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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석 만남보다 광주 온 이유에 집중"...전두환 손자, '주먹밥' 소회
- [이데일리 박지혜 기자] 전직 대통령 전두환 씨를 대신해 사죄한 그의 손자 전우원 씨가 지난 17일 제43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 전야제 행사 중 이준석 국민의힘 전 대표를 만난 상황에 대해 언급했다.우원 씨는 이날 오후 유튜브 라이브 방송에서 “제가 이름도 많이 들어보고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정치인분들도 어쩌다 보니까 만나게 돼서 인사드렸다”고 말했다.그는 “‘이때까지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죽기 전엔 만날 수 없는 TV 속 인물들이 현실 세계에서 나타나네’라는 일차원적인, 신기한 마음이 컸다”면서도 “‘분명히 정치인분들이랑 같이 있으면 사진이 많이 찍히고 여기에 대해서 기사가 써질 수도 있는데 정작 저는 그분들을 TV에서 많이 뵀다는 거 외에, 저 스스로 가볍게 조사를 해본 거 외에는 아는 게 하나도 없는 분들이어서 함부로 말을 걸고 그분들이랑 주도적으로 사진 찍는 게 두렵더라”라고 했다.전두환 전 대통령의 손자인 전우원 씨와 국민의힘 이준석 전 대표가 17일 오후 광주 동구 금남로에서 열린 ‘오월 주먹밥’ 나눔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1980년 5월 광주 공동체를 재현한 시민난장에서 우연히 만났다 (사진=연합뉴스)우원 씨는 또 “주먹밥을 만드는 과정에서 TV 속에서만 보던 분을 뵀는데 ‘와 이런 일이 저에게도’라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카메라 수십 대가 제 앞에 있으니까 기쁨과 놀라움도 잠시, 바로 걱정과 두려움으로 바뀌었다”며 “여기서 이분을 만난 거에 집중하기보다는 제가 왜 이 장소에 와 있는지, 제가 5월 17일에 광주에 오게 된 이유가 뭐고 제가 전야제에 있는 이유가 뭔지, 여기서 제가 어떻게 하면 조금 더 민주화 운동을 더 많은 분에게 알리고 그분들의 희생을 조금이라도 많은 분에게 전파할지 집중했다”고 밝혔다.우원 씨는 전 씨 일가 가운데 처음으로 5·18 추모식에 참석했다.그는 이날 전야제 행사 중 광주 동구 금남로에서 펼쳐진 시민난장을 찾았는데, 이곳에서 이 전 대표와 함께 주먹밥을 빚게 됐다.5·18 당시 광주 시민과 상인들이 계엄군에 맞서는 시민을 위해 주먹밥을 만들던 현장을 오월 어머니집 회원들과 함께 재현한 것이다.우연히 만난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주황색 앞치마를 두르고 비닐장갑을 손에 끼운 채 직접 빚은 주먹밥을 시민에게 나눠줬다.이 전 대표는 우원 씨와 주먹밥을 빚은 뒤 “정말 우연히 만났는데 진정성 있는 행보가 광주 시민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보수 정당의 정치인들도 뭔가 해야 할 일이 많다고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이어 “깊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저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고 아마 광주 시민을 포함해서 많은 대한민국 국민이 저분의 행보에 주목하고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퇴임 후 처음으로 광주를 찾아 추모식에 참석한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도 ‘우원 씨와 만날 용의가 있는가’라는 질문이 나왔다. 문 전 대통령은 “특별히 계획을 갖고 있진 않지만 계기가 된다면 못 만날 이유는 없다”고 답했다.전직 대통령 고 전두환씨의 손자 전우원씨가 17일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5·18 민중항쟁 제43주년 추모식에 참석해 헌화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한편, 우원 씨는 18일 할아버지 전 씨가 역사적으로 ‘학살자’라고 평가되어야 한다고 밝혔다.그는 이날 KBS 라디오 ‘최경영의 최강시사’에서 이같이 말하며 “위선자인 것도 같다. 왜냐하면 정말 국민을 위하고 국가를 위했으면 국가를 이루는 국민의 희생이 있을 때 그분들의 목숨과 삶을 할아버지 본인의 목숨과 삶의 소중함만큼 생각하고 그분들의 희생을 기리는 행보가 이어져야 하는데 그런 건 하나도 없었다”고 비판했다.이어 “어떻게든 그때 있었던 그분들의 희생을 폄훼하고 왜곡함으로써 할아버지 본인의 과오가 조금이라도 세상에 드러나지 않도록 하셨고 그런 걸 보면 우리나라 전직 대통령 중 하나로만 기억되는 게 아니라 한 개인의 욕심이 먼저이고 국민을 생각하지 않았을 때 얼마나 잔인한 비극이 일어날 수 있는지 되새기고 기억할 수 있는 사례”라고 덧붙였다.
- 초등생들 “아저씨 잘못 아냐 전두환 잘못”…전우원이 눈물 흘린 까닭
- [이데일리 강소영 기자] 고(故) 전두환 씨의 손자인 전우원 씨가 취득세 1억원을 내면서 눈물을 흘린 가운데, 길거리에서 만난 초등학생들에게 위로를 얻는 장면이 공개됐다.지난 7일 MBC ‘PD 수첩’ 공식 유튜브 채널에는 ‘전두환 손자, 전우원을 위로해주는 아이들’이라는 제목의 영상이 올라왔다. (사진=유튜브 캡처)해당 영상은 전두환 씨의 아들 전재용 씨가 운영하는 ‘비엘에셋’ 회사가 오산땅을 취득한 뒤 회사 주식 지분이 있는 전우원 씨에게도 취득세 납부 의무가 주어진 것과 관련, 전우원 씨가 총 취득세 1억 원 중 납부한 금액을 제외한 약 5000만원의 세금을 납부하는 장면이 그려졌다.취득세를 모두 납부한 전 씨는 “어제랑 오늘 해서 다 했다. 이 돈이 우리 가족이 정당하게 벌어서 저한테 준 돈이 아니지 않냐”며 눈물을 보였다.이어 “법을 어겼고 거기에 대한 처벌로 벌금이 나온 것이다. 죄가 있는데 내가 번 돈이 아깝다고 안 내면…”이라며 말끝을 흐리다 “비자금이 흘러간 것이 자녀들한테 있으면 그것도 범죄로 얻은 돈이니까 환수해야 하는 것처럼”이라고 언급했다.그런데 전 씨의 근처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초등학생 2명은 “아저씨가 잘못한 것이 아니니까 괜찮다”라고 전 씨를 향해 말을 건넸다.현재 6학년인 이들은 전 씨가 누군지 아느냐는 ‘PD수첩’ 제작진의 질문에 “전두환 손자분”이라고 대답했다. 이어 “전두환이 잘못한 거지 아저씨가 잘못한 게 아니다”라며 “기부해서 죄를 덜면 된다”고 전 씨를 위로했다.그러자 전 씨는 “맞다. 너희들은 어린데도 형보다도 옳은 생각을 한다”며 “형은 이런 생각은 항상 했지만, 실천하는 데 27년이 걸렸다”고 말했고, 아이들은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잘못을 뉘우치는 거니 죄책감은 갖지 말라. 아저씨가 잘못한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을 밝혔다.아울러 전 씨를 알아보게 된 이유에 대해 “(학교에서) 5·18 조사하고 와서 알게 됐다. 오늘 5·18에 대해서 공부했다. 4·19도 했고, 6월 민주화 항쟁도 (공부)했다”면서 “역사를 잊으면 안 된다”고 했다.전 씨는 아이들의 말에 웃음을 짓고는 “정말 기특하다. 형이 창피해서 어딜 봐야 할지 모르겠다”며 “형이 옳은 일을 하자마자 천사들이 와서 괜찮다고 해주니까 희망이 보인다”고 밝은 표정을 지었다.전 씨는 지난 3월부터 인스타그램 등 SNS를 통해 가족 내부 사정을 폭로해왔다. 전우원 씨가 지난 달 31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묘지 내 있는 김경철 열사 묘비를 닦고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아버지 전재용 씨와 이혼한 친모 사이의 위자료에 대해 비자금이었을 가능성에 대해 언급했으며, “어머님 말씀으로는 연희동 자택에 숨겨진 금고가 있고. 엄청난 양의 것들이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전 재산이 25만원밖에 없다고 했는데 어렸을 때부터 초호화 호텔을 며칠씩 빌리며 풀코스로 몇 십 명이 먹는 가족 여행을 가기도 했다” 등의 폭로를 이어갔다.또 계모 박상아 씨에 대해서는 “평소에 차갑게 대하다가 사람들 앞에서만 친한 척 연기를 했다”고 폭로하며 “내쫓으려 했다”고도 언급했다.전 씨가 폭로를 하게 된 배경에는 어렸을 적 가족들에게서 배운 개념과 커가면서 부딪히는 실정이 달랐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또 아버지(전재용 씨)의 바람 등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졌다.그는 앞서 KBS와의 인터뷰에서 “학살한 자들이 반성해야 되는데, 할아버지는 민주주의의 영웅이라 가르치고 광주민주화운동은 폭동 빨갱이들이 일으킨 반란이라고 가르치셨다”며 “하나하나 퍼즐이 맞춰지면서 그들이 떳떳하게 살지 않고 있다는 걸 배우고,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건지 제가 살면서 배우면서, 비자금이 도대체 얼마나 있어야 이렇게 살 수 있는 건지, 배우게 됐다”고 말했다.더탐사와의 인터뷰에서는 “그들의 피로 번 돈”이라며 “모든 사람들의 삶이 공평하고 소중한 것인데, 그들은 자신들의 삶은 소중한 줄 알면서 남들의 무고한 희생에 대해서 죄의식을 하루도 받지 않는 악마들”이라고 분개했다.최근 전 씨는 광주를 찾아 5·18 유가족을 만나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는 등 사죄의 말을 전했다.한편 전 씨는 이같은 폭로와 함께 마약에 대한 위험성에 대해서도 경고하고 나섰다. 전 씨는 지난 달 28일 마약 투약 혐의로 서울경찰청 마약범죄수사대에 불구속 송치된 상태다.그는 “마약 과다복용으로 죽을 뻔했을 때 정말 온몸이 부어오르고 칼이 온몸을 찌르는 것같이 아팠다. 숨도 안 쉬어지고 뇌신경이 완전 망가져가지고 고통이 멈추지 않고 증폭돼서 기절을 했다”며 “아무리 힘들어도 그 길로는 절대 가면 안된다”고 경고했다.
- 한 발의 총성으로 中 현대미술 시작됐으나…[정하윤의 아트차이나]<27>
- 작가 샤오루가 자신의 설치작품 ‘대화’를 향해 총을 쏘는 장면. 1989년 2월 5일 중국 베이징 중국미술관에서 개막한 ‘중국현대미술전’에서 샤오루는 자신의 작품을 향해 총을 쐈고, 오픈 3시간 만에 벌어진 이 ‘퍼포먼스’로 인해 전시는 바로 중단됐다.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들의 노력 끝에 다시 전시를 이어갈 순 있었지만 샤오루와 조력자는 경찰에 체포되고 만다.중국 그림을 보지 못한 지 한참입니다. 한국 미술시장이 자못 뜨거웠던 지난해와 올해, 세계의 작가와 작품이 우리를 기웃거리던 때도 중국은 없었습니다. 중국 ‘큰손’ 컬렉터의 규모와 수가 미국을 제쳤다는 얘기도 이미 2~3년 전입니다. ‘으레 미술은, 그림은 그런 것’이라며 반쯤 우려하고 반쯤 체념했던 한국화단을 뒤흔든, 기발한 감수성으로 뒤통수를 내리쳤던 중국 작가들이 하나둘 사라졌습니다. 예술을 예술이 아닌 잣대로 들여다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술에 기대하는 희망 역시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정치에도 경제에도 답이 없다 생각할 때 결정적인 열쇠를 예술이 꺼내놨습니다. 오랜시간 미술사를 연구하며 특히 중국미술이 가진 그 힘을 지켜봤던 정하윤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지점 그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때마침 ‘한중 수교 30주년’입니다. 다들 움츠리고 있을 때 먼저 돌아보는 시간이고 먼저 찾아가는 길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깊고 푸른 ‘아트차이나’로 안내합니다. <편집자 주> [정하윤 미술평론가] 탕! 1989년 2월 5일. 베이징 한복판에 위치한 중국미술관에서 총성이 울렸다. 사람들은 부랴부랴 대피했고, 전시는 급히 중단됐다. 테러인가?! 대체 누가 살벌한 중국의 수도, 그것도 엄중한 미술관에서 총을 쏜단 말인가! 황당하게도 총을 쏜 사람은 샤오루(肖魯·61)라는 미술가였고, 총을 쏘는 행위는 그녀의 ‘작품’이었다. ‘중국현대미술전’에 출품한 자신의 작품 ‘대화’ 앞에서 총을 쏘는 것이 작가의 ‘퍼포먼스 아트’였던 거다. ‘중국현대미술전’의 수난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말미에는 전시장에 폭탄이 있다는 편지가 도착하는 바람에 당국에 의해 전시가 중단되기도 했다. 결국 고작 2주라는 기간도 다 채우지 못하고 끝나버린 이 전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현대미술사에 가장 중요한 전시로 꼽힌다. ‘중국현대미술전’이라는 매우 평범한 이름을 갖고 있지만, 중국에서 현대미술을 견인한 모든 미술가가 참여했던 전시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크고 야심찼기 때문이다. 전국의 젊은 작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의 가장 야망에 찬 작품을 출품했고, 절대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지며 ‘노 유턴’(No U-turn)이란 슬로건을 내걸었다. 이 엄청난 전시를 기획한 사람들은 미술사에 길이 남을 두 큐레이터, 가오밍루(高名潞·74)와 리셴팅(栗憲庭·74)이었다. 당시 마흔 살이던 가오밍루는 1985년부터 1987년까지 중국의 29개 지역을 돌며 80개가 넘는 비공식적 예술가그룹을 조사했고, 2000명이 넘는 젊은 미술가 리스트를 만들었다. 가오밍루의 네트워크를 구성한 이들은 모두 예술을 창작하는 자유를 믿으며, 급진적인 형식을 보인 예술가들이었다. ◇‘폭탄 설치 편지’ 퍼포먼스 겹치며 결국 전시 중단이들은 회의를 거듭하며 전시를 준비하던 중 중국에서 아방가르드 미술이 합법적으로 인정을 받으려면 국가기관에서 전시를 열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렇다면 어디가 좋을까. 어디가 가장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가. 답은 두 말 할 것 없이 베이징의 중국미술관이었다. 중국미술관은 1959년에 마오쩌둥 주도로 지어진 10대 건물 중 하나로 그간 국가 주도의 전시를 열며, 국가의 입맛에 맞는 작품을 수집해오던 명실공히 중국 최고의 미술관이었다. 이곳에서 전시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관의 공식적 인정을 받는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규모 또한 대단했다. 3만㎡라면, 중국의 혁신적인 현대미술을 알차게 소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준비를 진행해 가면서 가오밍루와 공동 큐레이터로 의기투합한 리셴팅은 공공기관과 개인사업가들로부터 국립미술관 임대료를 넉넉히 후원받는 데 성공했다. 전시를 위해 186명의 미술가들이 293점의 작품을 설치했다. 모두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아직까지도 쉬빙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천서’도 이 전시에 나섰고, 장샤오강 초기 작품 중 정점을 찍었다고 평가하는 대작도 이 전시에 출품됐다. 이외에도 황용핑, 겅젠이, 왕광이, 리샨, 위요한, 딩이, 구원다 등등 중국 현대미술사를 수놓는 수많은 작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름 한 번 들어봤다고 생각되는 작가는 대부분 참여했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중국 베이징 중국미술관에서 열린 ‘중국현대미술전’ 오프닝 전경. 1989년 2월 5일 개막한 전시는 전국에서 모여든 186명의 젊은 미술가들이 293점의 작품을 설치하고,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지며 ‘노 유턴’이란 슬로건을 내걸었지만, 2주의 기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끝나버렸다. 그럼에도 현대미술을 향한 야심찬 열기를 집대성할 수 있었던, 중국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시로 꼽힌다.다양한 작품이 출품된 만큼, 또 전시 자체가 전위를 표방한 만큼, ‘골때리는’ 작품도 많았다. 샤먼다다 그룹은 미술관을 옮겨보겠다며 밧줄로 미술관을 칭칭 감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고, 자신이 닭이 돼 알을 품고 부화시켜보겠다는 퍼포먼스를 펼친 작가도 있었고, ‘새우를 판다’는 행위예술을 벌이며 온 전시장을 수산물시장처럼 만들어버린 미술가도 있었다. 콘돔을 이용해 거대한 설치작품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 모두는 1989년 중국에서는 아방가르드의 최전선에 있는 작품이었다. 일반 대중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을지 몰라도 외국 갤러리 관계자들은 이 전시가 역사적인 전시가 되리란 것을 직감하며 전시작들을 공개된 가격 그대로 지불하며 구매에 열을 올렸다. 이렇게 큐레이터와 미술가들이 온 열정을 불태웠던 ‘중국현대미술전’. 그 전시 오픈 3시간 만에 샤오루가 총을 쏜 것이다. 아마도 진정한 중국의 현대미술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으리라. 하지만 미술관에는 관람객이 들어차 있었고, 사전에 어떤 공지도 없었기 때문에 경찰에 의해 전시는 즉각 닫힐 수밖에 없었다. 외신이 예술에 대한 탄압이라며 신나게 보도하는 동안 큐레이터들은 열과 성을 다해 재개관 협상을 했고, 천만다행으로 전시는 다시 개막할 수 있었다. 샤오루와 조력자는 체포됐는데, 사용했던 총을 반납하고 여러 관료가 힘쓴 결과 풀려날 수 있었다. 황당하게도 그 뒤에 한 번 더 전시를 중지시킨 ‘폭탄 편지’ 또한 어떤 작가의 퍼포먼스였다고 전한다. 비록 애써 준비한 전시가 중단되는 것은 큐레이터와 다른 작가들에겐 분명 화나는 일이었겠지만, 총과 폭탄 해프닝 덕분에 ‘중국현대미술전’이 더욱 더 큰 파장을 일으키고 주목을 받은 것 또한 사실이다. ◇톈안먼사태 이후 작가들 창작 의욕 잃고 칩거 이어져아이러니하게도 자유로운 미술을 집대성한 ‘중국현대미술전’이 막을 내린 직후부터 중국 사회는 ‘자유’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내달렸다. 또 한 번의 총과 폭탄 때문이었다. 전시 폐막 두 달 뒤인 1989년 4월, 당비서 후야오방(1915∼1989)이 급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한 게 발단이었다. 덩샤오핑(1904∼1997)의 최측근이자 2인자였던 후야오방은 정치인 중 자유를 가장 많이 지지하는 쪽이었고, 때문에 중국 지식인들에게서 많은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권력 다툼 때문이었는지 그는 1986년 이미 정치적 힘을 잃은 터였다. 이후 1989년 무렵 다시 후야오방이 원래의 자리로 복귀할 거란 소문이 돌았고, 그(가 상징하는 자유)를 지지하던 중국인들은 당연히 그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후야오방이 돌연 사망하면서 사람들은 낙담 속에 그의 죽음을 대대적으로 추모하기 시작했다. 베이징 톈안먼광장은 화환과 꽃으로 뒤덮였고, 애도의 물결은 점차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집회로 변했다. 중앙미술학원 학생들은 스티로폼으로 ‘민주주의 여신상’을 만들어 톈안먼에 걸린 마오쩌둥 초상과 대치시켰다. 걸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함께 행진했다고 전해질 만큼 그 규모는 점점 커졌다. 1989년 5월 토시오 사카이가 촬영한 중국 베이징 톈안먼광장. 중앙미술학원 학생들이 스티로폼으로 만든 ‘민주주의 여신상’이 톈안먼에 걸린 마오쩌둥 초상을 마주보고 있다. 이후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집회는 점점 확산됐고 결국 6월 4일 ‘톈안먼사태’가 터졌다. 톈안먼광장은 총과 대포로 화염에 뒤덮였으며 ‘민주주의 여신상’은 탱크에 짓밟힌 채 처참히 부서졌다.당시 시민들의 항쟁을 보고받은 85세의 덩샤오핑은, 6월 3일 시민들을 진압할 것을 승인했고, 결국 6월 4일 새벽 요란한 총과 대포 소리가 울렸고 톈안먼광장은 화염으로 뒤덮였다. ‘민주주의 여신상’은 탱크에 짓밟힌 채 처참히 부서졌다. 역사가 ‘톈안먼사태’라 기록하는 사건이다. 그해 중국미술관에서 미술가들이 쏘아올린 자유를 향한 예술을 덩샤오핑의 군대는 총과 탱크로 진압했다. 불과 넉 달 사이 두 개의 전혀 다른 총소리가 베이징 하늘을 갈랐다. 톈안먼사태 이후 중국 사회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미술도 당연히 마찬가지였다. 작가들은 창작의 의욕을 잃고 칩거했다. 전시기획자였던 가오밍루는 미국으로 이주하였고, 리셴팅도 몸을 사리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1990년대 들면서 미술은 서서히 활력을 되찾았고, 작가와 큐레이터도 활동을 재기했지만, 톈안먼사태로 입은 내상은 이후 중국 미술을 무기력, 개인주의, 물질주의로 점철시켰다. 만약 ‘중국현대미술전’의 열기가 그대로 이어졌다면, 중국의 동시대미술은 훨씬 더 급진적인 형태를 가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역사에 ‘만약’은 아무 소용이 없는 법. 우리는 그저 중국 미술의 열기를 집대성한 전시로 1989년 ‘중국현대미술전’을 기억할 뿐이다. 1989년 베이징에 울렸던 전혀 다른 두 개의 총소리와 함께. △정하윤 미술평론가는…1983년 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고 싶었단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작가는 일찌감치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실 관심은 한국현대미술이었다. 하지만 그 깊이를 보려면 아시아란 큰물이 필요하겠다 싶었고, 그 꼭대기에 있는 중국을 파고들어야겠다 했던 거다. 귀국한 이후 미술사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
- "전쟁범죄에 면죄부", 중앙대서도 대일 외교 규탄 성명
- [이데일리 장영락 기자] 중앙대학교 교수 113명이 윤석열 정부 대일 외교를 규탄하고 책임을 묻는 성명을 발표했다. 4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학교 서울캠퍼스에서 열린 경희대 교수들의 강제동원 해법 관련 시국선언 기자회견에서 한 학생이 교수들의 시국선언문을 읽어보고 있다. 연합인권, 헌법 가치 수호를 위해 뜻을 모았다고 밝힌 중앙대 교수 113인은 13일 “강제동원 ‘제3자 변제’ 해법과 한일 정상회담 등 윤석열 정부가 보인 일련의 외교 행보가 일본의 식민지 전쟁범죄에 면죄부를 주는 최악의 외교 참사”라며 정부 대일 굴욕 외교를 규탄했다.이들은 “일본 정부가 역사적 진실을 직시하기는커녕 한반도 불법강점, 강제동원, 일본군성노예제, 민간인 학살 등을 부정하고 왜곡하며 적반하장으로 피해자들을 모욕했다”며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는 일본이 과거 군국주의 침략의 잔재를 청산하고, 평화와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진정성 있게 실천할 때 가능한 일”이라고 지적했다.이들은 “윤 대통령은 지난 3·1절 기념사에서 과거 일본의 식민 지배의 범죄성에 대해 외면하는 발언을 해 국민들을 경악케 했다. 3·1항쟁은 일본의 강권적 침략에 맞서 인도와 정의의 깃발 아래 대한의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초를 놓은 역사적 기념일에 일본에 면죄부를 주는 발언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며 윤 대통령 역사관에 대한 의문도 제기했다.또 “강제동원 해법은 일본의 군국주의 침략 자체를 망각의 늪에 던지려는 조치라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며 제3자 변제를 핵심으로 하는 강제동원 피해자 보상 해법의 심각한 결함도 지적했다. 이들은 “기시다 일본 총리가 강제동원을 비롯한 역사 문제에 대해 어떠한 사과나 유감 표시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일본 전범 기업에 구상권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것도 모자라 ‘2015 한일합의 이행’, ‘독도 문제’ 해결,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등 새로운 숙제만 잔뜩 짊어지고 돌아왔다”며 대일 외교 성과를 전반적으로 혹평하기도 했다.더불어 “일본의 전쟁범죄에 면죄부를 주고 피해자의 인권을 무시한 반인도적, 반헌법적 강제동원 해법을 즉각 폐기하고, 대일 굴욕 외교 당사자들에게 엄중한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밝혔다.“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윤석열 대통령을 더 이상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음을 선언하고, 동아시아의 항구적 평화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앞장설 것을 천명한다”며 윤 대통령의 결단도 촉구했다.대학 사회의 대일 외교 규탄은 논란의 한일 정상회담 후 주요대학들에서 이어지고 있다. 11일 부산대 교수와 연구자들이 윤석열 정부 굴욕외교 규탄 시국 성명을 냈고, 3월 24일에는 성균관대 재학생, 졸업생들이 시국 선언에 나섰다.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최근 ‘월요시국기도회’를 정기적으로 열어 윤 대통령 퇴진을 주장하고 있다.
- "언제든 밥 먹으러 오라"…무릎 꿇은 전두환 손자 품은 광주(종합)
- [광주=이데일리 김범준 기자]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이런 날도 오고….”, “망자의 영들이 오늘을 분명 기억할 겁니다.”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광주 시민들 대화 중)고(故) 전두환 전 대통령 손자 전우원씨가 31일 오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에 방문해 ‘5·18민중항쟁추모탑’ 앞 분향소에서 분향과 헌화를 하고 참배 묵념을 하고 있다.(사진=김범준 기자)31일 오전 9시45분. 고(故) 전두환 전 대통령 손자 전우원(27)씨는 회색 정장과 검정 코트 차림으로 약속된 시간보다 15분 일찍 광주 서구 5·18기념문화센터에 모습을 드러냈다. 입국 후 경찰 조사를 마친 뒤 ‘사과하고 싶다’며 첫 행선지로 곧장 광주를 찾은 전씨의 첫 공식 일정이었다.전씨가 등장하자 이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수십 명의 5·18민주화운동 희생자 유족 및 피해자들과 광주 시민들의 고개가 일제히 한 곳을 향했다. 지난 1980년 5월18일 이후 43년을 기다린 눈길이 그에게 쏟아졌다. 전씨 일가 그 누구도 공식적으로 5·18과 관련해 잘못을 인정한 적이 없어 이날이 첫 사죄 행보가 되는 날이었다.전씨는 이날 마중 나온 원순석 5·18기념재단 이사장과 세 공법단체 황일봉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회장, 정성국 5·18민주화운동공로자회 회장, 양재혁 5·18민주유공자유족회 회장과 잠시 비공개 면담을 나눈 후 만남의 장이 마련된 리셉션홀에 들어섰다. 그는 자리에 나온 유족 및 피해자들과 함께 일어나 잠시 묵념을 한 뒤 마이크를 건네받았다.고(故) 전두환 전 대통령 손자 전우원씨가 31일 광주 서구 5·18기념문화센터에서 5·18 피해자와 유족들과 만나 회견을 하며 사죄의 발언을 하고 있다.(사진=김범준 기자)전씨는 진지한 표정으로 마이크를 들고서 잠시 침묵하더니 “안녕하십니까, 전두환씨 손자 전우원입니다”는 말과 함께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러면서 “저같이 추악한 죄인에게 이렇게 소중한 기회를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 드린다”며 “이렇게 늦게 찾아뵙고, 더 일찍 사죄의 말씀을 드리지 못해서 진심으로 죄송하다”고 첫 심경을 밝혔다.그는 이어 “제 할아버지 전두환씨는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비극인 5·18 앞에 너무나 큰 죄를 지은 죄인이고 학살자”라면서 “가족을 대변해서 인정하고 정말 다시 한번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 군부 독재와 두려움 속에서 용기로 이겨낸 광주 시민 여러분께서 저를 따뜻한 마음으로 받아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울먹이며 고개를 숙였다. 5·18 당시 자녀를 잃은 오월어머니회 할머니들은 담담히 지켜보다가 이윽고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고(故) 전두환 전 대통령 손자 전우원씨가 31일 광주 서구 5·18기념문화센터에서 5·18 피해자와 유족들과 만나 사죄의 뜻을 밝히고 큰절을 올리고 있다.(사진=김범준 기자)이에 정성국 공로자회장은 “할아버지의 잘못을 대신 사죄하고 사과하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광주를 방문한 우리 전우원씨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며 “이번 방문을 통해 5·18 진상 규명과 국민 통합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환영의 말을 건넸다. 이날 발언대에 나온 유족과 피해자 대표들도 격려의 말들로 화답했다.전씨는 이어진 기자회견에서 이번 사과 계기에 대해 “교회 봉사활동을 통한 깨달음과 반성이 있었다”면서 “어머니는 제 선택을 지지하시고 자랑스럽다고 말씀하신다”고 밝혔다. 조부친인 전 전 대통령과는 생전에 5·18과 관련해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어 이날 자리에 앞서 따로 공부를 했다고도 했다.전씨는 회견을 마치고 5·18 피해자와 유족들 앞에서 거듭 사죄의 뜻을 밝히며 큰절을 올리기도 했다. 이후 기념관 뒤편에 5·18 희생자들의 성함이 새겨진 팻말이 한데 모인 추모관을 찾아 애도한 뒤, 곧장 광주 북구에 위치한 국립 5·18민주묘지를 찾았다.고(故) 전두환 전 대통령 손자 전우원씨가 31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에 방문해 작성한 방명록 글.(사진=김범준 기자)전씨는 이날 화창하고 따뜻한 날씨와 함께 100여명의 광주 시민들과 취재진의 맞이 속에서 5·18 추모곡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지는 묘지 입구 ‘민주의 문’을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그는 방명록에 “저라는 어둠을 빛으로 밝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민주주의의 진정한 아버지는 여기에 묻혀 계신 모든 분들이십니다”는 글을 남겼다.이어 전씨는 김범태 관리소장의 안내와 함께 5·18 첫 희생자 김경철 열사, 12세 나이로 계엄군 총에 맞아 숨진 전재수군 묘, 행방불명자들의 묘, 아직까지 신원 확인이 안 된 ‘무명 열사의 묘’들을 차례로 참배했다. 전씨는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참배한 묘비와 비석에 새겨진 희생자 사진들을 직접 하나하나 닦고 묵념하며 애도를 이어갔다. 이를 지켜본 한 시민은 “본인 외투로 하지 말고 이 수건으로 하라”며 건네자 전씨는 “괜찮다”며 정중히 사양하기도 했다.곳곳에 참배를 마치고 나온 전씨는 다시 민주의 문 앞으로 와서 “이렇게 와서 보니까 정말 죄송하고 창피한 마음뿐”이라며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앞으로도 좋은 모습 보여 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심경을 밝혔다. 이곳에 묻힌 5·18 당시 중학생이던 고(故) 문재학 군의 모친 김길자씨는 전씨의 손을 꼭 잡고서 “아직 젊으니까 건강도 잘 챙기시라”고 말하며 따뜻한 포옹을 나눴다.고(故) 전두환 전 대통령 손자 전우원씨가 31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고 전재수 열사의 묘비를 닦으며 참배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이어 전씨는 다시 시내로 가서 점심으로 한정식을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이날 오후 3시쯤 광주 동구 아시아문화전당(옛 전남도청사)을 찾았다. 5·18 당시 전남도청이었던 이곳은 광주 시민들과 계엄군이 마지막으로 대치한 최후 항쟁지다.전씨는 이곳에서 ‘도청지킴이’를 하고 있는 오월어머니회 소속 회원 12명과 만나 한 명씩 손을 잡고 사죄하며 면담을 나눴다. 할머니들은 전씨를 박수와 함께 “문은 항상 열려 있으니 배고프면 언제든지 밥 먹으러 오라”며 환영의 뜻을 전했다.전씨는 이날 마지막 공식 일정으로 옛 전남도청 앞 전일빌딩245를 찾았다. 이 건물은 5·18 당시 군 공수부대의 헬리콥터 사격을 받은 245개의 실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끝으로 전씨는 “광주에서 너무 언론에 노출되면 진정성이 퇴색돼 보일 수 있어 내일은 비공개 일정으로 소화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날 경찰의 출국 금지 조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예상한 부분이라 괜찮다”라며 “조만간 서울로 올라가 거처를 마련하고 (마약류 투약 혐의) 경찰 조사도 성실히 받을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하고 떠났다.고(故) 전두환 전 대통령 손자 전우원(가운데)씨가 31일 오후 5·18민주화운동 최후 항쟁지였던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사를 방문해 유가족 오월어머니회와 만남을 가진 후 5·18 관련 단체 관계자들과 손을 잡고 나서고 있다.(사진=김범준 기자)
- "정치할 생각없다"...광주서 눈물흘린 전우원, '친모' 언급도
- [이데일리 박지혜 기자] 광주를 찾은 전직 대통령 고(故) 전두환 씨의 손자 우원(27) 씨는 “욕하시는 분들 많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한 분도 없어서 오히려 죄송했다”고 말했다.우원 씨는 31일 오후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사죄와 참배를 마친 뒤 차량으로 이동하며 SNS 라이브 영상을 통해 이 같은 소회를 밝혔다.그는 “아들 잃고 가족 잃은 (유가족분들이) 40년 넘는 시간 동안 얼마나 힘드셨겠느냐”라며 “근데도 그 넓은 마음으로 저를 안아주시고 오히려 고맙다고 해주시는 데 할 말이 없었다. 너무 죄송하다”고 재차 사과했다.5·18 최초 사망자인 고 김경철 씨 묘소 등을 참배하면서 자신의 외투로 묘비를 닦은 우원 씨는 “은혜 받은 코트”라며 “세탁 안 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전직 대통령 고(故) 전두환 씨의 손자 전우원 씨가 31일 오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 묘지 고 문재학 열사 묘역을 참배한 뒤 모친 김길자 씨에게 사과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우원 씨는 5·18 피해자와 유가족, 단체 대표와 가진 면담에 대해 “바보같이 얘기해서 실수하면 어떡하지, 진심이 전해지지 않으면 어떡하지, 걱정 진짜 했다”며 “(일정을 무사히 마쳐서) 너무 다행이란 말밖에 할 말이 없다”면서 한숨 돌렸다.그는 “5·18기념재단 분들이 가족같이 따뜻하게 대해 주셨다”며 “유가족, 피해자, 기자, 시민 등 모든 분에게 감사하다”고 전했다.이어 “(저한테) 역사적으로 큰일 한다는데 (저는) 존재하는 거밖에 없고 가능케 한 건 시민”이라며 “돌로 쳐서 안 죽여주시고 십자가형 안 되고 가족들과 제가 이렇게 뻔뻔하게 살아 있는 건 여러분이 천사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유가족 뒤통수 치지 마라’라는 한 누리꾼의 댓글엔 “절대 아니다”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전직 대통령 고(故) 전두환 씨의 손자 전우원 씨가 31일 오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 묘지 고 문재학 열사 묘역을 참배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우원 씨는 향후 일정에 대해선 마약 투약 혐의 관련 경찰 조사 결과에 따르겠다고 했다.그는 댓글로 어머니 관련 질문이 이어지자 “조만간 어머니 뵐 것”이라며 “맘고생 많이 하셨을 텐데 잘 해결됐으니 걱정 마시라고, 안아 드리고 싶다”고 답했다.앞서 우원 씨는 전 씨 일가의 비자금 의혹을 폭로하면서 친어머니인 최모 씨도 언급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그는 “이번 사건 있을 때도 엄마 공개해서 스트레스 엄청 받으셨을 것”이라며 잠시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우원 씨는 전두환 씨 차남 재용 씨가 전 부인 최 씨와 낳은 둘째 아들이다. 재용 씨는 최 씨와 이혼한 뒤 탤런트 출신 박상아 씨와 재혼해 딸 둘을 낳았다.아버지를 ‘전재용 씨’라고 호칭한 우원 씨는 “가족과 연락은 안 하고 있다”며 “(입국 직후 마약 혐의로 체포됐을 당시) 경찰청에서 연락할 사람이 필요해서 어머니한테만 연락했다”고 했다.그는 또 “어머니가 응원을 해주셨다. 어머니가 결국은 가족의 피해자인데, 언제 어떻게 해코지 당할지 모르는 두려움이 있으시다”라며 “어머니가 예전부터 ‘(전 씨) 가족을 상대하는 건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고 말하셨다. 무서워서 말 못 하는 것도 크다고 하셨다”라고 주장했다.아울러 “저도 이 과정에서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 어머니가 두려워하시는 거 다 이해한다”고 말하기도 했다.우원 씨에게 ‘정치 입문’을 제안하는 누리꾼도 여럿이었다. 그는 “정치할 생각 없다”고 단호하게 답했다,전직 대통령 고(故) 전두환 씨의 손자 전우원 씨가 31일 오전 광주 서구 5·18기념문화센터에서 5·18 유가족에게 큰절을 하며 자신의 할아버지를 대신해 사과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우원 씨는 이날 오전 5·18 기념재단을 방문해 유족과 피해자들을 만나 사죄의 뜻을 밝혔다.5·18 유족들은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린 우원 씨를 안아주며 “얼마나 두렵고 힘들었냐”며 오히려 위로를 건넸다.우원 씨는 같은 날 오전 11시 30분께 국립 5·18 민주묘지에 도착해 방명록에 “민주주의의 진정한 아버지는 여기에 묻혀 계신 모든 분들”이라고 적었다.곧이어 묘역을 돌며 참배를 이어갔다.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 열사의 어머니 김길자 여사는 “재학아, 전두환 손자가 와서 사과한단다”라며 우원 씨의 참배를 눈물로 지켜봤다.우원 씨는 오후 3시부터 5·18 최후 항쟁지인 옛 전남도청과 전일빌딩을 방문할 계획이다.한편, 경찰은 이날 오후 우원 씨를 출국 금지 조치했다. 미국에 체류하며 자신이 마약을 투약해왔다고 밝힌 우원 씨는 지난 28일 입국하자마자 경찰에 체포돼 조사를 받은 뒤 38시간 만에 석방됐다. 경찰은 우원 씨 체포 당일 모발 등을 채취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감정을 의뢰했으며, 그 결과 등을 보고 추가로 불러 조사할 방침이다.
- "이대로는 못 살겠다"…서울 시청광장서 집회
- [이데일리 권효중 기자] “이게 나라냐, 이대로는 못 살겠다. 윤석열 정권 심판하자!”25일 전국민중행동을 비롯, 869개의 시민·사회단체들은 서울 시청광장 일대에 모여 이날을 ‘윤석열 정권 심판 3·25 행동의 날’로 선포, 시민행동을 진행했다. 이날 집회에는 노동계뿐만이 아니라 빈민, 농민 등 각계에서 참여했으며, 이들은 윤석열 정부가 공공요금과 물가 폭등으로 인한 민생 파괴에 노동조합 탄압, 여기에 굴욕적인 대일 외교까지 이어가고 있다며 이를 막기 위해 투쟁을 하겠다고 주장했다. 25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시청 인근에서 열린 윤석열 정권 심판 3.25 행동의 날 집회 참가자들이 행진하고 있다.(사진=뉴시스)이날 사전대회 첫 발언에 나선 이는 지난해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이었다. 희생자 이지한씨의 어머니 조미은씨는 “그때도 지금도 국가는 없다”며 “국가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는만큼 ‘동지’로서 함께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장희 ‘윤석열 정권 심판 서울시국회의’ 상임대표는 “윤석열 정부는 강제징용 해법을 졸속으로 내놓은데에 이어 일본을 직접 찾아가 굴욕적인 외교를 이어갔다”며 비판했다. 이 상임대표는 “헌법 질서를 파괴하는 대통령이 스스로 내려오지 않는다면 국회도 나서 탄핵을 추진해야 한다”며 “민족 및 평화, 노동자 서민에 대한 범죄를 윤석열 대통령이 시인할 때까지 끝까지 투쟁하겠다”고 말했다. 이후 민주노총 등이 합류하며 마무리 대회가 진행됐다. 앞서 민주노총 역시 서울 종로구 대학로 일대에서 대정부 총투쟁을 선언하는 결의대회를 열었다. 이들은 윤석열 정부의 노동·민생 탄압을 규탄했고 을지로 등 도심을 거쳐 시청광장까지 행진했다. 박석운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공동대표, 남경남 빈민해방실천연대 공동대표,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 등은 대회사를 통해 ‘윤석열 정권 심판’에 나서자며 “탄압에는 항쟁할 것”이라고 밝혔다. 박 공동대표는 “서민들은 물가 폭등과 난방비 폭등으로 절규하는데, 자산불평등은 역대 최대”라며 “이러한 고통 속에 전쟁 위기를 부추기고 일본 식민 지배에 면죄부까지 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농민계에서도 식량 주권과 농민의 생존권이 짓밟히고 있다며 규탄 목소리를 냈다. 하원오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은 “쌀값이 15개월째 하락하고 있는데 정부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며 “농민 생존을 외면하고 농민을 때려잡는 정권을 농민이 갈아엎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민 대회에 합류한 민주노총 역시 거듭 대정부 투쟁을 선언했다. 양 위원장은 “우리 민중은 독재 정권에 맞서 스스로 역사를 만들어왔던 것처럼 오늘 우리는 민중 승리의 대항쟁에 나설 것”이라고 대회사를 마무리했다. 이날 시민행동 참여자들은 “이게 나라냐, 더 이상 이대로는 살 수 없다”, “민중 생존권 쟁취하자”, “공안 탄압 자행하는 윤석열 정부 심판하자” 등의 구호를 외쳤다. 또 집회 현장에서는 ‘윤석열 정권 심판, 윤석열이 죄인이다’라고 적힌 대형 현수막이 펼쳐지기도 했다. 한편 전국민중행동의 시민행동 이후에는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이 정부의 강제징용 해법안을 규탄하는 제4차 범국민대회를 연다. 이에 경찰은 집회가 열리는 세종대로, 종로, 을지로, 일대에 교통경찰을 배치하고 가변차로를 설치했으며, 5000여명의 경력을 투입해 현장을 관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