절자’란 비판을 받고 ‘대통령병 환자’ 취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구국의 결단’이란 심정으로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창당해 1992년 14대 대선에서 승리, 1993년 ‘문민정부’를 탄생시키는 초석을 놨다.대도무문(大道無門) 김 전 대통령이 즐겨 쓰며 좌우명으로 삼았던 말이다. 그는 1979년 신민당 총재 재선 직후 “대도무문, 정직하게 나가면 문은 열립니다. 권모술수나 속임수가 잠시 통할지는 몰라도 결국은 정직이 이깁니다”고 말하며 민주주의를 향한 끊임없는 열망과 원칙을 표현했다. 김 전 대통령이 친필로 ‘대도무문’을 쓰는 장면이 언론에 자주 연출되기도 했다.“민주화의 길은 산행과 같다”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축적되던 1987년 1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산행 도중에 많은 낙오자도 있었다. 민주화도 이와 같다. 민주화의 길은 그만큼 고행의 길”이라고 당시 상황을 표현했다. 그는 “지금 우리는 민주화 산행에 있어서 최종 고지의 2백m 전방에 와 있는 셈”라며 머지않아 민주화가 달성될 것으로 예측했고, 그해 6월항쟁으로 국민적 열망은 표출됐다.“우리가 먼저 고통을 기꺼이 감당해야 한다” 1993년 김 전 대통령은 취임 후 첫 국무회의에서 “우리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 우리가 먼저 깨끗해져야 한다”며 자신과 가족들의 재산을 공개하면서 공직자 재산공개를 추진했다. “추석 때 떡값은 물론 찻값이라도 받지 않겠다”고 한 선언은 공직자 비리 척결과 금융실명제 실시 등 취임 초기 정치개혁으로 이어졌다.“김대중 대통령은 네로와 같은 폭군이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민주화를 이끈 ‘양대 거목’으로 정치적 동지이자 평생에 걸친 라이벌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2000년 3월 남북교류를 추진하던 김대중 대통령에게 “네로와 같은 폭군”이라고 비난했고, 김 대통령이 그해 10월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자 “노벨상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관련이슈추적 ◀☞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 관련포토갤러리 ◀☞ 김영삼 前 대통령 서거 사진 더보기
2015.11.22 I 김민화 기자
  • [김영삼 서거]YS가 남긴 어록은
  • [이데일리 김진우 기자] 고(故)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선 굵은 정치만큼이나 ‘촌철살인’과도 같은 어록들로도 유명하다.1979년 박정희 정권이 YH무역 여공들의 신민당 점거 농성을 폭력진압하자 이에 항거하는 과정에서 국회의원직을 제명당한 후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고 발표한 성명서는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이들에게 시공간을 뛰어넘어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의 제명은 부마(釜馬)항쟁을 촉발시키고 유신을 끝내는 전환점을 만들어냈다.“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 1990년 김 전 대통령은 30여년의 야당생활을 접고 노태우 대통령의 민주정의당(민정당),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신민주공화당(공화당)과 함께 자신의 통일민주당(민주당)을 합당하는 ‘3당합당’을 결행했다. 당시 이 때문에 야권으로부터 ‘변절자’란 비판을 받고 ‘대통령병 환자’ 취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구국의 결단’이란 심정으로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창당해 1992년 14대 대선에서 승리, 1993년 ‘문민정부’를 탄생시키는 초석을 놨다.대도무문(大道無門). 김 전 대통령이 즐겨 쓰며 좌우명으로 삼았던 말이다. 그는 1979년 신민당 총재 재선 직후 “대도무문, 정직하게 나가면 문은 열립니다. 권모술수나 속임수가 잠시 통할지는 몰라도 결국은 정직이 이깁니다”고 말하며 민주주의를 향한 끊임없는 열망과 원칙을 표현했다. 김 전 대통령이 친필로 ‘대도무문’을 쓰는 장면이 언론에 자주 연출되기도 했다.“민주화의 길은 산행과 같다”.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축적되던 1987년 1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산행 도중에 많은 낙오자도 있었다. 민주화도 이와 같다. 민주화의 길은 그만큼 고행의 길”이라고 당시 상황을 표현했다. 그는 “지금 우리는 민주화 산행에 있어서 최종 고지의 2백m 전방에 와 있는 셈”라며 머지않아 민주화가 달성될 것으로 예측했고, 그해 6월항쟁으로 국민적 열망은 표출됐다.“우리가 먼저 고통을 기꺼이 감당해야 한다”. 1993년 김 전 대통령은 취임 후 첫 국무회의에서 “우리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 우리가 먼저 깨끗해져야 한다”며 자신과 가족들의 재산을 공개하면서 공직자 재산공개를 추진했다. “추석 때 떡값은 물론 찻값이라도 받지 않겠다”고 한 선언은 공직자 비리 척결과 금융실명제 실시 등 취임 초기 정치개혁으로 이어졌다.“김대중 대통령은 네로와 같은 폭군이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민주화를 이끈 ‘양대 거목’으로 정치적 동지이자 평생에 걸친 라이벌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2000년 3월 남북교류를 추진하던 김대중 대통령에게 “네로와 같은 폭군”이라고 비난했고, 김 대통령이 그해 10월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자 “노벨상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관련기사 ◀☞ [김영삼 서거]반기문 “민주화 선봉에선 유일한 분”☞ [김영삼 서거]정의화 "대한민국 새로운 반석위에 올린 정치 선구자"☞ [김영삼 서거]IMF 외환위기에 빛바랜 YS노믹스☞ [김영삼 서거]권양숙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인생에도 영향"☞ [김영삼 서거]원유철 "민주화 이뤄낸 YS, 국민들에 영원히 기억될 것"
2015.11.22 I 김진우 기자
굴곡진 현대사 '민주화의 큰 산' 지다(종합)
  • [김영삼 서거]굴곡진 현대사 '민주화의 큰 산' 지다(종합)
  • [이데일리 김정남 기자] 굴곡진 우리 현대사를 온몸으로 받아낸 민주화 운동의 ‘큰 산’이 스러졌다. 대한민국 14대 대통령을 지낸 거산(巨山) 김영삼 전 대통령(YS)이 22일 0시22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서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19일 고열로 입원했다가 상태가 악화됐고, 21일 오후 중환자실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서거했다고 오병희 서울대병원장은 전했다.서울대병원 측이 밝힌 공식 사인은 ‘패혈증’과 ‘급성 심부전’이다. 향년 88세.김 전 대통령의 삶은 말그대로 한 편의 드라마였다. 이 현대사의 거인은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로 민주화투쟁의 최전선에 섰고, 군사정권을 종식시키고 최초로 문민시대를 열어 젖혔으며, 임기 말에는 초유의 국가부도 사태를 부르기도 한,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다. 그 과정에서 최연소(27세) 국회의원, 9선 국회의원, 3번의 야당 총수, 문민정부 대통령 등을 역임했다.특히 임기 초 전광석화처럼 하나회를 척결하고 금융실명제를 도입한 것은 우리나라 전반의 시스템을 한 단계 올려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치9단’ 김 전 대통령이었기에 가능했던 개혁이라는 시각도 많다.김 전 대통령의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가 ‘필생의 라이벌’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DJ)이다. 둘은 “세계에서 유례없는 특수관계”로 불렸을 정도로 뗴려야 뗄 수 없었다. 민주화 투쟁 때는 한마음으로 손을 맞잡은 ‘동지’였지만 권력을 앞에 두고는 한치도 물러서지 않은 ‘맞수’였다.이로써 우리 현대사를 이끌어온 ‘3김’ 중 김종필 전 국무총리(JP)만 남게 됐다. 사실상 우리 현대사의 커다란 한 페이지가 넘어가게 된 것이다.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진 김 전 대통령의 빈소는 이날 하루종일 조문객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김수한 전 국회의장(김영삼 대통령 기념사업회장),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서청원 새누리당 최고위원 등 상도동계 인사들은 차남인 현철씨(고려대 교수)와 함께 상주를 자처했다.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관련 정상회의 참석차 말레이시아를 방문 중인 박근혜 대통령도 서거 소식을 접하고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밝혔다. 월스트리트저널, AP통신 등 주요 외신들도 긴급기사로 “30여년에 걸친 군정(軍政)을 종식한 첫 대통령” “한국의 민주화를 이끌었던 인물” 등으로 일제히 보도했다.정부는 김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가장(國家葬) 형식으로 치르기로 했다. 장지는 현충원, 발인은 26일이다. 국가장 절차에 따라 정부는 빈소를 설치·운영하며 운구, 영결식, 안장식을 주관한다.
2015.11.22 I 김정남 기자
  • [김영삼 서거]박희태 "뜨거운 포용력 있던 '정치 대인'"
  • [이데일리 김진우 강신우 기자] 박희태 전 국회의장은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 “한없이 따뜻한 ‘정치 대인’이었다”며 “뜨거운 포용력이 김 전 대통령의 장기가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박 전 의장은 이날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김 전 대통령 빈소에서 조문을 마친 후 “제가 3당 합당 이후에 대변인을 했는데 당내 여러 계파에서 YS(김 전 대통령)에 반대하는 사람도 한 번 만나서 손을 꼭 잡으며 ‘한 번 꼭 도와주십쇼’ 하면 전부 YS 사람이 되는 걸 봤다”며 이같이 말했다.박 전 의장은 유족들에게 “특별히 제가 드릴 말씀이 없었고 큰 일 하고 가셨으니까 크게 마음 가지시라고(했다)…”라고 전했다.새누리당 소속인 박 전 의장은 18대 국회 하반기인 2010년 6월부터 2012년 5월까지 국회의장을 지냈다.▶ 관련이슈추적 ◀☞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 관련기사 ◀☞ [김영삼 서거]이명박 “민주주의 지킨 마지막 인물 사라져”☞ [김영삼 서거]朴대통령 "깊은 애도..예우 갖춰 장례준비할 것"☞ [김영삼 서거]오늘 12시15분 장례 관련 정부 브리핑☞ [김영삼 서거]정동영 "민주화 선봉 지도자..타계 안타깝다"☞ [포토]김영삼 전 대통령 조문 온 김종필
2015.11.22 I 김진우 기자
  • [김영삼 서거]정동영 "민주화 선봉 지도자..타계 안타깝다"
  • [이데일리 김진우 한정선 기자] 정동영 전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은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 “민주화 시대 민주화의 선봉에 섰던 우리나라 지도자로서 타계하신 데 대해서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정 전 고문은 이날 야당 정치지도자 가운데 처음으로 김 전 대통령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조문을 마치고 기자들과 만나 이같이 말하고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했다.정 전 고문은 “(김 전 대통령 아들인)김현철 (전 여의도연구원) 소장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했다”며 “김 소장이 고맙다는 말씀을 했다”고 전했다.정 전 고문은 2007년 17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이 합당한 대통합민주신당의 대통령후보를 지냈다.정 전 고문은 지난 4·29 재보선에서 서울 관악을 무소속 후보로 출마해 낙선했다. 이후 중국에서 머물다 최근에는 전북 순창에 칩거 중이다.▶ 관련이슈추적 ◀☞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 관련기사 ◀☞ [포토]김영삼 전 대통령 조문 온 김종필☞ 김영삼 전 대통령 국가장 확실시☞ [김영삼 서거]YS, 기업인 사면복권.. 재계총수들과 각별한 인연☞ [김영삼 서거]행자부 "국가장 안건, 오늘 국무회의서 처리"☞ [김영삼 서거]김무성 “각하 모시던 제자들이 모두 상주”
2015.11.22 I 김진우 기자
  • [김영삼 서거]김무성 “각하 모시던 제자들이 모두 상주”
  • [이데일리 강신우 기자]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22일 새벽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한데 대해 “각하를 모시던 제자들이 모두 상주”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이날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 마련된 빈소를 찾아 ‘오일장 내내 상주 자리를 지키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그는 이어 “상주 역할에 충실하겠다”며 “우리가 장지를 결정하는 게 급하다”고 했다. 김 대표는 이날 오전 8시37분께 국화 한 송이를 헌화한 후 향을 피우려 불을 붙였고, 이내 손을 떨며 향을 놓쳤다. 김 대표는 이후 김영삼기념사업회 이사장인 김수한 전 국회의장 등이 있는 내빈실로 가 오열했다. 상주 자리에는 김 대표를 포함해 김 전 대통령의 차남인 김현철 한양대 특임교수, 김 전 국회의장, 서청원 새누리당 최고위원 순으로 섰다. 그는 이른바 ‘3김시대’의 마지막 남은 주역인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빈소를 방문하자 김 전 총리의 손을 잡으며 “고맙다”고도 했다. ▶ 관련기사 ◀☞ [김영삼 서거]이명박 “민주화 이끈 지도자..빈자리 크다”(상보)☞ [김영삼 서거]정보통신부 출범…작은 정부 속 ‘정보화’ 의지☞ [김영삼 서거]이명박 “그의 빈자리가 매우 크게 느껴져”☞ [김영삼 서거]전경련 "선진국 사회 노력 생전업적 기려"☞ [김영삼 서거]이희호 "YS, 대한민국 변화시킨 대통령"
2015.11.22 I 강신우 기자
  • [김영삼 서거]이명박 “그의 빈자리가 매우 크게 느껴져”
  • [이데일리 강신우 기자] 이명박 전 대통령은 22일 새벽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한 데 대해 “그의 빈자리가 매우 크게 느껴진다”고 애도했다. 이 전 대통령은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새벽에 김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며 이같이 밝혔다. 이 전 대통령은 “그는 민주화를 이끈 지도자로서 군정을 종식하고 문민정부를 세웠다. 취임 후에는 여러 개혁적 조치를 통해 민주주의를 한층 심화시키고 국가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했다. 이어 “퇴임 후에도 나라를 걱정하는 애국심으로 정부와 국민에게 믿음을 주는 원로였다”며 “개인적으로 어려움에 부딪힐 때마다 용기를 주신 분이기도 하다”고 했다. 그는 “민주화를 주도한 역사적 인물로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라며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깊이 애도하며 손명순 여사를 비롯한 유족에게 위로를 드린다”고 덧붙였다. ▶ 관련기사 ◀☞ [김영삼 서거]전경련 "선진국 사회 노력 생전업적 기려"☞ [김영삼 서거]이희호 "YS, 대한민국 변화시킨 대통령"☞ [김영삼 서거]YS노믹스 5년간 성장률 평균 7.4%☞ [김영삼 서거]금융실명제에서 IMF까지..공과 교차했던 YS노믹스☞ [김영삼 서거]김종필 "YS, 신념의 지도자..영원히 기억될 것"
2015.11.22 I 강신우 기자
  • [김영삼 서거]금융실명제에서 IMF까지..공과 교차했던 YS노믹스
  • [세종=이데일리 피용익 기자] 22일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취임 이후 사회 전반에 걸쳐 강한 개혁 드라이브를 걸었다. 경제 분야에서는 금융실명제가 대표적인 개혁 성과로 꼽힌다.김 전 대통령은 1993년 8월12일 오후 7시45분 “이 시각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뤄집니다”라는 선언으로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했다. 자본편중 및 정경유착 등의 고리를 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김 전 대통령은 또 ‘신경제 100일’ 계획과 규제개혁안을 발표하고 정부조직 개편, 금융개혁 등을 단행하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의 경제정책은 ‘군사작전 같다’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전격적이었고 획기적이었다.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도 업적 가운데 하나다. 김 전 대통령은 OECD 가입을 위해 금리자유화 정책을 중점적으로 추진했다. 한국은 1996년 9월 OECD에 가입하면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기 위한 기반을 닦았다는 평가를 받는다.한국의 국민소득이 1만달러를 처음 돌파한 것도 이 때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전 대통령의 경제 정책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은 집권 말기에 닥친 위기 때문이다.집권 말기인 1997년 한보철강을 시작으로 진로, 기아자동차 등이 잇달아 부도 위기를 맞으면서 김영삼정부는 11월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관련기사 ◀☞ [김영삼 서거]김종필 "YS, 신념의 지도자..영원히 기억될 것"☞ [김영삼 서거]서청원 “대한민국 큰 별 지다”☞ [김영삼 서거]이른아침부터 조문객 발길 이어져☞ [김영삼 서거]행자부 "국가장 방침, 유족과 협의 예정"☞ [김영삼 서거]빈소 도착한 軍 의장대☞ [김영삼 서거]국가장으로 치러질듯..26일 발인☞ [김영삼 서거] 美中日 주요 외신,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긴급타전
2015.11.22 I 피용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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