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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선돋보기] '노무현 성공모델' 다시 통할 것인가
- (사진=사람사는 세상 노무현재단)[이데일리 김성곤 기자] 야권은 20대 총선을 앞두고 왜 분열하고 있을까요. 여권의 비판대로 단순히 유권자의 표를 얻기 위한 위장이혼 전략일까요? 어떻게 보면 차기대선과 맞닿아 있습니다. 키워드는 바로 ‘노무현’입니다. 핵심은 ‘과거 노무현의 성공모델이 차기 대선에서 다시 통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차기 대선에서 ‘문재인’으로 정권교체가 가능한지에 대한 찬반 여부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이하 정치인 직함 생략). ◇‘97년 대선’ 과연 DJP연대가 정권교체 기적 만들었나?과거 이야기를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김대중(DJ)을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유시민의 저서 중 97년 대선 전에 나온 ‘게임의 법칙’이 있습니다. 유시민이 마흔이 되기 전에 독일 유학 중 쓴 책입니다. 결론은 ‘DJ로는 대선승리가 어렵고 제3후보를 내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DJ는 온갖 고초에도 97년 대선에서 수평적 정권교체의 기적을 달성합니다. 대선승리의 원동력은 공식적으로 DJP(김대중+김종필) 연대였습니다. 실제 득표결과를 보면 대선 승패를 가른 것은 여권 분열이었습니다. 김대중(40.27%, 1032만6275표), 이회창(38.74%, 993만5718표). 두 사람의 표 차이는 39만여표에 불과합니다. 반면 이인제가 받은 표는 승자 김대중의 절반인 500만표(19.20%, 492만5000여표)에 육박합니다. 다시 말해 이인제의 독자출마가 없었다면 DJ의 당선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더구나 IMF 외환위기라는 여권의 메가톤급 악재에도 DJ가 힘겹게 승리했다는 점에서 97년 대선승패를 가른 것은 이인제 변수였습니다. 2002년 대선으로 가보죠. 노무현은 어떻게 승리했을까요. DJ집권 기간 내내 이회창 대세론이 막강했는데도 말이죠. 노무현(48.91%, 1201만4277표)과 이회창(46.58%, 1144만3297표)의 격차는 겨우 57만980표입니다. 97년 대선과 크게 차이가 없는 박빙 승리입니다. 97년 대선과 비교할 때 이회창은 150만표 정도를, 노무현은 168만표를 각각 더 얻었습니다. (사진=사람사는 세상 노무현재단)2002년 대선은 여야 일대일 구도라는 점에서 노무현의 당선이 쉽지 않았습니다. DJ정권 말기 레임덕에다 독자출마한 진보진영의 권영길이 97년 대선(30만표)보다 세 배 많은 96만표 가량을 얻습니다. 결국 영남표의 분열에서 원인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부산 출신의 노무현은 영남지역에서 DJ보다 높은 득표력을 보였습니다. 또 대선 전날 단일화가 깨지기는 했지만 정몽준과의 단일화도 주요 변수였습니다. 결국 97년과 2002년 대선을 거치면서 야권은 하나의 결론에 이릅니다. 호남의 대동단결, 수도권 선전, 영남표 분열이라는 3박자가 갖춰질 경우 야권의 대선승리가 가능하다는 방정식입니다. 실제 DJ의 경우 97년 대선에서 서울·경기·인천에서 모두 승리했고 광주·전남북에서는 90% 이상의 압도적인 득표율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분당·탄핵’ 사과없는 어정쩡한 봉합이 갈등 증폭두 번의 대선승리 이후 야권은 예기지 못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2003년 참여정부 첫해 새천년민주당이 분당되고 열린우리당이 창당됩니다. 2004년 17대 총선 직전에는 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사태가 일어납니다. 돌이켜보면 야권 지지자의 입장에서 보면 있을 수 없는 사건들이었습니다. 민주당 분당은 ‘대통령을 만들어준 게 누구인데 배은망덕하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탄핵사태 역시 ‘아무리 미워도 그렇지 어떻게 탄핵’이라는 분노를 낳았습니다. 17대 총선에서 과반을 달성했던 열린우리당은 이후 재보선에서 연전연패하며 몰락의 길을 걷습니다. 탄핵을 주도했던 옛민주당 세력도 이전의 위상을 회복하지 못하고 군소야당의 길을 걸었습니다. 야권은 갈기갈기 찢어졌습니다. 특히 분당과 탄핵의 앙금에 이어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논의까지 불거지면서 증오와 대립은 더욱 심화됐습니다.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 대오각성한 야권은 2007년 대선을 앞두고 통합을 선택합니다. 이 과정에서 현 야권분열의 기원이라고 볼 수 있는 분당과 탄핵 사태에 대해 이를 주도했던 세력들이 공식 석상에서 분명한 사과를 한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대통합민주신당이 만들어졌지만 결과는 실패. 대선 본선에서 이명박(48.67%, 1149만2389표) vs 정동영(26.14%, 617만4681표)의 표차는 무려 531만여표에 해당합니다. 한마디로 참패입니다. 특히 보수성향의 무소속 이회창이 355만9963표(15.07%)를 얻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격차는 더 커집니다. 보수의 득표율은 무려 63.74%에 이를 정도로 압도적입니다. 정동영은 서울·경기·인천 등 수도권에서 절반 이하의 스코어로 참패한 것은 물론 호남에서도 80% 안팎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DJ처럼 강력한 카리스마와 지역기반을 갖추지 못한 호남후보의 경우 대선 본선 경쟁력에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결과입니다. (사진=문재인 홈페이지)◇문재인은 2012년 대선에서 왜 패배했나?2007년 대선에서 참패한 야권은 2012년 대선에서는 노무현의 기적을 염원하며 문재인을 내세웁니다. 박근혜(51.55%, 1577만3128표) vs 문재인(48.02%, 1469만2632표). 결과적으로 패배입니다. 격차는 108만여표에 이릅니다.대선패배는 야권에 많은 숙제를 안깁니다. 도저히 질 수 없는 선거였다는 판단이 많았기 때문이죠. 실제 역대 대선과 달리 야당을 괴롭히던 진보정당마저 출마를 표기하고 완벽한 일대일 구도가 만들어졌습니다. 투표율도 75.8%로 예상보다 상당히 높았습니다. 또 영남에서 야권 득표율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경제민주화를 내세운 박근혜의 승리다. 문재인·안철수 단일화가 불완전했다. 친노 후보의 확장성의 한계다. 다양한 분석이 나왔지만 아직까지 이견이 분분합니다. 대선 득표율을 따져보죠. 앞서 밝힌 대로 야권후보의 대선승리는 호남단결, 수도권 승리, 영남표 분열이라는 3박자를 갖춰야 합니다. 문재인은 호남에서 90% 안팎의 득표(광주 91.97%, 전남 89.28% 전북 86.25%)를 기록합니다. 부산·경남·울산 등 이른바 PK지역에서는 40%에 육박하는 득표율을 기록합니다. 노무현 당선 때보다 높습니다. 그러나 수도권에서는 패배합니다. 서울(박근혜 48.18% vs 문재인 51.42%)은 이겼지만 인천(박근혜 51.58% vs 문재인 48.04%)과 경기(박근혜 50.43% 문재인 49.19%)에서 졌습니다. 문재인과 달리 노무현과 DJ는 모두 수도권에서 승리했습니다. 진보정당 후보였던 권영길이 출마하면서 야권표가 분산되는 악조건도 뛰어넘었습니다. 2002년 대선의 경우 서울(이회창 44.95% vs 노무현 51.30%) 인천(이회창 44.56% vs 노무현 49.82%) 경기(이회창 44.18% vs 노무현 50.65%). 97년 대선의 경우 서울(이회창 40.89% vs 김대중 44.87%) 인천(이회창 36.40% vs 김대중 38.51%) 경기(이회창 35.54% vs 김대중 39.28%).◇문재인 다시 한 번 더 vs 다른 대안도 있다자 이제 결론입니다. 차기 대선을 바라보는 야권의 선택지는 여러 가지일 수 있습니다. 좀 이르기는 하지만 문재인, 안철수, 박원순 빅3 이외에도 손학규, 안희정, 김부겸 등 여러 명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손학규, 안희정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영남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호남 기반의 야권이 영남 출신의 차기후보를 고려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영호남의 정치지형 자체 기울어진 운동장이기 때문입니다. 19대 총선 기준으로 지역구 숫자를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부산 18석, 대구 12석, 울산 6석, 경남 16석 경북 15석 등 영남은 무려 66석이지만 호남은 절반에 못미치는 30석(광주 8석, 전남 11석 전북 11석)입니다. 과연 누가 나서야 할까요. 크게 보면 더불어민주당은 여전히 노무현의 성공모델에 무게를 두는 것 같습니다. 국민의당은 이에 반대하고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것 같습니다. 정치는 생물이라고 합니다. 4.13 총선 성적표와 이후 전개될 합종연횡의 과정에서 야권 지지자들이 누구를 선택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답은 아래 중에 하나가 아닐까요? -친노의 상징인 문재인이 다시 한 번 도전해야 한다.-지난 대선에서 후보를 양보했던 안철수가 정답이다.-수도권의 비중을 고려할 때 박원순이 나서야 한다.-친노와 충청의 지지를 담보할 수 있는 안희정이다.-정치재개를 모색 중인 중도개혁 이미지의 손학규다.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뛰고 있는 김부겸이 필요하다.▶ 관련기사 ◀☞ [총선돋보기] 이정현·김부겸은 무조건 박수받아야 한다☞ [총선돋보기] 야당 당명 총선 이후 또 바뀐다 전해라
- [총선돋보기] 야당 당명 총선 이후 또 바뀐다 전해라
- [이데일리 김성곤 기자] 4.13 총선을 불과 80여일 앞두고 야권의 이합집산이 한창입니다. 아연실색할 일은 또 당명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야당의 당명은 얼마나 바뀌었을까요? 주변을 둘러보면 현재 야당의 당명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문재인 대표가 주도하는 더불어민주당과 안철수 의원이 주도하는 국민의당으로 양분된 가운데 천정배신당, 박주선신당, 박준영신당, 민주당 등 한두 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의 약칭이 민주당인지 더민주당인지 아니면 더민주인지 아리송합니다. 국민의당 역시 약칭이 국민당 아닌지 궁금해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의 약칭은 ‘더민주’입니다. 아울러 국민의당은 약칭 없이 ‘국민의당’을 사용합니다. 조동원 새누리당 홍보기획본부장은 총선 막판으로 가면 ‘국민과더불어민주당’이 되지 않겠느냐고 비아냥거릴 정도입니다. ◇與野, 97년 대선 이전 선거 때마다 당명 변경선거를 앞두고 매번 당명을 바꾸는 게 마땅치 않습니다. 미국의 공화당이나 민주당, 영국의 노동당이나 보수당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문제는 해도해도 너무 심하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용물이지 당명이라는 포장지가 아닙니다. 1997년 대선 이전까지는 여야의 당명 변경은 시도 때도 없이 이뤄집니다. 1988년 13대 총선부터 살펴볼까요. 이른바 1노3김 구도에서 치러진 대선에서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 이듬해 치러진 선거였습니다. 최근 선거에서 여야 거대 양당구도가 익숙하지만 그 당시에는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 신민주공화당 등 다당구도였습니다. 1992년 14대 총선은 여야 모두 당명이 바뀝니다. 1990년 이른바 3당 합당이 이뤄지면서 현 새누리당의 모태가 되는 민주자유당 이른바 ‘민자당’이 탄생합니다. 야권은 3당 합당에 반발한 이른바 꼬마 민주당과 DJ가 이끄는 평화민주당이 힘을 합치면서 ‘민주당’으로 이름을 바꿉니다. 4년 뒤 1996년 15대 총선에서도 또 당명이 바뀝니다. 여권이 찢어지면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주도한 신한국당과 김종필 전 총재가 주도한 자유민주연합으로 분리됐습니다. 야권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계에 복귀하면서 새정치국민회의로 이름을 바꿉니다. ◇97년 대선 분기점 與 당명 고수 vs 野 누더기 수준 변화 1997년 대선은 여야 당명 변화의 분기점이었습니다. 신한국당이 DJ 정계복귀에 반발한 민주당 세력을 통합해 한나라당으로 이름을 바꾼 이후 여권은 당명을 교체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반면 대선에서 승리한 새정치국민회의의 이후 당명 변화는 일일이 기억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복잡다단했습니다. 우선 대선에서 패한 한나라당은 이후 15년간 똑같은 이름을 고수했습니다. 차떼기 대선자금 후폭풍으로 당의 존립마저 위태로웠을 때는 물론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여타로 17대 총선에서 사상 최악의 패배가 예상됐을 때에도 당명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MB정부 시절 이른바 세종시 수정안 문제로 여권이 친이계와 친박계로 확 갈렸지만 분당과 당명 변경만은 없었습니다. 다만 4년 뒤 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으로 이름을 바꾼 뒤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반대로 97년 대선 이후 현 야권의 당명 변경사는 ‘안습’ 그 자체입니다. 너무 잦은 이합집산으로 누더기 수준입니다. ‘민주’라는 성에 새천년, 새정치, 통합이라는 이름이 끝없이 붙습니다. 2000년 16대 총선과 2002년 16대 대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이라는 이름을 씁니다. 이후 2004년 17대 총선에서는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으로 분열합니다. 특히 백년정당을 표방했던 열린우리당은 창당 4년도 되지 않아 2007년 17대 대선을 앞두고 대통합민주신당으로 바뀝니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는 통합민주당, 2010년 제5회 지방선거에서는 또 민주당으로, 2012년 19대 총선과 18대 대선에서는 민주통합당, 2014년 제6회 지방선거에서는 또 새정치민주연합이라는 당명을 사용했습니다. ◇4.13 총선 이후 야권의 당명은?4월 13일 이후 총선 결과가 나오면 여야의 당명은 또 어떤 변동이 있을까요? 물론 총선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예측불허입니다.다만 제1야당의 지위를 놓고 다투는 더민주와 국민의당의 총선 성적표는 서로 엇비슷할 수도 있고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완전히 압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어느 쪽이든 과연 2017년 대선 때까지 현재 야권의 당명이 또 유지될 수 있을까요? 회의적입니다. 잦은 당명 변경에 유권자는 혼란스럽습니다.한 가지 확실한 것은 총선 이후 야권의 새로운 당명이 출현할 것 같고 ‘민주’라는 이름도 빠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야권의 당명이 그냥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민주당’이라는 이름으로 오래오래 가기를 기원해 봅니다. 작지만 그게 한국정치의 발전인 것 같습니다. [표] 87년 이후 역대 선거별 주요 정당명●1987년 13대 대선 - 민주정의당 노태우, 통일민주당 김영삼, 평화민주당 김대중,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1988년 13대 총선 -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 신민주공화당●1992년 14대 총선 - 민주자유당, 민주당, 통일국민당 ●1992년 14대 대선 - 민주자유당 김영삼, 민주당 김대중, 통일국민당 정주영, 신정당 박찬종 ●1995년 제1회 지방선거 - 민주자유당, 민주당, 자유민주연합●1996년 15대 총선 - 신한국당, 새정치국민회의, 통합민주당, 자유민주연합 ●1997년 15대 대선 - 한나라당 이회창,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국민신당 이인제, 건설국민승리21 권영길 ●1998년 제2회 지방선거 - 한나라당, 새정치국민회의, 자유민주연합 ●2000년 16대 총선 -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 자유민주연합 ●2002년 제3회 지방선거 -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 자민련 ●2002년 16대 대선 - 한나라당 이회창,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하나로국민연합 이한동, 민주노동당 권영길 ●2004년 17대 총선 -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 자민련, 민주노동당●2006년 제4회 지방선거 - 열린우리당, 한나라당, 민주당 ●2007년 17대 대선 -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한나라당 이명박, 민주노동당 권영길, 민주당 이인제, 창조한국당 문국현, 무소속이회창 ●2008년 18대 총선 - 통합민주당, 한나라당, 자유선진당 ●2010년 제5회 지방선거 - 한나라당, 민주당, 자유선진당, 민주노동당 ●2012년 19대 총선 - 새누리당, 민주통합당, 자유선진당, 통합진보당●2012년 18대 대선 - 새누리당 박근혜, 민주통합당 문재인 ●2014년 제6회 지방선거 - 새누리당, 새정치민주연합, 통합진보당
- "퍼팅 안 해" 박정희, "골프 안 칠 거야" 김영삼
- 골프를 좋아한 대통령들. 스타일은 다 다르다. 9홀 ‘원퍼터 OK’로 끝내고 막걸리로 마무리한 박정희(왼쪽부터), ‘골프정치의 달인’으로 평가받는 자기과시형 전두환, 알아서 벌타 받고 타수 계산하는 규칙준수형 버락 오바마(사진=국가기록원·영상역사관·연합뉴스).[이데일리 오현주 기자] 여전히 ‘있는 자의 취미생활’이라고들 한다. ‘특권층의 전유물’이고 ‘부르주아의 유희’란다. 그럼에도 점점 몰린다. 한해 3000만명. 아주 단순하게 따지면 프로야구 관중 수의 4배를 웃돈다. 골프 얘기다. 한국에 흘러든 지 100년을 넘겼다는데 아직까지도 이처럼 ‘딜레마스러운’ 스포츠는 없을 거다. 대중화라고 해야 하는 건지 아닌지, 그래서 골프를 쳐야 하는 건지 아닌지, 친다고 하면 칭찬을 받을지 욕을 먹을지. 이 고민은 새벽에 조깅을 할까 말까와는 다른 차원이다. TV 드라마나 영화 속 묘사가 한몫했을 거다. 골프장 장면에서 ‘선’한 담론이 오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좋게 말하면 전략, 나쁘게 말하면 모략이 작전세력의 ‘나이스샷!’과 함께 스멀스멀 뻗쳐나올 뿐. 결정적으론 ‘정치인이 좋아하는 운동’이란 게 이유일 수도 있다. 뭔가 ‘클리어’하지 않다는 건데. 은밀한 거래를 하는 듯한 인상 같은 것 말이다. 그렇게 보면 골프와 정치인 중 손해를 본 쪽은 골프다. 그런데 정치인은 어쩌다가 골프와 친해졌나. 세 가지쯤으로 요약된다. 사람 만나는 데 억지스럽지 않다는 것, 비밀스러운 대화에 안성맞춤이란 것, 일상과 격리돼 있다는 것. 정치인 중 대장 격인 대통령이 골프를 하는 이유에는 두세 가지가 더 붙는다. 정치활동의 일부로, 자기과시를 위해. 하지만 대개는 최고 의사결정권자로서 중압감과 스트레스를 해소하려는 목적이 크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말한 ‘4시간의 자유’는 괜한 소리가 아니다. 정치인의 골프사랑은 골프를 즐긴 대통령을 꼽아봐도 자명해 보인다. 한국에선 박정희·전두환·노태우·노무현·이명박 대통령이 골프를 좋아했단다. 미국에선 첫 골퍼 대통령인 윌리엄 태프트 이후 오바마까지 17명 중 골프를 안 한 이는 셋뿐이고. 덕분에 여기서 흥미로운 지표가 완성된다. 골프스타일을 보니 정치스타일이 보이더란 거다. 책은 국제정치를 가르치는 현직 대학교수가 정치와 골프의 상관관계를 빼낸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역대 한국의 대통령과 미국의 대통령이 골프를 치면서 다 드러낸 통치스타일을 따져본 것이다. 골프장에서 쓴 정치소사인 셈이다. ▲“골프치지마 경제 살려!” “IS 공습? 난 골프장”박정희는 ‘늦게 배운 도둑질’이었단다. 처음엔 “서 있는 공을 맞히는 게 왜 이리 힘들지”란 푸념도 많았는데 나중엔 푹 빠졌다. 꼿꼿하게 서서 치는 폼이었는데, 퍼팅을 싫어해서도 그랬다. 국가원수가 고개를 숙이는 건 품위 없어 보인다는 게 이유. 주로 9홀만 그것도 ‘원퍼팅 OK’로 게임을 끝내곤 막걸리로 마무리했다. 오바마의 골프집착은 잘 알려져 있다. 지난해까지 임기 5년 동안 214번을 쳤다. 특기는 ‘남의 눈 의식하지 않기’. 2011년 오사마 빈 라덴에 대한 사살작전이 진행되는 상황에도 골프를 쳤다. 2014년 미군이 이라크 IS를 공습했을 땐 바로 몇 시간 뒤 골프장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골프를 치긴 쳤으나 슬쩍 이름이 빠진 이가 있으니 김영삼이다. 특유의 어록에 “골프의 단점은 너무 재미있다는 것”이 들어간 적도 있다. 그런데 단칼에 골프를 끊어낸 계기가 있으니 바로 ‘엉덩방아’다. 1989년 김종필과 세 차례 골프회동을 통해 3당 합당을 이끈 성과를 냈지만 그 한 라운드서 티샷을 하다가 그만 엉덩방아를 찧은 것이다. 이후 김영삼은 골프를 끊었다. 나아가 “재임기간 중 골프 안 친다”고 선언해버렸다. “왜? 경제를 살려야 하니까.” 대통령의 비장한 선언은 이내 ‘공직자 골프금지령’으로 치환됐다. 골프가 짧지 않은 동안 ‘금기스포츠’가 되고 ‘몰래하는 운동’이었던 건 김영삼의 ‘업적’이었다. ▲골프 치며 다 드러낸 통치본성 저자가 주목한 인물은 전두환이다. 역대 대통령 중 최고의 골퍼이자 ‘골프정치의 달인’이라고 평가했다. 주로 ‘자기과시’로 골프를 이용했는데, 앞뒤 한팀씩 비우고 치는 ‘황제 골프’도 전두환에서 나왔다. 정확하게 재지 않는 ‘장쾌한 골프형’이다. 저자는 이런 골프를 하는 정치인은 기회를 잡았을 때 모두를 걸고 도박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이에 비해 이명박은 ‘전략적 플레이형’. 코스의 길이, 벙커와 워터해저드의 위치 등을 사전에 철저히 파악한다. 사실 정치도 그랬다. 청계천 복원이니 교통체계 개선이니, 국민에 주목받을 일인가를 면밀히 따져보고 삽을 꽂았다. 미국에선 빌 클린턴과 오바마가 비교된다. ‘규칙무시형’과 ‘규칙준수형’의 대표주자다. 클린턴은 규칙을 안 지키는 골프로 유명하다. 멀리건을 너무 받아내 ‘빌리건’이란 별칭까지 얻었다. 전설의 골퍼 잭 니클라우스와 게임을 할 때도 빌리건을 50개나 쳤다는 일화가 있다. 반면 오바마는 알아서 벌타 받고 알아서 타수 계산하는 정직한 유형. 한 홀에서 10타를 쳐도 이걸 다 적을 정도니. 디보트도 메우고 벙커모래도 정리하는 부지런을 떨기도 한다. ▲“골프를 보면 사람을 안다” 딱히 결론은 없다. 재미삼아 읽으면 된다. 드라이버에 실린 역대 대통령의 정치력을 십분 이해한다고 해도 이제와서 어쩔 도리는 없지 않나. 다만 미래의 대통령 감을 고를 땐 유용할지도 모르겠다. 골프채 한번 쥐어주면 성격·도덕성·정치성향·통치유형까지 주르륵 다 빠진다는 저자의 판단을 믿어보면. 저자는 특히 규칙준수를 중시했다. 골프규칙은 골프장에 들어서는 순간 누구나 하는 무언의 약속이 아니냐고. 지키지 않는 게 이상하다는 거다. 하나만 덧붙이자. 올 초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한 골프활성화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한 박근혜 대통령은 골프를 치지 않는다. 못 치는지 안치는지 모르지만 아쉽게는 됐다. 저자나 독자나 얘깃거리 한점을 뚝 떼어낸 셈이니. 통치스타일이 골프로만 알 수 있는 거냐고 따진다면 할 말이 없긴 하다.
- LS그룹, 3개사 대표 교체..'새로운 리더십 구축'
- [이데일리 정태선 기자] LS그룹은 8일 오전 이사회를 열고 LS-Nikko동제련을 포함한 3개 회사의 대표이사를 교체하는 등 인적쇄신에 초점을 맞춘 2016년 임원인사를 확정했다. LS그룹은 “3명의 대표이사 신규선임과 함께 올해 경영성과와 내년도 경영환경 등을 고려해 부사장 3명, 상무 4명, 신규이사 10명을 등 총 20명의 승진 임원인사를 단행, 지난해(36명) 보다 규모를 대폭 줄였다”고 밝혔다.LS(006260)-니꼬동제련은 도석구 LS 부사장이, 가온전선은 김연수 LS I&D 부사장이, LS네트웍스는 이경범 부사장이 각각 대표이사 CEO로 신규 선임돼 회사를 이끌 예정이다. 이들은 새로운 리더십을 구축할 전문경영인으로 조직분위기를 쇄신하고 그룹의 성장을 주도할 수 있는 능력을 겸비한 것으로 평가를 받아왔다.도석구 LS-니꼬동제련 대표 .LS-니꼬동제련 CEO로 선임된 도석구 부사장은 2008년 그룹의 지주회사 전환은 물론 안정적 정착에도 기여했다. 특히 지주회사 최고재무책임자(CFO)를 역임하며 경영환경 변화 대응을 주도하고 자회사들의 재무건전성 확보와 리스크 관리 등을 통해 그룹의 가치제고에도 탁월한 성과를 이뤄냈다는 평가다.또 가온전선을 맡는 김연수 부사장은 미국 수페리어에식스(SPSX)의 구조조정 PMO(Project Management Officer)로서 강한 업무 추진력과 글로벌 비즈니스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경범 부사장은 LS네트웍스 브랜드사업본부장으로 프로스펙스, 스케처스, 몽벨 등의 브랜드 사업을 성공적으로 주도했다는 평가다.김연수 가온전선 대표LS그룹 관계자는 “지난해 LS(006260)전선, LS(006260)엠트론, 예스코, LS메탈 대표이사 교체까지 포함하면 그룹의 주력 계열사 대표이사가 대부분 교체되어 CEO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셈”이라고 말했다.이번 인사에서 부사장으로 승진한 LS산전의 김원일 전무는 융합사업본부장으로 초고압사업과 에너지신사업인 스마트그리드, ESS 분야 등의 사업개발 역량과 엔지니어링 역량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E1의 윤선노 재경본부장 전무는 올해 목표대비 세전이익을 초과 달성하고 자회사 흑자경영을 주도했고, E1 최영철 해외사업본부장 전무는 신규 선박을 적극 유치해 LPG 시운전 작업물량을 증대시키고 구매선 다변화 및 운송비 절감 등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승진했다.상무 승진자는 문명주 ㈜LS 경영기획부문장, 김동현 LS산전 재경부문장 CFO, 이동수 LS-니꼬동제련 영업담당, 정교원 GCI 대표이사 등 4명이다.또 이재영 구매물류부문장 CPO, 김승환 소재영업부문장, 이상호 재경부문장, 김종필 품질부문장, 김환 구미·인동지원실장(이상 LS전선), 신동혁 전력인프라사업본부 국내사업부장, 손태윤 재경부문 법무실장(이상 LS산전), 박성실 기술담당, 정경수 Rebuilding 담당(이상 LS-Nikko동제련), 천정식 운영본부장(E1) 등 10명이 이사로 신규 선임됐다.LS그룹 관계자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 주력 계열사 CEO를 대부분 신진인사로 교체한 것과 함께 이번 인사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상무 이상 승진을 최소화하고 지난해 수준의 신규 이사를 선임하는 등 하후상박(下厚上薄) 인사를 통해 조직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분위기를 쇄신코자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올해 초 지주회사인 ㈜LS의 최고전략책임자(CSO)로 영입한 안세진 전무를 시작으로, 이준우 ㈜LS 경영기획담당 이사 등 각 사별로 역량이 검증된 외부 인재를 추가 영입해 그룹의 미래준비 및 사업포트폴리오 재편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이경범 LS네트웍스 대표회사 관계자는 “내년에도 경영 환경 측면에서 저성장과 불확실성이 예상되는 이번 임원인사는그룹의 사업재편을 가속화하고 조직분위기 쇄신에 중요한 발판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 관련기사 ◀☞ [M&A 흥망성쇠]③`스몰 M&A 강자` LS그룹, 군살 빼고 본업 유턴☞ 구자열 LS그룹 회장, 청년희망펀드에 20억 기부☞ LS전선, 美 5700만 달러 규모 송전 케이블 계약☞ 亞 8개국 전력청, LS산전 스마트 에너지 사업 벤치마킹☞ LS산전, 5년 연속 글로벌 100대 혁신기업 선정☞ 세계 100대 혁신기업 '삼성·LG전자·LS산전' 5년 연속 선정
- YS 마지막 가는 길은 '화합과 통합'의 길
- [이데일리 최훈길 기자]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마지막 가는 길은 정적(政敵)까지 품은 ‘화합과 통합’의 길이다. 국가장을 주관하는 장례위원회에는 고인의 유지를 살려 보수와 진보, 산업화와 민주화 세력 모두가 참여한다. 행정자치부는 24일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 국가장 장례위원회’ 장례위원으로 총 2222명을 구성했다고 밝혔다. 정부 측은 808명, 유족 측은 1414명을 추천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1404명), 김대중 전 대통령(2375명) 등 과거 장례위원 규모를 고려할 때 역대 최대 수준이다.장례위원회 위원장은 황교안 국무총리가 맡았다. 부위원장으로는 정갑윤·이석현 국회부의장, 이정미 헌법재판소 수석재판관, 황찬현 감사원장, 홍준표 경남지사, 김봉조 민주동지회 회장 등 6명이 위촉됐다. 라이벌 관계였던 상도동·동교동계 인사들은 ‘공동 상주’로 나섰다.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창립 회원 300여명이 장례위원에 이름을 함께 올렸다. 김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공동대표였던 민추협은 전두환 군사정권에 저항한 재야인사와 정치인들이 만든 단체다. 이들이 맞서 싸웠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도 장례위원회 고문으로 이름을 올렸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김종필·고건·정운찬 전 총리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서청원 새누리당 최고위원, 손학규 새정치민주연합 전 상임고문 등도 고문에 포함됐다.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김영삼 전 대통령께서 서거하시기 전에 마지막 남기신 대국민 메시지가 통합과 화합”이라며 “통합과 화합의 뜻에 따라 대척점에 계셨던 전직 대통령도 모두 모셨다”고 말했다. 오는 26일 국회에서 열리는 영결식에서 조사는 황교안 국무총리가, 추도사는 김수한 전 국회의장이 맡는다. 23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김영삼 전 대통령 빈소에서 의장병들이 근무를 서고 있다. (사진=사진공동취재단)▶ 관련기사 ◀☞ [김영삼 서거]조희연 "젊은 세대 큰 혜택…고인 정신 이어갈 것"☞ [김영삼 서거]장례위 2222명 구성..역대 두번째 규모(1보)☞ [김영삼 서거]김부겸 "YS의 용기가 늘 부럽다"☞ [김영삼 서거]박관용 "YS 유언, 진정한 민주주의 해달라는 것"☞ [김영삼 서거]박주선 "통합과 화합의 유지 받들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