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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내가 곧 셀럽이다"…예술보다 빛난 '흥행'
  • [이주헌의 혁신@미술]<19> "내가 곧 셀럽이다"…예술보다 빛난 '흥행'
  • 마흔 살의 야심만만한 ‘상업미술가’ 앤디 워홀. 1968년 2월 스웨덴 스톡홀름 현대미술관에서 연 회고전 개막에 앞서 자신의 작품 ‘브릴로 상자’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브릴로 상자’ 역시 태생은 슈퍼마켓이다. 쓰고 버린 상품상자를 가져다가 목수에게 같은 크기로 수백 개를 만들어달라고 주문하고, 실크스크린으로 상표를 제작해 상자의 겉면에 붙여 ‘대량생산’했다.미술은 사람을 움직였습니다. 밥으로만 채울 수 없는 풍요와 평화를 안겨줬으니까요. 그림의 힘이고 조각의 에너지입니다. 하지만 미술의 역할이 이뿐이라 한다면 미술을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문명을 이끌고, 의식을 뒤집고, 결정적으로 돈의 흐름을 주도했던, 그것을 못 본 겁니다. 미술의 사조와 양식이 탄생할 때마다 세계경제에는 ‘변화의 그림’이 걸렸습니다. 바로 ‘혁신’을 주도했던 겁니다.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이주헌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미술로 이룬 혁신’의 현장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상으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이주헌 미술평론가] 팝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1928∼1987)은, 순수미술 쪽에서 ‘극혐’으로 치던 상업주의를 순수미술의 중심에 뿌리내린 예술가다. 현대미술이 온갖 경계를 타파하며 그 영역을 확장해왔지만, 작가 스스로 상업주의와의 경계를 허물고 그것을 새로운 예술이라고 부르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워홀은 전례가 없는 파괴자이자 혁신가였다. 전통적으로 사람들은 미술가들이 돈에는 큰 관심이 없는, ‘꿈을 먹고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미술가들 자신도 예술을 하며 돈을 앞세우는 것을 수치스러워했다. 하지만 워홀은 달랐다. 그는 앞장서서 돈을 추구했고, 돈이 예술에 의미를 더해준다고 믿었다. 돈과 관련해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난 평생 싸구려 스와치 시계를 차고 다녔지만 돈으로 다 해결할 수 있을 때 가장 행복했다. 돈은 내게 순간을 결정하는 기회일 뿐 아니라 감정의 원천이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게 뭘까’라는 질문이 돈을 그리게 했다. 예술도 근본적으로 돈을 통해 아름다움을 획득한다.”그런 그였기에 워홀은 자신을 뼛속까지 ‘상업미술가’라고 생각했다. 오로지 순수만을 부르짖는 예술가들은 그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반대로 그에게 적대적인 예술가들은 그를 예술을 이용해 오로지 돈과 잇속, 인기만 챙기는 ‘사악한 인간’으로 여겼다. 예술의 이름으로 미술을 타락시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워홀이 1968년 6월 3일 밸러리 솔라나스라는 여성의 총에 맞아 죽을 뻔했을 때 동시대의 거장 프랭크 스텔라조차 “로버트 케네디는 죽고 워홀이 살아나다니!”라고 한탄할 정도였다(로버트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워홀 사건 이틀 뒤인 6월 5일 저격당해 다음 날 사망했다). △워홀, 자신을 뼛속까지 ‘상업미술가’라 여겨지금도 워홀의 예술을 비판적으로 보는 미술인이 없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적극적으로 돈을 추구한 이답게 그의 작품은 갈수록 고가에 팔리고 있으며, 그가 간판 역할을 한 팝아트는 현대미술의 주류 가운데 하나로 확고히 뿌리를 내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행한 ‘성공방정식’을 따라 철저히 상업주의적인 방식으로 화단에서 성공한 미술가들 또한 급격히 늘어났다. 워홀은 1928년 8월 6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21세에 뉴욕으로 가 일러스트레이터로 성공한 그는 1950년대 ‘소비자혁명’의 힘을 보면서 자신과 같이 상업미술을 전공한 사람도 얼마든지 순수미술 쪽에서 큰 활약을 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얻었다. 상업의 영역에서 순수의 영역으로 넘어온 사람답게 그는 자신의 작품을 마케팅하고 홍보하는 것뿐 아니라 창작활동까지도 철저히 비즈니스적으로 접근했다. 워홀의 발상이 놀라운 것은, 기본적으로 비즈니스 자체가 예술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는 “비즈니스를 잘하는 것이 최상의 예술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실크스크린과 채색을 병행해 완성한 앤디 워홀의 ‘자화상’(1986)이다. 워홀의 다른 ‘자화상’들과 달리 마치 네거필름처럼 제작한 것이 특징이다. 30.4×25.5㎝ 규모의 작품은 2018년 국내 한 미술품 경매에서 10억원에 팔렸다(사진=이데일리DB).워홀은 자신의 ‘미술 비즈니스’를 일종의 연예산업, 곧 흥행업처럼 생각했다. 제아무리 상업적 센스가 있다 하더라도 미술을 흥행업이라고 생각한 미술가는 이제껏 없었다. 흥행업은 무엇보다 대중을 상대로 하는 비즈니스다. 반면 미술품 거래는 소수의 부유한 엘리트를 상대로 하는 비즈니스다. 전통적으로 비평가, 큐레이터, 아트딜러 등으로 이뤄진 폐쇄적인 이너서클에서 그 명성과 가치가 결정된다. 그러나 워홀은 자신의 작품을 ‘엘리트시장’이 아니라 ‘대중시장’을 겨냥한 상품처럼 만들었고, 그 마케팅 방식을 활용해 시장가치를 높이고, 나아가서는 그렇게 해서 얻은 상징자본으로 이너서클에도 영향을 줘 궁극적으로 미술사적 가치마저 높게 평가되도록 만들었다. 총체적인 흥행의 성공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그는 흥행의 귀재였다. “박스 오피스가 엄청나다는 건 ‘대흥행’을 의미한다. 당신은 1마일 떨어진 곳에서도 그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그 단어를 더 많이 소리 내어 말하면 냄새는 더 짙어지고, 냄새가 짙어질수록 더 크게 흥행한다.”△“앤디 워홀의 가장 위대한 작품은 앤디 워홀 자신”흥행사로서 그는 자신의 작품 소재를 최대한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거나 대중적인 소재로 한정했다. 마릴린 먼로나 엘리자베스 테일러 같은 ‘셀럽’, 코카콜라나 캠벨수프 같은 인기 소비상품, 미디어에 오르내린 각종 사건이나 사고의 이미지들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복잡하고 관념적인 것, 고급문화와 관련한 것은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물론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심판’ 같은 순수미술의 걸작을 활용한 작품도 있지만, 사실 이들 걸작도 워낙 유명해 이미 대중들에게는 ‘셀럽’ 같은 것이었다. 작품 수용의 측면에서는 미술관이나 갤러리 같은 전시장 못지않게 매스미디어를 통한 소통을 중시했다. 미디어가 자신의 작품을 자주, 크게 다루도록 하기 위해 그는 스스로가 셀럽이 돼야 한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깨달았다. 그러니까 작품만 부각하고 예술가는 조명 뒤로 숨는 게 낫다는 전통적인 사고를 버리고, 작품 자체보다 자기를 알리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썼다. 그래서 젊은 날부터 ‘앤디 슈트’라고 불리는 튀는 옷을 입고 가발까지 써서 누구라도 한 번 보면 결코 잊지 못할 독특한 페르소나를 창조했다. 자연히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미디어의 주목을 받은 그는 결국 “앤디 워홀의 가장 위대한 작품은 앤디 워홀 자신”이라는 말까지 듣게 된다. 종내는 그 스스로가 그의 예술의 표본이자 척도가 돼버렸다. 국내 한 갤러리가 연 ‘팝아트’ 전에 걸린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 연작. 워홀이 캠벨수프·코카콜라 등 인기 소비상품과 함께 제작한 ‘셀럽’ 시리즈 중 하나다. 먼로를 비롯해 엘리자베스 테일러, 엘비스 프레슬리, 마오쩌둥 등은 워홀이 즐겨찾은 ‘단골 유명인’이었다(사진=이데일리DB).워홀은 ‘비즈니스맨’답게 작품제작 과정 또한 매우 효율적으로 관리함으로써 생산성을 높였다. 그는 전통적인 회화 제작 방식을 버렸다. 주로 실크스크린 판화에 기초한 형식으로 작품을 제작함으로써 기계적인 방식이 주가 되게 했다. 이렇게 하니 작품을 빠른 시간에 다량으로 생산할 수 있었고, (많은 부분을 자신이 직접 하지 않고 조수들에게 맡겼어도) 작품의 질 또한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자신의 작업실을 워홀은 ‘팩토리’, 곧 공장이라고 불렀다. △1960년대 비틀스와 함께 팝문화 이끈 쌍두마차 평가이처럼 미술하고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철저히 상업적인 마인드로 미술에 접근한 워홀은 바로 그 전략으로 철옹성 같던 순수예술의 높은 벽을 허물어뜨렸고, 결과적으로 대중이 미술에 보다 쉽고 편하게 접근하게 함으로써 ‘미술의 영토’를 확장하는 공을 세웠다. 경직돼 있던 미술에 대한 관념이 그로 인해 ‘경천동지’할 정도로 바뀌어서 사람들은 이전에 비해 훨씬 개방적이고 유연하며 자유로운 시각으로 예술을 즐길 수 있게 됐다. 미술을 대중의 품에 안긴 그의 이런 성취를 기려 ‘라이프’지 1969년 송년호는 커버스토리 ‘1960년대-격동과 변화의 10년’에서 워홀을 비틀스와 함께 당대의 팝문화를 이끈 쌍두마차로 평가했다. 순수예술계(?)에 속한 인물이 당시 세계 최고 팝스타와 동급의 스타로 인정받은 것이다. 비록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지금도 강하게 살아 있어, 대중을 대상으로 그가 만든 이미지에 대한 인지도 조사를 해 보면 헬로키티 이미지와 거의 동급으로 나온다. 워홀이 제작한 이미지를 담은 의상, 팬시상품, 가구 등이 지금도 계속 출시되는 이유다. 물론 고가의 작품을 거래하는 미술시장에서도 그는 여전히 환영을 받는다. 현재 최고가를 기록하고 있는 작품은 2008년 거래된 ‘여덟 명의 엘비스’로, 인플레이션율을 감안해 계산하더라도 2019년 미국 달러화 기준으로 1억 1870만달러(약 1394억원)에 이른다. ※ 캠벨수프 통조림(Campbell’s Soup Cans) 1962년 7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페러스갤러리에 낯선 장면이 펼쳐졌다. 뜬금없이 통조림 32개가 등장한 것이다. 동네 슈퍼마켓에 진열한 상품과 다를 게 없었다. 각기 다른 32가지 맛이 담긴 수프 통조림 세트. 물론 슈퍼마켓의 그것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실물이 아니라 인쇄물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식료품 진열대를 만들고 진짜 수프 통조림인 양 하나하나 선반 위에 올려 전시했다. 이것이 바로 이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통조림이 된, 앤디 워홀의 ‘캠벨수프 통조림’이다. 워홀의 새로운 시도가 늘 그랬듯, 세간의 조롱을 있는 대로 다 받으며 한 개당 100달러씩 판매했던 그 ‘작품’(당시 진짜 캠벨수프 통조림은 캔당 29센트였다)은 전시에서 32개 중 6개가 예약판매가 됐다. 하지만 작품의 진가를 알아보는 이는 늘 따로 있는 법. 갤러리 디렉터이던 어빙 블럼이 6개에 대한 예약판매를 일일이 취소시키고 32개 모두를 1000달러(약 113만원)에 사들인다. 그 뒷이야기는 알려진 그대로다. 33년 뒤인 1995년 ‘캠벨수프 통조림’은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1450만달러(약 164억 4000만원)로 몸값을 높여 다시 팔렸다. 워홀을 더 유명하게 만들고, 워홀에 의해 더 유명해진 캠벨수프는 이후 ‘캠벨수프 통조림’ 100개 연작, 찢어진 라벨과 찌그러진 통조림 등으로 변주를 이어가며 워홀이 주도한 미국 팝아트의 핵이 됐다.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이 전시 중인 앤디 워홀의 ‘캠벨수프 통조림’. 워홀의 대표작이자 대중의 소비문화를 현대미술 영역으로 끌어들인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뉴욕현대미술관은 1962년 32점 연작으로 제작한 작품을 1995년부터 소장해왔다.△이주헌 미술평론가는… 미술로 삶을 보고 세상을 읽는다. 좀 더 많은 이들이 미술을 통해 일상의 풍요를 누리도록 글 쓰고 강연하는 일이다. 소명으로 여긴다고 했다. 발단이 있다. 홍익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돌연 일간지 기자가 되면서다. 그림에 관심을 잃어서가 아니라 그림을 막은 생계 때문이었다. 낮에 일하고 밤에 그리자 했다. 하지만 ‘투잡’은 쉽지 않았다. 미술담당 기자생활에서 얻은 필력과 생각을 가지고 현장으로 나왔다. 미술을 대중과 제대로 연결하는 미술평론가의 ‘진정한’ 역할, 그것을 해보자 했다. 그렇게 가나아트 편집장을 하고, 학고재 관장을 오래 한 뒤 서울미술관 초대관장까지 지냈다. 지금은 양현재단 이사로 있으면서 온전히 글과 강연에만 집중하고 있다. 지은 책이 수십 권이다. 굳이 대표작을 꼽자면 ‘신화의 미술관’(2020), ‘리더의 명화수업’(2018), ‘역사의 미술관’(2011), ‘지식의 미술관’(2009), ‘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 1·2’(2005) 등이 있다.
2020.10.30 I 오현주 기자
文대통령, 주말 책 추천…“‘옛 그림으로 본 서울’, 모처럼 좋은책”
  • 文대통령, 주말 책 추천…“‘옛 그림으로 본 서울’, 모처럼 좋은책”
  • [이데일리 김정현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24일 “모처럼 좋은 책을 한 권 읽었다”면서 최열 선생이 쓴 ‘옛 그림으로 본 서울’을 추천했다.문재인 대통령. (사진=연합뉴스)문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평생 한국 미술사에 매달려온 미술사학자 최열 선생의 ‘옛 그림으로 본 서울’”을 읽었다고 소개하고 “오늘날의 모습과 비교해보느라면 읽고 보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보는 재미가 있다”고 평가했다.문 대통령은 “(책의) 부제가 ‘서울을 그린 거의 모든 그림’인데, 저자가 알고 있는 옛 서울 그림은 거의 다 담겼다는 자부심이 배어 있다”며 “실제로 125점의 조선시대 그림이 최고의 해설과 함께 수록되어 있으니, 저자로서도, 출판사로서도 역작이라고 할 만 하다”고 말했다. “다만 책값이 보통 책값 두 배로 비싼 것이 좀 부담”이라고 덧붙였다.문 대통령은 “지금의 서울은 한양 또는 한성이라고 부르던 옛 서울과 전혀 모습이 다르다. 강·하천·산·계곡이 모두 달라졌고, 사람이 손대지 못하는 부분만 옛 모습이 남았을 뿐”이라며 “눈부신 발전과 개발이 있었지만, 그로 인해 잃어버린 것들도 많다”고 밝혔다.그러면서 “우리가 좀 더 일찍 자연과 환경의 소중함을 알았더라면 라는 탄식을 하게 되지만, 이제는 앞날의 교훈으로 삼을 뿐”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서울의 옛 모습은 그림으로 밖에 볼 수 없다. 다행히 조선 중기부터 발전한 실경 산수 또는 진경 산수화에 단편 단편 옛 모습이 남아있다”면서 “저자는 위치가 확인되는 ‘거의 모든’ 그림을 화가와 그림의 내력까지 충실한 해석과 함께 보여준다”고 소개했다.끝으로 “조선시대 서울을 그린 진경 산수화와 화가에 대한 사전과 같은 자료로서도 가치가 크다고 느낀다”고 말을 맺었다.
2020.10.24 I 김정현 기자
<18> 낡은 형식에 담아낸 에로티시즘, 자유를 얻다
  • [이주헌의 혁신@미술]<18> 낡은 형식에 담아낸 에로티시즘, 자유를 얻다
  • 클림트의 ‘물뱀 Ⅱ’(1907). 비슷한 시기에 그린 ‘물뱀Ⅰ’의 후속작이다. 수면 아래서 유영하는 인어처럼 물의 흐름에 흔들리는 에로틱한 여성의 신체를 보여주고 있다. 2019년 12월 현재 ‘세계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그림’ 6위( 2억 170만달러·약 2346억원)를 기록하고 있다. 개인 소장.미술은 사람을 움직였습니다. 밥으로만 채울 수 없는 풍요와 평화를 안겨줬으니까요. 그림의 힘이고 조각의 에너지입니다. 하지만 미술의 역할이 이뿐이라 한다면 미술을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문명을 이끌고, 의식을 뒤집고, 결정적으로 돈의 흐름을 주도했던, 그것을 못 본 겁니다. 미술의 사조와 양식이 탄생할 때마다 세계경제에는 ‘변화의 그림’이 걸렸습니다. 바로 ‘혁신’을 주도했던 겁니다.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이주헌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미술로 이룬 혁신’의 현장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상으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이주헌 미술평론가] 미술 분야에서는‘ 혁신가’ 하면, 대부분 새로운 양식이나 사조의 주창자를 떠올리게 된다. 기존 양식과 사조를 타파하고 새로운 조형의 지평을 연 이들이야말로 대표적인 미술 분야의 혁신가가 아닐 수 없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는 이런 혁신가 축에는 들기 어려운 미술가다. 그는 새로운 양식을 개척한 사람도 아니고 새로운 사조를 창시한 사람도 아니다. 보수적인 아카데미시즘에 기초해 대중적이고 관능적인 감성을 추구한 화가였다. 그래서 보기에 따라서는 오히려 퇴영적인 화가로 여길 수도 있는 존재였다. 그런 클림트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미술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2009년 영국의 ‘더 타임스’가 세계 미술애호가들을 대상으로 인터넷 투표를 했을 때 클림트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미술가’ 3위로 뽑혔다. 누구나 미술 분야의 ‘최고의 파괴자’라고 꼽는 피카소와 세잔이 1, 2위를 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작품(2019년 미국 달러화 기준으로 인플레이션율을 고려해 소비자물가지수에 의해 조정한 가격) 순위를 보면, 그의 ‘물뱀 Ⅱ’(1907)는 2억 170만달러(약 2346억원)로 6위에 올랐다.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던 작품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Ⅰ’(1907)은 1억 7120만달러(약 1992억원)로 14위에 랭크돼 있다. 여러 미술 관련 매체나 기관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100점’을 선정할 때 클림트의 ‘키스’(1907∼1908)는 대부분 10위권에 든다. 전위적인 미술작품이 쏟아져 나오던 시기에 이른바 ‘낡은 형식’으로 그림을 그렸던 화가의 예술이 어떻게 이토록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일까. △중요한 건 파괴의 크기 아닌 ‘의식·발상의 전환’ 이는 클림트가 그 낡은 형식으로 그만의 독특한 ‘보수혁신’을 이뤘기 때문이다. 이는 혁신이 꼭 기성체제의 전면적인 파괴나 해체가 있어야만 가능한 게 아니라, 이를 유지하면서도 가능한 것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의식 혹은 발상의 전환이지 외적으로 보이는 파괴의 크기가 아닌 것이다. 혁신의 진정한 힘은 무엇보다 나만의 고유성과 주체성을 확보하는 데서 나온다. ‘오리지널리티’가 있어야만 자신만의 시각으로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상황과 조건에 따라 큰 파괴의 양상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부분적인 변화로 나타날 수도 있다. 클림트의 시대로 돌아가 보자. 그가 10대였을 때 인상파 미술이 나왔다. 이어 신인상파·후기인상파가 나왔고, 그가 40대에 이르자 야수파·표현주의·입체파가 나왔다. 그가 50대가 됐을 때는 추상미술이 생겨났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서양미술의 주된 흐름은 이처럼 화면 자체가 전면적으로 해체되는 ‘추상화’(抽象化)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구상미술은 구태의연하고 열등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클림트가 선호한 그림은 여전히 구상적인, 그에 따라 상당히 보수적인 형식의 미술이었다. 물론 그의 미술이 당시 새로운 장식미술 사조인 아르누보와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그 계열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형식의 그림이 그의 그림이었다. 이처럼 클림트의 예술은 외형적으로는 보수성을 띠었으나, 그의 내면에는 매우 진취적이고도 개방적인 측면이 있었다. 바로 에로티시즘의 자유로운 추구였다. 클림트는 당대의 그 어떤 예술가보다 에로티시즘을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그의 예술은 늘 관능으로 충만했다. 서양미술은 예로부터 누드미술을 발달시키는 등 관능성을 중시한 까닭에 클림트의 에로티시즘 추구 자체는 그리 새로울 것도, 혁신적일 것도 없었다. 그러나 클림트의 에로티시즘은 그때까지 전례가 없을 정도로 강렬하고 노골적인 것이었다. 당시의 시각에서는 에로티시즘이 그림의 양념 역할을 해 ‘감칠맛’을 내는 정도라면 몰라도, 그 자체가 예술 표현의 궁극적인 목표가 돼서는 곤란했다. 그렇게 된다면 이는 예술 차원을 넘어 가부장문화에 기초한 기존 사회질서에 대한 도전이 될 수 있었다. 클림트의 ‘금붕어’(1902). 하얀 엉덩이를 드러낸 여인을 등장시켜 당시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향한 ‘입장’을 전달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여체의 관능미를 내보인 그 시작으로 이후 ‘물뱀’ 연작이 나왔다. 개인 소장.자연히 열심히 활동할수록 클림트에게는 많은 비난이 쏟아졌다. 무엇보다 부도덕하다는 비판이 줄을 이었다. 다른 예술가들은 조형적인 문제로 비난을 받는데, 그는 주로 도덕적인 문제로 비난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의 예술이 단순한 외설이었다면 그가 오늘날 이렇게 대단한 명성을 누리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지나치게 관능적이고 부도덕하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그의 예술은 도덕을 핑계로 자신의 미학을 비판하는 사회와 시대가 오히려 이중적이고 위선적임을 역설적으로 폭로했다. 그런 점에서 그가 관능적인 이미지를 줄기차게 그린 것은, 억압적이고 고루한 근대 유럽의 가부장적 질서를 무너뜨리고 욕망과 표현의 자유를 쟁취하고자 했던 당대의 시대정신을 선도한 것이었다. △“관능이 없었다면 당신들이 이 세상에 존재나 했겠느냐” 당시 그의 예술과 사회가 충돌했던 대표적인 사례가 ‘학부회화’ 연작이다. 안타깝게도 1945년 화재로 망실한 이 연작은 ‘철학’ ‘법학’ ‘의학’ 3부작으로 구성돼 있는데, 오스트리아의 교육부가 빈 대학의 대강당에 설치할 목적으로 클림트에게 의뢰한 것이었다. 교육부는 이 ‘학부회화’를, ‘어둠을 극복한 빛의 상징들로서 인간 이성의 위대함과 그것이 사회의 발전에 끼친 긍정적인 영향’에 입각해 표현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런데 1907년 완성을 코앞에 둔 ‘철학’이 전시를 통해 처음 공개되자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이성의 승리는커녕 관능적인 누드의 이미지들이 욕망과 무질서의 곤죽을 빚어낸 듯 보였기 때문이다. 빈 대학 교수들이 들고일어나 작품 설치 반대 청원서를 교육부에 제출했고, 사회지도층 인사들도 다투어 비난 여론에 가세했다. 분노한 클림트는 작품 제작을 위해 받았던 선금을 돌려주고 다시는 이런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클림트가 빈 대학으로부터 대강당 천장화 작업을 의뢰받아 제작한 ‘학부회화’(철학·의학·법학) 중 ‘의학’(1907). 삶과 죽음이 얽힌 에로티시즘을 테마로, 발표되자마자 ‘퇴폐미학’으로 찍히며 클림트를 신랄한 비난의 중심에 세운 작품이다. 1945년 나치 군대가 퇴각하며 저지른 방화에 모두 불타고 흑백사진으로만 남아 있다.‘학부회화’ 스캔들 이전부터 비판에 시달린 그가 이 무렵 항의의 제스처로 그린 유명한 그림이 하나 있다. ‘금붕어’(1902)란 작품이다. 그림을 보면, 깊은 심연에서 벌거벗은 세 여인이 부유하고 있다. 그들 중 가장 인상적인 여인은 살짝 뒤를 돌아보며 빨간 머리를 휘날리는 맨 아래쪽의 여인이다. ‘무닝’(mooning·비난이나 조롱의 목적으로 맨 엉덩이를 드러내 보이는 행동)을 하듯 흰 엉덩이를 들이밀며 강한 도발의 의지를 내보인다. 이 그림을 통해 클림트는 자신을 비난하는 사회지도층 인사들에게 되묻는다. “관능이 없었다면 당신들이 이 세상에 존재나 했겠느냐”고, “당신들의 빛나는 지성도 다 관능의 산물이다”라고. △대중의 의식 혁신…시각예술 에로티시즘 표현 제한 없어져 이처럼 혁신을 이루는 데는 꼭 기존 체제와 형식의 전면적인 파괴가 뒤따라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형식이나 골간은 유지하면서도 그 내용 혹은 정신을 새로이 함으로써 얼마든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이때 형식은 그 내용의 지배를 받음으로써 외형상으로는 이전과 유사해 보여도 나름대로 질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그 의식과 발상의 전환에 따라 형식이 새롭게 해석되고 새로운 개념이나 의미 혹은 가치를 덧입게 되는 것이다. 정치 쪽에서는 이런 종류의 혁신을 곧잘 볼 수 있다. 노사 대립이 격화해 사회 안정이 우려되자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1815∼1898)가 사회보험제도를 도입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의료보험·산재보험·연금보험 등 사회보험제도의 도입은 체제전복적인 급진 노동운동을 약화시키고 자본주의 체제를 존속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었다. 클림트 이후 시각예술에서 에로티시즘의 표현은 이제 거의 아무 제한 없이 가능해졌다. 클림트는 노골적이고도 진지한 에로티시즘의 추구를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의 욕망을 보다 순수한 눈으로 바라보게 했다. 이로써 알 수 있듯 조형의 혁신에 그가 기여한 부분은 비록 적을지라도 대중의 의식 혁신에 그가 기여한 부분은 그 어떤 예술가보다 컸다. ※ 클림트의 에로티시즘 ‘역사상 여성의 세계를 가장 잘 표현한 화가’를 묻는다면 단연 구스타프 클림트가 꼽힌다. 클림트는 여성을 이분법으로 구분했는데 ‘성녀’ 아니면 ‘요부’다. 이를 그의 사생활과 연결하면 ‘정신 따로’ ‘육체 따로’가 된다. 성녀든 요부든 클림트의 여성들은 그의 작품을 지배하다시피 했다. 우선 클림트의 요구에 관능적이고 외설적인 포즈를 거침없이 취해준 직업모델들이 있었다. 클림트가 사망한 뒤 사생아를 안은 여인들의 ‘생계부양비 청구 소송’이 14건이나 됐다는 건 그림 속 적나라한 묘사가 단순한 누드모델에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는 걸 말해준다. 그들 중 대표격으론 미치 짐머만이 자주 오르내린다. 클림트가 41세에 그린 ‘희망Ⅰ’(1903)에 등장한 젊은 임산부가 바로 짐머만이다. 하지만 평생 결혼을 하지 않은 클림트에게 ‘공식적인 미망인’은 에밀리 플뢰게다. 수많은 여인과 살을 맞댔지만 유일하게 관계를 지속한 단 한 사람이었던 거다. 둘의 육체적 관계는 잠깐이었고 평생 정신적 동반자로 교감을 나눴다고 전해진다. 클림트는 플뢰게를 네 번 그렸다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 ‘에밀리 플뢰게의 초상’(1902)이다. 이분법적 구분에서 성녀 쪽에 세울 또 한 여인으론 아델리 블로흐바우어가 있다. ‘아델리 블로흐바우어의 초상Ⅰ’(1907) 등 여러 작품에 등장하는 그녀는 엄청난 재벌집 안주인으로 클림트를 상류층과 연결시켜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클림트가 가장 선호한 모델이자 후원자로 평생 염문설이 끊이지 않기도 했다. 결국 클림트의 에로티시즘을 완성한 일등공신이라면 그의 곁에 짧고 길게 머물렀던 모든 여성을 내세워야 할 듯하다. △이주헌 미술평론가는… 미술로 삶을 보고 세상을 읽는다. 좀 더 많은 이들이 미술을 통해 일상의 풍요를 누리도록 글 쓰고 강연하는 일이다. 소명으로 여긴다고 했다. 발단이 있다. 홍익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돌연 일간지 기자가 되면서다. 그림에 관심을 잃어서가 아니라 그림을 막은 생계 때문이었다. 낮에 일하고 밤에 그리자 했다. 하지만 ‘투잡’은 쉽지 않았다. 미술담당 기자생활에서 얻은 필력과 생각을 가지고 현장으로 나왔다. 미술을 대중과 제대로 연결하는 미술평론가의 ‘진정한’ 역할, 그것을 해보자 했다. 그렇게 가나아트 편집장을 하고, 학고재 관장을 오래 한 뒤 서울미술관 초대관장까지 지냈다. 지금은 양현재단 이사로 있으면서 온전히 글과 강연에만 집중하고 있다. 지은 책이 수십 권이다. 굳이 대표작을 꼽자면 ‘신화의 미술관’(2020), ‘리더의 명화수업’(2018), ‘역사의 미술관’(2011), ‘지식의 미술관’(2009), ‘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 1·2’(2005) 등이 있다.
2020.10.23 I 오현주 기자
<17> "막장 연극에 초대합니다"…대중 열광시킨 블루오션
  • [이주헌의 혁신@미술]<17> "막장 연극에 초대합니다"…대중 열광시킨 블루오션
  • 호가스의 유화 연작 ‘유행에 따른 결혼’ 중 ‘결혼계약’(1743년경). 당시 영국 상류사회에 팽배해 있던 부도덕한 결혼 세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이 연작은 부와 명예의 맞교환을 전제로 맺은 정략결혼이 희비극적 결말로 가는 단계를 하나씩 꺼내 보여준다. 총 여섯 점의 연작 중 첫 번째인 ‘결혼계약’은 공허한 사치와 방종으로 치닫던 부부관계가 결국 파국을 맞는 막장연극의 서막에 해당한다. 영국 런던 내셔널갤러리 소장.미술은 사람을 움직였습니다. 밥으로만 채울 수 없는 풍요와 평화를 안겨줬으니까요. 그림의 힘이고 조각의 에너지입니다. 하지만 미술의 역할이 이뿐이라 한다면 미술을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문명을 이끌고, 의식을 뒤집고, 결정적으로 돈의 흐름을 주도했던, 그것을 못 본 겁니다. 미술의 사조와 양식이 탄생할 때마다 세계경제에는 ‘변화의 그림’이 걸렸습니다. 바로 ‘혁신’을 주도했던 겁니다.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이주헌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미술로 이룬 혁신’의 현장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상으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이주헌 미술평론가] 코로나19로 인류의 생명과 건강이 크게 위협받고 경제도 많이 위축되고 있지만 이 어려운 환경도 하기에 따라서는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바로 그런 자신감, 그런 희망이 요구되는 시대다. 그런 측면에서 18세기 영국 화가 윌리엄 호가스(1697∼1764)는 되새겨볼 만한 가치가 있는 예술가다. 호가스는 당시 영국 화단의 구조적 모순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도저히 성취할 수 없자 그 구조에 매달리기보다 틀 밖으로 뛰쳐나가 성공한 화가다. 그럼으로써 제약과 한계를 기회로 바꿨다. 그렇게 영국미술사에서 혁신의 아이콘이 됐다. 호가스가 살던 당시 영국의 귀족과 미술애호가들은 자국 출신의 미술가들을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탈리아와 프랑스, 네덜란드 등 전통적인 ‘미술 강국’의 거장들에게 더 관심이 많았다. 이런 배경에는 오래전부터 영국 왕실에서 홀바인(1465?∼1524)이나 반 다이크(1599∼1641)처럼 대륙의 실력 있는 화가들을 궁정화가로 초빙해온 역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런 답답한 현실 앞에서 호가스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함으로써 답을 찾았다. 귀족과 애호가들의 눈에 들기가 쉽지 않다면, 아예 이 ‘레드오션’으로부터 벗어나자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고는 고급 예술과는 거리가 먼 서민들을 향해 나아갔다. 이른바 ‘블루오션’을 찾은 것이다. 다른 많은 화가들이 어떻게 해서든 제도 안에서 성공하려고 눈물겨운 투쟁을 벌일 때 그는 그렇게 과감하게 제도에서 벗어났다. △대중, 조형적 성취보다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에 더 관심호가스는 꼼꼼하게 대중을 관찰했다. 귀족이나 미술애호가들과 달리 대중은 조형적 성취나 세련된 스타일 같은 것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미술은 시각예술이지만, 대중은 미술작품 앞에서 늘 이야기부터 찾았다. 얼마나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지닌 작품인지 그것에 더 관심이 많았다. 이를 깨달은 호가스는 스스로 ‘시각예술가’이기 이전에 ‘스토리텔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미술작품의 승부를 조형이 아니라 스토리에서 찾은 것이다. 호가스는 그렇게 콘텐츠의 중요성에 눈을 떴다. 당시 영국에서는 오페라 형식을 빌린 서민적인 음악극 ‘발라드 오페라’가 인기를 끌고 있었다. 또 영웅이 아니라 시민을 주인공으로 한 가정비극이 연극무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늘 억압과 모순에 치여 사는 대중은 그렇게 권력자나 기득권자, 속물들을 비판하고 인간의 어리석은 행위를 풍자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에 착안한 호가스는 자신의 콘텐츠도 그와 궤를 같이하는 방향으로 잡았다. 그렇게 해서 ‘근대의 도덕 주제’라는 타이틀 아래 마치 하나의 도덕 드라마를 보는 듯한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스토리를 중시한 호가스는 자신의 그림이 일종의 연극이란 생각을 갖게 됐다. 그래서 그 스스로 ‘극작가’와 ‘연출가’가 돼 스토리를 전개하고 이미지를 구성했다. 아무래도 단품으로는 스토리를 다 담기가 어려워 연작을 많이 제작했다. 당시로써는 매우 혁신적인 그의 그림은 대중을 열광하게 만들었고, 결국 그는 당대 최고의 예술가 자리에 올랐다. 이렇게 스토리로 승부를 봐 정상에 오른 까닭에 그는 화가이면서도 “셰익스피어 다음가는 희극작가”란 찬사를 듣게 됐다. △극작가·연출가 자처한 호가스…‘유행에 따른 결혼’ 등 연극 같은 연작 제작여기서 그의 대표작 ‘유행에 따른 결혼’ 시리즈를 살펴보자. 이 작품은 모두 여섯 점으로 이뤄진 연작이다. 첫 번째 그림 ‘결혼계약’(1743년경)은 정략결혼을 위한 흥정이 주제다. 무대는 어느 백작의 저택이다. 저택 안에서 백작과 상인이 자식들의 결혼 조건을 꼼꼼히 따지고 있다. 맨 오른쪽에 그린 백작은 지금 발을 다쳤음에도 애써 우아한 포즈를 취하며 자신의 가계가 얼마나 대단한지 상인에게 설명하고 있다. 가계는 대단한지 몰라도 그는 지금 돈이 매우 아쉽다. 허영에 들떠 살다 보니 씀씀이가 헤퍼졌다. 그림 맨 왼쪽에 그린 백작의 아들도 허영에 들떠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는 값비싼 프랑스식 패션으로 잔뜩 멋을 부렸고 거울을 보느라 다른 데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 이렇듯 형편은 아랑곳하지 않고 낭비하며 사는 영국 귀족들, 그로 인해 오늘 돈에 ‘아들(가문)까지 파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백작의 아들과 나란히 앉은 처녀는 상인의 딸이다. 그녀는 신랑이 될 사람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곁에 있는 변호사와 시시덕거린다. 바로 이 장면에서 우리는 이 정략결혼이 가져올 미래의 비극을 예견할 수 있다. 호가스가 그린 나머지 다섯 점의 그림은 이후의 상황을 특유의 드라마식 전개로 보여준다. 신부의 지참금으로 방탕한 삶을 살던 신랑은 바람을 피우다가 성병에 걸리고, 무료해진 신부는 앞선 그림에서 시시덕거리던 변호사와 연애에 빠진다. 이를 알고 두 사람을 덮친 신랑은 결국 변호사의 칼에 찔려 죽고, 변호사는 체포돼 교수형에 처해진다. 남편도 잃고 애인도 잃은 신부는 그 막막한 현실로부터 출구를 찾지 못하고 끝내 자살하고 만다. 당시 영국의 귀족이나 부유층은 이렇듯 정략결혼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화가는 이 그림을 통해 그들의 ‘일그러진 욕망’을 호되게 비판함으로써 대중으로 하여금 쾌감을 맛보게 했다. 호가스의 유화 연작 ‘유행에 따른 결혼’ 연작’ 중 ‘러브호텔’(1745). 호가스의 회화작품이 인기를 끌자 대중적 보급을 위해 제작한 판화작품이다. 신부의 불륜 현장을 급습한 신랑이 칼에 찔려 죽어가고 있고, 살인자가 된 변호사는 오른쪽 창으로 달아나고 있다. 회화작품에서는 인물들의 동선이 반대 방향으로 진행한다.대중의 관심을 사고 크게 인기를 끌었다 해도 그림이 팔리지 않으면 화가로서는 생존하기가 쉽지 않다. 어차피 영국의 귀족과 미술애호가들은 그에게 큰 관심이 없었고 당시 가난한 서민들은 값비싼 유화를 사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명성과 인기를 얻었다 해도 살아가기는 여전히 팍팍하지 않았을까. 아니었다. 호가스에게는 다 계획이 있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 가능한 판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호가스는 인기를 끈 자신의 그림을 판화로 다시 제작해 팔았다. 사실 그는 회화에 입문하기 전, 판화공방에서 먼저 일을 했다. 아버지가 빚으로 5년 동안 옥살이를 할 만큼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정규 교육 코스를 밟을 수 없었다. 그래서 기술자에 가까운 판화공의 길로 먼저 들어섰고, 그 경험이 그로 하여금 일찍부터 판화가 갖는 대중예술로서의 장점과 잠재적인 가능성을 두루 이해하게 했다. 그러니까 ‘대중화’란 블루오션으로 나아간 이상 호가스는 그 스토리부터 표현 형식, 나아가 미디어까지 일관되게 대중과 코드가 맞아야 한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이를 실행할 능력 또한 두루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일반 대중이 유화를 사기는 어려워도 판화는 얼마든지 살 수 있다. 판화야 수요만 있다면 같은 그림을 수없이 찍어낼 수 있으므로 유화에 비해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장점이 있다. 예상대로 그의 회화가 관심을 받고 인기를 얻을수록 그의 판화 또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얼마나 잘 팔렸는지 그 인기에 편승해 그의 판화를 그대로 베껴 파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올 정도였다. 자신의 권리가 침해당하는 것을 묵과할 수 없던 호가스는 의회에 청원을 해 판화 원작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저작권법을 제정하게 했다(1734년 호가스법). 법의 보호까지 받게 된 그의 작품은 유럽 여러 나라에 널리 팔려나갔고, 이후 그의 작품과 유사한 스타일의 시사풍자화는 죄다 ‘호가시안’(a Hogarthian scene)이라고 불리게 됐다.호가스가 동시대의 다른 예술가들처럼 기존의 제도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전전긍긍했다면 결과가 어땠을까. 오늘날 미술사가 평가하는 그런 대가의 반열에는 결코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호가스는 애초에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지는 못했지만, 결국 그것보다 더 큰 것을 얻었다. 이 모든 게 그의 앞에 놓인 제약과 한계 덕이었다. 그게 새옹지마가 됐다. 그런 점에서 때로 한계는, 한계로 위장한 기회다. 혁신은 빈번히 한계 혹은 위기와 함께 찾아온다. ※ “셰익스피어 다음가는 희극작가”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윌리엄 호가스(1697∼1764)는 어린 나이에 판각가의 도제가 돼 판화·삽화기술을 익혔다. 비록 하는 일은 소소했지만 야망은 컸다. 명예와 부를 거머쥘 수 있는 역사화가가 되는 것. 이를 목표로 거의 독학으로 그림공부를 하던 중 우연찮은 기회를 잡는다. 영국 왕 조지 1세의 궁정화가인 제임스 손힐 경의 집에 들어가 소묘수업을 받게 된 것이다. 5년쯤 뒤인 1729년에는 손힐 경의 딸과 결혼도 했다. 호가스의 결혼생활이 어땠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도덕적 교훈을 주제로 화면을 마치 연극무대처럼 꾸민 회화 연작은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매춘부의 편력’(1731∼1732), ‘난봉꾼의 편력’(1732∼1735), ‘유행에 따른 결혼’(1743∼1745), ‘새우 파는 소녀’(1740∼1745) 등이 연달아 나왔다. 호가스 스스로 ‘그림으로 쓴 희극’이라 했던 시리즈다. 실제인물을 모델로 세상의 병폐를 날 세워 풍자한 통찰력은 미술계뿐만 아니라 문학계에까지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는데, 근엄하게 꾸짖기보다 ‘그렇게 살다간 저 꼴 나기 십상’이라는, 마치 셰익스피어의 위트 넘치는 희극에 색을 입힌 듯한 느낌을 줬던 것이다. 덕분에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기세에 눌려 자국의 예술에 열등감을 갖고 있던 영국문화의 환경 전반을 극복하는 데도 적잖은 역할을 했다. 그 공적 덕인지 1757년부터 조지 2세에 이어 조지 3세의 궁정화가로도 활약할 수 있었다. 비록 역사화가는 못 됐지만 역사는 제대로 쓴 인물로 남았다. 호가스가 그린 자화상 ‘화가와 그의 퍼그’(1745). 호가스는 18세기 영국 화가들이 처한 ‘레드오션’에서 벗어나 아예 고급 예술과는 거리가 먼 서민을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 ‘블루오션’을 찾았다. 시각예술가이기 이전에 ‘스토리텔러’가 되기로 작정하고 작품의 승부를 조형이 아니라 스토리에 걸었다. 영국 런던 테이트갤러리 소장.△이주헌 미술평론가는… 미술로 삶을 보고 세상을 읽는다. 좀 더 많은 이들이 미술을 통해 일상의 풍요를 누리도록 글 쓰고 강연하는 일이다. 소명으로 여긴다고 했다. 발단이 있다. 홍익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돌연 일간지 기자가 되면서다. 그림에 관심을 잃어서가 아니라 그림을 막은 생계 때문이었다. 낮에 일하고 밤에 그리자 했다. 하지만 ‘투잡’은 쉽지 않았다. 미술담당 기자생활에서 얻은 필력과 생각을 가지고 현장으로 나왔다. 미술을 대중과 제대로 연결하는 미술평론가의 ‘진정한’ 역할, 그것을 해보자 했다. 그렇게 가나아트 편집장을 하고, 학고재 관장을 오래 한 뒤 서울미술관 초대관장까지 지냈다. 지금은 양현재단 이사로 있으면서 온전히 글과 강연에만 집중하고 있다. 지은 책이 수십 권이다. 굳이 대표작을 꼽자면 ‘신화의 미술관’(2020), ‘리더의 명화수업’(2018), ‘역사의 미술관’(2011), ‘지식의 미술관’(2009), ‘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 1·2’(2005) 등이 있다.
2020.10.16 I 오현주 기자
<16> 공장식 공방서 생산→홍보→영업…'CEO 화가' 루벤스
  • [이주헌의 혁신@미술]<16> 공장식 공방서 생산→홍보→영업…'CEO 화가' 루벤스
  • 평생 3000점이 넘는 대작을 제작한 ‘다작 화가’ 루벤스의 비밀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뽑힌 제자·조수들을 세심하게 조직화한 공방에서 나왔다. 공장식 분업체계를 세운 뒤 효율적으로 이를 가동해 거대한 작품을 대량생산했는데, 이렇게 생산한 작품은 ‘루벤스가 어느 정도 손을 댔느냐’에 따라 가격도 달랐다. 그 구분에 따라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예수회로부터 주문받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기적’(1619)은 모델로(modello)를 기초로 조수들의 역할을 나눠 완성했고, 딸을 그린 ‘클라라 세레나 루벤스’(1615∼1616)는 처음부터 끝까지 루벤스 자신이 제작했다. 또 프랑스의 왕비 마리 드 메디치의 생애를 주제로 한 ‘마르세유 상륙’(1622·연작 ‘메디치 사이클’ 24점 중 하나)은 다른 모든 건 공방에서 제작하되 인물만큼은 반드시 루벤스가 그려야 한다는 조건이 달렸던 작품이다. 빈미술사박물관·리히텐슈타인미술관·루브르박물관 소장.미술은 사람을 움직였습니다. 밥으로만 채울 수 없는 풍요와 평화를 안겨줬으니까요. 그림의 힘이고 조각의 에너지입니다. 하지만 미술의 역할이 이뿐이라 한다면 미술을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문명을 이끌고, 의식을 뒤집고, 결정적으로 돈의 흐름을 주도했던, 그것을 못 본 겁니다. 미술의 사조와 양식이 탄생할 때마다 세계경제에는 ‘변화의 그림’이 걸렸습니다. 바로 ‘혁신’을 주도했던 겁니다.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이주헌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미술로 이룬 혁신’의 현장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상으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이주헌 미술평론가] 미술에 대해 잘못 알려진 고정관념 중 하나가 ‘위대한 예술가는 과작(寡作)을 한다’는 것이다. 걸작을 하나 만들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이다 보니 과작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과작을 하는 거장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반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피카소, 마티스, 반 고흐, 모네, 르누아르, 렘브란트 등 우리가 아는 많은 대가들이 다작을 했다. 미술 창작에 있어서만큼은 ‘다다익선’이 진리다. 다작을 하면 졸작이 많이 나오지만, 걸작 또한 많이 탄생할 수밖에 없다. 17세기 바로크미술의 대가 페터르 파울 루벤스(1577∼1640)도 다작을 한 화가다. 유럽의 주요 미술관을 돌아보면 그의 작품을 설치하지 않은 곳을 찾아보기 어렵다. 흥미로운 사실은, 루벤스는 다작을 한 화가일 뿐 아니라 ‘아틀리에 경영’에도 매우 뛰어난 화가였다는 것이다. 아니, ‘아틀리에 경영’이라니? 아틀리에는 화가가 홀로 그림을 그리는 곳이 아닌가. 거기에 무슨 경영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하지만 실제로 루벤스는 ‘아틀리에를 매우 잘 경영’한 화가였다. 루벤스는 개신교도였던 아버지가 박해를 피해 고향 안트베르펜(벨기에 플랑드르 지방)을 떠나 쾰른 인근의 지겐(독일 서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 머물 때 그곳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다시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와 라틴어학교를 다닌 그는 한 백작부인의 시동이 돼 귀족문화를 익혔다. 이런 고급 교육의 바탕 위에서 그림을 공부한 뒤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다. 이탈리아 유학 시절 루벤스는 고대부터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대가들의 빛나는 성취를 빠르고도 광범위하게 흡수했다. 이후 이를 풍성하고 에너지 넘치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발전시켜 ‘화가들의 군주’이자 ‘군주들의 화가’로 명성을 드높이게 된다. △주문 받은 그림, 팀장에게 맡겨 책임지고 완성케 해루벤스가 이처럼 서양미술사의 최고 거장 중 한 사람으로 우뚝 서게 된 바탕에는 물론 그의 타고난 재능이 큰 몫을 했다. 하지만 그만의 독특한 ‘아틀리에 경영’ 또한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했다. 그는 공장식 분업체계를 세운 뒤 이를 효율적으로 가동해 대작을 대량으로 생산했고, 작품 생산방식의 차이에 따라 가격을 차등화했으며, 작업과정을 홍보에 활용하는 독특한 마케팅으로 작품을 손쉽게 팔았다. 그의 이런 행보는 지금의 기준으로 보아도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다. 루벤스의 아틀리에에는 많은 조수와 제자들이 있었다. 얼마나 많은 미술학도가 그의 아틀리에에 들어오고 싶어 했는지 1611년, 그는 한 지인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과장 없이 말하건대, 1000명이 넘는 사람의 청을 거절해야 하네. 심지어 친척과 아내의 청마저도 말일세. 내 가까운 친구들의 불평을 안 들을 재간이 없네.” 그는 그 치열한 경쟁을 거쳐 들어온 제자들을 세심하게 조직화했다. 서양에서는 중세 길드 시절부터 화가가 제자들을 두고 공방 형태로 작품을 제작했다. 제자들의 협력으로 만들어진 작품은 스승의 이름으로 팔려나갔다. 루벤스도 큰 틀에서는 이 형식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나, 그의 관리는 다른 작가들보다 훨씬 체계적이고 효율적이었다. 그는 일단 주문 받은 작품별로 팀을 하나씩 만들었고, 각 팀의 팀장이 전적인 책임을 지고 그림을 완성하도록 했다. 팀장은 기량이 매우 뛰어나야 했는데, 자신의 제자 출신인지 여부를 가리지 않아 안토니 반 다이크(1599∼1641)처럼 제자는 아니었어도 출중한 능력이 있는 사람을 고용하곤 했다. △루벤스 손이 얼마나 갔느냐가 작품 값 결정 핵심요소이렇게 조직화한 공방을 통해 생산한 작품은 정해진 분류기준에 따라 작품 값을 달리 받았다. 미술사학자 야코프 부르크하르트(1818∼1897)는 루벤스의 작품으로 알려진 그림들을 다음과 같이 구분했다. ① 처음부터 끝까지 루벤스 자신이 제작한 작품, ② 루벤스가 밑그림을 그린 뒤 조수들의 제작과정을 감독하고 직접 마무리한 작품, ③ 모델로(modello)를 기초로 조수들의 역할을 체계적으로 나눠 완성한 작품, ④ 루벤스 풍으로 제작됐으나 그는 거의 손을 대지 않은 그의 공방 작품, ⑤ 루벤스의 직접적인 참여 없이 그의 스타일을 따르는 추종자들이 복제한 작품, ⑥ 다른 화파의 화가들이 복제한 작품. 여기서 ⑤번과 ⑥번의 작품은 그의 공방에서 제작한 게 아니므로 제외하고, 나머지 작품들은 같은 사이즈라도 제각각 다른 가격으로 팔았다. 물론 루벤스의 손이 많이 간 것일수록 비쌌다.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루벤스 자신이 그렸다는 ‘클라라 세레나 루벤스’(1615∼1616)의 부분. 첫 부인 이사벨 브란트가 낳은 첫 딸 클라라의 다섯 살 때다. 안타깝게도 클라라는 12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작품 외에 클라라의 초상화는 3점이 더 있다. 루벤스의 다른 대작에 비해선 작은 규모(37×27㎝)로 제작됐다. 리히텐슈타인미술관 소장.앞의 ③번 사항에서 언급한 ‘모델로’는 원작을 만들기 전, 전체 인물과 배경의 구성이나 배색이 어떻게 될지 미리 구상해보는 유화 스케치를 말한다. 루벤스가 작은 모델로를 그려 팀장인 조수들에게 하나씩 나눠 주면 조수들은 자기 밑의 제자들을 지휘해 이를 각각 대작으로 확대 제작했다. 이 과정에서 루벤스의 손이 얼마나 갔느냐가 작품의 가격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로 기능한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의 왕비 마리 드 메디치(1573∼1642·앙리 4세의 두 번째 정부인)가 그녀의 생애를 주제로 한 24점의 연작 ‘메디치 사이클’을 주문할 때도 계약서에 ‘인물은 반드시 (조수나 제자가 아닌) 루벤스가 그린다’는 조항을 넣었다. 이처럼 루벤스의 간여 정도를 정하고 그에 맞춰 가격을 흥정한 것이다. 이 거대한 연작 앞에 선 관람객은 어떻게 루벤스가 이 대작들을 불과 2년 만에 완성했을까 놀라게 되지만, 실은 많은 부분이 제자들의 기여로 가능했던 것이다. 이 연작을 제작하는 동안에도 루벤스 아틀리에에서는 다른 팀들이 루벤스의 이름으로 또 다른 작품들을 무수히 제작하고 있었다. 이렇게 공방에서 작품을 제작하는 동안 그는 유럽의 여러 왕실을 드나들었다. 루벤스는 당시 그 어떤 상인 못지않게 ‘영업’의 중요성을 잘 알았다. 그의 인간적인 장점은 성격이 호방해 친화력이 높았고, 어릴 때부터 귀족문화를 잘 알아 세련되게 행동했으며, 고전에 대한 교양과 어학능력이 뛰어나 금세 사람들을 사로잡았다는 것이다. 그는 모국어인 플라망어뿐 아니라 라틴어·이탈리아어·프랑스어·영어에 능통했다. 이런 능력으로 적극적으로 ‘영업’에 나서니 숱한 귀족과 왕들이 그의 패트런이 됐다. 그에 대한 보답이라고나 할까. 루벤스는 유럽 왕가를 다니며 나라 사이의 복잡하고 어려운 외교문제의 해결에 적극 나서곤 했다. 이런 공로로 그는 영국과 스페인의 왕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이처럼 바쁜 루벤스가 대작 위주로 평생 3000점이 넘는 작품을 생산했다는 것은, 아무리 붓을 빨리 놀리는 화가였다 하더라도,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대규모 공방이 아니었다면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작업실에 컬렉터 전용 발코니 마련…‘퍼포먼스’ 연출도물론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기 위해 루벤스는 매우 부지런히 일했다. 흔히들 예술가는 올빼미 형이라고 말하지만, 그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났다. 또 일할 때는 ‘멀티태스커’였다. 1621년 덴마크 궁정의사 오토 스페를링이 목격한 바에 따르면, 루벤스는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의 저서 낭독을 들으며 그림을 그렸는데, 그러는 동안 편지를 구술해 쓰게 했고, 손님들과 이야기꽃을 피웠다고 한다. 스페를링은 이 모든 게 동시에 이뤄진다는 게 지극히 경이로웠다고 적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루벤스가 일부러 이런 연출을 한 ‘혐의’가 있다는 것이다. 패트런이나 딜러들이 자신의 아틀리에를 찾아오면 그는 이 모든 과정을 기꺼이 보여줬고, 붓으로 2m에 가까운 곡선을 휘감듯 그리는 ‘퍼포먼스’로 경탄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작업실 안에는 브리지 형태의 발코니가 있어 컬렉터들은 이 모든 장면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루벤스는 또, 다른 화가들의 작품과 고대 조각을 비롯한 동전·보석 등도 수집했는데, 컬렉터가 자신의 작품을 사서 나갈 때 “나보다 더 훌륭한 예술가의 작품”이라며 자신이 수집한 작품을 끼워 팔았다. 당대 최고의 화가가 극찬하며 떠안기니 컬렉터들은 그 작품 역시 사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이처럼 루벤스는 탁월한 ‘CEO 화가’였다. 관리에 능했으며 마케팅과 세일즈에 뛰어났다. 그렇게 해서 많은 재산을 모았을 뿐 아니라, 역사에 길이 남는 거장의 반열에까지 올랐다. ※ 안토니 반 다이크(1599∼1641) 루벤스와 함께 플랑드르 바로크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다. 어릴 적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여 ‘신동’ 소리를 들었다고 전한다. 특히 초상화에 탁월했는데, 굳이 대적할 상대를 꼽자면 루벤스와 티치아노를 거론할 정도다. 덕분에 그의 ‘우아하고 기품있는’ 초상화 양식은 이후 200여년간 유럽 궁중이나 귀족을 그리는 기준이 됐다. 루벤스와의 관계는 1618년 19세부터다. 이미 16세에 두 명의 조수를 고용한 독립 공방을 꾸리다가 루벤스의 작업을 돕게 되면서다. 굳이 제자만 고집하지 않았던 루벤스의 눈에 들었던 셈인데, 그럼에도 루벤스는 “내 제자 중 최고”라고 할 만큼 그의 능력을 높이 샀다고 한다. 루벤스에게는 확실한 조수였던 만큼 반 다이크 역시 큰 화가로 성장하는 데 루벤스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실제 나중에는 다른 사람들이 둘의 작품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루벤스 회화의 비법을 숙달했고, 루벤스의 작업장을 찾는 수많은 지식인·예술가·컬렉터들과 교류하며 대가를 상대하는 교양과 매너를 몸에 익혔다. 명예욕과 자기애가 강했다는 그는 평생 자신의 모습을 많이 그린 화가로도 꼽힌다. 1620∼1621년 그린 ‘자화상’에는 그의 20대 초반 앳된 얼굴이 보이는데, 이 얼굴은 이후에도 배경과 의상을 바꾸며 여러 차례 등장한다. 안토니 반 다이크 ‘자화상’(1620∼1621). 루벤스에게서 “내 제자 중 최고”란 말을 들었을 만큼 능력을 인정받은 반 다이크는 평생 자신의 모습을 많이 그린 화가이기도 했다. 20대 초반 앳된 모습인 이 자화상 속 얼굴은, 이후에도 배경과 의상을 바꾸며 여러 차례 등장한다. 독일 뮌헨 알테피나코텍 소장.△이주헌 미술평론가는… 미술로 삶을 보고 세상을 읽는다. 좀 더 많은 이들이 미술을 통해 일상의 풍요를 누리도록 글 쓰고 강연하는 일이다. 소명으로 여긴다고 했다. 발단이 있다. 홍익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돌연 일간지 기자가 되면서다. 그림에 관심을 잃어서가 아니라 그림을 막은 생계 때문이었다. 낮에 일하고 밤에 그리자 했다. 하지만 ‘투잡’은 쉽지 않았다. 미술담당 기자생활에서 얻은 필력과 생각을 가지고 현장으로 나왔다. 미술을 대중과 제대로 연결하는 미술평론가의 ‘진정한’ 역할, 그것을 해보자 했다. 그렇게 가나아트 편집장을 하고, 학고재 관장을 오래 한 뒤 서울미술관 초대관장까지 지냈다. 지금은 양현재단 이사로 있으면서 온전히 글과 강연에만 집중하고 있다. 지은 책이 수십 권이다. 굳이 대표작을 꼽자면 ‘신화의 미술관’(2020), ‘리더의 명화수업’(2018), ‘역사의 미술관’(2011), ‘지식의 미술관’(2009), ‘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 1·2’(2005) 등이 있다.
2020.10.08 I 오현주 기자
현대百, 경기 남양주에 ‘갤러리形 프리미엄아울렛’ 선봬
  • 현대百, 경기 남양주에 ‘갤러리形 프리미엄아울렛’ 선봬
  • 스페이스원 조감도. (사진=현대백화점)[이데일리 이윤화 기자] 오는 11월 경기도 남양주 다산신도시에 기존 교외형 아울렛과 미술관·공원 등을 결합한 새로운 형태의 아울렛이 들어선다.현대백화점은 다음달 6일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신도시에 프리미엄아울렛 4호점이자 국내 첫 ‘갤러리형 아울렛’인 ‘현대프리미엄아울렛 스페이스원(SPACE1)’을 오픈한다고 4일 밝혔다. 갤러리형 아울렛이란 국내외 유명 브랜드의 이월 상품을 판매하는 기존 교외형 아울렛에 문화나 예술적 요소를 결합한 신개념 쇼핑 시설을 말한다. 스페이스원의 문화·예술 관련 시설 면적은 총 3만 6859㎡(1만 1150평)으로, 상품을 판매하는 매장 면적(5만 1,365㎡, 1만 5,538평)의 70% 수준에 달한다. 현대백화점이 운영중인 프리미엄아울렛의 점포별 평균 문화·예술 관련 시설 면적(6611㎡·2000평)보다 6배 가량 넓다.스페이스원은 쇼핑(Shopping)과 놀이(Play), 예술(Art), 문화(Culture) 그리고 경험(Experience)과 ‘최초·단 하나’의 의미를 담은 ‘원(One)’의 앞 글자를 따 조합한 것으로 고객들에게 쇼핑·문화·예술 등 수준 높은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공간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프리미엄아울렛 시장 경쟁이 심화되면서 기존처럼 합리적인 쇼핑만 강조해서는 차별화되기 어렵다고 판단해, 쇼핑과 문화·예술 체험이 동시에 가능한 갤러리형 프리미엄아울렛을 선보이게 됐다”며 “고객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안하기 위해 점포명도 시(市)나 구(區)의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현대백화점은 이를 위해 스페이스원 곳곳을 다양한 문화·예술 콘텐츠로 채울 예정이다. 세계적 아티스트 겸 디자이너 ‘하이메 아욘(Jaime Hayon)’과 협업해 스토리텔링형 문화·예술 공간인 ‘모카 가든(MOKA Garden·Hyundai Museum of Kids’ Books and Art Garden)’을 선보인다. 하이메 아욘은 스페인 출신으로, 지난 2013년에는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TIME)이 선정한 ‘가장 창의적인 아이콘’에 선정되기도 했다. 총 1653㎡(약 500평) 규모의 모카 가든은 ‘하이메 아욘 가든’, ‘모카 라이브러리’, ‘모카 플레이’ 등 총 3개의 시설로 구성된다. 하이메 아욘 가든은 ‘이야기를 건내는 조각정원’을 콘셉트로 해 하이메 아욘이 직접 디자인한 강아지·원숭이 등 8점의 조각 작품들이 들어선다. 모카 라이브러리는 그림책 원화 전시와 문화·예술 교육 프로그램 등을 진행하는 미술관이며, 모카 플레이는 놀이시설과 벽면에 인류 진화 과정을 담은 벽화가 함께 있는 공간이다. 회사 측은 모카 가든을 방문하는 고객들에게 새로운 경험과 영감을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국내 작가들의 예술 작품들도 설치, 전시된다. 1층 야외 광장에 조각가 심재현이 작업한 높이 7m, 길이 13m의 대형 조형물인 ‘더 카니발리아 20(The Carnivalia 20)’이 설치되며, 매장 내부에는 설치 미술가 최정화 작가가 만든 5m 크기의 ‘스타(Star)’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현대백화점은 향후 스페이스원에 국내외 유명 작가들의 예술 작품을 추가로 설치할 계획이다. 현대백화점은 또한 스페이스원 내부와 외부에 5개의 정원을 꾸밀 예정이다. 정원 면적을 다 합치면 3만 5206㎡(약 1만 650평)으로, 축구장(7140㎡) 5개를 합친 것과 비슷한 크기다. 현대백화점은 향후 대규모 정원을 야외 음악회, 영화 시사회 등 다양한 문화 이벤트를 진행할 예정이다. 박상준 현대프리미엄아울렛 스페이스원 점장은 “스페이스원이란 이름에 걸맞게 점포를 방문한 고객들에게 기존 프리미엄아울렛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문화·예술·휴식 등의 새로운 가치를 제공할 계획”이라며 “스페이스원을 통해 국내 프리미엄아울렛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2020.10.04 I 이윤화 기자
<15> 튀는 화풍에 박리다매…'베네치아 이단아' 판 뒤집었다
  • [이주헌의 혁신@미술]<15> 튀는 화풍에 박리다매…'베네치아 이단아' 판 뒤집었다
  • 틴토레토가 그린 ‘최후의 만찬’(1592∼1594).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과 극단적인 대조를 이룬다. 어두운 실내에 대각선으로 놓인 식탁, 식탁의 중앙을 벗어난 예수, 예수보다 크게 그린 제자들이 거칠게 움직이고 있다. 여기에 만찬의 주역들보다 동작이 더 큰 남녀 하인들까지 나서 틴토레토의 역동적이고 파격적인 화풍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다. 틴토레토는 ‘최후의 만찬’을 여러 점 제작했는데, 이 그림이 그가 사망하기 몇 달 전 완성한 마지막 작품이다. 365×568㎝ 크기의 캔버스 유화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산 조르조 마조레 교회 소장.미술은 사람을 움직였습니다. 밥으로만 채울 수 없는 풍요와 평화를 안겨줬으니까요. 그림의 힘이고 조각의 에너지입니다. 하지만 미술의 역할이 이뿐이라 한다면 미술을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문명을 이끌고, 의식을 뒤집고, 결정적으로 돈의 흐름을 주도했던, 그것을 못 본 겁니다. 미술의 사조와 양식이 탄생할 때마다 세계경제에는 ‘변화의 그림’이 걸렸습니다. 바로 ‘혁신’을 주도했던 겁니다.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이주헌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미술로 이룬 혁신’의 현장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상으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이주헌 미술평론가] 16세기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화가 틴토레토(본명 야코포 로부스티·1518∼1594)는 다방면으로 혁신적인 화가였다. 미학과 조형어법도 혁신적이었고, 자신의 작품을 알리고 인정을 받는 방식도 혁신적이었다. 하지만 틴토레토는 “베네치아의 예술적 고아”로 치부될 정도로 당시 대부분의 동료화가들로부터 소외되고 배척당했다. 독불장군 같은 기질과 성격 탓도 있었고, 개성적인 조형으로 시대를 앞서간 탓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비우호적인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그는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을 쟁취해냈다. 서양미술사가 자랑하는 위대한 거장이 됐다. 틴토레토는 염색공(이탈리아어로 틴토레 tintore)의 21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래서 별칭이 틴토레토(tintoretto 작은 염색공. 염색공의 아들)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일찍부터 아들의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는 그를 당대의 거장 티치아노(1488∼1576)에게 데려갔다. 그러나 틴토레토는 불과 며칠 만에 그의 화실에서 쫓겨났다. 워낙 재주가 뛰어나 스승이 그를 시기해서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고, 자신만의 성향이 확고했던 어린 틴토레토가 스승의 스타일을 따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거나 그렇게 짧게 만났다가 헤어졌지만, 틴토레토는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내내 잃지 않았다. 다만 매사에 티치아노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 그와 구별되기를 원했다. 평생에 걸친 그 지독한 차별화의 노력이 그를 티치아노에 버금가는 예술가로 만들어놓았으니 그야말로 자존심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독자노선’을 걷는 동안 티치아노는 그를 계속 백안시해 큰손들이 후원하는 것을 방해하고 공모경쟁이 있을 때는 다른 화가에게 그 몫이 돌아가도록 손을 쓰곤 했다. △규범 깨부순 틴토레토…역동적 화면 창조 티치아노와 달라지고자 한 틴토레토의 노력은 그의 개성과 맞물려 그를 매우 진취적인 화가로 만들었다. 스승 티치아노는 정연한 구성과 풍부하고 부드러운 색조가 특징이었다. 이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의 르네상스 고전주의 미학을 계승한 것이다. 하지만 틴토레토는 이런 고전주의적인 규범을 깨버리고 비대칭적이고 역동적인 구성과 강렬한 명암 대비, 격정적인 정서의 표출을 선호했다. 오늘날의 관객이 봐도 매우 당차고 개성적인 그림이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가 장 폴 사르트르는 틴토레토를 “최초의 영화감독”이라고 평했다.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고 박진감이 넘친다는 것이다. 틴토레토의 혁신성을 잘 보여주는 그림의 하나가 ‘최후의 만찬’(1592∼1594)이다. 유명한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1495∼1497)과 비교해 보면 틴토레토의 그림이 얼마나 튀는 그림인지 금세 알 수 있다. 다빈치의 작품은 테이블이 화면과 수평이다. 당연히 공간이 매우 정적이고 인물의 배치도 균등한 편이다. 티치아노 역시 다빈치와 유사한 형식으로 ‘최후의 만찬’을 그린 적이 있다. 그러나 틴토레토의 ‘최후의 만찬’은 도저히 그 선례를 찾기 어려운, 매우 혁신적인 그림이었다. 일단 보는 이의 시선이 예수와 제자들보다 위에 있다. 그리고 테이블은 화면과 수평이 아니라 대각선을 이루고 있고 과장된 원근법으로 인해 뒤로 갈수록 급격히 물러선다. 화면이 전체적으로 지극히 어둡고 대부분의 인물은 윤곽 부분만 밝게 빛난다. 극단적인 명암법이다. 터치도 상당히 거칠다. 당시에는 지나친 표현 과잉, 감정 과잉으로 여겨졌지만, 바로 이 개성적이고 현대적인 표현이 그의 그림을 매우 역동적인 드라마로 만들어줬다. 그 역동성은 17세기 바로크의 대가 루벤스(1577∼1640)를 거쳐 19세기의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아(1798∼1863)와 제리코(1791∼1824), 그리고 드 쿠닝(1904∼1997)을 비롯한 현대의 추상표현주의자들에게 이어져 서양미술사의 중요한 조형전통이 됐다. 역동적인 화면의 창조자답게 틴토레토는 그림을 매우 빨리 그렸다. 이 성향 또한 매우 뜸을 들이며 천천히 그리는 스승 티치아노와 대비됐는데, 그림을 얼마나 빨리 그렸는지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1485∼1547)란 화가는 “내가 2년은 걸렸을 양의 작품을 틴토레토는 단 이틀 만에 해냈다”고 할 정도였다. 그래서 ‘프레스테차’(prestezza·신속하다는 뜻)가 그의 별명이 됐다. 물론 그림을 빨리 제작하다 보니 거친 터치가 그대로 드러나 그만큼 미완성의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 거친 붓놀림은 훗날 인상파 화가들이 적극적으로 구사하게 되는, 시대를 앞서가는 혁신적 표현이었다. △빠른 붓놀림…마케팅서도 빛 발해흥미로운 사실은, 이런 빠른 붓놀림으로 틴토레토가 조형적 차원을 넘어 마케팅 차원에서도 혁신의 빛을 발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564년 종교단체 ‘스쿠올라 그란데 디 산 로코’ 벽화 프로젝트였다. 이 벽화는 원래 공모경쟁을 통해 설치하기로 돼 있었다. 스쿠올라 그란데 디 산 로코는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평신도 종교단체로, 단체의 장려한 건물을 회화로 장식하기로 하고 틴토레토와 베로네세(1528∼1588)를 비롯한 다섯 명의 대가들을 대상으로 지정 공모경쟁을 실시했다. 각자 스케치한 것을 토대로 나름의 구상을 프레젠테이션하기로 한 날, 경쟁자들은 입을 크게 벌리고 다물지를 못했다. 틴토레토가 이미 완성작을 만들어 해당 벽에 설치해버린 것이다. 틴토레토의 ‘자화상’(1588). 머리카락과 수염, 입고 있는 옷의 감촉까지 손끝에 전해질 만큼 선명한 질감 표현이 특징이다.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 소장.경쟁자들은 분노했고 주최 쪽은 당황했다. 한바탕 큰 소란이 일어났다. 주최 쪽은 틴토레토가 공정한 경쟁의 룰에서 벗어났다며 그림을 떼어내고 그를 제외하려 했으나 “무상으로 기증하겠다”는 틴토레토의 한마디에 그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스쿠올라의 정관에 따르면 무상으로 기증하는 모든 물품은 무조건 받아들이게 돼 있었다. 분노한 경쟁자들은 이를 갈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워낙 그림을 빨리 그리다 보니 남들이 스케치할 시간에 그는 유화 대작을 제작할 수 있었고, 또 ‘전략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다 보니 그것을 무상으로 기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틴토레토는 한 술 더 떠 천장 장식화까지 무상으로 제작해주겠다고 약속하고 실천했다. 바로 이런 방식이 그가 즐겨 쓴 마케팅 방식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공짜 마케팅’이라 할 수 있겠다. 스승 티치아노의 경우에는 그의 작품을 한 점 사려면 귀족들도 ‘줄을 서서’ 오래 기다려야 했다. 티치아노는 작품을 천천히 제작했고 매우 비싸게 팔았다. 반면 틴토레토는 빨리 제작해서 싸게 팔았다. 작품 제작비 정도면 만족해했고 심지어는 스쿠올라 그란데 디 산 로코의 사례처럼 무상으로도 곧잘 건네줬다. 다른 동료 미술가들이 아무리 배척하고 견제하려 해도 이런 그를 ‘제압’할 수는 없었다. 일례로 스쿠올라에 성심껏 호의를 베푼 이듬해 그는 결국 그 단체의 멤버로 받아들여졌고, 이후 스쿠올라로부터 수십 점의 주문을 받아 경제적으로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 △돈에 매인 ‘을’ 아닌,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갑’예술가로서 그에게 중요한 것은 코앞의 돈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값을 높이는 데 전력을 다했다. 돈 욕심만 크게 부리지 않는다면 명성과 영향력이 먹고사는 것쯤은 지장이 없게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오히려 작품을 싸게 팔거나 공짜로 줘 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인기와 영향력에 대한 ‘지분’을 갖게 했다. 그럼으로써 그의 성공을 자신들의 성공으로 공유하게 했다. 그렇게 그는 ‘받는 자’가 아니라 ‘주는 자’, 돈에 매인 ‘을’이 아니라,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갑’이 됨으로써 오히려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가 됐다. 틴토레토는 티치아노를 필두로 베네치아 화단이 자신을 배척하려고 꽁꽁 묶어둔 속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유롭게 자신의 예술을 추구해 미술사의 중요한 혁신을 이뤄내고 말았다. 그런 점에서 그는 예술가로서 탁월한 리더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개성을 중시하고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예술가는 사람들을 이끄는 조직의 리더로서는 맞지 않을 때가 많다. 하지만 뛰어난 예술가는 상황을 이끄는 ‘상황의 리더’가 된다. 티치아노는 그렇게 숱한 배척과 어려움 속에서도 상황을 리드함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혁신가가 됐다. ※ 스쿠올라 그란데 디 산 로코(Scuola Grande di San Rocco) 1478년 설립한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자선기관이다. 지역상인이 중심인 평신도 단체로, 역병이 돌 때 기원을 올리는 성인 ‘성 로코’의 이름을 땄다. 그런데 정작 이 단체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자선활동보다 건물이다. 광범위하게 그려진 틴토레토의 작품들이 실내장식으로 들어 있기 때문. 우선 1564년 이 단체가 마련한 공모전에서 다른 화가들을 제치고 잽싸게 선점해 걸었던 벽화 ‘성 로코에 대한 찬미’를 시작으로 틴토레토는 1565년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모습을 마치 영화 장면처럼 그린 ‘십자가 책형’을, 또 1567년까지는 예수의 수난을 표현한 여러 점의 그림을 차례로 그려 건물을 장식했다. 1576∼1581년에는 위층 메인홀의 천장화 ‘청동뱀의 기적’(1577)을 비롯해 벽화 25점을 그렸고, 1582∼1587년에는 지상층 홀에 예수와 마리아의 일생을 그린 대작 8점을 더 완성했다. 결국 24년에 걸쳐 틴토레토는 신·구약성서를 망라한 성화 70여점을 이곳에 걸고 붙인 것이다. 건물 자체가 틴토레토의 거대한 대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어찌 보면 틴토레토는 빈곤한 사람들이 찾아오는 기관에 그림으로 성서를 옮겨내고 가난한 이들도 걸작 미술품을 감상할 기회를 만들어줬던 셈이다. 스쿠올라 그란데 디 산 로코는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틴토레토의 작품들이 벽과 천장을 장식하고 있는 스쿠올라 그란데 디 산 로코의 위층 메인홀 전경. 건물에 들어서는 순간 광범위하게 걸리고 붙은 틴토레토의 작품 수에 놀라고 작품 규모에 한 번 더 놀라게 된다. 1564년부터 1587년까지 24년에 걸쳐 틴토레토는 신·구약성서를 망라한 성화 70여점을 그려 이곳을 장식했다. 건물 자체를 자신의 거대한 대표작으로 만든 셈이다.△이주헌 미술평론가는… 미술로 삶을 보고 세상을 읽는다. 좀 더 많은 이들이 미술을 통해 일상의 풍요를 누리도록 글 쓰고 강연하는 일이다. 소명으로 여긴다고 했다. 발단이 있다. 홍익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돌연 일간지 기자가 되면서다. 그림에 관심을 잃어서가 아니라 그림을 막은 생계 때문이었다. 낮에 일하고 밤에 그리자 했다. 하지만 ‘투잡’은 쉽지 않았다. 미술담당 기자생활에서 얻은 필력과 생각을 가지고 현장으로 나왔다. 미술을 대중과 제대로 연결하는 미술평론가의 ‘진정한’ 역할, 그것을 해보자 했다. 그렇게 가나아트 편집장을 하고, 학고재 관장을 오래 한 뒤 서울미술관 초대관장까지 지냈다. 지금은 양현재단 이사로 있으면서 온전히 글과 강연에만 집중하고 있다. 지은 책이 수십 권이다. 굳이 대표작을 꼽자면 ‘신화의 미술관’(2020), ‘리더의 명화수업’(2018), ‘역사의 미술관’(2011), ‘지식의 미술관’(2009), ‘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 1·2’(2005) 등이 있다.
2020.09.25 I 오현주 기자
엘디프, 창업3주년 맞아 아티스트 브랜드 '아트레이블 L' 선봬
  • 엘디프, 창업3주년 맞아 아티스트 브랜드 '아트레이블 L' 선봬
  • [이데일리 황효원 기자] 엘디프가 창업3주년을 맞아 아티스트 브랜드 ‘아트레이블 L’을 선보인다. (사진=아트레이블 엘 (art label L) 소개 배너)‘아트레이블 L’은 기존에 엘디프와 저작권 계약을 맺고 아트프린트 에디션을 판매해왔던 아티스트 중 각 분야에서 콜렉터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왔던 소수를 선별하여 구성한 아티스트 에이전시로 아티스트에게는 집중적인 지원을, 고객사에게는 트렌디하고 감성적인 아트컬래버레이션을 제공한다.아트레이블 L은 아티스트와 아트프린트 등 일부 품목에 대한 독점적 저작재산권 이용허락 계약을 체결하고 소속 아티스트와 그 작품을 집중적으로 큐레이션하여 국내 및 해외에 전방위적으로 홍보하고 다양한 아트 컬래버레이션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오랜 시간 공들여 기획되었다.순수회화부터 디지털 일러스트레이션까지 시각예술 영역에서 새로운 감각을 드러내며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6명의 젊은 아티스트로 구성된 아티스트 그룹 ‘아트레이블 L’은 안소현 작가, Slowus 작가, 유지언 작가, 김유라 작가, Byul(차한별) 작가, 맨발나무(박한동) 작가가 함께한다.이들은 엘디프의 집중적인 브랜딩을 통해 기존에 판매하던 아트프린트 에디션은 물론 원화 판매, 해외 작품 판매 등에서 우선적인 지원대상이 된다.특히 엘디프가 리빙&라이프 트렌드쇼, 런던디자인페어 등 국내외 전시회에 참가하게 되는 경우 아트레이블 L 소속 아티스트 전용 기획관에 소개되는 등의 혜택을 누리며 매년 아트레이블 L 아티스트의 작품으로만 구성된 단체전을 갤러리에서 개최하여 소속 아티스트를 홍보한다.뿐만 아니라 ‘아트레이블 L’은 기업 및 기관과 예술가가 함께 하여 예술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아트 컬래버레이션’ 사업을 진행한다.이 사업은 고객이 원하는 프로젝트의 성격에 맞추어 가장 적합한 아티스트를 제안하고 고객의 제품이나 서비스의 완성도를 높여주는 디자인 사업이다.특히 아티스트와 고객 사이에서 소통의 창구가 되어 프로젝트를 끝까지 이끌어갈 분야별 디렉터가 상주하고 있다는 것이 강점이다.시각디자인 분야에는 삼성전자 출신 전문 비주얼 디자이너 HANS가 디렉터로 참여하며 웹/모바일 UX/UI 디자인부터 제품 디자인, 홍보물 디자인 등을 책임진다.공간디자인 분야에는 한양대학교에서 무대디자인을 전공하고 대학로에서 연극, 뮤지컬 무대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는 문화예술 전문 스페이스 디자이너 SACS가 디렉터로 참여하여 스토어 디자인부터 전시, 행사, 공연 디자인에 아티스트의 감각을 접목한다.2017년 9월 20일 개인사업자로 시작한 엘디프는 창업 당시 작품 판매순수익의 최대 50%를 작가에게 분배하는 예술공정거래(Art Fair-trade)라는 창업정신에 공감해준 6명의 작가와 약 30여개의 작품으로 엘디프를 시작했다.누구나 합리적인 가격대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아트프린트 에디션을 판매하며 예술공정거래 사업을 추진해온 엘디프는 창업1주년에는 엘디프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법인전환을 했고, 창업 2주년에는 ‘2019 런던디자인페어’에 단독브랜드로 참가하는 동시에 엘디프 글로벌 서비스를 시작하여 해외에도 K-ART작품을 알릴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했다.창업기념일마다 한 단계씩 점프업(Jump-up)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엘디프가 3주년을 맞이한 올해는 아티스트 브랜드 ‘아트레이블 L(art label L)’을 선보이며 예술공정거래의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나간다고 한다. 예술가들과 공정한 거래를 통해 상생하는 엘디프의 사업이 점점 확장되어 간다는 이 소식이 특히나 힘든 요즘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아래부터는 ‘아트레이블 L’ 소속 아티스트 대한 간략한 소개이다.안소현 작가: 절묘한 빛의 묘사와 휴식과 위로가 담긴 화풍으로 두꺼운 팬층을 가지고 있는 아티스트이다.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GS, ㈜탐앤탐스 등 유수 기관 및 기업에서 작품을 소장한 인기 작가이며, 특히 멕시코 두란고를 그린 작품이 해외 언론의 조명을 받으면서 해외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Slowus 작가: 영국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는 작가로, 2019년 정관장 TV 광고 일러스트, 스마일농부 제주 천혜향 캠페인 일러스트 등 기업 콜라보 사례가 풍부한 작가이다. 특히 위즈덤하우스, 시공사, 북로그컴퍼니 등에서 출판하는 책의 표지 및 내지 작업을 하는 등 활발한 작가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유지언 작가: 브랜드 조이브라운(Zoeybrown)의 창업자이자 대표로 본인만의 따뜻하면서도 빈티지한 감성이 담긴 아트굿즈를 통해 작품활동을 이어간다. 드로잉은 물론 사진, 타이포그래피 등 본인의 장점을 살려 아트포스터, 미니엽서, 마스킹테이프, 핸드폰케이스 등을 제작하여 오브젝트, 제주 카멜리아힐 등 국내 유명 온오프라인 편집샵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김유라 작가: 일본에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김유라 작가는 YRK Studio 라는 작가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수원컨벤션센터의 리플렛 및 가이드북을 제작하거나 인천시 홍보관의 백월, 단상 등에 들어가는 일러스트 작업에 참여하는 등 대중들에게 친숙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스타일로 작가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차한별 작가: 하나의 선으로 완성된 그림을 그리는 원라인 일러스트레이터로 IXVI 2018 FW 의류 콜라보레이션 작업, 미스틱 의 뮤직비디오 및 앨범 커버 작업, Restinpieces <따뜻한 손길 캠페인>의 의류 및 쥬얼리 아트콜라보레이션 작업 등 패션과 음악 분야에서 성공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실력파 아티스트이다.맨발나무 작가: 나무를 좋아하고 자연을 그리는 작가로, 홍익대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2020 아시아프에 참여 작가로 작품을 선보이는 등 순수회화 활동도 활발히 하면서 기업은행에서 발행하는 캘린더 아트콜라보, 양지사에서 발행하는 다이어리와 캘린더 아트콜라보를 진행하는 팔방미인 아티스트이다.
2020.09.21 I 황효원 기자
<14> 위대한 혁신가는 '휴머니스트'다
  • [이주헌의 혁신@미술]<14> 위대한 혁신가는 '휴머니스트'다
  • 조토가 그린 이탈리아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예배당 프레스코 벽화’ 중 ‘애도’(1304∼1306). 길이 13m, 폭 8.5m의 작은 예배당은 벽과 천장을 38면 구획으로 나눠 ‘수태고지’부터 ‘예수의 죽음과 부활’까지 조토의 프레스코화가 꽉 채우고 있는데 ‘애도’는 그중 가장 유명한 장면으로 꼽힌다. 예수의 주검을 둘러싼 인물들이 내보이는 다양한 슬픔의 층위를 자세·동작·표정 등으로 전달해 당대인들이 충격을 받을 만큼 사실적인 것이 특징이다. 애도자들 중에는 등을 보인 인물도 등장하는데, 이 역시 조토가 창안해 즐겨 사용한 기법. 공간의 깊이감 이상의 연극적 효과까지 만들고 있다.미술은 사람을 움직였습니다. 밥으로만 채울 수 없는 풍요와 평화를 안겨줬으니까요. 그림의 힘이고 조각의 에너지입니다. 하지만 미술의 역할이 이뿐이라 한다면 미술을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문명을 이끌고, 의식을 뒤집고, 결정적으로 돈의 흐름을 주도했던, 그것을 못 본 겁니다. 미술의 사조와 양식이 탄생할 때마다 세계경제에는 ‘변화의 그림’이 걸렸습니다. 바로 ‘혁신’을 주도했던 겁니다.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이주헌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미술로 이룬 혁신’의 현장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상으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이주헌 미술평론가]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1266/7∼1337)는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사실적인 조형으로 서양미술의 물꼬를 튼 위대한 혁신가다. 정적이고 양식화한 비잔틴 스타일이 압도하던 중세 말, 조토는 역동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화면으로 시대를 앞서갔다. 르네상스가 열리기 한 세기 전의 화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르네상스 화가’ 혹은 ‘르네상스 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잔틴 스타일은 우리에게 ‘이콘’(주로 동방교회에서 발달한 예배용 화상. ‘상’(像)을 뜻하는 그리스어 이콘에서 유래했다)으로 익숙하다. 비잔틴 회화는 색채와 장식을 중시해 장엄하고 화려한 인상을 주지만, 사실성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미술이다. 공간의 깊이감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은 탓에 공간이 얕다는 느낌을 주고 사물의 덩어리감도 떨어진다. 인물은 대체로 길게 그려졌는데, 눈이 강조되는 경우가 많아 보기에 따라서는 왠지 만화 같은 인상을 준다. 치마부에(1240∼1302 추정), 두치오(1255∼1319) 등 당시 이탈리아의 주요 미술가들은 이런 비잔틴 스타일을 따랐다. 이 스타일은 인간의 시각적 경험이나 이성적 판단과는 거리가 있는, ‘천상의 시각’을 표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 무렵에 비잔틴 스타일과 성격을 크게 달리하는 조토의 예술이 혜성처럼 등장한 것이다. 조토는 아직 원근법이 창안되기 전이었음에도 매우 직관적으로 원근법적 표현을 시도했다. 광학적인 이해 또한 동시대의 다른 화가들에 비해 매우 높았다. 무엇보다 대상을 견고한 입체로 표현할 줄 알았다. 그만큼 공간과 사물의 삼차원적인 특성을 잘 포착했다. 사람의 인상이나 제스처도 자연스럽게 묘사할 줄 알았다. 그에 더해 무엇보다 감정의 탁월한 표현으로 인간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뛰어났다. 이 모든 게 그가 진정한 휴머니스트임을 보여주는 증표라 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시각과 감정으로 세계를 표현하려고 했다. △조토, 사별의 슬픔 절절히 표현…인간적 공감 불러일으켜 조토의 휴머니즘은 그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예배당 벽화’(1304∼1306)에서 생생히 살펴볼 수 있다. 스크로베니 예배당은 그 이름이 나타내듯 엔리코 스코로베니라는 사람이 지어 봉헌한 예배당이다. 대부업자였던 스크로베니가 미술사에 남긴 매우 중요한 공헌은 바로 이 예배당 내부의 벽화를 조토에게 맡겼다는 것이다. 조토는 벽화의 주제를 ‘구원’으로 잡았다. 구원의 역사를 표현하기 위해 예수의 생애뿐 아니라 성모 마리아의 생애도 그렸는데, 이 두 생애를 그린 장면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고도 감동적인 장면은 ‘애도’다. 조토 특유의 사실적인 표현과 진한 휴머니즘을 느낄 수 있어서다. ‘애도’를 보노라면, 사랑하는 이와 사별하는 사람의 내적 고통과 슬픔이 절절히 느껴진다. 조토 이전의 화가들에게서는 보기 어려운, 매우 생생하고도 현실감 넘치는 표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검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져 땅에 누워 있다.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의 목을 감싸 안고 흐느껴 운다.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마리아의 시선은 형언하기 어려운 상실감을 드러내고 있다. 오른쪽에서는 예수가 가장 사랑한 제자 요한이 팔을 벌린 채 예수에게 달려온다. 그 역시 격정을 못 이겨 온몸으로 애통해 한다. 예수를 둘러싼 모든 이들이 그처럼 저마다의 몸짓으로 슬픔을 토해낸다. 하늘의 어린 천사들도 마찬가지다. 예수의 죽음이 얼마나 서러운지, 아기 천사들은 제각각 애처롭게 통곡한다. 바로 이런 표현이 조토를 이전의 다른 화가들과 구별해주는 대표적인 표지다. 대상의 내면과 감정에 충분히 틈입해 들어가 이를 매우 실감나게 생생히 전달해주는 것 말이다. 물론 기법적인 측면에서 보면, 오늘날의 우리에게 조토의 표현은 여전히 고졸(古拙)하고 ‘나이브’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인간이 만든 이미지가 이 정도로 박진감 있게 다가온다는 게 매우 신기했다. 나아가 그림 속 인물들의 감정이 생생히 느껴지고 그들에게 같은 인간으로서 공감하게 된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조토가 그린 ‘애도’의 부분. 예수의 죽음을 슬퍼하는 ‘천사’(왼쪽부터) ‘요한’ ‘마리아’다. 이전 화가들이 몰입했던 초자연적 현상을 버리고 인간적인 감정을 진하게 표현하고 있다.△창조·혁신의 근원적 목표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는 것’어떤 혁신이든 휴머니즘을 동반하지 않은 혁신은 진정한 혁신이 아니다. 창조와 혁신의 근원적인 목표가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는 것’ ‘인간을 보다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은 조토를 비롯해 우리 주변의 많은 창조자와 혁신가들이 증명해온 바다. BMW의 수석 디자이너로 일했던 크리스 뱅글(64)도 그런 혁신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휴머니스트로서 그는 자동차 디자인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자동차도 사람과 대단히 흡사해서, 자동차 디자인이란 ‘그 자동차의 성격을 외부로 표출하는’ 작업이다.” 자동차를 사람처럼 생각함으로써 그는 보다 ‘인간적인’ 자동차를 디자인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디자인하는 자동차의 성격을 면밀하게 연구했고, 그렇게 파악한 성격이 과연 어떤 생김새로 나타날지 인간의 사례와 비교해가며 추출해냈다. 그렇게 해서 직선적인 스타일이 트레이드마크였던 BMW에 곡선의 새바람을 불러일으켰고(그로 인해 분노한 BMW의 ‘광팬’에게 살해 위협까지 받았다), 결국 벤츠, 포드, 아우디 등 다른 브랜드들이 그 뒤를 따르는 성과를 이뤄냈다. 그가 이런 추구를 한 바탕에는 대학시절 광범위하게 파고든 ‘문(文)·사(史)·철(哲)’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문·사·철’은 그로 하여금 자동차를 하나의 인간처럼 상상하게 만들었는데, 그래서 케네스 클라크의 ‘누드의 미술사’를 읽을 때조차 그는 ‘누드’라는 단어가 나오면 대신 그 자리에 ‘자동차’라는 말을 바꿔넣어 읽었다고 한다. △장애 형제에 대한 배려에서 시작된 ‘킥보드’ 어른들을 위한 초경량 미니 스쿠터(킥보드) 또한 ‘인정’(人情)의 경험으로부터 기원한, 한 휴머니스트의 창작물이다. 스위스의 은행원이었던 빔 오우보터(60)는 자신의 단골 소시지 상점이 집에서 걸어가기에는 좀 멀고 차를 타고 가기에는 가까워 고민하던 끝에 어른들이 타고 다니기에 좋은 초경량 미니 스쿠터를 개발했다. 그가 스쿠터를 착안한 계기는 어린시절 단란했던 가족 간의 추억에 있었다. 오우보터에게는 다리에 장애가 있는 누나가 있었다. 다른 형제들과 달리 누나는 한쪽 다리가 25㎝가량 짧았다. 그러다 보니 자전거나 스키를 탈 수 없었다. 그러나 스쿠터, 곧 킥보드는 곧잘 탔다. 그래서 오우보터의 부모는 아이들이 가급적 자전거를 타지 않고 스쿠터를 타도록 유도했다. 형제들이 장애가 있는 형제에게 공감하고 그 애로를 함께 나누도록 이끈 것이다. 그 덕에 그의 부모는 거의 매년 스쿠터를 한 대씩 새로 사야 했다. 이처럼 스쿠터는 오우보터의 가족에게 사랑과 연대, 배려의 상징이었다. 이 사랑의 추억으로부터 발원해 개발한 초경량 미니 스쿠터는 처음에 주변으로부터 그다지 호의적인 반응을 얻지 못했다. 일반적인 어린이용 킥스쿠터는 바닥판이 넓고 바퀴는 바람이 든 타이어인데 비해 그의 스쿠터는 판이 작고 바퀴는 스케이트 롤러였기 때문에 매우 민첩한 동작이 가능했고, 빠르고 매끄럽게 몰 수 있었다. 한마디로 보다 ‘인간 친화적’인 스쿠터였다. 그러나 그가 이 아이템을 사업화하려 하자 친구들은 어른들이 무엇 때문에 킥스쿠터를 타겠냐며 앞다퉈 그를 말렸다. 의기소침해진 그는 첫 개발품을 차고에 처박아놓고는 더 이상 돌아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차고를 드나들던 이웃집 아이가 어느 날부턴가 그 개발품을 이용하기 시작했고, 곧 그 아이의 친구들이 몰려들면서 그의 스쿠터는 아이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 있는 탈것이 돼버렸다. 아이들이 사용하기에도 매우 편리했고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다시 용기를 내 자신의 개발품을 출시할 수 있었다. 동료 인간에 대한 공감과 애정에 기초한 휴머니즘, 이것이야말로 끝없는 혁신의 기회를 제공하는 마르지 않는 샘이다. ※ 치마부에(Cimabue·1240∼1302 추정) 중세 이탈리아 피렌체파를 대표하는 화가다. 비잔틴 스타일의 형식주의를 취하면서도 조형성이 강한 중교화를 그렸다. 1270년대 말부터 1280년대에 걸쳐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에서 ‘성모전’ ‘묵시록’ 등의 벽화를 제작했다. 이후 피렌체 산타 트리니타 성당에서 ‘마에스타’(장엄의 성모·1280∼1290)를 그렸고 그의 유명한 대표작으로 남겼다. 현재 우피치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산타 트리니타 마에스타’는 길이 4m에 육박(385.2×223.6㎝)하는 패널화로, 무엇보다 아름다운 조형성이 눈에 띈다. 하지만 비잔틴 스타일 특유의 평면적인 구성에 입체감·공간감이 떨어지는 구도를 보이고 있다. 이는 치마부에가 키운 제자 ‘조토’와 확연히 구분되는 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치마부에는 미술사에서 전환기를 이루는 13세기 후반 시대의 생활 감정, 취미의 변천 등 새로운 동향을 파악하고 반영해, 비잔틴 전통인 이차원적 회화양식에서 사실주의 양식으로 변환을 시도한 기여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조토와의 만남을 두고는 여러 일화가 전해진다. 피렌체 근방 시골마을 베스피냐노에 갔다가 바위에 그림을 그리던 열살 남짓한 양치기 소년을 보고 재능을 발견해 피렌체로 데려와 제자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그중 하나다. 조토의 스승으로 알려진 치마부에가 그린 ‘산타 트리니타 마에스타’(장엄의 성모·1280∼1290). 길이 4m에 육박(385.2×223.6㎝)하는 패널화로, 아름다운 조형성이 눈에 띈다. 하지만 비잔틴 스타일 특유의 평면적인 구성에 입체감·공간감이 떨어지는 구도를 보인다. 제자 조토와 확연히 구분되는 점이기도 하다.△이주헌 미술평론가는… 미술로 삶을 보고 세상을 읽는다. 좀 더 많은 이들이 미술을 통해 일상의 풍요를 누리도록 글 쓰고 강연하는 일이다. 소명으로 여긴다고 했다. 발단이 있다. 홍익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돌연 일간지 기자가 되면서다. 그림에 관심을 잃어서가 아니라 그림을 막은 생계 때문이었다. 낮에 일하고 밤에 그리자 했다. 하지만 ‘투잡’은 쉽지 않았다. 미술담당 기자생활에서 얻은 필력과 생각을 가지고 현장으로 나왔다. 미술을 대중과 제대로 연결하는 미술평론가의 ‘진정한’ 역할, 그것을 해보자 했다. 그렇게 가나아트 편집장을 하고, 학고재 관장을 오래 한 뒤 서울미술관 초대관장까지 지냈다. 지금은 양현재단 이사로 있으면서 온전히 글과 강연에만 집중하고 있다. 지은 책이 수십 권이다. 굳이 대표작을 꼽자면 ‘신화의 미술관’(2020), ‘리더의 명화수업’(2018), ‘역사의 미술관’(2011), ‘지식의 미술관’(2009), ‘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 1·2’(2005) 등이 있다.
2020.09.18 I 오현주 기자
<13> 느리게 보아야 아름답다…창조도 그렇다
  • [이주헌의 혁신@미술]<13> 느리게 보아야 아름답다…창조도 그렇다
  • 독일 함부르크의 쿤스트할레가 진행한 ‘2017년 슬로우아트데이’에 참여한 관람객들이 스위스 화가 아르놀트 뵈클린(1827∼1901)의 회화 ‘신성한 숲’을 감상하고 있다. 이 해의 슬로우아트데이에 쿤스트할레에서는 뵈클린 외에도 바로크시대 프랑스 화가인 클로드 로랭(1600∼1682), 러시아 태생 프랑스 화가 마르크 샤갈(1887∼1985) 등의 작품을 선정, 관람객들이 함께 감상하고 서로의 의견을 교환했다. 아래 거북이는 ‘슬로우아트데이’의 공식 마스코트다(사진=슬로우아트데이 홈페이지).미술은 사람을 움직였습니다. 밥으로만 채울 수 없는 풍요와 평화를 안겨줬으니까요. 그림의 힘이고 조각의 에너지입니다. 하지만 미술의 역할이 이뿐이라 한다면 미술을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문명을 이끌고, 의식을 뒤집고, 결정적으로 돈의 흐름을 주도했던, 그것을 못 본 겁니다. 미술의 사조와 양식이 탄생할 때마다 세계경제에는 ‘변화의 그림’이 걸렸습니다. 바로 ‘혁신’을 주도했던 겁니다.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이주헌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미술로 이룬 혁신’의 현장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상으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이주헌 미술평론가] “예술작품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무슨 씨앗을 뿌리게 될 것인가 하는 사실이다. 예술가는 죽고 한 장의 그림은 사라질 수 있다. 남는 것은 오직 그것이 뿌린 씨앗이다.” 스페인 출신의 화가 호안 미로(1893∼1983)가 한 말이다. 예술가의 창조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게 감상자의 수용이란 것이다. 제아무리 훌륭한 예술작품도 감상자의 마음 밭에 뿌려져 풍요로운 결실을 맺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런 점에서 창조의 과정에서 창작자 못지않게 중요한 존재가 감상자다. 창조의 가치를 결정하는 궁극적인 존재가 감상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미술의 선구자 마르셀 뒤샹(1887∼1968)은 이런 말을 했다. “예술가만이 유일하게 창조 행위를 완성하는 것은 아니다. 작품을 외부세계와 연결시켜주는 것은 관람객이기 때문이다. 관람객은 작품이 지닌 심오한 특성을 해독하고 해석함으로써 창조적 프로세스에 고유한 공헌을 한다.” 이렇게 중요한 존재가 감상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예술적 창조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감상자는 매우 주변적이고 수동적인 존재로 취급받았다. 이는 명백한 잘못이다. 소비자가 없는 상품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감상자가 없는 예술은 아무 의미가 없다. 새로운 가치가 만들어졌을 때 그 가치가 가치 있다고 판별하는 존재는 기업이나 예술가가 아니라 소비자와 감상자다. 그런 점에서 근래 들어 세계적으로 감상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제고되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다행스러운 일이다. △감상자 없는 예술은 의미 없어…‘감상의 가치’ 새롭게 인식 그 흐름의 하나가 ‘슬로우아트운동’(Slow Art Movement)이다. 슬로우아트운동은 미국의 컨설팅회사 ‘크리에이티브 굿’(Creative Good)의 CEO 필 테리가 2008년 고안한 미술감상운동이다. 테리는 뉴욕의 유태인박물관에서 한스 호프만(1880∼1966)과 잭슨 폴록(1912∼1956)의 추상화 두 점을 몇 시간 동안 넋이 빠진 듯 보다가 이 운동을 생각해내게 됐다. 대부분의 미술관 관람객은 작품을 진득하게 보지 않는다. 2001년 부부 교육학자인 제프리 스미스와 리사 스미스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 6점의 걸작을 대상으로 한 ‘관람객 감상실태’ 조사에 따르면, 관람객이 작품 한 점당 쏟은 감상시간은 평균 17초였다. ‘소셜미디어’의 시대에는 17초도 긴 시간이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데 불과 17초만 쓴다는 것은 관람객 대부분이 제대로 된 감상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테리는 미술감상이 지닌 무한한 가치를 사람들이 충분히 얻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2009년 뜻을 같이하는 16곳의 미술관과 함께 ‘슬로우아트데이’(Slow Art Day)를 공식적으로 출범시켰다. 매년 하루를 정해 진행하는 슬로우아트데이 행사에서는 행사에 동의한 관람객들이 자원봉사자의 인솔 아래 다섯 점의 작품을 하나당 10분 이상씩 모두 한 시간가량 감상하게 된다. 감상을 마친 관람객들은 삼삼오오 모여 점심을 함께하며 자신의 감상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미국 매사추세츠주 노먼록웰박물관이 진행한 ‘2019년 슬로아트데이’ 포스터. 미국의 일상생활을 대중적으로 표현해 미국인에게서 많은 사랑을 받은 화가이자 삽화가인 노먼 록웰(1894∼1978)의 1955년 작 ‘아트비평’(Art Critic)을 슬로우아트데이와 연결한 재치가 엿보인다(사진=노먼록웰박물관 홈페이지).이 감상에서 중요한 것은 미술관 쪽에서 사전에 작품에 대한 배경 지식이나 정보를 전혀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관람객은 오로지 작품과 일대일로 마주해 자신의 감관으로만 작품을 느끼고 그 안에 몰입해 명상에 가까운 감상을 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자신만의 시각과 관점에 기초해 주체적으로 감상을 하는 것이다. 창의적인 해석과 연상이 이어지고, 다른 관람객들과 토론까지 하다 보면 갖가지 신선한 영감과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2019년까지 세계에서 모두 1500가지 이상의 이벤트가 이 운동의 일환으로 열렸다. 아쉬운 것은, 우리나라의 미술관이 이 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야기를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기업, 소비자의 미적 욕구 못 채우면 도태될 수밖에”일본의 미술관 가운데서는 이 슬로우아트 개념을 비즈니스맨을 위한 감상프로그램에 특화해 적용한 사례도 있다.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의 ‘미술관에서의 대화’(Dialog in the Museum)라는 프로그램이 그것이다. 지난해부터 시작한 이 프로그램은, 신청자를 다섯 명씩 여섯 개 그룹으로 나눠 한 시간 동안 미술관의 소장품 세 점을 감상하게 했다. 각 그룹에는 스태프를 한 사람씩 배치하는데, 이들은 대화를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이 프로그램이 슬로우아트데이 프로그램과 다른 점은, 슬로우아트데이에서는 먼저 감상을 하고 나중에 모여 토론을 하지만, 이 프로그램에서는 한 시간 동안 감상과 대화가 함께 이뤄진다는 것이다. 물론 이 프로그램도 사전에 작품에 대한 정보를 주지는 않는다. “미술에는 정답이 없다”가 이 프로그램의 ‘그랜드 룰’이다. 스태프는 주로 질문을 던져 참가자의 의문이나 깨달음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하며, 자율적인 반응을 충분히 이끌어냈다고 판단하면 준비한 작품 정보를 건네준다. 이렇게 감상을 마친 뒤에는 ‘미술감상이 왜 비즈니스에 필요한지’에 대해 일본 최고의 전략 컨설턴트로 꼽히는 야마구치 슈의 강의를 듣는다.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의 주임연구원인 이치조 아키코는 이 프로그램의 초점이 “평론가나 미술사학자가 작품에 부여하는 가치의 맥락이 아니라, 참여자로서 나에게 그 작품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에 있다”고 말한다. 이런 주체적인 감상을 통해 자신만의 미의식을 단련함으로써 비즈니스 활동에 도움이 되는 직관력과 직감력을 기를 수 있다는 것이다.이 프로그램의 공동개발자이기도 한 야마구치는 일본 내에서 ‘미의식의 제고를 통한 비즈니스 역량의 확대’를 주창해온 선구자로 유명하다. 그의 저서 ‘세계의 리더들은 왜 직감을 단련하는가’(2017)는 우리말 번역본으로도 나와 있다(우리말로는 ‘직감’이라고 했지만, 책의 일본어 원제는 ‘미의식’이다).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미술관이 ‘2018년 슬로우아트데이’ 감상작품으로 선정한, 프랑스 화가 에두아르 뷔야르(1868∼1940)의 ‘집안의 헤셀 부인’(Madame Hessel at Home·1908). 휴스턴미술관 소장.야마구치는 비즈니스 종사자들이 미의식을 키워야 하는 이유가 “논리·분석·이성에 발판을 둔 경영, 이른바 ‘과학 중시의 의사결정’으로는 요즘처럼 복잡하고 불안정한 세계에서 비즈니스를 리드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짚는다. 이와 관련해 세계의 수많은 기업과 사람을 인터뷰한 야마구치는, 오늘날 대부분의 기업이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정보처리 능력을 갖춰 오히려 차별화가 소실된 현실, 그리고 세계시장이 자기실현적 소비의 장이 된 까닭에 기업이 소비자의 상상력과 미의식에 기초한 미적 욕구를 채우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세계의 엘리트들로 하여금 미의식을 단련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영국 명문 미술대, MBA 코스 개설…디자인적 사고로 경영 능력 키우게 그래서 포드, 비자, 글락소스미스클라인, 후지츠 등 세계 굴지의 기업들은 자사의 경영 후보들을 세계 대학 순위에서 미술·디자인 분야 1위인 영국 왕립미술대학원에 보내 트레이닝을 받게 하고, 미국 스탠퍼드대에서는 ‘디자인사고 프로그램’을 개설해 리더들로 하여금 리더십과 창조성을 연계해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키우도록 돕고 있다. 보다 본격적으로는 2017년 영국 런던예술대 산하의 센트럴세인트마틴스칼리지가 명문 미술대로는 처음으로 MBA 코스를 개설해 디자인적 사고에 기초한 경영 능력의 증진을 체계적으로 꾀하고 있다. “핵심적인 비즈니스 스킬과 미술·디자인대학의 창의성과 실험정신을 결합한 것”이 이 코스의 요체라고 담당교수 제러미 틸은 설명한다. 런던대의 브릭벡칼리지가 이 진취적인 코스의 협업대학으로 함께하고 있다. 이 모든 현상은 이제 관람객의 입장에서 미술을 수용하고 소비하는 것이 더 이상 단순한 수동적 감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우 광범위하고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활동임을 말해준다. 진취적이고 주체적인 해석을 통한 창조성의 발현, 나아가 비즈니스 현장에서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혁신적으로 시장을 개척하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능력의 배양까지 말이다. 미술과 디자인은 이제 더 이상 ‘알면 좋은 세계’가 아니다. ‘꼭 알고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할 세계’다. ※ 슬로우아트(Slow Art) ‘느림의 미학’ 또는 ‘느림의 예술’을 뜻한다. 예술가보다는 감상자에게 권하는 개념이다. 예술작품을 대할 때 그저 ‘공무처리’하듯 경직된 시선으로 흘려보내지 말고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감상해보자는 취지를 반영한다. 실제 이를 미술감상에 적용한 것이 ‘슬로우아트운동’이고, 그 운동 안에서 구체적인 실천안을 마련한 것이 ‘슬로우아트데이’다. 미술관에 따라 또 작품·작가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관람객이 한 작품 앞에서 머무는 평균시간이 채 30초가 되지 않는다는 각성이 바탕이 됐다. 매해 하루(주로 4·5월에 열어왔다) 사전신청한 관람객이 행사에 참여하는 각 지역 미술관·갤러리를 방문해 5점의 미술작품을 최소 10분 동안 감상하게 하자는 게 기본 줄기다. 2009년 ‘슬로우아트데이’를 출범할 당시에는 미국·캐나다·유럽 등 16곳의 미술관·갤러리가 참여했으나 10주년을 넘기면서 세계 각국 166곳의 미술관·갤러리가 함께하고 있다. 미국 시카고의 현대미술관, 영국 런던의 테이트 모던, 벨기에 브뤼셀의 왕립미술관, 독일 함부르크의 쿤스트할레 등 유수의 미술관이 회원으로 등록돼 있다. 한국에서는 아직 참여하고 있는 곳이 없다. △이주헌 미술평론가는… 미술로 삶을 보고 세상을 읽는다. 좀 더 많은 이들이 미술을 통해 일상의 풍요를 누리도록 글 쓰고 강연하는 일이다. 소명으로 여긴다고 했다. 발단이 있다. 홍익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돌연 일간지 기자가 되면서다. 그림에 관심을 잃어서가 아니라 그림을 막은 생계 때문이었다. 낮에 일하고 밤에 그리자 했다. 하지만 ‘투잡’은 쉽지 않았다. 미술담당 기자생활에서 얻은 필력과 생각을 가지고 현장으로 나왔다. 미술을 대중과 제대로 연결하는 미술평론가의 ‘진정한’ 역할, 그것을 해보자 했다. 그렇게 가나아트 편집장을 하고, 학고재 관장을 오래 한 뒤 서울미술관 초대관장까지 지냈다. 지금은 양현재단 이사로 있으면서 온전히 글과 강연에만 집중하고 있다. 지은 책이 수십 권이다. 굳이 대표작을 꼽자면 ‘신화의 미술관’(2020), ‘리더의 명화수업’(2018), ‘역사의 미술관’(2011), ‘지식의 미술관’(2009), ‘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 1·2’(2005) 등이 있다.
2020.09.11 I 오현주 기자
<12> '단순화'의 힘…버리면 얻는다
  • [이주헌의 혁신@미술]<12> '단순화'의 힘…버리면 얻는다
  • 피터르 몬드리안이 시차를 두고 그린 나무 그림이다. 위에서부터 ‘저녁, 붉은 나무’(Evening, The Red Tree·1908∼10), ‘회색 나무’(Gray Tree·1911), ‘꽃 피는 사과나무’(Blossoming Apple Tree·1912). 네덜란드 출신으로 바실리 칸딘스키와 더불어 20세기 추상회화의 선구자로 꼽히는 몬드리안은 자연의 재현 요소를 없애고 ‘신조형주의’라 말하는 보편적 리얼리티를 구현했다. 후기로 갈수록 구성·색을 최대한 절제하고 단순화한 ‘기하학적 추상’에 이르는데, 3연작 격인 나무그림은 그 과정으로 가는 초기 단계인 셈이다. 네덜란드 헤이그 헤이그미술관 소장.미술은 사람을 움직였습니다. 밥으로만 채울 수 없는 풍요와 평화를 안겨줬으니까요. 그림의 힘이고 조각의 에너지입니다. 하지만 미술의 역할이 이뿐이라 한다면 미술을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문명을 이끌고, 의식을 뒤집고, 결정적으로 돈의 흐름을 주도했던, 그것을 못 본 겁니다. 미술의 사조와 양식이 탄생할 때마다 세계경제에는 ‘변화의 그림’이 걸렸습니다. 바로 ‘혁신’을 주도했던 겁니다.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이주헌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미술로 이룬 혁신’의 현장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상으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이주헌 미술평론가] “잡스는 버튼을 제거해 장치를 단순화했고, 기능을 줄여 소프트웨어를 단순화했으며, 옵션을 없애 인터페이스를 단순화했다. 그는 심플함을 향한 자신의 애정을 선불교의 참선 덕으로 돌렸다.” 스티브 잡스(1955∼2011)의 전기를 쓴 애스펀연구소의 CEO 월터 아이작슨이 잡스의 탁월함을 평하며 한 말이다. 잡스 또한 1983년 ‘애스펀디자인콘퍼런스’에서 이런 말을 했다. “매우 단순한 스타일, 우리는 실제로 뉴욕의 현대미술관에 전시될 만한 수준을 목표로 하고 있다. 회사의 운영방식, 제품 디자인, 홍보, 이 모든 것은 한 가지로 귀결한다. 단순하게 가자, 정말로 단순하게.” ‘단순화의 화신’ 잡스는 기존 휴대폰들이 기능을 파악하기도 힘들고 미로를 헤매고 다니는 것처럼 느껴지자 아이폰을 구상했다. 초등학생부터 할머니까지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휴대폰이 그에게는 복잡하고 불편한 허접쓰레기처럼 보였다. 게다가 카메라를 장착한 휴대폰의 등장으로 디지털카메라 시장이 급속히 축소하는 것을 본 잡스는 2005년 당시 애플 수익의 45%를 차지하던 아이팟도 그런 운명을 당할 수 있으리라 우려했다. 잡스는 직접 휴대폰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물리적인 버튼형 키패드를 떼어낸, 최초의 멀티터치 스크린 형식의 아이폰을 출시했다. 아이작슨은 잡스가 팀원들과 함께 “세부사항 하나하나에 몰두하고 회의를 거듭하며 다른 휴대폰들이 복잡하게 만든 것을 단순화하는 방법을 파악해” 이 위대한 성공을 이뤘다고 상찬했다. △포드, 표준모델 하나만 제작…자동차 가격 ‘단순화’‘무조건 심플’(Simplify)의 공동저자 리처드 코치와 그레그 록우드는 비즈니스 분야에서 “거의 모든 위대한 성공 신화는 단순화의 신화”라고 단언했다. 코치와 록우드는 잡스뿐 아니라 포드자동차의 창립자 헨리 포드, 펭귄북스 창립자 앨런 레인, 맥도날드 창립자 맥도널드 형제와 레이 크룩, 보스턴컨설팅그룹 창립자 브루스 헨더슨, 인터넷서점 아마존의 설립자 제프 베이조스, 이베이의 창립자 피에르 오미디야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업가가 단순화로 남다른 성공을 얻었을 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한다. 일례로 포드는 기존 제품을 재설계해 단순한 표준모델 하나만을 만듦으로써 자동차 가격을 매우 저렴하게 ‘단순화’했다. 이로 인해 “1920년 포드사의 자동차의 판매량은 1905년과 1906년에 비해 무려 781배나 증가했다.”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자동차를 소유할 수 있게 됐고 ‘자동차의 민주화’가 이뤄졌다. 당시 “포드사의 자동차색이 죄다 검정색인 이유가 조립라인의 속도를 따라잡을 만큼 빨리 마르는 페인트가 일본산 검정페인트밖에 없어서”였을 정도로 포드사는 싼값에 대량으로 생산하는 새로운 생산체제를 가동했고, 이 단순화의 노력은 엄청난 보상을 가져다줬다. 맥도날드 역시 메뉴의 다양성을 포기하고 재료공급과 식당운영, 음식조리와 서빙을 극도로 단순화함으로써 큰 성공을 거뒀다. 그로 인해 맥도날드는 패스트푸드 식당이란 개념을 최초로 보편화한 기업이 됐다. 맥도날드의 방식은 이후 햄버거뿐 아니라 치킨·피자전문점이 패스트푸드 식당으로 급성장하는 데 중요한 본보기가 됐다. 단순화는 본질적으로 가장 기본적인 원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물리학자이자 발명가인 미첼 윌슨은 과학적인 이해력도 단순화에 대한 감수성에 있다고 지적했다. “위대한 과학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을 말해본다면, 우선 매우 복잡한 것들을 이해하는 능력은 필요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다. 가장 복잡한 것처럼 보이는 무엇을 간과해서 한순간에 저변에 깔려있는 단순성을 파악해내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추상미술 ‘단순화의 가치’ 선명한 메시지 전달미술은 단순화의 중요성에 대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주는 예술이다. 특히 추상미술은 단순화의 힘과 가치에 대해 매우 강력하고도 선명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추상미술을 뜻하는 영어 ‘앱스트랙트 아트’(abstract art)의 앱스트랙트가 ‘추출하다’는 뜻을 지닌 데서 알 수 있듯 추상미술은 대상의 다른 것들은 다 사상하고 정수 혹은 중요한 특질을 뽑아내 표현하는 미술이다. 한마디로 지극한 단순성을 추구하는 예술인 것이다. 프랑스 화가 이브 클랭(1828∼1962)이 그린 ‘IKB 191’(1962). 하늘빛 혹은 바닷빛 푸른색으로 화면을 뒤덮어 무(無) 혹은 공(空)을 연상시킨다. ‘IKB’(International Klein Blue)는 푸른색뿐인 모노크롬(단색추상) 작품을 만들고 스스로 붙인 이름. 클랭은 푸른색을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자연세계에서 가장 추상적인 것”이라고 했다.미술사에서 추상미술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20세기 초의 일이나, 인간이 추상이미지를 조형의 형식으로 표현한 것 자체는 아주 오래됐다. 기원전 3만 9000년경 스페인의 엘 카스티요 동굴에 그려진 붉은 원반 무늬처럼 선사시대의 동굴벽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암흑기(기원전 900~700년) 그리스의 도기화처럼 기하학적 무늬로 장식한 고대의 도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디자인이나 장식 요소로서 추상무늬를 오래도록 사용해왔지만, 순수미술로서 추상화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100여년 전의 일이다. 미술, 특히 르네상스 이후의 서양미술은 사실의 재현을 중시해 그 특질을 고도로 발달시켰다. 그러던 서양미술이 19세기 낭만주의와 인상파를 거치면서 화면이 풀어지기 시작했고, 20세기에 들어 표현주의와 입체파를 거친 뒤에는 마침내 순수한 추상회화의 세계를 열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추상미술이 본질적으로 대상에서 특정한 한 가지 요소를 추출해 표현하는 미술이란 사실은 20세기 추상화의 선구자 피터르 몬드리안(1872∼1944)의 나무 주제 그림들에서 생생히 확인할 수 있다. 그는 1909년 작 ‘저녁, 붉은 나무’에서는 나무의 형태를 꽤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지만, 1911년 작 ‘회색 나무’에 이르면 상당히 단순화해 나타내고, 1912년 작 ‘꽃 피는 사과나무’에 와서는 거의 온전한 추상형태를 보여준다. 이 단계에서 좀 더 나아가면 예의 수직선과 수평선, 사각형의 색 면으로 이뤄진 엄격한 기하학적 추상에 도달하는 것이다. △“법칙은 단순…버릴 게 무엇인지 알아내라” 이렇게 대상을 지속적으로 단순화함으로써 몬드리안은 세계의 가장 근원적인 구성 형식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몬드리안은 자신이 포착하고자 한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자연은 그토록 활기 있게 끝없이 변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절대적인 규칙에 의해 움직인다.” 몬드리안의 이런 시각은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 또한 크게 공명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파인먼은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현상은 복잡하다. 법칙은 단순하다. … 버릴 게 무엇인지 알아내라.” 단순화한다는 것은 그만큼 많을 것을 버린다는 것이다. 추상미술은 산업화를 통해 절대빈곤에서 벗어난 인류가 마침내 ‘버림의 미학’에 의지해 ‘다다익선’(多多益善)이 아니라 ‘소소익선’(少少益善)의 가치를 내면화하고 확산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소익선은 오늘날 많은 분야에서 중요한 화두가 돼 있다. 이를테면 노트북이나 텔레비전의 중량 혹은 두께를 더 줄이기 위해 기업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것이나, 불필요한 가재도구를 버리고 최소한의 물건으로 생활하는 미니멀라이프가 점점 더 주목을 받는 현상 등이 그런 것이다. 이런 버림의 미학, 소소익선의 미학이 추상의 미학이라면, 사실 오늘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삶의 추상화(抽象化)’ 혹은 ‘일상의 추상화’ 물결에 동참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삶을 추상화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복잡한 체계에 현혹되지 않고 번다한 변수들을 제거함으로써 나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핵심적인 의미를 찾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추상미술은 우리에게 늘 불필요한 삶의 무게를 덜어내라고 시그널을 보내주는 나침반 같은 예술이라 하겠다. ※ 엘 카스티요 동굴벽화(El Castillo Cave Paintings)스페인 북부 엘 카스티요 지역의 동굴에서 ‘손바닥 스텐실(물체를 대고 염료를 뿌려 윤곽을 그리는 그림)’과 ‘붉은 원반’ ‘동물’ 등을 그린 벽화가 발견된 것은 2012년. 기원전 3만 9000∼4만 800년경에 그린 것으로 추정했다. 당시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던 ‘알타미라 동굴벽화’보다 2만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는 연대결과를 두고 고고예술학계는, 현대인류 조상의 최고(最古) 예술품이라고 흥분했다. 이후 인도네시아 술레웨시섬과 보르네오섬에서 잇따라 더 오래된 동굴벽화가 발견되며 ‘가장 오래된’이란 타이틀은 내줘야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엘 카스티요 동굴벽화가 가진 예술적 의미는 적지 않다. 특히 주목할 것은 ‘붉은 원반’. 구상이 아닌 추상의 이미지가 등장했다는 점이다. 조야하고 거친 형태로 그저 점과 점에 가깝지만, 그래서 100년 전 본격화한 정교한 추상화와도 거리가 멀지만, 단순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태생적 예술성은 근원이 깊다는 뜻이다. 참고로 동굴벽화의 연대는 탄산칼슘(석회암 주성분) 시료를 얻은 뒤 우라늄-토륨 방사성 연대측정법을 이용해 측정한다. 땅에서 출토돼 지층정보를 살필 수 있는 석기 등 유물과 달리, 벽화는 연대를 직접 알아내기 어려워 벽면에 쌓인 탄산칼슘의 연대로 그림나이를 추정한다. 2012년 스페인 북부 엘 카스티요 동굴에서 발견된 ‘붉은 원반’ 그림. 엘 카스티요 동굴벽화에는 이외에도 ‘손바닥 스텐실’과 ‘동물’ 그림’ 등이 남아 있다. 고고학자들은 이 벽화가 네안데르탈인이 그린 것일 가능성도 점쳤다.△이주헌 미술평론가는… 미술로 삶을 보고 세상을 읽는다. 좀 더 많은 이들이 미술을 통해 일상의 풍요를 누리도록 글 쓰고 강연하는 일이다. 소명으로 여긴다고 했다. 발단이 있다. 홍익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돌연 일간지 기자가 되면서다. 그림에 관심을 잃어서가 아니라 그림을 막은 생계 때문이었다. 낮에 일하고 밤에 그리자 했다. 하지만 ‘투잡’은 쉽지 않았다. 미술담당 기자생활에서 얻은 필력과 생각을 가지고 현장으로 나왔다. 미술을 대중과 제대로 연결하는 미술평론가의 ‘진정한’ 역할, 그것을 해보자 했다. 그렇게 가나아트 편집장을 하고, 학고재 관장을 오래 한 뒤 서울미술관 초대관장까지 지냈다. 지금은 양현재단 이사로 있으면서 온전히 글과 강연에만 집중하고 있다. 지은 책이 수십 권이다. 굳이 대표작을 꼽자면 ‘신화의 미술관’(2020), ‘리더의 명화수업’(2018), ‘역사의 미술관’(2011), ‘지식의 미술관’(2009), ‘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 1·2’(2005) 등이 있다.
2020.09.04 I 오현주 기자
<11> 때로는 무의식에 기대라 더나은 선택으로 이끌리
  • [이주헌의 혁신@미술]<11> 때로는 무의식에 기대라 더나은 선택으로 이끌리
  • 이브 탕기가 그린 ‘불분명한 가분성’(Indefinite Divisibility·1942). 프랑스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한 탕기는 초현실주의 원칙을 가장 충실하게 따른 화가로 꼽힌다. 끝없는 수평선, 시간을 초월한 몽상적 요소를 배경으로 기묘한 형상의 생물과 광물, 또 태곳적 바위와 화석 등을 채운 기괴하고 비현실적인 공간을 표현했다. ‘불분명한 가분성’은 진공상태의 꿈속 같은 공간을 묘사한 숱한 작품 중 한 점. 탕기의 화풍은 이후 미국 전위미술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미국 뉴욕 버펄로 올브라이트 녹스 미술관 소장.미술은 사람을 움직였습니다. 밥으로만 채울 수 없는 풍요와 평화를 안겨줬으니까요. 그림의 힘이고 조각의 에너지입니다. 하지만 미술의 역할이 이뿐이라 한다면 미술을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문명을 이끌고, 의식을 뒤집고, 결정적으로 돈의 흐름을 주도했던, 그것을 못 본 겁니다. 미술의 사조와 양식이 탄생할 때마다 세계경제에는 ‘변화의 그림’이 걸렸습니다. 바로 ‘혁신’을 주도했던 겁니다.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이주헌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미술로 이룬 혁신’의 현장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상으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이주헌 미술평론가] 화가들은 창작활동을 하면서 머리가 생각만큼 유능하지 못하다는 사실에 곧잘 좌절하곤 한다. 기억을 하든 계산을 하든 일상에서는 그리도 유용한 머리가 그림을 그릴 때는 창조 프로세스에 오히려 걸림돌이 될 때가 많다. 그래서 미술가들, 특히 현대미술가들은 아예 이성이나 의식의 체계로부터 일탈해 파괴적이고 해체적인 작품을 많이 제작했다. 그 대표적인 미술이 초현실주의 미술이다. 유럽 문명이 큰 위기에 처했던,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에 생겨난 데서 알 수 있듯, 초현실주의는 계몽주의 이래 계속돼온 서양의 합리주의를 배격하고 우리 내면의 저 깊은 심연, 곧 무의식으로부터 창조의 영감을 길어올린 미술이다. 르네 마그리트(1898∼1967), 살바도르 달리(1904∼1989), 호안 미로(1893∼1983), 이브 탕기(1900∼1955) 등 대표적인 초현실주의 미술가들의 작품을 보노라면 마치 꿈속으로 들어가 몽롱하고 초월적인 시공간을 체험하는 듯하다. 이 표현을 위해 초현실주의는 이성과 의식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다양한 기법을 개발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오토마티슴’과 ‘데페이즈망’이다. 자동기술법(自動記述法)으로 번역하는 오토마티슴은 무의식적 상태에서 손이 가는 대로 즉흥적으로 형상을 만드는 기법을 말한다. 또 흔히 전치(轉置)로 번역하는 데페이즈망은 특정한 대상을 상식의 맥락에서 떼어내 이질적인 상황에 배치함으로써 기이하고 낯선 장면을 연출하는 기법을 말한다. 초현실주의 문학의 선구자 로트레아몽(1846∼1870)의 시에 “재봉틀과 양산이 해부대에서 만나듯이 아름다운”이란 표현이 있는데, 바로 이것이 전형적인 데페이즈망적 표현이다. 해부대 위에 재봉틀과 양산이 놓여 있다는 사실이 통념에 맞지 않지만, 바로 그 기이함으로 인해 이를 본 관객은 고정관념을 벗어나 새로운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데페이즈망’ 특정 대상을 이질적 상황에 배치이 데페이즈망을 가장 잘 활용한 화가가 마그리트와 달리다. 대중에게도 인기가 높은 두 사람은 대상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구상화가였으나, 그들이 데페이즈망에 의지해 그린 화포 위의 세상은 기이하고 불가사의한 현상으로 가득차 있다. 이를테면 바다 위 공중에 커다란 바위가 떠 있거나(‘피레네의 성’), 해변에 상체는 물고기인데 하체는 여인인 존재가 누워 있는(‘집단적 창안’) 마그리트의 그림과, 시계들이 흐물흐물하게 축 늘어져 있거나(‘기억의 지속’), 여인의 몸이 사람의 얼굴이 되는(‘겁탈’) 달리의 그림이 그런 것들이다. 그야말로 해부대 위에 재봉틀과 양산이 만난 것처럼 기묘한 그림들이다. 역시 기이하긴 해도 마그리트나 달리와는 달리, 구상이 아닌 추상으로 초현실주의를 추구한 화가들이 있다. 미로와 탕기 같은 이들이 그들이다. 탕기의 그림 ‘불분명한 가분성(可分性)’을 보자. 도대체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 같은 공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물들이 기묘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 공간 안에는 생명체가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이것들은 스스로 이런 형태를 이룬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가 이렇게 만들어 놓고 사라진 것일까. 우리의 의식 아래 심연으로 들어가면 이런 신비한 공간과 비일상적인 사물들이 존재할 것만 같다. 초현실주의의 세계는 이렇듯 끝없이 우리의 의식을 흔들어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달리, 낮잠 자다 갑자기 깨어나 꿈속 이미지 그려초현실주의 미술가들은 어떻게 이처럼 기이한 세상을 창조할 수 있었을까. 여기서 달리의 방법론을 한 번 살펴보자. 달리는 낮잠을 자다 갑자기 깨어나는 방법으로 무의식을 창작에 활용했다. 달리는 의자에 앉아 낮잠을 자곤 했는데, 잠들기 전 한 손에 반드시 숟가락이나 열쇠를 들고, 그 아래 바닥에는 금속 쟁반을 가져다 놓았다. 잠이 들면 손에 힘이 빠지고 숟가락이나 열쇠가 쟁반으로 떨어지기 마련이니, 그 요란한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나게 된다. 달리는 그때 바로 옆에 놓아둔 연필을 집어들고 방금 꾼 꿈속의 이미지들을 재빨리 스케치했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달리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독특한 상상의 세계를 창조했다. 미국 사진가 필리프 홀스먼(1906∼1979)이 촬영한 ‘달리 아토미쿠스’(1948). 홀스먼이 절친이었다는 살바도르 달리를 쵤영한 ‘초현실주의 인물사진’이다. 홀스먼의 조수들까지 합세해 고양이 세 마리와 물 한 양동이를 공중에 던지고, 그림을 그리던 달리가 붓을 든 채 점프를 하는, 절묘한 순간을 의도하고 포착했다. 6시간 동안 28차례 반복해 완성했다는 작품이다.초현실주의 미술에 관심이 많은 미국의 창의력 컨설턴트 마이클 미칼코는 비즈니스맨들에게 달리의 이 아이디어 착상법을 그대로 활용해보라고 권해왔다. 그의 조언을 받은 한 장례식장 경영자는 달리의 방식대로 잠자던 중간에 깨어 꿈을 기록했는데, 어느 날 꿈에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며 담소하는 장면과 잡화점을 봤다고 한다. 이 꿈을 기록한 그는 자신의 증조할아버지가 잡화점을 운영했고, 동네 사람들이 그곳에서 커피를 즐겨 마셨으며, 그 잡화점 한쪽에 만든 장례식장이 성장해 4대째 가업으로 이어져 내려왔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됐다. 이 기억의 환기는 그로 하여금 장례식장에 커피 코너를 만드는 것으로 나아가게 했다. 그렇게 해서 스타벅스 커피점이 그의 장례식장에 부속시설로 들어서게 됐다. 지금은 스타벅스 외에 비즈니스 공간, 관람실, 예배당 등이 어우러져 그의 장례식장은 삶과 죽음이 평화롭게 교차하는 곳, 곧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음’[生死一如]을 실존적으로 체험하는 곳이 됐다. 장례식장의 커피숍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사람들은 고인을 회고하고 또 자신을 돌아보며 인생의 의미에 대해 평화롭게 숙고해보는 시간을 갖게 된 것이다. 그의 장례식장은 그만큼 ‘인기 장례식장’이 됐다고 한다. 이처럼 무의식의 힘을 빌리면 비즈니스에서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결정을 하는 데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미국 노스웨스턴대 켈로그 경영대학원의 로란 노드그렌 교수와 네덜란드 라드바우드대의 압 데익스테르하위스 교수는 이 주제를 파고들어 ‘무의식적 사고이론’(Unconscious Thought Theory)을 세웠다. 이 이론에 따르면 무의식은 우리가 뭔가 선택할 때보다 유익한 선택을 하게 하고 문제를 풀 때보다 효과적으로 풀게 한다. △무의식, 문제와 관련된 사고의 ‘인큐베이팅’ 시작 두 교수는 사람들에게 정보를 주고 선택이나 결정을 하게 하는 다양한 실험을 했는데, 일례로 네 개의 아파트에 대한 정보를 주고 가장 좋은 아파트를 고르게 하는 식이었다. 이들은 피실험자를, 많은 정보와 이에 대해 연구할 충분한 시간을 준 그룹, 같은 정보를 주지만 짧은 시간을 준 그룹, 정보와 충분한 시간을 주지만 결정하기 전 주의를 딴 데로 돌리게 한 그룹 등 셋으로 나눴다. 첫 번째 그룹은 시간이 충분한 만큼 대부분 분석을 시도했다. 두 번째 그룹은 시간이 없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즉흥적 선택을 했다. 아무래도 첫 번째 그룹이 두 번째 그룹보다 평균적으로 더 좋은 선택을 했다. 그런데 가장 성적이 좋은 그룹은 이 첫 번째 그룹이 아니라 항상 세 번째 그룹이었다. 왜일까. 세 번째 그룹은 주의를 딴 데로 돌린 탓에 도리어 ‘무의식이 판단 과정에 개입하는 이점’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의식의 결정 과정에 무의식이 개입하면 보다 좋은 선택이나 좋은 결정을 하게 된다. 그래서 두 교수는 기업이 회의나 의사결정을 할 때 가능하면 두 단계로 나눠서 해볼 것을 제안한다. 정보를 모으고 분석하며 토론하는 과정이 하나고, 그것에 대해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는 과정이 다른 하나다. 둘은 분리하는 게 좋다. 그러니까 그 사이에 산책을 하거나 낮잠을 자거나 다른 활동을 함으로써 무의식이 개입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더욱 바람직한 것은 충분히 회의를 하고 파한 뒤 다음 날 아침에 다시 모여 결정을 해버리는 것이다. 의식이 문제로부터 벗어나면 무의식이 문제에 개입한다. 우리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지만 그 시간 동안 무의식이 문제와 관련된 사고의 ‘인큐베이팅’을 시작해 의식보다 더 양호하게 문제의 복잡성과 장단점을 파악한다고 한다. 결국 최종적으로 보다 나은 결정이 이뤄지는 것이다. 초현실주의 미술이 보여주듯 무의식은 이처럼 창조와 혁신의 중요한 동력이다. ※ 로트레아몽(1846∼1870)프랑스 시인이다. 본명은 이지도르 루시앙 뒤카스(Isidore-Lucien Ducasse). 아버지가 우루과이 수도 몬테비데오에서 프랑스 영사관의 부영사로 재직하던 중 태어났다. 몬데비데오에서 소년시절을 보내고 13세에 부모의 고향인 프랑스 타르브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진학과 졸업은 제대로 했는지, 남아있는 기록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작가를 꿈꿨던 그는 1868년 시집 한 권을 자비로 출판했는데, 초현실주의자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미친 ‘말도로르의 노래’다. 그때 쓴 필명이 ‘로트레아몽 백작’. 그러나 시집은 출간 당시 독자·평론가 어느 쪽에도 주목받지 못했고, 출판사는 내용이 우울하고 음침하다는 이유로 절판해버렸다. 이후에도 로트레아몽은 변변한 평가나 비평적 성공을 받지 못했는데, 그 좌절 때문인지 24세 나이에 요절했다. 결국 로트레아몽이 초현실주의 문학가와 예술가에게 재발견돼 근대시의 선구자로 추앙받은 건 사후의 일이다. 특별히 초현실주의 미술과 연결이 된 것은 화가 살바도르 달리가 ‘말도로르의 노래’를 연작 삽화로 그리면서다. ‘초현실주의의 기본 태도’로까지 회자하며 20세기 중반까지 자주 인용된 “재봉틀과 양산이 해부대에서 만나듯이 아름다운”이란 시구 역시 ‘말도로르의 노래’에 나온다. △이주헌 미술평론가는… 미술로 삶을 보고 세상을 읽는다. 좀 더 많은 이들이 미술을 통해 일상의 풍요를 누리도록 글 쓰고 강연하는 일이다. 소명으로 여긴다고 했다. 발단이 있다. 홍익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돌연 일간지 기자가 되면서다. 그림에 관심을 잃어서가 아니라 그림을 막은 생계 때문이었다. 낮에 일하고 밤에 그리자 했다. 하지만 ‘투잡’은 쉽지 않았다. 미술담당 기자생활에서 얻은 필력과 생각을 가지고 현장으로 나왔다. 미술을 대중과 제대로 연결하는 미술평론가의 ‘진정한’ 역할, 그것을 해보자 했다. 그렇게 가나아트 편집장을 하고, 학고재 관장을 오래 한 뒤 서울미술관 초대관장까지 지냈다. 지금은 양현재단 이사로 있으면서 온전히 글과 강연에만 집중하고 있다. 지은 책이 수십 권이다. 굳이 대표작을 꼽자면 ‘신화의 미술관’(2020), ‘리더의 명화수업’(2018), ‘역사의 미술관’(2011), ‘지식의 미술관’(2009), ‘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 1·2’(2005) 등이 있다.
2020.08.28 I 오현주 기자
<10> 이토록 색다른 빛, 집요한 관찰이 빚었다
  • [이주헌의 혁신@미술]<10> 이토록 색다른 빛, 집요한 관찰이 빚었다
  • 클로드 모네가 그린 ‘루앙대성당’(Rouen Cathedral) 연작 중 두 점. 프랑스 서북부 노르망디 루앙에 위치한 대성당의 풍경을 맑은 날 햇볕이 쏟아질 때(왼쪽·1894)와 해가 질 무렵(오른쪽·1894)에 각각 잡아냈다. 이전까지 서양미술이 총체적이고 일반적인 ‘사실적 묘사’에 공을 들였던 데 반해 모네는 마주친 대상을 그 순간 ‘보이는 대로’ 그리려 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의 효과를 관찰·구상해 시간별·계절별로 그려낸 연작은 그렇게 나왔다. 프랑스 파리 오르세미술관, 영국 카디프 국립박물관 소장.미술은 사람을 움직였습니다. 밥으로만 채울 수 없는 풍요와 평화를 안겨줬으니까요. 그림의 힘이고 조각의 에너지입니다. 하지만 미술의 역할이 이뿐이라 한다면 미술을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문명을 이끌고, 의식을 뒤집고, 결정적으로 돈의 흐름을 주도했던, 그것을 못 본 겁니다. 미술의 사조와 양식이 탄생할 때마다 세계경제에는 ‘변화의 그림’이 걸렸습니다. 바로 ‘혁신’을 주도했던 겁니다.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이주헌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미술로 이룬 혁신’의 현장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상으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이주헌 미술평론가] 윌리엄 블레이크, 요한 볼프강 괴테, 길버트 체스터턴, 토머스 하디, 브론테 자매, 미하일 레르몬토프, 앨프레드 테니슨, 존 로널드 톨킨, 브루노 슐츠, 헤르만 헤세, 헨리 밀러. 이들 문인의 공통점은? 모두 그림을 그려 본 사람들이란 것이다. 이들은 뛰어난 관찰력을 보여준 문인이고, 그들의 그런 능력과 미술작품 제작의 경험은 깊은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 미술이 관찰능력을 향상시켜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사물을 시각적으로 재현하기 위해서는 무수히 많이 보고 또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1840∼1926)의 만년을 기록한 필름 중에는 모네가 지베르니정원에서 연못을 바라보며 그림을 그리는 장면이 있다. 20세기 초에 촬영한 무성 흑백필름이어서 움직임이 약간 빨라 보이기는 하지만, 1분 15초 동안 모네는 무려 23차례나 연못 쪽을 바라봤다. 그리는 것보다 보는 데 시간을 더 들인 셈이다. 모네는 그토록 집요한 관찰자였고, 바로 그 관찰능력으로 근대미술의 거장으로 우뚝 섰다. △인상파 화가들, 그리는 것보다 보는 데 시간 더 들여 모네뿐 아니라 인상파 화가들은 대부분 관찰의 대가였다. 그런 점에서 인상파 미술은 진정한 관찰이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생생히 가르쳐주는 미술이라 할 수 있다. 진정한 관찰은 단순히 사물의 외양을 파악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사물의 질서를 꿰뚫어보고 오리지널한 시각에서 그 질서를 이해하도록 만든다. 그럼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도록 이끈다. 인상파 미술은 바로 그 특질을 선명히 드러내 보인 미술이라 할 수 있다. 인상파 회화는 흔히 ‘빛의 회화’라고 한다. 인상파 화가들은 빛을 묘사하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그 이전 화가들이 빛의 표현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옛 화가들은 빛과 대상을 분리해 사고했다. 대상은 대상대로 존재하고 빛은 그 위에 덧씌운 막처럼 인식했다. 옛 화가들에게 궁극의 주제는 언제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인상파 화가들의 인식은 달랐다. 그들에게는 대상이 아니라 빛이 그림의 주제였다. 그들은 우리의 눈이 지각하는 게, 대상이 아니라 대상에 반사돼 나온 빛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렇다면 시각예술로서 미술은 당연히 다른 무엇보다 빛을 표현해야 했다. 그것이 인상파 화가들의 생각이었다. 인상파 화가들이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이전의 그 어떤 화가들보다 야외에서 오랜 시간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인상파 화가들은 선배 화가들에 비해 자연을 훨씬 깊이 관찰했고, 빛의 성격과 특질에 대해서도 근원적인 성찰을 했다. 인상파 이전의 서양화가들은 대부분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렸다. 풍경화조차 말이다. 물론 처음 구상을 위해서는 야외로 나가 종이에 스케치를 하곤 했지만, 본격적인 유화 작업은 작업실로 돌아와 시작했다. 그래서 인상파 이전의 풍경화는 빛을 관념적으로 혹은 상투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모네·르누아르·피사로…같은 빛 관찰하고도 저마다 뚜렷한 개성 반면 인상파 화가들은 심지어 눈비를 맞아가면서도 현장에서 그렸다. 모네는 겨울이면 손난로를 준비해 나갔고, 바람이 드센 벼랑에서 그릴 때는 줄로 이젤과 몸을 바위에 묶었다. 대작을 그리느라 윗부분을 칠하기 어려울 때는 땅에 참호를 파 캔버스를 그 안에 내린 뒤 그리기도 했다. 이처럼 늘 치열하게 눈앞의 상황을 보고 그렸다. 야외작업에 경계가 없던 모네는 심지어 배 위에서도 그림을 그렸다. 에두아르 마네(1832∼1883)가 그린 ‘보트 아틀리에에서 작업하는 모네’(1874)다. 독일 뮌헨 노이에 피나코텍 소장.이 과정을 통해서 인상파 화가들은, 빛 하면 사람들이 상투적으로 떠올리는 평온한 날의 날빛뿐 아니라 온갖 표정의 자연빛을 관찰하고 표현하게 됐다. 빛을 그리며 그들이 깨달은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는, 빛은 끝없이 변하고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모네는 ‘루앙대성당’ 연작을 30여점 그렸는데, 성당은 같은 건물이어도 풍경 속의 빛은 새벽, 아침, 한낮, 오후, 해질 무렵, 안개 끼었을 때, 비가 올 때, 봄, 여름, 가을, 겨울, 순간순간 다 다르다. 그런 까닭에 이 시리즈의 진정한 주제는 성당이 아니라 빛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렇게 자연의 빛을 똑같이 관찰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화가들의 그림이 서로 매우 달라졌다는 것이다. 모네와 르누아르(1841∼1919), 피사로(1830∼1903), 드가(1834∼1917), 세잔(1839∼1906) 등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은 저마다 뚜렷한 표현의 차이와 개성을 보여준다. 동일한 빛을 관찰하고 표현했는데, 왜 이런 개성과 차이가 나타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은 이들이 그만큼 진득하고 진정한 관찰을 했다는 데 있다. 진득한 관찰은 차이와 차별화를 낳는다. 창의력 연구가인 로버트 루트번스타인과 미셸 루트번스타인 부부는 “객관적 관찰은 가능하지 않다”고 단언한다. 이들에 따르면 관찰자는 자신이 지닌 정신적 편견과 개인적인 경험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이것이 “관찰은 생각의 한 형태이고 생각은 관찰의 한 형태”인 이유다. 관찰이 진득하게 진행되면 될수록 관찰자는 그만의 고유한 편견과 경험에 따라 남이 못 보는 것을 보게 되고 남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창조와 혁신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 실례로 루트번스타인 부부는 비타민C를 발견한 생화학자 알베르트 스젠트 기요르기(1893∼1986)의 경험을 든다. 기요르기는 색채를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는데, 그의 이런 성향이 그로 하여금 무언가를 관찰할 때 자꾸 색채에 주목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상할 때 색깔이 변하는 과일(바나나 등)과 그렇지 않은 과일(오렌지 등)이 있다는 사실이 눈에 띄었다. 그는 식물의 폴리페놀이란 화합물이 산소와 작용해 과일을 갈색이나 검은색으로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렇다면 색깔이 변하지 않는 과일은 또 왜 그리된 걸까. 폴리페놀이 산소와 작용해서 산화하는 것을 막아주는 다른 화합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비타민C였다. 결국 색채의 차이에 대한 그의 관심이 비타민C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그가 만약 색채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면 이 위대한 발견의 기회를 놓쳤을 것이다. 관찰은 이처럼 관찰자의 개인적 경험과 성향에 따라 ‘유니크’한 결과를 내놓게 만든다. △“혁신가는 본질적으로 관찰자”…관찰, 가장 나다운 혁신 가능케 해 우리가 흔히 찍찍이라고 부르는 벨크로 테이프도 관찰자의 취향과 주의 깊은 관찰이 어우러져 탄생한 상품이다. 스위스의 전기기술자 조르주 드 메스트랄(1907∼1990)은 사냥을 무척 좋아했다. 어느 날 토끼를 잡으러 숲에 갔다가 옷에 산우엉가시가 잔뜩 붙어버렸다. 옷을 털어도 보고 세게 흔들어도 보았으나 가시는 잘 떨어지지 않았다. 사냥꾼답게 집요한 관찰자였던 그는 결국 확대경까지 들이댔다. 아니나 다를까. 가시의 모양이 갈고리 형태여서 한 번 들러붙으면 웬만해서는 떨어지지 않는 구조였던 것이다. 이를 확인한 순간, 그의 머리에는 갑자기 이 원리를 응용한 기능성 테이프 상품이 떠올랐다. 바로 벨크로 테이프였다. 이렇게 해서 지퍼와 단추, 끈의 역할을 상당 부분 대체한 벨크로 테이프가 탄생했다. GE는 어린이에 대한 애정이 많은 디자이너의 관찰 덕에 CT 촬영기를 어린이 친화적으로 ‘진화’시킬 수 있었다. 어린이는 CT 촬영을 대부분 두려워한다. 한 병원에서 CT 촬영기 앞에서 오열하는 아이를 본 GE의 디자이너는 자신의 디자인팀을 데리고 어린이 미술관 등 어린이 시설로 찾아가 아이들이 사물에 접근하는 모습을 집중적으로 관찰했다. 그 결과 CT 촬영실을 해적의 방으로 꾸미고 촬영기를 해적선으로 변모시키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이 방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어린이 환자 중 80%가 진정제를 투여받고 CT 촬영을 했는데, 이후 그 숫자는 20%로 줄어들었다. 이 사례를 언급하며 세계적인 경영대학원 인시아드의 교수인 할 그레거슨은 “혁신가는 본질적으로 관찰자”라고 말했다. 이처럼 관찰은 대상을 발견하고 이해하는 행위인 동시에 나 자신의 잠재력과 독창성을 확인하는 행위다. 관찰은 가장 나다운 혁신을 가능하게 한다. 이젤·캔버스 등 짐을 잔뜩 메고 야외작업에 나서는 세잔. 인상파 화가들의 주제는 ‘빛’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그 빛을 좇아 그들은 늘 현장으로 떠났다. 선배 화가들에 비해 자연을 깊이 관찰하고, 빛의 성격·특질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야외에서 오랜시간 그림을 그린 덕이다.※ 인상파 회화 & 인상주의 미술 19세기 후반 프랑스를 중심으로 색채나 색조, 질감에 관심을 두는 ‘인상주의(Impressionism) 미술’을 추구한 화가의 무리를 ‘인상파’라고 부른다. 인상파·인상주의란 용어는 1874년 파리의 한 전시에서 비롯됐다. 당시 미술계의 이단아던 모네·파사로·시슬레·드가·르누아르 등이 연 ‘화가·조각가·판화가 무명예술가협회 제1회전’이다. 8회까지 이어진 전시는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는데, 이전까지의 엄격한 형식이나 균형·구도가 아닌 강렬한 색상, 거친 붓질로 그저 그런 평범한 풍경·일상을 담아낸 작품이 줄지어 나섰기 때문이다. 그 첫 전시에서 현장을 목도한 이들 중 기자 루이 르루아가 있었다. 전시를 비딱하게 본 그는 전시작 중 한 점인 모네의 ‘인상, 해돋이’(1872)에서 딴 ‘인상’이란 말로 ‘인상파의 전시’란 비아냥거리는 글을 쓰게 됐는데, 오늘날 미술시장을 뜨겁게 달구는 인상파는 바로 이 조롱에서 탄생한다. 당시 인상파 회화가 발전하는 데는 뜻밖의 조력자가 나서기도 했는데, ‘물감튜브’와 ‘증기기관차’다. 빛을 좇는 야외작업을 하는 화가들을 작업실 밖으로 이끌고 이동시킨 결정적 도구이자 동기였다는 것이다. △이주헌 미술평론가는… 미술로 삶을 보고 세상을 읽는다. 좀 더 많은 이들이 미술을 통해 일상의 풍요를 누리도록 글 쓰고 강연하는 일이다. 소명으로 여긴다고 했다. 발단이 있다. 홍익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돌연 일간지 기자가 되면서다. 그림에 관심을 잃어서가 아니라 그림을 막은 생계 때문이었다. 낮에 일하고 밤에 그리자 했다. 하지만 ‘투잡’은 쉽지 않았다. 미술담당 기자생활에서 얻은 필력과 생각을 가지고 현장으로 나왔다. 미술을 대중과 제대로 연결하는 미술평론가의 ‘진정한’ 역할, 그것을 해보자 했다. 그렇게 가나아트 편집장을 하고, 학고재 관장을 오래 한 뒤 서울미술관 초대관장까지 지냈다. 지금은 양현재단 이사로 있으면서 온전히 글과 강연에만 집중하고 있다. 지은 책이 수십 권이다. 굳이 대표작을 꼽자면 ‘신화의 미술관’(2020), ‘리더의 명화수업’(2018), ‘역사의 미술관’(2011), ‘지식의 미술관’(2009), ‘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 1·2’(2005) 등이 있다.
2020.08.21 I 오현주 기자
<9> '다양성'을 잡아라 창조적 혁신이 있다
  • [이주헌의 혁신@미술]<9> '다양성'을 잡아라 창조적 혁신이 있다
  • 렘브란트의 ‘야경’(The Nightwatch·1642). 스페인을 상대로 줄기차게 독립투쟁을 하던 네덜란드 시민민병대를 그렸다. 원제는 ‘프란스 바닝 코크 대장의 민병대’다. 제목대로 민병대 대장 프란스 바닝 코크(1605∼1655)를 중앙에 세웠다. 암스테르담 도시민병대 본부 건물에 걸기 위해 의뢰했다고 알려진 그림은 렘브란트가 탄생시킨 새로운 단체초상화로도 의미가 크다. 이전까지 질서정연하게 얌전히 서 있기만 하던 인물들이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소장.미술은 사람을 움직였습니다. 밥으로만 채울 수 없는 풍요와 평화를 안겨줬으니까요. 그림의 힘이고 조각의 에너지입니다. 하지만 미술의 역할이 이뿐이라 한다면 미술을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문명을 이끌고, 의식을 뒤집고, 결정적으로 돈의 흐름을 주도했던, 그것을 못 본 겁니다. 미술의 사조와 양식이 탄생할 때마다 세계경제에는 ‘변화의 그림’이 걸렸습니다. 바로 ‘혁신’을 주도했던 겁니다.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이주헌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미술로 이룬 혁신’의 현장입니다. 3D 컴퓨터그래픽에까지 이어지는 이집트 미술, 스페이스X 민간우주선의 근원인 그리스 미술, 대량생산의 개념을 만든 목판화, 메디치가문의 부가 만든 피렌체 미술, 부르주아를 탄생시킨 인상파 미술 등을 비롯해 구스타프 클림트, 파블로 피카소, 앤디 워홀, 데미안 허스트 등 ‘혁신의 아이콘’까지.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상으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이주헌 미술평론가] 다양성은 혁신을 낳는다. 구성원의 ‘색깔’이 다양할수록 공동체는 보다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결과물을 도출해낸다. 다양성은 다채로운 관점에서 새로운 해결책을 내놓음으로써 공동체의 성장과 발전에 큰 기여를 한다. 보스턴컨설팅그룹과 뮌헨공과대가 행한 연구 ‘다양성이 관건이다’(The Mix That Matters·2016)는 통계적인 방법으로 이를 증명함으로써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줬다. 독일과 스위스, 오스트리아의 171개 기업을 대상으로 한 이 연구에 따르면, 관리직의 다양성 지수가 높은 기업일수록 ‘혁신수익’(innovation revenue) 또한 높게 나타났다. 혁신수익이란 최근 3년 동안 새로 출시한 상품이나 서비스가 창출한 수익을 말한다. 특히 복합기업이나 대기업일수록 관리직의 다양성은 혁신수익의 창출에 보다 큰 기여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상 기업 가운데 다양성 지수가 중앙값을 넘은 기업은 중앙값 아래의 기업에 비해 평균 38% 더 많은 혁신수익을 올렸다. △기업 관리직 다양할수록 ‘혁신수익’ 높아이 연구는 모두 6개의 카테고리로 관리자의 다양성 유형을 나눴다. 산업배경, 출신국가, 경력, 성(性), 연령, 학벌의 다양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연령과 학벌의 다양성은 혁신과 별 관계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신 나머지 네 유형은 통계상으로 유의미한 상관성을 보여줬다. 흥미로운 사실은, 유럽 여러 나라에서 기업의 여성이사할당제를 의무화한 것이 이들 기업의 혁신성을 높이고 있다는 점이다(기업의 여성이사 의무비율은 아이슬란드와 프랑스가 40%, 이탈리아 33%, 독일 30% 등이다). 여성이사할당제를 도입한 목적이 성평등을 위한 것이었지만, 현실에서는 혁신의 에너지로 작용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임원진의 20%가 여성인 기업은 수익 가운데 34%가 혁신수익인 반면, 임원진의 5%가 여성인 기업은 혁신수익의 비중이 25%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연구가 시사하듯 이제 다양성은 기업이나 여타 공동체가 혁신을 위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치가 됐다. 다양성의 증가가 미술문화의 발전을 선도한 미술사의 대표적인 사례는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이다. 이 시기를 네덜란드 미술의 ‘황금시대’(The Golden Age)라고 부른다. 유명한 ‘빛의 마술사’ 렘브란트(1606∼1669)를 비롯해 ‘진주 귀고리 소녀’의 화가 베르메르(1632∼1675), ‘초상화의 거장’ 프란스 할스(1580∼1666), ‘미술의 몰리에르’ 얀 스테인(1626∼1679) 등 대가들이 쏟아져 나왔고, 서양회화의 주요 장르가 되는 풍경화·정물화·풍속화 등이 이 시공간에서 그 틀을 온전히 갖춰 본격적으로 분화·발달하기 시작했다. 비록 외형상으로는 작은 나라에 불과했지만, 이 시기의 네덜란드는 이탈리아나 프랑스 못지않게 중요한 서양미술사의 리더였다. △렘브란트·베르베르·프란스 할스…대가 쏟아져나온 17세기 네덜란드네덜란드가 이처럼 ‘미술강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큰 기여를 한 게 바로 이 시기에 증대한 민족적·종교적·문화적 다양성이다. 다양성은 네덜란드의 경제도 함께 부흥시켰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모든 변화가 종교갈등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의 깃발이 오르자 네덜란드에서는 칼뱅주의(프랑스의 종교개혁자 칼뱅에게서 발단한 프로테스탄트 사상)가 빠른 속도로 확산했다. 그러나 당시 네덜란드를 지배하고 있던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이 저지국가가 가톨릭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때마침 네덜란드에서 ‘성상파괴운동’이 벌어지자 펠리페 2세는 측근 알바 공작을 보내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구금·처형되거나 재산이 몰수돼 네덜란드의 상공업 활동이 거의 중단될 지경에 이르렀다. 분노한 네덜란드인들도 무장투쟁으로 맞섰다. 북부 7개 주를 중심으로 위트레흐트 동맹을 결성(1579)해 분리독립에 나선 것이다. 동맹은 창립 헌장에 “누구나 종교의 자유를 가지며 어느 누구도 종교를 이유로 심문을 받거나 박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천명함으로써 자유와 관용의 원칙을 분명히 했다. 그 결과 여전히 스페인이 장악한 네덜란드 남부(플랑드르) 사람들뿐 아니라 유대인을 비롯해 프랑스의 위그노 교도 등 주변 나라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북부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네덜란드의 인구가 크게 늘어나, 1570년부터 1670년 사이 암스테르담 인구는 3만명에서 20만명으로 7배 가까이 팽창했다. 1650년의 통계에 따르면 암스테르담 인구 가운데 3분의 1은 외국계 혈통이거나 그 후손이었다. 17세기 네덜란드는 그렇게 진정한 인종의 용광로가 됐다. 당연히 외국계 후손 중에서는 큰 부자가 되거나 사회지도층에 편입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렘브란트의 걸작 ‘야경’(1642)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프란스 바닝 코크다. 훗날 암스테르담의 시장이 되는 그는 아버지가 독일 브레멘 출신이었다. 비록 그의 아버지는 헐벗고 굶주린 ‘꽃제비’로 네덜란드에 흘러들어 왔으나 아들인 그는 암스테르담 행정의 최고위직에까지 올랐다. 무일푼 이민자의 아들로서 암스테르담의 시장이 된 또 다른 독일계 거물이 야콥 포펜이다. 동인도회사의 이사까지 지내며 거부가 된 그는 죽을 때 요즘 돈으로 6000억원이 넘는 유산을 남겼다. 그야말로 다양한 배경과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몰려들어 다양한 기술과 재능을 발휘함으로써 네덜란드의 부는 급팽창했다. 렘브란트가 그린 ‘야경’의 부분. 그림 중앙의 인물, 작품의 배경이자 주인공인 네덜란드 시민민병대 대장 프란스 바닝 코크(1605∼1655)다.당시 네덜란드의 부를 잘 나타내는 게 동인도회사의 규모다. 현재의 달러로 이 회사의 절정기 시가총액을 계산하면 7조 9000억달러(약 9389조원)로, 역사상 이 회사보다 큰 시가총액을 달성한 회사는 아직 없다(우리나라 코스피 상장기업들의 시가총액보다 많다는 최근 애플의 시가총액도 1조 8000억달러에 불과하다). △가난한 농부부터 부유한 명문가까지…‘미술 자유시장’ 꽃피워이 같은 부의 확산은 네덜란드의 미술시장을 크게 발달시켰다. 전통적으로 유럽의 미술가들은 소수의 패트런으로부터 주문을 받아 작품을 제작함으로써 먹고살았다. 그러나 “가장 가난한 농부부터 가장 부유한 명문가까지 그림을 사들였다”는 이 시기 네덜란드의 미술시장은 주문시장이 아니라 자유시장으로 활짝 피어났다. 화가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작품을 제작하고 시장에서 이를 자유롭게 사고파는 게 일상화됐다. 사실 이런 거래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중엽부터다. 하지만 이 무렵 다양한 배경의 여유로운 시민이 크게 늘면서 다수의 시민이 참여해 그림을 사고파는 현대적인 미술시장이 선구적으로 뿌리를 내린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어려운 현상이었다. 이로 인해 더 이상 종교를 주제로 한 그림이 아니라, 풍경화·정물화·동물화 등 소시민들이 집에 걸어놓고 보기 좋은 장르의 그림이 집중적으로 그려졌다. 그만큼 네덜란드는 당대 유럽에서 가장 선진적이고 혁신적인 미술의 거점이 된 것이다. 공동체의 다양성은 이처럼 네덜란드의 경제와 미술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고 체류 외국인 수가 늘어나는 요즘의 대한민국이 이런 에너지를 어떻게 혁신의 동력으로 활용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할 때 참고할 만한 역사적 선례다. 무슬림 여성들이 수영할 때 입는 부르키니(부르카+비키니)는 레바논계의 호주 여성 아헤다 자네티가 2007년 디자인했다. 부르키니가 나오기 전까지 무슬림 여성들은 물놀이를 즐기려 해도 복장문제로 애로가 많았다. 이 문제를 가장 절실하게 느꼈을 이슬람국가들에서 이에 대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고, 오히려 호주에 사는 이슬람계 여성에게서 해결책이 나온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주민으로서 자네티가 처한 다문화, 곧 다양성의 상황이 그 같은 창조적 혁신을 자극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다양성은 혁신을 추동하는 힘이다. 네덜란드 화가 빌렘 칼프(1619~1693)가 그린 ‘명나라 도자기가 있는 정물’(Still Life with a Chinese Porcelain Jar·1669). 칼프는 어두운 배경에 화려한 색조로 은식기나 유리그릇, 특히 동양의 도자기를 과일 등과 어울린 독특한 정물화를 많이 그렸는데, 다양성으로 부를 창조한 네덜란드 시민들에게서 큰 인기를 끌었다. 미국 인디애나폴리스미술관 소장.※ 성상파괴운동16세기 중반 네덜란드 통치권자가 된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가 저지대 플랑드르(네덜란드 남부)에 주교직을 신설하고 칼뱅파의 신교도를 억압하자, 이에 반발한 신교도가 가톨릭교회의 성상을 파괴한 급진적인 반달리즘을 말한다. 스위스 취리히에서 발단해 네덜란드로 확산했고, 1566년 8월에 와서는 ‘우상숭배 말살’이란 구호 아래 네덜란드의 전역으로 퍼졌다. 당시까지 예술품의 주된 수장고였던 가톨릭교회 안의 회화·조각품이 거리로 던져졌고, 군중 앞에서 부서지고 불태워졌다. 사건은 충격적이었지만 이는 네덜란드의 미술사조가 급변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더 이상 화가에게 제단화·성화 등을 의뢰할 수 없어 텅빈 회벽 상태로 비어있던 교회와는 대조적으로, 도시 곳곳에 대중적인 그림이 걸리기 시작한 것이다. 시청·사무실 등 공공기관은 물론이고, 사교장·응접실 등 시민의 사적인 공간에까지 영역은 실로 광범위했다. 그림을 사고파는 미술시장이 활성화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특유의 ‘다양성’이 작용한 풍경화·정물화·동물화 등 장르에서도 혁신적 변화가 일어났다. △이주헌 미술평론가는… 미술로 삶을 보고 세상을 읽는다. 좀 더 많은 이들이 미술을 통해 일상의 풍요를 누리도록 글 쓰고 강연하는 일이다. 소명으로 여긴다고 했다. 발단이 있다. 홍익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돌연 일간지 기자가 되면서다. 그림에 관심을 잃어서가 아니라 그림을 막은 생계 때문이었다. 낮에 일하고 밤에 그리자 했다. 하지만 ‘투잡’은 쉽지 않았다. 미술담당 기자생활에서 얻은 필력과 생각을 가지고 현장으로 나왔다. 미술을 대중과 제대로 연결하는 미술평론가의 ‘진정한’ 역할, 그것을 해보자 했다. 그렇게 가나아트 편집장을 하고, 학고재 관장을 오래 한 뒤 서울미술관 초대관장까지 지냈다. 지금은 양현재단 이사로 있으면서 온전히 글과 강연에만 집중하고 있다. 지은 책이 수십 권이다. 굳이 대표작을 꼽자면 ‘리더의 명화수업’(2018), ‘역사의 미술관’(2011), ‘지식의 미술관’(2009), ‘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 1·2’(2005) 등이 있다.
2020.08.14 I 오현주 기자
<8> 전략은 거들 뿐 답은 현장에 있다
  • [이주헌의 혁신@미술]<8> 전략은 거들 뿐 답은 현장에 있다
  • 카라바조가 그린 ‘의심하는 도마’(1603).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중 부활을 믿지 못하는 도마가 예수의 옆구리에 난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보고 나서야 믿게 됐다는 이야기(‘요한복음’ 20장 24절) 중 가장 결정적인 장면을 포착했다. 마치 눈앞에서 벌어지는 듯한 생생한 현장감은, 종교화를 풍속화 그리듯 한 카라바조 회화의 ‘혁신’이다. 독일 포츠담 신궁전 소장.미술은 사람을 움직였습니다. 밥으로만 채울 수 없는 풍요와 평화를 안겨줬으니까요. 그림의 힘이고 조각의 에너지입니다. 하지만 미술의 역할이 이뿐이라 한다면 미술을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문명을 이끌고, 의식을 뒤집고, 결정적으로 돈의 흐름을 주도했던, 그것을 못 본 겁니다. 미술의 사조와 양식이 탄생할 때마다 세계경제에는 ‘변화의 그림’이 걸렸습니다. 바로 ‘혁신’을 주도했던 겁니다.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이주헌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미술로 이룬 혁신’의 현장입니다. 3D 컴퓨터그래픽에까지 이어지는 이집트 미술, 스페이스X 민간우주선의 근원인 그리스 미술, 대량생산의 개념을 만든 목판화, 메디치가문의 부가 만든 피렌체 미술, 부르주아를 탄생시킨 인상파 미술 등을 비롯해 구스타프 클림트, 파블로 피카소, 앤디 워홀, 데미안 허스트 등 ‘혁신의 아이콘’까지.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상으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이주헌 미술평론가] 17세기의 유럽을 압도한 바로크 예술은 매우 장엄하고 역동적인 예술이다. 특히 바로크 회화는 생생한 사실감과 강렬한 명암대비가 돋보인다. 이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의 한 사람이 이탈리아 출신의 카라바조(1573∼1610)다. 카라바조의 회화가 주는 혁신의 영감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걸작 ‘의심하는 도마’(1603)를 통해 그의 회화가 지닌 특징에 대해 먼저 알아보자. ‘의심하는 도마’는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과 만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화면 맨 왼쪽의 남자가 예수이고, 오른쪽의 세 남자가 그의 제자들이다.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지금 믿지 못하고 있다. 특히 맨 앞에 그려진 도마는 노골적으로 의심을 드러내 보인다. 그러자 예수가 도마의 손을 잡아 창상(創傷)이 난 자신의 옆구리로 가져간다. 살아 있는 사람의 몸으로 손가락이 쑥 들어가니 도마는 너무 놀라 이마에 주름이 확 생겼다. 그림의 도마는 옷이 터져 속이 드러났는데도 꿰맬 겨를이 없을 정도로 각박한 삶을 살고 있다. 손톱에는 때까지 끼었다. 그의 직업이 어부였던 것으로 전해지는 만큼 생생한 노동의 흔적이다. 서민의 이미지를 특유의 강한 명암대비법(‘키아로스쿠로’)에 실어 실제처럼 핍진하게 묘사한 탓에 현실세계가 우리 코앞에 바짝 다가선 느낌이다. △카라바조 “저잣거리 서민들이 나의 스승” 카라바조를 필두로 당시 많은 바로크 화가들은 이처럼 강렬한 사실적 표현을 추구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에 맞서 예술이 가톨릭의 위세를 드높이고 교리를 전파하는 최선봉에 서야 한다고 선포했는데(트리엔트 공의회 1545∼1563), 그 흐름에 발맞춰 많은 미술가들이 강렬하고 드라마틱한 작품들을 쏟아냈다. 카라바조의 그림처럼 키아로스쿠로 기법에 기초한 그림뿐 아니라, 조반니 바티스타 가울리(1639∼1709)의 ‘예수의 거룩한 이름의 승리’(1670∼1683)처럼 ‘디 소토 인 수’(di sotto in su) 기법에 기초한 천장화들도 그려졌다. ‘디 소토 인 수’는 밑에서 위로 올려다볼 때 나타나는 사물의 급격한 형태 변화를 생생히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이 기법에 의지해 그림을 그릴 경우 평면인 천장이 갑자기 아득한 깊이를 지닌 하늘로 변해 환영의 느낌이 매우 강하게 다가온다. 영화 ‘해리 포터’에서 호그와트학교 천장에 촛불이 무수히 떠 있고 그 위로 아득한 밤하늘이 펼쳐지는 장면을 떠올리면 좋겠다. 이렇듯 바로크 회화는 이전의 그 어떤 회화보다도 출중한 리얼리티를 보여줬고, 최고의 스펙터클을 느끼게 했다. 바로 이 박진감이 바로크 미술을 이전의 미술과 크게 구분 짓는 혁신성이었다. 이런 혁신을 이루기까지 미술가들이 벌인 노력은 치열했다. 특히 카라바조는 저잣거리에 나가 끊임없이 서민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화폭에 옮겼다. 추함과 잔인함까지 그대로 그려 고도의 리얼리티를 획득했다. 그로 인해 걸작 ‘성모 마리아의 죽음’(1605∼1606)을 그렸을 때는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성모로서 그 어떤 위엄과 영광도 찾아볼 수 없는 현실의 주검을 그렸기 때문이다. 머리를 흐트러뜨린 푸석푸석한 시신을 보고 보수적인 성직자들은 지나치게 불경스럽고 모독적인 그림이라며 반발했다. 그런 비난이 있을 때마다 카라바조는 저잣거리의 사람들을 가리키며 “저들이 나의 스승”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의 사실주의를 일컬어 ‘저잣거리 자연주의’(street naturalism)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시 로마는 성직자·용병·순례자·예술가·도둑·거지·창부 등 온갖 사람들이 몰려들어 출세와 한탕을 위해 경쟁하고 시기하며 폭력을 일삼던 도시였다. 그 생생한 ‘인생극장’의 뉘앙스가 고스란히 담긴 그의 그림은 그 어떤 화가보다 당대의 관객들에게 큰 호소력을 가졌다. 카라바조의 그림은 지금도 치열하게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의 시선을 강렬하게 사로잡는다. 성모 마리아를 불경하게 그렸다고 논란이 된 카라바조의 ‘성모 마리아의 죽음’(1605∼1606). 부풀고 푸석한 시신을 묘사한 충격적인 리얼리티에 놀라, 그림을 주문했던 산타 마리아 델라 스칼라 교회조차 거부했다고 전해진다.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 소장.카라바조가 그린 ‘성모 마리아의 죽음’(1605∼1606) 중 부분.△비즈니스, 늘 현장에서 고객과 지속적 상호작용해야 이런 카라바조의 현실주의 미학은 “현장에 답이 있다”는 비즈니스 격언을 되새기게 한다. 현장은 늘 우리의 지식과 통념을 뛰어넘는다. 현장은 끝없이 변한다. 부지런히 반복해서 현장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혁신을 이룰 수 없다. 이와 관련한 흥미로운 실험이 하나 있다. 바로 ‘1달러 거저 주기’ 실험이다. 이 실험은 미국의 변호사이자 혁신 컨설턴트인 다이애나 캔더가 대학생들에게 기업가 정신을 가르치기 위해 행한 것이다. 우선 학생들에게 1달러짜리 지폐 5장을 주고, 공공장소에 가서 1달러씩 거저 나눠주도록 했다. 모두 5달러이니 기회는 딱 다섯 번이다. 학생들이 각자의 장소로 흩어지기 전에 캔더는 ‘누가 그들의 타깃이 될지, 타깃의 주의를 끌기 위해 어떤 말을 할 것인지, 다섯 번의 기회 중 몇 번을 성공시킬 것인지’에 대한 간략한 계획서를 만들도록 했다. 학생들은 모두 5달러를 다 주고 올 것이라고 자신했다. 공짜로 돈을 준다는데 누가 마다할까. 이거 너무 쉬운 과제가 아닌가!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자신들의 판단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떤 사람은 바쁘다고 돈을 받지 않고, 어떤 사람은 의도를 의심해 돈을 받지 않았다. 연령과 성별, 직업군에 따라서 거부 반응도 제각각이다. 타인에게 거저 돈을 주는 것조차 이렇게 어렵다. 이 실험의 결과를 통해 학생들은 비즈니스에서 계획이란 하나의 출발점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계획은 부단히 수정될 수밖에 없고, 계속 현장으로 돌아가 고객과 지속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우치는 것이다. 특히 스타트업일수록 현장, 곧 고객과의 지속적인 교감이 매우 중요하다. △드러커 “기업에 생명력 부여하는 건 내부 통제 아닌 외부 고객” ‘린 스타트업’(The Lean Startup·2011)의 저자 에릭 리스는 많은 스타트업이 실패하는 이유가 “철저한 시장조사, 정교한 전략과 기획 등(전통적인 경영기법)에 현혹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런 ‘관념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현장의 고객과 구체적으로 상호작용함으로써 눈앞의 불확실성을 제거해나가는 게 우선이라고 충고한다. 리스는 처음부터 너무 완벽한 제품을 내놓으려 할 게 아니라, 핵심 기능만 갖춘 ‘최소 요건 제품’(minimum viable product·MVP)을 만들어 고객의 반응을 먼저 살피라고 제안한다. 그렇게 MVP의 성과를 측정하고 개선한 뒤 이 과정을 반복해 실패의 위험을 최소화하고 시장에 빠르게 적응해가라는 것이다. 현대경영학의 창시자로 꼽히는 미국의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1909∼2005)는 늘 현장에서 답을 얻은 대표적인 기업가로 ‘타임’ ‘포천’ ‘라이프’를 창간한 헨리 루스(1898∼1967)를 꼽았다. 드러커는 루스가 “모든 성공은 고객과 함께 출발한다는 자명한 진리에 눈뜬 사람”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루스가 ‘라이프’를 편집할 때 사진작가들과 자주 다퉈 “다시는 루스와 함께 일하지 않겠다”고 한 이들도 있었지만, 잡지를 받아든 그들 대부분은 루스의 판단이 결과적으로 옳았다고 긍정하곤 했다는 것이다. 사진작가들은 전문가의 시각에서 봤으나 루스는 독자의 시각에서 봤기 때문이다. 그런 루스의 시각은 기업 외부에서 기업 내부를 보는 시각, 곧 ‘아웃사이드-인 퍼스펙티브’(outside-in perspective)이며, 바로 이런 시각이 그의 성공을 뒷받침한 것이다. 드러커는 “기업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또 기업을 유지하는 것은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지 내부의 통제에 있는 것이 아니며, 고객은 그런 외부 현실과 힘을 움직이는 주동자”라고 단언했다. 끝없이 현장을 살피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답은 현장에 있다. ※ 디 소토 인 수 di sotto in su. 이탈리아어로 ‘아래로부터’ ‘밑에서 위를 올려다본’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15세기 말 르네상스 천장화를 제작하면서 터득한 미술기법이다. 바닥에 발을 디딘 상태에서 위를 올려다봤을 때 공간구조에 따라 드라마틱하게 변화하는 사물·인물·배경을 생생하게 표현한다. 정중앙에 시선을 고정하면 평면이 입체인 양 수직공간이 끝없이 확장해 마치 하늘이 뚫린 듯한, 혹은 인물이 승천하거나 추락하는 듯한 착시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덕분에 인간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하늘세상을 그려내야 하는 신성한 종교화에 ‘맞춤’이었다. 바로크 화가 조반니 바티스타 가울리의 천장화 ‘예수의 거룩한 이름의 승리’(1670∼1683)가 그중 한 점이다. 이탈리아 로마에 위치한 ‘일 제수 교회’(정식명칭은 ‘예수의 신성한 이름 교회’다)의 천장에 프레스코화로 그린 작품은 “교회의 궁륭(연속된 아치로 이뤄진 반원통 모양의 구조물)이 열려 하늘로 뻥 뚫린 듯한” 아찔한 환각에 빠지게 한다. 바로크 화가 조반니 바티스타 가울리가 ‘디 소토 인 수’ 기법에 기초해 그린 천장화 ‘예수의 거룩한 이름의 승리’(1670∼1683). 이탈리아 로마 ‘일 제수 교회’의 천장에 프레스코화로 그린 작품은 평면이 입체인 양, 아득한 깊이의 하늘을 배경으로 인물이 승천하거나 추락하는 듯한 환영의 느낌이 강렬하다.△이주헌 미술평론가는… 미술로 삶을 보고 세상을 읽는다. 좀 더 많은 이들이 미술을 통해 일상의 풍요를 누리도록 글 쓰고 강연하는 일이다. 소명으로 여긴다고 했다. 발단이 있다. 홍익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돌연 일간지 기자가 되면서다. 그림에 관심을 잃어서가 아니라 그림을 막은 생계 때문이었다. 낮에 일하고 밤에 그리자 했다. 하지만 ‘투잡’은 쉽지 않았다. 미술담당 기자생활에서 얻은 필력과 생각을 가지고 현장으로 나왔다. 미술을 대중과 제대로 연결하는 미술평론가의 ‘진정한’ 역할, 그것을 해보자 했다. 그렇게 가나아트 편집장을 하고, 학고재 관장을 오래 한 뒤 서울미술관 초대관장까지 지냈다. 지금은 양현재단 이사로 있으면서 온전히 글과 강연에만 집중하고 있다. 지은 책이 수십 권이다. 굳이 대표작을 꼽자면 ‘리더의 명화수업’(2018), ‘역사의 미술관’(2011), ‘지식의 미술관’(2009), ‘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 1·2’(2005) 등이 있다.
2020.08.07 I 오현주 기자
'사이코지만 괜찮아' 촬영지로 의정부미술도서관 각광
  • '사이코지만 괜찮아' 촬영지로 의정부미술도서관 각광
  • [의정부=이데일리 정재훈 기자] 인기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의 일부 장면이 의정부 미술도서관에서 촬영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주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경기 의정부시는 지난 1일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 13회에서 극중 고기능자폐인(HFA)이지만 타고난 그림 실력을 갖춘 문상태가 문강태, 고문영과 그림책 이야기를 하며 미술도서관을 둘러보는 모습이 방영됐다고 4일 밝혔다.미술도서관 내부.(사진=의정부시)미술도서관은 미술관과 도서관을 접목한 특화된 도서관으로 전국 최초로 지난해 12월 개관해 주목받는 의정부시의 자랑거리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미술도서관 고유의 독창성과 외관으로 도서관으로서의 본래 기능 뿐만 아니라 시의 관광명소로도 외부의 입소문을 타고 있어 유명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촬영장소로 러브콜을 받고 있다.이번 드라마 뿐만 아니라 시는 올해 지역 내 관광자원 및 축제와 관련한 신규 콘텐츠를 추가 개발하고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유튜브 등에 간접광고를 활용해 관광자원 홍보를 강화해 의정부시의 관광브랜드화에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임우영 문화관광과장은 “이번 드라마 촬영은 우리 시의 지역 인프라를 활용한 관광활성화 및 홍보 차원에서 추진한 것”이라며 “방송을 보고 많은 분들이 의정부시로 발걸음을 해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2020.08.04 I 정재훈 기자
<7> 붙잡고 늘어져라 끝까지, 덧칠에 덧칠하는 유화처럼
  • [이주헌의 혁신@미술]<7> 붙잡고 늘어져라 끝까지, 덧칠에 덧칠하는 유화처럼
  •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유화 ‘레오키포스 딸들의 납치’. 루벤스가 1618년경 그린 이 그림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생동감 넘치게 표현한 ‘살의 느낌’이다. 그 바탕에 선명한 색채, 역동적 움직임, 생생한 관능미, 드라마틱한 구성을 겹쳐내 바로크 예술의 걸작으로 꼽혀 왔다. ‘그리스신화’ 중 레다와 제우스 사이에 태어난 쌍둥이 형제가 레오키포스의 딸들을 납치해 아내로 삼는다는 내용을 줄기로 삼고 있다. 독일 뮌헨 알테피나코테크 소장.미술은 사람을 움직였습니다. 밥으로만 채울 수 없는 풍요와 평화를 안겨줬으니까요. 그림의 힘이고 조각의 에너지입니다. 하지만 미술의 역할이 이뿐이라 한다면 미술을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문명을 이끌고, 의식을 뒤집고, 결정적으로 돈의 흐름을 주도했던, 그것을 못 본 겁니다. 미술의 사조와 양식이 탄생할 때마다 세계경제에는 ‘변화의 그림’이 걸렸습니다. 바로 ‘혁신’을 주도했던 겁니다.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이주헌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미술로 이룬 혁신’의 현장입니다. 3D 컴퓨터그래픽에까지 이어지는 이집트 미술, 스페이스X 민간우주선의 근원인 그리스 미술, 대량생산의 개념을 만든 목판화, 메디치가문의 부가 만든 피렌체 미술, 부르주아를 탄생시킨 인상파 미술 등을 비롯해 구스타프 클림트, 파블로 피카소, 앤디 워홀, 데미안 허스트 등 ‘혁신의 아이콘’까지.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상으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이주헌 미술평론가] 유화를 처음 그리는 사람은 물감을 덧칠해갈수록 애를 먹는다. 물은 빨리 마르지만 기름은 천천히 마르기 때문이다. 붓놀림을 더할수록 그동안 바른 물감이 뒤섞여 색이 탁해지고 형태는 뭉개진다. 결국 통제불능 상태에 빠져 그림을 포기하기 일쑤다. 이런 유화 물감을 왜 만들었을까. 유명한 대가들의 작품이 그 이유를 잘 말해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1503∼1506)를 비롯한 유화 걸작들을 보라. 공간의 깊이감은 말할 것도 없고 양감·질감 등이 현실세계를 보는 것처럼 생생하다. 숙련된 화가들은 화면 각 부분의 말라가는 속도를 세심하게 고려해 덧칠한다. 일부러 마르기 전에 붓을 대 색채 혼합을 꾀하기도 하고(‘웨트 온 웨트’[wet on wet] 기법), 경우에 따라서는 캔버스 전체가 충분히 말랐다 싶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덧칠하기도 한다. 기법만 잘 익힌다면 유화는 덧칠이 매우 용이한 그림이다. 수십 겹이 아니라 그 이상도 층층이 쌓아올릴 수 있다. 끝없이 수정할 수 있는 그림인 것이다. 반면 수채화 물감은 덧칠을 많이 할 수 없다. 동양화는 덧칠에 더더욱 한계가 많다. ‘일필휘지’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고치거나 덧칠하기 어려우므로 숙련된 수묵화가들은 높은 집중력과 순발력으로 그림을 단번에 완성한다. 이와 달리 지속적으로 수정·보완할 수 있는 유화는, 회화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서양화가들이 집요하게 추구한 재료 개발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유화가 나오기 이전, 유럽에서 주로 그려지던 프레스코와 템페라화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수채화나 동양화처럼 그림을 덧칠해 개선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유화의 이 장점이 어느 분야에서건 혁신을 이룰 때 요구되는 중요한 절차적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혁신은 단칼에 이뤄지기보다는 부단한 수정과 개선의 과정을 거쳐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선구자보다 개선자가 혁신 성공률 높아이와 관련해 우리에게 의미 있는 통찰을 제공하는 연구가 있다.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의 피터 골더와 제라드 텔리스 교수가 1993년에 행한 ‘선구자의 이점: 마케팅 논리인가, 마케팅 전설인가’라는 연구다. 50개 제품 카테고리의 500개 브랜드를 대상으로 한 이 연구에 따르면, 새로운 제품으로 시장을 창조한 선구자 기업은 47%, 곧 절반 가까이가 실패한 반면, 바로 뒤이어 시장에 들어가 제품을 개선한 초기 개선자 기업은 오로지 8%만 실패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경쟁체제에서 ‘선구자의 이점’이 매우 클 거라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선구자를 바로 뒤따라가며 개선을 추구하는 게 보다 나은 성공 전략이 될 수 있다. ‘스마트컷’(Smartcuts·2014)의 저자 셰인 스노는 이를 서부개척시대에 비교해 “처음 아메리카 평원을 가로질러간 선발주자는 마차가 지나갈 길을 직접 만들어야 했지만, 후발주자는 바퀴자국을 따라가기만 하면 됐던 것과 같은 이치”라고 말한다. 선구자보다 개선자의 혁신 성공률이 높은 이유에 대해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의 애덤 그랜트 교수는 “서둘러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보다는 남의 아이디어를 개선하는 게 훨씬 쉽기 때문”이라고 짚는다. 그 예로 그는 페이스북과 구글의 사례를 든다. 페이스북은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 시장에 마이스페이스와 프렌스터보다 늦게 진입했고, 구글 또한 알타비스타와 야후가 나온 뒤에 검색시장에 진출했지만, 선구자들의 실수를 개선하고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조율할 시간을 가짐으로써 훨씬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가장 처음 나온 것’이 가장 오래가는 게 아니라 ‘가장 좋은 것’이 가장 오래간다. 가장 좋은 것은 개선이 가장 많이 이뤄진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선구자는 처음이란 그 위치에 만족할 게 아니라 끝없이 개선을 시도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유화, 독특한 양감·질감·색감 지닌 ‘사람 살’ 표현에 최적화다시 유화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그림을 그리다 보면 밑그림을 잡고 채색을 시도하는 초반에는 아무래도 여러 가지 실수나 문제가 발생하기 쉽다. 그러니 계속 고쳐가며 그릴 수 있다면 결점을 개선해 그림의 완성도가 크게 높아질 것이다. 바로 그 점을 유화가 해결해줬다. 유화는 변화에 무한히 개방돼 있기에 계속 손을 댈 수 있고 결국 처음의 구상과는 차이가 나는 그림으로 완성되기 일쑤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런 과정을 거쳐 서양미술사의 위대한 걸작들이 탄생해왔다는 것이다. 그러면 유화는 언제 생겨났을까. 현전하는 회화 가운데 유성물감을 사용한 것으로 확인된 가장 오래된 그림은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얀 동굴 벽화’다. 서기 650년경, 안료에 호두기름이나 양귀비기름을 섞어 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고대 이집트나 로마에서도 이런 건성유(乾性油)를 사용했지만, 그림 제작이 아니라 의약품 혹은 화장품을 만드는 데 썼다. 2008년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유화’로 기록된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얀 동굴 벽화’다. 아프가니스탄 중부 바미얀 계곡 인근 동굴에서 찾아냈다. 벽화를 그린 이가 누구인지는 명확치 않으나, 제작시기가 650년경이고 힌두쿠시산맥 자락이란 위치로 볼 때, 당시 교역을 위해 실크로드를 이동하던 미술가들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오늘날 우리가 아는 형태의 유화를 본격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네덜란드에서다. 그 이전에도(대략 12세기경부터) 유럽에서는 유성물감을 사용했으나 그 용도는 장식용 도료에 한정됐다. 그러다가 나무패널에 유성물감을 발라 그리는 유화를 15세기 네덜란드에서 처음으로 제작했고, 16∼17세기에 들어서는 유럽 여러 나라에서 이젤 위에 캔버스를 얹어 그리는 유화가 보편화됐다. 이 시기 유화가 모든 회화의 으뜸으로 우뚝 선 것은, 르네상스 들어 원근법과 광학법칙, 인체에 대한 해부학적 이해가 급속히 높아져 보다 섬세하고 핍진한 표현에 대한 요구가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네덜란드 출신의 미국화가 윌렘 드 쿠닝(1904∼1997)은 “유화가 창안된 이유는 바로 (사람의) 살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독특한 양감과 질감, 빛깔을 지닌 사람의 살을 표현하는 데 이전의 재료로는 한계가 많았다. 이런 대상을 특유의 촉감까지 환기시키며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서는 수없이 붓질을 반복해 다층적인 표현을 시도할 필요가 있었고, 바로 그 표현에 최적화된 유화가 탄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연설 원고 고치고 또 고친 마틴 루터 킹 목사…역사 바꿔놔유화의 이런 특질과 관련해 주목해볼 필요가 있는 서양의 전시문화가 있다. 바로 베르니사주(vernissage)다. 베르니사주는 직역하면 ‘니스 칠하기’인데, 전시가 공식적으로 열리기 전날, 화가들이 전시장에 내걸린 유화에 마지막 손질을 하거나 그림의 보호제인 니스를 바르던 데서 유래한 말이다. 오늘날에는 공식 개막 전에 컬렉터와 비평가 등을 불러 친교를 나누거나 마케팅을 하는 자리로 그 의미가 바뀌었지만, 애초에는 이처럼 마지막까지 그림에 손을 대기 위한 자리였다. 동양화였다면 표구까지 하고 전시장에 내걸린 그림에 더 이상 손을 댄다는 것은 생각하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 특성상 무한히 작품의 개선을 꾀할 수 있는 유화는 베르니사주 같은 독특한 덧칠문화를 낳은 것이다. 1934년 영국 왕립아카데미에서 열린 베르니사주 날, 아일랜드 화가 존 래버리(1856∼1941)가 액자를 씌워 벽에 걸어둔 전시작품에 가필을 하고 있다. 래버리가 마지막까지 손을 보고 있는 유화작품은 ‘미스 다이애나 디킨슨’(1934)이다.어느 분야에서든 이처럼 마지막까지 개선을 추구하는 개인이나 집단이 혁신의 승자가 되기 쉽다. 미국의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1929∼1968) 목사는 저 유명한 워싱턴DC 평화대행진을 앞두고 심혈을 기울여 연설 원고를 작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충분한 시간을 들였음에도 만족하지 못한 그는 행사 당일 새벽 3시가 되도록 원고를 고치고 또 고쳤다. 심지어 연단에 올라서기 직전까지 그는 줄을 그어가며 원고를 고쳤다. 마침내 연단에 올라가 연설을 하던 그의 입에서는 원래 원고에 없던 유명한 네 단어의 문장이 튀어나왔다. “나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그 문장은 모든 미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렇게 역사는 바뀌었다. 그처럼 혁신은 끝까지 붙잡고 늘어진 사람들이 만들어온 것이다. ※ 바미얀 동굴 벽화 Bamiyan Cave Painting. ‘세계 첫 유화’라는 타이틀을 가졌다. 아프가니스탄 중부 바미얀 계곡 인근 동굴에서 찾아냈다. 이 동굴에 그려진 벽화는 50점에 달한다. 그중 12점에서 유성물감의 성분을 확인했고, 2008년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유화’란 기록을 공식화했다. 이로써 유화의 시초는 15세기 유럽에서라고 믿어온 가정은 바로 깨졌다. 벽화를 그린 이가 누구인지는 명확치 않다. 다만 제작시기가 650년경이고 힌두쿠시산맥 자락이란 위치로 볼 때, 당시 교역을 위해 실크로드를 이동하던 미술가들이 아니었을까 짐작은 할 수 있다. 벽화에는 주홍색 가사를 입고 결가부좌한 수천 명의 부처가 원숭이·종려나무잎 등을 배경으로 등장한다. 사실 바미얀 계곡에서 더 유명한 것은 거대한 ‘석불’이다. 2001년 무장단체 탈레반이 ‘우상숭배를 막겠다’며 높이 53m와 38m에 달하는 석불 한 쌍을 산산조각냈는데, 수많은 동굴 벽화가 그때 같이 파괴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벽화를 복원하던 국제과학자팀이 성분분석을 위해 물감샘플을 채취했고, 바로 거기서 ‘유화의 역사’가 새롭게 쓰였다. △이주헌 미술평론가는… 미술로 삶을 보고 세상을 읽는다. 좀 더 많은 이들이 미술을 통해 일상의 풍요를 누리도록 글 쓰고 강연하는 일이다. 소명으로 여긴다고 했다. 발단이 있다. 홍익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돌연 일간지 기자가 되면서다. 그림에 관심을 잃어서가 아니라 그림을 막은 생계 때문이었다. 낮에 일하고 밤에 그리자 했다. 하지만 ‘투잡’은 쉽지 않았다. 미술담당 기자생활에서 얻은 필력과 생각을 가지고 현장으로 나왔다. 미술을 대중과 제대로 연결하는 미술평론가의 ‘진정한’ 역할, 그것을 해보자 했다. 그렇게 가나아트 편집장을 하고, 학고재 관장을 오래 한 뒤 서울미술관 초대관장까지 지냈다. 지금은 양현재단 이사로 있으면서 온전히 글과 강연에만 집중하고 있다. 지은 책이 수십 권이다. 굳이 대표작을 꼽자면 ‘리더의 명화수업’(2018), ‘역사의 미술관’(2011), ‘지식의 미술관’(2009), ‘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 1·2’(2005) 등이 있다.
2020.07.31 I 오현주 기자
서울시교육청, 온라인 작가 강연회 '랜선 북캉스' 떠나요
  • 서울시교육청, 온라인 작가 강연회 '랜선 북캉스' 떠나요
  • [이데일리 오희나 기자] 서울특별시교육청은 내달 12일부터 14일까지 학생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여름방학 온라인 작가 강연회 ‘랜선 북캉스’를 운영한다고 26일 밝혔다. ‘랜선 북캉스’는 서울특별시교육청 산하 3개 교육지원청(강서양천·동작관악·성동광진교육지원청)과 어린이도서관이 협력해 추진하는 사업으로 코로나19 상황에 여름방학, 휴가 기간에 여행이 어려운 가족을 위해 마련한 온라인 독서·문화 프로그램이다.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 유튜브(Youtube)가 가능한 곳 어디서나 참가할 수 있다.‘랜선 북캉스(북+바캉스)’는 문학, 예술, 여행 작가 9명과 함께하는 실시간 온라인 북토크로 ‘랜선으로 떠나는 문화생활(8월 12일)’, ‘랜선으로 떠나는 도서관(8월 13일)’, ‘랜선으로 떠나는 여행’(8월 14일)의 주제로 운영한다. ‘랜선으로 떠나는 문화생활’은 ‘시간을 파는 상점’의 김선영 소설가와 미술, 영화 전문 작가가 주제별 강연회를 진행한다. △내가 보낸 시간이 나를 만든다(김선영 작가) △내 마음을 위로하는 미술작품 만나보기(이소영 미술 칼럼니스트·작가) △북무비 토크, 원작이 있는 영화(이다혜 씨네21 기자·작가)로 구성돼 있다. ‘랜선으로 떠나는 도서관’은 그림책 작가와 시인과 함께하는 창작과 독서에 대한 이야기다. △그림책 만들며 사는 이야기(김상근 작가) △그림책 작업 그리고 음악 작업(박정섭 작가) △다독이는 일, 다독하는 일(오은 시인) △읽고 쓰고 만들면서 매번 발견하는 책(김민정 시인)의 주제로 진행한다. 그림책 프로그램은 어린이도 참가할 수 있다. ‘랜선으로 떠나는 여행’은 코로나 상황에서 갈 수 있는 국내 가족 여행지를 안내하고 세계의 이색 축제에 대해 알아본다. △길 위의 예술 여행 드로잉(김현길 여행작가) △자녀와 함께 떠나는 대한민국 힐링 여행(양영훈 여행작가) △세계의 축제와 문화(유경숙 여행작가) 순으로 강연한다.신청 기간은 오는 27일부터 8월 7일까지이며, 네이버폼을 통해 온라인 신청을 받는다. 참가 신청 시 저자에게 하고 싶은 질문을 입력하고, 질문 채택자에게는 주제 도서 1권을 증정하는 행사도 진행한다.서울시교육청은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집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겠다고 계획한 가족이 많은 가운데 학부모와 학생들이 랜선 북캉스 프로그램으로 가족과 함께 독서·문화 활동의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고 밝혔다.
2020.07.26 I 오희나 기자
<6> '르네상스 최대 스폰서' 메디치家…다빈치 찾아내다
  • [이주헌의 혁신@미술]<6> '르네상스 최대 스폰서' 메디치家…다빈치 찾아내다
  • ‘코지모 데 메디치 초상화’. 예술과 학문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지원했던, 메디치가문의 신화를 만든 이다. 1518∼1520년경 자코포 다 폰토르모가 패널에 오일로 그렸다.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소장.미술은 사람을 움직였습니다. 밥으로만 채울 수 없는 풍요와 평화를 안겨줬으니까요. 그림의 힘이고 조각의 에너지입니다. 하지만 미술의 역할이 이뿐이라 한다면 미술을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문명을 이끌고, 의식을 뒤집고, 결정적으로 돈의 흐름을 주도했던, 그것을 못 본 겁니다. 미술의 사조와 양식이 탄생할 때마다 세계경제에는 ‘변화의 그림’이 걸렸습니다. 바로 ‘혁신’을 주도했던 겁니다.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이주헌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미술로 이룬 혁신’의 현장입니다. 3D 컴퓨터그래픽에까지 이어지는 이집트 미술, 스페이스X 민간우주선의 근원인 그리스 미술, 대량생산의 개념을 만든 목판화, 메디치가문의 부가 만든 피렌체 미술, 부르주아를 탄생시킨 인상파 미술 등을 비롯해 구스타프 클림트, 파블로 피카소, 앤디 워홀, 데미안 허스트 등 ‘혁신의 아이콘’까지.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상으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이주헌 미술평론가] “돈을 버는 것보다는 의미를 만드는 데 열정을 바쳐라.” 애플의 ‘치프 이밴절리스트’(Chief Evangelist·기술전도사)였던 미국의 유명 마케터 가이 카와사키(66)는 ‘의미를 만드는 것’이 혁신의 첫걸음이라고 말한다. 그는 ‘혁신의 기술’을 주제로 한 테드 강연에서 열 개의 ‘팁’을 나열하고, 그 가운데 ‘의미를 만들라’를 첫 계명으로 꼽았다. 그에 따르면 “의미를 만드는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고, “세상을 변화시키면 돈은 자연히 따라오기 마련”이다. 카와사키는 그 사례로 다음의 기업들을 들었다. “애플은 ‘컴퓨터를 민주화’하고자 했다. 컴퓨팅 파워를 모두에게 가져다주기를 원했다. 그것이 애플이 만든 의미다. 구글은 ‘정보를 민주화’하고자 했다. 모두가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려고 했다. 이베이는 ‘거래를 민주화’하고자 했다. 웹사이트가 있는 누구나 다른 큰 소매점과 정면으로 맞설 수 있도록 했다. 유튜브는 사람들이 영상을 만들고, 업로드하고, 나눌 수 있기를 원했다. 이것이 기업과 그들이 만들고자 한 의미의 사례들이다.” 카와사키의 관점에서 보자면, 어떤 비즈니스도 단순히 이익이나 이윤만을 추구하는 것이어서는 곤란하다. 그 차원을 뛰어넘는 의미를 창출하지 못한다면, 그 비즈니스는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데도 결국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다. 혁신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고, 혁신이 없이는 성장도 없기 때문이다. 혁신은 바로 의미를 찾고 만드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메디치가문, 편견·멸시 딛고…자본·예술 결합한 ‘불후의 명작’ 빚어내 역사학자들은 문화혁신의 대명사인 르네상스가 메디치가문이 있어서 가능했다고 말한다. 메디치가가 르네상스를 활짝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경제활동이 역사적 의미를 지닌 문화활동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그들은 당시로써는 심각한 비난과 저주의 대상이던 대금업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활동이 합리적인 경제활동이자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의미창출 활동이기를 바랐다. 그 열정적인 ‘투쟁’에서 그들은 결국 승리했다. 메디치가는 이처럼 비즈니스와 의미를 하나로 연결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메디치 머니’를 쓴 영국 출신 경제사학자 팀 팍스(66)는 메디치가문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피렌체에 기반을 둔 메디치가문은 자본과 예술을 결합하여 피렌체 전체를 불후의, 그리고 불멸의 걸작으로 만들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피렌체의 명성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지 않았을 것이다. … 르네상스가 꽃을 피운 것은 바로 이 우수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수라’(usura)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 메디치가문에 번영을 가져다준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1360∼1429)는 대금업으로 집안을 일으켰다. 중세 유럽에서는 대금업을 신성모독과 같은 죄로 쳐서 심지어 “대금업자의 시신은 개나 소·말의 주검과 함께 구덩이에 묻는 게 마땅하다”(1274년 리옹공의회)고 할 정도였다. 그런 편견과 멸시를 딛고 큰 부를 일군 조반니는 아들 코지모 데 메디치(1389∼1464)에게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교육을 받게 했다. 그 덕분에 코지모는 라틴어·헬라어·히브리어·아랍어에 능했고, 고문서를 숙독하고 철학을 공부하며 인문학자들과 토론하는 것을 즐겼다. 인문학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컸는지 젊은 날 고문서를 수집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예루살렘까지 가려는 것을 아버지가 가까스로 말릴 정도였다. ‘메디치가문의 문장’이 든 조각. 1200년대 초에 만들어진 메디치가문의 문장은 6개의 붉은 원으로 장식했는데, 이후 가장 높은 원에 프랑스 발루아왕가의 문장인 3개의 백합 문양이 새겨진다. 동글동글한 공 모양을 두고는 여러 설이 있다. 메디치의 어원이 ‘메디슨’에서 유래하듯 약의 형체에서 따왔다는 설, 돈을 상징한다는 설 등.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소장.이렇게 성장한 코지모가 예술과 학문의 후원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예술과 학문에 대한 그의 남다른 이해와 사랑은 그에게 양립불가능한 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가져다줬다. 당시 금융업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과 그 뿌리가 되는 기독교 교리는 금융업자가 대변하는 강력한 세속적 욕망과 심한 갈등을 빚고 있었다. 바로 이 신앙과 현실의 모순을 코지모는 예술로 극복한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천재들의 손을 빌려 신을 찬양하고 도시를 아름답게 만드는 메디치가의 돈을 사람들은 더 이상 무조건적으로 비판할 수 없었다. 코지모는 많은 고문서를 수집해 고대 그리스·로마 철학의 보고인 메디치가문 도서관을 설립했고, 산마르코수도원을 건축·회화의 빛나는 아이콘으로 재건했다. 괴팍한 건축가 브루넬레스키를 후원해 찬란한 두오모 성당의 돔을 설계하게 했고, 도나텔로·필리포 리피 등 초기 르네상스 대가들의 든든한 뒷배를 보아줬다. 인문학 연구의 요람인 플라톤아카데미의 설립에도 관여하고 지원했다. 코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 피렌체시가 그에게 국부(國父·Pater Patriae)의 칭호를 선사한 것은 누가 봐도 그 공적에 걸맞은, 당연한 예우였다. △피렌체시, 코지모 데 메디치 사후에 ‘국부’ 칭호 선사피렌체의 르네상스는 코지모의 손자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에 이르러선 절정을 이뤘다. ‘위대한 로렌초’(Lorenzo il Magnifico)로 불린 데서 알 수 있듯 로렌초는 르네상스의 가장 강력하고도 영향력 있는 후원자였다. 어릴 적부터 당대 최고의 석학들에 둘러싸여 공부한 로렌초는 그 스스로 탁월한 시인이었다.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늘 역사라는 거시적인 흐름 속에서 돌아봤고 전성기 르네상스의 거장들, 곧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 산드로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등을 적극 후원했다. 할아버지가 만든 도서관을 더욱 크게 확장하고 피사대와 피렌체대에 거금을 기부했다. 그런 그에 대해 ‘처세의 지혜’를 쓴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1483∼1540)는 “피렌체에 독재자가 있어야 한다면 이보다 훌륭하고 매력적인 독재자는 없을 것”이라고 평했다. 이렇게 한 시대를 넘어 그 후까지 강력하고도 광범위한 정신적·감성적 영향을 끼친 가문은 세계사적으로도 찾기가 어렵다. 메디치가는 이처럼 전무후무한 문화사적 의미를 창출한 집안이었지만, 더불어 당대의 가장 선구적인 금융인으로서 근대 경제의 기초를 놓은 사람들이기도 했다. 흑사병이 창궐해도 신용을 지켜야 한다며 은행 문을 닫지 않을 정도로 돈을 열심히 벌었으나 그렇다고 돈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았다. 메디치가 사람들에게 돈은 뿌리요, 정치는 줄기와 가지였으며, 문화예술은 꽃과 열매였다. 아름답게 꽃을 피우고 풍성하게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제아무리 ‘불휘 깊은’ 거목이라도 존재의 의미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들은 그 사실을 잊지 않고 노력한 끝에 결국 르네상스라는 대혁신을 선도했다. 프라 안젤리코가 그린 ‘수태고지’. 1442∼1443년에 제작됐다. 메디치가의 후원으로 아름답게 재건한 산마르코수도원에는 안젤리코의 프레스코 시리즈가 곳곳에 들어 있다. 높이 230㎝ 너비 321㎝에 달하는 대작이다. 이탈리아 피렌체 산마르코미술관 소장.△포드, 어머니 죽음으로 ‘말보다 빠른 탈 것’ 갈망…자동차사업 의미 창출 메디치가뿐 아니라 많은 비즈니스 거장들에게서 우리는 ‘의미 추구’가 갖는 고귀한 혁신의 사례를 무수히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의 자동차왕 헨리 포드(1863∼1947)는 어릴 적 어머니가 위독해지자 말을 몰아 의사에게 달려갔으나 돌아왔을 때는 안타깝게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였다. 말보다 빠른 탈 것에 대한 갈망이 이때 생겨났다고 한다. 그 갈망이 그의 자동차 사업에 의미와 추진력을 더해줬다. 화가였던 새뮤얼 모스(1791∼1872)는 멀리 출타 중에 아내의 발병 소식을 들었지만 인편으로 소식을 접한 탓에 집에 돌아왔을 때는 장례식까지 끝난 뒤였다. 그것이 한이 된 그는 전신기술과 모스부호를 개발하게 됐다. 손을 자주 베이고 다치는 아내가 안쓰러워 약을 발라주던 존슨앤드존슨의 직원 얼 딕슨(1892~1961)은 자신의 부재중에도 아내가 스스로 치료할 수 있도록 반창고에 붕대를 붙이고 소독약까지 뿌린 ‘밴드에이드’를 만들었다. 아내에 대한 사랑이 히트상품의 개발과 생산으로 이어진 것이다. 의미를 만드는 것은 비즈니스에 혁신을 가져올 뿐 아니라 무엇보다 삶에 보람을 가져온다. 그것이 꺼지지 않는 창조의 에너지가 된다. ※ 우수라 usura. 라틴어로 ‘사용한다’란 의미의 명사다. 이로부터 ‘고리대금’ 혹은 ‘고리대금업’을 뜻하는 영어 ‘유저리’(usury)가 파생됐다. 메디치가문의 부를 만든 출발점인 우수라는 ‘개인에게 돈을 빌려주고 높은 이자를 받는 돈놀이’로 풀이할 수 있다. 이 행위가 ‘천대받는 대금업’으로 몰렸던 것은 당시 교회법이 이자받는 일을 금지했기 때문. 메디치가는 이 문제를 이자라는 표현 대신 비용이란 개념으로 풀었다. 현대식으로 말해 채권자의 대출행위에서 발생한 손실 혹은 비용에 대해 보상차원에서 지급하는 것을 이자라고 가정해 교회법과의 충돌을 피했던 것이다. 우수라에서 출발한 메디치가의 금융업은 ‘메디치은행’을 만들면서 본격화했다고 볼 수 있다. 메디치은행은 로마은행에서 평사원으로 경험을 쌓은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가 1397년 피렌체에 세운 은행이다. 지주 딸이 결혼지참금으로 들고온 1500플로린(피렌체금화·지금 돈 12억원)을 쌈짓돈 삼아 8000플로린의 자본금을 들였다. 환전과 대부업을 주 업무로, 메디치은행이 첫해 8개월 동안 남긴 이익은 약 1200플로린(수익률 10%). 이후로도 오랫동안 교황청의 공식은행으로, 세계에서 교황청으로 들어오는 막대한 자금을 관리했다. △이주헌 미술평론가는… 미술로 삶을 보고 세상을 읽는다. 좀 더 많은 이들이 미술을 통해 일상의 풍요를 누리도록 글 쓰고 강연하는 일이다. 소명으로 여긴다고 했다. 발단이 있다. 홍익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돌연 일간지 기자가 되면서다. 그림에 관심을 잃어서가 아니라 그림을 막은 생계 때문이었다. 낮에 일하고 밤에 그리자 했다. 하지만 ‘투잡’은 쉽지 않았다. 미술담당 기자생활에서 얻은 필력과 생각을 가지고 현장으로 나왔다. 미술을 대중과 제대로 연결하는 미술평론가의 ‘진정한’ 역할, 그것을 해보자 했다. 그렇게 가나아트 편집장을 하고, 학고재 관장을 오래 한 뒤 서울미술관 초대관장까지 지냈다. 지금은 양현재단 이사로 있으면서 온전히 글과 강연에만 집중하고 있다. 지은 책이 수십 권이다. 굳이 대표작을 꼽자면 ‘리더의 명화수업’(2018), ‘역사의 미술관’(2011), ‘지식의 미술관’(2009), ‘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 1·2’(2005) 등이 있다.
2020.07.24 I 오현주 기자
사상 최대 국보·보물 전시 "한민족 5000년 역사의 정수"
  • 사상 최대 국보·보물 전시 "한민족 5000년 역사의 정수"
  • [이데일리 김은비 기자] “이번 전시는 우리 한민족 5000년 역사의 유전자가 쌓여 있는 정수입니다.”지난 3년간 새롭게 국보·보물로 지정된 문화재 83건 196점을 한 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특별전 ‘새 보물 납시었네 신국보보물전 2017~2019’가 21일부터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다.정재숙 문화재청장은 전시를 하루 앞둔 20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그 질이나 양에 있어서 사상 최대 전시회”라며 “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귀중한 문화유산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전시회에 들어서면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책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관객을 맞이한다. 고대 왕의 업적부터 인물평전, 우리 신화와 전설, 풍속 종교까지 담고 있어 한국 고대 역사 속으로 안내하는 길잡이 같은 역할을 하는 두 책이 첫 작품으로 선정돼 전시회의 의미를 더한다. 경주 옥산서원이 소장하고 있는 삼국사기 9권이 국보 지정 후 완질본으로 전시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전체 길이 8.5m에 달하는 조선후기 산수화의 극치 이인문(1745~?)의 ‘강산무진도’(보물 제2029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도 주목을 끈다. 왼쪽 방향으로 끝없이 펼쳐진 산수화에는 작게 그려진 사람들이 평화롭게 사는 마을과 광활한 산수 구성과 계곡, 기암절벽 등이 섬세하게 표현돼 있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유토피아와 같은 이상적 세계를 표현했다.‘강사무진도’의 모티브가 된 심사정(1707~1769)의 ‘촉잔도권’도 함께 선보인다. 46억 화소로 스캔한 ‘강산무진도’가 30m 길이의 장대한 크기로 재현돼 병풍처럼 이들 작품을 둘러싼다. 소리 예술가 김준이 구현한 생생한 자연의 소리가 어우러져 마치 실제 그림 속 산천과 이상향의 풍경 속에 들어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한다.혜원 신윤복(1758~?)이 여인의 아름다움을 섬세하게 묘사한 ‘미인도’(보물 제1973호,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도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다. ‘미인도’는 여인의 전신을 초상으로 그린 드문 작품으로 조선의 미인을 상징한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서화류는 3주 후 한 차례 교체 전시돼 ‘미인도’ 또한 8월 12일부터 만날 수 있다.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은 “한국 문화를 대표하는 유물인 국보·보물이면서 전 세계 누가 와서 봐도 세계 속에서 볼 수 없는 세계유산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전시의 의의를 덧붙였다. 전시는 9월 27일까지 진행한다.[이데일리 이영훈 기자] 정재숙 문화재청장과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이 20일 오전 서울 용산구 용산동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새 보물 납시었네 - 新국보보물전 2017~2019’에서 유물들을 살펴보고 있다. 이번 전시는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새로 지정된 국보와 보물 157건 중 건축 문화재와 중량이 무거운 문화재 등을 제외한 83건 196점(국보 12건 27점, 보물 71건 169점)을 공개하는 자리로, 국보와 보물 공개 전시로는 역대 최대 규모다. 오는 21일부터 9월 27일까지 열린다.
2020.07.21 I 김은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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