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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대 향한 '염원' 담아..고양에 울려퍼진 '원 데이 모어'
- 마이클 리, 라민 카림루 등 무대 위 배우 9명과 영상 속 배우 41명 등 총 50명의 아티스트는 동료와 관객, 무대를 향한 마음을 담아 ‘One Day More’를 열창하고 있다(사진=리마프로덕션스)[이데일리 윤종성 기자] 뮤지컬 ‘레 미제라블’의 1막 엔딩곡 ‘One Day More’ 음악이 흐르고, 꺼져 있던 무대 위 스크린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한다. 화면 속에는 토니상 수상자이자 레전드 배우인 레아 살롱가(Lea Salonga), ‘왕과 나’로 한국계 최초 토니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루시 앤 마일스(Ruthie Ann Miles)를 비롯해 텔리 리엉(Telly Leung), 셀린드 쇼엔메이커(Celinde Schoenmaker), 로베르 마리엔(Robert Marien), 유카 다카라(Yuka Takara) 등이 차례로 등장해 한 소절씩 이어불렀다. 세계적인 뮤지컬 스타들만 등장한 것이 아니다. 채널A ‘DIMF 뮤지컬스타’, EBS ‘장학퀴즈 - 드림서클’(뮤지컬 배우 편) 우승자 등 뮤지컬 배우 지망생도 함께 했다. 마이클 리, 라민 카림루 등 무대 위 배우 9명과 영상 속 배우 41명 등 총 50명의 아티스트는 동료와 관객, 무대를 향한 마음을 담아 ‘One Day More’를 열창했다. 이들은 “앞으로도 우리는 함께 모이고, 함께 노래할 방법을 찾을 것”이라는 강렬한 메시지를 전하며 관객들에게 큰 울림을 선사했다. 공연 전까지 철저하게 비공개로 준비한 히든 프로그램 ‘One Day More’부터 엔딩 곡인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넘버 ‘Superstar’로 쉼없이 이어진 마지막 장면은 지난 27~29일 사흘간 고양아람누리 아람극장에서 열린 ‘2021 마이클 리 & 라민 카림루 콘서트’의 백미였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속에서도 공연을 멈추지 않았던 뮤지컬 배우들의 무대예술에 대한 강한 열정과 사랑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순간이었다. 마이클 리(오른쪽)와 라민 카림루가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다(사진=리마프로덕션스)한국 데뷔 15주년을 맞아 프로듀서로 변신한 마이클 리의 첫 프로젝트이자, 국내외 뮤지컬계를 대표하는 두 톱스타의 재회로 주목받았던 이번 콘서트는 ‘오페라의 유령’, ‘러브 네버 다이즈’,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레미제라블’, ‘선셋 블러바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등 명작 넘버의 향연이었다. 여기에 ‘신데렐라’, ‘Rumi’ 등 국내 미공개 신작 넘버들, 셀린 디온, 마이클 부블레, 일 디보, 레이디 가가의 히트 팝 등을 선보이며 관객들에게 색다른 매력을 과시했다.마이클 리와의 인연으로 스페셜 게스트로 참여한 김보경, 윤형렬, 민우혁, 전나영 등 4명의 국내 뮤지컬 스타는 ‘노트르담 드 파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미스 사이공’ 등 특별한 컬래버레이션 무대를 선보였다. 여기에 스티비 원더, 비욘세 등 세계적인 아티스트의 세션 및 싱어송라이터로 활약한 뮤지션 에디 브라운, 깜짝 출연한 마이클 리의 아들 제시 리가 피아노 연주를 들려주며 관객들의 큰 호응을 이끌었다. 지난달 코로나19로 작고한 아시아계 미국 뮤지컬 배우 고(故) 알빈 잉(Alvin Y. F. Ing)을 추모하는 시간도 가졌다. 아시아계 배우가 무대에 서기 어렵던 1950년부터 무대에 출연하며 후배 배우들의 길을 터줬던 알빈 잉은 ‘태평양 서곡’, ‘Allegiance’에 마이클 리와 함께 출연했으며 지난해 내한해 마이클 리와 특별한 공연을 하기도 했다. 공연을 마친 마이클 리와 라민 카림루는 “코로나19로 공연계가 힘들었지만, 무대에 같이 서고 싶은 우리 모두의 열정은 똑같다”면서 “공연장에서 관객 여러분들과 한자리에 모여 공연을 하는 것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더욱 소중한 순간이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 선릉역 오토바이 사망 현장에 국화꽃..."내가 될 수 있었다"
- [이데일리 박지혜 기자] 이른바 ‘선릉역 배달 오토바이 사망 사고’ 관련 추모식이 열렸다.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서비스일반노동조합은 27일 오전 서울 강남구 선릉역에서 전날 사망한 오토바이 운전자의 ‘추모 행동’을 진행했다.전날 오전 11시 30분께 선릉역 근처 교차로에서 배달 오토바이를 몰던 40대 운전자가 23톤 화물차에 치여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서울 수서경찰서는 A씨가 화물차 바로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다 치여 숨졌다고 밝혔다.경찰 조사에서 60대 화물차 운전자는 신호가 바뀌어 출발했는데, 운전석이 높아 앞에 있던 오토바이가 보이지 않았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플랫폼 배달라이더들이 27일 오전 서울 강남구 선릉역 앞에서 열린 ‘선릉역 오토바이 라이더의 추모행동’에 마련된 고인의 오토바이 옆을 지나고 있다 (사진=뉴시스)이에 대해 서비스노조는 성명서를 통해 “선릉역 오토바이 라이더는 우리의 모습”이라고 밝혔다.이들은 “선릉역에서 ‘배달의민족’ 앱으로 운행을 하던 배달라이더가 화물차에 깔려 사망했다”며 “우리는 그 사고 장면을 보면서 가슴이 먹먹하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그 라이더는 바로 내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이어 “사고 당일 잠 못 드는 라이더가 많았다. 경미한 사고만 나도 가족들은 우리에게 ‘배달일을 그만할 수 없느냐’고 묻는다. 고인이 사고를 당했던 날, 우리 가족들에게 이런 질문을 다시 한 번 받았다”고 덧붙였다.그러면서 “우린 언제나 손님에게 빠르게 음식을 갖다 주고자 플랫폼사간의 속도 경쟁에 내몰린 우리는 생존을 위해 도로 위를 달린다”며 “평범한 가장이 왜 그렇게 자기 생명을 갉아먹으며 급하게 달리는지, 그리고 자동차 사이를 뚫고 횡단보도 앞에 서는지, 신호와 핸드폰을 계속 번갈아 보는 이유가 플랫폼사 간의 속도 경쟁인 것을 알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선릉역 배달 오토바이 사망 사고’ 당시 현장을 지나던 차량의 블랙박스 영상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보배드림’)서비스노조는 “오토바이 사망자 세 명 중 한 명은 우리 배달라이더이다. 갖은 언론에 실리는 악플(악성 리플)들을 보며 우리는 또 한 번 괴로웠다”며 “100% 개인의 잘못인 사고가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도 안전하게 달리고 싶다!”고 토로했다.또 “배달업에 들어오는 노동자에게 안전교육이 제대로 된 게 있는가? 산업안전교육이라 해서 몇 시간의 기본 교육은 있지만, 오토바이를 안전하게 타는 법, 배달과정에서 주의해야 할 일, 도로 위에서 실제 안전에 필요한 교육은 제대로 받지 못한다”고 주장했다.플랫폼 배달라이더들이 27일 오전 서울 강남구 선릉역 앞에서 열린 ‘선릉역 오토바이 라이더의 추모행동’에 참석해 고인을 추모하고 있다 (사진=뉴시스)그러면서 “국회에서 중대재해처벌법이 통과됐다. 노동자의 산재사망에 대해 기업의 책임을 물은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 앞에 플랫폼이라는 이름이 붙은 우리는 사고가 나면 온전히 우리 책임이 된다”고도 했다.이들은 배달 플랫폼 기업에게 △유가족에게 도의적 책임을 다해 장례비용 일체와 위로금 지급 △사고 라이더가 산재보험을 적용받을 수 있도록 할 것 △라이더의 안전교육 강화 등을 요구했다.플랫폼 배달라이더들이 27일 오전 서울 강남구 선릉역 앞에서 열린 ‘선릉역 오토바이 라이더의 추모행동’에 참석해 고인을 추모하고 있다 (사진=뉴시스)아울러 서비스노조는 고인의 삼일장이 되는 오는 28일까지 선릉역 옆 오토바이에 헌화 및 향을 피우는 추모 행동을 진행할 것이며, 고인의 죽음에 아파하는 라이더에게 부조금을 모아 유족에게 전달할 것이라고 밝혔다.또 “안전한 일터를 만들기 위해 라이더 안전교육, 플랫폼기업 라이더 보험가입 의무화에 나설 것”이라고 했다.
- 고국 돌아온 홍범도 장군…“절치부심” 다짐한 文대통령(종합)
- [이데일리 김정현 기자] “우리는, 다시는 그런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절치부심해야 합니다.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강한 나라, 국제사회에서 존중받는 나라를 반드시 만들어야 합니다.”홍범도 장군(1868~1943)이 78년 만에 고국 땅에 몸을 누인 18일, 문재인 대통령은 아무도 넘볼 수 없는 강한 나라를 다짐했다. 봉오동 전투가 대한민국 건국에 끼친 영향력과, 그 승리의 주역 홍 장군이 ‘이역만리’ 타국에서 쓸쓸히 잠들어야 했던 역사를 되새기면서다.문 대통령은 18일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3묘역에서 열린 홍범도 장군 유해 안장식에서 추념사를 통해 “조국을 떠나 만주로, 연해주로, 중앙아시아까지 흘러가야 했던 홍 장군을 비롯한 고려인 동포들의 고난의 삶 속에는 근현대사에서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온갖 역경이 고스란히 배어있다”면서 이같이 말했다.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18일 오전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홍범도 장군 유해 안장식에서 묵념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문 대통령은 홍 장군의 봉오동 전투가 대한민국 건국에 갖는 의미를 설명하며 추념사를 시작했다. 문 대통령은 “3·1 독립운동의 정신 위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포했다”면서 홍 장군이 “그 해 치러진 ‘독립전쟁 1회전’, ‘독립전쟁 첫 승리’라고 불렸던 봉오동 전투와, 독립전쟁 최대의 승리 청산리 대첩을 이끌었던 독립전쟁의 영웅”이라고 설명했다.문 대통령은 이어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는 평범한 사람들이 함께 만든 ‘승리와 희망의 역사’”라면서 “모두가 함께 만든 승리는, 나라를 잃은 굴종과 설움을 씻고, 식민 지배에 억압받던 삼천만 민족에게 강렬한 자존심과 자주독립의 희망을 심어주었다”고 평가했다.이처럼 봉오동·청산리 전투가 갖는 의미에도 불구, 홍 장군이 타지 카자흐스탄에서 광복도 보지 못한 채 영면했다는 점을 상기한 뒤, 문 대통령은 “우리는 수많은 시련과 역경을 이겨내며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이뤘고, 드디어 선진국으로 도약했다”며 “장군이 고향 흙에 흘린 눈물이 대한민국을 더 강하고 뜨거운 나라로 이끌어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 과거 비참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을 나라가 됐다고 선언한 것이다.한편, 이날 안장식에는 홍 장군의 유해를 인도해준 카자흐스탄에 대한 사의가 곳곳에서 표현됐다. 카자흐스탄 현지의 봉환 추진 영상이 비중 있게 상영됐고, 추모 화환도 각각 카자흐스탄과 한국의 추모화인 빨간 카네이션과 하얀 국화로 구성됐다. 홍 장군의 유해를 하관한 뒤 문 대통령이 허토할 때는 카심 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으로부터 전달 받은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현지 홍 장군 묘역의 흙과 한국 현충원의 흙이 함께 사용됐다.
- 고국 돌아온 홍범도 장군…오늘부터 국민분향소 운영
- [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일제강점기 ‘청산리·봉오동 전투’ 승리의 주역인 여천 홍범도(1868~1943) 장군의 유해가 서거 78년 만에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에 국가보훈처는 숭고한 애국정신을 국민과 함께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해 ‘국민추모’ 기간을 운영한다고 밝혔다.보훈처에 따르면 국민추모는 코로나19 확산 방지 차원에서 온라인으로 진행하며, 이를 위해 국가보훈처 누리집에 오는 20일까지 추모공간(추모페이지)을 마련했다. 또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국립대전현충원에 임시안치가 되면 16일부터 이틀간 제한적으로 국립대전현충원에 ‘국민분향소’를 운영한다.홍범도 장군 유해가 서거 78년만에 15일 고국으로 돌아온 가운데 서울공항에서 유해 봉환식을 마치고 경찰의 호위속에 국립대전현충원에 봉송돼 임시 안치됐다. 국가보훈처는 16일부터 17일까지 대전현충원에 국민분향소를, 온라인에서 20일까지 추모공간을 운영한다(사진=국가보훈처).대전현충원 국민분향소는 코로나19 유행 상황을 감안해 분향소 참배객들에 대한 철저한 방역 점검과 함께 ‘직접 참배’와 ‘승차 참배’(드라이브 스루)를 병행한다는 계획이다. 대전현충원 현충문 앞에 설치되는 분향소 참배는 사전예약 없이 선착순으로 참가할 수 있다. 현지 직원 안내에 따라 직접 또는 승차 참배를 선택하면 된다. 오는 20일까지 운영하는 ‘온라인 추모공간’은 ‘장군의 귀환’이란 주제 아래 ‘나는 홍범도’, ‘장군의 귀환’, ‘추모하기’, ‘사진·영상’, ‘관련 사이트’ 5가지 메뉴로 구성됐다. 이중 ‘추모하기’ 메뉴를 통해 홍 장군에 온라인 헌화·분향이 가능하고 추모의 글을 남길 수 있다. 앞서 홍 장군 유해를 실은 공군 특별수송기는 15일 오후 7시30분쯤 전투기 6대(F-15K, F-4E, F-35A, F-5F, KF-16D, FA-50)의 엄호 비행을 받으며 경기도 성남시 서울공항에 도착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는 같은 날 오후 8시47분쯤 서울공항에서 진행된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식’에 참석했다. 정부는 지난 2019년 4월 문 대통령의 카자흐 국빈방문을 계기로 홍 장군 유해 봉환을 위한 협의에 본격 착수했다. 이후 홍 장군 유해 봉환은 봉오동 전투 100주년이던 작년에 카심 조마르트 토카예프 대통령의 국빈방한과 함께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 유행으로 1년 연기됐다. 이번 홍 장군의 유해 봉환은 16~17일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국빈 방한을 계기로 성사됐다. 홍 장군은 1920년 중국 지린성 봉오동에서 700여명의 독립군 연합부대를 이끌고 일본군 1개 대대를 섬멸, 우리 무장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홍 장군은 같은 해 10월엔 지린성 청산리에서 북로군정서를 지휘하던 김좌진 장군과 합세해 일본군을 재차 대파(청산리 대첩)하기도 했다. 그러나 홍 장군은 1930년대 연해주 거주 당시 극동지역 한인들에 대한 소련(현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정책에 따라 카자흐로 이주해야 했고, 결국 조국 땅을 밟지 못했다.홍범도 장군 유해봉환 특별사절단 단장인 황기철 국가보훈처장은 “홍범도 장군께서 서거 78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오신 만큼 범국민적으로 추모가 이뤄져야 하지만, 코로나19 상황을 감안해 국민들의 직접 참배보다는 온라인 추모로 장군의 조국독립을 위한 헌신을 기억하는 일에 동참해 주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 [데스크의 눈]"아는 만큼 보인다" 일갈했던 지성
- [이데일리 최은영 산업에디터] 생자필멸(生者必滅).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뜻입니다. 회자정리(會者定離).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게 마련입니다. 세상의 이치가 그렇습니다. 조금 일찍 하늘나라로 간다고 해서, 잠시 떨어져 있게 된다고 해서 너무 슬퍼할 필요는 없다는 소리겠지요. 떠나간 사람 보다 남겨진 사람을 보듬는 말로도 읽힙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향년 만 52세. 참으로 황망하게, 서둘러 갔습니다. 고인을 일컫는 호칭은 많습니다. 공학박사, 교수, 기업가, 엔지니어, 작가, 강사. 관심사도 어마어마했습니다. 역사, 경제, 정치, 사회, 문화를 아울러 폭넓게, 깊게 탐구했습니다. 서른이 되기 전에 박사학위를 취득해 삼성전자 반도체 연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미국 조지아공대에서 15년간 교수로 재직했고 조지아공대 기업혁신센터 국제협력 수석고문과 국제 통신 표준화 의장을 지냈습니다. 다음 아고라에서 ‘Bozart’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던 스타 논객이기도 합니다.(추종자 모임까지 생겨난 걸 보면 꽤나 유명했던 모양입니다.)최근 수년간의 삶은 구체적으로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강연회와 집필활동, 연구를 이어갔습니다. 사람을 만나고 세상을 보는 시각을 일깨워 삶의 방향을 돌려놓는 것도 고인의 주된 일과 중 하나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3년 전 오피니언 담당 부장과 필자로 처음 만났습니다. 고인은 ‘역사덕후’입니다. 누가 공학도 아니랄까봐 역사를 종과 횡으로 쪼개고 나눠 재조립하는 게 그분의 취미이자 특기였습니다. 정치, 외교적인 측면에서 한국의 경제상황을 진단하고 해석해 방향성을 제시하는 일도 사명으로 여겼습니다. ‘인간’도 탐구영역의 한 줄기였습니다. 바흐와 모차르트를 합친 ‘Bozart’라는 필명처럼 PC 통신 시절부터 클래식 음악에 애호가 수준을 뛰어넘는 식견을 갖추는 등 예술 전반에 걸쳐서도 조예가 깊었습니다.그는 우리 시대 보기 드문 ‘르네상스 맨’이었습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남긴 3만장에 달하는 친필 노트 ‘코덱스’에서 착안한 연재물 ‘임규태의 코덱스’(칼럼)와 이 세상 모든 산업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위대한 생각: 인더스토리’(TV 강연)는 지금까지 언급한 고인의 미친 탐구욕에 뿌리를 두고 탄생했습니다. 암투병 중 별세했다는 비보가 전해진 지난 26일, 고인이 생전 운영하던 페이스북 그룹 커뮤니티에는 그의 마지막 인사가 담긴 영상이 올라왔습니다. 그는 마치 소풍 나온 사람처럼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예정보다 빨리 가게 됐습니다. 저는 이 삶에 아쉬움이나 미련이 없습니다. 다 여러분 덕분입니다. 즐거웠습니다.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그를 인생의 나침반처럼 믿고 따르던 이들은 ‘내 인생의 등불이 희미해진 너무나 큰 슬픔입니다’(김**), ‘세상을 보는 눈이 교수님을 만난 이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김**), ‘선생님께서는 제게 넓디넓은 바다와 같은 분이셨습니다. 만약 다시 만날 날이 온다면 환하게 웃으며 뵐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맹**)라며 애도했습니다. 그는 생전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더 넓은 세상과 만나기 위해 지식의 바다를 거침없이 누볐습니다. 고인이 세상을 떠나고 지인을 통해 전한 새로운 프로젝트의 이름은 ‘소멸의 탄생’입니다. 지금쯤 이 세상 반대편에서 새로운 세상을 탐구하고 계실까요.고인은 그런 분입니다. 존경하는 임규태 박사님의 명복과 안식을 빕니다.※해외에 있는 고(故) 임규태 박사님의 지인들을 위해 추모글을 영어로도 번역해 게재합니다. - Condolences to ‘Bozart’, a renaissance man of the 21st century.[Eunyoung Choi, Industry Editor at Edaily] As the old saying goes, every living being must perish or come to an end. If there are hellos, then there’s bound to be goodbyes. Well, c‘est la vie. People may depart life on earth a little bit early, but we don’t have to mourn too much over a temporary farewell. After all, maybe these axioms are to assuage the grief of the ones that are left behind.But he was in haste to have left us at 52.The deceased wore many names. Doctor of engineering, professor, entrepreneur, engineer, writer, lecturer. His area of interest was borderless. He had a vast and deep understanding of history, economics, politics, social science, and culture.His career began at Samsung Electronics as a researcher in semiconductors after getting a Ph. D before turning 30. He served as a professor in Georgia Institute of Technology for 15 years. Also, he was a senior advisor for International Initiatives and a chairman of the international standard on white space at the Georgia Institute of Technology. He was also a renowned (based on the significant fan base drawn) writer under the pen name “Bozart” in Daum Agora. It is rather difficult to summarize his last years. He gave lectures, wrote articles and conducted research, traveling back and forth between Korea and the US. Another routine of his was to meet people and change the course of their lives by broadening their horizon.Personally, I first met Lim as his column manager three years ago. He was a history nerd. He was an engineer who really enjoyed and excelled at dissecting and reassembling the pieces of history. He saw it as his calling to diagnose and analyze Korea’s economic status from political and diplomatic perspectives and provide directional guidance. “Human studies” was also part of his focus of study. He was well-versed in arts, inferable from his pen name “Bozart”, which seems to be a combination of Bach and Mozart.He was a Renaissance man, a rarity in our times. Both “Lim, Kyu Tae’s Codex,” a serial column based on Codex, a handwritten manuscript amounting to 30,000 pages by Leonardo da Vinci, one of the greatest minds in human history, and “Think Great: Industory,” a TV show that told us the history of all industries in the world, came into being based on Lim’s insane curiosity and desire to explore.When the news was out that Lim has passed away during his fight against cancer, a farewell video was unloaded on Lim’s Facebook group. In a calm and composed manner, he spoke as if he were on a picnic. “I’m going earlier than expected. I leave no regrets thanks to all of you. It was a true pleasure knowing you all. I assure you that there is no need for grieving.”The post was immediately filled with condolences from those that looked up to him as their guiding light. “My light just got dimmer. I am deeply sorry for the loss”(Kim, **), “My worldview was never the same since I met Lim”(Kim, **), “Lim was like a vast ocean to me. If we were to meet again someday, I would greet him with a big smile.”(Maeng, **).Lim often said that “you can only see as much as you know”. He was boundless in his explorative journey to meet with a bigger world in the sea of knowledge. Shortly after his departure, his friends shared with me the name of Lim’s new project: The Birth of Extinction. Perhaps he has already embarked on a new journey in a different world.And that’s what he was, a traveler. May he rest in pe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