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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알 살 돈이 없어서"…베네수엘라 살인물가에 범죄마저 줄었다
- 거리에서 ‘엘 네그리토’로 불리는 24세의 한 베네수엘라 범죄자가 지난 13일(현지시간) 수도 카라카스에서 두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한 손에는 총을 든 채 AP통신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NBC방송 홈페이지 캡쳐)[이데일리 방성훈 기자] 베네수엘라 경제가 5년 만에 반토낙 났다. 살인적인 물가상승률 등 경제난에 허덕이고 있는 베네수엘라에선 범죄자들조차 “먹고살기 힘들어졌다”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베네수엘라 중앙은행은 29일(현지시간) 국내총생산(GDP), 물가 등 일부 주요 경제지표를 발표했다. 작년 GDP 성장률의 경우 마이너스(-) 18.7%를 기록했다. 공공부문 소비가 9% 줄었고, 제조업과 소매업은 22.5%, 34.1% 각각 뒷걸음질쳤다.파이낸셜타임스는 “2013년과 비교하면 GDP가 5년 만에 47% 쪼그라든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이나 경제학자들이 추정한 것과 유사한 수준”이라며 “2014년 이후 후퇴하기 시작한 GDP가 2015년 말부터 매분기 최소 10% 이상 감소했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베네수엘라 정부가 GDP를 공개한 것은 2015년 이후 4년 만에 처음이다. 매우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간 식량난이나 정전사태, 의약품 부족 등 인도주의 위기와 관련된 지표들을 의도적으로 숨겨왔기 때문이다.월스트리트저널은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지난 2017년 영아 및 산모 사망률이 공개된 직후 보건부 장관을 즉각 해고한 적도 있다”면서 “공개하길 꺼렸던 경제지표를 돌연 발표, 그 배경에 시장은 주목하고 있다”고 전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국가 경제가 붕괴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매우 ‘희귀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GDP가 반토막 난 것은 경제 버팀목인 원유수출이 급감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지난 4월 현재 베네수엘라의 원유 생산량은 하루 103만배럴로, 10년 전 320만배럴의 3분의 1 수준에 그치고 있다. CNN은 “2013년 3분기부터 2018년 3분기까지 국가 GDP가 52% 하락했다”면서 “베네수엘라 경제는 석유산업에 크게 의존하는데, 원유 수출량이 2013년 850억달러에서 2015년 350억달러, 작년엔 300억달러까지 줄어들었다”고 보도했다. 물가상승률은 2017년 863%, 지난해 13만60%로 각각 집계됐다. 다만 그대로 믿기엔 무리가 있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야당에서 발표한 170만%, IMF가 추정한 2017년 93만%, 2018년 137만% 등과 비교하면 괴리가 크기 때문이다.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한편 베네수엘라 경제난은 범죄마저 줄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마두로 정부는 최근 “지난 3년간 살인 사건이 39% 급감했다”고 발표했다. 비영리단체인 베네수엘라 폭력감시기구(VOV)도 같은 기간 살인 건수가 20% 줄었다고 거들었다. AP통신은 지난 13일 24세 길거리 범죄자와의 인터뷰를 보도하며 “베네수엘라에선 범죄자들조차 경제난에 허덕이고 있다”고 전했다. 거리명 ‘엘 네그리토’라는 이 범죄자는 인터뷰에서 “총알 한 알에 1달러다. 총을 많이 쏠수록 그만큼 지출이 많아진다. 반면 거리에서 벌어들이는 돈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경제난으로 범죄로 생계를 이어가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권총을 잃어버리거나 경찰에게 압수당하면 800달러가 사라진다. 탄창 하나를 다 비우면 15달러다. 총을 쏘는 것조차 이제는 사치”라고 설명했다. (사진=AFP)
- 디지털 영상으로 보는 ‘위대한 대한민국 문화유산’
- [이데일리 이정현 기자] 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은 LG전자(대표이사 조성진)와 공동으로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문화재를 소재로 한 디지털 영상체험 특별전 ‘위대한 대한민국 문화유산’을 오는 19일부터 내달 1일까지 경복궁에서 개최한다.‘위대한 대한민국 문화유산전’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를 거부하고 자주독립 의지와 역량을 보여준 3·1운동과 지속적인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를 문화재 콘텐츠로 이야기를 엮은 디지털 영상콘텐츠 전시다.‘100년의 대한민국’을 주제로 3개 부문의 전시와 체험구역으로 구성했다. 독립운동가와 대한민국임시정부 회의실, 전시장소인 경복궁의 100년 역사를 소개하는 편집 영상을 LG 올레드TV로 상영한다.전시관에 들어서면 ‘역사와 문화재’ 구역을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다. 3·1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소개하면서 3·1 독립선언서(등록문화재 제664-1~2호),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등록문화재 제389호) 등 문화재가 된 태극기,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사용한 권총과 백범 김구 회중시계(등록문화재 제441호) 등 독립열사들의 유품(복제품 포함)과 3·1운동 등 당시 역사적 사건이 영상으로 나온다.두 번째 순서인 ‘인물과 문화재’ 구역에서는 독립운동에 이바지한 역사적 인물의 흑백 사진을 원색으로 복원한 영상을 상영하고, 김구, 안중근, 유관순, 윤봉길 등 독립운동가 4명의 사진을 원색 복원하여 전시한다. 일제강점기 수난의 시대를 거쳐 온 경복궁의 변화를 영상으로 구성한 ‘100년 과거와 미래의 경복궁’, 독립운동 주요 인물의 기념관 소개와 함께 LG의 독립운동 분야 사회공헌을 소개하는 ‘항일독립유산과 후원활동’,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사료와 영상이 준비되어 있다.‘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회의실’ 구역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회의실에서 사용했던 의자와 책상, 명패, 다기도구 등 각종 소품으로 전시실을 꾸몄다. 이곳에서는 태극기와 관련한 영상을 볼 수 있다. ‘인공지능 역사문화 체험존’과 100년의 대한민국 문화유산을 고화질의 빔프로젝트로 생생하게 관람하는 ‘대한민국 역사문화 시네빔관’도 마련했다.이번 전시는 문화재청과 LG전자가 2015년부터 문화재 홍보와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한 문화재지킴이 협약으로 추진하는 연속 사업이다. 독립기념관, 한국문화재재단(문화유산채널), 식민지역사박물관, 안중근의사숭모기념회, 예산군 등의 지원이 있었다. 경복궁 야간관람과 연계해 야간에도 운영할 계획이다.
- 경기도교육청, 경기학생 간도서 독립선언서 읽는다
- [수원=이데일리 김미희 기자] 경기도교육청은 다음달 9~13일까지 경기학생대표 33명과 인솔자로 구성된 ‘2019 경기학생 동북아 평화역사 유적지 탐방단’이 연길, 훈춘 등 간도지역을 방문한다고 3일 밝혔다. 탐방단은 9일 청산리 전적지를 시작으로 백두산 등반, 해란강, 일송정, 봉오동 전적지, 은진중학교, 명동중학교, 명동교회 등을 찾아간다. 김약연 묘소를 참배하고 윤동주 생가, 송몽규 생가, 문안골(안중근 의사 권총사격장)도 답사할 예정이다.답사 일정에는 간도 독립운동 전문가 김재홍(규암 김약연 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의 해설, 독서토론과 탐방지 관련 인물들에 대한 발표와 토의도 함께 진행한다.민족 독립운동 모태이자 교육운동 중심지인 간도지역 탐방은 체험과 토론을 통해 항일투쟁 과정을 느끼고,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의 의미를 학생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으로 기획됐다. 이 모든 과정을 학생들이 영상물로 제작해 공유하는 활동이라는 점에서 더 의미가 크다.특히 학생 탐방단은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일인 11일 온라인을 통해 ‘100년을 거슬러 간도에서 다시 읽는 독립선언서’를 라이브 방송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조상의 항일투쟁 과정과 미래 평화와 상생, 통합과 번영을 향한 경기 청소년의 목소리를 담아낼 계획이다.경기도교육청은 31개 시·군 중학교 2학년 학생과 학교 밖 청소년 1000명이 참여하는‘응답하라 1919, 중학생 역사원정대’사업을 경기도청과 협력해 8월부터 10월까지 추진할 예정이다.김광옥 경기도교육청 민주시민교육과장은 “100년을 거슬러 경기학생 33명이 간도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뜻깊은 행사로 학생들이 지난 100년을 비춰, 평화와 분단극복에 대한 신념을 만드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했다.
- [목멱칼럼]우리 운명의 지침을 바꿔 놓고
- [정영훈 한국여성연구소 소장]“그 일이 있고나서, 동백기름에 젖은 머리를 탁 비어 던지고 일약 주의자가 되었지요.” 한남권번의 기생이었던 금죽은 3·1 만세를 경험한 이후 변화한 자신의 삶을 그렇게 설명했다. 그는 대구에서 태어나 겨우 일곱 살의 나이에 기생학교에 입학했다. 열여덟 살에 서울로 와 제법 이름 있는 기생으로 살던 그가 3·1 만세를 경험한 것은 스물두 살이었다. 그 사건 이후 그는 금죽이 아니라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 정칠성으로 다시 태어났다. 평양 진명여학교의 교장이었던 조신성은 3·1 만세 이후 ‘강도’가 되었다. 임시정부에 보낼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월급을 운반 중이던 우체부를 습격하여 3000원을 빼앗은 것이다. 그는 이전까지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학교 운영에 골몰하던 교장선생님이었지만, 3·1 만세에 참여했다가 사직을 당한 후 더욱 치열하게 직접적인 행동에 나섰다. 청년들을 규합하여 대한독립청년단을 결성했고, 다이너마이트 도화선, 권총, 인쇄기 등을 사들여 평안남도 맹산 선유봉의 한 동굴 속에 숨겨놓고 일본 관헌과 친일파에게 협박장을 보내고 경찰서와 군청을 공격하는 등 무장투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3·1 만세 당시 총독부의원에서 간호부로 일하고 있던 박자혜는 본래 덕수궁의 궁녀였다. 아홉 살에 입궁하여 10여 년간 궁인 생활을 하다가,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자 궁을 나와 간호부가 되었다. 만세 시위로 부상한 사람들이 그가 일하는 병원으로 실려 오자 그들을 치료하는 한편 자신도 만세 운동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그 후 병원을 사직하고 중국 북경으로 떠나 회문대학 의예과에 입학했다. 조화벽은 3·1 만세 당시 개성의 호수돈여학교 학생이었다. 호수돈에서 친구들과 시위에 가담했던 그는 일제가 휴교령을 내리고 학생들을 강제로 귀향시키자 어머니가 계신 강원도 양양으로 왔다. 버선목에는 독립선언문을 감춘 채 말이다. 일제 경찰의 검문에서 간신히 지킨 그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고향 청년들과 함께 몰래 인쇄하여 들고 4월 4일 양양 장날에 장터에서 만세 시위를 주동했다. 이후 학교를 세우고, 교사로 독립운동가로 살던 그는 독립운동가문의 기둥이 되어 간난의 세월을 강인하게 살아냈다. 유관순 열사가 그의 손아래 시누이다.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를 나오고 고향에서 부모와 함께 살던 안경신은 3·1 만세가 일어나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가 1개월 구류를 살게 된다. 석방 된 후 그는 대한애국부인회에 참여해서 군자금을 거두어 상해 임시정부로 보내는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아예 상해로 망명하여 광복군총영에서 국내로 파견하는 결사대의 일원이 되어 다시 입국했다. 평안남도 경찰국 청사에 폭탄을 던져 평양 시내를 들썩이게 하고, 평양시청과 경찰서에도 투척하였으나 도화선이 비에 젖어 불발에 그쳤다. 체포 당시 그는 임산부의 몸이었고,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1919년 3월에서 5월까지 세 달 동안 한반도 전역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에 참가한 사람은 모두 103만 명이 넘는다. 시위는 국내에서만 모두 1593건, 국외에서는 99건이 일어났다. 당시 한반도의 인구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1911년에는 1100만 명, 1925년에는 1900만 명이었다는 총독부 자료를 바탕으로 어림잡아 볼 때, 집집마다 모두 만세 시위에 가담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3·1 운동은 우리 민족의 운명을 바꾼 대 사건이었다.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왕의 백성도 아니고, 제국의 신민도 아닌 민주공화국의 국민으로 거듭나는 기점이 되었다. 그리고 3·1 운동은 거기에 참여했던 수많은 개인들의 운명도 바꿔놓았다. 그가 기생이었든 간호부였든 학생이었든 교장이었든 간에 그들은 자기 운명의 주체로, 민주공화국의 주체로 새롭게 태어났다.
- 분홍크래커로 총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왜? 저항하려고!
- 인도네시아의 현대미술가 F.X. 하르소노가 대표작 ‘만약 이 크래커가 진짜 총이라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습니까?’(1977)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 옮겨왔다. 분홍색 크래커로 만든 총을 산더미처럼 쌓아, 과자인지 무기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일상을 파고든 폭력성을 고발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과천=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어두운 구석공간에 조명을 받은 분홍빛이 뻗쳐 나온다. 슬금 다가가니 산처럼 쌓인 분홍더미. 그건 다름 아닌 권총이었다. 시선을 끄는 건 한 가지 더 있다. 총을 만든 소재, 크래커다. 깨물면 바삭 부서지는 담백한 과자 말이다. 이 얼마나 코믹한 상황인가. 결국 ‘핑키’한 색을 따라 다다른 산이 분홍색 크래커로 만든 총더미였다니. 도대체 애들이 장난친 것 같은 이 ‘작품’이 의미하는 게 뭔가. 눈길을 사로잡는 ‘작품’은 더 있다. 플라스틱 음료수병이 빙 둘러 원을 만든 한가운데 흰 천으로 싸맨 무언가가 누워 있다. 죽은 코뿔소 형상이란다. 그들을 내려다보는 듯한 한쪽 벽에선 빛바랜 영상이 돌고 있는데. 바닥에 들인 것과 비슷한 장면이다. 음료수병과 코뿔소 모형. 다른 점이라면 둘러싼 군중 사이에 한 남자가 둔탁한 둔기를 휘두르고 있다는 것. 이 섬뜩한 퍼포먼스와 모형이 의미하는 건 또 뭔가. 싱가포르 작가 탕다우가 30년 전 퍼포먼스 ‘그들은 코뿔소를 포획하고 그 뿔을 채취하여 이 음료를 만들었다’(1989)의 현장을 재현했다. 당시 작가는 코뿔소의 뿔로 만든 음료를 담아냈던 플라스틱 음료수 병 사이에 죽은 코뿔소 모형을 두고 그 죽음을 애도하는 ‘과격한’ 제스처를 선보였더랬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전혀 소통하지 못할 듯 보이는 두 ‘작품’에 공통점이 있다. 1960∼1990년대 아시아의 상황이란 거다. 한쪽에선 이전 시대의 사회·문화적 관습에 저항하는 변화를 열망했고, 다른 한쪽에선 민중을 억누르는 독재체제를 향해 투쟁의 비수를 꽂아댔다. 또 한쪽에선 빠른 도시화·산업화가 몰고 온 소비자본주의의 역기능에 시달렸고, 그 다른 한쪽에선 권력·제도를 비판하는 이슈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혼란과 격동, 저항과 연대가 아시아 곳곳에서 우후죽순으로 뻗쳐 나온 그때란 얘기다. 짧게는 30년, 길게는 60년을 거스른 당시의 이 상황이 한 공간에 모였다. 경기 과천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 펼친 ‘세상에 눈뜨다: 아시아 미술과 사회 1960s∼1990s’ 전이다. 한국을 비롯해 일본·중국·대만·홍콩·싱가포르·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필리핀·태국·인도·미얀마·캄보디아 등 아시아 13개국에서 날아온 작가 100명의 작품 170여점을 걸고 세웠다. 당대에 기고 날았던 각국 원로급 작가의 색과 행위, 목소리를 망라한 만큼 대규모다. 탈식민과 민족주의, 근대화와 민주화운동, 전쟁반대와 이념대립, 도시개발과 환경문제 등 광범위한 주제를 단 하나의 키워드 아래 묶어냈는데, ‘세상에 눈을 뜬 현대미술’이란 거다. 필리핀 작가 레나토 아블란(66)의 ‘민족의 드라마’(1982). 1976년 설립한 필리핀 젊은 미술운동가 단체인 카이사한의 창립멤버로 활약한 작가는 당시 마르코스 독재정권으로 고통 받던 민중의 모습을 마치 연극무대의 한 장면처럼 묘사했다(사진=국립현대미술관).△항거·비판의 역사…각국 원로급 총출동인도네시아에 현대미술을 상륙시킨 ‘아버지’로 불리는 F.X. 하르소노(70)는 자신의 대표작을 들고 한국을 직접 찾았다. ‘만약 이 크래커가 진짜 총이라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습니까?’(1977)다. 1965년 수하르토 통치가 시작된 이후 검열의 1순위가 됐던, 그 예술을 주도한 신미술운동의 실험적인 풍자였다. 이전과는 달리 설치·레디메이드·해프닝·오브제 등으로 관람객의 자발적인 반응까지 유도해낸 선도적인 미술이라고 할까. “실제 ‘분홍 크래커 총’을 제작했을 때 모여든 아이들이 크래커 총을 집어먹기도 했다”고 작가는 회고했다. 하지만 의도는 따로 있단다. 일상을 파고든 폭력성. 과자인지 무기인지를 구분할 수 없게 한 사회적 상황 말이다. 싱가포르에선 탕다우(76)가 나섰다. 30년 전 플라스틱 음료수병과 코뿔소 모형을 두고 퍼포먼스를 벌인 그이다. ‘그들은 코뿔소를 포획하고 그 뿔을 채취하여 이 음료를 만들었다’(1989)는 당대 소비자본주의가 잉태한 환경문제를 환기하려 제작·연출한 작품. 줄줄이 세운 병은 열을 내리는 치료에 효과적이란 코뿔소의 뿔로 만든 음료를 담아냈던 거다. 동물의 죽음을 애도하는 제의적 제스처를 과격하게 내보였던 40대 예술가가 이젠 70대가 돼 당시를 재현한 영상과 모형 앞에 섰다. 탕다우는 이 작품 외에도 ‘도랑과 커튼’(1979)을 함께 선뵀다. 도랑의 흙물이 잔뜩 밴 커튼 7조각을 늘어뜨린 작품은 땅에 대한 관심이란다. 자신이 살던 동네가 재개발로 철거된 이후 반영한 소재라고 했다. 싱가포르 작가 탕다우가 자신의 작품 ‘도랑과 커튼’(1979) 곁에 섰다. 도랑의 흙물이 잔뜩 밴 커튼 7조각을 늘어뜨린 작품은 작가 자신이 살던 동네가 재개발로 철거된 이후 생긴 땅에 대한 관심을 담아낸 것이란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한국에선 저항미술의 대가로 꼽히는 작가들이 줄줄이 나섰다. 조각·판화가 오윤(1946∼1996), 화가 김구림(83)·윤석남(80)·이강소(76)·민정기(70), 설치미술가 이승택(87) 등이다. 불·연기·안개·바람 등 자연현상으로 ‘형체 없는 조각’을 추구해온 이승택이 관습적 미술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낸 ‘하천에 떠내려가는 불타는 화판’(1988), 한강 살곶다리 부근의 잔디에 불을 놔 삼각형 흔적을 남긴 김구림의 ‘현상에서 흔적으로: 불과 잔디에 의한 이벤트’(1970) 등이 나왔다. 김구림은 “경찰에 연행돼 가던 작업”이라며 “모든 것이 내 캔버스란 생각으로 시도했다”고 당시를 돌이켰다.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라 불리는 작가 윤석남은 입체조각 ‘어머니 2-딸과 아들’(1992)을 선뵀다. 어머니의 가족사진 10장을 배경으로 폐목에 채색한 등신대 크기의 어머니와 딸, 아들을 만들어 세웠다. 지난 40여년을 일관되게 이어온 주제 ‘어머니’를 통해 “한국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고 했다. 화가로, 또 실험미술의 1세대로 활약한 원로작가 김구림이 자신의 대표적 퍼포먼스를 기록한 ‘현상에서 흔적으로: 불과 잔디에 의한 이벤트’(1970) 앞에 섰다. 작가는 “우리가 젊을 때는 힘든 세상이었다”며 “언젠가 이런 기회가 한 번쯤 있을 줄 알았지만 아시아 작가들이 한 데 모인 이번 전시가 너무 영광스럽다”고 소회를 밝혔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여성주의 미술의 대모’라 불리는 작가 윤석남이 자신의 작품 ‘어머니 2-딸과 아들’(1992) 옆에 섰다. 폐목에 아크릴물감으로 채색해 제작한 6점의 입체조각 ‘어머니 연작’ 중 한 점이다. 작가는 “1979년 마흔에 그림을 시작해 지금껏 어머니를 그려 왔다”며 “어머니 존재를 통해 한국여성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겠다 싶었다”고 말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회화 중에선 1980년대 군사정권이 장려한 ‘영화’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암시한 민정기의 ‘영화를 보고 만족하는 K씨’(1981), 조선시대 불화 ‘화엄사 시왕도’를 차용해 1980년대 소비문화를 지옥으로 풍자한 오윤의 ‘마케팅Ⅰ: 지옥도’(1980)가 먼저 보인다. 이들 사이로 최근 단색화시장에서 뜨거운 이우환(83)과 하종현(84)의 옛 작품도 발길을 붙드는데. 이우환은 철·솜으로 거대한 덩어리를 꾸며낸 ‘관계항’(1969/1988)을, 하종현은 패널에 스프링을 잔뜩 붙인 ‘무제’(1973)를 내놨다. 한국 민중미술의 대표작가인 오윤의 ‘마케팅Ⅰ: 지옥도’(1980). 조선시대 불화 ‘화엄사 시왕도’를 차용해 소비문화가 팽배했던 1980년대 한국사회를 지옥으로 풍자했다. 코카콜라·맥심 등 당시에 인기를 끌던 광고문구를 거침없이 혼용했다(사진=국립현대미술관).한국 전위미술 대표작가 이승택의 ‘하천에 떠내려가는 불타는 화판’(1988). 전통적인 조각·조형원리를 거부한 작가가 ‘형체 없는 조각’으로 관습적인 미술에 저항한 행위미술의 기록이다. 자신이 그린 화판에 불을 놓아 한강물에 떠내려 보내는 장면을 촬영했다(사진=국립현대미술관).△아시아판 ‘그날이 오면’…성찰의 무게감 가진 건 몸뚱이뿐이었다고 할까. 전시에는 자신의 몸을 도구로 쓴 작품이 유독 많다. 한 점, 한 점이 나라마다의 모진 족쇄를 감고 있고, 사회적 금기와 이데올로기에 저항한 행동주의를 입은 터다. 그나마 국가대항전은 지양한 모양새다. 딱히 어느 나라랄 것도 없이 온몸으로 항거한 예술혼을 몸 밖으로 꺼낸 대서사가 읽힌다. 다만 ‘왜 굳이 지금 한꺼번에 들춰야 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은 해결을 못 봤다. 서구가 자극한 대로가 아닌, 모처럼 세상에 ‘스스로 눈뜬’ 아시아의 거대한 예술적 움직임이 21세기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한때 ‘공명’을 이뤘다 할 이들이 지금은 어찌 흩어졌는지 혹은 연합했는지도 모호하다. 애써 다들 모아 수고롭게 올라섰는데 앞이 꽉 막힌 형국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막연히 그리워할 수 없는 ‘그 시대의 초상’이다. 다가서려면 어느 정도의 ‘공부’도, 마음의 준비도 필요하단 얘기다. ‘아시아의 그때는 왜 이토록 하나같이 무겁고 어두워야 했나’에 대한 성찰이 저절로 떠오르니까. 아시아판 ‘그날이 오면’, 바로 그거다. 전시는 5월 6일까지. 최근 단색화시장을 달구고 있는 이우환의 옛 작품 ‘관계항’(1969/1988). 철과 솜이란 이질적인 소재를 결합해 거대한 덩어리를 만들었다. 물질의 고유한 특성을 비틀거나 예상치 못한 조합으로 기존의 편견·관습을 깨는 작업 역시 당대 예술가들이 추구한 도전·저항의식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