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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⑧김윤모 하나증권 기업본부장(하)
  • [edaily] 이번주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은 하나증권 기업금융본부 김윤모 이사입니다.(인터뷰 중편에서 이어짐) -구체적으로 어려운 점은 뭡니까. ▲은행에서는 상사가 부하직원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수직적인 top-down decision making이 확실한 곳이 바로 은행이거든요. 요즘들어서 분위기가 많이 완화됐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도 보수적이에요. 하지만 증권사에서는 그래서는 안되겠다는 것을 많이 느꼈어요. 위계질서를 엄격히 내세우는 구조가 오히려 하우스의 발전을 해치는 거죠. 처음 출범시 은행, 그룹 등 다양한 곳에서 사람들을 끌어왔기 때문에 서로 다른 문화에서 자란 사람들을 한 덩어리로 뭉치게 하는 작업에 1년이 걸린 겁니다. 그 후 “이제 전진하자. 이 인원이면 어디가서 무엇인들 못하겠느냐”는 결심이 섰죠. -요즘도 출근을 일찍 하십니까. ▲네. 8시 이전에 출근합니다. 이사 승진 후 저는 임원 방이 필요없다고 말했어요. 고객과 직접 대면하고 회의를 주재해야하는데 방이 왜 따로 필요하냐고 말했죠. <“내가 일한만큼 대우받지 못한다는 것은 내가 시장에 필요없다는 의미”> -임원승진 후에도 성과급체계를 그대로 유지, 상당한 연봉을 받으신다고 들었습니다. 비결을 좀 알려주시죠.(웃음) ▲임원 중 성과급을 받는 사람들은 다른 하우스에서도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내가 일한만큼 대우받지 못한다는 것은 내가 시장에 필요없다는 의미일거다. 내가 필요하다면 거기에 걸맞는 대우를 해줘야한다” 는 거죠. 제 친구들 중에는 주식브로커로 성공해 엄청난 돈을 번 친구도 있습니다. 제가 그 친구들보다 질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직급보다는 비즈니스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럼 월급을 더 많이 받는 부하직원도 있습니까. ▲물론 있습니다. 올해는 제가 조금 더 많이 받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작년까지만 해도 팀장이나 다른 직원들 중 저와 비슷한 연봉을 받는 친구들이 꽤 있었습니다. 저는 제 봉급을 부하직원의 디스커션을 통해 결정합니다. 팀장들이 직접 “우리 보스는 일을 이러저러하게 했으니 이만큼 받으면 된다”고 평가하는 거죠. 사실 위에서는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모릅니다.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팀장이고 그들이 제게 돈을 줄 만하다고 생각해야 그 돈을 받을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들이 평가하기에 제가 무능력하다고 생각하면 저 말고 다른 사람이 하나은행 기업금융본부의 헤드로 와야 회사가 발전하겠죠. -옛날에 은행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을 고객으로 맞이하고 나서는 어떤 감정이 들던가요. ▲그 부분이 솔직히 말씀드려서 제 직업의 “애환” 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아직까지 브로커에 대한 인식이 매니저보다 화려하지 못한 일로 평가되고 있으니까요. 매니저와의 관계에서도 항상 자기주장을 낮추고 공손하게 대해야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앞으로는 동반자적 위치에 서는 식으로 분위기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브로커들이 많은 실력을 쌓아야겠죠. 저 개인적으로는 그런 문화를 많이 바꾸려고 노력하는데 상대방 쪽에서 호응해주지 않을 때는 만감이 교차합니다. 그 부분이 제일 힘들어요. -지난 한해 수익은 어느정도를 냈습니까. ▲30명이 영업이익 규모로 125억정도 흑자를 냈습니다. 원래는 170억 가량됐는데 코스닥 등록기업 시장조성 때문에 규모가 좀 줄어들었죠. <”실무경험을 가진 CEO들이 자꾸자꾸 등장하면 펀드매니저 대우가 파격적으로 달라지리라 믿습니다”> -이건 좀 조심스런 질문인데… 딜러와 브로커의 페이가 너무 차이난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딜러들이 브로커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과도한 수수료에 반감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인데요. ▲미국에서는 스페셜리스트에게는 확실한 대우를 보장해줍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그렇지않아요. 채권운용 펀드매니저가 운용을 잘해서 큰 수익을 내도 “너 혼자만 잘해서 그런 건 아니지 않느냐 시장이 좋아서 그렇지” 식의 분위기가 대부분이죠. 그건 한국의 금융기관 CEO나 CFO들이 능력에 걸맞는 대우를 해주는 미국식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은 탓이 크다고 봅니다. 실무경험을 가진 CEO들이 자꾸자꾸 등장하면 펀드매니저 대우가 파격적으로 달라지리라 믿습니다. -하나증권으로 옮긴 후 기억에 남는 딜은 무엇인가요. ▲회사채로 보면 두 가지 정도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이름을 밝히기는 좀 그렇고…하여간 모 그룹사의 BBB 등급 채권이 특히 기억에 남는군요.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소외당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 그룹사가 증권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쪽에서도 맡을 엄두를 못 냈어요. 저희 리서치에서 분석을 해보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돼서 밀어붙였습니다. 딜이 성공한 다음에는 고맙다고 난리도 아니더군요. 지금 잘 나가는 회사들 중에서도 한때 채권발행이 어려웠던 곳이 꽤 있었습니다. 그런 쪽을 맡았을 경우 저희는 이런 식으로 접근했습니다. 큰 기관을 직접 찾아가서 “이 채권을 왜 안 사냐. 이건 정말 저평가됐다” 고 주장했습니다. Argue 아닌 argue를 한 거죠. 그래서 큰 수익을 안겨준 곳이 몇 개 있습니다. 기업금융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큰 보람이었어요.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시대흐름에 순응하는 자세가 필요> -힘들거나 어려웠던 적은 없습니까. ▲제가 노력한만큼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나 할까요. 또 하나는 금융계에 종사하는 사람이 대부분 보수적이다보니 새로운 지식이나 시스템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좀 유연하지 못한 것 같아요. 배타적인 사고방식이 많이 존재하는 편입니다.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시대흐름에 순응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원래 영업하는 분들은 좀 공격적인데요. ▲저는 조화를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어느 한 면만 뛰어나서는 안되고 다방면에 걸쳐 균형감각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기자도 취재를 위해 매일 정보를 요구할 수는 없잖아요. 내가 정보를 주기도 해야 다음에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고. 세상만사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주고받는 식으로 이뤄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쪽 계통의 사람이 너무 강성을 띠면 곤란하죠. 이번에 놓쳤더라도 다음 번에 좀 더 좋은 가격을 노리려면 적당히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한의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는데…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요? ▲우선 저는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의 혈색을 세심하게 관찰합니다. 혈색만 유심히 관찰해도 신체의 어느 부분이 안 좋은지 정도는 알 수 있어요. 제가 체계적으로 공부한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지식을 쌓으려고 노력한 결과라고나 할까요. 병명이나 약재에 관한 호기심도 많습니다. 저는 “사람은 건강하게 오래살아야 한다” 고 생각해요. 미국 매니저들은 fitness club 등을 이용하면서 자신의 건강관리에 대단한 노력을 쏟습니다. 지금도 건강한 데 뭐하러 그렇게 시간을 들여서 운동하냐고 물어보면 그들의 대답은 이겁니다. “일을 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데일리 몸 컨디션을 최적으로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가진 능력의 베스트를 발휘할 수 있다” -그럼 건강관리를 어떤 식으로 하시나요. ▲목욕하는 것을 무척 즐기고 음식을 가려먹습니다. 기름진 음식은 거의 입에 대지 않습니다. 비만을 해소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서양에는 채식주의자가 많지만 바로 녹차입니다. 녹차를 끊임없이 마시죠. 담배도 끊었습니다. 금연을 결정한 이유는 브로커를 하다보니 말을 많이해서 목 상태가 나빠졌기 때문입니다. 성대결절도 앓았습니다. 목이 나빠져서 처음 병원에 갔더니 엑스레이 사진을 보고 인턴이 그러더군요. 혹시 직업이 가수시냐고. 그래서 가수라고 했습니다.(웃음) -다방면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은데 의사말고 다른 직업을 희망한 적은 없습니까. ▲쇼 프로그램 PD를 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음악을 무척 좋아해요. 듣는 것, 노래하는 것 모두다(웃음). 쇼 PD는 우선 즐거움을 주는 직업이잖습니까. 화려하고 재미있고 다이나믹한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누군가 “어차피 인생은 쇼다” 하던데요(웃음) <인재에 대한 교육, 투자가 시급하다> -한국 브로커리지 하우스가 앞으로 갖춰야 할 점은 무어라고 생각하시나요. ▲외국증권사에 비하면 지극히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적어도 기업금융 부분에서는 세계적인 증권사들과 경쟁할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이를 위한 교육 및 투자가 시급하다고 생각해요. 직원을 외국에 보내서 선진금융기법을 익히게 하는 일을 비롯해서요. 인재를 키우지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어요. 지금 비슷한 일을 계획중인데 이데일리에서도 한 분 정도 참가하시면 좋겠어요. 이 모두가 한국금융시장 발전을 위한 밑거름이 될 겁니다. -그러한 계획들이 윗선에서 제지 당하지는 않을까요. ▲그건 간단합니다. 이제 금융기관도 많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해당기업에 돈을 더 많이 벌어다주면 제가 원하는 바를 요구할 수 있는 거죠.(웃음) 그리고 회사도 그것을 수용하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바램은 무엇입니까. ▲저는 파트너라는 말을 무척 좋아하고 국내 최초의 파트너증권사를 만들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김&장, 앤더슨, 아서 D 리틀, PWC 같은 곳 말입니다. 각자가 파트너가 돼서 회사 일에 책임을 지는 유한회사 말입니다. 우리나라 조직에서는 인사가 어떻고 급여가 어떻고 간섭하고 질시하는 일이 비일비재 하잖습니까. 너무 비효율적인 것 같아요. 자기 역할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누가 봐도 ‘아, 저 하우스는 실력좋고 깨끗하고 담백한 곳이구나. 뛰어난 애널리스트, 브로커, 딜러들을 고루 갖췄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끔 할 겁니다. 이제 한국 자본시장도 자생적인 경쟁력을 갖출 시기인 것 같아요. 사실 금융계 선배들 중에서도 이런 노력을 하신 분들이 몇 분 계세요. -결혼은 어떻게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선을 봤습니다. 그 때 집사람은 병원 약사로 근무 중이었는데 만나기전에 먼저 전화를 했죠. 그랬더니 다짜고짜 “저번 주에 전화하신 분이죠?” 하는 겁니다. 무슨 소립니까. 난 저번 주의 그 남자가 아닌데. 그 말을 듣고 나니 오기가 막 발동하더라구요. 그래서 적극적으로 덤볐죠. 허허 동양적 성격이라 제 생활을 잘 이해해서 항상 고맙게 생각합니다. -공부를 더하겠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습니까. ▲그 생각은 많이 해왔습니다. 이사 승진 때 제가 임원승진 대신 공부를 좀 더 시켜달라고 부탁드린 적도 있습니다. 이론적인 것보다 선진국 자본시장에서 어떤 상품이 판매되고 그런 시스템은 어떻게 구축돼 있느냐는 식의 실질적인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제가 공부한 것들을 한국금융시장에 정착시키는 작업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죠. 언젠가는 갈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습니다. 아울러 저희 팀장급은 무조건 순환해서 공부를 계속 시킬 생각입니다. (김윤모 이사 약력) -59년 부산 출생 -부산대동고 졸업 -79년 고려대 정경대 통계학과 입학 -83년 조흥은행 입사 -86~91년 한미은행(신탁부, 외환업무부) -91년 하나은행(한국투자금융 전환설립 사무국, 신탁증권부, 영업부, 종기부, 장기경영팀) -99년 하나은행 지점장 -99년 9월~ 하나증권 기업금융본부
2001.04.27 I 정명수 기자
  •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⑧김윤모 하나증권 기업본부장(상)
  • [edaily] 채권 펀드매니저와 브로커는 미우나 고우나 얼굴을 맞대고, 전화로 숨소리를 함께 해야하는 관계다. 펀드매니저를 야구의 투수에 비유한다면 브로커는 포수다. 포수의 리드가 좋지 않으면 아무리 훌륭한 투수도 빛을 볼 수 없다. 이번주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의 주인공은 하나증권 기업금융본부를 이끌고 있는 김윤모 이사다. 하나증권 기업금융본부는 회사채, ABS 등 발행업무와 채권중개 분야에서 1년 반만에 업계 수위를 차지, 급부상한 브로커 하우스다. 김 이사는 하나은행에서 잘 나가는 ‘뱅커’였지만 과감하게 브로커로 변신, 여의도에 안착한 대표적인 ‘명동맨’이다. 은행원에서 증권사 직원으로, 그것도 폐쇄적이라는 채권판의 브로커로 변신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은행시절 신탁부에 오래 있어서 채권시장에 지인이 많고 전혀 낯설지는 않았어요. 제가 채권딜러였을 때 브로커로서 저를 응대했던 분들중 딜러가 되신 분들도 많구요. 지금은 제가 브로커고 그분들이 딜러죠. 입장이 바뀌었지만 개의치 않습니다.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고 시장에서 인정을 받으면 되죠.” 김 이사는 은행시절에도 새로운 상품을 만들고 새로운 채권에 투자하는데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하나은행의 해외DR 발행실무를 맡았을 때는 가격 협상의 기법을 익히기 위해 국내에 진출한 외국계 증권사를 이잡듯 뒤지고 다녔다. 자산유동화법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신탁적 양도”라는 방법으로 매출채권을 유동화시키는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기기도 했다. 하나증권 브로커팀을 이끌면서도 신용도가 높고 성장성도 있지만 시장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 회사채, 카드채 등을 발굴해 손수 기업IR까지 해가며 채권발행을 성공시켰다. 김 이사는 “단순히 호가나 불러주고 딜러들 의견에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브로커는 더 이상 경쟁력이 없다”며 “브로커일수록 공부하고 새로운 서비스를 개발해 내야한다”고 말했다. “투수에서 포수로, 딜러에서 브로커로” 김 이사의 변신 과정, ‘명동맨’의 ‘여의도 이주기’를 들어봤다.(김 이사 약력은 인터뷰 하편 기사 하단참조) -통계학을 전공하셨네요. ▲고려대학교 통계학과 79학번으로 입학했습니다. 통계학이란 학문이 너무 어려워서 대학시절에는 딴전을 많이 피웠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의사를 하면 훨씬 잘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제가 건강에 관심이 매우 많은 편입니다. 한약이나 한방체질에도 남다른 흥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집안에 의사가 계신가요. ▲가족 중에는 없습니다. 저희는 집안은 교육자 집안입니다. 조부때부터 3대째 교육자 일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저희 부친께서는 고등학교 영어선생님을 하셨죠. 한때 세칭 부산에서 제일 잘나가는 과외선생님이시기도 했습니다. 하하. 현재 형님 중 한 분도 교직에 계십니다. -그럼 어떤 기회에 건강, 의학쪽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겁니까. ▲그건 아마 타고난 것 같습니다. 아주 어릴적부터 흥미를 가졌으니까요. <비즈니스 맨의 꿈이 뱅커로> -대학교 시절의 꿈은 뭐였습니까. ▲상대쪽을 다니다보니 자연스레 비즈니스 맨의 꿈을 키웠습니다. 실제로 대학졸업 후 처음에는 모 그룹사 공채에 합격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인생이라는 것이 꼭 생각한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더군요. 제가 형님이 세 분인데 대한항공에서 근무하시는 형님께서 “그룹일이라는 것은 너무 힘들고 비전도 별로 없다. 금융계로 진출하면 어떻겠느냐”고 권유하셨어요. 그래서 군대가기 전에 조흥은행에 입사했습니다. -그 때가 언제였나요. ▲83년이었습니다. 지금 서울역 엘지빌딩에 있었죠. 그당시 은행은 무척 경직되고 위계질서가 엄격한 분위기였습니다. 처음 입행해서는 외환 네고업무를 담당했습니다. 한번은 다른 그룹사 직원과 우리 여직원사이에 싸움이 붙었어요. 대기업의 위세가 대단하던 때니까 그 그룹쪽에서 강력한 반발을 하고 저희 직원들은 큰 야단을 듣고…난리도 아니었죠. 그런데 사실 우리 여직원들은 순서에 맞게 일을 처리했을 뿐이었거든요. 그래서 차장에게 항의를 했죠. “여직원들은 사실 잘못한 것이 없다” 고 말입니다. 그 일로 차장과 크게 말다툼을 벌였는데 그때 ‘은행 일은 내 적성에 맞지 않다. 다른 직장을 찾아봐야겠다’ 는 것을 확실히 느꼈습니다. 그리고 군대를 다녀와서 새 직장을 구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IBM같은 외국기업들이 매우 인기가 높은 직장이었어요. 그래서 Bank of America와 국내 기업이 합작해서 만든 한미은행이 괜찮겠다 싶더군요. 외국계 기업의 문화를 지니고 있는데다 급여수준도 상당히 높았고… 바로 추천을 받아서 어플라이를 했습니다. 다섯명을 뽑는데 경쟁률이 몇십대 일일 정도로 무척 인기가 높았습니다. 그때 저희 담당임원이 김진만 전 한빛은행장이셨죠. 지금은 상상하기 힘드시겠지만 86년 당시 은행권에서 그렇게 자유로운 분위기를 지닌 곳은 아무데도 없었습니다. 자유복을 입고 회사 안에서 머그컵을 들고 돌아다니고 외국TV에서 본 것처럼 책상에 걸터앉아 회의도 하고… 이 모든 것이 당시로선 파격이었던거죠. 사실 조흥은행에서는 채 1년도 안되는 기간을 근무했기 때문에 첫 직장은 한미은행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한미은행에서의 생활은 ▲그때 김진만 행장께서 상무로 재직중이셨는데 저를 좋게 봐주시고 많은 배려를 해주셨어요. 특진도 세 번 정도 했습니다. 입사때부터 기업금융 쪽 일을 주로 했습니다. -그럼 어떤 계기로 한국투자금융 전환설립사무국으로 이직하게 되었습니까. ▲ 한국투자금융은 하나은행의 전신입니다. 처음에 제의를 받고 무척 고민을 많이 했어요. 한미은행에서의 생활도 괜찮았고 옮겨간 직장이 잘된다는 보장을 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술을 한잔 먹고 집에 들어가서 집사람과 얘기를 나눴죠. 저희 집사람은 말수가 적은 편입니다. 몇가지 물어보더라구요. -그게 뭡니까. ▲승진기회와 월급을 어디가 많이 주냐는 것이었습니다. 하하. 그래서 새 직장이 더 많다고 답했더니 그럼 그 쪽으로 옮기는 것이 당연하지 않냐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반문했죠. 여기서는 김진만 행장께서 나를 좋게 봐주시고 잘 돌봐주시는데 새 직장에 가면 그런게 다 없어지지 않느냐고. 집사람 말이 “그 분이 당신과 평생 같이 살기라도 하느냐. 언젠가는 홀로서야 하지 않겠느냐”고 모든 것을 명확히 해주더군요. 이직에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집사람은 직장 옮겨서 좋을지 안 좋을 지에 관해서 점을 보러가겠다고 하더라구요. 점장이 왈 “승진을 하거나 좋은 곳으로 갈 운명” 이라고 말했다더군요. 그당시 한미은행에서 막 대리로 승진했을 때라 또다시 승진하지는 않을 것 같고 그럼 좋은 데로 갈 운명인가보다 생각했죠. 제 친한 친구들 7명에게도 일일이 물어봤더니 다들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를 해주더군요. <여신, 외환, 신탁, 기획… 은행의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하나은행으로 옮긴 다음에는 어떤 일을 했습니까. ▲91년 하나은행으로 이직하고 나서는 온갖 일을 두루두루 다 했습니다. 본점영업부여신, LC, 외환, 신탁운용, 기획, 결산 등등이죠. 영업부 차장으로 승진한 후에는 30대 그룹 여신 외환업무나 기관섭외 및 마케팅 담당으로 일했습니다. 주로 영업쪽 일을 많이 하다보니 하루는 행장께서 “영업만 해서는 클 수 없다. 이제는 종합기획일을 좀 해봐라”고 하시더군요. 그 후 종합기획 주무과장으로 발령받았습니다. 처음에는 기획쪽으로 가게 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행장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이사 한 분께 “영업하는 사람을 기획으로 가라고 하시는 말씀은 회사를 그만두라는 것 아닙니까”라고 항의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기획일을 담당하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도움이 되고요. -하나은행에서 이직 제의를 받았을 때 유학을 보내준다는 등의 조건들도 있었다면서요. 이행이 됐습니까. ▲하나도 이뤄지지 않았죠. 하하. 승진은 빨리 했습니다만 일을 정말 많이 시키더군요.(웃음) 일은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일요일에도 집에 거의 못갔을 정도였으니까요. 하나은행 영업부 차장시절에 신상품도 많이 만들었습니다. -해외DR 발행 이야기 좀 들려주시죠. ▲금융권에서 저희보다 먼저 해외DR을 발행한 건 장기신용은행 뿐이었습니다. 그게 96년이었는데 실패했죠. 그때 김영삼 정부가 중소기업지원 명목으로 한시적으로 금융권 해외DR 발행을 허용했던 때였습니다. 장기신용은행이 실패할 무렵 저희는 한참 로드쇼(road show: 유가증권을 발행하려는 회사가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벌이는 설명회. 주요 국제 금융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진행된다. 유가증권 발행시에 실시하므로 일반적 기업설명회인 IR과는 구분된다)를 진행중이었습니다. 제가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준도 못됐고 그때 국제부는 현 하나은행 국제부 임원이신 최종석 상무께서 맡고 계셨습니다. 해외DR 발행의 경우 은행마다 발행 담당팀이 달랐어요. 국제부에서 맡는 곳도 있었고 다른 팀에서도 했는데 하여간 서로들 하려고 난리였습니다. 로드쇼라는 것이 해외에서 진행되는 것이라 재미도 있고 보람도 느낄 수 있는 일이잖습니까. 하나은행에서 해외DR 발행과 관련된 팀은 국제부와 저희 종합기획부였는데 저희는 서로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일이 워낙 많으니까요. 의견차도 있었구요. 결국 저보고 그 일을 맡으라고 위에서 말씀하시더군요. 제가 “왜 가야합니까?” 라고 질문했더니 “영어는 잘 못해도 담판을 잘짓는 당신 같은 사람이 제격이다”라고 하시더군요.(웃음) 가격 프라이싱을 해본 사람이 가야된다는 논리였죠. 그래서 한달동안 6개 외국계 증권사 서울지점장들을 저녁마다 만났습니다. 어떻게 하면 성공적인 해외DR 발행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많은 자문을 구했어요. 하루도 거르지않고 저녁마다 2시간씩 강행군을 해서 대충 결론을 내렸습니다. 공통된 답은 “동서양 문화는 다르지만 결국 DR 발행도 일종의 기싸움이다” 였어요. 흥정에서 밀리면 진다는 거죠. 그래서 하나은행이 프리미엄을 받아야 되는 이유에 관한 논리를 마련하고 마음의 준비를 가다듬었습니다. 그런데 장기신용은행이 실패를 하고 돌아오고 나니까 사람들이 별 기대를 안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아무튼 해외로 날아갔습니다. 저희는 주간사를 메릴린치나 골드만삭스 같은 큰 회사로 하지않고 조그만 회사로 선정했었어요. 양자가 세계적인 회사긴 하지만 일단 로드쇼가 시작되면 주간사는 발행자편이 아니고 투자자편으로 돌아서거든요. 그래야 투자자들에게 계속 채권을 계속 팔아먹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동방페레그린증권과 현대증권 등에 주간사 업무를 맡겼습니다. 당시 페레그린 증권이 동양을 잘 이해하는 하우스이기도 했으니까요. 그 후 협상테이블에 앉아 프라이싱을 하는데 1%밖에 못 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그 가격에는 도저히 발행못한다”고 말하고서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습니다. 그 후 재협상에 돌입해서 3%까지 끌어올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가격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애초목표는 10%였거든요. 또 다시 지루한 협상이 시작되고 마지막 즈음에 제가 말했습니다. “서로 양보하자. 정 안되면 너희 CEO와 우리 CEO가 담판을 지으면 될 것 아니냐. 난 10%를 생각하고 왔으니 3% 양보하겠다. 너희도 3% 양보해라” 라고요. 그래서 6%로 합의를 봤습니다. 딜을 끝내고나서 하루정도 뒷마무리 작업을 하는 것이 보통인데 저희는 그런 것 없이 일사천리로 일을 마쳤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 해외DR 발행이 그룹증자로 이어지면서 많은 분들이 좋은 평가를 해주신 것 같습니다. 그 후에도 발행에 실패한 곳도 더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외환위기 당시에는 무슨 업무를 맡으셨나요. ▲외환위기가 발생할 당시 장기금융전략팀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주된 업무는 금융권 얼라이언스 준비, 증권회사 진출업무였고 후에 종금사 합병업무도 맡았었습니다. 종금사 합병때는 비밀작업들도 많이 했습니다. 6개월동안 숨어 지내다시피하면서 성사를 위해 노력했죠. 위에서 “모 종금” 이라고 한마디 하시면 일주일 만에 작업을 추진하느라 백방으로 뛰어다녔습니다. 자료정리 및 재평가 작업만으로도 눈코뜰 새 없이 바빴습니다. (인터뷰 중편으로 이어짐)
2001.04.27 I 정명수 기자
  •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⑤임지원 JP모건 이코노미스트(하)
  • [edaily] 이번주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의 주인공은 JP모건의 임지원 박사입니다.(인터뷰 중편에서 이어짐) 뜻하지 않게 국가부채 논쟁에 휩쓸린 보고서 한 편 -임 박사님 하면 생각나는 것이 또 하나 있는데요. 지난해 총선때 국가부채 논쟁에서 한나라당 정책위장을 맡고 있는 이한구 의원이 인용한 자료가 바로 임 박사님의 리포트였는데요. 그 일로 곤욕도 좀 치르셨다면서요. ▲(대단히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전화를 좀 받았습니다. 인용된 부분은 구조조정에 관한 보고서였습니다. 모건이 99년 2월부터 태국과 한국을 비교하면서 구조조정 관련 보고서를 정기적으로 내기 시작했어요. 근데 채무에 관한 자료가 없어서 자료찾는데 고생을 많이 했어요. 그때만 해도 대외채무와 국내채무를 담당하는 부서는 있었지만 이 둘을 총괄하는 부서는 없었기 때문에 환율방향도 예측하기 어려웠어요. 사실 그 보고서는 힘들게 자료를 찾아서 제 나름대로는 굉장히 심사숙고한 후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나와있는 통계자료를 보고 채권발행(bond issuance)도 점검했죠. 국가채무와 국채, 공채, 채권발행, 정부 차용금(government borrowing) 등을 맞춰서 자신있게 쓴 건데 그렇게 쓰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전화도 많이 받았고 심지어 사과하라는 압력까지 들어왔어요. 하지만 회사에서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 고 강경하게 대처해줬어요. 외환위기를 겪고나서 정부 태도가 바뀌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자료요청 문제로 정부와 대화할 일이 많은데 점점 개방적으로 변해간다는 것을 느껴요. -임 박사님의 리포트를 보내달라는 요청도 있나요. ▲네. 메일링 리스트에 넣어달라는 분들도 있습니다. 요즘에는 저희와 같은 외국계 쪽의 보고서들도 상당히 많은 분들이 모니터링 하시는 것 같아요. 특히 외국인 투자동향을 파악할 목적으로 외국계 보고서를 필요로 하는 분이 많아진 탓이겠죠. ‘이 사람들의 견해는 무엇인가’ 이런 의미에서요. ”경기전망을 할 때 택시기사, 호텔도어맨들의 생각도 참조합니다” -자료들은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공식적으로 나오는 자료는 기본적으로 다 체크합니다. 저는 글로벌리서치에 있기 때문에 타국에서 나오는 데이터들을 볼 수가 있어요. 비록 그것이 공식화된 것은 아니더라도 제 업무에는 상당한 도움이 됩니다. 신문도 많이 참고하고 있어요. 제가 개인적으로 쓰는 지표들 중 하나는 특히 경기가 나빠질 때는 더욱 택시운전사나 호텔도어맨들의 의견이에요. 아주 유용하죠. -하지만 그런 건 계량화가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계량화는 안되지만 방향 설정은 가능합니다. 데이터가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 아닌가를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이에요 “요즘 손님 많이 드나요? 옛날보다 손님태우기 위해서 많이 기다리세요?” 하고 물어봐요. 기회가 있을때마다요. 그분들은 늘 라디오를 틀고 있고 승객들과 대화를 많이 나눠서 그런지 의외로 상당한 도움을 받고 있어요. 호텔도어맨들에게도 택시를 기다리며 “요즘 손님들 어때요?” 하고 물어보죠. 국내 요인만 보면 2분기 경기회복 가능 -그런 데이터에 의존한 결과 현재 국내경기가 어떻다고 보세요.(웃음) ▲국내 요인만 보면 확실히 경기가 반등기미(buttoming out) 를 보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해외요인만 빼면 2분기 회복도 가능한 것 같구요. 하지만 해외요인을 절대 무시할 수 없잖아요. 해외요인이 굉장히 나빠지고 있는 건 사실인데 미국이 리세션(경기후퇴)를 피하고 최악의 상황만 지나준다면 국내 경기는 W자 반등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최근의 보고서를 보면 내수부분에서는 분명히 바닥인데 외부적인 리스크를 도외시할 수 없다는 것인데요. ▲저희는 2분기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소비심리는 살아나고 있는 게 확실하지만 미국이나 일본이 1분기와는 달리 2분기 전망이 무척 안좋게 나오는 상황이거든요. 요즘 V, U, W자 반등에 관한 얘기가 여기저기서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V든 U든 다 좋지만 중요한 건 어떤 근거로 해서 그러한 모양의 반등이 일어나게 되느냐는 거죠. 보통 미국경기를 얘기할때는 ‘전분기 대비 연율’을 많이 봐요. ‘SAAR’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전년동기 대비 연율’을 해서 지표로 삼고 있다는 것이 문제에요. 전년동기 대비로 보면 V나 U자 반등은 말도 안되고 잘해봐야 W반등 이거든요. 어떤 시리즈를 대비해서 하는 것이냐는 것에 관해 명확한 기준이 없다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전망을 하실 때 얼마나 많은 데이터를 참고하십니까. ▲숫자는 기본이고요. 숫자가 매우 중요하긴 한데 제가 하는 일이 주로 예측에 관련되다 보니 이용할 수 있는 데이터만 가지고는 일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아요. 택시기사랑 얘기했더니 이렇다더라 해서 보고서를 그렇게 쓴다는 건 아니구요. 그 분들의 의견을 참고해서 감을 짚어내는 정도죠. GDP 동향을 예측할 때는 수 많은 기초자료가 필요합니다. 주로 사용하는 건 산업활동동향에 나오는 숫자들, 물가지수 등등이에요. 통계청과 한국은행에서 나오는 데이타를 기본으로 해서 정기적으로 예측보고서를 내고 그 외에 다른 데이타를 가지고 거시적인 전망을 하는거죠. 수십가지는 되는 것 같아요. -숫자를 처리하는 자체 툴이 있나요 ▲주로 엑셀을 사용하죠. 뉴욕에서 제공해주는 것도 있고 모건 자체에서 모델을 만들기도 합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보고서, 98년 8월에 나온 ‘한국수출 가능성 있다’ -이제까지 수많은 보고서를 냈을텐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보고서가 있나요. 잘한 것이든 실수한 것이든 말입니다. ▲음..기억에 남는 보고서는... 98년 1~2월달에 우리가 금을 수출하기 시작하면서 수출이 막 좋아지다가 2달 정도 지나니까 갑자기 나빠지기 시작했어요. 실제 데이타도 안 좋게 나오니까 난리가 나서 언론은 "한국수출 안 좋아"라는 타이틀로 대거 기사화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분석을 해보니 계절적인 효과나 금 수출로 인한 pay back을 빼고는 그다지 나쁘지 않은 거에요. 그래서 98년8월 중순에 "한국수출 가능성있다" 라는 보고서를 냈죠. 채권에 관한 보고서였으면 시장에서 바로바로 반응이 오겠지만 이 보고서는 그야말로 데이타 그 자체, 무생물에 관련된 내용이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수출이 9월달부터 갑자기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보고서제출 2주 후에 그런 결과가 나타나니까 정말로 기분이 짜릿하더군요. 99년 5월에는 제가 GDP 포캐스트를 엄청 틀리게 내보낸 적이 있어요. 제가 왜 그랬었는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재고조정에 대해 별다른 신경을 쓰지않고 포캐스트를 한 게 원인이었습니다. 만약에 실제 수치가 5.5%였다고 가정하면 저는 6.5~7.0% 이런 식으로 상당히 격차가 벌어지는 수치를 전망한 거에요. 1분기 GDP 전망이 정말 어려운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도 매년 5월만 되면 그 때의 악몽에 시달리고 있습니다.(웃음) -98년 가을에 99년 전체 GDP를 맞추고 얼마 안돼서 1분기 GDP를 못 맞추다니 의외로군요. ▲99년 전체 GDP를 맞춘 건 수치를 정확히 예측한 것이 아니라 향후 추세를 맞춘거죠. 경기가 내려가다가 회복되는 과정에서 그 올라가는 시점을 정확히 포착한 거니까요. 하지만 올라가는 속도를 예측하는 것에 실패한 겁니다. -"그럴 수도 있지" 라는 생각을 하는 대신 그때만 되면 악몽에 시달린다는 건 실패를 용납하지 못하는 치열한 성격이라는 의미입니까. ▲2000년 5월에 똑같은 예측을 하는데 그 전해의 실패가 떠오르면서 좀 주저하긴 했어요. "내가 1분기 전망에 좀 약하지" 하면서요.(웃음) GDP 전망이 무척 중요하거든요. 국내에선 숫자를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지만 해외에서는 그 GDP 전망을 보고 스트레티지스트들이 권고를 내보내기 때문에 소홀히 할 수가 없어요. 컨센서스와 반대로 포캐스트를 하면 그들에게 많이 미안하죠. 이코노미스트, 스트레티지스트, 딜러..확실한 영역구분 -JP모건은 국내 여러 하우스 중 드물게 자금을 직접 운용하는 딜러와 이코노미스트, 스트레티지스트를 다 갖췄는데요. 3자의 영역이 명확히 구분돼 있어 이코노미스트는 딜링룸에 들어올 수 없을 정도라고 들었습니다. 실제로 그런가요? ▲딜링 룸에 들어가지 못하는 그런 건 아닙니다. 물론 명확한 업무 구별은 있어요. 오히려 제 스스로가 너무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편이 맞을 겁니다. 자주 마주치게 되면 그만큼 서로의 의견에 영향받게 돼서 시장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어요. 제가 스트레티지스트의 롤을 하고 스트레티지스트가 딜러의 롤을 하려들면 엉망이 되는건 당연하겠죠. 저는 어느 정도 분리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짧게 보지 않으려면요. -그럼 서로의 견해가 다르면 트레이더나 스트레티지스트들과 의견 대립도 있겠군요. ▲물론이에요. 몇 시간씩 토론에 토론을 거듭하며 자기 의견이 맞다고 주장하죠.(웃음) 제 역할은 시장이 움직일 때 그걸 잡아주는 겁니다. 너무 지나치다 싶으면 그걸 튜닝해야죠. 제일 변동성이 심한 사람이 트레이더고 그 다음이 스트레티지스트들이에요. 저는 좀 길게 보고 가자는 입장인데 시장과 직면한 트레이더의 경우 눈앞에 먹을게 있는데 그걸 지나치기는 힘들어요. -각각의 직급구별이 없이 서로의 역할 안에서만 이야기합니까. ▲당연합니다. 어차피 세 명 모두 리포팅 라인도 다 달라요. 물론 직급의 차이는 있지만 그것이 의견개진에 있어 방해가 될 수는 없습니다. 모건의 문화 자체가 직책에 좌우되는 분위기가 아니에요. -본인의 연봉이 회사내에서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고 있습니까. ▲전혀 몰라요. 아무도 모릅니다. 그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우리 남편도 몰라요(웃음) -통상적으로 대기업 이사급 정도인가요. ▲대기업 이사가 얼마받는지 모르겠는데요.(웃음) 삼성경제연구소에 있었지만 저는 이사가 아니었으니까. 물론 많이 받긴 합니다. 연봉의 변동성은 아까 회의할때와 마찬가지에요. 시장과 직면한 트레이더들이 가장 많이 움직이고 그 다음이 스트레티지스트, 저희는 제일 적게 움직이는 편이죠.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기보다는 저를 아는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이코노미스트가 되고 싶다” -이코노미스트로서의 꿈은 뭡니까. ▲10년 정도는 이 일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기보다는 저를 아는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이코노미스트가 되고 싶어요. 10년이 지나면 다른 일을 가져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있어요. 무슨 일을 하게될 진 모르겠지만. -대학강단에 설 계획은 없으신가요. ▲지금은 없어요. 아직까지는. -업계에 세미나도 많이 나가실텐데 둘러보면서 인상에 남는 기관은 있던가요. ▲물론 있습니다. 말씀드리기는 곤란하구요. 한가지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다들 정말 진지하다는 거죠. 제가 학회나 여타 관계자들의 세미나에도 많이 나가봤지만 그 곳보다도 훨씬 치열하게 토론을 하시더라구요. 생업과 연관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수준이 상당해서 감명을 많이 받았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남편보다 늦게 들어갈때도 있을텐데 이코노미스트라는 직업을 잘 이해해주는 편이신가요. ▲네. 제가 힘들까봐 걱정해주는 편이에요. 저는 아침은 꼭 차려주고 나와요. 저녁을 같이하지 못할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차려주는 걸 너무 좋아하더라구요.(웃음) -만약 나중에 따님이 이 일을 한다면 어떡하실 겁니까. ▲저는 비단 이 직종이든 아니든 뭘 한다해도 말리지는 않겠어요. 무슨 일을 하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니까요. 자기가 좋아하고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일이라면 연예인이 된다고해도 간섭하지 않을 작정이구요. 좋아하면 열심히 할테고 열심히 하다보면 성공하지 않겠어요? 그러니 무슨 일을 해도 본인이 좋아한다면 말릴 생각은 없습니다. (임지원 박사 약력) -64년 출생(본적 대전) -서울예술고등학교 졸업 -87년 서울대학교 영문학과 졸업(83학번) -95년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 경제학박사 -96년2월~98년1월 삼성경제연구소 -98년2월~99년1월 JP모건 홍콩 -99년2월~ JP모건 서울
2001.04.06 I 정명수 기자
  •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③국민연금 한승양 팀장(상)
  • [edaily] 국민연금은 채권시장의 “큰 손”중에서도 가장 큰 손이다. 국민연금의 채권투자 규모는 23조5000억원. 우리나라 전체 채권시장 규모를 300조원이라고 할 때 7.7%에 달하는 규모다. 국민연금의 위력은 현재보다 미래에 있다. 국민연금 펀드는 시간이 지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주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의 주인공은 국민연금에서 채권투자를 담당하는 한승양 팀장이다. 그는 증권사 애널리스트 시절 채권을 알게 된 이후 운용역을 거쳐 채권팀장까지 채권시장의 모든 영역에서 경험을 쌓은 백전노장이다. 국내 최대의 펀드인 국민연금 채권운용을 맡으면서 시장 전체를 움직일 수 있는 “파워”를 가지고 있지만 “투명한 원칙”과 “새로운 투자기법”을 부르짖는 정통 채권맨이다. 국민연금의 존재는 채권시장이 좋을 때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지난해 채권수익률이 급락, 대부분의 채권펀드가 “이보다 좋을 순 없다”며 호황을 구가할 때 국민연금은 예보채 입찰에도 참여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연금에 들어오는 자금의 성격상 예보채를 투자할 때가 아니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만기가 1년인 투신권 펀드에서도 5년짜리 예보채를 겁없이 사들였지만 국민연금은 수익률이 맞지 않으면 사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켜나갔다. 올들어 채권수익률이 급등락을 반복하면서 예보채 입찰이 어려워지자 국민연금이 움직였다. 적정 수익률이 됐다는 생각이 든 것. 국민연금의 “예보채 입찰에 관심이 있다”는 말 한마디에 예보채는 “유찰” 위기에서 벗어났다. 한승양 팀장은 “시장에서 은근히 국민연금이 어떤 역할을 해주길 바라지만 연기금이 해야할 일은 따로있다”며 “외국 유수의 연기금 펀드처럼 훌륭한 연기금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수익성과 투명성이라는 원칙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 팀장은 교보증권 채권팀장 자리를 그만두고 98년 국민연금으로 자리를 옮겼다. 기금운용 담당자를 공채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한 것인데 120여명의 경쟁자를 물리쳤다. 월급은 절반으로 줄어들었지만 한 팀장은 “펀드다운 펀드를 운용해보겠다”는 의욕으로 충만했다. 민간인으로서 준공무원 조직에 들어가 갈등이 없지 않았지만 “최고의 펀드, 최고의 펀드매니저”라는 꿈을 이뤄가는 재미로 버텨나갔다. “토요일, 일요일이 가장 힘든 날입니다. 할 일이 없거든요.” 주말 여유시간마저 “일”을 하고 싶어하는 한 팀장의 채권철학을 들어봤다.(인터뷰 하편 기사 하단에 약력참조) -격동의 80년에 대학에 들어가셨군요 ▲제가 좀 늦게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원래는 자연계열이었습니다. 아버님께서 학자이신데 일제시대, 한국전쟁, 군사정권 등 암울한 시절들을 거치시면서 자식들은 정치나 사회상황에 휘둘리지 않는 직업을 택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과, 특히 의대를 가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제 적성과는 상관없이 고2때 이과를 선택하고 서울대 치대에 지원했었습니다. 그러다 “난 도저히 자연계열은 적성에 맞지 않는다. 문과로 다시 시험을 보겠다”고 말씀드리고 다시 시험을 봤죠. 그리고 서울대 사회과학대에 합격한 후 2학년 전공결정 때 국제경제학과를 선택한 겁니다. 격동의 80학번, 자본주의의 최첨단 증권시장에 입문 -80학번이시면 공부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절은 아니었을 텐데요. ▲그렇죠. 그 때 지금 한창 잘 나가시는 유시민씨, 심재철 의원등의 주도 하에 데모도 많이 했어요. 학교입학 후 두 달만에 5.18이 발생해서 10월까지 놀았습니다.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됐으니까요. -공부하면서 재미있게 읽었던 책은 있습니까. ▲당시 제가 다니던 국제경제학과(당시 무역학과)는 학교 내에서 데모를 제일 많이 하던 곳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운동권 활동을 열성적으로 했던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그 쪽 관련책을 곁눈질해서 많이 보게 됐어요. 지금 부총리이신 한완상 교수, 이영희 교수의 책을 많이 읽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80년대 대학을 다니신 분이 자본주의의 최첨단이라고 할 수 있는 증권시장에 입문한 것이 독특하다면 독특한데요. ▲당시에는 채권이 뭔지도 몰랐어요. 80년대 중반이후 주식시장이 부상하던 시기였습니다. 저는 가끔 80년대의 비극이라고도 표현하는데 그 때 수많은 우수한 인재들이 증권회사가 좋다니까 무작정 몰렸습니다. 그 후에 일이 잘 풀리지 않은 사람도 참 많았거든요. -증권회사를 택한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일단은 그곳이 자본주의의 최첨단을 달리고 있었고 또 금융의 증권화가 도래하는 시기였으니까요. 막 간접금융에서 직접금융시대로 넘어가려는 시대였지만 그때 한국의 직접금융이 너무 초기 단계라서 이 분야는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쌍용투자증권 부설 쌍용경제연구소에서 2년 반 정도 근무했습니다. -애널리스트로 말입니까. ▲네. 그런데 그 때는 애널리스트와 이코노미스트 등에 대해 뚜렷한 개념이 없었어요. 저는 증권연구실에서 금융시장 전반에 관한 연구, 경제분석 같은 업무를 담당했죠. 굳이 말하자면 일종의 스트레티지스트였죠. 거기서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한 2년 반 하다보니 지겹더라구요. 마침 그 무렵 채권에 눈을 떴어요. 이거다 생각하고 연구소장님께 채권팀으로 보내달라고 한달 정도 계속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채권계에 발을 내딛은 겁니다. ”채권시장처럼 가능성이 큰 시장에 몸을 바치고 싶었다” -채권팀에 그렇게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채권시장은 주식시장과 더불어 자본시장을 이끄는 수레바퀴중 하나이면서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훨씬 큽니다. 그런데 주식시장에 비하여 너무 낙후되어 있었어요. 미국이나 유럽시장을 보니 채권시장이나 채권매니저들의 위력이 대단하더라구요. 이 낙후된 분야에 몸을 바치고 싶었습니다. -그럼 교보증권으로 옮기면서 채권을 시작한 겁니까. ▲아닙니다. 쌍용경제연구소에서 쌍용투자증권 채권부로 옮겨 3년 정도 근무했죠. 거기서 참 많이 배웠습니다. 특히 3개월 정도 미국 월스트리트에 OJT를 다녀왔는데 그걸 계기로 정말 여러 가지를 배웠고 채권시장에 대한 인식도 새롭게 하게 됐어요. 채권을 계속하고 싶었는데 회사방침이 근무순환 방침이어서 영업부로 발령이 난 게 계기가 되어 교보로 옮겼고 거기에서 채권팀장을 맡았죠. -채권시장 경력이 한 11년은 되시는 군요. 듣기로는 국민연금이 처음으로 운용전문인력을 공채할 때 국민연금관리공단에 입사하셨다는데. ▲IMF 외환위기가 막 발생한 직후인 98년 2월에 공고가 났습니다. 그 때는 주식시장이 폭락하는 등 금융시장이 불안해지면서 국민연금에서 기금운용전문가 채용공고를 낸 거죠. -경쟁률은 어땠습니까? 운용팀장을 뽑는 것이었나요? ▲120명정도 왔던 걸로 기억합니다. 운용팀장이 아니라 매니저, 즉 운용역을 뽑는 것이었습니다. ”채권시장의 2세대로서 진정한 펀드운용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국민연금으로 옮기시면서 월급도 많이 줄었을 텐데. 자리를 옮기신 이유는. ▲급여는 정확히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증권회사에서는 운용의 한계를 느꼈어요. 증권회사에서는 운용이라는 것이 단기 트레이딩이 전부였는데 이게 진정한 의미의 운용은 아니거든요. 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증권회사 사람들의 꿈은 진정한 운용을 해보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선진국처럼 자신의 펀드를 가지고 전략과 포트폴리오를 짜서 운용하는 것 말이죠. 또한가지는 그동안 나름대로 갈고 닦았던 채권관련지식을 공익을 위하여 바치고 싶었어요 . 제가 채권을 시작하기 전에 그 분야에서 일하시던 분들이 바로 한국 채권시장의 1세대시죠. 저는 2세대쯤 되겠죠. 그 당시 운용은 주먹구구식이었어요. 운용이라고 해야 호가, 매매단가계산, 가격체결 그 정도가 전부여서 단가계산하는 것이 커다란 노하우일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단가계산하는 법도 가르쳐주지 않으려는 분위기였죠. -계산법을 안 가르쳐준다? ▲네. 채권을 시작하고 나서 얼마 후에 계산프로그램이 생겼죠. 샤프계산기인가? 그 계산기에 수식을 입력해서 마음대로 계산하는 선배들이 정말 부럽더군요. 그런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게 언제입니까? ▲80년대 후반입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증권시장이 펀더멘털을 중시하지도 않았고, 금리를 예측해서 채권을 사고 판다는 개념이 없었어요. 국고채도 없었고 그나마 회사채가 거래됐지만 대개 발행시장에서 소화된 게 대부분이었어요. 무보증사채도 없어서 회사채종류가 은행보증/기타보증 두 종류만 있어서 발행사의 신용도와 관계없이 호가가 두가지 밖에 없었어요. 은행이나 투신 같은 운용기관은 바이 앤 홀드(buy and hold:만기보유) 전략만 사용했구요. 채권을 매집해서 편입하기만 해놓는 시스템말입니다. 그런 것만 보고 배우다가 미국에 갔더니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대단했죠. 운용툴이 좍 펼쳐져 있고 프로그램이 저절로 움직이는데다 포지션을 가지고 매매을 하더라구요. 그래서 포지션을 가지고 운용하는 법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즘의 트레이딩이라고 하는 기법은 증권회사에서 맨 먼저 도입한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IMF 외환위기이후 채권시장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어요. 시가평가제도입, 인터넷기법의 활용등으로… -국민연금에 입사하고는 몇 분이서 같이 운용을 했나요. ▲1년간은 저 혼자 했습니다. 그 후 반년간 둘이 하다가 99년 11월에 기금운용본부가 생겨 자산운용조직으로 면모를 갖추었고. 지금은 채권운용팀에 5명이 있습니다.(미들, 백오피스 제외) 상반기중 4-5명을 충원할 계획입니다. 국민연금 입사 초기, 인프라 구축에 주력 -초기 홀로 운용할 때는 지금처럼 딜을 활발하게 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그 당시에는 채권운용에 배정된 자금이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실제 딜보다는 운용관련 인프라 구축에 힘을 많이 쏟았어요. 무보증회사채 매입근거를 마련하고 선진운용기법도 도입하고 그전에는 매입만 있었어요. 제가 운용을 맡으면서 처음 매도를 한 거죠. 결제방식도 개선하고 운용관련 규정도 만들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운용을 하게 된 것은 기금운용본부 출범 이후입니다. - 그 당시 채권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습니까. ▲처음에 제가 맡았을 때는 3조5000억이었고 본부가 만들어졌을 당시에는 6조5000억이었습니다. 지금이 23조5000억이니까 엄청나게 늘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익성, 안정성, 직접투자의 원칙 -기금운용이 운용본부로 통합되면서 많은 부분이 채권으로 바뀐거군요. ▲본부를 설립하면서 내건 운용방침은 수익성, 안정성이었습니다. 같은 fixed income 이라면 가장 수익이 높고 안정한 방법을 하겠다는 거죠. 그러면 예금을 들 이유가 없습니다. 요즘 국고채 금리가 떨어져서 좀 그렇지만 당시에는 예금과 채권의 금리차가 엄청났어요. 또 우리는 채권의 경우 간접투자는 안하고 직접투자만 합니다. 공사채형 수익증권과 은행금전신탁을 안하는 이유는 시가평가제하에서 시장위험을 무릅쓰면서 굳이 수수료를 줘가면서까지 들어야 할 이유가 없어요 .이건 저희 뿐 아니라 캘퍼스(CalPERS) 같은 해외유명 팬션(연금)펀드들이 동일합니다. 사족이지만 지난 2년간 국민연금의 채권운용수익률이 국내에서 제일 높습니다. 부실채권도 전혀 없구요 국민연금 포트폴리오 “국고채 55%, 회사채 45%” 우량 ABS에 투자 -채권운용규모가 23조나 되는데 그 포트폴리오가 어떤지 좀 알려주시죠 ▲절대치로 봐서 현재의 23조는 그렇게 많은 돈이 아닙니다. 보험료수입과 운용수익이 급증하고 있고 올해부터는 공공자금관리기금으로 예탁되던 자금이 없어져 국민연금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게 돼 있어요. 국민연금의 성격상 그중 상당부분은 채권에 투자할 수밖에 없고 현재는 국공채에 55%를, 회사채에 45%를 투자하고 있습니다. 회사채중 절반이상이 우량ABS이구요. -회사채의 투자등급은 어디까지입니까? ▲실질적으로 A등급이상에만 투자합니다. 규정상으로는 BBB등급에도 투자할 수 있습니다. 내부기금운용규정에 의하면 예외투자로 투자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이사장님의 승인을 받으면 BBB등급 회사채 투자가 가능합니다. 저희가 보수적으로 A급 이상에만 투자한 결과 부실채권이 전혀 없게 된거죠 “가장 중요한 투자전략은 저평가 채권을 발굴하고 고평가 채권을 매도하는 것” -그런 거대규모의 자금을 움직이면서 생각하신 큰 밑그림은 뭡니까. ▲기본적인 운용방침은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운용수익을 올리는 겁니다.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원칙은 디폴트 프리(default free)이구요. 그 원칙 하에서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짜서 여러 가지 전략을 구사하고 있죠. 그 중 가장 중요한 전략은 저평가채권을 발굴하여 매입하고 고평가채권을 매도하는 것입니다. 이 점이 다른 금융기관의 운용전략과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단순한 의미의 딜링은 아니라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사실 저희는 금리의 변동에 따른 단기트레이딩을 그다지 많이 하지 않습니다. 물론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터닝포인트에는 과감히 매매도 합니다. 지난 2월의 금리 급락기에는 많이 팔았어요. ABS 6조원 보유, 수익성 측면에서 주목하는 채권 -국민연금에서 주목하고 있는 채권은 어떤 것인가요? ▲저희가 가장 주목하고 있는 채권은 ABS 입니다. 우리나라 채권 중 ABS가 안정성과 수익성이 가장 높아요. 하지만 유동성이 낮아서 거래가 잘 안되니까 그동안 우리 시장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것이죠. 기금의 성격상 장기보유전략을 지향하는 국민연금으로서는 ABS가 가장 좋은 상품이지요. 기억에 남는 게 99년말부터 우리나라 시장에서 ABS가 본격적으로 발행되면서 여러분들을 설득하여 99년 12월에 규정을 바꾸고 그달에 처음으로 5000억을 투자한 것입니다. 초기에 적극적으로 투자한 결과 낮은 가격에 매입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는 약 6조원 정도의 ABS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하편으로 이어짐)
2001.03.27 I 정명수 기자
  • 재계원로가 본 고 정명예회장-송인상 전 능률협회장
  • [edaily] 21일 별세한 고 정주영 현대그룹 전 명예회장은 한국 현대사를 이끈 재계의 거목으로 평가되고 있다. 재계원로들이 평소 가졌던 그에 대한 평가를 들어본다. ◇송인상 전 한국능률협회장= <아이디어 샘솟는 불세출의 기업가> 아산에 대해 나는 여러 가지 입장에서 겪어 보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다양한 시각에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긴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와 함께 지냈던 기억의 편린들을 하나하나 꺼내보고 그의 성격과 일하는 스타일, 생각하는 방식 등을 그저 내 나름의 느낌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아산과 나는 1920년대 초에서 중반에 이르는 시기를 강원도 통천에서 보냈다. 그는 송전보통학교에 다녔고, 나는 통천보통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서로 만날 기회는 없었지만, 같은 시대를 한 지역에서 보낸 셈이다. 통천군 송전은 청송백사(靑松白沙)로 유명한 송전해수욕장이 있고 경치가 수려한 고장이기도 했다. 이러한 자연조건이 소년 시절 아산의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 특유의 소박하면서도 사람을 매혹하는 아산의 자질은 아마도 이런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해방의 감격과 전쟁의 참회를 거쳐 전재복구에 여념이 없던 1950년대 종반, 미국 원조가 DLF 차관으로 바뀌어져 갈 무렵 부흥부 장관으로 재임하던 나는 아산과 만나 시멘트 공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때 기업가로서의 아산의 편모를 들여다 볼 기회가 있었다. 불행하게도 나의 재임 중에 현대시멘트 건설은 실현을 못보았지만 그의 치밀한 기업가적 재능은 엿볼 수 있었다. 1960년대 중반에 나는 박정희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세계 각국을 돌며 한국에 투자할 것을 권고했다. 당시 정부의 4대 기획사업 가운데 하나였던 조선분야의 투자 유치를 위하여 스웨덴의 요테보리(Gothenburg) 조선소와 노르웨이의 아카(Aker)그룹을 방문해서 관계인사들과 폭넓은 교섭을 하였는데, 그것이 현대가 조선사업을 시작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교섭의 결과로 아카그룹의 시엠(Siem) 사장 일행이 한국에 왔고, 아산은 현대그룹이 정부로부터 조선사업자로 지정된 것을 전후하여 영국의 애플도어(Appledore)와 조선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때에도 아산의 과감성과 사업적 수완은 여실히 표출되었다. 영국에서 조선소 건설에 필요한 자재가 도착하기도 전에 아산은 희랍의 선주로부터 이미 수주를 따냄으로써 세계의 조선업계 인사들을 놀라게 했던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현대중공업이 조선사업을 전개해가는 과정에서 아산은 리더십이 탁월한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대내외에 과시했다. 사업을 펼쳐가면서 그가 보여준, 미지의 세계에 돌입하는 모험심과 불퇴전의 용기는 뭇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했고 지금도 우리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조선소 건설 현장을 야간에 손수 돌아보다가 자동차를 탄 채 물에 빠졌던 이야기는 그의 불굴의 용맹과 모험심을 여실히 알려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나는 아산과 함께 6년 동안 전경련을 맡아 일한 적이 있다. 내가 전경련 부회장이 되었을 때 아산은 이미 회장으로서 4년 여를 일해오던 터였다. 원용석, 정인욱 그리고 내가 부회장으로서 아산을 모시고 전경련의 일들을 열심히 돌보았는데, 그 과정에서 아산의 기업가로서의 모습은 크게 드러났다. 그는 나 같은 행정가 출신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아이디어를 때때로 내놓곤 했다. 그런 제안들에는 거시적으로 크게 멀리 내다보는 혜안과 탁견이 담겨 있었고, 그러면서도 비용과 효율을 충분히 고려하는 기업가의 본질이 내포되어 있었다. 아침에 모여 회의를 하다보면 아산은 곧잘 깜짝 놀랄만한 아이디어를 돌연하게 이야기했다. 한강의 고수부지도 그가 제안한 것이다. 오늘날 서울 시민들에게 큰 혜택을 주고 있는 이 고수부지의 아이디어를 아산이 담담하게 꺼냈을 때, 그런 일에 전혀 조예가 없던 나로서는 실현 가능성에 회의를 가질 수밖에 없는 꿈같은 이야기로 들렸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옳았으며 지금의 고수부지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언젠가 아산이 나에게 “송 회장도 무슨 사업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물었을 때 “나 같은 관료 출신은 사업을 하기에 가장 부적절하고, 나는 사업가로서의 재능이 전혀 없다.”고 답한 적이 있다. 그러자 아산은 “나는 길을 가다가도 이곳 저곳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사업을 발견하는데, 송 회장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눈에 뜨이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있다. 실제로 아산에게는 무슨 아이디어든지 사업으로 전환해서 이익 창출의 기회를 마련하는데 천재적인 소질이 있었다. 아산이 전경련 회장으로 있을 때는 한국경제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면서 큰 발전을 향해 줄달음치던 시대였다. 아산은 비단 대내적인 경제발전 뿐만이 아니라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을 높이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전경련의 국제협력사업에 대하여 남다른 정열을 쏟았다. 동남아 여러 국가와 경제적 유대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한·아세안 협력사무소(Korea-ASEAN Business Club)를 만들었고, 몸소 대표단을 이끌고 필리핀을 비롯한 여러 나라를 심방하기도 했으며, 구주를 위시한 각국과의 경제협력위원회 설립에도 엄청난 집념을 보였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들이 오늘날 한국이 국제적으로 잘 알려지고 경제적 측면에서 훌륭한 파트너로서 여러 나라들과 유대관계를 돈독히 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고 생각한다. 아산은 도전을 기회로 만드는 탁월한 재질과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어려운 일에 당면해서 우리가 용기를 잃고 있을 때 그는 이런 때야말로 진정한 기업가 정신을 발휘해서 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 나가야 한다고 격려했다. 한국이 국제적으로 경쟁력을 잃고 있는 가장 큰 요인의 하나로서 아산은 지나치게 높은 금리를 들었다. 그는 경제기획원 장관실과 한국은행 총재실을 찾아가 대만 등 우리와 비슷한 개발도상국의 금리를 비교하면서 금리를 비교하면서 금리 인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또한 정부의 규제를 철폐, 완화해 줄 것을 집요하게 건의했고, 전경련 내에 규제 완화를 연구하고 건의하기 위한 기구를 설치, 운영하기도 했다. 아산은 정부가 그러한 몇 가지 일만 도와준다면 다른 경제적 사안에 대해서는 기업가인 우리가 책임지고 해결하겠다는 것을 역설했는데, 그런 과정에서의 아산은 기업가 정신이 투철한 철인 같은 모습으로 비추어졌다. 아산은 어느 모로 보나 웅변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말에는 기업가로서의 철학에서 우러나온 진지함이 있었기 때문에 항상 무게가 실렸다. 아산과 함께 일본에 가서 한일경제협력회의에 참석했던 때의 일이다. 일본측 위원들은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보다 아산이 말하는 것에 더 큰 무게를 두고 경청했다. 그것은 아산의 확고 부동한 기업가적 신념과 그 소박한 접근 방식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의 기업인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아산이 성취한 현대의 성장사가 큰 무게로써 그들을 압도한 것이라고 믿어지는 대목이다. 아산과 나는 강원도의 낙후된 지역 출신으로서 한국경제가 도약단계로 뛰어들 무렵 경제계에서 같이 생각하고 희비애락을 함께 나누었다. 이는 단순한 우연이라기보다 필시 우리 두 사람이 전생에 대단히 깊은 인연이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불세출의 기업가 아산과의 만남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 정녕 매우 뜻깊은 것이었다. *자료 = 현대그룹 사이버 박물관
2001.03.22 I 김기성 기자
  • 고 정주영 명예회장 경영 에피소드
  • [edaily]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불도저에 비유되는 저돌적인 경영기법으로 주변을 놀라게 하곤 했다. 정 명예회장이 현대그룹을 일궈낸 저돌적 경영기법의 이면을 살펴본다. ◇빈대의 교훈 네 번째 가출로 인천 부두에서 막노동 시절. 그 곳의 노동자 합숙소는 빈대 지옥이었다. 정주영은 어느 날 꾀를 써서 밥상 위에 올라가 잤는데, 잠시 뜸한가 했더니 이내 빈대가 밥상 다리로 기어 올라와 물어뜯기 시작했다. 정주영은 다시 머리를 써서 밥상 다리 네 개를 물 담은 양재기 넷에 하나씩 담궈 놓고 잤다. 빈대가 밥상다리를 타려다 양재기 물에 떨어져 익사하게 하자는 묘안이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빈대들이었다. 빈대들은 사람을 물기 위해 벽을 타고 천장으로 올라간 다음, 사람을 목표로 뚝 떨어져 목적을 달성했다. 그때 정주영은 하찮은 빈대도 물이 담긴 양재기라는 장애물을 뛰어 넘으려 그토록 전심전력으로 연구하고 필사적으로 노력해서 제 뜻을 이루는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뜻을 세우고 최선을 다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한다. ◇500원 짜리 지폐와 초라한 백사장 사진의 신화 현대조선소 설립 당시 가장 큰 문제는 돈이었다. 정주영은 71년 9월 영국 버클레이 은행으로부터 차관을 얻기 위해 런던으로 날아가 A&P 애플도어의 롱바톰 회장을 만났다. 조선소 설립 경험도 없고, 선주도 나타나지 않은 상황에서 영국은행의 대답은 간단히 "NO"였다. 정주영은 그때 바지주머니에서 5백원 짜리 지폐를 꺼내 펴 보였다. “이 돈을 보시오. 이것이 거북선이오.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 전인 1천 5백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었소. 단지 쇄국정책으로 산업화가 늦었을 뿐, 그 잠재력은 그대로 갖고 있소.”라는 재치 있는 임기응변으로 롱바톰 회장을 감동시켜 해외 차관에 대한 합의는 얻었지만 더 큰 문제는 선주를 찾는 일이 남아 있었다. 그때 정주영의 손에는 황량한 바닷가에 소나무 몇 그루와 초가집 몇 채가 선 초라한 백사장을 찍은 사진이 전부였다. 정주영은 봉이 정선달이 되어 황량한 바닷가에 소나무 몇 그루와 초가집 몇 채가 선 미포만의 초라한 백사장 사진 한 장을 쥐고 미친 듯이 배를 팔러 다녔다. 결국 정주영은 그리스 거물 해운업자 리바노스를 만나 26만 톤짜리 배 두 척을 주문 받았고, 조선소 건립과 동시에 2척의 배를 진수시킨 세계 조선사에 유일한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다. 이렇게 정주영의 개척정신과 적극적인 추진력으로 이루어낸 현대조선소는 현재 세계 최대 규모의 중공업회사로 성장했다. ◇사우디 주베일산업항 대양수송작전 사우디의 주베일산업항 건설 당시 정주영은 시간과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모든 기자재를 울산조선소에서 제작하여 세계 최대 태풍권인 필리핀 해양을 지나 동남아 해상, 몬수운의 인도양을 거쳐서 걸프만까지 대형 바지선을 끌고 가는 대양수송작전이라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던 모험과 도전을 제시했다. 수송 도중 대형 파이프 자켓이 태풍으로 해난사고가 날 것에 대비해 자켓이 해면에 떠 있도록 하는 공법을 강구하는 치밀함도 보였다. 그 당시 선진국들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자켓 설치 공사 착수와 함께 자켓을 연결하는 빔 제작도 설계대로 울산에서 제작한 사실이다. 수심 30미터나 되는 곳에서 파도에 흔들거리면서 중량 5백 톤짜리 자켓을 한계오차 5센티미터 이내로 꼭 20미터 간격으로 심해에 설치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선진국들도 일단 자켓 설치가 끝난 후 그 간격을 재서 빔을 제작하던 실정이었다. 그러나 정주영의 창조적인 발상과 그칠 줄 모르는 도전의식으로 가로 18미터, 세로 20미터, 높이 36미터로 무게가 5백 톤이나 되는 자켓 89개를 울산에서 운반해 와 5센티미터 이내의 오차로 완벽하게 설치해 만든 사우디 주베일산업항은 20세기 최대의 역사라고 세계 언론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올릭픽 유치와 꽃바구니 한국과 일본의 올림픽 유치전 당시 한국이 올림픽 유치를 성공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올림픽 유치위원장이었던 정주영은 현대의 해외파견 직원들을 동원해 IOC위원들에 대한 세밀한 신상파악으로 성향을 분석하고 경쟁 유치국의 활동상황까지 치밀하게 분석했다. 승리의 여신이 정주영에게 미소를 지운 사건은 바로 정회장의 꽃바구니 전략! 정주영은 한국의 IOC위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꽃바구니 하나씩을 각국의 IOC 위원 방으로 넣어 주었다. 그 꽃바구니는 단순히 주문된 것이 아니라 현대의 해외파견 직원 부인들이 정성스럽게 하나하나 만든 것이었다. 그 꽃바구니의 반응은 의외로 대단했다. 그 다음날 각국 IOC위원들이 회의를 끝내고 로비에 모였다가 정주영 일행을 보면 모두 반가워하며 아름다운 꽃을 보내 주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진심으로 해주었다. 그때 일본측은 IOC위원 부부들에게 최고급 일제 손목시계를 선물했는데 시계 선물에 대한 인사는 없고 꽃바구니에 대한 감사인사만이 만발했다. 역시 값비싼 선물보다는 마음과 정성이 담긴 작은 선물이 인간적인 따스함을 전달할 수 있고 부담감도 안 준다는 사실을 정주영은 알았던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각국 IOC 위원들의 반응은 상당히 호의적으로 변했고 그동안 정주영과 현대 임직원들이 펼친 유치활동은 성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결국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쎄울 코리아!”를 외쳐 일본과의 올림픽 유치전은 한국의 승리로 마감됐다. ◇서산간척지의 신화 - 유조선 공법(일명 정주영 공법) 80년 초 정주영은 바다를 메워 옥토를 만드는 대규모 간척사업을 착수했다. 서산 앞바다는 조수간만의 차가 워낙 커 20만톤 이상의 돌을 구입해 매립해야만 물막이가 가능한 곳이었다. 이때 정주영은 공사비 절감과 공기단축 방안을 강구하다 대형 유조선으로 조수를 막으면 바위덩어리 외에도 흙이나 버력 등 현장 근처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도 물막이를 할 수 있다는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정주영은 『간척지 최종 물막이 공사는 인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공사이며, 설사 인력으로 해결이 된다고 해도 그 엄청난 비용이 문제다』라고 말하며,『밀물과 썰물의 빠른 물살을 막기 위해서는 폐유조선을 침하시켜 물줄기를 차단 내지 감속시킨 다음 일시에 토사를 대량 투하하면 제방과 제방사이를 막을 수 있다』고 현대의 간부진들에게 제안했다. 유조선 공법에 대한 실행 가능성을 현대의 기술진들이 면밀히 분석한 후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자 정주영은 1984년 2월 24일 직접 유조선에 올라 최종 물막이 공사를 진두지휘했다. 그래서 이 ‘유조선 공법’을 일명 ‘정주영 공법’이라고도 부른다. 이 공법 덕분에 현대건설은 계획공기 45개월을 35개월이나 단축, 9개월 만에 완공시킴으로써 총 공사비를 2백 8십억 원이나 절감해 세인을 깜짝 놀라게 했다. 정주영이 창안한 「유조선 공법」은 그 후 미국의 「뉴스위크」와 「뉴욕타임즈」에 소개되었고, 런던 템임즈강 하류 방조제 공사를 수행한 세계적 철구조물 회사인 랜달팔머 & 트리튼 사(社)가 유조선 공법에 대한 문의를 해오는 등 전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소떼몰이 방북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정주영에게 소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 농사를 생업으로 하는 전통적인 농가에서 소는 생계의 밑천이요, 가족과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정주영은 어린 시절 가난이 싫어 소 판 돈을 갖고 무작정 상경했다. 그후 노동판의 막일꾼에서 세계적인 기업가로 성공하기까지 정주영은 묵묵히 일 잘하고 참을성 있는 소를 성실과 부지런함의 상징으로 삼고 인생을 걸어왔다고 한다. 지난 1998년 6월 정주영은 민간기업인 최초로 소떼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 방북하면서 『이제 그 한 마리가 천 마리의 소가 되어 그 빚을 갚으러 꿈에 그리던 고향산천을 찾아간다』며, 『이번 방북이 단지 한 개인의 고향방문을 넘어 남북간의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초석이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고 말한 바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대립과 갈등의 상징이었던 판문점의 빗장을 열게 한 소떼몰이 방북은 정회장만이 생각할 수 있는 창조적인 발상이었던 것이다. 소떼몰이 방북에 대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문명비평가인 기소르망은 “20세기 마지막 전위예술”이라고 평한 바 있다.
2001.03.21 I 이경탑 기자
  • (긴급진단) ①총체적 불신이 나라 망친다
  • [edaily] 온 나라가 지금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절체절명의 과제였던 외환위기를 극복했다고 선언한 지 불과 1년 반만의 일이다. 지금 나라를 흔들고 있는 것은 비단 경제문제만이 아니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개혁의 상징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던 의약분업이 시행 반년만에 사실상 `실패`로 돌아가면서 현 정부가 추진해 온 개혁 전반의 정당성은 물론 개혁 주도세력의 리더십마저 근본부터 의심받고 있다. 의약분업 2년차를 맞은 건강보험 재정은 올 한해에만 무려 4조원의 당기적자가 불가피할 정도로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앞뒤 가리지 않고 제도를 밀어붙인 결과다. 의보재정은 벌써부터 지역-직장 의보를 통합하면서 파탄경고를 받아 왔다. 기대했던 의약분업의 순기능은 온데 간데 없고 국민들은 막대한 재정부담과 불편만을 안게 됐다. 경기침체로 가뜩이나 살기 어려운 마당에 정책실패의 뒷처리까지 떠맡게 된 국민들의 원성이 커지고 있다. 급기야 김대중 대통령이 17일 "문제가 없다는 말만 듣고 시작했지만 지금 보면 준비가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며 "의약분업은 내 책임이 크다"고 원죄를 뒤집어 썼다. 정책실패의 충격파가 국가 리더십에까지 미치는 양상이다. 2월까지 4대부문의 개혁을 마무리, 경제활력을 되찾도록 하겠다던 약속도 기대만을 키울뿐 피부로는 쉽사리 느껴지지 않는다. 뛰는 물가와 집세, 얇아진 봉급봉투, 반토막난 주가를 걱정하는 것은 호사로 여겨진다. 이미 110만명에 육박한 실업자들이 기약없이 직장을 찾아 헤매고 있다. 정부는 기회 있을 때마다 `대마불사의 신화는 사라졌다`고 외치지만 시장은 이를 믿지 않는다. 현대 계열사에 대한 금융지원이 나오면 일단 `특혜성 구제금융`으로 규정하고 보는 태도가 팽배하다. 문제는 시장의 시각이 옳고 그름이 아니라 무작정 믿지 않는다는데 있다. 금리를 내려도 자금은 기업부문으로 쉽사리 흘러들지 않고 단기자금 시장 주변을 떠돌고 있다. 기업을 장기적으로 신뢰하기 어렵다는 분위기를 돈 흐름이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런 와중에 미국과 일본발 위기 가능성이 고조되면서 희망의 싹마저 위협하고 있다. "하반기중 경기회복을 확신한다"던 김 대통령의 장담이 무색해질 위기에 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복임을 자처하는 정치인들은 오로지 1년반 남은 `대권`향방에만 몰두하고 있다. 신문의 정치면과 TV 정치뉴스는 대권주자들과 그 주변인들의 다툼 일색이다. 대통령이 나서 대권행보에 제동을 걸어도 이들의 행태는 별반 달라져 보이지 않는다. 책임있게 정책을 쓰고 국정을 수행해 나가야 할 관료조직은 국가의 미래보다는 개인의 `안위`에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관가는 수개월째 인사설에 휘말려 있고, 젊은 공무원들은 전문 행정가의 꿈을 접고 민간으로 대거 이동중이다. 국가행정의 인프라가 뿌리째 흔들린 지 이미 오래지만 손 쓰려는 이가 없다. 팀워크를 자랑하던 경제팀은 `세율인하`를 놓고 공개적으로 정반대의 소리를 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금 모으기` 정신을 되살리자고 호소하지만 이를 이끌 리더십과 신뢰, 희망 모두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필사즉생(必死卽生), 죽어야 산다는 옛말이 있지만 누구도 나서서 죽으려 하지 않는다. 외환위기 극복을 선언한 지 1년반이 지난 2001년 3월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2001.03.20 I 안근모 기자
  • (초점) 황소(bull) 때문에 바뀐 미국인들의 투자행태
  • [edaily] 강세장을 의미하는 황소(bull)가 언제 태어났다가 언제 죽는지를 판단하기는 매우 어렵다. 사후에 확인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미국의 뉴욕 타임스는 18일 황소의 탄생 이후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 기사의 초점은 주식시장의 붐이 미국인들의 생활과 투자에 대한 사고방식을 어떻게 바꾸었는가 이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1982년 미국 경제는 되살아날 수 없는 병에 걸렸다는 우려감이 확산되고 있는 와중에 태어난 황소가 지금 관의 크기를 재고 있는 상황이 됐다. 1987년 붕괴 당시에 사망에 대한 리포트가 나온 뒤 더 강하게 일어났던 동물에 대해 진혼곡을 부르는 것은 너무 성급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다우지수에 있어 1989년 이래로 최악의 한 주를 보낸 직후가 됐던 간에 이번 황소(강세장)은 미국에 있어 변화를 만든 것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이번 황소는 사람들이 사는 방식과 사람들이 리스크를 부담하는 방식을 바꿨다. 이것은 미국인들에게 과거 어느 때보다 주식시장의 수익에 의존하도록 만들었으며 저축을 할 필요가 없다는 확신을 심어줬다. 1990년대의 경제적 붐은 황소에 박차를 가했으며 황소에 의해 지출이 늘어남으로써 다시금 붐이 강화됐다. 스톡옵션이 광범위하게 퍼졌고 주식시장이 좋아하는 기업의 종업원은 낮은 자리에 있어도 백만장자가 됐다. 한 때 매우 위험한 것으로 보였던 주식시장은 최소한 장기간으로 보았을 때 확실한 것으로 간주됐다. 전미증권브로커협회의 최고경영자(CEO)인 로버트 글로버는 "개인투자자들이 주식에 코를 꿰었다"고 말했다. 그는 "주식시장이 너무 많이 나갔고 사람들은 주식은 투자위험이 없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밝혔다. 황소가 정점에 다다랐을 때인 1999년에 미국 가계의 순 자산은 14.1%나 증가했다. JP 모건 체이스의 투자전략가인 더글러스 클리고트는 "이것이 우리가 사는 집의 규모, 우리가 모는 차의 타입, 우리의 휴가 등에 영향을 미쳤다"고 묘사한다. 그는 "평균 미국인의 재산이 비정상적으로 개선됨에 따라 역사적 기준으로 볼 때 비정상적으로 많은 부채를 짊어지는 것도 당연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주가가 하락하면서 미국인의 부가 잠식당했다. 2000년에 미국 가계의 순 재산은 2% 하락했는데 이것은 정부가 2차 대전 이후 통계를 잡은 이래 처음이다. 1930년대의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기침체를 경험했던 1974년 조차도 가계는 미미하나마 재산의 증가를 경험했었다. 부의 손실은 1999년까지 미국인들이 그들의 투자와 저축액의 60%를 주식시장에 집어넣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1982년보다 100% 이상 증가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401k와 같은 퇴직연금이 제외됐기 때문에 실제로는 더 많을 수 있다. 미국 역사에서는 과거 어느 때도 지금만큼 월스트리트의 운에 부를 연동시키는 경우가 없었다. 모건 스탠리 딘 위터의 미국 주식 수석 투자전략가인 바이런 빈은 "내가 어릴 때는 사람들이 술집에 몰려가서 야구 경기를 보고는 했다. 그러나 지금은 CNBC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황소는 지금 아주 좋게 말한다고 해도 부상을 당했다. 다우지수는 1982년부터 2000년 초까지 1409%나 상승했다. 나스닥 지수는 3072%나 올랐다. 그러나 작년 3월 이후로 나스닥은 63% 떨어졌으며, 다우지수는 정점과 비교해 16% 하락했다. 다우지수는 지난 주에만 8% 하락했다.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 500 지수는 25% 떨어졌다. 만약 황소가 죽었거나 죽고 있다면 이 황소가 10년 전에 그 누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이 황소에 의존했던 미국 사회를 떠나는 것이 된다. 미국 기업들은 자사주를 매입하고 종업원들에게 스톡옵션을 주기 위해 빚을 끌어들였다. 가계의 포트폴리오도 바뀌었다. 예전보다 훨씬 적은 기업들이 퇴직자들을 위한 수입을 약속하지 않고 있다. 그보다는 투자 리스크가 수혜자에게 귀속되는 401k와 같은 복지 정책을 펴고 있다. 호시절에는 401k외에 저축한 돈이 적었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나 지금은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시대가 끝났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고 이것이 미국인들로 하여금 퇴직후 생활을 위해 더 많은 돈을 저축하도록 할 것이다. 저축자들은 장기적으로 혜택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기적으로 이것은 경제활동을 위축시켜 기업의 수익성에 타격을 주고 주가를 더 많이 떨어지게도 할 수 있다. 1982년에는 이러한 상황을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당시 다우지수는 800포인트 아래에서 움직였고 곰들이 어슬렁거렸다. 인플레와 금리가 치솟았고 미국경제는 침체기에 있었으며 미국 기업들이 외국 기업들과 경쟁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비관론이 퍼져 있었다. 주식시장은 1966년보다 더 낮았다. 설상가상으로 회계사들은 기업에게 어떻게 하면 실제보다 연금 정책을 더 낮게 꾸밀 수 있는가를 도와줬다는 이유로 조사를 받고 있었다. 새로운 회계 기준에 맞추기 위해 기업들은 연금에 막대한 돈을 쏟아야만 했다. 그렇지 않고 기업들이 의무를 경감시키는 방법을 찾을 수도 있었다. 그러한 상황하에서 기부한 만큼 돈을 찾는 401k와 같은 연금을 추구하는 경향이 일어났다. 노동자들이 퇴직금을 어떻게 투자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다. 초기에는 채권이나 MMF와 같은 곳에 투자를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금리가 떨어짐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주식에 돈을 넣게 됐다. 이것은 (한동안) 아주 좋은 선택이었다. 미국 기업들의 경쟁력이 높아짐에 따라 미국 기업들이 황금기 구가를 시작했다. 1981년에는 기업 순이익이 국민소득의 7.5%였으나 1997년에는 12.5%까지 증가했다. 1987년에 이 모든 것이 붕괴할 뻔 했다. 다우지수는 하루에 22.7% 폭락했으며 황소에 대한 부음이 쓰여졌다. 그러나 황소는 죽지 앟았다. 1989년까지 주식시장은 과거의 정점까지 회복됐고 여기서 배운 교훈은 주식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가가 떨어졌을 때 매수에 나서면 돈을 벌 수도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1982년에 스톡옵션은 상대적으로 희귀했다. 그러나 황소가 성장함에 따라 아주 보편적인 것이 됐다. 많은 기업들이 고위 임원뿐 아니라 최하위 레벨까지 스톡옵션을 부여했다. 그러나 보다 많은 옵션들이 주식을 매입하는 데 행사됨에 따라 기업들은 투자자들이 신규 주식 발행으로 인해 주식가치가 희석되지 않을까 하고 불쾌해할 것을 우려했다. 이러한 희석을 방지하기 위해 기업들은 자사주를 매입했고 이 때문에 기업들은 비즈니스 투자를 위해 돈을 빌려야 했다. 이 때문에 미국기업의 부채가 급격하게 증가했다. 기업공개(IPO) 시장이 뜨겁게 달아오름에 따라 창업의 목적이 변했다. 과거에는 창업한 뒤 이를 성사시키고 이익을 내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목돈을 벌 수 있는 기업공개가 목적이 된 것처럼 보인다. 이제 황소가 병이 들었고 미국인들은 주식이 장기 투자로서 여전히 좋은 것인지 저점일 때 매수하는 것이 좋은 투자전략인지를 결정해야만 한다. 지금으로서는 미국인들은 매도를 하지 않기 보다는 주식에 이전보다 적은 돈을 투입하고 있다. 전미증권딜러협회의 글로버는 "과거처럼 주식을 외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미국인들은 여전히 주식이 장기적 포트폴리오에 있어 주요한 부문을 차지한다고 결론을 내릴 것이다"라고 말한다.
2001.03.19 I 김홍기 기자
  • 미국식 자본주의 모델의 발전과정- WSJ
  • "신 자유주의"건 뭐건 간에 미국식 모델을 따르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미국의 월스트리트 저널은 지난 주 전 세계적으로 미국식 자본주의 모델을 따르고 있는 현상을 지적했다. 특히 지금은 누구도 공산주의 모델은 말할 것도 없고, 독일이나 일본식 모델도 언급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주장했던 "제3의 길"이나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나 리오넬 조스펭 프랑스 총리가 말했던 새로운 길에 대해서도 거의 언급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미국식 모델을 따를 것이냐 마느냐는 차치하고 라도 흥미있는 것은 미국식 모델이 세계를 장악하게 된 과정을 월스트리트 저널이 정리했다는 점.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78년 10월- 항공규제완화법 통과. ★1979년 7월- 에너지 위기 와중에 지미 카터 대통령은 미국내에서 "신뢰의 위기"를 발견하고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의 다수가 향후 5년이 과거 5년 보다 더 나빠질 것이라고 믿고 있다고 지적. ★1981년 1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우리는 미국 역사상 가장 길고 가장 나쁜 인플레로부터 고통받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경제적 결정을 왜곡하고 절약에 벌을 주고 있으며 젊은 사람과 나이든 사람 모두의 꿈을 짓밟고 있다"고 말함. ★1981년 8월- 항공교통 통제사들의 파업을 분쇄. ★1982년 12월- 실업률이 전후 최고인 10.8%를 기록. ★1992년 12월- 연방은행 금리가 1964년 이후 최저인 2.73%를 기록. ★1993년 - 전체 미국인중 3930만 명이 빈곤선 이하 생활. 32년간 최고임. ★1994년 1월- 나프타 발효. ★1996년 1월- 빌 클린턴 대통령이 State of Union 연설에서 "큰 정부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 ★1996년 8월- 클린턴이 복지 시스템을 개혁하는 법안에 서명. 이 법안은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최소 5년의 직장 근무 경험을 요구할 뿐 아니라 개별 주에다 복지 의무를 부여하는 것임. ★1998년 6월- 앨런 그린스펀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은 "강한 경제성장과 저 인플레가 결합된 현재의 경제적 performance는 미국 경제를 매일마다 지켜본 지난 50년중 가장 인상적이다"라고 말함. ★1999년 3월- 다우지수가 10000만 포인트를 돌파. ★1999년 - 전체 미국인중 3230만 명이 빈곤선 이하 생활. 숫자로는 1989년 이래 최저치이며, %로는 1979년 이래 최저치임. ★2000년 6월- 실업률이 1970년 1월 이래 최저인 4.0%까지 떨어짐.
2001.01.24 I 김홍기 기자
  • (화제)콜옵션 75.0 추가상승 기대로 인기..대박 날까
  • 콜옵션 75.0짜리에 추가 상승 기대감으로 매수세가 몰려들며 대박의 꿈을 키우고 있다. 지수가 급등세를 보이고 있지만 다음주 옵션 1월물 만기를 앞두고 더이상 높은 지수대의 콜옵션이 상장되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자세가 집중되고 있는 것. 현재까지 거래되고 있는 콜옵션중에서 가장 높은 가격이 75.0이지만 KOSPI지수는 이미 72선을 훌쩍 넘어버린 상태. 투자자들로서는 콜옵션 77.50짜리를 매수하고 싶지만 추가로 신규 행사가격 형성이 안되고 있다. 이는 현행 업무규정상 "만기일 주간 최근월물의 경우 신규 행사가격을 형성할 수 없다"는 내용 때문이다. 따라서 추가 상승을 예상하는 투자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격대는 75.0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렇게 되자 콜옵션 75.0짜리는 프리미엄이 급등하고 있고 거래량도 폭증하고 있다. 지난 3일 프리미엄이 0.11에 거래량 17만8815계약에 불과하던 것이 4일에는 0.60에 88만447계약으로 늘었다. 또 현재 프리미엄은 0.95까지 치솟았고 거래량도 53만4556계약을 넘어서고 있다. 증권사 관계자는 "시장이 워낙 강세를 보이고 있어 투자자들이 콜옵션 매수에 열을 올리고 있다"며 "특히 75.0짜리의 프리미엄이 크게 뛰어오르고 있어 지수가 75까지 올라 주느냐에 따라 대박이 날지, 아니면 손해를 볼지 다음 주에 결판날 것"이라고 설명했다.
2001.01.05 I 이정훈 기자
  • 전경련 김각중 회장 신년사
  • 21세기 새 장을 여는 신사년 새아침에 기업인과 근로자 여러분께 행운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돌이켜 보면 지난 경진년 한해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다사다난한 해였습니다. 우리 경제는 하반기에 들어서서 매우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고유가, 반도체가격 하락 등 대외요인과 이해집단간 갈등 표출, 실업증가와 파업사태 등 대내불안 요인이 겹친 때문입니다. 금융시장의 경색, 주식시장 침체로 기업의 자금조달이 어려워진데다 노동시장의 경직성 등으로 인하여 기업 및 금융구조조정마저 지연되는 악순환이 거듭되었습니다. IMF 외환위기를 차츰 극복해가고 있던 한국경제가 다시 침체의 길로 접어드는게 아니냐 하는 우려로 많은 국민들이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반면 어려운 경제상황에도 불구하고 경진년은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준 해이기도 했습니다. 역사적인 6.15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의 기틀을 마련하고 이산가족간 만남의 장을 재개한 뜻깊은 해였습니다. 더욱이 김대중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은 우리 민족에게 자긍심을 심어준 국가적 경사였습니다. 앞으로 전개될 금년도 대외환경은 더욱 악화될 것으로 우려되고 있습니다. 미국경제의 경착륙과 각국의 보호무역주의 추세 강화가 예상되는 등 세계경제의 불안요인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각국의 경제력 증대를 위한 각축전은 더욱 치열해질 것입니다. 경제회복이냐 후퇴냐 하는 기로에 서 있는 이 중차대한 시기에 우리가 세계경제의 조류에 뒤처지지 않고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금융구조조정을 신속하게 마무리짓는 한편 자금경색으로 우량기업이 부실기업으로 전락하는 일이 없도록 부실기업을 상시적으로 퇴출시키는 시스템을 정착시켜 우리의 대외신인도를 높이는 일이 시급합니다. 원활한 구조조정을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노동시장의 유연성 제고에 대한 각계각층의 이해와 협조가 뒤따라야 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또한 정부와 민간경제계가 한자리에 모여 산업경쟁력강화회의를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이를 통해 국가경쟁력을 높혀 21세기 세계 일류국가의 대열에 진입하는 밝은 비전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위기는 고통이 뒤따르겠지만 한편으로는 재도약의 기회를 제공해주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현실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도전의식으로 재무장하여 새로운 기회로 전환해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과거 역사를 회고해보면 우리 민족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고통을 감내하고 이겨내는 끈기와 저력을 발휘해왔습니다. 이는 투철한 민족애와 소명의식을 지닌 선인들이 후손에게 물려 준 훌륭한 정신적 유산입니다. 우리가 갈 길은 분명 어려운 여정임에 틀림없습니다. 힘들겠지만 우리 모두가 단결과 화합의 정신을 구현하여 똑바로 걸어간다면 극복하지 못할 정도의 험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민족의 역동성을 살려 고통스런 고갯길을 마침내 넘어서는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모두 함께 매진해나가도록 합시다. 기업들 역시 새로운 각오로써 경제활력 회복에 솔선수범하는 한편 경영의 투명성 제고와 윤리경영을 실천해나갈 것입니다. 또 기업의 수익증대를 통하여 고용을 증대시켜나갈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경영혁신과 기술개발에 주력하여 기업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주주중시경영에도 더욱 박차를 가할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들이 알찬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국민 개개인이 활력에 넘치고 기업가 정신을 북돋아주는 풍토를 조성하는데 깊은 관심을 기울여주셨으면 합니다. 한국이 기업활동하기 좋은 나라, 기업을 사랑하는 이들이 많은 나라로 만드는데 우리 모두의 지혜와 역량을 모아 나갑시다. 그리하여 정보화시대에 우리나라가 새로운 동방의 등불을 환하게 밝힐 수 있도록 꿈과 희망을 가집시다. 아무쪼록 신사년 한해가 우리 경제의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내고 힘찬 전진을 거듭하는 나날이 되기를 바라며 다시 한번 기업인과 근로자, 그리고 온 국민 모두의 가정에 행운과 축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회 장 김 각 중
2001.01.01 I 문주용 기자
  • 경제시스템의 변화..정부와 재벌-워버그 보고서②
  • 기업 및 금융 구조조정에도 불구하고 재벌의 위기는 계속되고 있다. 마치 도미노가 쓰러지듯 한국의 경제시스템은 위기를 맞고 있다. 정부가 "선제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사후 대응"에 주력해 더 많은 도미노가 쓰러졌다. 도미노는 한보그룹에서 시작됐다. 종금사가 영향을 받았고 다른 중소 재벌이 무너졌다. 기아그룹 붕괴를 거치면서 은행들도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외국투자자들이 이탈했고 외환이 급등했다. 소비가 위축되고 실업이 급등했다. 남아있던 재벌들이 하나둘 쓰러지거나 워크아웃에 편입됐다. 마침내 대우그룹이 무너지고 투신권이 된서리를 맞았다. 올해는 현대그룹이 유동성 위기를 겪었다. 다음 차례는 취약한 은행이 될 것이고 도미노의 끝에는 정부가 서 있다. ◇변화가 암시하는 것. 오래된 꿈(Old Dream)이 깨졌다면 새로운 꿈이 시작되고 있다. 새로운 비젼은 삼성이나 실패했지만 대우에서 볼 수 있다. SK는 통신과 화학 분야에서 부상하고 있다. 신세기통신도 인수했다. 변화는 4가지 측면에서 나타나고 있다. 우선 기업형태와 지배구조가 바뀌고 있다. "회장"이라는 지위에도 변화가 왔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지배구조도 투명해지고 있다. 둘째, 재무적인 구조조정이다. 차입경영을 차단하기 위해 부채비율 200%라는 가이드 라인이 정해졌다. 셋째, 모방투자(Copy Cat Investment)는 끝났다. 다른 재벌을 모방해서 여러 사업분야에 진출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됐다. 마지막으로 외국인 투자가들의 지분이 늘어났다. 경영에 대한 감시가 심화됐다. ◇정부와 재벌 한국 정부와 재벌에 대해 3가지 측면에서 서로 대면해 왔다. 우선 정부와 재벌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정치적인 측면에서 접촉했다. 둘째, 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제어하려는 관료집단과의 대면이다. 관료집단은 재벌을 컨트롤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셋째, 한국의 산업을 이끌어가는 선봉대로서 재벌을 붇돋우는 측면도 있다. 재벌을 담당하는 정부 부처는 공정거래위원회다. 미국의 반독점 법률과 비슷하지만 독점을 분해할 힘은 없다. 한국 정부는 과거에도 재벌에 대한 조사나 해체를 수행할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그 같은 행동을 할 수도 있었다. 국제그룹의 분해와 같은 예가 있다. ◇정치인, 관료, 은행가 그리고 재벌 김대중 정부는 과거의 부패를 청산하는 강력한 구조조정 정책을 수행했다. IMF도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요구했다. 재벌은 이 두가지에 모두 해당했다. 개혁 프로그램은 정부의 구조도 바꿔 나갔다. 재벌 시스템은 한국 정부가 경제를 다루는 방법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만약 정부가 거대산업을 조성하기 위해 은행을 임의로 이용하지만 않았어도 재벌과 은행의 관계가 지금처럼 얽혀있지는 않을 것이다. 97년의 한보그룹 위기는 산업과 은행의 결합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보여줬다. 한보는 사실상 정부의 조정하에 있었다. 우리는 이것이 당시 대통령의 아들과 관련돼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보 사건은 4가지 차원에서 한국의 위기를 보여줬다. 1)부패와 한국에서 돈을 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2)재벌이 어떻게 경영되고 거대산업이 어떻게 규제되는지 3)금융시스탬이 얼마나 취약한지 4)세계적인 잣대로 볼 때 한국산업의 신뢰도가 얼마나 약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김대중 정부에서도 부패척결과 구조조정에 대해 노력했지만 99년의 "옷로비 사건"과 같은 정부 권력과 재벌 사이의 불미스러운 관계가 터져나오기도 했다. ◇금융감독위원회 금융감독위원회는 한국의 경제기구중 가장 강력한 기구다. 금감위는 금융과 재벌 구조조정을 대행했다. 재벌에 대해 책임질 기구는 아니지만 재벌을 둘러싼 환경 변화를 주도했다. 이는 금감위가 은행과 주식시장을 컨트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금감위는 재벌의 부채 구조조정 가이드 라인을 제시했으며 이를 감시하고 있다. 금감위는 한국 산업의 재정적 건강도를 지키는 수호자 역할을 하고 있다. ◇2년반의 개혁 김대중 정부의 복지경제 정책과 반재벌 정책의 근간은 서울대 변형윤 교수의 영향을 받았다. 변 교수는 "정책 입안자들이 성장과 효율에 경도돼 "공정한 경쟁과 이익의 추구"라는 원칙을 포기하는 비싼 대가를 치뤘다"고 말했다. 변 교수와 그의 제자들은 89년 경실련과 같은 시민단체를 만들기도 했다. 김대중 정부 출범이후에는 정책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변 교수는 비공식적으로 김대중 정부에 자문을 했고 다른 멤버들은 공직에 진출했다. 전철환 한은 총재, 김성훈 농림부 장관, 김태동 청와대 수석, 이진순 KDI 원장 등이 있다. 특히 김태동 수석은 재벌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김 수석은 과거 재벌을 "한국산업의 5적"이라고 비난했다. 이들 개혁론자의 입장에서는 재벌이 IMF 위기의 주범이었다. 이같은 생각들은 처음에 은행과 관료들을 비난으로부터 구해냈고 은행과 관료사회의 지지를 받았다. 98년과 99년의 재벌개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미 50년대 이후 지속된 정책에 한가지를 추가했다. 김 대통령은 재벌이 기술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지주회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권은 98년 2월 재벌에 대해 강력한 경고를 보냈다. 98년초 정부는 재벌의 회장실을 없애도록 조치하고 불법적인 계열사 지원을 금지했다. 지주회사는 다음의 조건을 맞춰야 법적으로 인정받았다. 지수회사는 자회사의 지분을 50%이상 소유해야한다. 계열사는 손자회사를 가질 수 없다. 부채비율이 100%를 넘기면 안된다. 98년에 이같은 조건을 만족하는 대재벌은 없었다. ◇회장실 패쇄 회장실의 패쇄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1)독립적인 회장실 기능의 중단 2)구조조정 사무실은 오직 하나의 계열사에만 존재 3)회장과 계열사와의 법적인 관계정립 4)소액주주의 위상 강화 5)계열사간의 자금지원 금지. 이같은 조치는 외환위기에 대한 대응이 아니라 장기적인 정치적 조치로 재벌을 조정하는 족벌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회장실 패쇄는 대부분의 기업에서 일시적인 조치였다. 98년 7월, 계열사간 지급보증이 없는 회사에 대해서는 지주회사가 기술적으로 허용됐다. 일부 재벌은 즉시 계열사를 합병, 하나의 회사로 만들고 지급보증을 없앴다. 그리고 법적으로 허용된 회장실을 다시 만들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회사 통합은 욕구도 떨어졌고 쉽지도 않았다. 99년 중반, 많은 계열사들이 수익성을 회복했고 통합의 이점도 없어졌다. 동아그룹의 경우처럼 분사가 합병보다 더 매력적이었다. 지주회사 설립이 늦어진 이유는 우선 불만족스러운 법률과 선단식 경영을 제거하려는 정부의 압력때문이다. 회장실 패쇄의 진정한 의도는 1)투명하지 않은 계열사 지배를 막고 2)족벌경영을 그만두거나 법률적 책임이 있는 경영자가 되라는 압력이다. 재벌은 이같은 의도를 기꺼이 따르지는 않았다. 재벌은 정부의 직접적인 간섭을 피하기위해 몸부림쳤다. 지주회사는 논리적으로 합당한 "재벌의 진화"이기 때문에 정부는 기업구조와 경영시스템의 합리화를 뒤로 미뤘다. 이것은 이후 구조조정에 심각한 장애로 작용하고 있다. ◇사업영역의 축소 장기적인 정부정책 요소의 하나는 재벌의 성장력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재벌을 핵심사업으로 집중시키위해 "빅딜"정책이 추진되기도했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계열사들을 청산시키는 조치도 취해졌다. 한국의 과잉 생산능력을 고려할 때 다른 공장을 짓는다는 것은 합리적인 사업 판단이 아니다. 재벌 문화에서는 합병도 길고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빅딜은 여러분야에서 진행됐다. 외국인 투자가들의 대체적인 의견은 이렇다. 한국 정부는 기업구조조정을 충분히 빠르게 진행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재벌 입장에서는 대우의 붕괴를 들어 이같은 견해가 모순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정부가 스스로의 구조조정에서 느리게 행동했던 것처럼 재벌 구조조정도 느리게 진행할 것이라고 본다.
2000.12.30 I 정명수 기자
  • (결산 2000)고개숙인 애널리스트와 펀드매니저
  • 바닥을 모르고 추락했던 올해 주식시장에서는 전문가가 설 땅이 없어졌다. 애널리스트와 펀드매니저들은 예상과 달리 주식시장이 곤두박질치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새 천년 첫 해 증권시장에 대한 전망은 장미빛 일색이었다. 종합주가지수가 1500~1600까지 올라갈 것이다, 코스닥지수는 300, 400까지 간다는 예상이 대부분이었다. 실제로 1분기까지만해도 불가능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거래소가 반토막나고 코스닥이 5분의1 수준으로 폭락한 채 폐장했다. 증시가 심리적 공황에 빠지자 목청을 높였던 애널리스트나 펀드매니저도 수수방관할 뿐 "몸값"을 못했다. 더구나 증권업계의 업황이 나빠지자 후선부서인 애널리스트나 펀드매니저들은 구조조정 1순위로 지적되며 안팎으로 고통을 받았다. ◇가치 보다는 수급이 먼저.. 리포트 무용지물 애널리스트들의 설 땅이 사라지게 된 것은 기업의 내재가치 보다는 수급에 의해 주가가 좌우됐기 때문이다. 구조조정이 지연되고 경기가 둔화되는 등 추세적인 하향국면에서는 개별 기업들의 실적이나 가치가 부각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적정주가도 결국은 다른 주식과 비교를 통해 산정될 수 밖에 없는데 전반적으로 하락하는 상황에서는 이러한 접근이 의미가 없었다. 다만 매물화할 주식이 어느 정도인가가 주가에 직결됐다. 투자자들은 기업분석 리포트의 적정주가보다는 대주주가 지분을 처분할 가능성이 있는지, 기관이나 외국인의 보유물량이 얼마나 되는지, 주식으로 전환할수 있는 CB가 어느 정도인지를 먼저 따졌다. 애널리스트의 위상은 시장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난해 활황장세로 몸값이 높아졌으나 실력은 떨어졌다. 분석대상기업이 700여개에서 1000여개로 늘었으나 일부 애널리스트는 벤처로 빠져나갔다. 이러한 자리를 신규인력이 대거 메웠다. 굿모닝증권 서영수 애널리스트는 "기업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2~ 3년의 트레이닝과정이 필요하다"며 "시장이 갑자기 커지다보니 애널들의 층이 엷어지는 부작용도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펀드실명제 후퇴.. 다시 팀중심 운영으로 증시 활황기에 유행했던 펀드실명제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었다. 지난해 투신사들은 경쟁적으로 스타 펀드매니저를 영입했다. 스타 펀드매니저 이름을 걸고 고객들의 자금을 유치하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올해에는 이와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났다. 펀드수익률 공시에서 기존의 펀드매니저 이름이 "공동"으로 바뀌었고 개인의 재량권도 줄어들었다. 주식시장의 침체로 원금 유지는 커녕 반토막난 펀드도 속출하자 고객들의 항의가 빗발쳤기 때문이다. 특히 주식형펀드의 상황이 더욱 심했다. 이러한 것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지난 해 증시호황을 타고 대부분의 펀드가 좋은 수익률을 기록했다. 고객들의 인식도 좋아져 유명한 펀드매니저를 좆아 자금이 몰렸다. 그러나 언제까지 고수익을 유지할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였는데 이에 대한 부담으로 유명 펀드매니저는 자리를 옮기는 경우도 빈발했다. 새로운 펀드매니저가 이어받아서 운용할 경우 수익률이 부실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펀드매니저는 재량권이 박탈당한 대신 더욱 바빠졌다. 영업점에서 열리는 설명회에 나가서 강연도 무시할수 없다. 정착돼가고 있는 연봉제로 자기 몸값을 키우기 위해서는 고객을 모아야 할 입장이다. 이외에도 종목발굴 차원에서 기업방문도 소홀히 할수없는 상황이라 이래저래 펀드매니저의 위상은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막차탄 벤처행..시장침체로 쓴 맛 대박의 꿈을 안고 벤처행을 택했던 증권 전문가들도 고배를 마셨다. 증권맨들의 벤처로의 진출은 크게 두 부류. 뜻이 통하는 동료들이 모여 소규모 금융사를 차리거나 기존의 벤처기업으로 들어가 돈줄을 관리해주는 것이 주류였다. 특히 올해들어 벤처행 막차를 탄 펀드매니저나 애널리스트들은 꿈도 채 펴보기전에 가라앉고 말았다. 투자자문이나 컨설팅회사를 차렸던 증권맨들은 대부분 "박살"난 상태. 그나마 한가닥 의지할만한 회사도 없는 상황이라 사정은 더욱 딱하게 됐다. 일반 벤처행을 택했던 "선수"들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 벤처기업 CFO(최고 재무담당자)의 60~ 70%정도는 증권맨 출신이다. 펀드매니저나 애널리스트 보다는 채권이나 인수업무를 담당했던 경우가 많았다. 이들도 코스닥시장이 사상최저수준으로 폭락하고 기대를 모았던 제3시장이 침체를 보이자 망연자실 한숨만 짓는 신세가 됐다. 골든에셋벤처캐피탈주식회사 강동현 대표는 "증권맨의 꽃으로 불리는 애널리스트나 펀드매니저들의 위상이 증시침체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며 "내년에는 실적악화 등으로 증권가의 구조조정이 본격적으로 실시될 전망인데 이들 전문가들은 이 과정에서 다시 한번 수난을 겪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밝혔다.
2000.12.29 I 김희석 기자
  • (종합시황)악전고투 1년..龍頭蛇尾 주가·원화가치
  • 용두사미(龍頭蛇尾). 대박꿈을 안고 출발했던 용띠 해의 증시가 뱀꼬리가 되고 말았다. 새천년 대박의 꿈을 키우며 1059포인트로 문을 연 거래소시장은 폐장을 맞은 26일 결국 반토막이 났고 500선을 가까스로 지켰다. 시가총액은 357조에서 186조로 171조가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코스닥은 사상최저치를 경신했다. 300선을 넘보며 사상최고치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50선대로 무너지며 영욕의 한 해를 마쳤다. 달러원 환율은 크게 치솟아 원화가치가 떨어졌다. 채권값은 올들어 크게 올라 채권투자자들이 비교적 재미를 봤다는 지적이다. 26일 종합주가지수는 정부의 자금시장안정대책과 배당투자를 노린 매수세가 적극 유입되며 510선에 근처까지 오르며 출발했다. 그러나 달러원 환율이 1250원에 근접하는 등 환율이 불안해지자 상승폭이 둔화됐다. 종합주가지수는 전주말보다 4.02포인트 상승한 504.62로 마감했다. 1000억원이 넘는 프로그램매수세가 대거 유입되며 지수관련 비중이 큰 대형주들이 일제히 강한 상승탄력을 보였다. 동아건설은 연속 14일째 상한가행진을 이어갔다. 현대모비스 등 배당관련주들이 큰폭으로 올랐다. 파업중인 국민, 주택은행 주식도 올랐다. 코스닥종합지수는 개미군단의 매수에도 불구하고 기관과 외국인투자자들이 일제히 정리매매에 나서 전주말보다 0.09포인트 소폭 하락한 52.58로 장을 마쳤다. 선물시장에서는 외국인이 순매수했지만 개인과 기관의 정리성 매물에 가로막혀 좁은 밴드내에서 등락을 반복했다. 결국 선물 최근월물인 3월물 지수는 전날보다 0.65(1.05%)포인트 오른 62.65로 장을 마감했다. 이날 외국인은 선물시장에서 오전에 신규매수 위주로 순매수를 확대하다가 오후에는 신규매도를 늘리며 소폭 순매수로 마쳤다. 총 570계약 매수 우위를 보였다. 또 개인도 막판 매수를 급격하게 늘리며 61계약 순매수했다. 반면 투신은 1552계약 순매도했다. 달러/원 환율은 지난주말에 비해 17원이나 높은 1254원으로 거래를 마쳤다. 기업들은 달러사자에만 쏠렸고 누구도 달러를 팔지않으려했다. 은행들 사이의 외환거래는 거의 중단돼 연말분위기가 물씬 했지만 기업들의 달러가수요가 폭발하며 시장분위기는 과열양상을 보였다. 이날 재경부는 오전중 고위당국자 이름으로 "최근 국내외 시장의 불안정, 엔. 대만달러 약세, 수출입업체의 리드 앤드 래그(Lead & Lags) 현상으로 환율이 단기간에 급등하고 있다"며 "당국은 이와 같은 단기급등 현상을 우려하고있다"고 구두개입에 나서기도 했다. 채권시장에서는 국민, 주택은행의 파업 영향과 환율 상승 등으로 수익률이 소폭 올랐다. 두 은행을 수탁기관으로 하는 일부 투신사들은 결제에 애를 먹기도 했다. 연말 투신MMF 환매에 대비한 통안채가 급매물로 나와 높은 수익률에 거래됐을 뿐 지표채권 거래는 많지 않았다. 증권협회가 고시하는 국고3년 최종호가수익률은 전주말과 같은 6.75%, 국고5년은 2bp 오른 6.95%, 통안2년은 7bp 오른 6.97%를 기록했다. 회사채3년 AA-등급과 BBB-등급은 8.10%, 11.80%로 전주말과 같았다. 국채선물가격은 하락세를 나타냈다. 거래량도 많지 않았다. 3월만기 국채선물은 전주말보다 15틱(0.15포인트) 떨어진 102.82를 기록했다. 현물 채권시장의 거래량이 급감함에 따라 환율상승에 따른 가격하락 압력을 국채선물이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2000.12.26 I 허귀식 기자
  • 김철호 명성 회장 불구속기소-날개 다시 접나
  • 김철호 명성회장(62)이 다시 날개를 접을 것인가. 지난해 5월12일 대한생명 인수 전에 얼굴을 내밀기도 했던 김 회장이 지난 17일 태백산 폐광지역 개발 명목으로 20억원가량을 사취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김 회장은 지난 96년 4월 조경업자 이모(55)씨로부터 백지 당좌수표 20장을 건네받아 액면가 21억여원을 기재한 뒤 사업자금으로 쓰고 갚지 않은 혐의다. 이에대해 김회장측은 "이씨는 당시 명성 계열사의 대표이사였던데다 문제가 된 수표를 모두 회수해 피해가 없었는데 검찰이 무리하게 기소했다" 고 주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83년 구속된 후 10년만인 93년 가석방, 98년 잔형 집행 면제에 이어 지난 8월 광복절에 복권돼 "자유"를 찾은 그가 3개월여만에 다시 법정에 서게 된 것이다. 호남비료에 다니던 김 회장은 29세이던 66년 운수회사를 설립했다. 한때 130대의 코로나택시를 가진 대운수업자가 돼 성공하는 듯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망했다. 78년 관광업에 손댔다가 실패한 그는 79년 오성골프장을 인수했다. 이때부터 레저산업에 뛰어든 것이다. 81년4월부터 콘도미니엄을 분양하며 큰돈을 벌었다. 레저 관광 건설 무역 전자 식품 등 21개 계열기업을 거느린 재벌그룹으로 급부상했다. 그가 사업용으로 사들인 땅은 얼마후 금싸라기 땅으로 변했다. 자연히 의혹이 제기됐고 국세청의 세무조사를 받았다. 전북 출신으로 전주공고 한양대 원자력공학과를 졸업한 그를 70년대 율산 신선호 회장과 함께 한때 탄압받은 "호남기업인"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김 회장은 83년 7월31일 국내 각 일간지 1면 광고로 "강호 제현께 알리는 말"을 통해 국세청 세무조사로 그룹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호소했다. 이 광고는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는 그해 12월28일 선고공판을 통해 벌금 92억3000 만원징역 15년형을 받았다. 84년 8월 벌금은 79억3000만원으로 깎였지만 1280만평의 명성 소유 땅 대부분이 한화로 넘어갔다. 당시 쟁점은 한빛은행(당시 상업은행) 혜화동 지점 대리 김동겸씨를 통해 조달한 사업자금이 예금이냐 사채였냐 하는 것. 검찰은 예금으로 간주했지만 대법원은 87년 이 돈은 사채라는 판결을 내렸다. 김 회장은 83년 수기통장을 불법으로 발급받은 뒤 은행에서 대출받은 돈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돼 서울 고법에서 징역 15년, 벌금 79억3천만원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93년 가석방됐고, 98년 잔형 집행을 면제받았다. 그리고 지난 8월 광복절 사면으로 복권됐다. 그는 88년 11월의 5공비리특위 청문회에서 당시 구치소에 수감중이던 김 회장은 국회에 나와 증언하기도 했다. 옥중에서 문학에 심취해 87년에는 김동봉이란 필명으로 예술계 제7회 신인 상을 받기도 했다. 가석방후 95년 3월부인 신명진(56)씨와 인사동에서 시사전을 열기 도 했다. 95년 노산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명성은 83년 해체 후 93년 재건됐다. 재기를 꿈꾸는 김 회장이 꺼내든 카드는 94년 2월 태백권 대규모 관광레저단지 조성 계획. 일명 "스노우 마운틴 월드" 프로젝트다. 1조9900억원을 들여 2782만8000평 부지에 골프장, 스키장, 해상스 포츠천국 등을 건설한다고 제시했다. 명성그룹이 사업신청을 한 곳은 태백시황지동 함백산 일대 서학레저단지를 비롯, 태백시화전동 태백관광레저단지, 정선군고한읍 고토일복합리조트, 정선군남면 관광레저단지, 영월군상동읍 장산스키장등 5개 사업. 투자 예정액은 1조1000억원. 폐광지역 종합개발을 위한 강원도의 민자유치계획 1조9000억원의 57.9%에 해당하는 엄청난 규모다. 사업계획도 스키 슬로프 136면, 골프장 54홀, 콘도 3050실, 호텔 1100백실등 일반인들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규모였다. 명성그룹은 자금 조달 능력에 대해 캘리포니아에 소재한 관광레저 투자 전문회사인 VCC사 등으로부터 약속받은 12억달러가 사업자 지정과 동시에 지원되며, 나머지는 부동산신탁투자방식으로 개발하면 충분히 메울 수 있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94년 발표한 전남 완도 낚시전문 콘도 "청해진"과 전북 남원 지리산콘도도 97년 공사가 중단됐다. 이유는 미미한 분양실적에 따른 공사비 부족. 일단 착공한 뒤 콘도를 분양해 공사비를 조달하겠다는 복안이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지난 3월 경기도 안산시 대부동 시화방조제 앞에 "명성아쿠아토닉 호텔"을 짓겠다고 경기도에 사업계획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도로부터 "현실성 없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이 계획은 경기 안산시 대부동 시화방조제 중간 작은 가리섬과 북서쪽 외해의 공유수면을 포함해 5만9000여평에 수상 25층 수하 4층 객실 664실규모의 원추형 호텔을 세운다는 것이었다. 카지노와 스카이라운지, 해양박물관 등 부대시설을 갖추며 방조제와 호텔 사이는 케이블카로 연결하는 것. "2002년 월드컵" 관광특수에 맞춰 늦어도 공사에 들어가 3570억원으로 추산되는 사업자본은 전액 미국과 호주의 투자회사로부터 유치할 계획이라고 밝혔었다. "강릉지역 발전을 위한 정책토론회"에선 강원도 칠성산에 태권도 수련장이 건립되면 일대를 개발해 중국소림사를 능가하는 관광명소로 개발하겠다고 "큰소리"쳤으나 역시 무위로 끝났다. 강원도 성산에 태권도 수련장이 건립되면 미국 한곳에서만 매년 전체 태권도 동호인의 10%에 해당하는 50만명 정도의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난해에는 대한생명 인수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한 여름 밤의 꿈"이 됐다. 정책당국은 "해프닝"정도로 무시했다. 일본 민단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하겠다고 밝혔으나 신빙성이 낮았기 때문이다. 그 뒤 1년여만에 드러낸 김 회장의 모습은 "불구속 기소"였다. 20여년간 꿈꾸고 추진해온 레저사업에 돈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재기의 꿈을 버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없는 듯하다.
2000.11.19 I 허귀식 기자
  • ①금융중개시장 활성화가 절실한 이유
  • 금융의 혈맥인 중개시장을 바라보는 시장참가자들의 시선이 차갑다. 금융중개시장을 활성화한다며 마련했던 정부의 경쟁촉진방안은 사문화(死文化)돼버렸고 중개시장 활성화를 선언했던 가장 큰 이유인 시장의 선진화까지는 갈 길이 멀다. 투명한 정보의 흐름은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고 아직도 원화자금 중개기능은 독점형태로 운영되고있다. 어렵게 도입한 채권전문딜러(IDB)제도는 존재의의조차 희미해진 상태다. ◇금융중개시장 왜 중요한가 지금 이 시점에서 금융중개시장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개선책을 모색하는 이유는 뭘까. 금융중개시장은 단순히 ‘중개’만 하는 시장이 아니다. 자금중개시장은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시장이다. 시중통화량을 조절하고 금융기관에 적기에 적절하게 자금을 안배하는 기능도 갖는다. 한마디로 중앙은행과 밀접한 관계속에서 시장의 안정을 도모하는 안전판 구실을 한다. 이와 관련, 한국은행 이명종 과장은 “자금중개회사는 시중의 자금 과부족에 대한 정보를 취합하고 금융기관을 바로 연결시켜주며 자금흐름을 정리하게된다”며 “일차적으로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시그널이 콜 시장에 나타난다는 점에서 중개회사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인력이나 장비, 기법등을 개선해 자금중개기능을 강화하고 이를 통해 자금시장의 크기를 키우는 터전이라는 점이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적의 자금운용을 할 수 있도록 금융기관을 측면지원한다는 의미다. 이는 곧 금융의 수혜자인 기업이나 개인들에게 더할나위 없이 중요한 문제다. 금융기관이 건전해질수록 기업이 돈 빌려쓰기는 쉬워지고 자금흐름도 원활해지기 때문이다. 자금중개시장의 중요성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거대한 개방의 태풍이다. 자금중개시장은 앞으로 개방의 태풍을 온몸으로 맞아야할 상황이다. 시장이 경쟁력을 키우는데 소홀한 상태에서 개방은 곧 치열한 경쟁과 그에 따른 재편을 의미한다. 이른바 대외경쟁력의 문제는 지금 자금중개시장이 당면한 문제이다. ◇금융중개시장의 현실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자금중개시장이 지금 한국자금중개의 독점제체로 운영되고있다. 한국자금중개는 “콜시장의 규모가 작고 앞으로 금융구조조정이 끝나면 그 규모가 더 축소될 전망이므로 중개업자의 신규참여 허용은 시기상조”라는 입장이다. 정부는 지난 3월 청와대 업무보고에서 “금융결제원의 자금중개실을 결제원으로부터 분리, 별도법인을 설립해 외국환 중개회사로 신규인가하고 원화중개업무 인가도 신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명분은 한국자금중개와 실질적인 복수경쟁을 통해 자금중개시장의 발전을 도모한다고 명시했다. 상반기중 업무개시를 신청한다는 일정도 공개했다. 그리나 지금 금융결제원에서 분리된 서울자금중개는 금감위로부터 원화자금중개업무 인가를 받지못한 채 간판까지 ‘서울외국환중개’로 바꿔달고 이달 18일부터 먼저 인가를 받은 외화매매 및 외화콜 중개를 시작한다. 원화자금 중개업무 인가를 받지못한 이유는 여러가지이지만 결과적으로 정부가 당초 약속한 자금중개시장의 경쟁체제 도입은 물건너갔다. 외환중개기능은 복수체제로 운용되고있다. 1970년 은행협회가 하던 외국환 중개는 89년10월 금융결제원으로 넘어왔고 99년2월부터는 한국자금중개가 외환중개업무를 시작, 본격적인 경쟁체제로 들어섰다. 또 금융결제원은 자금중개실을 분리, 별도법인인 서울자금중개를 설립했고 오는 18일부터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한다. 시장경쟁체제를 이룩하겠다던 당초의 꿈을 접고 원화자금중개를 포기한 반쪽짜리 중개기관으로 출범하는 셈이다. 채권전문딜러제는 채권시장 활성화의 발판이지만 활성화까지 갈 길이 너무 멀다. 채권시장이 전문딜러제의 정착을 의문시하는게 현실이다.
2000.09.07 I 손동영 기자
  • (초점) 벨 캐나다가 엄청난 투자수익을 올리기까지- AWSJ
  • 아시안 월스트리트저널이 30일 벨 캐나다 인터내셔널과 AIG가 어떻게 한솔M.com에 투자해서 엄청난 수익을 올렸는 지에 대해 1면 좌측 기사로 상세하게 보도했다. 아시안 월스트리트저널은 벨 캐나다와 AIG이 투자수익을 거둔 사실은 외국인의 관점에서는 한국 투자의 분수령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다음은 그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벨 캐나다와 AIG는 최근 한국의 한 이동통신회사에서 12억 달러의 투자수익을 거뒀다. 2년이 안된 시기에 5배의 수익률을 기록한 것이다.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나라였던 한국은 금융위기로 인해 외국인 투자자에게 문을 열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1998~1999년중 200억 달러가 넘는 외국인 직접투자 자금이 유입됐다. 물론 벨 캐나다와 AIG가 투자하고 투자금을 빼기 까지의 과정이 쉽 지는 않았다. 이동통신 사업자 선정과 관련된 정치적 스캔들이 투자에 위협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투자를 했고 수익을 낸 뒤 탈출할 수 있었다. 이번 성공은 절묘한 타이밍과 20년을 거슬러 올라간 인간 관계, 투자비용이 솟구칠 때 빠질 줄 알았던 미국 교육을 받은 경영진 덕분이었다. 벨 캐나다가 한솔M.com의 경영감독을 맡고 한국통신에 주식을 매각한 것은 한국의 기업문화에 있어서 분기점이 된다. 외환위기 이후 첫번째 대규모 투자였을 뿐 아니라 외국회사가 처음으로 한국 통신회사의 최대 주주가 됐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인상적인 것은 외국인 투자자가 정부의 방해를 받지 않고 현금 다발을 갖고 한국 시장을 떠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UBS워버그 증권 서울의 매니징 디렉터인 리처드 사무엘슨은 "큰 진전"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그 계약은 정치적으로 이슈화가 될 만큼 큰 건이었다. 그러나 방해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리젠트 퍼시픽 그룹의 매니징 디렉터인 줄리안 마요는 "탈출구가 있다는 의미가 된다"며 "우리가 앞으로 더 많이 투자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고 말했다. 1998년초 벨 캐나다와 AIG는 이미 30만 명의 가입자를 확보하고 있는 한솔M.com에 주목했다. 그리고 휴대폰 사용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 2억5000만 달러를 투자키로 했다. 이 계약은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어렵지 않게 재가를 받았다. 사실 델 캐나다의 데렉 버니 회장은 1980년 주한국 캐나다 대사였다. 그는 당시 대통령에게 사형 선고를 받은 정치인에 대해 사형집행을 하지 말아달라고 청원한 여러명의 외교관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지금 사형선고를 받은 정치인은 대통령이 돼 있다. 한솔M.com의 조동만 부회장은 버니 회장의 과거 행동이 계약에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1998년초 함께 김대중 대통령을 찾았을 때 조 부회장은 이 일을 상기시켰고 그 때문에 분위기가 아주 좋게 흘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솔M.com이 휴대폰 사업권을 따기 위해 정부 관료에게 로비를 했다는 정치 스캔들이 터지면서 계약이 무산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당시 조 부회장은 검찰에서 180시간이나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조 부회장의 경영권 유지에는 문제가 없다고 확인시켜 줌으로써 1998년 9월에 거래가 성사될 수 있었다. 그 때 벨 캐나다는 1억5900만 달러, AIG는 1억600만 달러를 투자해 각각 23.3%, 15.5%의 지분을 확보했다. 최대 주주가 된 벨 캐나다와 AIG는 16명의 이사 자리중 4개, 2개를 확보했다. 그리고 회사 경영은 한국인 경영진이 맡기는 했지만 중요한 결정은 동의를 받도록 했다. CFO는 벨 캐나다측이 맡았다. 처음에는 이 계약이 대박인 것처럼 보였다. 1998년 초부터 1999년 말까지 한솔M.com의 시장 점유율은 매년 2배씩 성장하는 한국 휴대폰 시장에서 두 배로 늘어났다. 벨 캐나다와 AIG가 처음 투자했을 때 6억7000만 달러 정도였던 시가총액은 기술주 거품이 거의 최고치에 달했던 기업 공개시에는 폭발적으로 증가, 두 회사의 지분은 시가총액으로 40억 달러에 육박했다. 그러나 경쟁심화로 인해 수익을 내는 것이 어려워 보였다. 한솔M.com의 경우 가입자가 2년만에 30만 명에서 300만 명으로 늘어났지만 거의 수익을 내지 못했다. 조 부회장은 "미국에서는 50만 명의 가입자만 확보하면 엄청난 돈을 번다. 그러나 (경쟁 때문에) 휴대폰을 거줘나눠줬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조 부회장의 시각이 변하기 시작했다. 당초 그는 한국 최대의 휴대폰 서비스업체를 운영하려는 꿈을 갖고 회사를 설립했다. 그러나 노스웨스턴대 MBA 출신인 그는 냉정한 투자자처럼 적절한 시기에 파는 것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기업공개 한 달전인 1999년 11월 한솔과 벨 캐나다, AIG가 탈출 전략에 동의했다. 조 부회장은 "비이성적인 경쟁을 지탱하는 것은 주주나 종업원에게 좋지 않았다"고 말한다. 확실한 구매자가 있었기는 하지만 매각에는 장애물이 있었다. 협상을 시작했을 때 기술주는 치솟고 있었다. 벨 캐나다와 AIG, 한솔은 주당 7만 원에 팔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난 4월 버블이 꺼지면서 그들은 주당 3만 원 수준에서 팔 수 밖에 없었다. 차액은 25억 달러나 된다. 첫번째 구매자로 등장한 곳은 LG텔레콤이었다. 그러나 지난 2월 가격 차이로 협상이 무산됐다. 1월6일 6만3300원까지 갔던 주가는 4만원까지 내려가 있었다. 그리고는 한국통신이 매입의사를 밝혔으나 3월에는 지지부진한 상태에 빠졌다. 한솔M.com의 집행 부사장인 사무엘 권은 "한국통신은 큰 인수를 해본 적도 없었고 시기도 안좋았다"고 말했다. LG가 다시 협상 테이블로 되돌아왔다. 3주간의 집중적인 협상 끝에 협상이 거의 타결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4월28일 초 저녁 서울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변호사와 투자은행 관계자들이 호텔 방에서 계약서 초안을 다듬고 있는 동안, 벨 캐나다의 아시아 대표인 Mr 체가 LG측과 최종 미팅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아래층에서 매수자측을 만나고 1시간 만에 돌아온 체가 협상이 다시 깨졌다고 말했다. 벨 캐나다를 대리한 모건 스탠리 딘 위터의 사장인 매튜 긴스버그는 당시 상황에 대해 "믿을 수 없었다"고 회고한다. 2~3시간 후면 계약서에 사인을 하기로 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뉴욕에 있었다. 나스닥 주가가 급락하면서 한솔M.com 주가도 60%나 하락, 2만5000원까지 하락해 있었다. LG텔레콤의 인수가격은 대략 5만원 선이었다. LG의 대변인인 수 김은 가격에 불안해 했다고 말한다. 계약이 성사되지도 않았고 홍콩으로 돌아갈 비행기도 없었기 때문에 20여명의 협상팀은 하얏트 호텔의 J.J.마호니스에서 술을 퍼 마셨고, 조 부회장은 호텔 방에서 잠을 청했다. 그러나 탈출 전략이 실패할 즈음 한국통신이 새로운 제안을 해왔다. 가능한 빨리 거래를 성사시키는 것이 어느때보다 중요해졌다. 신문들이 정부가 대주주인 한국통신이 외국인에게 그렇게 많은 돈을 주어야 하느냐고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언론들이 협상을 주시하자 양측은 홍콩과 서울의 르네상스 호텔을 오가면서 비밀스럽게 협상을 진행했다. 결국 6월 첫째주 관계부처에서 거래를 승인했고, 한 주 뒤에 청와대에서 OK 사인이 나왔다. 서울 근교의 한 골프 클럽에서 양측 실무진이 가격을 뺀 나머지 사안을 최종 검토하는 동안, 양측 대표는 서울의 한 호텔에서 비밀리에 접촉을 갖고 최종 타결을 보았다. 이로써 벨 캐나다는 9억9500만 달러, AIG는 6억 달러를 챙겼다. 7월26일에 거래가 끝났다. 한솔M.com의 어제 종가는 1만5900원이다. 모건 스탠리 딘 위터의 긴스버그는 "결국 한국통신과 함께 방안에 들어간 벨 캐나다, 한솔, AIG가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조언자나 변호사도 없이 그들이 계약을 성사시켰고 악수를 나눴다"고 말했다.
2000.08.30 I 김홍기 기자
  • (초점) 미 언론의 생명공학주 분석
  • 24일 미국 뉴욕 증시에서 생명공학, 특히 게놈 관련주들이 큰 폭으로 상승했다. 이에 따라 생명공학 주식이 과연 계속해서 오를 수 있을 것인가와 생명공학 기업들이 언제쯤이나 수익을 낼 것인 지가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 로이터 통신 등이 이날 일제히 생명공학 업종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일단 24일 게놈주 상승은 미국의 전미건강연구소(NIH)의 발표 때문이었다. NIH는 이날 태아의 줄기 세포와 관련된 리서치 프로젝트에 대해 처음으로 돈을 지급하겠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연구가 중단될 수도 있는 프로젝트였다. 줄기 세포(stem cells)는 다양한 조건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미성숙 세포를 말한다. 줄기 세포는 초기 단계에서는 동일한 것처럼 보이지만 성장하면서 다양한 세포로 변하게 된다. 따라서 줄기세포를 규명하게 되면 다양한 질병의 원인을 알 수 있는 근거를 얻을 수가 있다. 이 발표로 휴먼 게놈 사이언스는 15%, 셀레라 게노믹스는 14.7%, 어피메트릭스는 13.5%, 아브게닉스는 14%, 밀레니엄 제약은 8% 이상 올랐다. 진 로직과 메드이뮨 등도 큰 폭으로 상승했으며, 태아상태의 줄기세포와 직접 관련된 게놈 업체들인 게론은 25%, 아스트롬 바이오사이언스는 60%, 스템셀스는 30% 폭등했다. 아스트롬은 미국 뉴욕 증시에서 거래량 상위에 들기도 했다. 뉴욕 증시에서 거래되는 모든 줄기 세포 관련 생명공학 업체가 상승한 것이다. 휴먼 게놈 사이언스와 셀레라 게노믹스는 줄기 세포와 관련된 연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기초 유전자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는 이유로 강세를 나타냈다. 그러나 워싱턴 포스트는 연구소와 동물 실험을 거쳐 사람에 대한 임상실험, 약품을 개발해 이익을 내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했다. 생명공학 업종에 가장 큰 문제는 언제쯤이나 수익을 낼 수 있느냐는 것. 그러나 생명공학 기업들은 과거보다 펀더멘털이 훨씬 좋은 상태다. 따라서 올해에도 다른 업종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강세를 나타내고 있다. 생명공학 기업들은 작년에 113.5% 폭등했으며, 올해에도 3월에 40.4%나 폭락한 뒤 5월말 이후로 54.9%나 상승했다. 올들어 지금까지 39.3% 상승해 있는 상태. 생명공학 업종보다 더 많이 상승한 업종은 반도체등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상승폭이 컸던 만큼 변동성도 어떤 종목보다도 크다. 이처럼 생명공학 기업들의 주가가 쉽게 흔들리는 이유는 대부분의 생명공학 업체가 설립된 지 얼마되지 않았고, 비즈니스 모델도 아직까지 검증되지 않은 상태며, 이익을 내는 업체도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미 연방식품의약국(FDA)가 생명공학 업체가 개발한 약품에 대해 승인을 내릴 지 여부는 더욱 불투명한 상태. 만약 FDA가 승인을 거부할 경우, 수년에 걸친 연구성과가 물거품이 되고 만다. 또한 정부 정책에 쉽게 흔들린다는 리스크도 안고 있다. 지난 봄에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인간 유전자 지도의 특허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발표하면서 주가가 폭락한 것이 그 예다. 그리고 클린턴이 이 발언을 번복하면서 생명공학 주가는 다시 급상승했다. 이처럼 생명공학 업체는 근본적인 취약성을 안고 있다. 이 때문에 생명공학 업종의 주가는 1991년에 250%나 폭등한 뒤 이후 7년간 매년 평균 12%씩 주가가 하락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생명공학 업체들의 펀더멘털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지금처럼 전망이 좋았던 적은 없었다고 한다. 승인을 받은 의약품 숫자는 1995년 6개에서 작년에는 70개로 늘어났고, 올해에는 90개에 도달할 전망이다. 또 이익을 내는 업체도 10년 전에는 3개에 불과했지만 작년에는 14개가 됐고, 2001년까지는 40개에 이를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한편 뉴욕 타임스는 생명공학 업체들이 막대한 자금을 토대로 기존의 대형 제약업체들과의 계약에서 칼 자루를 쥐게 됐다고 보도했다. 제약회사와 노예문서와 다름없는 계약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게 됐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제약회사들이 생명공학 업체에 자금을 대고 거기서 나온 연구성과의 이익을 거의 전부 독차지했다. 그러나 이것이 게놈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셀레라 게노믹스는 지난 6월 인간 유전자 지도의 완전 해독을 발표했는데, 이로써 생명공학 업체들의 꿈이 실현될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졌다. 일부 전문가들은 셀레라의 유전자 지도 해독을 닐 암스트롱의 달 착륙과 비견할 만한 과학적 업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성과 덕분에 생명공학 기업들의 자금확보가 훨씬 용이해지고 있다. 생명공학 기업들은 올 상반기에만 221억 달러의 자금을 유지했다. 작년에는 120억 달러, 1998년에는 81억 달러였다. 그리고 몇 년 전만 해도 한 기업이 기업공개(IPO)로 끌어들이는 자금 규모가 3000만 달러 정도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대부분이 1억 달러 이상을 끌어들이고 있다. 아브게닉스와 메다렉스, 밀레니엄 제약 등은 올 초에 각각 4억 달러 이상을 끌어들였고, 셀레라 게노믹스는 3월에 있었던 2차 증자에서 10억 달러 정도의 자금을 확보했다. 그리고 7월초 이래 지금까지 30개 생명공학 기업이 IPO에 성공했으며, 이들이 끌어들인 자금만도 25억 달러에 달한다. 그리고 16개 기업이 IPO를 대기하고 있는 중이다. 바로 이 자금이 생명공학 기업들이 제약회사들과의 계약에서 칼 자루를 쥐게 만든 것이다. 따라서 일부 생명공학 기업들은 개발한 신약으로 벌어들이는 이익을 50대50으로 나누는 계약을 맺기도 했다. 아브게닉스와 밀레니엄 제약이 각각 이뮤넥스, 아벤티스와 이러한 계약을 맺었다. 제약회사들이 생명공학 기업들에 2%의 로열티만 주고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그런 불평등한 계약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생명공학 기업과 제약회사간에 힘의 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알로스 세라페틱스 같은 업체는 아예 IPO로 확보한 9000만 달러의 자금을 토대로 자신들이 직접 신약을 개발, 판매하겠다고 선언했다. 제약회사의 도움이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생명공학 기업들의 미래가 밝지는 않다. 돈이 풍부하지 못한 기업도 있는 것이다. 레콤비난트 캐피털이 지난 1분기에 247개 생명공학 기업들을 조사한 결과, 61개 업체가 1년을 버틸 현찰이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재정상태가 좋은 기업들도 지금 갖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밀레니엄 제약의 최고재무책임자(CFO)인 케빈 스타는 “게놈은 규모의 게임이며 게놈 이후는 더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게놈으로 성공하려면 1억 달러가 아닌 수십억 달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생명공학 기업들이 실제 대박을 터뜨리려면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도 생명공학 기업들에게는 리스크 요인이다. 1991년과 1995년의 붐이 쉽게 수그러들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언제 다시 투자자들이 “생명공학 기업들은 아직 멀었다”고 생각할 지 모른다는 것. 따라서 생명공학 기업 주식은 항상 폭락의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체이스 H&Q의 애널리스트인 비벡 제인은 과거보다 훨씬 좋아졌다고 말한다. 생명공학 기업들의 주가가 폭등했던 1991년에는 2년을 버틸 자금을 확보할 생명공학 기업이면 매우 재무상태가 좋은 기업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많은 기업들이 5~6년을 버틸 자금을 확보해 놓은 상태라는 것이다. 연구개발에서 신약개발까지 할 수 있는 돈을 확보해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약개발이 가까워질 수록 자금확보가 더 용이해질 수도 있다. 미국 언론들은 생명공학 기업에 대해 투자할 경우에는 단기 급등락을 감수해야만 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변동성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리스크 요인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기술을 갖고 있는 기업에 장기간 투자했을 경우에는 대박을 터뜨릴 수도 있다고 한다. 로이터통신은 생명공학 기업에 투자하려면 투자금액중 5~10% 정도만 넣은 뒤 장기투자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2000.08.25 I 김홍기 기자
  • (초점) 대우차 매각이 재벌개혁 전환점- BW
  • 미국의 경제주간지인 비즈니스 위크가 최근호에서 대우자동차의 매각이 한국 기업 구조조정의 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다음은 그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1999년 7월 한국 정부가 대우그룹이 지급불능(insolvent) 상태에 있다고 선언하고 구조조정을 추진한다고 발표했을 때 전 세계 투자자들은 찬사를 보냈다. 만약 자동차에서 VCR까지 모든 것을 만드는 대우가 해체된다고 한다면, 한국의 다른 기업들도 정치적 후원과 정부의 금융지원 시대는 끝났다는 메시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때부터 1년이 지난 지금, 점검해보니 명확하지가 않은 상태다. 지금까지 워크아웃에 들어간 대우그룹의 12개 주요 계열사중 문을 닫거나 외국 기업에 팔린 것은 하나도 없다. 12개 기업중 어느 곳도 재정상태에서 경쟁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 총 부채는 아직까지도 자산보다 260억 달러 많은 800억 달러나 된다. 대우그룹의 더딘 구조조정으로 한국 기업이나 한국 정부가 단기적인 고통을 흡수하지 않으려 한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다. 김대중 정부는 실업 유발과 은행을 흔들 수 있다는 이유로 부실 기업의 문을 닫는 것을 꺼려했다. 대우의 경영진도 외국의 구조조정 전문가를 채용하기를 꺼려했다. 삼성증권의 리서치 디렉터인 이남우씨는 “필요한 것은 칼을 좌우로 흔들 수 있는 차가운 심장을 가진 CEO”라고 말한다. 한국의 성장률이 정부로 하여금 경제를 혼란에 빠뜨리지 않고 대우를 해체할 여지를 만들고 있다. (그러나) 대우나 다른 재벌들에 대한 구조조정 작업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지 않았다. 작년에 제조업체의 25%가 금융비용을 충당할 만큼을 벌지 못했다. 대우전자의 경우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 기업들의 문제를 잘 드러내는 예다. 대우전자의 부채는 대우 그룹의 계열사와 비교해 나은 상태이며 상품의 질도 그런대로 괜찮다. 이 때문에 지난 1월 40개의 채권단이 13억 달러에 달하는 부채를 주식과 전환사채로 전환해줬다. 그리고 앞으로 3년간 25억 달러의 무보증 채권에 대해 금리를 1%로 깎았다. 그러나 이 정도로도 충분치 않을 수도 있다. 대우전자 경영진은 2003~2004년에 수입의 5% 정도의 금융 비용 유지를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되려면 매출액을 올해 매출액의 두 배인 63억 달러까지 늘려야만 한다. 만약 이 꿈이 현실화되지 않는다면 대우전자는 다시 한번 부채 압박을 받을 수 있다. 대우그룹 문제의 진실은 포드가 자동차에 대해 최종안을 내게 될 몇 주간 사이에 더 확실해질 것이다. 포드는 9월말까지 최종안을 제출할 예정이다. 자동차 매각은 다른 재벌들에게 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하지 않으면 같은 운명에 처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처음으로 장기간 보호를 받아왔던 전략산업을 외국 경쟁업체에 개방한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계약이 성사될 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포드는 지난 6월에 69억 달러에 매수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새로운 부채가 드러났다는 보도를 접하고 아마도 포드는 그 절반 정도를 제안할 지도 모른다. 만약 협상이 깨진다면 유일한 대안은 GM이 될 것이다. 최선은 이 문제를 실용주의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포드는 글로벌 차원에서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대우 계약이 성사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대우의 운명은 이번 계약이 성공하느냐에 달려있다. 또한 한국 경제개혁의 미래도 마찬가지다.
2000.08.25 I 김홍기 기자
  • (분석)한일합섬, 철저한 구조조정으로 회생 기미
  • 부도로 사형선고를 받은 한일합섬이 2년 만에 다시 살아나고 있다. 법정관리 아래에서 착실한 자구노력을 진행, 회생의 기회를 맞고 있는 것이다. 최근 구조조정에 실패한 현대건설의 워크아웃, 법정관리 가능성이 나오고 있는 마당에 법정관리 기업의 재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일합섬의 박창준 상무는 "부도났을 당시에는 우리만 당했다는 원망이 없지 않았지만 지금은 법정관리 덕분에 철저한 구조조정을 진행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고 털어놓는다. ◇뼈를 깎는 자구노력을 시작하다=한일이 부도난 것은 지난 98년 7월1일. 이로부터 6개월만인 99년1월 법정관리 개시결정이 나자 뼈를 깎는 구조조정이 시작됐다. 사실 부도가 나기전인 90년대 초반부터 한일은 구조조정을 생각했다. 섬유산업이 성장에 한계를 보임에 따라 이 부분을 줄이는 대신 건설, 생명공학, 전자 등으로 다각화하고 섬유공장 설비를 중국으로 이전하기도 했다. 박 상무는 "구조조정 착수 시기가 남들보다 늦은 것은 아니었다"며 "다만 최고경영진의 적극적인 의지가 없어 효과가 미미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최고경영진의 의지가 없는 구조조정이 잘 될 리 없었다. 법정관리는 이런 자발적 구조조정보다 가혹하게 회사를 바꿔놓았다. 한일은 생명공학 진출의 꿈을 스스로 접었다. 총 700억원 투입해 키웠던 한효과학기술원을 198억원에 벤처기업에 팔면서 제약 사업부도 매각했다. 의류내수 부문은 총 7개 브랜드중 자체 수익이 가능한 남성복 "윈디클럽", 여성복 "레쥬메" 등 2개 브랜드만 남기로 5개 브랜드를 포기했다. 900억원 매출사업이 300억원으로 축소됐다. 올해 한해동안 162억원의 자구노력을 이행키로 채권단과 약속했지만 한일은 올들어 6개월만에 269억원의 자구실적을 달성, 채권단을 안심시키고 있다. 그 사이 엄청난 인원이 회사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97년말 15개 본부 1789명으로 연간 인건비가 449억원이 소요되던 한일합섬은 2년6개월만에 10개본부 1009명으로 줄였고 인건비도 227억원으로 낮췄다. 한때 40명이나 되던 임원도 지금은 9명에 불과하다. 인원수는 44%, 금액은 49%가 감소한 것으로 얼마나 많은 직원들이 눈물을 머금고 회사를 떠났는지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이들의 희생 대신 연간 280억원 규모의 손익개선 성과가 가능할 전망이다. 백용기 기획실 차장은 "2년여의 뼈를 깎는 구조조정 기간동안 노조의 파업이 없었고 올해에는 노사가 임금가이드라인 이하로 임금인상을 타결지을 정도였다"고 직원들의 협조가 큰 보탬이 됐음을 잊지 않았다. 김정재 한일그룹 전부회장을 재산관리보전인으로 맞은 것도 불행중 다행이었다. 수년전 김중원 회장과 마찰을 빚어면서 그룹 부회장에서 물러났던 김 관리인은 기획통으로 한일합섬 사장을 지내기도 하는 등 한일의 내부를 누구보다 잘 알았고 직원들의 신망도 두터웠다. 박 상무는 "법정관리에 들어가면 법원이나 은행 등으로부터 협조를 받는게 가장 힘든 일이었지만 관리인 덕분에 이를 잘 넘기고 있다"고 설명한다. 김 관리인은 직원들의 협조를 끌어내는데도 강한 설득력을 발휘했다. 노사가 한몸이 되어 구조조정을 진행하자 구사주가 경영에 간섭할 여지가 없었다. 백 차장은 "만일 구사주가 경영에 개입했다면 구조조정은 백년하청이 됐을 것"이라며 "이것이 법정관리의 최대 장점"이라고 평가했다. 철저한 자구노력과 노사협조, 구사주 배제 등 3박자가 갖춰지자 한일은 고통의 터널에서 서서히 헤쳐나올 수 있었다. ◇한일의 몰락은 무리한 사업확장 때문= 한일합섬은 70~80년대 달러를 긁어모으던 한국 최고의 수출업체였다. 이 회사가 부도난 것은 98년7월1일로 지금으로부터 거의 2년전의 일이다. 문민 정부 시절 경남고 인맥을 내세워 무리한 사업확장을 펼치던 것이 화근이었다. 당시 모기업인 한일합섬을 중심으로 전체 매출이 기껏 2조원 안팎이던 한일이 자신보다 덩치가 큰 우성그룹을 인수하려고 촉수를 뻗쳤던 것은 무모한 확장경영의 대표적인 예. 우성 인수가 무산된지 얼마 안돼 우리나라가 IMF관리체제로 들어가자 한일은 바로 휘청거렸다. 특히 수출유전스를 1억달러 가량 사용하고 있던 한일합섬은 외환위기로 환율이 급등하자 환차손의 직격탄을 맞았다. 1달러당 800원에 빌렸던 것을 1600원이상으로 갚아야 했기 때문이다. 부채비율이 600~700%에 이르던 한일은 급기야 정부의 퇴출기업 명단에까지 포함됐다. "법정관리 신청이라니, 그런 소리는 내앞에서 다시 꺼내지 마라" 부도가 나기 한달전쯤 한일합섬의 자금담당 실무자들이 김 전회장에게 법정관리를 준비하자는 말을 어렵게 꺼냈지만 돌아오는 것은 역정 뿐이었다. 하지만 이 때부터 실무자들은 몰래 법정관리 신청을 위한 서류준비를 시작했다. 이 작업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는 "자금 담당자를 중심으로 일상 업무가 끝나는 저녁 시각부터 경영진 몰래 숨어서 일을 했다"며 "회사를 살리기 위해선 법정관리로 갈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실제 며칠 뒤 한일은 정부의 퇴출기업 명단에 포함되면서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황에 빠져들었고 마침내 98년7월1일 도산했다. 당시에는 불만이 없지 않았다고 한다. 한 관계자는 "김영삼 정권과 관계가 가까운 대표적인 기업으로 알려지면서 "손 볼 기업"으로 찍혀 부도처리됐다는 식의 서운한 감정이 자리하고 있었다"며 "얼마뒤 우리가 법정관리절차를 밟는데 비해 고합이 워크아웃에 들어간 것을 비교하면 더 그랬다"고 술회했다. ◇되살아나는 회사 분위기=지난2월말 법정관리 인가결정으로 일단 채무상환이 유예받게 되자 남 탓을 하는 목소리도 가라앉았다. 회사정리계획안에서 당시 확정된 채권액은 무려 2조3천183억원. 이중 주채무는 7357억원이었고 계열사 보증채무와 건설사업과 관련한 분양채무 등이 나머지 대부분이었다. 한일은 확정 채무중 보증채무를 100% 면제를 받았다. 대신 7개나 되던 자회사의 지분을 내놔야 했다. 주채무 7357억원가운데 담보채권 5590억원은 전액 상환키로 하는 한편 나머지 정리채권은 은행이 70%를 출자로 전환하며 30%인 1703억원(원리금 포함)만 상환하는 조건을 부여받았다. 모두 7293억원 및 이자를 10년내 갚으면 법정관리체제에서 졸업하는 것이다. 이처럼 은행 등 채권단의 협조가 있자 곧 좋은 징조가 나타났다. 첫째 한일합섬의 사업근거지인 마산 지역 주민들이 한일을 돕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일은 마산 도심에 위치한 총 13만평에 달하는 공장 부지중 일부에 아파트 단지를 조성키로 하고 , 올 7월초 664세대를 분양했다. 당시 주채권은행인 한빛은행도 요즘처럼 건설경기가 좋지 않은 시기에 분양율이 70%만 되어도 다행이라 할 만큼 리스크가 큰 도전이었다. 하지만 마산 시민들이 적극 참여한 덕분에 1차 분양에서 90%가 넘는 분양율을 올리는데 성공했다. 분양대금으로 742억원이 확보된 셈이다. 한일은 2006년까지 이 지역에 모두 4880세대를 분양, 7458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이중 2827억원의 자금을 회사로 유입시킨다는 목표 달성에 최선을 다한다는 각오다. 건설사업 확대와 함께 신인견 섬유인 "코셀(COCEL)"의 사업화도 한일이 사운을 걸고 추진하는 사업이다. 이 섬유는 93년 한국과학기술원(KIST)의 이화섬 박사팀이 세계에서 3번째로 개발하는데 성공, 95년부터 한일합섬과 상업화를 추진했던 신섬유다. 한일은 현재 마산공장에 연산 60톤짜리의 파일럿 공장을 가동, 여기서 생산된 원면으로 방적, 제직 및 염색가공을 거쳐 후가공 업체들을 통해 제품화하고 있는데 성공할 경우 영업이익률이 무려 30%나 되는 기대주다. 이 같은 시험운영과 함께 모두 90억원을 들여 하루생산량 7.5톤 규모의 1단계 생산공장건설을 착수, 내년 3월 국내 섬유업계에서 처음으로 정상 가동에 들어갈 계획이다. 이어 2004년까지 단계적으로 증설, 2단계는 하루 생산량 30톤, 3단계도 30톤 등 모두 800억원을 투입해 총 하루생산량 67.5톤 규모로 공장을 확대, 연간 850억원의 매출을 올린다는 목표다. 한일은 이밖에도 연평균 115만달러에 이르는 대북경협사업을 더욱 확대키 위해 기술을 전수하고 유휴공장 이전 등 사업 확대를 모색하고 있다. 이를 위해 8월중 실무회담을 목적으로 평양 방문도 추진중이다. 백 차장은 "4500억원 정도(97년)이던 매출액이 지금은 4000억원정도로 줄어 들었지만 올해 64억원의 영업이익을 예상하고 있으며 건설사업, 신인견 섬유의 사업화가 성공하면 회사 실적은 급속도로 호전될 것"이라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한일은 무엇보다 부도후 한푼의 신규자금도 은행으로부터 지원받지 않은 채 자체 자금으로 사업을 수행, 은행권의 도움으로 연명하는 부실기업들과 대조를 보이고 있다.
2000.08.06 I 문주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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