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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모임·방문판매發 끝나지 않는 코로나19…당국, 소모임 금지
- [이데일리 함정선 안혜신 기자] 종교 모임과 방문판매 등을 통한 산발적인 코로나19 발병이 이어지고 있다. 대규모 확산세는 없지만 지역 내에서 꾸준히 20~30명의 확진자가 나오는 이유다. 이에 따라 정부가 교회 내 소모임을 금지했고, 소규모 방문판매에 참석하지 말 것을 거듭 당부하고 나섰다. [이데일리 이영훈 기자]해외 유입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이날 해외 유입 확진자는 33명까지 증가했다. 특히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지역에 감염이 확산하며 해당 국가 확진자 유입이 급증하고 있다. 다만 정부는 해외 유입의 경우 검역 단계에서부터 격리하는 등 관리할 수 있어 지역 확산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함께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공기 감염 가능성이 있다고 인정한 것과 관련, 방역당국은 환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10일부터 교회 소모임 금지…위반 시 300만원 이하 벌금정부는 교회 시설을 고위험시설로 지정하지는 않아 정규 예배는 정상적으로 진행하도록 하되,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소규모 모임·행사 등에 대한 방역 수칙 준수를 의무화한다고 8일 밝혔다. 이에 따라 교회의 책임자와 이용자는10일 오후 6시부터 정규예배 외 모임·행사 금지, 단체 식사 금지, 상시 마스크 착용 등 핵심 방역수칙을 준수해야 한다.방역수칙을 위반할 경우 ‘감염병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책임자나 이용자에게는 3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고 집합금지 조치를 시행할 수 있다.다만 시설의 개선 노력, 지역 환자 발생 상황 등에 따라 지방자치단체장이 방역수칙 준수 의무 해제 요건을 충족한다고 인정한 시설은 의무가 해제된다. 이를테면 온라인으로 예배를 진행하거나 마스크 착용, 좌석 간 간격 유지 등의 수칙을 모두 준수했을 때다. 방역 당국은 집단 감염이 주로 발생한 교회를 대상으로 방역수칙 준수 의무화를 우선 시행했으나 향후 위험도를 분석, 필요하면 사찰과 성당 등으로 조치를 확대할 계획이다. ◇방문판매, 코로나19 확산 ‘뇌관’ 떠올라수도권과 대전, 광주 등 전국 곳곳에서 방문판매와 연관된 소규모 집단감염이 끊이지 않고 있다. 수원시 교인 모임으로 알려졌던 집단감염은 인천 아파트 방문판매 등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으며 관련해서 확진자만 30명으로 늘어났다. 방문판매 현장에 있었던 신도가 성당에 나가며 고양 원당성당에서 6명이 확진되기도 했다. 대전 서구 방문판매 관련해서는 추가 확진자가 꾸준히 나오며 총 87명으로 늘어났고, 광주 광륵사와 관련해서도 금양빌딩 방문판매 관련 확진자는 25명에 이른다. 방문판매는 밀폐된 환경에서 장시간 접촉해 대화가 이뤄지기 때문에 감염 위험이 크지만 당국이 교회 등 종교시설처럼 철저하게 관리할 수 없어 문제다. 체험관이나 홍보관은 고위험시설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지만 가정방문 등 소규모 방문판매는 제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당국은 가족이나 지인들, 특히 고연령층이 방문판매 현장에 참석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거듭 당부하고 있다. ◇코로나19 공기전파…“밀폐 환경서 미세비말 조심해야 한다는 뜻”WHO가 공공장소, 특히 혼잡하고 폐쇄됐으며 환기가 잘 되지 않는 공간에서 코로나19의 공기 전염 가능성을 배제할수 없다고 밝힌 것과 관련해 방역 당국은 밀폐된 공간에서 미세비말을 통한 공기 전파 위험성을 조심해야 하는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정은경 중앙방역대책본부장은 “환기가 안 되는 밀폐된 공간에서 사람들이 밀집해 있고 마스크 착용 없이 접촉하는 환경이 위험하다고 얘기한 바 있다”며 “작은 비말들이 좁은 공간에 장시간 체류하며 호흡기를 통해 전파되는 그런 상황을 피해야 하고, WHO의 설명이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 본부장은 “그동안 얘기했던 환기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한다”며 “또한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이 밀폐된 환경에서 미세 비말을 통한 공기 전파 부분을 어느 정도 예방해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정 본부장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단순히 공기를 통해 전파되는 것은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는 기존 입장을 유지했다. 정 본부장은 “공기 전파에 대해서는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연구와 분석이 진행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이도류 연주자' 조재혁 "이번 공연은 '오르간'에 더 집중"
- [이데일리 윤종성 기자] “요즘 오르간 연습량을 부쩍 늘리고 있어요. 아무래도 오르간 연주 실력이 피아노에 비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어서요. 평소에는 두 악기의 연습량을 비슷하게 유지하고 있지만, 공연 프로그램에 따라 연습량을 유연하게 조정하고 있어요.”조재혁이 24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오드포트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사진=클래식앤)조재혁은 피아니스트와 오르가니스트를 겸하는 흔치않은 ‘이도류 연주자’다. 오는 7월 13일 잠실 롯데콘서트홀에서 리사이틀을 앞둔 그는 24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오드포트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오르간 연주 곡들이 아직 만족할 만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며, 이 같이 밝혔다. 조재혁의 공연이 주목받는 것은 1부 피아노, 2부 오르간 등 두 악기로 구성된 독특한 프로그램 때문이다. 연주자가 한 무대에서 피아노와 오르간을 동시에 연주하는 경우는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지난 1월 오르간 앨범 ‘바흐, 리스트, 비도르’의 국내 발매를 기념해 열리는 이번 공연은 당초 지난 2월 개최하려 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순연돼 앨범 발매 6개월 만에 가까스로 열리게 됐다. 조재혁에게는 각별한 의미를 갖고 있는 앨범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오르간을 동경했던 그는 16세 때인 맨해튼 음악대학 예비학교에서 오르간을 처음 접하고 피아노와 오르간을 같이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후 뉴욕과 뉴저지의 여러 교회에서 오르가니스트 활동을 했던 조재혁은 프랑스 음반사의 눈에 띄어 앨범까지 내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녹음 장소가 유서깊은 프랑스 파리의 라 마들렌 성당이기에 더 가슴 벅찼다고 했다. 조재혁은 “녹음 장소가 마들렌 성당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면서 “콧대 높은 유렵 성당이 외국인 연주자에게 수 백년 된 악기의 연주를 허가한 사실 자체가 무척 놀라웠다”고 웃었다. 그는 또 “마들렌 성당은 쇼팽의 장례식이 열렸던 곳으로 클래식 연주자들에겐 성지와 같은 곳”이라고 부연했다. 앨범은 1849년에 제작된 마들렌 성당의 그랜드 오르간으로 녹음했다. 성당이 항상 사람들로 붐비는 탓에 조재혁은 오후 7시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녹음했다. 이렇게 사흘간 녹음한 음반은 귀 기울여 들으면 지하철 소리가 들려 이채롭다. 그는 “파리는 지하철 노선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 어느 건물이든 진동소리가 들린다”며 “처음에는 다시 녹음하기도 했지만, 지하철 소리도 마들렌 성당의 일부라 생각하고 그대로 녹음했다”고 설명했다. 조재혁은 앞으로도 계속 피아노와 오르간을 병행할 계획이다. 그는 “차기 오르간 앨범 발매를 논의하고 있다”면서 “피아노와 오르간 두 악기의 병행이 이젠 조재혁이라는 연주자의 브랜드가 돼 버려 어떤 것도 포기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번 오르간 앨범 발매를 게기로 두 갈래였던 내 음악 커리어가 담쟁이 넝쿨처럼 함께 갔으면 좋겠다”고 웃었다. 오랫 동안 연주한 피아노가 가장 가까운 친구라면, 오르간은 신비로운 친구 같다고 말하는 조재혁. 그는 오르간이 가진 매력으로 “복잡성”이라고 답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복잡한 기계를 좋아해 세탁기, 냉장고 등 안 뜯어 본 물건이 없다”며 “처음에는 오르간이 기계적으로 어떻게 소리가 나는지 궁금했는데, 매커니즘을 이해하면 할수록 ‘어떻게 하면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겠구나’ 알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젠 오르간이 고장나면 직접 수리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졌다”고 덧붙였다. 코로나19로 인해 이달 영국 런던 데뷔가 무산된 조재혁은 “전 세계적인 코로나19 확산으로 많은 이들이 겪고 있는 고난을 위로하고 싶다”며 “이번 연주를 통해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다”고 말했다. 공연은 오는 7월13일 오후 8시 잠실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다. 관람료는 2만~7만원. 조재혁이 24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오드포트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하고 있다(사진=클래식앤)
- 대전의 대표빵집 '성심당', 롯데百 대전점서 시그니처스토어 첫 선
- 성심당 시그니처 스토어가 1일 롯데백화점 대전점에서 오픈하고, 판매 중인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사진=롯데백화점 대전점 제공[대전=이데일리 박진환 기자] 대전의 대표 빵집인 성심당이 롯데백화점 대전점에서 시그니처 스토어를 선보인다.롯데백화점 대전점은 ‘성심당 시그니처 스토어’를 오픈한다고 1일 밝혔다.성심당은 대전의 대표 빵집으로 군산의 이성당과 서울의 나폴레옹, 전주의 풍년제과, 부산 비엔씨와 함께 대한민국의 5대 빵집으로 손꼽힌다.또 2014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 때 교황의 식사빵을 만든 빵집으로도 유명하다.1956년 대전역 앞 작은 찐빵집에서 시작해 1970년대에 대전 중구 은행동으로 이전, 대전을 대표하는 향토기업으로 성장했다.현재 롯데백화점 대전점을 포함해 으능정이, 대전역, 대전컨벤션센터 등 모두 4곳에서 점포를 운영 중이다.2018년에는 단일 빵집으로는 최초로 연매출이 500억을 돌파하는 등 대전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발돋움했다.롯데백화점 대전점과 성심당의 인연은 2011년부터 시작된다.롯데백화점에서 수차례 러브콜을 보낸 끝에 같은해 12월 지하 1층에 문을 열었고, 2014년 10월에는 서울 롯데백화점 본점에서 열흘간 팝업스토어를 열어 4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이 같은 성공에 힘입어 2014년 11월 롯데백화점 대전점 1층에 케익부띠끄 매장을 오픈했다.당시 백화점 1층은 해외럭셔리 브랜드나 화장품 입점이 주를 이뤘지만 이례적으로 빵집으로 백화점에 대한 고정관념을 깬 시도로 평가받는다.올해는 롯데백화점 대전점 개점 20주년을 맞아 지역 상생 첫번째 프로젝트로 성심당과 손잡았다.지난 4월부터 2개월간 대대적인 리뉴얼을 진행해 기존 매장(380㎡)보다 3배 가까이 넓어진 최대규모(1070㎡)의 ‘성심당 시그니처 스토어’로 재단장했다.제품 판매에서 그치지 않고, 성심당의 대표 아이템인 튀김소보로의 모든 생산과정을 보여주는 ‘튀소팩토리’와 현장에서 직접 만드는 ‘라이브 샌드위치’, 천연발효 건강빵이 만들어지는 ‘밀방앗간’을 운영한다.지하 1층에서는 성심당의 감성충전 공간인 ‘오븐스토리’를 새롭게 선보여 아이와 함께 캐주얼 브런치를 즐길 수 있다.또 신메뉴 ‘초코 튀김소보로’를 이달 중 선보이고, 자율주행 배달로봇을 최초 도입하는 등 새로운 서비스를 제공할 예정이다.남승우 롯데백화점 대전점장은 “올해는 롯데백화점 대전점만의 시그니처 브랜드와 공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그 첫걸음을 대전의 대표 빵집인 성심당과 함께해 그 의미가 남다른 것 같다”며 “앞으로도 지역사회, 지역브랜드와 다양한 상생 활동을 진행, 지역에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롯데백화점 대전점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 [전문]文대통령 “5·18, 노무현 대통령 제일 먼저 생각난다”
- 문재인 대통령이 12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올해로 40주년을 맞은 5·18 민주화 운동과 관련해 광주 MBC와 인터뷰 하고 있다.(사진=청와대)[이데일리 김영환 기자] 문재인 대통령은 17일 “5·18하면 노무현 전 대통령, 당시의 노무현 변호사가 제일 먼저 생각난다”고 말했다.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 광주MBC의 5·18 40주년 특별기획 ‘문재인 대통령의 오일팔’에 출연해서 5·18과 관련해 떠오르는 인물에 대해 “광주 항쟁의 주역은 아니지만 그러나 광주를 확장한 분으로서 기억을 하고 싶다”면서 이 같이 말했다.문 대통령은 “80년대 이후의 부산 지역의 민주화운동은 광주를 알리는 것이었다”면서 “광주를 알게 될수록 시민들은 그 당시 광주가 외롭게 고립되어서 희생당했는데 거기에 동참하지 못하고 그냥 내버려두었던 그 사실에 대해서 큰 부채 의식을 가지게 됐고, 그것이 이제 민주화운동의 하나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고 평가했다.다음은 문재인 대통령 인터뷰 전문-5.18광주민주화운동이 시작된 지 40년이 됐습니다. 저는 그때 굉장히 어려서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실은 기억이 희미하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해 보면 기억이 없는데요. 대통령께서는 그때 어디에서 계셨고, 5.18 소식을 언제 처음 접하셨는지 말씀해 주십시오.△저는 그 5.18 전날인 5월17일 비상계엄령이 확대되고, 그날 바로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청량리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이 되었던 중에 저를 조사하던 경찰관들로부터 그 소식을 들었습니다.당시 그 경찰관들은 계엄군이 광주에 투입된 그(것)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인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계엄군의 발포로 많은 광주 시민들이 사상을 당한 사실, 그리고 또 경찰은 발포 명령을 거부해 가지고 시 진압에서 배제가 되었다는 사실, 또는 시민군들이 예비군이나 경찰 무기고를 열어서 무기를 들고 이렇게 맞서고 있다는 사실, 이런 사실들을 저에게 경찰정보망을 통해서 올라오는 소식들을 매일 매일 전해 주었습니다.저는 그런 얘기들을 들었기 때문에 그런 사실들이 당연히 다 언론에 보도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나중에 석방되고 난 이후에 보니까 그런 사실들은 거의 보도되지 않았고, 오히려 반대로 폭도들의 폭동인 양 그렇게 왜곡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광주 바깥에서는 어떻게 보면 가장 먼저 광주의 진실, 그런 것을 접했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1980년 5월27일 전남도청에서 광주 시민들이 계엄군들에게 진압된 이후에 1987년 6월항쟁까지 수많은 국민들이 광주 학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면서 민주화운동을 펼쳤습니다. 대통령께서도 그때의 국민들, 시민들과 같은 마음이셨을 것이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대통령께 있어서 광주 시민과 오월 영령들은 어떤 존재였다라고 할 수 있을까요?△우선은 제가 광주 5.18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민주화의 아주 중요한 그 길목에 다시 군이 나와서 군사독재를 연장하려고 한다, 그 사실에 굉장히 비통한 그런 심정이었고, 한편으로 광주 시민들이 겪는 엄청난 고통을 들으면서 굉장히 큰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80년 5월 초부터 매일같이 서울역에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모여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그런 집회 시위를 열었는데, 그게 날이 갈수록 숫자가 불어서 5월15일에는 무려 20만 명이 서울역에 운집을 했습니다.그런데 그 상황에서 군이 투입될 것이라는 그런 소문이 쫙 퍼졌는데, 그러자 당시 그 집회를 이끌고 있던 서울지역 각 대학 총학생의 회장단들이 말하자면 해산을 결정했습니다. 그게 이른바 ‘서울역 대회군’이라고 부르는 것인데요. 군이 투입될 수 있는 빌미를 줘서는 안 된다라는 명분도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군이 투입되면 아주 희생이 클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 상황이 좋아지고 난 이후에 다시 모여야 한다 그런 의견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그런데 나는 그때 그 결정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나는 그때 경희대 복학생 대표였는데, 나뿐만 아니라 대체로 복학생 그룹들은 말하자면 민주화로 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 군과 맞서는 것이기 때문에 군이 투입되더라도 사즉생의 각오로 맞서야 한다, 그 고비를 넘어야 민주화를 이룰 수 있다, 그리고 국제사회가 주시를 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서울지역에서 대학생들을 상대로 아주 가혹한 그런 진압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그런데 지금 그때 총학생 회장단들의 결정을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매일 서울역에 모여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대적인 집회를 함으로써 결국은 군이 투입되는 그런 빌미를 만들어 주고는 결국 결정적인 시기에는 퇴각을 하는 그런 결정을 내린 것 때문에 광주 시민들이 정말 외롭게 계엄군하고 맞서게 된 것이거든요. 그래서 그 사실에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고, 저뿐만 아니라 광주 지역 바깥에 있던 당시 민주화운동 세력들 모두가 이 광주에 대한 어떤 부채의식, 그것을 늘 가지고 있었고 그 부채의식이 그 이후 민주화운동을 더욱 더 확산시키고 촉진시키는 그런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그런 점에서 당시 광주 오월 영령들을 비롯한 광주 시민들은 우리 1980년대 이후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상징과 같은 그런 존재가 되었죠.-특히나 대통령께서는 5.18의 헌법적 가치에 대해서 누구보다 큰 관심을 기울여 오셨습니다. 대선 공약에서부터 시작해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까지도 헌법 전문에 5.18의 가치가 수록되어야 된다라고 얘기를 하셨는데요. 앞으로 개정될 헌법 전문에 5.18의 가치가 들어가야 한다면 여러 가지 광주 정신이 있습니다. 어떤 부분들이 꼭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우선 제가 그런 주장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제가 개헌안 발의를 했습니다. 비록 국회를 통과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제가 발의한 개헌안 그 전문에 5.18 민주화운동의 이념의 계승, 이것이 담겨있습니다.지금 현재의 우리 헌법 전문에는 3.1운동에 의해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4.19민주운동의 이념을 계승하는 것으로 그렇게만 헌법 전문에 표현되어 있는데, 우리가 이렇게 발전시켜온 민주주의가 실제로 문안화 돼서 집약돼 있는 것이 우리의 헌법이거든요.그런데 4.19의 혁명만으로 민주 이념의 계승을 말하기에는 4.19혁명 이후에 아주 장기간에 어찌 보면 더 본격적인 군사독재가 있었기 때문에 4.19운동만 가지고는 민주화운동의 어떤 이념의 계승을 말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그것이 다시 지역적으로 강력하게 표출된 것이 시기 순서로 보면 부마민주항쟁이었고, 5.18민주화운동이었고, 그것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이 6월 민주항쟁이었고, 드디어 그 미완된 부분이 다시 촛불혁명으로 표출이 되면서 오늘의 정부에 이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그 가운데 촛불혁명은 시기상으로 아주 가깝기 때문에 정치적 논란의 소지가 있어서 아직 헌법 전문에 담는 것이 이르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5.18민주운동과 6월항쟁의 이념만큼은 우리가 지향하고 계승해야 될 하나의 민주 이념으로서 우리 헌법에 담아야 우리 민주화운동의 역사가 제대로 표현되는 것이고, 또 그렇게 되어야만 5.18이나 또 6월항쟁의 성격을 놓고 국민들 간에 동의가 이루어지면서 국민적 통합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비록 헌법안 개헌이 좌절되었지만 앞으로 언젠가 또 개헌이 논의가 된다면 헌법 전문에서 그 취지가 반드시 되살아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예, 알겠습니다. 시기를 3년 전으로 좀 돌려보겠습니다. 5.18 37주년 기념식인데요. 그때 대통령에 당선되신 지 채 열흘도 안 돼서 직접 기념식에 참석을 하셨었죠. 여러 가지 장면들이 광주 시민들뿐만 아니라 국민들에게 감동을 줬던 것 같습니다. 특히 5.18 유족인 김소형 씨를 직접 안아 주시는 장면은 제가 듣기로 예정에 없던 그런 장면으로 알고 있는데, 그때 기억을 한번 되살려 보신다면 어떻습니까?△우선은 5.18 기념식이 제가 대통령 취임하고 난 이후에 처음으로 치른 국가기념식이었습니다. 그 점에서 뜻깊게 생각하고요. 우선 5.18민주화운동이 우리나라 아까 민주화의 역사에서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때 그 기념식에 대통령들이 참석하지도 않고, 그리고 또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도 못하게 해서 유족들이 따로 기념행사를 가지는,-그렇습니다.△그런 식으로 5.18 그 기념식이 조금 폄하된다할까 하는 것이 참으로 분노스러웠습니다. 실제로 제가 야당 대표를 할 때 그 공식 기념식에 정식으로 초청받아서 참석한 적도 있었는데, 그때 광주지방보훈청장의 경과보고, 그리고 국무총리의 기념사, 그것을 들으면서 그 속에 정말 5.18 민주화운동 정신에 대한 존중, 진심, 이런 부분이 거의 담겨져 있지 않은 그런 사실들, 또 유족들이 따로 기념식을 치르고 있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굉장히 좀 민망하고 부끄러운 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기념식을 마치고 저와 우리 일행들은 따로 묘역을 방문해서 거기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기도 했었는데, 어쨌든 그때 제가 대통령이 된다면 5.18민주화운동을 광주지역의 하나의 기념 이 차원에 국한하지 않고 말하자면 대한민국 전체의 어떤 민주화운동을 기념하는 행사로 그렇게 승화시키고, 또 대통령으로서도 해마다 참석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두 해의 한 번 정도씩은 참석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도 허용하고, 그래서 좀 제대로 기념식을 치러야겠다는 그런 식의 각오를 갖고 있었는데, 그런 제 각오와 약속을 실천할 수 있게 되어서 아주 뿌듯하게 생각을 했고요.그때 김소형 그 분은 저는 그때 처음 보는 분이고 사연도 처음 들었는데, 그분이 5.18 당일 날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5.18을 생일로 가지고 있는 그런 분이었어요. 그 아버지가 전남 완도에서 일하시던 분인데, 딸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로 왔다가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서 사망하게 된 거였거든요. 그래서 김소형 씨가 추도사를 하면서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었다면 엄마 아빠가 지금도 행복하게 잘살고 있지 않을까 이런 사연을 추도사에 담았는데, 그 추도사를 들으면서 누구나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죠.저도 눈물이 나는 것을 이렇게 막을 수가 없었고요. 그래서 그분 추도사 마치고 난 이후에 그냥 위로하는 말이라도 조금 건네겠다 생각하고 무대로 나섰는데, 그게 전혀 예정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마 처음 그 열린 공간에서 그 많은 분들이 참석한 그 행사에서 대통령이 갑자기 예정에 없이 무대 쪽으로 나가니까 우리 경호하는 사람들도 아주 당황했다고 하고, 김소형 씨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무대를 벗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제가 한참을 뒤에서 부르면서 쫓아가서 안아드렸는데, 이분이 어깨에 얼굴을 묻고 그냥 막 펑펑 흐느끼는 겁니다. 그래서 인제 좀 진정하기를 좀 더 기다렸었는데, 아마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유족들의 슬픔, 또 광주 시민들의 아픔, 이런 부분에 대해서 광주 시민들이나 또 전 국민들이 함께 공감한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합니다.-그리고 37주년 기념식 때 특별한 이름들을 호명을 하셨습니다. 표정두 열사, 박관현, 조성만, 박래전 이런 민주열사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시면서 오월 영령들뿐만 아니라 이들 민주열사들의 이름도 함께 기억해 줄 것을 주문을 하셨는데요. 어떤 취지이셨을까요?△아까 제가 80년 이후에 광주 5.18이 우리 민주화운동의 상징이 되었다라고 말씀드렸었는데, 실제로 그 이후에 민주화운동은 광주를 기억하라, 그리고 광주의 진상을 규명하라는 것이, 그것이 하나의 민주화운동, 그 자체가 바로 민주화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광주에서도, 또 광주 바깥에서도 굉장히 많은 분들이 광주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또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목숨을 바친 그런 분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 많은 분들을 다 일일이 호명하지는 못하고 제가 대표적으로 그 네 분의 이름을 호명했는데, 제가 말씀드리고자 했던 것은 5.18이 광주라는 특정한 지역으로 국한되는 운동이 아니다, 광주 밖에도 많은 5.18들이 있고, 그래서 광주의 정신이 우리 대한민국 전체의 민주화운동의 정신과 이념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그 사실을 우리 국민들도 기억해야 되고 광주 시민들도 그 사실을 기억하셔야 된다, 그런 말씀을 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대통령께서 취임하신 이후 수많은 5.18의 과제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의 원형 복원이라든가 5.18 헬기 사격과 관련한 국방부 조사위원회 가동, 그리고 며칠 전에 조사를 개시한 5.18진상조사위원회 출범, 수많은 일들을 지시하고 또 그런 것들이 진행되고 있는데요. 그만큼 5.18에서 풀어야 할 과제들이 많다는 뜻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대통령께서 생각하시기에 5.18의 여러 과제들 중에 가장 최우선적으로, 핵심적으로 해결해야 될 과제가 있다라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결국 과거의 그 아픔, 또 과거의 상처는 치유되어야 되는 것이거든요. 치유되어야 화해가 있고, 또 국민 통합이 이루지는 것이죠. 그 출발은 진실을 제대로 규명하는 것, 그 진실의 토대 위에서만 화해가 있고 통합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용서도 진실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죠.아직도 우리 광주 5.18에 대해서는 밝혀야 될 진실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침 오늘부터 5.18진상조사위원회가 본격적인 조사 활동이 시작됐는데, 이번에야말로 아직 남은 진실들이 전부 다 밝혀지기를 기대합니다.원래 이런 과거사에 대한 진상 조사는 국회가 특별법에 의해서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그에 따라 조사되는 것이 관례인데, 저는 국회의 입법을 기다리는 그것이 너무 시간이 많이 걸렸기 때문에 그렇게만 기다릴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진상조사위원회가 출범하기 이전에 국방부 자체 내에 5.18 특조위 구성을 해서 스스로 진상 조사를 하도록 하고, 거기에서 수집한 자료들을 진상조사위원회로 이렇게 이관해 주기로 그렇게 결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국방부 자체적인 5.18 특조위에서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헬기 사격 사실이라든지, 또 여성들에 대한 성추행, 성폭행, 심지어는 성고문 이런 사실들이 추가로 확인된 것은 나름대로 성과였다고 생각합니다.그러나 여전히 발포의 말하자면 명령자가 누구였는지, 발포에 대한 법적인 최종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 이런 부분들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아직도 행방을 찾지 못하고, 또 시신도 찾지 못해서 어딘가에는 아마 암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이 되는 그런 집단 학살자들, 그분들을 찾아내는 일들, 또 헬기 사격까지 하게 된 그 어떤 경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그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한 그런 어떤 그 공작의 실상들까지 다 규명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 규명의 목적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그 책임자를 가려내서 꼭 법적인 처벌을 하자라는 차원이 아니라, 그것이 그 진실의 토대 위에서 진정으로 화해하고 통합의 길로 나아가기 위한 그래서 꼭 필요한 그런 일이라고 믿습니다. 이번 진상조사위원회 활동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고, 정부도 적극적으로 뒷받침할 작정입니다.-대통령께서 5.18에 이렇게 많은 관심을 보이고, 또 실제 많은 과제들이나 이런 것들을 해결해 나갈 의지를 보이고 계십니다만 아직도 5.18을 왜곡하거나 5.18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상당히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5.18을 전 국민이 기념하는 민주항쟁 혹은 민주기념일로 볼 수 없지 않느냐 이런 의견도 일부 있는데요. 5.18 왜곡과 폄훼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데, 이와 관련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 궁금합니다.△우선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우리 민주주의는 다양한 생각을 허용하고, 또 다른 생각에 대해서도 말하자면 관용하는, 그런 말하자면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이죠. 그러나 그 민주주의의 그 관용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그런 여러 가지 폄훼에 대해서까지 인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5.18을 폄훼하고 왜곡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단호한 대응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요.어쨌든 아까 말씀드린 이 진상을 제대로 규명해내는 것도 그런 폄훼나 왜곡을 더 이상 없게 만드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나는 좀 더 나아가서 정말 우리 정치 현실이 안타까운 것이 그 추가적인 진실 규명이 없더라도 지금까지 밝혀진 역사적 사실만으로도 광주 5.18 그런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말하자면 결정적인 상징으로서 그래서 존중받기에 충분하거든요.이미 법적으로도 20 몇 년 전에 특별법이 만들어져서 그것이 민주화운동으로 규정이 되고, 또 거기에 희생당한 분들이 민주화운동의 유공자로 인정받기도 하고, 거기에 국가기념일로 지정이 되어서 전 국가적으로 기념행사도 치르고, 이 정도면 국민적으로, 국가적으로는 이렇게 하나 정리하고 다음의 장으로 넘어가야 되는 것이죠.개인적으로는 다른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일제 식민 지배에 대해서도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듯이. 그러나 국가적으로는 일제 식민 지배는 불의한 것이었고, 그다음에 거기에 저항한 독립운동의 정통성이 있는 것이고, 친일은 심판받아야 되는 것이고, 또 해방 이후에 우리 현대사에 있어서도 국가 발전의 과정에서 독재가 있었고, 그 독재에 맞서서 치열하게 항쟁하고 희생당한 그런 숭고한 민주화운동들이 있었고, 그런 운동들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이만큼 발전시켰고, 또 그와 함께 우리 경제 발전도 이만큼 이루었고 하는 이런 점에 대해서는 이제는 역사적 평가가 사실은 끝난 것입니다.이 평가를 넘기고 이제 앞으로 우리 민주주의를 얼마나 더 풍부하게, 더 크게, 넓게 발전시켜 나가느냐, 또 우리 경제를 얼마나 더 세계에서 선도적인 경제로 발전시켜 나가느냐, 이렇게 우리의 논의가 발전되어 나가야 하는데, 법적으로 다 정리된 사안을 지금까지도 왜곡하고 폄훼하는 발언들이 있고, 그것을 일부 정치권에서 조차도 그런 주장들을 받아들여서 이렇게 막 확대 재생산시켜지는 일들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런 식의 고리를 끊어야 우리 사회가 보다 통합적인 사회로 나갈 수 있고, 우리 정치도 보다 통합적인 정치로 발전해 나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5.18의 여러 인물들이 있습니다. 5.18을 상징하는 여러 인물들이 있는데, 대통령께서 생각하시기에 5.18 하면 생각나는 인물 혹시 있으시면 왜 그런지도 한번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저는 5.18 하면 조금 이야기가 약간 멀어질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노무현 前 대통령, 그러니까 그 당시의 노무현 변호사가 제일 먼저 생각이 납니다. 80년대 이후의 부산 지역의 민주화운동은 광주를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광주를 알게 될수록 시민들은 그 당시 광주가 외롭게 고립되어서 희생당했는데 거기에 동참하지 못하고 그냥 내버려두었던 그 사실에 대해서 큰 부채 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이제 민주화운동의 하나의 또 원동력이 되기도 했습니다.처음에는 유인물들을 통해서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도 하고, 또 해마다 5.18이 되면 버스를 2대, 3대 전세내서 민주화운동 하는 분들이 함께 합동으로 5.18 묘역을 참배하기도 하고, 그러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난 이후에는 그 당시의 광주의 상황을 촬영한 동영상들, 이른바 광주 비디오라고 부르던, 거의 한 시간 정도 되는 분량이었는데, 그 내용이 너무나 생생하고 정말로 참혹한 것이었습니다.누구나 그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을 할 수가 없는 그런 말하자면 확실한 증거가 되는 그런 비디오인데, 그 비디오들을 처음에는 성당이나 교회에서 몇 사람들이 돌려보다가 나중에는 대학의 동아리들, 학생회 이런 차원에서도 돌려보고, 6월항쟁이 일어났던 87년 5월에는 당시의 노무현 변호사와 제가 주동이 돼서 부산 가톨릭센터에서 5.18 광주 비디오, 말하자면 관람회를 가졌습니다. 영화 상영하듯이 하루 종일 모니터로 광주 비디오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산 시민들이 줄을 서서 기다려서 광주 비디오를 보고, 그때 비로소 광주의 진실을 알게 된 그런 분들도 많았습니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한 3, 4일 정도는 한 것 같습니다.그런 것이 부산 지역 6월항쟁의 큰 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또 부산의 가톨릭센터가 6월항쟁 때 서울의 명동성당처럼 자연스럽게 부산 지역 6월항쟁을 이끄는 그런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 일들을 함께했던 그 노무현 변호사, 광주 항쟁의 주역은 아니지만 그러나 광주를 확장한 그런 분으로서 기억을 하고 싶습니다.
- [위대한 생각]①모래서 찾은 실리콘…그 흔함이 세상을 바꾸다
- 세상을 올바르게, 세상을 따뜻하게’를 실천하는 경제종합미디어 이데일리가 창립 20주년을 맞아 ‘위대한 생각’(THINK GREAT) 대장정을 시작합니다. ‘위대한 생각’은 이데일리와 이데일리의 지식인 서포터스, 오피니언 리더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경제 인문학 토크 콘서트입니다. 우리 시대 ‘지성인’(至成人·men of success)들이 남과 다른 위대한 생각을 발굴하고 제안해 성공에 이르도록 돕겠습니다. ‘위대한 생각’은 이데일리TV에서 매주 화요일 오후 6시 방송하며, 강연 내용은 지면으로도 소개합니다.임규태 박사가 서울 중구 KG타워 하모니홀에서 ‘인더스토리’ 2강 ‘모래(沙)’ 편 강의를 하고 있다.(사진=이데일리 노진환 기자)◇오늘의 강연 및 지성인 ☆ ‘인더스토리’(INDUSTORY)현대 산업사회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들의 과거와 현재를 역사·정치·문화·기술·경제 등 복합적인 시선으로 이해하고 이를 통해 미래를 보는 능력을 기른다. 현대 문명의 기반이 된 ‘철(鐵)’과 ‘사(沙·모래)’부터 코로나19 사태로 주목받고 있는 ‘약(藥)’, ‘의(醫)’까지 이 세상 모든 산업의 역사를 다룬다. ☆ 임규태 공학자·교육자·기업가 미국 조지아공대에서 15년간 교수로 재직. 조지아공대 부설 전자설계연구소 부소장, 조지아공대 기업혁신센터 국제협력 수석고문. 국제 통신표준화 의장. 빅데이터·소프트웨어·게임·블록체인·기후변화 등 다양한 분야의 스타트업에 참여. [총괄기획=최은영 부장, 연출=정윤철 PD, 정리=김무연 기자] 27.7과 14. 임규태 박사는 이데일리 강연 프로그램 ‘위대한 생각’ ‘인더스토리’(INDUSTORY) 두 번째 강의 ‘모래’ 편을 이 두 숫자로 압축해 표현했다. 모래의 주성분인 규소(실리콘·Si)는 지각의 27.7%를 차지하는, 산소 다음으로 흔한 물질이다. 산소와 달리 산업재로 쓰이는 것이 특징으로, 세상에서 가장 값싼 산업재이기도 하다. 규소가 보유한 전자는 14개. 이 중 가장 바깥쪽 4개는 다른 원자와 화학 결합을 용이하게 한다. 규소로 만들어진 화합물은 방수성, 탄력성, 화학 반응에 대한 저항성이 강해 다양한 산업 영역에서 사용되고 있다. 현재 우리 생활과 밀접한 건물, 전자기기, 인체 보형물 등도 규소가 있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탈리아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내부 돔 구조.◇ 피렌체 울린 시멘트…1400년 지나 부활모래로 태어난 산업재가 없었다면 우리 일상은 얼마나 큰 불편을 겪었을까. 임 박사는 그 단적인 예로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이하 두오모)을 꼽았다. 1296년 첫 삽을 떠 약 140년에 걸쳐 완공된 두오모는 건축으로 신앙심을 표현하려 했던 당시 피렌체인들의 걸작이다. 두우모는 이후 르네상스 건축 양식의 모태가 됐다.피렌체인들은 로마 판테온 신전의 돔 형식을 두오모 성당에 이식해 자신들이 로마인들보다 신앙심과 기술 면에서 뛰어남을 증명하려 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성당의 마지막을 장식할 ‘돔’을 구현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 매듭을 푼 것이 천재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다. 돔 건축을 위한 경연에서 우승을 한 브루넬레스키는 나무 틀을 짜고 그 위에 벽돌을 얹는 방식으로 돔을 완성했다. 돔 건설에 걸린 시간은 17년. 돔의 무게는 3만7000톤(t)에 달했고 사용된 벽돌만 400만개를 넘었다.하지만 로마인들은 판테온 신전을 어렵게 짓지 않았다. 당시 로마인들은 시멘트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은 베수비오 화산 옆에 있는 작은 마을인 포졸리에서 구한 화산재로 시멘트를 만들어 사용했다. 임 박사는 “로마 제국이 동과 서로 갈라지며 시멘트 제조 기술은 잊혀졌다”라면서 “기술의 부재가 후대에 어떤 어려움을 안기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했다.윌리엄 애스프딘(사진 왼쪽)과 조셉 모니에르. 두 사람은 각각 시멘트와 철근 콘크리트 공법을 개발해 현대 건축을 완성했다.로마제국의 분열 과정에서 사라진 시멘트 기술은 1400년이 지난 1842년 영국에서 부활했다. 영국 남부 포틀랜드 지역에서 벽돌공 윌리엄 애스프딘이 포틀랜드에 풍부한 석회석을 이용해 시멘트 생산에 성공한 것이다. 비슷한 시기 영국의 헨리 베세머는 베세머 프로세스를 발명해 강철의 대량생산이 이뤄지고 있었다. 이 두 기술이 결합하면서 건축 분야는 일대 혁명기를 맞았다. 한편 프랑스의 조경사 조셉 모니에르는 1855년 철근을 엮은 뒤 그 위에 콘크리트를 붓는 건축방법을 개발했다. 현대 건축 체계를 대표하는 ‘철근 콘크리트 공법’이 탄생한 것이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철근 콘크리트 공법이 완성된 것은 고작 18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은 셈이다. 트랜지스터를 만들어 낸 벨 연구소 3인방. 왼쪽부터 존 바딘, 윌리엄 쇼클리, 윌터 브랜튼.◇ 보편성의 승리로 끝난 반도체 전쟁건축 산업을 180도 바꿔 놓은 규소는 미국 물리학자들과 만나면서 다시 한 번 세상을 뒤바꾼다. 1947년 미국 뉴저지에 위치한 벨 연구소에서 존 바딘, 윌리엄 쇼클리, 윌터 브랜튼이 트랜지스터를 개발한다. 트랜지스터는 전기의 흐름을 제어하고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반도체 소자다.벨 연구소를 떠난 쇼클리는 캘리포니아에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를 세우고 우수한 인재를 선발해 본격적으로 반도체 개발에 들어간다. 그러나 벨 연구소 시절부터 인성 등에서 뒷말이 많았던 쇼클리였기에 그 휘하의 인재들도 짐을 싸 반도체 회사 ‘페어차일드’로 적을 옮겼다. 쇼클리는 이때 떠난 8명을 ‘8인의 배신자’라 부르며 죽을 때까지 비난했다고 한다.8인의 배신자 중 한 명인 로버트 노이스는 1957년 평면 위에 회로를 프린팅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IC집적회로의 탄생이다. 작은 면적에 더 많은 회로들을 집약하는 기술이 탄생하면서 반도체 기술은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로버트 노이스(사진 왼쪽)과 잭 킬비. 두 사람 모두 같은 시기에 집적회로를 개발했다.우연의 일치로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에 근무하던 잭 킬비 역시 비슷한 평면 회로를 개발했다. 두 사람은 집적회로의 특허권을 두고 다퉜지만 결국 공동 발명자로 이름을 올리는 것으로 갈등은 일단락됐다. 하지만, 노이스와 킬비의 기술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킬비는 게르마늄 기판에 회로를 만든 반면 노이스는 실리콘에 집적회로를 만들었던 것. 당시 대부분의 반도체 연구자들은 전기적 특성이 우수한 게르마늄을 사용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노이스는 끝까지 실리콘을 고집했다.결국 산업이 발전할수록 실리콘, 즉 규소가 가진 보편성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보편성이 성능을 압도한 셈이다.임 박사는 “킬비의 의도대로 게르마늄을 기반으로 반도체 산업이 발전했다면 정보통신기술(ICT) 산업의 폭발적인 성장은 없었을 것”이라며 “결국 기술이란 성능 뿐 아니라 보편성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고 말했다.인텔 창업자들과 실리콘 밸리,◇ 왜 ‘실리콘밸리’인가노이스는 훗날 무어의 법칙을 만든 동료 고든 무어와 함께 실리콘으로 만드는 범용 반도체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페어차일드를 떠나 새로운 반도체 회사를 설립한다. 바로 ‘반도체 공룡’이라 불리는 ‘인텔’이다. 인텔은 고성능 메모리를 생산해 큰 성공을 거뒀으며, 이후 메모리 분야를 일본에 넘기고 자신들은 마이크로 프로세서와 중앙처리장치(CPU) 개발에 집중해 지금까지 세계 반도체 시장을 이끌고 있다.임 박사는 미국의 IT 산업단지인 실리콘밸리라는 이름이 붙게 되는 계기를 되짚었다. 실리콘밸리는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남쪽, 특히 샌프란시스코 만의 남쪽 끝 산호세부터 북쪽으로 레드우드 시티까지의 도시들인 산타클라라, 서니베일, 쿠퍼티노, 마운틴뷰, 팔로 알토, 멘로파크를 아우른다. 현재 실리콘밸리의 시작은 컴퓨터 기기 제조회사 휴렛팩커드(HP)로 보고 있다. 1989년 캘리포니아 주는 HP가 탄생한 에디슨가 367번지의 허름한 차고를 ‘실리콘밸리의 발생지(The Birthplace of Silicon Valley)’로 명명했다. 하지만 임 박사의 시각은 달랐다. 실리콘밸리라는 명칭은 실리콘 반도체 혁명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그는 “실리콘을 이용해 세상을 바꾼 것은 노이스와 무어 등이 창업한 인텔”이라며 “실리콘밸리의 이름이 나온 계기는 노이스가 실리콘을 선택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추측했다.
- [강경록의 ‘콕’] 즐거움이 꽃피는 화려한 거리로의 변신
- 여행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Go100Star의 로맨틱한 포토존[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기차역은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자연스레 상업 시설이 들어서고 거리가 번창한다. 더 많은 기차가 멈춰 설수록 기차역 주변은 활기를 띤다. 호남 철도 교통의 관문으로 통하는 익산역이 그렇다. 역 건너편에 익산문화예술의거리가 형성됐다. 일제강점기 건축물을 활용한 익산근대역사관부터 젊은 연인을 위한 데이트 명소, 지역민의 오랜 맛집까지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풍성하다.과거 영정통으로 불렸던 익산의 오랜 번화가 문화예술의거리◇일제강점기의 작은 명동 ‘중앙동’1900년대 익산에 신문물이 쏟아졌다. 교회와 성당이 세워지고, 일본인이 들어와 대규모 농장을 설립했다. 1912년에는 이리역(지금의 익산역)에 기차가 다니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천지개벽이었다. 익산문화예술의거리가 자리한 중앙동 일대는 일제강점기에 ‘작은 명동’으로 통했다. 일본식 지명 사카에초(榮町)가 오래도록 남아, 지금도 어르신들은 이곳을 ‘영정통’이라 부른다. 해방 후에도 기차역 상권은 건재했다. 매일 수만 명이 드나들고 밤새 네온사인이 반짝였다.그러나 2000년대 신도시 개발과 함께 상권이 조금씩 옮겨 가면서 구도심은 위기를 맞았다. 이에 익산시가 낡고 버려진 상점을 문화 예술인을 위한 창작 공간으로 빌려줬다. 갤러리와 공방이 하나둘 문을 열고, 익산아트센터가 운영하는 Go100Star(고백스타)에 익산근대역사관까지 들어서면서 거리는 생기를 되찾았다.익산근대역사관은 1922년에 세운 익산 중앙동 구 삼산의원(등록문화재 180호)을 옮겨 개관했다. 삼산의원은 이국적인 포치와 아치형 창문, 전면의 화려한 장식이 당시로는 꽤 파격적인 건물이었다. 일본인이 과시하듯 지은 건물이 아닐까 싶었는데, 독립운동가이자 의사 김병수가 그 주인이다. 군산과 서울 등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한 그는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삼산의원을 개원해 열악한 의료 환경에 놓인 식민지 백성을 돌봤고, 한국전쟁 때는 부산에서 군의관으로 활약했다.근대 익산의 역사를 살펴보는 여행자◇일제강점기의 가슴 아픈 흔적 속으로익산근대역사관으로 다시 태어난 삼산의원은 근대 익산의 다양한 변화와 일제강점기의 가슴 아픈 수탈, 뜨거운 항일운동의 흔적을 차례로 돌아볼 수 있다. 건물 뒤쪽에 복원 이전의 형태가 일부 남아 있다. 원래 건물을 103개 부분으로 해체해서 옮긴 뒤 조립해, 문화재 이전 복원의 특수한 사례로 평가받는다. 관심 있는 여행자라면 놓쳐선 안 될 볼거리다.익산문화예술의거리 한가운데 자리한 Go100Star는 포토 존부터 눈길을 사로잡는다. ‘꽃을 보듯 너를 본다’는 글귀만큼이나 로맨틱한 눈빛의 남학생과 옅은 미소를 띤 여학생이 풋풋한 고백의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서동과 선화공주, 아사달과 아사녀, 소세양과 황진이 등 유난히 많은 사랑 이야기를 간직한 익산이 아닌가.Go100Star는 연인이 귀여운 잠옷도 빌려 입고 앙증맞은 소품을 활용해 재미난 사진을 촬영할 수 있도록 꾸몄다. 프러포즈의 방, 사랑의 감옥 등 테마도 다채롭다. 출구에 자리한 ‘사랑의 등기소’에서는 커플·부부등록증을 발급해준다. 아쉽지만 익산근대역사관과 Go100Star는 현재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확산 방지를 위해 임시 휴관 중이다.직선거리로 500m 남짓하지만, 익산문화예술의거리 골목 구석구석에 저마다 이야기를 품은 공간이 선물처럼 숨어 있다. 근대의 뾰족한 삼각 지붕을 얹은 상가부터 낡은 담벼락을 갤러리 삼은 흑백사진, 셔터에 ‘가업을 이은 멋진 가게’라고 적어둔 정다움까지 소소한 즐거움이 꽃핀다. 라디오 스튜디오 ‘이리블루스’에서 DJ가 틀어주는 신청곡을 듣고, 옛 교복이나 개화기 의상을 빌려 입고 색다른 추억도 남길 수 있다.맛집을 찾아다니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50년 넘게 자리를 지키는 ‘신생반점’은 구수하면서도 담백한 된장짜장을, 익산의 옛 지명을 딴 ‘솜리당’은 제과 제빵 명장이 특산물을 이용한 갖가지 빵을 선보인다. 단팥빵은 1인당 구매 개수를 제한할 만큼 인기다. 지역 청년들이 운영하는 카페와 주점도 선택의 즐거움을 더한다.옛 삼산의원을 옮겨온 익산근대역사관◇익산의 근대문화유산들근대 풍경이 궁금하다면 익산 구 춘포역사(등록문화재 210호)에 들러보자. 춘포역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로, 1914년 대장역(大場驛)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큰 뜰’을 의미하는 이름처럼 일본인이 대규모 농장과 정미소 등을 운영한 지역이다. 1996년 춘포역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당시 사용한 정미소와 농장 가옥이 남아 일제 수탈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역 내부에 춘포역의 역사와 마을 사람들의 빛바랜 기억을 담은 흑백사진 등이 전시된다. 앞마당에 있는 증기기관차 모양 미끄럼틀은 아이들에게 반가운 놀이터다.춘포역에서 자동차로 10분 남짓 가면 달빛소리수목원을 만난다. 입구에 자리한 고목 ‘황순원 소나기 나무’는 소년 소녀가 비를 피했을 법한 커다란 구멍이 있어 신비로운 분위기마저 풍긴다. 널찍한 잔디밭과 계절마다 피고 지는 갖가지 꽃이 로맨틱한 쉼터를 제공하고, 고풍스러운 카페와 아기자기한 포토 존도 있다.익산 나바위성당(사적 318호) 역시 근대 모습이 남은 곳이다. 한국 천주교 초기에 세워진 성당으로, 1897년에 본당을 설립하고 1907년 건물을 완공했다. 입구부터 남녀를 구분했으며, 한식과 양식이 어우러진 외관이 아름답다. 성당 뒤쪽으로 난 십자가의길을 따라 화산 정상에 오르면 김대건 신부의 순교비가 있다. 중국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1845년 이곳 나루터를 통해 우리 땅에 처음 발 디딘 것을 기념한 공간이다. 실제로 화산에서 멀리 금강이 한눈에 들어온다.한식과 양식이 조화를 이룬 나바위성당의 아름다운 전경◇여행메모△여행 코스= 익산문화예술의거리→춘포역→달빛소리수목원→익산 왕궁리 유적→ 국립익산박물관→나바위성당→익산 함라마을 옛 담장△가는길= 경부고속도로→천안 JC에서 광주·전주 방면→연무 IC에서 강경 방면→망성교차로에서 익산·함열 방면→다송사거리에서 고가차도 진입→다송교차로에서 전주·군산 방면→중앙지하차도에서 지하차도 진입→익산문화예술의거리△잠잘곳= 인북로에 있는 반딧불이모텔 한국관광 품질인증업소다. 동서로의 웨스턴라이프호텔, 마한로의 익산유스호스텔, 함라면의 함라한옥체험관 등이 있다.△먹을곳= 중앙로의 신생반점은 된장짜장, 인북로의 솜리당은 단팥빵이, 중앙로의 김밥과 우동은 김마리오앤우동이 유명하다.△주변볼거리= 익산교도소세트장, 고스락, 서동공원
- '본 어게인' 진세연 이수혁에 기습 키스…감정의 시작
- [이데일리 스타in 김보영 기자] ‘본 어게인’ 진세연과 이수혁이 서로에 대한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사진=‘본 어게인’ 방송화면)5일 밤 방송된 KBS2 드라마 ‘본 어게인’(극본 정수미, 연출 진형욱 이현석) 11,12회에는 서로에게 끌리는 김수혁(이수혁 분)과 정사빈(진세연 분)의 모습이 담겼다.김수혁은 성당에서 천종범(장기용 분)이 묻은 유골을 발견했다. 그 시각, 장혜미는 공지철에 대한 책 ‘살인범의 비밀’의 저자로 뉴스 인터뷰에 출연했다.수혁은 종범을 찾아왔다. 종범은 “용의자 신분인가요, 참고인 신분인가요?”라고 물었고, 사빈은 종범을 걱정했다. 수혁은 “정사빈씨는 여기 계시죠”라고 말한 뒤 수혁과 차에 탔다. 종범은 자신을 취조하는 수혁에게 “그 아이는 임하영 아이다. DNA 채취해서 확인해 보시라. 임하영이 죽던 날, 술김에 저한테 자기 아이를 죽였다고 고백을 했다. 제가 찾아낸 뒤 성당에 옮겨서 묻어 준거다”라고 말했다. 이어 “팩트만 말한거다. 믿고 안믿고는 검사님 선택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장혜미와 딸 백상아(이서엘 분)는 수혁과 만나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혜미는 수혁에게 공지철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놨다. 혜미는 “나도 같은 생각이다. 살인은 의지로 막을 수 없다는 거. 그러니까 저번에 말한 그 아이, 잘 관찰해봐요”라며 수혁에게 종범에 대해 말했다. 혜미는 “난 그 아이 열세살 때 처음 봤다. 관심이 많은 것 같아 공지철에 대한 책을 선물했다. 난 사이코패스를 통찰하는 능력이 있다. 언젠간 나를 찾아오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때 나한테 솔직하길 바랬다. 생각보다 멘탈이 독했다. 자기 분야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둘 아이다. 그게 살인이 아니길 바라지만”이라고 말했다.수혁은 천종범과 공지철, 장혜미와의 관계를 파헤치기 위해 노력했다. 한편, 사빈은 종범에게 전화해 “나는 다른 사람 말은 안믿는다. 나는 나한테 다가오는 너만 믿을거야”라고 말했다. 한편 사빈은 종범의 가정사를 알게됐다. 다음날, 종범은 사빈에게 운석 목걸이를 선물했다. 수혁은 사빈에게 종범이 살인 사건의 용의자임을 말했다. 수혁은 사빈에게 종범을 조심하라고 말했고, 사빈은 “검사님은 왜 제 앞에서 항상 화내면서, 걱정하는거죠?”라고 물었다. 수혁은 사빈에게 “그만하죠”라며 자리를 떴다. 수혁은 사빈의 부검실을 찾았다. 수혁은 사빈에게 사체의 반지를 돌려줬다. 사빈은 “반지 돌려주러, 같이 가셔야죠”라고 말한 뒤 수혁과 함께 ‘오래된 미래’ 서점을 찾았다. 사빈은 수혁에게 “제가 사실 심장을 이식 받았다. 떨리는 게, 제 마음인지 이분 심장인지 알고싶다. 사실은 김수혁씨보고 처음부터 떨렸다”고 말한 뒤 수혁의 손을 잡았고 “부족하면 더 해도 돼요?”라고 말하며 수혁에게 입을 맞췄다.두 번의 생으로 얽힌 세 남녀의 운명과 부활을 그리는 환생 미스터리 멜로드라마 ‘본 어게인’은 매주 월, 화요일 오후 10시 방송된다.
- 어린이날까지 완화된 사회적 거리 두기…등교 개학 그 이후(종합)
- [이데일리 이지현 기자] 프로 축구와 야구 등 야외 스포츠의 경우 무관중 경기로 개막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교회와 성당 등에서도 실내 예배가 가능해진다.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19일 “다음달 5일까지 총 16일간 다소 완화한 형태로 `사회적 거리 두기`를 계속하기로 결정했다”며 이렇게 밝혔다. ◇강화된 사회적 거리 두기 한달…확진자 한자릿수 ‘뚝’이날 0시 기준 확진자는 8명 늘어난 총 1만661명이다. 지난달 22일부터 이날까지 약 1개월 가까이 진행된 강화된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이전까지만 해도 매일 100명 내외로 발생하던 신규 확진 환자는 지난 9일 이후 50명 이하로 감소했다. 이날은 약 두 달 만에 처음으로 한자릿수를 기록했다. 집단발생 건수도 사회적 거리 두기 시작 전 10일간 11건이 발생하던 것이 최근 10일간 3건으로 줄었다. 감염경로를 알 수 없는 확진자 비율도 10% 내외에서 최근 2주 간 평균 2.1%로 감소했다. 정세균 국무총리가 19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코로나19 대응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노진환 기자)그러나 전문가들은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지난 15일 실시한 국회의원 총선거 방역 결과가 2주 후에야 나오는 등 집단 감염 가능성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코로나19의 세계적인 확산세 역시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경제 침체와 이로 인한 서민층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강화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장기화 하면서 사회적 피로가 누적되고 참여동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휴대폰 이동량과 카드 매출액을 분석한 결과 강화된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시행한 직후에는 이동량과 카드사용 모두 감소했으나, 현재는 다시 점점 회복되는 경향이 나타났다.특히 오는 30일 부처님 오신날, 5월 1일 근로자의 날, 5월 5일 어린이날 등 이달 말부터 내달 초까지 이른바 `황금연휴`가 예고되며 강력한 사회적 거리 두기 조치가 무색해질 수 있다는 지적에 일부 조치를 해제해 숨통을 틔워주기로 한 것으로 풀이된다. 박능후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1차장은 “16일 간 사회적 거리 두기를 지속해 총선 등으로 인한 감염 확산 가능성을 점검하고 방역망 통제범위 밖의 원인 미상 감염사례를 최소화 해 향후 안정적인 코로나19 관리기반을 확실히 구축하겠다”고 설명했다. ◇공공 실외시설 문 활짝…학원 등도 운영 가능우선 공공부문의 경우 국립공원이나 자연휴양림, 수목원 등과 같이 위험도가 낮은 실외의 분산시설부터 운영을 재개한다. 프로야구와 같이 밀접 접촉이 가능한 실외시설에 대해서도 관중 없이 운영하는 방식으로 접촉을 방지하는 가운데 제한적으로 운영을 허용한다. 불필요하고 시급하지 않은 모임이나 외출, 집단행사는 가급적 자제하는 기조를 계속 유지하기로 했다. 다만, 필수적인 시험 등 불가피한 행사의 경우 방역지침을 준수하는 범위에서 제한적으로 허용한다. 박능후 1차장은 “자연휴양림 등 시설별로 주무부처에서 방역, 관리지침을 만들 것”이라며 “비교적 실내시설이나 야외활동은 지금보다 좀 더 편안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감염병예방법 위반 혐의로 고발 당한 사랑제일교회가 주일 예배를 강행한 19일 오전 서울 성북구 사랑제일교회에 신도들이 입장하고 있다. (사진=방인권 기자)종교시설, 학원, 실내체육시설, 유흥시설 등 4대 시설의 경우 `운영 중단`에서 `사용 자제`로 권고를 완화한다. 이에 따라 종교시설과 학원 등은 다시 문을 열어도 되지만 방문객 명단을 작성하고 일정 거기 두고 앉기, 수시로 환기하기, 마스크 착용하기, 출입자 기록하기, 발열 체크 하기 등의 방역지침을 준수해야 한다. 다만 방역지침을 지키지 않을 경우 정부는 기존과 동일하게 행정명령을 내릴 방침이다. 박능후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1차장은 “이번에 연장된 사회적거리두기 기한에도 유흥시설 등이 문을 열 경우에는 여전히 방역 수칙을 철저히 지켰을 경우 가능하다”며 “만약 이런 방역수칙이 지켜지지 않고 운영을 하면 기존과 같이 행정명령이 발동돼 벌금을 부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장기화에 대비해 사회적 거리 두기를 지속 가능한 형태로 실행하기 위한 생활방역은 5월 6일부터 전환한다. 일상생활과 방역조치가 조화를 이룰 수 있게 관련 수칙 등도 정비하고 있다. 교육부도 이때까지 상황을 보면서 등교 수업과 원격 수업 병행 가능성을 타진할 계획이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등교 개학의 경우 전반적인 상황을 봐가며 순차적으로 추진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강조했다.
- 달라진 근무 환경에..IT 기업들 ‘기대 반 우려반’
- [이데일리 김현아 기자]코로나19로 접촉을 꺼리면서 사무직 직원들의 재택근무가 늘고 교회나 성당, 대학에서도 비대면 온라인 예배나 미사, 강의를 잇달아 도입하고 있다.첨단 기술에 익숙한 IT 기업들은 이번 기회에 자체 도입한 원격 업무 지원 솔루션을 시험하면서 직원 안전과 함께 업무 효율성도 유지하는 모양새다. 게다가 원격 근무나 비대면 온라인 행사로 IT 솔루션의 사용량(트래픽)이 늘면서 매출 확대 기대감도 적지 않다.하지만,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재택근무가 길어지면서 소속감이 줄었다거나 팀장급 이상 리더들에게 업무가 집중되는 등 기술로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도 적지 않다.[이데일리 이미나 기자]SK텔레콤 등 재택근무 연장…수평 문화 확산에도 기여SK텔레콤, SK브로드밴드, SK스토아 등 대부분의 SK계열사들은 지난 주에 이어 전 직원 재택근무를 3월 첫번째 주까지 연장했다. 이들은 클라우드 기반으로 화상회의나 그룹콜을 하면서 오히려 출·퇴근으로 낭비하는 시간을 줄였다는 반응이다. SK텔레콤 관계자는 “(원격 협업 솔루션)‘팀즈’를 제대로 못썼던 직원들도 익숙해져 공통의 문서를 띄워 두고 원격으로 회의할 수 있게 됐다”면서 “대면 보고가 줄어 수평적인 기업 문화 확산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런 분위기는 재택근무가 원칙인 네이버나 카카오, 직원들이 절반씩 재택근무하는 KT도 마찬가지다. ▲SK텔레콤 직원이 지난해 도입한 마이크로소프트 협업 솔루션 ‘팀즈’로 업무를 진행하고 있다. SK텔레콤 제공기업·대학·종교시설에 속속 도입되는 IT..매출 확대 기대감도사무직과 달리 굴뚝업체 근로자들은 재택이 제한적이다. 제조업체인 삼성이나 현대차 등이 임산부 등 일부에 한해 재택근무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대학이나 종교시설의 경우 대면 접촉을 줄이고 온라인 솔루션을 도입하려는 사례가 늘고 있다. 연세대가 개강 이후 2주간 비대면 수업을 하겠다고 교수들에게 공지했고, 여의도순복음교회, 중구 영락교회 등 대부분의 교회가 신도들의 감염 위험을 줄이기 위해 온라인 예배 중계를 하고 있다.네이버가 제공하는 원격업무 지원솔루션 라인웍스 경우 2월 말 현재, 전월 대비 메시지 트래픽이 5배 이상 늘었고, 영상 통화량과 영상 화면 공유 기능 사용량도 1.5배 이상 상승했다. 솔루션 업계 관계자는 “코로나19가 3월 말이 지나야 안정화될 것으로 보여 기업들이 다른 공간에서도 업무를 볼 수 있는 클라우드나 협업 솔루션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 기업인 텐센트 클라우드에 따르면 우리보다 먼저 코로나19가 휩쓸고 간 중국에선 실시간 오디오 및 비디오의 평균 일일 통화 시간은 이미 30억 분을 초과했고, 최대 동시 통화 수는 1000만 회에 달했다. 기업문화는 아직..“답답하다”, “효과적 협업 한계” 지적도물론 원격근무가 문화적으로 안착한 것은 아니다. 지난주부터 원격 근무를 하고 있는 A기업 팀장급 관계자는 “아침 9시에 카카오톡 단체방에 출근을 알리고 저녁에도 알리고 퇴근하지만 직원들의 에티튜드(attitude·태도)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다. 팀장급 이상에 업무가 몰리는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B기업 직원은 “처음에는 좋았지만 답답하다”면서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될듯 한데 계속 재택근무를 하면 소속감도 적어지고 이러다 필요없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다”고 전했다.