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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검색결과 45건

전국 최초 대전서 서예 진흥 핵심기관 문 열었다
  • 전국 최초 대전서 서예 진흥 핵심기관 문 열었다
  • [대전=이데일리 박진환 기자] 전국 최초로 대전에서 서예 진흥을 위한 핵심 기관이 설립됐다.대전시 서예진흥원에서 2일 개원식이 열리고 있다. (사진=대전시 제공)대전시는 2일 ‘대전시 서예진흥원’의 개원식을 열고, 본격적인 운영을 알렸다. 개원식에는 이장우 대전시장을 비롯한 대전시의회 의원, 서예 전문가들과 일반시민들이 참여해 진흥원의 개원을 축하했다. 대전시는 올해 초 서예진흥원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 전문성과 풍부한 경험을 가진 수탁기관을 공모했으며, 한국서예단체총연합회 대전지회를 선정했다. 이후 직원을 공개 채용하고, 지난달부터 개원 및 사업 추진 준비를 해왔다.현판개막식으로 시작된 개원식은 서예의 발전과 진흥의 염원을 담은 ‘서예융성’이라는 축하 휘호 쓰기와 대전 서예를 대표하는 원로·중견작가 70여명의 대표 서예 작품을 관람하는 순으로 진행됐다. 대전 중구 선화동 테크노파크 7층에 있는 서예진흥원은 서예교육 전문인력 양성 프로그램, 교육 및 체험 프로그램, 대전 서예단체 및 서예인 실태조사 수행 등 서예 진흥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게 된다.이날 이장우 대전시장은 “대전은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선생 등 서예 대가의 맥을 이어온 고장으로 대전시 서예진흥원이 앞으로 서예 진흥의 핵심 기관으로서 큰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한다”며 시민들의 많은 관심을 당부했다.
2024.05.03 I 박진환 기자
정몽주의 선비정신 용인에서 살아나다 '제19회 포은문화제'
  • 정몽주의 선비정신 용인에서 살아나다 '제19회 포은문화제'
  • [용인=이데일리 황영민 기자]고려 말 충신 포은 정몽주 선생을 기리는 ‘제19회 포은문화제’가 7일 용인특례시 처인구 모현읍 포은 선생 묘역에서 막을 올렸다.포은문화제의 백미 전국 한시백일장.(사진=용인문화원)8일까지 진행되는 올해 포은문화제에서는 정몽주 선생을 주제로 한 공연과 어린이 포은스쿨, 포은학당 및 용인시 민속예술제, 전국 한시 백일장, 서예 퍼포먼스 등 각종 행사가 펼쳐진다. 이날 개막식에는 이상일 용인특례시장과 윤원균 용인특례시의회의장을 비롯해 전현직 용인문화원장과 문화제를 기획한 문화원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이상일 시장은 “우리가 이렇게 포은 선생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은 포은 선생으로부터 교훈을 얻어 우리가 살고 있는 용인특례시와 대한민국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다”라며 “포은 선생은 나라와 백성을 위한 일이라면 목숨도 바칠 각오로 활동했고, 성리학뿐 아니라 외교와 군사 분야에서도 훌륭한 업적을 남긴 개혁가였다”고 강조했다. 이 시장은 “조선시대 퇴계 이황 선생과 정암 조광조 선생, 학포 양팽손 선생과 우암 송시열 선생 등이 흠모했던 포은 선생이 용인에 자리 잡게 된 이유, 포은 선생의 활동, 그분의 훌륭하고 서정적인 여러 시(詩)들이 시청에서 발간하는 ‘용인소식’ 10월호에 잘 실려 있으니 살펴보기 바란다“며 ”포은 문화제가 선생의 정신을 기릴 뿐 아니라 교훈의 실천을 통해 용인을 바꾸는 역할을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7일 포은문화제 개막식에서 이상일 용인특례시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사진=용인시)최영철 용인문화원장은 기념사를 통해 “19회를 맞이한 포은 문화제는 초창기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쌓인 연륜만큼이나 다양한 내용을 담아내 경기도를 대표하는 문화제로 발돋움했다”며 “많은 시민이 포은 정몽주 선생에게서 배우고 본받을 수 있는 더 좋은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 앞으로도 노력하겠다”고 했다. 한편, 용인특례시는 포은 정몽주의 사상과 선비 정신을 상세하게 기록한 ‘용인소식’ 10월호를 행사장에 비치했고, 많은 시민들이 시민들이 이를 집어들고 내용을 살펴봤다. ‘용인소식’은 용인특례시의 다양한 시정(市政)과 사업, 각종 행사·뉴스·생활정보 등을 알리는 타블로이드판 월간지로 구독을 원하는 시민들이 매달 1000여명씩 늘어나고 있다. 구독을 희망하는 시민은 시청 공보관실로 전화하면 우편으로 받아 볼 수 있다.
2023.10.08 I 황영민 기자
역사를 바꾼 한 방울, 독약
  • 역사를 바꾼 한 방울, 독약 [물에 관한 알쓸신잡]
  • [최종수 토지주택연구원 연구위원] “죄인은 사약을 받으라.”죄인은 임금을 향해 큰절을 올리고 두 손으로 약사발을 들어 사약을 마십니다. 한 사발을 다 마시기도 전에 죄인은 피를 토하면서 쓰러집니다. 사극에서 빠지면 왠지 섭섭한 단골 장면입니다.(이미지=이미지투데이)죽음을 명한 약이기는 해도 임금이 내렸기 때문에 아무나 사약을 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의 사회적 지위가 있어야만 가능했지요.사약은 사람을 죽게 하는 약이니 사약의 ‘사’는 당연히 ‘죽을 사(死)’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틀렸습니다. 임금이 하사하는 약이라는 의미로 ‘줄 사(賜)’를 씁니다.기억해 보면 사약을 받는 죄인은 대부분 명망 있는 선비거나 궁궐 내 왕의 친인척으로 대부분 지체 높은 분들이었습니다. 사약은 고위 관료나 왕실 친인척이 큰 죄를 지었을 때 임금이 내리는 특혜성 처형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사약을 받은 사람은 왕의 처소를 향해 네 번 큰절을 올리고서 마시는 게 관행이었습니다.사약은 대체 무엇으로 만들었기에 한 사발도 마시기 전에 피를 토하면서 죽는 걸까요? 사약은 임금이 내리고 사람을 죽이는 약이었기 때문에 아무나 조제할 수 없었습니다. 궁중의 의약을 만드는 내의원에서 철저한 보안 속에서 제조하고 관리했기 때문에 아쉽게도 사약에 대한 ‘레시피’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관련 기록이나 문헌이 남아 있지 않아 사약 성분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고 다만 추정만 할 뿐이지요. 당시 독이 강한 것으로 알려진 비상, 부자, 천남성과 같은 재료를 섞어서 제조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사약은 임금이 죄인을 죽이는 약이지만 정치적 반대 세력의 손에 들어가면 임금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었기 때문에 사약 조제법을 극비에 부치는 것은 당연했을지도 모릅니다.(이미지=이미지투데이)조선시대 독살설이 떠도는 임금과 세자는 우리에게 익숙한 문종, 단종, 연산군 등을 비롯해 10명이 훌쩍 넘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임금을 비롯한 왕족은 늘 독살을 두려워했고 음식에 독이 들어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수라상 음식을 사전에 맛보는 기미상궁을 뒀습니다.정확한 ‘레시피’도 없고 의학 지식도 변변하지 않다 보니 약발이 좋은 ‘죽여주는’ 사약을 늘 만들 수는 없었나 봅니다. 더군다나 사약을 받을 죄인이 먼 귀양지에 있는 경우 여러 날을 운반해 가는 동안 사약이 상해 약효가 떨어지는 경우도 비일비재했을 겁니다.상황이 이렇다 보니 약발이 좋지 않아 죄인이 사약을 마시고도 죽지 않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사약을 조제한 내의원에서도 이런 경우에 대비해 사약을 만들어 보낼 때는 추가로 ‘리필’이 가능하도록 여유 있게 챙겨 보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송시열, 조광조가 받은 사약도 약발이 시원찮은 사약이었는지 여러 사발을 마시고 나서야 숨을 거뒀다고 합니다.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사약을 받은 임형수라는 사람은 무려 16잔의 사약을 마시고도 죽지 않아 결국 목을 매어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그의 기록을 보면 사약을 마시는 도중 사약을 전하러 온 의금부 서리를 보고 ‘그대도 한 잔 마시겠는가?’라는 말을 건네는 여유까지 부리며 사약을 마셨다고 합니다. 사극에서 단골처럼 등장하는 사약 사발을 마시다 말고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것은 모두 극적 효과를 위한 설정이라고 할 수 있지요.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독을 이용해 사람을 죽이는 독살은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독살이 인기가 높았던 이유는 다른 방법에 비해 은밀하게 죽일 수 있었고, 법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에는 사망 원인을 명확하게 밝혀낼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타살이 의심되어도 독을 검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명확한 증거를 가지고 밝혀내기는 쉽지 않았을 겁니다. 대부분의 독살이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이뤄졌던 것에 비해 조선시대 사약은 중앙정부에 의해 공공연하게 이뤄졌다는 점은 다른 나라에서는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사례입니다.죄인을 사형에 처하는 방법은 목을 베는 참수형이나 목을 매다는 교수형이 간단했을 텐데 왜 약발도 변변치 않은 약을 만들어서 보내는 번거로운 방법을 택했을까요? 이유는 조선시대 통치이념의 근간이었던 유교사상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이미지=이미지투데이)당시 중죄를 지은 죄인에게 극형의 처벌법은 교수형이나 참수형이 일반적이었는데 이 처벌법은 신체를 온전히 보존할 수 없었습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몸은 머리카락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강했던 당시에 신체를 훼손한다는 것은 사람답게 죽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었지요.이에 비해 사약은 신체를 훼손하지 않고 깨끗하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이었던 셈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교수형과 참수형은 공개된 장소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본인과 가문에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남기게 됩니다. 이에 비해 사약에 의한 사형은 사약을 들고 온 몇 사람만 보기 때문에 공개적인 불명예는 피할 수 있었지요. 명예와 명분을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겼던 당시 선비들은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치욕을 남기고 싶지는 않았을 겁니다. 당시 사회적 배경을 고려하면 임금이 사약을 내리는 것은 임금이 할 수 있는 일종의 배려이지 특권층만 누릴 수 있는 특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많은 사람들이 때로는 응당한 처분으로 때로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약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죄인에게 사약을 내려라”하던 공공연한 사약(賜藥)은 사라졌지만 미움이나 돈 때문에 누군가를 독살하려는 사약(死藥)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습니다.■최종수 연구위원(박사·기술사)은△토지주택연구원 연구위원 △University of Utah Visiting Professor △국회물포럼 물순환위원회 위원 △환경부 자문위원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 자문위원 △대전광역시 물순환위원회 위원 △한국물환경학회 이사 △한국방재학회 이사
2022.06.25 I 이명철 기자
역사에 대한 밝은 안목과 바른 실천
  • [김병일의 선비이야기]역사에 대한 밝은 안목과 바른 실천
  • [김병일 도산서원 원장·전 기획예산처 장관]대선 정국에서 국가 리더십에 관심이 높아지자 역사적 인물을 재조명하는 일이 잦다. 한 TV채널에서 태종 이방원을 소환하고 있는 것이 좋은 예다. 어떤 역사학자는 사석에서 드라마를 보고 역사 공부를 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현실에서 드라마 작가나 식자층, 지도층의 역사 인식은 일반인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에 전달하는 사람이나 전달받는 사람 모두 역사와 인물에 대해 평소 밝은 안목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먼저, 전체를 보고 판단해야지 부분만 보아서는 안 된다. 역사는 시간이라는 무대 위에서 여러 요소들이 관계를 맺으며 전개되는 과정이다. 이것을 무시하고 자기에게 필요한 부분만 인용하면 역사 오용이다. 다음으로, 역사에서 장점을 찾아 배워야지 작은 단점만 찾아 비판하는 것도 금물이다. 특히 오래 검증된 역사적 위인은 더욱 신중해야 한다.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도 등장한 포은 정몽주 선생(1337~1392)에 대한 평가가 대표적이다.포은은 고려에는 충신이나 조선 건국에는 걸림돌이 되어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되고 3개월 뒤 조선은 건국된다. 그러나 불과 10년 후 태종은 그를 만고의 충신으로 높이며, 명예와 관작을 회복시키고 자손도 등용하였다. 또 100여년이 지난 중종 때에는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뿌리내린 분으로 떠받들어지며, 공자가 모셔진 문묘에 조선 최초로 모셔진다. 고려의 충신인 포은이 조선에서 최고의 학자이자 충절의 롤모델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1517년, 퇴계 선생(1501~1570) 17세 때다.50년 세월이 흘러 만년의 퇴계에게 한 제자가 “앞 왕조(고려)에서 왕씨의 후계를 세운 사람이 신씨(우왕과 창왕)였는데, 포은 선생은 그대로 받들면서 물러나지 않았으니 뒤에 공이 있었다 할지라도 어찌 속죄 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퇴계는 “그렇지 않네, 이어지게 한 사람은 신씨이지만 왕씨의 종사가 아직 망하지 않았으므로 포은께서 섬긴 것이네.”라고 답하였다. 포은이 나라를 위한 충성심과 성리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높이고 배워야지 고려 말 우왕과 창왕을 섬긴 그의 처신을 문제 삼아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퇴계의 이런 생각은 다시 100여년 지나 우암 송시열 선생(1607~1689)에게 계승된다. 우암은 포은 묘소 앞 신도비문에 “퇴계 선생의 말씀은 참으로 옳다.”고 남겼다. 퇴계와 우암으로부터 역사를 보는 안목과 위인의 장점을 배우려는 지혜를 볼 수 있다.역사적 안목은 사명감과 실천력과 직결된다. 당시 조선 통치이념은 인간의 착한 본성과 올바른 이치를 지향하는 성리학이었지만, 현실에서는 골육상쟁의 왕위 쟁탈과 선비들이 죽거나 ㅤ쫓겨나는 사화가 이어졌다.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퇴계는 이에 대해 ‘임금 한사람만 성군이 되도록 하기보다 근본적으로 백성이 깨어나야 한다. 그러려면 솔선수범하며 이끌어갈 엘리트 선비가 육성되어야 한다. 이런 선비를 길러내려면 민간이 훌륭한 선현을 모시고 공부하는 서원을 설립하는 것이라’ 고 확신하였다. 그래서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 선생을 모신 백운동서원을 1550년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격상시키는 일에 앞장섰다. 오늘날의 소수서원이다.이어서 퇴계는 포은을 모시는 서원을 세워야 한다고 판단하고 선생이 자란 외가가 있는 영천의 제자들에게 권하였다. 이에 김응생, 노수, 정윤량 등 제자들은 1553년 서원을 창설하고 이듬해 두 번째로 사액을 받았다. 바로 임고서원이다. 서원에서 긴요한 책을 구하러 온 제자에게 임금이 하사한 책 《내사성리군서內賜性理群書》를 건넸다. “아니 임금이 내려준 책을 남에 주다니”라는 사람에게 퇴계는 “서원에 보내면 성현과 후학을 위하는 것인데 어찌 남이라 할 수 있는가”라며 관철했다. 책은 혼자 읽는 것보다 많은 학자들이 읽고 실천하면 더 이롭다고 여겼기 때문이다.역사와 위대한 인물을 공부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진지한 사유와 치열한 행동을 통해 과거에서 교훈을 얻고 미래를 현명하게 설계하는 안목을 키우고 실천하는 것이다. 역사인물에 대한 호출이 잦아진 현실에서 모두 잊지 말아야 할 점이다.
2022.01.07 I 송길호 기자
 ‘왕의 숲길’ 걸으며 세종의 애민을 엿보다
  • [여행] ‘왕의 숲길’ 걸으며 세종의 애민을 엿보다
  • 세종대왕릉인 ‘영릉’의 홍살문과 정자각까지 이어진 향로와 어로[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훈민정음’(訓民正音). 한글이 창제됐을 당시의 공식 명칭이다. 이름에서조차 구구절절 백성의 고초를 살피는 세종의 따뜻한 마음씨가 묻어난다. 날마다 듣고 쓰는 우리말과 글이지만, 정작 우리는 한글과 세종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세계에서 유일하게 만든 사람과 반포일, 창제원리가 알려진 뛰어난 문자다. 다가오는 한글날(10월 9일). 세종이 잠들어 있는 경기도 여주에서 한글을 만든 세종의 고마움을 생각하고, 우리말과 글을 소중히 여기며 제대로 쓰고 있는지 되돌아보는 것은 어떨까?◇영릉(英陵)과 영릉(寧陵)을 잇는 ‘왕의 숲길’을 걷다여주는 세종과 인연이 깊은 고장이다. 능서면에는 세종이 550여년 동안 잠들어 있는 영릉(英陵)이 있다. 남한강에 자리한 천년고찰 신륵사는 세종의 원찰이 되면서 세간에 더욱 알려졌다. 점동면 덕평리에 있는 제간공 권규의 묘역 역시 빠트릴 수 없다. 태종의 셋째 딸이자, 세종의 누이인 경안공주가 잠들어 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과 경안공주는 우애가 남달랐다. 천성과 기품이 서로 닮아서 궁에서 그 현명함이 함께 일컬어졌다고 한다.세종의 흔적이 곳곳에 남은 여주에서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영릉이다. 영릉은 조선 4대 임금인 세종과 그의 비인 소헌왕후가 함께 묻힌 조선 최초의 합장묘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원래는 지금의 서울 서초구 내곡동 헌릉 자리에 있었다. 세종의 비인 소헌왕후가 승하(세종 28년)하자 당시 헌릉 서쪽에 쌍실의 능을 만들고 오른쪽 석실은 세종을 위해 만들어 놓았다가 세종 승하 후 합장했다. 하지만 이후 영릉 자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이어지자 1469년(예종 1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장했다.세종대왕릉인 ‘영릉’(英陵)과 효종대왕릉인 ‘영릉’(寧陵)을 잇고 있는 ‘왕의 숲길’영릉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효종이 잠들어 있는 영릉(寧陵)이 있어 함께 둘러보기 좋다. 영릉(寧陵)은 효종과 그의 비 인선왕후의 능이다. 이 두 영릉을 영녕릉(英寧陵)이라 부른다. 영릉에서 영릉(寧陵)까지는 ‘왕의 숲길’이라는 약 700m의 산길을 걸어야 한다. 훗날 정조가 이곳에 와서 효종의 영릉을 참배한 후 이어서 세종의 영릉을 참배했는데, 그때 걸었던 길이었다는 기록에서 왕의 숲길이라고 이름 붙었다.날씨가 좋다면 여강길의 6코스와 4코스를 걸어보는 것도 좋다. 여강길 6코스인 ‘왕터쌀길’(10.2km)은 남한강(여강)을 곁에 두고 걸을 수 있고, 4코스인 ‘5일장터길’(13km)은 신륵사에서 출발해 세종대왕릉까지 이어지는 길이다.여주한글시장 상가에 설치된 세종대왕 조형물◇500년 역사의 여주장 잇는 ‘한글시장’여주 시내에는 한글을 주제로 한 ‘한글시장’이 있다. 한글시장은 5개 구역으로 나뉜다. 1구역은 여주시청 입구에서 시작하고, 4구역까지 차례로 이어진다. 중앙로를 중심으로 양옆에 골목이 연결되는데, 벽화를 보려면 2구역과 3구역 사이를 찾는다. 이곳에 세종대왕의 업적을 표현한 벽화가 있다. 탄생부터 즉위, 측우기 제작, 훈민정음 창제까지 세종대왕의 일대기를 재미있게 묘사했다. 벽화가 있는 낮은 담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그림의 선명한 색이 골목을 환하게 만든다.벽화를 좀 더 보고 싶다면 4구역 벽화골목으로 가자. 열심히 사군자를 그리는 세종대왕 모습이 제법 진지하다. 좁은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갈수록 추억에 빠져든다. 말뚝박기에 푹 빠진 장난꾸러기들의 익살스러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길지 않은 골목에서 문득문득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여주한글시장 전경여주 14개 마을 주민에게 들은 이야기와 채집한 물건을 전시하고 있는 ‘여주두지’도 근처다. 두지는 쌀을 보관하는 ‘뒤주’를 한자로 표기한 말. 새색시가 타던 가마와 우편배달부의 신발, 이발소 가위 등 소소한 물건이 가지런히 놓였다. 여주 사람들의 일상적인 생활과 밀접한 이야기와 물건이라 더 마음이 간다.여주두지를 돌아본 뒤에는 소년 세종 포토존으로 향한다. 영특해 보이는 소년 세종 동상이 인자한 표정으로 책을 들고 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발걸음을 멈추고 이곳에서 기념사진을 남긴다. 포토존 옆에 마련된 의자는 자음을 형상화해 눈길을 끈다.한글시장에는 다양한 한글도 만날 수 있다. 시장 간판 대부분은 한글이다. 시장 입구 바닥에는 훈민정음이 새겨졌고, 하늘에 알록달록한 한글 작품이 걸렸다. 글자로 사용하던 한글이 미술 작품으로 다가오는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우암 송시열 선생의 영정을 모신 대로사◇영릉(寧陵) 보며 비통해한 ‘대로’ 송시열을 기리다한글시장에서 남한강 쪽으로 도로 건너편에 ‘대로사’(강한사)가 있다. 대로사는 송시열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다. 송시열은 살아생전 여주에 머물 때마다 이 자리에서 효종의 능인 영릉(寧陵)을 바라보고 비통해했고, 후진에게는 북벌의 대의를 주장했다고 한다. 이에 정조는 유생들의 요청에 송시열을 기리는 영당(影堂)인 대로사(大老祠)를 짓도록 허락했다.홍살문을 지나자 대로사비각, 중문을 지나면 대로서원 강당, 삼문을 지나면 우암의 영정을 모신 대로사 본채가 나온다. 대로사비각(경기도 유형문화제 제84호)은 정조가 친히 비문을 짓고 전서로 글씨를 쓴 비석이다. 장대한 비석 우측 상단에 ‘어필’이라는 글씨가 있다.대로서원 강당중문을 지나면 대로서원이다. 팔각지붕에 정면 6칸 측면 4칸의 품위 있는 건물이다. 강당에 올라서니 여강에서 불어오는 강바람이 시원하다. 강당 처마 밑에는 ‘대로서원’ 현판이 걸려있다. 또 안에는 전서의 대가인 이한진의 전서로 된 ‘첨백당’과 황운조가 행서로 쓴 ‘강한루’ 편액, 이기진이 지은 ‘강당상량문’과 1785년에 이조판서 서유린이 짓고 쓴 ‘대로사상량문’도 걸려 있다. 강당 우측의 장린문 너머는 대로사 본채다. 영릉이 위치한 서쪽을 바라보게 세워졌다. 아쉽게도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지금은 문을 닫아둔 상태. 사당에는 송시열의 복제본 초상화가 걸려 있다.대로사의 또 다른 이름은 강한사다. 1871년(고종8년) 흥선대원군은 전국의 서원과 사우를 47개만 남기고 대부분 철폐했는데, 대로사는 다행스럽게도 살아남았다. 이때 명칭을 강한사로 개칭했는데, 이유가 조금 재미있다. 흥선대원군이 스스로를 ‘대로’(大老)라 했기 때문이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자 실학자인 대제학 박규수가 왕명을 받아 쓴 ‘강한사’라는 현판이 남아있다. ‘강한’은 여주의 풍광이 아름답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대로사비
2021.10.08 I 강경록 기자
정약용·김정희 등 선조들 삶 담긴 '옛길' 6개소 명승된다
  • 정약용·김정희 등 선조들 삶 담긴 '옛길' 6개소 명승된다
  • [이데일리 김은비 기자] 문화재청은 ‘삼남대로 갈재’, ‘삼남대로 누릿재’, ‘관동대로 구질현’, ‘창녕 남지 개비리’, ‘백운산 칠족령’, ‘울진 십이령’ 총 6개소의 옛길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으로 16일 지정 예고했다. 과거 옛길은 고려 시대 통치의 목적으로 건설된 역로로 조선 시대로 이어지면서 국가의 중요한 시설로 여겨졌다. 조선 후기에는 상업이 발달하면서 물자의 교류가 활발해졌고, 이용이 빈번한 도로가 대로로 승격되며 9개 대로 체계가 완성됐다. 삼남대로, 관동대로, 영남대로, 의주대로 등의 간선도로는 한양을 중심으로 전국을 연결했으며, 점차 민간교역로의 기능을 맡게 됐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당시 대부분의 옛길이 신작로로 바뀌는 과정에서 길이 확장되고 가로수가 세워지면서 본래 모습을 잃게 됐다. 남은 옛길마저 후대에 임도로 사용되면서 훼손된 경우가 많아 오늘날 남아있는 옛길이 더 이상 훼손되지 않도록 보존할 필요가 있었다.이번 ‘삼남대로 갈재’ 등 6개소의 옛길은 문화재청의 ‘옛길 명승자원조사’ 결과와 관계전문가, 지방자치단체의 추천을 받아 발굴한 옛길 잠재자원 21개소 중 현지조사, 문화재위원회 검토 등을 거쳐 역사문화적 가치, 경관적 가치, 생태적 가치, 활용 가치 등을 고려하여 명승으로 지정 추진됐다.삼남대로 갈재 정상(사진=문화재청)‘삼남대로’는 한양에서 삼남지방(충청·전라·경상)으로 가는 길로, 삼례, 전주, 태인, 정읍, 나주, 강진을 거쳐 해남의 이진항에서 제주에 이르는 약 970리 길을 말한다.이곳은 전라북도와 전라남도를 구분하는 상징적인 장소로 조선 시대 많은 문인들이 이곳을 지났다는 기록을 통해 이곳의 역사적 가치와 중요성을 알 수 있다. 또 송시열이 기사환국으로 사사되기 전 마지막 여정이 갈재였으며, 동학농민군이 장성에서 대승을 거두고 곧바로 정읍으로 향하기 위해 갈재를 넘었다고 한다. ‘삼남대로 누릿재’ 역시 조선 시대 강진과 영암을 잇는 삼남대로의 중요한 고갯길이다. 정약용, 최익현, 송시열, 김정희 등 많은 문사들의 방문기록이 내려오는 등 역사적 가치가 큰 옛길이다. 특히, 정약용은 강진에서 유배를 지내며 월출산과 누릿재를 여러 시와 글로 남기기도 했다. 조선 시대 강진, 해남, 제주 등지로 유배를 떠나는 경로였으며, 반대로 강진, 해남 일대의 선비들이 과거를 치르러 가는 길이기도 했다. 월출산을 넘어 강진으로 가는 길은, 험하지만 거리가 짧은 누릿재와 상대적으로 낮은 고개를 넘어가는 불티재가 있었으나,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누릿재를 주로 이용했다고 한다.관동대로 구질현의 V자형 지형(사진=문화재청)‘관동대로 구질현’은 강원도에서 한양, 수도권으로 향하는 관동대로의 일부다. 길 주변에는 계단식 지형이나 습지가 형성된 것으로 보아 농사를 지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1940년대 중앙선 철로가 개통된 이후에도 주민들은 양동면 시장이나 지평시내를 갈 때에 기찻삯을 아끼기 위해, 또는 소나 말 등을 기차에 싣고 갈 수 없어 옛길을 이용했다고 한다. 이곳은 남한강 수운을 이용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길목으로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이 다니면서 V(브이)자형의 독특한 지형이 형성되어 있고, 옛길을 따라 울창한 수림이 우거져 있어 경관이 빼어나다.창녕 남지 개비리와 낙동강(사진=문화재청)‘창녕 남지 개비리’는 박진 기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옛길로 소금과 젓갈을 등에 진 등짐장수와 인근 지역민들의 생활길로 애용됐다. 일제강점기 지형도에도 옛길의 경로가 기록되어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개비리는 ‘개가 다닌 절벽(비리)’ 또는 ‘강가(개) 절벽(비리)에 난 길’이라는 뜻으로, 선조들은 과거 낙동강의 수위가 지금보다 높아 발아래에는 강물이 차오르고, 아슬아슬한 벼랑길임에도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옛길에 올랐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신작로를 만들 때 자동차가 통행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경사와 너비를 확보하기 어려웠던 덕에 옛길의 모습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벼랑길에서 조망되는 낙동강의 모습과 소나무, 상수리나무 등으로 이루어진 식생이 옛길과 어우러져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명승지이다.백운산 칠족령 전망대에서 바라본 동강(사진=문화재청)‘백운산 칠족령’은 평창과 정선을 연결하는 대표적 고갯길이다. 이곳은 동강(남한강 상류)에 이르는 최단 경로로서 1960년대까지만 해도 동강을 통해 소백산 일대 금강송을 서울로 운송하던 떼꾼들이 애용했다고 전해진다. 길을 따라 감입곡류를 이루는 동강의 빼어난 경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울진 십이령 입구(내성행상 불망비)(사진=문화재청)‘울진 십이령’은 두천원을 기점으로 봉화 인근 내륙의 생산품과 울진 인근의 해산물을 교역하던 십이령의 일부로, 샛재·바릿재 등 옛 십이령의 주요지점이 잘 남아있다. 십이령은 울진과 봉화에 걸쳐 위치한 12개의 큰 고개를 말하며, 영남지방을 대표하는 험준한 길로 사대부보다는 주로 상인들이 오가던 길이었다. 조선 후기 문신 이인행(1758~1833)은 ‘신야집’에 유배지까지의 여정 중 겪었던 험한 길 중 십이령을 첫 번째로 꼽았다. 이곳에서 어염(魚鹽)을 파는 상인들이 끊임없이 왕래하던 모습을 남겼다. 실제 울진 십이령은 울진 내성행상 불망비, 성황당과 주막 터, 현령 이광전 영세불망비 등 보부상과 관련된 역사문화적 요소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특히, 샛재에 위치한 ‘조령 성황사’는 옛 보부상들이 성공적인 행상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오가는 길손들뿐만 아니라 주민들이 정기적인 배향을 하는 유서 깊은 곳이다. 문화재청은 옛길 6개소에 대해 30일간의 예고 기간 동안 각계의 의견을 수렴한 후,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으로 최종 지정할 계획이다.
2021.09.16 I 김은비 기자
100m 병풍 펼친듯..한폭의 동양화 따로 없네
  • [인싸핫플]100m 병풍 펼친듯..한폭의 동양화 따로 없네
  • 금강 건너편 카페에서 바라본 부소담악[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우리 조상들은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흔히 금강산에 비유했다. 충북 옥천의 부소담악(赴召潭岳)도 그중 하나다. 병풍을 펼쳐 놓은 듯 이어지는 바위절벽과 호수의 모습이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이 모습에 반한 우암 송시열은 ‘작은 금강’이라고 예찬했을 정도다.부소담악으로 가는 길. 옥천읍에서 4번 국도에 올라 대전 방면으로 향하다 환경사업소에서 우회전해 이지당을 거쳐 15번 군도를 따라가면 부소담악에 닿는다. 고리산(환산·581m) 둘레를 도는 이 길은 대청호 상류의 물길을 바라보며 달리는 멋진 드라이브 코스. 부소담악은 대청호 상류 쪽 추소리 부소무니 마을 앞에 자리하고 있다. 부소무니는 고리산 자락 아래 물에 뜬 연꽃(연화부수·蓮花浮水)의 명당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부소담악은 부소무니 마을 앞 물가에 떠 있는 산이라 해서 부르는 이름이다.부소담악의 지금의 모습은 대청댐 준공으로 물에 잠기면서다. 이후 칼날 같은 능선만 수면 위에 길게 드러났다. 물에 잠긴 부분의 흙은 씻겨나갔고, 물가에 비친 절벽은 정교한 아름다움을 빚어냈다. 700m에 이르는 이 절벽의 이름은 병풍바위. 봄이면 연둣빛 신록으로, 가을에는 붉은 단풍으로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으며 옥천 최고의 비경으로 사랑받았다.금강 건너편 카페에서 바라본 부소담악 병풍바위고요한 물길을 따라 잘 다듬어진 덱길을 10여 분 따라 걷다보면 장승공원이다. 이곳을 지나 언덕 위로 올라가면 조그만 정자 ‘추소정’이 나타난다. 추소리 마을 이름을 딴 정자다. 대청댐으로 수몰되기 전 이곳에는 추동마을·부소마을·절골 등 세 마을이 있었다. 이후 절골을 제외한 두개 마을 터가 물속에 잠겼다. 추소리는 추동마을의 ‘추’와 ‘부소마을의 ’소‘자를 가져와 붙인 이름이다. 수몰로 인해 마을주민들은 생활 터전과 비옥한 농토를 잃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아름다운 기암괴석을 얻은 셈이다.추소정에 오르면, 나뭇가지 사이로 부소담악이 모습을 드러낸다. 앞쪽으로 야트막한 능선이 악어처럼 웅크린 모습이다. 능선이 강물과 만나는 절벽이 부소담악. 물이 차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오히려 강물과 능선이 어우러진 모습이 장관이다. 날카롭게 솟은 칼바위와 그 사이를 뚫고 나온 할배소나무 등 수천년의 세월의 버텨온 자연의 신비로움 앞에 숙연해진다. 사실 이 모습 제대로 보려면 배를 타고 강 위에서 바라보는 것이 좋다. 추소정 건너편 호숫가에 있는 미르정원에서는 입장객들을 배에 태워 부소담악 일대를 둘러보게 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부소담악 건너편에 자리한 카페에서도 부소담악을 조망할 수 있다. 충북 옥천 부소담악 산책길
2021.06.04 I 강경록 기자
높이 3m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 국보 된다
  • 높이 3m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 국보 된다
  • [이데일리 김은비 기자] 현존하는 우리나라 불교조각 중 삼신불로 구성된 유일한 작품인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이 국보가 된다.문화재청은 보물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불삼신불좌상’을 국보로, ‘울진 불영사 불연’을 비롯해 ‘완주 송광사 목조석가여래좌상 및 소조십육나한상 일괄, ’송시열 초상‘ 등 3건을 보물로 각각 지정 예고했다고 28일 밝혔다.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사진=문화재청)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은 2008년 보물로 지정돼 조선 시대 17세기 불교사상과 미술사 연구의 중요한 사례로 평가받아 왔다. 삼신불은 화엄사상에 기반한 도상으로는 종종 보이지만, 조각품으로는 화엄사 사례가 유일하다.화엄사 대웅전에 봉안된 이들 좌상은 모두 3m가 넘는 초대형 불상이다. 1635년(인조 13년) 당시 유명한 조각승인 청헌과 응원, 인균과 이들의 제자들이 제작했다.최근 발견된 삼신불의 복장유물 등 관련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소실된 화엄사를 재건(1630∼1636)하면서 대웅전에 봉안하기 위해 삼신불을 제작한 시기(1634∼1635년)와 과정, 후원자, 참여자들의 실체가 확인됐다.발원문에 의하면 전국 승려집단의 대표라 할 수 있는 팔도도총섭을 역임한 벽암 각성(1575∼1660)의 주관으로 선조(재위 1567∼1608)의 여덟 번째 아들 의창군 이광(1589∼1645) 부부와 선조의 사위 동양위 신익성(1588∼1644) 부부 등 다수의 왕실 인물과 승려 580여명을 포함한 총 1320명이 시주자로 참여했다.이 삼신불좌상은 화려한 연꽃 대좌(부처가 앉는 자리)와 팔각형 목조대좌에서 결가부좌하고 있다. 거대한 규모와 더불어 단순하면서도 선이 굵게 처리된 조각솜씨로 인해 중후한 느낌을 준다.문화재청은 “당시 가장 유명했던 조각승 집단인 청헌파와 응원·인균파가 참여한 만큼 표현에서도 각 유파의 조각 특징을 잘 보여준다”며 “근엄한 표정의 비로자나불과 석가모니상은 청헌파가 제작한 것으로 판단되며, 부드러운 얼굴에 작은 눈과 두툼한 눈두덩이가 표현된 노사나불상은 응원과 인균의 작품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이어 “17세기에 제작된 목조불상 중 가장 크고, 조각으로 삼신불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불교조각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크고 중요하며, 예술·조형적 수준도 조선 후기 불상 중 단연 돋보이므로 국보로 지정해도 손색이 없다”고 평가했다.울진 불영사 불연(사진=문화재청)보물로 지정 예고된 울진 불영사 불연(가마)은 1670년(현종 11년) 화원으로 추정되는 광현, 성열, 덕진 등이 참여해 조성한 2기의 불교의례용 가마로, 지금까지 알려진 약 20기의 조선 후기 가마 중 형태가 가장 온전하다. 불교목공예의 일종인 불연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울진 불영사 불연은 2기 모두 1670년이란 제작 시기와 승려 학종이 좋은 장인을 만나 불연을 제작한 동기와 배경, 제작에 동참한 시주자, 불연 제작자로 추정되는 스님 등이 기록돼 있어 조선 후기 불교목공예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라고 문화재청 측은 평가했다.완주 송광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및 소조십육나한상 일괄은 1656년(효종 7년) 만든 불상으로, 당시 제작된 나한상 중 수량과 규모 면에서 최대다. 역량이 뛰어났던 17세기 조각장들을 계승한 조각승들이 승려 벽암 각성의 요청을 받아 제작했다.송시열 초상은 조선 중기 정치와 학문에서 뚜렷한 자취를 남긴 성리학의 대가 송시열(1607∼1689)을 그린 18세기 초상화다. 충북 제천 황강영당에 300년 넘게 봉안돼와 그간의 내력이 분명하다. 문화재청은 예고 기간 30일 동안 각계 의견을 수렴·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할 예정이다.
2021.04.28 I 김은비 기자
 만추, 마지막 가을을 ‘완주’하다
  • [여행] 만추, 마지막 가을을 ‘완주’하다
  • 전북 완주와 충남 논산, 금산이 경계를 이루는 곳에 우뚝 솟은 대둔의 명물 금강구름다리. 지상으로부터 80m 정도 높이에 있는 구름다리는 중앙으로 갈수록 흔들림이 더 많아지고 고도감도 절정에 이른다.[완주(전북)=글·사진 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가을이 떠나갈 채비를 한다. 정 없이 떠나는 가을의 멱살이라도 잡아 세우고 싶은 마음에 마지막 늦가을 여행에 나선다. 목적지는 단풍이 남도 땅으로 내려가는 길목인 전북 완주의 대둔산. 노령산맥에 솟아 있는 대둔산은 주위에 오대산, 천등산 등과 한맥을 이루고 있다. 봄의 운해, 여름의 신록, 가을의 단풍, 그리고 한겨울의 설경 등 계절마다 한 폭의 동양화를 그려내는 ‘호남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산이다. 가을보다 겨울이 더 가까운 이 시기, 이번 주말 시간을 내어 대둔산에 올라보는 건 어떨까. 어물어물 하다간 올가을 마지막 단풍도 놓칠 수 있다.바라만 봐도 오금이 저리는 대둔산 명물 ‘삼선줄계단’◇늦가을이 가장 빛나는 ‘호남의 금강산’충남 논산과 금산, 그리고 전북 완주가 경계를 이루는 곳에 우뚝 솟은 산이 대둔산이다. 대둔산은 한듬산을 한자로 만든 이름. ‘한’은 크다, ‘듬’은 두메나 더미, 덩이라는 의미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큰두메 산’이나 ‘큰덩이 산’ 쯤 되겠다. 낙조대, 태고사, 금강폭포, 동심바위, 금강바위, 삼선약수터, 옥계동 계곡 등등. 마치 신이 빚은 듯한 비경이 곳곳에 숨어 있어 사계절 내내 등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대둔산이 가장 빛나는 시기는 단연 늦가을. 형형색색 옷을 입은 병풍 같은 암봉들은 ‘작은 설악산’ 또는 ‘호남의 금강산’이라는 별명이 결코 과언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처럼 넋을 빼앗는 절경에 반해 신라시대 원효대사는 사흘 동안 대둔산에 머물렀다 하고, 만해 한용운과 우암 송시열도 대둔산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글귀를 남겼다.등산로도 다양하다. 1코스는 대둔산도립공원 매표소~동심바위~구름다리~마천대~칠성봉~강군봉 갈림길~용문골 매표소로 이어지는 5.2㎞ 구간으로 3시간 30분이 걸린다. 2코스는 용문골매표소∼장군봉갈림길∼칠성봉∼마천대 구간 2.2㎞로 1시간 50분이 소요된다. 3코스는 운주면 완창리 안심사에서 출발해 서각봉∼마천대∼동심바위∼대둔산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5.3㎞ 구간으로 3시간 50분 정도 잡아야 한다.사실 어느 쪽에서 오르든 상관없다. 아무리 긴 코스를 잡아봐야 3시간 30분 남짓이면 정상인 마천루에 닿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느 쪽에서 오르든 단풍 이파리들이 흩뿌린 선혈이 암봉마다 낭자한 풍광을 만날 수 있다.케이블카를 타고 바라본 대둔산의 단풍과 울퉁불퉁한 암릉◇금강구름다리, 삼선계단 너머 마천루까지 오르다대둔산은 남녀노소 누구나 편하게 오를 수 있는 산이다. 완주 쪽에서 협곡을 타고 오르는 케이블카가 등산로의 절반 이상을 가뿐하게 접어주기 때문이다. 대둔산이 사람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케이블카가 놓이기 훨씬 전인 1972년부터. 아찔한 암봉 사이를 금강구름다리로 잇고, 경사도 51도의 가파른 암봉을 타고 오르는 아찔한 삼선계단이 놓인 뒤에야 대둔산을 오르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케이블카를 타고 상부 정류소에서 내려 정상까지는 700m 정도. 거리는 짧지만 가파른 계단으로 이루어진 오르막길이다. 여기서 10분 정도면 붉은색 금강구름다리에 닿는다. 지상으로부터 80m 정도 높이에 있는 구름다리는 중앙으로 갈수록 흔들림이 더 많아지고 고도감도 절정에 이른다. 구름다리에서 정상 방향으로 길을 이으면 구름다리보다 더 무섭다는 삼선줄계단이 기다리고 있다. 바위 벼랑을 이은 철계단 오르막인데 사다리처럼 가파르고 아래는 천길 낭떠러지라 오금이 저릴 정도다.여기까지 가는 길은 대둔산 단풍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모습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구간이다. 특히 대둔산의 단풍을 이름나게 한 것은 치솟은 암봉이다. 거대한 직벽의 암봉에 선혈이 새어나온 듯 불붙은 단풍의 색감은 농염하기 이를 데 없다.삼선계단에서 마천대까지는 30분 정도면 오른다. 가파른 산길이라 노약자에게는 힘든 코스이지만, 종종 어린아이를 동반한 등반객과 나이 지긋하신 분들의 모습도 보인다. 커다란 개척탑, 즉 마천대가 보이면 정상에 도착했다는 의미다. 대둔산 정상 마천대에 서면 조망이 빼어나다. 정상에서 내려다본 금강구름다리는 기암절경과 함께 어우러진 단풍이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할 정도다.안도현 시인이 ‘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은 잘 늙은 절’이라고 표현한 화암사의 우화루◇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은 잘 늙은 절왁자한 대둔산의 소란스러움에 취해보았다면, 이제는 차분하고 적막한 풍경을 찾아 나설 차례다. 대둔산 인근에서 그런 정취가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이 화암사다. 불명산 자락에 있는 화암사는 조선시대에 지어진 사찰. 세월의 흐름을 멋지게 담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화암사가 유명해진 이유는 안도현 시인의 시 ‘화암사 내사랑’ 때문. ‘나 혼자 가끔은 펼쳐보고 싶은, 작지만 소중한 책 같은 절’이라고 시인이 소개했을 정도. 시인은 ‘구름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은 잘 늙은 절’이라고 화암사를 그려냈다. 이 시를 읽은 이들이 화암사를 찾아들며 세상에 존재가 알려졌다.들머리는 화암사 주차장. 이곳에서 자그마한 계곡을 따라 잰걸음으로 등산하듯 20여분 오르면 절집의 입구에 닿는다. 단풍 짙고 새소리 가득한 이 길에서는 가능한 보폭을 줄이고, 속도를 늦춰야 한다.화암사는 안도현 시인의 글처럼 ‘혼자 가끔 펼쳐보고 싶을’ 정도로 고즈넉하다. 우화루와 적묵당, 대웅전, 그리고 극락전의 높고 낮은 지붕선이 만들어내는 아늑함은 다른 사찰과는 남다르다. 그렇다고 건축물의 가치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화암사의 극락전은 국보로 지정됐을 정도. 신라시대에 창건한 건물이지만, 1605년(선조 38년)에 다시 지었다. 처마를 받치기 위해 하앙이라는 부재를 받쳐 놓은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이곳에서만 볼 수 있다.화암사는 입구(口)자형이다. 우화루와 극락전이 남북으로, 불명당과 적묵당이 동서로 마주보고 있다. 극락전 왼쪽에는 ‘입을 놀리는 것을 삼가라’는 철영제가 있고, 적묵당 뒤편에는 산식각, 우화루 옆에 명부전이 자리하고 있다. 자연적인 지형을 최대한 이용해 조화를 이루도록 한 건축양식에 새삼 선인들의 슬기로움이 느껴질 정도다. 안도현 시인이 ‘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은 잘 늙은 절’이라고 표현한 화암사의 우화루
2020.11.13 I 강경록 기자
 한폭의 수묵화 그린듯, 달도 쉬어 가는 곳
  • [인싸핫플] 한폭의 수묵화 그린듯, 달도 쉬어 가는 곳
  • 한천팔경 중 제1경인 월류봉에 달이 흘러 가고 있다.[영동=글·사진 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충북 영동 황간 일대에는 수묵화같은 풍광 ‘한천팔경’이 있다. 한천팔경의 최고 절경으로 꼽히는 곳이 월류봉(月留峰)이다. 백화산 자락에서 발원한 석천과 민주지산 물한계곡을 이루는 초강천이 만나는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깎아 세운 듯 층층이 솟아있는 봉우리와 그 아래를 휘감아 도는 맑은 물이 일품이다. 한 폭의 수묵화같은 월류봉 자락에는 화룡점정처럼 날아갈 듯 날렵한 정자가 세워져 있다.월류봉은 ‘한천팔경’ 중 제1경이다. 월류봉을 빼고 한천팔경의 나머지 일곱 곳은 사군봉, 산양벽, 용연대, 화헌악, 청학굴, 법존암, 한천정사 등이다. 하지만 자취도 희미하고, 감흥도 크게 일지 않는다. 아마도 옛 선비들이 한천팔경이란 명칭을 붙인 뜻이 오로지 월류봉에 있는 듯하다.해질무렵 바라본 월류봉과 월류정월류봉은 달이 능선을 따라 물 흐르듯 기운다는 모습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제1봉부터 5봉까지 모두 5개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월류정 앞을 흐르는 초강천 건너편에서 바라보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봄과 여름에는 신록이, 가을에는 울긋불긋 단풍의 모습이 있고 겨울에는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있기도 해 계절에 따라 사시사철 각기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루 동안에도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새벽 시간의 풍경부터 해의 방향에 따라 오전 및 오후 늦은 시간, 그리고 달이 뜨는 저녁시간까지 각각 새로운 풍경을 보여주곤 한다.월류봉 주변으로는 둘레길도 있다. 시간과 체력이 허락한다면 1봉부터 5봉까지 다섯개의 봉우리 능선을 타며 산행을 해보는 것도 좋다. 정상의 높이가 그리 높진 않으나 생각보다 가파른 산이라 약간의 체력을 필요로 한다. 월류봉 정상에 다다르면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아래로는 한반도 모양의 특이한 지형도 볼 수 있다.월류봉 주변에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흔적인 한천정사와 송시열 유허비가 남아 있다. 한천정사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은거할 당시 학문을 닦고 후학을 길렀던 곳이다. 이러한 내용을 알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 바로 송시열 유허비다. 월류봉을 위시한 한천팔경도 한천정사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월류봉 표지석 앞, 송시열 유허비 앞, 한천정사 앞에서 바라보는 월류봉의 풍경이 모두 제각각이다.새벽 무렵 월류봉에 걸려있는 달이 모습
2020.04.17 I 강경록 기자
 일제 탄압도 이겨낸 '세병관', 한민족 '혼' 되새기다
  • [여행] 일제 탄압도 이겨낸 '세병관', 한민족 '혼' 되새기다
  • 경남 통영 미륵산(461m) 정상까지 한려수도조망케이블카를 타고 오를 수 있다. 스카이워크 전망대 오르면 통영 시내와 바다 등 탁 트인 풍경을 둘러볼 수 있다.[통영=글·사진 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경남 통영이 역사 속에 등장한 것은 조선 중기 임진왜란이었다. 조선 수군의 근거지인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이 들어서면서다. 통영이라는 지명도 통제영의 준말에서 나왔을 정도다. 과거 ‘충무’라는 지명도 이순신의 시호 ‘충무공’에서 따온 이름임을 미루어 보면 그 역사적 배경 또한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통영이라는 도시는 조선 선조 36년(1603년) 제6대 통제사였던 이경준이 통영성의 중심이었던 지금 자리로 옮겨오면서 시작했다. 지금도 당시의 유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세병관’(洗兵館)과 충무공의 위패를 모신 ‘충렬사’(忠烈祠)가 대표적이다. 일제가 통제영의 시설을 거의 철거·훼손했을 당시에도, 지켜낸 우리 민족의 ‘혼’이다. 조선 삼도 수군통제영의 핵심 객사건물인 ‘세병관’◇국난 극복의 상징 ‘세병관’문호동 여황산 기슭에 선 ‘세병관’(국보 제305호). 삼도수군통제영의 핵심 객사 건물이다. 세병관에 간다는 말은 곧 통영 삼도수군통제영에 간다는 말과 같다. 삼도수군통제영은 지금으로 치면 해군 총 사령부 격이다. 세병관은 정면 9칸, 측면 6칸의 단층 팔작집이다. 조선 후기 건물치고는 기교의 치우침이 없고, 간결하다. 세병관 앞에서 서면 조선 수군의 본영다운 당당함이 느껴진다.세병관 이름은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 ‘세병마’(洗兵馬) 중 마지막 구절 ‘정세병갑장불용’(淨洗兵甲長不用)에서 빌여온 것이다. ‘병기를 닦아 다시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는 뜻으로, 안녹산의 난 때 적군에게 포로가 되는 등 전쟁에 시달렸던 두보의 바람이 담긴 시 구절이다. 전쟁에 대비해 평화를 열자는 유비무환의 의미다.세병관 출입문인 ‘지과문’. 그칠 지(止) 전쟁 과(戈), 즉 전쟁을 멈추는 문이다. 두 글자를 합치면 굳셀 무(武)가 된다. 이 문을 지나면 비로소 세병관에 이른다.세병관은 하루 두번 종을 쳐 시간을 알리던 ‘망일루’를 지나 출입문인 ‘지과문’을 거쳐야 한다. 망일루 누각에는 한여름 더위를 식히고 있는 관광객과 마을 주민이 가득하다. 누각에 서면 강구안부터 동피랑, 서피랑, 미륵산까지 통영의 주요 관광지가 한눈에 담긴다. 이어 가파른 계단을 올라 출입문인 지과문을 지난다. 그칠 지(止) 전쟁 과(戈), 즉 전쟁을 멈추는 문이다. 두 글자를 합치면 굳셀 무(武)가 된다. 이 문을 지나면 비로소 세병관에 이른다.세병관세병관은 웅장하다. 기둥은 군대의 행렬처럼 정연하게 배열했다. 단순하면서도 절도 있는 강한 힘이 느껴진다. 마루 한가운데에 3칸 정도 높게 단을 올린 ‘전패단’(殿牌壇)은 군통수권자인 임금에게 장계를 올리고 어명을 받는 곳이다. 나머지는 넓은 마루 공간으로 사방이 벽없이 뚫려 있다. 서울 경복궁 경회루(국보 제224호)와 여수 진남관(국보 제304호)과 함께 바닥 면적이 넓은 조선 목조건물 중 하나로 손꼽힌다. 창호 문 위쪽에는 사군자와 옛날 군인들의 전투 모습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통제사들의 이름과 통제사 휘하의 직제 등도 적혀 있다. 천장은 궐패가 놓이는 자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연등천장이다. 겹처마는 팔작지붕이다.넓은 마루에 올라 기둥에 몸을 기대면 시원한 바람과 산새소리에 스르르 눈이 감긴다. 한껏 달아오른 폭염도 잠시 쉬어갈 정도다. 그래서인지 통영 시민들도 자주 찾아와 더위를 식히고 가는 숨은 피서지다. 통영의 역사를 보여주는 심장인 ‘12공방’.◇통영의 역사를 보여주는 심장 ‘12공방’세병관 왼쪽 뒤쪽으로 난 문을 지나면 ‘통제영 12공방’과 백화당이다. 조선 수군 최고의 핵심 군사시설이었던 통제영은 전국의 물산과 장인이 몰려들었다. 조선시대 군영과 읍성에는 공방이 있었다. 이들은 군수품 생산은 물론 조정에 보내는 진공품과 중국 사신의 헌상품까지 조달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12공방’이다. 12공방에서는 부채·목가구·나전제품 등을 전문적으로 제작했다. 그렇다고 12개의 공방이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온갖 장인들이 모인 수많은 공방이라는 수사적인 의미가 더 강하다. 시기나 유행에 따라 새로운 공방이 생기고, 없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통제영 12공방에서 나전 체험을 하고 있는 관광객통영 12공방에서 만든 공예품은 하나같이 수준 높고, 질이 좋아 최상품으로 통했다. 대체로 부채·옻칠·장석·그림·가죽·철물·목가구·금은 제품·갓·자개 등을 다뤘다. 지금은 부채·대발·나전칠기·소목(가구)·두석(금속)·소반 등 일부 공방만 남아 있다. 부채를 만드는 ‘미선방’, 목가구를 만드는 ‘소목방’, 금은 제품을 만드는 ‘은방’, 자개를 붙여 나전제품을 만드는 ‘패부방’ 등이다. 일제강점기 후 민간으로 흘러들어간 장인들은 꾸준히 기술을 전수하며 맥을 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도 통영 장인들이 만든 갓·소반·장석·부채·가죽제품·나전 등은 최고의 명품으로 손꼽힌다.지금은 조선 최고의 공예품을 만들던 통제영 12 공방의 명맥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현장을 볼 수 있다. 여기에 체험까지 할 수 있어 더욱 뜻깊다. 더불어, 국가무형문화재를 비롯해 다양한 공예 장인의 작품 제작 시연과 해설도 들을 수 있다. 갓일·나전·소목·두석·소반·대발 등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을 받은 우리나라 최고의 장인들이다.여황산 기슭에 자리한 충렬사◇이순신의 영정을 모신 ‘충렬사’여황산 기슭에는 충렬사도 자리하고 있다. 충렬사는 이순신의 사당이다. 조선 선조 39년(1606년), 7대 통제사로 온 이운룡(1562~1610년)이 왕명에 따라 지었다. 이후 현종 4년(1663년)에 사액 받았다. 같은 해에는 강당과 동·서재를 갖췄다. 이후 통제영이 해체될 때까지 무려 291년간 삼도수군통제사는 봄·가을에 어김없이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충렬사 입구는 2층 누각의 강한루다. 강한루를 지나면 굵은 동백나무들이 눈에 띈다. 양쪽에 늘어서 있는 나무 중 가장 오래 된 이 동백나무는 본래 네 그루였는데, 지금은 두 그루만 남았다. 수령은 400년 정도다. 충렬사의 역사와 함께한 것이다. 꽃이 유난히 붉고 탐스러워 이곳 마을 처자들이 명정샘에서 물을 길어가며 꽃잎 띄우기를 즐겼다고 한다. 충렬사 강한루이곳을 지나 올라가면 외삼문이다. 외삼문 좌우로 비각 여섯 채가 나란히 늘어서 있다. 이들 비각 안에는 광해군 7년(1615년)에 이항복이 짓고 송시열이 쓴 충렬묘비를 비롯해 모두 11기의 비가 들어 있다. 외삼문을 거쳐 중문으로 들어서면 오른쪽이 승무당, 왼쪽이 경충재다. 마당을 거쳐 중문으로 들어서면 좌우로 동재와 서재가 있다. 이곳을 지나 내삼문(內三門)으로 들어가면 충무공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나타난다. 내삼문의 돌기둥 아랫부분 신방석에 새긴 해태의 표정과 모습이 고졸하고 익살맞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맞배지붕을 한 자그마한 건물이다. 이 안에 충무공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충렬사 이순신 장군 영정충렬사에는 진귀한 보물이 있다. 바로 ‘명조팔사품’(明朝八賜品)이다. 명조팔사품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우러 왔던 명나라 수군 도독 진인으로부터 이순신의 빼어난 전공을 보고받은 명 황제 신종이 이순신에게 보냈다는 8가지 보물을 말한다. 도독인 하나와 호두령패 한 쌍, 귀도 한 쌍, 참도 한 쌍, 독전기 한 쌍, 홍소령기 한 쌍, 남소령기 한 쌍, 곡나팔 한 쌍으로 이루어졌다. 신관호가 이를 8폭의 그림으로 그린 ‘명조팔사품도’ 함께 전해지고 있다.동광식당 멍게비빔밥◇여행메모△가는길= 수도권에서 승용차로 통영에 가려면 중부고속도로를 이용해 대전까지 간 다음 통영대전고속도로를 타고 통영나들목에서 빠져 도심으로 들어선다.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이나 서울남부터미널에서 버스를 이용하면 4시간15분 정도 걸린다△가볼곳= 미륵산(461m) 정상까지 한려수도조망케이블카를 타고 오를 수 있다. 1975m의 길이로, 이동하는 길과 스카이워크 전망대에서 통영 시내와 바다 등 탁 트인 풍경을 둘러볼 수 있다. 상부 승강장에서 내려 나무데크 길을 따라 10분쯤 오르면 정상이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섬들이 옹기종기 떠 있는 파란 바다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맑은 날에는 멀리 대마도까지 보인다. 통영 ‘스카이라인 루지’도 인기다. 리프트를 타고 출발지점으로 올라간 뒤 특수하게 제작된 썰매를 타고 내리막을 질주하는 레포츠다. 꼬불꼬불한 길을 스릴있게 내려오면서 통영시와 바다, 주변 섬이 조화된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잠잘곳= 최근 통영에 스탠포드호텔앤드리조트가 새로 생겼다. 246개 객실 모두 전용 테라스를 갖추고 있어 탁 트인 전망과 시원한 바닷바람을 만끽할 수 있다. 객실에 누워 일몰과 일출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경남 통영 미륵산(461m) 정상까지 한려수도조망케이블카를 타고 오를 수 있다. 스카이워크 전망대 오르면 통영 시내와 바다 등 탁 트인 풍경을 둘러볼 수 있다.
2019.08.09 I 강경록 기자
204억 쪼그라든 경매시장…그래도 답은 김환기뿐인가
  • 204억 쪼그라든 경매시장…그래도 답은 김환기뿐인가
  • 김환기의 반구상화 ‘항아리와 날으는 새’(1958). 17일 케이옥션 ‘7월 경매’에 최고가 작품으로 나서 올 상반기 부진했던 미술품 경매시장에 전환점이 될지 기대를 모은다. 추정가 11억∼17억원. 20호(72.7×53㎝) 규모의 작품에는 1950년대 김환기를 대표하는 핵심이미지 중 하나인 청아한 달항아리가 둘이다. 마치 해와 달처럼(사진=케이옥션).[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한껏 들떴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다. 불과 6개월 전이었는데 말이다. 자칫 10여년 전 그 지독한 트라우마를 다시 겪는 건 아닌지, 섣부른 우려도 나오는 모양이다. 삼복더위에 한국미술시장에서 불어온 싸늘한 바람 탓이다. 발단은 경매시장이다. 올해 상반기 국내 미술품 경매시장의 총 거래액은 약 826억원(825억 7760만원). 지난해 상반기의 약 1030억원보다 204억원(19.8%)이 줄어든 성적표를 내놓은 것이다.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와 아트프라이스가 최근 발표한 ‘2019년 상반기 국내 미술품 경매시장 결산’을 보자면 상반기 총 거래액 826억원은 그간 상반기 통계만 놓고 볼 때 3년 전보다도 뒤쳐진 결과다. 2015년 627억원, 2016년 964억원, 2017년 989억원, 2018년 1030억원으로 꾸준한 상승세를 보여왔던 터. 국내 경매시장 양대산맥인 서울옥션·케이옥션을 비롯해 아트데이옥션·아이옥션·에이옥션 등 8곳의 1∼6월 온·오프라인 거래액을 집계한 통계는 총 거래액 하락만 가리키지 않았다. 출품작(1만 2820점→1만 2458점), 낙찰작(8815점→8199점), 낙찰률(68.76%→65.81%)까지 지난해에 비해 모두 떨어진 지표를 내놨다. 지난 몇 년간 국내 미술시장은 꾸준하게 오름세를 기록했다. 특히 지난해 말 연달아 터진 각종 지표는 분위기를 고조시키기에 충분했다. 우선 2017년 기준 2018년 국내 미술시장 전체규모가 그랬다. 4942억 3600만원. 이는 전년(3964억 6900만원)에 비해 977억 6700만원(24.7%)이 늘어난 수치였고, 2007년 6000억원대를 찍고 바로 고꾸라진 이래 기록한 최고치였다. 경매시장 역시 순항이었다. 20년 전 국내 경매시장을 형성한 이후 처음으로 지난해 2000억원 시대를 열면서 2194억원의 실적까지 뽑아냈으니까. 2014년 전년 대비 35%가 성장한 971억원에 이어 2015년 1880억원으로 뻗쳐오른 뒤, 2016년 1720억원, 2017년 1890억원, 지난해 2149억원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더랬다. △19.8% 빠진 상반기 시장…고미술은 선전 올해 상반기 낙찰총액 1위를 기록한 작가는 김환기(1913∼1974)다. 시장 부침과 상관없이 부동의 1위 자리를 고수하며 여전히 ‘블루칩 작가’로 강세를 보이는 김환기는 68점을 출품해 48점을 팔아, 총 낙찰액 약 145억원 낙찰률 70.6%의 성적을 써냈다. 상위 10위권 내에 3점, 20위권 내에는 7점을 올리며 상반기 총 거래액 826억원 중 14.5%의 비중을 보였다. 다만 이 역시 지난해에 비해선 크게 부진한 결과. 지난해 상반기 김환기의 작품은 낙찰총액 214억원 낙찰률 87.5%를 기록했더랬다. 김환기의 전면점화 ‘무제’(1971). 올 상반기 미술품 경매시장에서 총 낙찰액 145억원, 낙찰률 70.6%로 부동의 1위를 차지한 김환기가 상반기에 가장 비싸게 판 작품이다. 지난 5월 서울옥션 홍콩경매에서 약 72억원(4700만홍콩달러)에 새 주인을 만났다(사진=서울옥션).보통 김환기의 대작 한 점이 그해 경매시장의 규모를 좌지우지하는 경향을 고려한다고 해도 상반기 침체는 뚜렷해 보인다. 지난해에는 붉은 전면점화 ‘3-Ⅱ-72 #220’(1972)이 있었다. 지난해 5월 서울옥션 홍콩경매에서 약 85억원(6200만홍콩달러)에 팔리며 ‘국내 미술품경매 최고가’를 다시 썼다. 대신 올해는 ‘무제’(1971)가 있었다. ‘3-Ⅱ-72 #220’과 비슷한 시기 비슷한 색상으로 그린 작품은 한 해 뒤인 올해 5월 서울옥션 홍콩경매에서 약 72억원(4700만홍콩달러)에 팔리며 ‘국내 미술품경매 최고가’ 2위에 안착했다. ‘김환기 대작 낙찰 변수’는 지난해와 올해가 거의 동일했다는 뜻이다. 상반기 경매시장의 위축을 바라보는 평가는 이제까지와 별반 다르지 않다. 서울옥션·케이옥션 두 경매사의 압도적인 비중(상반기 서울옥션 53.95%, 케이옥션 36.17%), 김환기·이우환·천경자·박수근 등 몇몇 단골작가에 기댄 양태 등 양극화·불균형의 고질적인 문제를 지적한다. 그럼에도 한 가지 고무적인 성과는 있다. 고미술의 선전이다. 조선시대 달항아리 ‘백자대호’가 지난달 26일 서울옥션 ‘제152회 미술품 경매’에서 31억원에 팔리며 국내 미술품 경매시장에서 거래한 도자기 중 최고가를 경신한 거다. 높이 45.5㎝의 이 백자대호는 2000년 3550만원에 첫 거래를 튼 이후 ‘달항아리 30억원 시대’를 열었다. 조선시대 제작한 ‘백자대호’. 지난달 서울옥션 ‘제152회 미술품 경매’에서 31억원에 팔리며 ‘달항아리 30억원 시대’를 열었다. 올해 상반기 미술품 경매시장에서 가장 큰 성과로 꼽힌다(사진=서울옥션).△상반기 145억원 김환기…반구상화로 분위기 반전 기대 관건은 올해 하반기다. 분위기 반전을 타진할 그 첫 시장을 케이옥션이 연다. 오는 17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본사에서 ‘7월 경매’를 여는 케이옥션은 184점 110억어치의 미술품을 내놓고 승부수를 띄운다. 이번 경매 최고가 작품은 김환기의 ‘항아리와 날으는 새’(1958). 추정가 11억∼17억원을 걸고 응찰자를 기다린다.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이’ 다시 김환기로 반전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는 점. 그나마 색다른 기대치라면 그간의 전면점화가 아닌, 1950년대 김환기를 대표하는 핵심이미지로 꾸린 반구상화란 점이다. 게다가 같은 해 그린 유사한 푸른톤의 ‘항아리’(1958)가 지난달 서울옥션에서 9억원에 팔렸던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이런 복잡한 바깥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환기의 ‘항아리와 날으는 새’는 더할 나위 없이 고고할 뿐이다. 커다란 백자 달항아리가 하늘을 나는 새 한 마리와 마치 한몸이 된 듯 중심을 차지한 위로 또 다른 항아리가 시선을 끈다. 마치 해와 달 같다고나 할까. 이 틈에 섞인 앙증맞은 매화가지는 점점의 기하학적 패턴과 어우러져 한국적 미의 절정감을 뿜어내는 중. 박수근의 ‘시장’(1950년대). 추정가 3억 5000만∼6억원을 걸고 17일 케이옥션 ‘7월 경매’에 나선다. 작가 특유의 거친 화강암 마티에르가 선명한 배경에 좌판을 벌인 두 여인의 옆모습을 잡아냈다. 박수근은 올 상반기 미술품 경매시장에서 호당가격 1위(약 2억 4786만원)를 기록했다(사진=케이옥션).고즈넉한 김환기의 항아리는 박수근의 여인들이 받쳐준다. 1950년대로 추정하는 작품 ‘시장’이 추정가 3억 5000만∼6억원에 나선다. 작가 특유의 거친 화강암 마티에르가 선명한 배경에 좌판을 벌인 두 여인의 옆모습을 잡아낸 그림이다. 박수근은 올해 상반기 경매시장에서 김환기를 제치고 호당가격 1위(약 2억 4786만원. 김환기는 4073만원)를 기록했다. 22점을 내 21점을 팔아내며 낙찰률 95.45%로 이 부문 1위에 등극하기도 했다. 다만 낙찰총액은 29억 6966만원으로, 2위 이우환(58억 94856만원)에 이어 3위 자리에 머물렀다. 이번 경매 고미술부문에 눈에 띄는 작품은 고산자 김정호의 목판지도인 ‘대동여지도 전도’(1864)다. 1861년 제작한 초간본인 ‘신유본’ 이후 수정작업을 거쳐 발행한 ‘갑자본’이다. 22권첩을 병풍처럼 펴고 접게 한 것이 특징. 현존하는 대동여지도 30여점 중 갑자본은 6점 정도만 남아있다는데, 이번 출품작은 판각상태가 좋아 초기판본으로 볼 만한 사료적 가치까지 지녔다는 평가다. 추정가는 5억 5000만∼7억원. 이외에도 ‘백자투각장생문필통’(19세기·8000만∼1억 5000만원), ‘청자상감국화문통형잔’(13세기·800만∼2000만원) 등의 도자기, 우암 송시열(1607∼1689)의 ‘겸익’(300만∼1000만원), 해공 신익희(1894∼1956)의 ‘격언’(250만∼800만원) 등의 글씨가 나선다. 이들이 꾸준히 이어지는 고미술의 상승세를 다질 수 있을지 관심을 끄는 건 물론이다.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전도’(1864). 17일 케이옥션 ‘7월 경매’에서 추정가 5억 5000만∼7억원에 새 주인을 찾는다. 1861년 제작한 초간본인 ‘신유본’ 이후 수정작업을 거친 ‘갑자본’이다. 판각상태가 좋아 초기판본으로 볼 만한 사료적 가치까지 지녔다(사진=케이옥션).
2019.07.15 I 오현주 기자
 1400년 전 백제 왕국의 비밀을 품은 도시 ‘부여’
  • [여행] 1400년 전 백제 왕국의 비밀을 품은 도시 ‘부여’
  • 낙화암에서 바라본 금강과 황포돗배[부여=글·사진 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충남 부여의 옛 이름은 ‘사비’였다. 백제는 서기 538년 성왕 16년부터 의자왕 20년까지 123년간 이곳 사비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렸다. 옛 도읍 부여는 예나 지금이나 경관이 수려하다. 발길 닿는 곳마다 명승이요, 절경이다. 문화도 찬란하다. 도처에 역사와 문화재, 그리고 전설이 있다. 부여의 산하에는 역사 속으로 스러져 간 백제의 통한이 서려 있다.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능산리고분군, 나성 등 700여년의 찬란한 역사를 꽃피운 백제. 그 백제인이 남겨놓은 흔적이자, 증언이다. 백제의 과거 모습을 담고 있지만, 아직 모든 것을 드러내지 않은 1400여년 전 백제를 만나러 간다.낙화암 바로 앞 백화정에서 바라본 백마강 모습◇700년 대백제의 꿈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부여의 진산인 부소산은 백제 왕실의 후원이자, 사비백제 최후의 보루였다. 백제인들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애잔함마저 간직한 명산이다. 1400여 년 전 백제의 영광을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여기에 수많은 백제 여인들이 꽃잎처럼 떨어져 주검으로 절개를 바꾼 ‘낙화암’과 백제 영욕의 세월을 함께 한 천년 고찰 ‘고란사’도 있다.부소산 기슭에는 사비 시대의 왕궁터인 ‘관북리 유적’이 있다. 2001년부터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대형건물터, 연못, 저장시설, 상하수도시설, 도로 등 다양한 유적이 나왔다. 그중 가장 주목받은 것은 ‘대형건물터’다. 전체 넓이와 초석의 크기로 보았을 때 왕궁에서 가장 큰 건물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유적 중 하나는 저장시설인 ‘지하창고’다. 직사각형의 구덩이로 참외, 봉숭아 등 백제인의 식습관을 엿볼 수 있다.백제 사비 시대 왕궁터였던 ‘관북리유적’관북리 유적을 뒤로하고 북쪽에 위치한 ‘부소산성’으로 향한다. 백제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 산성은 왕궁의 배후산성이었다. 평상시에는 후원으로, 유사시에는 방어시설이었다. 산성 서쪽에는 금강이 흐르고 있는데, 다른 이름은 백마강이다. 산과 강을 활용해 천연의 방어막을 형성한 셈이다. 부소산성의 소나무숲 길에는 백제 시대의 토성을 볼 수 있다. 이곳 토성은 사비토성의 외곽성인 ‘나성’과 판축공법이 동일하다. 성질이 다른 토양을 교대로 넣어 다져주는 건축기법으로,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이 길을 따라 오르면 ‘낙화암’에 이른다. 백제 멸망의 그날, 남겨진 궁녀들은 절개를 지키기 위해 이곳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 그 모습이 마치 꽃잎이 떨어진 것 같다고 해 ‘낙화암’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백제 여인의 넋이 담긴 백마강은 백제의 아픔을 품은 채 유유히 흐르고 있다. 낙화암 아래에는 백마강 유람선을 탈 수 있는 선착장이 있다. 이곳에서는 백마강을 일주하는 황포돛배에 몸을 실을 수 있다. 백제교류의 장이자, 백제 여인들의 혼이 담긴 백마강을 따라가면 우암 송시열 선생이 새겨놓았다는 낙화암의 붉은 글씨가 비장하게 다가온다.익산 미륵사지석탑과 함께 유일하게 남아있는 백제탑 ‘정림사지 5층 석탑’◇1400여년의 세월을 담고 있는 석탑 ‘정림사지석탑’백제는 석탑과 사찰이 많은 나라였다. 특히 사비 시대에는 불교 문화가 번성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사찰이 바로 ‘정림사’다. 백제가 웅진에서 사비로 수도를 옮긴 직후 지은 사찰이다. 지금은 건물터와 5층 석탑만이 남아 있다. 정림사의 명칭은 1942년 발굴조사 과정에서 ‘정림사’라고 적힌 기왓조각을 통해 밝혀졌다. 하지만 고려 시대 이름이다. 백제 시대 이름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정림사는 사비 도성의 중심이자, 왕궁으로부터 남쪽으로 일직선상에 놓여 있었다. 사비도성 어디에서도 바라볼 수 있도록 주변 지세보다 높게 설계한 것이다. 절터도 정형적인 가람배치로 중문에서 탑, 금당, 강당이 남북으로 일직선을 이루고 있다. 이를 회랑이 감싸고 있는 형태다. 회랑의 북쪽 동서편에는 승려가 공부한 ‘승방지’가 있었는데, 이는 백제 사찰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국내 최대 연꽃 서식지로 유명한 ‘궁남지’정림사지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정림사지 5층 석탑’이다. 익산 미륵사지석탑과 함께 유일하게 남아있는 백제 탑이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변화 과정을 보여주고 있어 사료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목탑 고유의 아름다움은 살리는 대신 문제점은 보완했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경사가 거의 없이 나아가다가 끝을 살짝 올려 반전 매력을 더했다. 한 번도 해체하지 않아 그 가치 또한 매우 높다. 기단부터 5층 지붕돌까지 거의 완벽한 형태다. 여기에 1400여년의 세월까지 고스란히 담고 있다. 목조형식에서 벗어나 완벽한 구조미를 보여주는 이 석탑은 백제의 미(美)를 보여주는 대표 격이다.이 아름다움에는 완벽한 비례미가 숨어 있다. 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지대석. 석탑은 지대석(14척, 1척에 35cm)의 넓이 절반인 7척을 기본단위로 만들어졌다. 1층 탑신과 지붕돌의 높이, 1층 탑의 너비도 7척이다. 2층과 5층, 3층과 4층의 높이의 합도 7척이다. 이 7척을 기준으로 높이와 너비가 균형을 이루고 있다. 사람이 바라보았을 때 가장 안정감을 느끼는 비율이다.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 아름다움을 가진 석탑인 정림사지 5층 석탑은 백제의 미와 백제 불교 문화의 상징인 것이다.능산리고분군◇찬란한 백제 문화가 남아 있는 ‘능산리 고분군’백제금동대향로시내 동쪽의 능산리에는 여러 개의 능이 있다. 백제 사비 시대의 왕릉, 능산리 고분군이다. 총 7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백제 고분 발달과정을 잘 드러내는 중요한 유적이다. 웅진 시대의 고분은 깬돌을 쌓아 만든 ‘횡열석식분’(굴식돌방무덤)이었다면, 이후 중국의 영향을 받아 ‘단면아치형전축분’(벽돌무덤)으로 발달한다. 이어 사비 시대에 들면서 단면아치형석실분, 단면육각형석실분으로 이어진다. 중국을 넘어 백제의 독자적인 고분 양식으로 발전한 것이다. 능산리고분군 1호분에는 벽화가 있다. 고분 네 벽면에는 ‘사신도’가, 천장에는 이상세계를 뜻하는 ‘연꽃과 구름’이 그려져 있다. 불교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졌는지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사료다.고분군 서쪽에는 능산리 사지가 있다. 성왕의 아들 창왕이 지은 사찰이 있던 자리다. 창왕은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567년에 지었지만, 660년 백제가 멸망하면서 폐허가 됐다. 하지만 1400년이 지나 현재에 이르러 백제가 다시 깨어났다. 서쪽 회랑 북단에 있는 한 물웅덩이에서 ‘걸작 중의 걸작’ 꼽히는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6호)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진흙에서 발견된 덕에 거의 훼손되지 않고, 온전한 상태라는 점이었다.현재 이 향로는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에는 백제금동대향로 뿐만 아니라 사비시대 유물들이 가득했다.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은 백제금동대향로다. 백제인의 뛰어난 공예기술과 백제인이 꿈꿨던 이상세계를 아주 잘 담아내고 있는 귀중한 보물이다. 항로는 크게 네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용이 승천하는 형상의 ‘받침대’, 불교의 이상세계를 뜻하는 연꽃과 수중 동물이 있는 ‘몸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뚜껑’은 5명의 악사와 12명의 선인, 그리고 호랑이, 사슴, 원숭이, 코끼리 등 39마리의 진귀한 동물이 함께 뛰어노는 신선 세계를 뜻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꼭대기에는 봉황이 있다. 이상세계로 비상하려는 듯 날개를 활짝 펴고 있다. 불교적 신념의 ‘극락왕생’, 도교적 이상향인 ‘신선세계’, 이를 다스리는 최고의 권위자 ‘용과 봉황’. 백제금동대향로는 백제인의 정신세계와 그들의 염원을 잘 표현하고 있는 백제의 정신과 마음의 정수다. 백제 고도의 상징물인 궁남지 포룡정 . 궁남지는 국내 최초의 인공 연못이다.◇여행메모△가는길= 수도권에선 경부고속도로 천안교차로에서 천안~논산고속도로로 갈아탄 뒤 공주교차로에서 당진 쪽으로 잠시 가다 서공주교차로에서 서천~공주고속도로로 갈아탄 다음 부여나들목에서 나가면 부여 시내로 들어갈 수 있다.△잠잘곳= 숙소는 롯데부여리조트가 좋겠다. 특급호텔 수준의 콘도미니엄이다. 백제문화재현단지 건너편에 있다. 3만2000㎡ 부지에 지하 1층~지상 10층 총 322실 규모로 호텔형 객실(234실)과 콘도형 객실(88실)로 나뉘어 있다.
2019.06.21 I 강경록 기자
설화와 절경 유배지의 포항을 여행하다
  • 설화와 절경 유배지의 포항을 여행하다
  • [이데일리 트립 in 정기영 기자] 포항 호미곶은 우리나라의 최동단으로 한반도에서 일출이 가장 먼저 뜨는 곳이다. 조선의 풍수지리학자인 남사고는 한반도 지형 중 호미곶을 호랑이의 꼬리에 비유하며 이곳을 천하명당이라고 했다. 최남선은 대한십경 중 하나로 쳤을 정도로 호미곶은 비경을 품은 곳이다.연오랑세오녀의 전설 비경의 호미반도 해안둘레길포항의 해안 절경은 그동안 군사 보안상의 이유로 개방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시대적 변화에 부응하기 위해 개방하면서 영일만 일대의 호미곶 해안을 따라 걷는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이 인기를 끄는 중이다. 청림종합운동장을 출발해 호미곶까지 전체 4구간, 25km로 조성된 탐방로는 전설과 비경이 펼쳐지는 길이다. 선녀가 내려와 걸었다는 하선대를 비롯해 흥하게 되라는 뜻으로 흥덕에서 음이 변한 힌디기, 천연기념물 제371호인 국내 최대 모감주나무 군락지 등 귀한 볼거리가 해안을 따라 펼쳐진다.도기야에는 연오랑세오녀의 설화를 바탕으로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도 조성되어 사람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연오랑세오녀 부부가 바위를 타고 일본으로 떠난 후 빛을 잃은 신라가 세오녀가 짠 비단으로 해와 달을 맞이한다는 설화를 바탕으로 했다. 세오녀가 짜준 비단을 신라 대궐의 보물창고인 ‘귀비고’에 보관했다는 것을 착안한 귀비고 박물관은 연오랑세오녀 전설을 풀어 놓았다. 해안 절경을 따라 조성된 탐방로이므로 걸으면서 탐방을 해도 되지만 호미곶을 따라 드라이브를 하면서 감상도 가능하다.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은 포항 12경 중 4경이다.알려지지 않았던 유배인들의 생활상 장기유배문화체험촌포항의 장기지역은 조선 태조 1년 설장수를 시작으로 211명이나 되는 선비가 이곳을 거쳐 갈 정도로 전남 강진과 더불어 조선시대 중요한 유배지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고증을 거쳐 재현한 ‘장기유배문화체험촌’이 최근에 개장해 알려지지 않은 장기지역 유배문화를 알린다. 유배문화체험촌에는 우암 송시열을 비롯해 다산 정약용의 적거지, 오도전의 안채 등이 조성되었다.4년 여간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한 우암 송시열은 ‘주차대전차이’ 등을 저술하고 많은 양의 시문을 창작하면서 장기 지방을 학문과 예절을 숭상하는 유교의 고을로 변화시킬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다산 정약용은 220여 일을 이곳에서 머물며 130여수에 달하는 시문과 이아술 등의 서책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재는 유실돼 전해지지 않는다.체험촌에는 유배생활 했을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는다. 또한 유배를 왔던 선비들이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서책을 놓지 않으며 많은 시문과 저서를 남겼던 유배인들의 정서를 느낄 수 있다. 죄인을 유배지로 보낼 때 사용하던 우마차, 목에 씌우는 칼 등의 유배형벌, 자연치유원 등 테마공원도 있어 관람자들이 여러 형태의 체험이 가능하다.특별함으로 선택하는 포항풀빌라 빠쏘장기지역에 손에 닿을 듯한 동해바다, 선명한 수평선에 떠 있는 듯한 특별함으로 여행객들이 선택하는 빠쏘펜션이 최근에 인기다. 구룡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은 입지 덕분에 육지와 바다 조망이 동시에 가능하다.개별 스파, 개별 풀빌라 타입으로 전 객실 오션뷰 객실이다. 빈티지 조명과 호텔식 침구류로 분위기가 깔끔함이 돋보인다. 거실과 테라스는 인더스트리얼 인테리어로 폴딩 도어를 설치해 분리를 할 수 있게 해놓았고, 개별 테라스에서는 바비큐도 가능하다.
종로구 옥인1구역 바위글씨 지정문화재 등록 추진
  • 종로구 옥인1구역 바위글씨 지정문화재 등록 추진
  • [이데일리 정병묵 기자] 서울시는 최근 재개발과 관련된 오랜 갈등을 매듭짓고 역사문화형 도시재생사업을 추진하기로 한 종로구 옥인1구역에서 발견된 ‘옥류동’ 바위 글씨를 시 지정문화재로 등록한다고 11일 밝혔다.‘옥류동’은 17세기 이래 김수항과 김창협과 같이 당대 최고 문인들이 시문을 짓고 ‘송석원시사’, ‘일섭원시사’ 등 문학모임이 이뤄진 조선시대 대표적인 문화공간이다. 한국문학사의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은 장소기도 하다. 현재 옥인동의 지역명도 ‘옥류동’과 ‘인왕동’이 합쳐진 것이다. 이 바위 글씨는 1989년 출간된 책 ‘서울 육백년’에서 사진으로만 존재가 알려져 있었다. 동호회 ‘한국산서회 인문산행팀’ 제보로 종로구 옥인동 47번지 바위 능선 일대에서 실물이 처음 확인됐다. 시는 이번에 발견된 ‘옥류동’ 바위 글씨가 조선시대 문인들이 모였던 문화공간 ‘옥류동’과 같은 장소에 있었던 바위 글씨로 사진 상의 글씨와 동일하다는 전문가의 자문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시는 당시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유물로 문화사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판단해 시 지정문화재 등록을 추진하기로 했다. 세간에는 우암 송시열의 글씨로 알려져 있으나 김수흥, 김창협 등 글씨 주인에 대해 전문가의 의견이 분분해 추가적인 고증과 함께 이 일대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한편, 종로구 옥인동은 오랜 갈등을 매듭짓고 역사문화형 도시재생사업을 막 시작한 지역으로 ‘옥류동’ 바위 글씨 발견이 역사문화마을도시로의 도시재생사업 추진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옥인동 주거환경개선사업구역은 2007년부터 재개발 사업 추진을 원하는 조합과, 한양도성의 옛 기억을 보전하고자 하는 지역 시민사회 간 대립으로 사업 추진이 장기간 지연돼 오다 2017년 역사·문화적 가치 보존을 위해 주택재개발 정비구역이 해제돼 조합에서 소송을 진행하는 등 갈등이 극도로 고조됐던 지역이다.시는 시·조합 간 갈등조정 심층면담(40회), 지역·시민사회단체 등 이해당사자 갈등조정간담회(15회), 총괄코디네이터 파견 등을 통해 시-주민-조합-시공사 간의 갈등을 해결하고, 주민과 조합의 요구를 반영한 역사문화형 도시재생사업을 추진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이는 재개발 갈등을 서울시의 중재와 조합, 주민들의 이해와 합의를 통해 해결한 첫 사례다. 4개 부문 16개 단위사업으로 추진될 계획으로 올해 153억원의 예산이 투입될 예정이다. 김승원 서울시 재생정책기획관은 “역사문화자원 보존과 함께 주민들의 삶의 질과 지역의 가치가 높아질 수 있도록 주거환경개선사업을 착실히 진행해 옥인동을 역사문화형 도시재생의 성공 사례로 만들어 나가겠다”고 말했다.
2019.02.11 I 정병묵 기자
 도시가 품은 시대를 산책하다
  • [도시재생③] 도시가 품은 시대를 산책하다
  • 밤이면 풍차에 불이 커져 더욱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는 대동하늘공원 전경.옛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충청지원 건물을 현대미술 전시장으로 재활용한 대전창작센터 전경.우암사적공원에 있는 기국정은 소제호가 매립될 당시, 소제동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철도관사촌이 독특하고, 골목에 문학과 예술이 담겨 있다.” 부산에서 소문을 듣고 소제동에 온 길이라 했다. 저녁 무렵 대흥동 어귀에서 그들을 다시 만났다. 낡았지만 어딘가 세련된 분위기가 마음에 드는 눈치다. 대전 대흥동과 소제동이 뜨고 있다. 대흥동에는 리노베이션한 카페나 오래된 맛집이 많고, 소제동에는 1920~1930년대 지은 철도관사촌이 있다. 모두 오래된 풍경을 간직한 곳으로, 이 가을과 잘 어울린다. 더욱이 두 동네는 최근 10여 년간 도시 균형 발전을 위한 재생 작업이 꾸준히 진행되어, 도시가 걸어온 시간을 풍성하고 멋스런 이야기로 들려준다. 근대부터 100년이 넘는 시간을 타박타박 걸으며 만나고 싶다면, 대흥동과 소제동을 찾아라. 대전역을 기준으로 대흥동은 서쪽, 소제동은 동쪽에 있어 연계해 둘러보기 좋다.6.25전쟁 때 이승만 대통령이 머물며 연합군의 6.25전쟁 참전에 합의했던 충남도지사 공관◇아기자기 카페와 오래된 맛집이 있는 ‘대흥동’대전역 광장에서 대전근현대사전시관으로 이어지는 중앙로 왼쪽이 대흥동이다. 1990년대만 해도 공공 기관 이전과 상권 이동으로 침체에 빠졌는데, 지금은 다시 북적이는 거리가 됐다. 2006년부터 도시 재생 사업을 꾸준히 진행한데다, 이곳에 둥지를 튼 젊은 문화 활동가와 예술가들이 노력한 결과다. 무엇보다 대흥동에는 시간에 시간이 더해진 풍경이 잘 남았다. 전문가들은 이 점에 문화 가치를 더한 도시 재생이 주효했다고 말한다. 여행 포인트는 크게 세 가지다. 근대건축물을 허물지 않고 새롭게 활용한 건물 찾기, 오래된 건물 외벽에 그려진 그림 찾기, 낡은 건물을 리노베이션해 빈티지한 카페나 갤러리 찾기. 먼저 대흥동 일대는 근대건축물을 문화 공간으로 재활용한 곳이 많다. 대전 충청남도청 구 본관(등록문화재 18호)은 지역 근현대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대전근현대사전시관으로, 대전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구 충청지원(등록문화재 100호)은 대전시립미술관 창작센터로, 초록 지붕이 우아한 대전여중강당(대전문화재자료 46호)은 대전갤러리로 다시 태어났다. 테미고개 인근에 있는 충청남도 관사촌도 눈에 띈다. 충청남도지사공관(대전문화재자료 49호)을 비롯한 관사 10여 동이 문화 공간으로 변신할 예정이다. 대전의 명물로 통하는 성심당의 튀김소보로.대흥동에서는 벽화 투어도 빼놓을 수 없다. 대부분 2012년 대전시립미술관이 기획한 〈예술을 통한 도시 재생〉전의 결과물이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카페 ‘여전히 잘,’(옛 산호다방) 건물 외벽에 흰 스웨터 벽화가 상징처럼 남아 있다. 낡은 담이나 배관에도 작은 그림이 보인다.오래된 주택이나 상가 건물을 리노베이션한 빈티지 공간 역시 매력 있다. 카페 ‘초록지붕’ ‘여전히 잘,’ ‘희나리’ ‘하이드아웃’ ‘안도르’, 문화공간주차 ‘파킹’ 등이 그곳이다. 안도르는 대한제국 시대 대전부윤(지금의 대전시장)의 관사였고, 파킹은 오래된 여관 주차장이었다. 저물녘에는 으능정이문화의거리 쪽으로 길을 잡아보자. 이곳에 도심 활성화를 위해 조성한 스카이로드가 있다. 도로 위에 대형 LED 영상 시설물을 세워 화려한 밤 풍경을 연출한다.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10~3월) 매시 정각에 50분씩 다양한 영상물이 머리 위로 흐른다(월요일 휴장). 추석 연휴(10월 4~5일)에는 ‘대전스카이로드 2017 한가위 대잔치’가 열려 거리가 더욱 풍성해진다. 전통 민속놀이 체험과 거리 퍼포먼스, 인절미 만들어 먹기 같은 프로그램을 무료로 즐길 수 있다. 오가는 길에 튀김소보로가 유명한 ‘성심당’이 보이면 잠시 들러 맛봐도 좋다. 대흥동 초록지붕은 적산가옥을 원형 그대로 살려 카페로 활용했다.◇일본 철도 노동자 집단 거주지였던 ‘대흥동’대전역 뒤쪽은 소제동이다. 1920~1930년대 일본 철도 노동자의 집단 거주지로, 전란과 개발을 용케 피한 관사 4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근현대를 거치며 집을 허물지 않고 형편이 허락하는 대로 조금씩 품을 넓혀, 조금은 삐뚤빼뚤하고 담장이 살짝 기울었다. 담장마다 키 큰 나무가 무성하고, 길가에 구멍이 숭숭 뚫린 나무 전봇대가 여러 개다. 한자리에서 60년 세월을 보낸 ‘대창이용원’도 정겹다. 흔히 보지 못하는 것으로 가득 찬 동네다. 이런 독특한 풍경에 소제창작촌이 자리한다. 지난 2012년 대전시 철도 문화유산 활용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운영하기 시작한 레지던시로, 빈집을 살짝 손질해서 활용하는 게 핵심이다. 현재 활용 중인 공간은 ‘소제창작촌’(작가 창작 공간), ‘재생공간293’(전시 공간), ‘시울마실’(게스트하우스), ‘시울2길 골목길’(공동체 공간) 등 네 곳. 소제창작촌의 유현민 프로그램디렉터는 “소제창작촌은 예술가들이 무상이나 저렴한 임대료로 빌린 집을 활용해 전시회를 열고, 때로 축제도 개최하며 주민과 함께 살아가는 곳”이라며 “올해는 특별히 시와 그림과 퍼포먼스로 소제동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흥동과 달리 주거지이므로 조용히 둘러봐야 하고, 재생공간293은 전화로 개방 여부를 확인하고 방문하는 것이 좋다. 시간이 넉넉하면 관사촌을 짓기 위해 매립했다는 소제호 방죽을 흔적 따라 걸어도 괜찮다. 허름한 골목을 품은 관사촌과 잘 어울리는 길이다. 소제동에는 수많은 나무가 산다. 대추나무, 감나무, 석류나무, 탱자나무가 어느새 담장을 훌쩍 넘었다.◇도심에 깃든 자연하루 종일 지치도록 도시 골목을 거닐었다면, 도심에 깃든 자연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동구 가양동에 있는 우암사적공원은 소제동이란 이름을 지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제자에게 학문을 가르친 곳이다. 버드나무가 울창한 연못이 남간정사(대전유형문화재 4호)나 기국정과 어우러진 풍치가 곱다. 남간정사 조금 위에는 우암 선생의 발자취가 담긴 유물관이 있어 함께 둘러보기 좋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도시를 보면 색다른 맛이 있다. 대동하늘공원과 보문산, 식장산이 멀리서 바라본 도시가 아름다운 곳이다. 대전역에서 2.3km 정도 거리에 있는 대동하늘공원은 풍차 뒤로 대전 시내가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언덕이다. 밤이면 풍차에 조명이 들어와 일대가 더욱 찬란해진다. 대전 시민이 ‘보물산’으로 부르는 보문산과 드라이브 코스로 소문난 식장산도 도시를 조망하기 좋다. 식장산은 임도로 정상부까지 오를 수 있어 야간 데이트 코스로 인기다. 여독은 온천욕으로 풀자. 대전에는 《동국여지승람》에 나올 정도로 역사가 깊은 유성온천이 있다. 대규모 온천 단지에 마련된 무료 족욕체험장이 지친 여행자를 반긴다. 유성온천역에서 가까워 찾기 쉽고,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까지(4~10월) 뜨끈뜨끈한 물에 발을 담글 수 있다. 여독을 푸는 데는 온천욕 만한 것이 없다. 대전 여행 시 귀가 전에 들리면 좋은 유성온천 내 무료 족욕체험장.◇여행메모△당일 여행 코스= 소제동→대전근현대사전시관→대흥동 일대→으능정이문화의거리(스카이로드)△1박 2일 여행 코스= 대전근현대사전시관→대흥동 일대→으능정이문화의거리(스카이로드)→(숙박)→소제동→우암사적공원→대동하늘공원 △가는길= 경부고속도로 대전 IC→동부네거리 금산·옥천 방면 좌회전→가양네거리 대전역 방면 우회전→성남네거리 금산·옥천·대전역(동광장) 방면 좌회전→계족로 850m→대전역(동광장) 방면 우회전→중앙로역 방향 직진→대전근현대사전시관△먹을곳= 튀김소보로·부추빵으로 유명한 성심당(1588-8069), 두부두루치기·오징어두루치기는 진로집(042-226-0914), 닭볶음탕은 현대식당(042-223-8922), 올갱이국 내집식당(042-223-5083), 돼지갈비는 대전갈비(042-254-0758), 두부두루치기·오징어두루치기는 광천식당(042-226-4751), 칼국수는 신도칼국수(042-253-6799)와 대선칼국수(042-471-0317)△주변 볼거리= 뿌리공원, 오월드, 한밭수목원, 이응노미술관, 대전 회덕 동춘당, 한밭교육박물관, 엑스포과학공원, 국립중앙과학관 등 대흥동에 버려진 여관주차장을 갤러리로 바꾼 문화공간 ‘파킹’소제창작촌 입주 작가들의 전시공간인 재생공간 293. 전시실 앞 우물터가 마을주민들과 축제를 펼지는 자리다
2017.09.30 I 강경록 기자
전쟁기념관, 11월까지 특별기획전 '병자호란, 그 기억과 반성' 개최
  • 전쟁기념관, 11월까지 특별기획전 '병자호란, 그 기억과 반성' 개최
  • [이데일리 김관용 기자] 전쟁기념관이 21일부터 11월 19일까지 5개월 간 전쟁기념관 기획전시실에서 특별기획전 ‘병자호란, 그 기억과 반성’을 개최한다.올해는 병자호란 종전 380주년이 되는 해다.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은 임진왜란에 비해 주목도가 낮았다. 하지만 최근 한반도와 북핵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 등 열강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일면서 다시금 생각해봐야 할 역사적 사건이 됐다.병자호란은 중국 대륙의 명·청 교체기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양대 강국 사이에 낀 조선이 대륙 정세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하지 못해 전화에 휩싸였던 전쟁이다. 이번 기획전은 380년 전 역사적 상황을 살펴봄으로써 패전한 전쟁에서 교훈을 얻고 국방의 중요성과 호국안보공동체 의미를 조명하기 위해 병자호란을 주제로 잡았다.전시회는 크게 ‘조선의 산하, 전운이 감돌다’, ‘뒤바뀐 천하, 병자호란’, ‘북벌과 부국강병의 꿈’, ‘병자호란을 돌아보다’ 라는 4개의 주제로 구성된다. 전쟁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는 유물은 물론 국립중앙박물관, 경기도박물관, 당진 충장사, 만해기념관 등 다양한 기관에서 모은 관련 유물 92점이 한자리에 선보인다. 안주성 전투의 영웅인 남이흥 장군의 ‘녹피방령포’, 백마산성을 지킨 임경업 장군의 ‘추련도’,남한산성 수어사로 분전한 이시백 장군의 ‘초상화’, ‘비격진천뢰’, ‘승자총통’, ‘각궁’, ‘오달제 묵매도’ 등 다양한 유물이 그래픽, 영상, 패널 설명 등과 함께 전시된다. 특히 기념관 소장 유물인 병자호란 당시의 나만갑 선생이 기록한 난중일기 ‘병자록’과 송시열 선생이 병자호란 때 척화론을 주장하다가 순절한 3인(홍익한, 오달제, 윤집)의 약전과 언행을 기록한 ‘삼학사전’도 전시돼 있어 눈여겨볼만하다. 이번 전시에서는 패전의 상흔으로 대변되는 ‘환향녀’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환향녀는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로 끌려갔다 돌아온 여인을 말한다. 당시 청나라에 끌려간 포로 수는 50만 명에 달한다. 이들은 노비, 군인, 몸종으로 혹독한 시절을 겪었다. 특히 여자들의 피해가 막심해 1637년 공식적으로 속환이 이뤄진 이후로도 많은 사람들의 핍박을 받으며 비참한 여생을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전란의 비극에 휘말렸던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오늘날 이와 같은 전쟁은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교훈과 메시지를 전해준다. 이 밖에도 어린이들을 위한 전시공간도 있다. 정묘·병자호란의 의미와 교훈을 알기 쉽게 전달하기 위해 ‘애니메이션 상영’과 ‘남한산성 퍼즐맞추기’, 호란의 위기 속에서 조선을 지킨 인물들을 전투와 연결시켜 보는 ‘열어보는 패널’ 등의 체험코너를 마련했다.
2017.06.21 I 김관용 기자
송영무, 주민등록법 위반 4건?…"아파트 담보 대출 때문에" 해명
  • 송영무, 주민등록법 위반 4건?…"아파트 담보 대출 때문에" 해명
  • 송영무 국방부 장관 후보자가 지난 12일 한민구 국방부 장관을 만나기 위해 서울 용산 국방부 청사로 들어서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이데일리 김관용 기자] 송영무 국방부 장관 후보자의 주민등록법 위반이 청와대가 당초 공개한 1건이 아니라 모두 4건이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에 청와대와 후보자가 고의로 축소 발표한 것 아니냐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송 후보자 측은 “신규 분양 아파트의 담보 대출 조건을 충족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명했다.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자유한국당 김학용 의원은 20일 “청와대가 송 후보자 지명사실을 발표한 지난 11일, 1989년 위장전입에 따른 주민등록법 위반 사실에 대해서만 밝혔지만 이후 1991년, 1994년, 1997년에도 주민등록법 위반 사실이 확인됐다”고 주장했다. 김 의원에 따르면 송 후보자의 첫 번째 법 위반은 1989년 3월 해군 제5전단 작전참모로 재직할 때다. 당시 경남 진해시 도만동 소재 군인 관사에 거주한 송 후보자는 대전시 동구 용운동에 위치한 부친의 집으로 본인의 주민등록을 이전한 바 있다. 동일 행정구역에 위치한 군인공제회 아파트를 분양받기 위해서다. 이는 당초 청와대가 발표한 내용이다. 그러나 1991년 11월 서울시 영등포구 신길동 충무아파트에 거주하던 송 후보자는 신규 분양받은 대전 한신아파트의 담보대출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본인의 주민등록을 형 집으로 이전했다. 1994년 10월과 1997년 8월에도 서울시 영등포구 신길동 충무아파트에 실제 거주하면서 주민등록은 각각 형의 자택과 고조부의 기념사당(문충사)으로 주소지를 옮겨 놓았다. 이에 대해 송 후보자 측은 “주민등록법 위반 사실에 대해선 송구하게 생각하지만 일부로 축소한 것은 아니다”면서 “주소지 이전 4건 중 3건은 아파트 분양 자격 취득을 위해 대전으로 주소를 옮김에 따른 것으로 융자 담보 조건 충족과 세입자의 퇴거 요청 등으로 주소지를 이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송 후보자 측에 따르면 그는 해군 장교로 임관한지 18년만에 집을 사기 위해 대전 형 집으로 주소지를 이전했다. 이에 따라 대전 한신아파트를 분양받았는데 담보 대출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해당 집으로 또 주소지를 이전했다. 당시 한신아파트 가격은 6000만원이었다. 18년 후 이를 되팔았지만 차익은 8000만원 남짓이었다. 부동산 투기를 위한 위장전입이 아니었다는 설명이다. 또 송 후보자 측은 “1994년 대전의 한신아파트 신규 세입자의 요청으로 형님 집인 대전시 용운동 집으로 주민등록을 다시 옮겼다”면서 “1997년엔 형님 소유의 용운동 377-9 집을 팔게 돼 인근 고조부 기념사당인 문충사로 주소지를 이전했는데, 당시 집안의 요청이 있었다”고 해명했다. 우암 송시열의 후손인 송 후보자는 춘추 제향 행사시 직손 후계로서 직분을 해야 한다는 문중의 요청으로 숙부 집으로 주소지를 이전했다는 설명이다. 대전시 용운동 377-9번지에서 383-9번지까지의 거리는 50m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송영무 후보자의 주민등록상 주소지와 실제 거주지가 다른 경우와 해명 내용 [출처=김학용 의원실]
2017.06.20 I 김관용 기자
 물소리도 잠재우는 깊은곳에서 '악상'을 떠올리다
  • [여행] 물소리도 잠재우는 깊은곳에서 '악상'을 떠올리다
  • 충북 영동 양산팔경 중 하나인 ‘강선대’[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예술가들은 자연에서 주로 영감을 받는다. 자연이 가지는 역설 때문이다. 가끔 거칠고 험하지만 매번 부드럽고 평화롭다.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등 소리가 가득하다. 한 편으로는 고요하게 싹이 돋고, 꽃이 피고, 낙엽이 진다. 인간이 자연에 비해 아주 작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명제도, 자연 속에 들어서면 저절로 알게 되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3대 악성 중 한 명인 난계 박연(1378~1458)은 특히 자연을 사랑했다. 그가 나고 자란 충북 영동의 자연은 난계의 음악적 영감을 자극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소백산맥의 준령에 둘러싸여 있어 산이 깊고, 골도 깊다. 그래서 흐르는 물도 맑고 스치는 바람도 고요하다. 한마디로 산수화 절경 속에 안겨 있는 도시다. 여기에선 범부조차도 묵객이 되고, 악성이 된다. 우리나라 3대 악성 중 하나인 난계 박연이 즐겨 찾아 피리를 불었다는 옥계폭포.◇ 일개 범부도 시인이 되는 곳 ‘옥계폭포’박연의 음악적 영감을 쫓아 찾아간 곳은 신천면 옥계리에 자리한 옥계폭포다. 옥계폭포는 천모산 깊은 골짜기에 숨어 있다. 찾아가는 길은 의외로 쉽다. 난계사에서 옥천방향으로 3km 전방 좌측 길가에 위치한 옥계리로 진입해 천모산 골짜리고 들어서서 산길을 따라 약 1km 전방에 있다. 혹여 거동이 불편하거나, 어린 자녀를 둔 관광객이라면 자동차를 이용해 더 쉽고 편하게 찾아가는 방법도 있다. 옥계폭포 150m 전방 매표소에 차를 주차하고 걸어오를 수 있다. 매표소에서 옥계폭포까지 오르는 길의 풍치도 일품이다. 폭포에서 떨어진 옥수가 천모산 계곡을 따라 흐르다 잠시 머무는 산중(山中) 저수지의 풍광과 뒤이어 나타나는 오솔길의 상큼함은 걷지 않고서는 느낄 수 없는 쾌적함이다. 폭포소리에 이끌려 도착한 옥계폭포는 한 낮의 불볕더위를 순간 잊게 할 만큼 시원한 청량감을 선사한다. 무려 20m에 이르는 물줄기가 깍아 지른듯한 절벽에서 쏟아지면서 폭포 주변이 청량감으로 가득하다. 주변 경관도 옥계폭포와 어우러지며 일대 장관을 이룬다. 이곳을 찾은 이들에게 주는 옥계폭포의 또 다른 선물이다. 이곳이 바로 난계가 즐겨 찾아 피리를 불었고,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발길도 잦았다. 다가갈수록 장쾌하게 흘러내리는 폭포의 시원한 물쏘리와 뿜어져 나오는 물보라가 세차다. 그 장관에 압도 되어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잠시 황홀경에 빠진다. 저렇게 수천년을 흘러내렸을 옥계폭포의 물줄기는 바위산을 움푹 깎아 절경을 이루며 바위틈으로 세찬 물보라를 토해내고 있다. 걸음을 뒤로하고 폭포의 장관에서 눈을 돌리자 폭포 주위에 깎아지른 절벽이 웅장하다. 폭포와 절벽의 웅장함을 한눈에 보고 있노라니 마치 살아 있는 산수화를 보는 듯 아름다우며 힘차다. 충북 영동 양산팔경 중 제1경인 영국사의 보물 중 보물인 1000년 묵은 은행나무◇금강이 빚은 아름다움 ‘양산팔경’ 옥계폭포를 나와 금강상류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 양산면에서 선녀가 내려와 목욕했다는 강선대를 만난다. 제1경인 영국사는 양산팔경의 정수로 불린다. 천태산 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큰 절은 아니지만 사찰 주변의 풍광이 아름답고 무엇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멋진 은행나무가 있어 전국적으로 이름난 관광명소이기도 하다. 이름처럼 유럽의 영국과는 전혀 관계는 없다. 영국사는 신라 때의 고찰이다. 고려문종 때 대각국사가 국청사라 했던 것을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 곳에서 나라의 안녕과 백성의 안정된 삶을 기원해 국난을 극복했다고 해 영국사로 이름을 바꿨다. 여기를 찾아가야할 이유는 경치말고도 또 있다. 영국사에는 5가지 보물과 1개의 천연기념물이 있다. 보물 제532호인 영국사부도(浮屠), 보물 제533호인 영국사삼층석탑, 보물 제534호인 영국사원각국사비, 보물 제535호인 영국사 망탑봉 3층석탑과 천연 기념물 제223호인 영국사의 은행나무가 그것이다. 그중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은 영국사의 은행나무다. 나무의 둘레를 치자면 여른 서넛이 손을 맞잡고 둘러서야 나무를 제대로 안을 만큼 거대하다. 공식적으로는 31.4m, 둘레가 11.54m의 거목이다. 크기만큼이나 이 은행나무의 나이도 무려 1000살로 알려져 있다. 특히 서쪽으로 뻗은 가지 한 가운데 한 개는 땅에 닿아 뿌리를 내리고 또 다른 은행나무로 자라고 있는 신기한 광경도 이 은행나무의 유명한 볼거리다.영국사 인근에 양산팔경 중 가장 아름답다고 손꼽히는 강선대가 있다. 유유히 흐르는 금강가에 우뚝 솟은 바위 위에 오롯이 서 있는 육감정자로 멀리서 보면 주변 노송들과 어울려 우아하고 고상한 멋이 흐른다. 이 외에도 금강과 양산면 일대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비봉산’과 봉황이 깃든 곳이라 전해지고 있는 ‘봉황대’, 금강 강가에 수줍게 서 있는 ‘합벽정’, 강선대와 금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서 있는 ‘여의정’, 목욕하는 선녀를 보느라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의 이야기가 깃든 ‘용암’, 글 읽는 소리조차 아름답다는 ‘자풍당’ 등이 양산팔경을 이룬다. 충북 영동 양산팔경 중 하나인 봉황대달이 머무는 봉우리라는 뜻을 가진 월류봉◇달도 잠시 쉬어가는 곳 ‘월류봉’해가 뉘엿뉘엿 서쪽으로 넘어갈 무렵 서둘러 월류봉으로 향한다. 백두대간에서 살짝 빠져나온 산맥이 민주지산에서 북으로 잠시 올랐다가 황간면 원촌리에 이르러 만들어 놓은 봉우리가 바로 월류봉이다. 깍아지른 절벽산인 월류봉의 높이는 400.7m다. 그 아래로 물 맑은 초강천 상류가 휘감아 흘러 수려한 풍경을 이룬다. ‘달이 머물다 가는 봉우리’이름처럼 달밤의 전경이 특히 아릅답다고 알려져 있다. 그 모습에 예로부터 이 일대의 뛰어난 경치를 ‘한천팔경(寒泉八景)’이라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 후 여행차 다녀간 곳으로 알려졌다. 월류봉 아래쪽에는 한때 이곳에 머물며 작은 정자를 짓고 학문을 연구한 우암 송시열(1607~1689)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한천정사와 영동 송우암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500년 된 배롱나무가 인상적인 반야사와 반야사 계곡도 돌아볼 만하다. 반야사는 신라 성덕왕 27년(728년) 운효대사의 10대 제자 중 수제자인 상원화상이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뒤에 고려 충숙왕 12년(1325년) 학조대사가 중수했다고 전해진다. 반야사를 끼고 있는 석천계곡에서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나른한 한때를 보낼 수도 있다. 노근리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양민을 학살한 통한의 현장이다. 철길 아래 터널 등에 총탄과 포탄의 흔적이 여태 남아 있다. 주변에 평화공원도 있어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우리나라 3대 악성 중 하나인 난계 박연의 뜻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00년 개관한 ‘난계국악박물관’에는 일반인들도 국악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국악체험촌을 운영하고 있다.◇여행메모△가볼 만한 곳= 옥계폭포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에 있는 난계국립박물관도 꼭 들러봐야할 곳이다. 우리나라 3대 악성인 난계 박연의 뜻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00년 여기에 들어섰다. 가야금을 비롯한 100여종의 국악기와 의상이 전시되어 있고, 난계 박연의 삶과 업적을 그래픽과 디오라마로 연출해 전시하고 있다. 더불어 악기를 직접 다뤄볼 수 있는 체험실도 따로 마련돼 있어 가족 여행객에게는 필수 코스다.△주변먹거리= 영동대학교 인근의 송천가든은 솥뚜껑 비밤밥이 최고 인기 메뉴다. 즉석에서 시루밥을 무쇠 철판 솥뚜껑에 올려 볶는 솥뚜껑 비빔밥 조리 광경은 식욕을 더욱 자극한다.천고각솓천식당 솥뚜껑비빔밥
2017.06.16 I 강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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