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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황현규 기자] 경기도 안양시 공사현장에서 목수로 일하는 정병철(45)씨는 근무시간인 아침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딱 3번 물을 마신다. 아침 9시와 낮 12시, 오후 3시다. 최고 기온이 35도가 넘는 폭염 경보가 발효된 날에도 마찬가지다. 정씨는 “정해진 시간 외 물을 마시지 말라는 이야기는 없지만 괜히 물 마시면서 쉬는 모습을 보여주면 일감이 줄어들까 눈치를 보게 된다”며 “요새처럼 기온뿐만 아니라 습도까지 높으면 이러다가 죽겠지 싶다”고 밝혔다.
폭염에 노출된 야외 근로자들의 노동 안전이 올해도 위협받고 있다. 정부가 마련한 ‘야외 근로자를 위한 불볕더위 지침’이 있지만 사실상 현장에서는 무용지물이라는 지적이다. 가이드라인 수립에서 끝나는 게 아닌 실질적인 이행을 위한 정부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아침마다 동료끼리 얼음 쟁탈전…”
13일 서울시에 따르면 올해 폭염특보 발효일수(9일 기준)는 11일이다. 사상 최악의 여름이었다는 작년(24일간)에 비해 다소 줄어든 수치지만 근로 현장에서 느끼는 체감 더위는 작년 못지 않다. 정씨는 “올해는 예년보다 습도가 높아 더 힘들었다”며 “비구름만 낀 상태에서 비는 안 오고 고온다습한 날이 많지 않나”라고 반문했다. 올해 집계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현장에서는 더위 때문에 응급실에 실려간 야외 근로자수가 꽤 될 것으로 추정했다.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521개 응급실에 접수된 온열질환자수는 4526명 중 야외 근로자는 1274명에 달했다. 같은 기간 실내 온열질환자수(624명)보다 2배 이상 많았다.
결국 이들은 대책을 촉구하며 청와대까지 갔다. 13일 오전 전국건설노동조합은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글이글 타는 태양 아래 그늘막도 없는 곳에서 한뎃잠을 자고 아무데서나 팬티바람에 옷을 갈아입고 있다”며 “아침마다 얼음 쟁탈전을 벌이면서 동료들끼리 서로 초라해지는 기분을 느낀다”고 호소했다. 이들은 또 “여름철만 되면 반짝 관심을 가지다 마는 국회와 정부에 실망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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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건설 노조의 자체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야외 근로자 382명 중 절반 가량(45.5%)이 폭염 가이드라인에 대해 들어본 적조차 없는 것으로 집계됐다. 특히 폭염경보·주의보 발령 시 ‘1시간에 10분·15분 휴식시간을 제공받는다’고 답한 근로자는 23.1%에 불과했다. 대부분은 ‘쉬지 않고 봄·가을 처럼 일한다(18.2%)’거나 ‘재량껏 쉰다(58.2%)’고 응답했다. ‘그늘막을 제공 받고 있다’는 응답자는 26.5%에 그쳤다.
노동 전문가들은 노동 지침 이행을 위한 정부의 감시와 투자가 절실하다고 제안한다. 전재희 건설노조 교선실장은 “정부의 대책은 말만 있고 제대로 된 감시와 투자는 없다”며 “사업장이 가이드라인을 제대로 이행하고 있는지 적극적으로 감시하고, 이를 위한 예산 편성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채여라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 선임연구위원도 “근로자들이 야외에 쉴 공간이 없어도 너무 없다”며 “얼음 재킷, 물 지급 등 현실적으로 마련할 수 있는 작은 대책부터 정부가 신경 써서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힘줘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