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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百, 현대어린이책미술관서 '바캉스보따리'전 연다
  • 현대百, 현대어린이책미술관서 '바캉스보따리'전 연다
  • [이데일리 함지현 기자]현대백화점은 판교점 5층에 위치한 어린이 대상 정부등록 1종 미술관 ‘현대어린이책미술관’에서 8월 29일까지 ‘바캉스보따리’ 전시를 연다고 30일 밝혔다.(사진=현대백화점)현대백화점에 따르면 이번 바캉스보따리 전시에는 신동준·강혜숙·이수지·정진호·서현 등 한국을 대표하는 그림책 작가 11명으로 구성한 아티스트 북 그룹 ‘바캉스 프로젝트’가 옛 이야기를 재해석해 내놓은 그림 작품 200여 점을 선보인다.현대어린이책미술관은 안전한 전시 관람을 위해 체온 체크와 출입명부 작성을 의무화하고, 매시간 단위 소독을 진행하는 등 방역을 강화해 운영할 예정이다. 전시 관람료는 6000원이다.특히, 이번 전시는 별도의 온라인 전시 홈페이지를 운영해, 미술관을 직접 방문하지 않고 무료로 가상현실을 통해 전시를 체험할 수 있는 ‘VR(가상현실) 미술관 투어’ 서비스를 제공한다.또한 온라인 전시 홈페이지에서는 아동들이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체험 활동을 운영한다. 대표적인 체험활동은 한 명씩 이야기의 한 장면을 그려 그림책을 완성하는 ‘그림 이야기 릴레이’와 작가들이 작품으로 표현했던 도깨비·용왕·초가집 등 옛 이야기 속 소재를 직접 그려보는 ‘보따리 속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등이다. 여기에 다음달 중으로 전시된 작품을 모바일 게임처럼 즐길 수 있는 ‘인터랙티브 아트’ 콘텐츠도 추가로 선보일 예정이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이번 전시는 ‘위드 코로나’ 상황에서도 아이들이 집에서도 안전하게 전시를 접할 수 있도록 기존 전시보다 온라인 콘텐츠를 확대했다”며 “앞으로도 어린이들이 어디에서나 자유롭게 문화·예술을 접할 수 있도록 다양한 콘텐츠를 선보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2021.04.30 I 함지현 기자
<11>海보지 않고 어찌 알리오
  • [손태호의 그림&스토리]<11>海보지 않고 어찌 알리오
  • 조선 ‘어해도’ 분야에서 일인자로 꼽히는 장한종이 그린 ‘물고기’(연도미상). 복사꽃 떨어진 맑은 물속에서 율동미를 뽐내는 ‘쏘가리’를 포착했다. 글공부에 매진하고 입신출세해 ‘부귀유여’를 바라는 길상화로 그렸지만, 맑은 푸른톤의 산뜻한 색감 덕에 감상화로서도 손색이 없다. 종이에 수묵담채, 25.6×29.4㎝,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혹독한 세상살이에 그림이 무슨 대수냐고 했습니다. 쫓기는 일상에 미술이 무슨 소용이냐고 했습니다. 옛 그림이고 한국미술이라면 더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는 일을 돌아보면 말입니다. 치열하지 않은 순간이 어디 있었고, 위태롭지 않은 시대가 어디 있었습니까. 한국미술은 그 척박한 세월을 함께 견뎌온 지혜였고 부단히 곧추세운 용기였습니다. 옛 그림으로 세태를 읽고 나를 세우는 법을 일러주는 손태호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조선부터 근현대까지 시공을 넘나들며, 시대와 호흡한 삶, 역사와 소통한 현장에서 풀어낼 ‘한국미술로 엿보는 세상이야기’ ‘한국미술로 비추는 사람이야기’입니다. 때론 따뜻한 위로로 때론 따가운 죽비로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손태호 미술평론가] 며칠 전 코로나19 유행 이후 처음으로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제목은 ‘자산어보’(玆山魚譜). 평소 다산 정약용(1762∼1836)과 그 형제들에 대해 존경심을 가지고 있던 터라 영화는 반갑기까지 했습니다. 정약용을 제외하곤 그의 형들이 역사적으로 크게 주목받지 못한 점은 늘 안타까웠고요. 영화는 정약용 형제 중 큰형인 정약전이 주인공입니다. 정약용은 아버지 정재원과 어머니 윤씨 부인 사이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삼형제 모두 어릴 적부터 글공부에 뛰어난 천재들이었습니다. 정조 사후 신유년 천주교 박해로 둘째 형 정약종은 순교했고 정조가 아끼던 정약전과 정약용은 간신히 목숨만 건져 형은 흑산도, 동생은 강진으로 유배를 떠납니다. ‘자산어보’는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유배생활하면서 그곳 청년어부 창대와 주민들의 도움으로 집필한 조선시대판 해양생물백과사전입니다. 실제로 ‘자산어보’는 흑산도 근해에 서식하는 어류·해조류 등 거의 모든 해양생물을 다루고 있습니다. 정약전이 원래 ‘자산어보’를 완성하기 전 구상한 책은 그림을 포함한 ‘해족도설’(海族圖說)이었으나 이 소식을 들은 정약용이 문자 우위 시대 환경에 맞게 그림을 삽입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아마도 당대 유학자들에게 정약전이 쓸데없는 책을 썼다는 비아냥을 들을까 우려했던 모양입니다. 결국 최종 완성한 책은 그림이 사라지고 글로만 정리된 ‘자산어보’입니다. 만약 그림까지 삽입했다면 진정한 해양생물도감으로 인정받았을 텐데 조금 아쉬운 부분입니다. 아마 이는 조선시대 화가들이 실용적인 목적이 아닌 감상용으로 물고기나 게 등 수중생물을 그린 ‘어해도’를 많이 남겼던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겁니다. 말이 나온 김에, 아쉬움도 달랠 겸, 그중 조선후기 화원 옥산 장한종(1768∼1815)이 그린 ‘물고기’를 한번 살펴볼까 합니다. ◇‘자산어보’에서 그림이 빠진 까닭은…수초 사이로 세 마리의 물고기가 아래 사선 방향으로 헤엄치는 모습이 보입니다. 위로는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한 마리가 몸을 꺾으며 방향을 바꾸고 있습니다. 엷은 파란색으로 물속을 표현했는데 수초와 맨 아래 물고기는 흐리게 묘사해 같은 수중에서도 깊이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물에는 복사꽃이 떨어져 있어 분홍빛과 푸른물이 어울리며 맑고 산뜻한 분위기를 냅니다. 일반적으로 물고기는 많은 알을 낳기에 다산을 상징하고 어(魚)는 넉넉하다는 의미의 여(餘)와 중국어 발음이 같아 여유와 풍요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작품 속 물고기의 어종은 무엇일까요. 모양과 형태로 볼 때 ‘쏘가리’입니다. 조선의 물고기 그림은 어종에 따라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합니다. 쏘가리는 한자어로 ‘궐어’인데 여기서 궐이 궁궐의 궐과 발음이 같아 대궐에 입성해 관리로 출세하는 입신양명의 뜻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조석진·이한복·허련 등 조선후기 화가들은 쏘가리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백과사전인 이수광(1563∼1628)의 ‘지봉유설’(芝峰類說·1614)에는 궐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쏘가리는 곧 지금의 금린어(錦鱗魚)다. … 이는 천자가 좋아하는 것이어서 천자어라고 불리기도 한다. 상고하건대 ‘궐’은 ‘괘’다. 세상에서 이를 입성으로 읽어 ‘궐’이라 하는 것은 잘못이다”(‘지봉유설’ 중). 이수광은 쏘가리의 궐이 원래는 ‘괘’인데 우리나라에 궐로 잘못 전해졌음을 지적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쏘가리 그림이 입신출세의 상징으로 그려진 것은 중국과 일본에는 없는 우리나라만의 고유한 해석입니다. 또 물고기 그림이 유독 세 마리를 그린 경우가 많은데 이는 ‘삼여도’의 의미로 세 가지의 여유만 있으면 글공부하는 데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그 세 가지 여유는 ‘하루의 남는 시간인 밤’ ‘일년의 남는 시간인 겨울’ ‘맑은 날의 나머지 시간인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을 의미합니다. 결국 장한종의 ‘물고기’는 삼여를 잘 활용한 것으로, 글공부에 매진하고 입신출세해 부귀유여를 바라는 길상화인 것입니다. 많은 화가들이 그린 전형적인 작품입니다. 다만 장한종은 복사꽃을 함께 그려 당나라 시인 장지화의 ‘어가자’(漁歌子)의 글귀인 ‘도화유수궐어비’(복숭아꽃 흐르는 물에 쏘가리가 살찐다)를 연상케 해 그림의 운치를 더했습니다. ◇끊임없는 관찰로 도달한 조선 ‘어해도 일인자’ 안동 장씨 화원 집안 출신인 장한종은 1795년(정조 19년) ‘원행을묘정리의궤’ 등 많은 의궤에 참여한 뛰어난 도화서 화원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어해도의 독보적인 길을 개척한, 조선 제일의 ‘어해도 화가’란 칭송을 들었습니다. 전통적인 어해도 화풍을 계승해 길상화뿐 아니라 소라, 조개, 자라, 게, 가오리 등 다양한 수중생물을 잘 그렸기 때문입니다. 특히 가오리 그림은 오직 장한종만이 그려 조선시대 ‘어해도’를 더욱 풍성하게 했습니다. 장한종의 ‘게와 가오리’(연도미상). 바다생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해 엮은 8폭의 ‘어개화첩’ 중 둘째 면에 실었다. 장한종만이 그렸다는 ‘가오리’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비단에 채색, 24.6×30㎝,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장한종의 다른 작품 한 점을 더 볼까요. 여러 바다생물을 그린 8폭 ‘어개화첩’ 중 둘째 면에 수록한 ‘게와 가오리’입니다. 사선의 대각선으로 나눈 화면의 아래에는 게가 바닥을 기고 있고, 위에는 가오리가 헤엄치고 있습니다. 게(蟹)는 딱딱한 등껍질[甲]을 가지고 있기에 과거에서 갑과로 합격하는 장원급제의 ‘갑’으로 읽힙니다. 이 그림 속 게는 우리가 일명 ‘꽃게’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림처럼 등딱지 양쪽으로 뿔처럼 나온 것이 꼬챙이 같다고 해서 ‘관해’(串蟹)라고 부르는데 ‘관’은 바다로 삐죽 나온 지형을 뜻하는 ‘곶’으로 ‘관해’를 우리나라 말로 하면 ‘곶게’가 됩니다. 이 ‘곶게’가 변형돼 우리가 현재 쓰는 말인 ‘꽃게’가 된 것입니다. 가오리는 생김새가 홍어와 비슷하지만 또 다릅니다. 홍어의 몸통은 마름모 형태의 꼭짓점이 분명하고 가오리는 전반적으로 둥근 형태를 가졌습니다. 그림 속 물고기는 홍어가 아니라 가오리가 분명합니다. 배 쪽으로 입이 있고 눈처럼 보이는 두 구멍은 코입니다. 눈은 반대쪽 등에 따로 있습니다. 꽃게가 갑자기 가오리와 마주쳐 놀랐는지 눈이 튀어나오고 집게발까지 쳐들었습니다. 가오리도 게를 보고 당황했는지 몸과 꼬리를 부르르 떨고 있습니다. 장한종은 게와 가오리 둘 다 사실적으로 정확하게 묘사했습니다. 이런 세밀한 묘사는 오랫동안 수중생물을 관찰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조선후기 학자 유재건(1793∼1880)이 쓴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은 장한종에 대해 이렇게 전합니다. “젊어서부터 숭어, 잉어, 게, 자라 등속을 사다가 비늘과 껍질을 자세히 살펴보고 따라 그렸다. 완성될 때마다 그림이 사물과 닮았음에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외국풍습과 물정 담은 ‘표해시말’혹독한 유배생활에서 나온 실용서 ‘자산어보’는 고답적이고 관념적인 성리학에만 매달려온 정약전 자신을 포함한 조선 유학자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입니다. 정약전은 ‘표해시말’(漂海始末)이란 글도 남겼는데, 소흑산도 홍어장수 문순득이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유구국(오키나와), 필리핀, 마카오, 광저우, 베이징 등 세계 여러 곳을 거쳐 다시 흑산도로 돌아온 표류기입니다. 정약전은 이런 외국 풍습과 물정에 대한 정보를 중요하게 생각해 문순득을 직접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표해시말’을 남겼습니다. 덕분에 오늘날 당시 그 지역에 대한 정보와 조선인들의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정약전을 비롯한 실학자들의 이런 실사구시가 당시 조선의 주류였다면, 19세기 제국주의가 부상하는 세계 동향을 좀 더 빨리 알아챌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치욕스러운 일제강점기도 겪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깨어 있는 지성은 퇴색하지 않는 법이라 했습니다. 지식인과 관료라면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하며 새로운 물결에 민감하고 개방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시대에 분노하고 권력을 비판하는 지식인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에 대한 기대, 세상에 대한 낙관이 빠져 있다면 분노는 쓸모가 없습니다. 정약전이 창대와 문순득을 넉넉한 애정으로 대하고, 장현종이 오랜 관찰과 관심으로 물고기를 대했듯이 말입니다. 실사구시는 바로 내 앞의 대상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했던 것입니다. ※ 자산어보 玆山魚譜 정약전이 16년 귀양살이 중에 집필한 방대한 ‘어류학서’다. 전라 흑산도 근해를 헤집고 다니며 수산동식물 155종에 대한 명칭·분포·형태·습성 등을 낱낱이 파악하고 기록한 뒤 ‘자산어보’란 제목을 붙였다. 완성을 본 건 1814년(순조 14년)이다. ‘자산’은 ‘흑산’의 다른 말이다. 가족에게 편지를 보낼 때마다 음침하고 어두운 ‘흑’산이란 표현 대신 쓴 자산을 제명에 사용했다고 서두에 밝히고 있다. “섬사람을 널리 심방하다가 초목과 조어를 이목에 접하는 대로 모두 세찰하고 침사해 그 성리를 터득한 장덕순(일명 창대)의 말이 믿을 만해 그를 맞아들여 연구하고 서차를 강구해 책을 완성했다”는 내용도 써뒀다. 24.8×17.7㎝의 크기에 매면 10행, 1행 21자로 된 3권을 묶어 1책으로 만들었다. 1권은 석수어·치어·노어·청어 등의 ‘인류’, 2권은 분어·해점어·돈어·오적어·장어 등의 ‘무린류’와 해구·해·복·합·감 등의 ‘개류’, 3권은 해충·해금·해수·해초 등의 ‘잡류’로 구성했다. 후대에 특히 주목을 받은 것은 청어와 고등어의 회유·분포에 관한 기록이다. 현재 동해와 서해에 회유하는 청어·고등어의 실태를 당시와 비교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로 꼽힌다. 필사본이 여러 곳에 소장돼 있다. 국립중앙도서관과 서울대·고려대·영남대 도서관, 서울대 상백문고 등. 다만 완사본은 하나도 없다. 1943년 여러 사본을 대조·보충해 새로 편성한 뒤 한글본을 만들었다. △손태호 미술평론가는… 30대 중반 도망치고 싶던 때가 있었다. 세상살이가 버겁고 고달파서. 막막하던 그 시절, 늘 그렇듯 삶의 퍼즐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풀렸다. 그즈음 눈에 띈 옛 그림이 우연이었고 그 흔적을 좇아 미술관·고서화점 등을 누비고 다닌 게 필연이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찍힌 인장 ‘장무상망’(長毋相忘·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을 보고 어째서 ‘그림이 삶, 삶이 그림’이라 하는지 깨달았다.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과학도의 길은 그날로 접혔다. 동국대 대학원 미술학과로 진학해 석·박사학위를 받은 뒤 한국미술 전문가가 됐다. 조선회화·불교미술에 기둥을 세우고 그 안에 스민 상징 같은 ‘옛 그림’은 거울로 곁에 뒀다. 지금은 한국문화예술조형연구소 학술이사로 있으면서 이론·현장을 연결한 연구, 인물·지리·역사를 융합한 글과 강연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 ‘조선불상의 탄생’(한국학술정보·2020), ‘다시 활시위를 당기다’(아트북스·2017), ‘나를 세우는 옛 그림’(아트북스·2012) 등이 있다.
2021.04.23 I 오현주 기자
<7>미나리 같은 아낙네도 "밥이 하늘이다"
  • [손태호의 그림&스토리]<7>미나리 같은 아낙네도 "밥이 하늘이다"
  • 윤두서가 그린 ‘나물 캐기’. 정확한 제작시기는 전해지지 않고 18세기 초로만 알려졌다. ‘채애도’(採艾圖)란 이름으로 ‘윤씨가보’에 전한다. 모시에 먹으로 그린 그림으로 30.4×25㎝ 크기다. 해남 윤씨 종가가 소장하고 있다.혹독한 세상살이에 그림이 무슨 대수냐고 했습니다. 쫓기는 일상에 미술이 무슨 소용이냐고 했습니다. 옛 그림이고 한국미술이라면 더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는 일을 돌아보면 말입니다. 치열하지 않은 순간이 어디 있었고, 위태롭지 않은 시대가 어디 있었습니까. 한국미술은 그 척박한 세월을 함께 견뎌온 지혜였고 부단히 곧추세운 용기였습니다. 옛 그림으로 세태를 읽고 나를 세우는 법을 일러주는 손태호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조선부터 근현대까지 시공을 넘나들며, 시대와 호흡한 삶, 역사와 소통한 현장에서 풀어낼 ‘한국미술로 엿보는 세상이야기’ ‘한국미술로 비추는 사람이야기’입니다. 때론 따뜻한 위로로 때론 따가운 죽비로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손태호 미술평론가] 봄의 향기가 진동합니다. 봄에 피어나는 향기는 봄꽃 때문이기도 하지만 봄나물 때문이기도 합니다. 파릇하고 여려 보이지만 얼어붙은 동토를 뚫고 나온 봄나물이 퍼트리는 진한 향은 그 어떤 식재료보다 매혹적입니다. 이맘때가 되면 어머니는 직접 담근 된장으로 쑥국을 끓여주시곤 했습니다. 냉이나물과 고들빼기김치도 봄 식탁에서 빠지지 않았습니다. 이뿐인가요. 쑥부쟁이, 소루쟁이, 민들레, 참죽순 등등. 이런 봄나물은 모두 강인한 생명력을 품은 먹거리라 춘곤증으로 나른한 시기에 제대로 효능을 발휘합니다. 원기를 회복시키고 면역력을 높여줍니다. 이렇게 산과 들에서 파릇한 나물들이 올라오기 시작하면 떠오르는 그림이 있습니다. ‘나물 캐기’를 주제로 한 그림들입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을 꼽으라면, 단연 공재 윤두서(1668∼1715)의 ‘나물 캐기’라 할 겁니다. 윤두서는 ‘자화상’으로 유명한 조선중기 선비화가입니다. ◇노동하는 여성의 고단함…남의 집 여인 뒷모습 그린 파격도작품은 봄날에 나물 캐는 두 아낙네를 그리고 있습니다. 나물 캐는 그림이란 뜻으로 ‘채애도’(採艾圖)라고도 합니다. 왼쪽 여인은 한 손에 다래끼를, 다른 손에는 칼을 들고 허리를 굽혀 막 나물을 캐려는 모습입니다. 오른쪽 여인은 캘 나물을 찾는 듯 뒤를 돌아보고 있습니다. 두 여인 모두 허리까지 내려온 저고리를 입었고 치마는 거추장스러운 듯 무릎 위까지 걷어 올렸습니다. 또 머리에는 수건을 썼는데, 조선후기 문인화가이자 평론가로 활동한 이하곤(1677∼1724)은 이 수건을 호남의 풍속으로 소개하며 “남쪽 지방에선 유독 머리에 수건 두르기를 좋아한다”란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런 수건은 지금도 농가에서 일하는 여성에게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림 속 배경도 한번 볼까요. 산은 산등성이를 윤곽선만으로 간결하게 표현했고 아낙네들이 서 있는 비탈은 풀과 자갈이 조금일 뿐 역시 간결하게 표현했습니다. 다만 비탈의 경사가 매우 가팔라 조금은 위태로워 보입니다. 윤두서는 이 가파른 경사를 통해 여인들의 고단하고 위태로운 삶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왼쪽 상단이 조금 허전했던지 새 한 마리 날려 두고 ‘방형백문’(方形白文)으로 호인 ‘공재’와 자인 ‘효언’을 낙관했습니다. 가파른 산등성이와 비탈로 불안정해진 구도는 오른쪽 여인이 고개를 뒤로 돌린 덕에 적잖이 해소가 됐습니다. 왼쪽으로 쏠리는 무게를 덜어낸 것입니다. 윤두서는 ‘나물 캐기’ 외에도 ‘짚신삼기’ ‘경전목우도’ 등을 그려 김홍도·조영석보다 훨씬 이전부터 풍속화를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사실 ‘나물 캐기’는 민가의 생활상을 묘사한 풍속화의 개척을 넘어서 당시로선 파격적인 소재를 다룬 작품입니다. 남녀유별이 엄격하던 시대에 선비가 아녀자의 뒷모습을 그린 점은 매우 도전적인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노동하는 여성, 여성노동의 현장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선비화가 윤두서가 알고 느낀 노동과 땀의 가치라고 해도 무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질끈 동여맨 수건, 야무지게 걷은 소매…‘여성의 땀’을 안 조부와 손자 해남 윤씨의 이런 화풍은 윤두서의 후대에도 이어졌습니다. 손자 윤용(1708∼1740)은 ‘협롱채춘’(挾籠採春)을 남겼는데 ‘나물 바구니를 끼고 봄을 캐다’란 뜻입니다. 배경 없이 넓은 화면의 아래쪽에만 그려져 혹시 미완성이 아닐까 의문도 들지만 낙관까지 마무리한 것으로 봐선 완성품입니다. 화면에는 오직 뒷모습의 여인 한 사람만 있습니다. 여인은 선 채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머리에는 흰 누비수건을 쓰고 뒤로 단단히 묶었는데 수건 아래로 머리카락이 살짝 보입니다. 왼손은 농기구를 들고 오른쪽 어깨는 망태기를 끼고 섰습니다. 농기구는 언뜻 낫처럼 보이지만 낫이 아닌 호미입니다. 예전에는 그림처럼 목이 긴 호미도 많이 사용했습니다. 최근 세계 최대 온라인쇼핑몰 아마존에서 우리나라 영주대장간에서 제작한 호미가 돌풍을 일으켰는데, 그 호미도 그림처럼 목이 깁니다. 정원을 꾸미는 도구로 고작 꽃삽을 사용한 외국에서 한국의 호미를 사용해 본 이들은 “어메이징”과 “원더플”을 외쳤다고 합니다. 윤용의 여인 역시 소매를 접어 올렸고 치맛자락은 위로 올려 허리춤에 찔러 넣었습니다. 그 아래로 속바지를 입었는데 속바지도 무릎 아래까지 올려 단단히 묶은 상태입니다. 여성치고는 단단한 종아리 근육이 보이고, 발에는 짚신을 신었습니다. 주위에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파릇파릇한 봄나물을 놔두고 여인은 허리를 세운 채 오른쪽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과연 여인은 어디를 보고 있을까요. 함께 나온 아이를 찾는 걸까요. 어디선가 새소리를 들었을까요. 아니면 앞으로 더 일해야 할 넓은 땅을 봤던 걸까요. 여러 가지 상상을 불러일으키지만 분명한 것은 화가는 여인의 강인함을 표현하고 싶어했다는 것입니다. 머리에 단단히 묶은 수건, 야무지게 들고 있는 날 선 호미, 씩씩한 옷차림, 단단한 종아리 근육 등이 어떤 힘겨움도 견뎌내겠다는 당찬 여성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300여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화면 밖으로 뿜어내면서 말이지요. 윤용이 그린 ‘협롱채춘’(挾籠採春·18세기). 나물 바구니를 끼고 봄을 캔다는 뜻이다. 주로 산수화를 그린 그가 남긴 유일한 풍속화로, 윤두서의 화법을 잘 계승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종이에 그린 수묵화로 27.5×21.2㎝ 크기다. 간송미술관 소장.한국에서 여성의 삶은 지금도 힘들지만 조선후기에는 훨씬 고단했습니다. 엄격한 성리학의 틀로 여성의 삶을 옭매었고 가정경제까지 책임져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서민 여성들은 끝도 없는 노동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여기에다 눈물 쏟게 하는 시집살이, 빨래, 바느질, 육아, 남편수발, 제사 준비까지 한시도 쉴 틈이 없었습니다. 들밥을 준비하는 것도 여성의 몫이었습니다. 하지만 먹을 것은 늘 부족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니 먹을거리가 부족한 보릿고개에 땅을 뚫고 올라오는 봄나물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렇게 나물을 캐던 중 잠시 허리를 펴 보지만 아직 더 캐야 할 봄나물만큼 어깨는 천근만근입니다. 힘들다고 호미를 놓을 수는 있었겠습니까. 주린 배를 움켜쥐고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들 생각에 호미를 다잡았을 겁니다. 아낙이 캐는 것은 나물만이 아닙니다. 가족의 삶과 희망도 함께 캤습니다. 아무리 삶이 고단해도 내 아이들만은 지키겠다는 의지가 솟아오릅니다. 그런 모습을 윤씨 가문 화가들은 멀리서 지켜보고 마음에 담아 그렸습니다. ◇윤두서의 애민정신, 외증손자 정약용에 이어져 조선시대 호남 최고 금수저 집안 장손인 윤두서는 어릴 적부터 따뜻하고 아름다움 심성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노비의 자식이 무조건 노비가 되는 것은 부당하다고 여겼고, 꼬박꼬박 노비의 이름을 불러줬으며, 노비문서를 태워버리기도 했습니다. 어머니가 받아오라는 빚 문서도 찢어버렸고 대규모 기근이 들자 가문의 나무를 땔감으로 바닷물을 이용한 소금을 생산해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가문의 정신은 직계자손뿐 아니라 외증손자인 정약용에게도 영향을 끼칩니다. 정약용의 애민정신은 이런 영향과 무관치 않을 것입니다. 해월 최시형(1827∼1898)은 “밥 짓고 밥 먹는 일이 가장 으뜸가는 제사”라 했으며 민주화 운동가이자 생명운동가인 무위당 장일순(1928∼1994)은 ‘밥이 곧 하늘’이라 했습니다. 코로나19로 서민의 삶이 너무 힘겨워졌습니다. 소상공인과 자영업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정부에서 이러저러한 지원책을 마련하곤 있지만 그나마도 한쪽에서는 포퓰리즘이네 세금낭비네 하며 비판하고 있습니다. 서민의 삶이 다 무너진 다음 다시 회복시키려면 지금보다 몇 배의 비용이 발생한다는 지적을 먼저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건강하게 잘 먹는 것만으로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용기가 생깁니다. 그래서 밥이 하느님이고 부처님입니다. ‘나물 캐기’를 통해 고단했던 옛 시절을 생각하며, 코로나19가 만든 현대판 춘궁기를 슬기롭게 잘 이겨나가길 응원해봅니다. ※ 해남 윤씨 전라남도 해남군의 토착 성씨다. 강진에 거주하던 윤효정(1476∼1543)이 해남 정씨 집안의 사위가 돼 해남으로 이주하면서 정착했다. 이후 경연검토관과 춘추관기사관 등을 지낸 윤구(1495∼?), 경상도관찰사와 예조참판 등을 역임한 윤의중(1524∼1590), 경상도관찰사와 예조참판 등을 지낸 윤광계(1559∼?)를 비롯해, 윤선도(1587∼1671), 윤두서(1668∼1715) 등 걸출한 인물을 배출해 당시 해남 기반의 명문사족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연시조 ‘어부사시사’(1651)의 저자로, 시가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혔던 윤선도는 해남 윤씨 중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윤선도의 출현으로 크게 빛을 낸 가문은 윤선도의 증손인 윤두서에 이르러 다시 천재적인 예술혼을 꽃피우며 명성을 높인다. 당쟁으로 인한 시대풍파를 겪으며 일찌감치 벼슬길을 포기하고 화가로만 산 윤두서는 시·서·화 모두에 능했다. 자화상·풍속화·사생화는 물론, 남종화풍 산수화, 화론과 서법, 전각과 지도 등 다방면에 재능을 발휘했다. 작품에 농사나 실생활에 대한 관심을 많이 표현한 것은 윤선도 이후 집안의 자부심이 된 예술을 통해 현실참여 의지를 내보인 것으로 보인다. 뒤이어 아들 윤덕희(1685∼1766)와 손자 윤용(1708∼1740)까지 3대에 걸친 가문의 예술혼은 조선 문인화의 맥을 잇는 중추적 역할을 했다.
2021.03.26 I 오현주 기자
  • [미리보는 이데일리 신문] 의혹 넘치는데 고작 7명 추가 적발…"국민 믿겠나"
  • [이데일리 김유림 기자] 다음은 3월 12일자 이데일리 신문 주요 뉴스다.△1면-의혹 넘치는데 고작 7명 추가 적발…“국민 믿겠나”-공모주 중복청약, 5월 20일부터 안 된다-쿠팡, 뉴욕증시 데뷔…韓 6대 유통사 시총의 3배-吳·安 단일화 합의 17-18일 여론조사-무너진 공직사회 기강, 무관용 일벌백계로 다스려야-1000조원 넘은 은행권 가계빚, 선제 대비책 시급하다△줌인&-기관·노조 업은 박찬구, 고배당 앞세운 박철완…주총 표대결 주목-中에 따라잡힌 韓 과학기술…생명·보건의료 추월당해△국민 의혹만 키운 신도시 투기 조사-한계 드러낸 1차조사…“퇴직자까지 범위 넓히고 계좌추적 서둘러야”-LH사태, 토지 이어 주택투기 논란으로 확산되나-여야 “의원 300명도 전수조사” 한목소리…실효성은 의문△국민 의혹만 키운 신도시 투기 조사-해체수준의 혁신 거론된 LH…주거복지 등 사업분야별로 분리되나-허술한 농지법…제도개선 요구 목소리 거세-“이제 아이들에게 부끄러운 직장돼”…LH직원들 침통△쿠팡 뉴욕증권거래소 상장-시총 72조 ‘유니콘 1호’…뉴욕증권거래소에 태극기 걸었다-예상 웃돈 공모가…김범석 7조·손정의 23.7조 잭팟-“아마존보다 비싼 쿠팡”…커지는 고평가 논란△정치-“檢 개혁 단계적으로” 중도 공략/“安과 이르면 12일 비전 발표회”/“文 부동산정책 안착” 선명 강조/“吳 후보와는 손흥민-케인 사이”-범야권 차기주자 우뚝 선 尹…돌풍 이어갈까, 찻잔 속 태풍 그칠까-美 국무·국방장관 방한…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재가동하나-4·7재·보선은 ‘정권심판’ 무대될 것△국제-中, 홍콩 선거제 개편 ‘반대 0표’…美 추가 제재 ‘새 카드’ 뽑을까-미국 월가 ‘新채권왕’ 건들락의 경고 “인플레 4% 넘고…나스닥 위험 수준”-‘2.1조 부양안’ 통과에 기분 UP?…바이든, 내친김에 인프라법안도 강행△경제-빚내 집 사는 2030 증가…韓경제 새 뇌관으로-‘제2의 LH 발본색원’…공공기관 윤리평가 강화-서울시립미술관 인근에 수소충전소 설치△금융-중소 손보사 車보험료 인상 움직임-뛰어라! 보험료가 낮아질지니-폐쇄절차 강화에도…은행 점포 올 들어 31곳 사라져△산업&기업-SK “과도한 합의금 수용 요구”…LG “ITC 결정 먼저 인정해야”-반도체 ‘쇼티지 쇼크’ 전방위 확산-SM상선, 올해 두 달 만에 작년 영업이익 72% 달성-쌍용차 한 고비 넘겼지만…P플랜 ‘산 넘어 산’-현대차 새 다목적차량 ‘스타리아’ 첫 공개-반도체 ‘쇼티지 쇼크’ 전방위 확산△산업·바이오-‘담합·폭리 의혹’ 휴대폰 할부수수료, 낮출 방법 있다-SK바이오사이언스 “세계 백신왕이 목표”-“백문이 불어일견…보안 취약점, 직접 해킹해 보여준다”△소비자생활-김봉진 우아한형제들 의장 또 ‘통큰 나눔’ 직원 1인 평균 5000만원어치 주식 지급-연봉킹은 KT&G…일당왕은 롯데제과-유재석 vs 정우성…1400억 비빔면 시장 쟁탈전△Auto&Life-국내 유일 ‘LPG SUV’ 경제성에다 친환경·고효율 더-세탄의 안정적 주행성능에 SUV의 공간성까지 갖춰△손태호의 그림&스토리-빼앗긴 일상에도 봄은 옵니다△증권&마켓-최초 접수 청약만 인정…공모주 쓸어담기 방지-공모주 열풍 경험한 투자자들 ‘중복청약’ 막차에 관심 집중-국내 증시 롤러코스터 장세 보이자…안정적인 리츠 매력 쑥△증권-‘실적 상승세’ vs ‘코로나 여파 여전’…뚜레쥬르 M&A ‘동상이몽’-법원, 산후조리원 ‘동그라미’ 회생절차 개시 결정-국민연금 전문위원장 로테이션 근로자 대표가 수탁위원장 맡아△관광비즈-SNS하 듯 여행 영상보다 장소부터 호텔예약까지 앱 하나로 한번에 끝내네-코로나 시대 최고 여행지 ‘걷기 여행길’-방한 외국인 95% 줄었다△스포츠-“디섐보처럼 화끈한 장티쇼 선보이겠다”-방역 더 철저히…모든 대회 개최 노력-추신수 “경험하러 온 게 아니라 이기러왔다”-김주형 “어드레스가 가장 중요해요”-美 언론 “김광현, 2021시즌 깜짝 활약 펼칠 선수△이데일리가 만났습니다-서울 대중교통·상하수도 요금 인상, 코로나 종식 이후에나 가능할 것-32년 만에 ‘제2의 지방자치시대’ 개막…의회 입법가능 강화안 반영 안돼 아쉬워△오피니언-[목멱칼럼] 디지털 역량 강화, 공무원도 예외 없다-[기고] 스마트팩토리, 선택 아닌 필수-[기자수첩] ”동맹은 공짜가 아니다“△피플-”수술용 로봇 기술력 자신, 美·유럽시장 공략할 것“-”‘오즈의 마법사’ 같은 창국 기대해요“-IBK 저출은행, 대표이사에 서정학 기업은행 부행장 선임-신임 금융연구원장에 박종규 선임연구위원-바흐 IOC 위원장 연임 성공 ”도쿄 올림픽, 예정대로 개최“-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김정규 12대 회장 선출△사회-‘집값 정상화’ 버스 시내 누비고…”농지법이 투기 조장“ 농민들도 뿔났다-”인간 존엄성 훼손했지만 형법 근거“…피해자만 있는 형제복지원-”예방효과 입증“…‘만 65세 이상’도 AZ백신 맞는다-검찰총장추천위 구성…위원장 박상기 前 장관
2021.03.11 I 김유림 기자
<4>꽃으로도 때리지 마라
  • [손태호의 그림&스토리]<4>꽃으로도 때리지 마라
  • 김홍도가 그린 ‘서당’(18세기). ‘단원풍속도첩’에 든 풍속화 25점 중 한 점이다. 원형으로 배치한 구도, 생생한 인물표정 등이 살아있는 화면을 만들어내고 있다. 종이에 수묵담채, 27×22.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혹독한 세상살이에 그림이 무슨 대수냐고 했습니다. 쫓기는 일상에 미술이 무슨 소용이냐고 했습니다. 옛 그림이고 한국미술이라면 더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는 일을 돌아보면 말입니다. 치열하지 않은 순간이 어디 있었고, 위태롭지 않은 시대가 어디 있었습니까. 한국미술은 그 척박한 세월을 함께 견뎌온 지혜였고 부단히 곧추세운 용기였습니다. 옛 그림으로 세태를 읽고 나를 세우는 법을 일러주는 손태호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조선부터 근현대까지 시공을 넘나들며, 시대와 호흡한 삶, 역사와 소통한 현장에서 풀어낼 ‘한국미술로 엿보는 세상이야기’ ‘한국미술로 비추는 사람이야기’입니다. 때론 따뜻한 위로로 때론 따가운 죽비로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손태호 미술평론가] 새 학년 새 학기입니다. 새로운 교과서를 받고 새로운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날 기대감에 학생들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등교합니다. 지난해 코로나19로 등교하지 못한 날이 많았는데 올해는 조금씩 대면 수업을 늘려 간다니 참 다행이다 싶습니다. 아무리 온라인 수업이 괜찮다고 해도 선생님과 친구들과 어울려 공부하는 학교 수업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공부란 것은 단순한 지식전달이 아니라 선생님의 행동을 보면서 옳고 그름을 배우고,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사회성을 알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선생님 앞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상상할 때마다 떠오르는 그림이 한 점 있습니다. 단원 김홍도(1745∼1806?)의 ‘서당’입니다. 아마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거의 없을 만큼 유명한 그림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유심히 보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안다고 생각하는 작품은 꼼꼼히 감상하기보다는 스치듯이 지나치게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번 기회에 한번 제대로 들여다보면 좋을 듯싶습니다. 보면 볼수록 새로운 느낌과 감동을 주는 그림입니다. 헐렁한 유복에 검은색 허리띠를 맨 훈장님 좌우로 아홉 명의 학생이 보입니다. 이 서당에는 모두 10명의 인물이 등장하지만 훈장님과 그 앞에 돌아앉아 눈물을 닦고 있는 아이가 그림의 주인공입니다. 이 두 사람이 중심인물이기에, 훈장님의 유생관을 진하게 그려 그곳으로 먼저 눈이 가게 한 후 벼루를 거쳐 아이의 머리로 시선이 옮겨가도록 배치했습니다. 훈장님은 조선의 시골 마을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동네 서당의 지극히 평범한 모습입니다. 유생관 옆으로 머리가 삐져나왔고 수염도 다듬지 못해 덥수룩합니다. 훈장님 앞에는 서탁이 있고 그 아래에는 방금까지 아이가 읽었던 책이 놓여 있습니다. 한쪽이 접혀 있는 것으로 보아 방금까지 아이 손에 들렸던 책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 왼손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습니다. 이 아이는 왜 울고 있을까요. 아마도 서탁 앞에 높인 가늘고 탄력 있어 보이는 회초리와 연관이 있을 겁니다. 무슨 잘못을 했을까요. 단서는 바닥에 놓인 책에 있습니다. ◇강독·제술·습자로 이뤄진 서당 교육 당시 서당의 교육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주요 서책을 읽고 외우는 ‘강독’, 문장을 익히는 ‘제술’, 여러 글씨체를 익히는 ‘습자’입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과목이 강독입니다. 매일 정해진 분량을 외워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에 외우지 못하면 외울 때까지 반복을 시켰습니다. 울고 있는 아이는 그 강독이란 고개를 넘지 못했나 봅니다. 김홍도가 그린 ‘서당’ 중 그림의 주인공이라 할 ‘훈장님’과 ‘우는 아이’를 클로즈업한 디테일. 안쓰러움이 묻어나는 훈장님, 회초리를 맞기도 전에 눈물부터 보인 아이 등에서 보듯, 동그란 얼굴과 올챙이처럼 표현한 눈에 얹은 생생한 표정은 김홍도 인물 표현의 특징이다.그런데 종아리를 맞기 전일까 맞은 후일까. 오래전부터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울고 있는 아이가 회초리를 맞기 전인지 후인지가 늘 궁금했습니다. 그 궁금증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풀렸습니다. 매를 맞기 전이란 것을요. 아이의 대님이 아직 풀리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가장 확실한 이유는 훈장님을 등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 서당에서는 전날 공부한 것을 외우는 복습이 공부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때 훈장님에게 등을 보이고 돌아앉아 암기한 내용을 소리내어 외우는데, 이를 ‘배송’(背誦)이라 합니다. 어제 배운 문장을 외워보라는 훈장님의 이야기에 아이는 뒤돌아서기 직전까지 책을 봤을 겁니다. 하지만 제대로 외우지 못했고 결국 훈장님은 종아리를 걷어라 했을 겁니다. 옆에 놓인 회초리를 보니 눈물이 안 날 수 없겠지요. 그 아이를 바라보는 훈장님의 표정에도 안쓰러움이 묻어납니다. 비록 회초리를 들 수밖에 없지만 안타까움이 컸던 것입니다. 다른 아이들의 모습도 재미있습니다. 무엇인가 답을 알려주는 듯한 아이, 고소하다는 듯이 웃고 있는 아이, 갓을 썼으니 제법 나이를 먹었을 아이, 형의 옷을 입고 왔는지 헐렁한 차림의 아이 등이 모두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습니다. 조선후기의 학자 이덕무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 자신이 다섯 살부터 글공부를 시작했다고 하니 맨끝 어린 학동도 그쯤 됐을 것 같습니다. 웃고 있는 아이들은 이미 테스트를 마쳤을 것이고 책을 뒤적이는 아이들은 다음 차례에 배송을 할 것입니다. 동그란 얼굴과 올챙이처럼 표현한 눈은 김홍도 인물 표현의 특징입니다. ‘단원풍속도첩’(檀園風俗圖帖)에 실린 풍속화 중 한 점인 이 그림의 탁월함은 구성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둥그렇게 둘러앉아 자칫 답답할 수 있는 구도를, 훈장님 왼쪽과 갓 쓴 학동 사이, 또 좌측 하단에 여백으로 벌려놓아 시원스럽게 소통하도록 했습니다. 그런 효과를 높이기 위해 회초리의 방향도 그 흐름의 방향과 일치하게 그린 것입니다. 지금은 학교에서 모든 체벌을 금지하고 있지만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선생님의 회초리는 필수적인 훈육도구였습니다. 조선시대 유학자라면 달달 외웠던 ‘사서삼경’ 중 하나인 ‘서경’의 ‘순전’에는 “회초리로 교육의 형벌로 삼는다”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훈장님의 회초리는 사회로부터 인정받은 것이란 뜻입니다. ◇서양 풍속화에도 등장하는 ‘회초리’ 선생님의 체벌은 동양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서양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17세기 네덜란드 대표화가인 얀 스테인(Jan Steen·1626∼1679)이 그린 ‘마을 학교’(The Village School)는 시골 학교의 평범한 교실 풍경을 그린 작품입니다. 그림 속에서 선생님은 작은 방망이 같은 도구로 아이의 손을 때리고 있고 아이는 눈물을 훔치고 있습니다. 바닥에는 망쳐버린 시험지가 구겨진 채 내동댕이쳐져 있습니다. 다른 아이들의 시선도 맞고 있는 아이 손에 모여 있고 그 아픔을 표정으로 함께하고 있습니다. 재치 있는 화풍으로 렘브란트(1606∼1669)에 버금가는 명망을 얻은 얀 스테인은 초기에 성서의 고전적 주제로 그림을 그리다가 후기에는 개성 있는 인물화로 재미있는 작품을 많이 탄생시킨 화가입니다. 이 그림도 보는 순간 바로 어떤 상황인지는 물론 인물들의 심리까지 잘 묘사한 뛰어난 작품으로 꼽힙니다. 17세기 네덜란드 풍속화가 얀 스테인의 ‘마을 학교’(The Village School·1665). 농민이나 중산층의 생활 정경을 위트와 해학으로 그려냈던 작품들 중 하나다. 110.5×80.2㎝, 아일랜드국립미술관 소장.그런데 동서양을 막론한 그림 속에 나타난 선생님의 체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체벌은 그 선한 목적에도 불구하고 폭력적인 방식이란 점에서 자유로울 순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학교가 체벌을 금지하기로 했을 겁니다. 하지만 왕왕 들리는 현실은 아닌가 봅니다. 여전히 아이들에게 체벌 이상의 폭력이 가해지고 있다는 것인데요. 특히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서 의사표현이 부족한 어린아이에게 훈육을 빙자한 학대가 자주 발생하는가 봅니다. 교육기관뿐만 아니라 안온해야 할 가정에서조차 단순 학대를 넘어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끔찍한 뉴스도 자주 듣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김홍도가 바라는 ‘서당’의 모습은…조선시대 서당은 서원과 달리 신분이 낮은 아이들도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양반의 아이들과 평민의 아이들이 같은 서당에 다니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평민의 아이들만 다니는 서당도 있었습니다. 백범 김구도 어릴 적에는 양반집 아이들이 다니는 서당에 갈 수 없어 평범한 농가 아이들이 다니는 서당을 다녔다고 했습니다. 김홍도의 ‘서당’에서는 갓을 쓴 양반집 아이와 평민집 아이가 같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중인 출신인 김홍도가 바라는 ‘서당’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비록 회초리가 등장하지만 폭력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이유입니다. 차별 없고 평등한 교육환경. 이것이 대한민국의 미래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 전제가 있다면 아동학대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꽃으로도 때려서는 안 될 일입니다. 새 학년 새 학기에 더구나 어렵게 다시 학교에 나가게 된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그 바람이 더욱 간절해집니다. ※ 단원풍속도첩 조선후기 단원 김홍도가 그린 풍속화를 묶은 화첩이다. 노동과 휴식, 취미와 놀이 등 당시 서민의 일상을 포착한 그림 25점으로 한 권을 엮었다. 기와 이기, 주막, 새참, 무동, 씨름, 쟁기질, 서당, 대장간, 점보기, 윷놀이, 그림 감상, 타작, 편자 박기, 활쏘기, 담배 썰기, 자리 짜기, 신행, 행상, 나룻배, 우물가, 길쌈, 고기 잡이, 노상과안, 장터길, 빨래터 등. 현장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듯한 생생한 표현력이 특징이다. 공 들여 그리지 않고, 각 장면에 가장 어울리는 기법으로 최소화한 묘사·채색 덕인데. 일체의 배경도 생략한 채, 덜 그리고 덜 칠해서 소재 자체를 돋보이게 한 영리한 그리기를 한 셈이다. 다양한 구도 역시 당시로선 ‘파격’이다. ‘서당’에서 보이는 원형구도 외에도 X자, 대각선, 사다리꼴 등으로 진짜 삶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배치했다. 무심한 듯 간단하게 작업한 듯하지만 인물의 표정은 물론, 자세와 방향까지 치밀하게 계산한 ‘명작 모음집’이다. 제작연도는 정확치 않고 18세기로만 전해진다. 27×22.7㎝. 1970년 보물 제527호로 지정됐다. △손태호 미술평론가는… 30대 중반 도망치고 싶던 때가 있었다. 세상살이가 버겁고 고달파서. 막막하던 그 시절, 늘 그렇듯 삶의 퍼즐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풀렸다. 그즈음 눈에 띈 옛 그림이 우연이었고 그 흔적을 좇아 미술관·고서화점 등을 누비고 다닌 게 필연이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찍힌 인장 ‘장무상망’(長毋相忘·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을 보고 어째서 ‘그림이 삶, 삶이 그림’이라 하는지 깨달았다.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과학도의 길은 그날로 접혔다. 동국대 대학원 미술학과로 진학해 석·박사학위를 받은 뒤 한국미술 전문가가 됐다. 조선회화·불교미술에 기둥을 세우고 그 안에 스민 상징 같은 ‘옛 그림’은 거울로 곁에 뒀다. 지금은 한국문화예술조형연구소 학술이사로 있으면서 이론·현장을 연결한 연구, 인물·지리·역사를 융합한 글과 강연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 ‘조선불상의 탄생’(한국학술정보·2020), ‘다시 활시위를 당기다’(아트북스·2017), ‘나를 세우는 옛 그림’(아트북스·2012) 등이 있다.
2021.03.05 I 오현주 기자
<3>대보름 밤 '다리' 좀 밟아줘야 하는 이유
  • [손태호의 그림&스토리]<3>대보름 밤 '다리' 좀 밟아줘야 하는 이유
  • 임득명이 1786년에 그린 ‘가교보월’(街橋步月). 천수경이 지은 동명의 시를 보고 종이에 수묵으로 그렸다(24.2×18.9㎝). 조선시대 산수화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성이 특징. 청계천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게 그린 뒤 광통교를 반듯하게 앉혔는데, 당대 유행한 서양화법에서 따온 듯하다. 같은 해 제작한 ‘옥계십이승첩’에 실렸다. 삼성출판박물관 소장.혹독한 세상살이에 그림이 무슨 대수냐고 했습니다. 쫓기는 일상에 미술이 무슨 소용이냐고 했습니다. 옛 그림이고 한국미술이라면 더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는 일을 돌아보면 말입니다. 치열하지 않은 순간이 어디 있었고, 위태롭지 않은 시대가 어디 있었습니까. 한국미술은 그 척박한 세월을 함께 견뎌온 지혜였고 부단히 곧추세운 용기였습니다. 옛 그림으로 세태를 읽고 나를 세우는 법을 일러주는 손태호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조선부터 근현대까지 시공을 넘나들며, 시대와 호흡한 삶, 역사와 소통한 현장에서 풀어낼 ‘한국미술로 엿보는 세상이야기’ ‘한국미술로 비추는 사람이야기’입니다. 때론 따뜻한 위로로 때론 따가운 죽비로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손태호 미술평론가] “대보름은 아름다운 명절이라 술에 취하여 서로들 부르네/ 달빛이 대낮처럼 밝으니 봄놀이가 오늘부터 시작되네/ 노니는 발끝이 큰길을 맑게 하고 무리의 악기 소리가 광통교에 들끓는데/ 통금도 없는 밤에 맘껏 이야기하니 기쁜 마음이 갑절이나 더해라”(천수경의 시 ‘가교보월’). 정월대보름입니다. 아마 사람들이 일 년 중 가장 달을 많이 올려다보는 날일 것입니다. 다행히 날씨가 좋아 휘영청 밝은 달이 떠오르면 그 보름달을 향해 작은 소망들을 띄워 보내겠지요. 달을 향해 기도하는 것이 익숙지 않은 요즘입니다. 하지만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달빛 아래 장독대에 정화수 한 그릇 떠 놓고 두 손 모아 기도하거나, 시골 논에 나가 볏짚단에 불을 붙이고 기도하는 모습은 흔한 광경이었습니다. 평소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걱정·근심을 보름달에게 다 털어놓으면 달은 그 이야기를 말없이 들어줬습니다. 이렇듯 일상에서 늘 마주하는 자연에 소원을 빌고 속마음을 고백하는 것은 우리의 오랜 문화였으며, 이는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겸손함을 갖고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조선시대 정월대보름 밤에는 ‘다리밟기’란 색다른 풍속이 유행했습니다. ‘다리밟기’는 정월대보름날 밤에 다리[橋]를 밟는 풍습으로 이날 밤에 다리를 밟으면 다리병[脚病]을 앓지 않는다고 알려진 세시풍속입니다. 일명 ‘답교’(踏橋) 또는 ‘답교놀이’라고 불렀는데 조선시대 한양뿐 아니라 전국에서 성행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즐겼기에 이 광경을 옮긴 그림이 여러 점 있을 것 같지만 사실 남아있는 작품은 거의 없습니다. 오로지 송월헌 임득명(1767∼1822)이 그린 ‘가교보월’(街橋步月·1786)만이 감상화로 현전할 뿐입니다. 그래서 미술사뿐 아니라 민속학에서도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꼽히며, 회화적으로도 뛰어난 그림이라 평가합니다. 오른쪽 위에 검고 푸른 하늘에 둥실 보름달이 떠올랐습니다. 달은 직접 그리지 않고 그 주변을 칠해 중심을 부각하는 것이 전통적인 표현법입니다. 이런 기법은 흰 부분을 남겨 놓았다는 뜻에서 유백법(留白法)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그림도 유백법을 사용했고 그래서 달 주변은 다른 곳보다 조금 더 어둡게 칠했습니다. 처음 달로 향했던 시선은 좌측 아래를 향해 사선으로 내려와 왼쪽 건물로 이어집니다. 그렇게 시선을 유도하기 위한 장치는 색입니다. 달과 가까운 건물 쪽에 그은 필선을 진하게 올렸고 건물 지붕도 하늘빛을 색으로 썼습니다. 당연히 반대편 오른쪽 건물도 같은 방향으로 그렸는데 그 사이 놓인 다리 아래로 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달빛과 건물, 물은 같은 방향의 사선인데 다리는 수평이어서 확연히 배경과 구분됩니다. 다리 위에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서 있습니다. 혼자 온 이, 벗과 함께 온 이, 무리지은 가족도 보입니다. 어느 해 정월대보름 밤, 조용히 물 흐르는 다리 위에 낮은 목소리의 웅성거림이 들리고, 겨울 찬 기운 속에도 따뜻한 인간다움이 느껴지는, 참신한 구도의 멋진 작품입니다. 임득명이 1786년에 그린 ‘가교보월’(街橋步月) 중 광통교에 오른 사람들을 클로즈업한 디테일. 당시의 다리 난간과 바닥 구조를 가늠할 수 있다.△고려부터 성행한 답교놀이 다리밟기는 많은 문헌에서 쉽게 찾을 수 있을 만큼 성행했습니다. 중국 당나라에서 유래했다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유행했습니다. 중국에서는 단순한 액막이놀이였는데, 사람의 다리[脚]와 물 위의 다리[橋]가 같은 음으로 읽혔던 덕에 우리나라에서 더욱 즐겼던 것 같습니다. “정월 보름에 달이 뜨면 그해에 풍년이 들 것인가를 점치며 다리밟기 놀이를 하는데, 이는 고려부터 내려오는 것으로서 대단히 성행했다. 남녀가 모여 다리 위에 들어차서 밤새도록 그치지 않으므로 법관이 심지어는 그것을 금지하고 체포하기까지 했다”(이수광 ‘지봉유설 芝峰類說’). “정월 보름날 밤이면 우리나라 남녀들이 성안 큰 다리에 모여서 노는데 그것을 일러 ‘답교’라 하며, 답교놀이를 하지 않으면 반드시 다리병을 앓는다고 한다”(이덕무 ‘청장관전서 靑莊館全書’ 중 ‘주교 走橋’). 그림 ‘가교보월’ 속 다리는 청계천 위에 걸려 있던 조선시대의 광통교(廣通橋)입니다. 광통방에 위치한 큰 다리란 뜻으로 ‘대광통교’로, 또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북광통교’로 기록하고 있지만 보통 광교라 불렀습니다. 답교놀이의 핫플레이스가 바로 광교였던 것입니다. 다른 기록은 이렇게도 전합니다. “한양 사람들은 모두 다리밟기를 하면서 밤이 새도록 놀고 즐기는데, 광통교가 가장 붐빈다”(권용정 ‘한양세시기 漢陽歲時記’). 중인화가 임득명은 정조 때 규장각서리를 지낸 인물입니다. 중인들의 시 모임인 ‘옥계시사’(玉溪詩社)에서 활동했는데 글씨·문장·그림이 모두 훌륭해 ‘삼절’로 불렸습니다. 옥계시사는 중인들이 한 달에 한번 모여 술을 마시며 시를 짓고 그림을 감상하던 모임입니다. ‘가교보월’도 그들의 시화첩인 ‘옥계십이승첩’(玉溪社十二勝帖)에 수록된 작품입니다. 비록 중인들의 모임이지만 학예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옥계시사 결성 당시 머리말에 “장기와 바둑 모임은 하루, 술과 여색 모임은 한 달, 잇속을 따지는 모임은 한 해를 가기 어려우나 문장을 남기는 모임은 평생 갈 수 있다”라고 썼을 정도입니다. 그래서인지 1786년 결성한 모임은 1818년까지 지속했고 단원 김홍도도 참여해 ‘송석원시사야연도’(松石園詩社夜宴圖)란 멋진 작품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광해원 개설한 앨런이 쓴 ‘조선견문록’에도 담겨 다리밟기는 외국인의 눈에도 신기하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우리나라 최초 서양식 병원 광혜원을 개설한 H N 앨런은 자신의 책 ‘조선견문록’에 “첫 보름이 떠오르는 정월대보름날 밤에 달빛 아래로 나와 그해에 다리와 발에 병이 나는 것을 막기 위해 다리를 건너가는 놀이를 한다”고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앨런 같은 외국인을 대상으로 다리밟기를 알린 그림이 있습니다. 한말 풍속화가 기산 김준근(출생·사망연도 미상)이 그린 ‘정월망일에 답교하는 모양’(1880년대)입니다. 어떤 장면인지를 상단에 풀어서 적어놓은 것으로 보아 김준근의 대부분 작품처럼 외국인에게 보이기 위한 그림이 분명합니다. 19세기 말에 활발히 활동한 김준근이 그린 ‘정월망일에 답교하는 모양’(1880년대·종이에 채색·16.9×13㎝). 이마가 넓고 긴 얼굴, 뛰어난 색감 등 특유의 표현이 살아 있는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부산·원산 등 개항장에서 풍속화를 그려 서양인에게 판매했다는 김준근의 작품은 당시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의 각종 여행기에 삽화로 쓰였다. 프랑스 파리 기메박물관 소장.작품에서 달은 보이지 않고 다리와 그 위를 걷는 인물만 압축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긴 담뱃대를 물고 앞선 남자 뒤로 엷은 보라색 두루마기를 입은 남자가 아이의 손을 잡고 다리를 건너고 있습니다. 아이의 붉은 두루마기를 비롯해 모두가 한껏 잘 차려입은 모습입니다. 다리는 돌다리로 ‘홍예’가 특징입니다. 조선시대에 홍예다리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는데, 만약 이곳이 한양이라면 인왕산 근처 금청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부산에서 활발히 활동한 김준근의 이력을 볼 때 부산 수영구의 이섭교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지금은 금청교·이섭교 모두 사라져 볼 수 없는 다리기에 그림은 더욱 소중하고 애틋합니다. 또한 특유의 이마가 넓고 긴 얼굴, 뛰어난 색감 등이 살아있는, 김준근의 풍속화 중에서도 완성도가 높은 작품입니다. △법정스님, 보름달 보며 “모두 행복하길” 기도 ‘무소유’를 쓰고 실천한 법정스님은 보름달이 뜰 때마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행복하기”를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 글귀는 원래 ‘숫타니파타’란 불경의 문장입니다. 그리고 이 글귀 뒤에는 이런 글이 이어집니다. “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을 목숨 걸고 지키듯이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해 한량없는 자비심을 발하라.” 결국 법정스님이 보름달을 바라보며 빈 소원은 자비였습니다. 아프고 괴로운 세상에 대한 간절하면서도 조건 없는 사랑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정월대보름 밤, 여러분은 누구에게 간절하면서도 조건 없는 사랑고백을 하시겠습니까. ※ 임득명과 김준근 ‘다리밟기’ 풍속을 그림으로 남겼다는 것뿐 임득명과 김준근의 공통점은 거의 없다. 다른 시대에 다른 신분으로 태어나 다른 화풍을 내보였다.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에 활약한 임득명(1767∼1822)은 시·서·화에 모두 능한 삼절로, 글씨는 전서, 그림은 정선의 진경산수화법에 능했다고 전한다. 여러 대에 걸쳐 여항문인을 배출한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나중에 여항문인들의 시 모임인 옥계시사의 일원이 된 건 이와 무관치 않다. 1786년 옥계시사 결성 때부터 동참해 ‘옥계십이승첩’(1786), ‘옥계십경첩’(1791) 등, 시회를 주제로 한 그림을 다수 그려 시화첩을 제작했다. 대표작은 ‘서행일천리도’(1813). 관서지방을 여행하며 풍물을 읊은 시와 실경을 그린 7폭 산수화다. 풍속화가 김준근(출생·사망연도 미상)의 생애에 대해선 알려진 게 없다. 19세기 말 부산·원산 등 개항장에서 풍속화를 그려 서양인에게 판매했다는 사실만 전한다. 행적은 국내보단 되레 외국에서 찾아지는데, 해외로 ‘뻗어나간’ 그의 작품 덕이다. 당시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의 각종 여행기에 삽화로 쓰이며, 조선의 풍속을 세계에 널리 알린 화가가 됐다. 독일·프랑스·영국·러시아·미국·일본 등 세계 20여곳 박물관에 1500여점이 남아 있다. 한국 최초의 서양문학 번역본인 ‘텬로력뎡’(天路歷程·1895)의 삽화가로도 활약했다. 농사·혼례·선비와 기생 등 18세기 전통 풍속화의 주제부터 물건 제작·판매, 형벌·제례·장례 등 19세기 말 시대상을 반영한 주제까지 다채롭다.
2021.02.26 I 오현주 기자
흔치 않은 '물방울·색점'…컬렉터 유혹하는 김창열·김환기
  • 흔치 않은 '물방울·색점'…컬렉터 유혹하는 김창열·김환기
  • 김창열의 ‘물방울’(2013·왼쪽)과 김환기의 ‘무제’(1967). 두 작품 모두 ‘흔치 않은 물방울과 색점’으로 컬렉터를 유혹한다. 프랑스 일간지 ‘르 몽드’ 1면에 투명하고 맑은 물의 얼룩을 띄운 ‘물방울’은 신문지에 올린 물방울 회화의 2000년대 버전. 김환기 특유의 반추상화와 전면점화 그 중간쯤에 놓을 만한 ‘무제’는, 두꺼운 마티에르로 살려낸 푸른 바탕에 노랗고 빨갛고 파란 색점을 감각적으로 찍어냈다. 23일 서울옥션 ‘제159회 미술품 경매’에서 각각 추정가 1400만∼2500만원과 10억∼20억원에 나선다(사진=서울옥션).[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물방울을 그리는 것은 모든 사물을 투명하고 텅빈 것으로 만들기 위해 용해하는 행위다.” 스스로 뱉은 그 말처럼, 남김없이 녹여내고 홀연히 떠났다. 새해 벽두부터 비보를 알린 한국 추상미술의 대가 김창열(1929∼2021) 화백 얘기다. 화백은 지난달 5일 숙환으로 타계했다. 하지만 ‘작가는 가도 작품은 남는다’고 했던가. 그이의 ‘물방울’ 작품들이 이미 가라앉을 대로 가라앉은 경매시장을 자극하고 있다. 올해 미술품 경매시장에 ‘물방울’ 작품들은 가히 ‘패키지’로 쏟아지며 컬렉터의 관심을 한껏 끌어올리는 중이다. 서울 강남구 언주로 서울옥션 강남센터에서 23일 여는 서울옥션 ‘제159회 미술품 경매’에는 김창열의 ‘물방울’ 작품이 8점 나온다. 올해 들어 처음 여는 메이저경매에 서울옥션은 김창열이 평생 화두로 삼은 ‘물방울’이 탄생한 1970년대 초반 이래 말년까지, 반백년 동안 이어진 물방울 회화를 연대별로 꺼내놨는데. 덕분에 비단 작품을 팔고 사는 경매로서뿐만 아니라 그이의 작품세계를 다시 들여다보는 기회로서도 의미를 채우고 있다. 김창열의 ‘물방울’(1986). 23일 서울옥션 ‘제159회 미술품 경매’에 출품한 8점 중 한 점이다. 194.3×294.5㎝의 대작으로 여느 작품보다 훨씬 많이 박힌 물방울이 압도한다. 길게 드리운 그림자 덕에 가뜩이나 큰 화면은 물방울로 차려놓은 잔칫상인 듯하다. 추정가 2억 8000만∼4억원(사진=서울옥션).이보다 앞선 예고편은 지난달 나왔다. 케이옥션이 ‘1월 경매’에 김창열의 ‘물방울’ 작품 4점을 출품했던 터. 타계 후 진행한 첫 경매에는 1983년 작품 1점 외에 2000년대 제작한 3점(2000·2003·2018년)이 나서 색다른 매력을 풍겼더랬다. 결과도 좋았다. 시작가 5000만원에 출발한 ‘물방울 SH84002’(1983)가 경합 끝에 그 3배에 이르는 1억 5000만원에 팔려나갔고, 2000년대 3점도 모두 낙찰됐다. 5500만원에 시작한 ‘물방울 SA3014-03’(2003)이 1억원에, 2500만원을 처음 호가한 ‘물방울 SB200011’(2000)은 5200만원에, 역시 2500만원에 시작한 ‘물방울 SA201806’(2018)은 5000만원을 부른 새 주인 품에 안겼다. △김창열 ‘물방울’ 쏟아져…8점 한꺼번에 출품 시작은 소소한 한 점에 불과했다. ‘물방울’의 탄생이 말이다. 작정해 찾은 것도, 흉내를 낸 것도 아닌 진짜 우연이었단다. 프랑스 파리에 머물던 1972년, 화실처럼 쓴 고약한 마구간에서 물을 뿌려둔 캔버스가 계기라면 계기다. 지독하게 가난했던 화가는 말라붙은 유화물감을 떼어내 재활용할 요량이었던 거다. 다음 날 아침, 눈에 들어온 건 유화물감이 아니었다. 영롱하게 빛나는 물방울이었다. 그이가 그날 유화물감을 떼어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물방울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이후 ‘미친 변주’는 선택이 아닌 필수코스였을 거다. 유화를 기본으로 아크릴·수채·먹, 캔버스가 아니라면 마포·신문지·모래·나무판·한지, 여기에 붓과 에어브러시 등등, 오로지 물방울 하나 맺히게 하는 데 동원한 도구는 차고 넘쳤다. 사실 김창열은 경매에선 매회 빠지지 않는 ‘단골작가’다. 하지만 그이의 ‘물방울’ 8점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건 처음이 아닐까 싶다. 이번 경매에서 가장 조명을 받는 작품은 1977년 제작한 100호 규모의 ‘물방울’(161.5×115.7㎝). 거친 마포에서도 빛나는, 크고 작은 물방울을 규칙 없이 얹은, 비교적 초기작이다. 추정가는 4억 8000만∼7억원이다. 1986년 작품인 ‘물방울’은 일단 규모에서 압도한다. 194.3×294.5㎝의 대작으로 여느 작품보다 훨씬 많이 박힌 물방울이 시선을 끈다. 게다가 길게 드리운 그림자 덕에 가뜩이나 큰 화면은 온통 물방울로 차려놓은 잔칫상인 듯하다. 추정가 2억 8000만∼4억원을 걸고 응찰을 기다린다. 김창열의 ‘물방울’(1977). 23일 서울옥션 ‘제159회 미술품 경매’에 출품한 8점 중 한 점이다. 161.5×115.7㎝ 규모의 거친 마포에 크고 작은 물방울을 규칙 없이 얹은, 비교적 초기작이다. 추정가 4억 8000만∼7억원에 새 주인을 찾는다(사진=서울옥션).흔하게 볼 수 없던 ‘물방울’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불투명한 흰색으로 물방울이라기보단 물거품에 가까워 보이는 ‘무제’(1968)가 그중 한 점. 1960년대 중후반 미국 뉴욕에 머물던 때, ‘캔디’라고 불린 색색의 구를 그렸던 당시의 그림이다. 어찌 보면 1970년대 본격적인 물방울 시대를 여는 초석이라 할 작품이다. 추정가는 2억∼3억원. 신문지에 올린 물방울의 2000년대 버전도 있다. 프랑스 일간지 ‘르 몽드’ 1면에 투명하고 맑은 물의 얼룩을 띄운 ‘물방울’(2013)이다. 김창열은 이미 1970년대 중반 이 같은 작업을 했더랬다. 역시 프랑스 일간지인 ‘르 피가로’ 1면에 수채물감으로 물방울을 그려 넣으며, 현실세계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신호를 보내기도 했다. 그후 40년 뒤 다시 탄생한 신문지 물방울 회화가 추정가 1400만∼2500만원에 새 주인을 찾는다. 참고로 지금껏 김창열의 ‘최고가 작품’은 마포에 그린 유화 ‘물방울’(195×123㎝·1973)로, 2016년 3월 케이옥션 홍콩경매에서 5억 1282만원에 낙찰됐다. 김창열의 ‘무제’(1968). 23일 서울옥션 ‘제159회 미술품 경매’에 출품한 8점 중 한 점이다. 1960년대 중후반 미국 뉴욕에 머물던 때 ‘캔디’라고 불린 색색의 구를 그렸던 당시의 그림이다. 1970년대 본격적인 물방울 시대를 여는 초석이라 할 만하다. 추정가 2억∼3억원에 나선다(사진=서울옥션).△김환기 색점 ‘무제’ 향한 기대감…이인문 ‘산정일장’ 최고가 출품경매시장뿐만 아니라 미술시장을 끌어올릴 ‘카드’로 여전히 기대를 접을 수 없는 김환기(1913∼1974)의 뉴욕시대 3점은 이번 경매의 또 다른 볼거리다. 무엇보다 1967년 작품인 ‘무제’는 1960년대 그이의 작품 중 가장 큰 규모(127.3×177.4㎝)로 주목 받는다. 김환기 특유의 반추상화와 전면점화 그 중간쯤에 놓을 만한 ‘무제’는, 두꺼운 마티에르로 살려낸 푸르고 넓은 바탕에 노랗고 빨갛고 파란 색점을 찍어내고 있다. 자연과의 교감을 이루는 조형세계를 표현했다는 의미도 의미지만 감각적인 리듬감이 단박에 혹할 만한 외형을 지니고 있다. 추정가는 10억∼20억원이다. 이외에도 실험적인 십자구도가 선명한 ‘14-Ⅶ-69 #87’(1969)이 추정가 2억∼3억원, 핑크빛 붉은 바탕에 푸른 달과 산을 상징적으로 올린 ‘무제’(1966)가 추정가 2억 5000만∼4억원에 나선다. 지난달 오랜 침묵을 깨고 케이옥션에 출품한 김환기의 전면점화 ‘22-Ⅹ-73 #325’(1973)가 시작가 30억원을 부르며 시장의 소생을 노렸지만 경매 직전 출품이 취소되며 무위에 돌아갔던 터. 때문에 잠든 큰손을 깨우는 시그널로서 김환기를 향한 기대감이 이번 경매로 고스란히 옮겨오게 됐다. 고송유수관 이인문의 8폭 병풍 ‘산정일장’(연도미상). 낮잠 자고 차 마시고 책 읽고, 소박하고 평화로운 문인의 일상을 읊은 시 ‘산정일장’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현전하는 이인문의 ‘산정일장’ 중 가장 큰 규모다. 23일 서울옥션 ‘제159회 미술품 경매’에서 시작가 20억원부터 호가를 높여간다(사진=서울옥션).고미술부문에선 고송유수관 이인문(1745∼1821)의 ‘산정일장’(山靜日長·연도미상)이 단연 돋보인다. 낮잠 자고 차 마시고 책 읽고, 소박하고 평화로운 문인의 일상을 읊은 시 ‘산정일장’은 조선시대 사대부의 이상적인 은거의 삶이기도 했다. 이인문은 이를 그림으로 탁월하게 표현한 대표 화가로 꼽힌다. 출품작은 현전하는 이인문의 ‘산정일장’ 중 가장 큰 규모(47.7×115.7㎝)로 묶인 8폭 병풍이다. 크기도 크기지만 양호한 보존상태가 가치를 높이고 있다. 시작가 20억원부터 호가를 높여갈 작품은 이번 경매의 최고가 출품작이기도 하다. 예정했던 3점이 출품을 취소한 가운데 이번 경매에 나선 작품은 총 190점. 약 120억원 규모다.
2021.02.22 I 오현주 기자
<2>파란눈 이방인이 본 '액운 날리기'
  • [손태호의 그림&스토리]<2>파란눈 이방인이 본 '액운 날리기'
  • 엘리자베스 키스의 ‘연 날리는 아이들’(1936·오른쪽). 석판화로 제작했다(49.5×36.5㎝). 키스 화풍의 특징인 부드러운 색감에 디테일한 묘사가 잘 드러나 있다. 키스가 서울·평양 등 전국 곳곳을 다니면서 그린 그림은 처음 대상을 만나 스케치를 하고, 숙소나 작업실에 돌아와 수채작업을 한 뒤 일본에서 판화작업을 하는 식. 같은 소재를 다른 기법으로 표현한 그림이 여럿인 건 이 작업방식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혹독한 세상살이에 그림이 무슨 대수냐고 했습니다. 쫓기는 일상에 미술이 무슨 소용이냐고 했습니다. 옛 그림이고 한국미술이라면 더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는 일을 돌아보면 말입니다. 치열하지 않은 순간이 어디 있었고, 위태롭지 않은 시대가 어디 있었습니까. 한국미술은 그 척박한 세월을 함께 견뎌온 지혜였고 부단히 곧추세운 용기였습니다. 옛 그림으로 세태를 읽고 나를 세우는 법을 일러주는 손태호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조선부터 근현대까지 시공을 넘나들며, 시대와 호흡한 삶, 역사와 소통한 현장에서 풀어낼 ‘한국미술로 엿보는 세상이야기’ ‘한국미술로 비추는 사람이야기’입니다. 때론 따뜻한 위로로 때론 따가운 죽비로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손태호 미술평론가] 농경사회였던 조선에서는 설날부터 정월대보름까지가 명절기간이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만큼은 일을 하지 않고 휴일로 보냈습니다. 요즘이라면 이런 황금연휴에 장거리 여행을 가거나 평소 하지 못했던 취미활동을 즐겼을 테지만 반세기 전만 해도 다른 풍경이었습니다. 온 마을의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놀이를 즐겼던 것입니다. 남자들은 윷놀이, 여자들은 널뛰기 등을 했는데요. 이런 세시놀이가 마을사람들의 유대감을 높이고 이웃 간 정도 두텁게 했습니다. 어른들이 윷놀이와 널뛰기를 하는 동안 아이들에게 가장 즐거웠던 놀이는 ‘연날리기’입니다. 겨울에 바람이 거세지면 집집마다 아이들이 연을 들고 나와 서로 자기 연이 더 높이 난다고 자랑하며 놀곤 했습니다. 또 연줄을 서로 엉키게 해 먼저 끊어지는 쪽이 지는 ‘연줄 끊기’도 많이 했는데, 연줄이 먼저 끊어진 아이는 종종 울음을 터트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이렇게 많이 즐기던 연날리기가 옛 그림으로 남겨진 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고작 19세기 말 김준근이 그린 풍속화나 20세기 초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 여류화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1887∼1956)의 그림 정도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 드문 작품 가운데 키스의 ‘연 날리는 아이들’(1936)을 통해 잠시 옛 시절로 돌아가 보고자 합니다. △연, 정치·군사 용도에서 액막이놀이로 그림에서 앞에 보이는 한 사내아이가 얼레를 돌리며 연을 날리고 있습니다. 그 연을 동생인 듯한 여자아이가 바라보고 있고요. 멋지게 연을 날리는 오빠가 자랑스러운지 여동생은 즐거운 표정으로 연을 바라봅니다. 날씨가 추운 탓인지 둘 다 얼굴이 발그스레합니다. 두 아이들 뒤에는 다른 연들이 같이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배경으로는 저 멀리 하얀 눈이 덮인 산이 보이고 그 앞은 팔각형 지붕의 정자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팔각정 옆에는 제법 높은 탑이 있는데 팔각정과 탑이 같이 있는 공간이라면 우리나라에서 탑골공원밖에 없을 것입니다. 탑골공원은 파고다공원이란 이름으로 지어진 서울 최초의 근대공원으로 3·1운동의 출발지이기도 합니다. 왼쪽 하단에 유독 ‘기덕’(奇德)이란 서명이 눈에 띄는데, 키스의 원어민 발음을 잘 몰라 ‘케이드’라 불렀던 당시, 기덕은 그 발음과 비슷하게 지은 한국이름입니다. 이 그림과 관련해 키스는 1946년에 펴낸 책 ‘올드 코리아’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서울은 연을 날리기에 최고로 좋은 도시입니다. 연 날리는 계절이 돌아오면 갑자기 하늘은 온통 형형색색의 연으로 뒤덮입니다.” 그녀에게 퍽 인상적이었던 연 날리는 장면은 이렇게 고운 색감의 그림으로 탄생했습니다. 다만 연과 두 아이를 삼각형 구도로 그린 그림은 안정적이긴 하지만 감상화로 보기엔 뭔가 심심하긴 합니다. 연날리기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등장할 만큼 아주 오래된 놀이입니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신라 선덕여왕 말년에 김유신이 풍연(風鳶)에 불을 달아 밤하늘로 올려 민심을 수습하였다”라고 썼을 만큼 고대에는 정치·군사적 용도로 연을 활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는 평양성 전투에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하지만 연날리기는 고려와 조선에 들어서 민가에 널리 퍼지며 일종의 액막이놀이가 됐습니다. 몇몇 기록이 그 장면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생년, 이름, 액을 없애버린다’란 글자를 쓴 연을 띄우다가 보름날 해질 무렵에 연줄을 끊어 날려 보내는데, 액을 멀리 보낸다는 뜻이다”(‘동국세시기 東國歲時記’). “아이들이 액이라는 글자를 연에다 써서 해질 무렵에 줄을 끊어서 공중으로 날려 보낸다”(‘경도잡지 京都雜志’).지금 세대는 연날리기를 마치면 연을 다시 수습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연날리기의 피날레는 얼레에 있는 실을 전부 풀고 연을 하늘로 날려보는 것입니다. 또 키스 그림에 등장하듯이 주로 방패연을 날렸는데, 사각형으로 모양을 잡고 가운데 구멍을 뚫은 방패연은 우리나라에서만 사용한 연입니다. 방패연은 중앙에 방구멍을 내어 맞바람의 저항을 줄이고 뒷면의 진공상태를 즉시 막아주기 때문에 연이 빠르게 움직여 조종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날리는 사람의 솜씨에 따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방패연을 주로 사용했다는 것은 연날리기가 단순히 높이 나는 데 그치지 않고 급상승, 급강하, 회전 등 ‘재주부리기’가 중요한 기술이란 점을 말해줍니다. 그런 연의 재주를 감상하는 것이 연날리기의 포인트였고요. △풍차·당혜…고유 복식 담은 ‘정원 초하루 나들이’엘리자베스 키스가 1921년 서울 광화문 일대를 배경으로 그린 ‘정월 초하루 나들이’. 채색목판화로 제작했다(25.7×37.5㎝).키스의 작품 중 정월과 관련한 그림 한 점을 더 보겠습니다. ‘정월 초하루 나들이’(1921)란 작품입니다. 멀리 있는 산이 하얗게 덮인 것을 보니 한겨울이고, 중층의 문루와 그 앞에 놓인 해치상을 보니 분명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입니다. 두 남매를 데리고 나온 어머니는 딸의 손을 잡고 아들을 향해 무엇인가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딸의 손에는 가스를 넣은 풍선이 들렸습니다. 아들은 다른 풍선을 불고 있는데 힘껏 용을 쓰는지 살짝 보이는 볼이 빵빵합니다. 이 그림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색감이 아주 고운 옷매무새입니다. 여인의 푸른빛 두루마기가 멋스럽고 소매에 흰 털이 달린 붉은 토시도 고급스럽습니다. 아이들도 색동저고리, 분홍치마, 푸른저고리, 하얀바지 등을 잘 차려입었는데, 바로 설빔을 입은 것입니다. 키스가 또 다른 저서 ‘동양의 창’(1928)에서 “정월 초하루인 설은 한국의 최대 명절이다. 이날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제일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나들이를 한다”라고 적은 바로 그 모습입니다. 방한모와 신발도 눈에 들어옵니다. 모두 지금은 거의 사라진 우리 고유의 겨울모자인 ‘풍차’(風遮)를 착용했습니다. ‘풍뎅이’라고도 불린 풍차는 모자 뒤를 길게 만든 것이 특징입니다. 모양이 ‘남바위’와 비슷한데 양옆에 귀와 뺨, 턱까지 가릴 수 있는 볼끼가 있으니 풍차가 분명합니다. 보통 여자용은 그림처럼 앞뒤에 장식 끈이나 술·비취·옥 등을 달았습니다. 코가 치켜 올라간 가죽 비단신인 당혜(唐鞋)도 자세히 묘사해 화가의 뛰어난 관찰력이 돋보입니다. △한국을 응원한 키스…크리스마스실 제작 참여도 키스가 처음 한국에 온 건 1919년 3·1운동이 시작된 지 한 달이 채 안 된 3월 28일입니다. 그녀는 한국에 오자마자 신비롭고 아름다운 한국에 단숨에 매료됐습니다. 그리고 무자비한 일본의 만행과 그에 맞서는 의연한 한국인에게서 큰 감동을 느끼게 됩니다. 그후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해 한국인의 생활상을 따뜻하고 정감 어린 시선으로 화폭에 담습니다. 그녀는 한국에서 최초로 전시회를 연 서양화가기도 했지만, 한국을 위해 여러 글을 써 3·1운동과 한국의 모습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한 작가기도 했습니다. 또 우리나라에서 심각했던 결핵의 치유를 위해 크리스마스실을 제작하는 데 세 번이나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연 날리는 아이들’도 크리스마스실 제작에 쓰였던 만큼 더욱 의미가 깊습니다. 포스터 성격의 그림이라 단순한 삼각형의 안정감 있는 구도를 택했던 이유도 설명이 됩니다. 키스가 한국에서 작품 활동을 하던 시기는 일제가 우리 민족문화를 말살하려 광분하던 때였습니다. 이런 모진 시절에 이토록 평화로운 정월의 세시풍속을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일제의 억압에 맞서는 한국인의 당당한 의연함과 질긴 생명력을 응원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다시 정월을 맞아, 100여년 전 그림 속 아이들이 그랬듯, 연과 풍선에 온갖 근심과 걱정, 못된 바이러스까지 담아 저 멀리 하늘로 띄워 보내고 싶습니다. 그래서 올해는 기쁜 소식들만 우리 사회 곳곳에 울려 퍼지기를 간절히 바라봅니다. ※ 엘리자베스 키스와 ‘올드 코리아’‘엘리자베스 키스의 초상화’(1922). 일본 화가 이토 신수이(1898∼1972)가 그리고 채색목판화로 제작했다(42×27㎝). 두 사람은 같은 시기 와타나베 공방에 드나들며 서로 알게 됐다고 전한다. 의자가 아니라 방석에 단정하고 꼿꼿하게 앉은 키스의 모습에서 동양문화를 깊게 이해했던 면모를 읽을 수 있다.영국 스코틀랜드 에버딘셔에서 태어난 엘리자베스 키스(1887∼1956)가 동양에 첫발을 디딘 건 1915년. 잡지사를 운영하던 언니 엘스펫 키스와 형부 존 로버트슨 스콧의 초청으로 일본에 내렸다. 이후 언니 내외가 영국으로 귀국하기 전 자매는 한국여행을 하기로 하고 1919년 3월 28일 처음 한국을 찾았다. 미술교육을 정식으로 받진 않았지만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던 키스는 한국에서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모델을 구하고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작품활동은 언니가 영국으로 귀국한 후에도 홀로 머물며 계속됐다. 이후 키스는 한국을 비롯해 일본·중국·필리핀을 오가며 여러 작품을 남겼는데, 한국인·한국풍경을 그린 80여점을 비롯해 평생 120여점의 수채화와 채색목판화·동판화 등을 제작했다. ‘한국 최초로 전시회를 연 서양화가’란 기록도 가지고 있다. 1921년 서울은행집회소에서, 1934년 서울 미쓰코시백화점(지금의 신세계백화점 본점)에서 연 전시가 그것. 한국을 소재로 한 두 권의 저서도 냈다. 1928년 출간한 ‘동양의 창’(Eastern Windows)은 여행 중 언니에게 쓴 편지를 편집하며 그림 12점을 소개한 것이고, 1946년 출간한 ‘올드 코리아’(Old Korea: The Land of Morning Calm·엘스펫 키스, 존 로버트슨 스콧 공저)에선 한국을 소재로 한 수채화 39점과 함께 일본 식민지정책을 규탄하는 글까지 실어냈다. 두 책은 각각 2012년과 2006년 뒤늦게 한국어로 번역되며 비로소 우리에게 알려졌다. △손태호 미술평론가는… 30대 중반 도망치고 싶던 때가 있었다. 세상살이가 버겁고 고달파서. 막막하던 그 시절, 늘 그렇듯 삶의 퍼즐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풀렸다. 그즈음 눈에 띈 옛 그림이 우연이었고 그 흔적을 좇아 미술관·고서화점 등을 누비고 다닌 게 필연이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찍힌 인장 ‘장무상망’(長毋相忘·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을 보고 어째서 ‘그림이 삶, 삶이 그림’이라 하는지 깨달았다.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과학도의 길은 그날로 접혔다. 동국대 대학원 미술학과로 진학해 석·박사학위를 받은 뒤 한국미술 전문가가 됐다. 조선회화·불교미술에 기둥을 세우고 그 안에 스민 상징 같은 ‘옛 그림’은 거울로 곁에 뒀다. 지금은 한국문화예술조형연구소 학술이사로 있으면서 이론·현장을 연결한 연구, 인물·지리·역사를 융합한 글과 강연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 ‘조선불상의 탄생’(한국학술정보·2020), ‘다시 활시위를 당기다’(아트북스·2017), ‘나를 세우는 옛 그림’ (아트북스·2012) 등이 있다.
2021.02.19 I 오현주 기자
 캔버스 밖으로 뛰쳐나온 ‘흰 소’를 만나다
  • [신축년] 캔버스 밖으로 뛰쳐나온 ‘흰 소’를 만나다
  • 부산 동구 범일동의 이중섭거리에는 이중섭 화가의 흰소를 테마로 만든 조형물이 있다.[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2021년은 흰 소의 해다. 소는 예부터 문학과 그림, 노래의 소재로 쓰였고, 이중섭은 ‘소의 화가’라 불릴 만큼 소와 관련한 그림을 많이 남겼다. 굵은 선과 역동적인 자세가 인상적인 ‘흰 소’는 이중섭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부산 동구 범일동의 이중섭거리에 가면 ‘흰 소’를 입체적으로 만든 동상을 볼 수 있다.범일동은 불운한 시대에 살다 간 천재 화가 이중섭의 애환과 예술혼이 깃든 동네다. 평안남도가 고향인 그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란했는데, 끼니조차 해결하기 힘든 상황에도 그림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물감 살 돈이 없어 담뱃갑 은박지에 그린 은지화는 우리에게 큰 감동과 울림을 안긴다. 몇 년 전 뉴욕현대미술관(MoMA)이 소장한 이중섭의 은지화 3점이 국내에 처음 선보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이중섭 화가의 그림들로 꾸민 이중섭거리한적한 주택가에 조성된 이중섭거리는 소박하면서도 여운이 오래 남는 여행지다. 큰길에서 골목으로 접어들면 축대에 설치된 이중섭의 부조가 눈에 띈다. 부산에 내려온 그는 1951년 가족과 잠시 제주에 건너갔다가 그해 12월 돌아와 범일동에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이중섭은 부산에서 지내는 동안 ‘범일동 풍경’을 비롯해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그가 걸어온 삶의 궤적을 조용히 따라가다 보면 마음 한구석이 자꾸 먹먹해진다. 담벼락을 활용한 거리미술관을 지나면 이중섭의 작품과 편지를 모아놓은 희망길100계단에 닿는다. 가파른 계단이 고달픈 그의 삶을 나타내는 듯,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아련함이 밀려든다. 어려운 시절에도 가족과 그림에 대한 희망을 품은 화가의 환한 미소가 애달파 보인다.이중섭 화가의 초상희망길100계단은 난간 부분을 작은 갤러리처럼 꾸며 발걸음을 떼기 쉽지 않다. ‘황소’를 비롯해 이중섭의 작품을 하나하나 관람하다 보면 우직하게 선 소 동상과 만난다. ‘흰 소’를 본떠 만든 조형물로, 마치 그림에 있는 소가 캔버스 밖으로 뛰쳐나온 듯 생동감이 넘친다. 흰 소의 해에 찾은 이중섭거리가 더욱 각별하게 다가온다. 이곳을 비롯해 계단 중간마다 작은 쉼터가 있어 화가의 작품과 일화를 감상하며 쉬기 좋다.이중섭은 부산에서 극심한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가족을 아내의 고향인 일본으로 떠나보내고 무척 슬퍼했다. 아내와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마다 절절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그의 작품을 보면 가족과 함께한 시간에 가장 행복해했음을 느낄 수 있다. 그와 가족이 주고받은 편지를 읽다 보면 어느새 눈가가 촉촉해진다.이중섭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계단을 모두 오르면 범일동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이중섭전망대에 이른다. 화가가 ‘범일동 풍경’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다. 그가 살던 판자촌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산 아래 옹기종기 모인 집이 힘겨운 시절을 딛고 일어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잔잔히 들려준다. 오른쪽에 우후죽순 솟은 고층 빌딩이 소박한 풍경에 현대적인 분위기를 더한다.이중섭전망대는 2017년에 방영한 드라마 ‘쌈, 마이웨이’를 촬영한 장소이기도 하다.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버스를 기다리는 곳으로 나왔다. 전망대 아래층에 있는 카페에서 그윽한 커피 향과 함께 여운을 음미하기 좋다(코로나 19 확산 방지를 위한 사회적 거리 두기로 운영 여부 확인 필요).만화 속 세상 같은 성북시장 웹툰이바구길성북시장에 있는 웹툰이바구길은 또 다른 감동과 즐거움을 선사한다. 황미나, 유현숙, 정연식 등 유명한 만화가들이 시장 골목을 개성적인 웹툰 거리로 만들었다. 다양한 캐릭터가 살아 숨 쉬는 시장은 마치 만화 속 세상 같다. 골목 따라 만화 간판과 벽화가 늘어서, 상점을 지날 때마다 만화 주인공이 말을 걸기라도 할 듯 즐거운 상상을 하게 된다. 시장 곳곳에서 좋아하는 캐릭터나 낯익은 웹툰을 찾아내는 재미가 쏠쏠하다. 만화체험관에서 그림을 그리고 스토리를 만들어보는 이색 체험도 할 수 있다.웹툰이바구길 언덕에는 숨은 보석 같은 책마루전망대가 있다. 동구도서관 외벽에 설치된 경관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면 옥상에 조성된 전망대에 닿는다. 산복도로와 부산항 일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전망이 일품이다. 책마루전망대는 개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동구의 새로운 명소이자 부산 최고 전망 포인트로 입소문을 타고 있다.증산공원에 세워진 증산전망대동구도서관과 이어진 증산공원은 가볍게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아담한 게이트볼장과 운동 기구들이 설치됐으며, 중심에 부산항 전망을 품은 증산전망대가 있다. 노을이 질 무렵에 가면 더욱 운치 있다. 증산공원은 동구 주민들이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는 곳이지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임진왜란 때의 아픈 역사와 만나게 된다. 공원 곳곳에 당시 왜군이 쌓은 옛 성곽(증산왜성)의 흔적이 있다.부산의 대표적인 도심 공원인 부산시민공원에도 우리 민족의 굴곡진 근현대사가 담겨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자본가들이 점유해 경마장과 일본 군용지로 사용했으며, 한국전쟁 당시부터 2010년 부지가 반환될 때까지 주한 미군 부산기지사령부가 주둔했다. 2014년에 문을 연 부산시민공원은 푸른 숲길과 연못, 음악분수, 갤러리, 역사관 등을 갖춰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기 좋다.주한미군 부산기지 터에 조성된 부산시민공원
2021.02.10 I 강경록 기자
"봄방학, 온라인 작가 강연회 ‘랜선 북캉스’ 떠나요"
  • "봄방학, 온라인 작가 강연회 ‘랜선 북캉스’ 떠나요"
  • [이데일리 오희나 기자] 서울시교육청은 24일부터 26일까지 학생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봄방학 온라인 작가 강연회 ‘랜선 북캉스2’를 운영한다고 7일 밝혔다. ‘랜선 북캉스2(북+바캉스)’는 교육청 산하 3개 교육지원청(강서양천·동작관악·성동광진교육지원청)과 어린이도서관이 협력해 코로나19 상황으로 봄방학동안 문화 생활이 어려운 가족을 위해 마련한 온라인 독서·문화 프로그램이다. 지난해 8월 운영했던 여름방학 온라인 작가 강연회 ‘랜선북캉스’가 학생·학부모의 큰 호응을 얻었으며, 이에 봄방학을 맞아 두 번째 프로그램을 추진하게 됐다. 유튜브(Youtube)에서 ‘랜선북캉스’를 검색해 접속하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랜선 북캉스2’는 그림책, 문학, 미술, 영화, 뮤지컬 작가 9명과 함께 하는 실시간 온라인 북토크로 △랜선으로 떠나는 그림책여행(24일) △랜선으로 떠나는 문학여행(25일) △랜선으로 떠나는 예술여행(26일)의 주제로 3일간 운영한다. ‘랜선으로 떠나는 그림책 여행’은 ‘눈물바다’의 서현 작가와 유설화 작가, 황유진 작가와 함께 그림책 제작과정과 에피소드, 인생 그림책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림책 수다(서현 작가) △나답게 살기(유설화 작가) △어른의 그림책(황유진 작가)의 주제로 진행한다. 그림책 프로그램은 어린이도 참여할 수 있다. ‘랜선으로 떠나는 문학여행’은 ‘너라는 생활’의 김혜진 소설가와 박준, 서효인 시인이 우리의 일상이 문학으로 변모되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를 지배하고 이끌어가는 생활에 대하여(김혜진 소설가) △내가 좋아하는 것과 내가 살아가는 것(서효인 시인) △당신의 행동 지침(박준 시인)의 주제로 진행한다. ‘랜선으로 떠나는 예술여행’은 미술칼럼니스트, 뮤지컬연출가, 영화감독과 함께 화가들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와 고전이 영화와 뮤지컬로 변모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위로가 되는 그림(이소영 미술칼럼니스트) △뮤지컬 ‘모비딕’ 첫 항해의 출발(조용신 연출가, 신지호 피아니스트) △원작이 있는 영화(변영주 감독, 이다혜 씨네21기자)의 주제로 진행한다.‘랜선 북캉스2’ 참가 신청 기간은 8일부터 21일까지이며 네이버폼을 통해 온라인 사전신청을 받는다. 참가 신청 시 저자에게 하고 싶은 질문을 입력하면, 질문 채택자에게 저자 친필 사인본 1권을 증정하는 행사도 진행한다.서울시교육청은 “장기화된 코로나19 상황으로 대면하는 문화생활이 어려워짐에 따라 문화 교류의 장인 ‘랜선 북캉스2’를 통해 가족과 함께 책으로 소통하고 위로가 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2021.02.07 I 오희나 기자
"코로나19에 문화예술도 책으로"…예술도서 판매 30%↑
  • "코로나19에 문화예술도 책으로"…예술도서 판매 30%↑
  • [이데일리 김은비 기자] 연초까지 코로나19 확산이 이어지면서 사람들이 집에서 책으로 예술을 즐긴 것으로 나타났다. 예스24는 29일 예술 분야 도서 판매량을 분석한 결과 작년 동기 대비 올해 초 예술 분야 도서 판매량이 30.4%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예스24 관계자는 “코로나19 장기화에 따른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로 사람들이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그림 그리기나 클래시 감상 등의 취미생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사진=예스24)예스24에 따르면 이달에는 ‘방구석 미술관’‘방구석 미술관 2: 한국’‘읽기만 하면 내 것이 되는 1페이지 미술 365’ 등 미술을 쉽고, 재밌게 설명해주는 도서가 인기를 끌었다. 또 ‘김락희의 인체 드로잉’ ‘누구나 쉽게 그리는 마법의 수성펜 수채화: 기초·중급편’‘시크릿 캐릭터 드로잉’ 등 드로잉 관련 도서를 비롯해 ‘90일 밤의 클래식’ ‘LP로 듣는 클래식’ ‘송사비의 클래식 음악야화’ 등 클래식 음악 관련 도서가 독자들의 선택을 받았다.특히 인기 팟캐스트 ‘방구석 미술관’의 운영자 조원재 작가의 교양 미술서 ‘방구석 미술관’은 도서가 출간된 2018년 8월 이후 매년 꾸준히 예술 분야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기록했다. 책은 종합 베스트셀러에도 오르는 등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책은 출간 이후 예술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는 도서가 다수 출간되는 등 예술 분야 도서 트렌드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예술 분야 도서의 주요 구매자는 40대가 41.1%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으며, 30대도 24.6%의 비율을 보이며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남녀 성비는 3 대 7로 여성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다.예스24 관계자는 “올해도 코로나19의 완전한 종식을 기대하기 어렵게 된 만큼 예술 분야 도서의 성장세도 지속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2021.01.29 I 김은비 기자
 삭막한 담벼락, 이끼 대신 '예끼' 내려앉았네
  • [여행] 삭막한 담벼락, 이끼 대신 '예끼' 내려앉았네
  • 예끼마을 입구에 있는 예끼마을 조형물[안동(경북)=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안동호 호숫가에 자리한 경북 안동의 작은 시골마을. 이 마을의 이름은 ‘예끼’다. ‘예끼’는 누군가를 혼내거나, 혼이 날 경우에 듣는 말. 보통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쓰는 표현이다. 자연스레 ‘예끼’ 다음은 ‘이놈’이나 ‘고얀놈’이 입에 붙는 게 일반적이다. 왜 마을 이름을 ‘예끼’라고 지었을까. 예끼마을의 ‘예끼’는 ‘예술의 끼’의 줄임말이다. 예술의 끼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예끼마을’이었던 것이다. 이름처럼 마을 곳곳에는 크고 작은 갤러리와 새련된 카페가 자리하고, 오래된 골목은 예스러움이 세련된 감각으로 더해져 동네를 밝히고 있다. 여기에 세월의 이끼가 뒤덮인 고택과 그보다 더 오래된 가치를 소중하게 품고 사는 사람들의 삶의 터가 바로 예끼마을이다.선성현문화단지 옆 예끼마을 골목과 벽에 그려진 벽화. 예끼마을의 옛 모습과 선성수상길을 함께 그려놓았다.◇예안사람이 예끼마을에 정착한 이유예끼마을을 찾아가는 길. 안동시청에서 도산서원 방향으로 길을 나선다. 그렇게 30여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한국국학진흥원. 그 아래 산기슭에 산골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바로 예끼마을이다. 행정구역상 도산면 서부리다. 이 산골에 어떻게 마을이 생겨난 것일까. 사실 이 마을이 생겨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마을 사람 대부분도 예안이라는 곳에서 살던 사람들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사연일까. 45년 전인 1976년. 당시 낙동강 물길을 막아 안동댐을 건설하면서 여러 마을이 물속으로 사라졌다. 예안마을도 수몰 마을 중 하나였다. 대부분의 예안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차마 마을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은 산언덕으로 모여들었다. 발밑에서라도 고향을 두고 보려는 심산이었다.예끼마을 곳곳에 그려져 있는 다양한 벽화마을 규모가 400여 가구에 달했다. 대구를 왕래하던 직행 시외버스도 운행했을 정도. 장날이면 배를 타고 정성껏 지은 농작물을 한가득 머리에 이고 팔러 나오는 아지메와 고등어 한 손 손에 들고 비틀거리는 할배들로 북적댔다.옹기종기 모여살던 마을은 어느새 조용해졌다. 농사짓고 소 키우던 이웃은 새 돈벌이를 찾아 도시로 떠나고, 나이든 노인들은 세월이 가져다준 무게를 짊어지다 세상을 떠났다. 마을은 절반으로 줄었고, 그렇게 생긴 빈자리를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도 허전함으로 채워졌다.시간이 흘러 마을에 다시 생기가 돌고 있다. 마을로 젊은 사람들이 찾아오면서다. 지난 2018년 마무리된 안동의 ‘이야기가 있는 마을 조성사업’이 계기가 됐다. 잊혀지던 옛이야기도 하나둘씩 들춰내기 시작했고, 까맣게 이끼 때가 낀 담벼락에는 벽화로 이야기를 그렸다. 그러는 사이, 빈집들은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예끼마을 내 있는 갤러리 ‘근민당’◇호숫가 마을 속 예술과 끼가 있는 사람들이제 예술의 끼가 흘러넘치는 이 마을을 둘러볼 차례. 마을입구부터 큰 조형물이 반갑게 인사한다. 조형물 아래 ‘예술과 끼가 있는 마을’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여기서부터 안동호까지는 내리막길이다.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송곡고택이 있다. 예안마을에 있었던 것을 1975년 이곳으로 이전해왔다. 송곡고택 맞은편에 근민당(近民堂)이라는 미술 갤러리가 있다. 선성현 옛 관아가 한옥 갤러리로 탈바꿈한 것으로, 예술 작품에 한옥 고유의 품격을 더했다. 갤러리 창을 통해 보이는 마을 풍경은 어떤 풍경화보다도 투명하고 서정적이다.마을 곳곳에도 여러 갤러리가 있어 예술향이 가득하다. 조용했던 마을이 예술과 끼로 점점 채우고 있는 공간이다. 우체국은 유명작가의 전시공간과 교육공간으로, 마을회관은 작가 창작실로 탈바꿈했다. 안동선비순례길 종합안내소 앞의 ‘끼 갤러리’는 마을 아이들의 솜씨를 뽐내는 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예끼마을 골목 중 ‘글읽는 테마골목’에 있는 조형물마을 골목으로 발을 들인다. 골목에는 1970년대식 풍경을 남겨두기도 했고, 너무 과하지 않은 정도의 벽화를 그려 넣기도 했다. 선성수상길을 그려놓은 골목에서는 ‘인증샷’ 찍느라 분주했고, 글을 테마로 한 골목에서는 가슴 울리는 문구에 길을 멈췄다. 벽 속의 꽃들은 사시사철 언제나 만개해 반긴다. 때로는 아이들의 말뚝박기도 훔쳐보고, 오래된 이발소도 들여본다. 벽 위의 그림들은 그렇게 여유롭게 지나간다. 비록 화려함이나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지만, 벽 속의 세상은 순수하고, 평온하다. 그렇게 골목들을 다니다 보면 한겨울 한파도 녹여버릴 따스함이 가득하다.예끼마을에서 걷기 좋은 길인 ‘선성수상길’◇호수 위 아득하게 뻗은 수상 다리에 오르다안동호 쪽으로 선성현문화단지가 깃들어 있다. 안동호가 훤히 내려보이는 자리에 객사, 동헌, 관창 등 옛 관아를 복원해 놓았다. 선성현문화단지 앞, 잔잔한 호수 위에 수상 데크(Deck)가 길게 펼쳐져 있다. 이 길은 지난 2017년 만들어진 ‘안동선비순례길’의 1코스인 ‘선성현길’. 오천리 군자마을에서 시작해 코스 이름이 된 선성현문화단지를 거쳐 월천서당에 이른다. 군자마을 뒷산을 넘어 안동호반을 따라가는 길로, 편안한 산길과 걷기 쉬운 데크로 이어져 있다.선성현문화단지 아래 안동호 수면 위에 길이 1.2km, 폭 2.7m의 규모의 부교(浮橋)가 놓여 있다. 선성현길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길인 ‘선성수상길’이다. 이 부교 덕분에 편안하게 물 위를 걸으면서, 안동호의 아름다움에 빠져볼 수 있다. 선상수상길에서는 평지와 달리 호수의 잔잔한 물결이 부교를 타고 전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예끼마을에서 걷기 좋은 길인 ‘선성수상길’세상을 꽁꽁 얼어붙게 했던 한파도 안동호의 아름다운 풍광에 잠시 힘을 잃는다. 수상길 중간 지점에는 쉼터를 겸한 포토존이 있다. 모형 오르간과 책걸상, 간이 철판 등 추억의 조형물도 있다. 과거 안동댐 건설로 수몰된 옛 예안국민학교가 이 자리에 있었음을 기념하기 위함이다. 일부나마 학교의 옛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에서 잠시 코끝을 에는 시린 바람과 함께 따스한 추억에 젖어본다. 수몰로 인한 ‘실향민’들의 향수도 아련하게 전해져 오는 듯하다. 그렇게 한동안 신선처럼 호수 위를 거닐다 보니 현세의 번뇌가 마치 남 일 같이 느껴져 온다.선성현문화단지 입구◇여행메모△먹을곳= 예끼마을에는 식당이 제법 있다. 그중 마을 토박이가 추천한 식당은 민속식당은 안동찜닭이, 선비촌식당은 간고등어, 대풍식당은 오삼불고기, 나그네식당은 시골정식이, 미정식당은 육계장이다. 술을 좋아한다면 ‘맹개술도가’도 빼놓을 수 없다. 직접 빚은 세가지 도수의 안동소주를 잔에다 조금씩 시음해볼 수 있는 곳이다. △잠잘곳= 선성현문화단지 앞 주차장 쪽으로 한옥체험관이 있다. 모두 6동(8인용 2실, 6인용 2실, 2인용 2실), 세미나실, 식당 등의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외부는 한옥이지만, 내부는 현대식으로 만들어져 있어 한옥의 불편함을 최소화했다.
2021.01.29 I 강경록 기자
현대百 판교점, ‘연매출 1조 클럽’ 등극…5년 4개월만
  • 현대百 판교점, ‘연매출 1조 클럽’ 등극…5년 4개월만
  • [이데일리 함지현 기자]현대백화점은 판교점이 지난 2015년 8월 오픈 이후 5년 4개월만에 연매출 1조원을 돌파하면서 국내 백화점 중 최단기간에 ‘1조 클럽’에 가입했다고 11일 밝혔다.(사진=현대백화점)현대백화점에 따르면 판교점은 지난해(1월~12월) 누적 매출 1조 74억원을 기록했다. 지난 2019년 매출(9200억원)보다 9.4% 신장한 수치다.이번 현대백화점 판교점 매출 1조 돌파는 ‘코로나19’ 장기화로 오프라인 유통 채널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거둔 성과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는다. 실제 현대백화점 15개 점포 중 2020년 매출이 전년보다 증가한 점포는 판교점과 압구정본점(전년대비 3.5% 신장) 두 곳에 불과하다.이와 관련,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은 최근 “코로나19 장기화 등 어려운 영업 환경에서도 판교점이 매출 1조원을 달성한 것은 의미가 크다”며 직원들을 격려하고 그간의 노고에 감사의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현대백화점은 판교점의 원동력으로 △MD 경쟁력 △새로운 쇼핑·문화 경험 제공 △구매력 있는 핵심 고객층 보유 및 광역 상권 고객 증가 △지역 상권과의 동반성장 노력 등을 꼽았다. MD 경쟁력과 관련, 판교점은 2015년 오픈 이후 루이비통을 비롯해 까르띠에·티파니·불가리·피아제 등 글로벌 명품 브랜드를 연이어 입점시키며 서울 강남 백화점에 버금가는 명품 라인업을 갖췄다. 또한, 축구장 두 배 크기인 국내 최대 규모의 식품관(1만 3860㎡)까지 운영하면서 지난해에만 판교점에 2600만명의 고객이 찾았다. 이는 작년 현대백화점 15개 전 점포의 평균 방문객인 1000만명을 2.5배 웃도는 수준이다. 차별화된 쇼핑·문화 콘텐츠도 특징이다. 국내 백화점 중 유일하게 운영 중인 현대어린이책미술관이 대표적이다. 현대어린이책미술관은 의류 매장 40~50개를 입점시킬 수 있는 공간(2736㎡)을 2개의 전시실과 그림책 6500권으로 채웠다. 이 곳은 2015년 오픈 이후 지난해까지 약 75만명이 다녀갔다.복합문화공간인 판교점 ‘1층 열린광장(660㎡)’과 10층 문화홀(760㎡)도 각종 전시회나 문화공연, 명품 팝업스토어 등 차별화된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선보인다. 핵심 상권의 구매력 있는 고객층과 함께 광역 상권의 고객 비중이 증가하고 있는 것도 판교점 매출 1조 돌파에 한 몫을 했다. 판교점이 위치한 경기 분당·판교 지역은 소득 수준이 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데다, 트렌드에도 민감해 ‘제2의 강남’으로 불린다. 판교점의 VIP 고객 수는 지난해 서울 강남에 위치한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무역센터점과 비슷한 수준으로 늘었다.현대백화점 판교점과 10km 이상 떨어진 용인·안양·수원(광교)·여주 등 광역 상권에서 판교점을 찾는 원정 고객도 매년 늘고 있다. 광역 상권 매출 비중도 오픈 첫 해인 2015년 38.6%에서 지난해 55.3%로 늘어났다. 이는 현대백화점 15개 전점 평균 광역 상권 매출 비중(30%)보다 20%포인트 이상 높은 수치다.이밖에도 경기 성남·판교 등 지역 상권과의 상생·동반성장 노력 또한 판교점 성장에 일조했다. 현대백화점은 이번 매출 1조 돌파를 발판 삼아 판교점을 ‘대한민국 대표 백화점’으로 키우겠다는 구상이다. 이를 위해 명품 브랜드 추가 유치와 전층 리뉴얼을 계획하고 있다.우선, 명품 라인업 보강에 나선다. 올 하반기 이후 판교점에 프랑스 주얼리 ‘부쉐론’, 영국 패션 브랜드 ‘버버리’ 등 10여 개의 글로벌 유명 브랜드를 새로 선보일 예정이다. 명품 핵심 브랜드 유치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아울러 3대 명품으로 불리는 ‘에르메스’의 경우 내년 오픈을 목표로 이르면 올 하반기에 착공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며, 명품 시계 ‘롤렉스’도 입점을 위한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이와 함께 대규모 투자를 통해 판교점 전층에 대한 리뉴얼 작업도 단계적으로 추진한다. 올해 안에 영앤 리치(젊은 부유층)를 겨냥한 ‘2030 고객 전용 VIP 라운지’와 럭셔리 남성 전문관을 새로 선보일 계획이다. 내년 이후 지하 1층 식품관과 1층 화장품 매장 리뉴얼을 추진할 예정이다. 럭셔리 슈즈 전문관(슈 라이브러리), 아동 전문관(키즈 파크) 등 다양한 전문관도 새롭게 꾸며 나간다는 구상이다.김형종 현대백화점 사장은 “명품 핵심 브랜드 유치 등 초럭셔리 전략과 함께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일조해 판교점을 수도권을 넘어 대한민국 넘버원 ‘쇼핑 랜드마크’로 키워나갈 방침”이라며 “압구정본점, 무역센터점 등 다른 백화점도 고객의 생활에 차별적 가치를 제공하는 ‘메가 라이프 플랫폼’으로 육성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2021.01.11 I 함지현 기자
거칠고 황량한 '세한도'가 당대 최고 문인화인 이유는?
  • 거칠고 황량한 '세한도'가 당대 최고 문인화인 이유는?
  • [이데일리 김은비 기자] “‘세한도’는 당대 최고 문인인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온 정성을 다해 그린 그림이다. 그림 속 나무, 집, 여백이 상징하는 바와 그림을 그렸던 배경까지 여러 면을 볼 수 있어야 작품의 진정한 가치를 알 수 있다.”추사 김정희 연구의 권위자인 최완수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은 김정희의 대표적 문인화인 국보 제180호 ‘세한도’가 왜 대단한 작품인지에 대해서 이같이 설명했다.최근 미술품 소장가 손창근 선생이 아버지 대부터 소장하고 있던 ‘세한도’를 아무 조건 없이 국가에 기증해 화제를 모았다. ‘세한도’는 김정희가 1844년 제주도 귀양살이 시절, 변함없이 사제간의 의리를 지킨 제자 이상적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달부터 특별전 ‘한겨울 지나 봄 오듯-세한·평안’을 개최하고 ‘세한도’를 국민에 공개했다. 하지만 ‘세한도’의 명성만 듣고 작품을 접한 사람들은 얼핏 왜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는지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제자에 대한 고마움을 담았다고 했지만 그림은 온화하고 정성스럽다기보단 거칠고 단출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가로 69.2cm, 세로 23cm 크기의 종이 한가운데 어설픈 집 한 채와 소나무, 잣나무 몇 그루만 그려져 있다. 메마른 붓에 빡빡한 먹을 묻혀 종이에 문지르듯 그린 그림은 황량하다는 느낌마저 든다.전문가들은 ‘세한도’의 진면모를 알기 위해선 추사의 삶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추사의 삶을 정리한 영상 ‘김정희의 삶과 예술’을 국립중앙박물관 유튜브에 올리기도 했다.(그래픽= 문승용 기자)◇서예·예술에 ‘천재성’ 보인 명문가 자제김정희는 1786년 대단한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추사의 고조할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냈고 증조할아버지 김한신은 영조의 사위였다. 아버지 김노경은 이조판서를 지냈다. 이렇듯 든든한 가문의 배경에 더해 김정희는 어릴 적부터 글씨와 그림 그리기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정조 때 정승을 지낸 채제공은 김정희가 7살 때 쓴 ‘입춘대길’이라는 글씨는 보고 “이 아이는 반드시 명필로 이름을 떨칠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이듬해에는 북학파의 박제가가 김정희가 쓴 ‘입춘대길’을 보고 “이 아이를 키워 가르치고 싶다”고 말했다. 박제가의 제자가 된 김정희는 그를 통해 당시 청나라에서 유행한 고증학과 금석학(비석에 새겨진 글을 바탕으로 언어를 연구함)을 배울 수 있었다. 유 교수는 “이때부터 김정희는 기회가 된다면 스승처럼 북경에 가야겠다는 꿈을 키웠다”고 설명했다.23살이 된 김정희는 아버지가 청나라 사신으로 가면서 함께 중국 연경으로 가게 됐다. 수행원 자격으로 따라갔던 김정희는 자유롭게 중국의 다양한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또 완원, 옹방강 등 중국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가능성을 한껏 키울 수 있었다. 금석학을 발전시킨 대표적 인물이었던 두 사람은 김정희의 글씨에 한눈에 매료됐다. 이때부터 김정희의 개성적 서체인 ‘추사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추사체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옛 글씨체를 연구해 만든 새로운 글씨체로 김정희는 평생 추사체를 발전시켰다.김정희는 이처럼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34세에 장원 급제했다. 가문의 권세로 조정에서 급제를 축하할 정도였고 이후에도 명성을 날렸다. 규장각에서 대교를 지낸 그는 성균관 대사성, 형조참판 등을 지냈다.김정희가 당대 위대한 예술가이자 학자였다는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졸기(망자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기록)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대단한 역사적 인물에 대해서만 사망 기록이 남겨져 있다. 마지막 관직이 병조참판이었던 김정희는 지위 자체만 보면 실록에 기록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철종 7년 10월 10일 기록에는 ‘(김정희는) 이조판서 김노경의 아들로 총명하고 기억력이 투철해 여러 가지 책을 널리 읽었으며, 금석문과 그림과 역사에 깊이 통달했고, 초서 해서 전서 예서에서 참다운 경지를 신기하게 깨달았다’는 내용이 있다.세한도 늙은 소나무 뿌리 부분(사진=국립중앙박물관)◇척박한 제주도 귀양생활 중 완성한 ‘세한도’하지만 김정희는 가문이 힘을 잃기 시작하면서 완전히 바뀐 삶을 살았다. 김정희는 55세 때 정적의 모함으로 아버지를 잃고 자신도 고문을 받아 만신창이가 됐다. 김정희 역시 사형에 처해질 뻔했으나 그보단 아래인 위리안치형을 받아 제주도로 귀양을 갔다. 특히 김정희가 8년간 귀양생활을 한 대정현은 제주도에서도 바람이 사납고 땅이 척박해 사람이 살기 힘든 곳이었다. 이곳에서 김정희는 울타리 밖도 벗어날 수 없었다. 유 교수는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 없었던 추사는 그 어떤 때보다 자신과의 대화를 많이 했고 ‘세한도’, ‘추사체’ 등을 이 시기에 완성했다”고 설명했다.‘세한도’에서는 당시 김정희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오다연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추위를 그림으로 그리기가 쉽지 않아 일반적으로 눈이나 메마른 나무를 통해 표현을 한다”며 “하지만 김정희는 가장 거친 종이 위에 마른 붓과 진한 먹을 사용해 한겨울 매서운 추위를 누구보다 멋있게 그렸다”고 말했다. 또 푸른 소나무와 촉백나무는 논어의 구절을, 창문 하나밖에 없는 집은 김정희의 귀양생활을 드러낸다. 화면 좌측에 김정희가 정성스럽게 쓴 제작 사유도 깊이를 더한다. 오 학예연구사는 “조선시대에 이렇게 상세히 그림의 제목과 제작 사유를 쓴 작품은 드물다”고 부연했다. 여기에 청나라 문인 16명이 쓴 극찬은 ‘세한도’를 더욱 빛낸다. 최 소장은 “추사가 당대 최고의 문인이었기에 이같이 함축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또 이를 알아봐 준 추사의 중국 동료 학자들이 있었기에 ‘세한도’가 완성될 수 있었다”고 부연했다. 국보 제180호 세한도(사진=국립중앙박물관)◇중국 2000년 서예사 아우르는 ‘추사체’귀양생활 중 김정희의 ‘추사체’도 완성된다. 유 교수는 “이때 당시의 추사체를 보면 괴이하다고도 말할 수 있지만 추사체의 변천 과정을 보면 중국 명필의 고전에서부터 오랜 연구를 통해 창의성을 발현한 것을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유 교수는 박규수가 쓴 ‘추사체 변천론’을 인용해 그 과정을 설명했다. 이에 따르면 ‘추사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여러 차례 바뀌었다. 청년시절에는 글씨의 획이 너무 두껍고 골기가 적었다는 흠이 있었다. …그러다 만년의 귀양살이 이후에는 드디어 남에게 구속받고 스스로 일법을 이루게 됐으니 신이 오는 듯 기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했다’고 돼 있다.유 교수는 “이렇듯 김정희의 추사체는 중국 서예 2000년 역사를 아우르고 있다”며 “추사는 조선시대 서예사뿐 아니라 동양 서예사 전체에서 견줘도 위상이 뒤처지지 않는다”고 평했다.김정희 초상(사진=국립중앙박물관)
2020.12.15 I 김은비 기자
겨울의 시작, 벽화 가득한 골목 여행
  • [가보자! 경기북부]겨울의 시작, 벽화 가득한 골목 여행
  • [이데일리 정재훈 기자]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기 전 어디로든 떠나고 싶은 마음이지만 전국이 코로나19의 재확산으로 뒤숭숭하다.실내 공간을 피하고 최대한 거리두기를 유지할 수 있는, 아날로그 풍경이 남아 있는 마을이 대안이 될 수 있겠다. 골목길 담벼락에 벽화가 있으면 고향 생각도 나고 아련한 옛 생각에 잠길 수 있다. 경기관광공사는 눈은 즐겁고 마음은 따뜻해지는 그림으로 치장한 벽화마을을 소개했다.전곡 LED벽화마을.(사진=경기관광공사 제공)◇낮과 밤,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벽화, 연천 LED벽화마을한 권의 동화책을 옮겨둔 것 같은 벽화거리가 연천군 전곡읍에 있다.전곡초등학교 후문에서 이어지는 100m 정도의 짧은 골목에 멋진 그림들이 그려져 있어 마치 미술관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 이곳의 매력은 밤이 되면 그림 위로 별들이 수 놓이듯 켜지는 LED에 있다.낮에는 반사판과 조명이 그림과 잘 어우러진 소품처럼 그림 속에 숨어있다. 마을의 벽을 캔버스 삼아 그린 ‘그네 타는 소녀’는 자체로도 감탄사를 자아내는 예술 작품이며 주변 환경을 기발하게 활용해 아이디어가 톡톡 튀는 재치있는 벽화들도 볼 수 있다.담벼락에 뚫린 구멍을 쥐구멍처럼 이용해 쥐와 고양이를 그려 넣은 그림은 깨알 같은 재미가 전해진다.일몰시간엔 기다렸다는 듯이 LED 불빛이 자동으로 켜지면서 정겹고 재미있던 낮의 모습과는 다른 분위기가 연출된다. 마른 가지만 있던 나무에 반짝이는 나뭇잎이 생기고 가로등 모양 소품에도 실제로 불이 들어온다. 벽화속의 밤은 낮보다 한층 더 빛을 발한다.LED벽화마을은 어두운 골목이라 우범지대가 될 우려가 있었던 과거를 씻어내고 이제는 낭만과 아름다운 별빛 골목으로 새롭게 태어났다.화전동 벽화마을.(사진=고양시 제공)◇고향의 향기가 솔솔 풍기는 벽화, 고양시 화전동 벽화마을고양시에 꽃밭이라 불리는 예쁜 마을이 화전동이 있다.본래 화전이라는 지명은 육지에서 바다로 튀어 나온 곶의 바깥쪽을 의미해 과거엔 ‘곶밖’이라 불렀는데 그 ‘곶밖’과 음이 비슷한 꽃밭의 한자 표기에 따라 ‘화전(花田)’이 됐다.화전동에는 △화전동 골목갤러리 △벽화향기 꽃길 △고양600주년 기념 벽화 △벽화향기 동화길 △벽화향기 힐링길 △벽화향기 무지개길 △벽화향기 달맞이길 △벽화향기 이야기길 이라는 이름의 벽화 골목이 있다.들판 위로 피어난 하얀 민들레와 담벼락 위로 고개를 빼고 쳐다보는 개구쟁이 아이들 등 마을 담장에는 정겹고 귀여운 그림으로 가득하다. 천천히 걸으며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치 어릴 적 읽던 동화 속에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벽화는 골목에 놓아둔 화분의 꽃과도 잘 어울리고 그림 너머로 풍기는 김치찌개 냄새는 자연스레 향수를 불러일으킨다.화전동 벽화 마을의 재미거리는 벽화향기 동화길의 숨은그림찾기에 있다.고양시의 전래동화를 숨은그림찾기 벽화로 표현, 베라산 마을의 아기장사 벽화에는 뱀과 성냥개비, 촛불, 밤, 몽당연필이 숨어있으니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벽화를 따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나무와 풀, 하늘은 현실과 동화 속 나라를 연결 짓는 느낌을 준다. 벽화를 구경하며 걷다보면 어느덧 마을 꼭대기에 도착하는데 이곳에서 마을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2020.11.28 I 정재훈 기자
'대부업체 담보물…' 비운의 거장 조각 9점, 경매서 새주인 찾을까
  • '대부업체 담보물…' 비운의 거장 조각 9점, 경매서 새주인 찾을까
  • 서울 성북구 동선동 아틀리에서 작업 중인 생전의 권진규. 작가는 흙으로 빚어 가마에서 구워내는 전통적인 방식의 테라코타 자소상·인물상을 많이 남겼지만 작품세계는 구상과 추상을 넘나든다. 오른쪽은 케이옥션 ‘11월 경매’에 한꺼번에 출품한 9점 중 테라코타 구상조각 ‘상경’(1968·추정가 2억 5000만∼5억원·위부터)과 ‘말과 소년 기수’(1965·추정가 1억 2000만∼3억원), 테라코타 추상부조 ‘인체 4’ 부분(1965·추정가 1억 4000만∼3억원)이다(사진=권진규기념사업회·케이옥션).[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인생은 공(空). 파멸(破滅). 오후 6시 거사.’ 굴곡 많은 삶이 이 한 줄에 접혔다. 1973년, 51세의 촉망받던 천재 조각가가 서둘러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마지막 흔적. 그날은 모처럼 그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고 기억하는 이들이 있다. 고려대 박물관에 ‘가사를 걸친 자소상’ 등 아끼던 작품 세 점을 넣고, 전시장까지 천천히 둘러봤다고 했다. 오래 걸리진 않았나 보다. 서울 성북구 동선동 작업실로 돌아온 그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게 초저녁이었으니. 유독 그 죽음을 두곤 이야기가 무성했다. ‘한국 조각미술계의 절망적인 풍토를 견디지 못한 좌절 때문’으로 몰아가는가 싶었다. 그렇게 몇십년이 무심히 흘러갔고, 그렇게 묻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뒤늦게 새로운 ‘단서’가 떠올랐다. 숱하게 새겼을, 수많은 조각품의 모티브였던 ‘사랑’의 행보를 드러낸 편지들이 공개된 거다. 이유가 무엇이든 그저 살아남은 자들의 입방정일 뿐, 가슴 아픈 서사는 덮어둔 채 그는 떠났고 작품만 남았다. 비극적인 초상을 뒤집어쓴 붉은 점토 조각들이. 그런데 거기가 끝이 아니었나 보다. 그이의 작품과 자료 700여점이 대부업체의 담보물이 됐다는 기가 찬 소식이 들려온 거다. 조각가 권진규(1922∼1973). 한국 근대조각의 거장으로 불리는 그다. “내가 만든 아이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했더랬다. 그 말처럼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발행한 교과서에 수록될 정도로 작품세계는 독보적이었다. 눈을 맞추지 않은 채 무표정하게 허공을 응시하는 두상들은 반은 작가를, 반은 어느 여인을 닮아 있었다. 그런 ‘아이들’이 빛도 없는 창고에 담보로 잡혀 묶인 몸이 됐다는 얘기는 충격 그 자체였다. 권진규의 테라코타 인물상 ‘혜정’(1968). 25일 여는 케이옥션 ‘11월 경매’에 나와 추정가 2억∼4억원을 걸고 새주인을 찾는다. 한꺼번에 출품한 9점 중 한 점이다(사진=케이옥션).그 사정을 들여다보려면 다시 그즈음으로 거슬러야 한다. “작품 모두를 너에게 맡기고 간다”는 유언을 접했던 이는 여동생 권경숙 씨. 그러니 작품을 지켜낼 공간을 마련하는 일은 동생은 물론 유족에게 오랜 소원이자 숙제였을 거다. 그 돌파구가 2015년 가까스로 마련되는가 싶었다. 권진규가 고교시절을 보낸 춘천에 권진규미술관을 짓는 조건으로 작품 700여점을 40억원에 양도한 거다. 옥광산업체 대일광업과의 계약이었다. 그런데 미술관 건립은 차일피일 미뤄졌고 대일광업과 갈등을 빚던 유족은 결국 작품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대일광업 관계사인 대일생활건강이 대부업체 케이론에서 작품을 담보로 40억원을 대출받은 사실이 드러난 거다. 법원의 판결은 지난 8월 나왔다. 대일광업에 양도대금 40억원을 받고 작품을 돌려주라며 유족 손을 들어줬다. 합의는 차라리 순조로웠다. 항소 대신, 내년 3월까지 대부업체에 변제금 40억원을 유족이 대신 지급하고 작품을 전량 인수하는 것으로, 인수한 작품 700여점은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는 형태로 정리가 됐다. 하지만 당장 자금 마련이 급해졌다. 동생 경숙 씨는 일본에서 오빠의 작품을 찾아오는 데 40억원을 다 썼고 지난해에는 집까지 처분한 상태라고 했다. 생전의 권진규. 서울 성북구 동선동 아틀리에서 작업 중 잠시 카메라를 봤다. 한국 근대조각의 거장으로 불리는 그는 “내가 만든 아이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했다(사진=권진규기념사업회).△40억 부채 중 10억 마련 위해 8점 출품 권진규의 조각품 9점이 한꺼번에 경매에 나온다. 오는 25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케이옥션에서 진행하는 ‘11월 경매’에서다. 고육책이 맞다. 대부업체 부채 40억원 중 10억원을 갚기 위해서다. 30억원은 경숙 씨가 은행대출 등으로 지난달 변제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정이야 어떻든 참으로 오랜 세월 묻혀 있던 권진규의 ‘아이들’이 바깥세상으로 나오게 된 셈이다. 케이옥션이 올해 마지막으로 진행하는 이번 메이저경매에는 인물상 ‘상경’(1968), ‘혜정’(1968), ‘여인두상 선자’(1966)와 ‘말과 소년 기수’(1965) 등 테라코타 구상조각, 색을 입힌 테라코타 추상부조 ‘인체 4’(1965), ‘인체 1’(1966), ‘문 3’(1967), ‘여인과 수레바퀴’(1972) 등이 나온다. 권진규의 매우 드문 나무조각인 ‘입산’(1970s)도 있다. 출품작 9점 중 담보작품이 8점. ‘상경’ 2억 5000만∼5억원, ‘혜정’ 2억∼4억원 등을 포함해 전체 추정가는 14억∼27억원이다. 1922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권진규는 1946년 월남해 가족과 함께 서울 성북동에 정착한다. 일본 무사시노미술학교에 입학한 건 3년 뒤인 1949년이었다. 졸업하던 해인 1953년 ‘제38회 이과전’에서 ‘기사’ ‘말머리’로 잘난 일본인들을 제치고 특선을 수상한 건 두고두고 화제가 되기도 했다. 권진규의 추상조각 ‘입산’(1970s). 매우 드물게 나무로 제작했다. 25일 여는 케이옥션 ‘11월 경매’에 한꺼번에 출품한 9점 중 한 점이다. 추정가는 1억 5000만∼3억원(사진=케이옥션).표현은 절제됐고 질감은 거칠다. 흙으로 만들어 가마에서 구워내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실제 인물을 모델로 세운 테라코타 두상은 권진규의 트레이드마크다. 한국에선 흔히 사용하지 않은 아주 오래된 방식을 꺼내며 그는 이를 ‘한국적 리얼리즘’을 정립하는 일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거기에 있다. 생전 남긴 200여점의 테라코타 자소상·인물상만으로 작품이미지가 굳어왔던 터. 실제 그이의 작품세계는 일본 유학시절부터 작업해온 동물상, 산과 물과 인체를 납작하게 빚은 부조상 등 구상·추상을 수시로 넘나들었다. 이번 경매 출품작들은 적은 수로나마 그 다채로운 사조를 나열한다는 의의가 있다. △김환기 ‘항아리’ 경매최고 17억원…총 176점 130억원어치 권진규의 조각 9점을 포함해 이번 경매에는 176점이 나선다. 130억원어치다. 최고 추정가에는 김환기(1913∼1974)의 작품을 내세웠다. 회화 ‘항아리와 날으는 새’(1958)가 9억∼17억원에 새 주인을 찾는다. 1950년대 파리시절 김환기가 즐겼던 항아리·새·매화 등이 특유의 푸른톤에 걸린 반구상화다. 이중섭(1916∼1954)의 ‘물고기와 석류와 가족’(1954)은 추정가 8억 5000만∼15억원에 나왔다. 두 아들과 아내를 일본으로 보낸 뒤 그린 추상화톤 작품이다. 그리운 가족이 물고기와 석류를 들고 천진난만하게 엉켜 있는 모습에서 재회에 대한 열망을 엿볼 수 있다. 김환기의 ‘항아리와 날으는 새’(1958). 1950년대 파리시절 김환기가 즐겼던 항아리·새·매화 등을 특유의 푸른톤 배경에 걸었다. 25일 여는 케이옥션 ‘11월 경매’에 최고 추정가 9억∼17억원으로 나선다(사진=케이옥션).꽃을 그리지 않은 박수근(1914∼1965)이 그린 꽃그림 ‘모란도’(1960s)도 눈길을 끈다. 총 6점을 넘기지 않는다는 작가의 꽃그림 중 한 점이다. 인물 대신 꽃이지만 특유의 두툼한 마티에르는 여전하다. 흙내음 물씬한 향토적 색감도 살아 있다. 추정가는 2억 2000만∼5억원. 고미술부문에선 ‘대동휘적’(1400s)이 대표작으로 나선다. 안평대군 이용, 양사언, 한호 등 조선서예사에서 내로라하는 명필들의 작품 12점을 수록한 서첩이다. 추정가는 2억 2000만∼4억원. 추사 김정희(1786∼1856)의 글씨 4점도 여기에 힘을 보탰다. 제주 유배시절 가족에게 안부를 묻는 편지글인 ‘간찰’(추정가 900만∼2000만원)을 비롯해 ‘화제시’(2500만∼4000만원), ‘지점·루무’(8500만∼1억 2000만원) 등이 응찰을 기다린다. 박수근의 ‘모란도’(1960s). 꽃을 그리지 않은 박수근의 꽃그림이다. 25일 여는 케이옥션 ‘11월 경매’에 나와 추정가 2억 2000만∼5억원을 걸고 응찰을 기다린다(사진=케이옥션).
2020.11.23 I 오현주 기자
한 달간 6만명 불렀다…'검은 피카소' 바스키아 1조원대 작품
  • 한 달간 6만명 불렀다…'검은 피카소' 바스키아 1조원대 작품
  • ‘장 미셸 바스키아: 거리·영웅·예술’ 전 전경. 오전 10시 30분 개장하자마자 찾아온 관람객들로, 전시가 열리고 있는 서울 송파구 올림픽로 롯데뮤지엄은 이른 시간부터 북적였다. 왼쪽으로 바스키아의 ‘빅터(Victor) 25448’(1987·182.9×332.7㎝)이 보인다. 바스키아 생애 마지막 작품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오전 11시. 입구가 북적이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도슨트(박물관·미술관 등에서 관람객에게 전시물을 설명하는 안내인)가 한 무리의 인파를 이끌고 이동을 시작한 거다. 족히 40∼50명은 돼 보였다. 사전예약은 물론 발열체크, 출입명부기록 등 심란한 여러 관문을 다 거치자면 여간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됐을 이들이다. 게다가 주말도 아닌 평일 오전이 아닌가. 대단하다 싶은 건 이뿐만이 아니다. 도슨트의 설명 하나하나를 맹렬히 경청하는 자세다. 한마디도 빼놓지 않을 듯 눈과 귀를 세운 채 도슨트 뒤를 흐트러짐 없이 따르는 중이니까. 전시 관계자는 “이 행렬이 하루에 세 차례, 1시간 가까이씩 이어진다”고 귀띔한다. 서울 송파구 올릭픽로 롯데뮤지엄. 저들이 시간과 비용을 아낌없이 내놓은 전시는 ‘장 미셸 바스키아: 거리·영웅·예술’ 전이다. 지난달 개막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관람객이 몰려들었다고 했다. 30분 간격으로 끊어가며 하루에 들이는 관람객 수를 통제하는 중에도 한 달간 6만여명이 다녀갔다니. 코로나19 이전 블록버스터급 전시를 무색게 하는 인기다. 장 미셸 바스키아의 ‘뉴욕 뉴욕’(1981). 거리낙서가 캔버스로 들어온, 그 시작점에 있는 작품이다. 시끄러운 뉴욕의 전경을 그래피티의 자유로움으로 묘사하고 있다. 검은 얼굴, 왕관, 썼다 지운 암호같은 문자들이 가득하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그리도 집중하게 만들었을까. 그 시작은 아마 이쯤이었을 거다. 40여년 전인 1970년대 후반 미국 뉴욕 맨해튼 거리. 어느 날부턴가 평범치 않은 ‘벽그림’이 등장했다. 세련된 맛이라곤 전혀 없는, 어린아이가 어른 눈을 피해 급하게 긋고 칠하고 도망친 듯한, 그림이라기보단 차라리 낙서라고 해야 할 흔적. 그런데 참 묘한 일이다. 이질적이고 거칠고 자유분방한 형체들이 가슴을 흔드는 거다. 그 ‘범인’이 밝혀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장 미셸 바스키아(1960∼1988). 아이티공화국 출신의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계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중퇴한 고교생 신분의 흑인 청년. 문제의 벽그림은 그가 친구 알 디아즈와 함께 브루클린·소호거리 곳곳에 유려하게 펼친 스프레이 낙서였던 거다. 둘이 만든 ‘팀명’도 보였다. 세이모(SAMOⓒ). ‘흔해 빠진 낡은 것’이란 뜻에 저작권 기호(ⓒ)까지 붙여, 진짜 함부로 터치해서는 안 될 작품처럼 내놨다. 무엇보다 내용으로 유추할 주제가 시선을 끌었다. 물질만능주의, 인종차별, 권위주의를 비판하고 조롱하던 메시지가 말이다. 반듯한 백인들이 들락날락하는 소호거리의 화이트큐브 갤러리들이 ‘화들짝’ 할 수밖에. 장 미셸 바스키아의 ‘무제’(무쇠팔·1983)와 ‘무제’(기원전 2000년의 비너스·1982). 어린시절 큰 교통사고를 당한 뒤 회복기에 봤다는 책 ‘그레이의 해부학’은 바스키아의 작품에 두고두고 영향을 미쳤다. 뼈와 근육, 해골 등 신체기관을 그대로 노출한 독창적인 도상의 출현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하지만 세이모 활동은 얼마 못 가 깨지고 만다. “입장 차이”가 그 이유였다는데, 이는 되레 바스키아의 행보를 더욱 자유롭게 한 모양이다. 당장 거리낙서를 캔버스에 채우는 작업에 들어섰으니. 1980년 대규모 그룹전 ‘더 타임스 스퀘어 쇼’, 1981년 뉴욕 PS1의 ‘뉴욕/뉴웨이브’ 전이 그 출발점이다. 특히 ‘뉴욕/뉴웨이브’ 전에선 특유의 화법으로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자동차, 비행기, 해골, 해부학적 인체, 문자를 붙인 작품 15점을 걸면서 ‘비딱한’ 존재감을 확실히 알렸다. 장 미셸 바스키아의 ‘여분의 담배’(1982). 창틀을 그대로 떼어다가 그 위에 드로잉을 했다. 굳이 그림 그릴 판을 가리지 않는 것도 바스키아 작업의 특징이다. 왕관과 자동차 등 즐겨 등장시켰던 상징만으로 간결하게 완성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장 미셸 바스키아의 ‘올드카’(1981). 캔버스 작업 초기작이다. 선으로 구획지은 네 개의 화면을 자동차만으로 채웠다. 바스키아에게 자동차는 부이고 권력이며, 뉴욕이란 도시를 보여주는 강력한 상징이었단다(사진=롯데뮤지엄).△불꽃같이 살다 28세 요절한 천재 아티스트 딱 8년이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출현으로 ‘현대미술의 전설’이 되고 홀연히 사라진 것은. 28세에 약물중독으로 급하게 세상을 떠나버리기 전까지 그는 3000여점을 그렸고 20세기 시각문화에 새 지평을 열었다는 극찬을 받았다. 당대 팝아트의 선두주자였던 앤디 워홀(1928∼1987), 또 다른 ‘낙서화가’ 키스 해링(1958∼1990) 등과 교류하며 저항문화를 열고 다지기도 했다. 실제 워홀은 바스키아의 재능을 먼저 알아보고 아버지처럼 후원하며 공동작업도 함께했더랬는데. 그 정 때문인가. 워홀이 수술후유증으로 사망하자 비통해하던 바스키아도 이듬해 워홀을 따라나섰으니 말이다. 그 불꽃같은 삶에서 바스키아는 “나는 갤러리 마스코트가 아닌 스타가 되길 원했다”는 소망은 이뤘다. “난 흑인 아티스트가 아니다, 단지 아티스트일 뿐이다”란 자존감도 지켜냈다. “날 반항아로 생각하는 걸 즐긴다, 멋진 것 같다”는 자부심도 충족했던 듯 보인다. 그러곤 종내 이렇게 정점을 찍는다. “나는 한낱 인간이 아니다, 나는 전설이다.” 장 미셸 바스키아가 인간적으로 또 작품으로 교감했던 중요한 두 인물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왼쪽부터 키스 해링, 앤디 워홀, 바스키아. “창의적인 사람들과 함께 지내면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상대방에게도 나에게도 흥미로운 변화다. 아마 상호보완적일 거다”라는 문구는 바스키아의 것이다(사진=롯데뮤지엄·오현주 문화전문기자).그다지 의식하지 않은 듯한 몇몇 단어와 이미지를 나열해 부조리하지만 무겁지 않은, 익살스럽지만 천박하지 않은 완성을 보는 것이 바스키아 회화의 특징이다. SAMO, 슈퍼맨에서 따온 알파벳 ‘S’ 외에도 달러($), 센트(¢), 엔(¥), 저작권(ⓒ), 왕관·자동차·해골 등은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상징. 이를 알 듯 모를 듯한 텍스트와 뒤섞은 뒤 그 위에 선을 긋거나 덧칠을 하고, 또 열심히 지워냈다. 굳이 캔버스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손에 잡히는 대로 널빤지·문짝·창틀을 떼어와 화폭으로 삼았다. 유화·아크릴·수채물감, 오일스틱·크레용, 스프레이 등 색 내는 도구라면 무엇이든 가져다 쓰고. 장 미셸 바스키아의 ‘무제’(1982·245.1×229.2㎝). ‘노란 타르와 깃털’(Yellow Tar and Feathers)이란 부제가 달렸다. 다듬지 않은 나무패널을 이어붙이고 채색·콜라주 등 다양한 기법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전한다. 바스키아가 처음으로 로스앤젤레스 여행을 갔을 때 그린 작품으로 1982년 LA 가고시안갤러리서 연 개인전에 걸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장 미셸 바스키아의 ‘무제’(노란 타르와 깃털·1982·245.1×229.2㎝)를 옆에서 봤다. 이어붙인 두 개의 나무패널이 보인다. 하나는 안쪽, 하나는 바깥쪽을 화판으로 썼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그의 작품을 두고 ‘사회적 편견과 억압에 대한 저항’을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회가 정한 암묵적 약속이란 걸 깨고 사회를 덮고 있는 모순을 비웃었으니까. 언어체계, 인과관계, 백인중심 체제·사상까지. “대부분의 내 작품에는 아프리카계 주인공이 등장한다, 하지만 난 그들을 묘사한 그림은 흔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고 고백했을 정도니, 아마 그의 항거는 뼛속에서부터 삐져나왔을 거다. △반항·저항으로 뭉친 스타작가의 대규모 회고전 뉴욕에서 단독화물로 비행기에 태워 서울 잠실에 내린 전시작은 150여점이다. 단독으로 실어 나르는 데 부족하지 않은 가치는 ‘작품가’가 대신 말해준다. 회화와 드로잉, 도자기·사진 등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들의 가격이 1조원대에 달한다고 하니. 이 중에는 2000억원을 호가한다는 ‘다른 길 옆 들판’(The Field Next to Road·1981)을 비롯해, 생애 마지막 작품인 ‘빅터’(Victor 25448·1987)도 포함돼 있다. 장 미셸 바스키아의 ‘다른 길 옆 들판’(The Field Next to Road·1981). 이번 전시작 중 가장 비싼 작품으로 2000억원을 호가한다. 1981년 작품 중 가장 큰 그림(220.9×401.3㎝)이기도 하다. 뼈를 드러낸, 바스키아 특유의 인체묘사가 보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거리의 반항아’가 ‘세계 화랑가의 기대주’로 신분세탁을 한 것 역시 갈수록 천정부지로 솟는 그의 위상과 무관치 않다. 현재 그는 데이비드 호크니, 제프 쿤스 등과 함께 세계서 가장 비싼 현대미술가군에 들어 있다. 가장 가깝게는, 2017년 5월 뉴욕 소더비경매에서 회화 ‘무제’(Untitled·1982)가 1억 1050만달러(약 1239억)에 낙찰되며 여러 기록을 두루 바꿔놓은 전적이 있다. 1980년대 이후 작품 중 경매 1억달러를 넘긴 첫 작품, 미국 작가 중 최고가 작품 등등. ‘검은 피카소’란 별칭을 생전의 바스키아는 좋아하지 않았단다. 그런데 어쩌겠나. 그를 한 단어로 표현할 이만한 수식을 아직 찾아내지 못하고 있으니. “내가 아프리카계 유색인인 게 내 성공과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 나를 아프리카계 아티스트와 견줄 것이 아니라 모든 아티스트와 비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맞다. 그래서 피카소다. 검은 얼굴에 왕관을 씌운 영웅(‘무제’ 1984 등)을 아무나 그리겠나. 전시는 내년 2월 7일까지. 평일 오전 11시, 도슨트 프로그램에 참여한 관람객 40여명이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롯데뮤지엄 전시 관계자는 “도슨트 뒤를 따르는 이 행렬이 하루에 세 차례, 1시간 가까이씩 이어진다”고 귀띔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생전의 장 미셸 바스키아(1960∼1988). 불꽃처럼 살다가 불꽃처럼 사라졌다. 1980년대 초 뉴욕화단에 혜성처럼 나타나 28세에 약물중독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8년여 동안 3000여점을 남기고 자신의 말처럼 ‘전설’이 됐다(사진=롯데뮤지엄).
2020.11.09 I 오현주 기자
'키즈맘' 사로잡은 현대프리미엄아울렛 스페이스원
  • [르포]'키즈맘' 사로잡은 현대프리미엄아울렛 스페이스원
  •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신도시 현대프리미엄아울렛 4호점 ‘스페이스원’ 전경(사진=윤정훈 기자)[경기 남양주=이데일리 윤정훈 기자]입동(立冬)을 하루 앞둔 6일 오후 강남에서 자동차로 40분을 달려, 구리IC를 빠져나오니, ‘현대프리미엄아울렛 스페이스원’이 나타났다. 스페이스원은 경기 동북권에 문을 여는 첫 대형 쇼핑시설로, 현대백화점의 네 번째 프리미엄아울렛이다. 무엇보다 접근성이 좋은 것이 강점이다. 구리IC, 남양주IC, 북부간선도로와 가까워 인근 남양주시와 서울 노원·중랑·강동구 등 서울 동부권에서 30분이면 방문할 수 있다.면적은 6만 2393㎡(약 1만 8874평) 규모로, 기존 교외형 아울렛에 미술관·공원 등 문화·예술적 요소를 결합한 국내 첫 ‘갤러리형 아울렛’이다. 총 2730대를 주차할 수 있을 정도로 주차장도 넉넉하다. 지하 1층(1200대)과 지상(600대), 별도의 주차타워(930대)로 구성돼 있다.스페이스원에 들어서면 쇼핑을 하다가 쉴 수 있는 야외 벤치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특히 아이와 함께 오는 ‘키즈맘’이 쇼핑과 놀이를 함께할 수 있도록 아울렛 곳곳에는 전용 공간이 마련돼 있다. 스페이스원 A관 3층 모카 가든 전경(사진=윤정훈 기자)세계적 아티스트 겸 디자이너 ‘하이메 아욘(Jaime Hayon)’과 협업해 꾸민 스토리텔링형 문화·예술 공간 ‘모카 가든’이 대표적이다. A관 3층의 하이메 아욘 가든은 ‘이야기를 건내는 조각정원’을 콘셉트로 도심 속 작은 산책공간을 연상케 한다. 모카 라이브러리는 그림책 원화 전시와 문화·예술 교육 프로그램 등을 진행하는 미술관으로, 아이들이 흥미를 가질만한 요소가 많다. 모카 플레이는 놀이시설과 벽면에 인류 진화 과정을 담은 벽화가 함께 있는 공간이다. 같은 층의 실내 스포츠 문화공간 바운스는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놀이 공간이다. 트램폴린과 멀티스포츠존 등으로 구성돼 있어 아이들이 체육활동을 즐길 수 있다.스페이스원 A관 인도어몰 3층은 키즈 전문관으로 오프라벨·닥스키즈·리틀그라운드·아이러브제이 등 30개의 키즈 브랜드가 입점했다.쇼핑 후에 커피와 따뜻한 빵을 즐기면서 쉴 수 있는 공간은 A관 1층 밤부 베이커리와 2층 성북동빵공장이 있다. 또 푸드스퀘어 내에는 폴바셋이 입점해 있다.백화점 급의 F&B브랜드도 다수 입점해있다. 미국 1위 스테이크 전문점 텍사스 로드하우스 국내 1호점, 남산돈까스, 이태원더버거 등이 푸드스퀘어에 있고, 성북동면옥과 도토리편백집은 3층 식당가에 자리잡고 있다.스페이스원 A관 3층 바운스 앞에 고객들이 대기하고 있다.(사진=윤정훈 기자)아이와 함께 쇼핑을 나온 박수진(37·남양주)씨는 “남편과 아이들 겨울 옷 쇼핑을 하러 왔다”며 “집과 가깝고 맛집들이 많아 자주 방문할 것 같다”고 말했다.친구와 쇼핑을 왔다는 김우덕(38·서울 강동구)씨는 “나이키 매장 등이 큰 폭의 할인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왔다”며 “1시간 넘게 대기하기 했지만, 득템하고 간다”고 했다.쇼핑몰은 출입구 뿐 아니라 매장 마다 QR코드를 찍고, 온도 체크를 하는 등 코로나19 방역에도 신경을 쓴 흔적이 엿보였다. 현대아울렛은 고객이 안심하고 쇼핑할 수 있는 매장 환경을 만들기 위해 스페이스원 전 직원이 발열 패치가 부착된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다.김형종 현대백화점 사장은 “스페이스원의 입지적 강점과 다른 프리미엄아울렛에서 경험할 수 없는 문화·예술 콘텐츠를 통해 고객들에게 국내 프리미엄아울렛의 새로운 가치와 기준을 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2020.11.07 I 윤정훈 기자
<20> 돈에 눈뜬 미술…'비즈니스 코치 시대' 열다
  • [이주헌의 혁신@미술]<20> 돈에 눈뜬 미술…'비즈니스 코치 시대' 열다
  • 데이미언 허스트의 ‘찬가’(Hymn·1999). 높이 6m, 무게 6t에 달하는 이 거대한 조각작품은, 허스트가 아들이 가지고 놀던 15파운드(약 2만 2000원)짜리 ‘어린이 해부학 장난감’을 크기만 키워 만든 것이다. 영국 런던 사치갤러리가 100만파운드(약 15억원)에 이 작품을 사들여 2000년 연 전시에서 처음 공개했다. 허스트는 ‘찬가’를 총 4점 제작했는데, 그 중 한 점을 한국 아라리오갤러리가 소장하고 있다. 사진 속 작품은 충남 천안 아라리오조각공원에 설치돼 있다(사진=ⓒ아라리오컬렉션&아티스트·아라리오갤러리 제공).미술은 사람을 움직였습니다. 밥으로만 채울 수 없는 풍요와 평화를 안겨줬으니까요. 그림의 힘이고 조각의 에너지입니다. 하지만 미술의 역할이 이뿐이라 한다면 미술을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문명을 이끌고, 의식을 뒤집고, 결정적으로 돈의 흐름을 주도했던, 그것을 못 본 겁니다. 미술의 사조와 양식이 탄생할 때마다 세계경제에는 ‘변화의 그림’이 걸렸습니다. 바로 ‘혁신’을 주도했던 겁니다.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이주헌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미술로 이룬 혁신’의 현장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상으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이주헌 미술평론가] 충격적이고 도발적인 작품들로 1990∼2000년대 세계 미술계를 휩쓴 YBAs(Young British Artists). 그 선두주자인 데이미언 허스트(55)는 새롭고 선구적인 ‘비즈니스 전략’으로 남다른 성공을 거뒀다. 자신은 창작에만 전념하고 자신과 관련한 비즈니스를 도맡아 처리해줄 ‘재무·경영전문가’를 ‘영입’한 것이다. 매니지먼트산업이 발달한 연예계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비즈니스 체제이지만, 이런 체제는 사실 최근까지도 미술인 사이에서는 지극히 생소한 것이었다. 하지만 바로 이 같은 비즈니스 전략을 택함으로써 허스트는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큰 성공을 맛볼 수 있었고, 미술인으로 하여금 미술을 보다 산업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게 만들었다. 자연히 그 이후 뛰어난 활약을 보인 젊은 미술가들 가운데서는 허스트의 ‘혁신’을 좇아 비슷한 종류의 매니지먼트 계약을 하는 사례가 부쩍 늘어났다. 허스트가 속한 YBAs는 ‘대처의 아이들’이라고 불린다. 원래 대처의 아이들은 영국 마거릿 대처의 집권기(1979∼1990)에 교육을 받은 세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대처리즘은 인플레이션을 극복하고 경기를 회복시켜 이른바 ‘영국병’을 치유하는 효과를 가져왔지만, 복지와 교육·문화 분야의 예산과 지원을 크게 줄여 특히 젊은 예술가들에게 큰 타격을 줬다. 그렇게 ‘문화의 낙후화’를 경험한 세대가 YBAs고, 그래서 그들 또한 대처의 아이들로 불리게 됐다. 그러나 이렇게 열악해진 문화적 환경이 허스트를 비롯한 YBAs에게는 오히려 큰 기회가 됐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더 이상 공적 제도와 기관에 의지할 수 없게 된 젊은 예술가들은 어떻게 해서든 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감을 가졌고, 이를 위해 전통적인 예술가상을 떨쳐버리고 이른바 ‘기업가정신’으로 무장하게 됐다. 그 선두에 바로 허스트가 서 있었다. △전통적 예술가상 떨치고 ‘기업가정신’ 무장해 성공허스트는 아직 미대생이던 1988년, 동료 미술학도들을 추동해 ‘프리즈’(Freeze)라는 전시를 조직했다. 이들은 전시장소였던 런던 항만공사 건물 섭외에서부터 작품 설치, 홍보, 마케팅, 판매에 이르기까지 어떤 갤러리나 기관의 도움도 받지 않고 ‘DIY’로 일관해 큰 성공을 거뒀다. 이 전시를 학생들의 아마추어 전시쯤으로 생각한 사람들은 현장에 가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작품의 완성도도 매우 높았지만, 완벽한 디스플레이에 고급스러운 도록, 거기에 저명한 평론가의 서문까지 모든 것을 ‘최고 수준’으로 선보였던 것이다. 홍보 또한 완벽하게 해서 당대 최고 컬렉터인 찰스 사치(73·사치갤러리 설립)와 최고의 큐레이터인 니컬러스 세로타(74·전 테이트미술관장)도 이 전시를 보러 갔다. 젊은 미술학도들의 ‘자생력’에 강한 인상을 받은 사치는 한동안 허스트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가 돼 이후 그의 성공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바로 이 도약의 시기에 허스트는 죽음 같은 섬뜩한 주제 아래 상어를 포르말린 상자에 넣어 내놓거나 반으로 가른 어미 소와 송아지를 포르말린 상자에 넣어 내놓는 등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작품들로 승승장구했다. 그 결과 허스트는 1995년 영국 최고의 미술상인 ‘터너 상’을 거머쥐었다. 자연히 수입도 급격히 늘어났다. 그런데 바로 이 성공으로 허스트에게 골치 아픈 문제가 생겼다. 바로 세금 정산이었다. 갑자기 돈을 많이 벌게 된 허스트는 세무문제에는 젬병이어서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그렇게 허둥지둥하는 사이 체납액이 발생하는 등 내야 할 세금은 산더미처럼 불어났다. 허스트는 돈을 버는 게 재앙 속으로 빠져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데이미언 허스트가 2012년 미국 뉴욕 가고시안갤러리가 연 ‘데이미언 허스트: 1986∼2011 스폿 페인팅의 모든 것’ 전에서 포즈를 취했다. 당시 전속화랑이던 가고시안갤러리와 손잡고 일명 ‘땡땡이그림’만으로 뉴욕·런던·파리·홍콩 등 8개 도시의 11개 가고시안갤러리에서 글로벌 세일에 돌입한 자리였다.△돈을 두려워했던 허스트에게 던피 “돈은 즐기는 것” 이때 허스트 앞에 혜성처럼 등장한 사람이 회계사였던 프랭크 던피(1937∼2020)다. 던피는 배우 이멜다 스턴튼, 레이 윈스턴 등 주로 연예인이나 공연업계 종사자들의 재무와 비즈니스를 관리해주던 사람이었다. 그러던 그가 우연히 런던의 한 클럽에서 허스트의 어머니를 만나 대화를 나눈 것을 계기로 1995년부터 허스트의 매니지먼트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다. 훗날 그에게 붙은 별명이 ‘허스트 제국의 건설자’이니 결과적으로 둘의 결합은 매우 성공적인 것이었다. 물론 이는 비즈니스와 관련한 자신의 단점을 직시하고 화가에게도 매니저 혹은 비즈니스 코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자각한 허스트의 선구적인 깨우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그 자체가 하나의 혁신이었다. 던피는 허스트의 일을 맡아 보면서 그가 실은 비즈니스 감각이 매우 뛰어난 예술가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문제는 돈에 대한 허스트의 부정적인 관념이었다. 세무문제로 곤경을 겪은 데서 알 수 있듯 허스트 역시 전통적인 예술가들처럼 돈에 대해 ‘무지’했다. 그래서 그 부정적인 돈 관념만 바꿔준다면 시장에서 그의 가치를 훨씬 크게 제고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던피는 허스트에게 “돈은 관리하는 것일 뿐 아니라 즐기는 것”이라고 충고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경제교육을 하듯 핵심적인 조언을 계속하자 허스트도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 훗날 허스트는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돈에 대해 개의치 않았다. 아니 그런 척했는지 모른다. 돈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하지만 프랭크가 돈에 대한 나의 관념을 바로잡아줬다.” 작품 ‘찬가’(1999)가 100만파운드(약 15억원)에 팔렸을 때 아직 30대의 젊은 작가로서 허스트는 ‘내 작품이 과연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가’ 하는 의구심과 당혹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작가 스스로 자신의 예술이 지닌 시장 가치를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때도 던피는 이렇게 충고했다. “가치에 대해 네가 걱정할 필요는 없어. 미술작품의 값어치는 (네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 다음 사람이 얼마를 지불하느냐에 달려있을 뿐이야.” 던피는 철저하게 시장 논리와 평가에 기초해 허스트의 작품을 세일즈했고, 그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다. 허스트의 다이아몬드 해골 작품 ‘신의 사랑을 위하여’(2007)가 5000만파운드(약 734억원)에 시장에 나왔을 당시 그 가격을 납득하기 어려웠던 한 기자가 “가격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하지 않느냐”고 묻자, 던피는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너무 싸게 내놨다”고 응수할 정도였다. 8601개의 다이아몬드를 씌운 해골 ‘신의 사랑을 위하여’(2007). 데이미언 허스트가 실제 18세기에 살았던 사람의 두개골에 백금을 입히고 다이아몬드를 촘촘히 박아 제작했다.△갤러리와 수익 배분비율 조정 등 합리적 ‘사업’ 허스트의 미술 비즈니스를 관리하면서 던피가 허스트에게 안긴 가장 큰 사업적 이득은 그와 갤러리의 수익 배분비율을 5대 5에서 7대 3, 8대 2로 조정한 것이었다. 심지어는 9대 1인 경우도 있었다. 미술가와 갤러리의 배분비율은 일반적으로 5대 5가 국제적인 관례다. 미술가는 시장에서 인기가 올라도 갤러리와 이를 재조정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협상력에 한계가 있는 데다가 “미술가가 돈만 밝힌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분야의 전문가를 대리인으로 두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회계사로서 던피는 철저하게 데이터에 기초해 합리적인 분석으로 이 같은 비율을 관철해냈다. 던피의 합류로 생긴 시너지 효과가 가장 잘 드러난 사례 가운데 하나는 2008년 9월 15일 런던 소더비에서 진행한 허스트 단독경매다. 작가와 경매사, 이 둘 사이를 섬세하게 조율한 던피는 무려 2억 75만달러(약 2356억원)의 낙찰총액으로 화가 단독경매로는 깨지지 않을 최고기록을 이끌어냈다. 물론 이차시장인 경매에는 한 번 이상 팔렸던 작품이 올라오는 게 관례인데, 이런 관례를 깨뜨리고 신작들을 대거 내놓았으니 일차시장을 구성하는 갤러리 쪽에서 불만이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이해가 충돌하고 정교한 마케팅 전략이 필요한 이런 프로젝트는 화가 혼자서 풀어가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던피 같은 유능한 매니저가 없었다면 경매사와 세세한 조건을 조율하고 전속 갤러리들의 불만을 잠재우며 매끄럽게 홍보를 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미술도 이제 연예산업처럼 에이전트나 기획사가 따라붙는 산업화의 시대가 왔음을 이렇듯 허스트와 던피가 선구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 영 브리티시 아티스트 ‘YBAs’(Young British Artists) 1980년대 말부터 활약한 영국의 젊은 미술가들을 통칭한다. 화가·조각가·아티스트 등 장르를 망라한 예술가집단으로 데이미언 허스트를 앞세워 트레이시 에민, 마크 퀸, 게리 흄, 채프먼 형제, 사라 루카스, 더글러스 고든, 제니 사빌 등 현대미술을 이끌어온 대다수가 여기에 포함된다. 뚜렷한 개성과 독립적이고 자유분방한 미디어로, 전통적 회화·조각은 빼버린 파격적이고 스펙터클한 개념미술을 세상에 알렸다. 대다수는 런던 골드스미스대 출신이다. 1988년 졸업을 앞둔 허스트가 동료들과 기획한 전시 ‘프리즈’(Freeze)를 통해 처음 존재를 알렸다. 풋내기 작가들이 런던 도클랜드의 빈 창고건물을 무료로 빌려 준비한 ‘프리즈’ 전이 YBAs의 기원이 된 셈이다. 바로 그때부터였다. 영국의 주요 컬렉터이자 딜러인 찰스 사치가 이들 젊은 작가군단의 작품을 대거 사들이기 시작했고, 1992년 자신의 사치갤러리에서 ‘영 브리티시 아티스트’란 타이틀로 전시를 열며 이들을 향한 열풍에 부채질을 했던 것. 실제 YBAs란 명칭은 이 전시를 통해 고유명사가 됐다. 이후 YBAs가 세계미술계에 ‘뜨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1997년 로열아카데미서 연 ‘센세이션’(Sensation) 전이 결정적이었다. 사치가 소장한 YBAs의 작품들을 한꺼번에 내놓은 전시는 관람객 30만명을 불러 모았다. 고풍스러운 로열아카데미에서 전위적·실험적인 설치미술이 등장한 자체가 이미 ‘센세이션’ 했던 전시는, 비단 ‘젊은 스타작가 탄생’에 머물지 않고, 영국 현대미술의 부흥을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1997년 영국 런던 로열아카데미에서 연 ‘센세이션’ 전 포스터.△이주헌 미술평론가는… 미술로 삶을 보고 세상을 읽는다. 좀 더 많은 이들이 미술을 통해 일상의 풍요를 누리도록 글 쓰고 강연하는 일이다. 소명으로 여긴다고 했다. 발단이 있다. 홍익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돌연 일간지 기자가 되면서다. 그림에 관심을 잃어서가 아니라 그림을 막은 생계 때문이었다. 낮에 일하고 밤에 그리자 했다. 하지만 ‘투잡’은 쉽지 않았다. 미술담당 기자생활에서 얻은 필력과 생각을 가지고 현장으로 나왔다. 미술을 대중과 제대로 연결하는 미술평론가의 ‘진정한’ 역할, 그것을 해보자 했다. 그렇게 가나아트 편집장을 하고, 학고재 관장을 오래 한 뒤 서울미술관 초대관장까지 지냈다. 지금은 양현재단 이사로 있으면서 온전히 글과 강연에만 집중하고 있다. 지은 책이 수십 권이다. 굳이 대표작을 꼽자면 ‘신화의 미술관’(2020), ‘리더의 명화수업’(2018), ‘역사의 미술관’(2011), ‘지식의 미술관’(2009), ‘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 1·2’(2005) 등이 있다.
2020.11.06 I 오현주 기자
남양주 ‘현대프리미엄아울렛 스페이스원’ 4일 프리오픈
  • 남양주 ‘현대프리미엄아울렛 스페이스원’ 4일 프리오픈
  • 현대프리미엄아울렛 스페이스원 전경(사진=현대백화점그룹)[이데일리 윤정훈 기자]수도권 동북부 첫 프리미엄 아울렛인 ‘현대프리미엄아울렛 스페이스원(SPACE1, 이하 스페이스원)’원이 문을 연다.현대백화점은 오는 4일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신도시에 프리미엄아울렛 4호점인 스페이스원을 오픈한다고 3일 밝혔다. 4일과 5일 이틀간의 프리오픈에 이어 6일 공식 오픈할 예정이다. 스페이스원은 기존 교외형 아울렛에 미술관·공원 등 문화·예술적 요소를 결합한 국내 첫 ‘갤러리형 아울렛’을 표방한다. 스페이스원의 문화·예술 관련 시설 면적은 총 3만 6859㎡(1만 1150평)로, 현대백화점이 운영중인 아울렛의 점포별 문화·예술 관련 시설 평균 면적(6611㎡)보다 6배 가량 넓다.세계적 아티스트 겸 디자이너 ‘하이메 아욘(Jaime Hayon)’과 협업해 꾸민 스토리텔링형 문화·예술 공간 ‘모카 가든’ 등 볼거리도 풍부하다. 모카 가든은 A관 인도어몰 3층에 들어서며, ‘하이메 아욘 가든’, ‘모카 라이브러리’, ‘모카 플레이’ 등 총 3개 시설로 구성된다. 하이메 아욘 가든은 ‘이야기를 건내는 조각정원’을 콘셉트로 해 하이메 아욘이 직접 디자인한 7점의 조각 작품들이 들어선다. 모카 라이브러리는 그림책 원화 전시와 문화·예술 교육 프로그램 등을 진행하는 미술관이며, 모카 플레이는 놀이시설과 벽면에 인류 진화 과정을 담은 벽화가 함께 있는 공간이다. 국내 작가들의 예술 작품도 설치·전시된다. 1층 야외 광장에 조각가 심재현이 작업한 높이 7m, 길이 13m의 대형 조형물인 ‘더 카니발리아 20(The Carnivalia 20)’이 설치되며, 매장 내부에는 설치 미술가 최정화 작가가 만든 5m 크기의 ‘스타(Star)’ 등이 들어선다.입점하는 브랜드는 식음료(F&B) 매장을 포함해 총 310여 개다. 발렌티노·휴고보스·비비안웨스트우드 등 명품브랜드와 폴로·DKNY·라코스테 등 합리적인 가격대의 브랜드가 입점해 있다.스페이스원의 이름은 ‘쇼핑(Shopping)과 놀이(Play), 예술(Art), 문화(Culture), 경험(Experience)’와 ‘최초·단 하나’의 의미를 담은 ‘원(One)’의 앞 글자를 따 조합했다. 고객에게 쇼핑·문화·예술 등 수준 높은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공간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현대백화점은 입지적 강점과 편리한 교통망을 바탕으로 1~2차 상권인 서울 전 지역과 경기 남양주·구리·의정부·하남 외에 양주·포천·가평 등 경기 동북부 상권(3차) 고객까지 최대한 흡수 하겠다는 전략이다. 이를 통해 오픈 첫해 매출 3,500억원을 달성한다는 목표다. 김형종 현대백화점 사장은 “스페이스원의 입지적 강점과 다른 프리미엄아울렛에서 경험할 수 없는 문화·예술 콘텐츠를 통해 고객들에게 국내 프리미엄아울렛의 새로운 가치와 기준을 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2020.11.03 I 윤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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