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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용의 세계시민] 대전자령대첩을 아시나요? 90주년 맞은 독립군의 승전보
-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독립운동가 지청천 장군.[이희용 다문화동포팀 자문위원]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독립군이 거둔 3대 대첩으로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1933년 대전자령전투를 꼽는다. 학자에 따라서는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를 하나로 이어진 싸움이라고 보고 대전자령전투와 함께 2대 대첩이라고 일컫기도 한다.지청천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은 중국군과 손을 잡고 대전자령(大甸子嶺)에서 전투를 벌여 일본군 130여 명을 살상하고 장갑차 2량, 박격포를 비롯한 각종 포 8문, 기관총 110자루, 소총 580자루, 탄약 300상자, 피복과 담요 등 군 장비 부속품 2,000여 건, 1개 대대의 1년 치 식량 등 마차 200여 대 분량에 이르는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했다. 역대 최대의 전과를 올렸음에도 대전자령대첩은 청산리전투에 비해 덜 알려져 있다. 승리를 이끈 지청천 장군도 청산리의 영웅 김좌진 장군이나 봉오동의 전설 홍범도 장군보다 존재감이 덜한 느낌이다. 1930년대로 접어들며 만주의 독립운동 진영은 암울한 상황을 맞고 있었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주요 지역을 점령한 데 이어 이듬해 꼭두각시 나라 만주국을 세웠다. 일본이 부설한 철도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1905년부터 만주에 주둔해오던 관동군도 대대적으로 증강됐다. 만주가 일본 손아귀에 들어가다 보니 일제의 수탈과 착취를 피해 만주로 건너온 한인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한인의 지원에 기대고 있는 독립군의 기반과 여건도 열악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위기는 새로운 기회를 낳는 법. 무장독립투쟁 세력은 조직을 통합하고 전열을 정비했다. 북만주에서는 지청천 장군의 한국독립군, 남만주에서는 양세봉 장군의 조선혁명군으로 재편됐다.중국도 가세하고 나섰다. 만주 중국인들은 일본의 영향력 확대를 달갑지 않게 여기면서도 일본군과의 정면충돌을 두려워해 한인들의 무장투쟁을 마뜩잖게 보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이 만주 지배 야욕을 노골화하자 항일투쟁에 나서면서 독립군과 연대한 것이다. 한국독립군은 중국호로군, 길림자위군, 중국구국군 등과 함께 쌍성보, 대전자령, 사도하자 등에서 일본군과 싸워 이겼다. 조선혁명군은 중국의용군과 연합해 영릉가와 홍경성에서 승전했다. 이 가운데 가장 큰 전과를 올린 대전자령전투는 1933년 6월 30일 치러졌다. 조선 회령에 주둔하던 일본군 19사단이 길림성 왕청현에 파견됐다가 복귀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한중 연합군은 대전자령에 이르는 계곡 양편에 매복했다. 일본군은 1600여 명이었고 독립군과 중국군은 각각 500명과 2000명 규모였다. 지청천은 공격 개시를 앞두고 병사들에게 이렇게 훈시했다.“태평령(대전자령)의 공격은 3천만 대한인민을 위하여 원한을 복수하는 것이다. 총알 한개 한개가 우리 조상의 수천, 수만의 영혼이 보우하여 주는 피의 대가이니 제군은 단군의 아들로 굳세게 용감히 모든 것을 희생하고 만대자손을 위하여 최후까지 싸워라!”(지헌모 저 ‘청천장군의 혁명투쟁사’ 중에서)한중 연합군의 공세를 견뎌내지 못한 일본군은 보급물자를 버려둔 채 도주했다. 아군의 피해는 경상자 4~5명에 그쳤다. 그러나 전리품을 나누는 과정에서 한중간의 갈등이 불거졌다. 그해 9월 독립군이 동녕현성을 공략했을 때 중국은 약속한 지원병을 보내주지 않아 독립군 수십 명이 전사하고 지청천도 부상했다. 10월에는 중국인 부대가 독립군 사령부를 포위한 뒤 지청천을 비롯한 간부들을 구금하고 무장해제에 나섰다. 만주를 무대로 한 활동에 한계를 느낀 지청천은 임시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여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 교관으로 부임했다. 이듬해 9월 양세봉마저 일본 밀정에 의해 암살되자 만주의 무장독립투쟁 세력은 사회주의자 일부만 남았다.일제는 1920년 청산리전투 직후 만주 한인을 대상으로 무자비한 보복에 나섰다. 이른바 경신참변(庚申慘變)이다. 이번에는 항일무장투쟁 세력의 근거지를 아예 없애는 작업에 나섰다. 이들 지역 주민을 강제이주시켜 공동화하는 대신 ‘안전농촌’이란 이름으로 집단부락을 만들었다. 만주 한인들은 피땀 흘려 개간해온 농토를 빼앗긴 채 새로운 황무지로 내던져졌다.6월 30일은 대전자령전투 90주년을 맞는 날이다. 승리의 주역 지청천 장군은 청산리전투에도 참전한 항일독립전쟁의 전설이자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인 광복군의 총사령을 지낸 인물이다. 그의 애국혼을 기리는 동시에 만주 동포들의 희생과 수난도 잊지 말아야 한다.◇글=이희용 다문화동포팀 자문위원(전 연합뉴스 한민족센터 고문)
- 尹 "자유 지키기 위한 한미가 흘린 피 잊어선 안돼"
- [이데일리 송주오 기자] 윤석열 대통령은 25일 “이 땅에 자유를 지키기 위해 한미 양국이 함께 흘린 피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25일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린 ‘한미동맹 70주년 특별전’을 찾아 ‘조약으로 본 한미 동맹’ 전을 관람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부인 김건희 여사와 함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방문해 ‘한미동맹 70주년 특별전’을 관람했다. 윤 대통령은 “6·25전쟁이 발발한 지 73년이 지난 지금, 전쟁의 참혹함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윤 대통령은 “올해는 한미동맹 70주년이 되는 해이고, 또 오늘은 6·25전쟁이 발발한 지 73년이 되는 날”이라며 “이런 역사적인 날, 한미동맹의 발전을 위해 애써 주신 분들을 모시고 동맹 70주년 전시회를 갖게 된 것을 뜻깊게 생각한다”고 밝혔다.그러면서 이날 행사에 참석한 참전용사 김두만 전 공군참모총장과 고(故) 백선엽 장군, 휴 린튼의 아들인 인요한 연세대 의과대 교수, 펠리페 토레스 리베라의 손녀 모니카 토레스 넷, 도널드 디 란떼르니에의 증손녀 알리비아 자위스키 등을 언급했다. 또 미8군 연락장교로 재직하며 서울탈환에 기여한 고(故) 김동석 대령의 딸인 김미령을 소개할 때는 “가수 진미령으로 국민들에게 더 잘 알려져 있다”고 소개했다.윤 대통령은 “73년 전 오늘, 트루먼 미 대통령은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신속하게 참전을 결정하셨다. 3년여의 전쟁 기간 우리 국군은 약 16만 명의 전사자를 포함하여 약 62만 명이, 미군은 3만 7000여 명의 전사자를 포함하여 약 13만여 명이 전사, 부상, 포로 등의 피해를 입었다. 지금까지도 한국군 12만여 명과 미군 7500여 명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는 영웅들의 희생과 헌신을 잊지 않고, 그분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끝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6·25 전쟁 이후인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로 동맹의 시대를 열었다며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은 성장과 번영을 일구었으며 자유, 평화, 번영의 인도-태평양 지역을 만들어 나가는 데 기여하는 글로벌 중추 국가로 도약했다”고 했다.그러면서 “지난 70년간 발전한 한미관계를 되돌아보고, 이를 지속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이번 전시를 기획한 것”이라며 “우리는 무엇보다 미래세대에게 한미동맹의 태동과 발자취, 동맹이 이룩한 눈부신 성과를 정확하게 알려줘야 한다. 앞으로 우리의 동맹을 이끌 주역인 미래세대가 지금의 자유와 번영을 있게 한 동맹의 가치와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윤 대통령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 결단, 피눈물 나는 노력, 그 위에서 피어난 따뜻한 우정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라며 “이번 한미동맹 70주년 전시회가 많은 분들께 동맹의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는 좋은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헤라클레스와 백조…수단 교민 탈출 '프라미스 작전'의 주역[김관용의 軍界一學]
- [이데일리 김관용 기자] 무력충돌이 벌어진 수단 내 우리 교민 대피를 위한 군사작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됐습니다. ‘재외국민 보호 약속을 지킨다’는 프라미스(Promise) 작전이었습니다. 이번 수단 교민 철수 작전은 대통령실 지휘 아래 국방부 등 군 당국과 외교부, 국가정보원 등 각 부처의 노력이 결집됐습니다. 특히 육·해·공군 전력이 모두 투입된 최초의 재외국민 보호 작전이었습니다. 육군과 공군 특수부대 병력을 태운 공군 수송기와 공중급유기가 파견됐고, 소말리아 해역 호송전대 ‘청해부대’ 제39진에 배속된 해군 구축함 ‘충무공이순신함’도 공중 이동이 불가능 한 상황을 대비해 수단 인근 해역으로 향했습니다. 군벌 간 무력 충돌로 고립됐다가 우리 정부의 ‘프라미스(Promise·약속)’ 작전을 통해 철수한 수단 교민들이 25일 경기 성남시 서울공항으로 입국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C-130J와 KC-330의 합작품이번 작전에서 C-130J ‘슈퍼 허큘리스’ 수송기와 KC-330 ‘시그너스’ 다목적공중급유수송기의 활약이 컸습니다. 공군 C-130J 수송기는 지난 21일 수단 체류 국민들의 무사 귀환을 위한 작전 명령을 받고 3시간 만에 김해기지 이륙 준비를 마쳤습니다. C-130J 수송기는 1만1507㎞를 날아 24시간 만에 수단 인근 지부티 미군기지에 도착했습니다. 태국과 인도에서 중간 급유만 받고 10개국의 영공을 통과하며 쉼 없이 비행했다는 얘기입니다. C-130J 수송기 연료로는 한번에 갈 수 없는 거리였습니다. 평소라면 중간 기착지를 경유해 40시간은 족히 소요됐을 거리라는게 공군 설명입니다. 당초 수단 수도 하르툼에서 지부티 내 미군기지를 거쳐 교민들을 대피 철수시키는 방안을 검토했었습니다. 장거리 비행이지만 혹시 모를 교전 위험성에 C-130J를 보낸 것입니다. 제우스 신의 아들 ‘헤라클레스’의 영어식 표기인 ‘허큘리스’(Hercules)라는 별칭을 가진 C-130J 수송기는 지대공 위협에 대비한 자체경보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위협 상황에서 전술 기동도 가능합니다. 특히 정밀접근레이더 등 항행안전시설이나 관제탑이 제 기능을 못하는 상황에서도 이·착륙 할 수 있습니다. 기체 방탄과 연료 누유 방지 등 방호 설계가 적용돼 있어 피탄 시에도 임무 수행이 가능한게 특징입니다.수단 체류 국민의 무사 귀환을 위한 ‘프라미스’ 작전에 투입된 공군 C-130J 수송기가 28일 오후 김해기지에 착륙하고 있다. (사진=공군)하지만 하르툼 공항 폐쇄 등으로 접근이 어려워지자 교민들이 일단 육로로 하르툼에서 수단 북동부 항구도시인 포트수단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작전이 변경됐습니다. 이곳에서 홍해 건너 사우디아라비아 제다를 거쳐 귀국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에 C-130J 수송기와 임무요원들은 다시 포트수단 공항으로 이동해 교민들을 후송할 준비를 했습니다. 24일 포트수단에 도착한 수단 교민들을 사우디아라비아 제다공항으로 안전하게 후송하며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아프간 기여자 수송 ‘미라클 작전’도이후 교민들은 제다공항에 대기하고 있던 KC-330 다목적공중급유수송기로 갈아타고 무사히 귀환했습니다. 별자리 중 백조자리를 뜻하는 ‘시그너스’라는 별칭을 가진 KC-330은 여객기를 모체로 하는 탓에 급격한 기동에는 무리가 있지만, 중간 기착 없이 장거리 비행이 가능합니다. 화물이나 승객을 태우지 않았을 경우 항속거리가 1만7400㎞에 달합니다. 최대 300여 명의 인원 또는 37톤의 화물을 운송할 수 있기 때문에 주임무인 전투기 공중 급유 뿐만 아니라 국외 재해·재난 발생 시 현지 국민이송, 해외 파병부대 화물·병력 수송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실제로 지난 2021년 5월에는 코로나 19 백신 수송을, 같은 해 8월에는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을, 11월에는 ‘요소수 긴급 공수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국가와 국민의 안전 보장에 기여했습니다. 올해 2월에도 강진 피해를 입은 튀르키예에 긴급 구호대와 물자를 수송하는 인도적 지원 작전을 펼쳐 국제사회에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였습니다. 특히 지난 2021년 8월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이 탈레반에 함락됐을 때 아프간 특별기여자와 가족 390여명을 구출한 ‘미라클 작전’ 역시 C-130J 수송기와 발을 맞춰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당시 C-130J 2대가 아프가니스탄 카불 국제공항과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 국제공항간 단거리 수송 임무에 투입됐고, KC-330은 이슬라마바드 국제공항에서 인천국제공항으로 수송하는 임무를 담당했습니다. 공군 KC-330 공중급유기가 후미로 진입한 F-15K 전투기에 급유 붐을 길게 내려 공중급유를 시도하고 있다. (사진=공군)◇수송기 추가 도입 추진…공중급유기도 부족국력 확대와 국제 사회의 불확실성 증대 등으로 공군 수송기들 역시 임무가 늘어 추가 도입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공군은 현재 C-130H/J 16대, CN-235 20대의 수송기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C-130J 일부 수송기의 수명 연한이 다가오고 있어 이를 대체해야 합니다. 이에 따라 이명박 정부 시절 2009년부터 2015년까지 6400억 원을 들여 대형 수송기 10여 대를 외국에서 도입하기로 결정한바 있습니다. 그러나 예산 문제로 도입 규모가 7대로 줄었고, 다시 줄어 결국 C-130J 수송기의 동체 연장형인 C-130J-30 4대가 2014년 6월 전력화됐습니다. 이후에도 대형수송기 도입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려 했지만 예산 문제로 진행이 쉽지 않다가 최근에서야 예산 7100억 원을 들여 3대를 추가 도입하는 사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다목적공중급유수송기 역시 부족한 상황입니다. 공군은 2019년 1월 KC-330 1호기 전력화 이후 현재까지 총 4대를 운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이 4대지, 1대는 정기 정비로 임무 수행이 불가능하고 다른 1대는 비상대기용으로 남겨둡니다. 실제로 임무에 투입될 수 있는 기체는 2대 뿐이라는 얘기입니다. 이에 더해 1대 마저 재외국민 보호 임무나 인도적 지원 작전에 투입될 경우 영공방위를 위한 주임무인 공중급유는 단 1대로 밖에 할 수 없습니다. 1~2대의 KC-330으로는 동·서·남해 모든 영역을 담당할 수 없습니다. 지난 해 12월에서야 공중급유기 2대를 추가하는 사업이 결정됐습니다. 2024년부터 2029년까지 총사업비 1조 2000억원을 들여 공중급유기 2대를 국외에서 구매한다는 계획입니다.
- 맥아더·김영옥·백선엽..'한미 10대 영웅' 뉴욕에 뜬다
- [이데일리 김관용 기자] 국가보훈처는 20일 정전협정·한미동맹 70주년을 맞아 한미연합군사령부와 공동으로 한미 참전용사 10대 영웅을 영상으로 제작해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송출한다고 밝혔다. 10대 영웅의 모습을 담은 30초 분량의 영상은 이날부터 다음 달 3일까지 타임스스퀘어에 있는 삼성과 LG 전광판을 통해 매일 680회씩 송출된다.10대 영웅은 6.25전쟁에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70년을 이어온 한미동맹의 역사에 큰 역할을 한 인물을 중심으로 선정했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 밴 플리트 부자(父子), 윌리엄 쇼 부자(父子), 딘 헤스 공군 대령, 랄프 퍼켓 주니어 육군 대령, 김영옥 미국 육군 대령, 백선엽 육군 대장, 김두만 공군 대장, 김동석 육군 대령, 박정모 해병대 대령 등이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해 전세를 역전시킨 영웅이다. 밴 플리트 장군은 미8군 사령관으로서 전선을 지킨 명장이었으며, 그의 아들 제임스 밴 플리트 2세는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해 1952년 4월 임무 수행 중 적 대공포 공격을 받고 실종됐다. 윌리엄 쇼 선교사는 주한미군 군목으로 자원입대해 한국 군대에 군목제도를 도입했다. 그의 아들 윌리엄 해밀턴 쇼는 하버드에서 박사과정 수학 중 6.25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미 해군에 재입대 해 인천상륙작전 시 정보장교로서 작전 성공에 기여했고, 서울수복작전을 위한 정찰 임무 수행 중 적의 총탄을 맞고 28세 나이에 전사했다.딘 헤스 공군 대령은 1950년 7월 대구기지에 도착한 이후 한국 공군 전투기 조종사 양성 훈련을 포함해 1년여 동안 250회에 걸쳐 전투 출격을 하는 등 한국 공군의 대부로서 역할을 했다. 랄프 퍼켓 주니어 육군 대령은 1950년 11월 청천강 북쪽의 전략적 요충지인 205고지 점령 때 수류탄에 맞고도 작전을 지휘하는 등 중공군에 맞서 활약했다. 김영옥 미 육군 대령은 재미교포로, 제2차 세계대전 참전 후 전역한 뒤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군 예비역 대위로 자원입대했다. 2018년 한국인 이름을 딴 미국 최초의 고속도로인 ‘김영옥 대령 기념 고속도로’의 주인공이다.백선엽 장군은 6.25전쟁에서 국군 제1사단을 지휘해 칠곡군, 가산·동명면 등지를 아우르는 다부동 전투에서 미군과 함께 북한군 3개 사단을 격멸했다. 김두만 공군 대장은 6.25전쟁 중 대한민국 공군 최초로 100회 출격을 달성, 김신 장군 등과 함께 승호리 철교 폭파 작전에도 참가했다. 김동석 육군 대령은 1950년 9월 미8군 정보 연락장교로 서울탈환작전을 위한 결정적인 적군 정보를 수집해 유엔군사령부에 제공함으로써 서울탈환작전에 크게 기여했다. 박정모 해병대 대령은 서울탈환작전 시 소대원을 인솔해 시가전을 전개하고 중앙청(당시 정부청사)에 인공기를 걷어내고 태극기를 게양했다.
- [한반도 24시]여덟살에 후계자 된 김정은, 그리고 그의 딸
- [고유환 통일연구원 원장]지난해 11월 김정은 총비서의 딸 김주애가 공개활동을 시작하면서 후계자 논쟁이 달아오르고 있다. 과연 김주애가 김정은의 후계자로서 공개 활동을 하는 것인지, 미래세대의 안전을 담보하는 전략국가 지도자의 이미지 연출 차원의 딸 공개인지, 딸을 가진 가정의 가장으로서 정상국가 지도자상을 내세우고 외부 세계와의 대화를 원한다는 메시지 전달 차원의 연출인지 등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김주애가 지난 석 달간 군사부문, 스포츠 행사, 건설현장 등 7차례 공개행보를 하고, ‘존귀하신’, ‘존경하는’, ‘사랑하는’ 등의 수식어와 함께 ‘백두혈통 결사보위’ 구호와 ‘사랑하는 자제분이 제일로 사랑하는 충마’라며 김주애가 타는 말에 대한 공개 언급, 우표발행 등은 후계구축과 관련한 징후로 볼 수 있다.1984년 1월 8일생인 김정은의 나이 40세에 후계를 공식화하는 것은 지나치게 빠르고 후계자로 단정할 수 없다는 지적이 있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 사회인 북한에서 여성 지도자가 나오기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아직 후계자로 단정하기는 이르지만 후계와 관련짓지 않고는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그러므로 선대 지도자들의 후계구축 논리와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김일성으로부터 김정일로 승계가 이뤄질 때 북한이 내세운 후계자론은 ‘혈통 계승론’, ‘혁명 계승론’, ‘김일성 화신론’ 등이 있다. 북한은 백두산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한 백두혈통이라야 후계자가 될 수 있고, 제국주의가 남아 있는 한 혁명은 계속돼야 한다면서 김일성 가계가 대를 이어 수령제 국가를 지도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김일성 화신론은 김일성의 통치철학과 스타일에 따라 수령제 국가를 계승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김일성 화신론은 ‘김일성 영생론’과 함께 김일성=김정일=김정은=조선로동당=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동일시하는 담론의 근거로 활용된다. 김정일은 계모인 김성애가 낳은 이복동생들과의 치열한 후계투쟁을 거쳐 이른바 ‘곁가지’들을 물리치고 당내 유일사상체계 구축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4년 2월 당 원로들에 의해 후계자로 추대됐다. 이후 김일성 사망 때까지 북한은 김일성-김정일 공동정권을 운영했다. 당내 후계지명 이후 김정일은 후계수업과 동시에 사실상 실권자로 20여년간 후계체제를 구축해나갔다. 김일성 사후 ‘고난의 행군’이라는 어려움 속에도 정권과 체제를 유지한 것은 오랜 후계구축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김정은은 2008년 8월 김정일의 뇌졸중 발병 이후 2009년 1월 8일 25살 생일 때 후계자로 공식 지명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일의 경우 후계자가 되기 위한 스스로의 노력이 있었지만, 김정은의 경우는 아버지 시대에 만들어 놓은 후계논리에 따라 선대수령이 지명하는 방식으로 간택됐고, 북한 주민들은 이를 ‘관습헌법’처럼 받아들였다.김정일의 후계자 선택 기준은 수령체제를 잘 이어갈 지도자의 자질이었다. 세 아들 중 지도자 자질을 보였던 김정은을 8세 때 후계자로 내정했고, 권력핵심에서는 김정은을 ‘샛별대장’이라고 부르고 ‘발걸음’이란 찬양 노래를 만들어 척척척 발걸음 소리를 후계자 등장의 상징으로 활용했다.김정은으로의 후계구축 과정을 곁에서 지켜본 사람은 ‘김정일의 요리사(2003)’란 책을 쓴 후지모토 겐지이다. 김정은 후계가 외부에 공식화된 것은 대만 사진작가 `후앙 한밍`이 2009년 9월 북한에서 찍은 포스터 사진을 공개하면서부터다. 포스터에는 “장군복, 대장복 누리는 우리 민족의 영광, 만경대 혈통, 백두의 혈통을 이은 청년대장 김정은 동지”라는 문구와 함께 김정은 찬양 노래 ‘발걸음’의 가사가 적혀 있었다. 이때까지 김정일의 아들 중 한 명이 후계자가 될 것으로 보았지만 3남인 김정은으로의 후계를 정확히 예측한 기관과 전문가는 거의 없었다.김주애의 이른 등장으로 여러 억측이 난무하지만 김주애가 후계자 군에 있는 것은 분명하고, 지도자의 자질이 있다면 여자이기 때문에 안 된다는 논리도 성립하기 어렵다. 수령제가 제도화됐다고 본다면 선대 수령이 간택하면 남녀 구분 없이 후계 수령이 될 수 있다. 다만, 김정은의 갑작스런 유고가 발생할 경우 야심가들이 김주애를 수령으로 옹립해 놓고 집단지도체제로 섭정을 시도할지도 모른다. 왕위계승처럼 북한의 후계문제는 최고지도자의 건강문제가 가장 핵심적인 변수다.
- "하늘에서도 작품하시길"…영화계, 故 윤정희 사망 애도 물결 [종합]
- 지난 2016년 9월 22일 서울 마포구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영화배우 윤정희 특별전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이데일리 스타in 김보영 기자] 한국 영화사의 발전을 함께한 은막의 스타, 영화배우 윤정희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영화계 및 누리꾼들 사이에선 애도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20일 영화계에 따르면, 알츠하이머 투병 중이던 윤정희는 19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별세했다. 향년 79세. 안타까운 비보에 영화계는 슬픔에 빠졌다. 신정균 감독은 고인의 죽음에 ‘별이 졌다’고 표현하며 그를 추모했다. 신정균 감독은 고 윤정희와 생전 ‘삼일천하’, ‘효녀심청’, ‘궁녀’, ‘평양폭격대’ 등 작업을 함께한 고 신상옥 감독의 아들이다. 신 감독은 “신상옥 감독과도 많은 작품을 하셨던 여배우 윤정희 여사님, 우리 어머니 생전에 마지막으로 방문하셨던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결국 알츠하이머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과의 이별을 고했다”며 “부디 하늘나라에서 먼저 가신 동료 선후배 영화인들과 함께 영면하시길 바라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애도했다. 원동연 리얼라이즈픽처스 대표도 SNS로 추모의 뜻을 전했다. 원 대표는 “1990년 ‘한샘’의 모델이셨고 그 광고의 조감독으로 선생님을 뵈었다”고 고인과의 첫만남을 회상했다. 이어 “이창동 감독님의 ‘시’ 시사회장에서 만나 그 인연을 말씀드리니 ‘꼭 작품 같이 해요’라고 말씀해주셨다. 이제 그 약속을 지킬 수 없지만”이라고 덧붙이며 비통한 심정을 덧붙였다. 원로배우 한지일 역시 자신의 SNS에 “대배우 선배들과 연기를 한다는 게 참 힘들었던 저에게 편하게 연기를 할 수 있게끔 이끌어주신 선배님”이라며 “‘죽는 날까지 영화를 하시겠다’던 팬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시고 너무 빨리 하늘나라로 가셨다. 파리에 계시면서도 늘 영화배우의 끈을 놓지 않고 귀국 때마다 영화 배우 선후배들과의 만남, 영화계 큰 어르신인 신영균 선배님과 동료 배우들과의 교우를 끊지 않으셨던 선배님”이라고 고인을 추억했다. 이어 “하늘나라에서도 그토록 사랑하셨던 영화 많이 많이 출연하세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애도했다. 영화 기관들도 애도에 동참하고 있다. 한국영상자료원은 공식 SNS 계정에 “배우 윤정희 님께서 별세하셨다”며 “‘청춘극장’(1967)부터 ‘시’(2010)까지 280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마지막 영화로 많은 여우주연상을 받으셨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밝혔다. 1944년생인 고인은 지난 1967년 12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출연한 영화 ‘청춘극장’으로 연예계에 데뷔했다. 당시 대종상영화제 등 각종 영화제 신인상 트로피를 8개나 쓸어담으며 주목을 받았다. 고인은 특히 문희, 남정임과 함께 ‘충무로의 트로이카’로 불리던 1970년대 대표 여배우다. 데뷔 이후 7년 동안 무려 300편에 가까운 영화에 출연했다. ‘안개’, ‘장군의 수염’, ‘독 짓는 늙은이’ 등 여러 작품에서 다양한 배역을 소화하며 연기력까지 인정받아 대종상영화제, 청룡영화상, 백상예술대상 등 여러 곳에서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다.전성기 시절 엄청난 인기로 ‘은막의 여왕’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왕성히 활동하던 중 돌연 학업에 매진해 유학길을 떠난 적도 있다. 그는 1974년 돌연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 뒤 파리 제3대학에서 영화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1976년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백건우와의 결혼으로 뜨거운 화제를 모았다. 다만 결혼 이후에도 20여편의 영화에 출연해 연기에 대한 꾸준한 열정을 보였다. 1994년 영화 ‘만무방’ 출연 이후 긴 공백기를 가졌지만, 16년 만인 지난 2010년에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를 통해 화려하게 귀환했다. ‘시’는 당시 칸 영화제 각본상까지 수상했다. 윤정희는 이 작품으로 각종 영화제에서 인생 마지막 여우주연상, 각종 공로상들을 휩쓸었다.다만 ‘시’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됐다. 고인이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어서 연기 활동이 더 이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2019년 언론 보도로 그의 알츠하이머 증상이 악화됐다는 소식이 처음 알려졌다. 당시 남편인 백건우는 이에 대해 “사실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게 그렇게 좋은 뉴스는 아니지 않나. 그런데 이제는 더 숨길 수 없는 단계까지 왔고 윤정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알아야 할 것 같았다. 사실 다시 화면에 나올 수도 없는 거고 해서 알릴 때가 됐다 생각했다“고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이 과정에서 지난 2020년에는 윤정희의 동생들이 ‘백건우가 치매에 걸린 윤정희를 방치하고 있다’는 주장을 제기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에 백건우가 윤정희 동생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기자회견을 여는 등 양측의 입장이 팽팽히 맞섰다. 급기야 프랑스 및 한국에서 윤정희의 후견인 지위를 둔 법적 다툼까지 빚어졌다. 당시 윤정희의 성년후견인은 딸인 바이올리니스트 백진희였다. 백진희는 프랑스 법원에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어머니의 성년후견인 지정을 신청해 승인을 받았고 2020년 국내 법원에도 성년후견 개시 심판을 청구했다. 윤정희의 동생들이 딸 백 씨를 성년후견인으로 지정해선 안된다고 주장했으나, 법원은 이들의 이의제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동생들은 2심 결과에도 불복해 대법원에 재항고했다. 하지만 성년후견 대상인 윤정희가 사망하면서 대법원에 계류 중인 이 사건은 추가 심리 없이 각하될 전망이다.
- 스크린에서도 뜨거운 '영웅'…천만 가슴 울릴까
- [이데일리 스타in 박미애 기자]국내 대표 흥행감독 중 한명인 윤제균 감독이 첫 시도한 뮤지컬 영화로 관객의 심판대에 선다.오는 21일 개봉하는 윤제균 감독의 새 영화 ‘영웅’은 1909년 10월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서른한 살이라는 짧고 불꽃 같은 생을 산 안중근 의사를 소재로 한 작품. 영화는 거사를 준비하던 때부터 죽음을 맞이하던 순간의 마지막 1년을 그린다. 영화는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을 기념해 제작돼 2009년 초연부터 7번째 시즌까지 마친 동명의 스테디셀러 뮤지컬을 영화화한 작품이다.◇뮤지컬 감동 그대로…웅장해지는 ‘그날을 기약하며’ ‘장부가’아들이자 남편, 두 아이의 아버지인 안중근(정성화 분)은 평범한 삶을 뒤로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의병 운동에 몸 바친다. 한편 일본의 만행을 목도한 궁녀 설희(김고은 분)는 조국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으로 건너간다. 안중근은 설희의 첩보 활약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하얼빈 방문 계획을 입수하고, 하얼빈으로 향한다. 마침내 거사 당일,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끌려가며 “코레아 우라(대한제국 만세)”를 외친다.‘영웅’은 정성화의 명불허전 안중근 연기가 빛나는 작품이다. 도입부에 안중근이 설원에서 왼손 네 번째 손가락 한 마디를 잘라내고 동지들과 이토 히로부미 처단을 맹세하며 부르는 ‘단지동맹’은 비장한 목소리로 한순간에 몰입되게 한다. 마지막에 안중근이 사형대에 올라서서 죽음의 두려움을 견뎌내며 부르는 ‘장부가’는 영웅 안중근에 가린 인간 안중근을 부각시키며 처절한 외침과 함께 깊은 잔상을 남긴다.영화는 초중반까지 안중근과 동지들의 의병운동, 설희의 첩보활동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며 투박한 장면 전환으로 감정의 흐름을 매끄럽게 잇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거사가 임박한 순간부터 안중근이 최후를 맞는 순간을 담은 중반부 이후는 ‘영웅’ ‘그날을 기약하며’ ‘누가 죄인인가’ ‘사랑하는 내 아들, 도마’ 등 뮤지컬의 유명 넘버와 절묘하게 어우러진 배우들의 호연으로 가슴 벅찬 감동을 선사하며 초중반의 아쉬움을 상쇄시킨다.특히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를 연기한 나문희와 설희를 연기한 김고은은 영화의 숨은 보석이다. 나문희의 관록이 묻어난 ‘사랑하는 내 아들, 도마’는 감정을 누르고 담백하게 부르는데 눈물샘을 자극한다. 원작보다 개연성을 강화한 설희 역의 김고은은 뮤지컬과 차별화시키며 발군의 노래 실력으로 놀라움을 선사한다.◇‘해운대’ ‘국제시장’ 쌍천만 감독의 뮤지컬 영화 도전‘영웅’은 윤제균 감독이 8년 만에 내놓은 영화다. 2009년 부산 해운대을 덮친 초대형 쓰나미의 위험을 그린 ‘해운대’으로 1132만의 관객을, 2014년 격변의 시기를 견디며 가족을 위해 헌신한 가장의 이야기를 그린 ‘국제시장’으로 1426만의 관객을 동원한 쌍천만 흥행감독이 도전한 첫 뮤지컬 영화다.그의 뮤지컬 영화 도전은, 2012년 ‘댄싱퀸’의 제작자와 배우로 인연을 맺은 정성화의 초대로 뮤지컬 ‘영웅’을 관람한 것이 계기가 됐다. 많은 넘버 중에서도 ‘사랑하는 내 아들, 도마’ 대목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는 윤제균 감독은 “‘국제시장’이 아버지를 위한 영화라면, ‘영웅’은 어머니를 위한 영화”라며 “ 조국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안중근 의사의 뒤에는 위대한 어머니가 있었다”고 얘기했다.윤제균 감독은 뮤지컬의 감동을 그대로 스크린에 가져오기 위해 전체 노래의 70%를 라이브 녹음으로 완성했다. 라이브 녹음 장비로 쓰였던 마이크와 인이어를 지우느라 무려 1000컷의 CG를 썼는데, 재난영화 ‘해운대’와 시대극인 ‘국제시장’보다 더 많은 CG를 사용했다는 후문이다.◇왜 안중근인가…관련 문화 콘텐츠 봇물문화계는 때아닌 안중근 열풍이다. 관련 문화 콘텐츠가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다. 오는 21일에는 영화 개봉뿐 아니라 뮤지컬 ‘영웅’의 서울 공연이 개막한다. 안중근 의사가 무대와 스크린에서 동시에 관객과 만나게 된 셈이다. 지난 8월에는 청년 안중근의 삶을 그린 김훈 작가의 ‘하얼빈’이 출간됐고, 영화계에서는 또 다른 안중근 의사와 독립투사들의 이야기가 준비 중이다. ‘내부자들’ ‘남산의 부장들’의 우민호 감독이 연출하고, 현빈이 안중근 의사를 연기하는 ‘하얼빈’이 제작된다.‘왜 안중근인가’라는 질문에 전문가들은 난세의 영웅을 바라는 것과 같은 심리라고 답한다. 코로나19 팬데믹, 경기침체, 이태원 핼러윈 참사 등 외우내환의 상황이 안중근 의사를 소환해냈다는 것. 윤성은 영화평론가는 “안중근 의사는 이순신 장군과 함께 난세를 헤쳐 나간 대표적인 민족의 영웅”이라며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지금의 불안한 현실이 실존했던 역사 속의 영웅을 찾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윤제균 감독과 함께 안중근 캠페인을 준비중인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K콘텐츠의 영향력이 증대되는 상황에서 ‘영웅’ 같은 콘텐츠가 우리의 역사를 전파하는데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전했다.
- 한니발 장군은 왜 코끼리를 데리고 알프스 산을 넘었을까?[세 번째 수수께끼]
- 편석준 작가이데일리는 IT적인 상상력을 키우는데 지혜를 주는 편석준 작가의 칼럼을 매주 월요일 연재하려 합니다. 그는 세상의 디지털전환을 앞당기는데 전사 역할을 하게 될, 아이들의 사고력을 높이는데 관심이 많습니다. 아이들의 사고력을 높이는 방법은 많지만, 아이들에게 직접 기획적 사고를 해보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편 작가는 이데일리를 통해 <아빠와 함께 풀어보는 수수께끼들-주기장(週企帳)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편집자주>▲ 출처 : Heinrich Leutemann상희 가족은 아빠, 엄마, 아들 상희 세 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겨울방학이 끝날 때쯤 회사 발령으로 엄마는 제주도에서 일 년 정도 일하게 되었다. 대신 아빠는 육아휴직을 내고 상희를 돌보기로 했다. 아빠는 일 년 동안 상희와 마음껏 놀 생각도 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 상희를 어떻게 하면 잘 가르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저 돈만 내고 걱정하면서, 스트레스 받는 것을 노력했다고 자위하면서 이런저런 학원에만 보내면 될까? 아빠는 평소에도 “생각하는 법”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 열 살이 된 아들에게 직접 생각하는 법을 가르쳐 주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주기장(週企帳)이었다. 일주일에 하나씩 ‘기획(企劃)’을 해보고 기록하는 공책이란 뜻이었다. ‘기획’이란 현실 위에 미래를 꿈꾸며 그리는 그림이었다. 생각이 먼저 있은 다음에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아빠는 상희가 주기장을 처음 접해보기 때문에 의욕을 돋구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기장을 작성해야 매주 용돈을 주기로 했고, 나중에 비싼 물건을 살 수 있도록 상희 이름으로 된 통장에 별도의 적립금도 입금해주기로 했다. 적립금은 일종의 보너스로 보너스 지급 여부와 금액은 아빠가 결정하기로 했다. 아빠와 상희는 본 내용으로 계약서를 작성했고 서로 지장을 찍었다. 그리고 서두에 “주기장은 상희가 아빠에게 돈을 내고 배워야 정상이지만, 아직 상희의 나이가 어려 경제활동이 어렵고 혈연관계임을 감안해 특별히 무상으로 교육함을 밝힌다.”라고 쓰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아직 ‘기획’이란 말은 아이에게 어렵기 때문에, ‘수수께끼’란 말을 사용하기로 했다. 아빠는 두 번째 수수께끼가 너무 어려웠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희가 주기장에 대한 흥미를 잃을까 두려웠다. 그래서 이번에는 옛날 장군 이야기를 상희에게 들려주고 간단히 수수께끼를 내려고 생각 중이었다. 아빠는 서재 책장 앞에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책들이 두서없이 꽂아두는 바람에 책장들 앞에서 십 분이나 서성거리다가 마침내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을 찾았다!아빠는 무릎 위에 상희를 눕히고 옆에는 삶은 땅콩이 가득 담긴 접시도 두었어요. 누워서 먹는 걸 엄마가 알면 큰일이지만, 아빠는 한 번쯤은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물론 옆에 엄마가 있다면 ‘한 번이 두 번 되고, 두 번이 열 번 되고, 그러다 평생 습관이 된다고!’라고 했을 테지만.“상희야, 로마 알지? 옛날의 로마는 지금 미국보다 큰 제국이었어. 그런데 로마를 거의 무너뜨릴 뻔한 카르타고의 장군이 있었어. 카르타고는 지금의 북아프리카 쪽에 있었는데, 장화 모양의 이탈리아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었지.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은 로마로 건너가 로마 사람들을 혼비백산하게 했어. 지금으로 치면 미국과 쿠바 정도의 거리일까? 물론 최종적으로는 로마가 이기고 카르타고란 나라가 완전히 사라져버리긴 했지만, 한니발 장군은 어떻게 로마를 거의 무너뜨릴 뻔했을까?”상희는 주먹 가득 땅콩을 쥐고 오물오물 씹으며 아빠 입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아빠는 속으로 외쳤어요. ‘오케이, 됐어!’ 아이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교육은 어떤 효과를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인 것 같아요.“그 비밀은 빠른 속도로 로마 본토가 있는 이탈리아반도로 진격했다는 거야. 로마 사람들도 당연히 카르타고가 전쟁 준비를 하고 쳐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 그 당시에도 나름 스파이가 많았고, 최선의 통신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을 테니. 하지만 예상보다 빨리 쳐들어온 거야.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이 매우 빠른 속도로 진군하는 전격전을 펼쳐 유럽 전체를 당황하게 한 것처럼 말이야. 한니발 장군은 어떤 방법으로 빠르게 쳐들어갔을까? 상희야, 맞춰봐!”“비행기를 타고 갔을까? 아, 그때는 비행기가 없었겠구나. 그럼 기구 같은 것을 타고 가지 않았을까요?”“아, 좋은 생각이구나. 실제로 그런 비슷한 생각이 지금 드론의 시초가 되긴 했지. 하지만 그때 한니발 장군은 알프스 산맥을 넘은 거야. 이탈리아반도 북쭉 위로 알프스 산맥이 펼쳐져 있는데, 그 험한 산을 넘어서 로마로 진군한 거야. 정말 대범한 계획이었지.”“아, 그럼 한니발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은 맨 처음 사람인가요?”“그렇진 않아. 플루타르코스란 역사가가 쓴 『영웅전』의 <마리우스> 편을 보면 ‘적이 가까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알프스산맥을 넘어갔다’란 얘기가 나오거든.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산맥이 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긴요할 때 전략적으로 사용하던 작전이었던 거지.”“응, 그럼 새로운 것도 아닌데 로마 사람도 예측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알프스산맥을 넘은 건 한니발 장군이 처음은 아니지만, 한니발 장군은 새로운 요소를 추가했어. 한니발 장군의 목표는 예상보다 빠르게 로마로 진군하는 것이었고, 문제는 그 루트가 새롭지 않다는 거였어. 이런 현실 위에 한니발 장군은 새로운 생각, 그러니까 새로운 그림을 그려서 성공한 거야. 기획(企劃)이란 말은 주어진 현실 위에 새로운 생각을 그리고, 그리고 그린 그림대로 추진해 현실을 바꾸는 것을 말하거든. 한니발 장군의 기획은 세 가지 였어.”● 겨울에 넘는다. 기존의 군대는 모두 여름에 알프스산맥을 넘었다● 빠르게 넘기 위해 공성장비를 버리고 코끼리를 버리지 않고 데리고 간다● 15일 안에 이탈리아반도로 진격한다. 이는 전에도 없던 속도였다. “아마 참모진의 많은 반대에 부딪혔을 거야. 병사들도 두려움에 떨었을 테고. 하지만 한니발 장군은 전쟁의 승리라는 최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예상보다 빠르게 로마로 가야 하고, 비밀무기인 코끼리가 필수라고 생각했던 것이지. 새로운 그림을 뜻하는 기획은 원래 기존의 안정된 질서와 생각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반대에 부딪힐 수밖에 없거든. 물론 그 작전이 실패할 수도 있었을 거야. 한겨울의 알프스산맥을 수만 명의 병사가 빠르게 넘어야 하고, 더구나 눈과 겨울이 낯선 코끼리까지 데리고 갔어야 했으니 말이야. 하지만 그 작전이 많은 분석과 고민 끝에 이른 결론이라면,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면 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아빠, 근데 왜 코끼리를 데리고 갔을까요?”■ 수수께끼 3 : 한니발 장군은 왜 코끼리를 데리고 알프스산맥을 넘었을까?“아빠 생각엔 아마도 로마인들은 전쟁터의 코끼리를 무서워했던 것 같아. 왜냐하면 코끼리는 아프리카에 자랐고 로마인들은 평소에 볼 수 없었을 테니. 그 덩치도 덩치이지만 그 울음소리는 또 얼마나 무시무시했겠어. 실제 『영웅전』의 <피루스> 편을 보면, 에페이로스의 왕 피루스가 로마인과 싸울 때 코끼를 활용한 얘기가 나오거든.” ● 아스쿨룸 평원 전투에서 로마군 3,500~6,000명을 전사시켰다.● 이 전투의 승리는 오직 코끼리들의 몸무게와 어마어마한 파괴력 때문에 얻은 것.아무리 로마군이라 해도 해일이나 지진처럼 몰려오는 코끼리들 앞에서는 도저히 용기를 낼 수 없었다.“한니발 장군은 그런 걸 다 알고 있었나 봐요. 그래도 대단한 것 같아요. 그런 멋진 기획을 세워, 세계 최강국 로마를 거의 무찌를 뻔했으니.”“중요한 것은 한니발 장군이 기존에 알고 있던 지식들을 연결하고, 기존의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그림을 그려 새로운 작전을 만들었다는 것이지. 현실을 바꾸려면 먼저 주어진 현실을 면밀히 살펴 흩어져 있던 것을 연결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잊지 마. 그리고 목적이 확고하고 고민 끝에 방법을 찾았다면 그다음에 제대로 실행을 한다면,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것도 잊지 말구. 자, 상희야. 아빠한테 오늘 들은 얘기를 주기장에 잘 정리하고 상희의 소감도 써야지. 그래야, 이번 주에도 용돈을 받을 수 있단 거 알지?”편석준 작가는아이와 성인을 대상으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 연습을 돕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위한 책으로 특허동화 『상상이상 미래세상』, 일반동화 『이제 내가 대장이야』 『토끼 손잡이와 여섯 손가락』을 출간했으며, 어른들을 위한 책으로 에세이 『너는 내일부터 치킨집 사장이다』, 인문교양서 『구글이 달로 가는 길』, 소설 『10년 후의 일상』, 경제경영서 『사물인터넷』, 『사물인터넷, 실천과 상상력』, 『가상현실』, 『스타트업 코리아』, 『왜 지금 드론인가』, 『전기차 시대가 온다』 『4차산업혁명 IT트렌드 따라잡기』, 『미래의 직업전망』 등을 출간했습니다.
- 보훈처 "유엔참전용사·가족 114명, 내일 한국 방문"
- [이데일리 이유림 기자] 유엔참전용사 국제추모의 날(11월11일)을 앞두고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15개국 114명의 유엔참전용사와 가족 등이 한국을 찾는다. 6·25전쟁에서 대한민국의 자유 수호를 위해 싸운 유엔 참전국 참전용사 유족이 지난 9월 29일 오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을 찾아 전사자명비에 헌화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국가보훈처는 6일 “오는 7일부터 12일까지 5박6일 일정으로 15개국 유엔참전용사 27명과 가족 등을 한국으로 초청한다”며 “정부 차원의 예우와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재방한 행사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이번 재방한 행사에는 유엔참전용사와 가족들 외에도 전후 판문점에서 근무했던 스위스 중립국감독위원회 근무자 3명과 가족 등 6명도 포함됐다.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영웅들을 모십니다’를 주제로 진행한 행사를 통해 한국을 찾은 토마스 타나카 미국 참전용사(만95세, 1927년생)는 재방한 참전용사 중 최고령자다. 1951년 미육군 일병으로 참전하여 금성지구 및 철원지역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참전 시기와 국적은 각각 다르지만, 6·25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로 꼽히는 후크고지 전투에 참전했던 전우들도 방한한다.캐나다 클로드 쁘띠(만87세, 1935년생) , 호주 로날드 몽크하우스(만91세, 1931년생), 튀르키예 탈립 이지트(만91세, 1931년생) 참전용사는 각각 1952년부터 1954년 기간 중 참전하여, 후크고지 전투를 비롯한 주요 전투에서 대한민국을 위해 투혼을 발휘했다. 네덜란드 테오도로스 후베르투스 하버 참전용사는 정전협정 하루 전 있었던 묵곡리 전투에서 전우 5명을 잃은 안타까운 사연을 가지고 있다. 재방한 초청사업으로 한국에 다녀온 전우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듣고, 이번에 처음으로 한국을 찾는다.유엔참전용사의 가족 중에서는 지평리 전투의 영웅 랄프 몽클라르 장군의 아들인 롤랑 몽클라르 씨와 그의 아내 마리 몽클라르씨도 방한한다. 몽클라르 장군은 6·25전쟁에 파병한 프랑스군 대대를 이끌기 위해 스스로 중장에서 중령으로 계급을 내려 참전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지평리 전투에서 중공군 공세를 막고 유엔군이 전세를 반전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된 오빠를 보기 위해 처음 방한하는 유가족도 있다. 헨드릭 라드스태츠(참전 1952.1~1952.8) 네덜란드 참전용사의 여동생 조아나 라드스태츠(만 88세)씨다. 그는 “정복을 잘 차려입고 미소를 짓고 손을 흔들며 떠나던 오빠의 모습을 항상 기억하고 있다”며 “오빠를 만나러 한국에 방문하여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유엔참전용사와 가족 등은 이번 방한 기간 △국립서울현충원 참배 △전쟁기념관 헌화·관람 △부산 유엔평화기념관 방문 △유엔참전용사 추모음악회 △유엔참전용사 국제추모의 날 행사 △보훈처장 주관 오찬 참석 등의 일정을 이어갈 예정이다.보훈처에 따르면 1975년 시작된 유엔참전용사 재방한 사업을 통해 지금까지 22개국 3만3604명이 우리나라를 다시 다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