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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집에서 온가족이 즐기는 우리 문화재
  • [랜선 전시 투어]①집에서 온가족이 즐기는 우리 문화재
  • [이데일리 김은비 기자] 선조가 물려준 우리 문화재를 집에서 만나보며 올 추석 연휴를 마무리하는 건 어떨까. 미술관, 박물관, 궁능은 코로나19 상황에 따라 집에 머무는 관람객들을 위해 다양한 전시를 비대면 온라인으로 제공하고 있다. 특히 문화체육관광부는 추석 연휴를 맞아 국립·공공기관이 보유한 비대면 문화예술 콘텐츠를 홈페이지에서 통합 안내하고 있다. 큐레이터·도슨트 해설을 곁들인 온라인 전시와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등을 활용해 현장 못지 않은 생생함을 전하는 전시 등 다양하다. 116개 전시, 공연, 체험 콘텐츠 중에서 눈여겨 볼만한 문화재 전시 3개를 선별해 소개한다.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안녕, 모란’ 특별전 기자간담회에서 관계자가 전시물을 살펴보고 있다.(사진=이데일리 DB)◇조선 왕실 수놓은 모란 감상하는 ‘안녕, 모란’ 조선왕실 문화를 수놓은 모란을 감상할 수 있는 국립고궁박물관 특별전 ‘안녕, 모란’을 유튜브 영상으로 볼 수 있다. 모란은 부귀영화를 상징해 과거부터 선조들이 정원에서 가꾸고 감상한 것은 물론, 왕실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며 큰 행사인 혼례와 상례 등에서 사용되기도 했다. 전시는 병풍을 비롯해 모란꽃 무늬가 그려진 궁궐의 각종 생활용품과 의례용품, 심사정과 강세황 등 18~19세기 문인 화가의 모란 그림 등 유물 120여 점을 선보이는 전시다. 학예연구사의 온라인 전시 해설 영상을 통해 조선 왕실 문화를 돌아볼 수 있다.1부 ‘가꾸고 즐기다’는 18~19세기의 대표적 모란 그림인 허련(1808~1832), 남계우(1881~1890) 등의 작품을 통해 모란을 가꾸고 감상하며 그림으로 그려 즐기던 전통을 살펴본다. 2부 ‘무늬로 피어나다’는 나전 가구, 화각함, 청화 백자, 자수물품 등 다양한 유물을 통해 조선왕실 생활공간을 장식한 모란과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살펴본다. 최초로 공개한 모란이 수놓인 창덕궁 왕실혼례복을 감상할 수도 있다. 3부 ‘왕실의 안녕과 번영을 빌다’는 왕실의 흉례에 사용된 모란을 조명한다.국보 ‘기마인물형토기’(사진=국립중앙박물관)◇문화재 비밀 궁금하다면, ‘빛의 과학, 문화재의 비밀을 밝히다’ 문화재 내부 보이지 않는 비밀을 풀어내는 방법이 궁금한 사람들을 위해 국립중앙박물관 ‘빛의 과학, 문화재의 비밀을 밝히다’ 특별전 전시 해설 영상이 마련돼 있다. 특별전은 문화재 속에 담긴 중요한 정보를 자연과학의 측면에서 다룬다. 국보 ‘기마인물형토기’ 등 총 57건 67점이 출품됐다.전시 해설 영상은 박영만 연구사가 빛의 성질과 특성을 이용해 문화재 조사를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1부에서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리구슬을 볼 수 있다. 백제 무령왕릉의 왕과 왕비의 머리, 가슴, 허리 부분을 중심으로 출토된 유리구술은 엑스선 형광분석기로 원료를 밝혀낼 수 있었다. 2부에서는 라인의 의복과 말갖춤 등 당시의 생활모습을 정교하게 표현한 걸작 ‘기마인물형토기’가 장식용 조각이 아닌 주전자였음을 밝히는 과정을 전한다. 3부에서는 조선시대 목조석가불좌상을 만나볼 수 있다. 불좌상은 훼손이 심각한 상태지만 CT조사를 통해 복장유물을 밝혀낼 수 있었다.(사진=‘서원, 어진 이를 높이고 선비를 기르다’ 전시해설 영상 캡처)◇유네스코 세계유산 서원의 의미 되새기는 온라인 전시해설조선시대 대표 교육기관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서원’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는 온라인 전시해설 영상도 있다. 국립전주박물관에서는 지난해 ‘한국의 서원’ 등재 1주년을 기념한 특별전 ‘서원, 어진 이를 높이고 선비를 기르다’를 직접 관람할 수 없는 관람객을 위해 온라인 전시해설 영상을 유튜브에 공개하고 있다. 전시는 정읍 무성서원 등 9개 서원 및 주요 박물관의 중요 문화재를 한 자리에 모아 서원의 세계유산적 가치와 우수성을 보여준다. 온라인 전시해설은 국가가 서원에 내린 사액현판, 각 서원에서 모신 대표 유학자의 초상과 그들의 정신이 담겨있는 유품, 서원 입학과 교육 과정뿐 아니라, 후배 선비들이 서원을 방문해 남긴 그림과 글, 책과 책판을 보관한 서원의 보물창고 장판각을 볼 수 있다.또 만인의 뜻을 모아 왕에게 전달한 선비들의 사회 참여와 정신을 담은 만인소, 현재까지 이어지는 서원의 제향 의례 등 서원과 선비에 관한 종합적인 모습을 만날 수 있다.
2021.09.22 I 김은비 기자
고척돔에 아트북 특화공간 ‘제2책보고’ 내년 개관
  • 고척돔에 아트북 특화공간 ‘제2책보고’ 내년 개관
  • [이데일리 김기덕 기자] 문화·예술 인프라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서울 서남권에 ‘아트북(예술책)’에 특화된 국내 최초의 복합문화공간이 들어선다. 서울시는 장기간 비어 있던 구로구 고척스카이돔 지하 1층 유휴공간을 리모델링해 총 면적 2500㎡ 규모의 ‘제2책보고’(가칭)를 조성한다고 6일 밝혔다. 개관 예정일은 내년이다. 제 1호 책보고는 방치됐던 대형 창고에서 헌책 보물창고로 2019년 재탄생해 이후 2년 6개월간 약 40만여명이 찾을 정도로 큰 사랑받은 송파구 ‘서울책보고’다. 이 같은 인기로 약 3년 만에 ‘제2책보고’가 문을 열게 됐다. 구로구 고척스카이돔 지하 1층에 마련되는 제2책보고 공간 배치도.기존 서울책보고가 공공헌책방 개념의 공간이라면, 제2책보고는 아트북을 중심으로 모든 세대가 예술적 오감활동과 체험을 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이다. 아트북은 책과 미술이 결합돼 예술적 체험을 할 수 있는 책이다. 그림책, 팝업북, 사진집, 일러스트북, 미술작품집, 독립출판물 등 주제·내용·형태면에서 예술적 요소가 들어간 모든 책을 말한다. 또 이 공강은 도서관과 서점, 활동·체험공간, 휴식공간이 융복합된 공간으로 운영된다. 이 공간에서는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국내 그림책과 해외 유명 팝업북, 서점에 가도 비닐에 싸여 있어 열어볼 수 없었던 고가의 서적, 책의 창의적 영역을 보여주는 독립출판물, 사진집, 미술작품집 등 약 2만여 권을 만나볼 수 있다. 시는 이달 7일부터 24일까지 제2책보고에 대한 조성과 관련해 명칭 공모전을 진행한다. 관심 있는 시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참여 시민은 서울책보고와 같이 ‘책보고’와 어울리는 단어를 조합해 제2책보고의 가치와 정체성을 알기 쉽게 표현하는 명칭을 제안하면 된다. 슬로건과 부분공간명도 공모한다. 시는 외부 전문가 심사와 시민 선호도 조사 등을 거쳐 다음 달 11일 최종 수상작을 발표할 예정이다.주용태 서울시 문화본부장은 “이번 공간을 통해 모든 세대가 새로운 책 문화를 경험하고, 지친 일상에서 감정과 심리를 치유하는 공간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2021.09.06 I 김기덕 기자
'책과 미술의 조화'…도서관 새 패러다임 제시한 '의정부미술도서관'
  • '책과 미술의 조화'…도서관 새 패러다임 제시한 '의정부미술도서관'
  • [의정부=이데일리 정재훈 기자] 전국에서 유일하게 미술과 책이 어우러지는 ‘의정부 미술도서관’.‘책 읽는 도시, 의정부’를 실현한다는 목적으로 지난 2019년 11월 29일 개관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미술특화 공공도서관인 ‘의정부 미술도서관’은 문을 연지 만 2년이 채 안됐지만 이미 의정부는 물론 수도권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자리잡고 있다.전시 작품을 둘러보는 안병용 시장.(사진=의정부시 제공)안병용 시장은 “공공도서관은 이제 다양하고 복합적인 문화공간으로써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며 “이런 의미에서 의정부 미술도서관은 공간에 매력을 더하고, 이런 변화는 도서관 문화를 바꾸는 동시에 시민의 삶도 변화시켜 지역을 성장시키는 힘을 내뿜는다”고 말했다.◇도서관 공간·가구, 작품이 되다의정부 미술도서관에 들어서면 ‘공간’과 ‘가구’를 가장 먼저 마주할 수 있다.이곳의 공간은 책과 사람,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도서관의 가치를 직관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해야하는 동시에 내부의 모든 것으로부터 영감을 받도록 디자인해야한다는 취지로 구성했다.1층은 아트그라운드로 전시관과 미술자료를 열람할 수 있으며 제너럴 그라운드인 2층은 일반 공공도서관의 역할을 한다. 특히 어린이 자료존과 일반 자료존을 분리하지 않아 가족이 함께 책을 읽을 수 있도록 공간을 연결했다.3층은 멀티 그라운드로 열람과 체험, 창작과 교육, 커뮤니티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몄다.원형계단을 통해 하나의 공간으로 연결된 도서관 내부는 전면 유리창을 통해 바깥의 풍경을 도서관 내부로 들였으며 서가 등 가구는 반투명 아크릴 소재로 제작해 책 속에서 답답한 느낌이 들지 않도록 한 특징이 있다.이런 점이 공부를 위한 도서관이 아닌 전 세대가 어우러지는 공동체를 향하는 의정부 미술도서관의 방향이다.도서관 내부 공간.(사진=의정부시 제공)◇특별함을 더한 도서관 자료미술을 특화한 도서관으로 역할을 다하기 위하 의정부 미술도서관은 예술서적의 장서 구성에 노력을 기울였다.특히 백영수 작가를 모티브로 한 신사실파 섹션을 따로 마련했다. 이 결과 우리나라 근·현대미술사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신사실파 관련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몇 없는 도서관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신사실파 작가의 작품이 수록된 현대문학 창간호(1955년) 등 희귀자료 550여 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의 전시도록을 별도 배치했다.개관 2주년에 즈음해서는 미국 내에서 아시아 컬렉션을 가장 많이 보유한 하와이 호놀룰루미술관이 기증한 미술전문자료 2200여 권도 공개할 계획이다.◇미술도서관만의 또 다른 매력 ‘기획전시’지난 7월 28일부터는 백영수미술관과 공동으로 ‘연결 : 의정부미술문화축제’ 展을 개최하고 있다.이번 전시는 신사실파 동인이자 의정부 대표 작가인 백영수 화백과 지역 작가들을 연결하고 이미 잘 알려진 중견 작가 및 예비작가의 가교 역할을 한다.‘발상의 전환’과 ‘연결의 가치’를 지향하는 의정부 미술도서관의 건립 목적과도 부합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또 백영수와 김선영, 김푸르다, 양홍수, 유벅, 윤엄필, 정창균, 조창환, 최덕호, 최현주, 추니박 등 11명의 작가와 ‘제1회 의정부시 전국 청소년 미술공모전’ 입상작도 만나볼 수 있다.도서관을 둘러보는 가족.(사진=의정부시 제공)◇도서관을 움직이는 시민 참여도서관을 방문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올리는 블로그와 각종 SNS의 후기를 통해 입소문이 난 결과 의정부 미술도서관은 벌써 26만 명이 다녀갔다.일반 이용자 뿐만 아니라 전국의 170여곳의 지방자치단체와 기관이 벤치마킹을 위해 방문하기도 했다.시는 의정부 미술도서관에 대한 관심에는 책을 읽고싶게 만드는 공간의 매력과 주제별, 연령별로 제공되는 북큐레이션에 있다고 분석했다.4만3000권이 넘는 책 속에서 각 분야별 서비스 담당사서가 주제에 맞게 뽑은 책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추천하는 큐레이션 서비스에 시민들의 호응이 뜨겁다.또 미술에 관심 있고 미술을 전공하는 시민들을 위한 플랫폼 역할을 위해 시민 자원활동가를 전시해설사인 도슨트로 양성해 전시 관람을 돕고 있다.작업 공간이 필요한 신진작가 지원을 위해 운영하는 오픈스튜디오와 미술전공자들이 진로를 결정하기 전 경험의 기회를 제공하는 청년문화예술아카데미를 통해 문화예술분야의 인재를 인큐베이팅하는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도서를 정리중인 자원봉사자.(사진=의정부시 제공)◇‘유퀴즈온더블록’ 등 다양한 매체 출연도의정부 미술도서관 공간 구성의 독창성으로 관광명소로도 주목을 받고 있으며 드라마, 예능프로그램의 촬영장소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작년에 방송한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에서는 그림책 이야기를 하면서 도서관을 둘러보는 장면이 방영됐고 방송인 유재석과 조세호가 진행하는 예능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록’도 도서관의 다양한 공간에서 촬영을 진행해 입소문을 탔다.여기서 그치지 않고 ‘어느날 우리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와 ‘하이클래스’(오는 6일 첫 방송 예정) 등 드라마 촬영 요청도 끊이지 않고 있다.‘엘르’, ‘코스모폴리탄’ 등 잡지와 라디오, 한국관광공사, 한국문화정보원 등에서는 우리나라 문화시설을 소개하는 콘텐츠를 통해 의정부 미술도서관을 소개해 다양한 매체를 통한 의정부시 이미지 제고에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2021.09.01 I 정재훈 기자
 윤범모 "홍라희 전 관장에 '3자 협업' 제안했다"
  • [만났습니다] 윤범모 "홍라희 전 관장에 '3자 협업' 제안했다"
  •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이 서울 삼청로 서울관에서 열고 있는 ‘이건희컬렉션 특별전’을 둘러보다 잠시 나무의자에 걸터앉았다. 57점을 걸고 세운 전시에 뒤로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1950s·왼쪽부터), ‘3-Ⅹ-69 #120’(1969), ‘산울림 19-Ⅱ-73 #307’(1973)이 보인다. 윤 관장은 “삼성가에서 특히 귀하게 아끼던 작품이 ‘여인들과 항아리’”라며 “만약 이 작품을 오늘 경매에 올린다면 시작가가 300억원쯤은 돼야 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사진=이데일리 이영훈 기자).[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숨가쁜 시간이었다. 아니, 그걸로는 부족하다. 숨이 턱턱 막히는 순간이었다. 온 국민이 한마디씩 거드는, 말 그대로 ‘초미의 관심사’가 아닌가. 게다가 대상은 이건희(1942∼2020) 회장의 유족이다. 결코 편하다고 할 수 없는 그들을 상대로, 1969년 개관 이래 52년 만의 가장 굵직한 ‘대형사건’을 처리해야 했다. 그것도 조용히 빠르게. 윤범모(70) 국립현대미술관장. ‘이건희 소장 미술품 기증’, 그 과정에서 굳이 한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그이여야 할 거다. 드러내지 않고 움직였다. 기증 발표 한 달여 전 이 회장 유족을 만나 ‘아주 특별한 제안’을 받았고, 가장 먼저 작품들을 실견했으며, 그 한 점 한 점이 옮겨지는 것을 뒤에서 지켜봤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 수장고와 경기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수장고를 오가며 5t 규모 무진동차량 18대에 실어나른 미술품이 1488점. 긴장감이 극에 달했던 운송과정이 모두 끝나고 드디어 ‘반입완료’ 사인을 받았다. 지난 4월 23일의 일이다. 유족의 발표는 닷새 뒤 나왔다. 그렇게 4월 28일, 소문만 무성하던 ‘이건희컬렉션’, 정확하게 말하면 이 회장이 개인소장했던 미술품 중 유족이 선별한 기증작이 베일을 벗었고, 이후 4개월이 지났다. 기증작 가운데서도 ‘정수 중 정수’라 할 대표작들이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형식으로 대중을 만난 지도 한 달하고 열흘이다. BTS 공연만큼이나 예약이 어렵다는 그 바늘구멍을 뚫고 다녀간 관람객은 8900여명. 시간당 30명으로 제한해서 그 정도다. 기증 결정부터 특별전까지, 솔직히 ‘이건희’란 타이틀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긴박한 진행’이었다. 그 ‘긴박한’ 중엔 전국 지자체를 들끓게 했던, 대통령이 지시하고 주무부서 장관이 받든 ‘이건희미술관’의 부지 선정 이슈까지 있었으니. 최근 윤 관장을 이데일리가 단독으로 만났다. 누구보다 마음을 졸이며 쌓았을 고단함이 왜 없었겠는가. 이젠 그 짐을 좀 덜었는지, 스스로 표현했던 진짜 ‘행복관장’의 얼굴이다. “이제는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물었더니 “인생살이는 변화무쌍한 것, 마음먹기에 달렸더라”는 선답이 왔다. 잠시 마주 보고 웃었다. ◇“미술관 소장품에 도움을 주겠다는 게 유족 입장” ―“생애 가장 큰 영광”이라 했던 이건희컬렉션 기증 이후에 4개월이 지났다. “특별전 전시장에 들어서서 처음 맞는 작품이 백남순의 ‘낙원’(1936)과 이상범의 ‘무릉도원’(1922)이다. 둘 다 이상향을 그린 작품인데 이건희컬렉션의 대량 기증이 미술관에 낙원을 만든 게 아닌가 싶다. 사막의 오아시스라고 할까. 전시에 부제를 붙인다면 ‘미술관의 낙원’이라 해도 될 거다.” 그도 그럴 것이 백남순의 ‘낙원’은 윤 관장에겐 가슴에 들인 작품이기도 하다. 몇 점 전하지도 않는 작가의 그 작품을 처음 발굴한 이가 바로 윤 관장이었던 거다. 1980년대 취재하고 글을 쓰던 시절, 소장자(백남순이 친구 민영순에게 결혼선물로 줬다)를 찾아 용산구 이촌동 한 아파트로 갔고, 높이 173㎝, 폭이 372㎝나 되는 8폭 병풍의 작품사진을 집안에선 찍을 수가 없어 아파트 옥상까지 끌고 올라가 촬영했다고 했다. 이후 그 ‘낙원’은 이 회장의 소장품이 됐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이 서울 삼청로 서울관 ‘이건희컬렉션 특별전’에 걸린 백남순의 ‘낙원’(1936) 앞에 섰다. 전시장에 들어서서 처음 관람객을 맞는 이 작품은 윤 관장에게 ‘각별하다’. 1980년대 윤 관장이 소장자를 찾아 처음 발굴해 세상에 알린 작품이기 때문. 이후 작품은 이건희 회장의 소장품이 됐다(사진=이데일리 이영훈 기자).―기증작 중엔 대형작가의 작품이 아닌 것도 꽤 있다. “이 회장이 근대미술 초기작을 모조리 수집할 때가 있었다. 미술사에서 중요한 작가인데 몇 점 남아있지 않은 경우라면 대부분 사들였다. 시장성에 상관없이 한자리에 모아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던 듯하다. 돈이 되고 안 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처음 이 회장 유족의 기증 의사를 받았을 때 어땠나. “소박하게 미술관에 빠진 것만 채워주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1488점이나 된 거고. 기본적으로 유족은 미술관 소장품에 도움을 줘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기증작 선별부터 그랬다. 그래서 리움미술관 소장품 몇 점이 따라온 걸로 안다. 기증을 위해 사전에 우리 미술관의 소장품까지 파악했던 거다. 유족 중 누구의 의견이라기보다 가족 전부가 합의를 본 일이다.” 어쩔 수 없이 국립현대미술관은 이건희컬렉션 전후로 나뉠 수밖에 없게 됐다. 그 이전, 반세기 동안 기증받고 또 사서 모은 소장품은 8782점. “언제 1만점을 채우나” 했던 역대 관장들의 소원이 이건희컬렉션 기증작 1488점으로 불현듯 현실이 됐다. ‘소장품 1만점 시대’가 열린 거다. 게다가 한 해 소장품 구입예산 48억원(2021년 기준)으론 언감생심이던, 수십억원대 김환기의 점화, 이중섭 소 그림까지 품을 수 있게 됐다. ◇“이건희컬렉션, 소유권 어디 있든 함께 활용해야” ―이건희 회장, 홍라희 전 관장과 인연이 있던 걸로 안다. “중앙일보가 서울 서소문에 신사옥을 지으며 퍼포먼스를 위한 공간을 만들었다. 이병철 선대 회장의 특명이었다. 호암갤러리가 그때(1984) 생겼고, 내가 전시기획 책임자로 일하게 됐다.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의 당시 공식직함이 중앙일보 상무이사였는데, 선대 회장이 며느리에게 ‘미대 출신이니 맡아서 해봐라’ 했던 게 홍 관장이 미술관 운영을 시작한 출발점이 됐다. 국내에 대형전시가 없던 시절이라 그만큼 호암갤러리 전시는 독보적이었고, 전시작 중 많은 작품을 이건희 회장이 구입했다. 당시는 국립현대미술관에 학예실도 없던 때라 덕분에 내가 ‘뮤지엄큐레이터 1호’로 불리기도 했다.” 이데일리와 인터뷰 중인 윤범모 국립현미술관장. 윤 관장은 “아무리 문턱 없는 미술관을 표방해도 일반인에게 미술관은 여전히 신전처럼 보인다”며 “이번 기증이란 사건이 미술관을 일반어로 전국화하는 데 기여한 바가 크다고 본다”고 말했다(사진=이데일리 이영훈 기자).―특별전에 홍라희 전 관장과 이서현 이사장이 다녀갔다는데. “맞다. 한 작품, 한 작품 공들여 봤고 ‘한자리에 모으니까 좋네요’라고도 했다. 관람 중 가끔 탄식도 나오더라. ‘이 작품, 우리집에 걸렸던 건데’ ‘이 그림은 선대 회장이 구입하셨던 건데’ 하는. 대부분 홍 관장의 혼잣말이었다.” 홍 전 관장과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이 ‘이건희컬렉션 특별전’을 관람한 건 전시 개막 다음날이었다. ‘기증자 예우’도 사양하고 일반인 관람에 맞춰 전시를 둘러봤다. 이후 윤 관장과 따로 만난 자리에서 홍 관장은 “기증작을 잘 활용을 해달라”는 말을 전했단다. 처음 기증 의사를 밝혔던 때와 다를 바가 없더라고 했다. ‘뭘 해드릴까’ 물었더니 ‘해주실 게 없다’고 했다는 거다. 되레 제안을 한 건 윤 관장이었단다. ―어떤 제안이었나. “3자협의체를 제안했다. 리움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이 함께하는. ‘이건희컬렉션이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으니 서로 협업체제로 가야 하지 않겠는가’ 말했다. 공동기획도 하고, 공동전시도 하고. 소장품의 소유권이 어디에 있든 같이 활용할 수 있는 카드를 함께 쓰는 게 좋겠다고도 했다. 이제 이건희컬렉션은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 됐으니 공동으로 꾀할 수 있는 미술문화 발전방안으로 이보다 더 바람직한 게 있을까 싶었다. 홍 관장에게서 ‘그렇게 해보자’는 대답을 들었다.” ◇“지자체 과열 유치전 덕에 ‘미술관’이 일반어 돼”이건희컬렉션의 뜨거운 이슈는 ‘이건희미술관’이 이어받았다. 전국 지자체의 과열 유치전을 불러왔고 지난달 초 문화체육관광부는 ‘이건희기증관’이란 가칭으로 후보지를 서울의 송현동과 용산동, 두 곳으로 압축한 상태다. 당장 국립현대미술관의 ‘이건희컬렉션’ 활용방안에도 영향을 미칠 이 사안에 대해 윤 관장은 말을 아꼈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이 서울 삼청로 서울관에서 열고 있는 ‘이건희컬렉션 특별전’을 둘러보다 잠시 나무의자에 걸터앉았다. 뒤로 윤호중의 조각 ‘물동이를 인 여인’(1940·왼쪽부터), 김기창의 ‘군마도’(1955), 김종태의 ‘사내아이’(1929)가 보인다. 윤 관장은 “이건희 회장은 미술사에서 중요한 작가의 작품은 대부분 사들였다”며 “시장성에 상관없이 한자리에 모아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던 듯하다”고 회고했다(사진=이데일리 이영훈 기자).―이건희미술관이 세워지면 기증받은 작품들은 어찌 되는가. “거기까진 논의된 바가 없다. 연내에 송현동과 용산동 중 부지를 결정할 테고 건립까진 수년이 걸릴 거다. 지금은 이건희컬렉션이란 가치를 최대한 높이고 활용할 고안만 하면 된다. 다만 ‘이건희기증관’이란 명칭 대신 그냥 ‘이건희컬렉션’이라 하는 건 어떠냐는 제언은 한 적 있다. 국가에서 짓는 건데 외래어는 좀 곤란하다고 하더라.” ―전국 지자체 다수가 미술관으로 직접 연락했다던데. “대한민국 각 시·도의 유치경쟁 덕분에 미술관이란 말이 국민적 차원에서 친숙한 단어가 된 점은 되레 긍정적으로 본다. 어쨌든 나는 권역별로 미술관은 많을수록 좋다는 입장이다.” ◇공식임기 내년 2월까지…코로나 탓 실력발휘 못해 안타까워” 윤 관장의 공식 임기는 내년 2월까지다. “코로나와 싸우느라 시간을 다 보내고 실력발휘를 못해 안타깝다”는 말이 충분히 이해가 될 만큼 지난 2년 6개월은 빠르게 지나갔다. 사실 국립현대미술관장의 ‘3년 임기’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장기계획은커녕 ‘뭘 좀 해보려면 끝난다’ ‘전임 관장이 기획한 일을 하다 보면 퇴임’이란 얘기가 나올 정도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지난해 4월 미술관의 숙원이던 관장 직급이 격상됐다. ‘임기제 고위공무원 나급(2급 국장급)’에서 ‘1급 차관보급’까지 올라선 거다(참고로 국립중앙박물관장은 1급 차관급이다). 그럼에도 윤 관장은 “겉만 우아한 백조관장”이라며 한껏 자신을 낮춘다. 이제 6개월여 남은 시점, 조심스럽게 연임의사를 묻자 “다음에 얘기하자”며 미소로 대신했다. ―‘소장품 1만점 시대’, 큰 성장이지만 자생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들 한다. “세계 유수의 미술관 역시 주요 기증작이 채운다. 미술품 구입 예산에는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고, 기증문화가 활성화될수록 그 비중은 는다. 하지만 기증도 결국 미술관에 신뢰가 생겨야 하는 거다. 이건희컬렉션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자생적’ 성과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이 서울 삼청로 서울관에서 열고 있는 ‘이건희컬렉션 특별전’을 배경으로 앉았다. 왼쪽으로 김은호의 ‘간성’(1927)이, 오른쪽으론 장욱진의 ‘공기놀이’(1938)가 보인다(사진=이데일리 이영훈 기자).―수장고 포화상태는 어떻게 해결하고 있나. “1488점 기증으로 과천·청주관에 있는 수장고가 95% 찼다. 여기저기 타진은 하는데, 사실 국가 차원의 예산·인력이 필요하다. 고무적인 건 몇몇 지자체에서 관심을 보인다는 점이다. 그런 식으로 돌파구를 마련해 지역과 미술관의 상생을 모색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미술관 업무가 소장품 쪽으로 쏠린 듯하다. “미술관 본연의 의무와 역할은 이건희컬렉션 이전과 이후가 똑같다. 사실 미술관의 격은 소장품이 말해준다. 그만큼 소장품 연구·관리가 중요하다. 소장품이 대거 증가했기 때문에 예산·인력을 배치하고 ‘비정상적 긴급사태’를 해결하려는 것뿐이다. 당장 등재작업부턴데, 우리 미술관이 소장품을 등재하는 역량은 한 해 200점 정도다. 이건희컬렉션 외에도 기증받은 500점 더 있으니, 지금 2000점 얼추 10년치를 작업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 2년 반 임기 중 중요한 성과를 꼽으라면. “한국현대미술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책으로 출판해 한글판은 국내에, 영문판은 해외로 내보내고 있다. 미술관 내 미술전문서점을 만든 것도, 전시도록을 상품화한 것도 꼽을 만하다. 연구저술은 굉장한 성과다. 세계 무대에 한국미술을 알리는 일이 늘 중요하다고 말해왔는데, 뭐든 정보를 줘야 관심을 가질 수 있지 않겠나. 도판이 풍성한 볼륨 있는 단행본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데일리와 인터뷰 중인 윤범모 국립현미술관장. 스스로를 ‘겉만 우아한 백조관장’이라고 말한 윤 관장은 “아등바등한 성격이 아니어서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편”이라며 “다만 ‘수처작주’(隨處作主·어느 곳이든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는 뜻)란 말을 따라 미술관 밖이든 안이든 주인의식으로 맡은 소임을 다하려 한다”고 말했다(사진=이데일리 이영훈 기자).△윤범모 관장은…1951년 충남 천안에서 났다. 동국대 미술학과, 동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동아신춘문예에서 미술평론부문을 수상(1982)한 뒤 글 쓰는 일로 미술계에 발을 들였다. 호암갤러리 큐레이터(1984∼1986)로 전시기획을 시작했고 예술의전당 미술관, 이응노미술관 개관·운영에 참여했으며, 광주비엔날레 20주년 특별전 큐레이터(2014),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예술총감독(2016), 창원조각비엔날레 총감독(2018)으로도 활약했다. 가천대 미술디자인대 교수(1994∼2016),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좌교수(2017∼2019)로 후학을 양성하며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장·한국큐레이터협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장에 임용된 이후 주요 전시로 ‘광장: 미술과 사회’(국립현대미술관 개관 50년 기념전·2019), ‘미술관에 書: 한국 근현대 서예전’(2020), ‘모두를 위한 미술관, 개를 위한 미술관’(2020),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2021) 등이 꼽힌다. ‘시인과 화가’(2021), ‘백년을 그리다’(2018), ‘한국미술론’(2017), ‘나혜석, 한국근대사를 거닐다’(2011) 등 저서도 다수다.
2021.08.30 I 오현주 기자
<25>점점이 박힌 그리움, 하늘의 별이 됐구나
  • [손태호의 그림&스토리]<25>점점이 박힌 그리움, 하늘의 별이 됐구나
  • 김환기가 1970년에 그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먹빛에 가까운 짙은 푸른색 점을 무수히 찍은 전면점화로 1970년대 김환기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점의 크기와 그를 둘러싼 색채의 농담·번짐의 차이로 마치 별빛이 부유하는 밤 풍경 같은 우주적 공간감을 던져준다. 작품은 이후의 전면점화에도 중대한 분기점이 됐는데, 흰 선이나 활형의 곡선을 들이기도 하고, 특유의 깊은 푸른색은 물론 주황·빨강·노랑 등 색조의 다양성도 꾀했던 거다. 뉴욕에서 제작한 작품은 서울로 보내져 그해 ‘제1회 한국미술대상’을 받았다. 캔버스에 유채, 236×172㎝, 환기재단·환기미술관 제공.혹독한 세상살이에 그림이 무슨 대수냐고 했습니다. 쫓기는 일상에 미술이 무슨 소용이냐고 했습니다. 옛 그림이고 한국미술이라면 더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는 일을 돌아보면 말입니다. 치열하지 않은 순간이 어디 있었고, 위태롭지 않은 시대가 어디 있었습니까. 한국미술은 그 척박한 세월을 함께 견뎌온 지혜였고 부단히 곧추세운 용기였습니다. 옛 그림으로 세태를 읽고 나를 세우는 법을 일러주는 손태호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조선부터 근현대까지 시공을 넘나들며, 시대와 호흡한 삶, 역사와 소통한 현장에서 풀어낼 ‘한국미술로 엿보는 세상이야기’ ‘한국미술로 비추는 사람이야기’입니다. 때론 따뜻한 위로로 때론 따가운 죽비로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손태호 미술평론가] 세계 문화예술의 중심 도시를 꼽으라면 어디를 꼽을까요. 당연히 현재의 중심은 미국의 뉴욕입니다. 구게하임미술관,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등 세계 최고의 미술관이 모여 있고 브로드웨이에서는 매일 수십 편의 뮤지컬과 셀 수 없을 만큼의 각종 연주와 연극이 무대에 오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뉴욕이 예술의 중심 도시가 된 것은 2차대전 이후이고 그 이전은 프랑스 파리였습니다. 지금도 파리는 유럽 제일의 문화예술 도시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문화예술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파리와 뉴욕, 이 두 곳 모두에서 인상적인 활동을 한 한국인 화가가 있었으니, 한국 추상회화의 선구자 수화 김환기(1913∼1974)입니다. 김환기가 이룬 한국미술의 성과는 대단하지만 그 성취가 혼자만의 노력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의 아내이자 예술적 동지인 김향안(1916∼2004)과 공동으로 이룬 업적이라 할 만해서지요. 그런 김향안을 김환기는 그림으로 어떻게 남겼을까요. 1950년대 김환기의 대표적인 ‘달항아리 시리즈’에 등장하는 여인의 모델이 된 이가 바로 김향안입니다. 그 시기 대표작 중 하나인 ‘항아리를 인 여인’(1950s)도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저고리 없이 옥색 치마만 입은 여인이 달항아리를 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던지 매병 한 점을 품에 안고 돌담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 뒤로 나무 한 그루가 여인을 지켜보듯 서 있고 그런 모든 풍경을 보름달이 환히 비추고 있습니다. 단발머리의 여인은 둥근 얼굴로 눈이 크고 코도 오뚝한 미인형으로, 김향안의 실제 모습을 많이 닮았습니다.◇아내이자 예술적 동지인 김향안 모델로 한 그림 작품에 도자기를 두 점이나 등장시킨 것으로도 미뤄볼 수 있듯 김환기는 소문난 도자기 애호가였습니다. 시골 안좌도의 전답을 팔아가며 백자, 특히 달항아리를 수집했습니다. 집안을 가득 채운 도자기 덕에 자신은 도자기 속에서 산다고 농담을 할 정도였다지요.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추구한 한국적 미의 결정체가 도자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평생 지우였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 혜곡 최순우(1916∼1984)와의 깊은 교류도 한국적 미에 대한 안목과 도자기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공유했기 때문입니다. 작품 속 여인에게 도자기를 두 점이나 이고 안게 한 것도 순박하고 어진 한국적 미를 구현한 도자기와 여인의 내면적 아름다움을 동일시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여인의 치마색은 고려청자의 은은한 비취색과 흡사합니다. 뒤에 선 나무는 김환기 자신을 상징했을 것입니다. 김환기는 근원 김용준(1904∼1967)이 살던 노시산방을 물려받아 ‘수화와 향안이 사는 집’이란 뜻의 수향산방으로 고쳐 살았는데 이 집 마스코트였던 감나무를 매우 사랑했고, 정원에서 꽃과 나무 가꾸기도 좋아했습니다. 나무와 대화한다는 뜻의 ‘수화’(樹話)란 호를 스스로 만들어 사용할 정도였습니다. 달 또한 무척 좋아했는데, 취흥이 도도해지면 우물가에 항아리를 들고 마당에서 춤을 추면서 “달이 뜬다, 노시산방에 달이 뜬다”고 노래할 만큼 김환기에게 달항아리와 달은 동일체였습니다. 그만큼 작품은 단순한 소재뿐이지만 그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한데 담아낸 것입니다. 김향안의 결혼 전 본명은 변동림으로, 천재 시인 이상(1910∼1937)의 아내였습니다. 그러나 이상과 함께 보낸 시간은 고작 3개월에 불과했고, 이상이 폐결핵과 일본감옥 수감으로 요절하면서 슬프게 막을 내렸습니다. 얼마 뒤 김환기의 적극적인 구애가 있자 결혼을 결심하는데, 이상과는 혼인신고도 하지 않아 서류상 미혼이던 변동림이 당시 딸이 셋이나 있던 김환기와 결혼을 하겠다니 주변에선 반대가 심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감행을 합니다. 이때 변씨와의 모든 인연을 끝내겠다는 의지로 김향안으로 개명을 한 것입니다. 김씨는 김환기의 성이고, 향안은 김환기의 아호니 김환기와 함께하겠다는 결심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김환기의 아내가 된 후로 김향안은 김환기의 뮤즈이자 친구이고 후원자이자 조력자였습니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단 한 번도 누구에게 손을 벌려본 적 없는 김환기를 위해 생활비를 마련해야 했고 세 딸을 공부시키고 돌보는 일도 김향안의 몫이었습니다. 미술시장의 중심인 파리에서 활동하고자 한 김환기를 위해 먼저 프랑스어를 공부해 작품 목록을 들고 파리로 가 화랑을 돌며 파리생활의 터를 마련한 것도 김향안이었습니다. 이후 파리에서 4년간 김환기는 그림을, 김향안은 미술사 등을 공부하는데, 밥은 굶어도 담배는 못 끊겠다는 김환기를 위해 담뱃값을 빌리러 다녔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김환기 ‘항아리를 인 여인’(1950s). 돌담을 배경으로 백자를 이고 안은 여인을 그린 작품으로, ‘여인과 달과 항아리’란 타이틀로 전해지기도 한다. 당시 김환기의 주요 소재였던 달과 항아리, 여인과 나무를 한 캔버스에 모두 들였다. 사실적 묘사에 상징성·기호성을 더해 이후 추상성의 단초를 마련한 동시에 풍부한 서정성까지 지닌 작품이 됐다. 캔버스에 유채, 91×71㎝, 환기재단·환기미술관 제공.하지만 귀국 후에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김환기가 홍익대 미대에서 교수와 학장을 지냈지만 당시 학교 형편이 좋지 않아 월급이 1년 동안 지급되지 않기도 했고, 그림값을 1급으로 쳐주지 않으면 팔지 않겠다는 김환기의 고집과 나중에는 모든 그림을 팔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가정형편이 영 신통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김향안은 글솜씨를 발휘해 매체에 각종 글을 쓰며 김환기를 위해 책 표지화라도 얻고자 출판사를 들락거리기도 했습니다. ◇“내가 찍은 점,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김환기 그림은 뉴욕에서 완성됩니다. 1964년 브라질 상파울루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 뒤 귀국하지 않고 바로 미국으로 날아가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초기 1년은 록펠러재단에서 후원을 받아 정착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변방의 화가에게 자리를 쉽게 내줄 뉴욕이 아니었습니다. 김환기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란 말을 처음으로 했을 만큼 한국적 미의 추구를 세계가 알아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그를 표현하는 조형언어는 나라마다 다르다는 점을 깨닫는 데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생활은 늘 궁색했고 아파도 병원조차 제대로 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추상의 세계로 깊이 나아갔고 예술적 고뇌와 한국의 벗, 산천의 그리움을 녹여낸 전면점화가 연달아 탄생합니다. 대표작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가 그중 한 점입니다. 작품은 뉴욕으로 떠난 뒤 한국화단에서 잊혀질 무렵인 1970년 한국일보사에서 주최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 출품해 대상을 받았습니다. 이미 여러 미술전에 심사위원 등으로 나섰던 김환기 입장에서는 공모 자체가 말도 안 됐지만, 초대 대회에 권위를 높여 달라는 주최 측의 간곡한 청을 거절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자신이 갈고 닦은 뉴욕에서의 성취를 고국에 보여주고 싶은 생각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그랬습니다. 이전의 반추상화에서 화면 전체를 점으로만 찍은 추상화로의 변신을 완벽하게 이룬 이 그림은 당시 미술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이 작품의 배경에는 또 한 명의 인물이 나옵니다. 절친이자 존경했던 시인 김광섭(1906∼1977)입니다. 작품명은 김광섭이 쓴 시 ‘저녁에’(1969)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당시 일기에는 “서울을 생각하며, 오만가지 생각하며 찍어가는 점” “내가 찍은 점,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라고 적어놨습니다. 그후 김환기는 1974년 사망할 때까지 우주적 연대로 확장한 대작의 전면점화를 다수 제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열정적인 활동이 건강에 무리가 돼 목 디스크가 심해졌고, 치료를 위해 수술한 뒤 회복 도중 침대에서 떨어진 후유증으로 결국 타계했습니다. 수많은 점을 찍으며 별을 보여주고 싶어 했던 김환기는 결국 스스로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됐던 겁니다. 남편을 여의고 30년을 더 산 김향안은 김환기의 예술세계를 정리하며 일생을 보냈습니다. 회고전을 추진하고 파리와 뉴욕, 서울에 환기재단을 연달아 설립했으며, 서울 부암동에 환기미술관도 세웠습니다. 김환기와 김향안, 또 김광섭까지. 이제는 별이 돼 만나볼 수 없는 이들이지만 그들이 있어 한국미술의 밤하늘에는 아름다운 별들이 총총히 빛나고 있습니다. ※김광섭과 김환기 문예지에 화문을 자주 발표하고 ‘글과 그림이 다 되는 작가’란 말을 들었던 만큼 김환기는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당연히 시인들과의 교류도 돈독했는데, 김광균·서정주·조병화·김광섭 등과 가깝게 지냈다. 이들과의 친분은 작품에도 종종 반영이 됐고 서정주의 시 ‘기도 1’(1954)의 전문을 실은 ‘항아리’(1955)란 그림도 발표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보다 대중에 더 잘 알려진 관계의 작품은 김광섭의 시 ‘저녁에’(1969)가 모티프가 된 전면점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다. 이 시 중 마지막 두 줄에서 따온 시구로 작품명을 삼은 그림은 마치 시인에 헌정한 듯하다. 일고여덟 살 위의 김광섭과 김환기는 서울 성북동 이웃사촌이었다가 김환기가 뉴욕으로 건너간 이후로는 편지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그 작품이 잘못 전달된 부고 때문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1970년 갑자기 전해진 김광섭의 사망소식에 비통해하던 김환기가 시 ‘저녁에’를 메모한 뒤 탄생시킨 그림이었던 것. 어쨌든 김광섭은 살아 있었고, 1974년 김환기가 61세로 먼저 세상을 떠난 뒤 3년을 더 살았다.
2021.07.30 I 오현주 기자
"책으로 더위 날린다"…경기도, 작가 초청 강좌 개최
  • "책으로 더위 날린다"…경기도, 작가 초청 강좌 개최
  • [의정부=이데일리 정재훈 기자] 경기도 북부청사 경기평화광장 북카페가 7월 문화의 날 행사로 무더위와 코로나19를 피해 여유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경기도는 오는 24일 오전 10시부터 ‘결과가 증명하는 20년 책육아의 기적’, ‘엄마 공부가 끝나면 아이 공부는 시작된다’의 서안정 작가를 초청 ‘20년 책육아의 기적, 몸마음머리 독서법’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펼친다고 21일 밝혔다.경기평화광장 북카페.(사진=경기도 제공)이어 28일 오전 10시에는 ‘치유미술관’, ‘나와 만나는 시간’을 쓴 김소울 작가가 그림을 통해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는 ‘아이 마음을 보는 아이 그림’ 강연을 진행한다.아이가 그린 그림을 북카페로 보내면 김소울 작가가 직접 그림을 해석하며 아이의 마음을 함께 느껴 보는 시간도 만든다.경기평화광장 북카페는 코로나19 장기화로 문화생활을 즐기지 못하는 도민 가족의 독서문화 향유를 위해 매월 문화의 날을 정해 ‘북콘서트’, ‘그림책 강연’ 등 다양한 문화행사를 비대면으로 진행하고 있다.이번 강연 역시 사회적 거리두기를 준수하고자 모두 온라인 비대면 방식으로 진행해 경기도민은 누구나 무료로 참여할 수 있으며 참여 모집은 메일로 하면 된다.자세한 사항은 경기평화광장 북카페 홈페이지 공지사항을 참고하거나 전화로 문의하면 확인할 수 있다.
2021.07.21 I 정재훈 기자
한옥 처마 밑에 숨은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 한옥 처마 밑에 숨은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 자치구 최초로 건립된 성북구립미술관은 한국 근현대 미술사를 중심으로 한 기획 전시를 주로 연다.(사진=서울관광재단)[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아파트가 많은 서울 도심 속 우리는 가끔 자연을 재료로 만든 한옥의 아름다움이 그리워지는 순간들이 있다. 한양도성 북쪽에 자리한 서울 성북구. 우리나라 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문학인들이 많이 살았던 곳으로 심우장, 길상사, 수연산방, 최순우옛집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 한옥들의 처마 밑이나 뜰에 앉아 신선한 바람을 쐬면 나무와 향토가 주는 싱그러움과 함께 더운 여름도 날려 버릴 것만 같다.1-3. 성북예술창작터에서 전형산 작가의 ‘목소리의 극장’전이 열린다. 스텝이 작품 ‘균형의 함정1;높은-소리, 낮은-소리’ 앞에서 작동법을 선보이고 있다.▲지역민이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미술관 ‘성북예술창작터와 거리갤러리’성북예술창작터(성북구립미술관 분관)는 동사무소 건물을 미술관으로 고친 도시재생공간이다. 조선 시대 화가 장승업의 집터였다고 하니, 그 의미가 남다르다. 총 2층으로 이루어진 아담한 공간에서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창작 활동을 하는 시각예술 분야의 신진 예술가들이 마음껏 기량을 펼친다. 성북예술창작터에서 이들을 발굴·지원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성북구민과 함께 성북구의 숨은 이야기와 풍경을 수집·기록하는 등 다양한 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열린 미술 문화 만들기에 힘쓴다. 지금 성북예술창작터에 가면 전형산 작가의 1인전 ‘목소리의 극장’을 관람할 수 있다. 총 8점의 설치미술 작품이 전시돼 있고, 관람객이 작품 일부를 작동해 볼 수 있다. 설치미술 작품은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데, 스텝이 작품을 설명해주고, 작동법을 알려준다. ‘목소리의 극장’전은 7월 24일까지 열린다.성북예술창작터 관람 후에는 성북구립미술관이 주관하는 ‘거리갤러리’를 함께 둘러보면 좋다. 거리갤러리는 ‘예술가와 주민이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미술관’ 콘셉트로 진행되는 공공미술 프로젝트다. 2018년 건축가 조성룡이 성북구립미술관 아래 복자교 일대에 오래된 석축과 건물, 옛 물길의 살려 거리갤러리 공간을 설계했다. 지금 2020년 ‘성북구립미술관 거리갤러리 공공미술 프로젝트’에 설치미술가 김승영이 두 번째 작가로 참여해 ‘바람의 소리’殿을 진행하고 있다. 올해 12월 31일 이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김승영 작가와 성북동 주민이 거리갤러리에 설치된 작품과 어우러질 수 있는 조경을 조성한다. 성북예술창작터 근처에 1968년 창업하여 생크림빵과 통팥빵으로 유명한 나폴레옹과자점이 있다. 성북예술창작터와 나폴레옹과자점 사이의 뒤쪽 동네가 옛날에 앵두나무가 많아 ‘앵두마을’이라 불렸던 곳인데 당시에는 근대한옥 밀집구역이였다. 지금은 한양도성 아래 골목에만 한옥이 몇 채 남아있다. 이 한옥을 고쳐 지은 레스토랑 ‘이안’과 카페 ‘반하당’이다.최순우옛집 안채에서 자원활동가가 관람객에게 최순우의 생애와 옛집에 관해 해설해 주고 있다.▲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일깨우는 공간 ‘최순우옛집’최순우옛집(서울시 등록문화재 제268호)은 미술사학자이자 4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인 혜곡 최순우가 말년을 보냈던 근대한옥이다. 혜곡은 이곳에서 대표작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집필했다. 이후에 집이 헐릴 뻔 했지만 이화여대 교수였던 김홍남이 시민 후원금을 모아 샀다. 이로써 최순우옛집은 시민이 지켜낸 ‘내셔널트러스트 시민문화유산’ 1호가 되었다. 외벽에 후원자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는 풍경이 감동적이다.시민이 앞장서 이 집을 지킨 이유는 옛집의 가치와 우리 문화재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데 평생을 바친 혜곡의 노력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혜곡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재직하는 동안 유물 수집과 보존 처리, 연구, 인재 양성에 힘을 쏟았다. 1950년대 말부터 일본, 유럽, 미국 등을 순회하며 우리 문화재 알리기에 앞장섰다. 일본에서 열린 ‘한국미술 5천년전’은 57만여 명이 관람하는 성과를 이뤄 전설로 남았다.혜곡이 살뜰히 가꾸었던 옛집 곳곳에 유품과 친필 원고, 문화예술인들이 보낸 연하장과 선물한 그림 등이 전시돼 있다. 최순우옛집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이 안채의 용(用)자 창살이다. 혜곡은 이 창살의 비례가 아름답고 정갈하다며 칭송했다고 한다. 김홍도의 글자를 좋아했던 혜곡은 사랑방 용자창살문 위에 김홍도의 글자를 집자 해 쓴 편액을 걸었다. 혜곡은 우리나라 식물에도 애정을 쏟았다. 맘에 드는 나무나 꽃이 있으면 뜰에 옮겨와 심었다고 한다. 지금도 앞뜰과 뒤뜰에 소나무, 대나무, 산사나무, 산수국, 모란, 수련 같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주변 명소로는 선잠단지(사적 제83호)를 추천한다. 조선 성종 때 백성에게 양잠을 장려하고 누에치기의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선잠제를 지냈던 곳이다. 선잠제는 국가의 중요한 제사였으므로 왕비가 뽕잎을 따며 양잠의 모범을 보이는 친잠례가 이루어졌다. 2018년 선잠단 위쪽에 선잠단지와 선잠제의 역사를 기록한 성북선잠박물관이 들어섰다. 길상사는 도심에 지어졌어도 전각들이 숲에 둘러싸여 있어 산 속 사찰 같은 분위기를 띤다.▲종교를 초월한 도심 속 안식처 ‘길상사’ 길상사 일주문을 통과해 절 마당에 있으면 마치 숲속에 들어온 것 같다. 삼각산 남쪽 자락의 숲과 계곡이 절 안에 들어와 있다. 이곳이 주택가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극락전 왼쪽, 계곡이 흐르는 숲 구역은 낮에도 그늘이 짙다.계곡 상류 비탈에 늘어선 오두막 같은 건물은 스님들이 수행하는 곳인데, 길상사가 개원하기 전 대원각에서 사용했던 건물이다. 성북동의 최고급 요정이었던 대원각이 길상사가 된 사연은 유명하다. 1987년 대원각 주인 김영한이 법정스님의 저서 ‘무소유’를 읽고 감동하여 대원각 대지 7000평과 건물 40여 동을 절 짓는 데 시주할 뜻을 밝혔다. 당시 시가 1000억이 넘는 부동산이었다고 한다. 1995년 법정스님이 대원각을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말사 대법사로 등록했다가, 1997년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길상사 창건일에 김영한은 법정스님으로부터 염주 한 벌과 길상화라는 불명을 받았다. 2년 뒤 김영한은 자신의 유언대로 눈 내리는 날 길상사 경내에 유골이 뿌려졌다. 법정스님도 2010년 길상사에서 입적했다. 길상사는 대원각 시절 건물을 대부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설법전 앞의 관음보살상이 천주교의 마리아상을 연상케 해 눈길을 끈다. 이는 법정스님이 종교 간 화합을 염원하는 마음에서 천주교 신자인 조각가 최종태에게 의뢰해 봉안한 것이다. 법정스님은 길상사가 종교를 초월해 누구나 부담 없이 드나들며 마음의 평안을 얻는 작은 공원이자 사색의 공간이며 기도처가 되길 바랐다고 한다. 그 뜻에 따라 일반인을 위한 템플스테이, 템플라이프, 여름수련회 등의 다양한 사찰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근처에 2010년 G20 정상회의 때 영부인들이 한국 전통문화를 체험하기 위해 찾은 곳으로 유명해진 한국가구박물관이 있다. 창경궁 전각을 비롯한 한옥 10채를 옮겨와 15년 동안 복원하고, 18·19세기 목가구 2,550점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이다. 한국가구박물관에서 조금 위로 올라가면 우리옛돌박물관까지 둘러볼 수 있다.수연산방은 1900년대 개량한옥으로서 건물 한 채에 사랑채와 안채가 함께 지어져 있다. 오른쪽 누마루가 사랑방 역할을 했다.▲일제강점기 문인들의 사랑방 ‘이태준가옥(수연산방)’우리나라 단편소설의 선구자라 불리는 상허 이태준은 성북동 자택을 ‘수연산방’이라 이름 짓고, 1933년부터 1946년 동안 월북하기 전까지 살았다. 수연산방(서울시 민속자료 제11호)은 ‘여러 사람이 모여 산속의 집에서 책 읽고 공부한다’는 뜻이다. 이름에 걸맞게 당시 수연산방은 문인들의 사랑방이었다. 상허는 김기림, 정지용, 이효석, 박태원, 김유영 등과 구인회를 조직하고 수연산방에서 시와 문학을 논했다. 상허는 ‘달밤’, ‘복덕방’, ‘돌다리’, ‘밤길’, ‘화관’ 등 100여 편에 이르는 작품을 집필했는데, 월북작가의 작품이 해금 된 1988년에 이르러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수연산방은 1998년부터 찻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언뜻 보면 전통한옥 같지만, 사랑채와 안채를 한 건물에 배치한 1900년대 개량한옥이다.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왼쪽에 건넌방, 오른쪽에 안방을 두었다. 건넌방과 튓마루, 안방과 누마루를 다실로 사용한다. 앞뜰 풍경을 액자 속 그림처럼 감상할 수 있어 누마루가 이 찻집의 명당이다. 이 누마루는 작은 규모의 한옥에서 보기 드물게 섬세하고 화려하게 지어졌다. 한옥 찻집은 흔하지만, 수연산방처럼 예스러운 멋을 간직한 곳이 흔치 않다. 수연산방의 여름철 대표 메뉴가 단호박빙수와 오미자차다. 단호박빙수는 단맛으로 포장하지 않고, 재료 본연의 맛을 살려 빙수의 품격을 높였다. 수연산방에서 도보 2분 거리에는 이종석별장(서울민속자료 제10호)이 있다. 조선말 마포에서 새우젓 장사로 부자가 된 이종석이 여름별장으로 지은 한옥으로, 건축 연도는 1900년대로 추정된다. 1985년 덕수교회에서 이곳을 인수해 연수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수연산방 맞은편 50년 전통을 자랑하는 ‘쌍다리돼지불백’식당이 있다. 개업 당시는 테이블 네 개 뿐이였던 기사식당이 지금은 꽤 규모가 커져서 시간이 지나도 푸짐한 한 상으로 사랑받고 있는 맛집이 되었다. 만해 한용운이 말년을 보냈던 심우장의 단출한 모습. 만해는 방에 불을 지피지 않고 냉방에서 생활했다.▲독립운동 역사의 현장 만해 한용운 ‘심우장’만해 한용운 심우장(사적 제550호)은 1933년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이 성북동 골짜기에 지은 집이다. 지금은 골짜기가 아니지만, 여전히 비좁고 가파른 골목을 한참 오른 뒤에야 심우장에 도착한다. 낮은 철 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너른 마당에 북향으로 지은 근대한옥 한 채와 관리소가 보인다. 만해는 조선총독부를 마주 보기 싫어서 남향집을 거부하고, 산비탈 북향 터에 집을 지었다. 심우장은 온돌방, 대청, 부엌으로 구성된 매우 단출한 구조다. 심우장에 남겨진 만해의 친필 원고, 유품, 연구 논문집, 서화, 초상화, 옥중 공판 기록 등을 통해 만해의 독립운동 활동상과 애국지사들과의 교류 현황을 짐작해본다. 만해가 서재로 사용했던 온돌방에는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서예가 오세창이 쓴 ‘심우장(尋牛莊)’ 현판이 걸려 있다. ‘심우(尋牛)’는 깨우침을 찾아 수행하는 과정을 소를 찾는 일에 비유한 불교 설화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29세에 불가에 입문한 만해는 입적할 때까지 독립운동에 온몸을 바쳤다. 1910년 경술국치 때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군 훈련장을 순방하며 독립군을 양성했다. 1919년 3·1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3년 동안 옥살이하기도 했다. 만해는 조선 땅이 감옥인데 방에서 편히 지낼 수 없다며 늘 냉방에서 지냈다고 한다. 그토록 독립을 염원했던 그는 광복을 목전에 두고, 1944년 심우장에서 중풍과 영양실조로 숨졌다. 이후 외동딸인 한영숙씨가 심우장에 살다가 만해사상연구회에 기증했다. 심우장 마당에는 수령 100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되는 소나무와 만해가 심은 향나무, 한영숙씨가 심었다는 잣나무가 산다. 사철 푸른 세 나무가 일제의 끈질긴 협박과 회유에도 변절하지 않았던 만해의 결기를 닮은 듯하다. 소나무와 향나무가 성북구 보호수로 지정됐다.성북동빵공장의 대표 메뉴인 생크림팡도르. 평일 300개, 주말 400개 한정 판매한다.▲세계의 면 요리가 한 자리에 ‘성북동 누들거리’성북동에 면 요리 전문점이 많다. 수십 년 된 칼국수와 잔치국수 식당을 비롯해 메밀국수, 짜장면, 냉면, 쌀국수, 파스타, 우동 전문점 등 약 27개 점이 한성대입구역에서 수연산방에 이르는 길에 늘어서 있다. 5번 출구 나폴레옹제과점 뒤편 주택가 골목 안에 있는 ‘국시집’이 성북동 칼국수의 원조로 알려졌다. 2대째 영업 중이며 김영삼 전 대통령 단골집으로 유명하다. 한우 사태와 양지로 끓인 육수는 맑고 깊은 맛을 낸다. 손으로 반죽한 경상도식 건진국수 면발은 매끄럽게 목을 넘어간다. 6번 출구쪽에는 멸치 국수가 맛있기로 소문난 ‘구포국수’가 있다. 이밖에 ‘성북동칼국수’, ‘손가네곰국수’, ‘하단’, ‘올레국수’, ‘우리밀칼국수’ 등 10여 개 국수집이 누들거리에서 성업 중이다.누들거리에는 소문난 빵집도 많다. 명불허전 ‘나폴레옹과자점’을 필두로 산딸기 프레첼이 유명한 ‘샤뽀블랑’, 천연발효종으로 건강한 빵을 만드는 ‘오보록’, 간식보다 주식으로 먹을 수 있는 식사 빵을 파는 ‘밀곳간’ 등이다. 심우장 위쪽 베이커리 카페 ‘성북동빵공장’은 숲이 보이는 테라스에서 40여 종의 빵과 커피를 즐길 수 있는 성북동 핫플레이스다.
2021.07.09 I 강경록 기자
세종문화회관으로 '예술바캉스' 떠날까
  • 세종문화회관으로 '예술바캉스' 떠날까
  • [이데일리 윤종성 기자] 세종문화회관 세종예술아카데미는 여름을 맞아 세대를 아우르는 다양한 특강 프로그램을 오는 8월 17~ 31일 선보인다. 사진=세종문화회관이번 여름특강에서는 △어린이·청소년 성교육 △4세부터 참가 가능한 놀이형 체험 프로그램 △티(Tea)소믈리에· 미술심화 강좌 등 전 연령층이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마련됐다. 구성애의 푸른아우성 소속 강사들이 오는 8월 17일 남학생, 18일 여학생을 위한 성교육 강의를 진행한다.초등학교 5~6학년 청소년들이 문화예술작품을 올바로 향유하기 위해 성에 대한 건강한 가치관을 세우고, 일생에 한번 뿐인 사춘기를 멋지게 보낼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이다. ‘삼각산시민청과 함께 하는 할머니와 엄마와 책을- 할머니가 들려주는 동화’는 부모가 아이와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삼각산시민청 소속 어르신들이 6~7세 어린이를 대상으로 ‘코뿔소가 다 먹었어’(8월 20일), ‘손가락 아저씨’(8월 27일) 동화를 구연한다. 아이들은 이야기를 들은 후 노래, 그림 등의 독후활동을 가지며 책과 더욱 가까워지는 시간을 갖는다.오는 8월 21일, 28일에 개설된 ‘듣고, 놀고, 배우고’는 유아 발달 과정에 꼭 필요한 동화와 음악을 결합한 예술 체험 프로그램이다. 동화 ‘엄마를 잠깐 잃어버렸어요’에 생생한 연주를 곁들여 아이들의 상상력을 북돋우는 시간이다. 이밖에 이세라 티소믈리에의 ‘나를 위한 시간, TEA TIME’, 국내 1호 전시해설가 김찬용의 ‘아트 네비게이션’ 등 문화예술애호가들의 기호에 맞춘 특강도 준비돼 있다. 여름특강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세종문화회관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2021.07.05 I 윤종성 기자
<21>'최초'란 왕관 씌운 '근대'의 무게
  • [손태호의 그림&스토리]<21>'최초'란 왕관 씌운 '근대'의 무게
  • 고희동이 1915년 그린 ‘부채를 든 자화상’.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가 그린 한국 최초의 서양화란 무거운 타이틀을 가졌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해 여름 작가 자신을 그렸다. 사실적으로 인물을 묘사하면서도 피부색과 옷색을 빛에 따라 다양하게 처리하고, 약간 뭉갠 듯한 붓질로 사물을 그리는 등 인상주의 화풍이 뚜렷하다. 인물의 왼쪽 어깨 부분의 바탕천이 찢어져 훼손된 상태로 발견됐고 1980년과 1991년 두 차례의 복원작업을 거쳤다. 캔버스에 유채, 60.8×45.5㎝,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혹독한 세상살이에 그림이 무슨 대수냐고 했습니다. 쫓기는 일상에 미술이 무슨 소용이냐고 했습니다. 옛 그림이고 한국미술이라면 더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는 일을 돌아보면 말입니다. 치열하지 않은 순간이 어디 있었고, 위태롭지 않은 시대가 어디 있었습니까. 한국미술은 그 척박한 세월을 함께 견뎌온 지혜였고 부단히 곧추세운 용기였습니다. 옛 그림으로 세태를 읽고 나를 세우는 법을 일러주는 손태호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조선부터 근현대까지 시공을 넘나들며, 시대와 호흡한 삶, 역사와 소통한 현장에서 풀어낼 ‘한국미술로 엿보는 세상이야기’ ‘한국미술로 비추는 사람이야기’입니다. 때론 따뜻한 위로로 때론 따가운 죽비로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손태호 미술평론가] 한국에서 근대는 언제부터일까. 근대의 출발 기준을 두고는 최초 개항을 시작한 ‘강화도조약’(1876)부터 ‘갑신정변’(1884), ‘갑오경장’(1894)까지 여러 견해가 있지만 대체로 19세기 후반이라는 데 큰 이견은 없을 것입니다. 새로운 서양문화의 유입은 미술에도 큰 영향을 미쳐 근대미술이 태동했고 이때는 한국 화가들에게 혼란과 도전이 복잡하게 얽힌 대전환의 시기였습니다. 특히 서양화가가 등장하고 서양화에 영향을 받은 일본 화가들이 대거 조선에서 활동하면서 서양화에 대한 관심 또한 크게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당시 한국에서는 서양화를 배울 만한 곳도, 가르칠 선생도 부족했습니다. 결국 서양화를 배우려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춘곡 고희동(1886∼1965)이 그들 중 가장 먼저였습니다. 바로 ‘일본 유학파 출신 한국 제1호 서양화가’입니다. 그는 많은 서양화를 그렸지만 여러 이유로 현재 단 3점만 남아있는데, 공교롭게도 3점 모두 자화상입니다. 그중 ‘부채를 든 자화상’(1915)은 고희동의 모습을 가장 진솔하게 보여주는 작품이자 한국화가가 그린 최초의 서양화란 타이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시적삼을 풀어헤치고 한쪽 다리를 세운 채 앉아있는 인물은 고희동 자신입니다. 가슴을 다 드러내고 오른손으로 부채를 부치며 더위를 식히는 모습입니다. 망중한을 즐기는 편안한 모습이지만 얼굴의 수염이 다소 근엄해 보이게 합니다. 표정은 살짝 경직돼 있습니다. 오른쪽 이마와 광대뼈에 유달리 강한 빛이 비치고 그 세기에 따라 얼굴·가슴의 음영 부분에는 엷은 푸른빛, 적삼 안쪽에는 보랏빛이 감돕니다. 뒤쪽 오른편에는 서양화 액자가 걸렸고 왼편에는 서양식 장정을 한 고급 책들이 놓여, 고희동의 신분과 최초의 서양화가로서의 자부심이 읽힙니다. 장서 위에 올린 사인(‘1915, Ko, Hei Tong’)은 고희동이 도쿄미술학교(도쿄예술대학 전신)를 졸업한 1915년에 제작한 그림임을 알려줍니다. ◇일본 유학 중 인상파 영향 받은 고희동전반적으로 색은 순도를 높이기 위해 밝은 원색을 사용했고 분할적 터치를 했습니다. 이런 기법으로 비춰볼 때 당시 서구 인상파의 영향을 짐작해볼 수 있는데, 이는 고희동의 도쿄미술학교 지도교수였던 구로다 세이키(1866∼1924), 오카다 사부로스케(1869∼1939), 후지시마 다케지(1867∼1943) 등이 인상파 기법을 추종했던 화가들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파격적인 자세, 반투명한 모시 질감 등 퍽 인상적인 작품인 반면 다소 어색한 가슴 처리 등이 아쉬운 점으로 꼽힙니다. 고희동은 귀국 후에 서양유화를 가르치는 최초의 미술선생으로 활동했지만 나중에 서양화를 포기하고 동양화로 전향합니다. 이런 변화에는 고희동이 유학을 가기 전 당시 전통회화의 계승자인 안중식(1861∼1919)·조석진(1853∼1920) 등에게서 그림을 배운 영향이 컸을 것입니다. 생전에 고희동은 “나의 유화는 단 한 점도 남아 있지 않다”고 했지만 사후 유품을 정리하던 중 이 작품을 포함해 유화로 그린 자화상 두 점이 발견됐고 전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구입했습니다. 특히 이 자화상은 한국 제1호 서양화가의 최초 유화작품으로 미술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등록문화재 제487호로 지정되기도 했습니다. 고희동은 작품 활동뿐 아니라 서화협회를 이끌며 우리 전통화단을 계승·발전시킨 공로가 있습니다. 보성고 교사 시절에는 제자 간송 전형필(1906∼1962)에게 영향을 끼쳐 그를 문화재수집가의 길로 이끌었고, 간송컬렉션을 갖추는 데 큰 역할을 한 위창 오세창(1864∼1953)을 연결해준 것도 고희동이었습니다. 한국 제1호 남성 서양화가가 고희동이라면 여성화가로는 나혜석(1896∼1949)이 있습니다. 나혜석은 진명여고를 졸업하고 1913년 일본 유학을 떠나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서양화를 배웠습니다. 귀국한 뒤에는 정신여학교 교사로 있던 중에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는데 이때 변호를 맡았던 김우영(1886∼1958)의 적극적인 구애로 그와 결혼을 합니다.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고희동·김관호(1880∼1959) 등과 함께 활동했고, 국내 최초의 페미니즘 소설 ‘경희’를 비롯해서 시·소설·에세이 등 많은 글을 발표한 문인이기도 했습니다. 전쟁통에 대부분 유실돼 나혜석의 유화작품도 얼마 남아있지 않습니다만, 고희동의 자화상만큼이나 역사적·미술사적 의미가 큰 ‘자화상’(1928)이 다행히 한 점 들어있습니다. 나혜석이 1928년 그린 ‘자화상’. 1920년대 세계일주를 떠난 1년 8개월여 중 프랑스 파리에 체류할 당시 영향을 받은 야수파 풍으로 그려졌다. 단순한 재현을 넘어선 강렬한 붓놀림과 자유로운 색채구사가 특징. 굵고 과장된 윤곽선으로 묘사한 인물이 이목구비가 뚜렷한 서구적 외모를 가져 나혜석의 ‘자화상’인지를 두고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럼에도 체념한 듯한 표정, 굳은 시선 등 작가의 심리와 정서를 잘 표현한 수작으로 손꼽힌다. 캔버스 유채, 63.5×50㎝, 수원시립미술관 소장.짙고 큰 눈, 유난히 긴 코, 주황색 음영이 드리워 도드라진 뺨 등 서구적 미인형의 얼굴이 보입니다. 파마를 한 듯 구불거리는 머릿결이 당시 신여성의 상징을 보여줍니다. 진주단추가 박힌 갈색 의상 등도 세련된 맵시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입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갈수록 배경이 짙어져 마치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꾹 다문 입과 긴장한 듯한 얼굴, 축 처진 어깨 등이 단순한 슬픔과는 결이 다른 우울함을 전합니다. 한국 최초의 서양여성화가, 신여성으로서의 자부심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전통적 한국여성의 굴레 벗어나려 한 나혜석나혜석은 1927년 여름 이후 남편과 함께 파리에 머물렀는데, 남편이 법률공부를 위해 독일 베를린으로 잠시 떠났을 때 3·1독립선언서 작성을 주도한 최린(1878∼1958)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이들의 연애는 파리에 소문이 자자했고 결국 남편도 알게 됐지만 나혜석은 남편이 아닌 사랑을 선택했고 귀국 후 이혼을 합니다. 이 연애사건은 당시 근대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스캔들로, 나혜석은 쏟아지는 비난을 홀로 감당해야 했습니다. 가족·친지에게 외면당하고 ‘나쁜 어미’란 손가락질에 나혜석은 아이들도 만나지 못하는 등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상처를 예술과 문학으로 승화시키던 중 사랑했던 최린이 변절해 총독부의 고위직에 오르자 절망합니다. 그 유명한 ‘이혼고백장’을 언론에 발표한 것도 그즈음입니다. 여성에게만 강요하는 정조관념을 비판하고 남녀의 평등한 사랑을 주장하며 최린에게 ‘정조유린 위자료 청구소송’을 제기해 또 한 번 한국사회를 들썩이게 합니다. 나혜석은 소송에선 이겼으나 사회의 따가운 시선에 옥죄였습니다. 미술학원을 차렸지만 불륜과 이혼으로 세상을 시끄럽게 한 여자가 운영하는 학원에 아이들을 보낼 부모는 없었습니다. 괴로운 속세를 떠나 중이 되고자 수덕사를 찾았으나 만공선사는 “넌 중이 될 여자가 못된다”면서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수덕여관에 여장을 풀고 약 3년간 1인시위를 했을 만큼 간절했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입니다. 이후 파리로 돌아가려던 계획도 물거품이 되면서 점차 나혜석은 시들어 갔고 수전증으로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도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행방불명이 됐습니다. 나혜석의 죽음이 알려진 것은 1949년 3월. 서울 원효로 시립자제원에서 ‘무연고자’로 숨을 거둔 지 4개월 뒤였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여성화가이자 뛰어난 문인의 죽음치고는 너무나 허무하고 처량했습니다. 이런 비극적 종말을 잉태한 파리시절의 ‘자화상’은 이를 암시하는 듯한 깊은 우울함이 진하게 배여 더욱 안타까운 작품입니다. 어쩌면 전통적 한국여성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결심했을 때부터 이런 결말을 예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시적삼에 삼베바지 등 한국적 옷차림이지만 양장한 책과 서양화 액자를 동시에 들여 문화적 격변에 따른 혼란스러운 자신을 표현한 고희동. 식민지 억압과의 투쟁에 더해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멸시와도 싸워야 했던 선각자 나혜석. 두 점의 자화상은 ‘최초’라는 이름의 왕관을 씌운 ‘근대’라는 무게가 결코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걷는다는 것은 두려움과 편견에 맞서는 일입니다. 시대를 개척하고 세상에 도전했던 그들의 고뇌를 동력으로 우리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근대로 달려나간 것입니다. ※ 도쿄미술학교와 근대 한국작가 1885년 설립한 도쿄미술학교는 오랫동안 일본 미술계를 대표해온 명문학교다. 1949년 도쿄음악학교(1887년 설립)와 합병해 도쿄예술대학으로 덩치를 키운 뒤론 예술계의 대명사가 됐다. 한국에 알려진 건 근대기에 서양화를 공부하려는 학생이 하나둘씩 건너가면서다. 1909년 입학한 고희동이 한국 ‘제1호 학생’으로, 1910년 입학한 김관호가 ‘제2호 학생’으로, 이후 김찬영(1899∼1960) 등이 차례로 이 학교에서 공부했다. 특히 김관호는 고희동을 뛰어넘는 활약을 펼쳤는데, 서양화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동시에 졸업작품으로 그린 ‘해질녘’(1916)이 도쿄 우에노미술관에서 열린 ‘일본문부성미술전람회’에서 한국인 최초로 ‘특선’을 수상했던 거다. 여인 둘이 해지는 물가에서 목욕하는 뒷모습을 그린 ‘해질녘’(도쿄예술대학 소장)은 ‘한국 최초의 누드화’란 기록도 가지고 있다. 이들의 뒤를 이어서도 도쿄미술학교에서 수학한 이후 한국미술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작가들이 적잖았다. 근대기 대표작가로는 김복진(1901∼1940), 도상봉(1902∼1977), 김용준(1904∼1967), 오지호(1905∼1982), 김인승(1910∼2001) 등이 있다.
2021.07.02 I 오현주 기자
신세계百 속 미술품, 모바일에서도 만난다
  • 신세계百 속 미술품, 모바일에서도 만난다
  • [이데일리 함지현 기자]신세계백화점은 애플리케이션에 ‘신세계 아트 스페이스’라는 공간을 새롭게 마련, 오프라인 백화점에서 전시하는 다양한 작품들을 모바일에서도 만날 수 있다고 30일 밝혔다.(사진=신세계백화점)신세계백화점에 따르면 온라인으로 준비한 신세계 아트 스페이스에서는 작품 감상은 물론, 작가에 대한 기초 지식과 함께 소개 영상도 볼 수 있다. 기존 오프라인 공간에서 부족했던 정보를 더 제공하는 것은 물론, 접근성도 높인 것이다.우선 오는 9월 25일까지 본점 본관에서 선보이는 팝 아트 전시를 모바일에서도 만날 수 있다. ‘해피 팝(HAPPY POP)’이라는 이름으로 기획한 이 전시는 해외 유명 팝 아티스트의 작품들을 한 자리에서 만나는 특별한 그룹전이다. 현재 본점 본관 아트월 갤러리 지하 1층에서 5층까지 진행 중이다.‘신세계 아트 스페이스’에서는 이번 전시 참여 작가 중 알렉스 카츠, 줄리안 오피, 존 버거맨, 데이비드 슈리글리. 무라카미 다카시의 작품을 집중 소개한다.알렉스 카츠는 대표적인 현대 미술 작가이자 가장 미국적인 화가로 손꼽힌다. 1950년부터 아흔이 넘은 지금까지도 회화와 드로잉 등을 통해 단순하고 대담한 화면 구성과 세련된 감성을 보여준다.영국 최고의 팝 아티스트인 줄리안 오피는 진한 윤곽선 라인과 콜라주 그림이 특징이다. 주위 사람들을 면밀히 관찰해, ‘내 방에 걸고 싶은 그림’을 그린다는 대중적인 감각의 작가다.존 버거맨은 영국에서 태어난 후 미국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 중이다. ‘Doodle(두들)’이라는 낙서 기법 회화로 유명하며 일상의 다양한 사물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다.영국 작가 데이비드 슈리글리는 간결한 문구에 동물, 사람, 외계인 등 일상적인 소재를 묘사한 낙서 같은 이미지를 결합해 유머를 자아낸다. 유쾌하면서도 예리한 통찰력을 보여주며 회화뿐 아니라 조각, 책, 비디오, 사진, 대형 설치 작업까지 영역을 넘나들고 있다.‘일본의 앤디워홀’로 불리는 무라카미 다카시는 만화, 애니메이션 같은 대중문화 이미지를 차용해 작품을 창조한다. 판타지적 캐릭터와 일본 문화를 이용해 대중적 상상력을 극대화한다.그 동안 신세계백화점 앱은 단순히 쇼핑 정보만 제공하는 것을 넘어 다양한 문화 예술 플랫폼으로 업그레이드 되고 있다.브랜드 할인 정보를 넘어 요즘 최신 트렌드와 인문학적 지식까지 담아 신세계만의 차별화 마케팅에적극 나선 것이다. 마치 한 권의 잡지를 보듯이 즐길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최근에는 지니뮤직과상호 협력을 위한 업무협약(MOU)를 체결해 7월 말 백화점 앱에 지니뮤직 전용관을 선보일 예정이다. 월별 뮤직 테마를 선정하여 플레이리스트, 매거진, 영상 등을 제공한다는 것이다.이성환 신세계백화점 영업전략담당 상무는 “다양한 문화 예술 콘텐츠를 보여줬던 신세계백화점이 이번에는 모바일을 통해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며 “유통을 뛰어넘어 고객 라이프스타일을 선도하는 차별화 마케팅을 선보이겠다”고 말했다.
2021.06.30 I 함지현 기자
"단순한 수선 아닌 책에 담긴 시간과 의미를 수집하죠"
  • "단순한 수선 아닌 책에 담긴 시간과 의미를 수집하죠"
  • 낡아서 소매 끝이 헤져도 버리지 않는 옷이 있는 것처럼, 종이가 다 떨어지고 부서져도 간직하고 싶은 책이 있다. 그럴 때 책을 고쳐주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트위터에서 팔로어가 20만명이 넘는 ‘재영책수선’이 바로 그런 곳이다.쓰고 버리는 게 더 익숙한 현대 사회. 수선으로 추억까지 되살리는 책 수선가 '재영'씨를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그의 작업실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진=이수빈 기자)우연히 시작한 책 수선..."다양한 분야 접해본 게 지금의 자산"‘책 수선’이라는 분야는 생소하다. 종이로 만들어진 점을 감안하면 책 커버나 페이지가 훼손되면 버리거나 종이류 재활용품으로 분리수거를 한다는 생각이 쉬워서다.영화 '광식이 동생 광태'에서 배우 김아중이 옛날 책을 수선하고 새롭게 제본하는 모습을 그려보면 '아~'하고 느낄 수 있다. 영화 속 김아중의 직업은 '를리외르', 우리말로 하면 '예술 제본가'다.재영씨는 "제가 하는 일은 책 수선과 보존에 방점이 찍혀 영화 속 김아중 씨의 일과는 조금 다르다"고 전했다.그는 "미국에서 북아트와 페이퍼메이킹(Paper Making, 종이를 재료로 하여 작품을 만드는 일)을 공부하다가 책의 구조를 공부할 필요를 느꼈다"며 "그러면서 책 수선의 세계에 우연히 발을 들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당시 지도교수가 책 제작에 필요한 기술을 배우려면 책 수선 일을 추천했다"며 "학교 도서관에서 책 수선일을 시작하면서 그 매력에 빠지게 됐다"고 덧붙였다.특히 시간의 흐름이 주는 자연스러운 변형이 재영씨에게는 매력으로 다가왔다.재영씨는 "책이 망가지려면 물리적인 힘이 작용했거나 시간이 축적이 돼서 자연적으로 서서히 망가지거든요. 그런데 저는 시간이 축적돼서 형태가 바뀌는 것들에 관심이 많아요”라고 했다.심지어 그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책의 기억을 관찰하고 파손된 책의 형태와 의미를 수집합니다'라고 적었다. 단순히 책을 수선하는 기능보다는 파손된 책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그의 의지가 반영된 것.책 수선 전에 재영 수선가가 공부했던 건 순수미술이다. “순수미술을 공부하며 재료도 여러가지를 써보고 그러다 보니 새로운 분야를 한다는 거에 거부감이 적어서 (책 수선에도) 시작했던 것 같아요”대학 졸업 후 디자인스쿨에서 디자인을 배워 그래픽 디자이너로 잠시 일을 했다. 이후 북아트를 전공하러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책 수선가로 일을 시작한 재영 수선가는 “처음엔 불안했다”고 말했다.“전공을 이렇게 바꿔도 되나, 그런 조바심이 들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했던 공부들이) 다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수선'이라는 기술에 감성을 더해재영씨에게 맡기는 책은 찢어진 종이를 붙이거나 오염을 지우는 데 그치지 않는다. 어떨 땐 아예 새로운 표지를 만들고 책장을 제작하기도 한다. 오래된 만화책들을 수선하고 그에 맞는 책꽂이까지 제작했다. (사진=재영책수선)박물관에서 고문서를 다루는 전문가가 책 수선을 하는 것은 익숙하지만 재영 씨는 민간에서 책 수선을 한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할머니의 일기장, 어머니의 그림집, 온 가족이 함께 쓴 옥편 등이 재영씨의 손을 거쳤다.전문 기관에 소속되지 않고 개인 공방을 연 계기에 대해 “책 수선 일을 하면서 개인적인 작업도 병행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책 하나하나마다 담긴 사연이 있기 때문에 도서관에서 일할 때와는 또 다른 재미가 있다"고 덧붙였다.재영씨는 “책 수선을 하는 게 사실 흔한 일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책이 수선됐을 때 의뢰자분들이 자신에게 의미있는 책을 돌아왔다고 반기는 것을 보면 망가진 걸 고치는 기쁨이 있어요"라고 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책이 '희귀서적'..."부담이 될 때도 있지만 보람차"그는 트위터에 책 수선 과정을 꾸준히 올린다. 수선 전후 사진을 보고 사람들이 놀라고 좋아하지만 사진으론 미처 담지 못하는 어려움도 있다.수선해서 간직하고 싶을 만큼 소중한 책, 하나 밖에 없는 책이니 모두가 희귀서적인 셈이라며 수선할 때마다 늘 긴장된다고 말했다.“제가 그걸 망치면 어디서 그걸 다시 구할 수 있겠어요.” 지금껏 망친 적, 의뢰자가 실망한 적은 없지만그래도 긴장되는 건 마찬가지다.이렇듯 모든 책이 각자의 사연을 갖고 있어 기억이 나지만 재영 수선가는 특히 기억남는 책으로 신지식 선생의 '빨간머리 앤' 초판 번역본을 꼽았다. 신지식 선생은 국내에 '빨간머리 앤'을 처음으로 소개했다. 재영 수선가는 "어릴 때 만화 '빨간머리 앤'을 좋아했거든요. 지금은 그 초판 번역본을 구하기 굉장히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수선가니까 만날 수 있었지요."라고 말했다.최근 다룬 책 중에서 기억에 남는 책으로는 결혼앨범을 들었다.1988년에 결혼한 남편이 곰팡이까지 낀 결혼앨범을 들고 찾아온 것. 재영씨는 "남편 분이 결혼앨범을 수선해서 아내에게 다시 선물하고 싶다고 가져왔다"며 "이런 선물을 만드는 데 일조할 수 있다는 게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고 전했다.그는 "수선 가격이 싸지도 않고 기간도 한 달이나 걸렸지만 남편 분이 수선본을 수령한 후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다'고 기뻐하는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사진=재영책수선) "수선 과정까지 공유하고 싶어"...유튜브·출간 등 활동 다양실물인 책을 직접 만지다보니 아날로그의 느낌이 강하지만 정작 재영씨는 "디지털을 좋아해요"라고 했다.필요할 때에는 컴퓨터 그래픽을 활용해 수선해야 할 작품을 테스트하기도 한다. 그는 "모든 걸 수작업으로 하다고 해서 가치가 높아지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사진=재영책수선)그는 지금도 꾸준히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다.재영씨는 "배운 기술들은 말 그대로 수선의 기본에 불과하다"며 "작업을 할 때에는 기본 기술을 얼마나 변칙적으로 활용하는가가 중요해요. 그런 건 오롯이 경험이 쌓여야 하는 일이거든요”라고 했다. 지금도 재영씨는 수선방법을 모를 때에는 사수에게 끊임없이 물어본다.재영씨는 책 수선이라는 분야를 널리 알리기 위한 노력도 병행하고 있다.책 수선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원데이 클래스를 열어달라거나, 책을 내달라는 요청이 꾸준히 온다.재영씨는 앞으로 책을 낼 계획도 갖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지난해 9월부터 올해 5월까지 '리디셀렉트'에서 18편의 글을 연재했다. 유튜브 채널 '재영책수선'에는 책 수선 과정의 '소리'만 담긴 영상을 업로드했다.재영씨는 "단순히 수선 전후를 비교해 (책 수선이) '신기하다'는 것 뿐만 아니라 책 수선가라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소개하고 싶다"며 결과물뿐만 아니라 과정도 사람들이 보고 듣고 즐길 수 있도록 만들고 싶다고 강조했다. /스냅타임 이수빈 기자
2021.06.26 I 이수빈 기자
<20>붓은 총보다 강하다
  • [손태호의 그림&스토리]<20>붓은 총보다 강하다
  • 파블로 피카소가 1951년에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 피카소의 대표적 반전 회화다. 하지만 여인과 아이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병사가 누구인지 명확치 않아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한국에서의 학살’이란 제목뿐 한국인은커녕 동양인도, 또 철갑 투구로 무장한 이들의 신분을 알아챌 단서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덕분에 “피카소가 표현하려 한 것은 특정 전쟁이 아니라 전쟁 그 자체”라는 해석이 오히려 설득력을 얻는다. 나무판에 유채, 209×109㎝, 프랑스 파리 피카소미술관 소장.혹독한 세상살이에 그림이 무슨 대수냐고 했습니다. 쫓기는 일상에 미술이 무슨 소용이냐고 했습니다. 옛 그림이고 한국미술이라면 더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는 일을 돌아보면 말입니다. 치열하지 않은 순간이 어디 있었고, 위태롭지 않은 시대가 어디 있었습니까. 한국미술은 그 척박한 세월을 함께 견뎌온 지혜였고 부단히 곧추세운 용기였습니다. 옛 그림으로 세태를 읽고 나를 세우는 법을 일러주는 손태호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조선부터 근현대까지 시공을 넘나들며, 시대와 호흡한 삶, 역사와 소통한 현장에서 풀어낼 ‘한국미술로 엿보는 세상이야기’ ‘한국미술로 비추는 사람이야기’입니다. 때론 따뜻한 위로로 때론 따가운 죽비로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손태호 미술평론가] 올해는 파블로 피카소(1881∼1973)가 태어난 지 14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아무리 미술과 그림에 관심이 없다고 하더라도 피카소를 모른다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피카소는 스페인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활동한 유명한 화가입니다. 한국그림과 한국미술을 소개하는 연재에서 난데없는 ‘피카소’가 뜬금없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굳이 피카소여야 하는 데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림 한 점 때문입니다. 바로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en Coree·1951)입니다. 피카소는 이 작품을 ‘전쟁에 반대하기 위한 전쟁그림’으로 그렸습니다. 한국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인 ‘한국전쟁’이 일어난 6월 25일, ‘한국에서의 학살’을 한 번 살펴볼까 합니다. 그림은 화면 중앙을 중심으로 좌우가 대비되는 구도임을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갑옷을 입고 총칼을 겨눈 병사들이 모여 있는데 표정을 읽을 수 없게 투구를 쓰고 있습니다. 커다란 발로 푸른 잔디를 짓밟은 이들이 겨누고 있는 총은 총구가 3개씩이나 달린 것입니다. 왼쪽에는 벌거벗은 여인과 아이들이 겁에 질린 채 한데 모여 있습니다. 무방비 상태로 아무런 저항의 무기도 갖지 못한 여인들의 얼굴은 공포로 일그러지거나 체념한 듯 무표정합니다. 그 와중에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어린아이는 흙장난에 열중하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합니다. 여인과 아이들이 서 있는 붉은 땅은 병사들이 선 푸른 잔디와 대조적으로, 다가올 비극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게르니카’ 함께 대표적 반전그림…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그림의 주제는 너무나 명확합니다. 전쟁의 희생자인 민간인과 학살자인 군인을 극적으로 대비해 전쟁의 폭력과 야만성을 적나라하게 고발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발표 직후 유럽이나 미국에서 큰 비난을 받았고 우리나라에서는 오랫동안 언급조차 되지 못했습니다. 1930년 중반 피카소는 초현실주의자 예술가들, 특히 화가이자 사진작가인 도라 마르를 만나면서 예술적 열정을 높여가던 중 1936년 모국인 스페인에서 내전이 발발합니다. 피카소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던 스페인은 1936년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장으로 그를 임명하면서 1937년 5월 파리국제박람회에 스페인을 대표한 작품 제출을 요청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그 유명한 ‘게르니카’(Guernica)입니다. 피카소 반전그림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지요. ‘게르니카’는 스페인내전 중 군인이 민간인을 학살한 사실을 고발하는 묘사로 당시 박람회를 찾은 많은 이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그림에 관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2차대전 중 피카소가 활동하던 파리가 나치에 점령을 당했을 때 일입니다. 나치가 피카소의 집에 쳐들어와 ‘게르니카’를 가리키며 “당신이 그렸소?”라고 물었다는 겁니다. 그러자 피카소가 이렇게 대답을 했다지요. “당신들이 그렸소!” 이즈음 피카소는 잔혹한 나치에 저항하기 위해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합니다. 2차대전이 끝난 뒤 피카소는 전쟁의 상흔을 씻으며 지중해변에서 목가적이고 평화적인 작품에 몰두합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1950년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프랑스 공산당을 통해 듣게 됩니다. 미국이 북한을 침공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이 희생당했다는 왜곡된 정보였습니다. 이어 공산당으로부터 미국의 이 같은 만행을 고발하는 작품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바로 ‘한국에서의 학살’인 것입니다. 어떤 이는 작품이 1950년 10∼12월 황해도 신천군 일대에서 벌어진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배경으로 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천군 사건 정황이 프랑스에 제대로 알려진 것은 1952년이라 이 주장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이념논쟁 속 한국 등서 오랜 세월 외면 받아와 그런데 정작 피카소는 이 작품 때문에 프랑스 공산당과 불화가 생깁니다. 누가 봐도 학살자가 미군임을 알 수 있도록 해달라는 공산당의 요청을 듣지 않았던 건데요. 피카소는 “미군이나 어떤 다른 나라 군대의 헬멧이나 유니폼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며 “나는 모든 인류의 편에 서 있다”고 했습니다. 우익은 우익대로 이 작품이 한국전쟁을 왜곡하는 공산당의 선전물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쏟아냈습니다. 미국은 피카소의 입국을 금지했고 전시를 막았으며 피카소 그림을 소장한 인사들은 조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작품은 어떤 도록이나 책에 수록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피카소를 칭찬하거나 언급하면 반공법으로 처벌을 받았습니다. 오죽하면 ‘피카소 크레파스’를 제작한 문구사는 제품명을 바꿀 것을 요구받았겠습니까. 1980년대가 돼서야 미국에서 피카소에 대한 금기가 해제되고 ‘한국에서의 학살’ 전시도 허락됩니다. 한국에서도 그제야 피카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개선하고 지금은 20세기를 대표하는 대화가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평화주의자 피카소 입장에서는 참 억울한 시절이자 작품인 셈입니다. 이수억이 1954년에 그린 ‘6·25동란’. 선명한 원색으로 화면을 구성하고 인물은 윤곽선 위주로 대담하게 표현했다. 형체는 분명하나 눈·코·입과 표정을 굳이 그리지 않은 건 한국전쟁이 피란길에 오른 이들 가족만의 비극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1987년에 작가가 개작한, 원작의 비극적 정서를 다소 덜어낸 ‘6·25동란’이 한 점 더 있다. 캔버스에 유채, 123×189.5㎝, 가나아트센터 소장.‘한국에서의 학살’이 한국전쟁의 폭력성을 고발한 작품이라 할지라도 피카소는 역시 당사자가 아닌 관찰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로서는 이 작품에서 조부모나 부모가 겪은 뼈아픈 고통을 느끼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우리나라의 많은 화가들은 종군화가로 참전하거나 피란생활 중 전쟁 관련 작품을 통해 상처 입은 국민의 마음을 다독였습니다. 피카소와는 달리 우리나라 화가들은 전쟁의 참상과 고통의 당사자이자 피해자이며 기록자였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수많은 한국전쟁 미술작품 중 한국인의 고통을 정말 잘 표현한 작품이 있습니다. 종군화가 이수억(1918∼1990)의 ‘6·25동란’(1954)입니다. ◇단순화해 극대화한 전쟁 참상…이수억 ‘6·25동란’ 작품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남쪽으로 향하는 피란행렬을 단순화하고 있지만 그 울림이 대단히 큽니다. 형제로 보이는 사내 둘이 가재도구를 잔뜩 실은 수레를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있습니다. 수레 위에는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여인이 앉아 있어 전쟁 중에도 생명은 이어진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수레 옆에는 흰옷을 입은 아낙이 큰 이불보따리를 머리에 얹고 짐까지 든 채 힘겹게 걷고 있습니다. 그 옆으론 검정 치마를 입은 누나가 동생을 업고 갑니다. 뒤로 가방을 메고 손에 보따리를 든 아이의 구부정한 허리가 보입니다. 어느 가족의 고단한 피란행렬을 그린 작품에선 주변에 지게를 진 인물도 있고 앞뒤에 반쯤만 보이는 인물도 있어 긴 행렬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수레를 끄는 인물의 고개는 수평이고 몸은 사선이라 유독 힘겨워 보이지만 사실 그림 전체는 의도적으로 수평과 수직, 사선으로 분할돼 있습니다. 이는 당시 한국화단에서 유행했던 입체주의 영향이지만 피카소의 기하학적 형태와는 다른 한국적 입체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분할 덕에 얼굴이 없고 피부는 검게 그을렸으며 땅만 바라보고 있는 피란길의 힘겨움과 고달픔이 더욱 실감납니다. 최근 어느 유력 신문에서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이 공산주의자의 전쟁선전물이란 기사가 나왔습니다. 시대에 뒤처진 이념 논쟁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듯해 씁쓸했지만 무엇보다도 자의적인 작품 해석이 참 안타까웠습니다. 물론 피카소는 순수예술지상주의자는 아닙니다. 그는 “그림이란 집안을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라며 예술작품이 단순히 감상의 도구나 장식품이 아닌 동시대의 부조리와 약자의 아픔을 대변하는 소통의 수단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행동한 화가입니다. 그러면서도 평화를 사랑한 나머지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를 많이 그렸고, 딸의 이름도 스페인어로 비둘기란 뜻의 ‘팔로마’(Paloma)라 짓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했던 것도 나치에 대한 항거이지 이념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그려진 지 70년이 지나서야, 최근 국내 한 전시를 통해 한국 땅을 처음 밟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한국전쟁의 고통과 상처를 어루만졌던 많은 작가와 작품들에 대한 관심도 이어지길 기대해봅니다. ※ 화가 이수억과 한국전쟁 한국전쟁을 겪고 기억하는 화가들이 모두 전쟁의 참상을 화폭에 옮긴 건 아니다. 오히려 그 수가 귀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이수억은 특별하다. 피란·폐허·상흔 등 전쟁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작품을 여럿 남겼다. 그 작업은 군인과 젊은 여성을 통해 전선과 후방의 삶을 가름한 ‘전선야곡’(1952), 전쟁의 상처를 도심의 무너진 빌딩 잔해로 대신 그려낸 ‘폐허의 서울’(1952), 무너진 도시에서 오직 살기 위한 소년의 사투를 암시한 ‘구두닦이 소년’(1953)을 거쳐 피란짐을 싣고 길 떠나는 가족을 재구성한 ‘6·25동란’(1954)으로 이어졌다. 1950년 전쟁과 함께 군속에 입대한 이수억은 1951년 1·4후퇴 당시 포항을 거쳐 대구에서 피란생활을 했다. 미군 헌병사령부에서 일했고, 국방부 종군화가단원으로도 활약했다. 1952년에는, 박수근이 그랬던 것처럼, 서울의 미군 PX(신세계백화점 자리)에서 초상화를 그려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종군화가단 전시에 ‘야전도’를 출품해 참모총장상을 수상했고, 대한민국미술대전에 ‘6·25피난도’ 등을 출품하는 등 이수억에게 한국전쟁은 치열한 현실인식과 진정한 작가의식의 다른 말이었다.
2021.06.25 I 오현주 기자
DNA 쏟아내는 7m 디지털폭포 아래서…"나 진짜 이이남인가"
  • DNA 쏟아내는 7m 디지털폭포 아래서…"나 진짜 이이남인가"
  • 이이남의 ‘시가 된 풍경’(2021). 높이 680㎝, 폭 200㎝의 대형폭포를 형상화해 12분 24초짜리 싱글채널비디오로 제작했다. 작품에서 수직하강 중인 것은 물이 아닌 문자다. “고대 갑골문부터 추사의 세한도까지 5300여권에서 받은 문자데이터로 제작했다”고 했다. 그 틈새 DNA 염기서열인 A·G·C·T까지 엉키고 뭉쳐 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작가 이이남(52)이 변했다. 아니 진화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거다. ‘사각프레임 속 파격’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게 됐으니 말이다. 동서양 명화에 LED를 들여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고전을 재창조하던 일도 시들해졌으니 말이다. 다 빈치의 ‘모나리자’, 클림트의 ‘키스’를 외워대며 멀리 갈 것도 없다. 그이의 진가가 발휘된 진짜배기는 고즈넉한 국내 산수화에 있었으니. ‘신-인왕제색도’나 ‘신-금강전도’, ‘신-세한도’나 ‘신-몽유도원도’ 등을 한 번이라도 봤다면, 그이의 변화 소식이 섭섭할지도 모르겠다. 맞다. 이이남의 ‘신’(新)은 단순한 새로움이 아니라 혁명에 가까웠다. 이건희컬렉션 덕에 270년 만에 강력한 유명세를 치른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1751·국보 제216호)를 비롯해 역시 겸재의 ‘금강전도’(1734·국보 제217호),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1844·국보 제180호), 안견의 ‘몽유도원도’(1447)를 뒤집어놨던 ‘사건’이 10여년간 따라다녔으니까. 감히 겸재·추사 등의 ‘국보 걸작’을 덧칠도 부족해 4∼8분여간 맹렬히 움직이는 그림으로 바꿔버렸던 거다. 담백했던 수묵화에 꽃 피고 바람 불고 비 내리고 눈 쌓이는 사계절의 변화를 컬러풀하게 심어내고 한구석의 고요한 초가에 불까지 켰다 껐다 했더랬다. ‘신-인왕제색도’에선 인왕산 위로 여객비행기 한 대 유람시키더니, ‘신-금강전도’에선 1만 2000봉마다 크레인·송신탑을 세우고 영화 ‘플래툰’에서나 봤던 군용헬기를 무차별 출격시키기도 했다. 흡사 전시상황이었다. 작가 이이남이 서울 은평구 사비나미술관서 연 개인전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다’에 내놓은 자신의 설치작품 ‘형상을 벗어나 존재의 중심에 서다’(2021) 옆에 섰다. 오른쪽 뒤로 높이 680㎝의 ‘시가 된 폭포’(2021) 윗부분이 보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이이남의 설치작품 ‘형상을 벗어나 존재의 중심에 서다’(2021) 중 바닥에서 올려다본 안쪽 전경. 작품은 고서를 매단 원이 쉴 새 없이 오르락내리락하며 바닥의 물웅덩이에 책 속 문자들을 비추게 제작됐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그런데 수묵화에 전쟁통을 끌어들인 이후의 시간이 그이에겐 ‘전쟁 같은 평화’였나 보다. 뒤늦은 성장통 탓이다. 이런 독백이 절로 나왔다고 하니 말이다. “사람은 사라져가는 시간 속에 살고 있다. 과연 없어지지 않을 게 무엇인가. 난 이제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 그래서 찾아다녔단다. “내가 사라져도 남아 있을 것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산 삶이 꺼진 이후에도 켜져 있을 어떤 것을.” ◇A·G·C·T 염기서열로 그린 DNA 산수처음부터 ‘세다’. 깊은 산중 거세게 바위를 때리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발을 떼야 하니까. 하지만 이 청각적 자극은 이후 시각적 충격에 비하면 소소하다. 680㎝ 폭포에서 허연 거품들이 수직하강 중인 장면을 코앞에서 목도하게 되니까. 그런데 정작 쏟아지는 그것은 물이 아니다. 물처럼 보이는 문자들이다. 그러고 보니 폭포벽에 박혀 있는 것들도 바위가 아니었다. 책이었다, 오래된 책. “고대 갑골문부터 추사의 세한도까지 5300여권에서 받은 문자데이터로 제작한 것”이란 설명이 따라나왔다. 쉽게 말해 인간을 지탱해온 정신세계, 문명의 역사를 고서가 토해내는 수억의 문자들로 펼쳐냈다는 거다. 이이남의 ‘반전된 산수’(2021). 허백련의 산수화 한 폭을 거꾸로 매단 작품은 바닥의 수조를 통해야 뒤집힌 그림 속 세상이 제대로 보이게 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서울 은평구 진관동 사비나미술관. 작가 이이남이 새로운 분기점을 찍으며 개인전을 연 곳이다. 강렬한 첫인상 ‘시가 된 폭포’(2021)를 비롯해 싱글채널·다중채널비디오에 고서·거울·수조 등 오브제를 곁들인 대형설치작품 21점을 꺼내놓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다’란 타이틀을 붙였다. 사실 이번 개인전을 이해하는 데, 작가의 변신을 수용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키워드가 하나 있다. ‘DNA’다. 작가의 모든 작품에 데이터화한 자신의 DNA 염기서열을 녹여냈다는 것인데. 다소 ‘뜬금없다’고 할지 모를 그 배경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문득 인생·작품을 걸고 정체성을 고민하던 작가가 “내 뿌리를 찾는 작업을 하자” 했단다. 그러다가 가장 바닥에 있는, 나를 구성하고 있는 DNA를 알아내야겠다는 생각에까지 이른 거다. 생각만이 아니었다. 그 일을 해냈다. 서울대 생명과학연구소를 통해 자신의 DNA를 추출했고 그 염기서열인 A(아데닌), G(구아닌), C(사토신), T(티민)의 복합구조 데이터를 얻어내기에 이르렀다. 그러곤 그 데이터로 고전 산수화를 다시 그려내는 일에 빠져든 거다. 둥근 또는 사각의 판에 DNA 데이터를 텍스트로 바꾼, 알파벳 A·G·C·T가 차곡차곡 쌓이며 옛 산수화가 하나둘씩 ‘채워지는’ 그림 말이다. 작가 이이남이 미디어설치작품 ‘DNA 산수’(2021) 중 한 폭 앞에 섰다. 자신의 DNA 데이터와 빛의 신호를 재해석해 작가 자신이 그림 속 산수와 하나임을 표현한 것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이이남의 ‘DNA 산수’ 중 전경 일부. 초록 조명이 진한 거울공간에 작가의 DNA 염기서열이 흘러내리는 산수화, 그들을 비추는 같은 크기와 모양의 또 다른 거울을 달아 겹겹의 중층적 세계를 펼쳐내고 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중국 송대 화가 곽희의 ‘조춘도’(1072)를 차용해 푸르고 깊은 싱글채널비디오로 제작한 ‘인간, 자연, 순환, 가족’(2021), 북송 때 화원 왕희맹의 ‘천리강산도’와 겸재 정선의 ‘사공도시품첩’ 속 ‘웅혼’ ‘충담’ 등을 어울려 다중채널비디오로 제작한 ‘DNA 산수’(2021) 등이 대표적이다. 작품 속에 흩날리는 A·G·C·T는 육안으로 쉽사리 가려낼 수 있는데, 불현듯 앞서 본 ‘폭포도 혹시?’ 할 수 있다. 그렇다. 그 흘러내리는 문자도 A·G·C·T가 함께 엉키고 뭉친 융합체였던 거다. ◇뿌리를 찾아 시대를 거스른 첨단 미디어 작품들 굳이 디지털이 아니어도 ‘움직이는 작품’은 더 있다. ‘형상을 벗어나 존재의 중심에 서다’(2021)란 긴 제목을 가진 설치작품은 중국 당나라 시인 사공도의 시학서 ‘이십사시품’의 한 구절에서 착안한 것. 이를 토대로 ‘주자대전’ 등 고서 몇 권을 매달아 아래위로 쉴 새 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설치작품을 만들었다. 그 의미는 물리적 율동감 이상이다. 바닥의 물웅덩이에 얼핏 비치는, 책 속 문자들의 정신 혹은 가치를 ‘어렵게’ 들여다보라는 뜻이니까. 이이남의 ‘반전된 빛’(2021). 함께 있을 수 없는 해와 달의 두 글자가 만나 빚은 ‘밝은 명’(明)의 조형물. 뒤집힌 글자는 그림자로 바닥에 깔릴 때 비로소 제대로 보인다. 조명을 비춘 방향을 거스른 그림자 역시 DNA 염기서열 A·G·C·T로 꿈틀대는 중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이이남의 ‘인간, 자연, 순환, 가족’(2021). 중국 송대 화가 곽희의 ‘조춘도’(1072)를 차용해 푸르고 깊은 싱글채널비디오로 제작한 DNA 그림의 대표작이다. 빈 공간이던 검정 판에 차곡차곡 염기서열 A·G·C·T가 쌓여 산수화가 그려진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형상을 뒤집어야 비로소 보이는 세상을 상징한 작품도 있다. 허백련의 산수화 한 폭을 거꾸로 매단 ‘반전된 산수’(2021)와 조형물 ‘밝을 명’(明)자를 거꾸로 세운 ‘반전된 빛’(2021)이다. 두 작품은 모두 세상의 진짜 모습은 바닥의 수조에 비췄을 때, 바닥의 그림자로 깔릴 때 제대로 보인다는 의미를 에둘러 심어낸 것이다. 파고들수록 녹록지 않은 심오한 메시지. 쉬운 방식도 있을 텐데 작가는 왜 이토록 복잡한 길을 자처했을까. “내가 진짜 이이남인가”를 묻고 싶더라는 거다. “보이는 이미지만을 추구하는 시대에 과연 영원한 게 있을지, 그게 알고 싶더라”고 했다. 그러곤 그 뿌리를 찾는 과정에서 형식으론 DNA에, 내용으론 동양철학·미학에 답이 있겠다고 결론을 내렸던 거다. 그 오랜 고뇌 끝에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는 시화일률 사상이 마침내 첨단 디지털기술을 입게 된 것이고. 전시에는 10여년 전부터 작가를 ‘제2의 백남준’으로 알린 ‘신-인왕제색도’ ‘신-금강전도’ ‘신-세한도’ ‘신-몽유도원도’를 함께 걸었다. 그 세월이야 그렇게 연결된다 해도, 보는 만큼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개인전만 70번째라는 이 미디어아티스트의 ‘천재적’ 발상이 과연 어디까지 가닿을지. 전시는 8월 31일까지. 작가 이이남이 2009년 제작한 작품 ‘신-인왕제색도’ 중 한 장면.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1751·국보 제216호)를 차용해 움직이는 그림으로 다시 그려냈다. 사계절의 변화를 들이고 고즈넉한 가옥에 불을 켰으며 인왕산 위로 서서히 나는 비행기도 띄웠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2021.06.21 I 오현주 기자
<18>신궁의 후예들 미래를 향해 쏴라
  • [손태호의 그림&스토리]<18>신궁의 후예들 미래를 향해 쏴라
  • 담졸 강희언이 그린 ‘사인사예’. 18세기 작품으로만 전한다. 세 가지 주제로 엮은 ‘사인삼경도첩’(士人三景圖帖)에 들었다. ‘사인사예’ 외에 대청마루에 엎드려 저마다 그림에 열중하고 있는 선비들을 그린 ‘사인휘호’, 나무그늘 아래서 시를 짓고 책을 읽고 시상에 몰두하는 선비들을 그린 ‘사인시음’이 있다. 이전까지 사인의 풍류를 묘사했던 인습적 권위에서 탈피하고 표현의 영역을 대폭 확대해 이후 기법·소재 등 조선 풍속화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종이에 수묵담채, 26×21㎝, 개인 소장.혹독한 세상살이에 그림이 무슨 대수냐고 했습니다. 쫓기는 일상에 미술이 무슨 소용이냐고 했습니다. 옛 그림이고 한국미술이라면 더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는 일을 돌아보면 말입니다. 치열하지 않은 순간이 어디 있었고, 위태롭지 않은 시대가 어디 있었습니까. 한국미술은 그 척박한 세월을 함께 견뎌온 지혜였고 부단히 곧추세운 용기였습니다. 옛 그림으로 세태를 읽고 나를 세우는 법을 일러주는 손태호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조선부터 근현대까지 시공을 넘나들며, 시대와 호흡한 삶, 역사와 소통한 현장에서 풀어낼 ‘한국미술로 엿보는 세상이야기’ ‘한국미술로 비추는 사람이야기’입니다. 때론 따뜻한 위로로 때론 따가운 죽비로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손태호 미술평론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도쿄올림픽이 결국 개최될 모양입니다. 오직 올림픽을 바라보며 피땀으로 준비해왔던 선수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코로나19 위기 상황에서 올림픽을 개최한다는 것이 너무나 위험한 일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올림픽이 단순히 선수들만을 위한 행사가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올림픽을 강행하겠다는 일본 정부의 무책임함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도쿄올림픽지도에 독도를 자국 영토로 표시해 우리 국민의 분노를 폭발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정치적 상황’이 아니라면 올림픽 자체는 세계인을 감동케 하는 행사입니다. 모든 종목이 다 그렇지만 그중 무엇보다 한국인을 감격케 하는 특별한 종목이 있습니다. 양궁입니다. 우리나라가 금메달을 다른 나라에 절대 내주지 않는 양궁은 우리 입장에서는 대회의 하이라이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여자 단체 양궁은 올림픽에서 무려 8연패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한국의 독무대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우리 민족이 언제부터 이처럼 활을 잘 쐈던 걸까요. 아마 고대부터일 겁니다. 수많은 그림들이 그렇게 일러줍니다. 고구려 고분벽화부터 활쏘기와 관련된 작품이 아주 많이 그려졌던 것이지요. 그중 하나를 고르는 일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굳이 그 어려운 일을 해야 한다면 담졸 강희언(1738∼1784 이전)의 ‘사인사예’(士人射藝)를 꼽겠습니다. 회화성으로 보나 구성으로 보나 활쏘기 그림에선 단연 최고봉이라 할 만합니다. ◇남과 여, 양과 음, 침묵의 소리 대비한 ‘사인사예’ 시작은 오른쪽 소나무 한 그루부터입니다. 왼쪽 아래 방향으로 비스듬히 뻗은 가지를 멀리 개울가와 같은 사선으로 그려 전경과 후경을 자연스럽게 구분한 덕입니다. 나무기둥은 윤곽선이 없이 그린 뒤 먹의 농담만으로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껍질을 표현했고 솔잎은 푸른색 선염(화면에 물을 칠하고 마르기 전 물감을 칠해 몽롱하면서 무거운 맛을 나타내는 채색기법)으로 표현했습니다. 나무 아래에 그림의 주인공들이 있습니다. 갓을 쓴 선비 셋이 보이는데 한 선비는 활시위를 당겨 막 화살을 쏘기 직전이고, 한 선비는 다음 화살을 잡으려고 하며, 나머지 한 선비는 활을 무릎에 끼운 채 앉아 있습니다. 그림 안쪽 나뭇가지 저 너머로는 개울가가 보입니다. 아낙들이 푸른치마를 허벅지까지 올리고 빨래를 하는 중입니다. 힘껏 치켜들었다가 내리칠 방망이 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것만 같습니다. 활터와 빨래터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 조화에 그림의 묘미가 있습니다. 바로 ‘소리의 시각화’입니다. 예부터 활 쏘는 곳에서는 이른바 ‘습사무언’(習射無言)이라 해 말을 삼가는 것이 기본 덕목입니다. 그럼에도 화가는 요란한 빨래 방망이 소리를 그림에 들여 활터의 침묵과 묘한 대비를 끌어낸 것입니다. 이 ‘침묵과 소리’는 ‘남과 여’ ‘양과 음’과 함께 그림이 의도한 주요한 대비법입니다. 활 쏘는 선비들에서는 옛 활쏘기 방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시위를 활에 걸 때는 양반다리를 한 후 양 무릎에 활을 끼운 채 겁니다. 조선의 각궁은 일본 활이나 서양 활과는 달리 쇠뿔·나무·힘줄 등을 여러 겹으로 만든 복합궁이라 탄성이 매우 강해 활시위를 걸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자세를 취한 이가 왼쪽 아래 앉아 활을 만지는 선비입니다. 활시위를 힘껏 당긴 다른 선비의 허리춤에는 화살 두 발이 매달려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보통 사대에 올라갈 때 이처럼 화살을 허리띠에 꽂고 올라가 하나씩 뽑아 쐈습니다. 한 번에 다섯 발씩 쏘는데 두 사람이 한 발씩 교대로 쏩니다. 이에 비춰볼 때 이 선비는 세 번째 화살을 쏘기 직전이고, 또다른 선비는 세 번째 화살을 준비 중이란 걸 알 수 있습니다. 팔뚝에 찬 완대로 볼 때 한 사람은 왼손잡이, 다른 사람은 오른손잡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담졸 강희언이 그린 ‘사인사예’의 부분. 활터에서 활을 쏘는 선비들(오른쪽)과 개울가에서 빨래하는 아낙들. 화가는 요란한 빨래 방망이 소리를 그림에 들여 활터의 침묵과 대비를 꾀했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 조화에 그림의 묘미가 있다.◇임금·양반·양민 막론하고 누구나 즐긴 국민스포츠 그림은 활쏘기 자세도 알려줍니다. 사대에 오른 두 선비의 발 방향은 팔(八)자도, 정(丁)도 아닌 어중간한 모습인데 이 자세를 부르는 이름이 있습니다. ‘비정비팔’(非丁非八), 바로 우리 국궁의 기본자세입니다. 무게중심을 살짝 앞쪽으로 옮기며 발사하는데, 팔의 힘만이 아니라 온몸의 탄성을 활의 탄성과 결합해야 멀리 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 활쏘기가 중국이나 일본보다 먼 120보(144m)를 기준으로 하고, 무관시험 때는 150보(180m)까지 쏘게 했던 데는 이런 원리가 있었던 겁니다. 현재 올림픽 양궁거리가 70m이니 조선의 활쏘기 거리는 이보다 두 배 이상 멀었습니다. 조선후기 문인이자 화가이면서 평론가였던 표암 강세황(1713∼1791)은 그림의 발문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편안할 때 연습하고 위태할 때 사용하니, 연북인(硏北人·문인 등 문필에 종사하는 사람)은 매우 부끄러울 것이다. 우리나라의 이러한 광경이 여기에서 극에 달했다.” 고대부터 지금껏 우리 민족에게는 활쏘기의 특출함이 있습니다. 고구려 시조 주몽(朱夢)에 대해 ‘삼국사기’는 주몽이 일곱 살 때 대나무로 만든 활로 파리를 잡았다는 기록을 전합니다. 고구려를 침략한 당 태종은 장수 양만춘의 화살에 한쪽 눈을 잃었다고도 합니다. 조선의 임금 중 특히 태조와 태종, 정조는 신궁으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게다가 활쏘기는 단순한 기예가 아니었습니다. 몸과 마음을 닦고, 동맹체를 결속시키기 위한 치열한 수련이었으며, 무인만이 아니라 임금·양반·양민을 막론하고 누구나 권하고 즐겼던 국민스포츠였습니다. 이런 전통이 면면히 흐르고 있기에 올림픽 8연패라는 전무후무한 기록도 나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비단 활쏘기뿐만 아닙니다. 활 관련 그림에서도 전통은 이어져 현대적 감각의 명작이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그 대표작이 바로 서양화가 김형근(91) 화백이 1970년에 그린 ‘과녁’입니다. 작품은 그해 ‘제19회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고, 지금은 청와대가 소장하고 있습니다. ◇화살 꽂힌 나무표적의 회화미 극대화한 ‘과녁’ 그림은 둥근 표적이 있는 나무과녁과 화살 3개가 전부입니다. 하지만 묘사는 단순치 않습니다. 나무판은 질감이 느껴질 만큼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넘칩니다. 과녁은 현대의 양궁과는 다른 국궁의 과녁으로 실제는 직선이 원 위에 있는데 회화적 안정감을 위해 반대로 그린 듯합니다. 표적에 활촉 자국은 보이지 않으나 화살 두 개는 비스듬히 꽂히게, 한 개는 땅에 닿게 한 뒤 각각의 그림자를 묘사해 사실감을 높였습니다. 김형근의 ‘과녁’(1970). 시위를 떠난 화살이 과녁에 박힌 순간을 사실주의적으로 그렸다. ‘대통령’과 인연이 많은 작품이다. 1970년 ‘제19회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았고, 이후 청와대의 소장품이 됐다. 당시 제대로 된 미술교육을 받은 적 없는, 지방 공무원 신분 작가의 작품으로도 화제가 됐다. “한국사람은 옛부터 과녁을 썼다”며 “둥근 것은 한국인의 혼을 뜻한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캔버스 유화, 162×130㎝, 청와대 소장.물론 작품은 활쏘기의 풍속이나 의미를 표현한 게 아닌 화살에 꽂힌 과녁의 회화미를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이런 그림이 나올 수 있었던 건 그만큼 활쏘기가 대중적이고 익숙했기 때문입니다. 화가는 토속적인 소재에 주목해 전통을 현대적 감각에 맞게 재해석하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이런 부단한 노력의 결실이 화단에서 인정받고 대중에게 감동을 줘 그의 작품은 높은 가격에 거래되기도 합니다. 1885년부터 한 해 동안 한반도를 여행한 러시아 장교들이 쓴 책 ‘내가 본 조선, 조선인’은 “다른 사람들이 모방할 수 없을 정도로 조선인은 활을 잘 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9세기 한양 성곽 안팎에 활터만 마흔여덟 곳이 있었을 만큼 활쏘기는 우리 민족의 생활 그 자체였습니다. ‘사인사예’부터 ‘과녁’까지 이어지는 활쏘기 그림은 전통의 위력을 보여주는 한 장면입니다.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법고창신’의 의미를 옛 화살에 묻혀 현대의 과녁으로 쏴주는 듯합니다. 화살은 이내 다른 과녁을 향해 날아갈 것이고요, 그래서 과녁은 화살의 종착지가 아닌 여정입니다. △손태호 미술평론가는… 30대 중반 도망치고 싶던 때가 있었다. 세상살이가 버겁고 고달파서. 막막하던 그 시절, 늘 그렇듯 삶의 퍼즐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풀렸다. 그즈음 눈에 띈 옛 그림이 우연이었고 그 흔적을 좇아 미술관·고서화점 등을 누비고 다닌 게 필연이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찍힌 인장 ‘장무상망’(長毋相忘·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을 보고 어째서 ‘그림이 삶, 삶이 그림’이라 하는지 깨달았다.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과학도의 길은 그날로 접혔다. 동국대 대학원 미술학과로 진학해 석·박사학위를 받은 뒤 한국미술 전문가가 됐다. 조선회화·불교미술에 기둥을 세우고 그 안에 스민 상징 같은 ‘옛 그림’은 거울로 곁에 뒀다. 지금은 한국문화예술조형연구소 학술이사로 있으면서 이론·현장을 연결한 연구, 인물·지리·역사를 융합한 글과 강연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 ‘조선불상의 탄생’(한국학술정보·2020), ‘다시 활시위를 당기다’(아트북스·2017), ‘나를 세우는 옛 그림’(아트북스·2012) 등이 있다.
2021.06.11 I 오현주 기자
이상·백석·이중섭 등..문화예술 꽃피운 근대기 시인과 화가들
  • [책]이상·백석·이중섭 등..문화예술 꽃피운 근대기 시인과 화가들
  • [이데일리 김은비 기자] 1930년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26세 청년 구보가 하루 동안 경성 곳곳을 배회하며 겪는 일을 묘사한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작품을 보면 당시 서울의 모습과 식민지 지식인의 감성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소설의 삽화는 박태원의 친구이자 그림도 빼어나게 잘 그렸던 시인 이상이 그렸다. 사실 이상의 본래 꿈은 화가로 그가 그린 ‘1928년 자화상’은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상할 정도였다. 자신의 소설 ‘날개’에 삽입된 드로잉도 이상의 솜씨다. 식민지 시절, 역설적이게도 문화예술은 오히려 찬란한 꽃을 피웠다. 젊은 지식ㆍ예술인들이 근대 문물의 수용과 함께 20세기 초반 서구의 사상ㆍ철학ㆍ문화 등을 빠르게 흡수하며 나라를 빼앗긴 울분과 설움, 절망을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다. 당시 내로라하는 수많은 문인과 화가가 예술적 교감을 나누고 이를 각자의 작품에 반영하면서 ‘경성의 르네상스’를 일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렇게 삶과 우정을 나누며 시대의 풍경이 되었던 문인과 화가의 합을 꼽아보면, 이상과 구본웅, 백석과 정현웅, 김용준과 김환기, 최승구와 나혜석을 들 수 있다. 이 같은 문인과 화가의 만남은 근대를 지나 구상과 이중섭, 박완서와 박수근, 김지하와 민중화가 오윤에 이르기까지 지금도 맥이 이어진다.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이 이와 같은 내용을 정리한 책 ‘시인과 화가’가 출간됐다. 윤 관장은 근대기의 시인과 화가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책을 기획했다. 오래 전 잡지 ‘인간과 문학’에 연재한 내용을 한데 모은 문화예술 에세이다. 윤 관장은 책 소개에서 “어두운 시대를 살았던 창작자들이 어떻게 시대를 끌어안고 예술세계를 풍요롭게 가꾸었는지 살펴보려 했다”고 출간 취지를 밝혔다. 그러면서 “문인과 화가의 만남이 현대사회에서는 과거 이야기로만 묻히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며 “직업적 세분화도 중요하지만 예술계의 진정한 통섭과 융합이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2021.06.04 I 김은비 기자
"책 완판에 전시장은 긴 줄"...RM이 다녀가면 대박난다
  • "책 완판에 전시장은 긴 줄"...RM이 다녀가면 대박난다
  • [이데일리 김은비 기자] 방탄소년단의 리더 RM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미술계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여전한 ‘RM 효과’를 과시했다. 미술 애호가로 알려진 RM은 평소 국내외 다양한 전시를 관람하거나, 관련 책을 읽은 후 팬들에게 SNS로 공유한다. 팬들 사이에서는 RM이 다녀간 미술관 및 공유한 책을 똑같이 따라가고 읽는 ‘RM투어’가 유행이다. 미술계에서는 “전시가 성공하려면 RM이 들러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떠돌 정도다.그룹 방탄소년단 리더 RM은 자신의 SNS에 안규철 작가의 책 ‘사물의 뒷모습’ 중 ‘식물의 시간’ 글을 공유했다.지난 28일 새벽 RM은 책 두 장을 찍어 팬 커뮤니티 위버스에 올렸다. RM이 공유한 글은 ‘개념 미술가’ 안규철 작가의 책 ‘사물의 뒷모습’(현대문학) 중 ‘식물의 시간’이라는 제목의 글이 담긴 부분이다. ‘내 속에 숨어있는 식물의 시간을 깨우는 새해가 되기를 겨울나무들 앞에서 소망해본다’는 문구가 적힌 글은 추운 겨울을 견디는 나무들을 보며 얻은 깨달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책은 사물 또는 현상의 보이는 것 이외의 뒷모습에 주목해온 안 작가가 작품활동의 일환으로 지난 2014년부터 ‘현대문학’에 연재한 글과 그림 69편을 엮어낸 것이다. “글은 제 아이디어 창고”라고 출간 이유를 밝힌 안 작가는 동명의 전시를 오는 7월 4일까지 부산 국제 갤러리에서 개최하고 있기도 하다.지난 3월 출간된 책은 RM이 내용을 공유하자마자 전국 온·오프라인에서 완판됐다. 31일 현재 교보문고와 예스24에는 책이 온·오프라인 전부 매진돼 ‘6월 2일 재입고 예정’이라는 알림이 떠 있는 상황이다. 출판사는 밀려오는 주문에 당일 바로 책 중쇄에 들어갔다. 온라인에는 “동영상에 빠진 세상에서 책을 손에 들게 만든 RM의 영향력” “요즘 읽을 책을 찾고 있었는데 RM이 위버스에 올린 거 보고 바로 구매했다” 등의 후기가 올라와 있다. 현대문학 관계자는 “28일 새벽 RM이 책을 공유하고 5분 만에 트위터에서 책 관련 글이 수천 건 올라왔고, 다음날 바로 책이 전부 매진됐다”며 “책을 서둘러 더 찍고 있지만, 급증하는 판매량을 따라갈 수가 없어 구매를 못한 독자들이 많은 상황”이라고 전했다.RM이 미술 관련 도서에 관심을 보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9월 RM은 자신의 생일을 맞아 국립현대미술관에 미술책 보급 등을 위해 1억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RM은 “미술 관람 기회가 적은 산간벽지의 청소년들도 도록 등을 통해 예술적 감수성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이유를 밝혀 미술계의 찬사를 받았다.그룹 방탄소년단 리더 RM이 방탄소년단 공식 SNS에 충북 청주시립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거장, 중원을 거닐다’에 방문한 인증 사진을 올렸다.(사진=방탄소년단 트위터 캡처)미술관도 여전히 ‘RM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지난 27일 RM은 충북 청주시립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거장, 중원을 거닐다’의 사진을 ‘버터풀 데이스(Butterful days)’라는 문구와 함께 방탄소년단 공식 트위터에 업로드했다. RM이 올린 글을 보고 지난 주말 전시를 다녀왔다는 한 팬은 “RM에게 좋은 전시 많이 와서 보라고 초대받은 기분”이라는 관람 후기를 자신의 SNS에 남기기도 했다.미술관 개관 5주년을 기념해 열린 근현대미술전은 충청권을 기반으로 활동했던 한국 근현대 작가들의 작품과 예술세계를 조망하는 전시로 오는 6일까지 열린다. 이번 전시에서는 김복진, 김주경, 정창섭 등 한국 근현대미술의 거장 12명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이번 전시에는 평소 RM이 각별한 애정을 보였던 단색화가 윤형근 화백의 작품도 포함됐다. 앞서 RM은 윤 화백의 지난해 이탈리아 포르투니미술관 전시에 이어 지난 1월 열린 미국 데이비드즈워너갤러리 전시와 4월 서울 PKM갤러리 전시까지 연달아 관람하며 관심을 드러냈다.서울 강서구 마곡동 스페이스K서울에서 지난 27일까지 열린 미국 작가 헤르난 바스의 ‘모험, 나의 선택’ 전도 RM 덕분에 성황리에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지난 2월 개막한 전시는 RM이 다녀갔다는 소문이 퍼지며 화제가 됐다. 전시 개막 일주일만에 1만 명 넘게 다녀간 전시는 매주 주말에 전시를 찾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입장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스페이스K서울 관계자는 “마곡지구는 회사가 많아 평소 주말엔 사람이 많지 않은 편인데, 이번 전시는 전국에서 온 관람객들로 특히 사람이 많았다”며 “RM의 영향력을 새삼 체감했다”고 설명했다.방탄소년단 리더 RM이 SNS에 방문 인증을 남긴 충북 청주시립미술관 특별전 ‘거장, 중원을 거닐다’에 걸린 윤형근 화백의 ‘다색 80-80’(사진=청주시립미술관)
2021.06.01 I 김은비 기자
<15>그 많던 웅어 다 어디로 갔을까
  • [손태호의 그림&스토리]<15>그 많던 웅어 다 어디로 갔을까
  • 겸재 정선이 1741년에 그린 ‘행호관어’. 한강과 한강변 명승명소 등을 그려 묶은 ‘경교명승첩’에 든 33점의 그림 중 한 점이다. 삼국시대부터 있던 민물포구인 행주나루 부근 행호, 그중 궁궐 진상품인 웅어가 많이 잡히던 음력 3∼4월 즈음의 전경을 그렸다. 비단에 채색, 29.2×23.0㎝, 간송미술관 소장.혹독한 세상살이에 그림이 무슨 대수냐고 했습니다. 쫓기는 일상에 미술이 무슨 소용이냐고 했습니다. 옛 그림이고 한국미술이라면 더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는 일을 돌아보면 말입니다. 치열하지 않은 순간이 어디 있었고, 위태롭지 않은 시대가 어디 있었습니까. 한국미술은 그 척박한 세월을 함께 견뎌온 지혜였고 부단히 곧추세운 용기였습니다. 옛 그림으로 세태를 읽고 나를 세우는 법을 일러주는 손태호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조선부터 근현대까지 시공을 넘나들며, 시대와 호흡한 삶, 역사와 소통한 현장에서 풀어낼 ‘한국미술로 엿보는 세상이야기’ ‘한국미술로 비추는 사람이야기’입니다. 때론 따뜻한 위로로 때론 따가운 죽비로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손태호 미술평론가] 경기 고양시에는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 전승지 행주산성 역사공원이 있습니다. 행주산성 역사공원은 바로 한강 옆에 들어서 정상에 오르면 아름다운 한강의 모습과 낙조를 즐길 수 있는 곳입니다. 1845년 헌종의 명으로 세운 행주대첩비와 역사관도 있어 치열했던 옛 역사를 돌아보며 어르신과 아이들이 산책하기가 참 좋습니다. 이곳에는 ‘행호정’이란 전망대가 있는데 이곳은 원래 군사용 초소를 새롭게 단장한 곳으로 ‘행호’(杏湖)는 조선시대 한강의 이곳을 부르던 명칭입니다. 이곳을 행호라 한 것은 인근으로 창릉천이 합류하면서 강폭이 넓어지고 물살이 약해져 마치 호수처럼 잔잔해 붙은 이름입니다. 행호에는 행주나루터가 유명했는데 한때는 고깃배로 붐볐던 곳으로 그 시절 행호의 풍경을 담은 작품이 그림으로 남아 있습니다. 바로 조선시대 진경산수화의 1인자 겸재 정선(1676∼1759)의 ‘행호관어’(杏湖觀漁)입니다. ◇양천현령 겸재가 그린 행주나루터 풍경겸재는 65세인 1740년(영조 16년) 겨울 양천현령에 제수됐습니다. 양천은 현재 서울 강서구 가양동 일대로, 옛날 현감이 이곳으로 발령을 받으면 울고 왔다가 울고 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시골이라 영 아쉬웠는데 재임 동안 수입이 꽤 짭짤해 떠나는 게 또 아쉽더란 뜻입니다. 한강 하구에 위치한 덕에 그만큼 물산이 풍부했던 것입니다. 겸재는 이곳에 있는 동안 멀리 양수리 근교에서 행호에 이르는 한강 주변의 풍경을 그림으로 많이 남겼는데 이 화첩이 바로 대표적 진경산수화첩인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입니다. 양천현의 강변에는 궁산(宮山)이 있는데 높이는 76m밖에 안 되지만 옛날 선비들이 풍류를 즐겼던 개화산·탑산 등과 함께 한강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하던 곳이었습니다. 겸재는 이곳 궁산에 자주 올라 풍광을 감상하고 사색하기를 좋아했는데 여기서 본 한강 건너편 행주산(덕양산) 쪽 풍경을 그린 것이 바로 ‘행호관어’입니다. 그림을 한 번 살펴볼까요. 저 멀리에 원경의 산들이 겹쳐 있고 중앙에는 행주와 덕양산이 있으니 그 앞이 바로 행호입니다. 행호에는 작은 어선들이 제법 몰려 있습니다. 오른쪽 덕양산 가장 높은 곳 아래 기와건물은 조선중기 문신 죽소 김광욱(1580∼1656)의 별서인 귀래정입니다. 가운데 기와집은 행주대신으로 불리던 송인명(1689∼1746)의 별서로 그는 당시 좌의정을 맡고 있었습니다. 맨 왼쪽의 건물은 숙종의 사돈인 김동필(1678∼1737)의 별서입니다. 결국 그림에 보이는 건물 모두가 세도가들의 별서였던 셈입니다. 이들은 모두 겸재와 직간접적으로 인연이 있는 인물들로 아마 겸재의 발걸음이 미쳤던 곳들이라 자신 있게 묘사할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행호관어’는 ‘행호의 고기잡이를 구경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고기잡이배가 그림에서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작은 고깃배가 무려 14척이나 강에 나왔으니 딱 지금이 풍어의 시기로 만선의 기쁨이 한창일 듯합니다. 그렇다면 이곳에선 어떤 고기를 잡았을까요. 그 해답은 그림과 함께 있는 사천 이병연(1671∼1751)의 제시에 적혀 있습니다. “늦봄이니 복어국이요, 초여름이니 웅어회라. 복사꽃 가득 떠내려오면, 행주 앞 강에는 그물 치기 바쁘다.” 겸재 정선의 ‘척재제시’(1741). ‘경교명승첩’에 든 한강변 진경산수화가 아닌 그림들 중 한 점이다. ‘척재가 시를 쓴다’는 뜻인데, 붓을 든 흰 수염의 선비가 척재 김보택이다. 귀한 웅어를 선물로 받고 답시를 쓰고 있는 모습이다. 비단에 담채, 33.2×28.7㎝, 간송미술관 소장.행호는 서해의 조수와 한강 민물이 만나는 기수역으로 많은 어류가 모이는 곳입니다. 특히 행주 웅어와 행호 하돈(황복어)은 맛이 뛰어나 임금의 수라상에도 올라가는 매우 귀한 생선이었습니다. 웅어는 갈대 속에서 많이 자라 갈대 ‘위’(葦)자를 써서 위어(葦魚·갈대고기)라고도 하며 지역에 따라 ‘우여’ ‘우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말기에는 아예 행주에 위어소를 둬 왕실에 진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음력 4월이면 행주나루에는 웅어잡이 배로 가득했습니다. 겸재의 그림 중 이 웅어와 관련된 그림이 또 있는데 바로 ‘척재제시’입니다. ◇웅어가 연결해준 그림과 시, 끈끈한 우의 여러 종류의 나무와 큰 파초가 울창한, 녹음을 자랑하는 어느 대감댁 마당에 군노가 생선꾸러미를 들고 있습니다. 방안 서가에는 책들이 가득 쌓여 있고 하얀 수염의 선비가 벼루와 연적을 놓고 종이에 글을 쓰려고 붓을 들고 있습니다. 그림은 온갖 초록빛으로, 이렇게 녹색을 과할 정도로 많이 사용한 예는 겸재의 작품 중 이 그림이 유일합니다. 특히 커다란 파초가 인상적인데 파초는 끊임없이 새 잎을 밀고 올라오는 모습, 봄이 되면 어김없이 새순이 다시 나오는 속성으로 강인한 생명력과 변하지 않는 의리의 상징이라 선비들이 좋아했던 나무입니다. 신라 최치원의 시에 처음 등장한 이래, 조선말까지 한시에 꾸준히 등장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습니다. 조선후기에는 문인사대부들이 정원을 가꾸는 문화가 크게 성행하는데 그때 파초 가꾸기가 유행했다고 합니다. 그림의 내용은 척재 김보택(1672∼1716)이 임금에게 진상했던 별미인 웅어 꿰미를 선물받고 이에 대한 답례로 시를 써 보냈다는 일화를 담고 있습니다. 척재의 집은 지금 종로구 북촌로 헌법재판소 자리로 그림에선 당시 조선시대 집권층의 사랑방 풍경을 엿볼 수 있습니다. 겸재가 이 일화를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그림은 완성 후 척재가 아닌 사천에게 보내졌는데요. 사천은 이 그림에 대한 답신으로 이렇게 적어 보냅니다. “버들가지에 꿰어 보낸 것으로 한술 뜰 수 있었습니다. 제 시를 보시고자 한다 하나 제가 보고자 하는 것은 몇 배입니다. 육지가 애상될까 보아 하나의 시축 중에 넣어 보내니 육지를 돌려보내실 때 함께 돌려보내소서. 18일 새벽에 조아림.” 겸재 정선의 ‘척재제시’(1741) 중 군노가 든 생선꾸러미를 클로즈업했다. 대감댁 주인인 척재 김보택이 선물받은 귀한 ‘웅어’다.음력 4월 18일이니 웅어철입니다. 겸재는 사천에게 웅어 선물을 보내면서 예전 척재의 이야기가 담긴 그림을 함께 보내 시를 독촉한 것입니다. 사천은 시와 함께 이렇게 편지를 보냈던 것이고요. 사천과 겸재는 이렇게 서로 그림과 시를 서로 주고받으며 평생 우의를 지킨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으며 웅어는 벗을 그리워하는 겸재의 마음이었습니다. ◇어부 소년과 양반집 규수의 사랑 이야기 전해 내려와행주 웅어에는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전해옵니다. 행주 어부소년 금원은 양반집 소녀 난사를 짝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난사가 못된 병에 걸려 고통받자 금원은 그 모습이 안타까워 이 병에 특효약이라는 웅어를 잡아 난사에게 먹입니다. 하지만 웅어는 허락 없이 함부로 잡을 수 없는 생선이라 어명을 어긴 죄로 금원은 석빙고에 갇혀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병이 나은 난사는 금원을 찾았으나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한강에 몸을 던졌습니다. 그런 사건이 있은 뒤 유독 아름다운 은빛 웅어 두 마리가 행호를 자유롭게 헤엄치는 모습이 자주 보이더라는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을 타고 전해졌습니다. 행호의 웅어는 도시개발과 확장으로 물길이 막히고 오염되자 거의 사라져 버렸습니다. 현재 행주와 능곡의 웅어전문집에 나오는 웅어는 한강이 아닌 목포와 해남의 웅어라 합니다. 이처럼 한강의 기적은 얻게 한 것뿐 아니라 잃게 한 것도 적잖습니다. 앞으로 한강이 좀더 깨끗해지면 사라졌던 은빛 웅어들이 헤엄치는 모습과 붉은 노을 속에 웅어잡이에 나선 고깃배들도 다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우리에게 옛 그림이 남아 있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을 풍경입니다. 상상만으로도 그 풍경이 너무 보고 싶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림의 어원이 ‘그리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겸재 정선의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겸재 정선(1676∼1759)은 나고 자라 평생을 살던 백악산과 인왕산 아래 장동 일대를 중심으로 한양 곳곳을 화폭에 담았다. 65세던 1740년 12월 11일에 양천의 현령으로 부임한 이듬해부턴 한강과 한강변 명승명소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 그림들을 모아 묶은 것이 ‘경교명승첩’(보물 제1950호)이다. 1741년부터 그려나가 화첩을 완성한 건 사망하던 해인 1759년으로 추정한다. 가로 42㎝ 세로 36㎝의 두 권짜리 화첩에는 상권 19점, 하권 14점 등 총 33점의 그림이 들어 있고, 이 중 20여점이 한강을 주제로 한다. ‘행호관어’ 외에 조선의 대표적 나루터로 꼽혔던 ‘송파진’, 아차산 일대 위치해 노량진과 함께 태종 때부터 별감이 배치됐던 교통의 요지 ‘광진’ 등 260여년 전 한강 일대가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겸재의 그림에 사천 이병연의 제발과 시가 어우러진 예술성은 물론, 현재 사용하지 않는 지명이나 본래 모습이 사라진 실경 등을 ‘기록’한 사료로서도 가치가 높다.
2021.05.21 I 오현주 기자
<14>토함산부터 '오방색 희망' 몰고 오다
  • [손태호의 그림&스토리]<14>토함산부터 '오방색 희망' 몰고 오다
  • 박생광이 그린 ‘토함산 해돋이’(1981). 화면을 위아래로 나눠, 오색의 서기가 뻗치는 배경에 붉은 해를 내려다보는 석굴암 본존불의 옆모습과 비스듬히 선 보현보살을, 또 토함산 산줄기 배경에 금강역사와 새끼를 어르고 있는 어미 표범, 얽혀 있는 한 쌍의 봉황 등을 그렸다. 박생광은 모노크롬이 유행하던 1980년대 초에 민화·불화·무속화 등에서 발견한 토속적인 이미지를 오방색으로 소화해 한국 전통화와 현대화를 동시에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이 그림을 두고 ‘위대한 만년의 출발점’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적잖다. 단청과 탱화, 민화와 무속화란 불교미술과 민간미술이 구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절정의 색채감’으로 완성해서다. 종이에 수묵채색, 135×140㎝, 서울시립미술관 소장.혹독한 세상살이에 그림이 무슨 대수냐고 했습니다. 쫓기는 일상에 미술이 무슨 소용이냐고 했습니다. 옛 그림이고 한국미술이라면 더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는 일을 돌아보면 말입니다. 치열하지 않은 순간이 어디 있었고, 위태롭지 않은 시대가 어디 있었습니까. 한국미술은 그 척박한 세월을 함께 견뎌온 지혜였고 부단히 곧추세운 용기였습니다. 옛 그림으로 세태를 읽고 나를 세우는 법을 일러주는 손태호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조선부터 근현대까지 시공을 넘나들며, 시대와 호흡한 삶, 역사와 소통한 현장에서 풀어낼 ‘한국미술로 엿보는 세상이야기’ ‘한국미술로 비추는 사람이야기’입니다. 때론 따뜻한 위로로 때론 따가운 죽비로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손태호 미술평론가] 오는 19일은 음력 4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매년 이날이 되면 가까운 사찰 한두 곳을 방문해 아기 부처를 목욕시키는 ‘관욕’을 하고 절을 올립니다. 그러곤 부처가 모든 중생의 행복을 기원했듯 우리 가정과 사회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합니다. 부처는 고대 인도 카필라국의 왕자로 태어나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불평등한 세상을 극복하고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행복에 이르는 길을 깨우치는 평생의 진리를 설파하다가 80세 완전한 해탈에 이른 인류의 큰 스승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4세기 후반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뒤 왕조와 사회 이념은 바뀌었어도 언제나 우리의 삶과 함께해 왔습니다. 이런 유구한 전통으로 우리의 인식과 생활 속에는 자연스럽게 불교문화가 스며들어 있습니다. 숭유억불의 조선시대에도 많은 불교문화재가 조성됐고 화원이나 일반 선비화가들도 불교적 내용이 담긴 작품들을 여럿 남겼습니다. 불교에서 유래한 전통은 현대에도 이어져 꽤 수준 높은 작품이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의 고유한 정신세계와 역사에서 작품의 모티브를 찾은, 내고 박생광(1904∼1985)의 ‘토함산 해돋이’(1981)가 그중 한 점입니다. ◇‘색채의 마술사’이자 ‘민족혼의 화가’ 박생광 그림 상단에는 오색의 상서로운 기운이 하늘을 덮고 있습니다. 중앙에는 토함산의 능선이 구불거리는데 그 사이에 부처가 우측 붉은 해를 바라보고 앉아 있습니다. 머리는 노란 테두리의 두광이, 몸은 금색으로 장엄돼 있습니다. 왼쪽에는 보관을 쓴 보살이 부처와 반대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데 가슴 장식이 있고 하늘의 옷이란 천의를 입고 있습니다. 붉은 해 속에는 파도 같은 구름이 지나가고 붉은 꽃잎이 산화하고 있습니다. 하단에는 왼쪽으로 봉황 한 쌍이 엉켜 있고 오른쪽에는 호랑이 어미가 새끼를 어르고 있습니다. 문양은 표범에 가깝지만 우리나라에는 표범이 없기에 호랑이로 해석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는 금강역사가 우람한 근육을 뽐내며 택견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이런 자세는 석굴암 금강역사상과 흡사하지만 어쩌면 한반도 지형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붉은 바지와 청색 상반신이 대조를 이룬 모습도 그런 감상을 뒷받침해줍니다. 머리 뒤로 흰색의 큰 두광이 매우 인상적인데 ‘박생광 채색의 완성은 흰색’이란 세간의 평가가 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작품은 조선후기 불화의 특징인 여백이 없고 구름 문양을 장식적으로 활용하는 특징을 잘 이어받았습니다. 세부 표현도 부처의 나발(불상 중 소라모양으로 올린 여래상의 머리카락), 삼도(불상의 목에 가로로 표현한 세 줄기 주름), 보살의 영락(금관 따위에 매달아 반짝거리도록 한 얇은 쇠붙이 장식) 등 불화를 알지 못하면 정확히 그릴 수 없는 기법들을 매우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한국 근현대화가 중 최고의 진채화가답게 강렬한 색깔로 여백까지 채워 그렸고 대자연과 불보살(어려움에 처한 중생을 구하기 위해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는 보살), 성스러운 동물 등이 하나로 어우러져, 석굴암 본존 부처의 신비로운 기운이 온누리에 펼쳐지는 듯한 감동을 주는 걸작입니다. 박생광은 한국의 전통 소재와 색채를 통해 한국화의 새로운 길을 보여준 화가입니다. 1920년 일본 유학을 통해 신일본화를 습득하고 여러 활동을 하다가 광복과 함께 귀국했지만 왜색화풍이란 이유로 활동에 제약을 받자 30여년간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기나긴 방황의 시기를 보냅니다. 이런 속에서도 자신을 덧씌운 왜색화가란 오명을 털어내기 위해 전국의 산천과 민족혼이 배어 있는 문화재나 사찰 등을 돌면서 한국적 미감과 소재를 수집하며 새로운 작품세계를 준비해 나갔습니다. 1977년 일본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귀국한 박생광은 단청·탱화 등에 나타나는 한민족의 색채미와 표현기법으로 불교 소재의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작품들은 전통불화의 눈으로 보더라도 크게 어색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박생광이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 진주 의곡사에 출가해 몇 달 동안 불교를 공부하다가 속세로 내려온 경험, 고등학교 동기이자 고향 친구인 조계종 큰스님 청담 스님과의 깊은 인연 등이 있었습니다. ◇천경자도 감탄한 ‘토함산 해돋이’ ‘토함산 해돋이’는 불교를 밖에서 지키는 신장(불교의 수호신)을 앞에 배치하고 불보살을 뒤에 배치한다거나 불상과 보살의 세부표현 등에서 불화의 깊은 이해를 드러냅니다. 작품을 본 화가 천경자(1924∼2015)가 생전에 박생광에게 “‘토함산 해돋이’를 제게 주시고, 제 그림 중 선생의 마음에 드시는 게 있으면 다 가져가세요”라고 했을 만큼 동료 화가에게도 인정을 받은 작품입니다. 박생광의 ‘반가사유상’(1981). 한국 근현대화가 중 ‘최고의 진채화가’란 별칭답게, 여느 작품보단 톤을 좀 낮춘 듯하지만 여전히 강렬한 색감으로 무속세계와 불교세계를 병치하고 있다. 궁궐·관청의 장엄, 종교적 예배, 민간의 치장 등에서 보이는 진채화를 박생광은 궁화·불화·무속화·민화 등 색채를 흡수해 통합했고 여기에 건축의 한 부분이라 할 단청으로 화룡점정을 찍었다. 종이에 수묵채색, 소재 미상.이 시기 박생광의 뛰어난 작품을 한 점 더 꼽는다면 ‘반가사유상’(1981)이 있습니다. 한국 불교에서 반가사유상은 보통 뺨에 손을 대고 사유하는 미륵보살을 의미하는데 이 작품에도 뺨에 손을 댄 보살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오른쪽에 사유하는 보살 아래 노란 저고리를 입고 가슴을 드러낸 여인이 있습니다. 그 아래에는 흰 쌀과 검은 콩이 든 그릇이 있고 그 밑으로는 소가 얼굴만 내밀고 있습니다. 왼쪽에는 무당이 부채를 펼치고 방울을 흔들고 있고 아래쪽에는 꽃들이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불교와 무속의 대비, 보살과 여인의 대비로 해석할 수 있으나 그렇게 단순히 볼 수 없는 이유는 가운데 푸른빛의 거울 때문입니다. 원형의 푸른 빛 아래로 손잡이가 달려 있으니 거울은 거울이나 좀 특별합니다. 불교에서는 죽은 뒤 심판의 장소에 가면 자신이 살아온 과거가 다 보이는 ‘업경대’란 거울이 있는데, 이것이 아마도 업경대를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해서입니다. 푸른 거울 안에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마치 어떤 인물이 자신의 잘린 머리카락을 들고 서 있는 듯한 표현이 있는데 한때 출가했던 박생광 자신을 표현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푸른색과 붉은색의 대비, 노란색과 녹색의 적극적 사용, 여기에 미술사학자 김원용(1922∼1993)이 ‘섬뜩하게까지 보이는 백색의 악센트’라고 표현한 흰색까지 어울려 작품은 색채의 마술사다운 박생광의 면모를 잘 보여줍니다. ◇삼국시대에 시작해 1500여년 이어진 연등회 풍습박생광의 작품에서 무속 표현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는 불교와 마찬가지로 서민생활과 밀접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국의 중요무형문화재 굿이나 유명한 무당들의 굿을 직접 보러 다니기도 했습니다. 어느 책에서 “샤머니즘의 색채, 이미지, 무당, 불교의 탱화, 절간의 단청, 이 모든 것이 서민생활과 직결된, 그야말로 ‘그대로’ 나의 종교인 듯하다”라고 고백했듯이 박생광은 서민들에게 깊이 밴 근원을 그리고자 했습니다. 그림을 그릴 때 그는 입으로 붓을 빨곤 했는데 주변에서 빨간색 주사에는 수은이 들어있다고 말려도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에서인지 1985년 그는 후두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매년 ‘부처님 오신 날’에는 무명의 빛을 밝히는 연등이 달리고 아기 부처를 목욕시키고 꽃을 공양하며 절을 합니다. 이는 삼국시대에 불교를 들여온 이후 1500여년 넘게 이어진 오랜 풍습이자 문화이고 모두의 평화를 기원하는 공동체 의식입니다. 부처에게 절을 하는 것은 자신을 한껏 낮추며 부처의 훌륭한 삶을 본받아 나와 모두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정진의 다짐입니다. 그래서 아마 박생광은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역사를 떠난 민족은 없다. 전통을 떠난 민족은 없다. 모든 민족예술에는 그 민족 고유의 전통이 있다.” 올해 ‘부처님 오신 날’은 비록 사회적 거리두기 영향으로 행사 규모의 축소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도 그날만큼은 세상 모든 종교의 신념과 이념을 떠나 모두의 행복을 기원해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코로나19로 지치고 힘겨운 이웃들이 조금만 더 기운을 냈으면 하는, 우리 모두의 공통된 바람이 있지 않습니까. 부처의 자비를 빌려 고통스러운 이 시간이 어서 지나가길 빌어봅니다. △손태호 미술평론가는… 30대 중반 도망치고 싶던 때가 있었다. 세상살이가 버겁고 고달파서. 막막하던 그 시절, 늘 그렇듯 삶의 퍼즐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풀렸다. 그즈음 눈에 띈 옛 그림이 우연이었고 그 흔적을 좇아 미술관·고서화점 등을 누비고 다닌 게 필연이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찍힌 인장 ‘장무상망’(長毋相忘·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을 보고 어째서 ‘그림이 삶, 삶이 그림’이라 하는지 깨달았다.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과학도의 길은 그날로 접혔다. 동국대 대학원 미술학과로 진학해 석·박사학위를 받은 뒤 한국미술 전문가가 됐다. 조선회화·불교미술에 기둥을 세우고 그 안에 스민 상징 같은 ‘옛 그림’은 거울로 곁에 뒀다. 지금은 한국문화예술조형연구소 학술이사로 있으면서 이론·현장을 연결한 연구, 인물·지리·역사를 융합한 글과 강연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 ‘조선불상의 탄생’(한국학술정보·2020), ‘다시 활시위를 당기다’(아트북스·2017), ‘나를 세우는 옛 그림’(아트북스·2012) 등이 있다.
2021.05.14 I 오현주 기자
100점 이중섭 100호 박수근…'이건희 1488점' 국현 소장사 다시 써
  • 100점 이중섭 100호 박수근…'이건희 1488점' 국현 소장사 다시 써
  • 이중섭의 ‘흰 소’(1953∼1954·왼쪽)와 박수근의 ‘농악’(1960s). ‘흰 소’는 소 그림을 많이 그렸던 이중섭의 작품으로도 매우 드물다. 전해지는 5점 중 한 점으로 이건희컬렉션에 들어 있었다. ‘농악’은 박수근 작품에선 매우 드물다 할 100호에 달하는(162×97㎝) 크기가 시선을 끈다(사진=국립현대미술관).[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유영국 187점, 이중섭 104점, 장욱진 60점, 이응노 56점, 박수근 33점, 변관식 25점, 권진규 24점. 여기에 파블로 피카소 112점. 국립현대미술관에 자리잡은 이건희컬렉션 1488점이 그 얼굴을 드러냈다. 한국 근현대미술작가 238명의 1369점, 해외 근대작가 8명의 119점이다. 면면이 가진 장르적 성향도 다채롭다. 회화 412점, 판화 371점, 한국화 296점, 드로잉 161점, 공예 136점, 조각 104점, 사진과 영상이 8점이다.7일 이건희(1942∼2020) 삼성전자 회장의 소장 기증미술품을 세부적으로 공개한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이들을 한마디로 “동서고금을 망라한 다양성”이라고 정리했다. 그러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품 1만 점 시대에 진입하게 돼 ‘행복관장’임을 실감한다”며 “생애 두 번 다시 만나기 힘든 쾌거”란 소회를 감추지 않았다. 지난달 28일 이 회장 유족이 발표한 기증목록이 이건희컬렉션의 ‘거대한 양적 규모’를 세상에 알렸다면, 이날 국립현대미술관이 공개한 세부내용은 ‘비범한 질적 수준’으로 존재감을 확인케 했다. ◇‘양적 규모’ 넘어서는 희귀작·진귀작 퍼레이드 무엇보다 언제부턴가 모습을 감췄던, 혹은 그간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희귀작이 대거 모습을 드러냈다. 소 그림을 많이 그렸던 이중섭(1916∼1956)의 작품으로도 드문 ‘흰 소’(1953∼1954)가 대표적이다. 지금껏 5점 정도 전해진다는 그 ‘흰 소’ 중 한 점이 이건희컬렉션에 들어있었던 거다. 작품은 1972년 이중섭 개인전과 1975년 출판물에까진 등장했으나 이후 자취를 감췄다. 이상범의 ‘무릉도원도’(1922·158.6×390㎝). 이상범이 25세에 그렸다고 소문으로만 전해졌던 작품이다. 100년 만에 세상에 나오게 됐다(사진=국립현대미술관).이상범(1897∼1972)의 ‘무릉도원도’(1922)도 마찬가지. 갈색바탕에 짙은 녹색을 드리운 가로 4m에 육박하는 이 청록산수화는 직접 본 사람이 없어 눈이 아닌 귀로만 들었던 작품이다. 나혜석(1896∼1948)의 ‘화녕전작약’(1930s)도 있다. 한국근대기 ‘이혼고백서’를 발표한 뒤 엄청난 사회적 스캔들을 일으킨 이후 제작한 것으로 추정하는 작품은, 수원 고향집 근처의 화녕전 앞에 핀 작약을 소재로 그렸다고 알려졌다. 일제강점기 1세대 유화가이자 첫 여성 서양화가였던 나혜석은, 작품 대부분을 소실해 극소수의 몇 점만이 현전했던 터. 이미 대중의 관심을 한몸에 받은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1950s)도 30년 넘게 잠적해 있던 작품. 김환기의 작품을 통틀어 가장 큰 568㎝의 가로가 긴 그림으로, 항아리와 여인, 새와 사슴·꽃 등 김환기의 대표적 도상을 다 품고 있어 의미가 크다. 나혜석의 ‘화녕전작약’(1930s·33×23.5㎝). 대부분을 소실해 극소수의 몇 점만 전하는 나혜석의 극소수 작품 중 한 점이다(사진=국립현대미술관).박수근(1914∼1965)의 ‘농악’(1960s)은 또 다른 의미의 희귀작이다. 박수근 작품에선 매우 드물다 할, 100호에 달하는(162×97㎝) 크기 때문이다. 이보단 좀 작지만 역시 그의 작품으로는 흔치 않은 130×97㎝ 크기의 ‘절구질하는 여인’(1954)도 포함됐다. 여기에 이중섭의 스승이기도 했던 여성화가 백남순의 유일한 1930년대 작품인 ‘낙원’(1937), 단 4점만 전해지는 김종태의 유화 중 한 점인 ‘사내아이’(1929) 등도 이름을 올렸다. 굳이 ‘희귀’가 아니라도 한국화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은 줄줄이 이어진다. 김은호의 초기 채색화 정수를 보여주는 ‘간성’(1927)을 비롯해 김기창의 ‘군마도’(1955), 변관식의 ‘금강산그룡폭’(1960s), 박래현의 ‘여인A’(1942), 장욱진의 ‘공기놀이(11937), ‘소녀’(1939), ‘나룻배’(1951) 등이다. ◇이중섭 작품만 104점…내년 ‘특별 개인전’ 꾸려 한 작가의 연대기를 방불케 할 ‘작품 수’가 눈길을 끌기도 한다. 100점을 넘긴 이중섭이 가장 특별하다. ‘흰 소’와 ‘황소’(1950s)를 포함해 회화 19점, 엽서화 43점, 은지화 27점 등이 국립현대미술관으로 모두 옮겨졌다. 100점을 넘긴 다른 작가는 ‘산의 화가’ 유영국으로 회화 20점, 판화 167점을 기증목록에 올렸다. 이중섭의 ‘묶인 사람들’(1950s·10.1×15㎝). 한국전쟁 피란시절에 그린 것으로 추정하는 은지화다. 팔과 다리가 묶여 오도가도 못하는 사람들을 빗대 시대상을 표현했다(사진=국립현대미술관).1488점의 기증작 대부분을 차지하는 근현대미술품은 1950년대까지 제작된 작품의 비중이 가장 컸다. 320점으로 전체의 22%를 차지했다. 작가의 출생연도를 볼 때는 1930년대 이전에 출생한 근대작가의 작품 수가 860점에 달해 58%에 기록했다. 해외 거장의 작품은 클로드 모네의 ‘수련’(1919∼1920),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책 읽는 여인’(1919∼1920), 호안 미로의 ‘구성’(1953), 살바도르 달리의 ‘켄타우로스 가족’(1940) 등 이미 공개된 7명 작가의 회화 7점 외에 피카소의 ‘도자기’가 무더기(112점)로 기증작 리스트에 올랐다. ◇7월 덕수궁관 일부, 8월 서울관서 본격 대중 만나국립현대미술관은 ‘이건희컬렉션’을 순차적으로 대중에 내보이는 계획을 세웠다. 당장 7월 덕수궁관에서 여는 ‘한국미, 어제와 오늘’ 전에 도상봉의 회화 등 일부 작품을 선뵌다. 이후 본격적인 공개는 8월 서울관에서 여는 ‘이건희컬렉션 1부: 근대명품’부터다. 이어 12월 ‘이건희컬렉션 2부: 해외거장’에 이어, 내년 3월에는 104점에 달하는 이중섭 작품만으로 ‘이건희컬렉션 3부: 이중섭 특별전’을 꾸린다. 파블로 피카소의 ‘도자기’.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해외거장의 작품 119점 중 피카소의 도자기가 112점을 차지했다(사진=국립현대미술관).그 사이 덕수궁관에서는 11월 ‘박수근’ 전에 이번 기증작을 대거 내걸 계획이다. 과천관에선 내년 4월과 9월에 상설전을 마련하고, 청주관에서도 내년 ‘보이는 수장고’를 통해 이건희컬렉션의 대표작을 심층적으로 감상할 수 있게 할 생각이다. 윤 관장은 “이번 기증작으로 볼 때 한국 고미술부터 동시대 서양 현대미술까지 이건희컬렉션이 가진 광폭의 시각을 확인할 수 있다”며 “오랜 시간 열정과 전문성을 가미한 컬렉션의 결과”라고 평가했다. 이어 소장품 중 특별히 눈에 띄는 작품으로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를 꼽은 윤 관장은 “김환기의 작품 중 가장 큰 대표작”이라며 “경매에 내놓으면 300억~400억원에는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해봤다”고 말했다. 최근 지자체의 맹렬한 유치경쟁을 부르고 있는 ‘이건희 미술품 특별관 건립’과 관련해선 말을 아꼈다. “특별관에 대해선 국립현대미술관이 직접 관여하고 있지 않다”며 “문화체육관광부에서 검토하는 것으로 안다”고 답했다.
2021.05.07 I 오현주 기자
박수근 5월 정선 6월 김환기 8월…전국구 '이건희컬렉션' 바쁜 신고식
  • 박수근 5월 정선 6월 김환기 8월…전국구 '이건희컬렉션' 바쁜 신고식
  • 이건희 회장의 소장품을 보관해오던 삼성미술관 리움과 호암미술관을 떠나,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전국으로 흩어진 ‘이건희컬렉션’이 앞다퉈 전시일정을 내놓고 있다. 6일부터 박수근미술관이 여는 ‘아카이브 특별전’에 걸릴 박수근의 유화·드로잉 18점이 가장 먼저 대중과 만난다(이미지=이데일리 디자인팀).[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세기의 유산’의 ‘세기의 이동’. 이건희컬렉션이라 불린 미술품 2만 3000여점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가는 일 말이다. 가깝게는 서울 용산구 이촌동부터 멀리는 제주 서귀포시까지, 전국으로 흩어져 갔다. 출발지는 삼성미술관 리움과 호암미술관. 그간 이건희(1942∼2020) 회장의 소장품을 보관해온 곳이다. 2만 1600여점을 기증받은 국립중앙박물관, 1400여점을 기증받은 국립현대미술관은 말 그대로 ‘비상’이다. 진동이 거의 없는 특수탑차에 실어 옮겨냈는데 이삿짐처럼 차곡차곡 쌓을 수도 없는 ‘귀한 작품’들이다 보니 수십 차례 이동은 보통이다. 그나마 일찌감치 이관작업을 끝낸 국립현대미술관은 기증품 전부를 과천관 수장고에서 보관 중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여전히 이동 중’이다. 박물관 한 관계자는 “이달 말까지 이어질 것”이라며 “규모도 규모지만 소장목록을 만들고 분류하는 작업도 만만치 않다”고 전했다. 이들 기증품은 박물관 소장품이 모여 있는 이촌동 수장고에 보관한다. 비교적 작품 수가 단출(?)한 지방 공공미술관 다섯 곳에선 일찌감치 ‘귀빈 맞이’가 끝났다. 박수근미술관에 18점, 이중섭미술관에 12점, 전남도립미술관에 21점, 대구미술관에 21점, 광주시립미술관에 30점 등 102점이 삼성 유족 측 발표가 있던 지난 28일 이전, 이미 이관을 마쳤다. 이제 남은 건 ‘개막’. 기증품을 수령한 미술관들이 앞다퉈 전시일정을 내놓고 있다. 그야말로 전국구가 된 이건희컬렉션이 봇물 터지듯 미색 향연을 펼치게 된다. ◇전국으로 흩어진 컬렉션…의미 없는 행보가 없다‘국민화가’라 불리는 박수근(1914∼1965)의 고향은 강원 양구다. 21세에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기 전까지 양구에 살았다. 2002년 뒤늦게 작가세계를 기린 군립박수근미술관을 건립하는데. 개관 2주년 기념식에서 뜻밖의 손님을 맞게 된다. 삼성미술관 리움의 홍라희(75) 관장이다. 당시 홍 관장은 미술관 주변 사유지를 매입해 자작나무숲을 만들자 제안했더랬다. 그 인연이 진했던 건지 이건희컬렉션은 박수근미술관으로도 향했다. ‘한일’(閑日·한가한 날·1950s)을 앞세워 ‘농악’(1964), ‘아기 업은 소녀’(1962), ‘마을풍경’(1963) 등 박수근의 유화 4점과 드로잉 14점 등 18점이다. ‘농악’은 1965년 ‘박수근 유작전’에 나온 이후 소장처 확인이 안 됐던 작품으로, ‘아기 업은 소녀’는 희소가치가 높아 “돈이 있어도 못 산다” 했던 작품으로 소문만 무성했더랬다. 특히 ‘한일’은 해외로 반출했던 것을 2003년 뉴욕 크리스티경매에서 낙찰받아 국내로 귀환시킨 ‘아픈 손가락’이다. 박수근미술관은 6일부터 ‘아카이브 특별전’에 이들 작품을 걸 예정이다. 기증품 중 가장 먼저 대중과 만난다. 박수근의 ‘한일’(閑日·한가한 날·1950s, 캔버스에 유채, 33×53㎝). 해외로 반출했던 것을 2003년 뉴욕 크리스티경매에서 낙찰받아 국내로 귀환시킨 작품이다(사진=박수근미술관).또 한 명의 ‘국민화가’인 이중섭(1916∼1956). 불운한 생애 중에서도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다. 가족과 함께 제주에 머물 때다. 1951년 피란 가 11개월간 머물던 서귀포에서 붓이 절로 움직였던 그때 풍경화 한 점을 그리는데. ‘섶섬이 보이는 풍경’(1951)이다. 서귀포 바다 너머 고즈넉이 자리잡은 무인도 ‘섶섬’을 내다본 작품이다. 짧았던 행복을 더듬는 화가의 붓질은 이후 ‘해변의 가족’(1950s), ‘아이들과 끈’(1955) 등으로 이어졌다. 두 아들과 재회하는 꿈을 포기 못한, 가슴저린 추억의 토막일 터. 이들 이중섭 작품이 제주 이중섭미술관에 새 둥지를 틀었다. 기증작 12점에는 아내에게 띄운 엽서화 3점, 담뱃갑에서 뜯어낸 은종이에 그린 은지화 2점, 수채화 1점, 유화 6점이 이름을 올렸다. 이중섭미술관은 9월 ‘기증 특별전’을 통해 이들 모두를 공개한다. 이중섭의 ‘섶섬이 보이는 풍경’(1951, 종이에 유채, 32.5×58㎝). 1951년 피란 가 11개월간 머물던 ‘가족과 행복했던’ 서귀포에서 그린 풍경화다(사진=이중섭미술관).전남 고흥 출신 천경자(1924∼2015), 신안 출신 김환기(1913∼1974), 화순 출신 오지호(1905∼1982), 진도 출신 허백련(1891∼1977). 이들 작가의 작품도 ‘귀향’을 끝냈다. 전남도립미술관으로 향한 기증작 21점 중 이들의 작품은 10점. 이외에도 김은호·유영국·임직순·유강열·박대성의 작품 11점이 속해 있다. 당장 눈에 띄는 건 이제껏 봤던 것과는 다른 화풍의 천경자 그림 두 점이다. 흙에 물감을 섞어 종이에 바르는 기법으로 배 위에 온갖 바다생물을 올린 ‘만선’(1971)과 묻어날 듯한 부드러운 질감의 ‘꽃과 나비’(1973)다. 특유의 서정까지 심어낸 오지호의 풍경화 5점에, 전면점화 이전 숱하게 연구한 십자구도를 화면에 그은 김환기의 ‘무제’(1970)도 따라나섰다. 지난 3월에 개관한 전남도립미술관은 겹경사를 맞았다. “상설관을 만들 계획”이라는 미술관은 이에 앞서 9월 ‘컬렉션 전시’를 예고했다. 김환기의 ‘무제’(1970, 캔버스에 유채, 121.5×86.5㎝). 전면점화 이전 숱하게 연구한 십자구도를 화면에 그은 작품이다. 신안에서 난 김환기의 이 작품은 고흥 출신 천경자, 화순 출신 오지호, 진도 출신 허백련 등 전라남도에 연고지로 둔 작가들의 작품과 함께 전남도립미술관에 새롭게 자리를 잡았다(사진=전남도립미술관).◇고향 찾아간 대가들… 바쁜 컬렉션 신고식 미술계에서 대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이인성(1912∼1950), 이쾌대(1913∼1965) 등 두 천재 작가를 필두로 거물급을 대거 배출했는데. 여기에 경북 울진에서 난 유영국(1916∼2002)을 포함하면 거대한 퍼즐이 완성된다. 이들 작가의 수작들이 대구미술관에 새롭게 자리를 잡았다. ‘노란 옷을 입은 여인상’(1934), ‘인물: 남자 누드’(1930s) 등 이인성 작품이 7점, 1970년대 그린 유영국의 ‘산’ 연작이 5점이다. 여기에 이쾌대의 ‘항구’(1960), 서진달의 ‘누드’(1938) 등을 포함해 김종영·문학진·변종하·서동진 등 8명 작가의 21점이 속해 있다. 대구미술관에서 이 모두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건 12월 ‘특별전’을 통해서다. 이에 앞서 현재 열고 있는 ‘대구근대미술제’ 전에도 일부를 선뵐 계획이란다. 이쾌대의 ‘항구’(1960, 캔버스에 유채, 33.5×44.5㎝). 칠곡 출신인 이쾌대는 이인성과 함께 대구지역 천재화가로 꼽힌다.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작가가 되고 성북회화연구소를 열어 미술계 거목들을 키워내다가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3년 월북했다(사진=대구미술관).김환기 5점, 오지호 5점, 이응노(1904∼1989) 11점, 이중섭 8점, 임직순(1921∼1996) 1점 등 5명 작가의 30점. 지방으로 내려간 이건희컬렉션 중 작품 수로는 광주시립미술관이 가장 많다. 수도 수지만 1950∼1970년대 작품경향을 대표하는 김환기의 유화, 전통 수묵화부터 ‘문자추상’ ‘군상’ 등을 망라한 이응노의 다채로운 한국화 등 연대기에 포함될 만한 작품이 고르게 포진됐다. 광주시립미술관은 이 특별한 기증작을 개관 30주년을 맞는 내년 3월 공개할 예정이다. 오지호의 ‘계곡추경’(1978, 캔버스에 유채, 40.8×53.1㎝). 한국 근현대 화단에서 인상주의 화풍의 대표작가로 손꼽힌다. 미묘한 색감의 변화를 포착한 생기 넘치는 붓 터치로 평생 한국적 인상주의 구현한 오지호의 풍경화 5점이 광주시립미술관에 기증됐다(사진=광주시립미술관).지방 미술관들의 바쁜 행보만큼 서울에서도 숨가쁜 일정이 이어진다. 6월 국립중앙박물관이 스타트를 끊는다. 국보·보물급 위주로 열릴 ‘특별전’에는 그간 헤드라인을 장식했던 이건희컬렉션의 주요 작품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1751·국보 제216호), 단원 김홍도의 ‘추성부도’(1805·보물 제1393호), ‘고려 천수관음보살도’(보물 제2015호) 등 문화재가 전부 나온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이관작업은 계속되고 있지만 “전시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관계자는 귀띔했다. “6월에 내놓을 국가지정문화재 60건에 대한 수령은 끝낸 상태”라고 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8월부터다. ‘명품전’이란 타이틀 아래 한국 근현대작품의 ‘핵심작’을 먼저 서울관에 건다.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1950s),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1954), 이중섭의 ‘황소’(1950s) 등이다. 이후 9월 과천관, 내년 청주관에선 서양화의 대표작을 공개할 계획이다. 클로드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1919~1920), 살바도르 달리의 ‘켄타우로스의 가족’(1940),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책 읽는 여인’(1890s) 등이 오랜만에 조명 아래 빛날 날을 기다린다.
2021.05.03 I 오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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